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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해에 대한 느낌
2018년 03월 30일 19시 46분  조회:1009  추천:2  작성자: 회령
      수필
                                              안해에 대한 느낌
                                                                                                                        회령

아들 며느리가 올해설은 저들집에서 쇠자면서 비행기표까지 보내오다보니 우리는 상해로 가게되였다.

나는 비행기에 앉아 씽ㅡ 몇시간 가면 된다고 대수롭잖게 생각했는데 안해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주비사업이 많았든것이다.

우선, 두서너달 입을 옷견지를 선택하느라 이랬다 저랬다하고 지어는 신이며 양말까지 안해는 꼼꼼히 검토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아들네게 줄 물건을 준비하는데, 나는 그만 입을 딱! 벌이고 말았다. 더덕, 도라지, 낙지, 마른명태, 고사리, 내기와 젠추가루, 고추가루, 고추장, 된장, 토간장(아들이 북어를 토간장에 찍어 먹는다며), 썩장까지… 여기까지는 나도 대체로 짐작을 했는데 그다음의 물건들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한 희귀한 것들이였다. 통닭(수탉) 두마리, 내몽골양고기 십여근, 찹쌀가루와 명란, 모두부(어느핸가 설에 아들 며느리는 연변두부가 이렇게 맛있는가! 하며 감탄을 했다고 한다.)를 꼭 갖고 간다는게 아닌가?! 나는 우습기도 하고 억이 막혔다.

내가 “상해에 없는것도 있는가?” 하며 면박을 주면서 빈정대니 안해는 듣는체도 안하고 자기주대대로 주비사업을 추진했다. 나는 트렁크 두개면 넉근할줄 알았는데 당초에 어림도 없었다. 트렁크 두개에 상자두개를 더 만들고도 안해는 계속 더 장만하느라고 고심을 했다. 상자를 또 한개 더 만들었는데 거기에는 자기가 담근 김치를 종류별로 차곡차곡 넣었다. 나는 이젠 다 됐으려니 하였는데 웬걸?! 깸과 잣을 50여근이나 구입해 왔다. 참는데도 정도가 있지, 내가 이렇게 많이 뱅기가 받지않는다고 역증을 내니 안해는 그것을 택배로 부쳐버렸다.

이젠 40대 50대가 된 아들 며느리, 딸과 사위들을 안해는 힘껏 완벽하게 보살펴 주고 도와주려고  항상 열성이다. 그뿐이 아니다. 청년이 다 된 손군들을 애기다루듯 하여 곁에서 보는 내가 오히려 민망하다.

나는 큰일에서나 작은일에서나 모든일에서 원칙과 도리를 지나치게 엄격히 강조하는 사람이지만(그래서 잔소리가 많다고 한다.) 안해는 “사랑”밖에 모른다. 내가 볼바에는 응당 해야할 일르는 말도(욕) 그는 하지않는다. 혹 말할때가 있긴하지만 냐의 느낌에는 가렵지도 아프지도 않게 어루만진다. 그래서 나는 안해와 여러번 쟁론을 하였다. 그렇게 쓰다듬기만 하는게 능사가 아니라구. 엄한 선생앞에 훌륭한 제자가 나고 드센장군이 있어야 용맹한 병사가 있다며 설교를 하려들면 안해는 시큰둥한 태도를, 지어는 공개적으로 “애비라는게 인정머리가 없다!”고 하며 거들떠도 보지않는다.

우리부부는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다. 생각해 보니 나는 엄격을 주의로 하고 안해는 사랑을 주의로 하고… 음양배합이 스스로 되고 문무의 도가 지켜진것 같다. 근년에 와서 나는 차츰 안해를 “량모”가 된다고 느낀다.

자식자랑은 반편이고 안해자랑은 팔부라고 하지만 나는 객관적인 립장에 서서 공정하게 안해에 대한 느낌을 더 말해보고저 한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안해는 처녀때부터 나에게 고분고분 온순했다. 환갑전까지는 그야말로 “부창부수”였다. 하다보니 우리부부는 “쌈”이란걸 못해봤다. 그런데 환갑후부터는 형세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안해가 주체사상이 형성되였는지 자기주의를 내 들고 고집하기 시작한것이다. 제일 큰 표현으로는 나를 “통제”하려 드는 것이였다. 먹는것으로부터 옷, 모자, 신, 나의 일거일동을 자기의 통제권내에 두고 사사건건 지령을 내리였다. 나는 일상생활세절에서 되는대로 자유롭게 행동하는 사람이다보니 안해의 통제가 달가울리 없었다. 하여 굴레를 쓰지않으려고 대갈을 내젓는 쇠새끼처럼 엇서고 반항을 하였다. 압박이 있는곳에는 반항이 있고 반항이 있는곳에는 압박이 있다. 내가 반항할수록 안해의 “통제력도”는 드팀없이, 더욱 견정불의하게, 드세여지었다. 나는 안해에게 차츰 지치기 시작했고 실천을 통하여 안해의 지령이 나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검증하였다. 나는 차츰 안해의 통제에 길들여지고 저도 모르게 안해의 지령을 기다리게까지 되였다.

이렇게 몇년을 지내면서 나는 안해의 “통제”인즉 나에대한 관심이며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였고 안해는 나에게 “현처”라는것을 승인하게 되였다.

