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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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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녀인의 일생
2019년 05월 24일 13시 51분  조회:341  추천:0  작성자: 회령
      중편실화소설
                                                 녀인의 일생
                                                                                                                  회령

내가 글을 쓸줄 안다면 소설을 한책 쓰고 싶어요.” 말은 90 바라보는 고분이 할머니가 눈물이 글썽해서 가끔하는 말이다.

고분이할머니는 극히 평범한 산골농촌 백성이였다. 그는 지난세기 20년대에 태여난후 한뉘 농촌에서 살면서 아들딸 8남매를 보았다. 그중에서 하나는 돌전에 잃고 7남매를 성인으로 키웠는데 아들은 다섯이고 맏이와 막내는 딸이다.

오늘 할아버지 할머니가 우리들은 거개가 모두 고분이할머니와 같은 어른들의 손에서 자랐다. 그리고 각자가 자기 분복대로 초로, 중로의 인생을 살고 있다. 우리 또래가 많아서 사회는 로령화시대라느니 뭐니하고 떠들어대고 있다. 하지만 고분이 할머니와 같은 최로의 로령어른님들은 이젠 몇분이 안된다.

고분이할머니는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지평범한 세계ㅡ백성들 속에는 경천동지의 거대한 이야기는 없어도 진솔하고 잔잔한 감동을 주는 이야기는 많다. 그것은 그들의 력사ㅡ생활자체가 매우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고분이할머니는 자신의 한생을, 말하자면 자서전같은 글을 쓰고 싶다고 하였다. 사람은 늙으면 쉽게 추억속에 잠기며 력사를 회고하기 좋아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거기에서 끝나는데 일종의 향수라고 하겠다. 그러나 고분이할머니의 경우에서는 다른점이 있었다. 말하자면 그이의 회억은 당신의 불행한 현실과 이어진 유감과 슬픔이였다.

      

  고분이는 오빠 , 언니 , 막내로 태여났다. 그의 집은 힘장수인 아버지와 무던하고 부지런한 어머니 그리고 6남매가 억척으로 일한덕에 토개(토지개혁)시에는 떳떳한 중농이 되였다. 사람들은 그의 아버지는 뚝곰이라 불렀고 어머니는 암쇠라고 하였다. 그들은 그대로 작수성례후 적수공권으로 살림을 시작하였다. 머슴총각과 부엌녀(머슴) 부모들이 짝을 맺어준후 그대로 머슴을 살았는데, 조선이 왜놈들에게 통채로 삼키우자 해외로 떠나는 사람들을 따라 중국땅 연변으로 들어왔다.

그들 부부가 충주에서 명천을 거쳐 연변에 들어서기까지는 꼬박 다섯달 거의 걸렸다. 그때 이미 아이가 둘이였는데 맏이인 아들은 아버지의 지게에 앉고 둘째인 딸애는 어머니가 업었다. 그대로 거지인 그들은 빌어먹고 빌어자며 날품을 팔아가며 이주민들의 뒤를 따라 끈질기게 걸었다. 한지에서 자고 굶은 날은 얼마인지 모른다. 다행은 로상에서 별일이 없은것이다. 그들은 길에서 죽는 사람을 한둘만 보지 않았다.

  드디여 두만강변의 작은 시가지인 봉화대에 도착했다. 엇비슴이 강건너 윗쪽에는 상탄이라는 중국마을이 있었는데 조선사람 서너호가 살고 있었다. 봉화대 대안은 시가지 하탄이였다. 상탄과 하탄의 중간에는 산세가 강파로운 산줄기 하나가 내리 질렀는데 끝에 불끈 솟은 마두암은 주둥이를 두만강에 처박아서 마치도 준마가 물을 먹는것 같았다. 산이 높지 않아서 마령이라 했는데 상탄과 하탄은 등허리에 가로 걸린 10여리 오술길로 통하였다.

고분이 부모들은 상탄에 자리를 잡았다. 때는 음삼월 청명이 멀지 않았다. 임자없는 땅이 무진장 많았다. 뚝곰과 암쇠는 걸싸게 일했다. 나무를 찍어다 삼간통 집을 짓고 빈땅을 욕심스레 개간을 하였다. 별명은 그때에 붙은것이다. 농량은 하탄에 가서 장리를 맡았는데 조선에 비하면 어방없이 눅었다.

  십여년 세월이 흘러 여섯째 고분이가 태여났다. 그해 뚝곰은 식구가 늘어나기에 6 기와집을 크게 지었다. 섯달 고분이는 기와집에서 태여났다. 하지만 어설픈 새집이여서 겉바람이 어찌도 심한지 산모와 갓난애가 얼어죽을 지경이였다. 구들은 불이 지경이였지만 하뇌바람처럼 세찬 겉바람은 귀뿌리를 씽씽 스쳤다. 아버지는 정지칸 구들에 조짚으로 고깔 초막을 틀고 산모와 갓난애를 그속에 있게 했다.

  세월은 흐르고 아이들은 갔다. 동네는 30여호의 마을로 되였다.

고분이 부모들은 아들딸 여섯을 하나도 잃지 않고 고스란히 키웠다. 아이 여섯을 공부는 하나도 시키지 못했으나 여덟식구가 자각적으로 부지런해서 배곯는 고생은 하지 않았다. 그때 세월에는 밥술을 자급한다는것이 대단한 일이였다. 마을에는 먹는것때문에 밤낮으로 근심하며 굶는 집이 20여호는 되였다. 고분이네는 그런 집들에 량식을 뀌여줄 여유까지 있었다. 마음이 무던한 고분이네 부모들은 누구든지 사정을 하면 힘껏 도와 주었다. 쌀이든 돈이든 뀌여 주고는 리자를 받는 법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도 고분이네 일이라면 말그대로 손발을 벗고 나섯다. 이사를 해서 3 병이 없으면 부자가 된다고 했는데 고분이네는 거이 30 누구하나 앓지 않았고 부지런해서그리고 마을 인심을 얻은 덕에 정말로 부자소리를 듣게 되였다.

      

  고분이는 광복나기 다섯해전 18살에 10여리 이웃에 있는 산골마을로 시집을 갔다. 신랑은 그보다 2살위인 리씨 총각이였는데 항렬에서는 맏이였다. 보통키에 호리호리하고 준수한 미총각이였다. 고분이는 이름 그대로 아담하고 알뜰한 처녀였다. 혼사말은 16살때부터 있었는데 세해나 끌게 된것은 리씨네가 너무도 가난하고 총각의 아버지가 원근에 소문난 괴상한 사람이였기때문이다.

  총각은 무척 총명하고 빠진데 없이 훌륭해서 욕심났지만 집은 죽물도 바로 못먹는 가난뱅이였다. 총각의 아버지는 붓글씨를 쓴다고 소문이 나고 학식이 있는 사람이였는데 일하기 싫어 하는 백수건달이였다.

그는 술잔이나 얻어 먹으면 공연히 남과 시비를 걸어서는 반나절씩 말싸움을 했는데 주로는 일본 사람, 잘사는 사람, 우쭐렁거리는 사람, 얄미운 사람, 관청 공무원들과 행패질이였다. 지어는 순사들과도 시비를 걸었는데 언쟁에서 지는때가 별로 없었다. .그는 남의 시비도 가로맡아 나서서는 약자의 편을 들었다. 하여 공술이 생길때가 퍼그나 있었다.
  하탄시가지에서는 리아무개라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대체로 가난한 사람들은 그를 좋아하고 뾰족한 사람들은 그를 싫어했다. 면목을 아는 조아무개는 왜놈들앞에서 갑장(촌장)이라는걸 했는데 리씨는 그를 보기만 하면 얘야!(네살위인 사람임.) 좆갑장! 이리오너라! 만났다. 오늘 어른께 한잔 올리렸다.”하고 길게 왜가리청을 질렀다. 조갑장은 물론 술을 먹이였다. 각가지 훈계를 들으며 대접하고 시중들어야 했다. 조갑장은 리씨를 슬슬 피하느라 했지만 웬일인지 번마다 잡히군 했다. 때로는 호명을 듣고도 못들은척하고 내빼기도 했지만 다음번에 잡히면 신물이 지경으로 몇갑절 닥달을 당해야 했다. 몇번 경험을 조갑장은 아예 리씨가 보이기만 하면 선손을 쳐서 너스레를 떨며 비위를 맞춰 주었다.

