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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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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헌병대 통역(9)
2017년 05월 19일 15시 33분  조회:1402  추천:0  작성자: 회령
                                                 일본헌병대 통역(9)
        5.중국인민해방군
 
연통산
 
    1948년4월 송강군구 8퇀1대대는 기차로 가목사를 떠나 목단강을 거쳐 연변 도문으로 빠진후 곧추 길림으로 갔다. 우리는 길림에서 며칠 휴식한후 8퇀의 집결처인 연통산으로 갔다. 그때는 령도기구에 많은 인사변동이 있었다. 주덕해는 이미 동북행정위원회 민족사무처 처장으로 가고 기타의 적지않은 령도들은 조선으로 나갔다. 하여 8퇀(3지대) 퇀장은 리덕산(김창덕), 참모장에는 관건, 정치처주임에는 정경호, 부주임에 장복(리덕원)이 임명 되였다. 장복은 전해 여름에 조선으로 나갔었는데 어떻게 되여선지 도로 들어와 주덕해의 안배로 정치처에 있었다. 주덕해와 장복은 연안시절부터 아는사이고 매우 친한사이다. 나도 그때부터 그들과 아는 사이였다.
연통산에 도착한후 나는 대대장 왕휘, 부대대장 윤명환과 함께 대대의 정군과 휴식을 참답게 틀어 쥐며 교도원의 직책을 적극 감당 하였다.

    1948년6월 중국인민해방군 독립 11사가 조직되였는데 사1급 령도에는 한족간부들이 안배되고 사 부직과 퇀급간부에는 몽땅 조선족들이 안배 되였다. 부사장은 리덕산, 정치부부주임은 장복이였다.(사장은 왕효명, 정치위원은 송경화, 정치부주임은 왕해청) 독립11사는 사1급의 한족간부 몇명을 제외하고는 몽땅 조선족들인데 모두 세개 퇀을 두었다. 1퇀 퇀장은 왕휘, 2퇀(원 3지대, 즉 송강군구 8퇀임.)) 퇀장은 관건, 3퇀 퇀장은 박정덕이였다. 우에서 이미 알다싶히 이들은 모두 나의 하급간부들이다. 독립11사가 조직되면서 사부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부사장 리덕산과 정치부부주임 장복은 나의 대대교도원 직무를 부교도원에게 인계하라고 하고는 다른 안배는 하여주지 않았다.

    그후 한달이 지나서 부대는 장춘 근교의 쌍양현으로 이동 하였는데 거기서 건사경축대회를 가지였다. 대회는 오후 3시 버드나무숲속에서 성대하게 진행 되였다. 대회에서 주보중장군이 열렬한 축하연설을 하였다. 그는 연설에서 “조선동지들은 중국의 항일전쟁과 국민당반동파를 반대하는 투쟁에서 거대한 공헌을 하였다. … 국제주의정신과 혁명적영웅주의정신을 더욱 발양하여 중국혁명에 더욱 큰 기여가 있기를 바란다. 목전에는 신식정군운동을 잘 틀어 쥐여야 한다.” 고 하였다. 나와 많은 사람들은 이제 중국인민해방전쟁이 끝나면(곧 끝날것이다.) 그 다음은 우리가 조국으로 나가게 될것이라 생각 했다. 우리는 중국혁명이 하루빨리 승리로 끝나게 하기 위하여 더욱 분투하리라 결심 했다.

    독립11사는 장춘포위전역을 눈앞에 두고 신식정군운동을 기세높히 전게 하였다. 그것은 내가 이전에1대대에서 창조 진행한 “3사”활동과 매우 비슷 하였다. 그런데, 장복은 여전히 나를 안배하지 않았다. 이 긴장하고 바쁜대목에 두달이나 하는일 없이 빈둥거린다는건 참으로 고통스러운 노릇이였다.

    어느날 나는 끝내 더는 참지못하고 퇀장 관건을 찿았다. 사람좋은 관건은 자기도 도대체 무슨 감투끈인지 모르겠다면서 좀 더 기다려 보자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사이 1대대1중대로 내려가 지도원을 협조해 신식정군운동을 틀어쥐라고 하였다. 나는 즉시 1중대로 내려가 사업 하였다.

