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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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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37)
2016년 04월 01일 14시 32분  조회:1913  추천:1  작성자: 김장혁



                                 2. 어린 누나
      윙-윙-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무릅쓰고 최경숙이 살던 고향이라고 운주동으로 돌아가 보니 마을은 볼품없이 돼버렸던 것이다.
      글쎄 집 문 앞에까지 나무를 심어놓아 앙상한 나뭇가지가 눈보라 속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아버지가 애들을 가르치던 서당은 문을 꽁꽁 닫아걸었고 대신 마을 복판에는 일본 학교가 보란 듯이 도고히 도사리고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늘그막에 일어를 배워가지고 일본 학교에서 마지못해 일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경숙은 위방에 들어가 아버지에게 권고했다.
      “아버님, 섬나라 오랑캐들 말을 그만 가르치고 간도로 들어갑시다. 간도에는 확실히 땅이 많고 소작료도 절반 밖에 받지 않습디다. 혼자 날 농사를 지었는데 소작료를 물고도 낟알이 서너 마대나 남았습니다. 죽물이라도 먹으면서 살 거 같습디다.”
       최구장은 구부정한 허리를 펴면서 목멘 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그래? 큰 사돈어른 노친이 간도에서 사망됐다니 참 섭섭하구나. 죽순이랑 잘 있느냐?”
     경숙은 농사일을 하느라고 검실검실하게 탄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
“예, 잘 있습니다. 그 애넨 중국 지주네 밭을 붙이는데다 함흥촌 앞쪽 평평한 곳에 밭을 개간해서 죽물은 푼푼히 먹고 삽니다.”
“그래? 그럼 한시름 놨구나.”
최구장은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곰방대를 뻑뻑 빨았다.
경숙은 아버지한테 다가앉으면서 조용히 간곡한 청을 들었다.
“아버님, 우리도 간도로 들어갑시다. 여기서 일본 놈들의 성화에 어디 살겠습니까? 손바닥만 한 땅도 없지. 저 마당에까지 나무를 심었으니 뭘 먹고 살겠니까?”
그러나 최구장은 한숨을 구들이 꺼지게 내쉬면서도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간도에 간들 일본 놈들의 마수에서 벗어나겠냐? 봐라, 네 말을 들어보니 간도에서도 함흥촌이 토벌을 맞았다고 하지 않니? 사람이 배불리 먹고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굶으면서도 고향을 지키면서 사는 건 더 중요하다. 혹시 배불리 먹고 살아도 자기 나라와 민족, 고향을 잃고 살아서야 죽은 거나 다름없다.”
경숙도 말을 꺼낸 바 하고는 끝을 보려고 들었다.
“아버지, 일본 학교에서 일어를 가르치고서야 어찌 자기 민족을 위해 산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예 일본 놈들의 마수가 덜 미친 간도에 가서 새 고향을 꾸리고 서당도 세운 후 우리 글을 가르치면서 사는 게 어떻습니까?”
“이놈 자식, 아무 말이나 다 하느냐? 내 일본 학교에서 우리 애들에게 일어를 가르치는 게 어째 가르치는지 알기나 하면서 지껄이는 거냐?”
최구장은 성을 벌컥 냈다.
드디어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나직이 말했다.
“이 놈아, 일본 놈들을 우리 고향에서 몰아내려면 우리 애들이 물론 우리 조선어를 먼저 알아야지. 'ㄱ, ㄴ, ㄷ, ㄹ'가 칼이 되고 총알과 폭탄이 될 수도 있지. 일본 놈들을 치려면 일어도 알아야 해. 독은 독으로 쳐야 한다고 악귀들의 말도 배워두면 일본 놈들을 치는 강력한 무기로 될 수도 있어.”
경숙은 머리를 숙였다.
“아버님, 용서하십시요. 아버님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횡설수설해서 미안합니다.”
한참 후 경숙은 마지막으로 간청을 드렸다.
“아버님, 온 집 식구들을 데리고 간도에 들어갑시다. 그 길만이 살 길입니다.”
최구장은 바로 고쳐 앉아 결연히 말했다.
“안 가! 조상들의 뼈가 묻힌 고향 개성을 떠난 것만 해도 염통이 쓰린데 간도 허황한 벌판으로 가? 정 가고 싶으면 너나 먼저 들어가라. 난 죽어도 간도 황야 땅에 안 간다, 안가. 다신 내 앞에서 간도 말을 꺼내지도 말라.”
경숙은 아버지 고집을 이길 수 없어 속이 탔다.
이때 정지에서 어린애 울음소리가 자지러지게 들리었다. 경숙은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면서 한숨을 지었다. 또 갓태여난 근룡이 젖이 없어 우는 모양이었다.
경숙은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정지로 나갔다.
“명옥아, 동생을 업구 나가서 동냥젖이라도 얻어 먹여라.”
“예.”
명옥은 갓 태어난 지 대여섯 달 밖에 안 되는 동생 근룡을 업고 눈보라치는 바깥으로 나갔다.
경숙은 집안을 돌아보면서 두덜거렸다.
“애에미는 어디로 갔니? 우는 애는 젖을 얻어 먹일 궁리는 하지 않고.”
경숙은 애 때문에 꽤나 속을 태웠다. 후처 김순금은 강릉 김씨네 맏딸이었다. 그런데 집이 어찌나 가난하였는지 그의 아버지는 늘 그를 남의 집에 1년이나 3년씩 줘 보내 소나 방목하면서 죽물이나 얻어먹고 연명하게 했다. 그러다가 스물세 살 때에야 그래도 운주동에서 살림형편이 괜찮은 최구장의 맏아들 최경숙의 후처로 들여보냈던 것이다. 처녀 몸으로 마흔도 넘은 경숙의 후처로 들어온 순금은 젖이 나오지 않아 애를 먹이지 못해 늘 투덜거렸다.
그는 쩍하면 자기보다 네댓 살 밖에 어리지 않은 선처의 오누이 근형과 명옥을 보고 남편의 뒷소리를 했다.
“별 늙은 영감을 마른 비행기를 다 태운다. 다  애비 무능한 탓이야. 어떻게 가난하면 먹지 못해 애를 먹일 젖도 안나오겠니.”
근형과 명옥은후 어머니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후어머니가 아버지를 늙었다고 욕하는 것만은 알아듣고 불쾌해했다.
근형과 명옥은 처음에는 후 어머니가 자꾸 아버지를 욕한다고 아버지에게 고자질했다.
“아버지, 아버지, 저 후엄마 자꾸 아버지를 욕합디다.”
“뭐 어쩌더냐?”
경숙은 다 큰 근형을 보면서 물었다.
근형은 들은대로 “별 늙은 영감을 마른 비행기를 다 태운다고 합더구마.” 하고 전해주었다.
      경숙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너부죽한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
     “그래? 일 없다. 건 욕하는 게 아니야. 후에 다신 계모 뒷소리를 해선 안 돼. 계모두 엄마야. 엄마 말을 잘 들어라.” 
경숙은 처녀 몸으로 계모로 들어온 색시 억울한 심정을 헤아리는 만큼 그저 지나쳐 버리곤 했다.
그 후부터 근형과 명옥은 네댓살 밖에 이상이 아니지만 계모 뒤 말을 하지 않고 시키는 심부름이랑 아주 잘했다. 그런데 후어머니는 젖이 나오지 않아 근룡은 낳은 날부터 젖을 온전히 먹지 못하여 늘 배고파 울었다. 그런데 순금은  동네 집으로 놀러 나가 집에 없군 했다. 그리하여 경숙은 명옥을 보고 불쌍한 동생을 돌보라고 부탁하군 했다. 명옥은 남동생이 불쌍해 업고 나가 동냥젖을 얻어 먹이군 했다. 그런데 하루 이틀이지 날마다 명옥이가 동냥젖을 얻어 먹이자고 하니 동네 애 엄마들이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명옥은 평소에 동네 애 엄마네 집에 가서 물도 길어주고 바느질두 해주고 맛 나는 음식이 생기면 가져다 주군 했다.
