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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기록》제1집 -> 박규식 편

4. 기타 사업
2020년 11월 26일 05시 13분  조회:265  추천:0  작성자: 기록
4. 기타 사업 
 
외사사업
 
나는 사업의 수요로 로씨야, 미국, 조선, 태국 등 국가와 홍콩, 오문 그리고 기타 외교사업과  통역사업도 했다. 
 
외국 기업의 관리경험을 배우라는 박일파 부총리의 지시에 따라 국가경제위원회가 조직을 맡고 국가경제위원회(国家经委)에서 고찰단을 조직해 철도부, 농기계부, 기계부, 방직부 등 몇개 부,사(국)로 구성된 중국 기업관리 고찰단을 만들어 1964년 음력설을 쇠고 조선의 대안전기공장에 가서 3개월 동안 기업관리를 고찰하였다. 단장은 국가경제위원회 위원 동신(董晨)이였고 당시 28세인 나는 번역 겸 비서사업을 맡았다. 우리는 조선에서 아주 높은 대우를 받았다. 조선정부 김일 제1부수상이 전체 대표단원을 접견하고 기념사진을 남겼으며 목란봉극장에서 가무를 관람시켰다. 이어 1964년 6월, 나는 중국무역대표단을 따라 조선 경내에서 두달간의 고찰을 하였다. 외무부 부장 리강을 단장으로 내가 통역을 맡았다. 조선정부 리주연(李周渊) 부총리는 고찰단의 주요한 인원을 접견하고 기념촬영을 했으며 회담에도 참석했다.
 

   
조선에서 김일 제1부수상과 함께             


외사 활동
 
방문기간에 리강 부장이 쓴 조선에 대한 우호적인 시를 내가 번역하였고 조선로동당 중앙기관지 《로동신문》의 제1면에 실렸다. 그러나 몇년후 이 시는 리강 부장에게 큰 우환거리로 되였다. 시비를 전도하는 문화대혁명 년대였던 1970년 여름, 외무부 리강동지의 안건을 전문적으로 조사하는 군대표가 우리 “5.7” 간부학교 군대표 리자옥(李子玉)의 안내로 나를 찾았다. 그들은 나에게 말하기를 리강은 3반(三反) 분자로 이미 붙잡았으며 그가 조선에서 외국과 내통하였으며 조선수정주의를 추겨 올리는 시를 내가 변역하였기에 리강의 문제를 철저하게 적발하라 했다. 리강동지는 장기적으로 주총리의 신변에서 사업하였으니 취흥의 뜻은 술에 있는 것이 아니듯이 그들이 리강을 타도하는 것으로 주은래 총리를 타도하자는 추악스런 목적이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하여 나는 “모릅니다.” 혹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란 말로 그들의 질문을 거절하였다. 나의 견결한 태도를 보고 “五七” 간부학교 군대표는 나의 당적을 제명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분노한 나는 그들과 론쟁이 벌렸다. 하지만 아무런 결과도 없으리라고 생각한 나는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당신들은 나의 당적을 박탈할 권리가 없다!”라고 말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통역사업은 힘 들고 긴장하며 자칫하면 실수할 위험성이 컸다. 1964년 가을, 우리 나라에서 “북경세계과학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는 건국이래 처음으로 열리는 국제학술토론회로서 국가에서는 전문적으로 북경에다 규모가 거대한 과학회당을 지었다. 
 
이 토론회에서 나는 곽말약과 화라경 등 유명인들에게 통역을 하였고 대회 개막식 주석의 통역도 맡았다. 개막식은 장엄한 인민대회당에서 14개 언어로 동시통역을 했다. 개막식은 조선대표단 단장이 주최하였고 나는 동시통역의 제1번역이여서 내가 한마디를 번역하면 기타 어종이 나의 번역에 따라 동시번역을 하였다. 번역실은 크지 않지만 초가을이라 실내는 무더웠다. 비록 선풍기는 돌아가지만 온몸은 땀투성이로 되었다. 개막식의 오전 행사가 끝나고 회의 집행주석이 휴식을 선포하자 나는 “북경세계과학토론회 페막”이라고 번역하였다. 비록 한글자 차이지만 이것은 내가 여태껏 통역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실수였다. 너무 긴장하였던 것이다. 다행히도 기타 동료들이 정신을 가다듬어 나의 잘못을 뒤따르지 않았기에 엄중한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다. 
 
