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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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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91)
2018년 01월 17일 15시 31분  조회:1154  추천:0  작성자: 김장혁





                                  11. 폭풍우에 쓰러져가는 사람들

      눈보라가 기승스레 휘몰아치던 동장군이 물러가고 농사꾼들 희망의 씨를 뿌리는 봄아가씨가 사뿐사뿐 다가왔다.
보릿고개가 아득히 멀건만 불비를 맞아 말라터진 소서구의 옥수수는  시들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사원들이 물을 이고 지어다 밭에 쳐도 곡식을 되살려낼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보릿고개를 넘기기 어려워 기아에 허덕이던 마을 사람들도 하나 둘 쓰러져갔다.
      (하늘도 무심하지. 어떻게 보릿고개를 넘긴단 말인가.)
      상순은 생각할수록 앞길이 막막하고 의심스러웠다.
      (이대로 계속 나간다면 사원들이 다 굶어 죽지 않을까?)
      이제껏 위 지시라면 순순히 다 순종해온 상순이었건만 이젠 이맛쌀을 찡그리면서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하루, 상우가 떡메를 만들어 들고 동생네 집으로 놀러 왔다. 그때 상순은 하나라도 백성들의 생활에 보태주려고 사원들을 동원해 생산대에서 양돈장을 짓고 집체로 돼지를 길렀다. 그는 가솔을 데리고 아예 양돈장 사양실에 들어 있으면서 명옥을 보고 생산대 돼지를 기르게 했다.
초봄이어서 쌀이 조금 있어서 그래도 명옥은 차좁쌀 죽에 장국을 끓여서 시형을 대접할 수 있었다.
상우는 동생 집인지라 속심의 말을 했다.
      “그 놈 흥수가 무더위를 먹고 쓰러지는 바람에 잘됐구나. 코개가 없어 집에서 죽을 먹어도 살피는 놈이 없어 편안하구나.”
상순은 터놓고 말했다.
     “허백호 서기도 철직당해 근심할게 없소. 집체식당도 당장 문을 닫게 됐소.”
     상우는 죽을 맛있게 먹으면서 말했다.
“집체식당보다 자기 집에서 끓여 먹는 게 훨씬 더 좋다. 사람마다 구미가 다르고 식사양이 다른데 어떻게 사기사발에 똑 같게 나눠 먹는다니?”
     “당과 국가를 믿어야 하오. 우에서도 보는 눈이 있을 거오. 집체식당을 차리다가 안 되면 자기 집에서 끓여 먹으라고 하겠지.”
“그래야지. 집체식당을 믿고 어디 배고파 살겠니?”
상우는 죽 두 그릇을 다 비우고 나서 명옥한테 얼굴을 돌렸다.
     “제수, 정말 잘 먹었소. 야, 이 놈의 재해 언제 끝나겠소? 정말 쌀 고생을 더 못하겠소. 사람이 굶고 사는 것만큼 바쁜 게 어데 있소?”
       상우는 눈물이 글썽해 엉덩이를 들고 일어나더니 집으로 돌아갔다.
상우는 따라 나가면서 명옥이 준비한 좁쌀주머니를 형님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상우는 사양했다.
“이걸 주고 너네는 어떻게 살겠니? 싫다. 제수를 가져다 줘라.”
그러나 상순은 기어이 좁쌀주머니를 형에게 밀어주었다.
“형님, 가져다 자시고 몸을 춰 세우오. 공산당의 영도아래 험한 3년 재해를 이겼으니까 이제 잘 먹고 잘 살 날이 올 거요. 형님, 우리 형제는 죽이라도 나눠 먹으면서 함께 살아나기요.”
“응, 그러자.”
상우는 동생네 부부가 정말 고마워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그는 쌀 주머니를 메고 집으로 흥겨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 좁쌀로 죽을 쑤어서 다 먹고 나니 또 먹을 것이 없었다. 결국 상우는 처자가 불쌍해 사양하다나니 몸이 겨릅대처럼 여위어갔다.
