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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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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헌병대 통역
2017년 05월 08일 10시 55분  조회:1382  추천:0  작성자: 회령
           회상기
                                              일본헌병대  통역(1.)
                                                                                                   류동호  (회령 정리)
차례

1. 복수

선죽교
통군정
신의주상업학교
복수

2. 일본헌병대 통역
문학수업
일본헌병대 통역
랍치

3. 팔로군
적공부 간사
로소한

4.조선의용군
태항산
연안
심양
할빈
첯사랑

5. 중국인민해방군
연통산
장춘

6. 일편단심
사업
가정

후기

                                           일본헌병대 통역 (1)
 
 
             1. 복수
 
선죽교
 
    래일 우리집은 신의주로 이사를 가게된다. 나는 학교에 가서 전학증명서를 뗀후(개성공립보통학교)거리구경에 나섯다. 아홉살밖에 안되는(1930년) 어린생각에도 천리타향으로 이사를 간다고하니 마음이 쓸쓸해 났다. 어쩐지 이렇게 떠나면 다시는 못 온다는 생각에서 고향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나의 생각에는 고향을 대표하는 곳이 두곳이였는데 그것은 고려충신 정몽주의 이야기가 슴배여 있는 포은서원과 선죽교 였다.

    그때도 개성사람들은 정몽주를 우상으로 자랑으로 받들고 있었다. 개성 사람들은 리성계의 조선왕조에 나가서 벼슬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대역무도한 역적인 조선왕조의 밥은(국록ㅡ월급) 먹지않는다는데서 그랬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정몽주의 이야기를 자주하여 주면서 사람이란 정몽주처럼 학식이 높고 절개가 굳고 일편단심을 변치 않는 사람이 되여야 한다고 하였다. 리씨 조선이 멸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된지도 이십여년이 지나 갔으나 당시 개성에는 일인상점이란 두개밖에 없었다. 그것마저도 고객이 없어서 멍하니 하늘 쳐다보기였다. 사람들은 “저것들은 조선 사람을 살피는(감시하는) 것들이다.”고 하면서 눈에든 가시처럼 여겼다. 조선사람들의 반일감정은 여전히 극한상태 였다.

    나의 할아버지는 출세를 꿈꾸며 열심히 공부룰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나라가 왜놈들에게 망하기 시작하자 공부를 해서 출세한다는 것은 왜놈들의 개가 되는것일 뿐이라고 인정하고 집어쳤는데 설상가상으로 그 즈음 량친마저 선후로 세상을 하직 했다. 하여 살림을 삼대독자인 할아버지가 떠메였는데 일할줄 모르는 할아버지 손에서 가세는 재빨리 기울어지였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자들과 거래하면서 기와집을 한칸 한칸 뜯어 팔아서는 그들에게 활동자금을 있는대로 헌금을 하였다. 그러다가 볼라니까 소위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기생방 술놀이를 일삼지 않겠는가?! 할아버지는 크게 통탄하며 실망하고 그들과의 거래를 끊었다. 그러나 가세는 이미 기울어질대로 기울어지고 셋방살이를 하는 신세였다. 궁여지책이랄가 할아버지는 집매매 거간군으로 나섯는데 생계는 점점 더 힘들어만 갔다. 그는 역시 외독자인 나의 아버지를 열세살부터 “개성양화점”(조선인이 경영.)에 다니며 일하게 하였다. 가세도 가세였지만 왜놈들 세상에서 공부란 쓸모 없는거고 무슨 기술을 배우면 평생 밥술은 먹을수 있을거라는것이 할아버지의 지론이였든 것이다. 나의 할아버지는 왜소한 체격이였으나 성미가 무척 급하고 담대하고 고집스러 웠다. 그는 관청의 일본인 사무원, 순사들은 말할것도 없고 그들 밑에서 일하는 조선인들도 모두 친일파로 보면서 쩍하면 시비를 걸고 싸움을 하였다. 하루건너 그러다 보니 류치장 신세와 벌금, 치료비, 기타 배상비가 거이 비는 날이 없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수그러 들 대신 점점 더 악만 남아서 개성판에서는 유명한 “악도리”로 조명이 났다. 성미가 조폭하다보니 거간업도 잘 될리 만무하였다. 개성바닥을 거이 돌다싶히 우리집은 자주 셋집 이사를 하였다. 그것은 더 눅거리 셋집을 찿다보니 이사는 잦아지고 셋집은 이사를 할수록 헌집이고 작은집이 였다. 셋집은 할아버지가 얻어 놓았지만 수리며 이사는 할머니와 어머니가 전담 하였다. 온순하고 정직한 아버지는 신방으로 하루 거르지 않고 출근 하였다. 월급은 1전 한푼 다치는 법이 없이 할아버지에게 드리였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술과 담배는 전혀 몰랐고 난봉기 같은 허튼짓은 근본 하지 않았다. 나의 할아버지는 량반자존심이 퍼렇게 살아서 남들과도 호통질 하기가 일수였고 식구들도 량반체모를 지키라고 호령하며 신칙했다.

