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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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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헌병대 통역(8)
2017년 05월 18일 15시 10분  조회:1606  추천:0  작성자: 회령
                                         일본헌병대 통역(8)

심양
 
    10월말 우리는 심양에 도착했다. 내가 속한 4구대는 심양에서 조금 더 나가서 대성역에서 내리였다. 밤중인데 역에는 조선독립동맹 북만특위 김택명(리상조. 광복후 조선에 나간후 실각.)이 파견한 안내원 안경쟁이 원일우(광복후 조선에 나간후 실각.)가 우리를 맞아 주었다. 우리는 분대별로 백성들의 집에 가서 식사를 하였다. 기름기가 반지르르 도는 이밥에 김치와 토장국에 고추가루를 듬뿍 놓아 우리는 땀을 뻘뻘 흘리며 배가 터지게 먹었다 환한 전등불, 막걸리… 익숙한 것이긴 하지만 몇해 만인가! 웃고 떠들고 대 잔치같았다. 사실 경사의 대 잔치가 옳았다. 나는 새삼스레 무량한 감개로 가슴이 뭉클하고 눈뿌리가 뜨거워 났다. 여기까지 오면 집문턱까지 다 온 셈이다. 17살 어린나이에 문학을 한답시고 겁없이 뛰여 왔든 심양이다. 잠든 어머니를 작별하고 집을 떠날때 10년을 기한으로 방랑 하리라 맹세를 했는데 헤여보니2년을 앞당겨 집앞에 왔다. 그간 나는 공산주의 혁명전사로 성장 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힘차게 일하리… 우리의 우렁찬 노래는 현실의 행동으로 되였다… 구슬픈 방랑가를 부르며 떠났던 내가 씩씩한 혁명가를 부르며 돌아올 줄이야! 격세지감을 금할수 없었다. 그때 내가 부르던 “방랑가”는 이렇다.
 
                   방랑자의 노래
 
       부지런히 걸어도 보람이 없고
                      걷지않고 멎어서도 쓸쓸하다.
       울지 말아라
                    광야의 벌레들아
       촌에서 하루밤 쉬고
                   풀밭에서 이틀밤 자고
       꿈에 본 고향어머니 모습이여
 
    잠자리는 소학교에 마련되였는데 콩깍지를 두툼히 깔고 그 위에 벼짚을 펴서 고급침대처럼 푹신푹신 했다. 마을 사람들은 잠자리가 험해서 안 되였다고 송구해 하였지만 우리는 너무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튿날부터 우리는 애민활동을 열정적으로 하였다.

    11월7일 심양역 광장에 세운 쏘련홍군 심양해방 기념탑 제막식이 있었는데 동북인민자치군(팔로군, 림표부대)과 조선의용군은 보무당당히 열병식에 참가했다. 그날 우리는 료녕성 주석(중공)장학사의 연설을 들었다.

    1945년11월10일! 심양시 근교에 위치한 고력툰(지금의 심양시 우홍구 대흥조선족향 오가황) 조선족소학교에서 조선의용군 전군대회가 열렸다. 그때까지 심양에 집결한(관내에서 나온) 조선의용군은 대략 2700여명이 되였다. 그외에 할빈, 통화, 안동(단동) 등 지에 1500여명이 있다고 했다.

    이 회의를 력사에서 “조선의용군심양회의”라고 하는데 그때의 력사배경은 다음과 같다.

    1945년7월17일부터 8월2일까지 쏘, 미, 영 3국 수뇌들인 쓰딸린, 트루맨, 처칠과 그들의 외교부장은 베를린 포쯔담에서 회의를 하였다. 회의에서는 2차대전후 독일문제 처리와 기타문제 처리원칙에 관하여 협정을 체결하였는데, 제7항의 령토위탁관리 협정에 따라 조선에다는 38선을 그어 놓았다. 38선 남에서는 미국이, 북에서는 쏘련이 일본의 투항을 접수하며 위탁관리를 하기로 쓰딸린과 트루맨은 협정에 조인 하였다. 치욕의 38선! 증오의 38선은 이렇게 하여 생긴 물건짝이다! 

