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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11) 부억녀
2024년 01월 11일 14시 03분  조회:868  추천:0  작성자: 김장혁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2장

                       
                              2. 부엌녀
 
     
 
 
     가을바람이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의 하현달을 스쳤다. 처량한 달빛이 영월동을 희끄무레 비추었다. 창렬의 집 지붕이 달빛에 앙상하게 드러났다.
      집 문이 열리면서 은녀가 나왔다.
      집 안에서 쿨룩쿨룩 기침소리와 함께 “은녀야, 이 달밤에 어디로 가냐? 그 집에는 못 간다.”라고 하는 창렬의 목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뒤이어 창렬의 처 명순이 뒤따라 나오면서 은녀의 손목을 잡았다.
     “어디로 가는 거냐? 한씨 댁에 못 들어간다. 어서 집에 들어가자.”
     어머니가 손목을 잡아 마구 끌었다.
     은녀는 어머니의 손을 마구 뿌리쳤다.
     “엄마, 내가 들어가지 않으면 우리 집 기둥을 빼주겠습니까?”
     명순도 더는 말릴 힘이 없어 못이 박힌 듯 우두커니 서서 은녀가 개울가로 내려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명순은 두 볼로 흐르는 눈물을 삼키면서 개울가에까지 따라 나왔다.
     “얘야, 아무튼 몸을 주의해라. 그 색마 같은 한길수를 주의해라.”
     “나도 다 컸으니 근심하지 맙소.”
     은녀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저고리 동전을 들어 닦으면서 개울물을 따라 허둥지둥 걸어 내려갔다.
     달빛을 싣고 졸졸 흐르는 개울물, 은녀는 그 개울물에 놓인 징검다리를 보자 둔덕 저쪽에 있는 칠성 오빠네 집 쪽에 눈길을 보냈다.   
      성칠 오빠 집의 등잔불빛이 눈물이 고인 은녀의 눈에 희미하게 알른거리면서 뜨였다.
     은녀는 한숨을 호- 내쉬면서 맥없이 개울가에 쪼그리고 앉았다.
    은녀의 귀전에는 성칠 오빠가 말고삐를 잡으면서 자기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알려라.”라고 하던 말소리가 쟁쟁하게 들려왔다.
    (어쩐담? 믿을만한 사람은 성칠 오빠 밖에 없다. 알릴까?)
    은녀는 엉거주춤 일어서다가 되 물앉았다.
    “안돼. 내가 들어가서 고생할지언정 성칠 오빠까지 부담시킬 수는 없지.”
    왕 왕 왕!
    성칠네 집 쪽에서 검둥이가 짖어댔다.
     은녀는 저도 모르게 머리를 들어 피뜩 성칠네 집 쪽을 바라보았다. 등불 빛에 키가 후리후리한 검은 그림자가 얼른거렸다. 그 그림자는 마당에서 장작개비를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오빠, 난 어쩌면 좋아? 흑흑흑,”
     은녀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흐느껴 울다 말고 양태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그럴 수는 없어. 이 몸이 더 고달프면 고달팠지.”
     은녀는 독한 마음을 먹고 개울 아래쪽으로 걸어갔다.
     이때 갑자기 버스럭 소리가 개울가에서 들려왔다. 은녀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몸을 옹송그리고 소리나는 쪽을 살폈다.
     킹!
     버드나무숲 속에서 버스럭 버스럭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검둥이가 뛰어나왔다.
     “검둥이야, 네가 웬 일이냐?”
      검둥이는 뛰어와서 은녀의 치마 밑으로 발등과 장딴지를 핥을 상을 했다. 따뜻한 코김이 발등을 간지럽혔다.
     은녀는 쪼그리고 앉아 검둥이의 뒤통수를 매만지다가 다독여주었다. 검둥이는 은녀의 품에 안기면서 끼깅거렸다. 검둥이는 성칠을 따라다니면서 자기 주인과 은녀의 각별히 친한 사이를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검둥이도 마치 은녀의 가련한 처지를 불쌍해하는 것 같았다.
