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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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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갑잔치
2018년 01월 18일 15시 05분  조회:600  추천:0  작성자: 회령
         수필
                                                               회갑잔치
                                                                                                                회령
우리부부는 계미생 동갑으로 작년에 회갑잔치를 하였다 회갑을 쇤후 친구들을 위주로 적지않은 사람들이 수연에 대한 감상이 어떠냐고, 진지하게 혹은 우스개로 물어왔는데 모두가 나의 진솔한 느낌을 알고싶어 하는 눈치들이 였다.

나는 처음 몇번은 생각나는대로 아무렇게나 응부를 했는데 후에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럴일이 아니였다. 천박한 소견에도 민족의 전통에 관계되는 화제라고 생각되여 후에는 느낌을 실사구시대로 솔직히 말하였다.

중국에서 연변은 중국조선족의 본가마을쯤은 된다. 이곳에서 사는 우리는 여러면에서  민족전통을 지켜나가고 있으며 다양하게 발전시키고 있다. 회갑잔치도 그중의 하나다.  

지금 연변에서는 70이 지나서 회갑을 쇠는것이 마치도 민속의 법인듯 착각을 해서 류행이 되고 있다. 그리고 회갑잔치를 하는 취지도 여러가지가 있다. 어떤이들은 허영심에 들떠서 대단하게 거행하고 어떤이들은 쓸데없는 허례라면서 아예 무시해 버린다. 적지않은 갑둥이들은 회갑을 일찌기 쇠면(예순살 제때에 쇠면) 일찌기 죽는다느니, 빨리 늙는다느니, 남들이 웃는다느니 하며 잔뜩 미룬다. 물론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제때에 못쇠는 사람들도 있다. 극히 적은 일부 사람들은 돈벌이를 목적으로 회갑을 쇠기도 한다. 다수의 사람들은 민속의 법지법대로 건강장수를 축하하고 여생의 행복을 축원하여 제때에 회갑을 쇤다.

내가 알기로는 세계의 2천여개 민족에서 회갑을 쇠는 민족은 우리조선족 뿐이다. 우리민족에게는 고금에 부귀빈천을 불문하고 돌생일, 결혼, 회갑, 상례를 반드시 거행하는 법이 있다. 그런데 돌생일과 상례는 본인의 감상이란게 있을수 없지만 결혼과 회갑은 그렇지 않다. 둘 중에서도 회갑잔치에 대한 감상이 제일 감개가 무량할것 같다. 나의 체험은 그렇다. 결혼은 문화대혁명때 낮에는 출근하고 저녘후 한시간을 동방홍과 어록노래합창을 하고 헤여지다보니 지금도 무슨꿈을 꾼것같기도 하고 얼떨떨 하다.

회갑년이 되자 자식들은 법대로 회갑잔치를 하자고 토론을 해 왔다. 인생에서 피할수 없는 행사이니 법대로 하자고 우리부부는 쾌히 동의하였다. 우리민속의 법에 따르면 부모가 회갑을 쇠지못했으면 자식들은 절대로 회갑을 못쇤다. 죽은사람에게도 회갑제를 차린다. 회갑은 반드시 갑년에 갑분의 생일날에 해야한다. 그런데 사정이 있을때는 생일후로 미루어 할수도 있지만 생일전에 앞당기지는 못한다. 마침 안해의 생일이 나보다 좀 앞이여서 나의 생일날에 할수있었다. 그런데 력서를 보니 그날이 목요일 모두 출근하는 날이여서 우리는 토요일로 미루어 결정했다. 자녀들의 사업과 하객들의 편의를 고려해서였다. 우리부부는 회갑을 쇠느라고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는것이 싫었다. 우리자녀들은 회갑잔치는 갑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사정에 따라 생일후 적당한 날자에 행사를 해도 된다는 조상님들의 너그러운 규정은 모르다보니 처음에는 머리를 좀 기우뚱거리다가 인차 우리말에 따랐다.