    우리가 조국을 향하여 나갈때 쏘, 미는 이미 조선땅에 들어와 점령군 행세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에서는 리승만을, 북에서는 김일성을 위수로 한 정권 수립을 온양하고 있었다. 10월, 한청(광복후 조선에 나간후 실각.)이 50여명의 조선의용군 전사들을 인솔하고 선견대로 조선 신의주로 나갔는데 거기서 그들은 쏘련홍군에게 무장해제를 당했을뿐만 아니라 학교에 같히기까지 하였다. 한청은 평양에 가서 김일성을 만났는데 김일성은 조선의용군과 조선독립동맹의 조직적 입국을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오겠으면 개인신분으로 오라.”고 답복 했다. 한청은 이 상황을 의용군과 동맹 령도에 전달 하였다.

    형세가 이렇게 된 상황에서 의용군과 동맹의 주요령도들은 개인적 신분으로 입국을 결정 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조국으로 이사를 나갔는데 그들도 그런 이주민의 한 사람이 된 셈이다. (중경에 있던 “한국광복군”은 조직적으로 환영을 받으며 남조선에 입국 했다.)

    고력툰회의(심양회의)는 사실상에서 조선의용군의 해체를 의미 한다. 그날 회의는 중공동북국과 동북인민자치군의 지도하에 열리였다. 회의는 부사령원 박일우가 사회하고 사령원 무정이 결정을 선포 했다. 무정 사령원이 시커먼 기색으로 선포한 결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조선의용군 사렁부와 동맹의 일부 령도들이 개인적 신분으로 먼저 귀국 한다.
  2. 부대는 중국 동북지구에 체류하며 확대 공고히 하며 새로운 임무를 완성할
  3. 준비를 하여야 한다.
    3.동북국과 팔로군의 지시에 따라 부대를 개편하며 당지군구의 지휘를 받는다.
  4. 부대를 아래와 같이 개편 한다.
                  1지대(남만지대): 지대장: 김웅
                                                 정치위원: 방호산
                                                 참모장: 안빈
                                                 정치주임: 주연
                 
                 3지대(북만지대): 지대장: 김택명
                                                정치위원: 주덕해
                                                참모장: 김연
                                                정치주임: 리근산

                5지대(동만지대): 지대장: 리익성
                                               정치위원: 박훈일
                                               참모장: 조렬광
                                               정치주임: 전우

                7지대(서만지대): 지대장: 김극
                                               정치위원; 박훈일

     이 7지대는 심양회의당시 무정의 명령에는 없었다. 7지대는 박일우가 5지대와 함께 동만으로 나가다가 길림지구에서 조직해 준 것이다. 각 지대는 그후 부대를 확대 가강 하였다. 그외 압록강지대, 영구독립대대, 개원조선의용군독립퇀 등 무장력이 산생 되기도 했다. 여기서 다시 한번 말하고 싶은것은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대부분 간부들은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선후로 귀국 하였는데 거이 모두가 김일성에 의하여 실각 당했다는 것이다. 조선혁명을 위하여 국내외에서 많은 혁명가들이 북조선에 집중하였는데 처음에는 남로당계, 다음은 쏘련계, 그다음은 중국계와 국내계(김일성계렬)간부들 대부분이 권력에서 실각 되였는데 이 변동은 1970년대에 이르러 기본상 결속 되였다. 오래동안 권력층 정돈을 하게 된것은 김일성을 위수로한 공고한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서 였다.
 
    심양회의후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칭호는 사실상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였다. 심양회의가 끝나자 즉시 우리는 말그대로 동서남북으로 헤여 졌다. 조국으로 나가던 발길을 중국대지에로 돌리였다… 심양회의에서 조선으로 나가지 못한다고 하니 사실은 많은 동지들이 달통되지 않아 하였다. 어떤 동지들은 울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기꺼이 명령에 복종 했다. 그리고 조국으로 나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다들 생각 했다.
 
