http://www.zoglo.net/blog/huiling 블로그홈 | 로그인
회령
<< 4월 2024 >>
 123456
78910111213
14151617181920
21222324252627
28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나의카테고리 : 작품

잊을수 없는 유감
2014년 03월 24일 16시 27분  조회:2810  추천:8  작성자: 회령
           중편실화
                                           잊을수 없는 유감
                                                                                                             회령

    장장 십년에 걸쳐 연출된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라는 장막극의 력사활무대에서 사람들은 자기를 충분히 연출하였다. 물론, 총적도연은 중앙에서 했지만 연기기교는 자기나름대로 발휘했든것이다. 지금와서 40대 이상되는 사람들이 그 한단락의 경력을 잘 총결해 보는것은 매우 필요하고도 유익하다. 총결이란 경험과 교훈을 찿는것이 중점이다. 각자의 그 한단락의 경험과 교훈은 자신과 후대들의 인생에 무척 도움이 될것이다.

     나는 의과대학 졸업을 반년 앞두고 문화대혁명 광풍을 맞게 되였다.

    대학의 열혈청년들은 학교의 선생님들에게 대자보를 붙이느라고 정신없이 돌아쳤다.

    처음에는 “각박하게 굴던”선생님들과 허물이 있는 선생님들이 대자보 포격 대상으로 되였다. 이를테면 학습에 대한 요구가 높고 엄격하여 글자 한개를 놓고도 점수를 깎으며 까다롭게 굴던 선생님, 쩍하면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이기에 책임성과 업무기술능력, 복무태도가 어쩌구 저쩌구하며 반나절씩 훈계하기 좋아하던 선생님, 무도장에 다니는가, 멋을 피우는가, 련애를 하는가, 술을 먹는가, 담배질 하는가… 쥐잡이하는 삵괭이처럼 눈알을 밝히며 밉살스레굴던 선생님, 우파로 되였다가 풀려났거나 가정성분, 정치력사, 사회배경, 그리고 지난날 이런저런 문제가 있었던 선생님들이였다.

    그러나 예봉은 인차 대방향인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집권파”(각급령도자)와 “반동학술권위”(교수, 박사, 학과주임)에게로 집중 되였다. 잇따라 학생들은 “혁명반란파”조직을 만들고 학교를 쥐고 흔드는것은 물론, 사회에까지 뛰쳐나가 시병원, 성병원, 시정부, 성정부를 들쑤시였다. “장”(长,각급령도책임자)자가 붙은사람은 덮어놓고 모조리 비켜 세운후 우선 “타도”를 붙이였다. 그리고 군중더러 검거, 적발, 비판, 투쟁하라고 선동했다. “탈권”(夺权, 령도권 즉 령도책임자리를 빼앗는것)해서는 반란파두목들이 그자리를 차지했다. 뚜드려봐서 “장”자에게 문제가 없으면 “해방”(비판투쟁에서 풀어주는것)을 시키고 단위령도반즈 혹은 반란파지휘부 성원이 되게했다.

    나는 반란파를 따라 다니긴 했으나 맹장은 아니였다. 그것은 내가 미친듯 분별없이 날뛰며 마구 반란하는 그런 작법이 썩 내키지 않았기때문에 소극적이였고 가정성분이 상중농이여서 (착취성은 있으나 부농계선에까지는 좀 미치지 못하는것) 반란파조직에서 중용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황패”(반란을 반대하는 보수파, 류소기 등소평을 보호하는파)로 몰리우면 혁명의 적이 되기에 좋든 궂든, 좋아하든 싫어하든 반란파를 따라 다녀야 했다.

    한편 모주석께 충성하는 정치적활동과 저작학습, 혁명적대비판을 반복적으로 밤낮 거듭하는 과정에서 나의 사상의식은 커다란 제고를 가져 왔다. 나는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며 당과 인민에게 충성하며 혁명적일생을 살리라 굳게 다짐 했다. 나는 의사와 약품이 결핍한 변강농촌—가장 간고한 곳에 가서 사업하겠다고 마음먹고 아름다운 설계도를 그리고 랑만적 꿈을 꿨다.

    1968년 상반년, 우리 졸업학년동창들은 석달간 졸업학기 학과를 후닥닥 배우고 조국의 각지로 분배되여 나갔다. 그때는 국가의 통일적 배치였다.

    나는 원래 참답게 학습하는 우수한 학생이였고 반란세월에도 손에서 교과서를 놓지 않았기에 졸업시험도 우수하게 치렀다. 시험은 형식적이여서 쉬웠으나 대부분 동창들은 모르는것이 많았다. 하지만 모두 졸업장을 탔다. 우리는 또 정치시험을 쳤는데 그것은 문화대혁명과 결합하여 저작학습심득 혹은 대비판 문장을 쓰면 된다고 했다. 말하자면 그것이 필업론문이고 중요한 항목이였다. 동창들 모두가 이 론문을 잘 썼는데 나도 물론 잘 써서 우수론문에 뽑혔다. 나는 론문에서 나의 인식과 굳은결심을 조금도 거짓이 없이 솔직하게 그리고 만강의 열정으로 서술 했다. 가장 높은 긍정과 호평을 받게 된 단락은 제일 간고한 곳에 가서 혁명사업에 일생을 헌신 하겠다고 한 대목이였다.

    내가 이불보따리를 메고 학교를 떠나던날 생화학교수와 약물학교수는 “학교에 남아 과학연구를 하면 가장 알맞는것인데…”하며 무척 애석해 하였다. 그러나 그때 나의 피끓는 청춘은 “광활한 천지”에 나가 림상의사를 마음껏 하는것이 전부의 소원이였고 “반동학술권위”가 될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었다. 나는 내심 존경하는 선생님께 “과학연구는 위험해서 싫어요.”하고 대답하며 “반동학술권위는 싫어요.”하는 뒷말은 마음속에 묻어 두었다. 솔직히 말해서 문화대혁명직전까지 내가 꾼 황홀한 꿈은 생리학방면에서 과학연구를 일생동안 하는것이였다. 그런데 문화대혁명의 광풍폭우속에서 혁명적인생관이 형성되게 되였다. 그리고 론문을 통하여 세상에 소리높이, 장엄하게 선포했던것이다. 선생님들은 “하긴 그렇다!… 백성이 제일 좋지…”하며 처연한 기색을지었다. “반동학술권위”교수며 박사인 그이들은 설상가상으로 미국특무, 일본특무 혐의까지 쓰고 그때도 한창 고역을 치르는 중이였다. (후에는 전국과학기술대회에서 표창까지 받았다.)

    나는 소원대로 편벽한 산간지대—농촌공사(향)위생원에 배치 받았다.

    이 공사는 면적이 크고 인구는 많았으나 현성과는 300여리 떨어져있었다. 골짜기 시내물에 다리도 놓지 못한 험악한 신작로는 뻐스나 트럭이 한쪽길만도 대여섯시간 꾸물거리며 달려야 했다. 거리가 멀고 교통이 렬악한데다가 가난하기까지하다보니 중한 환자는 집에서 죽을수 밖에 없었다.

    공사위생원의 규모는 너무도 보잘것이 없었다. 건물은 비록 기와를 얹긴 했으나 회칠한 흙벽이였고 직원은 모두 10명, 원장(당원), 회계, 출납은 행정인원이고 기술인원은 로중의 문의사, 30대의 서의 왕의사(입당적극분자), 부유보건을 맡은 로처녀 리의사(당원) 그리고 시집간 30대의 서호사(입당적극분자), 처녀호사 허명순, 약국에 중약제사와 서약제사가 각 1명이 있었다. 그들은 중년이였는데 중약제사는 당원이였다. 리의사와 서호사 그리고 처녀호사 허명순은 지구위생학교졸업생이고 다른 기술인원들은 모두 “다다끼아가리”(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기술인원)였다. 그들의집은 모두 공사마을에 있었다. 나의집은 심양시부근의 농촌에 있었는데 이곳과는 수천리 떨어져 있었다. 부모들은 농사를 지었다. 위생원에는 보조진단설비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간단한 화험조차도 할수 없었다.

    내가 위생원에 갔을때 정치형세는 어수선 했는데 박원장은 남녀생활작풍문제로 여지없이 뚜들겨 맞은후 남조선특무혐의까지 쓰고(조선전쟁당시 중상을 입고 적후에서 두달만에 빠져 나왔는데 서호사와 왕의사는 거기에 특무혐의가 있다고 걸고 들었다.) “걸려있는”(결론하지 못한것, 직무를 회복 못한것)상태고 위생원에는 소위 림시령도소조라는것이 있었는데 령도성원은 중약제사와 리의사, 서호사였다. 그런데 중약제사와 리의사는 비록 당원이긴하였으나 문화대혁명초기에, 서호사와 왕의사가 박원장을 반란할때 그를 두둔했다가 혼빵을 먹었는데 그후부터는 서호사와 왕의사의 눈치를 은근히 살피며 조심을했다. 서,왕 두 반란파는 쩍하면 다른단위 반란파들과 홍위병을 불러왔다. 병원안에는 그들을 따르는 사람이 없었다. 령도소조조장은 중약제사가 맡았지만 실지로는 서호사가(왕의사는 참모격이였다) 좌우지 하였다.