    어느날, 무슨 일로 푸독같이 성이 오른 할아버지는 집에 들어오는길로 할머니와 언쟁을 하였다. 고추가루를 내느라고 할머니가 절구질을 했는데(장을 보기위해) 걷어치우라느니 어쩌느니 하여 시비가 생겼는데, 할아버지가 절구공이로 할머니를 때린것이 그만 생사람을 죽게 했다. 집안에서 생긴 일이여서 덮어 감추기는 했으나 할아버지는 그날로 도망쳐 버렸다. 이티(두해)후, 할아버지는 집으로 돌아 왔는데 얼마후에는 미국인 선교사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는 과부를 맞아 들였다. 할아버지는 다시 거간업을 하며 들락날락 했는데 그때는 무조건 효도만 아는, 양처럼 공손하기만한 나의 아버지가 아니였다. 어머니의 비명횡사는 가슴속에 옹이 박혔고 학교문전에도 가보지 못한것도 새삼스레 원통 하였다. 그때 아버지는 공산주의를 연구한다는 사람들을 무척 흠모하며 따랐는데 그 연구가들은 아버지를 무식쟁이가, 이도 안난것이 콩밥을 먹겠다고 한다며 여지없이 몰아부치며 쫓아버렸다. 집일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안하며 공연히 며느리와 퍼러딩딩해 하는 훗어머니와도 어성버성한 상태 였다.

    어느날 저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대판드리 싸움을 하였다. 할아버지가 갑자기 래일로 셋집을 즉시 옮기라고 분부하자 아버지가 토를 단 것이다. 한달전에 해산하고 산후풍으로 안해는 앓고 있는데 엄동에 이사라고 하니, 그것도 래일로 당장 옮기라고 하니 아버지가 그건 안된다고 했든 것이다. 훗어머니는 선교사집 식모일을 한시도 거를수 없다하고 자신은 신방의 일이 요즘 무척 바빠서 몸뺄 겨를이 없는데… 그래서 안된다고 하니까 할아버지가 대뜸 후끈 했든 것이다. 갖바치를 하드니 이젠 상놈새끼가 다 되였다고 하며 길길히 날뛰였다. 그날 새벽으로 아버지는 어데론가 나가 버렸다.

    당시 우리집은 일곱식구 였는데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와 우리 형제들로는 맏이로 딸 신애, 나, 아래로 딸 경애는 얼마전에 죽고 정애는 태여난지 한달밖에 안 되였다. 일곱식솔이 말그대로 코구멍만한 단칸 셋집에서 살았다. 이사 주견은 할머니 쪼간인지 할아버지 궁냥인지는 모르겠으나 할아버지가 당장 몽땅 나가라고 고래고래 지르는 고함소리는 너무도 섧고 무서웠다. 그날밤 나와 누나는 싸움 말리려 나온 옆집 할머니네 집에 피해가서 쿨쩍쿨쩍 울며 밤을 새웠다.

