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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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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소설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 (4)
2017년 11월 26일 11시 12분  조회:1408  추천:0  작성자: 김장혁




         6. 실련영탄곡

       (오~ 내 '레날 부인'은 정말 붙잡을 수 없는 부평초야. 오 맞아, 은영아, 넌 부평초야."
      성호는 숙사를 내려오면서 부평초란 즉흥시조를 짓기 시작했다.
      "호수에 둥둥 떠돈 무근초 부평초야, 그래, 넌 뿌리 없는 부평초처럼 이 남자 저 남자에게 떠돌아다니는 부평초야."
       "오빠, 호호호. 누가 부평촌가요?"
   뜻밖에 길 옆에서 정희가 뛰여나왔다.
"밤중까지 숙사에 돌아가지 않고 뭐 해?"
"내 물을게 있는데요. 은영이 그렇게 좋아?"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도 파랑새의 굳은 표정이 드러났다.
"네가 뛰여나온 바람에 즉흥시조 령감이 다 날아났어."
"즉흥시조?"
"그래, 부평초, 뿌리 없이 떠도는 부평초."
"호호호."
파랑새 정희는 코를 싸쥐고 웃었다.
"진짜 오빠를 두고 짓는 근사한 시조군요. 뿌리 없이 떠도는 부평초. 내 한마디 보태 줄가요?"
"뭐야?"
"‘묻노니, 산들 미풍에 이리 저리 떠돌겠나?’ 이건 제가 오빠에게 하는 속심의 말이예요."
성호는 저도 몰래 웃음보를 터뜨렸다.
"아니야. 부평초는 은영과 파랑새를 두고 짓는 시조야!"
"아니예요. 오빠야말로 부평초예요. 호호호."
"너, 정말!"
성호는 도망치는 정희에게 주먹을 불끈 쳐들었다.
정희는 깔깔깔 웃으며 녀성숙사 쪽으로 달아났다.
성호는 숙사에 돌아와서도 밤중까지 침대에서 이리궁실 저리궁실 하면서 은영을 빗대고 시조 "부평초"를 다듬었다.
저쪽 침대에서 책을 보던 승호도 보다 못해 책을 놓고 이불을 들쓰고 코를 드렁드렁 골았다.
성호는 끝내 부평초란 시조를 다 써서 제비꼬리처럼 쪽지로 접어 웃 호주머니에 잘 간직했다.
이튿날 성호는 교실로 올라 갈 때 올리막길에서 은영이 오기를 기다렸다. 드디여 은영이 체육머리를 흩날리며 사뿐사뿐 다가왔다.
성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조를 쓴 쪽지를 건네주고 교실로 가버렸다.
은영이 교실로 들어가 가만히 쪽지를 꺼내 책상 밑에서 피뜩 읽어보았다.
 
부평초
호수에 뿌리 없이 떠도는 부평초야
파란 이팔 빨간 꽃잎 지녔다고 뽐내지 마
묻노니, 산들 미풍에 떠다니다 말겠냐?
 
은영은 어이없어 피씩 웃으며 쪽지를 쓰레기에 버리려 했다. 그러다 말고 그 시조에 몇 마디 쓱쓱 쓰더니 책가방에 건사했다.
(누가 누구에게 써 보낼 시조인가요?)
그녀는 공부를 하다가도 교수의 강의를 듣지도 않고 가방에서 쪽지를 꺼내 지우고 또 뭐라고 쓱쓱 쓰고 또 지우고 다시 썼다.
점심에 숙사로 내려 갈 때 은영은 옆 교실에서 불쑥 나온 성호를 따라갔다.
조용한 나무 밭 속 오솔길에 들어서자 은영은 나직이 "오빠, 밤중까지 쓴 시조를 잘 보았어요."라고 하더니 책가방에서 쪽지를 꺼내 건네주었다.
"이건 제가 오빠에게 드리는 시조예요."
성호는 쪽지를 펴보지도 않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긴, “부평초”는 우리 둘의 합작시조인 셈이지. 이건 영원한 기념이 될 수도 있는 명시조야.)
은영은 뒤에 파랑새 정희가 따라 오는 걸 보고 발뺌을 하듯 총총히 녀성숙사 쪽으로 내려갔다.
성호는 숙사에 돌아와 슬그머니 그 놈의 쪽지에 손이 갔다. 그는 평소에 지하 독서실에 가 있던 승호가 침실에 있는 것을 보고 위생실에 갔다.
위생실에서 성호는 호주머니에서 쪽지를 펴 보았다. 자기가 쓴 시조 "부평초"아래에 이런 글씨가 씌여 있었다.

       누가 누구에게 써 보낼 시조인가요? 나도 오빠에게 드릴 답시조라겠는지 충고라겠는지 한수 썼어요.
 
참새
날마다 재잘재잘 떠드는 참새야
어느 깨알 더 큰가 저울질만 하겠는가
역은 새 방아간이나 지나가지 맙소서
 
"허허, 정치학부 학생답잖게 잘 썼는데."
성호는 은영이 자기를 역은 참새에 빗대 야유했는데도 욕할 대신 감탄이 앞섰다. 성호는 은영이 쓴 답시조를 읽고 또 읽어도 야유보다 마지막 "충고"의 구절이 마음에 쏙 들었다.
( 질투의 불길을 달아주었더니 속이 좀 탄 모양이야. 내 '어느 깨알이 더 큰가 저울질 하는” 것이 꽤나 답답한 모양이지. 그래, 난 지금 파랑새냐 너 체육머리냐 저울질하고 있어. 역은 새가 방앗간을 지나갈 거 같아? 건 다 속담에 지나지 않아. 난 절대 방아간을 날아지나가는 참새 격이 되지 않을 거야. 근심하지 마. 사랑스런 체육머리야.)
성호는 은영이 고마워 시조에 대고 키스까지 뽁 안겼다.
그렇다. 은영이 곱다 못해 이젠 야유를 당해도 밉지 않았다.
어느 날 체육시간에 싱거운 꺽다리 범송이 글쎄 생각 밖에 성호와 씨름을 하자고 걸고 들지 않겠는가. 그 앤 어느 진 씨름경기에서 일등을 한 적이 있어 자신 있게 성호에게 도전했다.
(싱거운 자식!)
범송은 춤판에서도 독무를 추기 좋아했다. 땅바닥에 엉덩이가 거의 닿을 정도로 물앉았다가도 뻐드렁다리를 펴며 일어나면서 두 손을 천정이 닿을 정도로 올리 뻗칠 때면 숱한 녀학생들이 웃어 죽을 지경이였다. 싱거운 범송은 늘 자기가 춤을 잘 춰서  웃는가 여기고 점점 괴상한 동작으로 너펄거렸다.
성호는 범송의 도전에 응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호는 원래 주먹치기는 잘 하지만 씨름 같은 건 별로 해본 적이 없었다. 자신감은 없었지만 응전하면서 모래판에 나섰다.
(잘 됐어. 녀자애들 앞에서 어디 혼나봐라!)
범송은 성호보다 키가 한뼘이나 더 큰데다 실팍했다. 황소 같은 범송이 떡 끌어안자 성호는 숨마저 꽉 막히고 범송의 다리가 어떤 동작을 하는가 살피기도 어려웠다.
승호가 "시작!" 하기 바쁘게 범송은 성호를 끌어안고 안손을 치면서 황소처럼 떠밀었다. 성호는 힘도 써보지 못하고 썩박나무통이 넘어가듯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처녀애들은 비명을 질렀고 승호랑 너무 일방적이기에 재미없다며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범송은 사기충천해 오른 주먹을 하늘로 쳐들며 처녀애들 앞으로 가서 으시대며 테를 돌았다.
성호가 엉덩이 모래를 툭툭 털면서 볼라니 언제 왔는지 옆 학급의 은영이도 숱한 처녀애들 속에 끼여 있지 않겠는가.
(헛참, 이거 은영이 앞에서 무슨 꼴이야.)
성호는 머리를 푹 숙이고 테를 돌면서 키 큰 범송을 재낄 수를 생각해보았다.