    내가 갔을때는 운동이 중간계단으로 사람마다 “3사”를 회고하며 결심을 다지는 때였다. 그런데 고도로 발동된 전사들은 서로 언권을 가지려고 앞다투며 한사람이 언권을 가지면 반날이고 하루고 “3사”를 말하며 울고 웨치고 땅을 치고 뒹굴기까지 하며 끝날줄 몰랐다. “아이고, 어머니! 아이고, 아버지!”하고 통곡하며 원쑤를 갚겠다고 아우성 치고 벽에 머리를 쾅! 쾅! 짓쫏는 전사들도 있었다. 나는 전사들의 발언을 순서를 정하고 시간을 정하고 될수록이면 울고 웨치는건 억제 할것을 요구 하였다. 중대의 “3사”활동은 순조롭게 진행 되였다. 마지막 단계는 집체적으로 제사를 지내며(추도회 비슷한 형식으로) 전투결의를 다지는 것이다.

    어느날, 사부 정치부에서 한 간사가 순회를 하고 갔는데 이틀후 장복이 친히 1대대로 왔다. 그는 긴급 간부회의를 소집하고 직방 나를 지명하고 비판 하였다. 신식정군에 영향주고 전사들의 열정에 랭수를 끼얹었다는 것이였다. 회의에서 장복과 나는 치렬한 쟁론을 하게 되였다. 나중에 퇀장 관건이 모두가 사업을 잘하기 위한것이니 적합치 못한 부분은 시정하며 더욱 노력하자고 엉너리를 쳐서 수습 했다. 장복은 나를 중대에서 물러가라고 하였다. 나는 다시 대대부로 돌아와서 울적한 심정으로 나날을 보냈다.

    이 기간, 나는 지나온 나날들을 곰곰히 회고해 보았다.

    일본헌병대에서 넉달을 통역으로 일한것은 팔로군에서 일반적인 력사문제로 이미 결론을 내린거고 그후 여러번 표창을 받으며 맡은바 사업을 잘 감당 하였다. 태항산과 연안에서도 잘못한 일이 없었다. 3지대시절 몇가지 불쾌한 일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누구의 잘, 잘못이라고 할것까지는 없는것이 아닌가. 그것들로는 대개 너덧가지가 되였다. 46년도말 주덕해는 나에게 가목사, 목단강일대로 나가서 그곳에 있는 다섯개 조선족중대를 훈련해 가지고 데려 오라고 하였다. 나는 즉시 리명일을 데리고 가목사로 갔다. 그런데 중대들은 간부들을 기다리다 못해 군구 각 퇀에 분산 배치된 뒤였다. 당지 부대령도에서는 그러면 순시를 하면서 관리를 하던지… 다른 방법은 없다고 하였다. 나는 돌아와서 우리가 늦었더라고 주덕해에게 회보 하였는데 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할수없지. 됐다. 됐다. 설인데 술이나 마시자.” 하였다. 나는 사처로 뛰여 다니며 어떻게 하나 얼마만이라도 끌어 오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하였다. 그곳 부대령도들과 여러번 교섭도 하고 군구 유관부문도 찿아 다니며 토론 했는데 총적으로 말해서 그들은 전사들을 내놓기 싫어 했다.(당시 한족들의 참군열은 높지 못했다.) 하지만 공로는 없어도 고로는 있은건데 주덕해는 불만스러워 하는것 같았다.  내가 재삼 “우리가 손을 늦게 썼다.”고 하니 주덕해는 “그럼 내탓이란 말인가. 됐다. 됐다. 그만 하자.” 하며 술을 마이였다. 그날 나는 마일줄 모르는 술을 마이고 취하기까지 하였다. 두번째 일은 주덕해가 결혼을 할때 나에게 주례를 서 달라고 청탁을 했는데 나는 부끄러워 견결히 거절 했다. 주덕해는 그때 아주 불쾌해 했다. 나는 지어 창피스럽게 생각하며 그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 그러나 새파란 어린 총각인 내가 어찌 나먹은 사람의 혼례를 주관한단 말인가.(그는 나보다10살 이상이다.) 다음은 효상이와 내가 약혼식을 할때 그는 시종 시무룩한 태도였는데 “인연이란 따로 있는 법이니 할수 없지.”하고 한마디만 하였을 뿐이다. 나는 그때는 그 말 뜻을 몰랐다. 후에 관건을 어쩌구 저쩌구 말이 돌아서야 알았는데 주덕해는 “생각지도 않은 류등이 나서는 바람에…”하더라는 것이였다. 그말을 듣고 나는 무슨 못할짓을 한것처럼 참으로 민망 했다. 다음의 일은 좀 심각하게 생각 되였다. 그것은 내가 1대대 교도원으로 갔을때, 박약한 1대대를 재빨리 춰세우기 위하여 중대에 당지부를 건립하고 “3사”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군사훈련도 억세게 틀어 쥐였는데 군구에서 내려 왔던 순시원이 좋은 경험이라며 퇀에 보급하고 군구내에 소개까지 하였다. 보다싶히 이 일은 내가 누구에게 자랑하려고 한 일도 아니고 어데다 보고를 한적도 없고 보급이라든지, 소개라든지 한건 사실상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였다. 그런데 주덕해는 “그런일을 나에게 회보해야지… 나를 초과하자는건 좋은 일이지만…”하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나와 직접 말하는 것이였다. 그때 곁에서 장복은 “자기의 직계상급을 무시하거나 초월하는 행위는 좋지 않다!”고 하면서 사상상 방법상 주의하라고 동을 달았다. 내가 벌컥 성을 내며 그런것이 아니라고 변백하자 주덕해는 “좋은 일이다. 됐다. 됐다.”하면서 손을 저었다. 그리고, 지대부간부들이 자주 술을 마이고 무도를 추는데 대하여 마땅치않아한것이 있다. 그외에 또 무슨 일이 있었던가… 더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오, 이번에 장복과 크게 다투었지. 그러나 그것은 사업을 위한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별문제라고 생각했다.