    박원장은 문화가 낮고 착오가 있었지만 그래도 혁명적인 좋은간부에 속하는 사람이였다. 그런데 우리공사에서는 기세등등한 반란파인 왕의사와 서호사가 견결히 반대하고 나서는 바람에 해방받지못하고 그때까지도 걸려 있었다. 공사위생원에서는 혁명위원회도 설립하지못한 상태였다. 공사적으로 유명한 “로다난단위”(문제꺼리단위)였다.

    들은바에 의하면 왕의사와 서호사는 이 공사에서 제일처음으로 반란의 기치를 들고 나온 맹장들이였다. 위생원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혁명적군중이라고 했는데 기실은 박원장 보황패들이였다. 박원장에게는 10여년전 어느진위생원에서 원장사업을 할때 어떤 과부호사와 바람피운 전력이 있었다. 하여 그는 당조직으로부터 엄중경고처분을 받고 이공사에 전근 되였는데 말하자면 정배살이로 쫒긴 셈이다. 하지만 출신성분이 좋고 착오가 악렬하지 않고 회개표현이 좋아서 원장벼슬만은 가까스로 지킬수 있었다. 그는 고아로 머슴살이를 하다가 광복(1945년 8월15일)이 되자 인차 참군했는데 해방전쟁, 항미원조에까지 갔다가 돌아온 2등갑 잔페군인이였고 부대에서의 급별은 조선인민군대위였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입당적극분자인 왕의사와 서호사는 박원장에게 대자보를 붙이고 불질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중학교 홍위병들을 끌고 와서 박원장을 투쟁하였는데 고깔모자를 씌우고 개패와 헌신짝을 목에 걸고 (한족들이 바람쟁이를 모욕하는 방법) 쭈그러진 양철통을 뚜드리게 하면서 거리로 끌고 다니였다. 공사내에서 이런 극히 모욕적이고 창피스러운 투쟁을 당한 사람은 박원장이 첫 사람이였다고 한다. 그의 죄장은 이미 처리받은 남녀생활작풍문제와 혁명적군중을 타격 압제 했다는 것이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왕의사와 서호사를 입당 시켜주지 않았다는 것이였다. 위생원 군중들과 다른 사람들은 쩔룩거리며 끌려 다니는 박원장을 동정하였고 지어는 분개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군중들은 왕의사와 서호사를 “개인보복을 한다.”, “너무 한다.”하고 뒤에서 욕질했다고한다. 특히 서호사는 왕의사보다 몇갑절 말을 잘하고 악착스러운 여자인데 사람들은 “구린것이 더한다.”고 하면서 뒤에서 손가락질을 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서호사가 자기친구의 약혼자를 가로챈 비행을 두고 한 말이였다. 친구와 남자는 이미 약혼식까지 버젓히 한, 갈데까지 간 사이였는데, 그것을 다 알면서도 서호사는 중간에 끼여들어 결국은 결혼까지 했던것이다. 그일로 해서 친구는 정신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외에도 유부남인 왕의사와 시시한 소리가 있었다. 서호사는 입당은 말할것도 없고 원장 혹은 공사부녀주임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내가 갔을 때는 그들이 단위에 주로 배겨있으면서 혁명과 생산(사업)을 틀어 쥐느라고 할 때였다. 그리고 계급대오청리운동을 하느라고 밤마다 긴장하게 회의를 하군 했다. 계급대오청리는 사람마다 자기의 력사와 가정상황, 사회관계를 명백히 밝히고 과거의 착오와 사상문제를 털어놓고 혁명적인식을 수립하여 무산계급대오에 서는 운동이다. 말하자면 사람마다 관을 넘는 전민정풍운동이였다. 그러나 실제적인 실행과정에서 운동은 이 사람이 계급의 적인가 아닌가를 식별하는, 특히 눈에 쌍불을 켜고 이색분자, 그물에서 빠진 력사반혁명분자, 특무…를 붙잡아 내는데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 되였다. 하다보니 운동에서 검사, 교대, 탄백, 적발, 심문, 조사, 핵실, 비판, 투쟁…여러가지 방법과 수단을 마음대로 사용했다.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적의 켠으로 밀려가지 않으려고 무진애를 썼는데 그것은 인식여하를 보고 판가름이 났다. 하여 혁명적인식을 수립하느라고 (표달하느라고)진땀을 흘려야했다. 어떤 사람들은 가슴을 치며 눈물까지 흘려가면서 과거를 통분해하며 혁명적인식—결심을 발표 했다. 례하면 해방전에 사무원을 했거나 일본인회사에 다녔다면, 굶어죽더라도 왜서 그런일을 하며 밥벌이를 했던가고… 두뇌속에 모택동사상이 없다보니 그런 기로를 걷게 되였다고… 뼈저리게 후회하여야 하고 (심각하게) 이제부터는 모주석을 따라 칼산에도 오르고 불바다에도 뛰여들겠다고 혁명적이고도 비장한 결심을 내려야 했다.

    로중의 문의사는 과거력사가 불투명하다고 여러날 심사를 받으며 애를 먹었는데, 어린시절 남조선과 일본에서 산 력사는 불투명부분으로 하고 (증실인이 없다보니) 그후의것은 몇번 외지조사까지 하고 결론했는데 “우리켠으로 끌어당길 사람이다. 금후의 실제 표현을 본다.” 이렇게 결론하고 고비를 넘겨줬다. 왕의사와 서호사는 그에게 일본특무, 남조선특무, 국민당특무(해방전 장춘부근의 농촌에서 가난뱅이 뜨내기의사로 살았다.) 혐의를 쐬우고 호되게 닥달을했다. 그들은 아버지벌 되는 로인에게 마구 해라를하며 멱살을 쥐여 흔들고 귀뺨까지 쳤다. 나중에는 공사구류소에 가두기까지 했는데, 훗날 문의사는 그때일을 말하면서 통분하다못해 죽을생각까지 하였다고 하였다.

    나는 상중농(소수레가 있고 빌려줄때는 값을 받았다. 그리고 농망기에 일손을 사서 썼다. 그것이 착취행위라고 했다. 하여 상중농이 되였다.)의 자식인데다가 류소기수정주의교육로선의 류독을 받을대로 받은 고린내나는 더러운 아홉째여서(9종문제인물중의 마지막분자 즉 지식분자) 오던날부터 재교육대상일뿐만아니라 요시찰인물(주의해서 관찰할 문제인물)이였다. 그런데 나의 혁명적인식과 결심이 투철하고도 확고해서 여러사람들이 신임해 주었고, 착취계급과 철저히 결렬하며 가정과 계선을 나누고 혁명을 잘하라는 고무격려까지 받으며 고비를 넘었다.

    위생원림시령도에서는 나를 생산대에 로동력지원인원으로 내려 보내기도 하고 공정판(수리공정, 국방도로건설, 제방뚝쌓는공정)에 보내기도 했다. 나는 그들의 지시대로 열심히 로동에 참가 했다. 하여 어데가서나 “일을 잘한다.”는 칭찬을 받았다. 당시 공사혁명위원회에서는 기관, 단위들에 생산대 하향임무를(대채건설공작대)하루 건너 떨궜는데 위생원에서는 독신이자 피끓는 청년인 내가 제일 적임자였다. 나는 생산대와 공정판, 지어는 목재판까지… 어데로 가라면 어데로 달려가서 열심히 로동을 했다. 언제까지일지는 몰라도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는것이 응당한 일이고 나쁠것이 없다고 나는 생각 했다. 1년후 나는 감정을 받고 정식간부(의사)로 넘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서호사는 위생원령도반즈에서 세력인물이였는데 그는 왕의사와 함께 공연히 대학졸업생인 나를 질투하고 시기했던것이다. 하여 나는 위생원에는 별로 앉아 있지 못하고 “재교육”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미명하에 이리저리 로동판으로 내 몰리웠던것이다.

    림표사건(1971.9.13) 전해에 우리위생원에는 도시병원으로부터 두쌍의 내과의사부부와 화험사 1명, 약제사1명이 변강에 뿌리박는다면서 내려 왔다. 그들은 “의료위생공작의 중점을 농촌에 두어야 한다.”는 모주석의 6.26지시에 따라 의사가 결핍하고 약품이 부족한 농촌의 의료위생면모를 개변하기 위하여 내려왔는데 세간에서는 그들을 “6.26백의전사”라고 불렀다. 그들은 자원적으로 뛰여 왔다고 했지만 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던것이다. 단위에서 솎아버리고 밀려났던것이다. (혁명성이 북받쳐 자원한 사람도 있다.)벙어리가 소태씹은격이였으나 그들은 가장 즐거운듯 웃는 얼굴이였다. 잇따라 지구위생학교졸업생 다섯이 분배되여 왔는데 총각 두사람은 의사학과이고 처녀 셋중 둘은 호사전업이고 하나는 부유보건의사 학과였다.

