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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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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6월 16일 14시 27분  조회:1342  추천:0  작성자: 회령
        중편실화소설
                                                                  한
                                                                                                                     회령

    “그때법이 지금같으믄사 샘물깨서는 순보네가 데일 잘살게우.”
    “지금법이 어때서?”
    “아따, 나라법이 고쳐진걸 모루오? ‘사유재산은 불가침이다.’했능디…”
    “그러문 이전에 때려부쉬고 뺏은걸 어떻게 하능가? 지나간 얘기디만.”
    “그때는 그때고… 이제부터능 개인의 합법적재산은 불가침이란거요.”
    “법이란게 원래 기래야디…”

    동구옆언덕 정자나무그늘에서 샘물깨마을 로인 넷이 앉거니 눕거니하고 옛날이야 기를 하고있다. 그들로는 80대고령들인 장재석, 김만덕, 배점동이와 70이 지난 나ㅡ 문순보다.

    샘물깨는 이고장에서 60여호의 제일 큰 마을이였는데 지금은 10여호 궁벽한 마을로 되였다.

    오늘도 날씨는 무척 뜨겁다. 정자나무가지에서는 매미 두어마리가 지친듯 가끔 서너마디씩 울어보고 무슨새는 맑은소리로 곱게 지저귄다. 까치둥지가 있는 저쪽나무에서는 까치 한쌍이 생기발랄해서 깍! 깍! 짖어댄다.

    “그때 우리가 딩역살이 할셈치고 김대장을 찿아갔으니 말이디, 순보네는 아주 페가가 됐을게우.”
    “기막힌 일이디! 허씨네와 신씨네가 원, 그리두 지독할줄이야.”
    “그러니 갸덜 잘된게 무스게 있소? 다 환갑전에 죽구 자손들이래야 온전한건 하나두 없으니… 망했어.”
    “사람이 너무 이악하능게 아니야!”
    “후ㅡ. 정책이 좋구 간부가 좋아야 혀. 기래야 나라가 잘되구 백성두 잘되지. 기때나 디금이나…”
    “사실이 그렇티.”

    지금 이들이 하는 이야긴즉 나도 여러번 들어서 잘 알고있는 토지개혁때의 이야기다. 그때는 내가 어려서, 겪기는 했지만 자세한 내역은 알지못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들을수록 가슴이 미여져서 나는 듣고싶지도 않았고 그들이 외우고 또 외우는것이 질색이였다. 하지만 타박할수는 없다. 이상어른들이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생애에서 제일 큰, 그리고 유일한 이야기거리니까.
 
    광복이 되자 조선 청진감옥에서 아편밀수건으로 옥살이를 하던 허덕근이와 그의 사촌매부 신흥칠이가 집으로 돌아왔다. 샘물깨에는 그들의 부모처자와 형제 그리고 일가친척붙이들이 십여호가 살았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째지게 가난했다. 하지만 덕근이와 흥칠이, 덕근의 삼촌인 허문섭, 흥칠의 두 남동생, 그리고 친척들 중에서도 남자 너덧은 하도 감때가 사나워 마을사람들은 그들을 꺼리며 피하고 싫어했다. 그들은 농사에는 별반 전념하지 않고 노가다판이거나 투전판을 나들며 싸움질 하고 도둑질, 건달질을 꺼리낌 없이 하였다. 마을에서는 그들을 망나니무리라고했다.

    광복난 이듬해초가을 샘물깨에는 토지개혁공작대가 왔는데 리일룡이라는 사람이 목갑총을 메고 나타났다. 사람들은 그를 리대장이라고 불렀는데 기실 그는 대장이 아니고 보통대원이였다. 리일룡은 서른살푼한데 키가 작달막하고 얼굴에 칼자국까지 있어 까마잡잡한 것이 볼품은 없었으나 뱀눈처럼 차갑고 흉악한 삼각눈빛이 반짝일때면 살기를 뿜었다. 그는 샘물깨에 오자마자 허덕근, 신흥칠이네와 손잡고 “빈고농단”을 뭇고 맹활동을 하였다.

