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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기록》제1집 -> 박규식 편

5. 계급투쟁
2020년 11월 26일 05시 22분  조회:319  추천:0  작성자: 기록
5. 계급투쟁

계급사회에서 계급투쟁이 존재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내가 철이 들면서 눈으로 보았거나 경과한 계급투쟁은 수차례나 된다. 인상이 비교적 깊은 것은 토지개혁, “3반”, “5반”, 반혁명 진압, “4청”운동, 문화대혁명과 계급대오 청산 등이다.

1957년 여름, 내가 대학 1학년때에 한차례 열렬한 반우파투쟁이 시작되였다. 법률학부 3학년인 녀동학 림희령(林希翎)은 학교 례당에서 공산당을 반대하고 흐루쑈브의 “비밀 보고”를 격정적으로 연설했고 공업경제계의 갈패기(葛佩琦) 선생은 공산당은 “일당독제”이기에 자본주의의 “량원제(两院制)”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계급투쟁은 육친도 가리지 않는다. 공업경제학부에서 공부하고 있는 오옥장이 가장 귀여워한 외손자도 그의 외할아버지에게 대자보를 써 붙였다. 우리 학년의 몇몇 학생들도 농업고급사는 너무 빨랐고 쏘련의 원동 100여개의 마을은 원래 중국의 령토라는 등의 대자보를 써 붙였다.

잠깐 사이에 대명대방(大鸣大放)이였고 대자보와 대변론이 란무했다. 조용하던 교정은 질서가 란잡했으며 선생님은 강의를 하지 않았고 학생들은 수업에 참가하지 않았다. 대명대방이 지난 뒤 우리 반을 제외한 우리 학년의 기타 3개 반에서 6명이란 우파를 잡아냈다. 전 학년 학생의 5%를 차지한다. 당시 나는 중국어능력과 문자수준이 낮아 회의에서 발언도 하지 않았고 대자보를 쓰지도 않아 나의 관점은 피력되지 않았기에 다행으로 재난을 피면하게 되었다. 이번 반우파투쟁에서 우파로 인정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우파로 내세우는 바람에 계급투쟁이 확대하였고 지식인들은 감정을 상하게 되였다. “4 인무리”를 분쇄한 후에야 비로소 그들의 모자를 벗기고 정책을 시달했다.

1964년 가을부터 1965년 여름까지 나는 두차례 농촌 사회주의교육운동 즉 “4 청(정치, 경제, 사상과 조직을 청산)”에 참가하였다. 제1차는 료녕성 김현(金县)에 갔었다. 시험적으로(试点) 가는 인원이 방대하였고 단장은 료녕성당위 백잠(白潜) 부서기였고 분단장은 우리 연구소 부소장인 하석린(何锡麟 행정 8 급)이였다. 나는 대련 감정자(大连甘井子) 파출소 최보성(崔保盛) 소장과 함께 대고산공사 우툰(于屯)에 분배받았다. 우리는 “4청”지휘부의 요구대로 농민들과 같이 자고 먹으며 같이 일을 하고 “다섯가지를 먹지 말라"는 지시에 따라 입쌀, 물고기, 고기, 알(닭알, 오리알, 거위알 등)과 술을 마시지 않았다.

곤난방문을 통해 빈하중농들과 관계를 돈독히 하였고 군중을 발동하여 생산대의 장부, 사원의 공풀장부를 조사하면서 생산대 간부들을 모두다 “층계를 디디고(上楼)”, “손발 씻기(洗手洗脚)"를 진행했다. 실제로는 생산대 간부들에 대한 심각한 타격이다.

“4청”운동의 조직처리단계에서 나는 대량적인 내외 조사재료와 정책에 근거하여 한 “력사반혁명분자”의 모자를 벗기고 한 “반 사회주의 청년”도 규정했으며 한 “부농자제”도 혁명군인성분으로 고쳐주었다.

두번째 “4청”운동은 북경시 방산현(房山县) 남상악(南尚乐)공사 진강영(镇江营)에서 지도원직무를 맡았다. 여기의 “4 청”운동은 1기와 같아 조직처리단계에서 1938년 공산당에 가입한 로당원을 정책적으로 제명했다. 그는 나쁜 일이라면 다하는 온갖 악한이였다.

