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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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쳥년의 길
2014년 05월 26일 10시 27분  조회:2310  추천:2  작성자: 회령
               실화  
                                                      청년의 길
                                                                                                                회령

    한여름의 어느날이 였다. 나는 병원문진실에서 밖을 내다보며 저도 모르게 깊은 생각에 잠기였다.

    병원의사로서 업무에 관계되는 서적은 보지않고 무슨 “조선문학”이니 “두만강”이니 한 소설책 따위만 본다고 비판을 받았는데 그것이 납득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나의 포부는 의학과 문학으로 사회와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겠다는 것이였다.

    원장(지부서기를 겸임)은 당원과 입당적극분자, 단원을 불러 소범위 생활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는 보통 저녘후 밤시간을 리용하여 하는데 그날 참가자는 10여명이 되였다. 원장이 회의 취지를 말했는데, 나의 엄중한 자산계급개인주의사상을 지금부터 비판 방조 한다는 것이였다.

    그때 나는 입당적극분자 였는데 마, 자부에서는 몇번째 적극분자로 꼽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 보기에는 금년피에 입당이 될것 같았다. 왜냐하면 의료하향, 농업지원로동, 공정판의사, 등 간고하고 다른사람들이 싫어하는 일을 내가 자원적으로 제일 많이 했고 성적이 돌출해서 표양도 여러번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사업들을 광영한 혁명적 임무라고 생각해서, 그리고 간고한 사업에서 앞장에 서야한다는 모주석의 교시대로 하느라고 그렇게 했다. 그뿐이 아니다. 림상업무에서도 나는 내앞의 환자를 능히 잘 처리해서 군중들로부터 기술도 높고 복무태도가 좋다는 평가를 받았다. 직일도 많이 섯고 다른사람을 적극 도와주기도 했다. 중한 환자가 있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병원에 나와서 구급을 했는데 나는 없어서는 안될 기술골간의사였다.

    나는 명예를 바란것도 아니고 단순히 입당을 하기위해 그런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전심전의로 혁명을 위해서, 인민을 위해서 맡은봐 사업을 잘 하느라고 항상 자신을 편달하며 노력 했든 것이다. 그리고 나름껏 틈틈이 문학수업도 하였다. 나는 이렇게 하는 것이 나의 참다운 인생관이며 인생태도라고 인정 했다. 나는 자기가 공산당원의 표준에 기본상 부합 된다고 생각했고 얼마전에 입당신청서를 지부에 바치였다. 그런데, 비판을 한다고 하니 너무도 뜻밖의 날벼락이 아닐수 없었다.

    회의가 시작되자 선참으로 로처녀 리호사가 격렬한 비판발언을 하였다. 그는 우리공사(향)에서 선참으로 뛰쳐나온 반란파중의 한 사람인데 오랜 입당적극분자로서 입이 칼날같이 맵짠 녀자였다. 머리가 총명해서 모주석의 어록과 혁명적인 어구들을 많이 암기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적당히 배렬하고 응용해서 말을 잘 했다. 우리병원은 말할것도 없고 공사적으로도 웅변대회를 한다면 10등안에 들만한 사람이였다. 그는 검은것을 희다고 네모난것을 둥글다고 말할수 있는 재간이 있었다. 그런 기질에 문화대혁명 10년의 실천단련까지 거친터라 그야말로 청산류수가 울고 갈 지경이였다.

