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huiling 블로그홈 | 로그인
회령
<< 3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31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나의카테고리 : 작품

인생과 량심
2014년 05월 12일 09시 11분  조회:3324  추천:4  작성자: 회령
              중편실화
                                                    인생과 량심
                                                                                                               회령

    5.1절전날 우리는 산동성 유산시로 관광 겸 일보러 갔다. 북경에서 유산까지는 900키로라고했는데 점심먹고 떠난것이 밤아홉시에 유산에 도착했다. 유산 은탄호텔은 3성급이라고했지만 식사며 시설이 상당히 좋았다.

    이튿날 아침후 우리는 우선 일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날씨도좋고 기분도 상쾌한 아침이였다. 초중생손녀애는 유치원애들처럼 재잘거리며 퐁퐁 뛰였다.

    이곳에는“천하제일은탄(은모래톱)”이라는 풍경구가 있는데 황해해변가로 20여리의 백사장이 휘우둠이 뻗쳐있었다. 여기에 해수욕장은 물론, 각종 유람선을 띄우는데 앞으로는 한국, 일본과 직항하는 유산항구도 건설할것이라고했다. 그리고 바다위에 멋진 다리도 놓는다고했다.

    개발이 시작된지는 5년철이라고했는데 지금은 피서별장 건설이 한창 활기를 띄고있었다. 이미 지어놓은 별장들중에서는 향항투자상이 지은것이 제일이였다. 대경유전에서는 두곳에다 땅을사고 별장을 건설했는데 리,퇴직간부들에게 주는것이라고했다. 그런데 그것은 살림집모양이여서 향항것 하고는 멋이 떨어졌다.

    우리는 여섯개의 별장단지들을 돌아보았는데 별장소매쎈터에는 어데가나 사람들이 붐비였다. 북경, 상해, 심수, 광주, 심양, 할빈에서 왔는가하면 서안, 성도, 곤명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대부분이 젊은사람들인데 어린부부가 특히 많아보였다. 중국에 부자가 이렇게 많은것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것도 젊은세대가!... 외국인들도 가끔 보이였다.

    아들부부는 향항것을골라놓고 우리에게 의논을했는데 어느모로보나 마음에들었다. 집값은 북경보다 훨씬 쌌다. 이런집을 북경에서는 평당 대체로 17000원을하는데 여기서는 2600원이였다. 그저 가지는게 아닌가!... (작년에는 1800원이였다고했다)

    오후에 우리는 바다가에있는 “망해정”으로 갔다. 래일은 대고산에 있다는 명찰에 가 보기로했다. 망해정은 20리백사장 북쪽끝에서 바다로 뿌죽이내민 벼랑바위 위에있었다. 먼옛날 진시황 영정께옵서 저바다를 여기서 바라보셨다고 하는데 그때도 바다는 오늘처럼 아득하고 푸르렀으리…하지만 인간세상에서는 비장하고 장쾌한 희,비의력사가 도도히 줄기차게 흘러왔다.ㅡ

    손녀애의 지휘에따라 우리가 포즈를취하며 사진을찍고 록상을하느라 신이났는데, 누군가 나를부르며 왈칵 안겨왔다! 이게 누구냐?! 32년전에 헤여진 친구 문덕성이 아닌가!! 너무도 꿈같은 해후였다.

                                            1

    32년전 덕성이와 나는 고향인 작고편벽한 산골공사(향)에서 사업했는데 나는 중학교 교원이였고 덕성이는 공사병원 의사였다. 나는 북경으로 전근한후 인차 외국에나가 몇년간 사업하다보니 덕성이와 소식이 끊어졌다. 하지만 나는 덕성이를 잊은적이없다. 그와 나는 한마을에서 자란 죽마고우이기도하지만 그는 나의 구명은인이였다.

    문화대혁명중기, 반란파들이 공사당위서기를 투쟁하던 어느날 몇몇 맹장들은 그에게 몽둥이 매질을하였다. 그때 내가 뛰쳐나가서 그들을 막으며 시비를했는데 반란파들은 나에게도 가차없이 몽둥이를 휘둘러댔다. 그리고 책상위에 올려세우고 투쟁을했는데 얼마못가서 나는 쓰러지고 말았다. 장파렬이 됐던것이다. 덕성이는 급진수술을 서둘렀다. 단한명뿐인 수술실 동호사는 (병원 반란파대장. 별명은 똥호사뿅색발악단. 뿅ㅡ오입) 현병원에 넘기라고 내뱉고는 퇴근해버렸다. 200여리먼길, 교통수단도 구할수없는 상황에서(현병원 구급차는 고장났다고했다) 덕성이는 자기안해와(호사) 다른사람 둘을(내과의사와 호사) 데리고 나를 수술하였다. 덕성이가 아니였다면(그날 수술할수있는 의사는 그뿐이였다. 또 다른 수술할줄아는 조의사는 외지에 있는 집으로 갔었다.) 나는 그때 늙으신 부모님들과 젊은안해, 어린아이들을 남겨놓고 북망산의 일점분토가 되였을 것이다.

    덕성이는 아들네를 따라 2년전에 북경으로 왔는데 조양구에서 산다고하였다. 우리도 조양구에서 사는데 오늘에야, 그것도 여기서 이렇게 만나다니, 참으로 하늘의 조화라 하겠다… 그도 향항투자상이 지은 별장을 삿는데 우리것과는 서너동 건너서였다.

    한달남짓 지난후 덕성이부부와 우리부부는 별장으로 피서살이를 갔다. 어느날 우리두집은 점심밥을 잘 준비해가지고 망해정 저쪽에있는 너럭바위로 산보를나갔다. 그날 덕성이는 우리가 리별한후의 경력담을 죽ㅡ이야기하였다.

    그의 회고담은 나로하여금 사람의 인생과 량심을 두고 깊은사색을 하게했다. 거기에는 심오한 인생철리 같은것이 있는듯했는데, 그것은 캐고보니 결국은 매우 간단하면서도 명확하고 또 극히 평범한것으로서 우리가 어릴때부터 수없이 들어오던 “사람이란 량심을 바로 먹어야한다.”는 바로 그말이였다. 누구나 다 아는, 누구나 다 쓰는, 조상때부터 내려오는, 버릇이된, 잔사설과같은 바로 그말이였다. 그런데 그말이 그렇게 힘있는 진리인것을 덕성이 추억에서 새삼스레 느끼였다.

                                   2

    흘러간 인생을 돌이켜보면 내일생에서 가장 힘들었던때가 지나간 80년대초였다. 83년8월15일! 나는 정든고향을 아무런 미련도없이 집식구들을 이끌고 떠나버렸다. 그후로 나는 한번도 고향에 가지않았다. 보자는 사람도 없었거니와 보고싶은 사람도 없었고 볼일도 없었던것이다. 그곳은 아버지 어머니 고향이였고 내가 자란, 40여년 살아온 곳이다. 하지만 고향을 떠날때 아버지는 나에게 다시는 이곳을 돌아다도 보지말라고 하였다.

    짐과 여섯식구를 태운 트럭이 갈매산기슭을 돌아갈때 나는 그곳에있는 어머니의 묘소를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나를 부르며 손저어주는것만 같았다. 나는 저도모르게 눈물이 핑ㅡ돌았다. 자동차가 두개공사의 분수령인 하마느령(한많은령)을 넘을때 나의마음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이 령은 광복전에는 넘나드는 사람들이 울며넘는 울고개라고 했는데 후에는 그렇게 말하지않았다. 하마느령이란 주로 월급쟁이들이 만들어낸 말인데, 울면서 넘어오고 웃으면서 넘어가는 고개라고했다. 뜻인즉 궁핍하고 편벽한 산골오지로 가는것이 기막히고, 거기서 벗어나는것이 더없이 거뿐하고 기쁘다는것이였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67년5월초 나는 자청해서 도시에 붙어있는 공사병원으로부터 만삭이 된 안해를 이끌고 고향의 공사병원으로 전근해갔는데 그때 나는 희망과 포부로 가슴이 벅차고 설레였다. 의사사업을 잘 하여 고향사람들의 애대를 받으며 부모님 모시고 행복하게 살리라… 나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하마느령을 넘어왔다.

    그런데 오늘은 따지고보면 쫓겨가는 신세가 되였다. 17년세월이 두서없는 악몽 같았다. 서글픈마음이 한이없었다… 그러나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하마느령을 울며넘든 그날이 암과명의 분수령처럼 나의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으로 되였다.  

                                3

    덕성이부부가 우리공사병원으로 전근해 왔다는 소리를 듣고 나는 무척 놀랐다. 반가운것은 물론이지만 그의처사가 리해되지 않았다.

    우리공사는 작고 편벽한 산골오지지만 현의기구에 따라 있어야할것은 기본상 다 있었다. 베는 석자래도 틀은틀대로 10여개 기관과 단위들에는 근 200여명의 간부와 직원들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그 어느날 하마느령을 넘어가기를 바랐다. 산골을 벗어나 대처에 나가서 사는것이 그들의 공동한 소원이였다. 누가 전근해 나간다면 모두들 한없이 부러워했고 누가 전근해 왔다고하면 다들 은근히 아쉬워했다. 그리고 아마 무슨 불미한일이 있으려니 생각했다. 처음으로 안배받는 사람이 아니면 보통 대개가 착오진 사람들이기에. 고험과 단련차로 오는 간부도 전혀 없는것은 아니지만.

    덕성이는 병원숙직실에서 자면서 출근했는데, 만삭이 된 안해는 30여리 떨어진 산골마을 시집으로 갔다.(해산휴가) 어느날 나는 덕성이를 집으로 청하여 술잔을 나누었다. 그날 덕성이는 사업에 참가한후 오늘까지의 경과지사를 나에게 말해주었다.

                                                   4

    나는 덕성이 성미를 잘 안다. 덕성이는 단순하고도 아주 솔직하고 통쾌한 사람이다. 광명정대하다고 할가… 자기가 한일은 잘했든 못했든 했다고하며 남들의 시비도 모르는척 하는법이 없었다. 그는 외향형성격으로 마음이 수월했다. 양보하고 밎지고 손해를 봐도 대수로와 하지않았다. 맞지않으면 공개적으로 맞설뿐 음모궤계나 술수를 쓸줄 몰랐다. 그런데 그에게는 활량기가 있는것이 큰 흠이였다.

    덕성이는 어머니가 지병으로 계속앓고 집이 너무도 구차하여 대학에는 가지못하고 전업학교로 갔는데 서의전업을 졸업했다. 그는 최우수학생으로 졸업하다보니 학교문을 나서면서 직방 공사병원의사로 발령을 받았다. 우리현으로 분배된 13명졸업생에서 공사병원의사로 안배된 사람은 덕성이 하나뿐이였다. 다른동창들은 현과 진병원의 보조과실에 약제사 혹은 화험원으로 갔다. 덕성이가 간 공사병원은 우리현에서 꽤나큰 병원이였다.

    사업에 참가한 이듬해 초여름 덕성이는 창피하길 짝이없는 착오를 범하였다. 그것은 어느시병원에서 온 호사와 바람을 피우다가 들통이난것이다. 그호사는 작풍문제로 리혼을 맞은후 이 공사병원으로 쫓겨왔는데 바람기가 재발했든것이다. 그녀의 추파에 덕성이는 차츰 마음이 싱숭생숭해나기 시작했고 때로는 서로 지분거리기까지했다. 덕성이는 그때까지 련애한번 못해본 숫총각이였는데 그녀의 유혹에 걸렸든것이다. 어느날밤, 수술받은 환자집에서 덕성이와 그녀를 비롯해서 몇사람을 초대했는데 돌아올때 그녀는 덕성이를 자기하숙집으로 끌었다. 술기운에 열통이 커지고 탕개가 풀어진 덕성이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녀를 따라갔다. 하지만 정작 위험순간이 덮쳐오자 덕성이는 정신이 펄쩍들었다. 이녀자를 건드리면 안된다는, 큰일난다는 공포심과함께 수치감 자책감 자존심으로해서 그는 뛰쳐나왔다. 그런데 며칠후 서기가 그를 불렀다. 원장이 그날밤 일을 반영한것이다. 조사가 있자 호사는 덕성이가 자기를 강간하려 했다고 물었다. 덕성이는 사실대로 이실직고하였다. 2,3일지나서 서기는 덕성이를 데리고 공사당위로 갔는데, 당위서기사무실에는 표독스럽길 짝이없는 공사당위서기와 단서기 파출소소장 그리고 당위문서가 앉아있었다. 공사당위서기는 덕성이에게 류망행위와 강간미수행위를 승인하는가 안하는가 따지고 들었다. 덕성이는 사실대로 말한후 어떤처벌이든 다 받겠다고 하였다. 공사당위서기는 “나쁜놈새끼! 로실하지 못하군. 어디 감옥밥을 먹어봐라!”하고 을러메며 나가라고 소리쳤다. 이십여일 지난후 덕성이는 류단차간1년, 행정차간1년 처벌을 받고 현병원 외과에 림시로 전근되여 출근하였다.

    덕성이가 착오를 진후 현병원과 몇개공사에서는 서로 달라고 했는데 현위생국에서는 도시에 붙어있는 공사병원에 주었다. 그 병원 원장은 해방전쟁, 항미원조까지 갔다온 2등갑 잔페군인이였는데 부대에서의 급은 중대장으로 당원이였다. 중년의 사람좋은 그는 현병원으로 와서 덕성이와 담화까지하고 친히 데려갔다.

    후일담이지만, 덕성이가 착오를범한 그 공사의 당위서기와 병원서기, 원장 그리고 다른 몇몇 사람들이 바람쟁이호사와 치정관계가 있었는데 문화대혁명에서 그들은 모두 죽을 졸경을 치루었다. 특히 당위서기는 너무도 민심을 잃은 사람이였는데 그의 104개죄장에는 혁명적청년의사 문덕성이를 고의적으로 타격해서 전도를 망쳐놓았다는 조목도있었다. 당위서기는 개혁개방전까지도 정책락실을 받지못하고 걸려있다가 페인이되다싶이되여 퇴직해버렸다. 바람쟁이호사는 투쟁을 받다가 맞아죽었다. 후에 사람들은 당년의일을 가끔 잡담할때면 “량심 나쁜것들은 그래도 싸다.”고하였다.

                                           5

    덕성이는 새로운 단위에 간후 사업을 잘하여 호평을 받기 시작했다. 30여명 직원중에서 제일 나어린의사였지만 병진단을 잘하여 실력있는 의사라고 내외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몸이 가볍고 열정적이고 또한 겸손하고 성근했다. 그는 속이나 겉이나 다 같은, 수월하고 까다롭지않은 사람이여서 누구나 쉽게 접촉할수있었고 즉시 가까이 할수있어 다들 그를 좋아했다. 누가 방조를 부탁하면 대뜸 나섯고 간고한일에는 (하향, 농업지원, 외지공정판의사) 항상 앞장에섯다. 그는 총명하고 생기발랄했을뿐만아니라 창발력과 적극성이 높았다. 어떤일을 맡겨도 다 잘해내는 보배였다. 덕성이는 서의전업학교시절에 벌써 지구의 청년사회주 의건설적극분자로 되기까지했었다.

    여러사람들이 그에게 처녀를 소개해 주었는데 원장은 은근히 자기사위로 삼고싶어 하기까지했다. 그러나 덕성이는 자기허물 때문에 늘 망설이였다. 활달한 덕성이였으나 그에게는 마음이 수줍고 여린면도 있었던것이다.

