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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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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방아
2014년 08월 09일 16시 15분  조회:2647  추천:2  작성자: 회령
        수필
                                                       보리방아
                                                                                                                       회령

   조선사람이라면 보리쌀 보리밥 보리가을 보리마당질 보리방아 보리고개… 하여튼 보리를 다 알것이다. 우리민족의 보리에 대한 사랑과 애착 그리고 애환 끈끈한인연… 절절한 감정은 길고도 깊다. 보리에 대한 나의감정은 항상 슬프다.

   어느날 아침 부인이 별미로 보리밥을 지었다. 밥을 먹으며 나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주루루 흘렸다. 부인은 별미를 먹는 내표정이 어떤가를 관찰하고 있었는지, 의아한 기색으로 왜서 눈물을 흘리냐고 물었다. 나는 슬픔과 함께 눈물이 왈칵 치솟아서 식탁에서 물러났다. 말그대로 목이 꽉 메여 밥을 먹을수 없었다…

   광복이 된후 이듬해 봄 우리집은 조선 무산에서 어머니의 고향마을인 샘물깨로 두만강을 건너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소작살이 신세를 면해보려고 조선 청진 등 시가지에 가서 품팔이를 하다가 무산철광에 벌이가 좋다해서 그곳에 갔다가 이젠 샘물깨도 좋은세상이 되였다고 해서 고향마을로 되 돌아온 것이다. 10여년만에 그립던 고향으로 돌아 온 것이다. 돌아 온 해에는 3.7제(소작의 7할은 우리가 먹음.)로 뒷마을(아버지의 고향) 최지주(부농)네 농사를 지었다. 10여년전에 비하면 그야말로 좋은 세상이였다. 그때는 3.7제 2.8제(지주가 7,8할을 가짐.) 혹간 반작(소작을 절반씩 나누는것. 지주들은 버려도 아깝지 않을 밭때귀를 반작으로 주기도 했다.)을 했다. 아버지 어머니는 성수나서 열심히 농사를 지었는데, 명년에는 토지개혁을 해서 땅 없는 사람에게 밭을 분배해 준다고 하지 않는가?! 천지개벽보다 더 희한한 소문이였다.

   1947년 봄! 토지개혁이 정말 벌어졌다. 공산당의 은덕을 어찌 한입으로 다 말할수 있으랴!...

   그런데 우리는 아니였다. 그것은, 마을의 권력을 잡은 빈고농협회 허씨네가 우리에게는 밭을 줄수 없다고 딱 잡아뗏기 때문이다. 당시 계급획분을 하고 정식으로 가정성분을 결정할때 광복전 3년의 경제상황을 참조한다는 정책조목이 있었다. 허씨네는 샘물깨에서 제일 째지게 가난한 집들이였는데 사람들이 남녀가 하나같이 성미가 사납고 이악스러 웠다. 특히 큰허씨부부와 그의 작은삼촌은 말을 잘하고 성미가 우악스러 웠다. 그들은 청산투쟁에서 맹장이였고 토개공작대 최동무와 단짝이였다. 최동무는 빈고농협회주임인 큰허씨의 아낙네와 보통관계가 아니였다. 허씨네는 “3년경제상황참조”라는 정책조목을 확대발휘하여 갓 이사 온 우리와 똥돌이네를 샘물깨 사람으로 인정할수 없다는 것이였다. 아무리 여겨봐도 순전한 거렁뱅이가 명백하건만,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알수없고 때문에 성분을 매길수 없으니 이들은 샘물깨사람으로 호적에 넣을수 없다고, 그러면 타지방사람이니까 밭을 줄수 없다는 것이였다. 그때 연변전원공서에서는 이주민조직사업을 토개와 동시에 전개하였는데 우리두집의 출로는 이주민으로 가는 길밖에 없었다. 허씨네가 노린것도 이점이였다. 나눠먹을 인구수가 하나라도 적을수록 좋은게 아닌가. 우리는 세식구지만 똥돌이네는 아이만도 넷이였다.(아버지는 불구인데다 환자였음.) 밭을 분배해도 그렇고 기타의 청산과실을 나누어도 그렇고 그들은 하나라도 더 가지기 위하여 눈에 달이 올랐든 것이다. 그들은 실지로 좋은것을 더 많이 가졌다. 지금와서 분석해 봐도 그 원인밖에 다른 리유는 하나도 없다.