여기서 나의 느낌 한가지를 말한다면 회갑은 회갑년에 쇠야한다는 것이다. 70, 80에 쇠는것은 회갑이 아니다. 제때에 회갑을 쇠는데 대하여 나는 이것은 우리민족의 법이니까 그대로 해야한다는 생각에서 따랐을 뿐인데 안해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말하기를 법도 법이지만 자식들이 하자고 할때 제꺽 쇠는것이 옳다는 것이였다. 그래야 자식들의 마음부담을 덜어 준다고 하였다. 나는 자식들을 끔찍히 생각하는 안해의 모성애에 감탄을 했다. 부모님 회갑잔치를 제때에 하지못한 자녀들은 그것이 빚진마음으로 부담이 될것이다.

날자가 확정된후 나는 자녀들에게 서너가지 부탁을 강조하였다. 절대로 번지르르 하게 하지말며 초청은 당날교통권내로 하며 하객접대를 꼭 잘할것을 당부하였다.

우리는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하였다. 아들내외는 북경에서 사업하고 작은딸내외는 서안에서 사업하다보니 구체적준비사항들은 곁에 있는 큰딸부부가 도맡게 되였다.

잔치연회장소는 연길에 있는 백산호텔례식장으로 결정을 했는데 그것은 하객들의 왕림에 편리하다는 데서 그렇게 했다. 우리는 도문시에서 사는데 연길시로 하면 도문과 훈춘의 하객들이 불편하게 되였다. 하여 우리는 그들을 뻐스로 모시기로 했다. 회갑연주례와 촬영, 사진, 음악 등 일들은 연변인민방송국대외봉사부서에 맡기였는데 나는 그럴것까지는 없다고 반대를 했지만 자식들이 듣지않았다. 나는 그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리며 쑥스럽다. 하객대접연회상은 한상에 800원, 최고급표준이라고 하였다. 이점에 대해서는 잘했다고 동의를 했다.(당시는 보통 300원 표준.)

그런데, 복장문제에서 나는 안해와 자녀들과 쟁론이 생겼다. 그것은 안해의 이복은 한복으로 곱게 맞추는 것을 좋다고 하면서도 나는 입던 양복을 그대로 입어도 된다고 우겨댔기 때문이다. 나는 이복에 대해서 워낙 등한한 사람이다 그리고 습관된것을 좋아한다. 아이때부터 새이복은 어덴가 불편하고 쑥스러웠다. 우리집에서 보통 내가 우겨대는 일은 그대로 되였는데 이번에는 내가 지고 말았다. 그것은 끝내 연길백화에서 양복을 새로 한벌 사고야 만 것이다 백화아가씨는 너무 좋아서 눈이 가늘어 지고 입귀가 올라갔다. 원래는 내것도 한복으로 맞춘다는 것을 내가 견결히 반대를 했다. 우리이곳에서는 한복을 입는것이 생활화 되지 않았다. 녀성들은 일년에 몇번씩 입는데 참으로 곱다. 그러나 남자들은 입지않는다. 일년에 한두번, 혹은 몇년에 한두번 입는데 그것도 잠간 한두시간 입는다. 그러니 회갑날 하루때문에 랑비할수는 없다는 나의 일가견이였다. 그리고 회갑날에 복장은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조상님들의 규정은 없다는 것이 나의 고집이였다. 원칙을 지키면 되는거지 지엽적 세절에서까지 옴니암니할 필요가 없을뿐만아니라 어떤일이나  매사는 상황에 맟추어 해야하고 될수록이면 검박하게, 진심으로 처사를 하는것이 제일 좋고 제일 잘하는 것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준비는 다 되고 회갑날은(12월13일 토요일) 박두해 오는데 그때따라 날씨가 련일 유난히도 을씨년스러웠다. 잔치날에 일기가 나쁘면 사람들은 주인공을 원망하며 의론이 많다. 주인공으로서는 애매한 일이지만 어쩔수 없는 노릇이다. 그보다도 잔뜩 청해놓고 얼마나 민망하고 미안한 일인가. 잔치전날도 날씨는 여전히 아니, 더욱 더 사나워만 갔다. 보아하니 래일날씨도 이에서 별로 신통할것 같지 못했다. 우리는 크게 근심을 했다. 나는 밤잠까지 설치며 밖의 동정을 살폈는데 광풍은 점점 더 기승을 부리는것 같았다. 오늘까지 외지에 있는 자식들이 다 오고 원근에서 가까운 친척과 사돈님네도 다 오셧으니… 잔치는 이젠 벌려 논 잔친데 날씨가 이러니… 허나 무슨수가 있겠는가?! 여간랑패가 아니였다.