너무 굶어서 피골이 상접하게 된 상우는 어느 날 밤에 동생네 집에 와서 조 열대여섯 근 되게 얻어 집에 가져왔다.
“여보, 이걸 껍데기 채로라도 끓여서 좀 먹기요. 난 굶어서 내일이면 죽을 거 같소.”
그러나 아내는 날카로운 눈길로 영감과 조주머니를 번갈아보면서 생야단을 쳤다.
“아니, 이 영감이, 정신 나갔잖소. 시동생네 좁쌀을 가져다가 집에서 끓여 먹어서야 되오? 집에서 끓여먹다가 들키면 큰일 나겠소. 당장 가져가오. 그러찮으면 생산대에 고발하겠소.”
그 욕지거리를 듣고 상우는 맥없이 구들에 벌렁 나누었다. 그러자 아내는 자기가 가져가겠다고 좁쌀주머니를 들고 떠들썩하면서 바깥에 나가려고 했다.
상우는 안간힘을 다하여 아내의 왼쪽다리와 좁쌀주머니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열아홉 살 나는 순애까지 막아 나서자 나가는 수 없었다.
그녀는 두덜거리면서 신을 벗고 구들에 들어와 핸들 나자빠졌다.
그런데 이튿날 새금은 끝내 그 좁쌀주머니를 들고 생산대회의실에 가서 숱한 사람들에게 자기 영감을 낱낱이 고발했다.
그 바람에 생산대에서는 굶어서 다 죽어가는 상우를 회의실에 끌어다가 집체식당을 파괴했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상우가 연 며칠 굶어서 서서 비판을 받다가 까무러치는 바람에 투쟁대회는 희지부지해지고 말았다.
상우는 사망하기 사흘 전에 사촌여동생 복선이네 집으로 갔다.
그러자 복선은 사촌오빠에게 가만히 죽을 쑤어 주었다.
“여동생이 집에서 죽을 끓여 내게 줬다고 생산대에서 욕을 먹지 않겠니?”
상우가 근심하자 복선의 고중을 다니는 맏아들 성환은 “큰아버지, 잡숩소.”라고 했다.
상우는 죽사발을 받아들고 외탁을 한 성환의 너부죽한 얼굴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넌 공부도 잘한다더구나. 전번에 동생네 홍자가 말하던데 네가 초중에 내려가 초급중학교 애들에게 로어로 본 소설을 얘기해 줬다더구나. 러시야어 공부를 어떻게 잘했으면 러시야어 소설을 보고 아래 학년 애들에게 옛말을 해줄 수 있니?”
성환은 안경을 춰 쓰면서 그저 희죽이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김한봉의 맏아들 김성환은 동생 철주나 철삼, 철우, 철갑 등과는 달리 외탁해 수염이 더부룩하고 얼굴이 너부죽했다.
그는 마음도 너그럽고 공부도 특별히 잘했다. 그리하여 당시 초중 때부터 학교에서 몇 명 없는 "A학생"으로 뽑혀 진수해중학교 조교장의 특별대우를 받고 있었다. 조교장은 청화대학이거나 북경대학 입학생을 많이 양성해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성환과 순자, 경산 등 이른바 "A학생" 10여명을 뽑아 학교에서 우유까지 대접하면서 특별개별교육을 진행했던 것이다. 러시야의 사회주의 교육체계를 본 받아 당시 5점 시험점수제를 실시했는데 김성환과 김경산, 김순자 등은 항상 과목마다 5점을 맞았던 것이다. 하여 그들은 모두 진수해중학교의 보배로 불리었다. 당시 성환은 북경대학이나 청화대학 입학을 겨냥하고 공부했고 순자는 아버지 말씀대로 의과대학교로 가서 의사로 되려는 목표를 세우고 공부했다.
상우는 공부를 잘하는 성환과 순자를 한바탕 칭찬하면서 죽물을 맛있게 먹은 후 사촌녀동생 복선한테 말했다.