    장복이 돌아간후 나는 그래도 중대에 내려가 보통전사의 신분에서 신식정군에 참가 하겠다고 관건과 떼질을 썼다. 학습할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걸린지 여러날 되는 리질이 말썽을 이르켰다. 고열이 나고 혈변이 나가며 현기증까지 일어 휘청휘청 하였다. 죽는것만 같았다. 관건은 큰일 나자고, 이지경에 무얼 하겠다고 이러냐 하며 나를 억지로 사부 병원에 보냈다. 한달 넘어 치료해서야 병이 나았다.

    나에게는 여전히 직무안배가 없었다. 어느날 나는 사부로 찿아 갔다. 부사장 리덕산은 조선으로 가겠으면 가라고 하였다. 나는 그러면 조직적 수속을 하여 달라고 하였다. 리덕산이 뭐라고 말하려 하는데 장복이 말을 가로채가면서 “수속은 없다. 가겠으면 오늘이라도 개별적으로 가라.”고 하는것이 아닌가!... 아! 그때의 그 섭섭하던 심정은 지금도 가슴이 막혀 온다.

    나는 퇀부로 돌아와 관건에게 사연을 말하였다. 관건은 “참, 알수없는 일이다. 너와 무엇이 틀렸는가…”하며 처연한 기색을 지었다. 내가 주덕해도 만나보고 귀국하는 길도 알아보고… 할빈, 연변쪽으로 나가 보겠다고 하니 관건은 그것이 좋겠다며 려비를 푼푼히 주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마땅치 않으면 부대로 꼭 돌아 오라고 당부 하는 것이였다. 먼저 연변 도문에 이르러 알아보니 조선으로 가려면 통행증 수속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였다. 단위에서 증명을 떼고 수속을 밟는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가만히 두만강을 건너가도 별일은 없다고 하였다. 밀수군 마냥 내가 어찌 그럴수야 있는가!... 나는 강건너 조국산천을 한없이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할빈에서 주덕해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나의 말을 듣고는 “부대의 일은 부대에 가서 말해라. 나는 이젠 부대를 떠난 사람이니 방법이 없다.”고 하였다. 그는 함께 식사 하자는 말도 없이 잘 가라고만 하였다. 나는 착잡한 심정을 안고 다시 부대로 돌아 왔다.
 
장춘
 
    “신식정군”을 보통 “3사3정”이라고도 하는데 그 중점내용은 토지개혁교육과 정당 정군이였다. 부대에서 내건 구호는 “신식정군을 잘 하여 장춘을 해방하자!”였다. 각 부대는 “신식정군”을 하면서 장춘주변의 크고 작은 적들을 각개격파 하였다. 우리 독립11사는 맹가툰 전투에서 크게 본때를 보이였다. 그것은 “천하제1군”이라는 신7군에서도 가장 정예한 38사가 서교비행장을 탈환하려고 나오는것을 때려부순 것이다.

