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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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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헌병대 통역(10)
2017년 05월 20일 14시 41분  조회:1554  추천:0  작성자: 회령
                                                      일본헌병대 통역(10)
             6.일편단심
 
사업
 
    연길에 도착하니 우리일행을 지위초대소에 들게 했다. 나흘 휴식한후 우리는 지위조직부로 불리워 갔다. 부부장이라는 젊은녀성동무가 들어와서 인사를 하고는 지금 주덕해동지가 회의중인데 조금 기다리라고 하였다. 이윽하여 주덕해가 방으로 들어 왔다. 그는 “부대에 가서 유능한 간부들을 지원해 달라고 했드니 전부 문제꺼리들만 보냈군. 부대 일처사가 글러 먹었어.”하며 부대를 욕하는지 우리를 시답잖아 짜증을 내는지 툴툴거리였다. 이건 사람을 괄시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나는 대뜸 부아가 치밀어 “그럼, 우리를 부대로 돌려보내 주시오.”하고 퉁명스레 말했다. 우리가 무슨 죄인인가… 주덕해는 “됐어. 됐어. 그저 그렇다는 말이지.”하며 손을 흔든후 연변의 형세를 설명하면서 사업을 잘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이어 조직부 부부장 녀성동무가 사업터를 안배해 주었다. 장춘에서(164사)온 전업간부들은 개산툰종이공장으로, 심양에서(166사)나온 동무들은 석현종이공장으로 가라고 하였다. 그날오후 우리는 개산툰으로 갔다.

    당시 개산툰공장은 생산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창장 서명은 우리를 열정적으로 환영하면서 며칠 쉬라고 하였다. 우리는 공장초대소에서 주숙을 하였다. 서명은 광주시 사람으로 중산대학 졸업생인데 가정성분은 지주라고 하였다. 그는 일찍 혁명에 참가했고 1938년에 입당한 연안간부 였다. 그는 영어에 능통했다. 서명은 주덕해와 달리 우리를 “로팔로” “항일간부”, “연안간부” 하면서 존중하고 관심 했다. 그는 출근할때면 먼저 우리를 둘러보고는 공장으로 갔다. (서명은 후에 동북국 공업부문에 갔다가 외교부에서 사업하며 구라파 여러나라 대사로 사업. 1988년9월 사망.)

    나는 며칠 쉬면서 사상상 정서상에서 마음을 정리 하였다. 부대를 이끌고 보무당당히 귀국할 날을 꿈꾸던 나였다. 그런데 오늘은 군복을 벗고 지방으로 왔다. 어떻게 할것인가. 조직의 안배에 복종하며 맡겨주는 사업을 참답게 할수밖에. 무슨수가 있겠는가. 개별행동은 할수없다. 어느날, 조직은 조국으로 부를 것이다… 나는 효상이에게 편지를 써서 사연을 말하고 좀 더 기다리라고 하였다.

    며칠후 나는 서명을 찿아가서 아무일이나 다 좋으니 사업을 맡겨 달라고 하였다. 서명은 일하겠다는 사람으로는 내가 첯사람이라고 하며 매우 반가워 했다.
 
    지금부터 류동호의 곡절적인 인생길은 더욱 심화되기 시작 한다.
 
    서명은 류동호의 본보기였다. 대단한 지식분자이며 혁명에서 고경력자인 그는 광주를 떠나 머나먼 북쪽의 변강산골인 개산툰에 와서 오직 혁명을 위하여 사업하지 않는가… 류동호는 안착하고 혁명사업에 충성하리라 새롭게 다짐 하였다.

