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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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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헌병대 통역(4)
2017년 05월 14일 13시 34분  조회:1280  추천:0  작성자: 회령
                                                  일본헌병대 통역(4)

일본헌병대 통역
 
    압하양행에서 뛰쳐 나온후 며칠 지나서다. 어느날 서점으로 가서 문학서적들이 진렬된 서가를 두루 훝어 보니 히노아시헤이의 소설 “보리와 병사” “땅과 병사”가 있었다. 내가 책을 뒤적이며 보고 섯는데 누가 허리를 꽉 껴안았다. 이게 누구냐?! 창순이와 기호 였다! 긴말을 짧게 한다면 창순이는 삼촌의 교육하에 신의주로 돌아 가다가 천진에서 내렸다. 이미 지내본봐지만 신의주에서는 일자리 찿기가 힘들고 여기까지 온바에 차라리 이곳에서 직장을 얻을가 해서였다. 한달 거이 헤매고 다닌 끝에 꽤 마음에 드는 일터를 찿았다. 그것은 탕그스텐을 생산하는 공장에서 보조회계 자리를 얻은 것이다. 기호는 천진에 있는 사촌형과 함께 약담배 장사를 한다고 하였다. 창순이는 자기한테로 가면 취직이 될것이라고 했고 기호는 함께 약담배 장사를 하자고 했다. 최원규도 함게 한다고 했다. 몇탕만 뛰면 뭉치돈을 벌수 있다는 것이였다. 나와 창순이는 그런일은 꼬물만치도 하고싶은 생각이 없었다. 우리는 사회 지성인 문학가를 지향하는 사람으로 사회를 해치는 그런 잡종망나니는 뒬수 없었다. 굶어 죽는한이 있더라도! 나는 며칠 더 지난후 련락을 하겠다고 창순이와 약속 했다. 그날 우리는 기호가 한턱 쓰는 바람에 배불리 먹었다.

    2,3일후 발길 가는대로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한 곳에 이르니 그곳은 천진일본헌병대 대문앞이였다. 량켠에는 무장을 한 병사가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정문앞에는 공시판이 세워져 있고 거기에는 “통역모집”이라는 붓글씨 광고가 붙어 있었다. 헌병대통역이라면 어떤성질의 직업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이 꽤 신분있는(점잖은) 일일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이 있었다. 보초와 내역을 물으니 대문안 층집을 가르키며 그곳에 가서 알아보라는 것이였다. 현관에 들어서니 수직이 사연을 묻고 1층에 있는 한 사무실을 가르켜 주었다. 노크를 하니 일본말로 “들어 오시요.” 하는 대답이 들렸다. 정숙하고 위엄이 풍기는 방안에는 넥타이를 맨 중년의 사내가 커다란 테블뒤에 젊잖게 앉아 있었다. 무표정의 엄숙한 사내였다. 그는 용건을 물은후 통역모집에 대하여 간단히 말하고는 등기표를 주면서 5일후 오전 10시에 등기표와 증명사진 두장을 갖고 자기한테로 오라는 것이였다. 그날 시험을 친다고 하였다. 월급은 40원이고 숙식, 이복, 치료, 등등 기타는 현역헌병과 기본상 동일시 한다는 것이였다. 나는 응모해 보리라 결심 하였다.

    나는 그길로 창순이를 찿아 갔다. 그도 시험치게 하려는 생각에서 찿아 갔는데 창순이는 뜨직해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그건 보통직업이 아니고 정치 같은데, 왜놈들 밑에서 그런일을 하는것이 좋을것 같지 않다고 하였다. 그리고 안정된 생활이 아니면 가정살림이 문제가 될것 같다는 것이였다. 자기는 곰보여서 보나마나 인상에서 미끌어 질것이고… 회계가 제일이라고 하였다. 나는 10년안에는 장가를 가지 않을거니 가정살림 같은건 나와 상관 없는거고 통역만 하는데 정치와 무슨 련루가 되겠냐고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 했다. 훗날 나는 창순이 말을 우습게 들은것을 너무도 후회를 했다. 말그대로 일실족 천고한이 였다.

