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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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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 문제
2019년 05월 14일 13시 05분  조회:248  추천:0  작성자: 회령
      실화
                                          이주민문제
                                                                                                        회령

광복이 된 이듬해 봄 우리집은 조선 회령으로부터 어머니의 고향인 중국 연변땅 샘물깨로 두만강을 건너 왔다. 샘물깨 뒤마을 하강은 아버지의 고향이다. 두 마을은 시내물을 사이로 2리가량 떨어져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10년 거이 조선에서 헤매며다니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잔치후 그들은 이불보따리 하나를 메고 조선으로 건너갔다. 샘물깨나 하강에서 소작살이를 살기보다는 대처에 가면 살기가 나으리라 생각하고 두만강을 건너 갔는데 정작 세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이 처음으로 발을 디딘 곳은 조선 회령시가지 였다. 거기에는 셋째형님네가 살고 있엇다. 아버지는 형님이 꾸리는 야장간에서 일하다가 그것이 신통치 않아 얼마후부터는 온돌쟁이 건축공사장 하천제방공사 제지공장원목운반… 등 각종 품팔이 로동을 하였다. 아버지는 눈썰미가 있고 손재간이 좋아서 무슨일이나 한번 보면 깐지게 따라하였다. 어머니도 삯빨래 정미소일 자갈치기 물고기장사… 마른일 젖은일 가리지 않고 일했다. 하지만 그날벌어 그날을 겨우 살아가는 최하층 빈민생활을 면할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련이어 아이를 둘이나 잃고 빚은 잔뜩 커졌다. 어머니는 몹시 허약해 졌다. 그러나 절인 물고기를 이고 농촌마을로 돌며 쌀이며 콩 지어는 감자 강냉이를 바꾸어 나갈때도 올때도 무거운 광주리를 이고 다니는 일은 너무도 고되였다. 어머니 정수리머리는 그래서 많이 빠졌다. 하는일이 어느것 하나 쉬운일이 없었으나 살려니 악을 쓰지 않을수 없었다. 내위로 태여난 두 딸애는 돐전에 잃고 세번째로 태여난 나도 힘들게 자랐다. 처음에는 잿불에 오른쪽 발을 뭉텅 데여 몇달을 어머니 등에 업혀 지냈다. 그후 어느날 어머니가 왜놈순사집에 빨래를 가서 나를 눕혀 놓고 일하는데 내가 깨여 우니까 순사네 아이가 부저가락으로 나의 목을 마구 지져 놓은것이다. 순사녀편네는 일하려 다니면서 아이는 왜서 업고 다니냐고 자기사 바로 왜장독장을 치며 1원을 주며 어머니를 쫓았다. 그후 서너달 어머니는 밤이고 낮이고 나를 업어 달래며 겨우 목이 아물게 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너는 명이 길어 살았다고 여러번 말했지만 그게 어디 명이길어 산것인가?! 어머니 잔등과 눈물과 땀물이 나를 살린것이다…

세상은 점점 더 살기 힘드는 세상으로 굴러가고(왜놈들이 최후발악을 하던때다.) 아버지는 청진에 가서 고기배를 타면 벌이가 좋다해서 고기배를 탔는데 그야말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후 그일을 그만두었다. 그때 어머니는 선주네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며 아주 종취급을 당했다. 아버지는 이번에는 무산철광이 벌이가 괜찮다고 해서 무산철광으로 갔다. 거기서 광석을 캐기도 하고 구루마(광차)를 밀기도 했는데 그곳이 곧 전쟁판으로 된다고 해서 다시 회령으로 돌아 왔다. 회령에 온후 이일 저일 품팔이를 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광복이 조선사람에게 광명과 기쁨을 가져다 준것은 두말할것도 없는 사실이지만 갑자기 터진 사변은 사회가 혼란하게 했고 생활이 무척 어렵게 했다. 두어달이 지나며 회령시가지도 인민위원회가 사회를 관리하게 되였다. 그러나 경제생활은 전보다 더 험악했다.

아버지는 요행 회령역에서 일자리를 찿았는데 그것은 기차기관고에서 잡일을 하는것이였다. 일을 하면 배급쌀을 그날그날 받아 때를 넘기군하며 어려운 살림을 하는데 이듬해 봄 어머니 큰동생이 우리를 데리려 왔다. 샘물깨는 이제는 소작살이도 할만하게 정책이 좋아지고 명년에는 토지개혁을 한다는데 샘물깨로 가자는 것이였다.