    “6.26백의전사”중에서 현병원 내과부주임이였던 장의사(당원)는 우리 위생원혁명위원회주임이라는 벼슬을 달고 내려 왔다. 동시에 박원장에게는 부주임이라는 임명이 내려 졌다. 원래의 령도성원에 주임과 부주임이 안배되다보니 위생원의 령도기구는 보다 충실해 진것 같았다. 뿐만아니라 위생원직원도 대뜸 30여명으로 확대 되였는데 그것은 약품이 부족한 국면을 해결하기 위한 방책으로 “토제약창”을 꾸리고 직원가족을 채용했기 때문이다. 6.26지시후, 위생원에서는 기술인원만 받은것이 아니라 투시기, 화험설비, 수술실설비와 기타의료기재, 그리고 위생원건물을 지으라고 자금까지 받았다. 그야말로 복이 넝쿨채로 떨어진것이다. 그런데 구호차는 현위생국에서 가로채는 바람에 가지지 못했다. 이제야 비로소 위생원(병원)모양새가 나는가 싶었다.

    그런데 당장 시급한것은 상당히 중요한 외과의사가 없는 것이였다. 농촌에서, 그것도 현성과 300여리나 떨어져 있고 교통이 극히 불편한 상황에서 외과의사가 없다는건 보통문제가 아니였다. 장주임과 박주임은 현위생국에 뛰여 다니며 연수지표를 단꺼번에 네개나 얻어왔다.(구호차를 양보한것이 큰 은을 내기도 했다.) 나와 처녀호사 허명순이는 지구병원 외과로, 위생학교를 갓 졸업하고 온 두 총각의사는 하나는 오관과(구강과도 겸함) 다른 하나는 소아과 연수를 하기로 했는데 그들은 현병원으로 떠나갔다.

    우리의 연수기간은 1년, 명순이는 수술실호사를 학습하게 되였다. 명순이는 산골에 핀 함박꽃같이 환하고 싱싱한 처녀였다. 활달하고 듬직한 성격에 마음씨가 착하고 온순했다. 사람들은 그를 “큰집맏며느리감”이라고 칭찬하며 부러워 했는데 그는 그때까지 약혼하지 않았었다.

    나와 명순이는 참으로 열심히 연수를 하였다. 나는 외과병동의사직일실에서 자면서 밤낮으로 수술학습을 하는 한편 틈틈히 ×선(투시)학습도 하였다. 그것은 외과에서 (특히 골과) ×선과와 배합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에 배워 두어야했다. 그리고 부산과수술도 참답게 배웠다. 부닥치는 모든 환자를 위생원에서 치료하는것이 기본이며 기술상 설비상 해결 못하는 환자도 구급은 할수있어야 한다는게 내 좌우명이였다. 당시 상급부문에서도 당지에서 치료하는것이 원칙이라고 지시했고 무엇보다도 군중들이 그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명순이와 나는 1년간의 연수생활에서 서로를 더욱 알게 되였고 친근한 벗으로부터 차츰 애정이 싹트게 되였다. 우리는 애정문제에서 심중하고 리지적이였다. 명순이는 첫사랑이였지만 나는 이미 련애사가 있었고 또 가정성분이 상중농이다보니 자신에 대해서도, 명순이에 대해서도 여러번을 심각히 고려하지 않을수 없었다. 주요한것은 명순이 앞날에 피해를 안주고 끝까지 책임질수 있느냐, 그에게 행복을 줄수 있겠냐가 고민이였다. 우리는 연수에서 돌아온 이듬해 국경절에 결혼식을 치루었다.

    대학시절 졸업학기에 와서 나는 동창생처녀와 사랑을 언약한적이 있었다. 그 처녀는 나무랄데가 없는 훌륭한 처녀였다. 그의 부모들은 성정부 간부들이였다. 그런데 내가 고지식하게 제일 간고한 곳으로 가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그와 나는 첨예한 대립을 하게 되였다. 그에게는 자신은 더 말할것도 없고 나까지도 도시의 큰병원에 분배받게할 힘이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나는 모주석의 “광활한 천지에는 할일이 많다.”는 말씀에 고무되여 추호의 동요도 없이 변강농촌을 선택하였다. 그후 처녀와 나는 줄당기기와 같은 싱갱이 련애를 계속하다가 지치고 말았다. 우리는 서로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다보니 결국은 헤여지고 말았다. 나는 명순이에게 전부의 과정을 말해주었다. 그는 웃으면서 “괜찮아요.”했다. 그것이 나의 사랑에 대한 대답이였다.

    연수에서 돌아온후 나와 명순이는 1년간의 자아감정서와 함께 입당신청서를 위생원 당지부에 바치였다. 우리는 영원히 이곳에서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며 혁명하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때로부터 우리는 입당적극분자로 되였다.

    환자는 의사를 따르는법이다. 위생원에 내과의사, 외과의사, 오관과, 소아과, 부유보건의사와 중의까지 구전하게 있으니 매일과같이 환자가 모여들었다. 그런데 내과의사는 로중의 문의사까지 여섯이나 되였지만 외과의사는 나혼자뿐이여서 눈코뜰새가 없었다. 수술은 오관과의사와 부유보건처녀의사를 데리고 할때가 많았다. 수술이 있을때마다 수술전준비와 수술후정리를 명순이가 도맡아 했는데 기재소독, 수술실청소와 살균처리, 수술복, 수술포 빨래… 모두에 명순이 손이 가야 했다. 처치환자도 주사실환자 못지 않게 많았다. 하여 나와 명순이는 그야말로 매일 팽이처럼 바삐 돌았다. 우리에게는 출퇴근시간이 따로 없었다. 외과환자란 거개가 시간을 다투고 모진 고통을 동반하는 환자들이여서 외과의사의 궁둥이는 가벼워야 하고 손발이 잽싸고 준확해야만 한다. 늑장을 부리거나 등한시 했다가는 무슨 후과가 생길지 모른다. 열두밤중이라도 환자가 부르면 즉시 달려가야한다. 우리는 30미만의 젊은이다보니 피곤한줄을 몰랐고 그보다도 의사로서의 사명감이 높았다. 우리부부는 결혼시에 며칠 휴가를 맡아서 그때 나는 명순이를 데리고 집에 한번 갔다온후 그후에는 한번도 위생원을 떠나지 않았다. 아니, 떠날수 없었다. 우리는 애기 갖는것도 뒤로 미루었다.

    우리가 환자를 열정적으로 대하고 세심히 보살피며 참답게 책임진데서 호평은 날따라 높아 갔다. 로원장 박주임은 우리를 자주 고무격려해주었다.

    농촌환자들은 어느의사가 용하다고 하면 무슨병이고 가리지 않고 그 의사를 찾는다. 기층 일선의 의사로서는 무슨병에 부딪치면 무슨병을 치료할줄 알아야 한다. 위생원의사에게는 이점이 상당히 귀중하다. 그때 상급위생부문에서는 “한가지에 능통하며 여러가지를 할줄 알아야 한다.”(一专多能)고 호소 했는데 나는 이에 적극 호응했다. 나는 이빨을 뽑을줄도 알았고 코구멍과 입안의 수술도 할수 있었으며 계획생육관련수술과 인공류산에도 능숙했다. 그리고 투시와 촬영도 하였다. 나는 명순이에게 화험조작법을 배우라고 권고 했는데 그는 틈틈히 화험을 배워냈다. 일단 “6.26백의전사”들이 떠나버리면 모든일은 뿌리박은 우리들이 맡아 안아야 하고 또한 잘 해내야 하겠기에 다방면의 능력이 있어야 했다. 우리는 위생원에서 공인하는 기술골간이였다.

    위생원령도에서는 단위가까이에 우리집을 마련해 주었다. 그때까지 우리는 상당히 먼곳에서 남의집 건넌방살이를 했었다. 시비는 있었으나 결국은 직원을 관심하고 단위사업상 편리도 고려 한다는 차원에서 령도성원들의 의견은 가까스로 합의점을 찾았다한다. 위생원에서는 수술실, 투시실, 화험실, 주사실, 처치, 오관, 부유보건, 지어는 약국의 열쇠까지 우리에게 맡기였다. 하여 급진환자는 언제고 처리할수 있었다. 직일서는 사람들도 매우 편리해서 좋아 했다.

    당시, 의료위생계통에서는 “의료위생사업의 중점을 농촌에 두어야 한다.”는 모주석의 6.26지시를 관철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구체적인 사업들을 많이 하였다.

