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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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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그러진 기와집
2020년 09월 11일 14시 03분  조회:782  추천:0  작성자: 회령
         중편실화소설
                                               찌그러진 기와집 (신생)
                                                                                                                     회령
    나는 8월 중순께 초평향에 가 보기로 작심하였다.
   그 곳은 나의 청춘이 죽은 곳이며 나의 인생이 바뀌게 한 곳이다. 그 고장에 가 보기로 결심하기까지는 심각한 고민이 여러번 있었다.
 
   63년 여름 나는 대학 정치학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초평공사(향) 공청단 서기로 현당위 조직부의 특별한 배치를 받았다. 그때, 국가에서는 우리를 중학교 선생으로 배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런데 내가 공사공청단위 서기 벼슬자리에 배치를 받게 된 것은 대학시절에 벌써 입당을 하였고 학습을 잘 했고 품행이 단정했고 신체가 건장하고 재질이 총명했기에, 이를테면 덕, 지, 체가 전면적으로 발전한 청년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당에서는 배양전도가 있다고 본 것 같다.
   초평공사는 두만강변에 자리잡은 궁벽한 산골이였다. 손바닥만한 논밭뙈기 몇개는 두만강 버들방천 안쪽으로 있고 나머지는 모두 한전인데 골짜기 바닥과 산기슭에 널려 있었다. 다섯개의 산줄기는 두만강으로 내리 뻗치다가 멈췄는데 그 끝마다 마을이 앉아서 다섯개의 대대(촌)가 되였다. 매개 대대는 골짜기로 들어가면서 두세개씩 혹은 서너개씩 자연툰을 가지고 있었다. 마을마다 이름은 있었지만 그때는 아무대대 1대, 2대(생산대. 지금의 촌민소조.)하고 불렀다. 다섯갈래의 골짜기는 서로 비슷했는데 넓고 깊었다. 골짜기 마다 꽤 큰 냇물이 흘렀다 제일 크고 경치가 좋은 골짜기로는 초평대대가 차지하고 있는 소금강골짜기였다. 조선의 금강산처럼 아름답지만 작다고 해서 소금강이라고 한다고 했는데 구불구불 내리 뻗은 량옆 산줄기에는 벼랑과 기암괴석이 송백과 함께 무척 많았다. 단풍나무, 머루, 다래, 알구배, 찔구배, 돌배, 도라지, 함박꽃, 개나리, 찔레꽃, 천지꽃과 개살구가 제철을 맞아 만개할 때는 그 풍경이 그야말로 그림처럼 화려했다.
   초평공사는 한갈래의 신작로와 한갈래의 전화선으로 바깥세상과 통하였다. 량옆에 있는 린접 공사와는 7, 80리 사이고 현성과는 100여린데 날씨가 순탄하면 하루에 한번씩 뻐스가 왔다갔다. 전기가 없어서 두달에 한번 오는 농촌순회방영대는 저들이 가지고 온 찌프차 한쪽 뒤바퀴를 빼고 무슨 장치를 한후 전기를 내서는 영화를 보여주었다.
   이곳에서는 제일 큰 마을인 초평대대는 공사소재지였다. 거기에는 공사위원회(향정부) 초중학교 소학교 공급판매합작사(공소사. 상점.) 위생원(병원) 량잠, 림산작업소, 파출소, 우정국 등 단위들이 있었는데 벼짚이나 조짚으로 이영을 한 흙집들이 였다.(향정부와 학교 공소사는 토피집이였다.) 전 공사의 모든 집들은 초가집들인데 쇠여빠지는 버들버섯 같이 방정한 집이란 한채도 없는것 같았다. 그런데 초평대대에서 사무실로 쓰고 있는 집만은 8간기와집으로 공사에서 유일한 기와집이 였다. 40년이 거이 되는 집이다보니 헐망하긴 했으나 그래도 기본상 온전한 편이였다. 이 집은 현성에서 살던 지주의 마름이 살던집인데 마름은 광복이 터지자 지주와 함께 남조선으로 도망을 갔다. 집은 마을의 공회당, 구공소(구정부), 촌공소, 초, 고급사 사무실, 집체식당 등을 거치며 력사적 공헌을 하다가 다시 대대사무실로 되였다.
   산골사람들은 대체로 순박하고 말머리가 무겁고 듬직한 반면에 생기발랄함이 부족하다. 여기 사람들도 그랬다. 특히 10여년을 집체화 틀 속에 같히워 습관되고 살다보니, 그것도 점점 더 가난해만 가는 세월속에서 살다보니 사람들은 수심만 깊어가고 의욕은 없이 자기를 잊고 주는 대로 먹고 시키는 대로 일하는 수동적이 되여버렸다 한마디로 초평공사는 편벽하고 가난하고 또 몹시 적막한 곳이였다. 마을은 20여개가 되였으나 인구는 겨우 3000여명 밖에 안되였다.
 