    서명은 류동호에게 인사고 고장사업을 하라고 하엿다. 그것은 공장에 와서 일하려는 사람들을 적절히 배치하는 사업이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길림으로부터 서명의 안해가 왔는데 동북제지국에서는 그를 공장 선전고에 전근 시켰다. 서명의 안해는 선전고는 싫다면서 인사고에서 사업하고 싶어 했다. 서명이 미안해 하면서 이런 사연을 류동호와 말하자 류동호는 선뜻히 자리를 내 주고 선전고 일을 맡았다. 류동호는 간사로 리삼을 데리고 선전고 사업을 시작 했다. 그는 급선무로 문맹퇴치와 선전대를 조직하는 사업을 틀어 쥐였다. 그는 원목차간에서 림시공으로 일하는 처녀 조춘복이를(중학교 졸업생) 선전고로 오게한후 문맹퇴치를 맡게 했는데 춘복이는 3대거리로 문맹퇴치반을 참답게 가르쳤다. 춘복이가 공장에서 정식으로 선생질을 하자 적지않은 농촌 처녀 총각들이 공장으로 일하려 왔다. 류동호는 청년들 속에서 알맞는 사람들을 선발하여 문맹퇴치반 선생대오를 보강하고 인차 업여선전대도 조직 하였다. 업여선전대는 다양한 문예절목들을 만들어 공인들에게 연출하고 주변의 농촌마을에도 공연을 다니였다. 내용은 주로 혁명의 주인공답게 혁명을 잘 하며 공산당과 모주석을 노래하며 계급각오를 제고하며 혁명정권을 보위하며 공장을 사랑하고 복구와 생산을 하루 빨리 회복하자는 것이였다. 워낙 이 방면에 흥취와 소질이 있는 동호인지라 선전고의 사업은 활기롭게 잘 되여가고 있었다.

    몇달후 어느날 인사고 책임으로 있던 조경현이가 툴툴거리며 류동호를 찿아 왔다. 그는 서명이가 안해를 인사고 고장으로 안배하며 자기를 안전고에 가라고 한다는 것이였다. 돌이켜 보니 서명은 전업간부들을 차요한 부직이 아니면 지어는 공인으로 안배 하였다. 류동호는 즉시 서명을 찿아가서 당신이 창장과 서기직을 도맡는 것은 적당치 못하며 민족지구에서 민족간부를 중시하고 배양할 대신 차요시 하는것은 원칙적 문제라고 엄숙히 의견을 제출 하였다. 서명은 류동호의 의견을 허심히 접수 하였다. 그는 지부대회에서 자기의 편면적인 사상견해를 검사 하였다.

    그해 년말 류동호는 석현종이공장에 파견되여 생산관리를 학습하게 되였다. 갈때 그의 건의로 리훈과 리일민을 데리고 갔다. 학습을 마치고 그는 생산을 틀어쥘데 대한 구상까지 가지고 신심있게 돌아 왔다. 그런데, 서명은 연변지위의 지시라며 동북국당교에 가라는 것이였다. 그는 그자리로 심양에 갔다. 학습은 조선전쟁 때문에 한달 앞당겨 끝나고 단위로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그에게 계획과 과장을 하라고 하였다. 이로하여 서명과 류동호는 크게 쟁론을 하였다. 동북제지국에서 계획과 과장으로 왕 모(한족)를 보냈는데 서명은 그를 생산과장으로 안배하였다. 서명은 연변지위의 의견이라며 류동호를 설복 하였다. 류동호는 조직의 결정에 복종한다면서 계획과로 갔다. 얼마후 항미원조 동원이 있자 동호는 선참으로 지원 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조직의 수요라며 비준하지 않았다. 1951년7월 동북국에서 금주팔프공장에 간부를 지원하라는 지시가 내려오자 공장에서는 류동호를 가라고 하였다. 류동호는 두말없이 금주로 갔다. 금주에서는 그를 계획과 과장을 하라고 해서 그가 사업에 몰두하는데 52년 3반5반운동이 개시되자 이번에는 그에게 그 책임을 지라고 했다. 류동호는 심입된 조사를 거쳐 증거가 확실한20여명의 문제인물을 잡아냈다. 그런데 공장령도에서는 한명만 처리하고 남어지는 이리저리 빼 돌리고 풀어 주었다. (공장령도들의 친척들임.) 이로하여 류동호와 공장령도는 맞서게 되였다. 이렇게 되자 공장에서는 류동호에게 임무를 잘 완성 했다면서 원단위로 돌아가라는 것이였다. 54년3월 동호는 다시 개산툰으로 왔다. 그때는 개산툰공장이 활기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공장에서는 동호에게 계획과 과장을 하라고 했는데 얼마 안되여 성당교 학습임무가 내려 왔다. 누구도 가기 싫어하는 모양, 왕창장(원래의 생산과 과장)은 동호를 가라고하였다. 동호는 두말않고 성당교로 갔다. 후에 안 일이지만 왕창장은 계획과부과장 리삼을 과장으로 안배하기 위하여 그런 소동작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동호가 돌아온후 얼마안되여 리삼은 계획서를 분실했다. 숙반이 갓시작된 그때 이사건은 큰 사건이였다. 좀 더 찿아보자며 보고를 미룬것으로 해서 동호는 심사까지 받고 기건과 과장으로 림시 안배되고 리삼은 출당철직 되였다. 동호가 기건과로 간후 기건과가 확대되여 회계조가 나왔는데 동호는 회계조 조장으로 배치되였다.