     이때 징검다리 쪽에서 인기척소리가 났다.
    은녀가 검둥이 잔등을 쓸어주다가 머리를 들어 그쪽을 바라보니 달빛아래 후리후리한 사나이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담배불빛이 희끄무레 밝아지더니 성칠의 덩실한 코 마루와 입이 보였다.
     “오빠, 으흐흑.”
     은녀가 뛰어가서 성칠의 품 안에 안기면서 어깨를 들먹였다. 쓸쓸한 하현달빛을 빌어 은녀의 눈에서 줄줄 흐르는 눈물을 볼수 있었다.
    “은녀, 웬 일이냐?”
    성칠은 은녀의 어깨를 다독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는 검둥이가 개울 쪽에 대고 왕 왕 왕 짖어대자 사냥꾼의 민감한 감각으로 개울가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이상해 검둥이를 따라 집에서 내려왔던 것이다.
    “은녀야, 어서 말해라. 너 무슨 일이 있구나.”
     은녀는 어깨를 들먹이면서 성칠의 품에서 스르르 나왔다. 처량한 하현달빛에 그녀의 눈에 고인 눈물이 쓸쓸하게 반짝였다.
     이윽고 은녀는 목안으로 들어가는 소리로 말하였다.
     “한영감이 나를 부엌여로 들여갈 예산이오.”
     성칠은 은녀의 두 팔에서 손을 떼면서 한길수가네 집 쪽에 침을 퉤 뱉었다.
     “그 놈 새끼! 언감 네한테 손을 댄단 말이냐? 들어가지 말라. 그 놈이 감히 어쩌는가 두고 보자.”
     성칠은 열이 올라 씩씩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안 되오. 내가 가지 않으면 길수 놈이 빚 대신 우리 집 기둥을 뽑아가겠다고 했소.”
    “쳇, 그러기만 해보지. 가만 놔두지 않겠다. 가자, 집으로 돌아가자.”
     성칠은 은녀의 손목을 잡고 마구 집 쪽으로 끌다시피 했다.
     은녀는 끌려가면서 통사정했다.
     “이러지 마오. 내 이 밤에 가지 않으면 그 번들 이마가 내일 개다리들을 끌고 와서 집을 허물어갈게요.”
    그러건 말건 성칠은 은녀를 다짜고짜 끌고 은녀네 집 쪽으로 향했다.
    “일없다. 내 방법을 댈게. 너를 그 쌍놈 영감태기네 집에 들여보낼 순 없다.”
    “빚을 졌으니 무슨 용빼는 수 있소?”
    그 말에 성칠이도 은희를 마구 끌고 가다가 손을 스르르 놓았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담배쌈지를 꺼내 담배를 말아 부시를 쳐서 불을 붙여 물면서 개울가 모래바닥에 물앉았다.
     개울물이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면서 파란 가을 하늘과 달빛을 싣고 졸졸 흐르고 있었다.
     은녀도 성칠의 옆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은녀는 조약돌을 쥐여 애꿎은 모래바닥에 줄을 쪽쪽 그었다.
    이윽고 성칠의 입에서 콘크리트바닥에 쇠공을 굴리는 듯 목소리가 울렸다.
    “은녀야, 한영감의 빚을 물어주면 그만이야. 너는 저 개울가의 버들을 베서 버치를 틀고 나는 사냥을 해서 그 놈의 빚을 말끔히 물어  주고 네 아버지 폐병도 치료해주자.”
   “오빠, 오빠의 마음은 고맙소만 형님과 오빠네 일가에 미안하오.”
    “그런 소리를 하면 못써.”
    하현달이 치마봉을 희미하게 비추었다. 남쪽산등성이는 희끄무레 하고 산 음달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누워있었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 그들의 뺨을 시원히 적셔주었다. 어디에서인가 짝을 잃은 외기러기가 구슬프게 끼룩끼룩 울고 있었다.