    서너달후 이듬해 할아버지한테로 아버지편지가 왔다. 돈도 얼마간 부쳐 왔는데, 편지는 신의주에서 왔었다. 자리에 앓아 누윘던 할아버지는 편지를 쥐고 아이들처럼 흑! 흑! 느껴 울었다. 또 두어달 지나서 아버지 편지가 왔다. 어머니더러 아이들을 데리고 신의주로 이사를 오라는 것이였다. 이번에도 얼마간의 돈을 부쳐 왔는데 차표를 사고 남어지는 할아버지에게 드리라고 하였다.

    나는 먼저 포은서원으로 갔다. 일본사람이 문을 지키며 입장료 2전을 내라고 하였다. 처음으로 포은서원에 갔는데 돈이 없다보니 참관할수가 없었다. 몹시 아쉬운 마음으로 우두커니 서 있으며 보려니, 일본사람과 그들의 아이들은 그대로 들어가는게 아닌가! 문지기 일본사람은 그들에게 오히려 깍듯히 인사까지 하는 것이였다. 조선사람에게서는 돈을 받으면서도 거칠고 거만하기가 짝이 없었다. 나는 억울하고도 분했다. 왜서 일본사람이 조선땅에 와서 주인행세를 하는가?! 일본사람은 왜서 조선사람을 업신여기며 우쭐렁 거리는가?! 우리는 왜서 그들밑에서 억눌려 살아야 하는가?! 포은서원이 저들건가?!... 머리속에는 수두룩한 의문과 분함이 가득 했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 까닭을 알수 없었다.

    나는 발길을 돌려 선죽교로 갔다. 선죽교도 이번이 처음이다. 작으마한 돌다리는 선죽교라는 글도 희미했고 복사와 쓰레기로  거이 뭍힐 지경이였다. 그렇게 유명한 이야기가 스며있는 다리가 이럴줄을 몰랐다. 다리위를 오가며 나는 이담 크면 돈을 많이 벌어서 포은서원과 선죽교를 멋지게 만들어 놓고 일본사람들 한테 뽐내며 그들을 이길거라고 생각했다. 어느덧 해는 서산위에 너울너울 하고 개성의 마지막 하루는 저물어 갔다.
 
    류동호는 아홉살에(1930년) 고향인 개성을 떠난후(당시 개성 지정에서 살았음) 그후로는 다시 한번도 가 보지 못했다. 물론 할아버지도 다시는 보지 못했다.  파란만장한 그의 인생길은 고향을 마음속으로만 그리게 하였다.
 
통군정
 
    나는 신의주공립보통학교 3학년에 입학 하였다. 그때로부터 나는 교복을 입었다. 개성에서는 조선옷바지저고리에 팬티도 없이 맨발로 학교에 다니였다. 책은 베보자기에 싸 들고 다니였다. 전 교 400여명 학생속에 나같은 몰골의 학생은 아마  10여명뿐이였을 것이다. 베보자기는 글이 샌다고 하였지만 갈구리가 많은 일본글이여서인지 나는 공부를 잘 하였다. 음악과 체육도 잘 했는데 달리기는 항상 1등을 했다.

    왜놈세상에서 공부를 하는건 쓸모없다고 하던 할아버지가 왜서 나를 공립학교에 다니게 했는지… 할아버지는 왜놈들과 싸우려면, 싸워 이기려면 그들의 글과 말을 알아야 한다고 샣각한 모양이다. 개성에는 사숙도 여러개가 있었고 미국인이 경영하는 학교도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나를 공립보통학교에 다니게 했다. 그리고 공부를 잘 하라고 늘 당부를 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일본글을 떼엑! 떼엑! 일본인 선생을 모방하며 랑독할때면 조선글은 그보다 더 잘 알아야 한다고 자주 엄숙히 말하였다. 그러나 나는 명심하지 않았다. 나는 학교에서 주는(사실은 일본에서 주는) “우”자에만 열심했다. 나는 모든 과목에서 “우”자를 맞았다. 선생님과 상급생을 보면 하루에 열번이고 스무번이고 꼬박꼬박 경례를 하였다 하여 도덕품성도 “우”자를 맞았다. 나는 “우”자를 맞으면 기뻤고 “우”자를 맞자고 더욱 노력 하였다. 학교에서는 일주일에 두시간 조선글을 배워 줬는데 알던 모르던 관계치 않았고 성적에도 넣지 않았다. 그리고 학교안에서는 조선말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2학년까지는 조선말을 하다가 선생에게 들키면 “훈계”를 당하는 정도였지만 3학년부터는 단속이 철저하고 엄격했다. 불러세워놓고 귀뺨을 호되게 치는건 물론이고 목에 손바닥만한 검은패쪽을 온하루 걸게했다(교내에서) 수업정지, 변소청소, 벌금, 지어는 퇴학처벌까지 하였다. 만약 다른애가 조선말 하는걸 발견하면 패쪽을 넘겨주고 수업정지거나 변소청소같은 처벌을 모면할수도 있었다. 이면에서 학생단속을 잘하는 교원은 표창을 받는다고 하였다. 왜놈들의 조선민족말살정책과 수단은 그때 벌써 이렇게도 교묘하고 지독했다.