할빈
 
    심양회의후 3지대 간부들이 재일 먼저 심양을 떠나갔다. 우리는 안경쟁이 원일우의 안내하에 심양역에서 할빈행 기차를 구하느라 일주일이나 기다렸다. 어느때 기차가 있겠는지 알수없기에 대합실 한쪽귀퉁이를 차지하고 먹고 자며 외출도 하지못했다. 일주일후 석탄을 실은 화물차편을 요행 만나 할빈으로 떠나게 되였다. 때는 엄동이고 북으로 달릴수록 추위는 혹독 했다. 그러나 혁명의 새로운 임무를 맞으려 가는 우리의 붉은피는 뜨겁게 끓어 번졌다.

    우리 일행은 모두 19명이였다. 그들로는 주덕해(오기섭), 리덕산(김창덕), 김연, 관건(황재연), 리근산과 그의 처 김화순, 왕휘, 류등(류동호), 김학룡, 최서화, 박근택과 그의 처 박련옥, 리명일, 전광일, 한룡선, 류창렬, 리욱성, 고영룡, 공효 였다. 그외 안내원 원일우가 있었다. 3지대에 배치된 간부가 제일 적은것은 김택명(리상조)이 이미 부대기초를 딲아 놓았기 때문이다. 김택명은 태항산에서 조선독립동맹의 파견을 받고 북만에 간후 파안현을 중심으로 지하활동을 하면서 동맹 북만특위(제12지부)를 건립했고 광복후에는 재빨리 수백명 조선족 청년들로 조선의용군을 조직해 놓았던 것이다.

    우리는 45년11월19일 밤에 할빈에 도착 했다. 그날밤은 원 위만군 군관구 청사에서 며칠만에 편안한 잠을 잤다. 조선족 전사들이 보초를 섯다. 이튿날 아침 김택명은 우리를 보러 와서 너무도 기뻐 어쩔바를 몰라 했다. 그는 몹시 기다렸다고 하며 우리들의 손을 잡고 억세게 악수를 하였다. 아침후 부대가 주둔해 있는 “사꾸라소학교”로 가서 전사들을 만났는데 한개 대대쯤은 되였다. 그날 오후에는 오상현으로 부터 수백명의 조선족 청년들이 붉은기를 날리며 대렬을 지어 호호탕탕히 입대하려 왔다.

    그런데 오후 늦게 지대부에서 긴급명령이 내렸다. 즉시 할빈시내에서 철퇴하라는 것이였다. 그것은 쏘련홍군이 할빈을 국민당에게 넘겨 줬기 때문이다. 참모장 김연은 부대를 세개 대대로 편성하고 1대대는 왕휘, 2대대는 류등, 3대대는 김학룡이 책임진다고 선포 하였다.

    부대의 정황은 산만하고도 혼란 하였다. 사상각오와 입대열정은 높았으나 군사소질은 운운할 여지도 없었다. 입대하려 오는 조선족 남녀 청년들은 매일 끊임이 없었다. 나는 녀자들은 지대부로 보내고 남자들은 직접 받아 들였다. 그리고 부대의 전투력을 제고하기 위하여 밤낮을 분주히 돌아쳤다.

    11월25일, 우리는 배극도 술공장 창고에서 조선의용군 3지대 창립대회를 성대하게 거행 하였다. 그날 부대를 정식으로 편성 하였다.