    이튿날, 동녘이 푸름푸름 밝아오자 성칠은 동생 창준과 기준을 데리고 창렬의 집으로 갔다.
    성칠은 집안에 들어서자 벽에 기대여 겨우 앉아있는 창렬이를 보고 말하였다.
    “은녀 아버지 근심하지 맙소.”
     창렬은 그저 기침을 쿨룩쿨룩 했다.
    성칠이 바닥에 서서 구들에 올라가지도 않고 뒤 말을 이었다.
    “내가 사냥을 해서라도 한 씨 댁의 빚을 물어줄 테니 아예 근심하지 마시오.”
    “고맙네. 쿨룩쿨룩. 자네 신세를 쿨룩, 너무 져서. 쿨쿨, 쿨룩쿨룩. 아,”
    창렬은 일어서려고 하였다.
    “천만의 말씀, 이웃사촌이라고 서로 도우면서 살아얍지.”
    성칠은 성큼 구들에 올라가서 일어서려는 창렬을 만류하며 도로 앉혔다. 조왕간 쪽으로 하여 앉은 은녀 어머니와 은녀 그리고 은희까지 맑은 웃음을 지었다.
    창준과 기준은 형을 따라 밖에 나와 지붕에 올라갔다. 흩날리고 남은 이영을 고루고루 펴놓고 그 우에 새 단을 올려 이영을 잇기 시작하였다. 이때 은녀와 창준의 맏아들 상훈과 둘째아들 상길마저 달려와 새 단을 걸이 대에 걸어 지붕에 올렸다. 상호는 마당에 널린 새를 비로 쓸어 모았다. 기준의 맏아들 상우도 와서 마당에서 새로 새끼를 꼬았다. 여럿이 반나절을 역사 질 한 끝에 새 이영으로 탈바꿈했다.
      명순과 은희, 은녀는 집안 부엌에서 점심차비에 바삐 돌아쳤다. 은녀는 성칠 오빠가 준 장 꿩 깃털을 한대 뽑아 사랑방 천정에 꽂아놓았다. 명순은 그 장 꿩을 뜨거운 물에 튀를 해 곰의 고기와 함께 칼 모태에 놓고 돔박돔박 칼로 썰어 큰 가마에 얹었다.
      은녀가 부엌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불을 지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마에서 쌕김이 쌕 소리와 함께 뿜겨 나왔다.
     창렬은 지팡이를 짚고 마당에 서서 기침을 쿨룩쿨룩 하면서 지붕우의 성칠 네를 쳐다보았다.
     “수고들 했네. 사닥다리를 주의해 내려들 오게나.”
    성칠 네가 금방 사닥다리에서 마당에 내려서기 바쁘게 한길수가 응삼과 수길 등 하인들을 데리고 마당에 쓸어들었다.
    “에헴, 하긴 잘하는구먼. 은녀는 들여보내지 않고.”
    번들이마에 중절모자를 삐뚤게 쓰고 거들먹거리는 길수를 보고 기준의 얼굴에서는 언짢은 기색이 유표하게 흘렀다.
    은녀는 벌써 겁을 집어먹고 명순의 뒤에 숨어 두 손을 가슴 위에 맞잡고 서 있었다.
    성칠은 아주 너그럽게 한 씨 댁의 앞에 다가갔다.
    “한영감, 여기는 뭘 하러 행차했소?”
   한길수는 말이발을 앙다물고 투덜거렸다.
   “자네 삐칠 일이 아니네. 병 치료에 남의 돈을 잘 썼으면 갚을 줄도 알아야지. 양심이 있는가? 이젠 석삼년이 되도록 본전도 한 잎 갚지 않았단 말이오.”
    그때 실 돌피 같은 응삼이 우쭐해서 은녀 쪽으로 다가갔다.
     “은녀야, 어서 우릴 따라 가자. 괜히 집 기둥이 뽑히겠다.”
    그때 옆에 서있던 기준이가 어깨로 응삼을 콱 밀쳤다.
    “누가 감히 이 집 기둥을 뽑아간다던가?”