    그의 격렬하고도 격앙한 고음의 비판방조 발언을 요약한다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이 산에 올라서면 저 산이 높아 보이고 이것보다 저것이 좋아 보이고 의사가 되니 또 작가가 되고 싶고… 이것은 전형적인 자산계급개인주의 명리사상이다. 왜서 작가로 되자는가? 자기 이름 석자를 날리기 위한 것이다. 병원일에 열정을 보이는것도 위선적 음흉하고 교활한 수작에 불과하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속으로부터 겉에까지 자산계급개인주의사상이 꼴똑 들어찬 사람이다. 우리는 모택동사상의 볽은기를 높히들고 무산계급 혁명로선을 따라 기정 방침대로(모주석이 생전에 정해놓은 방침ㅡ 무산계 급독재 조건하에서 계속 계급투쟁을 틀어쥐고 혁명을 해야한다는 것.) 혁명을 하며 그길에서 최후의 피 한방울까지 기꺼히 바쳐야 한다. 나는 동무가 낭떨어지에서 말을 멈추고 환골탈태 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잇따라 세 사람이 앞다투어 용약 발언 했는데 자기가 혁명적사상수평이 고도로 높다는 것을 충분히 표달 했다. 그들이 높히 표현할수록 나는 그만큼 납작해 지였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나를 비판방조한다는 명의를 걸고 나를 여지없이 내리깍고 자기의 높은사상경계를 나타냈기 때문이다. “4인패”가 꺼꾸러진지 반년이 지났으나 “우경번안풍”(등소평)을 비판투쟁하며 문화대혁명의 살벌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발언은 입당적극분자 네 사람이 장편으로 하다보니 밤이 늦어 졌다. 당원들과 다른 사람들은 발언할것이 없는지, 혹은 싫은지 묵묵불언이였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그랬는지 부서기(원 원장겸 서기. 로당원. 잔페군인. 문혁기간 리호사 등 반란파들 한테서 비판투쟁을 호되게 당했다.)가 “건전한 개인흥춰를 나쁘다고 하는것이 옳은지… 생각해 볼 봐다.”라고 말했다. 이간단한 물음에 말싸움에 들어가서는 날고 뛴다는 리호사를 비롯해서 장편연설자들은 어안이 벙벙해 하였다. 부서기는 한마디를 더 하였다.

    “여유시간이 있으면 자기가 맡은 혁명임무와 관련되는것만 학습하고 연찬해야 혁명간부라고 할수 있다는데, 그렇지 않을때는 자산계급개인주의다 하는데 그럼, 시간이 있으면 장기를 놀고 지어는 밤을 새우기도 하며(오랜 입당적극분자중 모 사람. 리호사와 단짝인 반란파. 유부남. 리호사와 퀴퀴한 관계. 그도 죽어라고 원 원장을 투쟁했었다.) 부커치기라면 자다가도 일어나는(리호사) 행위는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가…우리는 전쟁을 하다가도 즘즘하면 네말바둑도 놀고 소설책도 보고 어떤 친구들은 시를 쓰기도 했다. 나의전우 조기천은 조선의 유명한 시인이 되기까지 했다. 전쟁하는 사람이라해서 총만 만지고 작전지도만 끌어 안고 있지 않았다. 사령관은 우리를 자산계급개인주의라고 하지않았다… .”

    부서기의 한마디가 회의취지를 뒤엎어 놓았다. 더는 발언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태가 이렇게 급전직하로 우습게 역전하자 원장이 팔을 걷어 부치고 직접 출마하였다. 원장은 나를 직방 심문했다. “왜서 문학학습을 하는가?” 그의 질문에 “여유시간을 리용하여 문학창작을 하려고 한다. 나는 가급적 더욱 많은 일을 하려고 한다. 문학도 일이다. 문학도 혁명을 위한것이고 사회와 인민을 위한 것이다. 물론 나의 업여애호다. 의사직책을 충분히 감당하며 업여로 문학을 하는것이 왜서 안되는가. 왜서 나쁜가.”고 나는 떳떳하게 속심을 그대로 말했다. 재미있는 글을 써 보려는 것은 내가10여년을 키워온 애호며 포부였다… 원장은 그야말로 기세등등해서, 누구의 이의도 용서안한다는 위풍을 떨치며 열변을 뿜었다. “보라! 이 동무의 마음은 문학에 가 있다. 의사는 조직에 매여있기에 할수없이 응부적으로 하는 것이다. 의학만도 벅찬데 문학까지 어떻게 하는가. 궤변이다. 완고하고 엄중하다! 자본주의 자유세계라면 문학인가 뭔가 하는데로 달아난지도 10년이 넘었을 것이다. 동무는 당에서 의사를 하라는데, 해야하는데, 왜서 기어코 문학인가?! 그래 자산계급개인주의명리사상이 아니란 말인가! 심각히 반성해 보라. 후에 다시 보자. 오늘은 이만. 페회!”

    나는 생각할수록 울분이 치밀었다.

    그때 문진실로 두 청년이 들어 왔다. 나는 즉각 의사의 위치로 돌아 왔다.