    그러는중 병원에는 호사전업 처녀가 배치받아왔는데 인물체격은 두말할것도없고 성품과 행동거지에 나무랄데가 하나도없는 훌륭한 처녀였다. 소문에는 현병원 총호사장감인데 기층단련을 시키기위해 보낸 호사라고했다. 사람들은 그를 “큰집 맏며느리 감”이라고했는데 그의 별명이 어릴때부터 정말 그랬다고 했다. 처녀도 덕성이처럼 산골 가난한농민의 자식이였는데 그의어머니도 장기환자였고 아래로 동생은 여섯이나 있었다. 그에게는 대담하게 련애를 걸어오는 총각들도 여럿이였는데 중매쟁이는 그보다도 훨씬 더 많았다. 보다싶이 처녀는 훌륭했지만 덕성이는 아예 꿈도꾸지않았다. 그런데 웬일이냐, 이듬해 봄부터 처녀와 덕성이는 사랑을 속삭이게되였고 그해 결혼까지하였다.

    그들이 사귈때 위생국과 현병원에서 사업하는 어떤사람들이 처녀를 찿아오기까지 했는데 그들은 각자의 욕심에따라 덕성이와 사귀지 말라고 온갖 감언리설로 처녀를 구술렸다. 말하자면 반간을 한것이다.

    덕성이가 결혼해서 한달도 되지않았는데 현위생국으로부터 국장의 직접지시라고 하면서 덕성이를 머나먼 국방도로건설 공정판에 의사로 보내라고 했다. 병원원장은 이런저런 구실을 대며 보내지 않으려했으나 국장의 명령은 아주 군대식 그대로였다.(국장은 부대퇀급전업간부) 신혼부부는 괘씸죄에 걸렸던것이다. 그런저런 쪼간을 알수도 없었거니와 단순하고 수월한 덕성이는 뢰봉식으로 좋은면으로만 생각하며 혁명임무를 받들고 기꺼이 공정판으로갔다.(6개월)

    문화대혁명때 국장은 관료주의작풍이 엄중해서 호되게 뚜드려 맞았는데, 덕성이를 공정판에 보낸것도 자기의 관료죄장이라며 스스로 탄백했다. 그런데, 그 는 그 지긋지긋한 고역(투쟁)에서 얼른 해방받기위해 잔꾀를 썼는데 소위 덕성이건을 고도로 “깡과선”에(계급투쟁 로선투쟁) 올려놓고 잘, 본때스레, 심각히, 멋있게, 검사하느라 했는데 그만 재주를 쓰다가 메주를 쓰고말았다. 그는 판단실수로 말한마디를 잘못하는바람에 더욱 죽을고생을 했다. 그것은 신혼부부를 리혼시키려는 음흉한 목적에서 비렬하게 그랬노라고 거짓말을 한것이, 이쯤하면 로실하고 표현이 좋다고 좋은처리가 있으려니했는데, 웬걸! 혁명성과 상상력이 고도로 풍부하고 발달한 반란파들은 여기에 엄중한 “깡과선”상의 문제가 있다고 영명한 판단을 했던것이다. 왜서 리혼시키려 했는가?! 무슨 량심인가, 음특한 무엇이 있다. 솔직히 탄백하라!... 반란파들은 대뜸 국장을 가두어놓고 돌격적심문을 들이댔다. 국장은 현병원의 부산과 녀의사와 한차례 작풍문제가 있은것을 끝내 실토하고야 말았다. 전혀 뜻밖의 휘황한전과에 지대한 고무를 받아 사기충천한 반란파들은 물에빠진개를 끝까지 따라가며 족치는 혁명적기세로 맹렬한공세를 들이댔다. 전현 위생계통의 반반한녀자들은 모두 혐의대상이 되였는데 결국 국장은 “정말 그뿐입니다! 모주석께 맹세합니다!”라는 쪽지를 써놓고 새벽에 심문관들이 조는 틈을타서 뛰쳐나가 기차에 치여죽었다. 량심한번 잘못먹고 잔꾀로 거짓말을 한것이 엄청난 화근으로 될줄이야!...

    억울한 안건을 시정할때 국장의미망인은 전안조반란파들이 남편을 때려죽였다고, 자살현장은 위조한거라고 걸고들었는데 당사자들은 그걸 해명하느라, 사과하느라, 량해받느라… 똥줄을 갈기였다. 그들전안조 몇몇은 확실히 심보가 고약한 사람들이였는데 웬일일가, 후에 몽땅 이런저런 불상사를 당했다. 사람들은 “량심이 나빠서 그렇게 되였다.”고 했다.

                                             6

    덕성이는 효성이 지극한 사람인데 그의안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병원에서 입당적극분자였다.

    덕성이는 멀리 산골에 계시는 부모님들을 모셔오고 싶었으나 집을 해결할수없어 안타까워했다. 사정을 알게된 병원직원들은 호조금을 뀌워줬는데 덕성이는 그돈을 선불하고 외상으로 집을 마련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마을을 돌아보고나서 뜨직해하였다. 그는 그곳이 한뉘 살아온 정든 고향보다 여러모로 못해보였던것이다. 하여 덕성이는 만삭이 된 안해를 데리고 고향의 산골병원으로 전근했던것이다. 병원에서는 너무도 아쉬웠지만 효자의길을 막으면 안된다고하면서 보내주었다.

    현위생국혁명의원회에서는 의무일군이 몹시 부족한 우리공사에 보낼사람이없어서 걱정이였는데 덕성이가 자원신청을하니 얼씨구! 대뜸 비준하였다. 마침 그곳에는 또 전근시켜주지않으면 안될 딱한사정의 녀의사가 있기도 했던것이다. 그는 딸애를 데리고 십년넘어 남편과 떨어져 살고있었다. 원래 그의사는 덕성이가 처음으로 갔던 병원에서 사업했는데 늘 현위생국 국장(죽은국장)을 찿아가서 남편있는데로(심양) 전근시켜달라고 떼질을씼다. 국장은 수두룩한 대도리를 늘어놓으면서 비판도하고 설복도하고 사상교육을하면서 질질 끌기만했다. 그는 덕성이를 그곳에 안배하게 되자 그녀의사를 인츰 전근시켜 주었는데, 무슨심술이 발작을했는지 누구도 싫어하는 우리공사로 보냈다. 녀의사는 딸애를 데리고 울면서 하마느령을 넘어왔다고 했다. 덕성이를 보낸후 현위생국 혁명위원회주임은 그녀의사를 수년래의 갈망대로 제꺽 전근시켜 주었는데 뒤에서는 인차 퀴퀴한 말이 돌았다. 녀의사는 꿈인가, 생신가, 마음껏웃으며 하마느령을 넘어갔다. 좌우간, 덕성이는 그 녀의사에게 은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 .

                                       7

    덕성이가 와서부터 우리가 리별할때까지의 10여년의 그의일은 내가 잘 안다. 지어는 그보다 더 잘아는것도있다. 이런것을두고 방관자가 더 밝다고한다.

    뭐라고할가, 말하자면 덕성이는 오자마자 쉬털이를했다. 그것은 마치도 곡절많은 앞날을 예언하듯… 덕성이가 불운해서였는지, 아니면 아버지 어머니가 박복해서였는지…

    덕성이가 와서 딱 일주일만에 그의어머니가 갑자기 사망했다. 덕성이 어머니는 두통증으로 오래동안 앓으며 신체가 매우 허약했으나 아주 강단이 있는 분이였다. 그의어머니는 생뚱같이 괴사성장염이라는 병으로 이틀도 안되여 사망했는데 그해 년세는 겨우 마흔아홉밖에 안되였다. 날씨가 더워서 3일장을 했는데 덕성이는 울지못했다. 집안집할머니가 곡을하라고 직신직신다치며 눈치를 했지만 그는 너무도 억이막혀 울지못했다.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사업을 잘하며 귀여운 손군도 안겨드리며 재미있게 살겠다고 웃으며 하마느령을 넘어온 덕성이가 아닌가! 그런데 이런변을 당하다니… 울음도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나오는법이다. 사람들은 주어다키운 자식놈이여서 그랬을거라고 훗날 뒤공론들을 했지만, 덕성이를 투쟁할때 동호사는 그런 후론까지 쳐들면서 “무산계급사상각오니 감정이니하는건 아직 둘째로하고 최저의 인간도덕도 감정도 없는 짐승만도못한놈!”이라고 악착스레 비판했지만 그건 몰라서 하는 소리기도 하겠지만 우선은 악의에서 하는 말이였다.

    나는 덕성이를 잘안다. 덕성이는 어릴때부터 꼭 부모를 잘 모실거라 자주 말했다. 우리가 “장가가면 세간난다.”하고 우스개를하면 그는 정색해서 자기는 안그런다고 했다. 우리가 효자났네하고 놀리면 그는 정말로 “그래, 효자다!” 하며 대들었다. 그것이 그의 아이때 별명으로 되였다. 덕성이는 오직 부모님을 모시겠다는 단순한 그한가지 마음과 리유로 궁벽한 이곳으로 오지않았던가! 그는 외지에 있은 그몇년간도 나에게 자주 편지를 써서 부모님들의 안부를 물었고 관심을 부탁하군했다.

    덕성이 안해는 시어머니 장례날부터 산통이 시작되여 꼭 일주일만에 큼직한 아들을 낳았다. 무더위속에서 밤낮닷새나 앓고 그는 수레에 실려 공사병원마을로 왔는데, 소위 공사산실에서(농촌집, 주인어머니가 산파겸임) 이틀후 해산했던것이다. 덕성이안해는 후에 그때 꼭 죽는줄로 알았다고 몇번 말했다.

    대엿새후 시아버지가 수레를 가지고와서 며느리를 집으로 데려갔다. 시집에는 어린시누이가 있을뿐 도와줄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다행이 산모가 건강하고 아이가 무탈해서 휴식기가 끝나자 인차 출근할수있었다.(산가는50일)

    그사이 동호사는 호사가 왔다는게 명색뿐이라고 하면서 얼마나 투덜거렸는지 모른다. 그는 반란하려 뛰여다니며 병원일은 점점 뒤전이였다. 그때까지 그의 “병원홍색반란단”에는 영예의대장 겸 혁명전사로 동호사 혼자뿐이였다. 성명서 창의서를 붙이고 초모문을 걸었으나 입대신청자는 시종 한명도없었다. 하지만 동호사는 대련합을 실시할때까지 일년남짓 “부대”를 이끌고 전투를 견지했다. 사람들이 “똥호사뿅색발악단”(동호사가 친구의 발등을 디디고 약혼한것과 조의사와의 추문을 빗댄것)이라고 빈정거린 그 이름은 오래동안 계속 불리우며 화제에 남아있었다.

    안해가 출근하기 얼마전 덕성이는 수치스럽고 너절하고 미련하기 짝이없는 짓거리를 했다.

    그것은 본가로 놀러온 어떤녀자와(조의사의 하숙집 딸) 눈을 맞췄던 것이다. 그들은 초면이였는데 녀자가 하루에도 두세번씩 병원에 들락거리드니 며칠새에 면목이 익었다. 원래 환자와 의사는 쉽게 가까워지는 법인데, 녀자는 의식적으로 달라붙어 꼬리치며 추파를 던졌다. 당시 덕성이는 심리상태가 매우 허전하고 불안정했다고 하였다. 단순하고 데면데면하고 수월한데다가 활량기가 있는 덕성이는 녀자의 유혹에 재빨리 넘어갔다. 어느날오후 녀자는 병원으로 와서 밤에 강변버들숲으로 나오라고했다. 그런데 마침 그날 녀자의 남편이 왔다. 녀자는 남편이 아버지와 마주앉아 술을마이는 사이에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그런저런 상황을 알길없는 덕성이는 여러번 망설이다가 끝내는 음특한마음을 억제못하고 강변으로 가고말았다. 녀자는 덕성이가 오지않으니 집으로 돌아오다가 그를 만났다. 그들이 강변으로 가는데 녀자의 남편이 안해를 불렀다….덕성이가 병원숙직실에 경황없이 앉아있는데 녀자부부가 동호사와 함께 병원으로 왔다.(그들은 잘아는 사이임) 녀자는 자기가 강변에서 바람을 쐬고 집으로 들어오는데 덕성이가 자기를보고 볼일이 있다고해서, 그래서 뭐냐고 물으며 따라걷는데 남편이 불렀다는것이였다. 녀자의 남편은 그래, 볼일이 뭐냐고… 색을먹고 대들고 녀자도 정말 그게뭐냐고… 함께 달려들었다. 그날밤 직일로 왔던 중약제사(당원, 병원림시령도소조 책임. 성원에는 동호사와 당원인 녀의사1명. 생산지휘부라고도 했음)는 사태의 엄중성을 대뜸 간파하고 사건을 맡아나섯다. 덕성이는 녀자를 희롱하려는 더러운 심보였다고 단마디로 숨김없이 승인한후 자백서까지 썼다. 그는 몽땅 자기잘못이라고 했다. 중약제사는 비밀을 지켜달라고 “피해자”에게 사정한후 동호사에게도 절대로 소문내지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훗날 중약제사는 나에게 말하기를 “적당히 둘러댈것이지. 원, 그렇게 고지식 하다니…”하고 혀를 쯧쯧차며 덕성이를 역지못한(눈치무딘, 교활하지못함) 사람이라고 하였다. 녀자는 형부와도 간통한 소문난 바람쟁이였다. 그녀아래로 녀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들자매는 조의사가 그들집에 하숙할때 시시한 말이 많았다. 조의사는 이미 결혼한 젊은이로서 안해는 시가지에서 살았다. 후에 중약제사가 조의사에게 귀뜀하여 그는 숙소를 병원의 빈방으로 옮겼다. 덕성이에게 바가지를 씌운 그녀는 후에 젊은나이에 풍을 맞고 페인이 되였다. 량심이 나뽰던 죄값인지…

                                      8

    덕성이가 왔을때는 문화대혁명이 “주자파”잡기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동호사는 공사내 반란패거리10여명(남어지는 광대한 혁명적군중이라고 했는데 기실은 보수파였다.)과 뭉쳐다니며 생산대(촌민소조)대장, 대대(촌)서기, 기관, 단위의 책임자들을 투쟁하느라 여념이없었다.

    동호사는 우리공사에서 제일 먼저 반란을 일으킨 사람이다. 당시에는 그의 정치수평, 사상각오가 높다고 긍정했지만 훗날의 그의 인생을 보면 그런것이아니였다. 그는 보복과 입당과 출세(령도직위)를 위하여 발악하다싶이 기를쓰고 뛰였든것이다.

    그때 병원에는 의무인원은 여섯이고 행정인원으로는 원장과 회계가 있었다. 중년이넘은 원장은 군대전업간부로서(대위) 1등 을급 잔페였는데 모진 고생을 다 하며 자란 고아였다. 광복이 되자 해방군에 입대하여 싸우다가 조선인민군에 넘었는데 후퇴시기 부상을 입고 돌아왔다. 당과 정부에서는 로동기능을 상실한 그를 배려해서 어느진병원의 원장으로 안배를했다. 그런데 그는 어떤과부호사와 바람을썼던것이다. 하여 당내경고처분을 받고 우리공사로 왔는데 말하자면 정배살이를 온 셈이다. 그가 병원으로 왔을때에는 당원으로는 중년의 중약제사 한명뿐이였고 적극분자가 4명이있었다. 당원이3명이 안되기에 병원에는 소조도 두지못하고 그들두사람은 기관지부에 속하여 일반당원으로 조직생활을 했다. 문화대혁명 직전에 병원에서는 녀의사 한명이 입당을 했는데 그것이 동호사와 조의사에게는 참을수없는 타격과 수치였고 분통이 터지는 일이였다. 병원의 적극분자로서는 동호사와 조의사가 년한이 제일 길었는데 후배인 녀의사만 비준이 되였든것이다. 그후 원장은 병원당소조 조장벼슬을 겸하게 되였다.

                                          9

    문화대혁명은 동호사와 조의사가 분풀이를 하고 출세할수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동호사의 개성은 한마디로 말해서 이악스럽는데 승벽심, 질투심, 자고자대와 교만성이 특출하게 강했다. 그래서 군중관점이 나쁘다느니 단결이 나쁘다느니 했는데, 사실대로 말해서 그를 아는 사람치고는 곱다는 사람이 몇히 없었다.