    “내다!”
    한길수는 호랑이처럼 고함치며 발길로 짚 기둥을 탁 찼다. 그 바람에 천정에서 흙 부스러기가 우수수 흩날려 떨어졌다. 주먹으로 벽을 꽝 치자 주먹만큼 벽이 우멍하게 패여 들어갔다.
    “어느 놈이 빚을 갚지 않고 내 앞에서 큰소릴 친단 말인가! 엉?!”
   기준이 한발 앞으로 나서는 것을 성칠이 막으면서 웃는 얼굴로 나서며 비아냥거렸다.
    “한 씨 주먹이라면 이 명천 바닥에서 누가 모르겠소? 손가락을 빼  빚을 갚겠소?”
   한길수는 목을 옆으로 삐뚤면서 귀를 기울였다.
    “무슨 말인가?”
    성칠은 한영감에게 다가서 나직이 말했다.
     “한 달만 말미를 줍소. 내 사냥해서 대신 갚아주지.”
     “또 기다려? 안 돼! 오늘 은녀를 데려가야겠네!”
    한길수가 으르렁거리는데 응삼이 옆에서 길쭉한 박대가리를 가로저으면서 풍을 쳐댔다.
   “그렇지요. 오늘 안으로 저 은녀를 데려가야 하겠네. 데려가구 말구. 흥!”
   응삼은 창렬 쪽으로 박대가리를 돌리더니 뱁새눈을 부라리었다.
    “나으리 벼락 같은 성미를 모르는가? 날래 은녀를 보내라구.”
   그때 기준이 썩 나서면서 들이 댔다.
   “한영감, 대체 빚을 얼마나 졌다고 은녀가 들어가야 합둥?”
   한령감은 개화장으로 땅바닥을 콕 찌르면서 고함쳤다.
   “빚을 진지 석삼년이 되니 이자에 이자까지 120원이네. 30원이면 소 한마리야. 아니, 자네들은 뭔가? 더운밥을 먹고 괜히 식은 걱정하다가 다치지 말게.”
   길수는 머리를 돌리더니 고함쳤다.
   “얘들아, 뭣들 해? 어서 저 은녀를 데리구 가자.”
    하인들이 우르르 쓸어가서 은녀의 양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러자 기준이 힘줄이 꿈틀거리는 팔을 휘둘러 하인의 귀쌈을 짝 갈기면서 땅방울같이 고함쳤다.
    “썩 피키지 못할까? 백주에 감히 남의 양가집 고운 딸을 빼앗아간단 말인가! 엉?”
    한영감은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는 자기나 뺨을 맞은 모욕감이 들었다.
    “아니, 저 놈이 개배때기를 차도 주인을 보고 차라고. 네가 감이 내 하인을 쳐? 이 놈아!”
    어지간한 사람이면 한 영감이 을러메기만 해도 질겁해 진작 달아났으련만 기준은 떡 뻗치고 서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한길수가 덮쳐 와서 개화장으로 탁 내리쳤다. 기준은 개화장을 떡 받아 쥐고 비틀었다. 한영감은 준비 없이 개화장을 휘둘렀다가 뜻밖의 반격을 받아 개화장을 빼앗겼다. 한길수는 중절모자가 땅바닥에 떨어져 굴면서 박 같은 번대 머리가 드러나고 말았다.
     “에끼, 이 놈, 언감 대들어?!”
    길수는 숱한 마을 사람들 앞에서 망신당하고 말았다. 그는 체면을 세우려고 이번에 왼손으로 치는 척하다가 오른 주먹으로 기준의 얼굴을 내질렀다. 이번에도 기준이가 날아드는 주먹을 몸을 낮추면서 왼손으로 탁 쳐올려 막으면서 피했다. 뒤이어 날아드는 왼손을 턱 받아 쥐고 비틀었다.
    “애개개, 이 놈이, 울뚝이놈. 애비 같은 사람과 정 버르장머리 없이 노는구나.”
