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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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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헌병대 통역(2)
2017년 05월 10일 14시 26분  조회:1331  추천:0  작성자: 회령
                                                     일본헌병대 통역(2)
신의주상업학교
 
    학교를 졸업하자 나는 이제부터는 일을 하며 아버지를 돕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신의주상업학교 시험을 치라고 하였다. 크게는 받들어 줄 힘이 없지만 어떤일이 있어도, 무슨짓을 해서라도 거기까지는 시발(시중)을 할테니까 공부를 더 하라는 것이였다. 어머니는 네가 졸업할때까지는 죽지않고 뒷바라지를 할것이라 하였다. 그때 우리집은 내 아래로 영애가 있고 그 아래 순애는 한살도 못되여 죽었다. 그리고 영호가 태여나서 식솔은 다섯이였다.(후에 막내로 정호가 태여났다.) 집은 여전히 구차하고 어머니는 지병으로 앓으면서도 약한첩 써보지 못했다. 나는 목이메여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 말을 따르기로 했다.

    나는 50여리 압록강 강판길을 걸어가서 신의주상업학교 시험을 쳤다. 나에게는 시험이 쉬웠다. 그런데 우습고도 너절한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갓 태여난 일본황태자의 이름을 쓰라는 것이였다. 아무리 하늘같은 천황페하라고 하지만 그의 갓난애 이름을 세상사람들이 어찌 알겠는가. 기저귀에 싸여있는 애이름을 우리또래가 알턱이 무언가. 시험문제는 천황이 아들을 본데 대하여 열광적인 축하를 하고 그리고 그 아이를 하늘같이 칭송한 아첨쟁이의 시를 써 놓고는 아이 이름을 대라는 것이였다. 이런 뚱단지 같은 시험문제가 나오리라고는 누구도 생각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쾌재를 부르며 제꺽 써 넣었다. 어느땐가 일본애가 보는 “소년구락부”라는 잡지에서 그런시와 애이름을 피뜩 본 기억이 났든 것이다. 나는 똥포대기에 싸여있는 애이름을(쯔끼노미야 아끼히도) 쓴후 출생지, 생년, 월, 일까지 썼다. 그리고 묻지도 않은 애비 에미 이름도 썼다. 나는 최우수 수석으로 록취되고 개학식에서 전 교 사생들 앞에 나서서 표창까지 받았다. 나는 일본애들을 이긴것이 무척 흐믓했다.

    그해, 일은 또 묘하게 풀리였다. 그것은 내가 신의주상업학교에 붙자와 같이 우리집이 신의주로 이사를 하게 되였든 것이다. 의주에서 아버지의 학도로 있던 백룡구씨가 신의주에 제화점을 차리면서 나의 아버지를 극력 끌어당긴 것이다. 백씨는 부자첩으로 들어 앉은 누이가 한밑천 잡아줘서 신방을 꾸리게 되였다.

   전문학교에서 신의주상업학교라고 하면 당시 일본 조선 만주에서 제일 이름이 높은 학교였다. 학교에서는 조선학생과 일본학생을 각 절반씩 모집했는데 월사금은 3원50전, 졸업시 일본수학려행을 가겠으면 달마다 1원을 더 내야 했다.(나는 아예 포기했다.) 학제는 5년인데 한개학급에는 다섯개반이고 반마다 학생은 50명, 조선학생과 일본학생이 반반이였다. 학과는 20여개고 복장 모자 신은 통일적이며 가방은 국방색배낭식이 였다. 선생은 몽땅 일본인이고 군인식 통일제복이 였다. 교칙은 반군사화로서 매우 엄격했다. 조선말 조선글은 절대적으로 엄금 했고 학기마다 한달씩 군사훈련을 받았다. 교관은 현역장교로서 대위 혹은 소좌 였다. 학생들은 매일 일기를 써서 선생의 검렬을 받아야 했다. 천황페하와 대일본제국을 가송하고 충성을 다진 일기는 좋은것으로 높은점수를 주고 애매한 소리가 있는 일기는 선생의 호된 닥달을 받았다. 학교는 전형적인(모범적 표본적) 노화교육, 파쑈교육 현장이였다. 학교의 취지는 “천황페하께 절대 충성하는 대일본제국의 젊은이를 양성한다!”는 것이라고 번듯히 내 걸었다.