    우리공사에서는 홍위병아이들이(초중에 둔 고중반아이들 30여명) 선참으로 일떠났다. 그들은 “파4구”(낡은사상, 문화, 풍속, 습관을 때려부쉬는것)에 재미가붙어 베감투, 옛날책,(족보도 있었음) 병풍을 들춰서 불태우고 량태머리처녀들을 쫓아가서는 머리태를 잘라놓았다. 그러다가 선생들께 대자보를 붙이기 시작했다.

    이에 힌트와 고무를 받은 동호사는 자기도 홍색반란단창립을 선포하는 한편 원장에게 대자보를 붙이기 시작했다. 공사내에서 확실히 그가 첫사람이였다. 하여 그는 문화대혁명 내내 반란파 원로 맹장으로, 가장 혁명적인 간부로 자처했고 자부했다.

    그의 대자보는 첯장부터 살기등등하고 혁명적이였다. “소위 원장이라는 주자파ㅡxxx 보아라!!!!! 대류망 너는 언녕 감옥에 가야할 놈이다!!!!! 류망죄장을 철저히 탄백하라!!!!! 우리 모주석의 혁명적홍색반란파들은 네놈을 무고한 녀자들의 배 위에서 끌어내려 릉지처참을 하고야 말겠다!!!!!” (당시 통용한 술어는 저 황제를 말에서 끌어내리리라 였다.)

    대자보를 붙인후 2ㅡ3일지나 그는 홍위병애들을 끌고와서 원장을 투쟁했다. 얼굴에 먹칠을 한후 한발이나 되는 고깔을 씌우고 목에는 개패와 헌 왕바신(겨울솜신)을 몇컬레 걸었는데 개패에는 대류망 대주자파 아무개라고 쓰고 뻘건잉크로 가새다리를 쳤는데 그건 총살한다는 의미였다. 그들은 원장더러 쭈그렁 양철바게쯔를 뚜드리게하고 그 박자에 맞추어 자기들은 신이나서 타도를 목청껏 웨쳤다. 성수난김에 골목골목을 돌기까지했는데 우리공사에서는 유사이래 처음으로 보는 놀라운 연출대였다.(어록노래를 부를때 원장이 박자를 맞추지 못하면 동호사는 훈계하며 시범을 보여줬다. 후에는 괜찮게 박자를 쳐 줬다.) 그들은 원장을 끌고 승승장구로 전공사를 시위류행을 했다. 우리공사에서 투쟁을 받은 사람은 병원원장이 첫사람이다.

    이때로부터 요물잡귀신(부농, 위만직원, 이런저런 허물이 있는 사람 등등)을 인신모욕을 꺼리낌없이 하며 투쟁하는 바람이 활발히 불기 시작했다. 매질도 마음대로 할수 있었는데 그것은 사상성, 혁명성이 아주 높은 구체적 행동으로 인정 받았다. 동호사는 관건적시각이면 구체적 행동을 했는데 그 선동력이 커서 효과가 좋았다. 동호사의 위신과 권위는 혁명투쟁중에서 재빨리 형성되여갔다. 그의 패거리(공사내 반란파들)중에서 아첨을 잘하는 어떤자들은 그를 섭원재라느니 강청 같다느니 했는데 사람들은 그를 경외(받들며 두려워함)하였다. 그런데 그건 표면적인것이고 내심으로는 싫어했다. 지어는 “때려죽일 간나새끼”라고했고, 앞에서 말한 그런 광채롭지 못한 명칭을 붙혀 주기까지 했다.

                                            10

    문화대혁명의 형세는 주자파 잡기에 계속 열을 올리면서 한편으로는 혁명위원회를 만드느라 갑론을박하기 시작하였다. 벙어리도 말할지경으로 군중들은 이미 대대적으로 발동되였는데 령도간부 처리에서 두가지 관점이 늘 첨예하게 맛섯다.

    령도간부를 때려치우고 탈권해서 자기들이 령도자리를 차지해야겠다고 날뛰는 자들은 홍색반란파라하고, 그들에게 이런저런 결점 혹은 착오가 있긴하지만 인민내부 모순이고 성적이 위주고 당을 따라 혁명을 하였고 하려는 간부라 할때는 단결, 비평, 단결의 방식으로, 과거를 징계하여 금후를 삼가케 하며, 병을치료하여 사람을 구하는 당의 일관한 조직원칙과 간부정책을 참답게 집행해야 한다고 즉, 령도강위에서 계속 사업하게 하거나 정황에 따라 적절한 정책락실을 하여 출로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보수파라고 하였다.

    그런데 두개파는 서로 자기만이 진정한 혁명파라고 우기며 호상 공격하며 지어는 사생결단으로 싸우기까지 했는데 그것이 바로 “문공무위”(도리로 공격하고 무력으로 보위)라는 것이다.

    덕성이는 확고하게 보수파의 관점이였다. 그는 두개파가 함께 령도간부를 비판, 투쟁하며 함께 결론하고 정책을 락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혁명위원회 구성도 모든사람들이 즉 군중성적으로 선거 결정해야한다고 력설하였는데 그것은 보수파들의 구미에 제일 들어맞았다. 덕성이는 보수파들의(기실은 광대한 군중) 지지를 받게 되였고 보수파지휘부의 고문역활을 하게되였다.

    보수파조직의 대장, 부대장들은 반란파들과 때로는 첨예하게 맞서자고 주장했다. 보수파조직상급의 지시도 그랬고 군중들의 정서도 반란파들을 “소멸”했으면 할때가 많았다. 그들은 반란파들의 과격한 행동을(붙잡고 가두고 때리는것 등) 행패질로 보며 증오했던 것이다. 덕성이는 보수파조직에서 무단적 행동을 하지 않도록 인도하는 한편 반란파들과 련합하기위한 담판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공사로부터 대대, 생산대와 기관, 단위의 생산지휘부 건립을 적극 협조하여 혁명과 생산을 틀어쥐도록 하였다. 당시 반란파들은 보수파조직의 책임자를 붙잡아 가두거나 때리며 위공(둘러싸고 몰아부치며 공격하는것)하는 짓거리를 몇번하였는데 격분한 보수파들은 이기회에 아예 반란파를 없애버려야 한다고 여러번 떠들었다. 그때마다 덕성이가 책임자들을 설복했다. 하여 우리공사에서는 그 흔한 무단적 충돌이 한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점을 후에 사람들은 모두가 그의 공로라고 인정해 주었다.

    공사내에서 덕성이 위신이 높아짐에 따라 동호사와 소위 공사독재지휘부(전안 조라고도 했음. 반란파들로 조직된것) 사람들은 그를 눈에든 가시로 보았다. 특히 한단위에서 덕성이와 밤낮으로 코를 맞대고있는 동호사는 그를 애비죽인 원쑤보다도 더 미워하고 증오하며 이를 갈았다. 덕성이는 전근해온후 얼마안되여 대뜸 원장과 병원군중들켠에 서서 사사건건 동호사와 맞서면서 애를 먹이는 것이였다. 병원안에서 동호사는 그야말로 고립되고 촌보난행이였다. 동호사의 눈에는 덕성이가 똥구덩속의 돌멩이와 같은 존재였다. 그는 덕성이 작풍문제를 폭탄으로 일격에 소멸해치우리라 작심했다.

    소위 공사전안조는 반란파들이 만든것인데 거기에는 중학교 교원3명과 동호사 그리고 다른단위의 반란파 3명 모두 일곱이였다. 그중에는 덕성이 소학, 초중 동창 두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덕성이 앞에서 늘 렬등감을 느끼며 그를 질투하였다. 그들은 동호사와 매우 친한 사이였다. 전안조는 때론 독재지휘부라고도 했고 때론 전안조라고도 했는데 누구를 잡아가두고 수색하고 투쟁하는걸 마음대로 결정하고 지휘했다. 사실은 공사내 “홍색반란단”의 지휘부였다. 사회적으로 반란파들이 득세하는 형세였으나 우리 공사에서는 진짜 반란파는 공사적으로 3,40명도 되나마나 했는데 행동대 주력은 홍위병 애들이였다.

    어느날 오후 덕성이가 병원에서 환자를 보고 있는데 홍위병대장아이가 아이들 서넛을 데리고 와서 독재지휘부에서 오란다고 했다. 덕성이는 일을 끝낸후 웬일일가 궁금해하며 공사로 갔는데 동호사와 두 동창이 회의실로 가자고 했다. 거기에는 일하려 나가지 않은 마을아낙네들과 아이들이 가득 했다. 사람이 워낙 거들먹거리길 좋아하는 동창이 개회를 선포했는데 공사군중독재지휘부에서 덕성이 비판대회를 지금부터 진행한다는 것이였다. 그야말로 말그대로 돌연 습격이였다. 우선 지금 까지의 착오를 전부 검사하라는 것이였다. 말하자면 남녀작풍문제부터 검사하라고 했다.

    그날 이후로 부터 덕성이는 반란파들이 만든 “9종인(문제인물)학습반”에 참가하게 되였다. 그는 동호사와 두 동창, 그리고 몇몊 사내들의(덕성이 안해를 은근히 넘보는) 눈에는 가시였지만 전공사 6천여명 사람들에게는 마치도 수령같은 인물이였다. 본인은 모르고있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믿고 따랐다. 지어는 존경했다. 그런데 순간에 그는 바람쟁이로 소문이 났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누구하나 그를 역성들수 없었고 들자고도 않했다. 보수파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못해하면서 혀를 끌끌차고 침을 뱉았다. 그때 사회풍기는 누가 오입을 했다고 하면 똥묻은 개보다 더 더럽고 너절한 인간으로 보았다. 동호사와 그의 친구들이 갑자기 덕성이 추행을 터뜨린 목적은 보수파들의 코대를 꺾어 놓으며 인간적으로 덕성이를 납작하게 만들려는데 있었다. 그들이 목적은 일거에 쉽사리 달성 되였다. 낯가죽이 두텁다고 할가, 아무튼 덕성이는 조금치도 위축되는 기색이 없이 문화대혁명에 계속 삐쳐 들었다. 머리를 숙이고 시무룩히 조용히 가만있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는 점점 더 동호사와 맞서고 반란파들과 맞섯다.

    소위 9종인학습반에는 공사당위서기, 공사사장 그리고 공사재량위원(위만시절 작은 목재판에서 회계를 한적이 있는 공사간부, 력사불청백 리유) 공사생산조리원(동생이 조선인민군고위급간부, 특무혐의) 림창의 령도(위만시절 철로호로대에 참가하여 총을메고 두어달 다리보초를 섯다. 력사불청백 리유)와 병원원장, 덕성이가 참가했다. 독재지휘부에서는 모주석 저작, 어록, 신문의 사론, “홍기”사론과 문장을 학습하고 자기의 죄장을 검사 교대하며 “깡과선”상에서 사상근원을 찿고 계급투쟁, 로선투쟁, 계속혁명 사상각오를 제고 하라고 하였다. 계급의 적이라면서 또 무슨 사상각오를 제고하라는것이 마치도 령도간부배양학습반 같기도 했다. 그덕에 덕성이는 말재간이 더욱 늘게 되였다. 밤낮 학습하고 대조를하며 검사를 해봤자 그것이 그것이고 별 희끔한것이 없었다. 진짜 독재건더기는 공사사장과 병원원장, 덕성이의 남녀작풍문제 뿐이였다. 그런데 그것 또한 아무리 “깡과선”에 올려놓아 봐도 도덕상 작풍상의 착오일뿐 형사문제도 아니고 적아모순은 더구나 아니였다. 다른사람들의 작풍착오는 조직에서 이미 결론한 오래전의 옛말이고 덕성이가 몇달전에 또 같은착오를 범한것이 제일 엄중한 문제이긴한데 그는 여러차례 비판 투쟁을 받았고 참답게 심각한 검사를 하였다. 너절한 짓거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때려죽일수는 없는일이고, 소위 혁명반란파로서 국가대사, 대방향을 틀어쥐고 혁명한다면서 남녀작풍문제만 들고 다니면서 열을 올린다는것도 광채로운 일은 아니였다. 사회상에서 뿐만아니라 반란파 내부에서도 덕성이를 두둔하는 여론이 돌기 시작했다. 덕성이가 잘못한건 번연한 것이지만 그럼 동호사는 어떠냐?! 자기친구의 남자를 가로채지 않았는가! 두집이 약혼식까지 치르고 당자들은 갈데까지 간걸 번연히 알면서도 동호사는 친구의 남자와 부부로 놀아났던것이다. 약혼은 두말할것도 없이 파혼이 되고 처녀는 지금도 정신이 온정치 못하다. 동호사는 친구의 남자와 정식으로 버젓이 약혼식까지 했는데, 공사당위부서기까지 올라갔던 남자가 남녀작풍문제로 곤두박질 할줄이야! 정절이 너무 엄중해서 남자는 당적, 공적을 모두 제명당하고 도루메기로 다시 농민이 되였다. 하지만 동호사는 파혼할 형편이 못되여 그들은 지금 애매한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동호사에게는 조의사와의 애매한관계 등 다른 퀴퀴부레한 뒷소리도 있었다. 우리공사에서는 문화대혁명이 화냥년놈을 잡는것이 중점이고 대방향이라면 동호사 문제도 “깡과선”에서 들춰봐야 할게 아닌가… 그리고 덕성이 두 동창이라는 작자들 밑구멍도 향기로운건 아니였다. 하나는 녀편네 궁둥이에 “깡과선”이 붙어있고(문화대혁명후 안해한테 리혼 당함.) 거들먹거리길 좋아하는 작자에게는 이것과 사귀다 저것과 사귀다 한 지저분한 련애사가 있었다.(문화대혁명후 죽었다.) 이러루한 추문은 웬일인지 사람들의 흥미를 쉽게 끌어서 여론이 술렁술렁 끓기 시작했다. 그시기에 “똥호사뿅색발악단”이라는 우습고 치사한 별명은 더욱 공개적으로 보급 사용 되였다. 눈치빠른 독재지휘부에서는 “9종인”학습반을 걷어치우고 덕성이를 풀이 주었다. 그사이 그들은 대비판대회 투쟁대회에 산과녁으로 끌려 다녔고 생산대에가서 로동개조를 하는등 갖은 모욕을 당했다.

                                           11

    대방향을 틀어 쥔다면서 두개파의 예봉은 다시 각급령도에 집중 되였다. 령도 한사람을 놓고 두개파가 만든 죄장이 달랐고 따라서 처리의견도 물론 달랐는데 누가누구를 설복할수 없었다. 그때에 마침 대련합을 하라는 모주석의 지시가 내려오고 빈선대(빈하중농 모택동사상 선전대), 군선대(해방군 모택동사상 선전대)가 대대들과 기관 단위에 진주 했다. 그런데 그들은 대련합을 좌파에게 통합하는 것이라고 인정하고 선전했는데, 우리공사의 좌파는 “홍색반란단”이라고 했다. 보수파들은 삶은 소대가리가 웃다가 꾸레미 터질일이라고 코웃음을 쳤지만 반란파들은 기고만장해지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보수파들은 선전대와 맞서서 따지고 들었는데 사태는 날따라 험악해 지었다. 보수파 두령들은 “선전대고 나발짝이고 쫓아 버리겠다!”고 하면서 행동안을 짜기 시작했다.

    어느날 밤, 반란파들은 반동로선을 숙청한다면서 보수파의 대장과 덕성이를 밤중에 돌연습격으로 붙잡아다 투쟁대회를 하였다. 그들은 련 삼일밤 “검은두목”의 류독을 청산한다면서 투쟁대회를 했는데 마지막 날에는 홍위병 맹장 아이가 뛰쳐나와 손전지로 보수파대장의 머리를 깠는데 선혈이 랑자하게 흘렀다. 분노한 보수파들은 수천명이 몽둥이를 들고 공사마을로 몰려 들었다. 공사건물을 차지하고 있던 반란파 지휘부 성원들은 재료보따리를 싸들고 어데론가 도망쳐 버리였다.