    1957년초 연변주에서 기본건설과에 방조인원이 수요되여 공장에서는 동호를 보냈다. 동호는 림시로 과장직을 맡고 사업하였다. 그때 마침 성에서 검사조가 왔는데 그들은 자기들을 잘 초대해 달라고 동호에게 말하였다. 동호는 그런것을 제일 미워하는 사람이였다. 결과는 검사조를 노엽히고 주위서기 전인영을 대노케 했다. 동호는 쫓겨 개산툰으로 되돌아 왔는데 그때는 아무런 직무도 주지 않았다. 그는 기건과의 일반간부로 있었다. 이로써 류동호의 관직(벼슬)은 끝나버렸다.

    전업후 류동호가 장기판의 말이나 포쪽처럼 이리뛰고 저리뛰고 굴러 다니게 된것은, 그리고 기껏해야 중층령도급에서 더 벗어나지 못하고 밀렸다 당겨졌다하게 된데는, 나중 “벼슬”에서 영 떨어지고 만데는, 그 내역이 있다.

    류동호의 일본헌병대 통역경력(말하자면 력사문제)을 팔로군에서는 근본상 무슨 문제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이것은 팔로군기로변군구사령원 소화, 정치위원 왕휘구, 적공부부장 로소한이 직접 심사결론한 것이다. 40년2월 혁명에 참가한이후 류동호의 계급의식과 사상각오, 혁명적극성은 현저한 제고와 뚜렸한 성과를 가져 왔다. 하여 42년도에는 팔로군로서군구에서 입당까지 하게된다. 후에 입당이 취소된것은 로서군구 조직고고장의 말과같이 그런원인이 아니다. 그 당시 중공중앙에서는 외국동지들이(당시는 조선족도 외국인으로 인정함.)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는 문제를 원칙상에서 금지할데 대한 내부지시를 했던 것이다. 43년봄, 류동호가 태항산으로 올때 당안재료는 분실없이 따라왔고(진한중이 휴대) 45년10월 심양으로 올때까지의 그의 당안(력사)에는 이렇다 저렇다 할만한 흠집이(문제, 결점) 없었다. 그의 당안은(력사) 좋았다. 그런데, 고력툰회의(심양회의) 직전에 조선의용군 사령부에서는 모든 재료(당안 및 기타 문서재료), 물품, 지어는 개인소지품까지 몽땅 기차편으로 조선 신의주에 부치였다. 류동호는 그때 누구보다 많은 책을 조선에 부치였다. 로소한에게서 기념으로 가진(1943년 갈라질때) “백과주해신어사전”은 가방에 넣고 다니며 늘 보다보니 남았다. 그는 지금도 그 책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모든것은 영영 분실되고 말았다.(아깝게도 한장뿐인 부모님사진도 조선에 부치다보니 잃어 버렸다.)

    현재의 당안은 3지대로부터 건립한 것으로 가장 중요한것은 49년7월 전업할때의 부대(164사) 감정서다. 감정서는 이렇게 되여 있다.

    “류동호에게는 천진일본헌병대통역으로 있은 엄중한반혁명력사문제가 있다. 주의하 여 관찰하며 공제하여 사용해야 한다.” 하단에는 사장 리덕산, 정치위원 장복의 친필서명이 있었다. (그 먼저의 조직의견 혹은 감정에는 “일반적인 력사문제”라고 했다.) 지방에서는 부대의 이 감정을 충분히 중요시한 셈이다. “엄중한반혁명 력사문제” “주의관찰” “공제사용”이라는 이런 전제가 있다보니 류동호를 다루는데는 소속단위 령도로서는 아주 편리했든 것이다. 자기를 초월하지 못하게 하는것인즉 “공제사용”에 부합되는거고 이리저리 굴리는 것은 “주의관찰”에 맞는 작법이였다. 그리고 “엄중한 반혁명력사문제”가 있는 사람이기에 아무때고 죄인 취급을 할수 있었다. 손오공은 금고주 하나로 당나라 중 현장의 노복을 했지만 류동호에게는 금고주가 세개나 씌워져 있었다. 그는 이렇게 발전전도가 이미 막힌 사람이였을 뿐만아니라 다른 사람의 승급용 발판이기도 했다. 입당하려는 사람, 승급하려는 사람, 어떤 리득을 챙기려는 사람들은 흔히 그를 내리까는것으로 자기의 높은 사상각오와 수평을 표현하였다.