이튿날 아침, 이게 웬 일이냐?! 일기예고가 빛나가도 아주 빛나간것이다. 언제 그랬더냐싶게 날씨는 완전히 화창한 봄날 같았다! 사람들은 효자효부로 소문난 사람들이 회갑을 쇤다고 하니 하늘이 알아준다고 덕담들을 하였다. 나는 입이 떡 벌어지고 기분이 너무 좋았다.

9시, 훈춘에서 하객들을 모신 뻐스가 도착하고 도문에서도 다 모이니 우리는 이포단장을 하고 승용차가 줄지어 선 곳으로 나갔다. 그런데 쭉 훑어 볼라니 제일 앞에는 경찰차가 서고 다음에 선 화려한 꽃단장을 한 승용차가 우리가 타고 갈 것이였다. 나는 맏사위에게 앞에 있는 경찰차는 웬영문인가고 물었다. 사위는 대답하기를 공안국친구들이 가지고 왔는데 길잡이를 선다는 것이였다. 꽃차도 우리고장에서는 제일고급이라는 귀빈용 호화차 였고 그 곷단장이라니 희한하기가 난생 처음보는 것이였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도 있는가?!

나는 큰딸과 맏사위에게 경찰차와 꽃차를 철거하라고 명령하였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회갑이 어쩌구 저쩌구 하더니 로망이 든거아니냐 하지 않겠는가. 딸과 사위는 경찰차는 친구들의 소행인데 꼭 설복해서 뒤에 서게 하겠지만 꽃차는 그대로 쓰자고 사정하였다. 친척들과 친구들도 그게 좋겠다고 풍을 달았다. 거기에 박자를 맟추어 안해는 “우리도 한번 꽃차에 앉아봅시다.” 하는데는 어쩔수 없었다. 이런것을 독불장군이요 중구난방이라고 할것이다.

우리는 기분좋게 연길로 달리였다. 지나간 세월이 차창밖으로 흐르는 산천처럼 다가오고 지나가며 바뀌군 했다. 제일 가슴을 설레게 하는것은 부모님들에 대한 회상이였다. 한뉘 고생속에서 허덕이며 나를 키우신 부모님, 출세를 해서 신봉쟁이가 되였지만 나는 효도를 몇번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마흔아홉에 돌아가시다 보니 내가 회갑제를 드렸다. 그날 너무도 슬퍼 흐느끼며 눈물을 줄줄 흘리는 나에게 어진안해는 저도 따라 눈물만 씻었지… 오늘의 우리모습을 아버지 어머니가 보고있는것만 같았다… 학업에 힘쓰며 생기발랄하게 향상하던 청춘시절, 사업에서 성적과 선진을 다투던 보람찬 나날들, 고마운 안해, 자식들을 성가시키기까지 바쁜줄 모르고 어느덧 지나간 세월… 걸어온 인생이 얼핏얼핏 지나갔다.

백산호텔 4층 례식장에 들어서니 넓고 환한 대청에는 하객들이  가득하고 웃고 떠드는 소리와 음악이 말그대로 명절분위기 였다.

우리는 만장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장모님을 모시고 상을 올린후 큰절을 하였다. 장내에서는 와르르 박수가 터졌다. “어마니! 고맙습니다.” 나는 이 한마디밖에 하지못했다. 가시집은 우리집보다 더 빈농인데 마을에서 제일 가난한 집이였다. 두집 부모님들중에서 지금은 80여세의 장모님만 계신다.