    보수파대장과 덕성이는 군중들을 학교운동장에 집결시키는한편 빈선대와 군선대 책임자를 찿아 군중과 접견할것을 요구 하였다. 선전대 책임자들은 그렇게 할수 없다고 나누웠는데 덕성이가 “당신들은 모택동 사상을 선전하려 오지 않았는가, 지금 저 군중들에게 대련합을 선전할 좋은 기회가 아닌가, 인신안전은 우리가 보증 한다.”고 재삼 설복해서야 대회장으로 갔다.

    대회에서 덕성이는 요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여러분들이 아다싶이 나는 창피히기 짝이없는 허물이 있는 사람이다. 금후에는 없을것이니 믿어달라. 우리는 모택동 사상을 완정하게 정확하게 체득하고 실천에서 활용해야 한다. 우리는 다 같은 군중이다. 두개파의 갈등은 사실상 인식상의 차이다. 호상 교류에서 능히 해결될 것이다. 대련합 형세에 주동적으로 적극 나서자. 우리는 혁명적군중이 아닌가!...”

   그의 발언은 눈앞이 환하게 하였다. 사람들은 “참! 인물이다!”하며 찬탄을 금치 못해 하였다. 덕성이 위신은 다시 회복되여 갔다.

                                          12
   
    그후 인차 선전대 책임자들은 바뀌고 공사의 “혁명을 틀어쥐고 생산을 촉진하는 림시 지휘부”가 성립 되면서 두개파는 사라졌다. 지휘부는 비교적 온당한 사람들로 구성 되였는데 그들은 현 혁명위원회(얼마전에 성립)의 지시와 선전대의 방조를 받으며 주로 두가지 일을 하였다. 한개조는 혁명을 틀어쥐였는데 당면의 급선무는 간부정책을 락실하며 혁명위원회를 내여오는 것이고 다른 한조는 생산을 틀어 쥐는 것이였다.

    두어달 지나 간부들 문제는 전부 락실 되였는데(병원은 제외) 모두 좋은간부로 결론되고 각급 혁명위원회 책임자로 되였다.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몇년을 올리뛰고 내리뛰며 주자파를 잡아내는 혁명을 하였다는 반란파들만 머슥하게 되였다. 자기들의 심술사납고 비뚤어진 량심만 내여 보인셈이 되였다. 그러나 누가누구를 비웃지는 않았다. 후에 사람들은 “세월이 환장했는데 사람이 온전할수 있나.” 하고 대범히들 말했다. 하지만, 비판 투쟁을 당한 사람이나 기를쓰고 투쟁을 한 사람이나 그리고 구경한 사람들도 나름대로 인생교훈을 얻은것만은 사실이리라.

    덕성이만 보더라도 그후로 부터는 시시한 소리가 더는 없었다.

                                            13

    공사병원은 직원이 아홉밖에 안되는 작은단위 였으나 공사적으로 제일 유명한 “로다난”(문제꺼리)단위 였다. 빈선대가 두사람이나 들어 갔다가 손들고 나온후 군선대가 들어 갔는데 그는 어린 한족청년이였다. 반장인가하다고 했는데 문화수준이 낮은데다가 언어장애로(병원직원들은 한어를 거이 못했다) 작용을 별로 발휘하지 못했다. 매일 오후 반날을 떼여 회의를 했는데 그는 모주석어록과 림표어록을 떠듬떠듬 몇토막 읽고는 자기말을 한바탕 했는데 누구도 알아 듣지 못했다. 동호사와 조의사 그리고 덕성이가 한어를 대충 얼버무리긴 했으나 자기의사도 바로 표달 못하는 상황에서 번역원질 한다는건 더욱 어려운일이였다. 게다가 한사람이 한개부문씩 맡다보니 환자가 오면 회의를 제대로 할수 없었다. 군선대 동지는 그런때를 오히려 더욱 좋아하는것 같았다.

    대련합후 사상인식 통일을 위하여 첯보조로 학습단계를 놓고 다음은 자기의 패성을 검사 비판하는 단계인데 두달이 지나도록 공사병윈에서는 땅뗌도 못하고 있었다. 륙속 각급 혁명위원회가 세워지자 군선대는 가버렸다.

    공사혁명위 원회에서는 소학교혁명위원회 부주임(녀. 말을 잘했다. 후에 작풍, 경제문제로 철직)을 공작대로 병원에 들여보내고 뒤에서는 내가 책임지게 했다.(나는 그때 공사혁명위원회에서 혁명을 틀어쥐는조에서 사업했다. 일명 떠, 피, 개ㅡ”투쟁, 비판, 개혁” 판공실이라고도 했음) 병원은 원장을 빼놓고는 모두 지식분자들이여서 원래 말을 잘하는 데다가 벙어리도 말하는 말대혁명(대변론 대비판) 단련까지 몇년 거친지라 한사람이 언권을 쥐면 반나절씩 말하였다. 그러고도 한결같이 “우선 여기까지 간단히 말한다.”고 했다. 특히 동호사와 조의사는 리론수평과 사상각오, 웅변기교를 시위하듯 어록과 사설의 단락을 넣어가며 기막힌 대론을 내리 풀었다. 이렇게 하다가는 학습단계가 언제가야 끝이날지 부지하세월이였다.

    녀교원은 수심이 가득낀 얼굴로 나에게 정황회보를 하였다. 인식을 적극적으로 발언들 하라고 해놓고 시간이나 차수를 제한 할수는 없고…남의 말을 듣고도 또 새인식이 나오고 인식은 새록새록 자꾸 나오고 높아만 가는데, 그건 기꺼운 신생사물이지만 운동의 진도상… 어떻게하면좋겠는지…지시해 달라는 것이였다. 이 녀교원은 소동작 (고자질)을 곧잘하며 남의 발등을 잘 디디는 수단이 있기에 조심해야 했다. 그와 동호사는 반란파 전우로서 “나는 녀교장!” “나는 녀원장!” 하며 서로 뽐내며 고무하던 사이였다. 나는 그의 사업성과를 잘 춰준후 한사람에게 반날씩 발언시간을 주면 한번 발언시간이 충족하겠냐고 되물었다. 그는 한번시간은 되겠지만 이튿날 사흘날 계속 발언을 요구하는데 거기에 대해서는…하고 물으며 문제를 나에게 도로 넘기였다. 만약 내가 발언을 적당히 제한 하라고 하면 어떤 말썽을 초래할지 모르는 일이다. 나는 구두상의 발언은 이제 반날씩 더 하고 남어지는 서면상발언으로 하라고 지시했다.

    한달 거이 지나 학습단계는 아쉬운대로 끝났는데 서면발언은 동호사와 조의사가 오히려 제일 적었다.

                                            14

    다음은 “뚸쓰피슈”(사심을 투쟁하며 수정주의를 비판)와 결부해서 자기의 패성을 비판하고 단결을 제고하는 계단인데 처음부터 긴장한 분위기 였다.

    역시 사단은 동, 조가 일으켰다.

    그들은 문화대혁명에 대한 자기의 고도로 높은 사상각오와 인식을 반나절 말한후 자기가 한 모든 행동들이 모주석의 무산계급사령부를 바싹 따른, 모택동사상과 혁명로선에 충성한 가장 정확하고 혁명적인 것이였다고 “검사”하였다. 그러면서 락후한 사람들의 파괴와 저애력과 견결한 투쟁을 진행한것이 자산계급패성이였다고 어처구니도 없는 발언을 하였다. 그말을 알아듣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는가. 격분한 사람들도 분분히 앞다투어 그런식으로 발언했는데 이거야말로 서로 빗대고 공격하기 였다. 패성을 비판하고 단결을 제고하기위한 학습반은 되려 패성을 추켜들며 분렬을 조장했다. 마치도 문화대혁명 초기로 되돌아 간것만 같았다. 발언은 점점 첨예해 지면서 변론으로 치달았다.

    녀교원은 또 나한테로 달려와서 대책을 상론하였다.

    나는 격동과 감정충돌을 제지하면서 사실을 내놓고 도리를 따지는 방법으로 충분히 변론하게 하라고 하였다.

    모순은 폭로해야 해결되는 것이다. 만약 혁명이라는 외의속에 불순한 동기와 사심이 숨어 있었다면 폭로하고 개조해야 한다. 사심을 가지고는 혁명을 잘할수없고 자신도 좋은 사람으로 될수없는것이다. 사람이란 량심이 나쁘면 남을 해치게 되고 자기도 좋을수 없는법이다.

    원장을 투쟁한 일련의 작법과 덕성이를 돌연적으로 투쟁한 사실, 그리고 다른 반란행동들은 동호사가 아무리 궤변을해도 그의 난처한 처지를 개변할수없었다. 변론할수록 그의 본질만 발가져 나왔다. 사람들은 동호사를 꺼리며 싫어했다. 그와 호흡이 맞는 조의사도 표면상에서는 거리를 두었다.

    문화대혁명 전 기간 조의사는 두 파 사이에서 계산적으로 행동하였는데 자대는 누구에게도 인심을 잃지않으며 자기위신을 높히는 것이였다. 하지만 원장과 공사당위서기에 대한 그의견해는 동호사와 똑 같았다. 오직 동호사처럼 공개적으로 표면에서 날뛰지 않았을 뿐이다. 그는 음으로 양으로 기회만있으면 자기는 어릴때부터 가정성분(상중농)때문에 눈치를 살피며 언행을 무척 조심해서 나쁜일을 하지않았다고, 의식적인 노력으로 늦긴했이도 소선대, 청년단에 들었고 수년간 꾸준히 당을따라 당원표준으로 살아왔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퀴퀴한 소문에 대한 방패막이와 자아변호라는것을 사람들은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가 음특하고 의뭉한 사람이라는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지만 동호사처럼 미워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동호사나 그처럼 확실하지않은 남의 치부를 기어코 캐려고 하지않았다.

    어느날 내가 덕성이에게 동호사, 조의사에 대한 시시한 소리는 나오지 않는가고 물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

    “그사람들이 나를 제일 비판했는데…그럴수있나. 혹 어떻다해도 조용히 교육할 일이지…”

    두달남짓 옥신각신한 끝에 이 계단을 대충 끝내 버렸다. 얼마후 공작대 녀교원도 철수해 버렸다.

    병원의 혁명과 생산은 다시 령도소조에서 맡아 안았는데 소위 조장인 중약제사는 동호사와 조의사의 지휘에 따라 움직이는 허수아비였다. 병원의 권력은 사실상 동호사와 조의사의 손에 들어갔다.

    혁명위원회를 건립하기 위하여 원장에 대한 정책락실을 진행하게 되였는데 동호사와 조의사를 비롯해서 네사람은(중약제사와 당원 녀의사) 철직을 주장했고 덕성이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그의 직무를 회복할수 있다고 인정하였다. 동호사네들은 원장과 입당한 녀의사를 작풍상에서 어떤문제가 있다고 걸고드는 한편(녀의사의 입당을 왜서 동의했는가?) 원장이 조선전쟁후퇴당시 력사가 의심스럽다고 따지고 들었다. 중상을 입고 홀몸으로 두달이나 적후를 돌다가 빠져 나왔다는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라고 했는데 그들은 원장을 적의 특무일수도 있다고 했다. 그야말로 기발한 상상이였다. 이런 상황에서 공사혁명위원회에서는 병원의 계급대오청리를 먼저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계급대오청리란 자기의 성분, 사회관계, 력사를 똑똑히 밝히고 결점과 착오를 철저히 교대하고 계듭투쟁, 로선투쟁, 계속혁명 사상각오를 제고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전민정풍이고 적아를 분명히 계급대오를 정돈하는 것이다. 방법상 적발, 질문, 비판, 조사, 증실을 동시에 모두 사용할수 있었다. 그리고 한사람 한사람씩 고비를 넘어야 했다. 병원은 직원이 아홉밖에 안되는 작은 단위였으나 몽땅 외지조사를 해야했고 어떤문제는 이렇다 저렇다 결론할수 없어서 걸어두는 수밖에 없었다. (4인패가 멸망된후에 몽땅 없던일로 흐지부지 싱겁게 취소되여 버렸다.) 례하면 원장의 후퇴시기력사,(특무혐의) 로중의사의 해방전력사(일본, 한국, 중국 길림시 부근에서 해방전에 살았는데 일본, 남조선, 국민당 특무혐의) 그리고 덕성이 신상 수수께끼였다. 성분, 사회관계에 어떤 문제가 있겠는지… 혁명자로서 무산계급 경각성과 투쟁성을 높혀야 한다고, 덕성이력사를 까다롭게 캐고든 사람은 동호사와 조의사 그리고 다른 한 입당적극분자호사(얼마후 남편있는곳에 전근. 조의사와 관계애매. 몇해후 남편이 남녀작풍문제로 감옥에 가자 리혼을 했는데 정신이 나빠졌음.)였다. 그야말로 강생, 강청식 사고방식과 수법이였다. 특히 동호사와 조의사는 자기의 리익에 방해된다고 인정되거나 어떤일로거나 혹은 공연히 밉게본 사람은 기어코 타격하고 배척하려 했다. 덕성이와 중의사는 다른사람들과 함께 원장의 복권문제로해서 그들과 첨예하게 맞섯을 뿐만아니라 입당심사시(군중들도 견해를 말하게 했은.) 반대발언을 했든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들에게 미운털이 박혔지만 덕성이와 중의사는 눈에든 가시였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틀어쥘만한 쪽지가 있었든 것이다. 하여 원장까지 그들 셋은 계급대오청리에서 소위 “력사문제”에서 관을 넘지못하고 걸려 있게 되였다.

                                                  15

    이악스런 동호사와 음특하고 의뭉스러운 조의사는 덕성이를 될수록이면 하찮은 인간으로 폄하하려고 애를썼다. 그들은 덕성이를 일본애라느니 술집간나가 낳은애라느니하며 그의 두 동창 등 사람들과 이미전부터 후론을 많이하며 비웃어왔는데, 계급대오청리가 시작되자 덕성이 력사를 철저히 밝혀야 한다고 정식으로 들고 나왔다.

    하여 나는 사람을 파견하여 그의 아버지 한테로 가서 증실재료를 받아오게 하였다.

    그의 아버지 말에 따르먼 덕성이는 조선 회령읍 사동에서 1943년에 태여났는데 생모는 쏘련으로 간다고 했고 생부모들은 항일하는 사람이라는 한마디 말밖에는 들은것이 없다고 하였다. 해산한지 두주일이된 덕성이 생모는 반듯하고 고운 젊은여자였는데 얌전하고 품위가 있어 보였다. 그는 덕성이 부모에게 아이를 훌륭한자식으로 잘 키우길 진심으로 축원한다고 단 한마디말 밖에 하지 않았다. 당시 덕성이 아버지는 사동에 있는 작은야장간에서 일했다. 그는 늦장가를 간데다가(가난때문에) 아이를 련이어 둘이나 다 잃고 세번째 애도 백후로 잃은지 얼마 안 되였는데 사람들이 불쌍한 애를 하나 키우면 훗날이 좋다고 권고한바도 있지만 그때 덕성이 어머니는 마침 젖이 철철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사동장마당에서 오구랑죽장사를 하는 할머니를 통하여 아이를 영영 가진다는 전제로 덕성이를 안아왔던것이다. 덕성이 생부모에 관해서는 오구랑죽장사할머니가 잘 알 가능성이 많지만 덕성이 부모들은 거기에 대해서는 구태여 알아두려고 하지않았고 비밀을 철저히 지키자는 다짐만 하였다. 덕성이를 안아온후 소문이 나지않게하려고 그들은 인차 조선 무산읍으로 이사를 갔다. 거기서 덕성이 아버지는 무산철광에서 날품을 팔며 살다가 광복이 된 이듬해 이듬해 중국 처가마을로 고향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또 억지공사로 떠미는 이주민으로 멀리 갔다가 다시 처가마을로 돌아왔는데 그때는 덕성이 앞가슴에서 붉은넥타이가 팔랑팔랑 날릴때였다.