“복선아, 손바닥만 한 땅이 있으면 호박을 심어라. 호박넌출이 뻗으면 그 넌출에 흙을 퍼놓아라. 그럼 호박넌출에서 뿌리가 내리고 호박이 달릴 게 아니야? 호박을 많이 심어 먹어도 쌀 보탬할 수 있다.”
그 말을 하고 사흘이 지나 상우는 굶어서 뼈 앙상하게 된 채 저세상으로 떠나가고 말았다.
농업중학교를 졸업하고 길림으로 기관사질을 하러 떠나간 동선은 아버지가 굶어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듣고 황급히 돌아왔다.
그는 아버지 관작을 매만지면서 흑흑 흐느끼며 대성통곡 쳤다.
“아버지! 이 불효자식을 용서해주옵소서. 일본 놈 세상에서도 살아남은 아버지를 굶어 세상 뜨게 하다니요. 어, 어엉.”
순애도 대성통곡쳤다.
지새금도 3년 재해를 원망하면서 뜨거운 눈물을 훔쳤다.
형님의 유체를 염습해 칠성판에 모신 상순은 형님을 붙안고 서럽게 울고 또 울었다.
상순의 처자들도 모두 와서 절을 올리며 울었다.
상순은 일곱 살에 형 상우의 지게에 올라 앉아 고향을 떠나 살 길을 찾아 간도 함흥 촌으로 들어왔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형을 삼촌처럼 따르고 의지해 살아왔고 형수도 작은 어머니처럼 존중하며 섬겼었다. 그런데 형은 소서구에 숱한 밭을 일궈놓고 굶어 세상을 떠나지 않았는가?
“형님, 세상에 이런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소? 소서구에 상우지를 남겨두고 죽물도 온전히 잡숫지 못하고 세상을 뜨다니? 형님, 일본 놈들의 세상에서도 굳세게 살아온 형님, 형님이 돌아가다니. 으흐흑, 흑흑, 형님-”
손자를 앞세운 병완은 긴 한숨을 쉬며 애탄했다.
“내가 오래 살아서 차마 보지 못할 일을 수태 보는구나.”
병완은 자기가 함흥촌을 잘 이끌지 못했기에 손자마저 잃게 됐다고 속으로 자책감을 느꼈다.
상순은 둘째조카 동선과 토론하고 형의 산소를 조개덕 뒷산 기슭에 썼다. 두 해 사이에 아버지와 형을 잃은 상순은 절망에 빠지나 다름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눈가루가 풀풀 흩날려 내리는 어느 하루, 하나 밖에 없는 동선이 찾아와서 밤중에 홍두깨처럼 이런 말을 불쑥 꺼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삼촌, 조선으로 가겠습구마.”
     “뭐라니? 엄마와 순애 그리고 이 삼촌을 두고 어디로 간다고 그러니?”
      상순은 조선으로 가려는 조카를 단통 나무랐다.
      “으리으리한 길림 시내에서 월급과 배급을 타면서 기관사질을 하면 좀 좋아 그러니? 배부른 타령 해도 한두가지 아니구나. 조선에 가면 별날 거 같니?”
허나 동선은 고집썼다.
     “원래 한족애들 속에서 일하지 못하겠습구마. 꼬리빵즈(高丽棒子)라면서 어찌나 놀려대는지 하루도 더 못 삐치겠습니다.”
상순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권고했다.
    “한족애들한테 머리를 숙이면서라도 잘 어울려 일해야지. 조선에 간다고 이밥이 하늘에서 떨어질 거 같니? 조선에 갔다가 돌아오면 자칫하면 조선특무나 민족우파로 몰릴 위험이 있다. 잘 생각해봐라.” 
그러나 동선은 자기 생각을 돌리지 않았다.
“삼촌, 내 재간으로 조선에 가서 얼마든지 기관사를 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조선에 나가서 아버지네 고향 기차를 몰고 싶습니다. 아버지 고향에 돌아가서 굶어 죽어도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상순은 다 큰 조카를 억지로 붙들어 둘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한숨만 내쉬었다.
