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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녀인의 일생
2019년 05월 24일 13시 51분
조회:1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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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회령
중편실화소설
한 녀인의 일생
회령
“ 내가 글을 쓸줄 안다면 소설을 한책 쓰고 싶어요 .” 이 말은 90 을 바라보는 고분이 할머니가 눈물이 글썽해서 가끔하는 말이다 .
고분이할머니는 극히 평범한 산골농촌 백성이였다 . 그는 지난세기 20 년대에 태여난후 한뉘 농촌에서 살면서 아들딸 8 남매를 보았다 . 그중에서 딸 하나는 돌전에 잃고 7 남매를 성인으로 키웠는데 아들은 다섯이고 맏이와 막내는 딸이다 .
오늘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 우리들은 거개가 모두 고분이할머니와 같은 어른들의 손에서 자랐다 . 그리고 각자가 자기 분복대로 초로 , 중로의 인생을 살고 있다 . 우리 또래가 많아서 사회는 로령화시대라느니 뭐니하고 떠들어대고 있다 . 하지만 고분이 할머니와 같은 최로의 로령어른님들은 이젠 몇분이 안된다 .
고분이할머니는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지 … 평범한 세계ㅡ백성들 속에는 경천동지의 거대한 이야기는 없어도 진솔하고 잔잔한 감동을 주는 이야기는 많다 . 그것은 그들의 력사ㅡ생활자체가 매우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 고분이할머니는 자신의 한생을 , 말하자면 자서전같은 글을 쓰고 싶다고 하였다 . 사람은 늙으면 쉽게 추억속에 잠기며 력사를 회고하기 좋아한다 . 그리고 대부분은 거기에서 끝나는데 일종의 향수라고 하겠다 . 그러나 고분이할머니의 경우에서는 다른점이 있었다 . 말하자면 그이의 회억은 당신의 불행한 현실과 이어진 유감과 슬픔이였다 .
고 분 이
고분이는 오빠 둘 , 언니 셋 , 막내로 태여났다 . 그의 집은 힘장수인 아버지와 무던하고 부지런한 어머니 그리고 6 남매가 억척으로 일한덕에 토개 ( 토지개혁 ) 시에는 떳떳한 중농이 되였다 . 사람들은 그의 아버지는 뚝곰이라 불렀고 어머니는 암쇠라고 하였다 . 그들은 말 그대로 작수성례후 적수공권으로 살림을 시작하였다 . 머슴총각과 부엌녀 ( 머슴 ) 는 부모들이 짝을 맺어준후 그대로 머슴을 살았는데 , 조선이 왜놈들에게 통채로 삼키우자 해외로 떠나는 사람들을 따라 중국땅 연변으로 들어왔다 .
그들 부부가 충주에서 명천을 거쳐 연변에 들어서기까지는 꼬박 다섯달 거의 걸렸다 . 그때 이미 아이가 둘이였는데 맏이인 아들은 아버지의 지게에 앉고 둘째인 딸애는 어머니가 업었다 . 그대로 거지인 그들은 빌어먹고 빌어자며 날품을 팔아가며 이주민들의 뒤를 따라 끈질기게 걸었다 . 한지에서 자고 굶은 날은 얼마인지 모른다 . 다행은 로상에서 별일이 없은것이다 . 그들은 길에서 죽는 사람을 한둘만 보지 않았다 .
드디여 두만강변의 작은 시가지인 봉화대에 도착했다 . 엇비슴이 강건너 윗쪽에는 상탄이라는 중국마을이 있었는데 조선사람 서너호가 살고 있었다 . 봉화대 대안은 꽤 큰 시가지 하탄이였다 . 상탄과 하탄의 중간에는 산세가 강파로운 산줄기 하나가 내리 질렀는데 끝에 불끈 솟은 마두암은 주둥이를 두만강에 처박아서 마치도 준마가 물을 먹는것 같았다 . 산이 높지 않아서 마령이라 했는데 상탄과 하탄은 등허리에 가로 걸린 10 여리 오술길로 통하였다 .
고분이 부모들은 상탄에 자리를 잡았다 . 때는 음삼월 청명이 멀지 않았다 . 임자없는 땅이 무진장 많았다 . 뚝곰과 암쇠는 걸싸게 일했다 . 나무를 찍어다 삼간통 집을 짓고 빈땅을 욕심스레 개간을 하였다 . 별명은 그때에 붙은것이다 . 농량은 하탄에 가서 장리를 맡았는데 조선에 비하면 어방없이 눅었다 .
십여년 세월이 흘러 여섯째 고분이가 태여났다 . 그해 봄 뚝곰은 식구가 늘어나기에 6 간 기와집을 크게 지었다 . 섯달 고분이는 기와집에서 태여났다 . 하지만 어설픈 새집이여서 겉바람이 어찌도 심한지 산모와 갓난애가 얼어죽을 지경이였다 . 구들은 불이 날 지경이였지만 하뇌바람처럼 세찬 겉바람은 귀뿌리를 씽씽 스쳤다 . 아버지는 정지칸 구들에 조짚으로 고깔 초막을 틀고 산모와 갓난애를 그속에 있게 했다 .
세월은 흐르고 아이들은 커 갔다 . 동네는 30 여호의 큰 마을로 되였다 .
고분이 부모들은 아들딸 여섯을 하나도 잃지 않고 고스란히 키웠다 . 아이 여섯을 공부는 하나도 시키지 못했으나 여덟식구가 자각적으로 부지런해서 배곯는 고생은 하지 않았다 . 그때 세월에는 밥술을 자급한다는것이 대단한 일이였다 . 마을에는 먹는것때문에 밤낮으로 근심하며 굶는 집이 20 여호는 되였다 . 고분이네는 그런 집들에 량식을 뀌여줄 여유까지 있었다 . 마음이 무던한 고분이네 부모들은 누구든지 사정을 하면 힘껏 도와 주었다 . 쌀이든 돈이든 뀌여 주고는 리자를 받는 법이 없었다 . 마을 사람들도 고분이네 일이라면 말그대로 손발을 벗고 나섯다 . 이사를 해서 3 년 병이 없으면 부자가 된다고 했는데 고분이네는 거이 30 년 누구하나 앓지 않았고 부지런해서 … 그리고 마을 인심을 얻은 덕에 정말로 부자소리를 듣게 되였다 .
고 생 문
고분이는 광복나기 다섯해전 18 살에 10 여리 이웃에 있는 산골마을로 시집을 갔다 . 신랑은 그보다 2 살위인 리씨 총각이였는데 항렬에서는 맏이였다 . 보통키에 호리호리하고 준수한 미총각이였다 . 고분이는 이름 그대로 아담하고 알뜰한 처녀였다 . 혼사말은 16 살때부터 있었는데 세해나 끌게 된것은 리씨네가 너무도 가난하고 총각의 아버지가 원근에 소문난 괴상한 사람이였기때문이다 .
총각은 무척 총명하고 빠진데 없이 훌륭해서 욕심났지만 집은 죽물도 바로 못먹는 가난뱅이였다 . 총각의 아버지는 붓글씨를 잘 쓴다고 소문이 나고 학식이 있는 사람이였는데 일하기 싫어 하는 백수건달이였다 .
그는 술잔이나 얻어 먹으면 공연히 남과 시비를 걸어서는 반나절씩 말싸움을 했는데 주로는 일본 사람 , 잘사는 사람 , 우쭐렁거리는 사람 , 얄미운 사람 , 관청 공무원들과 그 행패질이였다 . 지어는 순사들과도 시비를 걸었는데 언쟁에서 지는때가 별로 없었다 . . 그는 남의 시비도 가로맡아 나서서는 약자의 편을 들었다 . 하여 공술이 생길때가 퍼그나 있었다 .
하탄시가지에서는 리아무개라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 대체로 가난한 사람들은 그를 좋아하고 좀 뾰족한 사람들은 그를 싫어했다 . 면목을 아는 조아무개는 왜놈들앞에서 갑장 ( 촌장 ) 이라는걸 했는데 리씨는 그를 보기만 하면 “ 얘야 !( 네살위인 사람임 .) 좆갑장 ! 이리오너라 ! 잘 만났다 . 너 오늘 어른께 한잔 사 올리렸다 .” 하고 길게 왜가리청을 질렀다 . 조갑장은 물론 술을 사 먹이였다 . 각가지 훈계를 들으며 대접하고 시중들어야 했다 . 조갑장은 리씨를 슬슬 피하느라 했지만 웬일인지 번마다 잡히군 했다 . 때로는 호명을 듣고도 못들은척하고 내빼기도 했지만 다음번에 잡히면 신물이 날 지경으로 몇갑절 닥달을 당해야 했다 . 몇번 경험을 본 조갑장은 아예 리씨가 보이기만 하면 선손을 쳐서 너스레를 떨며 비위를 맞춰 주었다 .