    장춘외위의 적들은 아군에게 격파되여 몽땅 시내로 들어갔다. 아군은 군사상 포위전, 경제상 봉쇄전, 정치상 공심전의 전략방침을 세워놓고 장춘을 철통같이 에워쌌다. 적들로 하여금 량식과 탄약이 떨어져 군심, 민심이 동요하고 혼란할때 들이칠 계획이였다.

    적들이 우리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게 하기위하여 우리는 더욱 맹렬히 “신식정군”을 하였다. 낮에는 대부대의 련합작전훈련을 진행하고 밤에는 이쪽부대가 저쪽으로, 저쪽부대가 이쪽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곧 진공이 있을듯 허장성세 하면서 적들로 하여금 밤낮 불안에 떨며 안절부절 못하게 하였다. 그런가 하면 “공심전”은 더욱 가관이였다. 그것은 우리가 팔로군시절에 쓰던 무장선전대식인데 고음나팔이 울려대고 연에 달아맨 삐라가 날아가고 밤이면 함화가 진지코앞에서 판을 쳤다.

    들어도 못가고 나오도 못하고 적들은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되여 공중운수에 명줄을 걸고 매일을 전전긍긍 하였다. 장개석은 심양으로부터 비행기로 먹을것을 날라다가 공중에서 내리던지였는데 그것을 교란, 파괴하는것은 신나고 재미 있었다. 비행기가 오고 락하산을 뿌리면 고사포, 기관총, 보총을 갈기는데 비행기는 그것이 무서워 고공에서 되는대로 짐짝을 뿌려던지고는 달아났다. 락하산이 터지고 짐짝이 흩어지고 어떤것은 초속으로 떨어져서는 박살이 되였다. 락하산이 우리구역에 떨어질때도 자주 있었다. 짐짝에는 먹을것도 있고 무기 탄약도 있었다. 우리는 장개석을 “우리네 운수대장”이라고 했다. 익살쟁이들은 운수과장이라느니 반장이라느니 조장이라느니 하기도 했다.

    48년10월19일0시 국민당 운남부대군장 증택생이 전 군을 이끌고 기의를 했다. 하여 동, 남, 서쪽의 방선이 활짝 열리게 되였다. 관건은 2퇀을 거느리고 재빨리 담당위수구역인 동쪽을 점령하였다. 우리퇀이 입성하여 북경로까지 전진하였을때 선두인 2영과 신7군이 맞붙었다. 먼저 우리측에서 전사 몇명이 희생 되였다. 우리는 함성을 지르며 길을 사이두고 장춘은행 앞까지 돌진했다. 장춘은행은 신7군의 지휘부로서 적들은 악질적이였다. 놈들은 은행의 견고한 건물에 의지하여 완강히 저항해 나섯다. 장춘해방전투에서 이 전투가 제일 치렬하게 마지막까지 진행된 전투다. 우리퇀은 싸울수록 용맹하게 적들을 족쳤다. 나는 일선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전사들과 함께 싸웠다. 이 전투에서 차라리 죽는것도 좋겠다고 생각하니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그런데 총알은 나를 피해 달아났다. 저녘때가 거이되여 적들은 은행건물 3층창문으로 흰기를 내걸고 투항하였다. 이로써 장춘해방전투는 승리적으로 결속 되였다.(1948년10월19일)
독립11사는 입성후 지금의 인민광장을 중심으로 우리퇀은 동부(동북, 동남지역까지 포함.), 1퇀은 서남부, 3퇀은 서북부 위수임무를 감당하게 되였다. 입성후 사부는 위 만주국국무원 자리에 들고 우리퇀은 일본령사관 자리에 들었다. 입성후 시내 정리사업은 참으로 간거했다. 그러나 3일후부터 기차가 통하고 전기가 통하고 량식, 채소가 대량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내 치안질서는 온정 되였다.
그해 11월2일,심양이 해방 되고 료심전역이 승리적으로 끝났다. 11월11일 장춘시위와 정부, 독립11사는 련합으로 동북해방경축대회를 굉장하게 거행하였다. 13일에는 장춘철로공인구락부에서 독립11사 장춘전투총결 표창대회를 진행 하였다. 대회는 48년6월 독립11사가 건립된이래 지금까지의 사업을 전면적으로 총결하고 선진단위와 모범인물을 표창 하였다. 대회는 련속 5일간 진행 되였다.