동선은 공부도 잘하고 글씨도 아주 곱게 써서 마을에 소문이 있었다. 게다가 키는 자그마해도 외까풀 눈을 굴리면서 어찌나 눈치 빠르고 역빠른지 다른 청년들은 따라 다니기 힘들었다. 금옥이네 칠군이랑 함깨 조선으로 장사를 가면 어느새 어디로 쭁드르르 빠져 나갔는지 모르게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팔고 돈을 척척 챙기곤 했다. 그는 외교에도 능해 촌구석에 박혀 살 사람이 아니라고 마을 어른들이고 친구들이고 혀를 끌끌 찰 지경이었다.
상순은 조카 동선과 공학을 자기 아들처럼 아끼고 믿고 살려고 했다. 그런데 공학이 몹쓸 병으로 해 훌쩍 떠나간 마당에 동선마저 조선으로 떠나가면 어떻게 하겠는가?
삼촌의 이런 심정을 읽은 동선은 위로의 말을 덧붙였다.
“삼촌, 근심하지 마십시오. 이젠 삼촌에겐 덕돌이 있잖습둥?”
동선은 네 살 밖에 안 되는 덕돌을 품에 안더니 뽀뽀를 해주었다.
허나 상순은 세 귀 눈을 치뜨면서 나무랐다.
“내 근심은 하지 말라. 허나 엄마는 어쩌니? 금방 아버지 세상 떴는데 엄마를 나어린 순애한테 맡겨놓고 조선으로 가니? 잘 생각해봐라. 조선에 가지 말고 엄마를 잘 모시면서 여기서 삼촌이랑 함께 살자.”
동선은 한숨을 후 내쉬면서 고집을 부렸다.
“여기 있어 봤자 아버지처럼 굶어 죽을 수밖에 더 있습니까? 우파나 현행반혁명 모자를 쓰지 않으면 변화무쌍한 정치몽둥이에 맞아 죽을지도 어떻게 압니까?"
동선은 마음을 굳힌듯 정색했다.
     "삼촌, 오랫동안 생각하고 내린 결심이니까.  더 말리지 맙소. 이제 조선에 가서 기관사를 하고 자리를 잘 잡으면 엄마와 삼촌을 모셔 내가겠습니다.”
상순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절대 날 조선에 데려간단 말을 하지도 말라. 함흥촌과 조개덕은 우리 두 번째 고향이야.  할아버지랑 너네 아버지랑 우리 조손3대가 저 소서구로부터 황무지를 개간하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느냐? 난 이 두 번째고향 땅을 떠나지 않아.”
드디어 그는 동선을 더 말려야 쓸데없다는 것을 알고 마지막 부탁을 했다.
“조선에 가도 항상 엄마와 순애를 잊지 말라.”
“예. 불효한 조카를 용서합소.”
동선은 삼촌에게 절을 꾸벅 하고 일어났다.
상순은 떠나가려는 조카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며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항상 독기 서린 세귀눈에 흐르는 뜨거운 석별의 정을 보고 동선도 돌아서며 눈물을 훔쳤다.
그는 돌아서더니 “삼촌, 덕돌이 모자를 쓰고 가깁소.” 라고 했다.
그러자 덕돌은 털모자를 벗어 몸 뒤에 숨기면서 몸부림쳤다.
    “안되오. 내 털모자를 쓰고 가면 나는 어쩌오?”
     동선은 덕돌을 훌 안아 들고 마주 보며 얼렸다.
     “덕돌아, 이제 형님이 돈 많이 벌면 사탕과자를 하늘만큼 사줄게. 이 모자도 가져다줄게."
그제야 덕돌은 “형님, 꼭 내 모자를 가지고 오오. 양? 사탕과 과자를 꼭 사오지? 양?”라고 했다.
동선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그래, 꼭 사올게.”라고 했다.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는지 덕돌은 고사리 새끼손가락을 내밀면서 깍지걸이를 하자고 했다.
“거짓말을 하면 안되오. 형님.”
“그래 약속하마.”
동선은 덕돌을 안은 채 새끼손가락으로 깍지걸이를 하고 흔들었다.