   훗날 토개사업에서의 편차와 차실을 시정할때 우리두집에 대한 처리가 잘못되였다고 마을의 일부 사람들이 잡담으로 사석에서 말을 좀 하였다지만, 그것이 무슨 쓸데 있는가! 그저 그렇다는 것이지… 샘물깨에서는 무얼 시정이고 사정이고 할것이 없다보니 그 계단을 씁슬히 지나갔다. 다만, 그때는 최동무가 이미 떠나간 뒤였다. 그는 쉬쉬한 뒷소리를 달고 있다가 공작대에서 캐출을 맞고 흑룡강 어디에 있다는 제집으로 돌아갔다. 큰허씨는 마을에서 령도자로 있다가 토개후 얼마 안 되여 사망했다. 소문에는 페병에 울화병이 겹쳐서 이른나이에 죽었다고 했다.

   우리패 이주민들은 돈화현 관지구의 깡거우재라는 무인지경 산골로 가서 원시인같은 모진고생을 하다가 쓰탕촌부근의 무인지경 허허벌판에 자리를 옮겨 마을터전을 잡고 토굴막에서 살았다.(지금의 돈화시 관지진 강남촌ㅡ유명한 아름답고 행복한 순 조선족마을임.) 그때의 그 가난과 고생을 어찌 다 말하랴!... 특히 나의 어머니는 수토가 맞지않아 더욱 모진 고생을 하였다. 하나라도 더 잘살아 보려고 아니, 한첩이라도 약을 좀 써 보려고 어머니는 악을쓰고 일하며 버티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약은커녕 보리밥한술 못 잡숫고 세상을 떠나셧다. 42살 젊은나이에…

   강남촌 토굴막에서 어머니는 내 남자동생을 낳았다. 동생은 세살 먹던해 오래동안 앓던 설사로 죽고 아래로 녀동생이 태여났다. 그후 어머니는 또 임신이였는데 그때가 바로 보리고개 막바지인 여름철이 였다. 보리는 이제 십여일이 지나면 가을할수가 있었다. 보리는 오곡에서 제일 먼저 익는 곡식이다. 지금은 맥주요 감주요 술 등 사치한 음식을 만드는데 주재료로 쓰지만 그때는 귀중하고 고마운 농량 생명미ㅡ 목숨이였다. 우리는 보리가을 할날을 손꼽아가면서 고대하였다. 집에는 쌀알이라고는 정말로 한알도 없었든 것이다. 마을사람들은 언제부터 산나물 푸성귀로 연명하고 있었다. 간혹 쓰탕촌 한족사람들 한테서 장리로 겉곡인 조 수수 강냉이 보리를 꿔오는 집도 있었지만 대부분집들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강남촌에는 나의 아버지가 마을사람들을 휘동하여 만들어 놓은 절구 세개와 발방아 한틀이 있었는데 거기에 보리쌀을 찧었다. 보리방아는 적어도 다섯번은 찧어야 하는데 마지막에 가서는 누게를 하고(물을 주는것) 찧는다. 그러나 깔끄러미가 벗겨지지 않기에 다시 말렸다가 또 두번을 쓸어야 먹을수 있는 보리쌀이 된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방아는 보리방아일 것이다. 절구로 찧을때도 그렇지만 발방아로 찧을때는 꼭 시중꾼이 있어야 한다. 긴작대기로 께끼대기질을 하면서(확속의 쌀을 뒤번져 주는것.) 혼자 찧기도 했으나 그건 조력꾼을 얻을수 없는 부득히한 경우였다. 어머니가 보리방아를 찧을때면 내가 꼭 따라나섯다. 악의악식렬악한 환경에서 피골이 상접한 어머니는 악 하나로 벝혀왔는데 이번에는 여러날 조짚거적위에 헌포대기를 덮고 누우셧다. 그리고 자꾸 구역질을 하였다. 물밖에 마이지 못하는데 물도 한모금 마이고는 몇배를 토하군 했다. 나는 어머니가 죽는것만 같아서 매일 겁이났다. 가재나 조개를 잡아오라는가 해도, 풋감자나 호박 열콩따위를 따오라는가 해도 어머니는 다 머리를 저었다. 어머니가 벌써 여러날 아무것도 잡숫지 못하고 맹물도 마이지 못하니 이러다 죽으면 어쩌는가고 내가 울상을 하며 안달아하니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제병이여서(임신기 응당한 일이라는 뜻.) 이제 얼마간 지나가면 일없다.”고 했다. 나는 그런줄로 알았고 그러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그때 아버지는 길딲기민부로 이미 외지에 가고 집에 없었다.