   현당위 조직부장과 현공청단위 서기는 나와 담화할 때 간고한 곳일수록 단련과 성장에 아주 유리하다고 하면서 사업을 적극적으로 잘 하라고 고무하고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사업을 잘하면 광명한 앞길이 열린다고 하였다. 벼슬길에 오른 사람치고 승급을 꿈꾸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그때의 나의 머리 속에는 당과 모주석의 은덕에, 국가와 인민의 기대에 보답하여야 한다는 사상과 결심만 꽉 차 있었다. 그때의 나는 참으로 순결하고 단순하였다.
   초평공사보다도 더 궁벽한 두메산골에서 자란 나는 확실히 당과 모주석의 은덕과 나라와 인민의 배려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나는 초, 고중과 대학을 국가조학금을 받았기에  공부를 할 수 있었고 대학에서 병으로 몹시 앓을 때 국가의 보조를 크게 받았다. 그리고 부모님과 형님내외의 지극한 정성과 회생을 잊을 수 없다. 나도 물론 많이 분투를 했다. 초중때는 여름방학이면 약뿌리를 캐고 목이버섯(무얼)을 뜯어말리워 공소사에 팔았다. 겨울방학에는 햇싸리나무를 해서 공소사에 근을 떠서 팔았다. 나라에서는 싸리나무를 사다가 배광주리거나 공정판에서 쓰는 툴란재 (흙광주리)를 만든다고 했는데 싸리나무 수요가 많았다. 우리 또래들은 그런 부업을 해서는 학비에 보탰다. 고중과 대학시절에는 여름방학, 겨울방학을 시내에서 품팔이를 하였다.
   나는 당의 교시대로 가장 간고한 곳으로, 가장 수요하는 곳으로 가서 사업을 잘하는 것으로 하늘 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당과 국가와 인민, 그리고 부모형제의 이 모든 은덕에 보답하리라 마음속에 굳게 다지고 있었다.
   그때도 극히 개별적이 였지만 비밀리에 뒤문거래를 하는 현상이 있었다. 만약 내가 조금만 “활동”을 하면 모교에 분배 받거나 큰도시에 분배 받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도와 주겠다고 자청하는 처녀도 몇이 있었다. 그러나 나의 포부와 결심은 동요가 없었다. 나는 뒤문거래를 비렬한 행위로 보며 경멸하였다.
 
   내가 초평공사당위 서기 남명덕의 사무실에 들어서니 남서기 외에 또 한명의 중년남자가 있었다. 남서기는 나를 한번 힐끔 쏘아보고는 머리를 돌리고 표표히 않아 담배를 피웠다. 그와는 반대로 중년남자는 일어나서 따뜻하게 악수를 하여주고 당위 부서기 겸 조직위원 김응수라고 자기소개까지 하였다. 그는 공사공청단위 서기가 없어서 자기가 대신 맡았댔는데 참 잘되였다며 무척 반가워 하였다.
  “그럼 얘기를 하오.”
   남서기는 성난 사람처럼 뱉아던지 듯 차겁게 한마디를 하고는 쥉쥉 나가버렸다. 감때 사납고 표독스럽다는 인상이 들었다.
김응수는 너그럽고 인자한 사람이라는 것이 첫눈에 환히 알리였다.
   그는 나에게 가정형편이며 친척이며 나의 경력을 자세히 물었다. 그리고 우리 집이 있는 삼도구공사 정황에 대해서도 이것 저것 여러면으로 묻다가 나중에는 애인이 있는가고 묻기까지 하였다. 이어 김응수는 자기경력을 자세히 들려준후 공사간부들로부터 각 단위들과 대대, 생산대에 이르기 까지 전 공사의 일반정황을 손금보 듯 환하게 소개하여주었다.
   그는 공사의 청년단사업을 어떻게 잘 할 것인가에 대하여 나와 진지하게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공사의 여러가지 사업들에 대해서도 하나하나 손가락을 꼽아가며 조리 있게 설명해 주었다. 하여 나는 공사의 사업에 대하여 대체적인 륜곽과 체계를 잡을 수 있었다. 김응수의 담화는 나에게 선생님의 가르침 같았다.
 
   베는 석자라도 틀은 틀대로라고 공사는 보잘것 없었지만 부서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공사에는 부련회라는 부서도 있었는데 주임은 리련옥이였다.
   련옥이는 현성에서 나서 자란 시가지 사람으로 고중졸업생이였다. 그의 아버지는 현법원의 원장이고 어머니는 현당위판공실 주임이였다. 련옥이는 대학시험에서 미끌어진 후 집에서 놀다가 현병원 호리원(청소공)으로 취직을 했는데 얼마후에는 초평공사 부련회주임으로 왔다. 그는 이미 결혼을 하였으나 아직 아이는 없었다. 남편은 군인으로 패장이라고 했는데 대련에서 근무한다고 하였다. 련옥이는 이 곳으로 나보다 두달 남짓 먼저 왔었다. 그는 탄력있는 맞춤한 키꼴에 해사하게 생겼는데 잘 웃고 잘 떠들고 노래와 춤을 잘하고 멋을 부리기 좋아 했다. 말은 청산류수고 문장도 괜찮게 썼다. 술도 마시고 우스개로 담배도 두어모금 빨고는 캑캑거리며 호들갑을 떨었는데 그럴 때면 김응수를 비롯하여 나이가 지긋한 공사간부들은 얼굴을 돌리며 찌프리였다. 련옥이가 과분하게 우스개를 피울 때면 같은 청년세대인 나는 민망하기 그지 없었다. 공사간부들 중에서 무장부 문부장만은 련옥이와 희닥질을 하며 장난을 하였는데 그럴 때면 남명덕은 눈귀에 잔주름을 지으며 재미있어하였다. 그때는 부드럽고 정이 가득한 눈길로 련옥이를 바라보며 “천생 부녀주임감이야!”하고 칭찬을 하였다. 련옥이는 입당적극분자 였다. 맨 남자들 뿐인 공사간부들 속에서 련옥이는 말그대로 생기가 넘치는 일점홍이였다.
 