(또 황소처럼 떠밀어봐라.)
두번째판이 시작됐다. 약이 오를대로 오른 성호는 범송이 안손을 치지 못하게 오른 손을 딱 쥐였다. 아니나 다를가. 범송은 큰 키와 힘을 믿고 또 황소처럼 마구 떠밀었다. 그때 성호는 옆으로 몸을 홱 탈아 빼더니 손바닥으로 범송의 뒤통수를 탁 치며 왼손으로 엉덩이를 콱 떠밀며 고함쳤다.
“가라! 이새끼!”
범송은 자기 힘에 모래에 머리를 처박았다.
숱한 녀학생들은 “우~와~” 하고 감탄했다.
처녀애들은 황소 같은 범송에게 보통 체구의 성호가 또 당하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뜻밖의 장면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번째판이 시작됐다. 범송은 얼굴의 모래를 툭툭 털고 악이 올라 성호의 허리를 끊어지라고 주먹을 쥔 손으로 꽉 누르며 틀어쥐고 내동댕이쳤다. 하도 날랜 성호였기에 멀리 뿌려나갔지만 오또기처럼 모래판에 앉았다가 되일어섰다. 약이 오를 대로 오른 범송은 말상을 흔들며 서우처럼 덮쳐들어 성호를 끌어안아 하늘 높이 쳐들어올렸다가 모래에 내리메쳤다. 허나 성호는 모래 우에 살짝 날아내렸다. 그는 번개 같이 달려들어 범송의 사타구니 밑에 오른 손을 밀어넣더니 물소 같은 꺽다리를 산천경개를 구경해보라고 건뜻 들어올렸다.
“야- 힘장사로구나!”
어디선가 은영의 감탄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범송은 허망 들려 성호의 어깨 너머 두다리를 버둥거리며 발악했다.
“에끼, 이놈새끼! 저리 가라!”
성호는 갈범처럼 고함치며 범송의 한종아리를 가로 치며 태를 쳤다. 범송은 엉덩방아를 찧으며 절구통처럼 맥없이 쿵 쓰러졌다. 너무 아파 오만상을 찌푸렸다.
“2대 1! 성호가 이겼어!”
승호가 고함쳤다.
그런데 범송은 눈에 쌍불을 켜고 달려들더니 성호의 뺨을 찰싹 갈겼다. 성호도 벼르던 참이라 재차 날아드는 갈구리 같은 손을 피하면서 자세를 낮추며 오른 주먹으로 범송의 아래배를 올리쳤다. 련이어 성호의 무쇠주먹이 두다리 새를 강타했다.
“아이쿠!”
범송은 사타구니를 움켜쥐고 비명소리와 함께 무릎을 꿇었다. 성호는 그때라고 주먹으로 말상을 올리 걷어쳤다. 범송은 뒤로 벌렁 쓰러져 땔, 땔 굴렀다. 성호는 승호랑 동창들이 말리건말건 발길을 날려 범송의 길쭉한 말상을 마구 걷어찼다.
힐끔 곁눈질해 보니 은영은 바늘로 쏘는 듯한 눈길로 표독스레 성호를 쏘아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허나 성호는 마음 속으로 시원해하였다.
청춘의 활기로 가슴 벅찼던 대학교 시절은 동지섣달 해처럼 짧기도 짧았다. 오래지 않아 졸업하게 되였다. 실로 평생의 리상을 실현할, 전도를 개척할 관건적인 시각이 닥쳐왔다.
승호랑 연구생시험준비에 헌 세집에서, 열람실에서, 교실에서 골똘히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호는 은영이라는 사랑의 돛배에 리상을 실현하는 돛을 올릴 푸른 꿈을 꾸면서 어디 려관 손님이면 그렇게 시름놓고 잘 잤겠는가. 점심을 먹고 해가 서산에 지도록 쿨쿨, 저녁을 먹고 련애소설이나 읽고 은영을 낚을 묘수만 궁리하다가 초저녁부터 이불을 들쓰고 누워 쿨쿨, 하여간 머리가 뗑 해나고 온 얼굴이 팅팅 붓게 자고 또 잤지. 진짜 자는 시간 외에는 알심 들여 사랑환상곡을 짓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쿨쿨 자던 성호는 누가 이불을 활 벗기고 코를 마구 비트는 바람에 와닥닥 놀라 깨났다.
“왜 이래? 남의 단잠을 깨우면서.”
성호가 툴툴거리면서 이불을 쓰고 되누우려 할 때였다. 이번에는 성호의 귀를 마구 비틀어 쥐여 일으키지 않겠는가.
벌떡 일어나보니 승호가 아니겠는가.
“이 자식!”
성호가 주먹을 쳐드는데 승호가 주먹을 내리면서 “조용히 할 말이 있어.”라고 하며 침실 밖으로 나갔다.
다른 애들은 삼각련애 일로 싸우자고 그러나 해서 성호를 보고 주의하라고 했다.
성호는 승호가 또 전번에 범송을 메쳐놓고 한바탕 족쳤다고 한판 붙어보자고 찾는가고도 생각하며 운동복에 가벼운 신까지 신고 따라나갔다.
칼바람이 낯을 핥으며 윙윙 불어쳐 나무가지들에서 무서운 비명소리를 내 분위기가 자못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승호는 성호를 데리고 세집으로 들어가 전등을 찰칵 켜지 않겠는가.
성호는 한숨을 후- 내쉬면서 어두운 전등불빛을 빌어 세집을 둘러보았다. 언제 헌집인가 싶게 말쑥하게 거두고 새로 천정과 창문을 간단히 장식까지 했다. 실내에는 성호와 함께 들어 올려온 침대에 책걸상  밖에 없었다.
“이게 네 지하독서실이냐?”
“응, 앉아라. 친구로서 충고하는 거야. 아무리 ‘급제 만세 시대’라고 하지만  졸업장이라도 탈 수 있게 명심해 공부해라.”
성호는 뒤말이 궁금해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승호는 깜장눈을 한번도 깜짝하지 않고 정중하게 말하는 것이였다.
“련인이 없으면 고독하고 타격이 클 수도 있다. 하지만 은영과 정희와 그런 련애 그만둬! 삼각련애, 질투 따위는 이 세상 련애사에서 지나간 옛 방법이야. 련애는 그래도 내가 선배지. 사랑은 대방의 감정에 대한 향수이고 티 없이 맑고 깨끗한 두 순정으로 연주하는 아름다운 사랑의 멜로디야. 네가 ‘사랑의 돛배에 리상의 돛을 올리려는 건’ 얼마나 순결하지 못해? 너 은영을 사랑하니? 아니면 그 애 아버지 권력을 탐내는 거냐?”
성호는 자기를 훈계하는 승호가 눈꼴사나웠다.
“검정개 돼지 흉을 작작 해라. 넌 그리 련애를 하지 않겠구나. 픽!”
승호는 놀라는 기색이 조금치도 보이지 않았다.
“내 말은 련애면 련애지. 사내대장부가 뭐야? 녀자애들의 치마폭에 휩싸여 뜻을 펴려고 하다니? 너무 연약하고 가련하잖아?”
성호는 승호의 말을 듣다 못해 변명했다.
“얘, 점점,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모로 가도 서울에 가면 돼. 네가 삐칠 일이 아니야.”
그는 자기 말이 얼마나 가련할 정도로 무력한가를 느끼며 실망스러워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승호는 깜장눈으로 성호를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련주포를 쏘았다.
“계속 이따위로 놀면 난 친구로 보지 않아. 땅을 밟고 하늘을 떠인 사내대장부가 지구라도 삼켰다가 토할 큰 뜻을 세울게 아니라 사랑을 구걸하고 권세에 아부하고 동창생을 질투하고 상사병에 걸리고. 뭐냐? 권세가문의 치마자락에 매달려 상류사회에 기어오르려고 꿈을 꿔? 가소롭다, 진짜 가소로워! 4년 동안 배운 건 고작 고거냐?”
성호도 자기 이른바 주의를 토로했다.