“4청”은 극좌 로선의 지도하에 “당내에서 자본주의 길을 걷는 당권파”를 처리하는 일이였지만 사실은 문화대혁명이 농촌에서 예고된 것이다. 계급투쟁시대에 부분적인 사람들의 한을 시정하고 나쁜 사람을 다스리는 일은 큰 위험성이 존재했다. 그러기에 나는 문화대혁명기간 가슴이 조마조마했지만 그래도 무사했기에 내가 한 것은 옳았다고 본다.

전례없던 문화대혁명이 일어났을 때, 나는 방산에서 “4청”운동을 하고 있었다. 1966년 6월에 연구소에서는 우리에게 연구소로 돌아와 문화대혁명에 참가하라는 통지를 발송했다. 나는 신문과 방송을 통해 문화대혁명의 메시지를 좀 알고 있었으나 문화대혁명은 문화예술계의 일이지 우리와는 별 상관이 없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연구소에 돌아와 보니 상황은 달랐다. 가는 곳마다 연구소 당조직에 질문을 들이대는 대자보가 붙어있었다. 전에 정치 표현이 그다지 좋지 않는 사람들은 팔장에 홍위병 완장을 차고 위풍을 부리며 거들먹거려 짙은 계급투쟁의 화약냄새가 풍겼다.

내가 연구소로 돌아온 이튿날 오전에 연구소 당조(所党组)확대회에 참가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당조회의에서 어떻게 문화대혁명을 이끌고 어떻게 군중을 발동할 것인가를 연구하는 회의였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회의가 시작된 지 얼마 안되어 홍위병과 반란파가 회의장에 몰려와 이 회의는 문화혁명을 파괴하고 혁명군중운동을 진압하는 “검은 회의(黑会)”라고 당조직을 비난했다. 반란파와 회의참가자들은 이튿날 새벽까지 격렬한 쟁론을 하였다. 그들은 당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모두 자기의 관점을 밝히란다. 어떤 사람은 그 자리에서 당조직의 회의는 반혁명회의라고 했지만 나는 이번 당조직의 회의는 절대 “감은 회의”가 아니라는 태도를 명백히 표시하였다. 이 태도로 인해 내가 문화대혁명에 참가한 이튿날 나는 당위를 보호하는 “보황파”란 모자를 썼다. 이번 회의가 끝나자 당조직은 옆으로 물러섰다.

운동이 심입되자 운동을 령도하기 위해 상급에서 공작대를 파견했다. 한번은 공작대를 철소하는가 아니면 계속 남아있겠는가에 대해 변론이 있었다. 나는 변론대회에서 공작대는 많은 일을 했으니 응당 우리와 함께 계속 혁명을 해야 한다고 말했더니 “공작대 보호자”란 문화대혁명의 두번째 모자를 쓰게 되였다. 당시 마음이 답답하고 괴로웠으며 지나친 억압에 문화대혁명에서 “출신이 좋지 않았던” 우리 몇 사람도 “홍기전투대”라는 홍위병조직을 건립했다. 전투대가 건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967년 여름, 우리 전투대의 류진방(刘振邦)이 쓴 대자보를 나더러 붓글씨로 쓰라 했다. 내가 얼핏 보니 대자보는 강청(江青)을 비판한 문장으로 언어가 너무 공개적이여서 상대방에게 꼬리 잡힐 가능성이 많았다. 일부 동지들과 상의를 거친 후 문자에 약간의 수정을 하였는데 말투가 좀 완화되였으나 얼핏 보아도 야심가와 음모가 강청을 비판한 것임이 한눈에 안겨 왔다. 대자보를 그날 저녁에 천안문 성벽에 붙여놓았다. 이 대자보는 큰 일을 저질렀다. 이튿날 북경이 발칵 뒤집힐 정도였다. 우리는 “반동조직”으로 몰렸고 반란파들은 우리 전투대원들을 잡으려 날뛰었고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려고 하였다. 우리는 다시는 연구소에 있을 수 없어 어떤 사람은 숨어있었고 어떤 사람은 달아났다. 나는 반석 처가집에 가서 석달 넘게 숨어있었다.