명옥은 근룡을 포대기에 싸 업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데 동네에 동냥젖이라도 얻어 먹이자고 나갔다.
그는 동네 애 엄마네 집으로 가다가 집 울안에서 어미염소가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것을 보고 두덜거렸다.
“염소도 제 새끼를 젖을 먹이는데 우리 후 엄마는 어쩜 제 난 애도 젖을 먹이지 않고 놀러 다녀요?”
그런데 명옥은 피뜩 떠오르는 생각이 들었다.
(옳지, 우리도 염소를 기르면 근룡의 젖이 근심이 없을게 아닌가.)
명옥은 그날 동냥젖을 겨우 얻어 먹인 후 집으로 부랴부랴 돌아와 아버지께 간청을 드렸다.
“아버지, 우리 염소를 삽시다.”
경숙은 명옥을 한심하다고 마주 보았다.
“왜?”
명옥은 자기 주견을 내놓았다.
“젖이 나는 어미염소를 사면 우리 근룡이 젖 근심을 하지 않아도 될게 아닙둥?”
그러나 경숙은 도리머리 질 했다.
“에이, 산 사람도 입에 풀칠을 하기 힘든데 언제 염소를 사겠니? 또 어데 불시에 젖이 나는 염소가 있겠니?”
명옥은 “이젠 근룡이 살았구나.” 하고 환성을 질렀다.
“저 앞집 똥애네 집에 젖이 나는 어미염소 있습구마. 그걸 사깁소.”
“그래?”
경숙은 궁리 깊은 명옥을 보고 내심 감탄이 나갔다.
“이젠 우리 명옥이 다 컸구나. 어미 없이 자란 네 정말 기특하다. 그럼 그 집 염소를 사자.”
경숙은 근룡을 살려내려고 간도 함흥촌에 가서 농사를 지어 번 돈을 풀어내 염소를 사기로 마음먹었다.
명옥과 근형은 기뻐 그 길로 아버지를 데리고 똥애 네 집에 갔다. 그러자 똥애 네 엄마는 똥애에게 젖을 먹이다가 “무슨 일입둥? 올라 옵소.” 하고 인사했다.
경숙은 바닥에 선채 애를 안고 일어나는 똥애 어미를 보고 “그간 우리 근룡에게 젖을 먹이느라고 수고 많았소.” 하고 인사부터 했다.
“동네 애라고 굶겨 죽이겠습둥?”
똥애 엄마는 명옥과 두두두 거리던 때와는 달리 체면을 차렸다.
경숙은 단도직입적으로 흥정을 걸었다.
“이 집 염소를 파오.”
“예?”
똥애 엄마는 똥애를 안고 서성거리면서 경숙의 부녀를 번갈아보았다.
“남의 암염소를 사서 뭘 하겠습둥?”
경숙은 구들 끝에 걸터앉으면서 비난사정을 들이댔다.
“똥애 엄마, 지금처럼 어떻게 근룡에게 동냥젖을 계속 먹여 키우겠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래서 이집 염소를 사다가 거두면서 염소젖을 근룡에게 먹일 예산이오.”
마음씨 착한 똥애 엄마도 자기 젖을 근룡에게 갈라 먹이기보다 염소를 팔면 좋을 것 같아 제꺽 대답했다.
“그럽시다. 그런데 염소새끼는 팔지 않겠는데 어미염소를 사가면 어쩌겠습둥?”
“똥애 엄만 우리 근룡을 젖을 먹여 키워줬는데 우리 새끼 염소를 그저 키워줍지.”
“그럼 그러세요. 한 10원은 받아야겠는데요.”
그러나 경숙은 “15원을 드립지.” 하고 그 자리에서 동전을 세어 주었다.
“이래서 되겠습둥?”
똥애 엄마는 받기 미안해했다.
그러자 경숙은 사람 좋게 인사했다.
“그간 우리 근룡한테 친엄마처럼 젖을 먹였는데 감사해 더 드리는 거요. 염소까지 팔아주니 얼마나 감사한지 절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오.”
똥애 엄마는 미안해 눈치를 보면서도 동전을 몽땅 받아 까래 밑에 쓸어 넣었다.
어미염소를 산 명옥은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이젠 우리 근룡이 젖을 먹지 못해 울지 않겠어요.”
그는 아버지가 사준 어미염소를 근룡의 어머니처럼 모시면서 풍설이 이는 겨울에도 눈 속에서 마른 풀을 훑어다 먹이고 지어 자기 밥이나 죽물마저 염소에게 젖을 내라고 덜어내 먹이군 했다.
그는 어미염소에게 풀을 먹이면서 “많이 먹고 젖을 내라. 그래야 우리 근룡이 배고프지 않지. 많이 먹어.” 하고 중얼거렸다.
어미염소를 산후 근룡은 젖 근심이 없이 염소젖을 먹고 잘 자랐다.
그런데 눈풍설이 이는 날에 명옥은 염소를 먹일 풀을 얻어들이기도 여간 힘겹지 않았다.
명옥은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는 삭막한 산과 들판을 바라보면서 언제면 고향에 살구꽃과 배꽃이 피고 신록이 짙어가는 봄이 오겠는가고 손꼽아 기다렸다. 그는 염소 먹일 파란 풀이 자란 들판을 눈앞에 그려보았다.
정말 어린 남동생에 대한 어머니와도 못하지 않은 어린 누나의 사랑은 눈물겨웠다.
 
3. 생이별
빼앗긴 고향의 들에도 봄은 찾아와 훈훈한 봄바람이 불어왔다.
경숙은 후처가 둘째아들 근룡을 낳는 바람에 고향에서 그럭저럭 삯일이나 하면서 겨울을 보냈다.
어느 날, 경숙이 금방 잠자리에서 일어나 땔나무를 패려고 도끼를 쥐고 바깥을 나갈 때었다.
몇 집 건너 앞집에서 사는 막내제수 한혜옥이 손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울안으로 들어왔다.
“아주버님, 난 저 나그네와 못 살겠습구마.”
“막내제수, 또 어째 그러오?”
경숙의 물음에 혜옥은 정지로 들어가면서 투덜거렸다.
“또 본병이 발작해 그러지 어째 그러겠습둥?”
경숙은 도끼를 털렁 떨어뜨리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막내 동생 경석은 관준 영감이나 시준 영감에게서 배우라는 의술은 제대로 배우지 않고 약 담배 질을 해 집이 망할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저놈새끼를 어쩌겠니? 이전에도 막내제수 자살하려고 뒤 산에 가서 나무에 목을 맨 걸 겨우 풀어 구해냈잖은가? 그때 다신 약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더니. 갑산에 가서 감자농사나 계속 지을 게지 또 약 담배 질이니 어쩐단 말이냐?)
막내제수가 시아버지 앞에 가서 고소하는 소리와 대성통곡소리를 들으면서 경숙은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가로흔들었다.
“시아버님, 어떻게 저 근섭이 애비 버릇을 떼 줍소. 우린 못 살구 나앉게 됐습구마. 약 담배를 사자고 돈을 빡빡 끌어내가더니 이젠 집까지 내놓겠답구마.”
최구장은 하얀 수염을 슬슬 어루만지면서 막내며느리를 다독이는 말을 했다.