사람들은 리씨를 괴상한 사람, 특별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항일투사거나 혁명하는 사람도 아니였고 협객이나 주정뱅이 망나니도 아니였다. 젊은 시절 서당공부를 하며 청운의 포부가 컸던 그는 시국때문에 모든것이 수포로 돌아가자 자포자기를 했던것이다. 사회도 가정도 자신도 모두 귀찮았던것이다. 술잔이나 건네고 집으로 돌아 올때면 멀리에서부터 에헴! 에헴! 하고 곤두침을 뱉으며 자취를 알리였다. 집에 있는 식구들은 덴겁을 해서 영접을 해야한다. 조금만 소홀했거나 무엇이 눈에 거슬리는 날에는 그야말로 날벼락이 떨어진다. 일단 주정을 시작하면 마누라로부터 식구들(아들 , )에게 욕사발을 퍼붓고 다음은 동네 사람들을 욕하였다. 소를 잘못 매서 남의 곡식을 해쳤다는둥, 기음 꼬락서니가 어떻다는둥, 아이들의 건사도 바로해 주지 않아 메스겁다는둥, 어른을 보고도 인사할줄 모른다느니별의별 욕설을 부었다. 그런후에는 사돈들을 돌아가며 욕하였다. 그는 욕을 할때까지 정좌를 틀고 앉아서 호통을 했는데 빠르면 밤중이되여 페막사를 하였다. 취중에 하는 말이였지만 망발은 없었다. 식구들을 비롯해서 사람들은 그를 주정뱅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술만 마이면 잔사설이 길고 앉아서 깨기에 견디기 어렵다고 했을뿐이다. 어찌되였든, 그의 주풍도 고분이네 집에서는 중대한 고려사안이였든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돈이란 있다가도 없을수 있고 없다가도 있을수 있지만 사람은 한번 만나면 그뿐이니(그때는 리혼을 몰랐다) 당자의 사람 됨됨이가 가장 중요한것인데, 리씨총각은 참다운 청년이라는데서, 그리고 시애비가 괴상한 리령감은 주정은 한다지만 경우 시비는 올똘한 사람이라 간대루사 며느리와 주정을 하랴 하는데서 혼사는 이루어지게 되였다. 워낙 세상사란 좋게 생각하면 좋아 보이는 법이다.

고분이는 삼일(첫날, 친정에 다녀오는 행사) 갔다온 이튿날부터 정식으로 가마뚜껑 운전수로 되였다. 자기까지 아홉식솔의 후근을 맡은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지은 아침은 이밥 세그릇과 푸대죽이였다. 시어머니 신칙하에 첫날베개속에 넣어온 입쌀로 지은 이밥은 시아버지와 남편, 시동생에게(남편 바로 아래동생) 올릴것이고 시어머니와 시누이 그리고 자기가 먹을것은 멀건 푸대죽이였다. 반찬은 김치와 산나물 두어가지뿐이 였다.

  아침식사가 시작 되였다. 정주칸 웃목에서는 시아버지가 아들을 대면으로 겸상을 하고 아랫목에서는 나인들이 죽사발을 들고 둘러 않았다. 김치모랭이는 가운데 방바닥에 놓았다. 그런데 아침상을 받은 시아버지가 수절을 들지 않고 밥상을 점두룩 내려다 보고만 있는것이 아닌가! 집안 어른께서 첫술을 뜨지 않았기에 모두가 기다리며 눈치를 살피였다. 그것은 7 되는 막내딸까지도. 아마 무슨 말씀이 있을게다아니나 다르랴. 시아버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씀하였다. 밥을 푸대죽에 넣어 같이 먹자는것이였다….

  고분이는 총명하고 부지런하고 다정다감한 남편을 믿고 일편단심 한생을 살아왔다. 그리고 그들 부부는 살아보려고 그야말로 필사의 노력을 하였다. 하지만 식량고생, 돈고생, 병고생은 고분이와 무슨 악연이 있었는지 지지리도 모질었다.

리씨총각과의 결혼은 고분이에게 고생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그들 부부의 금슬은 백년해로 변함이 없었다. 그들은 온갖 곤란, 난관 그리고 질기고 모진 고생앞에서 언제 한번 얼굴 붉힌 일이 없었다.

      44 흘린 땀물 눈물
 
남편의 말에 의하면 시아버지가 서당공부를 할때에는 여유롭게 사는 집이였다고 한다. 시아버지는 어릴때부터 신동이라고 불리웠는데 학습에 노력함이 또한 좋아서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다고 한다. 그는 포부가 커서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리라 결심했고 높은 벼슬을 꿈꾸었다. 중앙급 관리가 되여 기울어지는 나라를 부강국으로 건설하며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누리게끔 한몸을 바쳐가리라 맹세 했는데, 조선 리왕조의 시국은 글러만 갔다. 대원군과 명성황후 --- 시애비와 며느리가 엎치락 뒤치락 집안 싸움을 해를 이어 계속 하더니 결국은 나라를 망국으로 몰아 갔다. 시아버지의 청운의 푸른꿈과 노력(학습) 여지없이 파멸되고 말았다. “한일합방전후 그의 부모님들은 선후로 돌아가고 일할줄 모르는 그의 손에서 가세는 대뜸 몰락했다. .그는 남부녀대 어린 처자를 끌고 해외 이주민 무리를 따랐다. 배운 글이 있기에 조선에서 따로 생계를 도모 할수도 있었으나 그는 망국에서 망국노로 살지 않는다는 조선선비의 지조가 퍼렇게 살아 있었던것이다. 중국 간도 --- 연변땅에 이르러 그는 여덟번이나 이사를 하며 가산을 몽땅 탕진하였다. 하여 지금은 알뜰한 소작농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나마 지금 정도로 사는것은 아들 형제와 시어머니, 시누이가 악을 쓰고 일한 덕분이였다.
 
시아버지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고 아무런 일감도 찾지 않았다. 집에 있을때는 케케묵은 책을 뒤적이고 겨울에는 전책을(소설책) 읽어서 동네 사람들이 한구들 모여 들었다. 그외의 시간은 허구한 하탄시가지에 가서 막걸리나 술잔을 얻어 자시고 돌아 다녔다. 어느 단위나 기관에서 간부나 직원으로 초빙을 하면 코방귀를 ! ! 뀌였다. “너들따위 밑에서? 상노무새끼들!” 하고 횐목을 썼다. 얼어 죽어도 겨불은 쪼이지 않는다는 기고만장한 절개였고 고집이였다. 그는 일본사람은 쪽발이, 딸깍발이, 왜놈, 미개족새끼들이라며 남녀로소를 아예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상대하지도 않았고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 못지 않게 일본글 일본말을 알아서 시비거리는 발벗고 찾아 다녔다. 그는 중국글 중국말도 잘했다. 시아버지 주정은 여전했다. 다만 며느리를 욕하지 않았을뿐, 그는 며느리를 딸들보다 귀여워했다.

  고분이가 시집온 이듬해 , 정정하고 쌩쌩하던 시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했다. 어느 마을의 좌상로인이 사망했다는 말을 듣고 문상을 갔다가 촉한에 걸렸던것이다. 친척도 아니고 별로 아는 사이도 아니였는데, 시어버지는 례문에 등한치 않았던것이다.