    나는 2학년까지는 모범학생이였다. 그런데 사달은 3학년부터 생기 였다. 그것은 한반위인 장창순이를 친하면서 부터다. 학교에는 여러가지 과외써클이 있었는데 나와 창순이는 신발만 통일적인 롱구부에 들었다. 격검, 유도, 야구, 정구, 수영, 배구대, 축구대, 그리고 문예써클들이 있었는데 욕심은 났으나 거기에 들자면 갖춤새가 많아서 들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써클의 애들과 시합을 해보면 실력이 어슷비슷 했다. 창순이는 두리둥실한 얼굴에 키가 크고 실팍했다. 그런데 심한 얽둑곰보 였다. 인물은 그랬으나 마마자국마다 슬기가 고였다는 말과 같이 그는 총명하고 학습을 잘 했으며 롱구를 잘하고 힘이 쎘다. 말수가 적고 듬직 했는데 문학을 지향하는 진짜문학도 였다. 그때까지 나는 학교에서 주는 책 외에는 다른책은 별로 접촉해 보지 못했는데 창순이와 친하면서 부터는 문학세계에 풍덩 빠지게 되였다.

    나에게도 문학소질이 있었는지 창순이가 보았다는 문학서적은 밤을 패가며 몽땅 탐독을 했다. 우리는 시간만 있으면 문학을 이야기 했는데 공동언어는 저도 모르게 공동리상으로 되였다. 창순이는 학교를 졸업하면 취직을 해서 생계를 보장하며 문학에 정진하겠노라 하였다. 나는 할바에는 불이번쩍나게 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학교는 부모님들의 성의를 봐서 졸업은 하겠지만 졸업후 10년을 기한으로 세상을 방랑하며 견문을 넓힌후 소설을 쓰겠다고 하였다. 창순이를 온당파 현실형이라고 한다면 나는 급진파 리상형이랄가, 하여튼 그때 나는 문학에 열광 했다. 청년기에 들어서면서 나의 성미는 칼날같이 날카롭고 급해지였다. 그리고 두려움을 몰랐다. 일본애들이고 선생이고간에 경우시비상 내가 옳다고만 인정이 되면 지려고 하지 않았다. 일본애들과는 두마디 안짝에 주먹이 나가고 나보다 센 애라도 팔매같이 날려 들었다. 나는 동학들 사이에서 “겐까도리”(악도리)로 불리웠다. 부모들은 동호는 점점 할아버지를 닮아 간다며 근심했다. 그러나 나는 대수롭지 않았다. 개성바닥에서 정몽주 하나만 태여나라는 법은 없을것이다. 사내가 세상에 태여나서 떳떳한 삶을 살아야지 비굴하게 틀린것에 머리를 숙이겠는가… 그때 나의 인생관에는 이런 알맹이가 박혔든것이다. 창순이는 듬직하고 너그럽고 무던했다. 그는 “야! 곰보야!” 해도 빙그레 웃으며 “왜, 무슨일이 있니?” 하는 성미였다. 창순이네는 아버지와 형 장창용(1945년봄 연안에서 해후함. 남만지대ㅡ조선의용군1지대 1대대장, 1946년 무송에서 토비숙청전투에서 희생. 의주공립보통학교 동창생 리임곤이도 그때 희생.)이가 운송회사직원이고 집살림은 괜찮은 상태였다. 나는 창순이 교복이며 가방, 교과서를 물려 가지기도 했다. 창순이는 나의 잊지못하는 좋은 친구였고 문학의 뜻을 실현 하지는 못했으나 자별한 문우 였다.(조선전쟁에서 희생)