“아가야, 고놈새끼를 혼뜨검 낼 테니 근심 말아라. 이젠 우리 집에 들어와 살도록 해라. 밤낮 고놈을 지킬 테니 어디 약 담배를 사기나 하겠냐. 흥!”
그 말에 혜옥은 눈물을 훔치면서 머리를 천천히 들었다.
“아버님, 저를 한집에서 아버님을 모시고 살게 해줍소. 그렇찮으면 우리 집은 끝장입니다.”
“그래, 그래. 오늘로 들어오너라.”
경숙은 바깥에서 아버지와 막내제수가 주고받는 말을 듣고 속궁리 하였다.
(안 되겠다. 아무래도 간도에 가야지. 여기 있다간 온 집안이 망하겠다.)
막내제수가 저고리 고름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나오자 경숙은 윗방으로 들어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였다.
“아버지, 여기서 어떻게 살겠습둥? 간도에 들어가 삽시다. 확실히 간도는 땅이 조선보다 넓어서 살기 괜찮습더구마.”
최구장은 못마땅한 눈길로 경숙을 쏘아보았다.
“어째? 막내 들어온다고 그러니?”
“아닙구마.”
어진 경숙은 아버지 눈길을 피해 방구석을 내려다보면서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하였다.
“이 집안을 구하자면 내 먼저 간도로 들어가는 게 옳은 거 같습니다.”
최구장은 아예 맏아들의 말을 잘라버렸다.
“그만 해라. 난 죽어도 아버지와 엄마 산소를 남겨두고 고향까지 버리고 간도에 가지 않아. 더구나 조선을 버리고 연명이나 하자고 오랑캐들이 득실거리는 만주국에 가?”
어진 경숙은 오늘만은 물러서지 않고 계속 자기 생각을 말하였다.
“그럼 제 먼저 처자들을 데리고 들어가겠습구마. 간도에 살만하게 발을 붙인 다음에 그때 아버님을 모셔가겠습구마. 물론 맏이로서 불효를 저지르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달리 어떻게 고향에서 살 도린 없습구마. 팔간 집에 왁 모여서 손가락을 빨면서 마주 보면서 어떻게 살겠습둥?”
최구장은 먼 문밖 하늘을 내다보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어떻게 돼 우리 가문이 이 지경이 다 됐느냐?”
이때 불붙이에서 경인과 어금이 근원과 근현을 데리고 놀러 왔다.
경인 부부는 위방에 올라와 문안을 올렸다.
“그간 아버지와 형님, 편안히 계셨습둥?”
“오, 그래.”
이때 근원과 근현이 뛰어 들어왔다.
“할아버지!”
구장은 손자들을 끌어안으면서 얼굴의 주름살을 잠시나마 폈다.
“오, 손자들 왔구나.”
그는 어금의 잔등에 업힌 근환을 보면서 “많이 컸구나.” 하고 반기다가 “어째 근덕은 보이지 않니?” 하고 물었다.
경인은 “저기 우시장에 있는 일본사람들의 상점에 일하러 보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최구장은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에이, 이제 겨우 열세 살 밖에 안 되는 죄꼬만 게 어떻게 일본 놈들의 성화에 삐치겠느냐?”
“그래도 어찌겠습니까? 어려서부터 강하게 키워야 합지.”
최구장은 경숙을 돌아보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에이, 어쩌겠니?”
경인은 아버지와 형님을 번갈아 보면서 “그간 무슨 일이 생겼습둥?” 하고 다급히 물었다.
“네 형이 간도로 들어가 살겠다고 해.”
“예?”
최구장의 말에 경인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형님을 쳐다보았다.
경숙은 아버지 손을 잡고 꿇어 엎디면서 눈물을 흘리었다.
“아버지, 맏아들 구실을 못해 미안합니다. 저를 보내줍소.”
최구장은 먼 문밖 하늘에서 눈길을 떼더니 맏아들의 너부죽한 잔등을 내려다보았다.
“어찌겠니? 기왕 네 오래 한 생각이 그거면 간도에 가는 수밖에. 너나 들어가라. 맏사위 석은과 맏딸 죽순이두 간도 어떻게 좋고 하는데 살 길을 찾아 가 봐라.”
“좋긴 아버님과 어머님도 함께 갑시다.”
“안 된대도. 난 고향을 떠날 수 없어. 섬나라 오랑캐들한테 쫓기어 고향을 버리고 간도엔 안 가. 굶어 죽어도 고향에서 조상들의 산소를 지키면서 사는 날까지 살 테야.”
경숙은 일어나더니 큰절을 꾸벅 올리었다.
“아버지, 그럼 난 오늘로 간도에 떠나가겠습구마.”
최구장은 하얗게 서리 내린 머리를 끄덕이면서 주름이 밭고랑 같은 눈물을 두 볼에 주르르 흘리었다.
정지에서 부자간이 하는 말을 듣고 성단이가 위방에 뛰어 들어왔다.
“경숙아, 너 무슨 말이냐? 너까지 간도에 가면 이 가문은 어쩌지?”
경숙은 어머니께도 큰절을 꾸벅 올리었다.
“어머님 불효자식을 용서합소. 부모님도 인차 간도에 모셔가겠습니다.”
이때 근형이 위방에 뛰어 들어왔다.
“아버지, 엄마 산소를 두고 어디로 갑둥? 난 가지 않겠습구마.”
명옥이 보니 정지에서 새어머니는 근형의 말에 입귀를 비쭉하는 것이었다.
경숙은 열아홉 살이나 되는 근형을 보고 난감해하였다.
“할아버지도 내 간도에 가는 걸 억지로 막지 않았다. 나도 널 보고 억지로 간도에 가자고 하지 않겠다. 네 생각대로 해라. 내 대신 고향에서 할아버지를 잘 모셔라.”
경숙은 정지에 내려와서 근룡을 업고 있는 명옥에게 물었다.
“너는 어쩌겠니?”
“간도로 가지 않으면 근룡을 어쩌겠습둥?”
경숙은 머리를 끄덕였다.
근형은 발칵 성을 냈다.
“명옥아, 엄마 산소를 두고 어디로 간다고 그래? 넌 오빠하구 함께 엄마 산소를 지키자.”
명옥은 어쨌으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었다.
그때 경숙이가 “엄마 산소는 근형이 지키면 된다. 명옥은 따라가고 싶으면 가자.” 하고 결단을 내렸다.
근형은 명옥의 손을 잡고 말리었다.
“넌 오빠 말을 들어.”
명옥은 근형의 손을 맞잡고 “아버지 말은 듣지 않고? 오빠도 함께 가기요.” 하고 말하면서 오빠를 간절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근형은 명옥의 손을 활 팽개치면서 성을 발칵 냈다.
“넌 엄마가 낳은 딸이 아니냐? 가지 못해.”
그러나 명옥은 근형을 업은 채 부모를 따라나섰다.
이때 경인이가 지게를 진 경숙을 따라 나왔다.
“형님, 실은 내 명옥의 혼사 말로 내려왔소.”
“그래?”
경숙은 경인을 돌아보았다.
“아직 근형을 장가보내지 못했는데 불시에 명옥의 혼사 말이냐?”
경인은 경숙에게 다가앉으면서 귀속 말을 하였다.
“형님, 명옥이 어미 없이 불쌍하게 자랐는데 우리 막내처남에게 시집보내면 어떻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절반은 집안혼사니까 명옥이 고생하지 않고 살 거 같소.”
경숙은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사돈 지간에 혼인을 어떻게 하니?”