    1955년 개산툰공장 당위 간부과(조직부)에서 “5인소조”가 전면적인 심간(간부심사)공작을 했는데 류동호에 대한 심간결론은 다음과 같다.

    “천진일본헌병대 통역을 한 엄중한력사반혁명문제가 있다. 그러나 력사반혁명분 자로 모자는 씌우지 않는다. 인민내부모순으로 한다. 하지만 주의하여 관찰하며 사용에서는 공제 한다.”

    1957년부터 날따라 열이 오르는 “계급투쟁” “정치사상투쟁” 환경에서 류동호의 운명은 더욱 비참해지기 시작한다.

    1957년9월 연변주위와 직속단위들에서 민족정풍을  하였는데 류동호는 “소수민족지구가 발전하려면 소수민족간부를 대량적으로 배양해야 한다.” 고 발언 하였다. 이 언론은 승진을 위하여 밤낮 고심하는 일부 사람들에게 좋은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들은 류동호의 “엄중한력사반혁명문제”로 부터 근원을 내리 풀어 나중에는 그에게 “지방민족주의분자”라는 모자를 씌웠다. 류동호는 자동에 있는 공장 부업기지에 가서 로동개조로 소사양을 하였다. 이듬해에는 멀리 산골인 세린하 향에가서 농사를 지으며 밤마다 반우경학습반에 참가 하였다 어느 한번 그는 학습반에서 “당지부가 행정일을 간섭하거나 도맡아 하는것은 적당치 못하다.”고 발언 했다. 이로하여 그는 또 한차례 발판으로 되였다. 이번에는 그에게 ‘우파분자”라는 모자를 씌웠다. 류동호는 1962년6월까지 만5년을 로동개조로 농사일을 하다가 공장으로 돌아 왔다. 이만하면 개조가 되였다고 인정해서였는지, 아니면 납작하게 만들어 놨다고 봐서였는지… 공장당위에서는 그에게 씌운 두가지 모자를 이젠 벗겨 준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건재차간에 가서 로동을 하라고 했다. 그후 원목차간을 거쳐 2년여 로동을 하다가1964년 하반년부터는 공장도서실의 도서관리원 사업을 하였다.

    도서관리원으로 사업한지 2년거이 되여 류동호는 문화대혁명을 맞게 된다. 운동이 시작되자와 같이 그는 “엄중한력사반혁명분자”로 잡혀나와 인신적 모욕을 당하며 모진 투쟁을 당하였다. 처음 몇달은 류동호를 직접 투쟁 하였다. 즉 그가 투쟁의 과녁이였다. 그러다가 후에는 더 투쟁할멋도 없고 죽은귀신이라고 인정되여 잡귀신무리에 그저 따라다니는 팔자가 되였다. 어느 잡귀신을 투쟁할때면 그도 따라나가 잡귀신들의 행렬에 서서 모든개투쟁을 받으면 되였다.(1966 년부터 1969년감옥에서 나올때까지) 1968년3월 개산툰공장혁명위원회가 투쟁속에서 “승리적으로, 영광스럽게 탄생했다.” 혁명위원회주임은 송복진이라는 한족이였다. 그는 당, 정, 군(민병) 공장의 대권을 한손에 틀어쥔 인물로 되였다. 그의 곁에는 군 대표가 붙어 있었다.

    송복진은 계급투쟁을 억세게 틀어쥐였다. 그는 명령을 내려 “문제인물학습반”을 꾸렸는데 중점인물들은 쇠살창을 댄 배양중심학교 교실에 가두었다. 류동호는 거기에 열한달을 같혀 있었다. 1969년 감옥에서 나온후 류동호는 당적취소, 간부자격취소, 5급공으로 강급처리를 받고 생활복리과에 가서 땔나무실이 로동을 하였다. (월급은112원으로부터 58원24전으로 깍김.) 류동호는 이 로동을 만7년 하였다. 그간 1971년 송복진이 조정하는 당위는 류동호의 당적을 회복해 준다고 하였다. 류동호가 “그럼, 너회들이 나에게 씌운 정치모자는 어떻게 하는가?”하고 물으니 송복진은 “인민내부 모순으로 한다.”하고 얼버무렸다. “그럼! 들씌운 죄장은 벗기지 않고 당적은 무슨놈의 당적이야! 너같은 자식이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마당에 평판은 또 무슨 개뿔짝 같은 평판이야?! 싹 걷어 치웟!” 류동호가 문을 거세게 박차는 바람에 출입문유리는 박살이 되고 말았다. 그때 세월에 이 사건은 보통일이 아니 였다. 그후 이 일은 전기적색채까지 띄고 공장에서 오래동안 류전 되였다. 당적은 두리뭉실 그냥 회복이 되였다고 했으나 간부자격이며 기타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다. 류동호는 그러건 말건 관계치 않았다. 그는 그냥 우차몰이를 하며 좋은 화목이 나오면 탁아소, 직공식당에 우선으로 가져다 주었다. 그는 이 평범한 일도 혁명사업이며 자기는 장사덕처럼 오직 혁명만 하면 된다고 생각 했다. 그리고 어느날엔가 당은 공정한 대답을 줄것이라고 확고히 믿고 있었다.

