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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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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90)
2017년 12월 20일 16시 37분  조회:1360  추천:5  작성자: 김장혁




                    9. 추방

       정규상 같은 유명한 교수, 의사를 보고 병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상교양에 결부한, 범보다 더 무서운 정치징벌이었다. 그것은 마치 푸르른 초원에서 풀을 먹지 못하고 달리지 못하게 천리마를 말뚝에 매 두는 것이오, 소 주둥이에 꾸러미를 채워 여물을 먹지 못하게 하는 격이 아니고 무엇인가?
       의학학부 학부장 로기순 박사는 정규상이 어처구니 없이 무함과 릉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 항상 도리머리를 저으며 침묵으로 항거했다.
       어느 하루 저녁 퇴근하기 전에 정규상이 복도를 청소할 때었다.
“박 서기, 이러지 마세요. 누가 보면 큰 일 나겠습니다.”
“떠들지 마오.”
“서기가 어째 이럽니까? 이걸 놓으십시오.”
박영발 서기 사무실에서 여성의 애원소리가 간간히 들리었다.
“입당하겠다면서 어째 정치민감성이 없소?”
“…”
“고분고분 말 들으면 입당시키구 내과 간호사장을 시킬게.”
“저는 처녀예요. 이러면 어떻게 시집갑니까?”
"우리 둘 밖에 모르는데. 어째 시집가지 못한다고 그러오?”
“야, 이걸 놓으십시오.”
“말 들어. 제꺽, 응?”
“어쩜 사무실에서 이럽니까?”
“잔말 말고 하자는대로 들이대라."
"입당 못해두 이런 짓, 아니, 이러지 말라는데두!"
"어째 정규상처럼 우파모자를 쓰구 투쟁맞겠니?”
“아, 아, 집안 집 삼촌이라는 게. 이, 이게 뭐, 뭔가요?”
“눈 딱 감고 조금만 참아라.”
“이러지 마, 말라는데. 아이구, 아파 죽겠다. 씨!”
"쉿!"
정규상은 복도를 두리번거리었다. 누구도 없었다. 다만 저쪽에 당직의사가 한창 환자서류철을 뒤적이고 있을 뿐이었다.
정규상은 살금살금 사무실에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밀봉된 문이 꼭 닫힌 사무실 안에서 후닥닥 후닥닥 하는 소리와 여성의 비명인지 신음소리, 침대가 삐꺼덕삐꺼덕 하는 소리 귀청을 아프게 때렸다.
(더러운 놈!)
정규상은 고의로 복도를 청소하는 척 하면서 걸레대로 사무실 문을 퉁퉁 쳐놓았다.
정규상이 걸레질을 하면서 세면실로 들어가 문을 살며시 열고 살펴볼 때다. 사무실 문이 살며시 열리더니 박영발 서기가 복도를 두리번거리는 것이었다.
정규상은 제꺽 세면실 문을 닫고 걸레를 물초롱 안에 넣고 휘휘 휘저으며 씻어댔다. 그러다가 다시 세면실 문을 살며시 열고 박영발의 사무실 쪽을 살폈다.
한참 후에 한 간호사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오더니 사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종종 걸음을 쳐 세면실을 지나 간호사 실로 가는 것이었다.
그녀가 세면실을 지날 때 정규상은 자기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항상 박영발을 삼촌이라고 졸졸 따라다니며 아양을 떨던 박윤희가 아니겠는가! 정규상은 박윤희가 불쌍해 보지 못할 것을 본 것 같아 세면실 안 칸에 있는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나오지 않았다.
한참 후 여성 화장실문이 열니는 소리가 나더니 잘칵 문을 잠그는 소리가 나고 뒤이어 흑흑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리었다. 박윤희의 흐느낌 소리 같았다.
한참 후 여성 변소 쪽에서 종이를 버스럭거리는 소리와 흐느낌소리가 들리었다.
정규상은 여성 화장실에서 나가는 여성이 누군가고 살펴보았다. 분명 박윤희였다.
박윤희가 나간 후 정규상이 여성 화장실을 청소하면서 살펴보니 파지 통에 빨간 피가 가득 묻은 위생지가 수두룩이 널려 있었다. 정규상은 피 묻은 위생지가 지저분하게 널린 쓰레기통을 청소해 버리면서 박영발에게 간음당한 박윤희가 불쌍해났다.
한참 후 박영발의 사무실의 불이 켜졌다가 꺼졌다.
이윽고 박영발이 어두운 사무실에서 나와 복도에 서서 여기 저기 살펴보는 것이었다. 드디어 어깨를 으쓱하더니 층층계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세면실에서 정규상이 문을 살며시 연채 살피다가 걸레를 들고 나올 때었다.
갑자기 뒤에서 나는 고함소리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놈 우파분자, 아직도 퇴근하지 않고 뭘 기웃거려?!”
정규상이 돌아보니 떠나간 것 같던 박영발이 도끼눈이 돼 쏘아보는 것이었다.
“아, 박서기, 이제야 퇴근하오?”
“안되겠다. 네 놈은 투쟁을 덜 받았구나. 진짜 음흉한 놈이구나.”
정규상은 속으로 맞받아 욕했다.
(적반하장이라더니 누가 할 소리를 누가 하니?)
박영발은 정규상을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며 이발을 부득부득 갈았다.