“일없소. 내 막내처남은 여기서 갈 때 일곱 살이지만 이젠 열여덟이나 되였소. 큰처남 같게 생겼다고 생각하면 되오."
최구장은 한참 생각하더니 “그 혼처 좋은 거 같아. 남을 주기보다 큰며느리 동생에게 주면 믿을만하지 않겠느냐?” 하고 뚝 찍어 말했다.
경숙이도 아버지 말에 “글쎄 말입니다.” 하고 말하더니 인차 “내 이번에 들어가면 너 막내처남을 보고 혼사 말을 전해주마.”라고 대답하였다.
최구장은 경인을 보고 “둘째며느리를 불러오라.” 하고 분부하였다.
그리하여 경인이 정지에 나가 어금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둘째며느리, 여기 앉소.”
어금은 근환을 업은 채 무릎을 꿇고 한쪽으로 쪼그리고 앉았다.
최구장은 곰방대를 뻑뻑 빨다가 천천히 말하였다.
“금방 경인이 명옥과 둘째며느리네 막내오라비 혼사 말을 꺼내던데 둘째며느리 생각은 어떻소?”
어금은 머리를 숙인 채 대답하였다.
“집에서 토론하고 왔습구마. 시조카는 어려서 엄마를 잃고 고생스레 자랐는데 제 남 동생한테 시집보내면 마음 놓을 거 같습구마.”
최구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경인아, 너희들이 혼사말서함이라도 써라. 경숙아 기준 사돈어른께 보내려무나.”
경인은 제꺽 “예.” 하고 대답했다.
그는 인차 위방에 있던 붓과 먹 그릇을 찾아왔다. 경숙이가 먹을 물에 갈고 경인이가 최씨 가문의 의사를 대표해 편지를 간단히 썼다.
최구장이 들고 자세히 보더니 머리를 끄떡이면서 경숙에게 넘겨주었다.
“기준 사돈어른께 적당한 시기에 전해라.”
“예, 그렇게 합시다.”
말을 마치자 경숙은 처자를 데리고 누더기를 싼 보따리를 지게에 메고 울타리 밖을 나섰다.
그때였다.
근섭이 약 담배인이 올라 비틀거리면서 들어오다가 거슴츠레 뜬 눈으로 경숙이네 일가 네 식구를 흘겨보면서 두덜거렸다.
“어째 우리 큰집에 들어온다고 보기 싫어 떠나가오?”
경숙은 술에 취한 듯이 비틀거리는 경석의 어깨를 잡아 흔들면서 애탄 소리를 쳤다.
“야, 이놈아, 정신을 차려! 이제 또 약 담배 질을 해 봐라. 네놈과 형제 인을 끊어버리겠어.”
경석은 계속 볼 부은 소리만 하였다.
“양, 옳소. 혼자 부모형제들을 버리고 간도에 가서 잘 사오.”
최구장이 보자 못해 경석의 귀 쌈을 찰싹 갈겼다.
“네 이놈새끼, 부모와 맏형님 앞에서 무슨 돼먹지 못한 소리냐? 언제 정신을 차리고 제 노릇을 하면서 살겠느냐?”
숱한 사람들 앞에서 얻어맞자 경석은 섧다고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다.
경숙은 처와 함께 넓적 엎드려 부모에게 절을 올리고나서 허리 굽혀 여러 형제들에게 인사했다. 경숙의 뒤에 보따리를 인 순금과 근룡을 업은 명옥이 뒤따라 간도를 향해 떠났다.
그는 멀어져가는 정든 고향을 돌아보더니 한숨을 후 내쉬면서 지게를 춰지고 성큼성큼 걸음을 다그쳤다.
경숙은 산정에 올라서서 동으로 유유히 흐르는 운주하와 치마봉아래 푸릇푸릇 해가는 산비탈을 둘러보았다. 수림속의 감자밭자리와 운주동 터 밭에까지 나무를 심은 지 몇해 되여 나무가 허리를 칠 지경이었다.
(후~ 섬나라 오랑캐 놈새끼들, 손바닥만한 밭에까지 나무를 심으라니 뭘 먹고 산단 말이냐?)
그는 속으로 일본 놈들을 욕하면서 고향의 뒷산 선산을 바라보는 순간 할아버지 산소에 절도 하지 않고 떠나는 불효한 자기를 발견하였다.
“아차, 할아버지 산소를 두고 가는데 큰 절이라도 올리고 가야겠다.”
순금은 투덜거렸다.
“에이고, 갈 길도 바쁘구먼. 원, 별 걱정은?”
경숙은 눈을 흘기면서 큰 소리를 쳤다.
“잔말 말고 따라와. 머나먼 간도로 가면서 조상의 산소에 가서 인사도 드리지 않으면 돼?”
그제야 순금은 찍소리도 못했다.
그들은 선산에 이르러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합장한 커다란 산소 앞에 가 나란히 늘어섰다.
경숙은 옷깃을 여미고 정중히 말씀 올렸다.
“할아버지, 할머니, 이 불효자식을 용서하옵소서. 살 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 땅이 넓은 간도로 먼저 들어갑니다. 농사를 많이 지어 잘 살게 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편안히 계십시오.”
그들은 큰절을 꾸벅꾸벅 세 번이나 올리었다. 순금은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 남편을 따라 큰절을 올렸다. 명옥은 쌔근쌔근 잠든 근룡을 업은 채 증조할아버지에게 큰절을 올렸다.
이때 순금은 시할아버지 산소 앞에 엎드린 채 흑흑 흐느껴 울었다.
경숙은 처음에는 의아해하였다. 그러나 순금이 우는 것이 이상해졌다.
“여보, 왜 우오?”
순금은 경숙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엉뚱한 말을 하였다.
“시할아버님, 이 불쌍한 손비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옵소서. 아무리 우리 본가집이 가난하다고 해도 그렇지 않습둥? 본가 집에 어디로 간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간도로 떠나야 합둥? 시할아버님, 도와주옵소서.”
경숙은 아내의 말에 도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고 도리머리 질 하였다.
“여보, 당신 효성심은 알만 하오. 지금 일본 밀정들이 우리가 어디로 가는가 뒤를 밟고 있는지 어떻게 아오? 황차 이번에 가면 영 가는 게 아니고 다시 고향에 돌아온단 말이오. 그때 인사해도 늦지 않소.”
엄마가 울자 근룡도 명옥의 잔등에 업힌 채 고사리손을 엄마 쪽에 뻗치면서 “응아-” 울음보를 터뜨렸다.
경숙은 아내의 두 손을 잡아 일으키면서 “우린 꼭 농사를 많이 지어가지고 돌아오는 게요.” 하고 얼리었다.
“말씀이야 그렇지만 이제 가면 언제 온다고 그럽둥? 흑흑.”
순금은 경숙의 말을 곧이듣지 않으면서도 조금 누그러들었다.
정작 할아버지 산소를 떠나고 고향을 떠나게 되자 경숙의 마음은 허전해졌다. 그는 고향산천을 빙 둘러보더니 처자를 데리고 무거운 발검음으로 북을 바라고 떠났다.
"이제 고향을 떠나면 언제 다시 올가?"
순금은 남편을 바라보면서 “금방 꼭 돌아온다 해놓고. 배불리 먹을 수 있다면 간도에서 살자고 그러지. 누가 이 잘난 시집 고향으로 오겠습둥?” 하고 말하였다.
경숙은 후처를 쏘아보며 “그래도 정든 고향 아니오?” 하고 퉁명스레 쏴주었다.
순금은 “하기야 여기 본댁이 묻혀있으니까 어찌 잊겠습니까? 맏아들도 저렇게 남아있지.” 하고 두덜거렸다.