  시아버지가 사망하고 보니 21살의 남편이 호주의 멍에를 떠메게 되였다. 이미도 호주나 다름이 없었지만 지금은 명실공히 호주가 되였다. 시어머니는 그간 고분이를 데리고 해오던 안살림을 몽땅 고분이에게 밀어 맡겼다. 고분이는 끼니며 옷이며여덟식솔의 턱없이 부족한 답답한 살림을 맡았다.

그때의 시어머니들은 고방열쇠(살림경제권 령도권) 내여놓기 싫어했다. 며느리를 맞으면 장을 세독 먹여봐야 한다느니, 간장을 세독 먹여봐야 한다느니 하면서 고방열쇠를 틀어쥐고 시집살이를 시켰다. 말하자면 소위 가문의 법도를 가르치는것인데, 자기 구미에 맞게 길을 들이는 판이였다. 집안이 잘되기를 바라는 욕심은 며느리를 닥달하는것으로 표현되였다. 그들은 집안이 흥성하려면 녀자가 마음쓰기로부터 언행에 이르기까지 처사를 잘해야 하는법인데 그것은 들어온 남의 사람--- 며느리가 잘해야 한다고 인정했던것이다. 하여 수월하다는 시어머니들도 며느리와 퍼러딩딩하기가 일수였다. 령도자의 위풍과 본때를 보여주는것이였다. 여북하면 고추 당추 맵다한들 시어머니처럼사 매우랴!”하는 군소리까지 생겨 낫겠는가. 하지만 고분이 시어머니는 그렇지 않았다. 그에게는 고방열쇠도 없었거니와 부엌살림이 신물이 났다. 언녕 밀어놓고 싶었지만 령감의 눈치때문에 거조를 내지 못했는데 이젠 감놔라 배놔라 내마음 내키는 대로였던것이다. 막막하고 고된 부엌일을 메내부치니 거뿐하기 짝이 없었다. 맹물을 끓이든 풀뿌리를 삶든 내알바가 아니다. 령도권은 내손에 있으니 틀은 틀대로 낼수 있고이런 심사였다. 시어머니는 성깔이 사무럽고 까다롭고 괴벽하여 고집이 세고 꼬디(노염) 많았다. 순박한 고분이는 열아홉살 어린 나이에 여덟식솔의 힘든 안살림을 맡았다.

  시어머니를 비롯해서 다른 식구들은 바깥일을 나가고 집에는 고분이와 여덟살짜리 막내시누이만 남았다. 고분이는 당장 끼니를 장만해야할 준엄한 가마목현실에 부딪쳤다. 음식감이 있다해도 이렇게 큰집의 하루 세끼를 만든다는건 쉬운일이 아니다. 그런데 가마목일은 만든다는데만 그치는것이 아니였다. 우선 장만해야 한다. 감이 있어야 무엇을 만들게 아닌가. 그날 고분이는 눈물이 글썽해서 안절부절 못했다.

  삼동은 사발밑굽이 들여다 보이는 멀건 장물죽으로 에때워왔다. 이제부터는 일철이 시작되였기에 일군들이 장물만 마일수는 없는 노릇이였다. 무슨 건덕지가 있는것을 먹어야 하겠는데 감자 시래기, 호박 무우오가리와 산나물 말린것은 있으나 쌀과 된장이 걱정이였다. 푸대죽에 한홉씩 넣는대도 보리고개까지는 어방 없었다.

고분이는 친정에 손을 내여미는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친정집 구걸도 민망한 노릇이였다. 부모들은 기력이 쇠진했고 큰오빠내외가 대여섯 조카들까지 상봉하솔의 살림을 하는데 조카들은 학교를 다니였다. 친정은 친정으로서의 사정이 또한 있었던것이다. 친정은 무슨 자선기구도 아니였고 대단한 부자도 아니였다.  몇차례 구걸을 하니 올케의 눈빛과 말투가 곱지 않았다. 어머니와 올케는 고분이 앞에서 티각태각 다투기까지 하였다. 매번 된장 두어사발, 보리쌀 혹은 좁쌀을 반자루 남짓 이고 돌아올때면 고분이는 가난설음에 눈물을 텀벙텀벙 흘렸다.

고분이 부부는 자력갱생을 하려고 그야말로 비장한 분투룰 하였다. 빌어온 장은 사흘못가고 가난구제는 나라님도 못하는 법인데 허구한날을 친정에 의지하여 살수는 없는 것이다. 풀싹이 돋아서 락엽이 질때까지 고분이는 틈만 있으면 나물을 캤다. 그것은 광풍폭우가 휘몰아쳐도 멈출수 없었다. 남편은 밤에도 나가 땅을 뚜지고 호박이며 무우따위 푸성귀를 심었다. 곡식에 물알이 들기 시작하면 고분이는 강냉이 수수 콩을 뜯어다 망질을 해서는 푸대죽에 넣었다. 보리가 익기 시작하면 이삭을 뜯어다 말리웠다. 하지만 풋보리 방아는 사람을 기진맥진하게 했다. 보리방아는 찧어본 사람이라야 얼마나 힘든지를 안다. 잉태중인 고분이가 땀을 철철 흘리며 방아를 찧을 때면 남편이 때론 슬그머니 와서 도와주었다. 고분이는 땀과 함께 눈물을 이리씻고 저리씻고 하였다. 보리방아는 워낙 사람이고야 찧는것이건만 고분이는 막내시누이를 데리고 사실은 혼자 찧었다. 남편이 거들면 시어머니는 녀편네 궁둥이에 붙어 돈다고 줄욕을 부었다. 대답질을 하면 왜장독장을 치고 꼬디를 쓰기에 시무룩이 웃으며 물러 났다. 시어머니는 심사가 뒤틀리우면 막내시누이를 달고 뿌르르 오래비 집으로 달아났다. 한번 가면 반달 한달씩 괄시를 받으면서도 배겨 있었다. 아들과 며느리가 개여 올리며 빌면 돌아오군 했다. 시외삼촌은 누의를 천하에 둘도 없는 꼬디쟁이라고 하면서 밸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봤으면 좋겠다고까지 했다. 시어머니 성미는 그렇게 괴벽 했다.

고분이네는 궁여지책으로 소작 절반거이 선타작(청곡을 소작료만큼 이랑수로 떼여낸후 먹는것) 하였다. 물퉁이지만 우선 먹어야 했기에. 달리는 용빼는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호박잎이 피기 시작하면 고분이는 하루에도 몇번씩 남새포기를 살피였다. 호박이 언제 달리나 감자알은 얼마나 컸는지난들난들 호박잎이 고분이를 얼마나 울리고 애타게 했는지 모른다. 하탄에 가서 장리쌀을 꿔다먹은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광복전해 고분이는 두번째로 딸애를 보았다. 임신기에 입쓰림이 심해서 고분이는 맹물로 연명하며 죽다가 살아 났다. 무엇을 먹을만 하니까 백두산같은 보리고개가 앞에 놓였다. 고분이는 배추잎에 된장을 발라 먹으며 막달까지 견디였다. 그래도 법은 있어서 해산을 했는데, 시어머니는 딸이라며 산모를 팽개치고 밭으로 나가 버렸다. 남편이 시어머니에게 며느리를 시중하며 며칠만 끼니를 맡으라고 하자 시어머니는 왈칵 성을내며 막내시누이를 달고 오래비네 집으로 뿌르르 달아 났다. 고분이는 해산한 날부터 그냥 하혈을 하며 가마목일을 죽기로 악을 쓰며 하지않을수 없었다. 남편과 시누이들은 밭일이 한창 바쁜때여서 별로 도와주지 못했다. 갓난이는 젖이 없어 좁쌀미음을 먹였는데 설사를 그냥 하다가 두달후에 죽었다. 아이를 묻고 그날밤 남편은 고분이와 우리는 이후 자식들과 절대로 꼬디를 쓰지 말자.” 언약을 하였다. 언약을 고분이는 한평생 참답게 지켰다.