    걀캉걀캉 바짝 마르고 키큰 청년은 칼코가 인상적이였다. 그의 손에는 두툼하고 낧은 소설책ㅡ리기영의 “고향”이 쥐여져 있었다. 다른 한 청년은 키가 작고 통통했다. 아파서 온 사람은 키가 크고 코마루가 날카로운 말라깽이 청년이였다. 병은 위염인데 위신경관능증이 심했다. 그리고 빈혈도 있었고 신체가 허약했다. 식사조절, 영양보충, 휴식이 수요 됐다.

    그런데 청년은 무척 열정적인 문학도 였다. 조양천지질대 공인으로서 우리 산골공사에 와서 석탄매장량을 탐사하는 중인데 시추작업을 한다고 했다. 3교대로 하는 시추작업은 중체력로동이고 생활은 물론 불편하고 간고 했다. 게다가 청넌에게는 사상부담도 컸다. 그것은 일할 힘이 없어서 청가를 자주 맡고, 쉴때는 말할것도 없고 출근시에도 틈만 있으면 기를 쓰고 소설책을 들여다 보는데 밤을 패가며 열중할때가 많다고 하였다. 하여 시추대 왕대장은 그를 자산계급개인주의사상이 엄중한 문제인물로 락인을 찍고 호되게 닥달을 했다. “너같은 락후분자가 뭐, 작가가 되겠다구?...” 청년과 왕대장은 개와 고양이처럼 대립되여 충돌 상태였다. 생활상 이렇게 악성순환을 하다보니 병은 나날히 심해가고 신체는 시나브로 허약해 질수밖에.

    나와 청년은 같은 문학도다보니 단박 친해졌다. 청년은 쾌활하고 성실했는데 자기는 꼭 문학을 하며 큰 작가로 되겠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고장의 어느 처녀와 사랑을 속삭인다고 하였다. 그의 이름은 우광훈이였다. 나는 나와같은 문학도를 만난것이 무등 반가웠다.

    나는 광훈이에게 병의 원인과 치료방법 주의사항을 자세히 가르켜 준후 석달이란 휴식진단서를 떼여 주었다. 공사병원의사로서는 최고의 권한이 거기까지 였다. 나는 광훈이에게 6개월내지 1년은 휴식치료를 해야하는데 먼저 석달을 휴식하며 치료한후 다시 보자고 말하였다.

    원래는 몇일간의 휴식진단서를 떼자고 왔던 광훈이는 너무도 좋아서 입이 떡 벌어 졌다. 그는 진단서를 들고 어깨춤을 추며 걸음도 씽씽 걸어 갔다. 왕대장 앞에 “이걸 봐라!”하며 진단서를 탕! 메내부칠 생각을 하니 통쾌하고 흐믓하고 궁둥이가 거뿐했을 것이다. “뭐?! 내가 꾀병을 하고 락후분자라구?... 작가는 커녕 떡가두 못할놈이라구?...” 하여튼 광훈이는 기분이 좋아하며 돌아 갔다.

    이튿날 오후 보리저녘때쯤이 였다. 원장이 공사당위 소회의실로 즉시 가 보라는 것이였다.

    소회의실에는 당위부서기와 조직위원 그리고 젊은 한족사내가 있었다. 방안의 분위기가 이상스레 긴장하고 엄숙했다.

    조직위원이 우광훈이라는 시추대 공인에게 진단서를 떼여준 일이 있는가고 물었다. 내가 그랬다고 대답하자 그는 이 동무가 시추대 왕대장인데 진단서에 대하여 설명해 주라는 것이였다. 나의 설명을 들은후 왕대장은 “네가 광훈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가. 우리 시추대에서 제일 또랑당을 부리는 락후분자인것을 아는가. 그런사람에게 휴식진단서를, 그것도 하루 이틀도 이니고 단꺼번에 석달이나 감히 떼여 주는가. “혁명과 생산을 틀어 쥐라.”는 이때에 이게 의사로서 무슨 행위라고 생각 하는가…” 하며 단통 색을 먹고 련줄포를 갈겨 대는 것이였다.

    나는 왈칵 피가 솟구쳤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누굴 훈계하는 건가! 나의 말이 거칠수 밖에 없었다.

    “광훈이가 또랑당락후분자인지 반동분자인지를 내가 어찌 아는가. 내가 병을보고 진단서를 떼는걸 너에게 청시하고 비준을 받아야 하는가. 무슨 의견이 있으면 현위생국에 물어봐라. 광훈이가 현병원에 가서 보이면 아마 반년의 휴식진단서가 나올게다. 너 하고 싶은대로 해 봐라.”