    이때 응삼이 뒤에서  영팔, 수길 등 하인들에게 고함쳤다.
    “자네들은 뭘 하는가? 주인어른이 당하는데.”
     영팔과 수길은 동네방네에 소문난 한다하는 싸움군이였다. 그들은 대판 팔을 걷고 싸움판에 뛰어들었다.
     “기준아, 그만해라!”
    성칠이 말렸다.
    이때 은녀가 고함치면서 앞에 썩 나섰다.
    “이러지들 맙소. 내 부엌데기로 들어가면 모든 게 끝이 아니겠소.”
    기준도 한길수도 모두 손을 놓았다. 한길수는 오른손목이 아파 왼손으로 부여잡고 오만상을 찌푸리었다.
     “그래, 진작 그래야지. 에이, 팔목껍질이 다 벗겨졌군.”
      한영감은 시어미 역정에 개 배때기를 찬다고 기준이랑은 감히 업신여기지 못하고 창렬의 목덜미를 잡아 활 밀쳤다.
     “이게 다 네 놈 탓이야! 죽여치울 놈, 빚을 갚지 않고 저 놈들을 믿고 우쭐대?”
    창렬은 엉덩방아를 찧고 땅바닥에 쓰러진 채  가슴을 부여잡고 기침을 쿨룩쿨룩 했다.
    그새 응삼이가 땅바닥에 떨어진  중절모를 주어 한길수의 번대머리에 삐뚤게 씌워주었다.
     뒤이어 하인들은 은녀를 붙잡다 싶이 하여 앞세우고 개울 아래쪽으로 향해 발걸음을 뗐다. 창렬과 명순은 저쪽으로 가면서 이쪽을 되돌아보는 은녀를 보고 땅을 치면서 울었다.
    성칠은 보다가 안 되여 한길수에게 통사정을 하였다.
    “은녀를 제발 데려가지 맙소. 내 사냥을 해서 꼭 빚을 물겠습구마.”
    “은녀를 먼저 데려갈 테니까. 자네가 사냥을 해서 빚을 물면 그때 다시 내오게나.”
   성칠은 별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기준만은 울뚝 밸을 못 이겨 눈에서 불길이 이글거렸다.
    “사람을 업신여겨도 유분수지. 아무리 빚을 졌다고 남의 딸을 빼앗아가다니. 이 집에서는 어떻게 농사를 짓고 산단 말이요?”
    한길수는 개화장을 휘둘러 기준이를 가리키면서 빈정거렸다.
    “아하, 아직도 은희와 상호가 있지 않는가? 저 울뚝밸이 정말 귀찮게 논다니까? 이 담에도 오늘처럼 그렇게 버릇없이 놀다가는 내 버릇을 단단히 가르쳐줄테다.”
   한길수는 개를 잡은 포수처럼 우쭐해 어깨를 으쓱하면서 응삼과 수길 등 하인들을 데리고 개울 쪽으로 내려갔다.
    저 불쌍한 은녀를 보라. 하인들에게 납치되다 시피 해 개울 아래쪽으로 내려간다. 그 처참한 광경을 보고 창렬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가슴을 치면서 울음보를 터뜨렸다.
    “다 내 잘못이지. 내 빨리 죽었더라면 빚을 지지 않고 살았겠는데. 은녀를 언제 찾아내오겠느냐? 어이구. 내 딸아. 쿨룩, 쿨룩.”
    명순은 남편을 부축하여 딸이 랍치돼 가 텅 빈부엌으로, 괴로움만 남은 쓸쓸한 부엌으로 들어갔다. 적막감의 꼬리를 붙잡고 부자집으로부터 오는 공포가 하품 하며 스물스물 기어 들어온다.
    둘째딸 은희는 저고리 동전으로 눈물이 글썽한 눈 굽을 찍었다.
    상호가 엄마를 달래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엄마, 울지 마! 응? 울지 마. 흑, 흑, 흑.”
    그 광경을 보고 모두들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성칠과 기준은 격분해 씩씩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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