고분이는 그래도 모진세월을 견뎌냈다. 광복이 되였다. 그해 고분이네는 상탄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사이 시동생과 시누이는 결혼을 하고 광복 이티후에 셋째시누이는 조선의용군 3지대로 갔다. 고분이는 동생들의 결혼잔치를 그것도 셋이나 누구정신으로 어떻게 치뤘든지 생각나지 않았다. 시동생은 남편의 옷견지로 두루 갈무리를 했었고 시누이들은 자기옷을 뜯어 눈가림을 했다. 이불도 뜯어 솜을 갈라서 어떻게 했었고 남편은 리자로 겨우 돈푼을 맡아 왔는데 해준것은 없고 리자돈은 굴러 빚만 망덕만해 지었다. 후일담이지만, 동서는 큰집신세가 하나도 없었다고 두고두고 원한을 잊지 않았다. 셋째시누이가 군대로 간것도 가난한 집을 뛰쳐나간 일면도 있었다. 셋째시누이는 사평전투에서 렬사로 되여 종이장 한장을 집에 보내왔다. 시어머니는 아들 며느리가 제구실을 잘못해서 딸이 죽었다고 넋두리를 하며 대성통곡을 하였다. 후에도 쩍하면 푸념을 하며 엉엉 울었다. 고분이부부도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중 마음이 곱던 셋째시누이가 아니였던가!

광복이 이듬해 남편은 구장의 눈에 들어 구공서에 가서 공작하였다. 말하자면 출세를 한것이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구공서로 쫓아가서 이찌도 행악질을 하는지 몇달 못하고 끋내 집으로 잡혀 왔다. 늙은에미와 불쌍한 동생에게 고생을(농사를) 맏기고 저는 책상머리에 앉아 호강을한다는 것이였다. 그는 빗자루로 책상을 뚜드리고 아들을 쥐여 패기까지 하며 왜장독장을 쳤다. 구장은 이악스럽길 짝이없는 무식한 아낙네라며 혀를 둘렀다. 이듬해 구장은 남편을 연변전원공서에 추천하였다. 청년이 전도유망한 인재라면서 당의 간부로 배양할 가치가 있다고 인정했든 것이다. 남편은 도망치는 사람처럼 가만히 집을 떠나갔다. 몇달후 고분이는 아이를 데리고 남편을 따라가서 시가지 살림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들은 시어머니에게 잡혀서 집으로 끌려오고야 말았다. 성정부로 올라 간다고 했는데, 남편은 겨우 2년남짓 사업했을 뿐이다. 그후로부터 남편은 간부명색을 일은 일절 하지 않았다. 고분이할머니는 오늘도 그때일을 생각하면 한생에서 제일 유감이라고 하였다.

광복이 된후 소작료가 내려가고 토개를 한후 호조조까지, 가난한 사람들은 천지개벽의 번신을 하였다. 고분이는 가마에 밥을 지을수 있었다. 그런데 합작화운동이 불어치면서 밥가마 사정은 급전직하로 다시 긴장해 지었다. 그것은 농업사에서 수입분배를 로동공수에 따라 했기 때문이다. 상등로력이 하루 일을 하면 10 한공을 버는데 고분이네는 로력이 남편 하나뿐이 였다. 초급사가 시작되여 얼마후   막내시누이는 시집을 가고 시어머니는 풍을 맞고 자리에 누웠는데 목아래는 완전퇀환(마비)으로 손가락도 꼼짝 못하였다. 게다가 올망졸망 아이가 넷이나 되여 고분이는 근본상 일밭으로 나갈수 없었다.(맏이인 큰딸은 소학교에 다녔다.) 시어머니 곁에는 한시도 사람이 떨어질수 없었고 그리고 자신도 빈혈 간염 위염 신염 풍습 신경통 여러가지 지병을 얻어 자주 앓기 시작했다. 수자에 따라 구량은 탈수 있었으나 표준이 낮아서 턱없이 부족했다. 남편 하나의 공수로는 안로량(로력공수가 일년 정액을 초과하면 초과공수에 따라 량식을 탈수 있었다.) 고사하고 빚에 빚만 덮쌓였다.(주로는 량식대) 군입거리가 없는 아이들은 푸대죽을 먹고 그자리에서 허기들어 했고 사내애들이여서 먹기도 잘먹고 작란도 세찼다. 배가 차지않아 숟가락을 놓지않는 아이들을 보며 고분이는 가슴이 얼마나 쓰렸는지 모른다. 학교 다니는 큰딸애는 점심사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아이들을 벌거벗겨 키울수는 없는거고 학교 다니는 아이는 연필이며 백로지를 사야했다. 시어머니와 자신의 병치료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애들은 맨발로 뛰여 다녔다. 돈이 나올 구멍은 급한때에는 부득불 쌀되박을 파는수밖에 없었다. 10여리 밖에 하탄시가지가 있어서 장을 볼수 있는것이 그나마 다행이였다. 딸애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시어머니를 맏기고 고분이는 장보려 달려 갔다. 돈잎이 될만한것이면 무엇이든 이고 갔다. 산나물이며 푸성귀며 닭알이며 지어는 애들이 잡아온 고기새끼도 들고 갔다.

보는바와같이 사정은 이러해도 마을에서는 군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은 한마을에서 사는 사촌동서 사람이 더욱 그랬다. 그들은 고분이는 워낙 거친일을 하기 싫어한다는둥 집체일은 하지않고 장마당은 다닌다는둥 아프다는건 거짓말이라는둥말새질이 많았다. 사촌지간에 의가난것은 동중일에서 남편이 바른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작은사촌동생이 초급사 회계를 했는데 어느해 그는 자기들 형제의 로동공수를 십여공 높혀 놓았다. 사람들이 뒤에서 쉬쉬하며 의론이 있자 남편은 사촌동생과 함께 로력공수를 다시 맞췄는데 확실히 틀린것이 나타났다. 남편은 사촌동생을 따끔히 타일러 준후 사람들에게는 전표를 잘못봐서 생긴 오차라고 설명을 했다. 가랑잎으로 눈가리기 같은 어설픈 수작이였으나 그때는 두루 얼버무려 고비를 넘겼다. 사촌동생은 그냥 회계를 했지만 앙심은 그때부터 생기였다. 그들은 사촌형이 말썽을 만들었다고 넘겨 짚은 것이다. 웬일인지, 친척간의 앙숙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그때로부터 고분이네와 사촌간은  껄끄럽게 지냈다.

초급사를 거쳐 고급사가 되고 공산주의로 가는 금다리ㅡ인민공사가 되여 공산주의 천당, 지상락원이 바로 코앞에 다가왔다고 하였으나 고분이네 살림은 점점 어려워만 지였다. 맏이인 큰딸은 전업학교로 가고(경제난으로 고중을 포기했다.) 아들 다섯과 막내딸은 초중 소학에 다녔는데 공부를 특수하게 잘해서 원근에 소문이 났다. 자식들이 공부를 잘하고 품행이 좋아서 칭찬받는것은 자랑스럽고 기쁜일이였지만 그들부부의 부담은 그야말로 초부하 상태였다. 사는것이 너무도 힘든 고역이였다. 어떤 사람들은 아이들을 소학교 공부나 시키고는 일을 시키라고 권유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들은 추호도 그런생각은 하지않았다. 그들은 자식들을 위하여 살며 한생을 하리라!” 맹세 하였다. 그리고 그대로 하였다! 훗날 아들 다섯은 대학까지 나오고 막내는 조기련애로 학업을 실패했다. 맏딸은 관내로 시집간후 자신의 힘으로 고급직함까지 따고 시부모를 공대하여 큰집맏며느리라고 소문이 났다. 이것은 후일담이다.