저쪽 뒤 산 중턱에서 근형의 애탄목소리가 산골짜기와 들판에 메아리쳤다.
“명옥아~ 가지 말라, 엄마 산소는 어쩌고 가니?!”
“명옥아, 가지 말라, 오빠를 두고 어데 가니~?”
그러자 명옥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더니 두 손을 모아 입에 대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소리 질렀다.
“오빠- 우리 함께 간도에 가기요. 빨리 오오.”
명옥은 발을 동동 구르면서 애타게 소리쳤다. 하건만 근형은 어머니 산소에 절을 하고나서 이쪽을 눈 뿌리 빠지게 바라보면서도 오지 않았다. 명옥은 오빠가 애타게 부르자 돌아갈까고 생각하면서 멈춰 섰다.
(그런데 잔등에 업힌 근룡은 어찌겠는가? 내 없으면 간도에 가서 누가 근룡한테 동냥젖을 먹이겠는가? 또 아버지는 어쩌겠는가?)
명옥은 “오빠, 우리 함께 가기요. 빨리 오오.” 하고 울면서 고함쳤다.
그러나 오빠가 어머니 산소 옆에 떡 버티고 서 있는 것을 보고 왕왕 울었다.
그러자 경숙이가 명옥의 손을 마구 잡고 끌었다.
“네 오빤 이제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함께 올게다. 후에 내 와서 데려가겠다.”
그제야 명옥은 흑흑 흐느끼면서 아버지 네를 따라갔다. 그는 그때까지 어머니 산소 옆에 서서 손을 젓는 근형 오빠에게 손을 젓고 또 저었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몇 발자국 가다가도 저 멀리 오빠를 되돌아다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흑흑 흐느꼈다. 명옥이 고개를 넘어설 때까지도 근형은 한발자국도 까딱하지 않고 어머니 산소 옆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근형은 이쪽을 따라오면서 산꼭대기에 올라가 두 손을 입에 모아대고 고함쳤다.
“명-옥-아- 가-지 마-라- !”
“오빠- 빨리 따라 오오-”
생이별하는 오누이의 그 애처로운 목소리 산골짜기마다에 처량하게 메아리치며 울려 퍼졌다.
야속하다, 야속해. 어찌하여 오누이는 이렇게 애절한 생리별을 하여야만 하는가?
야속하다, 야속해. 구경 어느 놈들 때문에 우리 부모형제가 생리별하고 망국노의 설음을 안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간도로, 연해주로, 사할린으로,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흩어져 가서 살 길을 찾아야만 하는가?
4. 명천에서 사돈처녀
눈앞을 가리기 힘들게 눈보라가 윙- 윙- 휘몰아치는 날에 경숙은 지게에 누더기이불을 얹은 가마를 지고 처자를 이끌고 온 하루 걸어서 우시장에 이르렀다.
순금은 투덜거렸다.
“온 하루 걷고 나니 다리 아파 죽겠다. 이렇게 걸어서야 언제 간도라는데로 가겠니?”
경숙은 안해가 본가집 부모형제도 찾아보지 못하고 떠나는 억이 막힌 심정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는 말썽없이 간도로 가려고 판자 집을 가리켰다.
“저건 우시장역이오. 저기 들어가 기차를 타고 간도로 가면 하루면 다 갈 수 있소.”
순금은 언 얼굴에 대뜸 화색을 띄우면서 “기차를 타고 가? 거 호사로구나.” 하고 기뻐하다가 인차 웃음을 거뒀다.
“돈 많이 들지 않습둥?”
“아따 걱정도. 어서 역에 들어가기요.”
경숙은 꼬리를 밟는 일본 밀정놈들이 없나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는 자기 쪽에 오는 수상한 눈길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양손으로 순금과 명옥의 팔을 잡고 역 대합실로 들어갔다.
역 안에는 개찰구 쪽으로 나가는 숱한 일본 사람들로 야단법석이었다.
경숙이네도 그 뒤를 따라 개찰구 쪽으로 밀려나갔다. 대부분 팔소매 넓은 화복을 입은 일본남녀들이었다. 일본 사람들 속에 쌀에 티만큼이나 흰 무명한복을 입은 조선 사람들이 섞여있었다.
경숙이네가 자그마한 쇠살창문안에 들어서자 일본 사람이 경숙의 앞을 막으면서 기차표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경숙은 호주머니에서 동전 대여섯 개를 꺼내 손바닥을 내밀었다.
일본 역무일군은 “나니에 이끼(어디로 가)?” 하고 물었다.
일본 말을 알아들을 리 없는 경숙은 뒤덜미를 긁적거리기만 했다.
“빠가야로, 하야꾸 고다에(빨리 대답해)!”
경숙은 머리를 들고 일본 사람의 도끼눈을 마주보며 아무래도 어디로 가는가고 묻나 싶어 희죽이 웃으면서 “간도, 간도!” 하고 대답했다.
“오, 간도 나니에 이끼(간도 어디에 가)?”
“하이!”
“간도 나니(간도 어디?”
“간도 나니라니?”
일본말을 모르는 경숙은 뒷덜미를 긁적거리다가 뒤를 돌아보더니 아내와 명옥을 손가락질하면서 엉뚱하게 대답했다.
“간도 난다구? 진수해 난다.”
“진수해에 이끼?”
경숙은 손짓을 보태가면서 웃지도 울지도 못할 대답을 얼버무렸다.
"응, 진수해 산에 이끼 많지. 그래, 진수해 난다."
경숙은 “난다”는 일본 말은 “간다”는 말인가 알고 “진수해를 간다”는 말을 “진수해 난다”고 대답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 사람은 진수해란 지명만 듣고서도 경숙의 손바닥에서 동전 세 개를 쥐여내고 대신 기차표 석장을 주면서 역 밖의 플래트 홈을 가리켰다.
“이께(가게)!”
순금은 역에서 나가면서도 의문이 많았다.
“일본 사람들은 어째 이끼를 자꾸 외울까? 일본엔 이끼 밖에 없나 봐. 호호호."
경숙은 순금에게 눈짓하면서 "어서 나가자고."하고  팔소매를 잡아끌었다.
"그 돈이면 숱한 쌀을 사 먹겠는데.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다고. 여보, 혹시 일본 놈에게 돈을 떼우진 않았습둥? 일본 놈들이 어떤 놈들이라고.”
경숙은 재촉했다.
“어서 가기오.”
순금은 겁나 목을 움츠렸다.
“작작 소릴 지르라고. 간 떨어지겠다. 흥! 일본 사람들 앞에선 고양이 본 쥐처럼 꼼짝달싹 못하다가도 여편네한텐 고래고래 고함질이네.”
경숙은 돌아서면서 욕하려다가 그만뒀다.
저쪽에서 기차가 허연 연기를 내뿜으면서 칙칙 폭폭 달려오고 있었다.
경숙이네 네 식구는 숱한 사람들과 함께 기차에 올라탔다.
이윽고 기차는 그들을 싣고 고향을 서서히 떠나 북으로 달렸다. 고향 명천 산천이 뒤로 점점 멀어져갔다.
순금과 명옥은 차창 밖으로 멀어져가는 고향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순금은 본가집 부모형제들에게 어데로 간다는 말도 남기지 못하고 정처없이 고향을 떠나가는 것이 마음이 앞 두 볼에 눈물을 줄줄 흘리었다.
명옥은 근룡을 업은 채 차창 밖을 내다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었다.
(오빠, 미안하오. 내 돈을 많이 벌면 꼭 기차를 타구 고향에 돌아와 오빠를 데리고 갈게. 그때까지 잘 있소.)