    소위 문학을 하느라고 나와 창순이는 닥치는 대로 많은 책을 보았다.(일문서적) 방학에는 둘이서 무전려행(방랑)을 다니기도 했다. 우리는 밤이면 호떡집에 가서 호떡을 받아서는 려관이며 술집으로 다니며 팔기도 했다. 그때 그렇게 고학을 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호떡은 술집에 가면 잘 팔리였다. 술이 서너순배가 돌면 사내들은 옆에끼고 앉은 아가씨들의 응석을 잘 들어줬다. 아가씨들이 호떡을 먹겠다고 하면 통이 크게 모판채로 사기도 했고 때로는 거스름돈도 손을 휙 내저으며 받지않기도 했다. 나는 그 꼬락서니가 가소롭기는 했으나 입으로는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우리는 이렇게 번 푼전도 책을 사 보는데 썼다. 일본집으로 돌며 잡지거나 소설책을 한책에 5전씩 사서 본후 페지로 팔아서는 또 낡은책을 사서 보았다. 우리가 하리라는 소위 문학은 일본글문학이였다. 보는 책은 몽땅 일본글이 였다. 당시 조선책은 매우 적었다. 그때 나에게 깊은 인상을 준 소설로는 고리끼의 “동년” “나의대학” “어머니” 등이였다. 당시 히노아시헤이의 소설 “분뇨담”이 무슨 1등상을 받고 돈도 대단히 벌었다고 하며 사회에 인기가 들썽했는데 우리는 그것을 본후 “그따윌 갖고!”하며 아주 깔보았다. 그따위 똥오줌이야기가 1등이라면 우리도 지금 당장 열배는 나은 소설을 쓸것만 같았다. 진보적 사회과학서적들도 보긴 했지만 알둥말둥한건 둘째로 치고 우선 재미가 없었다. 문학에 미치다 보니, 제대로 말하면 소설책에 미치다 보니 학과는 언녕 구중천에 달아났다. 나는 대뜸 꼴찌 2등생이 되였다. 겨우 급제를 맞으면 만세를 불렀다.

    5학년, 졸업을 몇달 앞두고 나의 인생에서 큰 사변이 발생 했다.

    어느날, 중국 청도상업학교에 다니는 최원규(신의주공립보통학교 동창.)가 우리학교로 와서 우리 몇은 반갑게 만났다. 원규는 꽤 잘사는 집 앤데 우리학교로 전학을 하려고 왔던 걸음이였다. 우리는 원규가 한턱 낸다고 해서 중국집으로 가서 짜장면을 한그릇씩 먹었다. 식사가 끝나서 밖으로 나왔는데 원규가 그만 호신용 단도를 중국집 밥상밑에 두고 나왔다는 것이였다. 우리는 원규를 따라 중국집으로 갔다. 원규가 칼을 찿으니 주인은 좀 기다리라고 했는데, 잇따라 조선인 순사가 헐레벌떡 뛰여 들었다. 그길로 우리 다섯은 경찰서로 끌려가서 류치장에 같히고 취조를 받기 시작했다. 취조는 밤낮 사흘이나 진행 되였다. 고함치며 때리고 기승을 부리는 것이 잡아먹을듯 그저일이 아니였다. 고등계 안경쟁이 말라깽이는(일본인) 살무사처럼 표독하고 우리를 잡아온 조선인 김순사는 미친개처럼 앙칼스러 웠다. 3일후 우리는 녹초가 되여 경찰서에서 풀려 났다. 그사이 집까지 수색을 당했는데, 우리는 “불량청년”으로 퇴학처벌을 받았다. 나는 “불량청년”이라는 딱지가 원통하고 분했을뿐 학교를 퇴학 맞은건 대수롭지 않았다. 까짓것! 졸업하고 취직한댔자 남의 밑에서 눈치를 보며30원짜리 직원따위나 되는걸, 노가대 로동판에 다녀도 그만한 돈은 얼마든지 벌 자신이 있었다. 그보다도, 나는 문학가로 될것이니 고리끼처럼 오히려 차라리 잘되였다 했다. 락심천만해 하는 부모님 보기는 정말 미안 했다. 그러나 무슨방법이 있겠는가… 나는 이튿날부터 노동판을 찿아 다녔다.
 
복수
 
    신흥 공업도시로 일어서는 신의주에는 노가다판이 많았다. 일본말 일본글에 막힘이 없고 팔팔한 청년이다보니 일자리 얻기는 식은죽 먹기였다. 나는 방사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원자재와 성품을 밀차에 실어 나르는 로동인데 얼마를 하면 얼마를 전표를 떼여 줬다. 그리고 열흘에 한번씩 간조를 주었다. 억세게 일하면 3,40원은 벌수 있을것 같았다.