“얘, 이 검정개야. 네 말에 도리 있어. 허나 지금 학교에서 졸업배치도 책임지지 않는데 그래 사랑이나 권세가문과의 관계학이라도 쓰지 않고 어쩌니? 관계학도 생산력이잖아. 그래 부모들의 숱한 돈을 팔고 대학공부를 하고서도 도시 일자리도 못 찾고 시골에 가서 교편을 잡아야 되니?”
승호는 철색얼굴에 비장한 기색을 띠며 뒤말을 이었다.
“관계학 소영없다는게 아니야. 우리는 우선 자기 운명을 남에게 맡기지 말고 인류가 수천년 쌓아놓은 문명과 지식을 머리에 넣어야 해. 그래야 이 다음 사회에 나갈 때 관계학이나 사랑철학을 그리 쓰지 않아도 도시에 남아 훌륭한 일을 할게 아니냐? 너처럼 구걸하지 않아도 지식이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사랑이 자기 발로 자연스레 찾아올 거 아냐? 대장부란 자기 운명을 자기 능력에 맡겨야 눈 앞의 사랑과 명예, 지위, 금전 따위를 초개같이 보며 떳떳이 자기 갈 길을 나가면서 청사에 길이길이 빛날 업적을 이룩할 수 있는 거야. 친구야, 정신 차리고 공부하게나.”
“됐다, 됐어. 너 같이 공안과장의 아들이면 그렇게 해도 될 거야. 허나 농부의 아들은 그렇게 못해.”
승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더 말하려고 해도 말이 들 거 같지 못해 그만 두었다.
성호는 지하 독서실에서 나온 뒤에도 승호의 말이 어찌나 철리가 있는지 자기가 얼마나 무지한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흥, 자식 헌 세집에서 철학을 연구하더니 사랑철학도 깊이 연구했구나. 자식, 약혼녀를 두고서도 제일 야드르르한 홍희라는 꽃을 꺾으려고 하는 주제에 누굴 훈계해?”
그는 승호를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들 성호와 그를 친구인데 생김새가 비슷하게 생겼다고 했다. 허나 승호는 그보다 한살 이상인데 뭐나 자기보다 한 수 우였으니까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흥, 자식, 학교 식당에 갈 때에도 손바닥만한 카드를 쥐고 중이 념불하듯이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저런 명언 따위를 토해내는가? 흥, 승호야, 너 같은 놈은 위생실에서 뭘 연구하면서 살겠지만 난 달라. 넌 애비 권력을 빌어 좋은 일자리에 가서 리상을 실현하겠지만 난 농사군의 아들이야. 우리 아버지도 공안국장을 그만두지만 않았더라면 나도 이렇게 속을 태우지 않고서도 시내에서 활개치면서 살 거야. 아버진 얼마나 소박한 토지개혁 때 간부야. 난 그렇게 못해. 절대 그렇게 순박하게 살 수 없어.”
성호는 중얼거리며 손바닥으로 머리를 탁탁 쳤다.
“승호, 너희들 동으로 갈 때면 난 혼자 서쪽으로 갈테야. 혹시 시장경제시대에 나 같은 실력가들이 더 쓰일 수도 있어.”
성호는 침실에 돌아와 침대에 눕자마자 눈 앞에 방불히 웨딩드레스를 입은 선녀,  사랑하는 은영과 함께 사랑환상곡에 맞춰 결혼례식장에 들어서는 장면을 보는 것만  같이 눈 앞에 삼삼히 떠올랐다.
“오- 나의 레날부인이여!”
성호는 기도나 드리듯이 두 손을 모아 가슴에 대고 눈을 딱 감았다.
이튿날 오후에 파랑새 정희가 성호를 조용히 찾았다. 성호가 현관으로 나가보니 새파란 털실내복에 빨간 쵸치사 목수건까지 맨 정희가 희미한 불빛 아래 더 예뻐보였다.
“은영이, 아, 아니, 정희!”
성호는 불쑥 튀여나간 실수에 그만 혀끝을 홀랑 입귀로 내밀었다.
정희는 침울한 표정을 짓더니 “조용한 곳으로 가서 얘기할게 있어요.”라고 하거이 현관 저쪽으로 또박또박 걸어갔다.
정희, 그녀는 이전에 은영에게 질투의 모닥불을 피우는데 공을 세웠다. 성호는 하는 수 없이 은영이 보지나 않나 흘금흘금 곁눈질하면서 정희를 따라 나섰다.
그는 정희가 인도하는대로 그녀를 따라 눈보라 휘몰아치는 대학 뒤동산으로 갔다. 푸른 소나무들이 윙윙 몸서리치며 비명을 질렀다.
“무슨 일이야? 추운데 어서 말해.”
정희는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더니 목수건을 만지작거리며 간신히 빨간 앵두 입을 열었다.
“어떤 애가 사랑인지 뭔지 고백하면서 어찌나 치근거리는지. 어떻게 하면 좋을가.”
“누가?!”
“범송이.”
“뭐라고? 범송이?”
정희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 자식 개버릇 해. 반반한 녀자는 누나고 뭐고 다 지껄여? 흥!”
성호는 그제야 자기가 은영과 정희를 동시에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사실 성호는 정희를 질투의 불씨로만 쓰기 아까울 정도로 마음 속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재삼 느꼈다. 허나 리상의 꿈을 실현하려면 은영의 아버지 막강한 권세를 빌어야만 했다. 은영은 사랑의 녀신일뿐만 아니라 상류사회에 바라오르는 사닥다리였다. 때문에 더 높은 절벽에 있을지라도 그는 정희보다 은영을 골라잡고 은근히 슬쩍슬쩍 다가가고 있었다. 성호는 1 대 1의 련애도 아니고 복잡한 삼각련애, 아니, 이중, 삼중, 다각 련애에 빠진 것이 아닌가? 그 사랑도 더러운 권세욕에 얼룩진 순결하지 않은 건 아닌가?
정희는 격분해하면서 착잡한 생각을 하는 성호를 보고 용기를 내 한술 더 떴다.
“난 범송이 은영에게 홀딱 반해 쫓아다녔다는 걸 알아요. 주책없는게 한살 이상인데도 내한테 매달리지 않겠어요?”
정희는 성호를 흘끔 곁눈질 하더니 “난 어쩌면 좋아요?” 하고 물었다.
“어쩌긴 어째? 알아 할게지.”
“사랑하는 련인이 있다고 했어요.”
“누구?”
“아이고, 이 능구렁이야.”
정희는 두 주먹으로 성호의 어깨를 북 치 듯했다.
“범송이 키도 멀쑥한게 좀 좋아서?”
“말이라고 해?”
“이전에 볼라니 범송에게 스케트도 가져다달라, 책가방을 메다달라, 심지어 밥까지 타다달라 하면서 꼬리를 쳐들고 한들거리더니. 숫총각의 사랑을 어째 그렇게 헌 신짝 차버리 듯하오?”
“픽, 딱 한 가지 리유,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죠. 내가 심부름을 시키니 아마 자기를 좋아하는가 했던 모양이지. 쳇, 더러운 기름개구리 백조 고기를 먹으려는 거지.”
성호는 놀라운 눈길로 정희의 걀쭉한 얼굴을 신기한듯 들여다보았다.
“사실 난 성호 씨 가슴에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려고 그런 건데요. 범송인 오해한 거 같아요.”
정희는 점점 열을 올렸다.
“정희, 말뜻을 알 거 같소. 시간을 주오. 좀 생각해봐야겠소.”
성호는 뒤를 달면서 속으로 어머니와 넷째누나가 항상 하던 말이 떠올라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절대 결혼하지 않을 처녀애들을 다치지 말라. 괜히 대학에서 제명받겠다.”
(정희와 결혼하려는 거야? 아님, 왜 뒤를 달아? 량심 없는 놈!)
“실망을 주지 말아요.”
“에이고, 내 지식이 있소? 돈이 있소? 난 농사군의 아들이란 말이요. 열번째 자식이지만 부모를 모셔야 할 막내아들이라오. 뭘 보고 날 따르오.”