이때 명옥의 잔등에 업힌 근룡이 자지러지게 울었다.
명옥은 일어나 서성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울지 말라, 근룡아, 이제 간도에 가면 널 쌀죽을 끓여줄게. 응? 울지 말라. 근룡아.”
순금은 명옥의 잔등에서 근룡을 쑥 빼내 안았다.
“에이고, 염소도 없지 어찌 하겠니? 배고파 이러는데. 근룡아, 불쌍한 아가야, 어쩜 네 어미는 젖도 안 난다니? 구차한 살림살이에 속을 어찌나 바질바질 태웠으면 젖도 안 나겠니?”
경숙은 눈물을 흘리는 처자를 보고 마음이 아파 차창 밖으로 외면해버렸다.
명옥은 바늘방석에 앉은듯이 서서 두 손을 맞잡고 계모와 근룡을 번갈아보았다.
명옥은 아버지 지게에서 보따리를 헤치고 주먹밥덩이를 꺼내더니 밥알을 뜯어내 근룡의 입에 넣어 주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배고픈 근룡이 글쎄 입으로 쌀알을 오물오물 받아 넘기는 것이었다.
“야, 애기 목에 걸리겠다.”
경숙은 “오래지 않으면 돌이 되겠는데 일없소. 언제까지 젖을 먹이겠소?” 하고 손수 밥알을 근룡의 입에 넣어주었다.
한참 쌀알을 먹이자 근룡은 울음을 끊었다. 기차 안에서는 간도로 들어가는 숱한 흰 두루마기 차림새의 사람들과 화복을 입고 요염하게 치장한 일본 사람들로 떠들썩했다.
그들은 기차를 타고  밤낮을 달리다가도 멈추고 멈췄다가도 달려서야 겨우 진수해에 이르렀다.
경숙은 진수해역에 내려 지게를 진 채 개찰구 쪽으로 가면서 자기 뒤를 흘끔흘끔 살폈다. 수상한 놈이 꼬리를 밟을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사람들이 밀물처럼 개찰구 쪽으로 나가고 있었다. 뒤에 낯선 사내가 다가와도 자기 뒷덜미를 덥석 잡고 “어디로 가?” “병완과 기준이 알지?” 하고 고함칠 것만 같았다.
다행히 개찰구를 나와 조용한 골목에 들어서도 뒤를 밟는 사람은 없었다. 그제야 경숙은 그는 한숨을 후- 내쉬었다.
“함흥촌으로 시름 놓고 가도 되겠소. 해지기 전에 빨리 가기요.”
순금은 또 도도거리기 시작했다.
“에이고, 간도에 오면 일본 놈들이 없나 했더니 쥐며느리처럼 와글거리는구나. 뭐. 어데서 저렇게 숱한 일본 놈 새끼들이 깨났을까?”
경숙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그래도 여기 중국 지주들은 우리 조선 지주들보다 소작료를 덜 받소. 어째 그러는지 간도의 일본 놈들은 밭에다 나무를 심으라고 하지 않소.”
순금은 곧이듣지 않았다.
“천하의 까마귀는 다 검다고 여기 일본 놈 새끼들이라고 악귀가 아니고 부처님이겠습둥?”
경숙은 처자를 데리고 이 골목 저 골목 에돌아 진수해 북쪽 끝으로 나갔다. 어떤 골목에는 기와를 얹고 유리창 문을 해단 상점이랑 약방이랑 들어앉았다.
순금은 고향 명천보다도 더 떠들썩하는 진수해를 보고 “우리도 여기서 살았으면 좋겠소. 상점에 들어가 엿 사탕도 사먹고 얼마나 좋겠니?” 하고 명옥을 돌아보았다.
경숙은 “조개덕의 밭은 어쩌고?” 하고 막 막아버렸다.
순금은 남편을 흘겨보면서 푸념질을 했다.
“한뉘 농사만 짓고 어떻게 살겠습둥? 장사도 해야 남들처럼 기와집을 짓고 살지.”
경숙은 순금의 말에도 일리가 좀 있다고 생각했다.
(사돈집과 변소 간은 멀어야 한다고. 명옥이 혼사 말이 성사되면 기준 사돈과 어떻게 한 마을에서 산단 말인가? 명옥과 상순이 부모형제 지간에 말썽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서로 눈치를 보면서 살겠는가? 에이, 괜히 이 놈의 혼사 말을 꺼냈다가 함흥촌에서 살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니야?)
경숙은 근심부터 앞섰다. 그러나 그는 근룡을 업은 명옥을 피뜩 돌아보고는 한숨을 땅이 커지게 후- 내쉬었다.
(안 돼. 어미 없이 자란 저 명옥을 경인의 말처럼 걔 막내처남에게 줘서 시름 놔야지.)
경숙은 함흥촌에 마음을 붙이게 하려고 처자들 앞에서 그런 속내를 내비춰 보이지 않았다.
순금은 “어이구, 해 다 넘어가는데 아직도 먼 모양이지. 아름드리버드나무 꽉 들어선 게 어디 무서워 가겠니?”
순금은 낯선 고장에 온지라 남편을 바싹 따라 걸음을 다그쳤다.
명옥은 근룡을 업은 채 겁이 나 여기 저기 곁눈질하면서 아버지 뒤에 딱 붙어 서서 걸었다. 다행히 근룡이 젖을 먹겠다고 울지 않았다.
경숙은 처자를 데리고 봄날 농사군의 새 해 희망을 안고 저물어가는 해를 밟으면서 함흥촌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들이 함흥촌 죽순이네 집에 들어섰을 때는 해가 지고 어둠의 장막이 서서히 내리드리우고 있었다.
고향과는 달리 간도 함흥촌은 아직도 여우가 눈물을 흘릴 지경으로 추웠다. 더구나 지난해 겨울 일본 놈들의 토벌 때 불에 타버린 마을이 볼품조차 없었다.
경숙이 처자를 데리고 여동생 죽순이네 집에 들어서자 매부 석은과 여동생 죽순이 반겨 맞았다.
“에구, 인차 들어온다더니 한해 만에 들어왔구먼.”
경숙은 지게를 벗어 바닥에 세워놓으면서 말했다.
“어린 둘째를 업구 올 일이 막막했소. 게다가 아버지까지 어찌나 간도로 가지 말라고 하는지 어떻게 오겠소. 아버님도 모시고 올가고 설복해보았지만 안 되겠습데. 고향이 뭔지 기어이 고향을 떠나지 않는다오.”
죽순은 손으로 눈언저리를 닦으면서 중얼거렸다.
“그래 아버지랑 어머니랑 오라버니들이랑 모두 별 변고 없이 잘 있소?”
경숙은 위방에 올라가면서 “그럭저럭 보낸다. 경석이 그 놈새끼 또 약담배인이 올라 부모들이 속을 태운다. 어쩌겠니? 개 똥 먹는 버릇을 고치지 못한다고.” 하고 중얼거렸다.
석은 부부간은 정지에 들어선 순금을 보자
“새 아주머니, 절을 받소.” 하고 절을 하려고 했다.
순금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니, 이러지 맙소. 내 훨씬 어린데 왜들 이럽둥?”
경숙도 손사래를 하면서 바삐 매부와 여동생을 말렸다.
“형제간에 신식으로 악수나 하면 되지. 절은 무슨 절?”
그리하여 그들 형제간은 서로 악수로 인사했다.
석은은 경숙을 데리고 위방으로 들어갔다.
정지에서 죽순은 명옥을 보더니 와락 끌어안았다.
“에이고, 우리 명옥이 이렇게 처녀로 다 돼 왔네.”