    시험치려 온 사람은 40여명 되였다. 모두가 중, 장년들이였는데 맵시가 허술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넥타이까지 매고 신사풍이 였다. 보통 차림의 애숭이 청년은 나 하나뿐이 였다. 시험지는 두장이였다. 한장은 한문을 일문으로 번역 하라는 것이고 다른 한장은 일문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것이였다. 소학생 수준급이였다. 한시간의 시험시간을 나는 20여분에 마치고 시험지를 바치였다. 시험생들은 오후 3시에 다시 오라고 하였다.

    오후 3시, 시험관이 합격자 명단을 발표했는데 모두 3명이였다. 나도 그중의 하나였다. 시험관은 한사람씩 어떤 사무실로 데려 갔는데 제일 처음으로 나를 데려 갔다. 으리으리한 사무실에는 헌병대위가 잔뜩 위엄기를 뻗치고 앉아 있었다. 대위는 엄엄한 눈길로 나를 지켜 보드니 첯마디로 “전선에 가겠는가!”하고 엄숙히 물었다. 전선의 총알을 나와는 상관없는걸로 아는 나는 “가겠습니다.” 하고 제꺽 대답 했다. 원래 전쟁터에 가보고 싶어하든 내가 아닌가! 나는 그 순간 기쁜 심정에 가슴이 울렁거리기까지 하였다. 대위는 일본헌병대통역용원(민간인, 고용인원)으로2년을 복무한다는 보증서를 쓰게하고 소개신과(거기에는 나의 증명사진을 붙이였다.) 차표값이라며 돈을 주었다. 3일내로 창현에 주둔하고 있는 세가와이 혼성려단 헌병대로 가라고 하였다. 나는 창순이와 작별하고 창현으로 갔다.

    창현 주둔 세가와이려단헌병대로 찿아가니 사무실에서 한 장교가 나를 맞아주었다. 나는 거기서 또 2년을 헌병대 통역 용원으로 복무한다는 각서를 썼다. 장교의 설명에 따르면 “용원”이란 민간인을 부대에서 고용한다는 것인데 말하자면 림시공으로 사용시간은 2년이고 그러나 부대에서 수요되지 않을때는 아무때고 해고 하지만 본인은 2년내에는 마음대로 못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2년후에는 본인에게 자유를 준다고 했다. 생활상에서는 일체를 부대와 함께 해야하며 동일대우를 향수한다고 하였다. 일본사병들의 옷을 주는데 입고 안 입는건 자기마음대로지만 모자는 써야 한다고 하였다. 모자에는(센또보시, 전투모) 노란 오각별이 붙어 있었다. 무기는 금지고(다치면 안된다.) 신분증명 같은건 없었다.

    장교는 나를 한 중대로 데리고 가서 중대배속헌병조 조장에게 맡기였다. 그 중대 헌병조에는 두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20대 청년으로서 오장급이였다. 조장인 시라이시는 온화해 보이는 인상이고 조원 오야마는 표독스러워 보이였다. 1939년 8월하순부터 나는 정식으로 그들의 통역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부대에서 발급하는 옷이며 비품에서 나는 속옷과 신 이불 배낭은 사용 했으나 겉옷과 모자는 사병들을 줘 버렸다. 모자를 쓰지 않는다고 시비하는 놈은 없었다. 나는 돈벌이를 하려 온 민간인 2년 계약공이지, 그리고 조선사람이지 너들과 같은 천황페한지 개뼉따군지 한 무슨놈에게 매운 일본쫄병은 아니라는 자존심에서 그랬다. 후에도 줄곧 그랬다. 로신의 작품을(한문, 일문)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그이처럼 되겠다는 야심에서 상고머리를 하고 다부샨즈를 항상 입었다. 얼마 안되여 나는 헌병 두놈이 다 나보다 지식이 낮은걸 알고는 그들을 항상 속으로 얕잡아 보았다.

