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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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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향간부
2014년 04월 08일 07시 16분  조회:2702  추천:2  작성자: 회령
            실화
                                        하향간부
                                                                                                          회령

    지금은 공작대가 별로 없지만 30년전에는 크고작은 여러가지 공작대가 많았다. 큼직큼직한것을 대충 꼽아본다면 “토지개혁운동공작대” “진반숙반운동공작대” “3반5반운동공작대” “농업집체화운동공작대” “대약진운동공작대” “4청운동공작대” “사회주의교육운동공작대” “공인선전대” “빈하중농선전대” “해방군선전대” “대채를따라배우는운동공작대” 등등이 있었다. 그때는 중요한사업이면 보통 “운동” “대회전”으로 했는데 공작대가 군중들속에 들어가서 구체적인 지휘를 했다. 이들은 당의 중심사업을 잘 완성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사업하였다. 공작대성원은 각양각색이였다. 하지만 그 어떤 공작대나 공통성이 있었는데 그것은 철같은 규률이다. 그 규률을 공작대에서는 보통 “3 대규률 8항주의”라고했다. 공작대 모든 성원들은 마땅히 높은 정치사상각오를 가지고 규률을 엄격히 지키며 군중들의 앞장에 서서 그들을 이끌어야했다. 시기시기의 당의 중심임무를 완성하기 위하여 수천만의 공작대원들은 피땀을 흘리고 지어는 보귀한 생명을 바쳐가면서 간고분투를 하였다. 마멸할수 없는 그들의 로고와 공헌, 성과를 어찌 한입으로 다 말할수 있으랴!... 농촌에서는 공작대성원들을 보통 하향간부라고 불렀다.

    나는 붉은기아래서 성장했다. 소학교때에는 소선대원이였고 의학전업학교를 다닐 때에는 청년단원이였는데 그때에는 이런조직에 가입하는것이 아주 싶지 않았다. 한반 학생이 3, 40명이라 할때 소선대원은 기껏해야 7, 8명이였다. 청년단원도 그랬다. 정 치사상각오가 높아야 할뿐만아니라 학습과 품행이 좋아야했다. 가정성분은 빈농이여야하고 8촌까지 정치, 사상, 력사와 현실표현에 문제가 없어야 했다. 그뿐이 아니다. 다정한 친구들에게도 문제가 없어야했다. 나는 의전 3학년때에 연변주직속기관청년사 회주의건설적극분자에 당선되기까지했다.

    학교를 졸업하자 당과 국가에서는 나를 변강산골공사병원에 의사로 배치하였다. 우리청년들은 모두 가장 간고한곳에 가겠다고 자원하였다. 공사병원에 간후 얼마안되여 공사단위에서는 나에게 공사기관단지부서기직책을 맡겨주었다. 나는 당과 모주석의 지시를 받들고 혁명사업에 충성하며 인민을 위하여 전심전의로 복무하는 훌륭한 사람으로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사회에 나선 그날부터 장장 22년을 나는 공사병원에서 사업했는데 해마다3분의 둘의 시간은 하향간부로 사업하였다. 본직업무에 관계되는 하향은 두말할것도 없고 농업생산과 관계되는 하향도 병원에서는 내가 도맡아 하다싶히 하였다.

    농업에서 대채를 따라배우는 운동이 전개된후(1966ㅡ1978) 대회전형식을 많이 사용하면서 림시적인 공작대를 자주 조직하였다. 례하면 비경생산대회전공작대 모내기대회전공작대 공구량대회전공작대 그리고 잇따라 제방뚝건설, 수리공정, 농토기본건설, 대채전건설대회전을 기세높히 진행하는데 사업량은 많고 선진을 다투는 혁명열의는 북받치고 공사의 간부력량은 부족한 상황에서 공사당위에서는 기관단위들에서 하향간부를 뽑아 공작대를 조직하였다. 병원에도 번번이 명액이 떨어졌는데 그럴때마다 나는 용약 자원을 했고 매번 비준되였다. 나는 당의 중심사업을 완수하는 일선에 나가는것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하였다. 내가 공작대에 자보한 동기는 극히 단순하였다. 하향간부란 병원에 앉아서 새하얀 위생복을 입고 병을 보기보다는 몇십배 간고한 임무라는것은 모두가 잘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간고한 곳일수록 더 가려하며 그런곳에서 적극적으로 사업하는 동지야말로 훌륭한 동지”라고 하신 모주석의 말씀을 가슴속에 깊히 새겼고 또 단위의 실정을 보더라도 청년인 내가 간고한일에서 앞장에 서지않는다면 그건 도리가 아니였다. 나는 당을위한 사업에서 청춘을 남김없이 이바지하며 훌륭한 당원으로 단련성장하며 인민을위한 혁명의길에서 한생을 살리라는 포부를 품고 있었다. 이렇게 하는것이야말로 정확한 인생태도이며 보람있는 삶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때의 나의 인생관 가치관은 이렇게 단순하고 소박하였다. 하긴, 나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당에서는 대채를따라배우는운동에서 상년공작대를 조직하였다. 그 시간은 대개 3, 4년으로 매개 생산대에 한명씩 들어갔다. 이것을 “점을 잡는다”고하였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한 하향간부를 상대적으로 온정시켰다. 그들은 험수에 합격될때까지 4년이고 5년이고 대채식생산대를 만들어야한다.