나는 극심한 심리적 압력과 두려움으로 몇날 며칠 동안 밤잠을 설치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고 정신이 황홀하여 반년간 진정제를 먹지 않으면 안 되였다(실제는 정신병환자가 먹는 약). 나의 머리는 큰 손상을 받았고 기억력이 감퇴되여 경상적으로 이것저것을 잃어버리곤 한다. 하여 어떤 사람들은 사람의 령혼을 촉진하는 문화대혁명은 나를 병신으로 만들었으며 나의 똑똑한 머리는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혼란한 상태를 수습하기 위해 1969년, 상급에서 로동자, 해방군 모택동 선전대를 파견하였다. 우리 연구소는 전체 직원이 106 명이 되였으나 “중재구(重灾区)”로 선전대 인수가 무려 52명이나 된다. 거의 1대 2의 비률이다. 선전대로 온 사람들은 만만치 않아 문제를 만들어 우리를 괴롭히려 했다. 그들이 주둔한 후 첫번째 명령은 우리를 집중시켜 땅바닥에서 자란다. 이전에 우리는 푹신한 침대와 의자가 있는 서이호텔 북배루(西颐宾馆北配楼)에서 기숙하여 조건이 좋았다. 그들은 우리 보고 하는 말이 “너희들은 이렇게 좋은 데서 사니 모두 수정주의 싹이지!” 그들이 온 후, 두파의 군중을 련합시켰고 연구소도 군의 명칭대로 련대(连队)라고 고쳤으며 식사할 때도 줄을 섰다. 우리는 매일 아침에 청시하고 저녁이면 회보하였으며 어록을 외우고 충절무를 추었으며 낮에는 부근 공사에 가서 로동 “개조”를 해야 했다.

내가 처음으로 계급대오를 청산하는 운동에 참가한 곳은 하남성 식현(息县) “5·7”학교이고 후에는 하남 명항(明港)의 한 병영이었다. 림표 1호 호령으로 북경에 있는 정치위험분자와 리기분자를 외지로 분산시켰다. 류소기, 등소평 등은 이런 배경하에서 외지로 쫓겨 갔다. 중직기관“中直机关”을 “5.7”대학교라는 이름으로 모두 외지로 분산시킨 것은 실제는 고대 류배(流放)의 변종이였다. 우리 “5.7”학교는 하남 식현 동악(东岳)공사에 있었다. 식현 경내에 몇십개의 이러한 중직기관간부학교가 있었다. 동악은 내가 가본 지역중 자연조건이 가장 나쁜 고장이다. 회하범람구(淮泛区)에 속해 끝없는 평지로 봄이면 7, 8급 이상의 바람이 불어 지붕이 날려갈 념려로 마을 사람들은 흙벽돌로 쌓은 나지막한 집을 지었다. 남쪽방향에 세수대야만한 구멍 하나를 남겨 햇빛이 쬐여들도록 했다. 여름철 기온은 40℃까지 접근하여 밤중 전에는 잠을 잘 수 없었고 밭일은 해가 뜨기 전과 해질무렵에 했다. 어느 날 오후 조끼를 입고 채소밭 일을 하는데 뜨거운 해빛에 쪼여 등에는 팥알만한 빨간 물집이 총총히 튕겨났다.

그곳은 점토땅였고 비가 자주 왔다. 비가 오면 질척한 흙이 발에 붙어 떨어지지 않으며 걷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비만 그치면 땅땅해진 땅은 곡괭이날도 찍혀 들어가기 힘들다. 낡은 풍습에 전기가 없었으며 식량창고도 없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볼 수 없었다. 공사간부들의 로임은 매달 30원도 안되였으며 손목시계를 찬 공사간부가 아주 적었다. 그곳은 목재가 없어 학생들의 책상, 걸상과 농민의 량식 저장창고도 모두 점토로 만들었다. 돼지우리도 없어 돼지와 사람이 한 집안에 있다나니 주방도 돼지우리 같았다. 너무 가난해서 도적이 욱실거리였는데 50대 사람들은 거의 다 도적질을 하였다. 그들은 문학연구소에서 집을 지으려는 목재를 하루밤 사이에 훔쳐갔다. 공사를 통해서야 비로소 잃어버린 목재를 찾아올 수 있었다.