    오랜세월 모진가난과 고생속에서 덕성이 어머니는 을병이 들어 마르고 허약해서 할머니처럼 늙었고 덕성이는 또래들보다 머리통 하나는 작고 까무잡잡했다. 그러나 몹시 령리하고 귀여웠다. 덕성이 부모들은 덕성이아래로 또 아이를 셋이나 잃고 끝으로 딸애 하나를 키웠는데 훗날이 좋다던 말이 맏는다고 해야할지, 틀린다고 해야할지… 어쨌든, 가난이 원쑤인것만은 사실이다.

    덕성이 외할아버지는 외손주가 귀여워서 하는 소린지 아니면 찌뿌둥해서 그러는지 쩍하면 “일본노무새끼 같은게”하고 말했는데 집안에서만 하는 소리를 부실한 그의 막내딸이 밖에 나가서도 그렇게 말했다. 마을사람들은 그저 애를 욕하는 소리겠거니 했을 뿐이다.(그때는 그런말로 욕을 잘했다.)

    우리가 초중학교를 다닐때부터 위에서 말한 두동창과 몇몇애들이 (그들은 모두 다른마을의 애들이였다.) 덕성이를 “일본새끼”요 “술집간나새끼”요 하고 놀려 댔는데 우리 생각에도 그건 너무 지나친 롱담이고 모욕적인 것이여서 다른 친구들은 그러지 않았다. 우리마을에서는 어른들로부터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덕성이를 “얻어온 애”라고 의심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어느때 내가 부모들께 덕성이에 대해 물으니, 그이들은 벌컥 성을 내면서 그런 미친소리를 누가 해?! 싱싱 자라는 애를 누가 그렇게 더렵혀?! 하며 되려 나에게 욕사발을 퍼 붓는 것이였다. 덕성이는 쾌활한 성격이여서 친구들의 그런 놀림을 근본 탄하는 법이 없었고 전적으로 롱담인줄로 알았다. 우리도 전혀 믿지않았다.

    덕성이 부모들은 량심이 바르고 선량하고 마음씨가 무던한데다가 아버지는 침구와 토방법을 퍼그나 알아서 마을사람들을 열두밤중이라도 곧잘 도왔으며 어머니는 바느질, 음식솜씨가 좋아서 역시 마을사람들의 일손을 자주 방조했다. 덕성이네는 마을인심이 매우 좋았다.

    덕성이 부모들이 그토록 고생하며 애를 쓰고 지켜온 비밀이, 30여년이 지난 지금에와서 동호사와 조의사에 의하여 덕성이 “력사문제”로 불거져나오며 만천하에 폭로될줄이야!... 참으로 맹랑하고 어처구니가없는 일이였다. 참으로 고약한 심보였다.

    덕성이 부모는 진짜고농인데(중국에 온후 부농집 땅을 소작했다.) 그들이 안아다 애지중지 줄곧 지금까지 키워온 핏덩이 아들이 그래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생부모가 만약 친일파거나 특무, 지주, 자본가라면 덕성이도 계급의 적이라는 말인가… 자기들의 상중농성분에 대해서는 분자(부모)와 자녀(자신)를 절대 혼돈하면 안된다고, 부모가 반동이래도 자식은 혁명자일수 있다고 얼마나 말 잘하던 그들이였든가... 그들의 심보는 “력사문제”라는 정정당당한 제목을 가장 혁명적인 어구로 표달해서 자기들의 높은 혁명적사상각오를 표현함과동시에 작풍문제까지 겯들어 밉살스럽길 짝이없는 덕성이를 기껏 똥칠해 놓자는 거기에 있었다.

    문화대혁명이라는 대기후가 량심이 바르지못한 어중이 떠중이 야심가들에게 활무대를 펼쳐주었다면 계급대오 청리는 그들이 마음껏 사람잡이 기량을 한바탕 발휘할수 있게, 야심실현에 박차를 가할수 있게 또 한 막을 마련해 주었다.

    동호사와 조의사는 덕성이 아버지의 증실은 제집식구가 한 것이여서 무효라고 주장했는데, 통일적 결론을 도무지 내릴 방법이 없었다. 참으로 코막고 답답한 노릇이였다. 당시는 특무요 지하당이요 하면서 누가 계급의 적인가해서 반란파들 끼리도 눈에 쌍불을 켤때였다. 덕성이는 착오가 있는데다가 의심스러운 인물로까지 되여 걸려있는 수 밖에 없었다.

    어느한번 회의에서 조의사는 덕성이를 비판방조한다면서 “필요없이 젊은여자의 젖가슴에 청진기를 대고…곁에있는 내가 다 어떠하고 아짜아짜 했다… 나는 늘 덕성이를 강변에 내 놓은 아이처럼 시름놓지못하고 근심하게 된다.”고 아주 형편없는 사람으로 못박아 놓으면서 멸시하고 자신을 슬쩍 분칠했다. 그날 덕성이는 역겹길 짝이없고 분통이 치밀었으나 꾹 참았다. (당신이 그토록 극진히도 나를 생각해 왔는가. 지금까지 모르고 있어서 미안하다. 내가 언제 필요없는 청진을 했는가. 당신 참으로 말과같이 음특하고 의뭉한 사람이구만. 아니, 엉큼하고 능청스럽군.) 그후 어느날 조의사는 회의전 몇사람이 있는 좌석에서 밑도 끝도없이 덕성이 안해 이름을 부르며 “오늘밤 나한테로 오너라. 우유를 한고뿌 먹여 줄게.”하고 추잡한 롱담을 하였다. 그들 사이는 년령차이도 차이였지만 그런 육담은 말할것도 없고 보통의 우스개도 원래부터 하는 사이가 아니였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무안과 창피로해서 덕성이 안해는 얼굴이 빨개서 어쩔바를 몰라했다. 그는 어질고 말주변이 퍽 약한 여자였다. 인차 회의는 시작되고 롱담은 이상한 여운만 남기였다.

    며칠 지난후 동호사는 덕성이 안해에게 긴히 생각해주는 친절성을 무등 보이면서 덕성이는 너무도 너절하고 여지없는 사람이여서 당초에 짝이 안되니 “걸려있는” 이때에 리혼하고 새출발을 하라고, 좋은 사람이 있으니 소개해 주겠노라고 하였다. 그때에야 정신이 번쩍든 덕성이 안해는 “당신들! 시시하게 놀지 말라. 우리는 당신들을 언녕부터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하고 면박을 주었다. 그때 덕성이는 대대로 하향 나가 있었다. 덕성이 안해는 이런 사실을 우리부부에게 말하면서 매우 격분해 하였다. 훗날 내가 덕성이에게 그 너절한 사람들을 가만 놔 두엇냐고 물으니 덕성이는 대답하기를 “ 그따위를 뭘!... 그보다 나는 내 허물이 너무도 후회 되였네.”하는 것이였다.

                                16

    중의사에게 3국특무 혐의를 제일 처음으로 창조발명해서(기실은 창조발명도 아니다. 중앙문화대혁명령도소조 강생 강청과 형제반란파들 한테서 배운것이다.) 덮씌운 사람도 동호사와 조의사였다. 중의사도 그들의 입당심사에서 “바른소리”를 했던 것이다. 동호사와 조의사가 너무도 끈질기게 달려들자 중의사도 그만 악이 나고 말았다. 너희들이 쩍하면 얼토당토않은 궤변으로 사람잡이를 하는데 누군 몰라서 가만있는가. 어데 한번 맛 좀 봐라! 중의사는 이런 반발심으로 어느날 밤 회의에서 조의사의 가정성분과 력사를 다시 심사해야 한다고 맞공격을 들이댔다.

    “조의사가 제입으로 말말간에 장을 비는식으로 은근슬쩍 자주 말해온바지만, 쬐꼬만 애새끼때부터 눈치보기를 하며 살아왔다고 하니 절대루 간단한 사람이 아니다. 누구의 눈치를 살피였는가? 왜서? 어떻게 살피였는가… 이런 사람은 속에 꼭 꺼리고 원망하는것이 있고 야심과 음모가 있다. 속에 꺼리낄것이 없는 광명정대한 사람은 누구 눈치보기를 할 필요부터가 없는것이 아니겠는가! 잘못이 있어도 다 털어놓은 사람은 발편잠을 잔다. 내가 보기에는 문선생이 그렇다. 무슨 지하당에 들었는지 무슨 퀴퀴한 노릇을 했는지 알게 뭐람. 흥! 조의사 같은 사람은 속을 알수없다. 믿기 어렵다….”

    워낙 말을잘하는 중의사가 한바탕 내리 엮으니 반박할 재간이 없었다. 귀에걸면 귀걸이고 코에걸면 코걸이가 되는 이런궤변을, 게다가 몇사람이 맞장구를 치며 함께 우기기만하면 누구를 잡아 족치기에는 충분한 그때 그 세월이였다. 그는 조의사에게 먼저 시비를 걸어 문제를 만든후 동호사도 납작하게 만들어 놓을 작정이였다. 그에게는 그럴만한 자신이 있었든 것이다. 하지만 중의사는 독불장군으로 구류소로 쓰는 빈집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병원에서는 련속 3일밤 중의사 대 조의사, 두 입당적극분자(동호사와 다른호사) 가 한편이 되여 치렬한 변론을 하였다. 원장과 덕성이를 포함해서 다른 사람들은 지지도 반대도하지않고 하회를 지켜보았다. 중구난방으로 중의사는 궁지에 몰려 비판투쟁을 받게 되였다. 동호사와 조의사는 애비벌되는 중의사에게 마구 해라를 하며 멱살을 잡아 흔들고 귀통을 치기까지 했다. 그들은 마치도 마친사람이 광기를 쓰는것 같았다. 끝내 그들은 “위대한 계급대오청리운동을 교란 파괴하였다!” 는 현행반혁명죄장을 씌우고 자칭 혁명을 주관한다는 동호사가 궁둥이에서 불패소리 나게 뛰여다니드니 공사혁명위원회주임(공사당위서기. 어느 진 홍색반란파총지휘 였음. 훗날 녀지식청년 동호사 등 수명의 여자들과 작풍문제로해서 감옥에 갔음) 과 숙덕거린후 중의사를 구류소에 집어 넣고야 말았다.

    사태가 이렇게 돌변하자 덕성이 등 군중들이 떠들고 일떠나 그들과 대항하게 되였는데, 병원의 혁명과 생산은 란장판이 되고 전공사 여론이 왁자하게 되였다. 십여일후 현의 공작조가 와서 중의사를 석방하고 병원을 종전대로 돌게 하였다. 하지만 누구를 잡지도 비판하지도 않았다. 일장풍파는 평정 되였지만 병원은 더욱 “로다난”(문제꺼리 애물단지)단위로 되여버렸다.

    후에 중의사는 그때 너무도 억울하고 원통해서 죽을생각까지 하였다고 하였다. 소학교에 다니는 어린애가 밥을 날라 올때면 그것처럼 가슴 터지는 일이 없더라는 것이였다.

                                     17

    공사병원은 자체로 자기문제를 해결할 가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할것인가?... 공사혁명위원회에서 한창 속을 태우고 있는데 우뢰소리같은 회소식이 전해왔다. 그것은 현과 지구급병원에서 “6,26백의전사”가 한꺼번에 십여명이나 안배 되였는데 그중에는 혁명위원회주임, 부주임까지 있다고 하였다. 그야말로 오뉴월에 쓰고있던 누더기를 벗어 던진것같이 통쾌했다. 죽이되든 밥이되든 제코를 제가 씻지 않으리…

    그때는 또 각자 자기단위로 돌아가서 혁명과 생산을 하라는 시기였다. 더는 남의 젯상에 감놔라 배놔라 하지말고 제노릇이나 착실히 하라는것이였다. 홍위병애들도 이젠 그만했으면 됐으니 학교로 돌아가서 공부를 하라고 했다. 반란에 재미를 붙인 불량끼 있는 애들은 그래도 반란할것이 없나해서 사회를 기웃거리며 돌아 다녔는데, 어데서나 “너들 여긴 왜 왔어? 또 무슨 못된짓을 할려구…되지못한 송아지새끼 엉뎅에서 뿔 난다구, 어서 학교루 가 공부나 해! 쬐꼬만 애새끼들이 어른들을 호령하다니 엑! 드르워서 쯧쯧쯧. 무슨 개망태기 판인지…”하고 거침없이 야단을 치는것이였다. 그전같으면 선자리에서 모가지가 달아날 소리를, 지금은 오히려 그것이 정정당당하였다. 홍위병이니 반란단이니 반란파요 하는것이 이젠 다 한물이 지나갔던것이다. 단위는 단위끼리 사람은 사람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18

    이제부터는 모택동저작을 활학활용하는 자만이 값이가는 한막이 열려졌다. 말하자면 모택동사상으로 사상혁명화를하고 계속혁명을 해야하는데 말과 행동이 따라가야 한다는것이다. 그러나 전날에 반란경력을 갖고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영광스러운 경력으로, 무슨공로를 세운것처럼 생각하며 자기를 다른사람들보다 한단계 높은 한발작 앞선 혁명자로 자부했다. 병원의 동과 조가 바로 그런 사람이였다. 그리고 그때에도 혁명적투쟁성이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반란으로 일어난 사람들을 선진분자로 인정해 주었다. 사람들은 량심 나쁜것들이 득세하는 별난 세상이라고 코웃음을 쳤지만 위로는 중앙문화대혁명령도소조가 호령하고 아래로는 각급 혁명위원회가 받들고 있으니 나중에 어찌되나 지켜볼 뿐이였다. 림표와 쿵로얼(공자)을 납작하게 죽여놓고 뚸쓰피슈를 하며 매일 “로삼편”과 어록, 최고지시, 중요문장을 학습하면서 특히는 모택동저작과 사상을 활학활용하는 운동을 고조로 이끌면서 천하는 대란으로부터 다스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위에서는 “복벽”(국가의 정상상태 회복)과 “계속혁명”의 새로운 투쟁이 차츰 심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아래에서는 활용에 중점을 두다보니 자연히 입살이 드센것보다 손발을 놀리는것이 더욱 값이가게 되였다.

    혁명위원회주임 벼슬을 달고 “6.26백의전사”로 내려온 박주임은(현병원 내과부주임) 활용파 였다. 부주임은 활학파로서 말로는 누구보다 더 혁명을 잘 했으나 위신이 없었다. 그는 행정인원이였는데 간이 나쁘고 술중독이여서 타락해 가는 사람이였다. 원래의 원장은 당지부 부서기로 있다가 얼마후 현성에 있는 진병원의 당지부서기로 전근했다.

    박주임은 진심으로 농촌의 의료, 위생면모를 크게 개변하려는 포부를 품고 사업을 억세게 틀어 쥐였다. 그는 맨발의사 대오를 건전히 하며 합작의료 (대대위생소. 즉 지금의 촌위생소)를 꾸리고 3급의료위생망(향, 촌, 촌민소조)을 건립하며 의료와 위생방역, 계획생육, “3토4자”(토의사, 토방법, 토약. 자체로 배양하고, 자체로 재배하고, 자체로 만들고, 자체로 사용), “량관5개”{음료수와 분변관리. 우물, 변소, 돼지굴, 퇴비장, 환경 등 개혁.}, “사해소멸” 등 농촌의 의료워생사업을 전방위적으로 활발하게 힘차게 추진했다. 그는 무산계급정치통수, 사상혁명화를 견지하고 동력으로 각항사업을 이끌었다.

    당시 어느 대대에 부농성분인 로중의가 있었는데 원근에 명의라고 소문났고 군중위신도 좋았다. 하지만 박주임은 그를 밀어내고 자기가 선택한 자습위주 배양중인 초학자를 그 대대의 맨발의사로 앉치였다.