    만약에 개성을 량반적 도시라고 한다면 신의주는 상놈의 도시라고 할가, 사회는 복잡하고 치안은 혼란 했다. 우선 인군 구조부터 복잡하다. 조선사람, 일본사람, 중국사람, 그리고 코대도 여러가진데 흑인도 때론 나타났다. 신의주에 모여든 사람들은 신분이 각양각색이고 하는일이 각가지고 류동이 심했다. 절도, 강도, 강간, 싸움, 지어는 살인도 발생했고 공사장의 사고, 화재, 정전… 마치도 란리판 같았고 복마전 같았다. 2차세계대전의 광풍속에서 일본의 대화침략전쟁은 본격적으로 진행중이였다. 하여 소위 만주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신의주는 매일 더욱 북적이며 법석 끌었다. 일본군대들의 이동, 반일투사들의 활동, 학생시위, 로조의 파업, 순사들은 매일 벌컥뒤집힌듯 뛰여다니고… 크고작은 사건들이 벌둥지를 쑤셔놓은듯 말그대로 비일비재 였다.

    로동판으로 다니며 나는 생각 하였다. 나의 인생목표는 문학 ㅡ 작가가 되여 소설을 쓰는것인데 로신이나 고리끼와 같은, 적어도 히노아시헤이를 릉가하여 세상에 명성을 떨칠뿐만 아니라 뭉치돈이 저절로 굴러오게 해야하겠는데 그날을 앞당겨 오자면 이미 가졌던 생각ㅡ 10년 방랑이 가장 좋은 첩경이라고 확신 하였다. 그리고 커다란 타격과 랑패로 해서 기맥을 버린 부모님들을 구하자면, 그이들께 광명과 영광과 행복을 안겨 드리자면(나의 임무가 아닌가!) 하루빨리 문학으로 대성을 하는 길밖에 없었다.

    어느날, 나는 하루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창순이를 찿아 갔다. 창순이는 졸업한지 1년이 다 되여 가지만 그때까지도 취직을 못하고 있었다. 심한 곰보때문이 였다. 창순이는 소설책을 보고 있다가 나를 반겨 맞아 주었다.
    “문학을 하자면 먼저 일본부터 두루 돌아 보아야겠는데 가지 않겠니?”
    “나는 방랑은 지금도 생각이 없다.”
    “그럼 나 혼자 간다. 자주 련계를 할게.”
    “떠날때 꼭 알려라.”

    저녘까지 먹고 밤이 퍼그나 깊어 나는 집으로 돌아오게 되였다. 내가 얼마전에 불타버린(원인은 모르겠다. 쉬원하기 그지 없었다.) 그 짜장면중국집을 지나 한참 걸었는데 앞에서 어떤사람이 비틀비틀 걸어 왔다. 이게 누구냐?! 우리를 잡아가던 그 조선놈 김순사가 아닌가?! 야! 오늘 잘 만났다. 이래서 원쑤는 외나무다리서 만난다고 했구나! 스쳐지날때 다시 한번 눈박아 보니 틀림없는 그놈이였다. 일이 되자고 그랬는지 마침 앞뒤에는 인적이 없었다. 서로 엇바뀌자 마자 나는 젖먹던 힘까지 다 내여 돌멩이로 놈의 뒤통수를 힘껏 깠다. 그리고는 곁골목으로 내뺐다.(밤이 깊은데다 으슥한 골목길을 걸어야 하기에 돌멩이를 쥐고 왔다. 창순이는 자라고 했다. 놈은 즉살했다고 소문이 났다.) 며칠은 긴장하며 가슴이 떨렸다. 이일은 부모와는 말할것도 없고 창순이와도 말할수 없었다. 차츰 나의 배짱은 든든해 갔다. 좋은사람을 기어코 잡으려 드는 그런 망나니는 원래 언녕 죽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에서 였다. 나는 속이 후련해 나기까지 했다.