정희는 정색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성호는 이글거리는 정희의 따가운 눈길을 외면하면서 자리를 떴다.
그는 정희를 숙사에까지 데려다주고 눈이 퍽퍽 빠지는 교정의 백양나무 밑에 기대서서 찬바람이 스치는 총총한 뭇별을 쳐다보며 사랑과 리상, 전도를 두고 처음 심각하고도 여러 면으로 심사숙고해보았다.
결론은 간단했다. 기실 정희는 은영보다 인물체격이나 성격이나 다 짝지지 않은 예쁜 처녀애였다. 순수한 사랑을 선택하라면 성호는 아무런 고려도 없이 숲 속에 핀 나리꽃 같은 정희를 선택했을 것이다.
(허나 아무런 배경도 없이 대학교수를 믿고서야 어찌 정계에 진출해 상류사회에 바라오른단 말인가? 정희는 전도를 개척하고 리상을 실현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
성호는 이튿날에 다시 정희를 불러 학교 뒤산으로 올라갔다. 정희는 그래도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어올라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성호의 뒤를 따라 발목까지 풍풍 빠지는 하얀 눈을 빠드득 빠드득 밟으면서 뒤산 소나무숲 속까지 따라왔다.
성호는 희망에 찬 눈길로 자기를 바라보는 정희에게 차마 실망을 주기 힘들어 한 식경이나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정희의 얼굴에 점점 웃움기가 사라지고 파랑새란 별명답게 파랗게 질려갔다.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정희, 미안하오.”
“알았어요. 은영을 사랑하지?”
성호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저 머리만 끄덕였다.
정희는 파랗게 질린 볼에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성호의 허리를 감아 안았던 팔을 맥없이 스스르 풀었다.
정희는 성호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으며 애원하듯 련주포를 놓았다.
“아니죠. 어제 저녁에 내 범송의 말을 할 때 격분해하는 성호씨를 보고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맞지? 성호는 나를 사랑하고 있죠? 왜 자기 감정을 속여요?”
성호는 정희  앞에서 허울이 쫄딱 벗겨졌다. 그는 더는 초라한 모습을 감출 수 없었다.
정희는 계속 반격을 가해왔다.
“성호, 성호는 은영을 사랑하기보다 권세가문을 탐낸 거 아니고 뭔가요?”
성호는 답변할 말이 없었다.
“우린 청춘을 불태워 노력만 한다면 자기 능력으로 얼마든지 전도를 개척할 수  있다고 봐요. 자기 감정을 속이지 말고 진정한 사랑을 택하세요.”
그러나 성호는 은영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사랑과 전도를 가지고 도박을 걸었다. 그는 아주 허위적인 인간으로 탈바꿈했다.
“정희, 난 정희를 사랑한 적이 없소. 절대 오해하지 말고 사랑의 키를 돌리오. 빨리 돌릴수록 좋을 거요.”
“알았어요. 사랑은 구걸할 수  없어요. 꼭 후회할 거예요.”
정희는 눈물을 씻더니 한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어깨를 들먹이면서 맥없이 휘청휘청 산 아래로 내려갔다. 빨간 목수건이 바람에 날려 눈위에 떨어진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가 내 시선에서 사라지자 성호는 정희의 빨간 목수건을 주어들고 보다가 품 속에 건사했다. 뒤이어 주먹으로 소나무를 피터지게 꽝꽝 치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난 사람이 아니야! 넌 권세욕에 불타는 마귀야! 마귀!”
성호는 무슨 정신에 눈덮인 학교 뒤산에서 내려왔는지 몰랐다.
이튿날 오전에 성호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현관에서 기다렸다가 교실에서 갓 나온 은영 옆에 다가가 걸으면서 점심에 보자고 했다. 누가 은영을 빼앗아라도 갈가봐 선손을 써야만 했다.
       은영은 깜장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대수롭잖게 말했다.
“무슨 말인지? 지금 말하면 될게 아닌가요?”
“아니, 어떻게 동창들이 오가는데서.”
“그럼 말하기 바쁜 문젠가요?”
“그쯤 알고 점심을 자시고 교실에 오오.”
그제야 체육머리 은영은 알 것 같다는듯이 머리를 무겁게 끄덕이면서 깜장눈으로 성호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 표정만 보아도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몰랐다.
허나 벼른 도끼 무딘다고 그날 점심에 성호는 너무 긴장해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고 뚱딴지 같은 졸업론문을 잔뜩 늘여놓고 정이 폭 든 은영을 놔 보냈다. 성호는 재가루 될 듯한 마음을 쏟아부을 용기마저 없는 자기를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학교 속도스케트경기 개막식에서 성호는 뜻밖의 대박이 터졌다. 주최측에서 글쎄 그를 보고 체육머리와 함께 스케이트 쌍무를 추라는 것이였다.
졸업론문준비에 바쁘면서도 그들은 보름동안 발을 맞추고 무용동작을 창작해 매개 동작마다 익숙히 련습했다.
드디여 그날은 오고야 말았다. 3년 전처럼 은영은 탄력 있는 몸에 착 붙는 얇은 오렌지색 나일론운동복에 노란 털실 못자를 썼다. 이전보다 다르게 이번에는 하얗고 탄탄한 허벅다리가 다 드러나게 투명하고 긴 살색 양말을 신고 척 나섰다.
수천쌍의 눈길을 받으면서 성호와 은영은 리종수가 작사 작곡한 “사랑환상곡”에 맞춰 한쌍의 은제비처럼 훨훨 나래 치며 경쾌하게 빙상무용을 추었다.
성호는 흥에 겨워 멋진 조형동작을 리드해나갔다. 성호가 한쪽 다리를 뒤로 높이 추켜들면서 은영씨의 허리와 한쪽 허벅다리를 잡자 은영은 한발로 평형을 잡으면서 꽃나비처럼 두팔을 벌리고 뒤로 누우면서 한쪽 다리를 높이 추켜들었다. 뒤이어 그들 둘이 서로 허리를 안고 나란히 미끄러져나가면서 한 손씩 앞으로 뻗치고 한쪽다리씩 뒤로 높이 추켜들었다. 그들은 관성으로 십여초 동안이나 그 멋진 조형동작대로 판들판들한 빙판 우로 큰 반원을 그리면서 미끄러져나갔다.
여기저기서 섬광등이 번쩍번쩍하였다. 박수갈채가 우뢰가 터지듯싶었다.
그날은 아마 그들이 영원히 잊지 못할 날이였다. 정열에 넘치는 24살 때 그 날은 정열에 불타는 청춘의 한 페리지로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퇴장해서도 은영은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가슴을 할딱이면서 성호의 품 속에 꼭 안기더니 허리를 꼭 껴안았다.
순간 성호는 얼마나 놀랍고도 행복했는지 몰랐다.
그는 거기서 용기를 얻고 그날 점심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다.
은영은 귀밑을 살짝 붉히면서 “그래요.” 하고 쾌히 응낙하였다.
성호는 조용한 음식점으로 은영을 데리고 가서 점심을 잘 차려 맛나게 먹었다.
성호는 음식점에서 나오자 은영을 보고 정색해 말했다.
“졸업시험에 바쁜데 잠간 얘기하다가 가기요.”
은영은 버릇처럼 체육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면서 “퍽 신비한데요.”라고 하면서 따라나섰다.
성호는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안고 사랑하는 은영을 데리고 정희를 만났던 학교 뒤동산으로 올라갔다. 무릎을 빠지는 눈을 무릅쓰고 그들은 남들의 눈길이 보이지 않는 소나무 숲 속으로 들어갔다. 학교 무장부나 학생회에 들키는 날에는 야단이였다. 학교에 통보나지 않으면 검사를 해야 했고 학생기률 처분을 받아야 했다.
“호호호. 참 랑만적인 설경인데요. 여기서 스키라도 타면 얼마나 좋겠어요?”
성호는 “오늘은 우리 청춘에 영원히 남을 날이니까.”라고 허두를 뗐다.
“그래요. 죽어도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우리 아빠와 어머니마저 와서 구경했는데요.”
성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날 인사시키지.”