    신의주에서 아버지는 일본사람이 경영하는 “이와다제화점”에서 일했다. 아버지의 기술은 상당히 높았지만 일본인 학도공보다 신봉은 낮았다. 집세에 물까지 사 먹다보니 우리집생활은 여전히 몹시 가난하였다. 30여원 신봉에서 아버지는 달마다 할아버지에게 생활비를 꼭꼭 보내 드리였다. 두해후 누나 신애는 할아버지가 데리고 있겠다고 해서 개성으로 나가고(그후로 한번도 보지 못함) 동생 정애는 페염으로 밤중에 죽었다.(죽던날 저녘 일본인 병원에 갔다가 해열제 한대를 맞고 돈이 없어 돌아왔다.) 어머니는 그냥 앓는 몸이였다. 정애가 죽었을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돈이 없어 네가 죽었구나!”하며 그말만 거듭하며 슬피 울었다. 그때 나는 무턱대고 이 모든 불행은 일본사람들 때문이고 돈이 없는 탓이라고 인정했다. 크면 돈을 많이 벌겠다는 생각이, 부자가 되여 일본사람들이 부러워하게 하며 눌러놓겠다는 생각이 굴뚝같이 자꾸 치솟았다.

    4학년 때다. 어느날, 5학년의 일본애가 자기대신 변소청소를 하면 돈을 10전 주겠다며 나를 시까스르는 것이였다. 나는 20전을 주면 하겠다고 하면서 되려 그애를 골려 주었는데, 웬걸?! 녀석이 그러자며 통이 크게 노는게 아닌가. 나에게는 20전이면 대단히 큰 돈으로 보였는데… 좋다! 이새끼, 그러면 해보자. 나는 불이 번쩍나게 변소청소를 해 치웠다. 그애는 나보다 큰것은 물론 주먹이 세여 우쭐거리는 앤데 동학들은 그애를 두려워 하며 조심 했다. 내가 변소청소를 끝내고 돈을 달라고 하니 녀석은 휘 검사를 해 보고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집에 갈때 주겠다는 것이였다. 나는 대뜸 머리가 확! 달아 올랐다. 녀석의 멱살을 끌고 변소안으로 들어간후 골받이와 주먹을 날리며 똥구덩이에 처박자고 하니 녀석은 항복한다고 하며 당장 돈을 주겠다는 것이였다. 둘이 엉켜 붙다보니 헌옷을 입은 나는 팔소매가 찢어지는 손해를 보았다. 녀석은 잘못했다면서 팔소매가 찢어진것은 자기때문이니까 배상한다면서 50전을 내여 놓았다. 나는 그럴건 없다면서 20전만 받고 그애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주었다. 무의식 순간에 발생한 일이지만 생각할수록 마음은 떳떳하고 뿌듯하고 통쾌하였다. 그후부터 우리는 비교적 친한 사이가 되였다. 그애는 나에게 그일을 말하지 말아달라고 하였는데 나는 그런 시시한 짓거리는 하지않는다고 담보했다. 그때로부터 나에게는 또 한가지 셈이 들었는데 그것은 내가 옳다고 생각되는건 끝까지 삗친다는 줏대였다. 그것은 나의 성격으로 되고 말았는데 이로해서 나는 훗날 많은 좌절을 당했다.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나는 여전히 학습, 음악, 체육에서 1등이였다. 돈으로는 너회 일본애들을 이길수 없지만 대신 공부에서는 너회들을 절대적으로 이긴다는것이 그때 나의 전부의 결심이였다. 학교에서 나는 꽤 위신이 높았다. 그러나 우쭐렁 거리지는 않았다. 그것은 나의 천성이 그런것 같다. 그리고 나는 항상 나의 정정당당한 실력으로 이기겠다는 마음뿐이다보니 우쭐거리며 너덜댈 필요가 없었다. 승리는, 1등은 다른사람들이 인정해 주는것이니까, 저절로 불어대서 되는것이 아니라고 셈이 들었든 것이다.