사람들은 리씨를 괴상한 사람 , 특별한 사람이라고 했다 . 그러나 그는 항일투사거나 혁명하는 사람도 아니였고 협객이나 주정뱅이 망나니도 아니였다 . 젊은 시절 서당공부를 하며 청운의 포부가 컸던 그는 시국때문에 모든것이 수포로 돌아가자 자포자기를 했던것이다 . 사회도 가정도 자신도 모두 귀찮았던것이다 . 술잔이나 건네고 집으로 돌아 올때면 저 멀리에서부터 에헴 ! 에헴 ! 하고 곤두침을 뱉으며 자취를 알리였다 . 집에 있는 식구들은 덴겁을 해서 영접을 해야한다 . 조금만 소홀했거나 무엇이 눈에 거슬리는 날에는 그야말로 날벼락이 떨어진다 . 일단 주정을 시작하면 마누라로부터 식구들 ( 아들 둘 , 딸 넷 ) 에게 욕사발을 퍼붓고 다음은 동네 사람들을 욕하였다 . 소를 잘못 매서 남의 곡식을 해쳤다는둥 , 기음 맨 꼬락서니가 어떻다는둥 , 아이들의 코 건사도 바로해 주지 않아 메스겁다는둥 , 어른을 보고도 인사할줄 모른다느니 … 별의별 욕설을 다 퍼 부었다 . 그런후에는 사돈들을 돌아가며 욕하였다 . 그는 욕을 다 할때까지 정좌를 틀고 앉아서 호통을 했는데 빠르면 밤중이되여 페막사를 하였다 . 취중에 하는 말이였지만 망발은 없었다 . 집 식구들을 비롯해서 사람들은 그를 주정뱅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 술만 마이면 잔사설이 길고 앉아서 깨기에 견디기 어렵다고 했을뿐이다 . 어찌되였든 , 그의 주풍도 고분이네 집에서는 중대한 고려사안이였든 것만은 사실이다 . 하지만 돈이란 있다가도 없을수 있고 없다가도 있을수 있지만 사람은 한번 만나면 그뿐이니 ( 그때는 리혼을 몰랐다 ) 당자의 사람 됨됨이가 가장 중요한것인데 , 리씨총각은 참다운 청년이라는데서 , 그리고 시애비가 될 괴상한 리령감은 주정은 한다지만 경우 시비는 올똘한 사람이라 간대루사 며느리와 주정을 하랴 하는데서 혼사는 이루어지게 되였다 . 워낙 세상사란 좋게 생각하면 다 좋아 보이는 법이다 .
고분이는 삼일 ( 첫날 , 친정에 다녀오는 행사 ) 을 갔다온 이튿날부터 정식으로 가마뚜껑 운전수로 되였다 . 자기까지 아홉식솔의 후근을 맡은것이다 . 그가 처음으로 지은 아침은 이밥 세그릇과 푸대죽이였다 . 시어머니 신칙하에 첫날베개속에 넣어온 입쌀로 지은 이밥은 시아버지와 남편 , 시동생에게 ( 남편 바로 아래동생 ) 올릴것이고 시어머니와 네 시누이 그리고 자기가 먹을것은 멀건 푸대죽이였다 . 반찬은 김치와 산나물 두어가지뿐이 였다 .
아침식사가 시작 되였다 . 정주칸 웃목에서는 시아버지가 두 아들을 대면으로 겸상을 하고 아랫목에서는 나인들이 죽사발을 들고 둘러 않았다 . 김치모랭이는 가운데 방바닥에 놓았다 . 그런데 아침상을 받은 시아버지가 수절을 들지 않고 밥상을 점두룩 내려다 보고만 있는것이 아닌가 ! 집안 어른께서 첫술을 뜨지 않았기에 모두가 기다리며 눈치를 살피였다 . 그것은 7 살 되는 막내딸까지도 . 아마 무슨 말씀이 있을게다 … 아니나 다르랴 . 시아버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씀하였다 . 밥을 푸대죽에 넣어 다 같이 먹자는것이였다 ….
고분이는 총명하고 부지런하고 다정다감한 남편을 믿고 일편단심 한생을 살아왔다 . 그리고 그들 부부는 좀 잘 살아보려고 그야말로 필사의 노력을 다 하였다 . 하지만 식량고생 , 돈고생 , 병고생은 고분이와 무슨 악연이 있었는지 지지리도 모질었다 .
리씨총각과의 결혼은 고분이에게 고생문을 열어 주었다 . 그러나 그들 부부의 금슬은 백년해로 변함이 없었다 . 그들은 온갖 곤란 , 난관 그리고 질기고 모진 고생앞에서 언제 한번 얼굴 붉힌 일이 없었다 .
44 년 흘린 땀물 눈물
남편의 말에 의하면 시아버지가 서당공부를 할때에는 꽤 여유롭게 사는 집이였다고 한다 . 시아버지는 어릴때부터 신동이라고 불리웠는데 학습에 노력함이 또한 좋아서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다고 한다 . 그는 포부가 커서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리라 결심했고 높은 벼슬을 꿈꾸었다 . 중앙급 관리가 되여 기울어지는 나라를 부강국으로 건설하며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누리게끔 한몸을 바쳐가리라 맹세 했는데 , 조선 리왕조의 시국은 글러만 갔다 . 대원군과 명성황후 --- 시애비와 며느리가 엎치락 뒤치락 집안 싸움을 해를 이어 계속 하더니 결국은 나라를 망국으로 몰아 갔다 . 시아버지의 청운의 푸른꿈과 노력 ( 학습 ) 은 여지없이 파멸되고 말았다 . “ 한일합방 ” 전후 그의 부모님들은 선후로 돌아가고 일할줄 모르는 그의 손에서 가세는 대뜸 몰락했다 . . 그는 남부녀대 어린 처자를 끌고 해외 이주민 무리를 따랐다 . 배운 글이 있기에 조선에서 따로 생계를 도모 할수도 있었으나 그는 망국에서 망국노로 살지 않는다는 조선선비의 지조가 퍼렇게 살아 있었던것이다 . 중국 간도 --- 연변땅에 이르러 그는 여덟번이나 이사를 하며 가산을 몽땅 탕진하였다 . 하여 지금은 알뜰한 소작농 신세가 되고 말았다 . . 그나마 지금 이 정도로 사는것은 아들 형제와 시어머니 , 네 시누이가 악을 쓰고 일한 덕분이였다 .
시아버지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고 또 아무런 일감도 찾지 않았다 . 집에 있을때는 케케묵은 책을 뒤적이고 겨울에는 전책을 ( 소설책 ) 읽어서 동네 사람들이 한구들 모여 들었다 . 그외의 시간은 허구한 날 하탄시가지에 가서 막걸리나 술잔을 얻어 자시고 돌아 다녔다 . 어느 단위나 기관에서 간부나 직원으로 초빙을 하면 코방귀를 흥 ! 흥 ! 뀌였다 . “ 너들따위 밑에서 ? 상노무새끼들 !” 하고 횐목을 썼다 . 얼어 죽어도 겨불은 쪼이지 않는다는 기고만장한 절개였고 고집이였다 . 그는 일본사람은 쪽발이 , 딸깍발이 , 왜놈 , 미개족새끼들이라며 남녀로소를 아예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 상대하지도 않았고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 하지만 누구 못지 않게 일본글 일본말을 알아서 시비거리는 발벗고 찾아 다녔다 . 그는 중국글 중국말도 잘했다 . 시아버지 주정은 여전했다 . 다만 며느리를 욕하지 않았을뿐 , 그는 며느리를 딸들보다 더 귀여워했다 .
고분이가 시집온 이듬해 봄 , 정정하고 쌩쌩하던 시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했다 . 어느 마을의 좌상로인이 사망했다는 말을 듣고 문상을 갔다가 촉한에 걸렸던것이다 . 친척도 아니고 별로 아는 사이도 아니였는데 , 시어버지는 례문에 등한치 않았던것이다 .