    내가 가서 10여일이 지났으나 별로 할 일이 없었는데 어느날 중대는 전선으로 이동 한다고 하였다. 팔로가 출몰하는 남피라는 곳으로 간다고 했는데 남피는 작은진으로 창현에서 남쪽으로 50여리 내려간 곳이였다. 팔로가 무서워서 부대는 대낮에 행군 했다. 반나절 강행군을 해서 남피에 이르렀을 때는 바로 점심때 였다. 불같이 내리 지지는 태양아래 사병들은 기진맥진하여 우선 그늘을 찿아 늘어 지었다. 팔로는 이미 달아난지 오래고 마을은 조용했다. 중대 장교들을 선두로 모두가 팬티바람으로 큰대자가 되여 낮잠을 자건만 오야마는 자지 않고 마을로 뛰여 다녔다. 시라이시와 나는 우물곁에서 등멱을 감았다. 우리는 중대장교들과 함께 자동차를 타고 왔기에 힘은 빼지 않았다. 얼마후 오야마는 남녀로소 중국사람 20여명을 붙잡아 왔다. 시라이시는 “또 적극성을 보이느라 수고한다.”하고 히죽이 웃으며 나에게 말한후 나무밑으로 자려 갔다. 오야마는 나를 불러다 곁에 세우고 일장 연설을 하였다. 대일본제국이며 황군이며 위력을 뒤죽박죽 떠벌인후 팔로가 몇놈이 왔던가 어데로 달아 났는가 이곳에 공산당이 있는가 누군가… 제대로 말하면 상을 준다. 속이면 쓰라쓰라다… 그리고 나더러 통역을 하라고 하였다. 자기딴에는 무척 잘 말했다고 긍정하는지 그는 만족한 표정이였는데 나는 우습고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침을 퉤! 뱉았다. 자식이! 쉬지도 못하게 하면서 지랄이 아닌가. 조장이 시키지도 않는, 그런데 너의 물음에 대답할 중국사람이 여기 누가 있을텐가. 정말로 안다고 해도 숱한사람 앞에서 어찌 감히 말하겠는가. 미련한 놈이 지랄하고 자빠졌네. 나는 그의 웅변을 대충 번역했다. 오야마는 자기가 그렇게 많이 말했는데 왜서 그리 짧은가고 하며 눈알을 지릅떴다. 나는 중국말은 짧아서 그런걸 난들 무슨 수가 있겠니? 하고 마주 눈알을 부라렸다. 개자식! 의견이 있으면 조장과 말해라. 주제꼴에 누굴 업신 봐?...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했다.

    중국사람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한결같이 모른다는 대답뿐이였다. 머리를 내젓고 손사래를 치면서 벙어리 소리를 하였다. 약이 오른 오야마는 늙은이며 녀자며 아이들과 으르딱딱거리며 멱살을 쥐여 흔들기도 하고 귀뺨을 치기도 하다가 한 장년을 끄집어 냈다. 그 장년은 어제오후 팔로같은 사람들이 10여명 저 앞길로 지나가는걸 보았다고 하였다. 어데로 가더냐고 물으니 그건 모르겠다는 것이였다. 오야마는 돌파구를 만났다는듯 집요하게 따지고 물었는데 사내의 대답은 여전히 다른것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것이였다. 악이 바짝 오른 오야마는 칼집으로 장년의 머리를 사정없이 갈기였다. 대뜸 피가 물흐르듯 주루룩 흘렀다. 사내는 고함을 지르며 달려 드는데 마을사람들이 붙잡고 말렸다. 오야마가 소리치자 사병 둘이 달려 와서 사내를 틀어 잡았다. 오야마는 사내를 묶어가지고 자동차 있는데로 끌고 갔다. 순간에 벌어진 사태앞에서 중국사람들이 벙벙해 떨고 있는데 이번에는 선무반의 한 녀석이 나섯다. 그는 대체로 중국말을 얼버무릴줄 알았다. 그도 적극성을 보일때라고 생각 했는지  일화친선, 우애, 단결을 떠벌이며 한바탕 씨부렁 거렸다. 한놈은 생사람을 뚜두려 패고 한놈은 우애단결이 어쩌구저쩌구… 세살먹은 애들 작란인가, 나는 그들의 꼬락서니가 너무도 가소롭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윽하여 중대는 또 출발 하였다. 남피는 안전지대여서 한개 소대를 남겨놓고 중대 병력은 송경툰이라는 위험구역에 가서 주둔한다고 하였다. 한 30여리를 남쪽으로 더 내려간다고 했다. 시라이시는 소대와 함께 남피에 있겠다고 하며 나와 오야마는 중대를 따라가라고 하였다. 그 속내는 뻔 하지만 오야마는 명령에 따를수 밖에 없었다. 중대는 저녘때가 다 되여 송경툰에 도착 했다.