    우리집은 또 이사를 하였다. 이번에는 신의주에서 50여리 되는 압록강 위 의주로 이사를 했다. 이사하게 된 리유는 간단하다. “이와다제화점” 주인 이와다씨가 나의 아버지를 은근히 떠 보며 감시하고 공연한 트집을 잡으며 될수록이면 월급돈을 깍자고 하면서도 어데로 갈가봐 을러메고 순종케 하려는것이 아버지에게는 대단히 불쾌하고도 반감이 일게 했든것이다. 이와다는 치사스럽게도 아버지 작업대 위에 때로는 돈지갑을 슬쩍 놓고는 그것을 어쩌는가 지켜보며 나의 아버지를 숭매뜨기(떠보는짓) 하기까지 하였다. 그것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의주에는 김씨가 경영하는 “시대양화점”이란 신발공장이 있었는데 김씨는 언제부터 나의 아버지를 욕심 내면서 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정직한 나의 아버지는 이와다와 언약이 있었기에(여기서 일한다는) 갈념을 안했는데, 이와다가 점점 더 사람을 우습게 알며 이젠 자기에게 매운 노예처럼 취급하려고 드는데서 아버지의 분통이 터졌든 것이다.

    5학년부터 나는 의주공립보통학교에 다니게 되였다. 우리집은 의주에서도 여전히 셋집살이를 하고, 이렇게 나는 소학교 6년을 세개학교를 다니게 되였다. 의주에서도 나는 공부를 잘하여 소문이 났다. 하지만 조선글은 잊어 버리다싶히 되였다.

    그것은 6학년 졸업학기 였다. 어느 화창한 봄날 나는 동창생친구 리임곤이와 함께 통군정 구경을 갔다. 그 당시 통군정은 조선8경의 하나라고 했다. 통군정은 외적의 침략을 물리친 선렬들을 기념하여 세운 력사유물이다. 그 위에 산꼭대기에는 “충혼비”가 세워져 있었는데 그것은 왜놈들이 로일전쟁에서 죽은 저들 관병을 기리여 세운것이다. 통군정에서 바라보는 산아래 압록강 일경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내가 “충혼비”도 보자고 하니 임곤이는 그건 왜놈들이 죽은것이여서 보면 안된다고 하면서 우리는 크면 독릴단을 따라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였다. 이런말을 그날 나는 처음으로 들었다. 그러나 나는 임곤이처럼 그렇게 셈이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임곤이에게 “너는 크면 독립단을 따라 가라. 나는 맏아들이니까 돈을 벌어 집부터 살려야 겠다.” 하고 말하여 임곤이는 대단히 불쾌해 했다. 말은 비록 그렇게 했으나 속으로는 임곤이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후 학교에서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 했는데 누가 학교변소벽에 “삼천리 금수강산 삼천만 동포야! 잠을 깨라!”라고 락서를 한 것이다. 그로해서 우리 졸업반애들은 곤욕을 치뤘다. 나는 임곤의 작간이 아닐가 의심은 했으나 입밖에 말할수는 없었다. 얼마후 아버지와 그게 무슨소린가고 물으니 아버지는 크면 다 알게 되니까 어데가서 함부로 말하면 안된다는 것이였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일본사람과 조선사람은 앞으로 생사판가리 싸움을 피면할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그 싸움에는 나도 례외가 아닐거라고 생각 되였다.
그러나 훗날 일본헌병대통역이 될줄은 천만 꿈에도 생각 못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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