통역사업은 가뿐하고 즐거울 때도 있다. 나는 통역으로 주은래, 진의, 곽말약, 리사광 등 지도자들이 주최한 연회에도 참가했다. 장엄한 인민대회당에서 우리 나라 각지의 명료리를 먹어보았고 외국 손님을 모시고 조국의 명승고적과 아름다운 풍경도 구경했었다.

1973년 북경에서 길림으로 조동해온 후 나는 시대외경제련락판공실에서(내부적으로는 계획위원회의 한 직능 부문이다) 사업을 하였다. 이 부문은 우리 시의 대외경제 원조와 기타 방면의 원조 업무를 책임졌다. 원조를 받는 국가는 우리 나라와 우호적인 국가였다. 대외원조의 내용은 제품 및 물자 지원, 실습생 양성과 의료대 파견 등이다. 우리 시에서 지원하는 기업과 단위는 국가, 성, 시를 포함한 대중기업과 일부 단위이다. 나의 직책은 지원하는 기업과 단위가 제때에 훌륭히 임무를 완성하도록 조직, 협조, 지도하고 지정한 기간과 질을 보장하며 대외원조 임무를 완성하는 것이다. 우리 시가 원만히 대외원조임무를 완성하는 것은 원조를 받는 나라와의 우정과 단결을 증진시키고 우리 나라의 국제지위를 높여줌에 일정한 작용을 했다. 
 
투자유치는 경제업무이자 중요한 대외업무이기도 하다. 개혁개방의 끊임없이 심화됨에 따라 우리  시 경제건설은 신속하게 발전했고 투자유치임무는 더욱 긴박하고 번중하였다. 투자유치를 잘하기 위해 나는 시계획위원회에 투자유치처를 설립하고 주관하여 우대정책을 정하고 시정부에서 발표하고 실시하였다. 나는 여러번 외국에 가서 대상 인입과 투자유치 등 활동을 하였고 시내에서 각국의 외국 상인들과 여러차례 협상하였고 그중 일부 대상은 이미 락착되였다. 우리 시의 투자유치를 촉진하고 규범적이고 투자유치의 수준을 제고하기 위해 나는 “대외경제 업무 지침”이란 책을 편집하여 1991년 6월에 길림성과학기술출판사에서 출판, 발행하였으며 동업자들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민족사업
 
우리나라는 다민족 국가로서 민족사업을 잘하는 것은 국가의 통일과 단결, 사회 안정과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데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당과 정부에서는 언제나 민족사업을 중요한 위치에 두고 관심이 컸다. 우리 시는 소수민족이 모여사는 지역으로 35개의 민족에 소수민족이 43만명이나 되며 전체 인구의 10%를 차지한다. 그중 조선족이 17만명으로 조선족의 산재지역중 조선족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 그들은 북벌전쟁, 항일전쟁, 국내해방전쟁과 항미원조전쟁에서 피땀을 흘렸으며 새중국의 건립과 조국보위에 불멸의 공훈을 세웠다. 사회주의혁명과 건설, 개혁개방시기에 부동한 각도로 자신의 총명과 재질을 기여했다. 조선족들은 민족의 언어, 문자, 문화와 풍속습관 등을 잘 보존하고 있다. 나는 국가 간부로서 그들을 위해 힘과 능력을 이바지하는 것은 나의 책임과 의무이다.
 