시아버지가 사망하고 보니 21 살의 남편이 호주의 멍에를 떠메게 되였다 . 이미도 호주나 다름이 없었지만 지금은 명실공히 호주가 되였다 . 시어머니는 그간 고분이를 데리고 해오던 안살림을 몽땅 고분이에게 밀어 맡겼다 . 고분이는 끼니며 옷이며 … 여덟식솔의 턱없이 부족한 답답한 살림을 떠 맡았다 .
그때의 시어머니들은 고방열쇠 ( 살림경제권 령도권 ) 를 내여놓기 싫어했다 . 며느리를 맞으면 장을 세독 먹여봐야 한다느니 , 간장을 세독 먹여봐야 한다느니 하면서 고방열쇠를 틀어쥐고 시집살이를 시켰다 . 말하자면 소위 가문의 법도를 가르치는것인데 , 자기 구미에 맞게 길을 들이는 판이였다 . 집안이 잘되기를 바라는 욕심은 며느리를 닥달하는것으로 표현되였다 . 그들은 집안이 흥성하려면 녀자가 마음쓰기로부터 언행에 이르기까지 처사를 잘해야 하는법인데 그것은 들어온 남의 집 사람 --- 며느리가 잘해야 한다고 인정했던것이다 . 하여 수월하다는 시어머니들도 며느리와 퍼러딩딩하기가 일수였다 . 령도자의 위풍과 본때를 보여주는것이였다 . 여북하면 “ 고추 당추 맵다한들 시어머니처럼사 매우랴 !” 하는 군소리까지 생겨 낫겠는가 . 하지만 고분이 시어머니는 그렇지 않았다 . 그에게는 고방열쇠도 없었거니와 부엌살림이 신물이 났다 . 언녕 밀어놓고 싶었지만 령감의 눈치때문에 거조를 내지 못했는데 이젠 감놔라 배놔라 내마음 내키는 대로였던것이다 . 막막하고 고된 부엌일을 메내부치니 거뿐하기 짝이 없었다 . 맹물을 끓이든 풀뿌리를 삶든 내알바가 아니다 . 령도권은 내손에 있으니 틀은 틀대로 낼수 있고 … 이런 심사였다 . 시어머니는 성깔이 사무럽고 까다롭고 괴벽하여 고집이 세고 꼬디 ( 노염 ) 가 많았다 . 순박한 고분이는 열아홉살 어린 나이에 여덟식솔의 힘든 안살림을 떠 맡았다 .
시어머니를 비롯해서 다른 식구들은 바깥일을 나가고 집에는 고분이와 여덟살짜리 막내시누이만 남았다 . 고분이는 당장 끼니를 장만해야할 준엄한 가마목현실에 부딪쳤다 . 음식감이 있다해도 이렇게 큰집의 하루 세끼를 만든다는건 쉬운일이 아니다 . 그런데 이 집 가마목일은 만든다는데만 그치는것이 아니였다 . 우선 장만해야 한다 . 감이 있어야 무엇을 만들게 아닌가 . 그날 고분이는 눈물이 글썽해서 안절부절 못했다 .
삼동은 사발밑굽이 들여다 보이는 멀건 장물죽으로 에때워왔다 . 이제부터는 일철이 시작되였기에 일군들이 장물만 마일수는 없는 노릇이였다 . 무슨 건덕지가 있는것을 먹어야 하겠는데 감자 시래기 , 호박 무우오가리와 산나물 말린것은 좀 있으나 쌀과 된장이 큰 걱정이였다 . 푸대죽에 한홉씩 넣는대도 보리고개까지는 어방 없었다 .
고분이는 친정에 손을 내여미는수밖에 없었다 . 그러나 친정집 구걸도 민망한 노릇이였다 . 부모들은 기력이 쇠진했고 큰오빠내외가 대여섯 조카들까지 상봉하솔의 살림을 하는데 조카들은 학교를 다니였다 . 친정은 친정으로서의 사정이 또한 있었던것이다 . 친정은 그 무슨 자선기구도 아니였고 대단한 부자도 아니였다 . 몇차례 구걸을 하니 올케의 눈빛과 말투가 곱지 않았다 . 어머니와 올케는 고분이 앞에서 티각태각 다투기까지 하였다 . 매번 된장 두어사발 , 보리쌀 혹은 좁쌀을 반자루 남짓 이고 돌아올때면 고분이는 가난설음에 눈물을 텀벙텀벙 흘렸다 .
고분이 부부는 자력갱생을 하려고 그야말로 비장한 분투룰 하였다 . 빌어온 장은 사흘못가고 가난구제는 나라님도 못하는 법인데 허구한날을 친정에 의지하여 살수는 없는 것이다 . 풀싹이 돋아서 락엽이 질때까지 고분이는 틈만 있으면 나물을 캤다 . 그것은 광풍폭우가 휘몰아쳐도 멈출수 없었다 . 남편은 밤에도 나가 땅을 뚜지고 호박이며 무우따위 푸성귀를 심었다 . 곡식에 물알이 들기 시작하면 고분이는 강냉이 수수 콩을 뜯어다 망질을 해서는 푸대죽에 넣었다 . 보리가 익기 시작하면 이삭을 뜯어다 말리웠다 . 하지만 풋보리 방아는 사람을 기진맥진하게 했다 . 보리방아는 찧어본 사람이라야 얼마나 힘든지를 안다 . 잉태중인 고분이가 땀을 철철 흘리며 방아를 찧을 때면 남편이 때론 슬그머니 와서 도와주었다 . 고분이는 땀과 함께 눈물을 이리씻고 저리씻고 하였다 . 보리방아는 워낙 두 사람이고야 찧는것이건만 고분이는 막내시누이를 데리고 사실은 혼자 찧었다 . 남편이 거들면 시어머니는 녀편네 궁둥이에 붙어 돈다고 줄욕을 퍼 부었다 . 대답질을 하면 왜장독장을 치고 꼬디를 쓰기에 시무룩이 웃으며 물러 났다 . 시어머니는 심사가 뒤틀리우면 막내시누이를 달고 뿌르르 오래비 집으로 달아났다 . 한번 가면 반달 한달씩 괄시를 받으면서도 배겨 있었다 . 아들과 며느리가 개여 올리며 잘 빌면 돌아오군 했다 . 시외삼촌은 누의를 천하에 둘도 없는 꼬디쟁이라고 하면서 밸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봤으면 좋겠다고까지 했다 . 시어머니 성미는 그렇게 괴벽 했다 .
고분이네는 궁여지책으로 소작 절반거이 선타작 ( 청곡을 소작료만큼 이랑수로 떼여낸후 먹는것 ) 을 하였다 . 물퉁이지만 우선 먹어야 했기에 . 달리는 용빼는 수가 없었던 것이다 . 호박잎이 피기 시작하면 고분이는 하루에도 몇번씩 남새포기를 살피였다 . 호박이 언제 달리나 감자알은 얼마나 컸는지 … 난들난들 호박잎이 고분이를 얼마나 울리고 애타게 했는지 모른다 . 하탄에 가서 장리쌀을 꿔다먹은 이야기는 더 하지 않는다 .
광복전해 고분이는 두번째로 또 딸애를 보았다 . 임신기에 입쓰림이 심해서 고분이는 맹물로 연명하며 죽다가 살아 났다 . 무엇을 좀 먹을만 하니까 백두산같은 보리고개가 앞에 놓였다 . 고분이는 배추잎에 된장을 발라 먹으며 막달까지 견디였다 . 그래도 법은 있어서 해산을 했는데 , 시어머니는 또 딸이라며 산모를 팽개치고 밭으로 나가 버렸다 . 남편이 시어머니에게 며느리를 시중하며 며칠만 끼니를 맡으라고 하자 시어머니는 왈칵 성을내며 또 막내시누이를 달고 오래비네 집으로 뿌르르 달아 났다 . 고분이는 해산한 날부터 그냥 하혈을 하며 가마목일을 죽기로 악을 쓰며 하지않을수 없었다 . 남편과 시누이들은 밭일이 한창 바쁜때여서 별로 도와주지 못했다 . 갓난이는 젖이 없어 좁쌀미음을 먹였는데 설사를 그냥 하다가 두달후에 죽었다 . 아이를 묻고 온 그날밤 남편은 고분이와 “ 우리는 이후 자식들과 절대로 꼬디를 쓰지 말자 .” 고 언약을 하였다 . 그 언약을 고분이는 한평생 참답게 지켰다 .