사촌시동생은 “4운동에서 탐오건으로 졸경을 치르고 떨어 졌다. 그후 그들형제는 회갑전에 모두 사망했다. 과부가 사촌동서들은 워낙 심술이 곱지않은 사람들인데 그들은 고분이네를 실없이 미워하며 시기하고 질투 하였다. 특히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집체생산에는 배돌이고 자본주의만 한다느니(장보기를 두고 하는 말이였다.) 그런 사람들은 량식도 주지말아야 한다느니 하며 험담을 하고 공격을 했다. 지어는 터밭에 무얼 심었는가 보자며 자귀밟은 밭고랑을 보기까지 하였다. 밭에서 고추씨가 나오자 이걸 봐라! 량식은 없다면서 자본주의를 심었다. 먹을게 없으면 집체에 손을 밀고렴치짝도 없지!”하고 악담을 하였다. 거동을 보고 마을사람들이 오히려 밉살스러워 했다. 그런데 우습게도 며칠후 동서가 함께 상점물건을 훔치다가 당장에서 덜미를 잡혀 투쟁을 당하며 개골망신을 했다. 그후 타고장에 이사를 갔는데 선후로 일찌기 남편들을 따라 갔다. 마을에서는 별로 불쌍타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것을 보면 사람이란 마음이 고와야 하고 동네인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자식들은 산골에서 그럭저럭 살고있다.

고분이네는 생산대(마을) 배려로 공수가 높은일을 맡아 했다. 담배모 키우기, 황연불 보는 일인데 그것은 기술로동이여서 공수가 높았다. 하루에 한공5부를 받았다. 하지만 그런벌이는 석달남짓 밖에 안되였다. 온실에 불을때며1리도 되는 두만강물을 지게로 걸어다 담배모를 키우는 일은 무척 힘드는 일이였다. 고분이도 틈만 있으면 10여미터 깊은 드레우물울 길어다 남편을 도왔다. 하지만 남편은 공수를 벌기위하여 그외의 일도 맡아 하였다. 이를테면 가까운 곳의 기음을 떼여 맡는다든지 담배모 나르는 상자를 짠다든지 하며 조금도 쉬지않고 기계처럼 일하였다. 고분이도 틈나는대로 일손을 도왔다. 사촌동서들은 저봐라! 도거리라 하니까 죽을둥 살둥 모르고 일하는걸.” 하며 입을 비죽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분이부부는 기를쓰고 일했다. 남편은 온실안 빈틈에 고추 가지 도마토모를 붓기도 했다. 뜨락에 심을것과 장마당에 모종이였다. 물론 말썽은 뒤따랐다. 어느 한번의 대비판 회의에서 사촌동서들은 사촌시형을 냅다 비판하였다. 우리 생산대에서는 제일 전형적인 자본주의라는 것이였다. 남편은 자본주의긴 하지만 자력갱생으로 살겠다는건 사회주의 겠지? 동네 여러분들이 뻔히 들여다 보듯이 아이들을 공부 시키자니 그렇게 할수밖에 없고집체빚을 한푼이라도 적게 지고우리도 목숨이 살자는건 착오가 아니잖소? 아이들은 크면 나라를 위해 일할거고.”하고 대답을 해서 회장에서는 호응이 일어났다. 생산대 정치대장은 집체일을 잘하며 틈틈이 제집일을 하는건 자본주의가 아니라고 말한후 고분이네는 아이들이 일곱이나 되여도 생산대 옥수수대 하나 꺾어 먹는법이 없고 이삭하나 다치지 않지만 어떤집애들은(사촌동서네) 쩍하면 남의 터밭이나 생산대 밭에 뛰여드는데 아이들 교육을 잘하라고 훈계를 하기까지 했다.

고분이는 하탄시가지에 가서 강냉이가루를 꿔다가 농량에 보태기도 했다. 갚을때는 물론 쌀을 준다. 돼지를 팔면 개인빚을 갚고 꾸어 썼다. 그는 병든몸으로 악을 쓰고 삼복무더위에도, 엄동의 겨울에도 장보려 다니였다. 눈물나는 너무도 모진 고역의 계속이였다. 그렇게 일곱자식의 공부뒤바라지를 하였다. 그리고 출세를 시키였다. 그들은 다진 맹세를 실현 하였다.

자식들은 외지에서 월급생활을 하면서 부모를 방조하느라 했으나 모두 초년생이라 여유가 별로 있을수 없었다. 잇따라 줄줄이 결혼이 닥쳤다. 막내까지 시집을 보내고보니 남은건 그대로 빚과 골병뿐이였다. 남들은 용케도 사명을 완수하였다고 하며 칭찬을 하였으나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빚을 자식들에게 물려줄수 없다는 데서였다. 하지만 태산같은 빚을 무슨수로 갚겠는가?! 병은 깊어가고 기력은 하루가 다르게 못해만 가는데 생산대 수입은 내리막 재주만 하였다.

20여년 공산주의를 향해 숨차게 달려 왔지만 해마다 차례지는건 실망뿐이였다그사이 두번 풍작이 들었으나 한공에 겨우 70, 량식대와 추렴새 따위를 떼고나니 제일 분배가 많은집이 백원 조금 되였다. 평년은 한공이 2,30, 몇차례 흉년에는 무슨 마이너스 30전이라든가문화대혁명 10년에서 8년이 마이너스를 했다. 30여호 마을사람들이 몽땅 빚을 지고보니 누가누구를 말할 형편이 되였다. 제일 꾸러미인 고분이네는 위안 되였다. 하지만 사람이란 빚은 갚아야 한다. 고분이네는 생산대 빚이 3천여원, 신용사 빚이 2천여원이였다. 개인빚은 2백여원이였다. 보아하니 죽는순간까지 갚는다고 해도 갚을 재간이 없는 빚이였다.

자식들이 하나 집을 떠나면서 량식사정은 나아갔다.  17년을 온갖 심술을 피우며 누워있던 시어머니는 욕창 한곳 생기지 않고 깨끗히 앓다가 사망했다. 고분이는 그만큼 정성을 다하여 시어머니를 돌봤든 것이다. 마을에서는 효부라며 모두 감탄 하였다. 막내딸 잔치까지 한후에는 밥상이 좋아 졌다. 닭알이나 고기반찬도 때론 올랐다. 하지만 빚을 생각하면 밥술을 든채로 멍해질때가 자주 있었다. 이대로 계속 혁명을 한다는데, 혁명은 언제가야 승리하며 부러운것이 없다는 공산주의는 어느때 보는건가다른것은 그만두고 빚만 청산하면 우리에게는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라고 그들부부는 한탄 하였다.

하늘이 무심하지 않아 그들에게는 살길이 열였다. 개혁개방이 된것이다. 1983 이른봄 고분이네 마을에서는 집체화의 틀을 마스고 개체를 실시하였다. 고분이네는 제비쥐기로 가진 과수원을 욕심내는 사람에게 주고 3천원빚을 일조에 탕감했다. , 이런 경사도 있나! 꿈인지 생신지 황홀하기만 했다. 그해 농사는 어거리 대풍이 들었다. 고분이네 수확은 잡곡까지 3천여근이 되였다. 남편은 키높히로 쌓아올린 낟알마대를 밤중에도 두세번 일어나서는 쳐다보며 웃곤 하였다. 감자 무우 가을배추 마늘까지 처리한후 신용사 빚을 5백원 갚았다. 그후 5년을 농사와 뜨락경제(공예작물) 신용사 빚을 몽땅 청산했다. 빚까지 갚고나니 두로인의 기맥은 ! 풀리였다 삭신애 한점 기력이 없고 아프지 않은데가 없었다. 령감은 때론 복통이 심하다며 2,3일씩 달팽이처럼 꼬부리고 자리에 눕기도 했다. 고분이는 워낙 지병인지라 자기는 원래 그렇거니 하며 하루하루를 지탱해 나갔다. 여기저기 시가지에서 사업하는 아들들은 방산집이 아니면 세집에서 그런대로 말씽은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령감은 나날이 쇠약해 가는 자신의 팔과 다리를 가끔 만져보며 개혁개방이 10년전에만 실시 되여도 지주 뺨치게 되였을 텐데하며 아쉬워 했다. 지금와서 그들부부의 여한은 아들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지 못하는 것이였다. 그러나 단념 하였다. 이젠 정말 기력이 없었다.