    나는 상년공작대에 자원하였고 비준되였다. 나의 점은 학서생산대였는데 공사소재지와는 10여리떨어진 차도 통하지않는 곳이 였다. 20여호의 작은 생산대로서 정치대장은 갓 입당한 청년이고 생산대장은 초중을 졸업한지 3년되였다. 그들은 모두 반란파출신들이였다. 부대장은 장가간 젊은이로 농사일에는 미립이 튼 감농군이였다. 그런데 성분이 상중농이였다. 하여 문화대혁명초기까지는 대장을했지만 탈권바람이불자 떨어졌다가 다시 부대장으로되였다. 정치대장은 농기짬같은데로 들어갈가해서 은밀히 “활동”하는 엉큼한 사람이고 생산대장은 공사모주석저작학습적극분자로 입당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이였다.

    그해 모내기철이다. 공사당위에서는 3급간부확대회의를 열고 모내기대회전을 호소 했다. 공사유선방송에서는 새벽2시부터 “모내기타령”을 띄우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런데 학서에서는 4일늦어 모내기를 시작하였다. 그것은 부대장을 비롯해서 사원들이 그렇게 해야한다고 했는데, 내가 보기에도 도리가 있었다. 하여 나는 그들을 지지했다. 살얼음이 깔린 논판에 맨발로 들어서서 모내기를 한다는것도 어기낭차한 일이였지만 우선은 벼모가 아직은 어렸다. 정치대장과 생산대장은 당의지시요 계급투쟁, 로선투쟁이요 대채건설이요 하며 목에 핏대를 세웠지만 중구난방으로 시무룩하고 말았다.

    어느날 반란파출신으로 벼락출세를 한 공사당위서기가 시찰을 내려왔는데 그는 노기등등해서 나와 생산대간부들을 한바탕 닦아세우고 돌아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자기생각대로 모내기를 하였고 기한내에 완성하였다.

    무슨대회전이든 꼭 동원대회, 총결대회가 있었는데 3급간부들을 불러다가 성대하게 하는것이 그때는 류행이였고 규례였다. 모내기대회전총결대회에서 학서생산대는 지명비판은 받지않았으나 가슴이 뜨끔뜨끔하게 욕사발을 먹었다.