“네 놈, 말을 함부로 해 고생을 하는 걸 알지? 주둥이를 잘 건사해라. 함부로 지껄였다간 감옥에 보낼줄 알아라. 알겠어?”
정규상은 자기 입을 막으려고 하는 개수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쩌는 수 없었다.
“예, 알았습니다. 난 아무 것도 모릅니다.”
“당신은 총명한 사람이란 걸 아오.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는 거 알리라 믿네.”
박영발은 경고 메시지를 보내고는 휑하니 자리를 떴다.
정규상은 심장박동이 급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며 박영발이 떠나간 어둠침침한 복도와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이튿날 아침이었다.
정규상이 한창 청소할 때다.
박영발이 다가왔다.
“우파분자 정규상은 광명위생원으로 가서 개조해라.”
“예?”
정규상은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못 들었는가? 광명위생원으로 가라!”
광명위생원은 시내 한 가도 위생원이었다.
정규상이 위생원에 개조하러 내려갔을 때었다. 광명위생원에는 5십대의 김형내라는 중의와 약제사, 간호사 셋밖에 없었다.
김형내는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면서 기 죽은 정규상을 아주 반갑게 맞았다.
“에이유, 심장내과 전문가가 이런 누추한 가도위생원에 와서 어떻게 고생하겠소?”
정규상은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사상개조를 잘 해얍지.”라고 한마디만 했다.
여성약제사는 형내의 둘째 며느리 박명자라고 불렀는데 약제사를 하는 한편 시아버지한테서 중의를 배우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성근한 여성이어서 아주 존중하는 눈길로 정규상을 바라보면서 “후에 저에게 서의를 많이 가르쳐 주세요.”라고 하며 반갑게 인사했다.
허나 정규상은 겸손하게 “개조분자에게서 뭘 배울 게 있겠습니까?” 하고 말했다.
명자는 웃으면서 “정교수는 우리 연변에서도 이름 높은 진단전문가에 심장내과 전문가인데요. 이 기회에 꼭 스승으로 모시고 심장내과 의료기술을 배워야겠어요.”라고 했다.
정규상은 한숨을 후 내쉬며 옆에 서 있는 간호사에게 눈길을 돌리며 먼저 눈인사를 건넸다.
허나 간호사 박영자는 정규상한테 멸시하는 눈총을 주며 등을 돌리는 것이었다.
지어 자기는 팔짱을 끼고 떡 버티고 서 있으면서도 아버지 벌 되는 정규상을 보고 훈계부터 했다.
“개조하러 왔으면 청소랑 말끔히 해야지, 뭔가요?”
      정규상은 속으로는 불쾌했지만 별수 없었다. 꾹 참으면서 청소를 하지 않으면 안 됐다.
      형내는 너무 한 것 같아 영자를 책망했다.
      “예절 없이, 참, 그거 뭐요?”
“에이유, 김 의사는 우파분자를 두둔하는가요?”
“조선 사람들은 예로부터 어른을 존중하는 예절을 지켜왔소. 그게 뭐요?”
형내의 질책에 영자는 혀를 홀랑 내밀었다.
그후부터 그녀는 형내 앞에서 더는 정규상과 각박하게 놀지 못했다. 허나 항상 눈살이 꼿꼿해 정규상을 핼끔 쳐다보며 눈을 흘기군 했다. 
        어느 날 오후에 출근한 박영자는 형내를 찾아와 호들갑을 떨었다.
“김 선생님, 언닌 입당하고 내과 간호사장이 됐대요. 언니가 얼마나 부러운지 모르겠어요.”
       형내는 염소수염을 슬슬 쓸면서 “축하한다고 언니에게 전하오.”라고 하고는 환자를 계속 보았다.
      그는 환자의 손목에서 진맥하던 손을 떼더니 그때까지 종알거리는 영자에게 눈길을 돌리며 물었다.
“언니 이름이 뭐라고 했던가?”
영자는 외까풀 눈을 곱게 상글거리었다.
“박윤희입니다. 어째 대상자라도 소개해주렵니까? 우리 언니 저 보다 퍽 예뻐요. 여자들이란 예쁜 것도 밑천인가 봐요. 언니는 예쁜 덕에 큰 병원에 갔잖아요.  미모 덕에 또 입당도 빨리 했지요.”
(박윤희? 아니, 그럼 영발에게 짓밟힌 윤희가 하루 아침 사이에 입당하고 간호사장이 됐단 말인가?)
정규상은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형내가 눈을 내리깔고 처방을 떼면서 영자에게 물었다.
“어떻게 돼 그리 빨리 입당했다오. 뭐 예쁘다고 입당시켰겠소? 당조직에서 미녀만 입당시키겠소? 그럴 수는 없소. 반 우파 투쟁이 심한데 그런 말 작작 하오.”
그제야 영자는 혀를 홀랑 내밀더니 의사 사무실에서 나가며 종알거렸다.
“에이고, 내 팔자도 기구하지. 한뉘 쥐구멍만한 위생원에서 낑낑거리다나면 언제 언니처럼 입당하겠니?”
정규상은 영자가 나가자 슬며시 형내에게 물었다.
“저 영자 동무의 언니는 어느 병원 내과 간호사장이랍니까?”
그러자 형내는 정규상을 흘끔 건너다 보더니 대수롭잖게 대답했다.
“YB병원 내과 간호사장이라오.”
“예, 그렇군요.”
형내는 이상한 듯이 정규상을 쳐다보았다.