은영은 걀쭉한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
“뭐 그렇게까지야.”
성호는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이면서 몇십 번이나 외워보던 말을 느릿느릿 꺼냈다.
“은영은 어떻게 생각하겠는지 모르겠소. 한 친구가 은영을 피끓는 청춘의 티 없이 맑은 순정으로 사랑하고 있다오.”
“어마나!”
은영은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성호는 외마디 대답을 피하고 계속 에둘러 말했다.
“그는 비바람이 불어치고 파도 세차게 쳐도 끄떡하지 않는 바다가의 초석처럼 영원히 드팀없이 은영을 사랑하겠다오.”
은영은 긴장한 기색이라고는 티끌만치도 없이 피씩 웃기만 하는 것이였다.
(남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말하는데 깔깔깔 웃다니?)
성호는 더는 룡암처럼 끓어번지는 정열을 누르지 못하고 은영을 와락 끌어안고 화산 폭발처럼 사랑을 고백했다.
“은영이, 사랑하오. 은영의 사랑이 없으면 난 자유와 리상, 행복, 지어 생명과 령혼마저 끝장나오. 난 미쳐 죽을 것 같소. 나를 구해주오. 의심되면 심장이라도 꺼내보오. 내 심장은 그대를 위해 높뛰고 있단 말이요.”
은영은 성호의 가슴을 밀어냈다.
“성호씨, 이러지 마. 이럼 난 괴로워.”
“왜? 내가 사랑하는데.”
“안 될 일이기에.”
“왜? 술 마시고 말한다고?”
머리를 살래살래 젓는 그녀.
“은영보다 나이 더 많다고?”
“사랑에 나이가 대순가요?”
“그럼 뭐요? 대학교에서 4년 생활하면서 내 마음 속엔 은영 밖에 없었소. 4년 전 스케트를 타던 그날부터 난 은영을 줄곧 사랑해왔소. 은영은 내 피끓는 청춘의 모든 것이였소.”
“성호씨, 스케트를 타거나 사교춤을 춘 건 공동한 과외흥취지 사랑은 아니죠.”
“사랑은 공동한 흥취에 토대하지 않는가?”
“호호호, 그럴 때도 있겠지만 난 그렇찮아요. 과외애호를 일종 오락으로 논 것이지 거기에 토대해 사랑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성호는 맥없이 은영을 놓아주며 중얼거렸다.
“난 이불을 꾸며주던 날이랑, 아까 빙무를 다 추고 나를 꼭 끌어안을 때도 그렇고.”
“호호호. 성호씨, 그래 오빠 같은 동창생이 저녁에 덮을 이불이 없을 때 꾸며주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렇긴 하지. 난 내가 짝사랑을 했다고 믿지 않는데.”
성호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중얼거리다가 은영의 가녀린 어깨를 잡아 마구 흔들며 부르짖었다.
“아니야, 아니! 난 믿어지지 않아. 내 정희를 좋아하는가 의심해 그러지? 간에 가 붙고 쓸개에 가 붙고 한다고? 맞지? 난 정희와 관계를 끊은지 오래.”
그때 은영은 놀란 표정을 짓더니 나직이 입을 열었다.
“정희와 갈라지다니. 어마나. 정희 때문도 아닌데.”
그녀는 성호 품에서 몸을 빼더니 아주 조용하면서도 똑똑히 말했다.
“이걸 놓고 들어봐요. 사랑을 날개로 삼으려는 사람한텐 사랑도 찾아가지 않아요. 이 시대 처녀애들은 지식이 있고 능력이 있는 개척자에게 자기 평생을 맡기려고 하지 녀성 치마 밑에 기여들고 치마폭을 잡고 바라 오르려는 연약하고 무능한 무골충 같은 남자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권세 있고 돈 많은 남자를 좋아하지 않고 언제 나 같은 농부의 아들을 좋아하겠소?”
성호는 멍청하게 눈가루 흩날리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나에겐 물려 받을 재산도 없는데다 부모까지 모셔야지. 그게 큰 흠이지. 나한테 웬 머저리처녀가 시집오겠소?”
은영은 정색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오빠, 몇해전 능력 있고 지식 있는 사람이 되라고 충고하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오빤 그 상이 장상이니 전 실망했어요. 오빤 훌륭한 남자예요. 사내 기질이 있고요. 꼭 저보다 더 좋은 처녀대학생을 얻어 잘 살리라고 믿어요.”
성호는 고함쳤다.
“인생은 마라토너요. 이제 금방 스타트선인데. 이제부터 시작하면 안되겠소? 난 은영만 곁에 있으면 무슨 일이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소.”
허나 은영은 체육머리를 쓰다듬어 넘긴후 옷매무시를 바로 잡더니 분명히 말했다.
“늦었어요.”
그녀의 정색한 맑은 깜장눈길과 마주치자 성호는 가슴이 갑갑해나고 귀뿌리가 윙- 해났지만 그녀의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우린 남이면 몰라도 웃학년 선배인데다 오빠 같은 분이 아닌가요? 더 애나게 굴고 싶지 않아요. 난 이미 사랑하는 남자가 있어요.”
“누구? 범송이?”
“차차 알게 되겠지요.”
“그럼 누구?”
“나는 구지욕이 강한 한 탐구자에게 내 사랑을 바치기로 했어요. 그의 연구생 시험준비에 영향을 줄가봐 기다리는 중이예요.”
“그 탐구자라는 량반은 행복하겠다. 이렇게 아름다운 은영이 사랑을 받으니까. 건데 도대체 누구요?”
성호의 애탄 말에 은영은 “힌트 한나 해주지요. 지하도서실을 가 본 적이 있죠? 그 남잔…”
“앗! 승호?!”
성호는 정수리에 청천벽력이나 얻어맞은 듯이 기겁했다. 그는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비틀 뒤로 물러섰다. 자기 눈을 의심할 정도로 은영을 똑똑히 쳐다보았다. 은영은 분명 체육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아, 성호의 연극은 이렇게 희극적으로 짝사랑이란 비극의 막을 서서히 내렸다. 성호의 화산 폭발 같던 참사랑도, 옹근 4년 동안 모든 정력을 기울여 엮어온 사랑환상곡도 짝사랑으로 처참하게 끝났다. 그가 바꿔 온 것은 오직 살 용기마저 잃게 하는 실련의 고통이였다. 모든 것이 파멸을 선고하는 그 시각 성호에게는 외로움과 공허감, 슬픔과 칼로 에이는 듯한 마음의 아픔만이 남아 있게 됐다. 성호는 사랑과 질투로 해 고민과 가슴 아픈 실련의 고통을 안고 헤맨 정희와 실련으로 해 정신 이상에 걸린 범송에게도 미안했다. 게다가 동창생들을 볼 면목도 없게 됐다.
성호는 마음  속에 얼기설기 뿌리내린 은영에 대한 사랑이 뽑히는 순간 칼로 에이는  듯한 고통과 절망으로 죽을 것만 같았다. 마음  속에 뼈 속에 골수에 얼기설기 뿌리 내린 사랑의 낚시줄이 뽑히면서 뻘건 피를 흘리고 슬픔이 흘러나왔고 절망의 고름이 처절하게 흘렀다. 성호는 불시에 귀뿌리가 윙 해나면서 시꺼먼 천길 나락 아래로 허망 떨어져내려가는 감을 느끼면서 눈앞이 캄캄해났다. 염라왕국에 갇히면 이런 고통에 비하랴. 사랑하던 은영을 잃고는 살 것 같지 못했다.
소나무 초리에서 눈보라가 절망과 슬픔으로 부서져 흩날렸다. 씁쓸한 눈가루가 모래알처럼 날아와 성호의 뺨이며 목이며 얼얼하게 들부신다.
실련의 눈보라 속에 은영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가녀린 어깨를 들먹이고 오도카니 서 있었다. 그녀 뒤에서 성호가 그 절망의 심연에서 허우적거리며 비틀비틀 간신히 몸을 지탱하면서 멀어져갔다.
      은영이 눈보라 속으로 사라진 허허벌판에 성호가 우두커니 서서 즉흥으로 시조를 읖조렸다.