주례는 방송국의 인기아나운서 서태문씨가 맡았는데 우리는 그의 안내대로 꽃대문을 거쳐 칠색주단을 밟으며 큰상이 놓인 단으로 향하는데 앞에서는 나의 손녀와 외손자가 신나서 곷보라를 뿌리고 량옆에서는 젊은친구들이 꽃실과 꽃포를 연신 터뜨렸다. 음악과 어울려 박수갈채가 요란했다. 아들과 며느리는 우리옆에 서고 딸부부들은 되에 따르며 단상까지 갔다.

착석이 된후 이제부터 잔치는 식순에 따라 진행되는데 우리는 시키는 서방질을 하면 되였다.

첯순은 아들의 친구가 축사를 하는데, 퍼그나 공력을 들인것 같았다. 그것은 당안을 들추고 채방을 했는지 우리의 지나온 력사가 쭈욱ㅡ 밝혀져 있는게 아닌가?! 부풀린건 없었지만 성적을 일일이 라렬하고 덕행을 지적하고 공로와 품덕을 높히 찬양한후 나중에는 조직과 군중의 호평을 말하고 여생의 행복과 건강장수를 축원한다고 하였다. 축사에서 찬양소리는 누구못지않게 뜨르르 요란했지만 축사를 들으며 나의 심정은 점차 착잡해 지었다. 오늘 만좌중 앞에서 우리가 걸어온 60평생을 동글가놓고보니 스산하지는 않았다. 그만하면 적지않은 일을 했다는 것이 새삼스레 느껴지며 마음에 위안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잇따라 느껴지는것은 내가 더 해야할 일을 많이 못했구나! 하는 자책과 아쉬움이 였다…

다음순은 헌수절목인데 덕담과 노래와 춤이 어울려 흥성흥성 했다. 여기서 특히 잊을수 없는 장면이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손녀애와 외손녀, 외손자가 헌수를 하며 합창으로 목청껏 건강장수를 축원하던 장면이다. 고 어린것들의 맑은 목소리를 들을때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고 참으로 기뻣다. 이래서 후손후손 하는건가?! 다음장면은 정말 전혀 생각지 못한것이다. 그것은 수십패의 헌수가 다 끝나고 주례가 “루락되신분들이 없으십니까?”하고 좌중에 묻자 꽃대문 밖에 운집해 서있던 수십명 사람들이 일제히 나오는 것이였다. 눈여겨 보니 혹 아는 얼굴도 보이는것 같고 창졸지간에 어리둥절 하기만 했다. 그들은 우리앞에 줄느런히 두줄로 섯는데 30여명은 되였다. 한사람 한사람씩 자기를 소개하며 인사를 하는데, 아하! 그들은 나의 환자들이였든것이다. 안해앞으로 온 이들도 여럿이였다.(안해는 호사임.) 나는 참으로 반갑고 또 너무도 고마웠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나는 허허 웃으며 옷소매로 눈물을 딲았다. 우리부부가 의료사업을 할때 세번 전근을 했는데, 오늘 오신이들은 그 세곳에서 대부분이 오시고 몇분은 외지에서 왔는데 한분은 흑룡강 할빈에서 왔다고 했다. 전혀 면목이 없었다. 그가 말해서야 우리는 알았는데 그는 청년시절 안해의 피를 수혈받고 자기가 살게 되였다는 것이였다.