    송경툰에는 중국 괴뢰경찰 한개 소대가 주둔해 있었다. 그들에게는 류치장도 있었는데 오야마는 끌고 온 사내를 류치장에 가두었다. 헌병조는 류치장과 길을 사이두고 작은 집에 들고 얼마간 떨어진 곁에는 중대부가 있었다. 당지 사람들인 문서 장준리와 화식원 공씨는 우리가 도착하자 블려왔는데 한집에 함께 있게 되었다. 그들은 경찰서에 속한 사람들이 였는데 오야마가 문서와 화식원을 요구해서 넘어온 것이다. 장준리는 30푼한 얌전한 사람이고 공씨는40대의 무던해 보이는 사람이였다.

    장준리와 공씨는 제집에서 출근하던 사람들인데 오야마가 전시상태가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헌병조 사무실에서 자라고 하였다. 집 가운데 칸은 넓직한 봉당이고 량켠은 캉(온돌)이 있는 방이였다. 방 절반은 캉이고 남어지 절반은 봉당이였다. 거기에 사무상을 하나씩 놓았다. 그날밤 나는 오야마와 함께 잤다. 그런데 녀석이 어찌도 지독하게 이발을 갈아부치고 잠꼬대를 하는지 한잠도 잘수 없었다. 짜증이 바짝 난 나는 침구를 몽땅 걷어 가지고 밤중에 장준리네 방으로 건너 갔다. 아침에 깨여난 오야마는 성이 푸르르 나서 왜서 마음대로 위치를 변경했느냐고 하면서 야단이 였다. 한집안에서 위치는 무슨 개뿔같은 위치고 네가 개 뼉다구 널어대듯 까드등 까드등 이발을 갈아 대고 고함까지 지르는데 사람이 어떻게 자느냐…내가 벌컥 밸을 쓰니 그는 한참이나 노려 보다가 제 방으로 건너가 버렸다. 나는 이놈애에게 그저 굽실거려서는 안되겠다고 다짐했다. 아침후 오야마는 어제 남피에서 잡아온 사내를 데려 오라고 나에게 명령조로 소리 쳤다. 나는 “내가 할일은 통역이지 심부름군은 아니니까 그따위 일은 나와 말 말아.”하고 마주 소리 쳤다. 두번째로 마찰이 생긴 것이다. 오야마는 이발을 앙다물면서도 할말이 없는지 장준리더러 심부름을 하게 했다.

    시에미 역증에 개배때기 차듯 그날 중국사내는 오야마에게 지독하게 맞아 댔다. 나와 장준리에게 본때를 보이느라 그러는것 같기도 했다. 심문은 저녘때까지 계속 되였다. 오야마는 말그대로 소나 말을 때리듯 사내를 마구 두드려 패고 사내는 한대중 팔로가 어데로 갔는지 누가 공산당인지 모른다고 하였다. 오야마가 지칠정도 였으니 사내는 어떻게 되였겠는가! 화식원 공씨는 그 사내를 자기가 안다면서 사람이 고지식하고 우직하며 부실하다고 하였다. 순 토배기 농사군인데 팔로며 공산당을 알 사람이 근본 못된다고 하였다. 내가 보기에도 그런것 같았다. 나는 오야마에게 공씨의 말을 말해 주면서 저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량민 같다고 하였다. 오야마는 표독스레 나를 노려 보더니 “이놈이 불량민일때는 너도 책임 지겠는가!”하고 걸고 들었다. 이번에는 내가 할 말이 없었다.