    1976년 “4인패”가 거꾸러진후 얼마안되여 송복진은 류동호를 보자고 하였다. 송복진은 류동호와 비하면 어느면에서나 많이 떨어지는 사람이였다. 류동호는 무슨 연극을 하나 보려는 심사에서 그를 찿아 갔다. 송복진은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고 원목구입이 어떻게 중요하고 어쩌고 하며 뜸을 들였다. 류동호는 꼴같지않아 역정을 버럭 내며 “밖에 소를 세우고 들어 왔으니 얼른 말해라.” 하고 퉁명스레 쏘았다. 송복진의 말은 원목구입원을 하라는 것이였다. “하지!” 류동호는 외마디 대답을 하고 나와 버렸다. 이튿날 류동호는 앓고 있는 안해에게 “병원에 자주 가 보라.” 하고는 머나먼 가목사로 떠나 갔다. 그때로 부터 3년동안 류동호는 동북각지 림업국과 산판을 무수히 돌아 다니며 공장의 가장 중요한 기본 원료인 목재구입을 하였다. 77년, 78년에는 공장의 선진생산자로 당선 되여 년말표창대회에 참가하라고 통지가 왔지만 그는 아른체도 하지 않고(송복진 등 그들을 보기 싫었다.) 목재구입에 동분서 주 하였다.

    1979년2월 공장에서는 구입원 두 사람을 파견하여 류동호의 사업을 인계 받도록 하였다. 류동호는 마지막으로 원목차피 40바곤을 띄우고 공장으로 돌아 왔다. 전해에 송복진 등 사람들은 철직, 전근 등 조직적 처리를 받았다. 개산툰공장의 문화대혁명 뒤처리는 비교적 간거했다. 600여명의 억울한 안건과 80여명의 인명건은 간단한 일이 아니였다. 그만큼 “4인패”류독이 심하고 사건들이 많았다.(바로잡는 사업은 근 3년시간이 걸렸다.) 이 공작은 조봉명(후에 주당위조직부부장으로 사업함.)이 공작대를 이끌고 많은 수고를 하였다. 공장의 령도기구에는 많은 변동이 있었다. 류동호가 돌아 오자 창장 강귀송(조선족)은 그에게 계획과 과장사업을 맡기혔다. 그러나 류동호는 태도를 보류하였다. 그런데 그때 마침 중앙방직부에서 일어통역을 한명 요구 하였다. 제일 적임자는 류동호 였다. 류동호는 기꺼히 임무를 접수하고 북경으로 갔다.(평정산에 가서 사업.)

    1981년 임무를 완성하고 단위로 돌아오니 공장에서는 그때까지도 그의 계획과 과장직을 걸어 놓고 있었다. 류동호는 창장 강귀송을 찿아 직무를 해임하여 달라고 하였다. 모두가 한급이라도 벼슬을 못해 안달을 하는 판에 이런 사례는 처음 있는 일이였다. 강귀송은 “지금까지 로혁명간부를 박대 한것을, 섭섭하지만 량해하고 사업을 하여 달라.”고 하며 류동호를 설복 하였다. 류동호는 “그런것이 아니다. 이젠 나이도 다 먹었는데, 젊은 사람들이 중요한 부서에서 대담히 사업하게 해야 한다.”하며 그냥 자기의 의견을 고집 하였다. 하여 이 문제는 매듭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그해 년말, 류동호는 생애에서 평생처음으로 개인일로 당조직을 찿아 연변주당위로 갔다. 아침 저녘으로 바라보이는 서산에는 두 아들과 안해의 무덤이 있고 이고장에서 바친 청춘과 한생이 어쩐지 서글프기만 해서 마음을 도무지 진정 할수가 없었다. (1949년7월, 28살 총각으로 여기에 오지 않았든가! 어느덧 60이 되였다.) 그는 자꾸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 환경을 바꾸기로 생각 하였던것이다. 주위 조직부부장 조봉명은 자기의 불찰이기나 한듯히 관심이 부족했다며 거듭 사과하고는 어떤부문에 가고싶냐고 물었다. 류동호는 문예단위 같은데 자리가 있으면 일반직원으로 아무일이나 하였으면 한다고 대답 하였다. 조봉명은 즉석에서 선전부장 김영만에게 직접 전화로 련계를 하여 주었다.