    그후 한달가량 지나서 일본으로 건너갈만한 로비가 마련 되였다. 일해서 번 돈은 아버지에게 드리면서 얼마씩 뜯어 모은 것이다. 일본으로 가자면 경찰서의 통행증이 있어야 하는데 증명은 고등계에서 떼여 주었다. 어느날 오전 나는 경찰서 고등계를 찿아 갔다. 증명수속은 안경쟁이말라깽이살무사 담당이였다. 놈은 이름을 묻고 호적부를 보며 나를 면목이 있다는듯 흘끔흘끔 쳐다 보더니 서류궤에 다가가서 무슨 기록부를 뒤적였다. 잠간후 내앞으로 다가온 놈은 불이 번쩍나게 귀쌈을 때리며 “너같은 불량선인은 대일본제국으로 못간다!”하고 고함을 치는것이였다. 내가 왜 불량선인이야! 네놈이 억지로 쒸운게 아닌가. 이, 쌍놈이새끼! 나를 퇴학맞게하고 또 앞길까지 막아?! 나는 왈칵 치미는 분노를 겨우 참으며 밖으로 나왔다. 쌍놈새끼! 너 잘되나 나 잘되나 두고 보자. 성공한후 네놈을 꼭 찿을거다… 나는 이발을 갈며 속으로 줄욕을하고 윽별렀다.

    네놈의 일본은 못간다고 했지? 그러면 중국으로 간다. 그거야 네놈도 어쩔수 없겠지? 네놈의 그 거미다리만한 일본에 비하면 중국이야 진짜 어른이지. 차라리 잘됐구나. 나는 그길로 신의주 기차역으로 갔다. 발차시간을 알아보기 위해서 였다. 내가 시간표를 바라보고 섯는데 누가 어깨를 툭 쳤다. 의주농업학교에 다니는 친구 장기호 였다. 그의 집은 사리원에 있었는데 괜찮게 사는 모양이였다. 그는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아 봉천(심양)쪽으로 가볼가해서  신의주로 나오긴 했는데 고려중이 라고 했다. 우리는 10월 1일에 떠나기로 약속을 했다. 그것은 내가 간조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기호와 헤여지고 나는 창순이를 찿아 갔다. 창순이는 집에 없었다. 나는 10월1일에 중국으로 간다는 것과 함께 방랑하지 못함이 아쉽지만… 10년후에 만나자는 쪽지를 써놓고 돌아섯다.

    간조를 받은날 오후 나는 압록강변으로 나갔다. 고즈넉한 곳에서 조용히 앞날을 두루 생각하며 무엇을 쓰기도 하고 미역도 감으려 했다. 내가 강변 오솔길을 따라 스적스적 걸어가며 앞을 바라보니 아래 위 버들방천이 좀 사이뜬곳에서 웬 사람이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어쩐지 눈에 익은 사람 같은데… 가까이 가며 바라보니 아니, 고등계 안경쟁이가 아닌가?! 본능적이였든가? 주위를 살펴보니 아무도 없었다. 나의 가슴은 세차게 방망이질을 했다. 쌍놈새끼! 오늘 죽어봐라! 나는 아닌보살을 하고 놈의 뒤로 난 오솔길을 따라 슬슬 걸어 갔다. 강과 오솔길은 평행으로 뻗었는데 강변에 앉은 안경쟁이와 오솔길은 두어발작 사이가 떴다. 무슨 사색에 잠겼는지 죽을때가 되였는지 놈은 내가 등뒤에까지 갔는데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주먹을 불끈쥐고 광도뛰기를 하듯 두발굼치로 놈의 등을 힘껏 냅다 질렀다. 놈은 가뿐하게 물속에 처박혔다. 수면은 아무일도 없었던듯 잔잔하고 강물은 넘실넘실 흘러 갔다. 강변에도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사위는 여전히 조용 했다. 나는 오솔길을 따라 되돌아 내려오며 은근히 강변을 살피였다. 안경쟁이는 다시 보이지 않았다.
 
    두차례의 살인(1938년8월초, 9월중순의 일임.)을 류동호는 나에게 처음으로 말한다고 하였다. 왜서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는가고 물으니 그는 “말하면 증실인이 없기에 오히려 복잡한 문제로 될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 지금은 무엇때문에 말하는가고 더 물으니 “나는 누구처럼 력사를 외곡하거나 떼고 보태며 가공할 리유도 없으니, 이 나이에 이젠 아무런 바랄것도 두려울것도 없으니… 비밀도 필요 없고… 지난일들을 그대로 말할뿐이다. 력사는 사실대로 말해야 하며 말은 량심있게 해야 한다. 나는 지금도 생각하면 통쾌하다.”고 하였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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