    이튿날, 오야마는 심문을 계속 했다. 뜨락에 끌고나가 사다리에 동여맨후 묻고는 두드리고 두드리고는 묻는데 사내는 머리를 떨어뜨리고 어제처럼 대들지 못했다. 두드려도 크게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오야마는 사다라를 쾅! 차서 넘어 뜨린후 장준리더러 주전자에 물을 길어 오라고 소리쳤다. 내가 통역하자 장준리는 우물에 가서 물을 한주전자 가득 길어 왔다. 커다란 주전자의 물을 오야마는 사내의 입에 마구 들이 부었다. 그리고는 배를 밟아 물이 분수처럼 솟게 하고는 또 반복 했다. 오야마가 고함을 치며 물었지만 사내는 응대도 못하였다. 점심때가 거이 되여 사내는 축 늘어진것이 죽은것 같았다. 오야마는 당황해 하였다. 점령구에서 헌병이 생살권을 쥐고 있다고는 하지만 무턱대고 사람을 죽이지는 못하게 되였든 것이다. 오야마는 괴뢰경찰을 불러다 사내를 끌어 가게 하였다.

    점심후 경찰이 달려와 사내가 죽었다고 보고 하였다. 오야마는 경찰을 따라 길건너 류치장으로 가드니 얼마후 인차 돌아 왔다. 그는 한참 맴돌며 서성거리드니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리였다. 두어시간 지나서 오야마는 나와 장준리를 불렀다. 그는 헌병대 공문지에 쓴 보고서를 내여 놓고 나와 장준리에게 지장을 찍으라고 하였다. 보고서는 두장이였는데 하단에 그의 이름이 씌여져 있고 그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그 아래에 통역 류동호 문서 장준리라고 쓴 것이였다. 나는 보고서를 쭉 내리 보았다. “왕귀생은 팔로군의 밀정임은 탄백 했는데 다른 비밀은 말하지 않아서 심문을 하였다. 심문후 류치장에 감금 했다. 놈에게 심장병이 있고 신체는 허약했다. 때문에 체형은 별로 하지 않았다. 오전 심문후 류치장에 가뒀는데 머리를 돌벽에 박고 자살 했다. 시체는 집에서 처리하게 했다…” 중점이 요약 이러 했다. 나는 지장 찍기를 완강히 거절 했다. 오야마는 후에 보자면서 “통역 류동호”를 새까맣게 지워버린후 장준리를 다그쳐 지장을 찍게 했다. 장준리는 부들부들 떨면서 지장을 찍었다. 오야마는 창현 헌병대로 간다면서 중대부로 뛰여 가드니 얼마후 자동차로 급급히 떠나갔다. 때는 저녘때가 거진 되였다. 이곳은 위험구로서 밤은 팔로군세상이고 낮은 일본군 세상이였다. 하여 왜놈들은 밤이면 잔뜩 긴장해서 경계를 가강하고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야마는 왜서인지 사병 두엇을 데리고 부랴부랴 떠나 갔다.

    그시간후로 오야마는 다시 중대로 오지 않았다. 이틀후에 중대로 스즈끼라는 헌병이 새로 왔다. 그의 말에 의하면 오야마는 송경툰과 남피사이 중간쯤 되는 지점에서 팔로군무공대의 습격을 받아 즉사를 했다는 것이였다. 시라이시는 여전히 조장으로 남피에 있었다.
스즈끼는 하야말쑥한 20대 청년으로서 역시 오장이였는데 중국말도 좀 알았다. 그는 소설책이나 보다가는 마을안을 빈들빈들 돌아 다니기 좋아 했다. 헌병대 일에는 열중하지 않았고 우리와도 사이좋게 지내려 했다. 스즈끼와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친구처럼 되였다. 우리는 소설책보기를 좋아해서 장준리가 소설책을 자주 얻어 왔다. 우리 넷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곧잘 하였다. 스즈끼는 오늘 고운처녀를 보았는데 소개해 달라고 우스개를 하기도 했다.