    그때 대대 당지부와 혁명위원회, 군중들의 반발이 컸는데 제일 마구잡이로 범무서운줄을 모르고 소리를 친 사람은 대대빈하중농협회주임이라는 로당원 늙은이였다. 그는 “개코두 모르는 햇내기를 의사질하라고 하구 군중들이 좋아하는 한뉘 의사인 명의는 쫓아버리는 그런 철딱서니 없는 지랄이 어디 있는가.”하며 기승을 부리였다. 박주임은 병원의 당원들과 동호사 조의사 등 골간들을 이끌고 련며칠 밤마다 그 대대로 가서 로선시비를 했다. 대대 로선시비대는 병원대를 당할 재간이 없었다. 서너번 붙어본후 다른 전투원들은 백기를 들고 투항을 했는데 제일먼저 항복한자들로는 서기 부서기 주임 부주임 등 사령부 일급들이고 끝까지 비전향투사로 사책에 이름을 남긴 영웅은 빈협주임 로당원 늙은이였다. 그는 “이제 병이나서 다 써거져{죽다}봐라!”하고 최후의 악담까지 했다. 뿐만아니라 “진리는 소수인에게 있다.”고 한 모주석의 말씀까지 활용하면서 비분강개해서 웨쳐댔다. 워낙 알짜 빈농로당원인데다가 그때는 마구 모자를 씌우는 때가 아니여서, 인식문제로 그쯤해 두고 말았다. 하지만 얼마후에 진행된 “토구납신”(낡은것을 내여 보내고 새것을 받아들 임.)운동에서 그는 류소기의 자산계급 수정주의 류독을 토구하고 모주석의 무산계급 혁명적 위생로선을 납신하고야 관을 넘었다. 그후 그는 대대합작의료를 적극 받들어 주었는데 초약재배지도 좋은 밭뙈기를 떼여 주도록 주장하고 틈틈이 일손을 자원적으로 도와주기까지 했다.

    훗날 맨발의사는 선진인물로 되여 전국 위생공작 좌담회에 박주임과 함께 참가하기까지 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붉은기수” 강청을 뵙는 영광까지 지니고 돌아왔다.

    그번 로선시비에서 가장 표현이 돌출했든 사람은 부주임(활학패. 말로만 혁명하는 사람이라는 뜻), 동호사, 조의사, 박주임의 안해{현병원 내과의사. 무도쟁이. 퀴퀴한 말이 많았음.}, 그리고 다른 한 “6.26백의전사” 리의사였다. 어느날 밤은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강경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한창 자고있는 로중의 부농의사 늙은이를 끌어다가 산과녁으로 한바탕 투쟁하기까지 하였다. 조의사는 그한테서 짬짬이 중의를 배우며 험방, 밀방을 얻느라고 술병을 들고 슬금슬금 드나들던 사람이였는데{훗날 그 밑천으로 중의 흉내를 내며 돈벌이를 했으나 그닥지 않았다. 그는 로중의를 모시고 더 배우는 것인데… 문화대혁명때문에 랑패를, 보았다고 툴툴 거렸다.} 어느틈에 현성에 있는 “피해자” 환자까지 불러와서 부농의사는 그의 호된 투쟁까지 밤새껏 당하는 졸경을 치루었다. 세번째 날에는 박주임의 건의로 대낮에 전 대대의 군중들을 모아놓고 부농의사의 류독을 숙청하는 대회까지 하였다. 그 환자는 간경화, 신염으로 오래앓은 사람인데 부농의사가 용하다는 소문을 듣고 두달가량 부지런히 다니면서 약을 썼다. 그후 병은 완전히 치료가 되였다. 하지만 그는 조의사의 계발교육을 받고 부농의사와 철저히 계선을 가르고 투쟁을 했는데, 투쟁하는 리유로는 “그 먼 현성에서 차비를 숱해 팔며 뢰물까지 사 들고 앓는 몸으로 숱한 고통을 겪으며 치료를 다녔는데… 왜서 빨리 치료해 주지 않았는가?! 그 숨은 심보를 탄백하라!”는 것이였다. 워낙 쇄된 목소리로 구호를 잘 부르는 동호사는 조의사에게 한발 떨어진것을 감지하고 미봉책으로 최고음 악청을 다하여 10여가지 구호를 여러번 선창했다. 부농의사는 “돈을 빨아먹기위해 그랬다. 약값외에 받은것은 모두 배상하겠다.”하고 탄백과 함께 결심발표까지 하고서야 풀려났다. {병술과 사탕 과자 따위}

    로선시비에서 소극적인 사람들은 원장과 중약사, 당원녀의사, 그리고 덕성이 등 따라다니던 군중들이였다.

    부주임, 동호사, 조의사 등 다섯 사람은 박주임의 이번 전역에서 큰 역활을 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조의사는 대공을 세운셈이다.

    하지만 다른 전역들에서는 그들의 역활이 미약했다. 박주임은 그들을 2선 즉 병원문진이나 지키게 하고 말보다 실제적인일을 잘할수있는 사람들로 하향공작대를 묶었다. 이 공작대는 로선시비에서 소극적이였든 사람들로 조직 되였는데 그들은 박주임의 기대보다 훨씬 더 일을 잘하였다. 특히 덕성이는 박주임의 모사면서 유력한 맹장이였다. 난제는 그가 가면 원만히 풀리였다. 공사당위서기(투쟁받던 원 당위서기)와 현, 지구 하향공작대들은 덕성이를 능력있는 간부라고 호평했다. 하지만 생활작풍문제는 꺼림직 했다.

    박주임은 위병으로 고생하면서도 억척스레 사업을 전개했다.(적절한 치료기를 놓쳐 후에 위암으로 사망.) 우리공사위생원은 성의 깃발로 되여 성과 중앙의 령도에서 시찰을 왔었고 성내 여러곳에서 참관 학습을 왔다.

    박주임과 초년생 맨발의사의 활학활용강연테프와 문자재료는 위생계통 뿐만아니라 다른부문에서도 학습재료로 하였다.

    명성이 날리게 되자 지구급 당보에서 취재를 왔는데 책임심ㅡ직업도덕이 높은, 융통성 령활성이 없는 고지식한 기자는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여러사람들을 채방했다. 결과, 표양도 있었지만 비판도 적지 않았다. 특히 합작의료의 “3토4자”에 대하여 군중들은 의견정도가 아니고 원망을 했다. 그중에서도 토약에 대해서는 “개짓을 한다!”면서 비난하고 풍자하고 심지어는 증오까지 했다. 그들은 공사위생원에서 만든 “서슬”주사를 맞고 어린애 한명과 어른 한명이 죽은 일을 분노해서 떠들었다. 그러면서 “토약을 만드는 자도 없고 믿는 자도 없으며 쓰는 자는 더욱 없다.”고 하였다. 사용률이 몇프로고 효과가 좋아서 군중들이 대대적으로 환영하며 농촌의 췌의쑈요(의사가 결핍하고 약품이 적다.)가 근본상에서 해결되였다는 소리는 “당나발, 개나발”이라고 하였다.

    덕성이는 “3토4자”에 대하여 박주임과 질량, 효과, 사용을 놓고 여러번 견해상 충돌이 있었다. 그는 “3토4자”를 아직은 그렇게 높히 긍정하며 성과를 회보하거나 경험소개를 할때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다른 항목들은 궤도에 올랐고 량성순환을 하기 시작했지만 “3토4자”만은 아직 모색계단이고 박주임이 말하는 것처럼 무슨 근본문제를 해결한것은 절대로 아니라고 강력히 부정했다. 그러면서 대약진때의 허풍치기 과대보고 작법을 쓰면 안된다고 거침없이 내뱉았다.

    박주임은 너는 하나만알고 둘은 모르는 단순한 놈이라고 하면서 한심하다는듯 허허허 웃었다. 하지만 말은 옳은말을 하였다. 덕성이는 확실히 그런 사람이였다.

    기자가 그를 찿았을 때에도 그는 자기견해를 그대로 말하면서 이것이 중점적으로 틀어쥐여야할 미완성의 임무이며 연구과제라고 덧붙이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상급에서는 박주임의 회보와 활학활용강연에 더 구미가 당겨했다. 신생사물(합작의료)의 생명력과 위대한 성과가 정치적으로 더욱 급히 필요하고 수요됐든 것이다. 그것은 위대한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공로이며 모주석의 무산계급혁명로선의 승리였고 신생사물인 공사와 대대혁명위원회의 성적이였고 병원, 박주임의 성적이였든 것이다.

    박주임과 초년생 맨발의사는 전국농촌위 생공작좌담회에 가서 강청을 뵈옵기까지 했는데, 현 혁명위원회에서는 문교 위생 을 책임졌다는 부주임이 갔는데 그는 뚝불기같이 현병원 외과 수술실 호사를 데리고 갔다. 금후 계획생육수술을 선진적 방법으로 잘하기위해서 어쩌구저쩌구 했는데 그건 가랑잎으로 하문 가리기였다. 사람들은 입을 씰룩거리고 코를 찡긋거리였다. 이 부주임은 현 홍색반란총부 총지휘였는데 농구창공인이였다. 수술실 호사는 그의 반란파 전우였다. 그는 좌담회에 갔다온후 인차 입당을 하고 현병원 혁명위원회부주임이 되였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할가 몇년후 두사람은 “대류망” 이라는 명함을 달고 쌍캐출(당적, 공직박탈)을 당했다. 지구신문에서는 묵묵 벙어리였다. 다만, 위생방역과 “량관5개”를 틀어쥔 성과와 경험이 손바닥 두개만한 자리에 3면기사로 발표 되였을 뿐이다.

    후일담이지만, “췌의쑈요” 궁벽한 농촌에 영원히 뿌리를 든든히 아주 깊히 박고 모주석의 무산계급혁명적위생로선을 활짝 꽃피우고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게 하겠다면서 숨가삐 달려왔다던 영광의 “6.26백의전사”들은 선후로 몽땅 가버렸다. 4인패가 꺼꾸러진후 중앙에서는 수요 및 구체상황에 근거하여 적절히 조절하여 일부분은 원 단위로 돌아갈수 있다고 했으나 그때까지도 뻗치고 있던 신생사물ㅡ 혁명위원회에서는 “엣다 모르겠다. 다 가라.”하는식으로 몽땅 돌아가게 했다. 달아나는데 선후차이가 있은것은 뒷문 여하에 있었다.

    우리공사위생원에는 시가지에 있는 안해가 교통사고로 하반신퇀환(마비)이 온 “6.26백의전사”가 있었는데 그는 현과 지구혁명위원회를 수차 찿아가서 닭이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사정해서야 제일 마감으로 전근해 갔다. 그는 너무도 순진한 사람이였는데 단위에도 혁명위원회에도 힘써 줄만한 사람이 없었든 것이다. 그러나 그는 6.26전사라는 백의가 있었기에 시가지 안해 곁으로 갔지만 당원녀의사는 6.26이 아닌데다가 뒷문도 없고 립장상 쓸수도 없어서 시가지 남편곁으로 가지못하고 근 10년을 견우 직녀같이 살았다. 아이는 시집에 맡기고 그러다가 끝내는 리혼까지 당했다. 후에 재혼을 했는데 남편이 많이 활동을 했기에 3년후 작은 진시가지로 전근을 했다. 50을 코앞에 둔 때였다.

    박주임은 원 단위로 돌아간후 옛날자리 그대로 내과부주임이 되고 그가 힘써 수립한 맨발의사는 그의 상급인 위생국 부국장으로 되였는데 혁명위원회가 없어지면서 그의 감투도 인차 날아났다. 훗날 그는 강청덕에 상해구경을 했고 혁위회 덕에 부국장 감투를 몇달 써 보았고 공사위생원의 직공으로 월급쟁이가 되였다며 감사하다고 하였다. 그가 부국장으로 영전하자 대대에서는 부농의사를 다시 썼다. 그런데 그는 얼마간 하다가 사직을 했다. 리유는 “3토4자” 등 형세의 요구에 따라갈수 없다는 것이였다. 합작의료는 그의 제자였던, 맨발의사와 함께 일하던 약제사가 넘겨 받았다.

                                           19

    “토구납신”운동이 시작되면서 신 당원을 받아 들이는 활동이 활기를 띄었다. 공사당위에서는 한해에 두번씩 입당지표를 지부에 주었는데 그래도 적극분자들의 갈망을 전혀 만족줄수 없었다. 누구나 다 입당하고 싶어했다. 아마5류분자, 9종인들도 입당하고 싶었을테지만 그것은 말그대로 그림의 떡이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처지를 너무도 개선하고 싶었을 것이다. 사람은 역경속에서 벗어나고싶은 본능이 있는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갈망은 당시로서는 어처구니도 없는 공상, 망상이였다. 그들은 무산계급독재의 대상들이였고 아무런 인권도 없는자들이였던 것이다. 덕성이도 그중의 일원이였다.

    그런데, 덕성이는 또 입당적극분자기도 하고 위생원의 골간이기도 했는데 지어는 사람들이 박주임조리라느니 장래의 원장감 이라느니 했는데 자신도 자기가 무슨 배역인지 알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생활작풍 허물로해서 바람쟁이로 널리 조명이 났으니 입당도 벼슬도 다 어려울 것이고 오직 사업을 잘하여 당과 인민의 호평을 받는것이 최대의 목표라고 이 두가지만은 명석히 알고 있었다. 그는 입당도 벼슬도 자기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것이라고 인정했기에 사상상 그어떤 부담도 없었다. 자수안맹을 했으니 누구를 원망할일도 없었다. 부담이라면, 누구나 다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하는 안해에게 량심상 내내 미안한 것이고 같은착오를 다시는 더 범하지 말며 깨끗하게 살아야 겠다는 그 한가지 뿐이였다. 하지만 그는 문뜩문뜩 떠오르는 량심의 가책과 참회의 마음으로 해서 괴롭고 후회되고 고통스러울 때가 어쩔수없이 자주 있었다. 그럴때마다 그는 “이제와서 후회한들 무엇하랴. 쑨죽이 밥이 되랴…훌륭한 의사로 꼭 되겠다!”하고 결심을 다지고 다지면서 자기의 마음을 달래며 용감하게 일어섯다. 그는 자기는 당의문앞에 서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안해는 꼭 입당해야 한다고 안해에게 자주 말했다. 안해는 그의 마음을 리해 하였다. 착오는 고치면 좋은 동지라고 말하지만 생활작풍 착오만은 모든 사람들이 당사자의 이마빼기에 락인해놓고 죽은후에도 손가락질하는 치욕스러운 멍에였다. 입당하겠다고 그치욕의 허물을 어떻게 만천하에 제입으로 공포를 하겠는가! 그들부부는 입당심사시의 자아소개, 자아감정을 생각만해도 가슴이 졸아들고 온몸이 떨리면서 소름이 끼쳤다. 사실상 그들부부는 이렇게 천진무구한 량심을 소유한 사람들이였다.

    공사당위에서는 병원지부에 매번 한명의 지표를 주었다. 병원에는 이름을 걸어놓은 적극분자만해도 10여명이 되였다. 그속에는 두말할것도 없이 덕성이 부부도 있었는데 동호사와 조의사는 10여년의 자격을 가진 원로형 적극분자였다. 죽은 한공기고 배가죽이 등때기에 가 붙은 중대가리는 한구들 되는데, 사태가 이러다보니 누가누구에게 자비심을 베풀거나 사양하는 공산당원의 고매한 풍격을 발휘할 겨를이 없었다. 입당을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하여온 적극분자들은 심사시기만 되면 고도로 긴장해 하였다. 그들은 자신을 당원표준으로 바싹 단속하는 한편 경쟁자의 약점을 수집 장악하기에 그야말로 혈안적이였다. 아이들이 원족에서 보배찿기보다 더욱 맹렬했다.