                                장미꽃
맘 속에 춘풍처럼 스며든 녀신아
혜성처럼 다가왔다 별지처럼 사라졌네
외로움 눈보라처럼 하아얗게 서렸네
                  7. 미련
성호는 침대에 누워 멍청히 천정 한곳만 쳐다보며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그는 비록 은영에게 실련당했지만 자기 감정을 시원히 토로하고나니 얼마나   홀가분한지 몰랐다. 그녀한테 어떻게 말할가고 며칠이고 벼르고 별렀지만 결과는 비극적으로 끝났다. 일종 해탈감이라고나 할가. 결과는 어떻든간에 속시원히 활 말해놓고나니 한시름을 놓은 것 같았다.
그러나 뒤이어 이제껏 쌓아온 리상의 달걀무지가 하루 아침에 와그르르 무너지는 감, 그리고 쓸쓸한 패배감도 스물스물 기여들었다.
(이날 이때까지 범송이 은영과 좋아한다고 경계했는데. 허참, 승호가 중뿔나게 튀여나올 줄이야. 개새끼, 지하독서실에서 공부하는 척하면서 엉뚱한 짓을 했군. 밤중에 막내 홍희와 쑥떡거리며 련애하더니 아래 학번의 은영까지 넘보았어?)
성호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사랑의 라이벌한테 한대 안겨주고 싶었다.
(다 승호를 탓할 순 없지. 은영도 눈이 멀었어. 약혼녀가 있는 승호를 사랑하다니? 헛참, 홍희하고 이중련애를 하는 거 알기나 해?)
성호는 다시 들어누워버렸다. 허나 승호에게 순순히 지고만다는 것도 자존심에 허락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개 주둥이에 들어간 내 ‘레날 부인’을 빼내오지?)
성호는 침대에 누워 한참 이리 궁실 저리 궁실 하면서 궁리를 굴리고 또 굴렸다.
(혹시 건달놈새끼 더러운 밑바탕을 알면 떨어지지 않을가? ‘약혼녀도 있어’, ‘우리 학급 막내와도 련애하더라’. 그럼 은영은 ‘아이고, 사기꾼이야!’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싸쥐고 도망칠 거야. 혹시 귀뺨을 찰싹 갈길지도 몰라. 그 다음엔  나한테 달려올 거야.)
성호는 금시 웨딩드레스를 입고 자기한테 달려오는 물 찬 제비같이 예쁜 은영을 방불히 보는 것만 같았다.
그는 승호의 밑바닥을 들춰내는 일을 한시도 늦출 수 없었다.
며칠이고 은영을 조용히 만나려고 기회를 노렸지만 은영은 련 며칠 눈에 뜨이지도 않았다.
어느 날 저녁에 학교 식당으로 가다가 뭔가 들고 사뿐사뿐 걸어가는 은영을 발견했다.
(아이고, 내 사랑아, 오늘 끝내 만났구나.)
성호는 걸어가는 은영의 뒤모습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여 황급히 뒤따라 달려갔다.
“나 좀 보기요.”
은영은 와뜰 놀라 주춤 멈춰서 새침한 표정으로 뒤돌아보았다.
“어마나, 간 떨어지겠네.”
그 바람에 사발에서 국물이 흘러내렸다.
성호는 뒤덜미를 긁적이면서 “미안하오. 조용한데 가서 얘기하기요.”라고 했다.
은영은 홱 돌아서면서 “무슨 할 얘기 또 있어요? 숱한 애들이 봐요. 창피하게.” 하고 발뺌을 빼기 시작했다.
성호는 리지를 잃고 은영의 팔을 홱 잡아챘다.
쟁그랑! 댕그랑!
밥사발과 국사발이 땅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왜 이래요? 난 할 말이 더 없어요.”
은영은 화난 나머지 언성을 높였다.
그녀는 지나다니는 숱한 애들을 보더니 귀밑을 붉히며 엎드려 밥사발과 국사발을 주어들고 성호를 쏘아보았다.
“다신 찾지도 말아요.”
한마디 남기고는 홱 돌아서서 침실 쪽으로 뛰여갔다.
성호는 닭 쫓던 개 격으로 돼 녀성숙사로 사라지는 은영의 뒤모습을 멍청히 보다가 돌아섰다.
밥맛이 없어 식당에 가지도 않고 숙사 쪽으로 돌아섰다.
“성호-”
백양나무 쪽에서 웬 처녀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호가 맥없이 머리를 들어 그 쪽을 바라보니 뜻밖에도 해연이 오도카니 서서 자기를 웃는 얼굴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성호는 울적한 기분에 별로 반기는 기색도 없이 다가가면서 퉁명스레 물었다.
“여긴 어째 왔소?”
“뭐 대학교는 나 같은 로동자들이 오지도 못하는 곳이오?”
성호는 너무 지나친 것 같아 “언제 왔소?” 하며  속에 내키지 않은 인사말이라도 건넸다.
그제야 해연은 해시시 웃으며 성호 옆에 달라붙더니 “한참 되오.”라고 하더니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였다.
“저녁식사 했소?”
성호는 볼멘소리로 “밥맛이 없소.”라고 했다.
해연은 성호를 쳐다보면서 “우리 시내에 가서 맥주나 한잔 할가요?”라고 하며 스리살짝 추파를 보냈다.
성호는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며 백양나무 가지들이 몸부림치는 을씨년스런 날씨에 몸을 옹송그렸다.
“추운 날에 맥주는 무슨?”
“그럼 소주 할가?”
성호는 진퇴량난에 빠졌다. 호주머니에 단돈 1원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버선목이라고 번져보일 수도 없었다. 또 필경 한 마을에서 머리를 맞대고 일하던 해연을 몰라라고 숙사에 들어가버릴 수도 없는 일이였다.
“성호는 소비자 아니고 뭐요? 내 한턱 낼게.”
성호의 고충을 알기라도 한 듯한 해연이 선뜻이 성호를 잡아 시내로 끌었다.
성호는 못 이기는 척하면서 시내로 발길을 옮겼다.
(이래선 안되는데. 고중생과 약혼하고 결혼할 수 없어. 난 꼭 은영과 같은 권세가의 규수를 꽉 잡아야 출세한단 말이야.)
체면  앞에서 리성의 방패는 산산이 박살났다. 성호는 마지못해 끌리다싶이 시내 음식점에 가서 들어앉았다. 갓 개방한 세월이여서 시내에 음식점이라고는 거의 한거리에 몇집 밖에 없었다.
40평방메터도 되나마나한 음식점에 손님도 몇이 없었다. 성호는 제일 구석진 곳에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해연은 메뉴를 들고 보면서 성호가 좋아할 것 같은  돼지고기로, 개고기로, 소고기로 이것 저것 수태 시켰다.
“해연이, 언제 다 먹는다고 그래오?”
성호는 미안했다.
“근심 말라고.”
그 말에 메뉴를 적던 아가씨는 외면하면서 킥킥 웃었다.
성호는 재수 없는 날이여서 별 수모를 다 당한다고 속으로 욱하고 뭔가 괴여올라오는 것을 겨우 참아냈다.
“오빠 좋아하는 모두부야 빼놓을 수 없지.”
“됐소, 됐어.”
성호가 손사래를 쳤다.
“알았어. 먼저 이만 하고 먹으면서 보지요.”
해연은 아주 흥이 도도해서 성호를 마주 바라보았다.
“오빠, 어째 오늘 기분이 썩 좋지 않다. 무슨 일이 있어?”
성호는 입에 빗장을 지른채 묵묵부답이였다.
해연은 성호의 얼굴에 흐르는 검은 그림자를 보아낸듯 화제를 슬쩍 바꾸었다.
“오빠, 내 오늘 태평거촌에 올라가 보았는데요. 오빠네 막내누나 왔더라고요.”
“막내누나? 건데 어째 고향마을에 갔소?”
“뭐, 못 갈델 갔소? 난 태평거촌 집체호 지식청년인데. 또 장차 농촌에 뿌리박고 혁명을 할 사람인데. 호호호.”