뒤이어 명옥의 잔등에 업힌 근룡을 보고 “요게 우리 조칸가? 어디 안아보자.” 하고 근룡을 안았다.
“양. 근룡이오.”
“근룡이? 이름이 참 좋구나. 요 귀여운 것아.”
죽순은 근룡을 안고 야들야들한 볼에 쪽 뽀뽀를 했다.
“근룡아, 이담 룡처럼 건실하게 자라라. 응? 에이고, 요고 고와서 어쩌겠니.”
쪽쪽 뽀뽀를 하는 죽순을 보고 순금은 속으로 흐뭇했다.
“아~그~ 요고 어쩌겠니? 아니, 이 총각이 이런 실례라고.”
근룡이 죽순의 품에 오줌을 쐈던 것이다.
명옥은 바삐 걸레를 가져다 고모의 저고리를 닦아주었다.
“괜찮다. 오줌과 똥이 친척을 가린다고 조카 오줌이 아니라 똥도 더럽지 않아.”
등잔불 밑에서도 순금의 얼굴에 띤 반가운 기색을 짐작할 수 있었다.
위방에서 경숙은 경인이 써주던 혼사 말 편지를 석은 앞에 내놓고 한창 의논중이였다.
“매부, 이 혼사 말을 어떻게 하면 좋소?”
석은은 머리를 끄덕였다.
“우리 집안에 또 개성 최 씨를 데려온다? 이건 집안 혼사나 마찬가지요. 상순은 내게 8촌 손자벌이요. 이전에 내 죽순과 결혼하자 어떤 스님이 말하던데 영월 김 씨 네 집안에 개성 최 씨 네 집안에서 여자 셋이 들어오면 영월 김 씨 집안이 잘 된다고 했소. 이 집안 혼사는 하는 게 좋을 거 같소. 형님 생각은 어떻소?”
이때 정지에서 순금형님과 놀던 죽순이 위방에까지 올라와 말렸다.
“에이고, 오빠, 이 혼사를 그만두오. 둘째오빠는 뭘 보구 상순에게 명옥을 주겠다고 그러오? 그 상순은 잘 생기긴 했소만 밸 때기 유별나오. 요즘 또 뭐 드문드문 장백산에 들어가 인삼한테서 총을 쏘는 걸 배우고 권투를 배운다 했소. 어디 살림살이를 할 사람이오? 자칫 명옥을 줬다가 고생하면 어쩌오?”
그 말에 석은은 기분이 상했다.
“작작 말하오. 상순은 남자답게 잘 생겼고 대단히 역빠르더구먼. 장차 보오. 그 놈이 큰일을 하지 않는가?”
그래도 죽순은 계속 자기 생각을 터놓았다.
“아니, 명옥의 한뉘 팔자 걸렸는데 가만 있으라오?”
석은은 아내에게 정지를 눈치 질 하면서 “쯧쯧쯧” 하고 마땅찮아했다.
죽순은 입을 비쭉거렸다.
“명옥이 들어도 괜찮소. 이전에 큰집 아주머니가 소를 쓴다고 말한다고 작두로 소 엉덩이를 찍어놓은 일을 잊었소? 풍로를 지붕에 올리 뿌려서 집에 큰불이 날 번 하기까지 했는데도.”
“그만하오. ‘흥!’ 소리도 반간이라고 그만하구 나가오.”
죽순은 정지에 내려가서도 순금과 명옥에게 상순의 허물을 말하면서 상순에게 시집가면 십중팔구는 고생한다고 말렸다.
순금은 가타부타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듣고만 있었다.
명옥은 “고모, 상순이란 게 누굽둥?” 하고 호기심이 나서 물었다.
“에이고, 이번 혼사 말을 한 경인 오빠네 작은 처남이란다. 너도 알게다. 우리 고향에 산적이 있는 사돈네 막내아들이지. 우리가 간도에 들어온 이듬해에 부모랑 형이랑 함께 간도에 들어왔지.”
고모의 말을 듣고 명옥은 한 참이나 기억을 더듬다가 “오, 기억나오. 이전에 우리 할아버지 서당에 와서 공부를 하던 애겠구먼. 호 호 호. 코를 풀럭거리면서 ‘엄마, 집에 가기요.’ 하던 애구나.” 하고 코를 싸쥐고 웃었다.
순금은 눈을 흘기면서 “너 그 말버릇부터 고쳐라. 네 신랑 될 사람을 코를 풀럭거리던 애라니? 쯧쯧.” 하고 훈계했다.
위방에서 석은은 극구 상순을 두둔해 나섰다.
“상순이 성질은 좀 유별나게 괴벽하오. 사내란 골기 있어야 되오. 그 앤 열여섯 살 때 글쎄 아버지를 괭이로 찍어놓은 저 패랑천촌의 대지주 지학사를 해동분주소에 송사를 걸어 이겨서 치료비까지 배상받아낸 애오. 이담 그 앤 공부만 하면 큰일을 할 애오. 저 아녀자들 말을 곧이듣지 말고 명옥을 시집보내기요. 낭패 없을 거요.”
그때까지 경숙은 담배를 말아 피우면서 묵묵히 궁리만 했다.
한참 후 경숙은 이렇게 말했다.
“내 보건대두 상순 사돈총각은 총명하구 역빠르더구먼. 그런데 확실히 성질이 불 같아서 좀 근심되오.”
석은은 계속 상순이 좋은 사위 감이라고 말했다.
“이 어지러운 난세에 상순처럼 주대 있고 역빨라야 사오. 고방 새기처럼 어지기만 하면 어데다 쓴다오. 여편네한텐 마음고생시키지 않아 좋겠지만 골기 없어 아무 일도 못하오.”
경숙은 머리를 수깃하고 한참 생각하더니 머리를 들었다.
“경인이도 자꾸 제 처남한테 주면 고생하지 않을 게라고 하더구먼. 매부까지 좋다고 하니 이 혼사 말을 받아들이는 걸로 하기요. 그런데, 내 어찌 제 딸을 주자고 사돈영감을 찾아가 혼사 말을 하겠소?”
석은 영감은 “그 게야 그렇지. 여자 쪽에서 먼저 혼사 말을 하는 거 같잖소. 내 기준 영감네 집에 가서 경인처남 편지를 전하구 조카를 절반쯤 삶아놓지.”하고 자신 있게 말했다.
석은 영감은 그 자리로 기준을 찾아 떠났다.
기준이네는 전번 토벌에 소서구의 집이 불에 타버려 웃새집 제일 위방에 들어 살고 있었다.
웃새집으로 찾아가니 집 울안에서 창준이 부부가 농사차비를 하느라고 밭갈이 할 가대기랑 소버치랑 손질하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일루 해 넘어가는데 왔소? 어서 들어오오.”
“기준이 있소? 내 할 말이 있어 왔는데.”
석은의 말에 창준은 토성안집 아래를 가리켰다.
“그 앤 지금 집을 짓자고 저기 집터를 보러 갔소.”
석은은 두루 돌아보면서 “상순은 어디로 갔소?” 하고 물었다.
창준은 가대기를 들어 집 뒤에 가져가면서 “저 형과 상 소물을 사러 진수해에 갔소.”라고 알려주었다.
석은은 “아, 벌써 아주머니 돐제가 됐구먼." 하고 머리를 끄덕이더니
“그럼 내 둘째조카를 찾아 할 얘기 있어 가보겠소.”라고 하며 울안에서 되나왔다.
석은은 그 길로 토성안집 동쪽으로 갔다.
기준은 거기서 토성밖 우물주위를 빙빙 돌면서 집터를 보고 있었다.