    공씨는 될수록 맛있는걸 하느라 했고 장준리와 나는 괴뢰경찰들과 앞잡이 밀정들이 가져오는 정보를 정리해서는 스즈끼에게 보고했다. 정보를 장준리가 기록부에 올리고 내가 그것을 번역했다. 내가 보건대 정보라는 것이 말짱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이였다. 밀정들은 아침후에 담당마을로 나갔다가 오후면 돌아오는데 소위 정보를 장준리에게 보고했다. 어느마을 누구네 집에서 잔치를 했다거니 누가 남피로 장보려 갔다왔다느니 팔로를 봤다는 사람이 없었다느니… 이러루한 것들이 였다. 스즈끼는 보는둥 마는둥 하고는 상우에 던져 버렸다.

    중대가 송경툰에 주둔해 있은 한달남짓한 사이에 두번 출동한적이 있었다. 어느 마을에 팔로가 왔었다고 해서 주변을 한바탕 돌고는 돌아 왔다. 그후 이곳은 비교적 온정해 지였다고 인정 되였는지 어느날 흑룡촌이란곳으로 부대가 이동 했다. 그곳은 송경툰에서 서남쪽으로 20여리 내려간 곳이 였는데 마을은 작지만 팔로들의 활동이 빈번하다고 하였다.

    중대는 대낮이 되자 행군 하였다. 그런데 수레길은 파도가 친것처럼 기복이 심하고 전호처럼 푹 패인것이 아주 나빴다. 량켠은 강냉이, 수수밭이 아니면 쑥과 잡목이 꽉 들어섯는데 팔로가 그속에 매복하기가 한참 좋은 지형이였다. 길안내로 송경툰에서 늙은이를 데리고 떠났다. 자동차가 앞에 서고 나와 늙은이는 운전사 옆의 발판에 서서 길을 안내하라고 중대장이 명령 했다. 그날 무슨일로 중대의 통역이 없었다. 운전사 곁에는 소대장이 앉고 차에는 10여명 사병들이 탔다. 중대장은 3,40메터 떨어져서 부대를 이끌고 따라 왔다. 수레길이 산기슭을 끊고 나간 좁은길로 자동차는 요동을 치며 겨우 빠지는데 세차게 기우뚱 하는 바람에 나는 길옆의 바위돌에 부딪치며 어망결에 매달렸다. 그런데 자동차는 그냥 전진하면서 옆에달린 갈고리로 나의 왼다리 무릎뒤를 끊어 놓았다. 비명소리와 함께 차는 서고 사병들이 뛰여 내려 나를 차 위로 들어 갔다. 상처에서는 피가 콸콸 쏟아지고 동통은 숨이 막히게 하였다. 위생병은 지혈을 시키느라 붕대로 무릎위를 끊어져라 동여 매고 진통제를 놓았다.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련속 질렀다. 위생병은 다리가 끊어진것 같다고 하였다.

    부대가 흑룡촌에 이르자 거기서 퍼그나 먼곳인 동광이란 곳으로 나를 이송했다. 거기에는 대대부가 주둔해 있었는데 기차역전도 있었다. 대대의사는 다리뼈가 끊어 졌다고 하면서 창현 려단병원으로 후송 했다. 부상된후 반날도 안되여 창현까지 왔다. 려단병원에서는 천진륙군병원으로 또 후송 했다.