    샘물깨에서 제일 잘사는 집은 우리집이 였다. 다음은 장재석이네 등 서너집이 괜찮게 살고 김만덕, 배점동 등 십여호가 자작농이였다. 남어지는 모두 소작농인데, 뒷마을 지주 최군필의 땅을 소작지었다.

    우리집은 할머니가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아버지, 어머니와 누이 셋은 농사일을 하였다. 학교가 먼 탓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딸들은 물론, 나까지도 공부를 시키지 않았다. 나에게는 외양간을 치고 소꼴을 베고 돼지풀을 뜯는 등 잡일을 시켰는데 늘 힘에 부치였다. 아버지가 나에게 배워준 사람의 도리란 “사람이란 부지런해야 산다.”는것과 “인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전부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을 어찌도 억척스레 하였는지 원근에 “꼬리없는 수쇠”, “꼬리없는 암쇠”라고 소문이 났다.

    우리집이 부자로 된것은 대개 광복전 3년부터이다. 3년전에는 자작농을 하면서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와 어린 세 딸들까지 기를 쓰고 부업을 하였는데 땔나무장사와 돼지와 닭, 개 등 짐승치기를 하며 닭알한개, 고기한칼 먹지않으며  푼돈을 모았다고 한다. 그러는중 광복 4년전부터 뒷마을 최지주가 논밭을 얼마씩 팔았는데 시가보다 좀 눅긴해도 현금직거래여서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최지주는 자기의 논밭을 사라고 아버지에게 자청했는데(아주 생각해 주듯히) 마침 아버지손에는 푼돈이지만 얼마간의 현금이 있다보니 최지주의 논밭을 비교적 헐값으로 사들이게 되였다. 시국이 급하게 글러감에 따라 최지주는 논밭이며 가산을 슬슬 처리하면서 여차직하면 도망칠 준비를 하였다. 그는 스스로 생각해 봐도 자기가 지주로 되기까지는 원근에 너무도 많은 악행을 했던것이다. 옛말에 부자가 하나면 세동네가 망한다고 했지만 이고장에서는 최지주 하나로 열동네가 망했다. 최지주 본인도 흉악했지만 그가 결탁한 개다리왜놈순사나부랭이들도 악독하기 짝이 없었다. 최지주는 첩살림을 세곳에 두고 살았는데, 첩으로 끌려가기를 반항해서 자살한 처녀도 셋이였다. 물매로 맞아죽은 사람은 일곱, 병신이 되였거나 골병든 사람은 몇인지 셀수없다. 엄동설한에 가마가 뽑히우고 문짝이 떨어져 나간 집은 몇백호가 될것이다… 최지주가 헐값으로 혹은 지어는 외상으로까지 밭이며 재물을 처리하니 나의아버지는 이게 웬 떡이냐?! 좋아라하고 사 들였다.(광복이 터지자 최지주는 일본사람들과 함께 즉각 도망쳤다.)

    토지개혁이 시작되자 우리집은 꼼짝없이 부농으로 잡히워 청산을 맞게되였다. 집식구들의 힘만으로는 논밭을 다 다룰수 없다보니 더러는 소작을 주었고 농망기에는 품삯을 두셋씩 쓰기도 했다. 그리고 마을사람들에게 장리쌀과 리자돈을 놓기도 했다. 광복전해에는 12칸기와집을 짓기까지했다. 땅이많고 재물이 많고 기와집에 압박착취까지 했으니 청산을 맞아도 단단히, 철저히 맞아야 한다고 빈고농단에서는 땅! 땅! 을러메며 별렀다.

    얼마후 성분을 획분하고 청산을 시작하였다. 리일룡이 조직한 샘물깨빈고농단주석 은 허덕근이고 부주석은 신흥칠인데 골간은 두말할것없이 그들 줄래였다. 덕근의 삼촌인 허문섭이도 한자리를 했는데 청산위원이라 했다. 덕근의 처는 왼쪽눈이 경하게 사팔뜨기였는데 해반주그레하게 생겨서 눈을 할기죽거릴때면 애교스럽게 보였다. 그는 어느새 일룡이와 배가 맞았는데 부녀반장을 했다. 치보위원은 흥칠의 손밑동생이 되여 그는 구구식보총을 한자루 가지고 있었는데 매일 그것을 매고 성수나서 우쭐우쭐 마을을 돌기도 하고 때로는 이웃마을에도 갔다왔다.