   나는 사업을 패기 있게 본때스레 밀고 나갔다. 나에게는 전승못할 난관이 없었다. 정확한 사상과 왕성한 혈기, 포만한 정열과 지혜, 굳센 의지는 사업효률과 성과를 높여주었다.
   당위 서기 남명덕은 나에게 완성불가능의 하향사업임무를 줄 때가 많았다. 례하면 어느대대의 모내기를 5월 중순 전으로(5월 하순에 시작 함) 끝내라 하거나 세벌김을 반달 혹은 지어는 한달 앞당겨 끝내라고 명령하였다. 더욱 한심한 것은 사원들의 민식이 겉곡으로 200근도 않되는데 여량을 몇톤 바치게 하라는 것이였다. 식량이 떨어지면 반소량(량잠에서 꿔다 먹는것)을 먹게 할 것이니 여량임무를 견결히 완성하라고 하였다. 남명덕이 나에게 일을 시키는 본때는 팥쥐에미 배씨가 콩쥐에게 일을 시키는 것과 꼭 같았다.
   남명덕은 너무도 감때 사납고 표독해서 공사내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고 현내외에서도 널리 “왜놈십장”, “일본감독”, “토비”, “남패천”(해남도에서 유명했던 악패토호) 이라고 조명이 났다. 산골사람들이 보기에는 높은 어른인 공사당위 서기에게 이런 심각한 별호가 붙은 데는 유래가 있었다. 내가 들은 몇가지만 보더라도 별명이 과분하지 않았다. 남명덕은 농망기면 일하러 나가지 않은 사원이 있나 해서 마을을 검사하는 작법을 잘 썼는데 한번은 벼모철에 앓아 누운 사람을 강박적으로 살얼음이 낀 논밭으로 내 몰아 그날 오후 병이 도져 죽었다고 했다. 그리고 멱살을 쥐여흔들거나 줄욕을 퍼 붓는 건 보통일사라고 했다. 지어는 사람을 때리기까지도 했는데. 한 농민은 귀통을 맞은 것이 그쪽 고막이 터져 귀머거리가 되였다고 한다. 그 뿐이 아니다. 현에서 령도가 오니 생산대의 소를 잡아 불고기를 해 먹인 일, (역축도살을 절대 금지할 때임.) 공소사에서 일을 잘하고 있는 녀직원을 쫓아내고 아들 남철이를 대신 넣은 일, 그외에 남녀간의 시시껄렁한 말도 있었다. 남명덕에게는 민분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현의 령도에서는 그를 “혁명적극성이 높고 사업열정이 높고 손탁이 드세다.”고 하였다. 남명덕의 조폭한 공작방법과 실제를 탈리하는 지시를 제때에 두루 무마해 주거나 조절해 주는 사람은 김응수였다. 남명덕은 김응수가 곁에 있음으로 해서 좋은 소리를 들으며 서기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었지만 김응수를 “우경”이라면서 늘 아니꼽게 보았다.
남명덕의 횡포에 정면으로 맞서는 사람은 젊은 패기가 끓어넘치는 나였다. 나는 남명덕에게 빌붙어 굽실거릴 필요도 없었거니와 공사의 사업을 놓고 누구와 흥정할 필요도 없었다. 당의 사업, 인민의 사업을 잘하는 것만이 내가 해야 할 바였다. 남명덕과의 몇차례 충돌에서 내가 그의 체면을 전혀 고려치 않은데서 그는 나를 아주 괘씸해 하였다. 김응수의 조률도 별로 작용이 없었다. 나는 물론 대수롭지 않았다.
 
   64년 5월, 내가 모범단서기가 되여 성에서 열린 표창대회에 갔다 와서 며칠후다. 그날 우리 공사간부 10여명은 남명덕의 아들 남철의 잔치술을 먹고 밤 늦게야 헤여졌다.(파혼이니 뭐니하다가 약혼녀가 배가 불러와서 급급히 결혼등기를 하고 잔치를 했다.)
   칠흑 같이 캄캄한 밖으로 나오니 시원하고 신선한 대기에 기분은 무척 상쾌했다. 나는 봉선이가 몹시 보고싶었지만 밤도 깊었고  술까지 마셧기에 단념하고 하숙집으로 향하였다.
   봉선이도 작년여름에 대학을 졸업하고 이곳 초중에 배치를 받았다. 그도 집은 나처럼 외지에 있었는데 궁벽한 산골의 가난한 집에서 큰딸로 태여났다. 봉선이는 인물, 체격, 총명, 품성… 말하자면 덕, 지, 체, 그 어느 것 한가지도 나무랄 데가 없는 훌륭한 처녀였다. 하지만 가정성분이 부농이여서(실제는 자작을 하는 중농이였다.) 여기 두메산골 초중으로로 배치를 받은 것이다.
   작년 늦가을에 나와 봉선이는 김응수내외의 “전술”에 걸려 첯만남을 한후 자연스레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 우리는 사랑한다느니, 좋아한다느니 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나 만나면 포옹과 키스는 사양치 않았다. 그러나 성의 계선은 엄격히 지켰다. 그것은 결혼식을 올린 다음의 절차로서, 그 순서를 위반하는 것은 저렬하고 수치스러운 도덕적, 법적으로 착오적 행위라고 인정하였다. 나와 봉선이는 금년 국경절에 간단히 결혼식을 하자고 약속하였다.
   내가 기분좋게 스적스적 걷고 있는데 누군가가 등뒤로부터 나의 가슴을 꽉 끌어안았다. 나는 기절초풍 놀라면서도 잔등에 뭉클하는 젖가슴을 느껴였다.
   “조서기, 우리 집으로 가자 응!”
   련옥의 뜨거운 입술이 나의 볼에서 화끈거렸다.
   “아니, 이러지 마오!”
   나는 다급히 그의 손을 풀면서 주위를 살펴 보았다. 다행이 아무도 없었다.
   “쥐도 새도 모름다.”
   련옥이는 속삭이며 나의 아래를 움켜 쥐였다. 그것은 나도 모르게 힘이 뻗쳐 있었다. 나는 련옥이를 꼭 끌어안았다.
   련옥의 하숙집은 정말 비여있었다. 우리는 불덩이가 되여버렸다. 련옥이는 련속 신음을 토하다가도 나의 가슴팍이며 등허리를 꼬집으며 쥐도 새도 모르게 이러자고 하였다. 봉선이와 결혼한 후에도 자기를 잊으면 안된다며 거듭 꼬집었다. 우리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살자고 굳게 약속을 하였다.
   귀신이 곡할 일이 였다. 사상, 감정, 품행이 건강하던 내가 련옥의 사탕폭탄 한방에 순간에 무너질 줄이야?! 성의 유혹을 이기는 힘은 따로 있는 건가?... 나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얼마후 나와 봉선의 38선도 허물어지고 말았다.
 