고분이는 그래도 모진세월을 견뎌냈다 . 광복이 되였다 . 그해 고분이네는 상탄으로 이사를 하였다 . 그사이 시동생과 두 시누이는 결혼을 하고 광복 이티후에 셋째시누이는 조선의용군 3 지대로 갔다 . 고분이는 동생들의 결혼잔치를 그것도 셋이나 누구정신으로 어떻게 치뤘든지 생각나지 않았다 . 시동생은 남편의 옷견지로 두루 갈무리를 했었고 시누이들은 자기옷을 뜯어 눈가림을 했다 . 이불도 뜯어 솜을 갈라서 어떻게 했었고 남편은 리자로 겨우 돈푼을 맡아 왔는데 해준것은 없고 리자돈은 굴러 빚만 망덕만해 지었다 . 후일담이지만 , 동서는 큰집신세가 하나도 없었다고 두고두고 원한을 잊지 않았다 . 셋째시누이가 군대로 간것도 가난한 집을 뛰쳐나간 일면도 있었다 . 셋째시누이는 사평전투에서 렬사로 되여 종이장 한장을 집에 보내왔다 . 시어머니는 아들 며느리가 제구실을 잘못해서 딸이 죽었다고 넋두리를 하며 대성통곡을 하였다 . 후에도 쩍하면 푸념을 하며 엉엉 울었다 . 고분이부부도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 그중 마음이 곱던 셋째시누이가 아니였던가 !
광복이 된 이듬해 남편은 구장의 눈에 들어 구공서에 가서 공작하였다 . 말하자면 출세를 한것이다 . 그런데 시어머니가 구공서로 쫓아가서 이찌도 행악질을 하는지 몇달 못하고 끋내 집으로 잡혀 왔다 . 늙은에미와 불쌍한 동생에게 고생을 ( 농사를 ) 떠 맏기고 저는 책상머리에 앉아 호강을한다는 것이였다 . 그는 빗자루로 책상을 뚜드리고 아들을 쥐여 패기까지 하며 왜장독장을 쳤다 . 구장은 이악스럽길 짝이없는 무식한 아낙네라며 혀를 내 둘렀다 . 이듬해 봄 구장은 남편을 연변전원공서에 추천하였다 . 청년이 전도유망한 인재라면서 당의 간부로 배양할 가치가 있다고 인정했든 것이다 . 남편은 도망치는 사람처럼 가만히 집을 떠나갔다 . 몇달후 고분이는 아이를 데리고 남편을 따라가서 시가지 살림을 시작했다 . 그러나 이번에도 그들은 시어머니에게 잡혀서 집으로 끌려오고야 말았다 . 성정부로 올라 간다고 했는데 , 남편은 겨우 2 년남짓 사업했을 뿐이다 . 그후로부터 남편은 간부명색을 띤 일은 일절 하지 않았다 . 고분이할머니는 오늘도 그때일을 생각하면 한생에서 제일 큰 유감이라고 하였다 .
광복이 된후 소작료가 내려가고 토개를 한후 호조조까지 , 가난한 사람들은 천지개벽의 번신을 하였다 . 고분이는 가마에 밥을 지을수 있었다 . 그런데 합작화운동이 불어치면서 밥가마 사정은 급전직하로 다시 긴장해 지었다 . 그것은 농업사에서 수입분배를 로동공수에 따라 했기 때문이다 . 상등로력이 하루 일을 하면 10 부 즉 한공을 버는데 고분이네는 로력이 남편 하나뿐이 였다 . 초급사가 시작되여 얼마후 막내시누이는 시집을 가고 시어머니는 풍을 맞고 자리에 누웠는데 목아래는 완전퇀환 ( 마비 ) 으로 손가락도 꼼짝 못하였다 . 게다가 올망졸망 아이가 넷이나 되여 고분이는 근본상 일밭으로 나갈수 없었다 .( 맏이인 큰딸은 소학교에 다녔다 .) 시어머니 곁에는 한시도 사람이 떨어질수 없었고 그리고 그 자신도 빈혈 간염 위염 신염 풍습 신경통 등 여러가지 지병을 얻어 자주 앓기 시작했다 . 입 수자에 따라 구량은 탈수 있었으나 표준이 낮아서 턱없이 부족했다 . 남편 하나의 공수로는 안로량 ( 로력공수가 일년 정액을 초과하면 초과공수에 따라 량식을 더 탈수 있었다 .) 은 고사하고 빚에 빚만 덮쌓였다 .( 주로는 량식대 ) 군입거리가 없는 아이들은 푸대죽을 먹고 그자리에서 허기들어 했고 사내애들이여서 먹기도 잘먹고 작란도 세찼다 . 늘 배가 차지않아 숟가락을 놓지않는 아이들을 보며 고분이는 가슴이 얼마나 쓰렸는지 모른다 . 학교 다니는 큰딸애는 점심사는 법이 없었다 . 그런데 , 아이들을 벌거벗겨 키울수는 없는거고 학교 다니는 아이는 연필이며 백로지를 사야했다 . 시어머니와 자신의 병치료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 애들은 맨발로 뛰여 다녔다 . 돈이 나올 구멍은 급한때에는 부득불 쌀되박을 파는수밖에 없었다 . 10 여리 밖에 하탄시가지가 있어서 장을 볼수 있는것이 그나마 큰 다행이였다 . 딸애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시어머니를 맏기고 고분이는 장보려 달려 갔다 . 돈잎이 될만한것이면 무엇이든 이고 갔다 . 산나물이며 푸성귀며 닭알이며 지어는 애들이 잡아온 고기새끼도 들고 갔다 .
보는바와같이 사정은 이러해도 마을에서는 군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 그것은 한마을에서 사는 사촌동서 두 사람이 더욱 그랬다 . 그들은 고분이는 워낙 거친일을 하기 싫어한다는둥 집체일은 하지않고 장마당은 잘 다닌다는둥 아프다는건 거짓말이라는둥 … 말새질이 많았다 . 사촌지간에 의가난것은 동중일에서 남편이 바른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 작은사촌동생이 초급사 회계를 했는데 어느해 그는 자기들 형제의 로동공수를 십여공 높혀 놓았다 . 사람들이 뒤에서 쉬쉬하며 의론이 있자 남편은 사촌동생과 함께 로력공수를 다시 맞췄는데 확실히 틀린것이 나타났다 . 남편은 사촌동생을 따끔히 타일러 준후 사람들에게는 전표를 잘못봐서 생긴 오차라고 설명을 했다 . 가랑잎으로 눈가리기 같은 어설픈 수작이였으나 그때는 두루 얼버무려 고비를 넘겼다 . 사촌동생은 그냥 회계를 했지만 앙심은 그때부터 생기였다 . 그들은 사촌형이 말썽을 만들었다고 넘겨 짚은 것이다 . 웬일인지 , 친척간의 앙숙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 그때로부터 고분이네와 사촌간은 늘 껄끄럽게 지냈다 .
초급사를 거쳐 고급사가 되고 공산주의로 가는 금다리ㅡ인민공사가 되여 공산주의 천당 , 지상락원이 바로 코앞에 다가왔다고 하였으나 고분이네 살림은 점점 더 어려워만 지였다 . 맏이인 큰딸은 전업학교로 가고 ( 경제난으로 고중을 포기했다 .) 아들 다섯과 막내딸은 초중 소학에 다녔는데 공부를 특수하게 잘해서 원근에 소문이 났다 . 자식들이 공부를 잘하고 품행이 좋아서 칭찬받는것은 자랑스럽고 기쁜일이였지만 그들부부의 부담은 그야말로 초부하 상태였다 . 사는것이 너무도 힘든 고역이였다 . 어떤 사람들은 아이들을 소학교 공부나 시키고는 일을 시키라고 권유하기까지 했다 . 하지만 그들은 추호도 그런생각은 하지않았다 . 그들은 “ 자식들을 위하여 살며 한생을 다 하리라 !” 맹세 하였다 . 그리고 그대로 하였다 ! 훗날 아들 다섯은 대학까지 나오고 막내는 조기련애로 학업을 실패했다 . 맏딸은 관내로 시집간후 자신의 힘으로 고급직함까지 따고 시부모를 잘 공대하여 큰집맏며느리라고 소문이 났다 . 이것은 후일담이다 .