              지대장: 김택명    부지대장: 리덕산
              정치위원: 주덕해
              참모처참모장: 김연    참모: 한룡선
              정치처주임: 리근산   조직고장: 조경형    선전고장: 한탁주
              공급처처장: 관건

              1대대: 대대장 겸 1중대장: 왕휘
                                            2중대장: 최서화
              2대대: 대대장 겸1중대장: 류등     부중대장: 박근택    
                                            2중대장: 류창렬   부중대장: 김만선
              3대대: 대대장 겸1중대장: 김학룡  부중대장: 리명일
                                           2중대장: 리욱성   부중대장: 윤명환
             간부교도대대장: 고영룡
             지대경위중대장: 전광일
             위생대대장: 공효
 
    부대의 조직편성은 깔끔하게 되였지만 부대건설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진행하게 되였다. 나는 대대 지전원들의 정치사상소질과 군사소질 제고에 모를 박고 억세게 추진 했다. 부대의 전투력은 현저한 제고를 가져 왔다. 창립대회 며칠후 지대부에서는 나에게 일본군 군수품 창고의 무기와 물품들을 5일내로 옮기라는 지시를 하였다. 나는 대대를 지휘하여 그 임무를 3일내에 완성 하였다.
 
    12월 10일 우리 2,3대대와 지대부는 빈현에 가서 주둔하게 되였다. 1대대는 송강군구 사령부 경위를 맡다보니 늘 우리와 떨어져 행동했다. 여기서 교대해야 할것은 3지대 창립 그날부터 우리는 송강군구에 귀속 되였는데 대외로는 조선의용군 3지대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명칭은 이듬해 6월 송강군구 8퇀으로 되면서 완전히 취소 되였다. 조선의용군은 사실상 심양회의후 동북인민자치군, 동북민주련군, 중국인민해방군으로 연혁 되였다.
 
    빈현에서 나의2대대는 전위부대로 되여 송화강변의 신전이라는 곳에 진주 하였다. 대안에는 국민당 정치토비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놈들은 악독하고도 기세가 사나웠다. 우리대대는 송강군구 사령원 섭극정의 직접적인 지휘하에 눈보라가 세찬 어느날 밤, 은밀히 송화강 얼음강판을 기여넘어 대안에 매복 하였다. 모진 추위는 뼈속까지 얼어들었으나 전사들은 매복을 견지 했다. 날이 휘붐이 밝자 우리는 맹호마냥 적진으로 덮쳐 들었다. 적들은 목란현성까지 버리고 아예 산속으로 도망쳐 버렸다. 전투는 휘황한 승리로 끝났지만 2중대장 류창렬이 가슴에 관통상을 입었다. 우리 대대는 목란현성에 주둔하면서 새로 건립된 지방정권을 보위하며 치안과 군중사업을 적극적으로 진행하였다. 새로 해방한 목란현의 정세는 재빨리 온정 되였다. 그런데 현성 북쪽으로 30여리 떨어진 혼부라는 곳에 일본인 개척단이 있었는데 토비들과 일부 중국사람들이 그들을 여지없이 유린한다고 하였다. 군구에서는 우리대대에 그들을 보호하라고 명령 하였다. 나는 즉시 한개 중대를 이끌고 혼부로 갔다. 우리가 간 날 저녘 대표격인듯한 일본인 3명이 “장관”인 나를 찿아 왔다. 녀자 셋을 내여 놓겠으니 사병들이 다른 녀인들은 다치지 말아 달라는 것이였다. 나는 그들에게 공산당과 팔로군의 정책을 설명해 주면서 안심시킨후 군중공작을 바싹 틀어쥐는 한편 토비들의 행적을 정찰 하였다. 여러날 정찰하여보니 토비들이 가까이에는 확실히 없었다. 멀리 도망쳐 버린것이 였다. 치안질서가 온정 된후 우리가 혼부를 떠날때 일본인민들은 떨어지기 아쉬워 하며 멀리까지 부대를 따라 왔다. 몇명의 녀성들은 기어코 부대와 떨어지려 하지 않아 나는 할수없이 그들을 지대부로 보냈다.
 