    일이 안되느라 그랬는지 회의가 끝나자 점심이나 먹고 가려고 집에 들르니 부석부석 부은 안해가 울먹울먹하며 맞아주었다. 태여난지 두달도 안되는 딸애는 점적주사를 달고 있었는데 불덩이같이 열이 올랐고 이곳저곳에서는 붉은반점이 보이였다. 벌써 일주일이 되였다는게아닌가?! 그리고 재탄도(눅거리. 한수레에 3원.) 거이 떨어진다고 하였다. 갓난애는 감기에 걸렸는지 열이나서 병원의사들이 번갈아 들어와서 보아주었는데 의사마다 항균소를 처방했지만 효험은 고사하고 점점 더 중해만 간다는 것이였다. 진찰해보니 항균소부작용이 였다. 나는 점적주사를 뽑아치우고 알콜찰욕을 하였다. 보리저녘때쯤되여 아이는 진정되기 시작했다. 나는 소재지생산대에 가서 우차를 빌어가지고 급급히 재탄 실으려 갔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재탄을 실어다 놓은후 밤도와 학서로 돌아갈 타산이였다. 이웃생산대에서 부업으로하는 소형탄갱은 산언덕위에 있었는데 산길로 가면 험하긴 해도 5, 6리고 좋은길로는 10리가 더 되였다. 나는 지름길을 잡았다. 눅거리 재탄은 반수레도 되나마나 하였다. 밤당번으로 나온 농민들은 재탄에 덩이탄을 더 실어 재탄값으로 가져가라고 하였다. 나는 절대로 그렇게 할수 없었다. 나는 부지런히 석탄을 채에 쳐서 재탄을 한수레 가득 싣고 바삐바삐 돌아섯다. 날은 깜빡 어두워지고 비는 그냥 주룩주룩 내렸다. 저녘꼴을 먹지 못한 소는 성깔을 부리듯 와락와락 걸었다. 좁고 울퉁불퉁 험한산길은 미끌고 질척거렸다. 나는 소코뚜레를 바싹거머쥐고 소를 달래면서 조심조심 산길을 내렸다. 날씨는 칠흑같이 캄캄해지었다. 급한내리막이면서 90도로 꺾어진 대목에 이르러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수레가 곧추 내리쏠리였다. 밀바가 끊어진 것이다! 찰나, 소는 대가리를 번쩍들고 밀리지 않으려고 앰! 앰! 갑자르며 네다리를 뻗치고 안깐힘을 썼다. 뿔로는 수레멍이를 받치였다. 나도 소와 함께 멍에를 힘껏 뒤로 밀며 단숨을 톱았다. 진땀이 줄줄 흘렀다. 수레는 서너발작 내리 쏠리다가 멈춰섯다. 수레를 세우고 숨을 돌리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캄캄한 골짜기바닥이 밑창없는 죽음의 함정같아 보이였다. 정신이 아찔하였다. 그곳에서 한발작만 더 나갔더라면 소와 수레는 박살이 되였을것이다. 그 후과를 내가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그야말로 천만다행이였다.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소의 목덜미를 자꾸 쓸어주면서 소에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재탄을 석탄굴에 다 퍼넣고나니 열한시가 지났다. 그런데 아이가 또 열이나기 시작했다. 나는 새벽까지 안해와 함께 아이를 돌보다가 그만 깜빡 잠이들었다. 깨여보니 이게 어느땐가?! 오전10시가 지났다. 나는 마치도 지각한 학생처럼 부랴부랴 학서로 돌아갔다. 반날일을 빠진것이 몹시 마음에 켕기였다. 아이는 후에 별일 없었다.

    모내기대회전이 끝난후 인차 한전기음에 달라붙었다. 어느날 비가 쏟아져 사원들은 하루 쉬게되였다. 그날 나는 부대장과 함께 모판써료부를 시냇물에 싣고가서 씼었다. 우리는 써료부를 다 씼은 후 반두를 가져다 고기잡이를 하였다. 세치네는 서너사발이 되였다. 부대장은 으슬으슬한데 한잔 하자며 자기집으로 나를 끌었다.

    며칠후 공사당위에서는 하향간부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 당위서기는 나를 호되게 비판하였다. 착오는 모내기대회전에서 상중농 부대장과 단짝이되여 군중의 뒤꽁무니를 따른것, 청가도 없이 모내기대회전총결후 반나절이나 집에서 늑장을 부린것, 그리고 세치네를 잡아 술놀이를 한것 등이였다. 회의에서 서기는 당위의 결정이라면서 나의 점을 학서에서10여리를 더 산골로 들어가는 초평더기생산대로 옮긴다고 하였다.

    후일담이지만 학서생산대 정치대장과 생산대장은 당위서기에게 나의착오를 반영하며 잘못된 일의 모든 책임을 나에게 밀었든 것이다. 그래도 대대서기가 나서서 일은 잘한다고, 밤중이라도 환자가있으면 곤히 자다가도 달려가고 이튿날에는 또 일은 일대로하고 속탈과 몸살을 앓을때도 코피를 흘리면서도 일을 했다고 두둔한데서 상년공작대에서 쫓기지는 않았다. 그해 학서생산대의 정치대장은 “활동”한 보람이 있어 소원대로 공사농기짬으로 가고 생산대장은 “사상리론수평이 높고 계급투쟁을 잘 틀어 쥐여서” 입당을 했다. 학서생산대의 대채건설은 성과가 많았지만(주로는 사상상에서) 그해 산량은 전해보다 더 내려 갔다.