우리는 낮에는 벽돌을 구워 집을 짓거나, 농사를 하거나 채소를 심었으며 저녁에는 계급대오를 청산했다. 잔혹한 투쟁과 무정한 타격으로 전체 간부학교에서는 7~8명이나 자살을 했다. 어떤 사람은 목매여죽고 어떤 사람은 층집에서 떨어져 죽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팔을 베였다. 가장 비참한 것은 마음에 없는 말을 하기 싫어 끓는 물을 입에 부어넣어 혀와 목이 익어 다시는 말을 할 수 없게 된 일이였다.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지만 학교는 시체를 삿자리에 둘둘 감아 그 자리에 묻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 한 사람은 국경절에 술을 마실 수 있는 틈을 타서 한번에 술 두근을 마셔 알콜중독에 걸렸고 일주일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깨어났을 때는 벌서 페인이 되여있었다. 이번 계급대오 청산은 모두가 심사대상이었고 그중 5분의 1은 중점심사대상으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각종 정치모자를 쓰고 징벌을 받았다. 물론 당의 11기 3차 전체회의에서 오류를 바로 잡았고 정책을 시달하였지만 이것은 뒷이야기다.

나는 간부학교에서 후근패(后勤排) 취사반에 분배받아 구매와 채소 심는 일을 하였다. 취사반장은 장씨로서 장문천(张闻天)의 전문료리사였다. 조직에서 장문천을 외지로 쫓아내자 그는 우리를 따라 이 학교로 왔다. 장문천은 준의회의때부터 중공중앙 총서기 직무를 맡았으나 려산(庐山) 회의 문제로 모주석의 동의하에 우리 경제연구소에 와서 특별연구원으로 되였다. 그의 사무실은 우리 사무실 옆에 있었고 그는 사람을 친절하게 대하여 우리는 그를 “문천동지”라고 불렀다.

나는 장반장의 요구대로 가까운 시장에서 채소를 사오군 했다. 그곳은 저울에 달아 사고 파는 것이 아니라 눈짐작으로 값을 매겼다. 나는 책에서 돼지의 목, 키, 길이와 배를 보고 통돼지의 무게를 계산하는 공식을 본 적이 있어 내가 사온 돼지는 항상 돼지 머리와 내장이 더 남았다. 하여 상급의 칭찬을 받을 때도 있었다. 한번은 돼지 한마리를 사서 돌아오는데 이미 날이 저물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차에서 깜빡 졸다가 전신에 식은땀이 날 정도로 깜짝 놀랐다. 돼지가 보이지 않았다. 극도로 긴장한 나는 오던 길을 되돌아 돼지 찾으러 내려갔다. 다행이 다리가 묶인 돼지는 달아나지 못하고 달빛 아래에서 꿀꿀거리고 있었다. 너무 기쁜 나는 “'돼지할아버지’, 당신은 나의 목숨을 구했소!”라고 소리 질렀다. 이것은 내가 간부학교에 와서 가장 기쁜 일이였다.

간부학교에서도 재미 있는 일과 우스운 일이 있다. 이 지방은 비료가 없으면 곡식이 자라지 않아 마을 사람들은 광주리를 등에 메고 돌아다니며 거름을 준다. 어느 날 그들이 문학연구소 주둔지에 오니 작은 키에 머리가 큼직한 로인이 변소 옆에 작은 걸상에 앉자 책을 보고 있었다. 그들이 변소에 들어가 분변을 퍼내고 있었으나 그는 못 본 척 하였다. 그들은 그 로인이 바로 모주석이 지명하여 비판한 중국의 홍학(红学)권위 류평백임을 알자 거기에 와서 분변을 훔쳐가는 사람은 날이 갈수록 많았다. 류평백이 변소를 지키니 문학연구소의 변소는 날마다 깨끗해졌다. 그후 주총리의 의견에 따라 류평백을 북경으로 모셔왔다. 북경으로 돌아온 그날 류평백은 왕부정(王府井) 식당에서 북경오리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 배가 터져 죽었다고 한다. 당당한 학문권위가 밥 먹다가 죽었다고 하니 참으로 비참한 일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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