    례하면 대대에(촌) 합작의료위생소를 건립하고 “맨발의사”를 배양 안배했고 단위와 생산대에는(촌민소조) “홍의참”(红医站)을 만들고 생산을 탈리하지 않은 위생원(卫生员)을 1-2명 양성해 주었다. 약품이 부족한 국면을 해결하기 위하여 “3토4자”(三土四自, 토의사, 토약, 토방법, 자기절로 배양하고, 만들고, 장만하고, 사용한다.)활동을 대대적으로 전개 했다. 장주임은 대대합작의료위생소의 70%이상을 “3토4자”가 점령해야 한다는 지표를 결정하고 강력히 추진했는데 이는 전 성적으로 가장 혁명적수준이였다. 그외에도 위생방역, 계획생육, 애국위생운동을 지도 전개 했는데 농촌에서는 “량관5개”(两管五改, 물과 분변관리를 틀어쥐고 변소, 돼지우리, 퇴비장, 마을길, 우물개조,)와 “4해소멸”이 중심과제였다. 음료수와 분변관리를 틀어쥐는것은 기본고리(纲)이고 5개에서는 마을실정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도 했다. 그리고 “4해”는 참새가 빠지고 파리, 모기, 빈대(이도 빈대와 함께 한개 항목에 넣었다.) 쥐가 소멸대상이였는데 사람들은 참새가 너무 재잘거리며 억울하다고 하는 바람에 시끄러워 빼 주었다고 하며 와하하 웃기도 했다. 공사위생원은 자신의 의료업무도 잘 완성해야 할뿐만아니라 대대합작의료위생소를 지도 협조하여 상술한 임무를 완성해야 했다. 위생원 장주임은 사업열정이 높고 창발력이 뛰여난 사람이였다. 그는 우리를 “신발의사”(개조가 수요되는 지식분자, 후에 이말은 위생계통의 류행어가 되었다.)들이라고 하면서 기층에 내려가 맨발의사와 한덩어리가 되여야 하며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부단히 받아야한다고 항상 강조하였다. 우리는 시기시기에 따라 “3토4자의료대”, “계획생육의료대”, “량관5개의료대”, “4해소멸검사조”, “애국위생검사단”, “순회의료대”, “위생원, 접생원 배양학습반”, “농업지원”… 등등 다종다양한 명의로 줄기차게 여러가지 활동을 전개하며 하향을 련속 부단히 하였다. 매개인에게는 하향날자 지표와 농업로동에 참가하는 날자 지표까지 있었다.

    장주임은 무슨 사업이나 임무지표, 완성시간을 명확히 결정하고 자신이 앞장서서 추진했는데 현과 지구, 성에까지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우리공사의 의료위생사업은 확실히 많은 개선과 제고를 가져와 령도로부터 긍정을 받았고 군중들도 만족해 하였다. 특히 위생방역, 계획생육, 애국위생 방면에서 성적이 돌출하였다. 이면에서 나는 장주임의 유능한 조수이자 주력이였다.

    장주임은 무슨일에서나 선진을 다투고 앞장에 서려 했는데, 책임자로 말하면 장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명예를 추구하며 실제를 탈리하고 극좌로 나간다는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마늘로 감기를 예방할수 있다는 말을 들은 그는 대뜸 생산대 위생원들까지 발동하고 임무를 주었는데, 마늘즙을 내여 코구멍에 떨궈넣게 하고 생마늘로 코구멍을 번갈아 틀어막게 했다. 그리고 구체적인 통계수자를 보고하게 했다. 학교와 단위들에서도 위생원들이 마늘즙소동을 벌리게했다. 또 식초를 증발시키는 방법도 일반화하면서 재채기소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뒤에서는 공사위생원을 아이들 작란을 한다고 욕하였다. 벼모철에는 모내기대회전을 지원한다면서 생당쑥과 오이풀을 달여 리질예방약이라고 하며 논판으로 이고 나가 사원들께 돌아가며 한사발씩 먹이는 활동을 했다. 농민들이 억지로 그것을 먹고 토하거나 배가 아프다고하면 위생원들은 모주석의 혁명적위생로선, 6.26지시에 맞선다고 그들을 비난했다.

    그때 사회상에도 괴상한 일들이 많았다. 토끼와 닭을 안고 다니며 피를 빼서는 주사를 맞는 일도 있었는데 장주임은 그것도 신생사물이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감숙인가 청해인가 한데서 서슬(卤水)을 끓여 깡치를 먹고 위병 , 풍습병, 심장병, 페병을 떼였다고했는데 그것이 만병통치명약이라고 널리 소문이 나고 위생행정기구에서는 추광하라고 지시까지 했다.

    장주임은 누구에게 질세라 그 토방법을 적극 받아 들였다. 현병원에서 서슬로 주사를 만들었다고 하자 그는 우리 토약공장에서도 즉시 주사를 만들게 했다. 서슬주사는 혈관에 놓는것인데 우리공사에서는 그것을 맞고 어린애 한명과 중년부녀 한명이 죽기까지 했다. 서슬주사탓인지, 다른탓인지는 밝히지 못했으나 장주임은 서슬주사 때문은 절대로 아니라고 주장하며 누가 만약 이 신생사물을 공격한다면 그와 끝까지 로선시비를 할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서슬주사는 약국에 번듯하게 진렬해 놓고 상급검사단이 볼수 있게 해놓았을뿐 장주임자신을 망라하여 위생원의사들은 누구도 더는 감히 사용하지 못했다.

    장주임의 드센 지휘하에 대대합작의료위생소들에서는 70%이상의 “3토4자” 지표를 실현 했다. 이것은 전 성적으로 앞자리였다. 그런데 기실은 모두가 형식적이였다. 대대맨발의사들은 감기약 1호, 2호… 설사약 1호, 2호… 하고 병에 (알도 있고 가루도 있었다.)표딱지는 붙여 놓았으나 그것은 검사맟히기 위한 눈가림이고 실지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군중들은 차라리 첩약을 먹게 하여 달라고 떼질 쓰며 접수하지 않았다. 그것을 한줌씩 여러번 먹는것이 힘들기도 했거니와 효과도 알리지 않았던것이다. (기침물약같은 한두가지 토약은 일정한 효과가 있었다.) 어떤 사람은 차라리 침을 놓아달라고 했다. 아니면 집에서 강다짐으로 들어 누워 앓기도 했다.

    장주임이 친히 선발하고 배양한 어느 맨발의사는 (당원. 다리를 상하여 불구가 된 농촌청년) 장주임의 지시를 적극 따라 나섯는데 그는 자기의 몸에 자기가 직접 침을 놓으며 의학 학습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자체로 약을 만들어서는 자기몸에 실험 했다. 그러다가 몇번은 중독이 되여 큰일날번 하기까지 했는데, 그는 맨발의사의 모범인물로까지 되였다. 장주임은 그를 어느대대의 합작의료위생소에 안배 했다. 그 대대에는 원래 유명한 로중의가 있었다. 그런데 그의 성분이 부농이고 그가 바로 부농분자였다. 장주임은 대대혁명위원회와 반복적인 협상(투쟁)을 하고 로중의를 밀어낸후 맨발의사를 안배 했던것이다. 그런데 대대빈하중농협회주임이 맨발의사를 “개뿔짝도 모르는 생둥이”라느니 “도끼의사”라느니 하며 모욕중상하고 비방공격하는데 앞장 섯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3토4자”약을 “쥐똥같다, 토끼똥, 염쇠똥 같다, 쇠똥부스러기 같다.…”하며 똥이란 똥은 다 주어다 빗대면서 악렬하게 무함 공격했다. 이런 정보가 장주임에게 입수되자 그는 성이 나서 펼펄 뛰였다. “이눔이 령감쟁이, 한번 혼빵을 먹여야 겠군!” 장주임은 왕의사, 서호사 등 대여섯 사람을 이끌고 가서 그 빈하중농협회주임과 대대적인 변론을 했다. 그들은 련5일간 밤마다 그 대대로 가서 수정주의반동위생로선을 비판하고 류독을 숙청 했는데, 애매한 부농의사는 산과녁이 되여 빈협주임대신 즉살나게 투쟁 당했다. 나중에 빈협주임은 인식착오를 승인하고 태도표시를 하였는데 기껏한다는 소리가 “먹고 싶은 사람은 사발들이로 갖다 먹소. 말리지 않을 테니까… 나는 안 먹겠소. 앓지 않으문 될게아니우.”라고하는것이였다. 그리고 한술 더 뜨며 “요새 보니까 당신들 기운살이 드세더군. 혁명성이 대단하던데 래일부터 우리대대 제전(다락밭)건설에 나오슈. 로동력이 부족한테. 커털(口头)혁명파만 하지 말구 실지 행동으루 해야지…”하고 역공격을 하는것이였다. 장주임은 속에서 홍두깨가 치밀었지만 로력지원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응낙하지 않다가는 농업에서 대채를 따라배우는 운동에 소극적이였다는 모자를 뒤집어 쓸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3토4자” 보급률이 70%라는 기적적 성적을 올린후 장주임은 그것이 경상화 되였을뿐만아니라 더욱 공고발전 되여간다고 상급에 보고하고 경험소개도 여러번하였다. 농촌에서 대채 참관을하듯 지구는 물론, 성내 여러곳에서 우리공사의 “6,26지시”관철락실선진사적을 학습하려고 참관단이 련속부절 들이 닥쳤다. 성혁명위원회 위생청에서는 우리공사위생원을 따라 배우자는 구호를 정식으로 호소하기까지 하였다.