돌이켜 보면, 시집와서 개혁개방전까지 44년세월을 그러니까 회갑나이가 지날때까지 고분이는 식량고생, 돈고생, 병고생까지 너무도 모진 고생을 하여왔다. 연변은 몰라도 하탄진에서는 제일 고생한 사람이 고분일 것이다. 그가 흘린 땀물 눈물은 과연 몇동이가 될가?!... 그의 신체상의 아픔과 생활상의 고통은 말과 글로 형용할수 있겠지만 마음의 설음, 슬픔과 쓰라림은 무엇으로 표현하랴그야말로 일구난설, 일필난기라 하겠다.

좋은 세월이 왔다! 고목봉춘이라 할가?... 하지만, 고분이부부에게는 그림의 떡이였다. 그들의 한생은 지나간 것이다



1990 , 고분이량주는 큰아들을 따라 시가지로 왔다. 수중에는 집과 잡동사니를 처리한 돈이 천여원 있었다. 이것인즉 그들의 전부의 재산이였다. 밭은 맡겠다는걸 사절하고 마을에 공유지로 들여 놓았다. 그들은 지난 수십년간 마을사람들의 신세가 크다고 생각했든 것이다. 그들이 떠날때, 전날밤 마을에서는 환송회를 했고 이튿날에는 수레에 태워 하탄시가지 역전까지 갔다. 마을사람들은 거이 모두가 하탄까지 따라오며 여니(배웅) 했다.

큰아들은 2,3년전부터 부모를 모시겠다고 했는데 그들이 동의하지 않았다. 중에서 하나가 죽으면 그때 모시라고, 그래야 부담도 적고 간편하다는 것이였다. 그런데 그것이 생각대로 되지않았다.

큰아들네 세식구는 20여평 두칸짜리 집에서 살았다. 며느리는 개인식당에서 일을하고 손자는 초중학생이였다. 그때만해도 사람들의 관념은 부모는 큰아들이 모셔야 한다는 것이였다. 딸은 출가지외인이고. 늙으면 아들을 따르는 법인데 그것은 아들들의 항렬에 따라 봉양을 책임졌다. 이를테면 맏이가 책임을 못하면 둘째가, 둘째가 안되면 셋째이런식이였다. 만약 형님들이 있으면서 지차가 모시면 사회여론에 오르고 말밥이 되였다. 본인들도 광채롭지 못한일로 생각했다 하지만 고분이량주는 아들과 합가를 하지않았다. 림시방편으로 아들집 근처에서 세집을 맡고 량주가 기거를 하였다. 사정이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든 것이다. 다른 아들들은 큰형이 어떻게 처사하나 눈치만 살피는듯, 그것은 며느리들이 더욱 그러는것 같았다.

시가지로 와서 두해만에 령감은 한생을 마치였다. 제일 고통스럽다는 이선암인가 하는 병이였는데 령감은 신음소리 한마디 하지않고 땀만 철철 흘리다가 사망하였다. 그는 림종이 가까워 올때 로친의 손을 맥없이 잡고 고생이 많았지수고했어아이들을 먹이지 마우.”하고 유언을 당부했다. 그리고 혼미하더니 사흘후에 조용히 숨이 사라졌다.

고분이할머니는 큰아들집으로 들어 갔다. 짐이래야 이불한채에 옷견지따위를 보따리 하나 그리고 작으마한 낡은 려행가방 하나뿐이였다. 그속에는 진통제 소화제 따위 상용약품 몇가지와 돋보기 치솔 수건 머리빗 숟가락 같은것이 들어 있었다. 배운것, 본것 없이 무지막지 막돼먹은 맏며느리는 퍼랄수구(페물수구) 한족로친을 불러다 남비며 사발이며 숟가락까지 왈카당 절카당 팔아버렸다. 남어지는 불을 처박아 버렸는데 마치도 무슨 분풀이를 하는것 같았다.
그는 큰시누이부부와 시동생들 그리고 동서들 앞에서 항상 렬등감을 느끼였다. 그들은 자기보다 여러차원 높은 사람들이였든 것이다. 하여 그는 형제들이 모이는걸 제일 싫어 하였다. 명절이나 무슨일사로 모이기만하면 그는 사단을 일쿠었다. 음식상이 갖추어진 후에야 펄쩍 뛰여들기가 일수였고(그때는 하탄에서 살았음) 자기는 무슨일이 있다면서 부산을 떨며 먼저 달아났다. 어떤때는 괜히 아이를 뚜드려 패며 소란통을 이르키기도 했다. 그의 눈에 제일 만만한것은 산골에서 농사짓는 막내시누이부부 였다.

큰아들이 이런 개차반같은 녀자에게 장가들게 된것은 다리를 살룩살룩 절고 집이 가난하고 부모에 동생들이 여럿이여서 부담이 많다는 약점 때문이였다. 그리고 서른이 거이되는 로총각이여서 장가들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큰아들이 다리는 다섯살때 두엄무지 쇠줄을 밟은것이 염증을 이르켜 그렇게 되였다. 그때 다리를 찍어야 한다고해서 고분이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다행이 느릎나무뿌리껍질로 반년여 치료를 해서 다리를 살렸다.   

큰며느리는 시집온후 기실은 제일 부담없이 제살림을 했다. 명색이 큰며느리라는 사람이 군일마다 이핑게 저핑게 요리빠지고 저리빠지면서 떡이나 먹고는 달아 났다. 때로는 무슨 심통이 났는지 아예 오지도 않았다.

다섯째아들의 잔치 때에는 신부가 받은 큰상을 엎겠다고 날뛰다가 제지를 당하니 자기를 부등켜 안고있는 큰시누이(13 이상임.) 파마머리를 잡아 끌고 뜯어 놓았다. 잔치하객들이 겨우 떼여 놓으니 이번에는 큰시누이남편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틀어쥐고 얼굴을 할퀴자고 발광하였다. 큰시누이남편이 맏며느리라는 사람이 군일이 될수록이면 잘되게 앞뒤를 살필대신 이게 무슨 행실인가!”하고 나무랬기 때문이다. 그는 제밸을 못이겨 방바닥에 늘이져서는 헐떡이였다. 사람들은 혀를 휘두르며 천하에 둘도 없는 망졸이라느니 정신이 나쁜것 같다느니 하면서 끌끌 혀를 찼다. 그가 그런 어처구니 없는 행패질을 한것은 넷째까지는 잔치가 자기와 비슷했거나 지어는 못하기도 했지만 다섯째의 잔치가 자기때보다는 훨씬 좋다는 데서였다. 자기는 소학교밖에 다니지 못한 산골농촌녀자라고 업신여긴다는 앙심을 품고 있었든 것이다. 그는 부부가 대학에서 선생질하는 셋째시동생네와도  앙숙이였다. 둘째시동생네( 사람 모두 대학출신) 수월하고 겸손한(두살 위지만 자기한테 한다고)사람들이라고 좋게 보았다. 하지만 넷째와 다섯째네는 코풀레기라느니 제노릇만하는 것들이라느니 하며 째째하다고 밉게 보았다. 주로는 자기를 위촌하지 않는다고 불만이였다.