    이면에서 병원에서는 동호사와 조의사를 당할자가 누구도 없었다. 그들은 10여년의 실천을 통하여 풍부한 경험과 교훈 및 수완을 구비하고 있는 실력가였다. 그리고 눈에 달이 올랐다. 왜서 그렇지 않겠는가. 앉은 석동도 창피하기 그지없는 놀림감인데 10여동이란게 말이 되느냐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번에는! 이번에는!”하며 매번 이를 깨물고 적비상전을 했지만 번번히 락방을 하면서 오늘까지 왔든것이다.

    “파퍼운동”(올리막 톱기. 모택동사상, 무산계급혁명로선, 계급투쟁각오에 자기를 대조하여 뚸쓰피슈를 하며 사상인식, 각오를 제고하는 운동)이 거이 마무리 되여가는 때에 잇따라 또 납신을 하게 되였다. 당조직의 대문을 활짝 열어제끼고 신 당원을 받아들이라는 모주석의 최고지시, 명령에 따라 지부의 입당심사에는 전체 당원, 본인, 그리고 군중대표가 참가했다. 때로는 상급당위에서 순시원이 내려와서 참석하기도 했다. 순시원은 근엄하기가 국제공산조직에서 온 관찰원 같았다. 무엇을 적기도 하고 그러나 말한마디 없이 앉아 있다가 중간에 가 버리는것이 상례였는데 그것이 오히려 회의장의 분위기를 더욱 엄숙하고 긴장하게 하였다. 워낙 긴장한 판이긴 하지만. 목숨보다 더 귀중한 정치생명이 왔다갔다하는 관건적 순간이 아닌가!

    동호사와 조의사는 공사당위2부서기 겸 혁명위원회2부주임인 옛날의 홍위병대장을 뚜져서 중요기밀을 입수 하였다. 그것은 둘 다 금년에 희망이 있을것 같은데, 병원은 지식분자들이 집중된 곳이기도 하거니와 워낙 복잡해서 서기가 납신을 직접 틀어쥔다는 것이였다.

    “내가 해 보겠다니까 햇내기라고 깔본단 말이야. 씨! 얼마 못가구 물러날 것들이!”

    2는 분해서 투덜거렸다. 동호사와 조의사는 자기들이 오히려 더욱 분해죽겠다는듯 색을먹고 표현을 하며 긴히 역성을 들었다. 속으로는 “이번에는!” 하고 이를 악물며 두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어느날 밤, 박주임은 전 원 직원 회의를 소집 하였다. 그는 먼저 인심을 고무하는 특대희소식을 전한다면서 래일부터 납신을 시작한다 고 공포하였다. 잇따라 이는 정치적대사로서 어떠어떠한 중요성과 심원한 의의가 있다고 누구나 다 아는 대도리를 한바탕 력설한후 운동기간 군중들이 지부와 밀접히 련계하는것을 환영한다고 하였다. 군중들은 납신에 관한 회의구나 하고 생각하며 이제부터는 태도표시를 하겠지 했는데, 웬걸?! 덕성이 착오를 비판한다는 것이였다. 아니, 덕성이가 또 무슨 착오를 졌어?! 또 바람?... 오이밭에 한번 똥눈개를 보면 항상 저개저개하는 식으로 사람들은 대뜸 그것부터 생각했다. 덕성이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이 휘둥그래서 박주임을 바라보았다.

    “지금 사회와 원내 군중들이 문선생이 집을 가지고 투기모리를 한다고 여론이 아주 나쁜데 본인이 검사한후 동지적 각도에서 비판방조 합시다.

    ” 박주임은 굳어진 표정으로 사뭇 엄숙하게 말했다. 덕성이와 군중들은 더욱 얼떠름해 졌다. 박주임이 집을 사고 팔며 그속에서 어떻게 투기모리 행위를 했는지 솔직히 검사하라고 다시 뚱겨줘서야 덕성이는 비로서 깨도가 되였다.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시로는 투기모리라고 하면 매우 비루하고도 매우 큰 경제적 범죄였다. 탐오와 마찬가지로 형사적 추궁을 했고 법적처리를 했다.

    사연은 이러 했다.

    덕성이는 어머니가 사망한후 아버지와 녀동생을 공사마을로 데려오고 싶었으 나(원래 부모를 모시려고 고향산골로 오지 않았든가!) 집도 없고 돈도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딸과 함께 그런대로 아직은 살림할수 있으니까 동생을 시집 보낸후 보자는 것이였다. 그때 동생은 17살이였다. 어머니 삼년제가 지난후 덕성이는 동네어른들의 권고로 새 어머니를 모시기로 결심했다. 들어보니 도리가 옳았든 것이다. 아버지와 의논하니 아버지는 뗑! 하고 반대를 했다. 덕성이는 아버지를 설복하여 재취를 하게했다. 계모는 친척할머니가 외지에 있는 아들집에 두어번 놀러 갔다가 풋면목이나 익힌 분이였다. 그는 한뉘 불임이다보니 네댓번 자리를 옴기며 여러 자식들을 키웠으나 어느집 하나 마땅치 않아 헤여지고 헤여지고 하다가 나중에는5촌조카에게 의탁했는데 그런데 조카와도 맞지않아 또 헤여지고 홀로 살았다. 친척활머니는 달린것도 없고 고생을 많이한 로친네여서 좋다고 하였다. 단순하고 데면데면한 덕성이는 친척할머니 말을 전적으로 따랐다. 그들 부부는 앞으로 행복하게 살자고, 잘 모시겠다고 거듭 다짐하면서 계모를 모셔 왔다. 덕성이 이런 처사는 원근에 소문났다. 사람들은 덕성이를 하늘이 굽어볼 효자라느니 며느리가 더욱 휼륭하다느니 하고 칭찬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모든것이 파멸로 끝날줄은 그때는 물론 알지 못했다.

    몇년후 동생은 시집가고 부모들은 그냥 그곳에서 살았는데 그간 덕성이는 방 두개짜리 초가를 마련했다. 이런집을 마련하기까지 그는 7,8년세월 10여차의 이사를 하며 헛간, 건넌방, 창고, 버린집을 돌며 한심한 고생을 했다. 하지만 그는 쾌활하고 락천적이였다. 그의 안해는 한결같이 밝은 모습이였고 그들은 열정스레 사업을 잘했다.

    좌우간 집이 있게되자 덕성이는 부모를 모시겠다고 들썽거렸다. 아버지는 너의 다섯식구도 비좁은데 되지도 않을 소리라고 하면서도 합가를 바라는 눈치였다. 그런데 계모는 계산이 달랐다.

    훗날 스스로 밝힌바지만 그는 덕성의 아버지가 사망하면 마을에서 “오보호”로 두루 살다가 기맥이 없을때는 양로원으로 간다는 방안을 이미 세워놓고 있었던 것이다. 보아하니 아들 며느리라는 사람들의 쥐꼬리만한 월급은 그들만 먹고 살자해도 판부족인데 령감에게는 재산은 고사하고 량식대 빚만해도 몇백원이 되였다. 하지만 밥은 먹을수 있고 그리고 말은 바른대로 이집 식구들은 사람들이 우선 모두 좋았다. 덕성이 내외는 진심으로 부모를 관심했는데 사람단련을 많이한 로친은 첯눈에 대뜸 그것을 알아보았다. 그는 호구를 옮길때 그저 동거를 하는걸로 하라고 했는데 덕성이는 그 눈치를 모르고 그저 하라는 대로 하였다. 데면데면한 덕성이는 아마 쑥스러워 그러나보다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계모는 그럴듯한 리유를 여러조목 엮으면서 덕성이를 춰주며 합가는 곤난하다고 설복했다. 덕성이 생각에도 집조건 하나는 확실히 무리였다. 덕성이 계모는 기력이 좋아서 생활상 별일 없었지만 아버지는 작년이 다르고 금년이 달랐다. 계모는 아버지보다 7년이나 지하고 신체도 건강했지만 생산대 일은 근본상 하지 않았고(농사일을 모른다고 했다. 크고작은진에서 생활. 배급통장은 팔았음.) 집일도 좀 힘드는 것은 하지않았다. 지어는 김치움에 가는일도 령감을 시켜, 마을에서는 저 령감이 로친한테 감투가 벗어졌다고 하였다. 후일 덕성이 아버지는 말하기를 나의 속옷 빨래도 로친은 “내가 이런일을 하자고 이 산골로 왔는가.”고 하면서 해주는 법이 없었고 내가 어디 아프다고 하면 그가 먼저 들어 눕는다고 했다. 덕성이 아버지는 몇번이나 갈라지려고 하다가 참았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아들 며느리를 망신시키지 않기위하여 그랬다는 것이였다. 로친은 쩍하면 양로원이 어떠어떠하게 좋다고 하면서(실지로 구경가 보기까지 했다.) 함께 가자고 하기까지 했는데 그럴때마다 내가 막아치웠는데 동네가 모르게 싸운적도 수십번이라고 하였다.

    그런저런 내역을 전혀 모르는 덕성이는 부모를 하루빨리 모셔오지못하는것이 죄스럽고 민망했다. 그러는중 마침 알맞는 집이 나타났다. 비록 헐망한 초가였으나 그래도6간 집이였다. 덕성이는 작은집을 팔고 그 집을 삿는데 200원을 빚을 지었다. 그는 작은집을 팔때 몇년전의 원가에 수리하며 든 돈 60원을 더 받았다. 집을 산 사람은 덕성이보다 퍽 나이 많은 공사간부였는데 덕성이 설명을 들으며 히죽이 웃었다. 그는 흥정을 끊고 술까지 한잔 삿는데 사실은 자기가 수월한 사람을 만나서 집을 눅게 삿노라고 했다. 덕성이는 그럼 됐다고 하면서 돈을 받았다. 여기에는 그 무슨 사기협잡이거나 투기모리행위가 근본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사간부는 덕성이 같은 년하 사람에게 속히울 사람도 아니였다. 큰 집을 마련하자 덕성이는 부모와 합가문제를 또 의논 하였다. 아버지는 동의 했지만 계모가 부동의였다. 계모는 워낙 구변이 좋았는데 이번에도 이런저런 리유를 라렬하며 몇년 더 지난후 보자는 것이였다. 아버지는 덕성이에게 천천히 설복을 하겠으니 급해 말라고 하였다. 몸은 이집에 있으나 마음은 다른곳에있는 로친이 그에게는 사실말이지 커다란 심복지환이였다. 상황이 또 이렇게되자 덕성이는 미몽을 잠시 억제하는수밖에 없었다. 마른나무가지 꺽듯할수는 없는 일이고 그러나 아버지를 생각하면 한시가 급했다. 그는 나에게 답답한 심정을 자주 말했다.

    그런데, 일은 또 생각 밖으로 꼬이였다. 그것은 원 집주인이 시가지로 이사를 하면서 불같이 빚재촉을 하였든 것이다. 량심이 곧은 덕성이는 단가마에 오른 개미처럼 빚임자보다 더 급해 했다. 지글서 응부하라고 내가 귀띔하니 그는 펄쩍 뛰는 것이였다. “사람이 그러면 되나.” 나는 무안해서 뭐라고 말할수 없었다. 200원을 마련할 재간이 없은 덕성이는 단호히 집을 팔았다. 그저 줘도 싫다할 정도로 형편없은 집을 덕성이는 아버지와 함께 그야말로 우라까이(대수리. 변모시킴.)를 했는데 이번에도 원값에다 수리비용을 쓴것만큼 추가했다. 집은 한족이 삿는데 “호! 호! 띵호 띵호. 잉가이디 잉가이디.”(좋다. 응당이다.)했다. 집터가 커서 자기도 욕심은 있었으나 수리할일이 기가막혀 사지 않았는데 이렇게 차려졌다면서 그는 매우 기뻐했다. (2년이나 비여뒀던 집임)

    덕성이는 다시 빈헛간을 얻어서 단간방 살이를 시작했다.

    덕성이를 비판한다는 회이는 우습게도 변론회로 되고 말았다. 부주임, 동호사, 조의사, 박주임안해, 그리고 다른 6.26 입당적극분자 리의사 등 다섯사람은 최고경지의 “깡과선”에서 웅변을 토하고 근20명의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분석할일이 아니라고 머리를 저었다. 박주임은 “혁명적 간부는 자신에 대한 요구를 엄격히 높으게 할수록 좋다.”고 하며 대도리를 력설한후 회의를 끝내였다. 그는 서슬주사를 맞고 죽은 사건도 모주석의 무산계급혁명적위생로선의 승리로 구가한 능력있는 달변이였다.

    덕성이에게 투기모리행위를 한다고 제일 처음으로 말거리를 만든 사람은 동과 조다. 동호사는 덕성이라하면 눈에 든 가시기에 사사건건 허물을 잡으려고 하는것이 그로서는 응당한 일이라고 하겠지만 조의사는 좀 다른차원의 심층 내역이 있었다. 시가지에 안해와 아이까지 있는 일가지장이였으나 10년세월이 지나도 전근한다는건 부지하세월이고… 젊고 곱고 훌륭한 덕성이안해가 항상 욕심이 나서 애가 탔다. 그가 보건대 덕성이는 어느모로 비겨도 자기보다 형편없이 처지는 사내고(그는 대학졸업.) 동호사를 통해 코빵을 먹은일이 한번 있기는 해도 어찌보면 회망이 있을것 같기도 했다. 하여 그도 사사건건 덕성이를 살피며 허물을 잡아 납작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는 자기의 가장친한 액내들과 술김에 떠벌이기를 덕성이안해는 이제 조만간 자기것이 된다고 했다.

    그러면, 박주임은 왜서 빨리도 늦지도 않게, 바로 납신전야에 덕성이에게 방망이 찜질을 하려고 했는가? 그 내역은 두세사람만 알뿐이다.

    당위 조직위원이였든 나는(학교에서 공사당위로 이미 전근) 어느날 서기의 의지를 박주임에게 간단하게 전했는데 그것은 “상급에서 덕성이안해가 이번피에 입당하면 공사부련회주임으로 쓰려는것 같다.”라는 것이였다. 박주임은 안해를 입당시키려고 은근히 힘쓰는 중이였다. 원래는 작년에 희극적으로 처녀호사와 청년의사가 입당했는데 공사당위에서는 처녀호사를 부련회주임으로 쓸 타산에서 그런 무리수를 썼던것이다. 그런데 처녀는 입당후 시가지 총각과 벼락같이 결혼하고 또 뒷문거래로 선손을 써 벼락같이 시가지로 달아 났다. 공사당위에서는 언약을 차버린 처녀가 괘씸하기는 했으나 닭쫓든개 지붕 처다보기가 되고 말았다. 서기는 “수고스레 죽을쒀서 개좋은 노릇을 했다.”고 하면서 음ㅡ 음ㅡ노여워 했으나 말그대로 죽은아이 자지 만지기만도 못했다. 청년의사는 입당신청서 따즈보를 써 거리에 붙힌 장거로 납신을 했다. 그의 집은 현성에 있었는데 과부어머니는 우리공사에 점을잡은 공작대대장 (현혁명위원회부주임. 전국농촌위생공작좌담회에 갔다 온 그사람)과 친밀한 관계였다. 그청년도 입당후 인차 현병원으로 달아났다. 후에 들은 말이지만 처녀호사는 시가지에 간후 또 벼락같이 리혼을 하고 자유의몸이 되였는데 개혁개방초기에 벌써 술집을 경영했다. 그는 병원에 적을 남기고 술집장사를 했는데 벼락같이 부자가 되고 또 벼락같이 죽었다. 사람들의 허튼소리에는 너무 바람을 써서 그리 되였다고 했다. 청년의사는 바람을 피우다 덜미잡이를 당했는데 물매를 맞고 다른곳으로 전근했다. 생동한 경험과 교훈을 섭취한 령도에서는 이번에는 안가락호ㅡ뿌리박은 녀간부들속에서 주임감을 은근히 물색했는데 전 현적으로도 덕성이안해만큼한 사람이 없는것 같았다.