   나는 뻔뻔스러운 이중인격자가 되고 말았다. 능청스러운 위군자로 타락한 나는 은근히 지금의 성생활에 대하여 만족감과 행복감까지 느끼였다. 지금은 오히려 내가 주동적이 였다. 나는 봉선의 앞에서는 인간이였으나 련옥의 앞에서는 짐승이였다.
 
   8월의 어느날 점심때다. 련옥이가 자기사무실로 오라고 나에게 눈치를 하였다. 우리는 이미 여러번 거기서 만났었다.
   공사간부들은 사업시간이란 게 따로 없었다. 임무가 있으면 낮이건 밤이건 몰두하여 사업하고 일이 없을 때는 자유자재였다. 대부분 사업은 기층에 내려가서 해야 하는 것이기에 늘 하향을 했고 공사건물은 항상 비여있었다. 늙은 문서가 집을 지키고 있긴 했으나 그는 점심시간이면 기껏 늑장을 부리며 자기 집에 있었다. 공사건물은 초평마을에서 퍼그나 떨어져 산기슭에 우두커니 있었다.
   11시가 좀 지나서 나는 련옥의 사무실로 갔다. 문은 열려져 있었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 지나서 련옥이가 왔는데 왜서인지 다른 때와는 달리 긴장해 하고 불안해 하는 것 같았다. 련옥이는 서랍에서 사무용지도 꺼내고 또 만년필도 찿으며 서성거렸다. 나는 더 참을 수 없어서 문을 잠그고 련옥이를 꽉 끌어안았다. 그런데, 련옥이가 놓으라고 소리소리 악을 쓰며 나를 밀치는 게 아닌가?! 내가 마구 우격다짐을 쓰는데 “탕! 탕! 탕!”하고 누가 세차게 문을 두드렸다. 나는 선자리에서 굳어지고 련옥이는 흐트러진 모습 그대로 달려가서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나가버렸다.
   활짝 열린 문앞에는 쇠꼬챙이 처럼 깡마르고 표독스러운 남명덕이 뱀눈알 같이 독살스럽고 차거운 눈길로 나를 쏘아보고 그 옆에는 덜썽 키가 큰 문부장이 기세 등등해서 서 있었다.
  “너! 여기 꼼짝말구 서 있어라. 가서 응수를 오라구 해!”
   남명덕은 문부장께 소리를 치고는 쥉쥉 자기사무실로 가서 파출소의 한소장을 당장 오라고 전화를 하였다.
   련옥의 사무실로 김응수와 한소장이 선후로 들어선 후 잇따라 련옥이도 문부장과 함께 들어왔다.
   “야! 사실대로 말해라. 한소장! 제대로 쓰오.”
   남명덕은 노기등등해서 소리쳤다. 부들부들 떨고 선 나의 눈앞에는 남명덕의 날카로운 눈길이 보이는 듯 했고 전신에 소름이 끼치였다. 동시에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는 사태에 머리가 텅 비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요?!”
   김응수가 걸상을 주며 나의 어깨를 두드리였다.
   “무슨 일인지, 사실대로 솔직히 말하오.”
   김응수가 다시 한번 재촉하자 떨리던 가슴이 좀 진정이 되는 것 같았고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그렇다! 이지경에서 무엇을 주저하겠는가?! 사실대로 솔직히 말하자. 다 말하자. 나는 일체를 단념하고 전후사를 말하기 시작했다. 련옥이와 바람난 그날밤으로부터 오늘 련옥의 신호, 그리고 우격다짐, 탕! 탕! 탕!에 이르기까지를 그대로 다 말하였다.
   “련옥이! 말해보오.”
   남명덕의 목소리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아닙니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내가 재료를 쓰려고 하는데 제가 마구 덮쳐들고서는! 응응응…”
   련옥이는 집이 깨지게 악청으로 웨치고는 울음보를 터뜨리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처음으로 머리를 쳐들고 련옥이를 멍해서 바라 보았다. 아니, 이럴 수가 있는가?!...
   “나쁜 놈새끼! 한소장! 저새끼를 공안국에 잡아가오!!
   남명덕은 나를 손가락질 하며 새된목소리로 소리를 꽥 질렀다.
   “이렇게 하기오. 사실을 자세히 서면상으로 쓰오. 래일 오전까지 철저하게 몽땅 쓰오. 11시에 남서기한테로 가져오오. 그리고 오늘 이 일을 지금은 절대비밀로 합시다.”
   김응수가 말하자 한소장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오!”
   남명덕은 벌컥 일어서며 외마디 소리를 꽥 지르고는 나가버렸다.
   내가 사무실에서 멍하니 앉아서 방금 있은 일을 두서 없이 생각하고 있는데 김응수가 들어왔다.
   “창락이! 거, 무슨 그런짓을 사람이 하오?! 정말 천만 뜻밖이오… 원! 창락이가 그럴줄은… 정말 꿈에두 생각 못했소! 원, 사람이… 검사실 그대로 자세히 쓰오. 두부를 써서 한부는 남서기를 주구 한부는 나를 주오. 아마두 일이 복잡할 것 같소.”
   그는 부시럭 부시럭 담배를 말더니 나를 주고 다시 자기 것을 말았다. 나는 비로서 더없는 수치를 느끼며 죽고싶도록 뼈저리게 후회가 되였다 이거, 무슨 꼬락서닌가?! 내가 이렇게 끝장을 보다니… 나는 책상에 엎드렸다. 더는 머리를 들 용기가 없었다.
   “후ㅡ 창락이! 내말을 잘 듣소. 사람은 누구나 다 착오를 범할 수 있소. 하지만 이건 참으로 수치스러운 착오요. 봉선에게는 뭐라고 하겠소!... 창락이! 지금 창락이가 해야 할 일은 착오를 철저히 검사하고 조직의 처리를 성근히 접수하고 고치는 것이요. 그리고 맡겨주는 사업을 잘하면 되오. 고치면 여전히 좋은 동지지. 저녘은 우리 집에 와서 먹소..”
 