    잇따라 “신의료법”“신침료법”을 대폭적으로 일반화하는 바람이 맹렬히 불어쳤는데 신화같은 소문이 매일과같이 들려왔다. 어떤것은 중앙인민방송국에서 방송원이 목이 꽉 메여 격앙된 목소리로 방송까지 했다. 그 실례의 하나로 광주 모병원에서 침구마취로 수술하는데 성공 했다는 소식을 들수 있다. 침을 꽂고 모주석어록학습을 겸용했는데, 환자는 무려 여섯시간이나 되는 대수술과정에서 저작학습 심득을 발표하고 어록노래를 우렁차게 부르며 원만하게 수술을 받았다는, 세계를 놀래우는 희한한 뉴스였다. 그뿐이 아니다. 은침 한대가 모주석의 위대한 혁명사상과 무한한 사랑을 주어 벙어리가 “양반극” 노래를 하고 소아마비 후유증이 말끔히 치료 되여 롱구장에서 맹호같이 뛰였다는 방송과 문장도 있었다.

    그때 우리지구병원에서도 경천지동의 희한한 기적이 창조되였다. 그것은 맨발의사가 백선피가루봉지를 안고 서의들만의 신성한 령역인 수술실에 들어가(폭파약을 안고 적의 또치카에 뛰여들듯 용맹한 기세로) 반동학술권위들과 서의들이 쩔쩔매는 출혈을 지혈시켰다는것이였다. 그 맨발의사는 백선피가루를 뇌수술환자의 골속에 뿌려 넣었다는것이다. 물론 환자는 죽었으나 따라서 지혈은 된것이다. 백선피가루가 막았는지, 심장이 서서 지혈 되였는지… 혁명적 목소리는 맨발의사의 “3토4자”가 위력을 떨쳐 휘황한 승리를 쟁취했다고 소리높이 말했다. 지구병원에서는 침구마취에서도 상당한 진전을 가져오고 있다고 했다.

    다급해난 장주임은 우리공사위생원에서도 형세에 바싹 따라 “신의료법”, “신침료법”을 대대적으로 보급하게했다. (왕의사를 현에서 꾸린 학습반에 파견하여 배워오게한후 공사, 대대, 생산대와 단위 위생원들에게까지 배워주게하였다.)“신의료법”에는 물론 여러가지 기발한 방법들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피부에서 이상한 점(기미같은)을 찾아 삼각침으로 그것을 뚜지고 병줄을 (사실은 근막임.)뽑아내는 방법도 있었다. 실오리같은 흰색섬유를 끊어놓거나 조금 뜯어 내고는 모든 병의 근원을 쉬원히 뽑아 버렸다고 했다. 시술과정에 환자는 몹시 아파도 모주석어록을 따라 외우며 참아야 한다. 시술이 끝나면 “만세!”를 웨치기도 했다. 하긴 생살을 뜯어내는 고통에서 풀려 났으니 만세를 웨칠만도 했다. (마취제는 금용함) “신침료법”도 희한했다. 그중에서 나를 제일 조마조마하게 한것은 경추에 있는 대추혈을 3-4치 심도로, 즉 척수강내에까지 찌르는 방법이었다. 그 방법은 정신분혈증환자치료에서 즉효라고 했는데, 왕의사는 위생원, 맨발의사와 위생원의사들이 전부 모인 장소에서 “신침료법”조작을 하여 보였다. 그런데 정신병환자가 호흡이 정지되는 바람에 우리는 무진애를 써서야 목숨을 구했다. 정신병환자는 그후 없던 증세까지 겹치어 가정을 매일 살풍경으로 만들어 놓았다. 상완, 중완, 하완혈을 (명치아래, 복부의 침혈)등어리로 나가게 침을 놓는 소위 “투혈(透穴)”료법도 손에 진땀을 쥐게했다. 그밑에는 간, 위, 대동맥이 있다. 그런데 이런 혁명적 “신침료법” “신의료법”은 간단하고도 배우기 쉽고 또 많은 문제를, 특히 서의가 손을 들고 나 앉은 난치, 불치의 병 치료에서 그 위력이 대단하다고 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모주석의 혁명적위생로선을 관철집행하는 구체적 실천행동이라고했다. 맨발의사와 위생원들은 쉽사리 배우고 응용했다. 이점에서는 신을 신은 위생원의사들이 뒤떨어졌다. 하여 장주임은 병원의보급률, 사용률 지표(그가 결정한 높은지표)가 달성 못된다고 매일 우리를 닥달질 했다. 그러나 소나기만 울고 비는 내리지 않았다. 나중에는 환자에게 사정 사정 해서 아프지도 않고 가렵지도 않게 요긴하지 않은곳을 침 두어대 놓아 주는것으로 보급률, 사용률 지표를 완성했고 장주임은 상급에 할말이 있게 되였으며 긍정적 평가를 받게 되였다.

    장주임은 우리도 수술에서 침구마취를 하여 또 한번 전 성을 깜짝 놀래우며 뒤흔드는 기적을 창조하자고 여러번 시도를 했다. 그러나 번마다 환자가 마취가 안된다고 고함을 지르며 반항하는 바람에 아쉽게도 큰 성공을 하지 못했다. 모주석어록랑독과 노래를 잘하는 리의사와 서호사, 양반극노래를 한곡조 잘 뽑아넘기는 왕의사가 전국 노래자랑 경연을 하듯 목이 쉬게 읽고 부르고 했으나 환자에게 효험이 없었다. 그러나 장주임은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선진사적을 불이 번쩍나게 만들어 냈다. 계획생육대회전(돌격섬멸전)을 전개할때 우리는 절육대상들을 위생원에 불러다 수술하던 데로부터 수술기재보따리를 둘러메고 찾아 내려가서 붙잡아 수술을 했는데 이 조치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후 장주임은 외과수술도 그런식으로 하여 보자고 나를 핍박하다싶이 했다. 나역시 영웅심이 발동되어 한번 모험해 보기로 했다. 마침, 란미염환자가 수레에 실려 위생원으로 왔는데 단순성이여서 보수료법으로도 치료 될것 같았다. 그런데 환자는 기어코 쉬원히 떼여버리겠다는것이였다. 장주임은 그 환자를 다시 집에 싣고가서 수술하자고 했다. 그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되였다. 장주임은 소리높이 개가를 울리고 우리위생원은 또 한번 전성을 들썽케했다. 모르긴해도 성적으로 혹은 전 지구적으로 우리가 첫포를 울렸을 것이다. 이런식의 수술을 장주임은 “캉톨수술”(炕头手术)이라고 명명했는데 인차 의료위생계통의 혁명적행동을 상징하는 류행어가 되였다. 장주임은 “캉톨수술”에 온갖 혁명적어구와 높은 사상경지를 부어 넣었는데, 상급에서는 아무리 찬양하고 미화해도 절대로 과분한것이 아니라고 부추기며 한술 더 떴다. 그후 우리는 또 한번 “캉톨수술”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재수가 없었다. 수술후 환자는 염증이 와서 위생원에 올라와 오래동안 입원치료를 했다. 장주임은 “캉톨수술”에 대하여 더는 강조하지 않았고 나도 다시는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문화대혁명은 8-9년 진행 했지만 끝날줄 몰랐다. 운동에 운동이 꼬리를 물고 학습에 학습이 거듭 되면서 점점 더 심입되고 계속되였다. “비림비공”(批林批孔)에 잇따라 “수호전”에 나오는 송강의 “투항주의”를 비판하고 “1타3반”“로선톺기” “토구납신”(ㅁ土旧纳新)을 전개하면서 또 “우경번안풍을 반격”하는 바람이 슬슬 불어 왔다.

    문화대혁명후기 공사당위에서는 우리위생원에 입당지표를 두장 주었다. 그런데 위생원에는 입당적극분자가 일곱명이 있었고 그들은 모두 입당을 신청했다. 그들로는 왕의사, 서호사와 같은 로적극분자가 있었고 우리부부와 장주임의 안해, “6.26백의전사”인 최의사 부부가 있었는데 우리는 모두 왕의사나 서호사에 비하면 햇내기 적극분자였다. 그러나 스스로는 누구에 못지 않게 자격이 된다고 생각했다. 중은 많고 죽이 적은 상황에서 입당신청자들은 은근히 긴장해 하고 경쟁을 하게 되었다. 위생원 지부사업은 박주임이 주로 책임 졌는데 그는 신청자들의 재료정리를 차근차근 진행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의 재료준비는 충분하게 되였으나 나의 재료가 채 되지 못했다. 하여 지부에서는 중약제사와 왕의사, 서호사를 파견하여 나에 대한 외지조사를 하였다. 성분문제와 대학시절의 나의 표현을 재확인 조사하는것이 주요내용이였다.

    위생원당지부에서 본격적으로 입당심사를 하려고 하는 어느날 란미염환자가 수레에 실려 왔다.