    3년후에 폭로된 것이지만, 그번의 납신에서 동호사는 궁둥이로, 조의사는 수류탄(병술) 권총(닭다리)에다가 피동이긴 했지만 녀편네 궁둥이까지 받치며 할동했으나 치욕적인 랑패를 보았다. 동과 조는 그해 납신에서는 또 헛물을 켜고 앙앙불락이였지만 이듬해에는 10여년의 숙원을 끝내 이루고야 말았다. 하늘이 무심하지 않았든지 이듬해 현공작대대장은(상해회의에 갔던 사람임.) 그들 두 사람과 은밀한 인연을 맺게 되였든 것이다. 대장은 공사2부서기와 함께 병원지부에 대하여 그리고 당위에서 유력한 “역활”을 했든 것이다. 공작대대장은 “사실이 증명하건대 그사람들이 계급투쟁성이 제일 높구만. 맑스주의철학은 계급투쟁의철학이고 우리당은 계급투쟁을 하는 당인데 그런사람들이 입당못하면 누가 하겠소?! 주류를 봐야지. 주류를! 사소한 결함은 입당후에 당의 교육하에서 얼마든지 고칠수 있는게구.” 그는 퍼러딩딩해서 반대자들을 훝어 보았다. 다수가결로 입당은 통과 되였다. 2부서기와 대장은 “조직적 료해”라는 기회로 조의사의 녀편네와 바람인연을 맺았든 것이다. 조의사가 잘 접대하라고 한 당부도 물론 작용을 했겠지만. 2부서기가 병원의 납신을 친히 틀어쥐기 시작해서부터3년후 호황은 막을 내리였다. 그것은 2부서기가 대낮에 옆집녀편네를 건드렸다가 그만 큰코를 쳤기 때문이다. 문발만 치고 낮잠을 자는 옆집아낙을 2부서기는 수월히 생각하고 덥썩 끌어안았는데 아이쿠! 웬걸, 뜻밖에도 녀자는 야생말처럼 날뛰며 사생결단을 한 것이다. 2부서기는 6년징역을 가고, 얼마후 공작대대장은 현병원 외과 수술실호사와 함께 쌍캐출을 당했다. 그번의 납신에서 덕성이안해는 “가정혁명화에 노력할 것이며 계급투쟁성을 제고해야 한다.”는 귀중한 방조를 받고 미끌어 졌다. 동과 조는 “남에게 마레주인것만큼 자기에게도 마레주의여야하며 입으로만 혁명하지말고 행동으로 하며 아무와나 쩍하면 다 싸우지 말고 자고자대, 교오자만을 극복하며 환자를 비롯해서 군중들과 단결을 주의하며 단정했으면 좋겠다.”는 충고룰 받았다. 그해 명액은 박주임의 안해와 “6.26백이전사” 리의사가 가지게 되였는데 2부서기 때문에 박주임의 안해는 훗날 “궁둥이당원”이라는 이름을 여벌로 달게 되였다.

                                                 20

    나는 외지로 전근할때 덕성이와 술잔을 나누며 이런말을 하였다.

    “아마도 다음은 너희부부가 입당할 차례일것 같은데 사상회보도 자주 써 내고 신청도 적극 해야지 신청하지 않는걸 어떻게 토론을 하나…”

    내가 이렇게 말하니 덕성이는 싫다고 하였다. 생각하면 수치스럽기만한 착오사실(작풍문제)을 도저히 말할 용기가 없다는 것이였다.

    “아는사람들 앞에서는 그런대로 비위장 두껍게 용서해 주시요. 당에 받아 주시요. 하고 말할수도 있겠지만 모르는사람들에게 내게 이런일이 있었소. 하지만 이미 고쳤소. 당에 들고싶으니 받아주시요.하고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나는 단념했네. 당초에 비위가 약해서 않되겠네. 좋은 의사가 될 생각 뿐이네.”

    그는 서글픈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런걸 왜 그따위 짓거리를 했어!”

    내가 벌컥 역정을 내니 그는 넉살좋게 이죽거리는 것이였다.

    “그러게 말이 아닌가. 얼빠진 놈이야. 생각할수록 나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어. 괜찮아. 입당을 포기하면 되는거지. 입당이 내인생의 전부는 아니야.”

    덕성이는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인데… 랑패가 아닌가?!... 그야말로 일실족천고한이라 하겠다. 우리는 술을 마이며 기분나서 떠들썩 했지만 아래방에서 덕성이안해는 손수건으로 눈굽을 찍고 나의안해는 머리를 수그리고 시무룩해 앉아 있었다.

    “자, 마셔. 까짓거!”

    우리는 녹초가 되게 술을 마셨다. 그것이 우리들이 젊은시절에 마인 마지막 술잔이다.

    많은 세월이 지나간 오늘, 우리는 풍치좋은 바다가 너럭바위 위에서 술잔을 마주하게 되였다. 무량한 감개를 금할수 없었다. 가는 세월을 누가 막으랴. 바라보니 흰머리가 새삼스럽다. 인생은 지나 갔는가! 오늘 부턴가!...

                                               21

    “자네가 떠난 이듬해 나는 위생원에서 지은 사택에 공짜로 살게 되였네….”

    덕성이는 말을 이었다.

    4인패가 꺼꾸러지고 “6.26백의전사”들이 모두 가 버리니 위생원은 텅 빈것 같았다. 외지에 집이있는 사람들도 가버리고(조의사도 갔음. 한국에 불법체류를 하던중 죽었다.) 안가락호ㅡ뿌리 박은 사람들만 남았다. 굴러온 돌이 박힌돌을 빼고 들어온 벌이 왕!ㅡ 한다고 그간 몇년을 누구정신에 들볶이우며 법석 끓었는지 모르겠다. 하긴 나라전체가 팥죽끓듯 와글거리였으니 조용한 구석이 있을수도 없었겠지만 우리 위생원은 특별히 복잡했다. 그것은 내부에 동, 조와 같은 유명한 말썽꾸러기 반란파가 사사건건 혁명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제는 진정이 되는것 같았다.

    동호사는 입당후 찬바람을 쌩쌩 일구며 더욱 날카로와 졌는데, 이젠 그야말로 명정언순, 문화대혁명의 치렬한 계급투쟁속에서 용솟음쳐 나온 참신하고 당당한 혁명가로 되였다. 그런데 1년 조금 지나서 그의코는 납작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2부서기의 피해자중의 하나라고 덮어주는 명분이 있어서 낯짝을 들고 다닐수 있었다. 그것은 가랑잎으로 하문 가리기여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막을수 없었지만 그로서는 달리 궤변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끌어오던 결혼을 소리없이 해버렸다. 사람들은 피장파장인데 뭘… 잘됐다고 하였다.(몇년후 과부가 되였다.)

    위생원의 업무는 차질이 없이 돌아갔다.

    이제와서 맏며느리가 무던한줄 알겠다고 군중들은 말하면서 우리부부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공사위생원은 국가의 제일 기층 의료위생기구로서 나는 의료위생업무와 행정령도책임을 림시로 감당하고 있었다. 업무는 우리가 일을 더 하면 되는것이였으나 행정은 령도가 있어야 하는건데 위생원에는 령도가 없었다. 중약사와 동호사가 당원이긴 했으나 현위생국에서는 그들을 령도로 쓰지 않았다. 현에서는 현병원의 직원들중에서 한사람을 파견하여 림시책임으로 보냈는데 두달에 한번씩 바꾸기로 했다. 주지하다싶히 이것은 림시방편으로 응부책이고 뿌리박을 령도를 결정해야 겠는데 그것이 마땅치 않았다. 후에야 안 것이지만 유관부문에서는 나를 놓고 한창 저울질 하는 중이였다.

    집이 생기자 이듬해 봄 나는 부모들을 모셔 왔다. 아버지의 기력이 이젠 살림하기에 힘겨운 상황이여서 나는 무작정 합가를 결정했는데 계모는 더는 구실을 댈수 없었다. 그런데 1년도 되기전에 계모는 마을로 되돌아 가려고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을에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잡아뗐다. “오보호”타산이 실패하자 이번에는 양로원 꿈을 다그쳐 추진했다. 그는 아들 며느리가 어찌도 구박을 하는지 도저히 살수없다고 대대서기를 찿아가고 공사민정을 하루에도 두세번씩 찿아 다녔다. 한편 사회에는 우리가 어떠어떠하게 나쁜사람이라고 온갖 여론을 퍼뜨렸다. 온갖 빨래는 자기에게 다 시키고 이밥은 저네들만 먹고 자기에게는 강냉이떡만 주는데 그것도 애기주먹만큼, 죽도록 앓아도 주사한대는 커녕 정통편 한알 어떻겠는가! 아니, 어느한번은 죽을 좀 쒀 달라고 하니 인차 쒀 주긴 했는데 너무 쓰거워서 먹지못했는데 쥐약같은걸 넣는것 같았다고… 계모는 그야말로 정신나간 사람처럼 온갖 허튼소리를 구애없이 하고 다녔다.

    그런저런걸 전혀 모르는 우리는 즐거운 기분으로 매일매일을 흥겨워 했다. 아버지도 벙글써 흐믓해 하고 아이들은 성수나 했다. 나는 살맛이 났다. 안해는 계모의 속옷까지도 알뜰히 빨래하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는 이밥은 어른들께 떠 드리고(겸상)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배급대로 먹었다. 아이들은 응당 그러려니 했고 습관이 되여서 잘만 먹었다. 계모는 하루건너 포도당 링겔주사를 맞다싶이 했는데 정작 약을 써야할 아버지는 로친때문에 늘 사양했다. 안해는 진심으로 시부모공대를 나름껏 잘 하였다. 우리집이 병원울안에 있다보니 병원사람들은 제집 나들듯 하면서 우리집일은 손금보듯 환히 안다. 그런데 계모가 이런 여론을 퍼뜨리고 다니니 사람들은 모두 경악을 금할수 없었다. 모두가 보아와서 아는바이지만, 너무도 허무맹랑한 기막힌 소리였다. 사람들은 저 로친이 로망이 드는 모양이라고 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량심이 삐뚤어진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럴줄을 몰랐다고 하면서 계모를 어루만져 주며 부추기고 맞장구를 처 주기까지 했다.

    동호사와 병원안의 두세 사람은 절호의 기회를 만났다고 신이 났다. 그런 사람들은 령도자리가 어떨꿍 해 하는 사람이 아니면 나를 아니꼽게 보는 사람들이였다. 병원의 공금으로 가만가만 술판을 벌이고 지어는 되거리장사까지 하는것을 내가 지적한것이 몇사람의 미움을 사게 되였든 것이다.

    어느날, 내가 하향했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말그대로 우리집앞은 초상난 집이였다. 집앞에는 병원사람들을 비롯해서 알고모를 사람들이 가득하고 아버지와 안해가 계모를 몰아 부치고 있었다. 비로서 사태를 알게된 그들은 억이 막히고 분통이 터졌든 것이다. 그날, 대대서기와 공사민정은 우리집에 와서 도대체 무슨 영문인가고 당자들 앞에서 무릎맞춤을 했던것이다. 계모의 헛소리는 당장에서 발가지고 안해는 분지도에 기절까지 하였다. 나는 너무도 한심하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할지 일순간 도무지 궁리가 나지 않았다. 그후 삼사일 나는 화해를 시켜보려고 노력했는데, 모두가 수포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절팔리고 중팔린 이김에 아예 갈라지겠다고 선언했고 안해는 철저히 실망 했다는 것이였다. 그런줄은 꿈에도 생각 못하고 한품에 안아 받들었는데 이럴수가 있단 말인가?! 그는 울다가는 사설을 하고 오열을 토하다는 쓰러지고 했다. 계모는 견결히 양로원에 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호구도 동거로 한거라는 것이였다. 그리고 덧붙혀 한다는 말이 미안하긴하지만 내가 조작한것임이 다 발가졌으니 너무 분해하지 말라고, 양로원에 가기위해 구실을 만드느라 그랬으니 량해를 하라고했다. 이런어른과 무슨말을 더 한단 말인가…

    나는 계모를 소원대로 양로원에 보내 드렸다. 지금은 양로원을 가장 리상적인 “로인의 집”이라고 하지만30년전에는 자식이나 가까운 친척이 있어가지고 부모나 친척을 양로원에 보낸다는건 천하에 불효막심한 행실이였다. 나는 사람들이 갑론을박하는 말도마에 올라 화제의 인물로 되었다. 공사당위에서는 우리집 경제형편이 너무도 궁색한것을 감안해서 계모의 양로원일체비용을 면제해 주면서 우리더러 사업을 잘하라고 하였다. 나는 그일이 지금도 미안하다.

    계모는 양로원에 간후 너무도 심술을 부려서 양로원 원장과 공사민정은 도리머리를 떨었다고한다. 그는 3년철 되는해에 사망했다. 나의 아버지는 우리와 함께 13년을 보냈다.

    현에서는 당지에서 사람을 뽑아 위생원의 인원을 보충 했는데 원장에는 대대의사를 앉히고 서기로는 대대서기가 올라왔다. 그들은 또 자기자녀와 친한사람을 끌어 왔다. 병원은 마치도 생산대 같기도 하고 누구네 집안가문 같기도 했다. 10여명 직원은 패거리가 생기고 우리는 아무데도 붙지않아 외목에 났다. 하지만 업무골간이다보니 없어서는 아니될 존재였다. 우리는 일심전력으로 사업에만 몰두했다.

    현위생국에서는 나를 시가지의 어느 공사에(그때는 시에 속하지 않았다. 두달후 시에 넘었음.) 원장으로 안배하려고 했는데 나는 사절하고 다른 병원으로 전근했다. 원래는 고향산골에 그냥 있으려고 했는데, “령도로도 쓰려는데가 없고 받자는 곳도 없는 인물”이라는 여론은 안해를 너무도 힘들게 했든것이다. 내가 간 그병원은 시급 병원인데 그곳에 간후 안해는 인차 입당을 하고 총호사장으로 사업했다. 그는 지구의 모범호사장으로 되기까지 했는데 위생부로부터 영예의 금메달까지 받았다. 나는 과주임사업을하며 연구생 학습을 거쳐 주임의사가 되였다…

                                                    22

    내가 고향을 떠난후 10년도 되나마나한 사이에 다른 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아주던 사람들은 모두 횡액을 당하였다. 이상한 일이였다. 그렇게 날고뛰던, 한다하던 사람들이 웬일인가?! 량심이 나빠서인가? 어찌보면 그런것 같기도 했다….

    화창한 날씨 춤추는 갈매기 푸르른 바다에서는 신선한 해풍이 살살 불어오고 우리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09. 5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205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125 송아지 친구들 2018-01-22 0 1198
124 난중지 난사 2018-01-21 0 1352
123 회갑잔치 2018-01-18 0 2642
122 패가망신 2018-01-12 0 1102
121 량심 2017-12-31 0 1071
120 일망타진 2017-12-31 1 1191
119 주총리의 명언 2017-12-27 0 1191
118 고추가루 2017-10-19 0 1105
117 2017-06-16 0 1341
116 나의필명에 대한 설명 2017-06-05 0 1693
115 두만강 성에장 2017-06-01 0 1156
114 일본헌병대 통역(10) 2017-05-20 0 1548
113 일본헌병대 통역(9) 2017-05-19 0 1401
112 일본헌병대 통역(8) 2017-05-18 0 1605
111 일본헌병대 통역(7) 2017-05-17 0 1525
110 일본헌병대 통역(6) 2017-05-16 0 1152
109 일본헌병대 통역(5) 2017-05-16 0 1054
108 일본헌병대 통역(4) 2017-05-14 0 1272
107 일본헌병대 통역(3) 2017-05-12 0 1095
106 일본헌병대 통역(2) 2017-05-10 0 1330
‹처음  이전 1 2 3 4 5 6 7 8 9 10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