   이튿날 오전 검사서를 남명덕에게 가져가니 그는 “거기 앉아라.”하고는 검사서를 보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누가 보던지 이걸 보면 련옥이가 나쁜 사람이지. 이걸 알면 그의 남편이 가만 있겠는가! 견결히 리혼하자구 할텐데, 군혼파괴죄가 얼마나 큰지 아니? 총살이다 총살! 다른 것은 싹 없애고 어제 일만 써라. 련옥이가 보자했다구 하지말고 네가 뛰여들었다구 하구… 어제 일만 련옥의 말대로 써라. 군혼파괴죄에 걸리지 말고… 련옥이가 무사해야 너도 사는 거다. 그리고 검사서라 하지 말고 탄백교대서라고  해라. 아니, 탄백서라 해라. 가!”
   그날 오후에 나는 탄백서를 남명덕의 앞에 바치였다. 생각해보니 남명덕의 말에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서로 좋아서 바람을 쓴 작풍문제든 강간미수든 나는 이젠 볼장을 다 본 끝장이 난 사람이지만 련옥이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나의 말 한마디에 청백한 련옥이로 될수도 있고 난질이 버릇으로 된 더러운 화냥년 련옥이가 될 수도 있었다. 나는 남명덕의 말대로 련옥이를 보호해 주리라 마음을 결정하였다.
   남명덕은 탄백서를 본후 “됐다.”하고는 나와 봉선의 관계를 자세히 따지였다. 나는 사실을 그대로 말했다. 나의 말을 듣고 난후 그는 말하기를 결혼등기도 하지 않고 동품부터 한것은 순전한 류망행위라고 하였다. 나는 승인한다고 대답하였다.
 
   9월초 나는 강간미수죄와 류망죄로 현공안국에 잡혀 갔고 두달후에는 군혼파괴, 강간미수, 류망죄로 16년 도형을 받고 감옥으로 갔다.
   내가 미결수로 두달이나 있게 된 것은 김응수가 강간미수죄를 부인하는 재료를 법원에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명덕과 한소장이 나의 류망죄를 더 찿느라고 심입된 조사를 하다보니 시간이 걸렸다. 법원에서 나를 반복적으로 심문할 때 나는 이런 것들을 알게 되였다. 김응수가 제공한 재료에 대해서 나는 그건 내가 처음에 한 거짓말이라고 “탄백”하였다. 심문과정에서 나는 초평공사의 적지 않은 각시들과 처녀들이 나로 인해서 모욕적인 질문과 조사를 받았다는 것을 눈치챘고 알게 되였다. 어떤 처녀들은 부인과검사까지 받았다고 한다. 한 처녀는 처녀막이 파손되여 끝내 동반자를 실토하기까지 하였다고 했다. 나는 더없이 미안했고 죄송스러웠다. 하지만 아무일도 없이 무사할 줄 알았던 련옥이가 그간 어째서 리혼을 당했는지… 이상했다.
감옥으로 가면서 나는 봉선에게 천만번 사죄하며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우리의 약혼을 없던 일로 하자고 편지를 보냈다. 김응수에게도 미안하다고 간단히 편지를 했다. 편지는 고마운 간수가 꼭 전해주겠다고 하였다.
 
   감옥에 간 이듬해 늦은 봄, 그러니까 65년도 6월이다. 나는 뜻밖에도 봉선이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 사연은 간단했다.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과 기다릴 거라는 내용인데 편지지는 여러군데가 잉크가 피고 젖었다가 마른 흔적이 력력하였다. 봉선이는 편지를 쓰면서 피눈물을 흘린 것이다!... 나는 편지를 쥐고 반나절을 흐느꼈다… 나는 감방의 손바닥만한 뙤창문으로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개조에 힘껏 노력하리라 결심하였다.
   67년도 가을 봉선이 한테서 두번째로 편지가 왔다. 사연은 간단했다. 아들애가 죽었다는 소식과 멀리 시집을 간다는 것이 전부였다. 편지지는 여러군데가 잉크가 피고 젖었다가 마른 흔적이 력력하였다. 봉선이는 편지를 쓰면서 피눈물을 흘린 것이다!... 나는 편지를 쥐고 반나절을 흐느꼈다… 나는 감방의 손바닥만한 뙤창문으로 푸른하늘을 바라보며 인생의 허무함에 실망하였다.
 