    환자는 19살되는 청년이었는데 급성화농성란미염이였다. 아직 터지지는 않았으나 급히 수술해야 했다. 나와 명순이는 수술준비를 서둘렀다. 그런데 장주임이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란미염환자의 치료문제를 토론시키는것이 아닌가?! 그는 “군책군력”(群策群力, 군중의 지혜와 힘)을 발휘하여 치료하자고 호소했다. 나는 아연실색하였다. 환자가 시간을 다투는데, 너무도 명확한 치료방안이 눈앞에 있는데 “군책군력”이라니?… 나는 뗑-해서 여러사람들의 입만 바라 보았다. 항상 남먼저 발언하는 왕의사와 서호사가 앞다투어 발언하고 잇따라 입당신청을 한 다른 세사람들도 뒤질세라 발언했다. 환자는 죽는다고 아우성 치는데 그들은 고도로 되는 사상각오를 표달하며 장편대론을 펼치였다. 그들의 발언을 요약한다면, 지금까지 우리위생원에서 외과수술실이 “양노철학”과 “숭양미외”의 소굴이며 완고하고 락후하고 썩어빠진 수정주의반동적위생로선의 보루라는 것이였다. 이 환자를 어떻게 치료하는가하는 문제는 단순한 치료문제, 업무문제인것이 아니라 계급투쟁, 로선투쟁, 사상투쟁이며 누가 누구를 전승하느냐하는 사활(死活)적인 대시비, 대방향문제라고 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조국의 위대한 보물고인 중의적 방법으로 이 “금구”를 단번에 짓부시고 위대한 승리를 쟁취하자고 하였다. 그들은 우리의 목적은 꼭 달성되어야 하며 능히 달성 된다고 호매롭게 말하였다. 그야말로 감동적인 장면이였다. 나는 아무말도 못하고 멍해 있었다. 장주임은 확실히 위중한 환자가 옳은가고 나에게 물었는데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니 그는 “그럼 좋다! 이런 환자를 ‘군책군력’으로, 중의적 방법으로 치료한다는것은 혁명적 기적이다. 우리는 단결하여 더욱큰 승리를 쟁취하며 다시 한번 세상을 놀래우자.”고 격정 드높이 호소했다. 그는 당장에서 치료소조를 뭇고 자기의 지휘아래 입당신청자 다섯사람과 (나와 명순이는 빼놓았다) 로중의 문의사 그리고 중약제사를 성원으로 결정했다. 장주임은 문의사에게 “혁명의 중임을 맡긴다.”고하며 잘하라고 고무격려를 하였다. 서호사는 제꺽 나서며 문의사에게 모주석어록 두마디를 증정 하겠다고 했는데 (당시령도들이 이런 제스처를 잘 사용했다.)그가 증정한 어록은 “일부파쿠 얼부파쓰(一不怕苦,二不怕死)”와 “결심을 내리고 희생을 무서워 말며 만난을 물리치며 승리를 쟁취하려 가자.”였다. 그리고 잇따라 이것은 한차례의 사상표현을 보는 중대한 고험이라면서 혁명적극성을 다해야 한다고 압력과 고무를 동시에하였다. 그런데 문의사는 오히려 몹시 당황해하며 난처해 하였다. 그러나 그는 로련한 처세가였다. 그는 매우 겸손하고 허심한 태도로 자기의 능력을 극력 과소평가하면서 여러사람이 공동히 노력하자고 하였다. 특히 장주임이하 왕의사, 서호사, 그리고 여러선생들의 구체적인 지도하에서 자기도 노력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궁여지책이랄가 대대의사들과도 협의하는것이 어떠냐고 건의를 했는데 장주임은 그것도 참 좋은 발상이라고 했다. 그런데 뒷말 한마디로해서 나는 뒤통수가 부옇게 몰리웠다. 그것은 부농의사를(대대위생소에서 쫓겨난) 회진에 참가시키면 어떠냐고 건의했는데(그는 원근에 명의라고 소문난 로중의다.) 서호사는 대뜸 “계급의 락인은 어쩔수 없구만! 한심하네!”하고 나를 찔- 흘겨보며 쏘아 부쳤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뒤질세라 격분해서 나를 한바탕 성토했다.

    치료소조는 긴장히 돌아쳤다. 누구의 처방인지는 모르겠으나 우선 서슬점적주사를 환자에게 달아 놓고 두세가지 첩약을 급히 달이였다. 장주임은 대대맨발의사들을 불러 올리고 현병원중의과와 중의병원에 전화로 자문을 하였다. 환자는 약을 먹이면 토하고 죽겠다고 소리쳤다. 그는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며 살려 달라고 애걸하기도 했다. 서호사는 문의사에게 증정한 그 두마디 어록을 환자에게도 몇십번 증정 했는지 모른다. 그들은 어록노래와 양반극노래도 불러 주었다. 그러나 환자의 복통은 가중해만 갔다. 그때, 나는 어처구니 없는 짓거리에 조급해 나고 격분까지 했지만, 그리고 사상상 량심상 갈등과 투쟁이 심각했는데 결국은 자신을 위하여 명철보신에 일변도를 하고 말았다. 처방을 련속 바꾸어 들이 댔으나 환자는 약을 삭이지 못하고 토하기가 일쑤였다. 배에는 중약으로 고약을 만들어 바르고 장주임이 배양한 그 맨발의사는 환자의 귀와 복부, 사지에 몇십대의 은침을 하루 두번씩 명심해서 놓았다. 서슬점적주사병은 디룽디룽 달려있었다. 이틀이 지나도 환자의 병세는 조금치도 수그러 들지 않고 오히려 더욱 심해 갔다. 환자의 어머니는 현병원에 보내달라고 떼를 쓰기도 하고 빨리 수술해 달라고 애걸 하기도 했는데 내과의 세 입당신청자들은 그에게 계급투쟁, 로선투쟁을 말해주고 모택동사상과 6.26지시를 선전해 주느라고 땀을 흘리며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산골아낙네는 자꾸 대항하며 락후한 소리를 거듭 했다. 순박하고 어리무던해 보이는 산골 농민은 “하여튼, 있는 힘을 다 써 주시우. 수고해 주시우.”하며 수심 가득한 얼굴에 어색한 웃음을 억지로 띄우며 자꾸 손바닥을 비비였다.

    사흘이 지나서 환자는 진정되여간다고 했다. 치료소조에서는 성수가나고 사기가 배로 오르고 장주임의 얼굴에는 승리의 희열이 력력 했다. 나는 의아해하면서도 신기해났다.다행이라고 생각되면서 모순되고 조마조마하든 마음이 활 내려갔다. 이제 기적같은 경험을 잘 학습하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이틀이 지나서 환자는 진정되여가던 그 맵시대로 죽고 말았다. 환자의 어머니는 “병원것들이 다 벼락 맞아 뒈져라!! 급살을 맞아라!!”하고 실성하여 악을 썼다. 산골농민은 “사람이 죽었는데 무슨말을 그렇게 하우. 좀 그만 하우.”하며 마누라를 달래였다. 그는 부근의 생산대로가서 수레를 빌어다 죽은 아들을 싣고 집으로 갔다. 그는 장주임과 치료소조의사들에게 “수고 하셨수다.”하고 작별인사까지 했다.

    환자는 죽었다. 그러나 그간의 과정을 가지고 장주임은 네댓시간이나 되는 “활학활용강용”(活学活用讲用)재료를 만들어 가지고 현과 지구의 위생계통대회에서 선진사적 보고를 하였다. 그의 선진사적보고는 마지막 부분이 특히 정채로웠다. 그 단락은 다음과 같다. “환자는 죽었다. 그러나 우리의 사상은 혁명적이였고 정확했고 위대한 승리를 했다! 모주석의 위대한 무산계급위생혁명로선을 관철하는 길에서 대가를 지불하지 않을수 없다. 지나온 혁명의 로정이 그렇지 않았던가! 앞사람이 쓰러지면 뒷사람이 이어섯다. 전진의 도로는 곡절적이고 전도는 광명하다. 우리는 위대한 모택동사상의 기치를 높히들고 무산계급혁명로선을 따라 힘차게 전진할것이다!우리의 앞길을 막을자는 이 세상에 없다! 우리의 목표는 꼭 실현 되여야한다! 우리의 목표는 꼭 실현 된다! 동지들! 노력분투 합시다!!”청중들의 느낌은 다종다양 했겠지만 박수갈채는 우렁찼다. 구구절절 모주석을 높이 받들고 그이의 말씀으로 배렬했는데, 사개가 맞고 빈틈이 없고 흠이없이 미끈하고 류창하고 힘찬 강용앞에서 박수를 치지않을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천하제일의 절창이라 할만큼 기막힌 기담괴론이였으나 혁명위원회가 지지하는데 누가 감히 시비를 할텐가?! 성혁명위원회 위생청의 지시로 장주임의 선진사적강용발언은 록음테프로 편집되여 전성 방방곳곳 위생계통의 학습재료로 되였다. 지어는 다른 부문에서도 갖다 들었다. 강용재료에서 나와 명순이는 두말할것없이 전형적인 반면교재로 인용 되였다.

    그런데, 제갈량이라고 소문난 장주임도 이번일에서 한가지 실책만은 승인 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것은 환자선택에서 경한환자 - 이를테면 만성발작성란미염 같은 환자를 선택하여 중의방법을 썼더라면 더욱 휘황한 성적을 걷우었을 것인데 그점이 아쉽게 되었다. 치료하지 않아도 며칠지나면 별일 없는 그런 환자를 선택했더라면 아마도 그는 제돈을 쓰면서라도 환자를 실물견본으로(증인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멋드러진 강용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별문제였다. 환자가 죽었든 살았든,(살았다면 더 대단했겠지만) 장주임의 도금칠에는 별로 영향이 없었다. 상급에서는 그의 높은 계급투쟁, 로선투쟁, 무산계급사상각오와 혁명성, 령도예술 그리고 여러가지 사업성과를 이미 긍정하고 있었던것이다. 그해 그는 친히 배양한 맨발의사와 함께 전국농촌위생공작좌담회에 참가하여 강청을 뵙는 영광까지 지니였다.