 1987년초 시당위에서는 시계획위원회에 영길현 춘등(春登) 공사 흥광(兴光)촌이란 빈곤한 마을을 지원하라는 임무를 내렸다. 임무를 받은 나는 관련 부서의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마을에 가서 고찰했다. 흥광촌은 50여호 인가로  60-70헥타르의 수전이 있으며 모두가 조선족이다. 이 마을은 원래 유명한 량식 생산촌이며 현에 큰 공헌을 했었다. 하지만 최근 몇년간 물도랑에 물이 없고 가뭄이 들어 련속 2년간 량식 한알도 거두지 못했다. 사원들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다. 종자도 없고 먹을 것도 모자랐으며 심지어 간장과 소금 살 돈도 없는 형편에 17만원이란 빚까지 걸머지고 있었다. 하여 마음이 흩어지고 정서가 극단적으로 떨어졌으며 어떤 사람들은 고향을 등지고 기근으로 인한 피난민으로 전락되렸다. 당지부도 마비되다 싶이 되여 춘경시기가 닥쳐왔는데도 그 해의 생산 준비도 하지 않고 있었다. 문제를 료해한 후 나는 기관에 돌아와 주임사무회를 소집하고 빈곤을 퇴치할 방안을 제출하였다. 구체적인 방안은 펌프우물(机井) 두개를 파서 관개할 물을 해결하고 만근의 식량배급표를 모아 량식을 농민들에게 주고 보통 가격의 비료를 얻어오며 도로에서 촌으로 가는 길을 닦고 종자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농업을 주관하는 담당주임 세명의 사업일군들을 거느리고 마을에 주둔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였다. 주둔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농촌사업에 익숙하였으며 그중에 나는 일부러 동복항(佟福恒)을 파견하여 빈곤 구제를 맡도록 하였다. 동복항은 문화혁명때 작은 실수가 있었기에 입당 토론도 통과되지 못하였다. 그가 농촌에 내려가면 빈하중농의 재교육 받는 데 도움이 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특장을 발휘하여 빈곤을 퇴치하는 데도 리로웠다. 50세에 가까운 그는 어려움을 극복하며 농민들과 함께 펌프 우물 두개를 팠다. 이 우물은 생명수였으며 풍년의 물이었다. 이 마을은 당년에 풍년을 맞이하였고 밥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당시 길림시 시장  왕운곤과 함께                   


길림성당위 하죽강 서기와 류수림 부성장과 함께
    
남은 문제는 어떻게 치부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심중하게 고려한 후 나는 계획위원회에서 가장 젊은 부처장 손량언(孙良彦)을 뽑았다. 그는 길림재정경제학원을 졸업했고 자질이 좋았으며 경제적인 두뇌가 있었고 경제방면의 지식은 물론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착실하게 일하는 정신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대담하게 산나물 가공공장을 차리고 양어장과 다양한 민속관광시설을 만들었으며 식당도 운영했다. 그러나 어떻게 관광객을 확보하기 위해 고민하던중에 그는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농촌에 오시기를 바랍니다!"란 구호를 제출했다. 그리고 시 외사 및 관광부문과 련락하여 관광객을 모집하였다. 얼마 안 지나 관광객들의 발길은 흥광촌에서 끊어지질 않았다. 마을의 수입이 증가됨에 따라서 사람들의 생활이 크게 전변되었으며 흥광촌은 끝내 빈곤에서 해탈되였다.
 
손량언은 빈곤촌을 퇴치한 공로로 상급기관에서 여러 차례 칭찬을 받았고 선후로 영길현 부현장, 시계획위원회 부주임으로 발탁되였다. 중국의 농민은 세상에서 가장 순박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한 사람을 잊지 않았다. 흥광촌 촌민들은 시계회위원회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여러차례나 나를 초청했다. 나는 병원에 입원했다는 구실로 거절했지만 그들은 단념하지 않고 다시 몇 차례나 나를 초청하였다.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나는 병원에서 흥광촌으로 갔다. 생각밖으로 마을 사람들은 명절옷을 입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마을 입구까지 마중 나왔다. 감사의 말과 나의 신체건강을 바란다는 표어가 가득 붙었고 심지어 양어장벽에 벽돌로 이러한 표어들이 박혀 있었다. 이것은 내가 겪었던 각종 환영식중에서 가장 성대하고 열렬한  환영식이여서 영원히 잊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 시에는 조선족사업단위와 기업이 적지 않다. 그들은 우리 시의 조선족교육과 문화사업, 경제건설에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발전중에서 여러가지 어려움과 문제를 봉착했다. 
 
나는 시조선족유치원을 새로 짓고, 시조선족실험초등학교의 개조와 확대, 시조선족중학교의 확대와 건설, 시조선족군중예술관의 개조와 건설, 시조선족백화상점과 랭면옥 건설 등에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광범한 농촌 동포들의 병을 보는 것이 어려워(이들 중 상당한 사람은 중국어에 능통하지 못하다) 하는 문제점에 비추어 조선족병원을 짓고 싶었으나 퇴직으로 실현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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