    빈고농단에서는 청산대상에 우리집은 잡아놓은 소고기고 그외에 장재석이네 등 세집을 상중농이라 하면서 털어먹기로 했다. 그런데, 마을에서 유일하게 조선 청진고중을 졸업한 (광복 되는해) 재석이가 정책규정조목에 따라서 토지면적, 집재산, 착취행위 등 모든것을 따지고 들며 계산하는바람에 그만 꿍꿍이가 실패를 하였다. 기실 그들은 하중농정도도 되나마나 하였든 것이다.

    청산투쟁시작첫날 빈고농단에서는 우리집마당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세딸과 나 그리고 할머니까지 다 내 세우고 투쟁을 시작하였다. 높은마루에는 탄자를 깔아 주석대로 하고 치보위원인 흥칠의 동생은 장총을 메고 대회장주변을 위엄스레 어슬렁 어슬렁 순라를 했다. 주석대 복판에는 일룡이가 목갑총을 차고 않았다. 량켠에는 덕근이와 흥칠이 문섭이가 앉았는데 덕근의 처는 낯을 반짝 쳐들고 남편곁에 앉았다.

    일룡이는 잔뜩 위엄을 부리며 나의아버지를 문초하기 시작했다.

    “너, 문명준! 부농이 맞지?”
    “나에게 땅이 많으니 부농이 옳겠지…”
    “빈고농의 피땀을 빨아먹은놈! 어떻게 착취를 했는지 몽땅 탄백을 해라! 이 때려쥑일 놈으새끼!”
일룡이는 제애비벌도 더 되는 나의아버지에게 거침없이 반말질을 하여대며 불호령을 하였다.
    “내가 누기를 착취했소?”
    “소작주구 장리쌀에 변놓이꺼정… 머슴도 두구… 그래, 이게 착취가 아닌가! 이 개쌍놈으새끼가!”
    “이것보슈. 남들이 제일 후하다해서 반작을(지주와 작인이 절반씩 나눔) 줄때 나는 2.8로(지주 2, 작인8) 주었소. 장리쌀은 한말을 주고 두말을 받을때 나는 두되를 받기두 하구 받지않기두 했소. 변놓이는 제일 눅은 변을 주긴했지만 한번도 변을 받아본적은 없소. 문섭이, 흥칠이어마님네  말씀해보시우. 저분네 몇집은 너무두 구 차해서 어예 소작료를 받지도 않았소…”
    “엉? 네놈으새끼! 악질완고통이구나! 되우족쳐라!”

    일룡의 일성대갈에 흥칠이와 그의 치보위원동생이 살기등등해서 몽둥이를 들고 나섯다. 그들은 말그대로 사정없이 나의아버지를 후려치기 시작했다.(그들은 사전에 일룡의 지시를 받았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험악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경악하는데 재석이 만덕이 점동이 등 여러사람이 나서서 그들을 제지하였다. 재석이는 유일한 고중학교졸업생이고 만덕이와 점동이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제지공장에서 일하다가 광복이 되며 공장이 서게되자 집으로 돌아왔는데 샘물깨에서는 이들만큼 학식이나 견문이 넓은 사람이 없었다.

    “순보아버지 말이 사실이요. 따질건 따지더라도 사람을 때리는건 틀리오. 리대장이 이래도 되오?”
감때사나운 만덕이가 일룡이에게 다가서며 시비를 걸고들었다.
    “니들 혁명맛을 모르는구나! 문명준! 니놈이 얼마나 뻗치는가 두구 보자!”
케가 우습게되자 일룡이는 산회를 선포하고는 빈고농단간부들을 데리고 덕근이네 집으로 갔다.