    1982년1월 류동호는 연변주문예창작평론실 부주임이라는 벼슬을 달고 연길로 전근해 갔다. 그리고 10달후 리직 했다.(부현급 정치, 생활대우. 정책상 원래는 5년을 더 재직에 있을수 있었으나 그는 자원리직을 했다.)
 
가정
 
    1949년7월초 류동호는 개산툰에 온후 효상이에게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편지를 했다. 얼마후 효상이 회답편지가 왔는데 더 기다릴수 없다며 파혼을 하자는 것이였다. 류동호는 그러는 것도 좋겠다며 동의를 했다. 이렇게 그의 첯사랑은 막을 내리였다.
164사는 1949년7월17일 사장 리덕산과 정치워원 장복의 인솔하에 조선으로 나갔다. 조선에 간후 라남 5사로 재편되였다. 사단장은 김창덕(리덕산) 문화부 사단장은 리덕원(장복)이 였다.(후에 모두 실각. 장복은 회령에서 감독개조로 농촌일 을 하다가 수레에 깔려 죽었다.)

    효상이는 류동호와 파혼한후 어찌되여 김택명(리상조)의 아이를 심양에서 낳았다. 그때 그는 김일성저작 한문번역 사업으로 심양에 있었다. 김택명이 실각한후  효상이 행적도 사라졌다. 지금까지 류동호는 물론,그의 집에서도 효상의 소식은 모르고 있다.

    1950년 동북국당교에 갔을때 류동호는 490퇀 선전고에서(장춘) 함께 사업하던 전우 김동무를 만났는데 그는 전업한후 화룡현에서 공회주석을 하고 있었다. 그의 소개로 류동호는 화룡중학교에서 교원사업을 하는 처녀 리경숙과 련애를 하게 되였다. 편지가 서너번 오간후 당교학습이 끝나면 만나기로 약속 하였다. 학습이 끝나기전 류동호는 화룡현위 조직부부장으로 있는 김명한(류동호가 3지대 1대대 교도원으로 갔을때 김명한은 1중대 중대장이 였다. 류동호는 그를 교도대에 학습을 보냈다. 거기서 김명한은 중대장을 했다.)에게 편지를 써서 리경숙의 정황을 자세히 알려 달라고 하였다. 얼마후 김명한의 회답이 왔다. 처녀는 위 만주국 사도대학 졸업생인데 훌륭하다고 하였다. 홀어머니와 함께 있는데 어머니는 려관업을 하는 젊잖은 분이라고 했다. 그때 어느날 주덕해가 그들을 보려고 당교로 왔다. 주덕해는 “나는 네가 효상이를 따라 조선으로 갈줄로 알았는데, 너의 사상각오에 만족과 감탄을 금할수 없다. 너는 훌륭한 혁명간부다. 내가 조선방문을 갔을때 효상이를 데려 오려고 했는데, 설송이 말을 들어보니 효상이는 너무 더러워서 데려 오지 않았다. 싹 잊어 버려라. 연길 공안국에 좋은 처녀가 있는데 소개 할가?”하며 동호의 눈치를 보았다. 류동호는 “지금 화룡에 있는 처녀와 련애중인데 결과를 보고 결정 합시다.”하고 대답 하였다.

    당교학습이 끝나자 류동호는 김동무와 함께 화룡으로 갔다. 경숙이는 역전에 마중을 나왔다. 로총각 로처녀의 약혼은 그날로 결정 되였는데 어머니는 그들을 한방에서 자게 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고 이야기로 밤을 새웠다. 그들은 그해 국경절에 결혼식을 올리려 했는데 류동호가 사업이 바빠서 설로 미루었다. 설에도 또 시간이 없어서 결국 잔치는 이듬해 5.1절에 간단히 치루고 말았다.(너무 간단했고 축의금을 일체 받지 않아서 모두 과부잔치같다고 했다.) 결혼후 경숙이는 연길로 전근 했다가 다시 개산툰공장으로 전근 했다. 그는 개산툰공장에 온후 줄곧 원목차간 회계사업을 했다.