샘물깨는 두만강변에 앉은 비교적 큰 마을이였다. 마을사람들은 모두 농사를 짛고 살았는데 부농은 한집이고 중농이 댓집이 되였다. 남어지는 소작농 반소작농들이 였다. 마을은 대체로 화목하였다. 마을에서 제일 가난한 집은 대여섯호가 되였는데 그들로는 허씨네가 너덧집이 되고 그들의 친척들인 신가와 김가네 두집이였다. 허씨네는 사람들이 게으르고 도둑질을 하거나 싸움질을 자주 해서 마을 인심이 좋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녕악스러 웠다.

광복이 된 해는 갈팡질팡 어리둥절 지나가고 46년도부터는 중국공산당세력이(민 주대동맹) 연변을 장악하였다. 샘물깨에는 공유지 등 왜놈과 그 주구들의 땅과 재산이 없기에 청산이요 분배요 할것이 없었다. 우리는 우선 외가집의 헌 사랑채에 있으면서 외가집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남들이 버린 황무지뙈기를 더 다루었다. 하반년이 되면서 마을에는 토개공작대(토지개혁공작대)간부가 뻔질나게 드나들기 시작했다. 샘물깨를 맡았다는 간부는 서른살쯤 되여보이는 최씨였다. 마을사람들은 그를 최대장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때로는 목갑총을 메고 오기도 했다. 그는 어떻게 료해를 했는지 처음부터 허씨네와 손을 잡았다. 얼마후에는 빈고농협회를 내오고 허덕근을 주임으로 그의 삼촌 허문순, 사촌매부 신흥칠을 부주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덕근의 처 사팔뜨기 배씨를 부녀반 반장이라 했는데 최씨는 그와 간통을 하였다. 배씨는 동글납작한것이 꽤 자색이 있었는데 특히 그 사팔뜨기눈을 할기죽거릴때는 아양을 떠는것 같았고 유혹적이 였다.

마을의 “생살권”을 틀어쥔 허씨네는 기탄없이 횡포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협회간부들이 마을을 위하여 수고를 한다며 이집 저집을 다니며 추렴새를 걷우기도 했는데 이런 심부름은 김씨네 아들들을 시켜먹었다. 김씨네는 아들이 4형제였는데 풍을 맞은 홀애비가 맨봉당에서 짚거적을 깔고 사시장철 누워 있었다. 아이들인 그들 4형제는 추렴심부름을 시키면 성수나서 뛰여 다녔다. 한밥 잘 얻어먹는것이 성수났고 찌꺼기를 가져다 아버지에게 대접하는것이 더없이 자랑스러 웠다. 마을사람들은 그애들이 드달겨 와서 쌀을 내라거나 콩이거나 닭을 내라거나 두부나 떡을 하라면 군소리를 한마디 못하고 대령하였다. 그애들의 뒤에는 우락부락하는 협회간부들이 있었고 더욱히는 목갑총을 멘 최대장이 뻗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해 추석이였다. 밤에 마을사람들은 우리외가집 마당에서 오락을 하였다. 추석달이 둥글 떠서 오락이 흥겹게 무르익어 가는데 최대장이 난데없이 목갑총을 련속 두방이나 냅다 갈기엿다. 막걸리 사발이나 들이 켠 그는 흥이 솟구쳤든 것이다. 바로 문앞에서 천지가 터지는듯한 총소리가 울리자 기진맥진해 구들에 누워 있던 우리어머니는 기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류산으로 피못에 쓰러졌다. 그날밤 우리어머 니는 사경을 헤매다가 그래도 겨우 복색해 났다. 이일은 인차 여러가지 소문으로 원근에 퍼져나갔다. 하지만 우리집과 외가집, 그리고 친척들은 여기에 대하여 일체 말을 삼갔다.

그해 가을후 마을빈고농협회에서는 연변전원공서의 지시에 따라 이주민모집사업을 진행하였다. 동시에 토지개혁준비도 은근히 하였다. 빈고농협회간부 대여섯은 공작대 최씨와 짜고들어 마을에서 살림꼴이나 잡고 사는 집들을 이짬에 몽땅 털어 먹을 작정이였다. 훗날 얘기지만, 이듬해 봄 청산과실과 토지를 분배할때 허덕근네들은 최씨를 끼고 마음대로 행패를 하였다. 좋은물건, 좋은밭은 다 자기들이 차지하고 정책이고 뭐고 욕심나고 눈에 드는것이 있으면 청산이라며 빼앗아 가졌다. 말그대로 허씨네 천하였다. 이런 무법천지가 있을수 있는가?! 만약 광복이 금방 났을때쯤이라면 또 모르겠으나 지금이 어느땐가?! 공부를 한 중농집 자식들과 세상물정에 눈이 뜨기 시작한 마을사람들의 반발로 최씨와 허덕근네 빈고농협회는 그간의 모든비행이 몽땅 철저히 적발 폭로 되였다. 현과 구의 공작대에서는 이 사건을 고도로 중시하고 철저한 조사를 진행하여 엄정한 처리를 하였다.