    이날후로부터 우리집은 초상난집과 같았다. 빈고농단간부들이(기실은 허씨와 신씨네 줄래들) 시도 때도없이 뛰여들어서는 재산을 조사등록한다면서 집을 샅샅히 뒤번지며 돌아쳤다. 그리고 닭이며 개를 잡아 술상을 차리라 호통치고 밥을 해 올리라고 하였다. 그러기를 며칠지나 그들은 아예 우리를 마을뒤켠에 있는 반나마 허물어진 페가에 내쫓았다. 깨여진 쟁개비며 이가 떨어진 사발, 부러진 숟가락, 누더기보다도 더 구역질 나는 넝마같은 이불, 이런것을 주며 우리를 빈몸으로 쫓았는데 옷까지도 벗겨내고 저네들의 집에서 가져온 누더기를 주었다. 그날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들 그리고 할머니까지 결사적으로 악을 쓰며 죽기로 대항해 나섯는데 결국은 죽을지경으로 물매를 맞고 쫓겨났다. 나는 기를 쓰고 울어대여 줄욕을 먹으며 호된매를 맞기도 했다.

    우리집청산은 허씨네와 신씨네가 물건이며 옷, 이부자리, 세간기물, 쌀… 등등을 슬금슬금 가져가다보니 얼마 않되여 거덜이 났다. 30여호 빈고농들은 쌀 한되, 숟가락 한개도 가지지 못했다. 정작 청산과실분배는 간단했다. 큰소 두마리는 덕근이와 흥칠이가 끌어가고 송아지는 문섭이가 가졌다. 밭도 좋은자리는 허씨네와 신씨네가 차지했다. 집은 우리를 쫓아낸날부터 공회당으로 쓴다며 관리는 덕근네가 한다던것이 그대로 덕근이가 가지고 말았다. 마을사람들은 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뻔히 보고 아는지라 뒤에서는 여론이 많았다. 사람들은 샘물깨에 토비무리가 생겨났다고 하였다. 두목은 일룡이고 대장은 덕근이와 흥칠이라 했다.

    일룡이가 주도한 소위 청산과실분배와 토지개혁이 끝난 이튿날이다. 일룡이는 샘물깨에 있을때는 계속 덕근이네 집에서 숙식을 했는데, 전날 밤늦게까지 술놀이를 한 일룡이는 해가 중천에 뜰때까지 그냥  자고있었다. 점심때가 거이되여 나의어머 니는 덕근이네 집으로(우리집) 시걱거리를 가지려 갔다. 집에서 쫓겨난날부터 우리는 끼니마다 빈고농단에서 내여주는 나뱃겨(마지막으로 나오는 보드라운 겨), 흙모래가 섞인 싸래기를 타다 먹었다.(우리집에서 돼지와 닭모이로 둔것.) 때꺼리쌀은 때로는 일룡이, 때로는 덕근이, 어떤때는 덕근의 처가 창고문을 열고 내여줬는데 제것을 공짜로 주는것보다 더 거들쩍 거리며 각박하기 짝이 없었다. 큰누나는 일룡이에게 강간당하고(감춘 금품을 말하라며 심문하는척하다가) 아래누나들은 일룡이와 덕근이에게 강간당할번한 후부터는 쌀타려 가지않았다. 주로는 할머니가 다녔는데, 할머니가 앓아눕자 어머니가 다녔다. 어머니가 가자 마침 덕근이가 창고안에서 무얼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기운베보자기를 가지고 창고에 들어서니 덕근이는 잽싸게 곳간문을 닫고 어머니를 끌어 안았다. 그리고 헐떡거리며 입쌀을 주겠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와락 뿌리치고 집으로 달려와서 한바탕 저주를 퍼 부었다. 꼬부리가 누워있던 아버지는 벌컥 일어나드니 도끼를 쥐고 씽! 달려나갔다. 아버지가 뜨락에 뛰여들자 마침 마루에 앉아있던 일룡이와 덕근이, 흥칠이가 대뜸 응전을 했다. 아버지는 누구를 찍지도 못하고 몽둥이란타에 쓰러지고 말았다. 일룡이는 공포까지 한방 쏘았다.