    대회 마지막날, 장춘전선사령부 정치위원 소화의 연설이 있었다. 그를 보는 순간 나는 솟아오르는 눈물을 억제할수 없었다. 1940년4월 어느날 팔로군기로변군구 사령원이였든 소화는 간부들 회의석상에서 “이 동지가 조선혁명동지 류동호다.” 하고 나를 소개하면서 뜨거운 악수까지 하여 주었다. 로서군구까지 1년반 나는 그의 신변에서 사업하며 많은 사랑과 관심, 지도를 받았다. 그는 자기의 아래위내이까지 나를 입혔다. 그후 6,7년 세월이 지난 오늘 뜻밖에도 옛 사령원을 만났다. 그러나 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 갈수 없었다. 나는 지금 “아무것도 아니기에!”… 수장들과 떨어져 있어야 했다. 대회가 시작되기 직전 정치부주임 왕해청이 나를 부르기에 달려가니 정치위원 송경화가 오늘 수장의 통역을 맡으라고 직접 임무를 주는것이였다. 나는 울렁이는 가슴을 진정하며 주석대 귀퉁이에 서 있었다. 소화는 주석대로 오다가 나를 보고 “류동호! 너 여기 있는가?!”하며 몹시 반가워 하였다. 나는 제꺽 경례를 한후 소화가 내여미는 손을 두손으로 마주 잡고 눈물을 떨구었다. 무슨말을 했으면 좋겠는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날 소화는 조선동지들의 국제주의정신과 혁명적영웅주의를 매우 높히 찬양하면서 나를 껴 안다싶히 하고 어깨를 다독이며 이 쑈류도 잘 싸운 동지라고 하였다.(이말은 통역하지 않았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소화의 연설을 통역 하였다.

    기쁨과 흥분속에서 설이 지나고 이듬해 3월 독립11사는 중국인민해방군 보병 164사로 개편 되였다. 한족간부들은 모두 전근해 가고 조선족들로 무어졌는데 사장에는 리덕산, 정치위원에는 장복이 임명 되였다. 원 1퇀은 490퇀으로, 2퇀(3지대)은 491퇀으로, 3퇀은 492퇀으로 편성 되였다. 그때 사부에서는 나를 490퇀 정치처 선전고에 가서 사업하라고 하였다. 나는 수년간 정들고 함께 싸운 전우들과 작별하고 이불짐을 둘러메고 490퇀의 위수구역인 장춘서남쪽으로 갔다. 선전고에는 화룡에 집이 있다는 김동무(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가 있었다. 나는 그와 함께 사업 하였다. 직무는 여전히 없었다.

    그해 7월초, 내가 사무실에서 재료를 쓰고 있는데 정치처주임 정길운이가 퇀장의 지시라며 나를 사부에 가 보라고 하였다. 나는 무슨일일가? 생각하며 사부로 갔다. 사부 회의실에는 이미 20여명 사람들이 있었다. 얼마후 조직고의 간부가 종이장을 들고 들어와서 점명한후 “동무들은 오늘 제대하여 연변으로 가게 된다.”하고 선포 하였다. 이어 몇사람을 지명하며 수속문건을 가져가라고 하고는 나가 버렸다.

    제대간부 20여명은 장도선 북행렬차에 앉아 연변으로 떠났다. 모두가 머리를 수굿하고 묵묵히 앉아 갔다. 부대에서는 송별도 환송도 없었다. 부대가 곧 조선으로 나간다고 모두가 들뜨고 기뻐할때 우리는 제대되여 중국땅에 떨어지게 된것이다. 나는, 나의 일은 왜서 이렇게 자꾸 꼬이기만 하는지 알수 없었다. 이번에는 조국으로 나가게 된다고 얼마전에 효상이와 편지까지 하였다… 차탁에 엎디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루루 흘렀다. 로소한이 “혁명가가 울면 되나!” 하고 방불히 곁에서 말하는것만 같았다. 그러나 슬프고 서러운 마음을 걷잡을수 없었다.

    렬차는 뚜두둑! 뚜두둑! 쉼없이 달리였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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