이주민모집사업을 하게된것은, 당시 연변의 조선족마을들의 실정을 보면 토지는 적고 분배받아야 할 인구는 많아서 사람을 줄여야겠다고 연변전원공서에서는 판단한 것이다. 그때 마침 돈화현과 액목현에 일본개척민들이 버리고 간 밭이 많다고 전원공 서에서는 불확실한 정보를 믿었든 것이다.

이주민모집은 46년 겨울에 본격적으로 진행되였다. 모집을 나온 간부는 마치도 자기가 거기서 사는듯 혀가 돌아가는 대로 황통을 불어댔다. 그의 임무는 이주민을 한집이라도 더 끌어 모으는 것이고 거기에 따라 그의 성적이 결정 되였던 것이다. 시꺼먼 부식토에 발이 푹푹 빠지는 황무지가 무진장하고 감자는 사발통 같고 무우는 베개 같은데 강냉이는 방치같고 조이삭은 황둥개꼬리 같다는둥 노루와 꿩이 저절로 가마에 뛰여들고 냇물에는 가재며 조개며 물고기가 우글우글 하다고 하였다. 일본새끼들이 그게 여간만 요사하고 녕악스러운 놈들인가?! 좋은것은 제놈들이 다 빼앗아 차지하고 우쭐렁 대다가 망하니까 하루밤새에 다 팽개치고 똥줄이 빠지게 도망을 쳤지. ㅎㅎㅎ. 이제 우리가 누가 먼저 가면 누가 먼저 마음껏 문전옥답을 가지게 되는거다… 공작대가 련며칠 회의를 불러놓고 옛말을 하듯 구수하게 불어넣었으나 이주민에 가겠다고 자원하는 집은 하나도 없었다.

이주민모집은 자원원칙하에서 본지에 온지가 3년이 되지않는 집들을 주로 동원하라고 하였다. 자원이 없자 이주민공작대는 울상이 되였다. 그는 최씨와 허덕근의 빈고농협회에 술잔을 사며 매달렸다. 그들은 샘물깨로 온지 3년이 되지않은 우리집과 류인산네를(똥돌이네) 대상으로 잡고 공략하기로 계획을 잡았다. 똥돌이네는 길림어데서 살다가 광복이 되니 강원도 철원산골에 있는 고향으로 간다고 떠난것이 샘물깨로 두만강 옆에까지 와서 주저앉은 것이다. 그들 네식솔은 걸어서 길을 떠났는데 품팔이를 하며 오다보니 46년봄에야 샘물깨에 도달했든 것이다. 똥돌이와 개똥네는 아직 어리고 안해는 앓으며 기여오다싶히 했는데 이젠 더 걸을 맥이 없었든 것이다. 류인산은 앞날을 기약하며 강건너 조선산을 바라보며 한탄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샘물깨에서는 우리아버지와 류인산을 초과할만한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그들은 우선 세상을 돌아다닌 경력이 남다르고 풍부했다. 그만큼 아는것이 많았다. 최씨와 허덕근네 일파는 나의 아버지를 불러다 닥달을 하는데, 조선서 무슨일을 하고 살았는지? 왜놈들과 어떤 사이였는지? 아주 무슨 정치문제나 있는듯히 걸고 들었다. 류인산도 국민당구역에서 왔는데, 광복전이나 광복후나 의문점이 많다는 것이였다. 한편 부녀반의 배씨는 마을의 녀자들을 다 끌어 모으고 나의 어머니와 똥돌의 어머니를 투쟁하기 시작했다. 추석후부터 나의 어머니는 아주 자리에 눕고 말았는데 배씨는 기어코 나의 어머니를 끌어다 투쟁을 하였다. 죄장은 공작대를 공격했다는 것이였다. 련며칠 터무니 없는 악다구니에 나의 어머니는 쓰러지고 말았다. 사태가 이렇게 되였는데도 배씨는 사람들을 우리집에 끌고와서 어머니를 단지고음을 하였는데 이번에는 이주민으로 가겠는가고 대답을 강박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꼴을 보니 허덕근네 등쌀에 괄시와 행패를 당하기 보다 아예 이주민으로 가는것이 마음 편하다고 생각하였다. 우리집이 이주민으로 가겠다고 하니 모든것이 조용해 지었다. 똥돌이 어머니는 남편과 같이 “의문점”으로 끝없는 닥달을 받았다. 끝내 류인산도 이주민을 가겠다고 대답하였다.