    초평더기생산대에 간후 나는 그해의 공구량임무를 제때에 완성하지 못했다. 그곳은 한전뿐인데 전기가 없다보니 마당질을 전부 군재와 도리깨질로 하였다. 내가 보기에는 사원들이 일을 잘 했다. 달밤에도 기음을 매고 후치질 가을걷이 탈곡을 했다. 바람이 좋으면 밤에도 양창질을하며 공구량임무를 기한내에 완성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기한을 어겼다. 나는 또 비판을 받았다. 이번에는 계급투쟁, 로선투쟁 정치사상투쟁을 바싹 틀어쥐쥐 않는다는 모자까지 씌웠다. 비판투쟁 해야할 사람도, 사건도 없기에 나는 모주석저작학습, 신문의사론, 선진사적 등 정면교육만 했던것이다.

    탈곡후 대채전건설대회전이 전개되였다. 초평더기에서는 다락밭을 만들 마땅한 필지가 없었다. 초평더기생산대는 말그대로 구릉위에 있는 더기여서 수전은 풀수 없어도 한전밭들이 모두 반듯한 평전이였다. 그런데 공사당위서기는 정치적각도에서 상징적으로라도 다락밭을 꼭 만들어야 한다고 내리 먹였다. 서기는 로선적, 정치적, 사상적, 혁명적 높이에서 중요성, 필요성, 박절성을 강조했지만 생산대간부와 군중들은 코방귀를 뀌였다. 나도 그랬다. 그것은 얼토당토않은 궤변이였든 것이다. 돌을 실어들여 뚝을 만들고 흙을 퍼다가 채워서 다락밭 모양을 만들라고 하는데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는 망발이 였다. 나는 조짚과 꽁깎대로 벼짚을 바꾸어다 사원들에게 동삼내 가마니짜기 개인부업을 하게 하였다. 그것은 사원들의 생활에 크게 보탬이 되는 일이 였다. 이로하여 나는 또 계급투쟁 로선투쟁 정치사상투쟁 높이에서 호된분석과 비판을 받았다. 이번에는 하도 엄중하기에 병원에서도 입당적극분자와 군중들의 비판을 몇차례 받았다. 안해는 병원호사인데 마음만 곱고 언변이 없는 사람인데 그는 쿨쩍쿨쩍 울기까지 했다. 가정혁명화가 부족하다고 그도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점”을 바꾼다고는 하지 않았다. 초평더기보다 더 간고한 곳은 없었든 것이다.

    새해 농사가 시작 되였다. 한전농사에서는 씨붙임과 기음, 후치질이 관건적인 것이다. 그러나 일단 비가오면 한전일은 하지 못한다. 그런데다 초평더기에는 워낙 밭면적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우리는 실속있게 부지런히 일을 하였다. 동이트면 밭으로 나가고 풀이 보이지 않아서야 집으로 돌아 왔다. 등에 모기불 쑥타래를 꽂고 기음을 매고 후치질을 했다. 달밤에도 일을 했다. 초평더기에서는 대회전마다 며칠씩 규정한 시간을 어겨 나와 간부들은 비판을 받았지만 그해 농사는 풍작을 했다.

    생산대총결이 끝난후 어느날 밤 초평더기 간부들은 콩 한마대와 학서생산대와 바꿔 먹는 그 귀한 벼 두마대를 우리 집에 가져 왔다. 나는 겨우 그들을 설복하여 돌려 보냈다.

    그간 몇년사이에 병원의 적극분자들은 모두 입당을 하였지만 나와 안해는 그해에도 입당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락심하거나 누구를 원망하지 않았다. 동지들의 비판에 대해서도 줄곧 해석하거나 변명하지 않았다. 모주석께서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삼가하며 사업을 잘하면 된다.”고 하시지 않았든가! 나는 전혀 위축정서가 없었다. 친구들이 밤낮 하향만 하며 제노릇은 한가지도 못하는 “머저리 하향간부”라느니, 번마다 비판이나 받는 “운동간부”라느니 하고 놀리며 우스개를 하면 나는 “그것 참, 듣던중 좋은 말이야.”하며 유쾌히 웃었다. 친구들은 “저 부실한것 하구는 말도 말아. 아이쿠! 하여튼, 사람은 진투야…”하며 혀를 끌끌 차기도 하였다. 나는 그 어느날 나도 당원으로 될것이라고 확신 하였다…

    이듬해 봄, 주위생국에서 동북삼성간염병고찰단 성원으로 가라고 해서 나는 상년공작대 하향간부사업을 그만두게 되였다. 두달여 고찰임무를 끝내고 돌아오니 전근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향간부 경력에서 나는 별로 해 놓은 일도 없고 그토록 념원하든 입당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후회되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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