   이러는 어느날 늦은 아침때다. 이웃에 사는 개꼴집할머니가 어머니를 찿아 왔다. 보리방아를 찧겠는데 일손을 도와달라는 것이였다. 개꼴집은 령감 로친 량주뿐인데 연길현 개꼬리라는 곳에서 왔다고 했다. 원래는 괜찮게 살아서 중농쯤은 되였는데 부농으로 매기고 청산을 하니 분통을 못이겨 이주민을 자원했는데 보내더라고 했다. 할머니는 한뉘 불임증이였다고 한다. 아버지 어머니는 평소에 그집일을 잘 도와줬다.

   그날 어머니는 보리방아라는 말을 듣더니 기적같이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무더운 여름날 어머니는 호박(방아확)곁에 누워서 께끼대기를 하여 주었다. 한호박뿐이라고 하던것이 일이 빠르게 끝나니 개꼴집할머니는 냉큼 집으로 달려가서 요것뿐이라고 하면서 또 한호박을 가져왔다. 보리방아는 저녘때가 되여서 끝났는데 어머니는 말그대로 기진맥진 하였다. 개꼴집할머니가 고맙다는 치사를 거듭하며 쌀함지를 들고 가려할때 어머니는 렴치불고하고 보리쌀 한바가지만 뀌여달라고 주저주저 어렵사리 말하였다. 어머니의 말이 채끝나지도 않았는데 개꼴집할머니의 안색은 대뜸 새침해 졌다. 요것가지고는 햇보리를 바슴(타작)할때까지는 어방도 없겠는데… 꿔줄것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 아닌가! 그럼 나뱃겨라도 한줌 달라고 하니 개를 여러날 맹물만 먹여서… 꿔주지 못한다고 하면서 뿌르르 제집으로 가버렸다. 내가 호박이며 감자 열콩따위로 푸대죽을 끓이는데 어머니는 밖이 어둑어둑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자리에 쓰러지더니 아이처럼 엉엉 우시였다. 내가 어째서 그러시는가고 거듭 물어서야 어머니는 위에서 말한 사연을 말하였다. 그러면서 “그 보리밥을 한그릇만 먹었으면 살것같겠는데…”하시였다. 내가 다시가서 사정해 보겠다고 하니 어머니는 그만두라고 딱 잡아떼며 손까지 흔드셧다.

   나는 어린심정에도 너무도 분하고 또 원통해서 개꼴집할머니를 모질게 욕을 하며 저주까지 하였다. 어머니는 그러면 못쓴다고 하시면서 가끔 흑흑 느끼시더니 차츰 쉬는듯 조용하였다. 밤은 어느때가 되였을가? 나도 꿈나라로 들어갔다. 꿈에 개꼴집할머니와 대판드리 싸우면서 보리쌀함지박을 빼앗아 동댕이를 쳤는데 어데서 어머니가 불쑥 나타나면서 “너, 이게 무슨짓이냐?! 어른께!” 하면서 모진호통을 하는게 아닌가! 깜짝 놀라며 눈을 뜨니 해가 닷발이나 떠올랐다.

   어머니는 구역질도 하지않고 꼬부리고 누워있었다. 나는 어머니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무얼 잡술만 한가고 거듭 물었다. 어머니는 아무런 응대도 없었고 얼음처럼 차거웠다… 바로그때 똥돌이 어머니가 호박잎으로 덮은 사발을 들고 바당에 들어섯다. 그는 살뜰한 음성으로 “헹님에 이걸 좀 잡술만 하것는지. 겨우 보리쌀 한줌을 넣고 불개밥을 했슴메. 한술 들어보시소.”…… 그보리밥은 랭수한사발과 함께 어머니 젯상에 댕그랗게 올랐다.

   그후부터 나는 보리를 피끗 생각만 하여도, 보리라는 말만 들어도 어머니가 생각났다. 보리밥을 먹을때면 아예 먹지않거나 할수없이 두어술 뜨고 말았다. 목이 메여와서 먹을수 없었다. 아버지는 우리남매를 데리고 한뉘 사셨는데, 내가 너무도 보리밥을 먹지 못하니 수전농사벌방으로 이사를 했다. 그후부터 오늘아침까지 나는 보리밥을 한번도 먹지 않았다. 세월이 약이라지만 보리는 나의 가슴속에 슬픔으로 지금도 살아있다.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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