47년도 2월 우리와 똥돌이네는 이주민으로 떠났다. 우리는 소수레 두대를 빌어가지고(한대는 외가집것) 큰외삼촌과 이웃집 사람을 데리고 룡정으로 떠났다. 룡정에서 기차를 타고 돈화로 떠나면 수레는 그들이 가져와야 했다. 100여리 먼길을 당날로 가기위하여 우리는 아침 일찍히 길을 떠났다. 그날은 시퍼런 날씨가 삭풍이 몰아치며 진눈개비까지 휘뿌리며 몹시도 을씨년 스러웠다. 그래도 마을사람들은 동구밖 멀리까지 우리를 바래주었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거이 10여리를 따라왔다. 우리나 똥돌이네나 무슨 이사짐이란게 별로 없었다. 누더기 이불보퉁이 외에 말그대로 바가지짝이나 있고 수레에는 어머니와 아이들이 앉아도 자리가 헐렁했다. 허덕근네들은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말라고 거듭 강조했다. 거기로 가면 정부에서 집이며 량식이며 뭐나 다 마련해 준다는 것이였다. 그저 길에서 먹을것과 차비나 가지면 된다며 우리의 이사짐을 은근히 살피였다.

우리가 십여리 잘 갔을때 길옆 바위밑에서 장정 대여섯이 뛰쳐나왔다. 허덕근을 비롯해서 허문순, 신흥칠 그리고 김씨네 아이들이 였다. 그들은 우리의 짐을 규정에 어긋나는것이 없는지, 검사를 해야겠다고 하였다. 그들은 쌀자루며 보따리를 들추고 수레에 깐 북데기밑까지 들추었다. 두집길량식이 이만하면 넉근하다고 하면서 쌀자루와 콩자루 등 량식을 빼앗고 사발과 숟가락도 몇개를 빼앗는것이였다. 지어는 마을사람들이 준 떡덩이며 삶은 닭알까지도 갈라냈다. 신흥칠이는 닭알을 통채로 누런입안에 넣고는 히물거리기 까지 하였다. 저들의 눈에 드는건 다 빼앗은 그들은 우리를 가라고 하였다.

이주민으로 가서 우리가 겪은 피눈물의 곡절을 여기서 대충 말하자 해도 소설책 하나는 될 것이다. 귀납해서 간단히 소개한다면 당시 돈화나 액목현에서는 왜서인지 이주민들을 전부 무인지경 산골에 안배를 했다는 것이다 일본개척민들이 살던 고장에는 조선족 이주민을 한명도 넣지 않았다. 산골이라 해도 화전을 뚜질만한 땅뙈기가 있으면 그대로 눌러 앉겠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도저히 사람이 살수 있는 곳이 아니였다. 하여 이주민들은 저절로 살곳을 찿아 이리저리 떠나가 버렸다. 우리아버지는 이주민패를 데리고 돈화쪽으로 되 나오며 마을터를 잡았다…

훗날, 연변전원공서 부전원을 했든 문정일씨는 “우리가 조직한 이주민사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고 가슴 아프게 회고를 하였다. 우리가 잡은 마을은 명당이였는지 지금도 사람들이 잘 살고 있다. 우리집은 어머니가 자꾸 앓으며 샘물깨로 나가자고 하여 53년봄에 샘물깨로 이사를 왔다. 우리가 왔을 때는 초급사 시절인데 마을사람들은 모두 그대로 있었다. 다만, 허덕근이가 심화병에 결핵까지 덮쳐 죽고 배씨는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어렵게 살고 있었다. 그후60년대 초 까지 첯빈고농협회간부로 활동하던 사람들은 모두 죽고 후손들도 그후 다 망하고 말았다. 샘물깨 사람들은 그때 옛말을 두고두고 하면서 사람이란 량심을 바로 써야 한다고 후대들에게 말한다.
                                                                                                                95.7(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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