    왕대장은 시추임무가 어떻게 중요하고 긴급하고 지방의 각급당위에서 어떻게 중시하고 있으며 대원들의 적극성이 어떻게 필요하고 정치사 상공작이 얼마나 중요하고 혁명적 무산계급은 마땅히… 한바탕 내리 풀었다. 나는 “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고, 지금 수술을 해야겠으니 가 봐야겠다.” 하고 그의 말을 일축해 버렸다. 조직위원은 어서 가 보라고 하였다.

    그날밤, 원장은 또 전과 같은 회의를 소집하였다. 주제는 진단서문제 였다.

    사전에 포치와 준비가 있었는지 리호사 등 네명의 입당적극분자들은 나에게 맹렬한 블질을 하였다. 포치가 없다해도 정치후각이 예민한 그들은 적극적일 수 밖에. 황차 7.1에 신당원을 받아 들이는 이 대목이 아닌가.

    나는 같은 문학애호가라는 점에서 예리한 분석과 첨예한 비판을 받았다. 우광훈은 락후분자로 결정해 놓고 그를 감싸준 사상본질이 비판할수록 마치도 무슨 반혁명집단을 파듯 했다. 부서기가 몇마디를 했다가 하마트면 그도 련루 될번 했다. 나는 입당은 고사하고 사면초가의 곡경을 치렀다.

    그번의 입당은 희극적으로 원장의 처가 되였다. 차례진 명액이 하나뿐이 였는데 그들부부는 곧 현병원으로 돌아갈 “6.26백의전사”였다. 안해를 입당시켜 산골에 내려왔던 보람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티후 공사당위부서기가 작풍문제로 감옥에 가면서 원장의 처는 궁둥이일이 드러나고 말았다. 후에 안 일이지만 원장은 자기처를 입당 시키기 위하여 장애로 지목되는 나를 들이친 것이였다.

    리호사는 이티후에 공사당위부서기의 “신세”를 입어 끝내 입당을 했다. 그런데 병원약을 가지고 조선장사를 해서 말썽이 많았고 해관의 누구와 또 바람을 써서 개골망신을 했다. 조선서 중고품 텔레비며 랭장고를 장사해 왔는데 사람들은 그를 일부분 당원이 먼저 부유해진 전형인물이라느니 모범이라느니 하면서 풍자 했다. 후에 그는 젊은나이에 불행히 과부로 되여 전부터 알고 지내던 한국 늙은이 한테 제꺽 시집을 갔다. 그리고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바치겠다든 혁명의길에 당증을 팽개치고 한국국적에 넘었다. 한국령감에게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바치겠는지… 그건 더 두고 봐야 알 노릇이다.

    나는 여전히 끈질기게 문학 수업을 견지했다. 정면에서 타격하고 측면에서 조소하고 배후에서 풍자하는 역경이였지만 포부를 변치 않았다. 그리고 작품도 발표 했다. 어떤작품은 일정한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문학에서 우광훈과 비견하면 대학교선생과 소학생 차이다.

    듣는말에 의하면 우광훈은 지질대를 사직하고 연변대학 조문계를 거쳐 문학의 일로를 일심정력으로 달리였는데 지금은 중국조선족 문단에서 한자리 딛고 선 유능한 중견작가이며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부주석이라고 한다. 해외에서도 우광훈을 알아 준다고 하니 보통이 아니다.

    우광훈과 나는 부지런히 자기의 포부를 실현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우광훈이는 나보다 재수가 더 좋았다. 개방이 되고 대학문이 열리고… 그것이 진단서를 뗀후 얼마안되여 우광훈이 앞에 번쩍 다가 왔든 것이다. 그때 나는 이미 아이가 셋이나 되는 중년이였다.

    나는 후회는 없다. 의사로서의 직책을 유감없이 리행했고 문학도 나름껏 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사회와 인민을 위하여 한생을 살리라 다졌던 청춘의 포부와 초심을 시종 변치않고 오늘까지 왔기 때문이다.

    정확하고 원대한 포부를 품고 일단 목표를 확정한후 끈질기게 열심히 실현을 위하여 노력분투하는것이 청년의 길일것이다.

    진단서를 떼 준후 지금까지 나는 우광훈이를 한번도 만나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문학의 길에서 잘 나가는 것이 내일처럼 기쁘다.

    물론 나도 노력분투한다….

                                                                                                                          0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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