    그들부부는 4남1녀의 자녀를 두었다. 그런데 큰아들은 1976년 잔치를 한달 앞두고 아침을 먹고 나간 사람이 건축현장에서 사고로 죽었다. 둘째는 삼년후 공장에서 홍반(극독품)을 실은 차로 날라온 물고기를 먹고 중독성간염으로 앓다가 어린처자를 남겨놓고 역시 서산으로 갔다. 1981년에는 환난을 함께 하여온 안해도 두 아들의 뒤를 따라 류동호의 곁을 떠나 갔다. 이렇게 련속 덮쳐드는 불상사는 류동호로 하여금 비창한 마음을 억제할수 없게 하였다. 그는 생각다 못하여 주당위로 찿아 갔던 것이다…
 
부기
 
    류동호가 리직한후 이듬해 주당위에서는 로간부들을 조직하여 혁명사적지 현지답사를 진행 하였다. 류동호는 거기에 참가하여 무한, 계림, 태항산, 연안, 할빈 등 지를 한달여 방문 하였다. 당년의 전우들과 수장들을 다시 보는것만 같았다. 그는 돌아온후 문단사람들의 손을 빌어 회상기 10여편을 발표 했다. 류동호는 여생을 그토록 애착하던 문학에 바치려 결심 했다. 그런데 그는 필력이 너무도 따라가지 못함을 새삼스레 발견하고 한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한어로도, 일어로도, 조선글로도 문장을 쓰기가 너무도 힘들었다. 그러나 전우들의 우렁찬 함성이 귀에 쟁쟁하고 씩씩한 모습이 눈에 삼삼하여 진정할수가 없었다. 그는 문단의 젊은 사람들께 소재를 적극 제공하는 한편 부지런히 조선어 공부를 하며 습작을 하였다. 그러나 이때에는 정력이 따르지 못했다.
 
    1983년봄 류동호는 가족을 찿아 보려고 조선 신의주로 갔다. 여러날 헤매인 끝에 동생 영애와 영호, 정호를 만나 보았다. 아버지는 신의주군화공장에서 일했는데 조선전쟁시 폭격에 죽고 어머니는 영호네와 함께 삭주에서 살고있었다. 그는 창순이도 찿아 보았는데 창순이는 전쟁시 이미 죽고 그의 안해가 아들을 데리고 있었다. 류동호는 창순이 형 창용의 사망소식을 그의 부모들에게 알린후 삭주에  가보려고 하였다. 그런데 보안서에서 아무리 사정하여도 비준하지 않아 그대로 돌아오는수밖에 없었다. 동생들의 집 살림은 모두 넉넉치 못했다. 류동호 자신도 줄곧 가난한 살림을 하였다.
 
    류동호는 1993년 일본 민간단체인 “무궁화”회의 초청으로 일본 유람을 하였다. 그때 다나까가즈오(본명은 사도다께오)와 감격적인 해후를 하였다. 꼭 반세기가 지나 갔다. 세상은 많이 변했다…
 
    “조선의용군행진곡”(리정호 사, 곡)을 정률성의 작품으로 오인한 문제를 류동호는 상당한 노력을 들여 시정하였다.
 
    그후, 한국에서 공훈보훈처 리보온선생이(력사학자) “상해림시정부”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의 항일활동력사를 수집하려 왔을때 류동호는 사료를 적극 제공하는 한편 그를 배동하여 사적지를 답사하고 경력자와 증실인들을 찿아 다니며 조선민족의 항일투쟁력사를 재조명하는 사업에 적극 협력 하였다.
 
후기
 
    류동호는 새세기 첯해인2천년 10월23일에 세상을 하직 했다.(1921.9.17 ㅡ2000.10.23) 페암말기로 진단을 받고 한달후에 작으만한 셋집에서(장춘) 사망 했다. 자식들이 마지막으로 성병원에 가본다고 모시고 갔는데 입원할수 없어서 셋집을 맡고 대충 치료를 받았다. 그는 림종에 무슨 요구가 없는가고 물으니 아무런 요구도 없고 죽은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였다.(필자도 몰랐다.) 자식들은 그의 골회를 개산툰으로 안고가서 어머니와 함께 합장하였다.
 