    목란현이 온정되자 우리대대는 군구의 명령에 따라 연수현으로 이동 하였다. 우리는 전방인 류하툰에 주둔하면서 부근에 있는 흑룡궁과 마가점의 토비들을 숙청 하였다. 연수현이 온정되자 대대는 또 명령을 받고 주하현으로 이동 하였다. 주하현을 교란하는 토비들은 위하일대에 있었다. 우리는 위하 근처인 일면파에 주둔 하면서 토비숙청에 기세를 올리였다. 얼마후 잔여 토비들은 아예 멀리 산속으로 도망쳐 버렸다. 이때가 1946년 3월이였다. 3월 20일! 나의 입당이 비준 되였다. 입당소개인은 주덕해 였다. 나는 무한한 영광과 기쁨을 힘으로 부대건설과 지방사업을 억세게 추진 했다.

    4월초, 나는 부지대장 리덕산의 긴급명령을 전달 받았다. 대대장 직무를 류창렬에게 인계하고(류창렬은 상처가 채 낫지 않았는데도 중대로 돌아왔었다.) 즉시 지대부로 오라는 것이였다. 나는 통신병과 함께 말을 달렸다. 내가 도착하자 리덕산은 임무를 주었다. 리영택, 마창근, 한탁치 3명 중대장을 인솔하여 할빈전선으로 곧 출발 할것.(사만툰에서 주덕해가 기다리고 있음.) 3대대 대대장직을 맡고 할빈전투에 참가할것.(원 대대장 김학룡은 오상방면으로 조동.) 할빈부근에서 입대를 기다리는 500여명의 사람들을 3대대에 편입 시킬것! 나는 즉시 할빈전선으로 달리 였다.

    1946년4월28일 낮12시 쏘련홍군은 할빈시내에서 전부 철거 하였다. 쏘련홍군이 빠져 나오자 용기백배, 만단의 준비를 하고 있던 3지대와 민주련군 형제부대는 할빈시내로 노도와 같이 처들어 갔다. 4000여명의 국민당 군대들은 총 한방 쏘지 못하고 송화강을 건너 도망치고 할빈은 해방되여 인민의 품으로 돌아 왔다. 할빈 해방후 3지대는 할빈 위수임무를 수행하면서 근교의 토지개혁운동을 보위 하였다. 입성후 지대부는 남강에 있는 일본령사관자리에 들고 우리3대대는 그 길건너편에 있는 흥농합작사자리에 들었다. 우리의 임무는 남강, 향방구 일대의 치안을 유지하며 주변농촌의 토지개혁운동을 보위하는 것이였다.

    그해 9월2일 오전 우리대대 7중대장 리영택 등 21명은 주변농촌 토지개혁운동 보위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희생되였다.(그들의 기념비가 할빈시렬사릉원에 있다.) 이것은 3지대가 성립된이래 처음으로 당한 손실이였다. 리영택 등 21명은 중국의 혁명사업에 고귀한 생명을 바쳤다. 그후에도 3지대 전우들은 중국의 혁명사업에 피와 생명을 많이 바쳤다.

    1947년1월 나는 1대대 교도원 직무를 맡게 되였다. 나는 한달을 주는 휴가도 마다하고 대대장 왕휘, 부대대장 윤명환과 함께 부대의 정치사상건설과 군사건설을 억세게 틀어 쥐였다. 중대에 당지부를 건립하고 “3사”(개인사, 가정사, 반동정권의 압박 착취사)활동을 전개하여 정치사상각오를 현저히 제고 했고(이 경험은 군구내에 소개되고 전 퇀에 보급.) 군사훈련을 가강 하였다. 하여 비교적 박약하던 1대대는 재빨리 현저한 제고를 가져와 각항 전투임무를 잘 완성 하였고 퇀부의 표창을 받기까지 했다.

    그해 5월 우리1대대는 할빈을 떠나 가목사에 가서 주둔하면서 북쪽의 학강, 부금으로부터 남쪽의 쌍학산, 화남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지역에서 무기탄약창고와 병기공장, 비행장의 수위임무 및 무기수송을 감당 하였다. 그 외에도 토지개혁운동과 지방정권건설을 보위하며 토비를숙청하고 반혁명파괴활동을 진압하며 치안유지를 보장하는등 막중한임무를 훌륭히 완수하였다. 그해 하반년 부터 중국인민해방전쟁의 형세는 방어단계로 부터 진공단계로 전이 되였다. 우리는 대부대를 따라 남하할 준비를 긴장히 하였다.
 