    너덧달 전에 내가 청소부로 일하든 병원이다. 저들 부상자라고 해서인지 아니면 의덕이 좋아선지 병원에서는 나를 살뜰히 대해 줬다. 사진을 찍고 수술을 하고 야단법석을 했는데 다행이 다리뼈는 상하지 않았으나 상처는 심하다고 하였다. 영양식을 갔다주고 대소변을 받아내며 움직이면 안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매일 시간주사를 놓고 약도 여러가지를 주었다. 그런데 며칠후 홍수가 들이 덮친다고 하면서 환자들을 일본으로 옮긴다며 대소동을 하였다. 나는 뜻밖에 일본으로 가게 된것이 무척 기뻤다. 그것참! 화가 복이 됐군. 하지만 나는 크게 실망하며 일본을 증오하게 되였다. 그것은, 조선사람은 일본으로 가져가지 않고 북경륙군병원으로 옮긴다는 것이였다. 다른리유는 없고 오직 조선사람이기 때문이였다. 망할새끼들! 조선사람은 사람이 아닌가. 왜놈들의 민족차별시 정책은 이렇게 선명하고 공개적이 였다. 나는 앞으로 꼭 유명한 문학가로 되여 네놈들이 입을 딱! 벌이게 하고야 말리라 맹세 했다.

    당시 북경 일본륙군병원은 지금의 청화대학 자리였다. 병원조건은 천진보다 오히려 좋았다. 조선과 일본에서 위문대가 와서 연출을 하기도 했는데 최승희(조선의 유명한 무용가)가 추는 춤을 그때 처음으로 관람했다. 입원기간 나는 많은 소설책을 보았는데 로신의 작품을 그때 제일 많이 보았다. 그리고 습작도(일문) 많이 하였다.

    40여일이 지나 나는 출원 하였다. 의사는 두어주일 더 있으라고 했는데 나는 갑갑해서 출원시켜 달라고 사정 했다. 다 나은것 같은데 빈둥빈둥 논다는 것이 량심상 께름해서 견딜수 없었다. 일본사병들은 하루라도 병원에 더 있으려고 별수작을 다 부리였다. 아침검사를 들어오기전에 죽어라고 뜀박질을 해서는 심장이 빨리 뛰고 혈압이 오르게 하기도 하고 아침밥을 위가 어떻다며 먹지 않기도 하고(검사후에 게눈 감추듯 했다.) 머리가 아프다느니 허리가 아프다느니… 하면서 꾀병을 하였다. 나는 그런 비루한 꼬락서니가 더구나 보기 싫어, 그들에게 본때를 보이기도 하느라고 출원을 우기였다. 조선사람은 너들과 같지 않다! 나를 봐라. 이런 오기 였다.

   출원후 나는 곧장 창현에 있는 헌병대로 찿아 갔다. 가는길에 천진에서 창순이를 찿아가니 그는 신의주로 돌아 갔다고 했다. 헌병대 대위는 네가 왔는가고 하며 무등 반가워 했다. 우리는 언녕 네가 오지 않을거라고 믿었는데, 참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였다. 나는 속이 흐믓했다. 중대는 그냥 흑룡촌에 있으니 거기로 가라고 하였다. 흑룡촌에는 스즈끼도 장준리도 공씨도 그대로 있었다. 그간 팔로가 나타났다고 하여 서너번 헛탕을 치며 달아다닌외에는 별일이 없었다고 했다. 서쪽에서 보았다고 하여 서쪽으로 달려가면 또 동쪽에 있다고 하여 그리로 달려 갔는데 꿩구어 먹은 자리였다. 후에는 밀정들의 정보를 신임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마구 부정할수도 없어서 부아통이 터지기도 했다는 것이였다. 특별뉴스로는 스즈끼가 어떤 처녀와 련애를 한다는 것이였다. 우리가 하는일은 여전히 그랬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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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모택동의 이야기(2) 2022-10-31 0 372
177 모택동의 이야기 (1) 2022-10-20 0 508
176 왕소군 2022-09-30 0 261
175 포증씨에 대한 생각 2022-09-15 0 204
174 사마천 2022-09-10 0 229
173 사면초가 2022-09-06 0 222
172 홍문연 2022-08-31 0 197
171 진왕조의 멸망 2022-08-15 0 243
170 진시황과 분서갱유 2022-08-05 0 202
169 조식선생의 칠보시 2022-07-22 0 234
168 해서의 초심 2022-07-19 1 216
167 손빈의 친구원쑤 2022-06-25 1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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