“오- 정의사 그 병원에서 왔으니깐. 아는 사람이겠소.” 
“알다뿐이겠습니까. 예. 한과에 있었습니다.”
“오, 정말 그렇지. 항상 저 여동생을 찾아와 웃고 떠들고 했는데 요즘 보이지 않소. 전번에 피뜩 큰 길에서 보니까 아주 수척해졌더구먼. 그 곱던 얼굴이 반쪽이 되지 않았겠소.”
정규상은 속으로 짚이는 데가 있었다. 분명 박영발이 윤희의 정조를 짓밟은 대신 돌격입당시켜 간호사장까지 시킨 것이었다. 그런 방법으로 자기 죄악의 흔적을 가리려는 것이었다.
(개자식, 내가 입당신청서를 쓴지 십년이 되도록 입당시키지 않더니 풋내기를 입당시키고 그런 개짓을 하는구나. 개똥을 청보자기로 싸놓을 수 있을 거 같니? 처녀 전도를 짓밟고 더러운 야욕을 채우고서도 천벌받지 않을 거 같니?)
허나 정규상은 누구하고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규상이 빗자루를 쥐고 청소하려고 하니 형내는 말렸다.
“청소는 영자나 시키고 환자를 볼 준비나 하오. 의사가 병을 보지 않고 그런 일까지 하겠소?”
허나 정규상은 빗자루를 쥐고 사무실 안을 썩썩 쓸었다.
어느 날, 웬 곱살하게 생긴 각시가 애기를 업고 정규상을 찾아왔다.
“정 의사 바쁘지 않습니까?”
“오, 옥선이 어떻게 돼 왔소?”
김옥선은 애기를 잔등에서 풀어내려 안으면서 “얘가 아파서 왔습니다. 좀 봐주십시오.”라고 하며 기침을 콜록콜록 하는 애를 앞으로 내밀었다.
정규상은 형내의 너부죽한 얼굴을 마주 바라보면서 “김 의사는 정말 용한 중의요. 김 의사에게 보이오.”라고 했다.
사실 광명위생원에는 중약이나 있었지 애들 감기에 맞을 베니실린마저 없었다. 서약이 없는 중의위생원에서 정규상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옥선은 애기를 안고 맞은쪽에 다가갔다.
“우리 마을에서 살던 각시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얘를 살려 주십시오. 자꾸 기침을 콜록콜록 하면서 열이 자꾸 오릅니다.”
형내는 애 손을 잡아 사무 상우에 놓더니 맥을 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형내는 옥선을 마주 보며 “폐가 좋지 못하구먼. 치료를 바짝 하지 않으면 위험하오.”라고 했다.
뒤이어 형내는 처방을 떼면서 “혹시 집에 결핵병을 앓는 사람이 없소?” 하고 물었다.
옥선은 눈물을 흘리면서 “후남편의 본댁이 결핵병을 앓아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후남편도 전염됐는지 기침을 쿨룩쿨룩 합니다.”라고 했다.
형내는 짚이는 데 있어 처방을 쓱쓱 써서 약제사 며느리에게 주었다.
한참 후 박명자가 중약을 내다 옥선에게 주었다.
옥선은 눈물을 흘리면서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하고 애를 업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분 수고했습니다. 얘가 살아나면 내 떡을 쳐 가지고 오겠습니다.”라고 인사했다.
옥선이 광명위생원을 나서는데 정규상이 따라 나와 그의 손에 돈 2원을 쥐어 주면서 “얘 병을 치료하는데 보태오.”라고 했다.
“아니, 이렇게 큰돈을, 이러지 마십시오.”
“받소.”
옥선이 받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정규상은 마구 밀어주고 나서 “그래, 재가를 가서 후남편과 잘 보내오?”라고 물었다.
“예. 정의사 소개한대로 정말 마음이 좋고 듬직한 후남편을 만나서 마음고생이 없이 잘 보냅니다. 얘가 아파서 속이 타 그렇지요.”
옥선은 또 코마루가 시큼해나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크게 근심하지 마오. 일없을 게요. 저 김 의사는 우리 시내에서 소문난 한의(중의)요.”
정규상의 말을 듣고 옥선은 얼굴에 조금 긴장을 푸는 기색이 피어올랐다.
광명위생원을 나와 점심때가 오래지 않은 것을 느낀 옥선은 애를 업고 여동생 옥숙이네 집으로 갈 가고 생각했다.
여동생 옥숙은 옥선보다 열 살이나 지하였다. 체격도 좋고 예뻐서 시내 운수공사 운전수 질을 하는 신랑을 만나 아주 재미나게 살고 있었다. 그녀의 신랑 리상철은 원래 부대를 갔다가 내몽골자치구에서 해방표 자동차를 몰았는데 이 시내로 들어왔던 것이다.
옥선은 애를 업고 가서 점심이나 먹고 갈까 생각하다가 인차 생각을 달리했다.
“앓는 애를 업고 여 동생네 집으로 가지 마자. 혹시 폐병이 귀여운 조카 춘화한테 전염되면 어떻게 해?”
옥선은 앓는 애를 잔등에 업고 첩약을 들고 걸어서 모아산 고개 길에 들어섰다. 20전을 주면 버스를 타고 모아산을 넘어 집으로 가련만 정규상이 준 돈을 쓰기 아까웠던 것이다. 하긴 이전에는 물독을 사도 좋은 버스를 두고 물독을 이고 모아산을 넘고 가슴을 치는 해란강을 넘어 집으로 돌아간 일도 아주 많았다. 하여 애를 하나 달랑 업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힘겹게 모아산 고개를 넘으면서 옥선은 자기 인생이 고달픈 모아산 고개 길과 같은 감이 들었다.