첯 사랑
 
    조선족들의 참군열정은 참으로 드높았다. 부자가 함게 오는 일도 있었고 어떤 마을에는 지어는 남자가 없다고도 하였다. 부대에는 처녀들도 많아 졌다.

    우리가 할빈을 해방하고 위수임무를 수행하고 있을때 지대부 공급처에 안효상 이라는 처녀가 배치되여 왔다. 효상은 할빈시내 사람으로 할빈녀고 졸업생이라 하였다. 꽤 예쁜 얼굴에 호리호리 하고 탄력 있는 몸매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그는 문예에 흥취가 있었고 피아노도 칠줄 알았다. 입대전에는 은행직원이였는데 돈을 아주 빨리 세는 특장이 있었고 장부처리도 할줄 알았다. 그리고 글씨를 곱게 썼다. 효상이는 선전대에도 알맞츰 하고 공급처에도 적당한 처녀 였다. 효상이가 입대하자 그를 눈에 띄워본 주덕해는 그를 공급처에 배치 했다. 그것은 공급처 처장인 로총각 관건에게 련애기회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 였다. 이것은 후에 들은 소리다.

    46년 늦은 봄, 어느날 1대대2중대 부중대장 전광이 우정 우리대대부로 나를 찿아 왔다. 그는 나에게 자기가 안효상이라는 처녀에게 청혼을 했는데 처녀가 우물쭈물하며 쉬원한 대답을 하지 않고 있어 애가 탄다고 하며 나더러 방조해 달라는 것이였다. 내가 나서서 설복하면 일은 백발백중 성사 된다는 것이였다. 전광이는 얼마전에 리혼했다고 하였다. 그때까지 안효상이라는 처녀를 보지도 듣지도 못한 나는 어처구니가 없기도 했거니와 시시하고도 또 아주 난처 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때까지도 사랑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없은 사람이다. 이런일에 대해서는 아직 꿈도 꾸지않는 사람보고 누구 중매질을 하라고 하니, 나는 역증을 내다싶이 뗑! 거절 하였다. 그런데 마음을 단단히 먹고 온 전광은 검질기게 달라 붙는 것이였다. 나는 할수없이 건성으로 후에 보자고 대답하였다. 전광이는 효상이를 구슬릴때 한 말까지 나에게  털어 놓으며 꼭 방조를 부탁한다고 거듭 다짐을 두기까지 하였다. 그는 효상이에게 관건은 너와 인물체격면에서도 짝이 너무 기울뿐만 아니라 나이도 너무 차이가 나고 지식수평도 맞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이 너무 호인이 돼서… 3지대에서 제일 훌륭한 사람은 3대대 류등대대장이지만 그는 또한 너의수평에서는 바라볼 처지가 못된다. 제일 합당한 천생배필은 오직 자기뿐이라고 했다는 것이였다. 건성이라도 대답을 하고보니 꽤 답답한 노릇이였다. 

    그런데 지대부에서 향방구 주변의 토지개혁운동의 순리로운 진행을 보장하기 위하여 한동안 그곳에 력량을 집중하라는 지시가 내려 왔다. 내가 두어달 거이 지나 대대부로 돌아오니 전광이가 기다렸다는듯 찿아 왔다. 그는 아주 소태 씹은 상으로 격분해서 “바람쟁이 같은게” “부르죠아 같은게” “그런 계집애는 두번 보기도 싢다.”하며 효상이를 한바탕 줄욕을 하였다. 그간 효상의 답복을 받았는데 철저히 퇴짜를 맞았다는 것이였다. 전광의 일은 안됐으나 나는 큰 시름을 놓았다. 나는 그와 우스개까지 하였다. “네가 퇴짜를 맞았으면 대단한것 같은데 그리 쎈가. 어디 내가 한번 걸어 볼가?” 전광이는 정말 그러라며 한번 톡톡히 코대를 꺽어 놓으라고 하였다. 우리는 우스개로 그러고 말았다. 나는 물론 마음속에 넣어둘것도 없고 잊어 버렸다.