    총소리에 놀란 마을사람들이 급급히 몰려와 보니 아니, 이런?! 나의아버지는 피못에 쓰러져 인사불성이고 그 장면은 처참하고도 끔찍스럽기 짝이없었다. 사람들이 몰려들자 일룡이는 “이놈새끼! 반동놈새끼!”하고 련속 게목을 지르며 허장성세를 하였다. 그러면서 또 련속 두방이나 공포를 쏘았다. 일룡이가 거침없이 또 총을 쏘자 날파람있고 감때사나운 만덕이가 대뜸 일룡의 귀통을 갈기였다. 그리고 호통치며 쏘아부쳤다. “왜놈이 왔소?! 토비가 왔소?! 당신 왜 쩍하면 총질이요? 당신, 이마을에 와서 마음대로 행패질하며 자꾸 이러는거 아니요!”

    재석이와 점동이는 나의아버지를 번갈아 업으며 집으로 달리고 만덕이는 도끼를 주어들고 뒤따랐다. 아버지의 몰골을 본 할머니는 식칼을 들고 덕근이네게로 갔다. 그리고 당장에서 맞아죽었다. 일룡이는 또 공포를 두방 쏘았다.

    마을사람들은 한결같이 격분하여 치를 떨었다. 이런 무법천지가 있는가?! 그래, 이마을이 저 몇놈의 건달망나니들 세상인가… 재석이와 만덕이, 점동이는 따라나서는 마을사람들을 말리고 40여리밖에 있는 구정부로 토지개혁공작대 김대장을 찿아갔다. 그들은 저녘켠이 다 되여 김대장을 만났는데, 샘물깨의 그간의 정황을 낱낱히 전부 고발하였다. 소위 청산과실분배며 토지개혁, 그리고 일룡이와 덕근이, 흥칠이가 피워댄 건달짓거리까지 고발하였다.(나의큰누나와 재석은 혼약까지 한 사인데 일룡이에게 강간당한 누나는 그것을 재석이에게 말하고 혼약을 취소했다.)

    깜짝놀란 김대장은 대원 두사람을 데리고 밤도와 샘물깨로 달려왔다. 사실이였다! 마을사람들의 반영은 재석이네가 고발한것보다 더욱 엄중했다. 이틀후, 김대장은 일룡이와 덕근이, 흥칠이는 현으로 압송하고 샘물깨빈고농단을 정돈하였다. 주석에는 배점동 부주석 겸 치보위원은 김만덕이가 선거되였다. 장재석은 문서에 회계까지 겸하게 되였다.

   샘물깨의 문명준청산은 김대장의 직접적지도하에 다시 진행되였다. 밭분배를 다시하고 큰소 두마리는 식솔이 많아서 밭면적이 많은 두 빈농에게 분배했는데, 거기에 다섯집씩 붙혀서 소결이까지 무었다. 기와집은 식구가 제일 많은 전춘식이네 와 집을 바꿔 가지도록 하였다. 그런데, 전춘식로인네가 싫다고 떼를 써서 나의아 버지가 사정을 하기까지 했다. 밭도 우리집인구수에따라(죽은 할머니도 포함.) 량전을 분배받았다. 덕근이네가 준것은 페경지로 있은 자갈밭이 였다. 이부자리, 옷견지와 세간기물도 적당히 돌려받았다.

    현에 잡혀간 리일룡이는 마희산토비의 밀탐이라는 것이 탄로나서 총살당했다. 덕근이와 흥칠이는 1년 옥살이를 하고 돌아온후 얼마안되여 죽었다. 덕근이는 창피해서인지 두문불출하다가 페병으로 죽고 흥칠이는 조선밀수를 하다가 조선서 맞아죽었다.
 