   80년9월, 나는 만기석방으로 원적지인 삼도구향 립봉촌 갈매골 고향마을로 돌아왔다. 이 꼬락서니를 해 가지고 고향으로 간다는 건 죽기보다도 싫었다. 그러나 무슨 방법이 있는가?! 갈 곳도 없었거니와 반드시 원적지로 가야 한다고 하니. 그리고 계급투쟁을 잘해야 한다고 하였다. 출옥할 때 감옥의 령도들은 신생을 축하한다고 하였지만 나는 기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립봉에서 뻐스를 내린 나는 괴나리봇짐을 메고 골짜기 수레길을 따라 허정허정 걸었다. 길 옆 쑥밭에서는 풀벌레가 시들해서 가끔 울고 산새가 두어마디 호젓한 울음을 울었다. 산굽이를 돌아 작으마한 언덕에 오르니 저 멀리로 갈매골 고향마을이 보이였다. 나는 길 옆 바위에 걸터앉아 고향마을을 바라 보았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루루 흘렀다. 이대로 어디론가 가 버리고 싶었다. 아니, 이대로 여기서 죽고싶었다.
   마을에 들어서니 10여호 밖에 안되는 마을은 폴싹 퇴락하여 페허같이 괴괴하였다. 나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형님네 집을 향해 주섬주섬 다가갔다. 마당에서 무얼하고 있던 형님이 자취소리를 들었는지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달려나왔다.  우리는 부등켜 안고 엉엉 울었다. 20년세월! 우리는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나는 감옥에 가서 얼마후 형님께 편지를 써서 그간의 사실을 알린 후 또 다른 감옥으로 가게 되니 회답을 하지 말며 구태여 찿느라고도 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주소를 안대도 그 먼 곳을 면회 올 경비도 없겠거니와 이 꼬라지를 봐선 또 뭘하겠는가?... 소식이 없으면 무사한 줄로 서로 알자고 형님께 약속을 했다. 우리가 흐느끼며 컥컥거리는 소리를 듣고 형수님이 달려나왔다.
   집은 초가삼간 옛집 그대로나 이젠 거이 허물어지는 낡은 집이 되였다. 그간 나 때문에 소경이 되였든 아버지는 몇년 전에 서산으로 가고 어머니는 풍을 맞아 운신을 못하고 누워 있었다. 형님내외도 많이 늙었다. 초중을 졸업한 큰 조카는 집에서 일하고 있었다. 아래로 남자애와 녀자애 두 조카는 학교로 다니며 말며 한다고 하였다.
   쇠똥을 섞어바른 흙냄새와 된장찌개냄새, 퀴퀴하고 지린 어머니 냄새까지 진하게 풍기는 집안에서 여섯 식솔이 비좁게 사는데 지금 구지지 한 나까지 끼여들었다. 집에 온 후 나는 웃방에서 두 조카애와 함께 어머니 곁에서 새우잠을 잤다. 우리는 모두 주접이 든 몰골에 말도 별로 하지 않았다. 사실은 할말도 별로 없었다. 감옥에서 갓 나온 나는 집식구들에게 무거운 정치보따리로 되였다. 며칠후 나는 삼도구 파출소에 가서 등록하고 립봉대대 치보주임한테도 가서 보고를 하였다.
   마을사람들은 모두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형님네도 다르지 않았다. 감자에 강냉이, 보리쌀을 밑불개로 하고 좁쌀을 좀 넣은 밥은 괜찮은 끼니였다. 이런 밥을 하루 두끼 혹은 세끼를 이어댈 수 있으면 그것은 아주 다행이였다. 해마다 그렇지 못하다 보니 반소량을 먹는데 그건 정말로 입에 풀칠하기 였다. 반소량을 미처 이어대지 못할 때도 있는데 그럴 때면 그야말로 말 그대로 돼지도 먹기 싫어하는 푸대죽을 사람이니 먹었다는 것이 였다. 집체는 해마다 내리막 재주만 하다보니 소위 1년총결 결산분배라는걸 하긴 하였으나 그건 빚문서 장부총결이였다. 아무개네는 빚이 얼마고 아무개네는 얼만데 묵은 빚이 얼마고 금년 빚이 얼마고 합계 얼마다. 이런 총결이였다. 사람들은 닭마리를 팔고 약뿌리나 나무짐을 해서 소금이며 등잔불 석유를 삿다. 아무리 “자본주의 꼬리를 끊어 버리고 싹을 없앤다!”고 하였지만 마을사람들은 슬금슬금 서로 덮어주며 이런 부업을 하였다.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다른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옛말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였지만 갈매골의 생활에는 변한 것이 없었다. 아니, 점점 더 빈궁에로 변해갔다. 살길이 막막한 이세상, 숨막히고 암담하기만 했다.
 
   두루 10여일이 지났다. 나는 생산대장과 의논하고 방목장 일을 맡았다. 방목장은 마을에서 골안으로 10여리 더 들어가 있었다. 이름은 듣기 좋게 목장이지만 거기에는 움막 하나, 송아지 네마리, 페우가 두마리 있었을 뿐이다. 페우는 풀살이나 올려서 잡아먹거나 이웃 생산대와 벼를 바꾸었다.
   앞뒤로 가파로운 높은 산이 둘러 있고 동서로는 갈매골이 길게 뚫렸으나 골짜기가 이리저리 구불구불하다보니 결국은 역시 높은 산이 막아섰다. 움막 앞으로는 벽계수가 솰솰 쉼없이 흘렀다. 이따금 산새가 외롭게 한두마디 울고는 사라졌다. 풀벌레도 울며 말며 시들한데 목장은 고즈넉 잠잠하였다. 이런 것을 적막강산이라 할것이다. 밤이면 가까이에서 혹은 먼 곳에서 부엉이가 몇마디 울었다. 다만 소쩍새만은 무슨 사연이 그리도 슬픈지 장밤 쉬지않고 울었다. 정말로 목에서 피가 나올 때까지 우는 건가. 소쩍새의 울음은 참으로 구슬펐다. 한달 거이 지나니 차츰 목장에 습관이 되였다.
   “생”이란 무엇인가? 감옥 령도들은 “신생”이 어쩌구 “전도”가 어쩌구 “노력분투”니 “발전”, “성공”이 어쩌구 저쩌구 하며 수다를 떨었지만 나는 언녕 회망이며 욕망을 포기한지 오랜 사람이 였다. 나와 소는 모양이 다를 뿐 같은 신세였다. 소는 나의 유일한 동무였다. 소들과 함께 여기 저기를 방목 다닐 때면 지금 내가 소를 방목하는 건지 소가 나를 방목하는 건지 얼떨떨하기도 했다. 비트적 비트적 겨우 걸으며 느릿느릿 풀을 뜯는 페우를 볼 때면 나의 남은 세상도 방불히 보이였다. 나도 이제 저렇게 살다가 어느날 죽을 것이고 그러면 나의 “생”은 “숭고한”  사명을 완성한 것으로 될 것이다…
   혹, 어떤 날은 16년 감옥생활이 회고 되기도 하며 감옥이 그립기도 했다. 그럴 때면 “차라리 무기도형에 떨어질 게지…”하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나는 지금이 감옥보다 못하였다 감옥에는 그래도 사람세상이 있었지만 여기는 적막강산 뿐이 였다..
 