“쳇, 해연이 어디 한뉘 시골 풀밭에 머리를 파묻고 살 녀자오?”
불쑥 그런 말을 해놓고 성호는 후회하면서 혀를 감빨았다.
(해연을 책임지지 못하겠으면 웬 쓸데없는 말?)
“내야 든든한 대학생 오빠 있는데 왜 시골에서 살아? 허나 시골 시부모를 위해서라면 내야 시골에서 닭과 돼지를 기르면서 살 수도 있지.”
“또, 또. 오빠라고 부르지 말라고. 한살 이상 누난데. 원, 쯧쯧.”
“어마나, 지금 세월에 나처럼 자진해 시부모를 모시겠다는 색시감이 어디 있소? 한나라도 있으면 내 비단보에 싸서 이고 다니겠어.”
성호는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런 걸 어떡해?)
드디여 채가 들어왔다.
해연은 술잔에 소주를 찰찰 넘치게 부어올렸다.
“오빠, 오랜만에 오빠와 마주 앉으니 진짜 기쁘오.”
뜻밖에 해연은 술잔을 내밀었다.
“한잔 따라주겠어요?”
“어쩌지 못하면서 웬 소주요? 맥주나 마시오.”
“취하지 않을테니 근심하지 마오.”
성호는 곧이듣지 않고 점원을 보고 맥주 한병 달라고 해 부어주었다.
“오빠, 자, 한잔 마시오.”
잘라당 술잔을 마주치더니 해연은 꼴깍꼴깍 굽냈다.
성호도 기분이 상한지라 에라 모르겠다고 굽냈다. 먹지 않아도 먹었다고 할 판이라 성호는 돼지고기점을 짚었다.
“막내누나 무슨 일이 있습데?”
“아마 애를 낳으러 온 거 같습데.”
“그래? 며칠 전에 YB병원에 다니는 우리 이모네 집으로 왔었는데.”
“그래도 자기 엄마 집에 와서 낳는게 마음에 놓여 그랬겠지.”
성호는 한시 바삐 막내누나와 매형을 보고 싶었다.
둘다 이젠 술이 거나하게 됐다. 해연은 자꾸 돼지고기채를 더 청해온다, 술잔에 술을 찰찰 넘치게 따라 두손으로 들어 권한다 하면서 정성을 다했다. 성호는 그녀가  눈물겹게 가긍하기만 했다.
성호는 울적한 기분에 해연의 손에서 술잔을 받아 꿀꺽꿀꺽 삼키면서 불쑥불쑥 속심의 말을 쏟아냈다.
“너 오늘 밑진 장사 했어.”
“뭘? 웃기지 마오. 난 장사하러 온 게 아닌데. 뭘 밑져?”
“난 호주머니에 돈 1전도 없어.”
“오~ 그런건 근심하지 않아도 돼. 님께선 아직 소비자가 아니오? 난 학교 식당에라도 출근하는 월급쟁이 로동자 아닌가요?”
성호는 불쌍한 자기를 여린 마음으로 보듬어 주는 해연이 불시에 사랑스러운 감을 느꼈다.
“그래, 우리 대학교 식당 아줌마, 고맙소.”
“아이유, 벌써 취했어? 숫처녀를 보고 아줌마라니?”
(실련의 아픔을 달래줄 사람은 너뿐이지. 전도고 리상이고 뭐고 젠장, 해연이랑 같이 예쁘고 풍만한 계집애와 마구 뒹굴면서 놀고 싶은 건 어쩌지?)
“너 학교 식당에 취직했니?”
“그래, 래일부터 학교식당에 들어가 너한테 국물이랑 퍼줘야 해.”
“그래, 잘 됐구나.”
성호는 조용한 음식점을 두리번거리다가 나직이 귀속말을 했다.
“얘, 식당에서 돼지고기채랑 가만히 좀 더 퍼주렴.”
“고만한 거야 OK!”
성호는 취중에도 용케 리성을 되찾아가군 했다.
“얘, 이젠 밤도 깊었구나. 너, 뭘 보고 이 못난 농민의 아들에게 미련을 두고 뒤꽁무니를 쫓아다녀?”
그 기막힌 말에 해연은 손으로 취기 오른 성호의 코끝을 살짝 쥐여 비틀어놓았다.
“좋아 그래.”
“이전에 내 소를 방목할 땐 날 소 닭 보듯했잖아? 갑자기 이 성호가 그렇게 좋아?”
해연은 억이 막혔는지 입을 함박만하게 쫙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사실 네가 대학에 입학하지 않았더라면 그저 멋지고 잘난 총각으로 남을 수도 있었지.”
“이런 멍청이라고. 넌 리상과 전도도 안중에 없냐?”
“식당 복무원한테 무슨 리상과 전도가 있어? 대학생 성호한테 시집가면 다지.”
성호에게는 그런 말이 아주 실망스러웠다. 순수한 녀성보다도 그래도 리상과 전도를 추구하는 녀성이 지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탁 쳤다.
“한잔, 따라 올리지요.”
이때 주방에서 개고기 한접시를 들고 나온 한 처녀가 다가왔다. 성호의 흐릿한 눈길에도 그녀의 모습에 놀랐다.
“아니, 선화야!”
더 놀라 일어선 건 아마 해연인 것 같았다.
“선화지?”
성호 이모네 옆집의 그 선화 맞았다.
선화는 성호  앞에 개고기 접시를 내려놓고 술병을 들었다.
“한잔 올려도 괜찮을가요?”
성호는 이 술자리가 복잡하게 얽힐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해연은 성호에게 선화를 소개하기에 급했다.
“얜, 우리 소학교 동창생이야. 어떻게 돼 여기 있니?”
선화는 보름달 같은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를 흘리며 성호의 술잔에 술을 찰찰 넘치게 따랐다.
“어쩌겠냐? 대학에도 붙지 못한게 음식점이라도 차려야 밥벌이를 하지.”
“그래, 이 음식점이 네 거냐?”
선화는 머리를 끄덕였다.
“보스님,  한잔 받아.”
해연이 술병을 잡자 선화가 찬장에 가서 술잔을 들고 왔다.
그때 성호가 해연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한잔 부어주었다.
선화는 술잔을 들고 “진작 부으려고 하다가 두 분의 주흥을 깨는 거 같아 늦었어요. 아무튼 이후에도 우리 음식점에 자주 오세요. 그럼 제가 소주 한잔 권하지요. 두분 행복할 걸 축원해요.” 하고 말하였다.
그녀는 성호와 해연의 술잔을 달라당 마주쳤다.
성호는 술잔을 높이 들어 쭉 굽냈다.
“오늘 기분 좋구먼. 시내 미녀들과 한잔 하는게. 한가지 명확히 할게 있소.”
그는 해연과 선화를 번갈아보면서 “나와 해연은 절대 그런 관계 아니오. 절대 오해하지 마오.”하고 술잔을 들었다.
이때 음식점 문이 벌컥 열리더니 처녀총각 손님이 들어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승호가 글쎄 홍희를 데리고 들어서지 않았겠는가.
“어서 오세요. 단골손님들께서 오셨구만요.”
선화가 마중 나가면서 아양을 떨었다.
홍희는 자기들을 놀라운 눈길로 보는 성호를 발견하고 혀를 홀랑 내밀며 외면했다. 승호는 황급히 홍희를 데리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야, 어딜 가?! 같이 한잔 하자!”
성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호는 “마셔라! 주흥을 깨뜨리지 않을게.” 하고 나가버렸다.
성호는 뒤쫓아나가려다 말고 제자리에 물앉았다.
선화는 손님을 빼앗겨 아쉬워하다 말고 성호에게 한잔 더 따랐다.
“저분들을 어떻게 알아요?”
“동창생이요.”
성호는 선화의 잔에 한잔 따라주면서 물었다.
“쟤들 여기 자주 오오?”
“그래요. 주일마다 서너번 와요. 단골손님인데요.”
“그래? 참 좋은 친구지.”