“여기다 집을 짓자고 그러오?”
석은의 물음에 기준은 이쪽으로 머리를 돌리면서 “양, 아저씨 보건대 집터가 어떻소?” 하고 되물었다.
“글쎄, 우물이 가까워서 좋긴 한데.”하고 대답하면서 주위를 살폈다.
“그런데 토성안집과 가까워 좋겠소? 일본 놈들이 병완 형님과 조카들을 잡지 못해 날뛰는데 일없겠소?”
석은의 말에 기준은 한숨을 후 내쉬면서 먹장구름이 뒤덮인 하늘을 멍해 쳐다보다가 머리를 숙였다.
“괜찮소. 똘만 놈이 죽었기에 누구도 우릴 알아보지 못하오. 우린 전번에 협파회에 이름을 써넣을 때두 형님은 김문칠이라고 써넣구 난 김경칠이라고 써넣었소. 이젠 누가 우리를 쉽게 알아보겠소.”
그러나 석은은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래도 조심하오. 고향에서 자네들을 알아보는 일본 놈들의 개다리가 찾아오면 대사요.”
“일없소. 또 똘만이놈처럼 때려죽이지 뭐. 소서구에 있다고 우릴 잡지 않겠소? 간도 어데로 간들 일본 놈들의 마수가 뻗치지 않겠소.”
기준의 말에 석은도 땅이 꺼지게 한숨을 지었다.
“병완 형님이 집안 족보를 만들어놔서 큰일을 했소. 잘 건사하오. 일단 족보가 발각되면 끝장이오.”
“그러지 않고. 기름종이에 싸서 오지독에 넣어서 천지꽃산 어머니 산소 옆에 묻어뒀소.”
“잘했소.”
석은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품속에서 편지를 꺼내 기준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뭐요?”
“둘째처남이 보낸 거요.”
“맏사위가 무슨 일로?”
기준은 내리 글로 된 편지를 뜯어보았다.
두 번이나 곡을 내면서 내리읽더니 기준은 머리 들어 석은을 바라보았다.
“칠촌 숙, 이건 상순 혼사 말을 하는 게 아니오?”
“그렇소. 내 처조카 명옥과 상순이 혼사 말을 하는 게오.”
기준은 우물가에 가서 우물덮개에 엉덩이를 붙이고 한참 먼 하늘 쪽을 바라보며 무슨 궁리를 하는 것이었다.
석은이가 다가가자 기준은 “이건 집안 혼사말이구먼. 명옥이란 사돈새기는 칠촌숙의 처조카이자 내 맏사위네 친조카 아니고 뭐요?” 하고 물었다.
석은은 기준과 나란히 우물덮개에 기대서면서 개의치 않아했다.
“집안 혼사면 어떻소? 석철 형님의 가마골에 있던 처제가 조카네 맏며느리로 들어갔는데 좋지 않았소? 그때도 조카는 사돈 간 집안 혼사라고 싫어했지만 지금 보오. 조카네 맏며느린 처사도 밝고 인사성도 밝고 사리에 밝지 않소. 사돈 간에 서로 알고 믿을 수 있어 더 좋지.”
기준은 석은을 마주보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소. 최구장네야 우리 한 고향에서 대대로 함께 살아서 믿을만하지. 그런 사돈집안과 겹겹이 사돈을 맺는다는 건 아주 좋지. 맏딸도 그래서 최구장 네 둘째며느리로 준 게지. 그런데 최구장 맏손녀가 벌써 그렇게 컸는가?”
기준이 무릎을 탁 쳤다.
“아차, 우리 상순이 간도에 들어올 때만 해도 일곱 살 밖에 안 됐는데 양띠니까 올해 벌써 열아홉 살이나 됐으니까. 최구장 네 맏손녀도 나이 그쯤 됐겠구나.”
석은은 혼사 말이 돼가는 것 같아 기뻤다.
“그러잖고. 우리 처조카 상순과 동갑양띠요. 걔는 섣달 초닷새 생이요. 상순은 생일이 언제오?”
기준은 인차 대답했다.
“시월 십팔이지.”
석은은 박수까지 쳐댔다.
“천생배필이오. 둘 다 양띠라. 생일도 상순이가 앞섰으니 궁합도 맞을 거 같소.”
기준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글쎄 나두 맏사위하구 맏딸이 한 이 혼사말은 집안혼사여서 믿음직하다고 보오. 그런데 칠촌숙도 알지만 내 처가집도 개성 최씬데 또 개성 최씨를 며느리로 맞아들여도 일없겠소? 당자들은 어떻게 생각하겠는지? 상순은 밸 때기 사나워서 말을 듣겠소? 또 사돈 새 애기를 보지두 못하고 어떻게 혼사 말을 하겠소?”
석은은 우물 덮개에서 엉덩이를 떼면서 기준을 마주 바라보며 말했다.
“근심하지 마오. 지금 내 큰 처남 식솔들이 다 우리 집에 와 있소. 아예 오늘로 혼사 말을 매듭짓는 게 어떻소?”
기준은 도리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안 되오. 내일은 우리 어머니 한돐 날이오. 한 보름 지나 다시 보기요.”
“아차, 내 그만 깜빡 잊었구먼.”
석은이 간 후 상우는 아버지께 다가와 말했다.
“아버지, 또 집안혼사 말을 하겠습둥?”
“어떠냐? 믿을만한 집안인데.”
기준이 대수롭잖게 생각하자 상우는 우물 뒤 집 쪽을 살피더니 뒤를 달았다.
“아버진 모르는 거 같은데. 어험, 상순은 저 내 사촌처제 춘실과 좋아하는 눈칩구마.”
“뭐라고? 그 놈 새끼 부모 허락 없이? 내 이놈새끼 집으로 돌아오기만 해봐라. 종아리를 분질러놓지 않는가.”
기준은 버럭 고함쳤다.
상우는 지 씨 네 집을 흘끔 들여다보더니 바삐 아버지 팔을 잡아 토성 앞으로 모시고 갔다.
“지씨네 듣겠습구마.”
기준은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이구, 저 놈 새끼를 어쩌겠니? 제 형님의 사촌처제하구 좋아하다니? 제 정신이 있니?”
상우는 아버지 팔을 놓으면서 말했다.
“매형네 조카나 내 처제나 다 사돈 간인데?”
기준은 상우를 쏘아보면서 을러멨다.
“너도 같은 양 하겠니?”
마음이 어진 상우는 더 말하지 못하고 집터 쪽으로 스적스적 걸어갔다.
기준도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상우한테로 다가갔다.
“여기다 집을 짓는 걸로 하자. 토성 동쪽이자 우물이 가까우니 살기 편리할 거 같구나.”
상우도 “아버지 생각대로 합시다.” 하고 대답하고 나서 뭉청 무너진 서쪽토성을 바라보더니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이 아까운 토성안집을 어쩝둥?”
“일본 놈 새끼들이 집단부락촌공소루 쓴다잖니?”
“개새끼들이, 인삼 형님네 집을 빼앗아 촌공소루 쓰다니? 장학사랑 놔둘 거 같습둥.”
기준은 머나먼 곳을 바라보면서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 일본 놈들을 다 몰아내구 마음 놓고 살겠니? 제 집과 땅을 가지고 살날이 언제 있을까? 일본 놈들을 봐라. 남의 양아들 집도 마구 빼앗아 자기네 촌공소를 앉힌다지 않니? 에이고, 이 놈의 세상이 언제 끝나겠니?”
상우도 먹장구름이 뒤덮인 하늘을 쳐다보면서 갑갑해 구름이 다 날려가게 거친 황소숨을 씩-씩-몰아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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