옥선은 원래 남편 조철호를 12년이나 기다렸다. 기실 조철호는 항미원조 전쟁 때 김성칠 련대장을 따라 무명고지 전투에 참가했다. 무명고지 절벽이 적들의 포격에 무너지는 바람에 조철호는 대적공세를 벌이던 아나운서 녀전사와 함께 무정한 바위돌에 깔려 장렬히 희생됐던 것이다. 시집 큰동서네 고방에서 베갯잇을 눈물로 적시면서 신랑을 기다리다가 혹시 구새 목에서 발자국 소리가 쿵쿵 들리면 신랑이 달빛을 밟으면서 문을 뚝 떼고 집으로 돌아 올 것만 같았다. 하여 문고리를 쥐고 바깥을 내다보다가 낯모를 나그네가 문 앞을 지나가군 했다.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 가면 옥선은 문고리를 잡은 채 모래기둥이 무너지듯이 스르르 물앉곤 했다. 어떤 때에는 독수공방하면서 신랑이 1948년 가을 장춘을 해방한 후 집에 피뜩 들리었다가 간 후 보낸 편지와 조선전쟁 때 보낸 편지를 매만지면서 신랑을 그리고 또 기다렸다. 허나 평양이 폭격을 맞은 후 다시는 편지가 오지 않았다. 게다가 신랑이 남기고 간 유복자 외동아들마저 잃어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후에 옥선은 시부모와 말해 한 마을에 세간난 후 네 살짜리 막내 시동생을 업어 키우면서 신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리었다. 하여 새파란 나이에 옥선은 12년이나 신랑을 기다리며 허무한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한마을에서 살던 의사 정규상이 소개해 평란 촌에 있는 후남편 이종호를 만나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종호에게는 본댁이 낳은 14살 난 딸 신자와 11살 난 아들 경수 그리고 일곱 살 밖에 안 되는 둘째딸 순자 해서 조롱조롱 애 셋이나 달려 있었다.
종호는 애 하나도 데리고 오지 않은 후처 옥선에게 미안해 애들 셋 가운데서 젖먹이 순자를 용정에 있는 사촌형네 집에 줬다. 그 사촌형 내외간은 슬하에 자식 하나 낳아 기르지 못했다. 사촌형은 일점혈육도 없는 허전함을 달랠 겸 사촌동생네 둘째딸을 두말없이 제꺽 받아들이었다.
순자가 용정 오촌큰아버지네 집으로 떠나가는 날 눈보라가 어찌하여 그렇게 불어쳤는지 모른다.
순자는 큰아버지 손에 잡혀 용정으로 떠나면서 아버지와 경수 오빠 그리고 신자 언니를 번갈아 보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었다.
평란촌 마을 동구 밖을 거의 떠나 갈 때었다.
갑자기 순자가 몸을 돌려 “언니! 오빠!” 하고 고함치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큰아버지의 손을 홱 뿌리치고 이쪽으로 되 달려 왔다.
“순자야!”
경수도 네 살 지하인 여동생을 와락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아버지, 내 여동생을 남에게 주지 마시오. 예?”
경수가 아버지를 쳐다보는데 종호는 “이 놈 자식, 여동생을 시내에서 살게 보내는데 뭘 알아서 그러니?” 하고 욕했다.
종호가 흘끔 옥선의 눈치를 살폈다. 옥선은 머리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 후 옥선은 어미 없는 선실의 애들이 더 없이 불쌍해 났다.
그녀는 후남편 종호를 보고 “애들이 불쌍해 어디 남의 집에 보내겠어요? 데려 오세요.”라고 말을 꺼냈다.
그러자 종호는 속으로는 놀랍고도 기뻤지만 동의할 수 없었다.
“무슨 소리를 하오? 남도 아니고 사촌형한테 보냈는데. 시내에서 살면 좀 좋아서?”
“후 어미도 어미입니다. 어찌 자기 자식을 남에게 맡기겠습니까? 데려 옵시다.”
“뭘 먹고 살겠소? 3년 재해 세월에 입이 하나라도 불어나면 입에 거미줄을 치겠소.”
그러나 옥선은 기어이 데려오려고 고집했다.
“그 애를 데려오지 않으면 후 어미가 무슨 면목으로 이 마을에서 살겠습니까? 남들은 후 어미가 애들을 쫓아냈는가 하겠습니다. 멀건 죽물을 먹으면서라도 한 집에서 키우면서 삽시다.”
종호는 옥선의 두 손을 잡고 “고맙소. 낸들 제 새끼 불쌍하지 않겠소?”라고 하더니 옥선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날로 종호와 옥선은 용정에 가서 순자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사촌형은 순자를 내놓기 아까와 했지만 별 수 없었다. 자기 딸을 데려가는 데야.
순자는 너무 좋아 아버지와 후 어머니 손을 쥐고 퐁퐁 외발 뜀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경수와 신자는 여동생 순자를 와락 끌어안고 왕왕 대성통곡 쳤다. 그 정경을 보고 마음이 비단 같은 옥선은 애들이 불쌍해 뜨거운 눈물을 흘리었다.