사촌시동생은 “4 청 ” 운동에서 탐오건으로 졸경을 치르고 나 떨어 졌다 . 그후 그들형제는 회갑전에 모두 사망했다 . 과부가 된 사촌동서들은 워낙 심술이 곱지않은 사람들인데 그들은 고분이네를 실없이 미워하며 시기하고 질투 하였다 . 특히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집체생산에는 배돌이고 자본주의만 한다느니 ( 장보기를 두고 하는 말이였다 .) 그런 사람들은 량식도 주지말아야 한다느니 하며 험담을 하고 공격을 했다 . 지어는 터밭에 무얼 심었는가 보자며 자귀밟은 밭고랑을 파 보기까지 하였다 . 밭에서 고추씨가 나오자 “ 이걸 봐라 ! 량식은 없다면서 또 자본주의를 심었다 . 먹을게 없으면 집체에 손을 내 밀고 … 렴치짝도 없지 !” 하고 악담을 하였다 . 그 거동을 보고 마을사람들이 오히려 밉살스러워 했다 . 그런데 우습게도 며칠후 동서가 함께 상점물건을 훔치다가 당장에서 덜미를 잡혀 투쟁을 당하며 개골망신을 했다 . 그후 타고장에 이사를 갔는데 선후로 일찌기 남편들을 따라 갔다 . 마을에서는 별로 불쌍타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 이런것을 보면 사람이란 마음이 고와야 하고 동네인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 그들의 자식들은 산골에서 그럭저럭 살고있다 .
고분이네는 생산대 ( 마을 ) 의 배려로 공수가 높은일을 맡아 했다 . 담배모 키우기 , 황연불 보는 일인데 그것은 기술로동이여서 공수가 높았다 . 하루에 한공 5 부를 받았다 . 하지만 그런벌이는 석달남짓 밖에 안되였다 . 온실에 불을때며 1 리도 더 되는 두만강물을 지게로 걸어다 담배모를 키우는 일은 무척 힘드는 일이였다 . 고분이도 틈만 있으면 10 여미터 깊은 드레우물울 길어다 남편을 도왔다 . 하지만 남편은 공수를 더 벌기위하여 그외의 일도 더 맡아 하였다 . 이를테면 가까운 곳의 기음을 떼여 맡는다든지 담배모 나르는 상자를 짠다든지 하며 조금도 쉬지않고 기계처럼 일하였다 . 고분이도 틈나는대로 일손을 도왔다 . 사촌동서들은 “ 저봐라 ! 도거리라 하니까 죽을둥 살둥 모르고 일하는걸 .” 하며 입을 비죽거렸다 . 그러거나 말거나 고분이부부는 기를쓰고 일했다 . 남편은 온실안 빈틈에 고추 가지 도마토모를 붓기도 했다 . 뜨락에 심을것과 장마당에 팔 모종이였다 . 물론 또 말썽은 뒤따랐다 . 어느 한번의 대비판 회의에서 사촌동서들은 사촌시형을 냅다 비판하였다 . 우리 생산대에서는 제일 전형적인 자본주의라는 것이였다 . 남편은 “ 자본주의긴 하지만 자력갱생으로 살겠다는건 사회주의 겠지 ? 동네 여러분들이 뻔히 들여다 보듯이 아이들을 공부 시키자니 그렇게 할수밖에 없고 … 집체빚을 한푼이라도 적게 지고 … 우리도 목숨이 살자는건 착오가 아니잖소 ? 아이들은 크면 나라를 위해 일할거고 .” 하고 대답을 해서 회장에서는 호응이 일어났다 . 생산대 정치대장은 집체일을 잘하며 틈틈이 제집일을 하는건 자본주의가 아니라고 말한후 고분이네는 아이들이 일곱이나 되여도 생산대 옥수수대 하나 꺾어 먹는법이 없고 이삭하나 다치지 않지만 어떤집애들은 ( 사촌동서네 ) 쩍하면 남의 터밭이나 생산대 밭에 뛰여드는데 아이들 교육을 잘하라고 훈계를 하기까지 했다 .
고분이는 하탄시가지에 가서 강냉이가루를 꿔다가 농량에 보태기도 했다 . 갚을때는 물론 쌀을 준다 . 개 닭 돼지를 팔면 개인빚을 갚고 또 꾸어 썼다 . 그는 병든몸으로 악을 쓰고 삼복무더위에도 , 엄동의 겨울에도 장보려 다니였다 . 눈물나는 너무도 모진 고역의 계속이였다 . 그렇게 일곱자식의 공부뒤바라지를 하였다 . 그리고 출세를 시키였다 . 그들은 다진 맹세를 실현 하였다 .
자식들은 외지에서 월급생활을 하면서 부모를 방조하느라 했으나 모두 초년생이라 여유가 별로 있을수 없었다 . 잇따라 줄줄이 결혼이 닥쳤다 . 막내까지 시집을 보내고보니 남은건 말 그대로 빚과 골병뿐이였다 . 남들은 용케도 사명을 완수하였다고 하며 칭찬을 하였으나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 그것은 빚을 자식들에게 물려줄수 없다는 데서였다 . 하지만 태산같은 저 빚을 무슨수로 갚겠는가 ?! 병은 깊어가고 기력은 하루가 다르게 못해만 가는데 생산대 수입은 내리막 재주만 하였다 .
20 여년 공산주의를 향해 숨차게 달려 왔지만 해마다 차례지는건 실망뿐이였다 . 그사이 두번 풍작이 들었으나 한공에 겨우 70 전 , 량식대와 추렴새 따위를 떼고나니 제일 분배가 많은집이 백원 조금 더 되였다 . 평년은 한공이 2,30 전 , 몇차례 흉년에는 무슨 마이너스 30 전이라든가 … 문화대혁명 10 년에서 8 년이 마이너스를 했다 . 30 여호 마을사람들이 몽땅 빚을 지고보니 누가누구를 말할 형편이 못 되였다 . 제일 빚 꾸러미인 고분이네는 좀 “ 위안 ” 이 되였다 . 하지만 사람이란 빚은 갚아야 한다 . 고분이네는 생산대 빚이 3 천여원 , 신용사 빚이 2 천여원이였다 . 개인빚은 2 백여원이였다 . 보아하니 죽는순간까지 갚는다고 해도 다 갚을 재간이 없는 빚이였다 .
자식들이 하나 둘 집을 떠나면서 량식사정은 나아갔다 . 17 년을 온갖 심술을 다 피우며 누워있던 시어머니는 욕창 한곳 생기지 않고 깨끗히 앓다가 사망했다 . 고분이는 그만큼 정성을 다하여 시어머니를 돌봤든 것이다 . 마을에서는 효부라며 모두 감탄 하였다 . 막내딸 잔치까지 한후에는 밥상이 꽤 좋아 졌다 . 닭알이나 고기반찬도 때론 올랐다 . 하지만 빚을 생각하면 밥술을 든채로 멍해질때가 자주 있었다 . 이대로 계속 혁명을 한다는데 , 혁명은 언제가야 승리하며 부러운것이 없다는 공산주의는 어느때 보는건가 … 다른것은 다 그만두고 빚만 청산하면 우리에게는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라고 그들부부는 한탄 하였다 .
하늘이 무심하지 않아 그들에게는 살길이 열였다 . 개혁개방이 된것이다 . 1983 년 이른봄 고분이네 마을에서는 집체화의 틀을 마스고 개체를 실시하였다 . 고분이네는 제비쥐기로 가진 과수원을 욕심내는 사람에게 주고 3 천원빚을 일조에 탕감했다 . 원 , 이런 경사도 있나 ! 꿈인지 생신지 황홀하기만 했다 . 그해 농사는 어거리 대풍이 들었다 . 고분이네 수확은 잡곡까지 3 천여근이 되였다 . 남편은 키높히로 쌓아올린 낟알마대를 밤중에도 두세번 일어나서는 쳐다보며 허 허 허 웃곤 하였다 . 감자 무우 가을배추 파 마늘까지 처리한후 신용사 빚을 5 백원 갚았다 . 그후 5 년을 농사와 뜨락경제 ( 공예작물 ) 로 신용사 빚을 몽땅 청산했다 . 빚까지 다 갚고나니 두로인의 기맥은 탁 ! 풀리였다 삭신애 한점 기력이 없고 아프지 않은데가 없었다 . 령감은 때론 복통이 심하다며 2,3 일씩 달팽이처럼 꼬부리고 자리에 눕기도 했다 . 고분이는 워낙 지병인지라 자기는 원래 그렇거니 하며 하루하루를 지탱해 나갔다 . 여기저기 시가지에서 사업하는 아들들은 방산집이 아니면 세집에서 그런대로 말씽은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 령감은 나날이 쇠약해 가는 자신의 팔과 다리를 가끔 만져보며 개혁개방이 10 년전에만 실시 되여도 지주 뺨치게 되였을 텐데 … 하며 아쉬워 했다 . 지금와서 그들부부의 여한은 아들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지 못하는 것이였다 . 그러나 단념 하였다 . 이젠 정말 기력이 없었다 .