    청산투쟁을 맞은후 아버지와 어머니는 반페인이 되고 말았다. 물매를 호되게 맞은것이 어혈로 되고 특히는 머리와 허리뼈를 크게 다쳤는지 두통증과 허리병으로 운신조차 하기 바빠했다. 하지만 두분은 삼노끈으로 머리를 동이고 기다싶히 하면서도 농사일을 하였다. 그간 큰누나와 둘째누나는 흑룡강 밀산어덴지 홀애비한 테로 시집을 갔다. 두 누나는 까치둥지만한 보따리를 하나씩 들고 함께 떠나갔다. 누나들이 떠나갈때 나는 무척 울었다… 막내누나와 내가 일군이기는 하지만 우리집은 마을에서 제일 가난한 집으로 살았다. 3년재해 첫해가을 아버지는 마당에 심은 감자를 캐다가 “아구 가슴아!”하고 두번 위치고 숨을 거두었다. 석달후, 어머니도 부엌에서 불을 때다가 아버지처럼 “가슴아!”하고 돌아가셨다.

    집에는 막내누나와 나뿐인데 누나는 나를 장가보내기전에는 시집을 가지 않는다고 하며 로처녀로 늙어갔다. 그래도 가끔 누나에게 혼처중매가 들어오기도 했는데 들어보면 너무도 기가막혔다. 팔부가 아니면 벙어리, 마흔살, 쉰살이 되는 후처자리 였다. 누나는 원근에 소문난 인물체격이 너무도 아름답고 똑똑하고 알뜰하고 일잘하고 허물할데가 없는 색시감이 였다. 아니, 부농의 딸이라는 너무도 큰 허물이 있었다. 누나는 모든 중매를 단마디에 거절했다. 나에게는 혼처문안도 없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여 몇년후 우리마을에 장춘에서 지식청년들이 20여명이 왔다. 몽땅 조선말은 한마디도 모르는 한족청년들인데 호장이라는 쑹가는 나이가 스무살이 넘었다고 했는데 험상궂게 생긴데다 롱구선수처럼 우둑진 체격이였다. 그애는 낡은 수레바퀴를 두개나 얻어다 놓고 하루에도 몇번씩 거중운동을 하였는데 확실히 힘이 장사였다. 쑹가는 남자와 녀자애 몇을 졸개처럼 달고 다른집체호로 놀러다니기도 하며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 생산대 령도와 사원들은 그들을 건드리기 싫어했다. 반달남짓 지나서 집체호청년들은 저들을 “붉은기반란단”이라 하며 마을의 계급투쟁 뚜껑을 열어제낀다고 소리치며 날뛰기 시작했다.

    나와 막내누나는 그들에게 불리워 가서 이것저것 닥달을 당하며 자주 심문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날 밤, 이번에는 누나만 불러 갔는데, 누나는 밤중이 되여서야 집으로 왔다. 나는 그때까지 자지않고 누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째선지 누나의 기색이 다른때와는 달라 보였다. 내가 그새끼들이 어쩌던가? 무슨일이 없었는가? 이리 저리 물으니 누나는 그저 그렇다. 하면서 자기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어쩐지 기분이 찜찜하기만 했다.

    며칠후다. 그날은 두만강변에 있는 콩밭의 기음을 매게 되였다. 그날 집체호청년 들도 여럿이 나왔는데 희한하게도 호장 쑹가도 일하려 나왔었다. 쑹가는 나의누나 곁에 이랑을 잡고 기음을 매여 나갔다. 얼마쯤 김을 매며 보니 쑹가가 누나보다 한발쯤 앞서 나가고 있었다. 내가 다시 엎드리는 순간! 기절할 사건이 터졌다! 그것은 나의누나가 호미뒤등으로 쑹가의 뒤통수를 힘껏 깟던것이다. 누나는 련속 두번을 더 내리깟다. 쑹가는 찍소리도 못하고 즉사를 했다. 누나는 호미를 던지고 달려나가 두만강에 뛰여들었다.

    파출소에서 누나의 방을 검사할때 수첩에 쓴 다음과 같은 글이 발견되였다.

    “네놈이 나를 더럽혀?! 너는 내손에서 끝장이 난다!!” 화불단행이던가?! 누나가 죽은후 한달남짓 지나서 흑룡강 밀산에서 외지조사를 나온 사람들이 큰누나와 둘째누나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일본특무, 조선특무로 심문을 받다가 맞아죽었다는 것이였다… 두 누나 모두가 후손은 없다고 하였다.
 