선실의 애들을 셋이나 키우는 것도 쉽지 않은데 설상가상으로 재혼해 낳은 첫애마저 글쎄 기침을 콜로콜록 하면서 앓아 야단났다. 속이 타다 못해 재 가루로 될 지경이었다.
옥선이 어린애를 업고 모아산 고개 아리랑 고개를 터벅터벅 넘으니 재가해온 평란촌 마을이 환히 내려다 보였다.
(얘가 일 없어야겠는데.)
옥선은 광명위생원에 있는 유명한 의사 정규상을 생각하자 애를 구할 신심이 생겨 한 숨을 후 내쉬더니 애를 춰 업고 모아산 고개 길을 내려갔다.
                                  10. 3년 재해 비극

      어느 토요일 날, 눈보라 치는 바깥을 내다보다가 정규상은 전번에 아버지가 편찮다고 약을 지어달라고 찾아왔던 상순이 눈앞에 선히 떠올랐다.
그는 퇴근하면서 형내에게 “아버지 친구가 농촌에 있는데 몹시 편찮은 거 같습디다. 내일 피뜩 가서 보고 오겠습니다.”라고 했다.
형내는 역서장을 뒤번져보더니
“쉬는 날인데 가보오.” 하고 청가를 주었다.
그는 주사실 쪽을 피뜩 살피더니 영자가 벌써 퇴근한 것을 보고 시름 놓고 물었다.
“아버지 친구는 어느 마을에 있소?”
정규상은 문 밖을 나가려다가 주춤 멈춰 섰다.
“여기서 한 40여리 떨어진 함흥 촌이라던가 하는 시골마을에 있습니다.”
정규상은 기억을 더듬다가 무릎을 탁 쳤다.
“아차, 아닙니다. 함흥 촌에서 살다가 조개덕으로 이사해 내려왔다고 합디다.”
형내는 문께로 가다가 돌아섰다.
“아버지 친구 이름이 뭐요?”
“김기준입니다. 그 집 아들은 김상순입니다.”
“아니, 그 분이 편찮다고 하오?”
“예. 어떻게 아는 사입니까?”
형내는 도로 사무상 앞으로 가더니 “그 분은 작은 할아버지 되는 분이오.” 라고 했다.
“예? 정말 세상은 넓고도 좁구먼.”
"어떻게 내 작은할아버지를 아오?"
"사실 세교지간이죠. 저의 아버지와 상순의 아버진 제정 때 룡정 장마당에서 면목을 익히게 됐답니다." 정규상한테서 이왕지사를 쭉 듣고 나서 형내는 머리를 끄덕였다.
“어떻게 편찮다오?”
정규상은 상순이 약을 지으러 왔던 때 일을 죽 이야기하고 나서 뒷말을 이었다.
“제대로 잡숫지 못해 기맥을 쓰지 못하는 거 같습디다. 전번에 상순을 보고 인삼 같은 거나 사다가 대접시키라고 했습니다.” 
형내는 정규상을 보고 “정 선생, 내일 함께 가 보기요.”라고 제의했다.
정규상은 기뻐하면서도 얼굴에는 근심의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다.
“우파분자와 동행해 괜찮겠습니까?”
“별 소리를 다 하오. 환자를 보러 가는데 어떻단 말이오. 후과는 내 책임질게.”
그때 형내 둘째며느리 박명자는 시아버지를 흘끔 곁눈질하면서 근심하는 표정을 드러냈다.
이튿날 아침, 형내는 돼지고기 몇 근에 기맥을 추는 약 몇 첩을 져 들고 떠났다.
정규상은 좁쌀주머니를 둘러메고 그를 따라 나섰다.
오동지섣달이라 매섭게 추웠다. 대지는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쳐 얼어붙은 은세계를 방불케 했다.
소서구 어구지에 있는 조개덕에 이르러 그들은 마을 사람들과 물어 제일 남쪽에 자리 잡은 상순의 집으로 들어갔다.
상순은 한창 아버지를 부축하고 숟가락으로 죽물을 입에 떠 넣어주다가 그들이 온 것을 보고 놀랍고도 반가워했다.
시아버지가 눈 대변을 닦아내던 명옥은 반갑게 인사하고는 부엌으로 내려가 가마부터 부시었다. 그녀는 큰시조카가 가져온 돼지고기를 장물에 얹고 부엌에 내려가 아궁이에 불을 땠다.
형내는 자기보다 거의 열 살이나 지하인 상순을 항상 깎듯이 삼촌 대접을 했다.
명옥은 돼지고기를 좀 베내 둘째 은숙을 보고 큰집 시조카 경학네 집에 가져가라면서 점심을 잡수러 오라고 이르라고 했다.
“예.”
은숙은 돼지고기를 받아들고 한집 건너 뒤에 늙은 비술나무 아래 경학 오라버니 집으로 달려갔다.
형내와 정규상이 한창 앓는 기준을 진찰했다. 세월은 기준만 스치고 지나갔는지 이마에는 밭고랑 같은 주름살이 패이고 머리에는 시허연 서리가 내리었다.
기준은 그때까지도 푹 꺼져 들어간 눈으로 형내와 규상이 그리고 금방 들어선 경학까지 다 알아보았다.
상순은 형내와 규상을 한쪽으로 불러 물었다.
“아버지 병세 어떻소?”