돌이켜 보면 , 시집와서 개혁개방전까지 44 년세월을 그러니까 회갑나이가 지날때까지 고분이는 식량고생 , 돈고생 , 병고생까지 너무도 모진 고생을 하여왔다 . 연변은 몰라도 하탄진에서는 제일 고생한 사람이 고분일 것이다 . 그가 흘린 땀물 눈물은 과연 몇동이가 될가 ?!... 그의 신체상의 아픔과 생활상의 고통은 말과 글로 형용할수 있겠지만 마음의 설음 , 슬픔과 쓰라림은 무엇으로 표현하랴 … 그야말로 일구난설 , 일필난기라 하겠다 .
좋은 세월이 왔다 ! 고목봉춘이라 할가 ?... 하지만 , 고분이부부에게는 그림의 떡이였다 . 그들의 한생은 다 지나간 것이다 …
양 로 원
1990 년 봄 , 고분이량주는 큰아들을 따라 시가지로 왔다 . 수중에는 집과 잡동사니를 처리한 돈이 천여원 있었다 . 이것인즉 그들의 전부의 재산이였다 . 밭은 세 맡겠다는걸 사절하고 마을에 공유지로 들여 놓았다 . 그들은 지난 수십년간 마을사람들의 신세가 크다고 생각했든 것이다 . 그들이 떠날때 , 전날밤 마을에서는 환송회를 했고 이튿날에는 수레에 태워 하탄시가지 역전까지 갔다 . 마을사람들은 거이 모두가 하탄까지 따라오며 여니 ( 배웅 ) 를 했다 .
큰아들은 2,3 년전부터 부모를 모시겠다고 했는데 그들이 동의하지 않았다 . 둘 중에서 하나가 죽으면 그때 모시라고 , 그래야 부담도 적고 간편하다는 것이였다 . 그런데 그것이 생각대로 되지않았다 .
큰아들네 세식구는 20 여평 두칸짜리 집에서 살았다 . 며느리는 개인식당에서 일을하고 손자는 초중학생이였다 . 그때만해도 사람들의 관념은 부모는 큰아들이 모셔야 한다는 것이였다 . 딸은 출가지외인이고 . 늙으면 아들을 따르는 법인데 그것은 아들들의 항렬에 따라 봉양을 책임졌다 . 이를테면 맏이가 책임을 못하면 둘째가 , 둘째가 안되면 셋째 … 이런식이였다 . 만약 형님들이 있으면서 지차가 모시면 사회여론에 오르고 말밥이 되였다 . 본인들도 광채롭지 못한일로 생각했다 하지만 고분이량주는 아들과 합가를 하지않았다 . 림시방편으로 아들집 근처에서 세집을 맡고 량주가 기거를 하였다 . 사정이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든 것이다 . 다른 아들들은 큰형이 어떻게 처사하나 눈치만 살피는듯 , 그것은 며느리들이 더욱 그러는것 같았다 .
시가지로 와서 두해만에 령감은 한생을 마치였다 . 제일 고통스럽다는 이선암인가 하는 병이였는데 령감은 신음소리 한마디 하지않고 땀만 철철 흘리다가 사망하였다 . 그는 림종이 가까워 올때 로친의 손을 맥없이 잡고 “ 고생이 많았지 … 수고했어 … 아이들을 애 먹이지 마우 .” 하고 유언을 당부했다 . 그리고 혼미하더니 사흘후에 조용히 숨이 사라졌다 .
고분이할머니는 큰아들집으로 들어 갔다 . 짐이래야 이불한채에 옷견지따위를 싼 보따리 하나 그리고 작으마한 낡은 려행가방 하나뿐이였다 . 그속에는 진통제 소화제 따위 상용약품 몇가지와 돋보기 치솔 수건 머리빗 숟가락 같은것이 들어 있었다 . 배운것 , 본것 없이 무지막지 막돼먹은 맏며느리는 퍼랄수구 ( 페물수구 ) 한족로친을 불러다 남비며 사발이며 숟가락까지 왈카당 절카당 팔아버렸다 . 남어지는 불을 처박아 버렸는데 마치도 무슨 분풀이를 하는것 같았다 .
그는 큰시누이부부와 시동생들 그리고 동서들 앞에서 항상 렬등감을 느끼였다 . 그들은 자기보다 여러차원 높은 사람들이였든 것이다 . 하여 그는 형제들이 모이는걸 제일 싫어 하였다 . 명절이나 무슨일사로 모이기만하면 그는 꼭 사단을 일쿠었다 . 음식상이 다 갖추어진 후에야 펄쩍 뛰여들기가 일수였고 ( 그때는 하탄에서 살았음 ) 자기는 무슨일이 있다면서 또 부산을 떨며 먼저 달아났다 . 어떤때는 괜히 아이를 뚜드려 패며 소란통을 이르키기도 했다 . 그의 눈에 제일 만만한것은 산골에서 농사짓는 막내시누이부부 였다 .
큰아들이 이런 개차반같은 녀자에게 장가들게 된것은 다리를 살룩살룩 절고 집이 가난하고 부모에 동생들이 여럿이여서 부담이 많다는 약점 때문이였다 . 그리고 서른이 거이되는 로총각이여서 장가들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 큰아들이 다리는 다섯살때 두엄무지 쇠줄을 밟은것이 염증을 이르켜 그렇게 되였다 . 그때 다리를 찍어야 한다고해서 고분이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 다행이 느릎나무뿌리껍질로 반년여 치료를 해서 다리를 살렸다 .
큰며느리는 시집온후 기실은 제일 부담없이 제살림을 했다 . 명색이 큰며느리라는 사람이 군일마다 이핑게 저핑게 요리빠지고 저리빠지면서 떡이나 먹고는 달아 났다 . 때로는 무슨 심통이 났는지 아예 오지도 않았다 .
다섯째아들의 잔치 때에는 신부가 받은 큰상을 차 엎겠다고 날뛰다가 제지를 당하니 자기를 부등켜 안고있는 큰시누이 (13 년 이상임 .) 파마머리를 잡아 끌고 뜯어 놓았다 . 잔치하객들이 겨우 떼여 놓으니 이번에는 큰시누이남편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틀어쥐고 얼굴을 할퀴자고 발광하였다 . 큰시누이남편이 “ 맏며느리라는 사람이 군일이 될수록이면 잘되게 앞뒤를 살필대신 이게 무슨 행실인가 !” 하고 나무랬기 때문이다 . 그는 제밸을 못이겨 방바닥에 쭐 늘이져서는 헐떡이였다 . 사람들은 혀를 내 휘두르며 천하에 둘도 없는 망졸이라느니 정신이 나쁜것 같다느니 하면서 끌끌 혀를 찼다 . 그가 그런 어처구니 없는 행패질을 한것은 넷째까지는 잔치가 자기와 비슷했거나 지어는 못하기도 했지만 다섯째의 잔치가 자기때보다는 훨씬 좋다는 데서였다 . 자기는 소학교밖에 다니지 못한 산골농촌녀자라고 업신여긴다는 앙심을 늘 품고 있었든 것이다 . 그는 부부가 대학에서 선생질하는 셋째시동생네와도 앙숙이였다 . 둘째시동생네 ( 두 사람 모두 대학출신 ) 는 수월하고 겸손한 ( 두살 위지만 자기한테 예 , 예 한다고 ) 사람들이라고 좋게 보았다 . 하지만 넷째와 다섯째네는 코풀레기라느니 제노릇만하는 것들이라느니 하며 째째하다고 밉게 보았다 . 주로는 자기를 위촌하지 않는다고 불만이였다 .