성호는 머리를 끄덕이다가 뭔가 꼬리를 밟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후에 종종 와서 술을 마시세요.”
선화는 해연의 눈치도 보지 않고 성호와 술잔을 부딪치고 잔을 쭉 굽냈다.
성호는 “승호, 저 친구는 우리 학급의 체육위원인데. 정말 능력이 있는 친구지.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녀자친구도 많고.” 하고 슬슬 올리췄다.
“그런 거 같아요. 번마다 다른 녀자친구 데리고 오던데요.”
“혹시 체육머리를 한 녀자애도 데리고 왔소?”
“예. 체육머리 굽실굽실한 녀자 체격 진짜 죽여주더구만요. 좀 나이 있는 녀잔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던데요.”
“그래?”
성호는 가능하게 옛날 약혼녀 아닐가 짐작됐다.
성호는 머리를 가로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리성의 높은 장벽이 해연, 선화와 자기 사이에 우뚝 일어서는 감을 느꼈다.
(그래, 그 한마디가 고맙구나. 해연아, 넌 교수 딸이니까 . 학교식당에 들어와 일하면서라도 시내에서 만족스레 살진 몰라. 선화, 넌 음식점을 차려 돈이나 벌면서 잘 살 수 있어. 난 농민의 자식이야. 그러나 너희들과는 달라. 나한텐 상류사회로 진출할 원대한 포부와 리상이 있어. 절대 리상과 전도를 포기할 수 없어. 너희들을  선택하는 거면 같은 값에 분홍치마라고 정희를 선택하지.)
선화의 깎 듯한 인사를 뒤로 하고 성호가 바깥에 나오자 차디찬 눈보라가 실련의 쓸쓸함과 함께 윙윙 휘몰아쳐왔다. 해연의 덕분에 거나하게 마셨건만 그의 마음을 쓸쓸하게 만들었다.
“고맙다.”
성호의 말에 해연은 “이담 두고 두고 인정을 갚아다오.” 라고 했다.
성호는 그저 머리를 끄덕였다.
“이담 로임 타면 한턱 낼게.”
“돈은 싫어. 사랑해달라.”
성호는 비틀거리며 해연의 부축을 받아 겨우 학교 대문어귀까지 왔다.
“이 팔을 좀 놔라. 남들이 보면 련애한다고 소문나겠어.”
“소문 나면 뭐라니?”
“이러지 말래도.”
“우리 집에 가 놀래?”
“어디로 가? 놔라.”
성호는 용케도 팔을 빼내고 비틀거리며 숙사 쪽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해연은 오도카니 서서 성호의 뒤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련에 찬 눈길이 보이지 않는 한오리 실처럼 어둠  속에서 성호의 잔등으로 따라갔다.
눈보라 치는 어둠  속에서 성호를 바라보는 미련에 찬 눈길이 또 한나 있었다. 진짜 눈물겨웠다.
그 주인공이 바로 정희였다. 성호가 은영에게 미련이 남아 있는 것보다 못지 않게 그녀는 아직도 성호에게 가는 미련이 남아 있었다. 헌데 해연의 부축을 받으며 비틀거리는 성호의 뒤모습을 보고 실망의 파도가 찰랑거렸다.
정희는 도리머리를 흔들더니 비틀거리며 숙사로 발길을 옮겼다.
침실에 돌아와 맞은켠 승호의 침대를 보니 이불이 개여진 채 사람은 없었다.
(요놈 자식, 홍희를 데리고 어데서 노는 모양이야.)
순간 성호는 그들의 꼬리를 밟아서 은영한테 알려주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옳다. 항상 열집의 사위가 돼야 한다더니 약혼녀를 두고 홍희와 은영을 건드려? 어림도 없어. 만천하에 쫄딱 밝혀놔야지.)
성호는 침실에서 나와 주춤 멈춰섰다.
(요 교활한 새끼, 어데 가서 개 수작을 할가? 선화네 음식점엔 다시 안 갈 거고.)
바깥에 나와 서성거리다가 눈보라치는 백양나무숲 속을 바라보는 순간 혹시 어둠  속에 홍희를 껴안은 승호의 징그러운 모습을 방불히 보는 것만 같았다.
성호는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고 눈보라 속을 헤집고 교정의 백양나무숲 속을 헤집고 찾고 또 찾아 헤맸다. 허나 승호네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천진한 막내동창생 홍희가 불쌍해났다.
(어쩜 시내에 남으려는 미련에 승냥이 같은 색마한테 얼리워? 네 처지  불쌍해.)
그는 숙사로 돌아오다가 2층 세집 전등이 켜졌다가 깜빡 꺼지는 것을  발견했다.
(혹시 저 것들이 헌 세집에서? 그래, 지하독서실이 어쩜 이 추운 겨울엔  제일 좋은 련애장소지.)
성호는 다짜고짜로 세집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평소에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지 오랜 곳이였다. 2층 제일 안쪽에 있어 조용하기로 천혜의 련애장소였다. 밤중인지라  바늘이 떨아지는 소리마저 들을 수 있을 지경으로 아주 조용하였다.
성호는 도적고양이처럼 헌 세집에 다가가 문꼬리를 잡아 당겨보았다. 문이 꼭 잠겨 있었다.
그때였다. 집 안에서 와닥닥, 와닥닥 무슨 소리가 들리고 녀성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왜 이래? 미쳤어?”
(아니, 홍희 목소리 같은데.)
“미치긴? 함께 이 시내에서 살겠으면 내 말을 곰상곰상 들어.”
“그래도 그렇지. 결혼도 안하고 맨날 이럼 돼?”
“우린 이미 몇번이나 결혼했는데도 왜 이래?”
“들키면 어째? 퇴학맞자고 이래?”
“근심하지 말라? 아무도 모르니까.”
성호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문에 난 옹이구멍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는 "지하독서실" 안에서 벌어진 광경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승호가 글쎄 한 녀자를 깔고 들어앉아 그걸 하려고 덤벼들고 녀자는 밑에서 두다리를 버둥거리면서 저항하고 있지 않겠는가!
성호는 심장이 바깥으로 튀여나올듯이 쿵쾅, 쿵쾅 높뛰였다.
“누구야? 혹시 은영이? 머리카락이 긴 걸 보니 체육머리가 아니야.)
“이러지 말래도?”
“홍희, 사랑해. 한번이면 어떻고 열번이면 어때? 이미 쒀놓은 죽인데.)
“오빠, 약속해. 나하구 결혼하겠다고. 영원히 배신하지 않겠다고.”
“이젠 몇십번 맹세했어. 영원히 사랑해, 영원히 네 신랑이 돼주마.”
“은영을 좋아하지 않지?”
“그래, 너만 사랑할게.”
성호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승호가 색마처럼 어린 막내 홍희를 깔고  씨닥거리는 것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홍희 불쌍하구나.)
성호는 놀란 나머지 그 자리를 바삐 떴다. 그러나 고약한 생각이 머리를 쳤다.
(잘됐어. 네 놈이 이러고서도 은영과 좋아해?)
침실에 돌아와 성호는 복잡한 생각을 굴렸다. 그는 은영의 마음을 돌려세우기 위해서라도, 아니, 은영을 승냥이 같은 색마의 아가리에서 빼내기 위해서라도 승호의 진상을 알려줘야 했다.
그러나 친구를 잃을 것을 생각하니 한편으로 마음 한 구석이 아팠다. 더구나 사건이 커지면 승호와 홍희는 퇴학맞을 수도 있었다. 은영 때문에 그들의 전도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이때 승호가 침실에 돌아왔다. 그는 자는 척하는 성호 쪽을 흘끔 곁눈질 해보더니 침실에서 되나갔다.
그날 밤에 승호는 다시 침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개자식, 진짜 미쳤구나. 지하독서실? 픽, 지하섹스장이라고 해라. 오늘 밤에 허리 뚝 부러지게 밤을 새겠지. 큰 일은 큰 일이야.)
성호는 친구로서 승호를 속심의 말로 타일러주지 못하는 것이 자못 마음 아팠다.
성호는 구경 어떻게 해야 은영을 쟁취할 수  있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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