시정부 간부인 큰아들은 매우 똑똑하고 정직하고 젊잖은 사람이였다. 그는 전통적 보수적 관념을 갖고 있어서 부모는 자기가 책임을 져야하며 형제들에게는 직접적 책임이 없다고 인정했다. 그들이 스스로 부모에게 효성하며 간혹 자기를 방조하는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면에서 안해의 생각은 매우 현대적이고 급진적(당시로는)이였다. 그는 아들들이(딸은 부쏸. 헴에 넣지않는다. 책임이 없다는것.) 무조건 돌아가며 부모를 모신다든지 생활비를 고루 병탐한다든지(고루 풍기는것) 해야한다고 인정했다. 친정어머니(남편은 일찍 사망. 시부모를 학대한 전형인물.) 동생들은 그의 관점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부추겼다. 그런데 시동생부부들은 남편과 같은 견해들이였다. 그들은 형님의 로고를 마음속으로 잊지 않으면 된다고, 여유가 있으면 물질상 적당한 표시를 하는것도 좋고이렇게들 생각하고 있었다. 큰아들이 아닌가! 그러니 책임지는것은 천경지위라는 것이였다. 그것은 고분이할머니도 그렇게 생각했다. 좋든 굿든 큰아들을 따라야 한다고 법으로 믿어왔던 것이다.

큰아들은 어머니를 모셔온후 살뜰히 보살펴 드리였다. 가마목에서 쉬게하고 닭알을 삶으면 제손으로 발라 드렸다. 병원에 모시고 가서 전면검사를 하니 모병은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내과주임의사는 집에서 대증치료나 하라면서10여가지 약을 알려 주었다. 그는 가지가지 약물을 갖춰 놓은외에도 험방책에서 토방법을 선택하고 보건동작도 어머니에게 가르켜 드렸다.

아들의 효성에 고분이할머니는 감격과 기쁨의 눈물을 자주 흘렸다. 령감과 지나간 인생이 자꾸 올라 눈물이 흐르기도 했다. 고분이할머니에게는 체질적으로 무슨 눈물이 그렇게 많은지 눈물을 줄줄 흘렸다. 정감이 풍부하고 마음이 여리였든가?... 좋고 궂은 눈물겨운 사연이 너무도 많았든가!… 사람은 누구나 기왕지사에 대하여 어떤일은 너무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에 충실하며 래일을 기대하여야 한다. 이것은 유익한 인생태도다. 고분이할머니도 이런도리는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생각처럼 되지않는 심정이였다. 하여 그도 때론 안타깝기도 했다. 그렇지만 한생을 거이 눈물속에서 살아온 그를 눈물이 헤프다고 하여 나무릴수야 있겠는가하여튼, 그의 주름진 얼굴에서는 눈물이 방울방울 자주 흘렀다. 그런데 이것은 그이의 커다란 허물이였다.

나무는 고요히 있자고 하지만 가지많은 나무에 바람 새가 없다. 산골에서 농사짓던 막내딸부부는 하탄시가지로 올라와서 뜨내기 일을 했다. 말하자면 그들로서는 쌰해를 한것이다. 사위는 오토바이삼륜을 몰고 딸은 도라지짠지를 해서 팔았다. 그런데 사위녀석이 노래방에 드나들며 바람을 피우기 시작해서 하루건너 싸움질을 해대는 모양이였다. 워낙 일하기 싫어하고 건달기가 있어서 고분이량주는 꿈도꾸지 않았는데 막내딸이 녀석과 한덩이로 굴러 다닐줄이야! 녀석이 손이야 발이야 빌며 허혼을 해달라고 간청을 하고 맹세를 하니 잔치를 주고 말았는데 꼬락서니였던 것이다.

볼갑스럽고 표독스레 생긴 큰며느리는 공연히 들펑질을 하며 불손했는데, 시어머니가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리는것을 제일 짜증나 하였다. 그는 누가 죽었는가! 누굴 죽으라고 우는가!” 하고 악청을 지르며 내놓고 면박을 했다. 시어머니가 내가 스스로의 생각에서 공연히 그런다고 대답하면 나는 그런 보기 싫으니까 다른아들집에 가서 실컷 울라고우리집에는 이만있었으면 되였다고거침없이 쏘는 것이였다. 그러던 마침 막내딸네가 사단이 생기니 며느리는 딸께로 보라고, 가서 지키라며 밀며 쫓았다. 늙어빠진 장모가 제집으로 오자 막내사위는 짓뿌디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술을 물켜듯 하며 집이고 나발이고 짓부셔 버리겠다고 하며 지어는 도끼까지 들고 행패질 하기가 일수 였다. 어느날은 밤중에 녀편네와 장모를 쫓아 내기까지 하였다. 하여 그들 모녀는 그날밤 친척집에 찿아가서 밤을 새웠다.

고분이할머니가 작고 낡은 려행가방을 들고 딸집으로 간지 한달남짓 였다. 큰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 큰아들 장례후 둘째아들이 어머니를 모셔 갔다.

둘째아들 때문에 당년에 고분이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것은 둘째가 중학교에 다닐때다. 학교에서 갑자기 병이 났는데 숨이 막히면서 가슴이 터진다고 아이는 땅바닥에서 마구 뒹구는 것이였다. 하루에도 몇번씩 발작을 하는데 하탄진 병원에서는 무슨병인지도 모르겠다고 하였다. 큰병원으로 가는것은 옳지만 돈이 있는가! 그때 울면서 사정사정 돈이 신용사 빚이다. 둘째는 석달넘게 입원치료를 받고 병이 떨어지긴 했지만 무얼 먹으면 목에 걸린다고 하면서 가슴이 막힌다고 하였다. 하여 입쌀을 꿔다가 미음을 먹이며 3년여 각별히 돌봐야 했다.

둘째는 마음이 수월해서 자기것을 아끼지 않았다. 돈도 그랬고 물건도 그랬다. 옴니암니 따지는 성미가 아니였다. 하지만 참을성이 없고 단순한것이 결함이였다. 며느리는 젊은사람이 한없이 무던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습관성류산이였다.

새끼를 미워하는 부모는 없다. 열손가락을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것이 없듯이 자식에 대한 정은 같았으나 그러나 길고 짜름은 있다. 고분이량주는 자식들의 장점과 단점을 알고 있었다. 산전수전 세파를 많이 경험한 그들은 자식들을 성가 시킨후 아들 며느리들에 대하여 평론이 있었고 견해가 있었다. 셋째네는 아들은 원칙을 아는 사람이지만 중병으로 앓는 몸이고 며느리는 사회적으로 그리고 가정적으로, 친정까지부담이 많은 사람이였다. 넷째는 말은 해도 나약한 성격이고 며느리는 허욕이 많은데다가 시부모는 근본상 자기와는 상관없는 늙은이들로 인정하고 있는 사람이였다. , 책임감같은건 꿈도 꾸지 않는 사람이였다. 그들은 제노릇만 하는 사람들이였다. 다섯째는 어떤가? 아들은 아직 순진하고 천진 했다. 그런데 며느리는 쥐방울만한것이 앙큼하고 녕악스럽기까지 했다. 솔직히 말해서 둘째네가 제일 마음에 들었으나 법도가 있는거고 큰아들의 얼굴을 지켜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여느아들들은 당시 여건이 안되였다. 모두가 공령이 짧아 박봉인데다가 살림을 시작한 초기여서 아직은 터도 잡히지 못했다. 그리고 코구멍만한 셋방살이에 끼울 렴치도 형편도 못되였다.