   82년 봄이다. 어느날 내가 소우리 말뚝을 박고 있는데 큰 조카가 헐떡거리며 달려왔다. 집체를 걷어치우고 개체를 하는데 오늘 땅이며 집체재산을 분배하니 급히 내려오라고, 제비를 쥐니까 빨리 오란다고 하였다. 세상이 무너지는지 깨지는지 일체 관심이 없던 나는 멍 해서 조카만 멀뚱멀뚱 바라 보았다. 한집이 빠져도 제비놀음을 못하니까 빨리 오라더라며 조카가 거듭 재촉해서야 나는 정신이 들었다.
   탈곡장마당에는 마을사람들이 3, 40여명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모두가 긴장되고 흥분된 얼굴로 활기에 넘쳐 있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였다. 나도 갑자기 삶의 의욕이 솟구쳤다. 그러니까 이젠 목숨도 제것이고 밭도 재산도 다 제것이란 말이 아난가?! 자기의 생은 자기 손으로 산단 말이지?!... 허! 그것 참, 세상이 변했네!!
   사람들은 번갈아 가며 제비를 쥐고는 엉덩이를 치며 하하 웃기도 하고 “엥이! 무깍지야!”하고 랑패상을 짓기도 했다. 집체재산이라는 것이 열두어가지 밖에 안되다 보니 무깍지가 여러개 있게 되였든 것이다.
   나는 제비를 제일 마지막으로 쥐였는데 커다란 돌군재였다.(석마돌. 탈곡할 때 씀.) 나는 돌군재를 마을 공동용으로 기부하고 목장터와 지금 거기에 있는 다리병신 어미소와 갓난 새끼송아지를 달라고 하였다. 대장이 군중토론에 부치니 모두 그러라고 이구동성으로 동의를 했다.
 
   85년 8월! 나는 초평향에 가 보기로 용단을 내렸다. 그간 오래동안 나는 초평향의 소금강골을 유원지로 만들면 어떨가? 하고 반복되는 사색을 하였다. 그러나 나의 “휘황찬란”한 과거지사가 자꾸 걸리였다. 초평에 가서 번들거리면 나는 새롭게 신문인물이 될 것이다. 아이고 어른이고 남녀로소가 모두 다시 나를 쳐다보며 나의 뒤통수에 대고 손가락질을 할 것이다… 그러나 소금강골을 한번 잘 개발하고픈 생각을 억제할 수 없었다. 나는 실사구시적으로 진지한 사색을 거듭하였다. 강간미수니 류망이니 하는 죄목은 승인이 않되는 억울한 죄다. 군혼파괴죄는 따져보면 련옥이가 자초한, 말하자면 자업자득이라 하겠다. 하지만, 그건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 조직위원 김응수가 나에게 한 말이 힘이 되였다. 그는 20년전에(내가 강간미수범으로 잡힌 날.)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치면 여전히 좋은 동지지.” 나는 초평향에 가서 사업을 본때스레 펼치며 꼭 성공하리라 결단을 내렸다. 오직 이 길만이 나의 생과 존엄을 찿으며 나를 빛내이는 길이라고 확신하였다. 사업을 잘하여 초평향 인민들에게 꾸준히 좋은 일을 하면 나의 명예도 많이 좋아질 것이다. 나는 나의 이런 관점이 청년시절의 나의 초심과 일맥상통함을 새삼스레 느끼며 감개가 무량하기 그지없었다…
   개체로 된 후 그간 4년간 나는 억척스레 일했다. 목장의 아래 우를 더 도급맡고 통이 크게 대대적으로 사업을 벌이였다. 나는 소, 양, 돼지, 닭, 벌을 치고 하마(기름개구리)를 기르고 인삼장과 버섯장도 시작하였다. 그리고 약초와 산나물 재배도 시작했으며 황무지를 일구고 량식과 사료를 자급하기에 힘썼다. 형님네 식구들은 나와 함께 말 그대로 억세게 분투하였다. 정부에서는 나를 다종경영호로 인정하고 자금 지원을 하여 주며 수의소의 지도를 배치하는 등 세심한 보살핌을 지속적으로 주었다. 나는 금년 봄에 갈매골 고향마을 사람들을 흡수하여 “갈매골농민합작사”를 만들었다. 지금 우리에게는 70여만원의 자산이 있다. 만원호를 “장원”이라며 장려하는 지금 우리는 특등장원으로 되였다. 83년도 국경절에 나는 남매를 데리고 사는 젊은과부에게 장가를 갔다. 그의 남편은 79년도에 목재판에 갔다가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금년봄에 안해는 떡돌같은 아들을 낳았다.
 