형내는 규상을 바라보며 “큰 병이 없소. 굶어서 기맥을 쓰지 못하는 거 같소.”라고 했다.
규상도 머리를 끄덕이었다.
상순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야, 내 얼마나 무능하면 아버지를 굶기기까지 했겠소? 흉년세월에 어쩜 이런 일이 다 있소?”
명옥은 죽으라는 소리 내놓고 상순의 말을 고분고분 듣고 한마디 말대꾸를 하지 못했다.
뜻밖에 명옥이 한마디 툭 내쏘았다.
“생산대에서 쌀을 나눠주면 저 오보호 마반산집 할머니한테 다 가져다주는게 어쩌겠소.”
“뭐라고? 난 공산당원인데 어떻게 힘든 할머니를 돌보지 않겠소?! 우리 마을 애들 치고 어느 애가 마반산집 할머니 조산사로 받아내지 않았소? 덕돌도 그 할머니 받아내지 않았고 뭐요?"
상순은 아내에게 허연 눈알을 부라렸다.
"됐소, 돼."
형내는  상순을 말리더니 물었다.
“작은할아버지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오?”
“일흔 둘이오.”
“오, 우리 집안은 모두 장수한 내력이오. 작은 할아버지는 문제없소.”
정규상은 환자가 듣는 자리에서 하는 위로의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귀신같이 진단해 소문 높은 그는 푹 꺼진 눈 확에서 맥없이 한곳만 바라보는 기준의 눈과 바쁘게 몰아쉬는 숨소리를 듣고서도 큰아버지가 오래 앉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때 기준이 머리를 규상한테 힘겹게 돌리며 띄염띄염 물었다.
“아, 아버지 조선에서 무, 무사히 보내오?”
“아버지는 십년 전에 미제가 평양을 폭격할 때 세상떴습니다.”
“오, 그랬구나. 참 좋은 친, 친군데.”
기준은 맥없이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날 저녁에 기적이 일어났다. 기준은 놀랍게도 자리에서 일어나 돼지고기 국에 이밥 한 사발이나 말아 다 잡수었다. 그리고는 맥없이 드러누웠다.
상순은 아버지를 근심했다.
허나 형내는 상순을 위로했다.
"작은삼촌, 근심하지 마오. 작은할아버지는 음식에 취해 누웠소. 좀 쉬고 나면 괜찮을 거요. 약재에 인삼을 좀 넣었는데 잘 닳여서 대접하오. 그러면 일어날 게요.” 
형내와 규상은 점심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기준을 깨울세라 조용히 일어나 귀로에 올랐다. 정규상은 광명위생원에 사상개조를 하러 왔기에 더욱 이튿날 출근에 주의해야 했던 것이다.
상순은 두 손으로 그들의 손을 꽉 잡고 인사했다.
“약과 돼지고기 가져다줘 감사하오.”
“규상 동생은 정치몽둥이에 맞으면서 고생하면서도 이렇게 먼 시골에까지 와서 고맙소.”
규상은 우파란 말만 나와도 머리 끼가 곤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상순의 손만 잡고 흔들기만 했다.
상순은 형내와 규상의 뒷모습이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자그마한 흑점으로 돼 아물거릴 때까지 바라보았다. 순간 그들의 미거가 고마워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형내의 말대로 이튿날 기준은 맥없이 일어나 앉았다.
상순과 명옥은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연 며칠 상순과 명옥이 풍로에 형내가 지어다 준 첩약을 약탕기에 닳여 대접하고 규상이 가져온 입쌀로 정성껏 이밥을 따로 지어 드렸다.
기준은 약과 밥을 잡숫고 기적적으로 바깥으로 지팽이를 짚고 나가 대변을 보는가 하면 젖먹이 손자 덕돌을 안고 흥얼거리기까지 했다.
그러자 상순과 명옥의 얼굴에는 반가운 미소가 피기 시작했다. 손녀들도 할아버지 일어나 앉자 좋아서 어찌 할줄 몰라 깡충깡충 뛰였다. 그 애들은 다시는 애를 먹이지 않고 할아버지 심부름을 아주 잘했다. 덕돌은 할어버지 무릎에 앉아 흔들거리면서 재롱을 피웠다.
어느 날, 윙윙 휘몰아치던 눈보라가 누그러들자 기준은 상순을 불러 이런 말을 꺼냈다.
“얘야, 소서구로 가보자.”
“예? 이렇게 추운 겨울에 소서구로 가서 뭘 하겠습니까?”
상순은 창문으로 눈 덮인 바깥을 내다보면서 세귀눈이 휘동그래졌다.
기준은 벽을 짚고 겨우 일어나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다. 상순과 명옥이 양쪽에서 아버지를 부축해 바깥으로 나갔다.
(풍설이 윙윙 이는데 왜 이러실까?)
기준은 괭이를 들고 길을 떠나려고 했다.
상순은 바삐 아버지 손에서 괭이를 받아 들면서 “뭘 하려고 이러십니까?” 하고 물었다.
“가 보면 알 거야.”
“수레에 앉아 갑시다.”
상순은 바삐 생산대 우사에 가서 소수레를 메워 몰고 왔다. 명옥은 황급히 집에 달려 들어가 이불을 내다 수레 밑바닥에 펴고 시아버지를 모셨다. 뒤이어 탄자를 수레에 앉은 시아버지 몸에 둘러 주었다.
“고맙소. 며느리.”