    나는 서른살이 넘어서야 어리숙한 리혼녀에게 장가를 갔다. 안해는 사지는 멀쩡해도 일도  살림살이도 바로 하지못했다. 그러나 사람의 본능은 어쩔수 없어서 우리에게는 아들형제와 딸 하나가 있었는데, 아이들을 소학교까지는 공부를 시켰다. 하지만 실력이 형편없고 내가 뒷받침 할 힘이 없다보니 모두 집에서 농사일을 하게 되였다. 안해는 부증으로 시름시름 앓음자랑을 하다가 샘물깨에서 개혁개방이 실행된해 초가을에 나를 떠나 갔다.(샘물깨에서는 1983년부터 개체를 하였다.)

    개체가 실시된후 우리4부자는 극성스레 일하였다. 하여 첫해에 “온보”를 해결하여 더는 배고픈 고생을 하지않게 되였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나는 청산투쟁으로 집에서 쫓긴날부터 개혁이 된 이해초가을까지 40년가까히 계속 배고픈고생을 하였다. 아이들과 함께 둘러앉아 이밥을 가득 담은 소래를 가운데 놓고 먹을때마다 이 이밥 한술 먹지못하고 죽은 안해, 그리고 부모형제들, 개벽같은 지금세상! 앞날에 대한 서글픔… 여러가지 생각이 두서없이 갈마들어 목이 메군하였다…

    우리집 살림은 남과같이 펴이지 못했다. 세상은 잘살수 있는 세상으로 되였지만, 잘살고픈 마음은 있지만 나는 마음처럼 할수없었다. 신체가 어찌도 하약한지 영 기맥을 출수없고 여기저기가 아프지 않을때가 없었다. 자식들의 형편을 본다면, 솔직히 말해서 아이들이 똑똑치 못하니 제노릇하기가 글렀다.

    큰아들은 그래도 저와 비슷한 짝을 얻어서 장가를 갔으나 작은것은 향방이 없다. 딸은 제그릇이 그렇다보니 만난 짝도 그저그렇다. 나는 손녀애를 보긴했으나 고것도 답답한 애물이다. 왜냐하면 우리 이고장에는 학교란게 없다. 원래는 소학교가 있었는데 개혁후 사람들이 련이어, 대량으로 마을을 떠나가면서 소학과 초중이 한개로 되여가지고 향소재지에 있다. 샘물깨에서 40여리나 먼곳이다. 손녀애를 어떻게 공부시키겠는지… 그것도 나는 대책이 없다.

    세월이 좋아져서 사람들은 “두번째 해방”을 맞았다고 좋아하지만, 모두 풍족한 생활로 웃음꽃이 활짝피고 있지만 나는 폴싹 늙어버리고 지쳤다. 사람들은 나를 재석이네들보다 더 나이를 먹은 사람으로 본다.
 
    “세월이 참 빠르단 말이야! 명준어른이 순보를 안아온것이 아주 어끄제 같은디… 그때는 모두가 순보를 떡판에 떨어졌다구 했디…”
    “그때, 저사람이 너, 몇살이니 물으면 새발같은 손가락을 일곱개도 보이고 여덟개도 보였지. 보기에는 대여섯살 같았구만.”
    “자네부모는 항일한 사람 같아. 조선 종성에서 왜놈경찰의 추격을 받다가 달아났다니께…”
    “지금두 살아 있을가? 어디에 계신지… 아마 이젠 모두 사망했을게야…”

    나는 광복나기 두해전, 문순보로 문명준의 아들로 호적에 올랐다. 지나간 평생을 돌이켜 보면 쓸쓸한 마음을 금할길 없고 무량한 감개를 한입으로 다 말할수 없다. 얼마 되지는 않겠지만 앞날을 생각하면 답답하고 쓸쓸하다. 고진감래라는 말이 있긴하지만 나와는 연이 없다…
                                                                                                          19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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