시정부 간부인 큰아들은 매우 똑똑하고 정직하고 젊잖은 사람이였다 . 그는 전통적 보수적 관념을 갖고 있어서 부모는 자기가 꼭 책임을 져야하며 형제들에게는 직접적 책임이 없다고 인정했다 . 그들이 스스로 부모에게 효성하며 간혹 자기를 방조하는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 그러나 이면에서 안해의 생각은 매우 현대적이고 급진적 ( 당시로는 ) 이였다 . 그는 아들들이 ( 딸은 부쏸 . 헴에 넣지않는다 . 책임이 없다는것 .) 무조건 돌아가며 부모를 모신다든지 생활비를 고루 병탐한다든지 ( 고루 풍기는것 ) 해야한다고 인정했다 . 친정어머니 ( 남편은 일찍 사망 . 시부모를 학대한 전형인물 .) 와 동생들은 그의 관점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부추겼다 . 그런데 시동생부부들은 남편과 같은 견해들이였다 . 그들은 형님의 로고를 마음속으로 잊지 않으면 된다고 , 혹 여유가 있으면 물질상 적당한 표시를 하는것도 좋고 … 이렇게들 생각하고 있었다 . 큰아들이 아닌가 ! 그러니 책임지는것은 천경지위라는 것이였다 . 그것은 고분이할머니도 그렇게 생각했다 . 좋든 굿든 큰아들을 따라야 한다고 법으로 믿어왔던 것이다 .
큰아들은 어머니를 모셔온후 살뜰히 보살펴 드리였다 . 가마목에서 쉬게하고 닭알을 삶으면 꼭 제손으로 발라 드렸다 . 병원에 모시고 가서 전면검사를 하니 모병은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 내과주임의사는 집에서 대증치료나 하라면서 10 여가지 약을 알려 주었다 . 그는 가지가지 약물을 갖춰 놓은외에도 험방책에서 토방법을 선택하고 보건동작도 어머니에게 가르켜 드렸다 .
아들의 효성에 고분이할머니는 감격과 기쁨의 눈물을 자주 흘렸다 . 령감과 지나간 인생이 자꾸 떠 올라 또 눈물이 흐르기도 했다 . 고분이할머니에게는 체질적으로 무슨 눈물이 그렇게 많은지 눈물을 줄줄 잘 흘렸다 . 정감이 풍부하고 마음이 여리였든가 ?... 좋고 궂은 눈물겨운 사연이 너무도 많았든가 !… 사람은 그 누구나 기왕지사에 대하여 어떤일은 너무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 오늘에 충실하며 래일을 기대하여야 한다 . 이것은 유익한 인생태도다 . 고분이할머니도 이런도리는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 그러나 생각처럼 되지않는 심정이였다 . 하여 그도 때론 안타깝기도 했다 . 그렇지만 한생을 거이 눈물속에서 살아온 그를 눈물이 헤프다고 하여 나무릴수야 있겠는가 … 하여튼 , 그의 주름진 얼굴에서는 눈물이 방울방울 자주 흘렀다 . 그런데 이것은 그이의 커다란 허물이였다 .
나무는 고요히 서 있자고 하지만 가지많은 나무에 바람 잘 새가 없다 . 산골에서 농사짓던 막내딸부부는 하탄시가지로 올라와서 뜨내기 일을 했다 . 말하자면 그들로서는 쌰해를 한것이다 . 사위는 오토바이삼륜을 몰고 딸은 도라지짠지를 해서 팔았다 . 그런데 사위녀석이 노래방에 드나들며 바람을 피우기 시작해서 하루건너 싸움질을 해대는 모양이였다 . 워낙 일하기 싫어하고 건달기가 있어서 고분이량주는 꿈도꾸지 않았는데 막내딸이 녀석과 한덩이로 굴러 다닐줄이야 ! 녀석이 손이야 발이야 빌며 허혼을 해달라고 간청을 하고 맹세를 하니 잔치를 해 주고 말았는데 그 꼬락서니였던 것이다 .
볼갑스럽고 표독스레 생긴 큰며느리는 공연히 들펑질을 하며 불손했는데 , 시어머니가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리는것을 제일 짜증나 하였다 . 그는 “ 누가 죽었는가 ! 누굴 죽으라고 우는가 !” 하고 악청을 지르며 내놓고 면박을 했다 . 시어머니가 내가 스스로의 생각에서 공연히 그런다고 대답하면 나는 그런 꼴 보기 싫으니까 다른아들집에 가서 실컷 울라고 … 우리집에는 이만있었으면 되였다고 … 거침없이 내 쏘는 것이였다 . 그러던 차 마침 막내딸네가 사단이 생기니 며느리는 딸께로 가 보라고 , 가서 지키라며 막 떠 밀며 쫓았다 . 늙어빠진 장모가 제집으로 오자 막내사위는 짓뿌디하기 짝이 없었다 . 그는 술을 물켜듯 하며 집이고 나발이고 다 짓부셔 버리겠다고 하며 지어는 도끼까지 들고 행패질 하기가 일수 였다 . 어느날은 밤중에 녀편네와 장모를 쫓아 내기까지 하였다 . 하여 그들 모녀는 그날밤 친척집에 찿아가서 밤을 새웠다 .
고분이할머니가 작고 낡은 려행가방을 들고 딸집으로 간지 한달남짓 후 였다 . 큰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 . 큰아들 장례후 둘째아들이 어머니를 모셔 갔다 .
둘째아들 때문에 당년에 고분이는 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 그것은 둘째가 중학교에 다닐때다 . 학교에서 갑자기 병이 났는데 숨이 막히면서 가슴이 터진다고 아이는 땅바닥에서 마구 뒹구는 것이였다 . 하루에도 몇번씩 발작을 하는데 하탄진 병원에서는 무슨병인지도 모르겠다고 하였다 . 큰병원으로 가는것은 옳지만 돈이 있는가 ! 그때 울면서 사정사정 꾼 돈이 신용사 빚이다 . 둘째는 석달넘게 입원치료를 받고 병이 떨어지긴 했지만 무얼 먹으면 목에 걸린다고 하면서 가슴이 막힌다고 하였다 . 하여 입쌀을 꿔다가 미음을 먹이며 3 년여 각별히 돌봐야 했다 .
둘째는 마음이 수월해서 자기것을 아끼지 않았다 . 돈도 그랬고 물건도 그랬다 . 옴니암니 따지는 성미가 아니였다 . 하지만 참을성이 없고 단순한것이 큰 결함이였다 . 며느리는 젊은사람이 한없이 무던했다 . 그런데 불행하게도 습관성류산이였다 .
새끼를 미워하는 부모는 없다 . 열손가락을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것이 없듯이 자식에 대한 정은 똑 같았으나 그러나 길고 짜름은 있다 . 고분이량주는 자식들의 장점과 단점을 잘 알고 있었다 . 산전수전 세파를 많이 경험한 그들은 자식들을 성가 시킨후 아들 며느리들에 대하여 평론이 있었고 견해가 있었다 . 셋째네는 아들은 원칙을 아는 사람이지만 중병으로 앓는 몸이고 며느리는 사회적으로 그리고 가정적으로 , 친정까지 … 부담이 많은 사람이였다 . 넷째는 말은 잘 해도 나약한 성격이고 며느리는 허욕이 많은데다가 시부모는 근본상 자기와는 상관없는 늙은이들로 인정하고 있는 사람이였다 . 즉 , 책임감같은건 꿈도 꾸지 않는 사람이였다 . 그들은 제노릇만 하는 사람들이였다 . 다섯째는 어떤가 ? 아들은 아직 순진하고 천진 했다 . 그런데 며느리는 쥐방울만한것이 앙큼하고 녕악스럽기까지 했다 . 솔직히 말해서 둘째네가 제일 마음에 들었으나 법도가 있는거고 큰아들의 얼굴을 지켜줘야 하지 않겠는가 . 그리고 여느아들들은 당시 여건이 안되였다 . 모두가 공령이 짧아 박봉인데다가 살림을 시작한 초기여서 아직은 터도 잡히지 못했다 . 그리고 코구멍만한 셋방살이에 끼울 렴치도 형편도 못되였다 .