명옥은 “추운데 일찍이 돌아오십시오.”라고 당부했다.
기준은 머리를 끄덕였다.
상순이 아버지를 모신 수레를 몰고 소서구로 삐꺼덕삐꺼덕 올라갔다.
눈보라가 하얀 백룡처럼 소서구 골 안을 핥아 대고 있었다. 드문드문 길이 눈 둔덕에 막혀 상순이 삽으로 마구 파헤쳐버리면서 길을 낸 후 계속 올라갔다.
기준은 살던 소서구 옛 집터를 둘러보더니 수레를 세우라고 했다.
“상순아, 여긴 조선 고향에서 쪽박 차고 살 길을 찾아 간도로 들어와 살던 옛 집터지?”
상순은 그제야 아버지가 왜 소서구로 온 것을 알 것 같았다.
아버지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더니 괭이를 쥐고 눈 가슴을 헤치며 천지꽃산 쪽으로 부축을 받으며 올라갔다.
한참 걷던 기준은 천지꽃산 기슭의 밭에 물앉는 것이었다.
“아버지, 추운데 일어나십시오.”
허나 기준은 “놔라. 내 좀 여기서 편히 쉬고 싶구나.” 라고 하며 눈을 스르르 감고 앉아 까딱하지 않았다.
상순은 아버지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런데 기준은 천천히 일어나자마자 상순의 손에서 삽을 받아 쥐어 눈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한참 파니 검누런 흙바닥이 드러났다. 기준은 괭이를 놓고 무릎을 꿇고 물앉더니 검누런 흙바닥을 두 손으로 매만지더니 눈물을 줄줄 흘렸다.
“얘, 이 땅, 이 땅은 우리 조손 3대가 피땀을 흘려 개간한 밭이 아니더냐? 이 아까운 밭을 버리고 가기 아깝구나.”
“아버지!”
상순도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부축해 일으켰다.
기준은 두 손에 언 흙부스러기를 담아 든 채 상순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일어났다. 뒤이어 손에 든 흙을 코에 대고 냄새를 흡흡 맡아댔다.
“겨울이 돼서 흙의 향기 덜 나는구나. 허나 나는 마음 속으로 이 흙의 냄새가 맛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말을 마치자 그는 흙을 마구 입에 넣고 씹어 삼키었다. 그같이 이 땅을 사랑하고 아끼는 참 농사꾼이었다.
“아, 이제야 우리 피땀이 푹 스며든 이 땅의 맛을 제대로 보았구나.”
기준은 흙을 씹으면서 몸을 돌리더니 상순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간절히 부탁했다.
“상순아, 정치인들이 어떻게 세상을 만들든지 간에 우린 농사꾼이야. 농사꾼의 양심은 밭을 묵여선 안 된다. 농사도 잘 모르는 건달들의 지시만 듣지 말라. 이 아까운 밭을 잘 다뤄 사원들이 굶지 말게 해라. 새 해에는 보릿고개도 넘기 힘든데 꼭 명심해라. 이 밭은 우리가 어떻게 일군 거냐? 우리 조손 3대가 뱀에게 물리고 괭이에 발등을 찍히면서 일군 밭이 아니냐? 지주 장학산의 눈칫밥을 먹으면서도 한 괭이 한 괭이 파서 일군 피밭이야!”
상순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흐느껴 울며 정중하게 말씀을 드렸다.
“예, 아버지, 제가 사원들을 잘 이끌지 못해 미안합니다. 이제부터 저는 진리를 견지하면서 허풍치기들의 말을 절대 듣지 않겠습니다. 농사를 잘 지어 사원들을 배불리 먹고 살게 하겠습니다.”
그제야 기준은 생강같이 바짝 마른 손으로 상순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일어나라. 내 죽으면 이 자리에 묻혔으면 좋겠다. 난 여기 누워서 우리 일군 밭에서 잘 자라는 곡식을 보고 싶구나. 허나 손바닥만 한 땅도 아깝구나. 밭에 묻지 말고 저쪽 계수동 쪽의 황무지에 묻어주면 족하다. 거기 누워서도 서쪽에 있는 이 밭을 볼 수 있으니까.”
“아버지!”
아버지는 자기가 피땀으로 일군 밭에 묻히기도 아까와 하는 것이 아닌가!
상순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 수레에 아버지를 모시고 귀로에 올랐다. 소서구 골안은 그들을 환송이나 하는 듯이 눈보라들이 환호성을 울리면서 뒤따라 달려왔다.
정규상이 가져온 쌀로 죽을 쑤어 며칠 아버지를 대접하고 나니 쌀이 또 떨어졌다. 하긴 열 근이 좀 넘는 쌀을 9명 식솔이 죽을 쑤어 며칠 먹겠는가! 겨울이 돼서 푸성귀도 없고 정말 살기 각골했다.
명옥은 쌀독을 빡빡 긁다가 웃새집에 달려갔다. 항상 바쁜 일이 있으면 웃새집에 달려가면 큰집 시조부모로부터 동서들까지 항상 도와주군 했다. 그리하여 명옥은 큰집을 아주 자기 본가집처럼 믿고 살았다.
명옥이 앓는 시아버님께 죽물이라도 대접하게 쌀을 뀌어 달라고 하자 둘째동서와 후시할머니는 두 말없이 좁쌀을 한주머니 내주었다.
“에이고, 효성스러운 며느리구나.”