내가 친히 초청한 사람들 가운데서 딱 한사람이 오지않았다. 그는 15분교통권인 룡정시에 있다. 지금 병원어느과의 주임인데 우리는 함께 12년을 사업했다. 내가 령도로 있을때 그는 “매부 매부”하면서 은근하던 사람이다. 그에게는 약점이 있었는데 대인관계에서 지나치게 리해득실을 따지며 계산적이여서 사람들은 그를 “요사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를 늘 너그럽게 대해주었다. 그는 아무런 설명 한마디도 없이 오지않았다. 우리가 정년퇴직을 하였으니 이젠 볼일도 쓸모도 없다는 건가. 그야말로 사람이 떠나자 차물도 식은 셈이였다

헌수절목이 끝나자 주례는 나에게 한말씀 하라며 마이크를 넘겨 주었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새해 여러분의 가내제절이 건강다복하기를 축원한다고 한마디 한후 끝내려. 했는데, 단상에서 내려다 보니 숱한 젊은이들이 쳐다보지 않겠는가?! 나는 그들에게 특별히 두어마디를 더 하고 싶었다.

“오늘 많은 젊은친구들이 다망함에도 불고하고 이렇게 우리의 건강장수를 축원해 주니 참으로 기쁘고 고맙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바이지만, 지금은 세상이 많이 달라지고 많이 좋아지었지요. 지금은 천시, 지리, 인화가 모두 갖추어졌습니다. 여러분들은 혈기왕성하고 정력이 포만한, 아침 8ㅡ9시경의 태양이지요. 현실도 여러분의 것이고 미래도 여러분의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하세요. 여러분의 빛나는 성과를 기원합니다.” 장내에서는 열렬한 박수가 터져나왔다.

답사를 하는 이 중요대목에서 나는 흥분으로 그만 큰 실수를 하였다. 그것은 마이크를 안해에게 넘겨줘야할것을 깜빡한 것이다. 오늘 그와 나는 똑 같은 주인공이 아닌가?! 나는 두고두고 안해에게 사과하고 오늘도 미안하다. 그런데 안해는 내가 말하고 자기는 가만히 서 있는것이 더 멋지다고 하였다. 자기까지 나서서 뭐라고 하면 품위가 떨어진다는 것이였다. 가정에서나 단위에서나 그는 시종 부창부수, 현모량처형 녀인이였다.

회갑잔치는 오후 두시에 끝났다. 우리는 하객들에게 일일이 차비를 드리고 전송한후 귀로에 올랐다. 안해는 음식을 보내야 할 집들에 제대로 보냈는가를 꼽아본후 원만히 되였다며 기뻐했다.

저녘후 큰사위는 하객들이 무사히 돌아가셨는가를 확인했는데 한건의 사고도 없었다. 우리는 거뿐한 심정으로 잔치총결을 하였다. 래일 아들네와 막내딸네는 돌아가야 하기에 간단하게라도 지금 총결해야 하였다.

나는 자녀들의 처사를 긍정해 준후 기쁨과 고마움을 표시하고 다음과 같은 당부를 하였다. “오늘 내가 잔치연회에서 젊은이들께 한 말은 니들께도 하는 말이니 명심하기 바란다.”

하객들의 본첨(축의금)은 10만이 훨씬 넘었다. 나는 너무도 억이 막혔다. 원, 이런변이라구야?! 민망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게 물론 다 오고 가는 돈이지만 이건 너무도 지나치다고 생각되였다. 나는 자녀들에게 자기앞으로 들어온 본첨은 자기가 챙기며 금후 잊지말고 답례를 하라고 당부하였다. 그런데 자녀들의 주장은 그게 아니였다. 답례는 등한히 하지않겠지만 이 축의금은 아버지 어머니가 유람하는데 쓰라는 것이였다. 싱갱이 끝에 우리는 그러기로 했다.

자식들은 흥이 도도해서 지칠줄 몰라했고 귀여운 손군들은 깔깔거리며 뛰놀았다. 온갖시름을 다 놓아선지 피곤이 몰려왔다. 나는 침실에서 손군들의 웃음소리를 어렴풋이 들으며 꿈나라로 들어갔다.

회갑을 쇤후 제일 큰 느낌은 지나간 세월에 대한 아쉬움과 이제부터는 인생을 보람있게 살겠다는 결심이였다.
                                                                                                                            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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