엎딘김에 절이라고 계속해서 안해자랑 3부로 들어가자.

나의 안해는 마을에서도 제일 가난한 농사군네 집에서 맏이로 태여났다. 집에는 풍을 맞아 전혀 운신을 못하는 할머니가 계셧고(17년을 누워있다가 사망.) 안해아래로 남동생다섯 끝으로 녀동생이 하나 있었다.

안해는 천성이 그랬는지 부모님 교육이 좋았는지, 아이때부터 정직하고 마음이 고왔다고 했다. 크면서는 생김새도 복상스러웠지만 그 마음씀씀이가 너무도 신통해서 “큰집맏며느리 감”이라고 별명이 나고 원근에 소문이 났다고 한다.

아이때 처녀때 일은 내가 잘 모르지만 사회생활 첯시작부터, 말하자면 혁명공작에 참가해서부터는 안해의 모든일들을 손금보듯 잘안다. 그것은 우리가 한단위에서 함께 사업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업과 생활속에서 서로를 잘알게 되였고 자연스레 련애, 약혼, 결혼순으로 나가게 되였다.

안해는 아이때부터 대학에 가기전까지 줄곧 할머니의 저녘은 책임지고 밥을 대접했고 부모님들을 도와 할머니 병수발을 많이 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또 대학가고 외지에서 사업하고 이어 결혼하다보니 부모님들을 너무도 도와 드리지 못했다고 두고두고 한탄하였다. 그뿐이 아니다. 동생들을 잘 돌보지 못했다고 그는 여러번 후회하였다.(우리의 신봉이 너무도 적었다.)

시집에서도 안해의 부담은 적지않았다. 시어머니가 일찍 사망하다보니 삼남매 세아이를 안해 혼자힘으로 다 키웠다. 나는 공작대다 외지장기출장이다 하향이다 학습반이다 회의다 하면서 혁명사업에 온갖 정열을 다 바치다보니 말그대로 집은 려관이였다.

안해는 사업을 잘하고 시아버지와 훗시어머니를 진심으로 잘 모시여 3.8절이면 해마다 표양을 받았다. 훗어머니는 우리와 함께 14년을 살고 사망하셧다. 그간 안해는 치매끼가 있는 시어머니를 따뜻히 보살폈고 양말이며 속옷(팬티)까지도 자기가 일요일이면 손빨래를 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우리와 함께 9년을 더 앉고 돌아가셧다. 아버지는 며느리가 너무도 곱고 마음에 들어 생전에 하신다는 말씀인즉 “내가 죽으면 자네는 울지 말아라. 자네를 고생시키지 말고 껍뿌적 죽어야 하는데…”하시였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실때마다 안해는 웃으면서 “아버님 절대로 아무런 근심도 마세요. 제가 다 제대로 할겁니다…”고 하였다. 안해는 시아버지가 자립을 못하면 쓰겠다고 기저귀감과 위생지를 두마대나 장만해 두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그 귀저기를 아버지는 한장도 쓰지 못했다. 그것은 아버지가 아침식사까지 잘 하셧는데,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셧기 때문이다.(향년84세)

지금은 우리두집에서 윗어른으로는 장모님 한분만 계신다. 장모님은 연길에 있는 연변광영원에서 만년을 보내고 있다. 연길에 세아들과 두손자가 있다보니 그들이 장모님보려 자주 다닌다. 우리는 도문에서 한달에 한번씩 다닌다.

매번 어머님을 면회갈때마다 안해는 알뜰히 준비를 한다. 상용약이며 각가지 음식, 과일, 음료, 우유… 한보따리가 되는데 다행인것은 호실마다 랭장고가 있는것이다. 돼지발쪽, 닭다리, 개장국, 육개장, 증편, 죠즈같은걸 갖고갈때는 종이로 싸고 솜으로 더 싸고하여 가마에서 방금 꺼낸것처럼 따끈따끈하다. 안해는 무엇이나 푼푼히 갖고간다. 음식은 서너때를 잡숫게 하고 반찬이며 음료, 우유, 약 같은건 한달분을 갖고 간다.

안해는 닭다리며 발쪽은 자기가 직접 고기를 뜯어서는 어머니입에 넣어드린다. 지난달 우리는 돼지발족을 푹 삶아서 갖고갔는데, 안해가 어지럽다며 누워있는 어머니에게 그걸 대접하는 모습이 어찌도 보기좋은지… 내가 핸폰으로 사진을 여러장 찍었다. 나는 사진을 우리자식들에게 보내면서 이 아름다운 장면을 함께 향수하자고 하였다. 그런데 큰딸이 “76세의 딸이 97세의 어머니께 음식을 대접”이라고 문자를 달아 세상에 발표할줄이야?! 대뜸 찬양의 문자와 음악을 배경으로 한 목소리가 막 떴다.

안해라고 잘한일만 있고 완전무결할수는 없을것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것은 입당할때 두사람이 지적한 부족점 뿐이다. 그들은 지적하기를 “투쟁성이 약해서 금후에는 이면에서 노력했으면 더욱 좋겠다.”고 하였다. 안해는 그들의 지적을 접수했는지 부인했는지 아니면 망각했는지... 내가 보기에는 시종 산천이 여구했다.

근년에 와서 나는 안해를 효녀, 효부라 할만하다고 속으로 인정한다.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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