오히려 시할머니는 손비 명옥을 기특하게 생각하며 혀를 끌끌 찼다.
명옥은 웃새집에서 얻어온 좁쌀로 지은 고들고들한 조밥사발을 시아버지 밥상에 올렸다. 기준은 아주 맛있게 조밥 한 사발을 굽 내고 자리에 드러누웠다.
“야, 밥을 먹으니 살 것 같구나.”
이 한마디가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말씀일 줄은 상순과 상우, 명옥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3년 재해를 입어 쌀 고생을 해 3년 동안이나 제대로 잡숫지 못해 앓던 기준은 끝내 동지섣달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생전에 그렇게 사랑하던 자손들을 한 구들이나 남겨두고 너무나도 총망히 세상을 떠났다. 그해 기준의 연세는 겨우 72세 밖에 안됐다.
자식을 앞세운 병완은 조개덕의 상순이네 집에 와서 하늘을 멍해 쳐다보면서 땅을 치며 탄식했다.
“내가 오래 살아서 보지 못할 일을 다 보는구나. 내가 먼저 죽어야 하는데 주책없이 너무 오래 사는구나. 우리 고향을 떠나 간도에 와서 황무지를 개간해 배불리 먹고 살자고 그렇게 애를 썼구먼. 하늘도 무심하지. 황소같이 힘도 센 내 둘째아들마저 굶어 죽게 만들다니?”
“아버지!”
상우는 굶어서 운신하기 힘들면서도 달려 와서 대성통곡 쳤다.
“맏아들인 내가 아버지를 모시지 못한 불효를 용서해줍소. 아버지~, 아버지~”
상순은 아버지를 붙안고 더욱 서럽게 울었다.
“내가 더 잘 모시자고 모셔왔건만 따뜻한 밥도 온전히 대접하지 못해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같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어엉, 어엉,”
두 며느리와 순자랑 순애랑 애들도 모두들 서럽게 엉엉 울었다. 덕돌은 무슨 영문인지 몰랐지만 아빠와 엄마, 누나네가 서럽게 울자 덩달아 엉엉 울어댔다.
최경인과 어금도 영월구에서 맏아들 근덕과 맏손자 일웅을 데리고 왔다. 최경인은 영월구에서 교편을 잡게 됐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돌아간 후 진수해로부터 차조구로 이사해갔던 것이다. 월금도 광석으로부터 맏아들 해진을 데리고 달려 왔다. 금옥도 남편 최학섭과 칠군이랑 인자랑 데리고 와서 서럽게 울었다. 그들은 아버지가 앓는다고 하자 몇 번이고 쌀 주머니와 돈을 들고 찾아와서 병문안을 하고 돌아갔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자 효성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아 서럽게 대성통곡을 쳤다. 그 밸을 끊는 것 같은 통곡소리는 밤이 가고 새날이 밝을 때까지도 끊지 않았다.
상우와 상순은 없는 살림살이에도 누이들의 돈까지 모아 아버지 기준을 관작을 짜서 계수동으로 올라가는 산마루에 어머니와 함께 나란히 모셨다. 그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합장하지는 않았다.
상순은 아버지의 쓸쓸한 무덤 앞에서 절을 꾸벅꾸벅 올리면서 죄송한 마음을 칼로 한 오리 한 오리 어이는 듯이 아팠다.
(3년 흉년 세월에 아들로 생겨서 부모를 제대로 대접하지 못한 불효를 어찌 하리오? 부모에게 효성을 하려고 영월구 공안국 국장을 다 버리고 두 번째 고향인 함흥 촌으로 돌아왔건만 부모께 제대로 효성도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함흥 촌과 조개덕 백성들의 쌀독은 텅텅 비었고 오래지 않아 가마에 거미줄이 칠 지경입니다. 한개 대대 사원들의 쌀독을 책임진 당 지부 서기로서 백성들이 굶어서 일 밭에서 척척 쓰러지는 비참한 정경을 더는 눈 뜨고 볼 수 없습니다. 형님도 항상 굶어 눈 확이 푹 꺼져 보기도 무섭게 됐습니다. 몇 십 년 동안 할아버지와 함께 혁명을 한 결과가 고작 이렇단 말씀입니까?)
그때로부터 상순은 과묵한 사람으로 돼 늘 고민에 잠겼다. 아버지를 갓 여읜 상주로서 항상 생산대대 회의실에서 회의를 해도 벽에 기대 앉아 대머리를 숙인 채 눈을 감고 숱한 문제를 사고하고 고민했다. 그는 무슨 회의를 하든 항상 입에 빗장을 지르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말수가 적은 그는 회의 때마다 몇 시간이고 지어 며칠이고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지어 술도 마시지 않았다. 그것은 백열화된 정치폭풍 속에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혹시 술을 마시면 취해 세치 혀끝을 잘 못 놀려 우파 모자를 쓸 수도 있지 않는가. 또 어지러운 길목에 춘실과 같은 음흉한 녀자들이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는 형편에서 남녀관계와 같은 다른 실수를 할 수도 있지 않는가. 
      칠칠흑야와 같은 세월에 아무리 노력해도 어두운 하늘에서 총총한 별같이 반짝이는 생활의 한 쪼깍이라도 숨겨 둘 수 없었던 것이다. 언제 어디서 밤중에 내민 홍두깨와 같은 몽둥이에, 명목 모를 몽둥이에 얻어맞아 쓰저질지 모를 어지러운 세월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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