   내가 자가용을 몰고 초평향에 도착한 것은 오전 9시가 거이 되여서다. 향정부에 들어가서 서기와 향장을 찿으니 면바로 그들은 모두 사무실에 있었다. 내가 자기소개를 하자 그들은 무척 반가워 하며 왕림을 열렬히 환영한다고 하였다. 그들은 나의 사적을 여러번 들었다고 하였다.
   그날 일은 참으로 재빨리 순리롭게 되였다. 나는 향정부와 소금강골 도급계약을 맺고 예약금 10만원을 주기까지 했다. 향정부에서는 풍성한 점심식사로 나를 초대하여주었다. 좌석에서 나는 혹시 김응수라고 아는가 물었는데, 웬걸?! 김응수로인이 마을에 계신다는 게 아닌가?!
   내가 젓가락을 놓고 곧바로 김응수를 찿아 가겠다고 하니 서기와 향장이 따라나섯다.
   나와 김응수가 부등켜안고 일희일비로 감격한 이야기를 여기서 어찌 다 말하랴!! 그는 늙긴했으나 깨끗하고 정정했다. 그가 연신 “창락이! 창락이! 이렇게 오다니?!” 하고 웨치자 집안에서 “뭐요?! 누구? 창락이?”하고 웨치며 그의 안해가 뛰쳐 나왔다. “아이고! 이게 누구냐! 창락아!” 그는 나를 끌어안고 왕왕 울었다. 나도 걷잡을수 없이 뜨거운 눈물이 마구 쏟아 졌다.
   우리는 초평촌 뒤산기슭 소나무밭에 가서 둘러 앉았다. 향장의 분부로 향간부 몇사람이 음식을 날라와서 그야말로 푸짐한 산놀이 잔치가 벌어졌다. 산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초평촌은 옛모습이 대체로 그대로인 것 같았으나 그래도 산간마을의 아담함과 포근함이 깃들어있었다. 저 아래로 소학교와 초급중학교는 새로 지은 것이고 향정부도 마을 가까이로 새로 지었다. 내가 공안국으로 잡혀간 공사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을 변두리에 대대사무실이던 기와집은 지금도 있었는데 절반은 허물어지고 거이 쓰러지는 절반이 벋팀목에 의지해 위태롭게 서 있었다.
   김응수가 천천히 지난 일을 말하였다.
   “창락이가 간 후 나는 재료를 현에 보냈는데 창락이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부인했다더구만. 련옥이는 문부장 때문에 모든 것이 들통나서 리혼을 맞았소. 문부장은 련옥이를 데리고 살자고 그의 남편에게 일러주며 엉큼한 수작을 했는데 련옥이가 죽다보니… 남서기는 문화혁명에서 죽을 고생을 했소. 창락이 문제도 나와서 민분이 컸지. 원래 민분이 많은데다가… ㅉㅉㅉ. 작으만치 죄장이 104가지나 됐는데 다 사실이란 말이오. 건달이나 다름없는 아들을 공사공청단위 서기에 앉히자고 창락이를 잡아먹지 못해 눈에 달이 올랐지. 련옥이를 입당시켜 현으로 보내고 남철이를 공사공청단위에 안배하자고 련옥의 에미와 약조를 했다고 투쟁을 들이대니 련옥이가 실토를 해서 우리도 알았소. 그리고 낫살이나 먹은 게 그게 또 뭐요. 련옥이와 글쎄… 개명치 못하게… ㅉㅉㅉ”
   “그런데, 련옥이는 어째서 죽었습니까?”
   “련옥이가 그런 사람일 줄이야. 67년도 여름에 남서기랑 문부장, 한소장, 봉선이두 끌려나와 투쟁을 받았는데, 그날 련옥이는 남철이가 몽둥이로 머리를 친 것이 기절했다가 다시 깨여나긴 했는데, 그때부터 지누비(자리에 누워 앓음.)를 하다가 얼마 후에 죽었소. 그날 군중들이 니 애비도 치라고 소리를 치니 남철이는 정말 애비도 쳤소. 련옥이는 한소장과 문부장의 안해가 달려들어 머리까지 깍아버리고 전안조에 잡아가면서부터 계속 투쟁판에 끌려다니다가 결국은 그렇게 되였소… 78년도 틀린 것을 바로잡을때 창락의 문제를 제출하니 문화혁명 전의 일이여서 심사를 안 한다구 하더구만. 그간 창락이가 참 고생했소…”
   나는 남명덕의 소식도 물었다. 김응수의 말에 의하면 남명덕은 지금도 결론을 내리지 못해서 “걸려” 있다고 했다. 그는 이웃 향으로 이사를 갔는데 풍을 맞아 겨우 운신을 한다고 하였다. 남철은 련옥의 건으로  4년 옥살이를 갔다 왔다. 남서기 시중은 그래도 그토록 천대를 받던 안해가 해준다고… 김응수는 처연한 기색으로 말하며 담배를 피웠다.
   “창락이! 놀라지 마오. 저기 저 기와집이 보이지? 저 집에서 봉선이가 아들을 데리고 살고 있소.”
   “아니?!”
   “봉선이는 아이를 낳고 온갖 멸시를 무릅쓰고 살았소. 그러다가 문화혁명이 터지니 투쟁대상으로 잡혔지. 67년도에 마지막으로 투쟁을 받고 잡귀신에서 빠지긴 했지만 창락이를 더는 애 아버지라 할 용기가 없다고 우리와 말했소. 우리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소.”
   “아이가 얼매나 좋은지. 창락이를 똑 빼 닮았소. 올해 대학에 붙었소.”
   지금까지 눈굽만 자꾸 딱고 있던 김응수의 안해가 한마디를 하였다. 나는 망연자실 멍해 있었다. 초평향에서 이런 일을 만날 줄이야?!…
 
   이튿날 아침후 나는 봉선이며 김응수내외, 향간부들의 여늬(배웅)를 받으며 귀로에 올랐다. 할 일이 숨 가쁘게 많았다. 차창으로 송진내 짙은 싱그러운 대기가 풍겨 들었다.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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