비록 마음에 싶던 둘째네 집으로 오긴 했으나 고분이할머니의 눈물은 더욱 많아지였다 . 밥상에 오른 닭알을 보고도 목이 칵 ! 메고 눈물이 주루루 흘렀다 . 하여 밥상에 마주 앉았다가도 그대로 물러나기도 했다 . 어머니가 시도 때도 없이 비감을 억제 못하니 둘째는 위안하던데로부터 신경질을 내기 시작했고 그다음은 싫증을 내며 때로는 어머니를 미워하기까지 했다 . 물론 다른 자식들도 어머니의 눈물을 좋다고 한것은 아니다 . 안해가 어머니 심정을 리해 하라고 , 리해하면 될거 아니냐고 수차 권고해도 효과가 별로 없었다 . 오히려 자기와도 신경질을 벌컥 벌컥 썼다 . 안해는 워낙 듬직한 성미여서 더는 상관하지 않았다 . 그는 자기몸도 불편할때가 자주 있었으나 거기에 대해서는 등한하고 시어머니는 극진히 진심으로 보살폈다 . 그가 이렇게 한것은 천성도 관계가 있겠지만 수양과 품덕 때문이였을 것이다 .
둘째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진정어린 정성이 보람이 있었는지 , 시어머니는 우정 상탄에 가서 단오날 아침에 익모초를 베여다 고약을 한단지나 만들어 며느리를 먹였다 . 그러기를 련속 2 년후 그는 임신에 성공하여 아들을 낳았다 . 시어머니가 기특하고 장하다고 칭찬하니 그는 어머니 덕분이라며 감사해 하였다 .
둘째며느리는 아이가 소학교에 다닐때쯤부터 고혈압과 관심병으로 앓기 시작했는데 때로는 몹시 고통스러워 했다 . 그사이 다섯째 아들은 단위가 파산되여 곤경에 처했는데 이악스런 며느리는 매일 남편과 바가지를 긁으며 싸움질을 하여 대드니 끝내는 리혼 하고야 말았다 . 얼마후 다섯째는 심수시에 가서 한국기업에 들어갔는데 그만 교통사고로 죽었다 . 얼마후에는 막내사위가 술을 먹고 삼륜을 몰다가 길아래 웅덩이에 처 박으며 죽었다 . 딸은 그후 한국으로 시집을 갔다 .
불상사가 거듭생기자 사회에서는 늙은이가 오래 사는것이 일이 아니라는둥 , 좋지않다는둥 하며 고분이할머니를 빗대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 지어는 늙은이는 일찌감치 죽는것이 복이라고 꺼리낌없이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러면 , 자기들은 환갑이 지나면 곧 죽을텐가 ?!
둘째며느리가 자주 앓자 고분이할머니는 양로원으로 가겠다고 하였다 .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당시에는 세 아들과 세 며느리들은 양로원에 가는것을 매우 체면이 깎기는 일로 생각하였다 . 자식들이 뗑 ! 하고 하늘에 올라붙자 고분이할머니는 더 말하지 않았다 . 그는 령감의 림종시 부탁을 항상 명심하고 있었든 것이다 . 고분이할머니는 죽을 생각도 하여 보았다 . 그러나 자기가 그렇게 처신을 하면 자식들의 얼굴이 무엇으로 되겠는가 ! 그는 죽을수도 없었다 .
지금의 상황에서는 넷째가 어머니를 모시는 것이 가장 합당하였다 . 그런데 넷째는 안해를 설복할 재간이 없었다 . 둘째며느리는 심장병으로 앓으면서도 계속 시어머니를 모시겠다고 고집하였다 . 형편이 이렇게 되자 남편이 중병으로 앓고 있는 셋째며느리가 자진해서 시어머니룰 모셔 갔다 . 그는 자기가 끝까지 모시겠다고 결심을 내렸든 것이다 .
작고 낡은 려행가방을 들고 시어머니가 보따리를 든 셋째며느리를 따라 택시 타러 나갈때 둘째며느리는 따라나가며 눈물이 핑 돌아 하였다 . 그는 시어머니 손을 꼭 잡고 “ 며칠후 좀 낳으면 모시러 가겠어요 . 그간 무사히 계세요 .” 하고 당부하였다 . 그런데 그가 먼저 구천으로 갈 줄이야 !...
고분이할머니는 돌째며느리와 16 년을 함께 살았다 . 시고부가 16 년을 하루같이 화목하게 살게된 비결은 며느리가 “ 리해 , 존경 , 관심 ” 을 좌우명으로 했기 때문이다 .
어느 한번의 표창대회에서 둘째며느리는 이렇게 말하였다 .
“ 솔직히 말해서 로인을 좋아할 젊은이는 없을 겁니다 . 더욱히 사랑한다는 거창한 말을 나는 믿지 않아요 . 그러나 리해하고 , 존경하고 , 관심한다는 말은 승인 합니다 . 그렇게 하는 며느리들이 많지요 . 나도 그렇게 하기 위하여 노력 합니다 .
사람은 늙으면 아이가 된다고 하지요 . 정말 그런것 같아요 . 어느 의사와 자문해 봤는데 정말 그렇대요 . 우리도 그 자연법칙을 어길수 없대요 . 로인님들의 정상적인 거동은 맑은정신이 지배한 거고 실수 , 착오는 흐린정신 때문이죠 . 이런 분들과 우리 젊은사람들이 좋으니 궂으니 무슨 시비를 합니까 !...
그분들은 우리를 사랑 했습니다 . 그의들의 로고와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들의 오늘이 있는게 아닙니까 . 부모님을 포함해서 선인들의 은덕을 다 보답할수는 없습니다 . 영원히 그럴 겁니다 .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 사랑은 없다고 하지요 . 하지만 로인님들의 여생을 책임지고 자기 나름껏 최선을 다해 보살펴 드릴수는 있어요 .”
그의 발언은 회장에서 오래동안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
……
고분이할머니는 양로원 뜨락의 나무밑 걸상에 앉아서 저 멀리에 있는 시가지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식사시간도 잊고 눈물을 흘리기가 일수였다 . 처음몇번은 복무원들이 알은체를하며 동정의 말도 몇마디 하던것이 얼마후부터는 “ 밥 먹어요 !” 하고 꽥 소리치고는 관계치 않았다 .
오늘도 고분이할머니는 양로원 뜨락의 나무밑 걸상에 앉아서 저 멀리에 있는 시가지를 바라보았다 . 그곳 서쪽하늘에는 저녘노을이 곱게 피여 있었다 . 마음은 허전하고 쓸쓸하기 그지 없었다 . 뜨거운 눈물이 걷잡을수 없이 또 주루루 흘러 내렸다 …
지금 그는 가장 큰 소원이 자식들에게 더는 별 탈이 없을것과 자기가 하루빨리 령감곁으로 가는 것이라고 했다 . 비록 말은 그렇게 해도 자손들이 번창하며 잘되는것을 오래오래 보고싶은 것이 사실은 진솔한 마음이다 . 양로원이 어떠어떠하게 좋다느니 어쩌느니 하고 말들은 잘해도 그것은 삼자들이 하는 말이고 그의 경우에는 절대로 그것이 아니였다 . 고분이할머니에게 있어서 양로원은 부득이한 선택이였다 .
고분이할머니와 같은 세대들은 삼대 사대 … 손군들을 눈앞에 보며 , 만지며 , 정으로 , 오래오래 사는것이 인생 최대의 락이다 . 그리고 간절한 바람이다 . 그러나 뜻대로 되는 인생이 몇이나 되는가 ! 그리고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다 . 그것은 누구나 모두 .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라 어쩌라 설교를 하지만 고분이할머니는 그렇게 할수 없었다 . 생명의 본능적인 욕망도 욕망이겠지만 후대에 대한 기대와 사랑이 너무도 절절했든 것이다 . 그에게는 자신에 대한 그어떤 보답같은것을 바라는 마음은 조금치도 없었다 . 시체말로 “ 대공무사 ” 라고 할가 , 자신의 일체를 깡그리 자손들에게 바친 , 바치는 고분이할머니 였다 .
어른들의 마음은 모두 그렇다 . 그런이들을 후손들이 어찌 효도치 않겠는가 ?!...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고 세상보다 넓은것이 , 해님보다 더 따뜻한것이 천하 부모님들의 자손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다 !… 힘으로 안되면 마음으로라도 자손들을 생각는것이 ( 돕자는 것이 ) 로인들의 유일무이한 마음이다 … 고분이할머니의 마음은 그랬다 . ㅡ
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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