    며칠후 위생원당지부에서는 입당신청자들에 대한 심사를 진행하게 되였다. “토구납신”지시에 따라 당조직 활동에 군중대표를 참가시키는 새로운 형식이 창조 되였는데 입당신청자 일곱은 당사자면서도 군중대표신분으로 모두 참가 했다. 그외에 군중대표가 너덧사람 더 있었다.

    나는 첯번째로 심사를 받았는데 대뜸 미끌어 떨어지었다. 그러나 심사시간은 오히려 그 누구보다도 길었다. 내가 미끌어진 주요한 원인은 란미염환자(죽은 청년)를 다짜고짜로 수술하려고 한 엄중한 착오 때문이였다. 입당을 신청한 다섯사람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발언 했는데 당원들보다 그들이 오히려 더 많은 말을 하였다. 그들은 발언에서 저마다 십여조목의 모주석어록을 인용하면서 계급투쟁의 강(纲)과 로선투쟁의 선(线), 그리고 사상투쟁의 심도에서 나를 분석하고 “성근한 동지적 방조”를 하였는데 마치도 대비판을 하면서 나를 투쟁하는것 같았다. 란미염환자사건은 나를 어느코에 갖다 걸어도 다 들어 맞는 비판거리였다. 그리고 분석 심도가 아무리 깊어도 과분하지 않았다. 발언자들은 나를 방조한다는 형식을 통하여 자기의 높은 사상각오를 더욱 잘 표현하기 위하여 마치도 웅변 경쟁을 하듯 했는데, 내가 듣기에는 그래도 왕의사와 서호사가 한차원 더 고명한것 같았다. 란미염환자건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발언과 기본상 대동소이 했지만 그들의 발언은 보다 전면적이고 체계적이였고 또 모주석어록과 당장규정을 그 누구보다 더욱 많이 인용하면서 심각하게 “성근한동지적방조”를 하는것이 특색이었다. 그들은 계급투쟁 각도에서 문제를 력사적으로 고찰하면서 사상적근원을 파 헤치였다. 우선 나의 가정성분에서 계급적근원을 찾았는데 상중농과 부농은 친형제다보니 (형님과 아우사이라고 생동하게 비유해서 말했다.) 계급적 본능에서 부농의사를 란미염환자 회진에 참가시키자고 말할수밖에 없었다는것이였다. 이는 아주 자연스러운일로서 계급투쟁각오가 너무도 낮다보니 그럴수 밖에 없다는것이였다. 다음은 위생원에서 집을 마련해 줄때(단위방산임) 당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아니, 혁명적군중의 사상각오정도여도 그것을 사절해야 마땅한 것이거늘 입이 떡 벌어져서 좋아하지 않았던가…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행동인가, 결국은 세계관 인생관 사상에 원인이 있다는 지적을 했다. 잇따라 “캉톨수술”문제를 거론했는데 수술자리화농은 기술사고면서도 책임사고이고 그것을 구실로 신생사물을 요람기에 압살 했다는것이였다.이것도 당성여부를 보기에 앞서 엄중한 착오이며 사상문제인데 거기에는 계급성, 세계관, 인생관, 로선문제 등 다양한 측면들이 종합적으로 포함된다는것이였다. 또 그들은 나의 련애사를 공개한후 의미심중하게 거기에 의문점이 있다고 했다. 회의참가자들은 귀가 번뜩해서 저건 또 무슨 소리냐는듯 긴장해 하는것 같았다. 내가 무슨의문이냐고 물으니 그들은 이성지간의 관계가 어느 정도였는지?... 그것이 의문된다고 했다. 나는, 우리가 사랑을 언약 했지만 손도 별로 잡은적이 없다고, 많은 동창들이 증명설수 있다고 격분해서 말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일을 남이 보게 하는가? 어떻게 증명을 서는가. 량심에 달린문제다.”하고 한술 더 뜨는 것이었다. 그들은 마치도 내가 한 처녀를 롱락, 희롱, 유린까지 한것처럼, 류망인것처럼 듣는 사람들이 느끼게 말을 구사하는것이였다. 나는 너무도 억이 막혀 멍해 있다가 “입당을 못해도 상관 없는데, 이 문제는 당조직에서 꼭 해명해 달라.”고 소리쳤다. 나의 입당심사는 결국 싱겁게 우스운 꼴로 끝나버렸다. 나는 입당을 하려다가 공연히 더러운 루명만 쓰고 말았다.

    명순이도 심사에서 떨어 졌는데, 그에 대한 심사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에게는 단위에서 집을 줄때 좋아한 사상적근원,“캉톨수술”과 이번의 란미염환자문제에서 나와 원칙적 투쟁을 견지해야할 대신 맞장구를 친 사상적근원이 분석 지적 되였다. 서호사는 말하기를 “부부는 부부이기보다 우선 혁명적 동지 관계다. 때문에 가정혁명화면에서 노력해야 한다. 공산당의 철학은 투쟁의철학이니만큼 부부사이에도 원칙적투쟁을 견지해야한다.”고 했다. 왕의사도 한마디를 보충했는데 “명순이는 계급투쟁성이 결핍하다. 호인주의다보니 사람들은 <큰집맏며느리감>이라고 한다. 공산당원은 투쟁성이 특히 중요하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밤낮 일만 일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전형적인 류소기의 유일생산력론의 표현이다.”고 했다. 입당심사는 나를 몹시 억울하게 하였다. 마찬가지로 명순이도 억울하게 되였다. 아니, 나 보다 더 억울하게 되였다. 그는 복무태도가 너무도 좋아서 전공사에서 사람마다 칭찬하는 “큰집맏며느리감”이라는 여자였다. 명순이는 일을 엄청 많이 잘 했고 작은 오차도 한번 없었다. 그리고 책임성이 각별히 높았다. 명순이가 만약 나의 안해가 아니였다면 그는 틀림없이 이번에 입당 하였을 것이다. 그야말로 애매한 두꺼비가 떡돌에 치인격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는 변명도, 반박도 하지않았고 더욱히는 누구를 보복적으로 공격하지는 않았다.

    입당심사는 긴장속에서 십여일 계속 되였는데 나중에 통과 된 것은 극적으로 장주임의 안해와 “6.26백의전사”최의사, 두사람이였다.

    서호사는 사람들이 앞에서는 경외하고 뒤에서는 “되지 못한년, 죽일년”하고 욕하는 사람이였다. 그는 자고자대가 이만저만한 사람이아니였다. 그야말로 안하무인이였다. 성미 또한 이악스럽고 까다롭고 괴팩한것이 어찌보면 선천성결함 같았다. 쩍하면 사람들과 시비를 걸고 싸우기까지 했으며 번연히 틀린 시비도 궤변을 늘여 놓으며 끝까지 이기려고 했다. 사람들은 그와 무슨 언쟁을 하다가도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더 대상하지 않고 피해버리는데 그럴때면 그는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였다. 그는 스스로 자기가 가장 “투쟁성”이 높다고 인정했다. 맑스주의 철학은 투쟁의 철학이고 모택동사상은 반란과 투쟁이기에, 공사적으로 제일먼저 반란의 기치를 든 자기가 당원표준에 가장 부합된다고 늘 인정해 왔던것이다. 그런데 당조직과 군중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서호사는 군중위신이 없었다. 아니, 사람들이 미워하고 싫어했다. 주사를 놓을때 환자가 아프다고 말하면 “쇠바늘이 들어가는데 그래 아프지 않고 가렵 겠는가…”하고 쏘아 붙이면서 약물을 콱 주사해 더욱 아프게 하는가 하면 아이들의 혈관주사는 터지면 두세번 더 찔러봐서 안될때는 손을 바꿔야 하는데, 서호사는 아이엄마들이 손을 바꾸면 어떠냐고 하면 “나를 초과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하며 오히려 더 기를 쓰고 자기가 조작했다. 곁에 다른 호사가 있음에도 그는 손을 바꿔주려하지 않았다. 하여 주사 맞을 환자들은 그를 슬슬 피하기도 했는데 그는 사람을 가린다고 되려 괘씸해했다. 이런일들은 극히 자질구레한 복무태도 혹은 방법문제지만 군중들의 인상은 대단히 나빴다. 원내동료들과도 그는 자주 충돌을 일으켜 왁자 떠들며 부산하게 하였다. 다른 부문에서 일손이 바쁘면 서로 돕는것이 응당한 처사건만 그는 일부러 분공과 제도를 내 세우면서 물건너 불보듯하며 약을 올리듯했다. 심통이 발작할때면 의사들의 처방을 비꼬기도 했는데, 어느 의사가 만약 포도당주사를 처방하면 “이따윗걸 맞아 무얼해, 개눈깔사탕 두알보다도 못한것을…그래두 무슨 의사라구…흥!”하고 환자앞에서 꺼리낌없이 의사들을 폄하 했다. 서호사는 복무태도, 단결, 군중관점, 교오자만극복 등 방면에서 더욱 노력해야 하며 남에게 마레주인것 만큼 자신에게도 그래야 한다고, 세계관, 인생관 개조에 계속 노력하라는 충고를 받고 미끌어졌다.