비록 마음에 싶던 둘째네 집으로 오긴 했으나 고분이할머니의 눈물은 더욱 많아지였다. 밥상에 오른 닭알을 보고도 목이 ! 메고 눈물이 주루루 흘렀다. 하여 밥상에 마주 앉았다가도 그대로 물러나기도 했다. 어머니가 시도 때도 없이 비감을 억제 못하니 둘째는 위안하던데로부터 신경질을 내기 시작했고 그다음은 싫증을 내며 때로는 어머니를 미워하기까지 했다. 물론 다른 자식들도 어머니의 눈물을 좋다고 한것은 아니다. 안해가 어머니 심정을 리해 하라고, 리해하면 될거 아니냐고 수차 권고해도 효과가 별로 없었다. 오히려 자기와도 신경질을 벌컥 벌컥 썼다. 안해는 워낙 듬직한 성미여서 더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몸도 불편할때가 자주 있었으나 거기에 대해서는 등한하고 시어머니는 극진히 진심으로 보살폈다. 그가 이렇게 한것은 천성도 관계가 있겠지만 수양과 품덕 때문이였을 것이다.

둘째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진정어린 정성이 보람이 있었는지, 시어머니는 우정 상탄에 가서 단오날 아침에 익모초를 베여다 고약을 한단지나 만들어 며느리를 먹였다. 그러기를 련속2년후 그는 임신에 성공하여 아들을 낳았다. 시어머니가 기특하고 장하다고 칭찬하니 그는 어머니 덕분이라며 감사해 하였다.

둘째며느리는 아이가 소학교에 다닐때쯤부터 고혈압과 관심병으로 앓기 시작했는데 때로는 몹시 고통스러워 했다. 그사이 다섯째 아들은 단위가 파산되여 곤경에 처했는데 이악스런 며느리는 매일 남편과 바가지를 긁으며 싸움질을 하여 대드니 끝내는 리혼 하고야 말았다. 얼마후 다섯째는 심수시에 가서 한국기업에 들어갔는데 그만 교통사고로 죽었다. 얼마후에는 막내사위가 술을 먹고 삼륜을 몰다가 길아래 웅덩이에 박으며 죽었다. 딸은 그후 한국으로 시집을 갔다.

불상사가 거듭생기자 사회에서는 늙은이가 오래 사는것이 일이 아니라는둥, 좋지않다는둥 하며 고분이할머니를 빗대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어는 늙은이는 일찌감치 죽는것이 복이라고 꺼리낌없이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러면, 자기들은 환갑이 지나면 죽을텐가?!

둘째며느리가 자주 앓자 고분이할머니는 양로원으로 가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당시에는 아들과 며느리들은 양로원에 가는것을 매우 체면이 깎기는 일로 생각하였다. 자식들이 ! 하고 하늘에 올라붙자 고분이할머니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령감의 림종시 부탁을 항상 명심하고 있었든 것이다. 고분이할머니는 죽을 생각도 하여 보았다. 그러나 자기가 그렇게 처신을 하면 자식들의 얼굴이 무엇으로 되겠는가! 그는 죽을수도 없었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넷째가 어머니를 모시는 것이 가장 합당하였다. 그런데 넷째는 안해를 설복할 재간이 없었다. 둘째며느리는 심장병으로 앓으면서도 계속 시어머니를 모시겠다고 고집하였다. 형편이 이렇게 되자 남편이 중병으로 앓고 있는 셋째며느리가 자진해서 시어머니룰 모셔 갔다. 그는 자기가 끝까지 모시겠다고 결심을 내렸든 것이다.

작고 낡은 려행가방을 들고 시어머니가 보따리를 셋째며느리를 따라 택시 타러 나갈때 둘째며느리는 따라나가며 눈물이 돌아 하였다. 그는 시어머니 손을 잡고 며칠후 낳으면 모시러 가겠어요. 그간 무사히 계세요.”하고 당부하였다. 그런데 그가 먼저 구천으로 줄이야!...

고분이할머니는 돌째며느리와 16년을 함께 살았다. 시고부가 16년을 하루같이 화목하게 살게된 비결은 며느리가 리해, 존경, 관심 좌우명으로 했기 때문이다.

어느 한번의 표창대회에서 둘째며느리는 이렇게 말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로인을 좋아할 젊은이는 없을 겁니다. 더욱히 사랑한다는 거창한 말을 나는 믿지 않아요. 그러나 리해하고, 존경하고, 관심한다는 말은 승인 합니다. 그렇게 하는 며느리들이 많지요. 나도 그렇게 하기 위하여 노력 합니다.
사람은 늙으면 아이가 된다고 하지요. 정말 그런것 같아요. 어느 의사와 자문해 봤는데 정말 그렇대요. 우리도 자연법칙을 어길수 없대요. 로인님들의 정상적인 거동은 맑은정신이 지배한 거고 실수, 착오는 흐린정신 때문이죠. 이런 분들과 우리 젊은사람들이 좋으니 궂으니 무슨 시비를 합니까!...
그분들은 우리를 사랑 했습니다. 그의들의 로고와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들의 오늘이 있는게 아닙니까. 부모님을 포함해서 선인들의 은덕을 보답할수는 없습니다. 영원히 그럴 겁니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사랑은 없다고 하지요. 하지만 로인님들의 여생을 책임지고 자기 나름껏 최선을 다해 보살펴 드릴수는 있어요.”

그의 발언은 회장에서 오래동안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

고분이할머니는 양로원 뜨락의 나무밑 걸상에 앉아서 멀리에 있는 시가지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식사시간도 잊고 눈물을 흘리기가 일수였다. 처음몇번은 복무원들이 알은체를하며 동정의 말도 몇마디 하던것이 얼마후부터는 먹어요!” 하고 소리치고는 관계치 않았다.

오늘도 고분이할머니는 양로원 뜨락의 나무밑 걸상에 앉아서 멀리에 있는 시가지를 바라보았다. 그곳 서쪽하늘에는 저녘노을이 곱게 피여 있었다. 마음은 허전하고 쓸쓸하기 그지 없었다. 뜨거운 눈물이 걷잡을수 없이 주루루 흘러 내렸다

지금 그는 가장 소원이 자식들에게 더는 탈이 없을것과 자기가 하루빨리 령감곁으로 가는 것이라고 했다. 비록 말은 그렇게 해도 자손들이 번창하며 잘되는것을 오래오래 보고싶은 것이 사실은 진솔한 마음이다. 양로원이 어떠어떠하게 좋다느니 어쩌느니 하고 말들은 잘해도 그것은 삼자들이 하는 말이고 그의 경우에는 절대로 그것이 아니였다. 고분이할머니에게 있어서 양로원은 부득이한 선택이였다.   

고분이할머니와 같은 세대들은 삼대 사대손군들을 눈앞에 보며, 만지며, 정으로, 오래오래 사는것이 인생 최대의 락이다. 그리고 간절한 바람이다. 그러나 뜻대로 되는 인생이 몇이나 되는가! 그리고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다. 그것은 누구나 모두.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라 어쩌라 설교를 하지만 고분이할머니는 그렇게 할수 없었다. 생명의 본능적인 욕망도 욕망이겠지만 후대에 대한 기대와 사랑이 너무도 절절했든 것이다. 그에게는 자신에 대한 그어떤 보답같은것을 바라는 마음은 조금치도 없었다. 시체말로 대공무사라고 할가, 자신의 일체를 깡그리 자손들에게 바친, 바치는 고분이할머니 였다.

어른들의 마음은 모두 그렇다. 그런이들을 후손들이 어찌 효도치 않겠는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고 세상보다 넓은것이, 해님보다 따뜻한것이 천하 부모님들의 자손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다!… 힘으로 안되면 마음으로라도 자손들을 생각는것이(돕자는 것이) 로인들의 유일무이한 마음이다고분이할머니의 마음은 그랬다.

                                                                                                               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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