    그후 퍼그나 지난 어느날 나는 사무장 대신 공급처에 볼일을 갔다. 보려던 관건은 없고 어떤 처녀가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하야말쑥한 꽤 예쁜 처녀 였다. 저 처녀가 그 효상인가…

    “동무가 안효상 이요?”
    “네. 누구신지…”
    “3대대 류등이요.”
    “아! 그러세요?! 어서 앉으세요.”

    이상했다. 정작 효상이를 마주하고 보니 종래로 그렇지 않던 마음이 싱숭거리고 두서없는 헛소리가 술술 나오기 시작했다. 문학이 어떠느니 예술이며 연극이며 영화 가 어떠느니 이야기를 하다가 또 음악, 무용, 미술까지 거들어 댔다. 나는 모택동의 연안문예좌담회 말까지 한바탕 내리 풀었다. 나중에 우리는 함께 연극구경까지 하기로 약속 하였다. 그때 마침 할빈에서는 “피눈물의 원한”이라는 연극공연이 있었다. 일요일 나는 쭉ㅡ 비다듬고 효상이와 함께 연극구경을 했다. 효상이도 무척 맵시를 내고 나왔다. 보아하니 나에게 호감을 갖는것 같았다. 그후로 우리는 접촉이 더욱 잦아 졌고 애정이 진짜로 싹트기 시작 했다. 지내보니 효상이는 교양 있고 사상도 건전한것 같았다. “바람쟁이 같은게” “부르죠아 같은게”는 아니였다. 그간 나는 효상의 초청으로 그의 집에 두번이나 갔었다. 그의 아버지는 철로 직원으로 일하다 사망하고 어머니는 인자하고 젊잖아 보였다. 오빠는 철로에서 일한다고 하였다.

    이듬해 3월 우리가 할빈을 떠나기 두달 앞서 나와 효상이는 정식으로 약혼식을 거행 했다. 약혼식은 작은 음식점에서 가지였는데 주덕해와 1대대간부, 그리고 전우 몇이 참가 했다. 효상이 어머니와 오빠도 참가 했다. 그때의 약혼식은 지금의 결혼등기나 잔치와 같이 엄숙한 절차였다. 우리는 모두가 악수를 해야한다고 해서 부끄럼을 무릅쓰고 처음으로 손을 잡아 보았다. 그리고 그날을 기념하여 약혼사진을 찍었다. 다음은 참석자 일동이 찍고 부대사람들과 우리가 또 한장 찍고 가정사진도 한장 찍었다. 모두 넉장을 찍었다.

    47년말 조선으로 부터 화교대표로 정설송(정률성 부인)이 할빈에 왔는데 그는 김일성의 부탁대로 간부를 데려가려고 하였다. 안효상의 입국문제는 본인과 주덕해가 결정권을 나에게 맡기였다. 그때까지도 우리의 입국은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하던 나는 아무런 주저도 없이 대찬성을 했다. 효상이는 떠나기에 앞서 가목사로 나를 보려 왔다. 그는 3일간 대대부에 있으면서 나의 옷도 빨래하고 작별의 정을 나누었다. 떠날때 우리는 두번째로 악수를 하였다. 믿겠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두번의 악수만 하였을 뿐이다. 할빈행 렬차는 길게 기적을 울리고 효상이는 그렇게 떠나 갔다.

    효상이는 조선에 간후 김두봉의 비서실에서 사업하다가 녀성동맹중앙에서 사업 했다. 그는 모스크바국제녀성대회, 아세아녀성대회 등 국제적 활동에도 참가하며 사업을 잘 하였다. 우리는 편지로 그리운정과 기쁨과 고충을 교류하며 전진을 고무 하였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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