    왕의사는 업무능력이 약하고 사업적극성이 부족했다. 그는 의료사고를 자주 쳤는데 번마다 우리가 곁에서 수습해 주었다. 그리고 왕진과 기층하향을 싫어해 비판을 받기도 했고 사업임무(지표)를 잘 완성하지 못하여 지적을 받기도 했다. 그에게는 퀴퀴한 뒷소리도 많았는데 사람들은 체면을 돌봐서 말하지 않았다. 왕의사는 업무자질을 제고하며 사업적극성과 책임성을 제고해야하며 세계관, 인생관 개조에 노력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최의사의 안해는 당원으로서는 거리가 먼 보통 녀자였다. 그는 가정살림에 지나치게 집착 했다. 직장에서 자주 뜨개질을 하여 핀잔을 받으면서도 미안한줄도 모르고 집일 때문에 출근시간에도 자리를 뜰때가 많았다.

    4인무리가 꺼꾸러진후 “6.26백의전사”들은 선후로 위생원을 떠나갔다. 그들은 거개가 원단위로 돌아갔다.

    장주임은 “4인무리”가 꺼꾸러진후 제일 먼저 위생원을 떠나 갔는데, 지구위생국 국장이 된다느니 어쩌느니 하였는데 결국은 원단위인 현병원 내과부주임으로 되여 제자리로 갔다. 그런데 여기서 희극적인 장면은 그가 알심들여 양성한 맨발의사가 전국농촌위생공작좌담회에 갔다온후 현위생국 부국장 보좌에 발탁 되였다는것이다. 맨발의사는 장주임의 령도로 되였던것이다. (한달후에 소리없이 취소되였다.)

    장주임을 제갈량이라고 하게 된것은 그가 사업에서 멱수를 잘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사람보다 한발 앞서 이름을 날릴수 있는 항목을 틀어 쥘줄 알았다. 그리고 그에게는 한번 큰 인물이 되여 보겠다는 포부와 야심이 있었다. 하여 혁혁한 사업성과들을 만들어 내고 도금칠을 번쩍번쩍 빛나게 잘 하였는데, 조직부문에서 보는 시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그의 안해는 올때도 뒷말을 달고 왔지만 가면서도 꼬리를 달고 갔다. 그것은 현병원에서 사업할때 자산계급생활방식을 추구하는 멋쟁이라느니, 무도쟁이라느니, 누구누구와 어떠 어떠 하다느니 했는데 우리공사에 와서는 입당을 하면서 “궁둥이당원”이라는 꼬리를 달게 되였다. 공사당위의 부서기라는 사람이 그와 소위 조직담화를 한다면서 간통을 했던것이다.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엉켜붙었는데 부서기는 3년의 감옥살이를 갔다. 그는 순 남녀생활작풍문제로 해서 옥살이를 갔는데 문제가 여러건이 있었다. 어떤사람들은 장주임을 오줌깨라고 비웃었다.

    장주임은 원단위로 돌아간후 그간 자기의 실무수평이 많이 뒤떨어졌음을 절감하고 업무능력을 제고하기 위하여 위가 아픈것도 참으면서 상해에 가서 1년의 연수를 열심히 하고 돌아 왔다. 그런후2년남짓 지나서 위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병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들은후 어느날 나와 명순이는 병문안을 갔다. 그날 장주임은 나에게 “나는 김선생부부가 훌륭한 사람들이란걸 잘 알고 있었소. 그러나 받들어 주지 못했는데 참으로 미안하오. 꼭 훌륭한 사람들이 되오.”하고 말하면서 몹시 감개무량해 하였다. 말은 바른대로, 사실 우리부부는 원내외에서 참답게 사업하였다.

    최의사는 “6.26백의전사”로 내려온후 사업을 잘 했다. 그는 마음씨가 무던해서 누구와도 잘 어울렸다. 또 부지런 했다. 대채를 따라 배우는 공작대에 나가서도 일을 잘 하여 사원들의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생산대에서 가만히 갖다주는 벼마대를 받아 먹은것이 그가 떠나간후 뒷소리가 되였다. 지금 같으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그때는 아주 엄중한 착오였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가지고 최의사를 혈뜯지는 않았다. 사람이란 인심이 중요한데 그는 인심이 좋았던 것이다. 서호사와 왕의사는 입을 비쭉거리며 때론 험담을하였지만 사람들은 응대하지 않았다.

    장주임이 떠나간후 위생원의 령도권은 다시 박원장에게로 돌아 갔다. 4인패가 멸망한후 혁명위원회는 취소되고 원장제가 회복되면서 위생원의 소위 령도성원들도 해산되였다. 박원장은 원래대로 원장이 되고 후에 현위생국에서는 나를 부원장으로 임명 하였다. 그후 나와 명순이는 입당을 했는데 현위생국에서는 나를 다른 공사위생원의 원장으로 배치 했다.

    우리가 그 공사로 떠나간후 얼마안되여 왕의사는 의료사고와 남녀작퐁문제로해서 감옥에 가고, 서호사는 젊디젊은나이에 불행하게도 과부로 되였다.“금후의 실제 표현을 본다!”고한 로중의 문의사와 중약제사는 편안하게 사업하고 만년을 복하게 살았다. 부유보건 로처녀 리의사는 혼인광고로 만난 도시 로총각과 결혼해시 아들딸 남매를 낳고 지금 행복하게 살고있다. 그런걸 보면 어른들이 사람마다 모두 제 배필이 있다고 한 말이 틀리는 말이아니다.“6,26백의전사” 최의사부부는 개체진료소를 꾸리고 부자가 되였다고한다.(최의사안해가 집살림에 지나치게 집착한것은 가난도 한 원인이라고 이전에 나는 생각했다.) 박원장은 현으로부터 리휴로간부 대우를 받아 도시에 가서 행복하게 살았다.

    나는 다른 공사에 간후 위생원의 업무건설에 노력 하였다. 그러는중 모교에서 석사연구생모집시험이 있었다. 나는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이되고 2년후 석사학위를 가졌는데 조직에서는 모교에서 사업하라고 하였다. 하여 우리는 심양시로 이사를 하였다. 얼마후 나는 국비로 일본에 연수를 가서 생리학박사학위를 따고 돌아 왔다. 나는 커다란 곡절이 별로 없이 인생을 순리롭게 걸어 왔고 나름대로 성공을 했다고 생각한다. 괜찮게 되였다고 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아니, 잊을수 없는 커다란 유감이 있다.

    그것은 급성화농성맹장염으로 죽은 청년에 대한 것이다. 지금도 그때 일이 눈에 선 하다. 나는 20여년의 외과림상의사 생애에서 한차례의 실수도 하지않았다. 그러나 청년의 죽음은 외과의사로서 나의 엄중한 실직이다. 가끔가끔 그때일을 회고하면 마음은 한없이 괴롭고 량심의 가책은 끝이 없다.그리고 그때가 너무도 아쉽고 원망스럽다. 세상에는 후회약이 없다. 우리들은 산골 농민부부에게, 청년에게 참으로 큰 죄를 지었다!...

    나는 왜서 수술을 못했던가?!... 청년은 왜서 죽었는가?!...

    그때, 만약 내가 견결히 나서서 수술해 주었더라면 청년은 8일내에 깨끗히 잘 완치가 되였을것이고, 정직하고 참답고 아주 총명했다는 그 청년은 지금 훌륭한 사람이 되였을 것이다.—

    그때가, 만약 정상적인 세월이였다면 청년은 절대로 죽지않았을것이다.ㅡ

    그러나 무정한 력사에는 “만약”이라는 가설이 없다. 오직 보귀한 력사적경험과 침통한 력사적교훈만이 있을뿐이다.

                                                                                                                                  08.10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206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146 로년의 자세(6) 2019-12-30 0 1704
145 로년의 자세(5) 2019-12-27 0 816
144 로년의 자세(4) 2019-12-23 0 792
143 로년의 자세(3) 2019-12-20 0 769
142 로년의 자세(2) 2019-12-16 0 851
141 로년의 자세(1) 2019-12-12 0 922
140 구명은인 2019-11-24 0 1066
139 과불급의 모범 2019-09-21 0 958
138 쌀독에서 인심 난다 2019-08-02 0 938
137 폭염 폭우맹위에 황연대각 2019-06-14 0 971
136 한 녀인의 일생 2019-05-24 0 1268
135 이주민 문제 2019-05-14 0 944
134 재수없은 재수 2019-03-02 0 1084
133 졸업사진 2018-12-10 0 2362
132 모성은 있어도 효성은 없다 2018-07-25 0 1152
131 추석때가 오면 2018-06-26 0 1160
130 층집별명에 대한 고찰 2018-06-06 0 1005
129 청명절 점경 2018-05-25 0 1142
128 청진기를 버린 사연 2018-05-22 3 1558
127 석양이 붉게 타는것은 2018-04-08 0 1059
‹처음  이전 1 2 3 4 5 6 7 8 9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