    류동호는 두가지 꿈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문학으로 크게 성공해 보겠다는 것이였고 다른 하나는 조국(조선)을 위하여 몸바쳐 사업 하겠다는 것이였다. 그러나 그의 꿈은 어느것하나 실현되지 못했다. 1949년 부대에서 전업한후 그는 중국의 혁명과 건설에서 충성을 다하여 사업을 잘 하겠다고 결심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일편단심은 긍정을 받지못했다. 건국후 30년의 계급투쟁환경은 그를 줄곧 “주의관찰” “공제사용” 하였다.

    중국의 간부는 혁명(사업)에 참가한 시간을 기준으로 건국전과 건국후로 자격을 론한다. 건국전에 혁명에 참가한 간부로서 제일자격자는 장정간부(공농홍군)이고 두번째는 항일간부(팔로군, 신사군)이고 세번째가 토개간부다.(항일전쟁후 혁명에 참 가한사람.) 건국전에 혁명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개국공신들로 인정한다. 때문에 당의 귀중한재부로, 귀중한간부력량으로 당에서는  중시하고 중용했으며 사회적 으로는 매우 존중했다. 이런 건국전 간부들중에서 연안에서 사업한 경력이 있는 간부는 특히 “연안간부”라고 부르면서 더욱 높히 보았다.

    류동호는 두말할것 없는 항일간부, 연안간부로 건국전에 이미 중공당원이였고 부퇀급간부(대대교도원) 였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극히 귀중한 당의 지식인간부 였다. 적어도 70년대까지는 보기드문 고경력자 간부 였다. 혁명에 참가한 이래 그에게는 크고작은 공로는 있어도 착오는 없었다. 그는 오직 혁명을 위하여 사업을 적극적으로 하였다. 그는 사업을 잘한, 능력있는 훌륭한 간부였다. 응당 중용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전업후 그는 반급의 승진도 못했다.

    그런데 왜서 리덕산이나 장복은 류동호를 압제하고 지어는 타격까지 했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대량의 간부력량을 전쟁에 투입하여 소모 하던데로부터 돌려서 권력기구를 건설하게되니 죽은 적고 중이 많은 국면이 조성되게 되였다. 말하자면 벼슬자리(령도직위,직급)는 적고 적임자는 많았다. 이런 상황은 자연스럽게 경쟁이 있게 마련이다. 올리훝고 내리훝고 허물있는자는 모조리 뽑아 치워도 적임자는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인사를 주관하는 책임자의 사적인소가 작용할때는 어느누구를 도태 시킨다는건 식은죽 먹기였다. 류동호는 이런 분위기에서 희생물로 되고 말았다. 그와 주덕해, 리덕산, 장복의 개인관계는 그닥 원활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의 주풍(이상 세 사람은 애주가다.)과 남녀작풍에 대하여 류동호는 늘 곱지않게 보았든것이다. 허물잡기에서 4개월의 통역경력은 좋은 흠집이 되여 인위적으로 부풀려 졌다.(엄중한 력사반혁명문제로.) 4개월이 결국은5년의 항일경력과 3년의 해방전쟁, 즉 8년간의 목숨을 바쳐 싸운 혁명투쟁경력을 덮어버리고 눌러버린 것이다. 전업후의 상황도 어금비금 하였다. 일반적으로 령도자들은 자기를 초월하는 하급을 그닥 반기지 않는다. 그 가장 근본적원인은 로소한의 말과같이 개인리기주의사상일 것이다.

    개혁개방의 새시대, 새세상을 만났을 때 류동호는 몹시 기뻐하였다. 사람마다 마음껏 자기의 재능을 발휘할수 있는 좋은세상이라며 그는 찬탄을 금치못해 하였다. 등소평이 참 잘했다고 그는 여러번 말했다. 그는 이제부터 문학을 잘 해 보리라 새롭게 다짐하였다. 그러나 마음은있어도 기력이 따라주지못했다.

    류동호는 기구한 일생을 살았다. 그러나 그는 혁명사업에 나름껏 충성하였다. 더 많은 역활을 발휘하지 못한것은 보다싶히 그의 탓이 아니다. 류동호의 불우한 한생은 막을 내리였다. 하지만 정직한 사람들은 오늘도 그의 한생을 아쉽게 생각하며 추억하고 있다.(10)
                                                                                      끝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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