동선은 잘 들어가지도 않는 덕돌의 자그마한 털모자를 억지로 꾹 박아 쓰고 길을 떠났다. 삼촌과 여동생들인 순애, 순자, 은숙 그리고 남동생 덕돌까지 떠나가는 동선을 마을 동구 밖에까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바래였다. 지새금은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아들마저 가는 길을 보기 싫어 바래러 나오지도 않았다. 동선이가 저 멀리 아래 마을 어귀에서 흑점으로 아물거리다가 사라질 때까지 상순과 친척들은 눈물을 머금고 손을 저으며 눈을 떼지 않았다.
      동선이 조선으로 떠나간 후 상순이네 일가에 대한 지새금의 태도는 일변했다. 이전에는 순자랑 함흥촌에 올라가면 토성안 집의 큰집 큰어머니가 밥을 주지 않아 항상 셋째외할머니네 집에 가서 얻어먹곤 했다. 또 지새금은 이전에 동서인 명옥과도 물과 불처럼 생불을 켜고 욕설을 퍼붓곤 했다. 허나 동선이 간 후 처지가 뒤바뀌었다. 그녀는 이젠 시동생 네를 믿고 살아야 했다.
      어느 하루, 광석 촌에서 사는 상순의 둘째매형 박범석과 둘째누나 김월금이 환갑을 쇠게 돼 순자와 홍자는 큰 집의 순애와 함께 간 적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순애는 입을 열자마자 또 삼촌댁의 허물을 하기 시작했다.
“네 엄마 우리 할아버지를 굶겨 죽였다더라. 못된 아주머니야!”
너무 억울해 순자는 맞받아 욕했다.
“네 엄마는 맏며느리라는게 어째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모시지 않았니? 그래서 우리 아버지와 엄마는 둘째인데도 할아버지와 할머니, 막내고모까지 우리 집에 모셔 왔다더라. 3년 재해에 조부모를 모시느라고 우리 아빠와 엄마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니?”
허나 한 살 위인 순애도 녹녹치 않았다.
“너네 아버지하구 엄마 둘째 돼가지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우리 부모보다 더 잘 모실 것처럼 모셔갔기에 우리 부모가 온 동네에 얼마나 팔렸니? 마치 우리 부모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잘 모시지 않아 모셔간 거처럼 되잖았니? 삼촌은 왜 그랬다니? 우리 부모와 사전에 토론도 없이 수레를 몰고 와서 모셔갈게 뭐야? 그 땜에 우리 부모 동네에서 얼마나 팔렸는지 아니? 정말 주책없이 놀았어.”
순자는 지려고 하지 않았다.
“큰아버지 굶어 세상 뜨지 않았고 뭐야? 헌데 어떻게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작은 고모까지 모시겠니? 그래서 우리 아버지와 엄마가 큰집 부담을 덜어주느라고 그랬다. 그것도 모르고 떠드니?”
그러자 순애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둘은 서로 소 닭 보듯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순애는 어머니에게 순자가 하던 말을 일러바쳤다.
후에 순자는 순애와 놀자고 큰집에 찾아갔다. 그는 속으로 전번에 순애와 싸운 일로 한바탕 욕먹을 거라고 생각하고 큰어머니 눈치를 살폈다.
허나 뜻밖에도 큰어머니 지새금은 아주 상냥하게 웃으면서 대하지 않겠는가.
       “윗대 때문에 너희들까지 틀리면 되니? 이 다음부터는 외가집에 가서 밥을 먹지 말고 우리 집에 와서 먹어라. 내 없으면 너희들끼리 식장에서 꺼내 마음대로 먹어라!”
       (아니, 맏엄마 어떻게 된 일인가?)
       이전에는 맏아들 공학이 개산툰병원에서 의사질을 할 때 사카린을 혼자 먹으면서 동네에 나가 사카린을 조금만 넣어도 얼마나 단지 모른다고 자랑했다. 허나 시동생네를 한 숟가락도 주지 않았다. 허나 지금은 해가 서산에서 뜰 지경이 됐다. 새금은 밥도 먹으라고 하고 사카린도 냉수에 타서 냉국을 해 먹으라고 둬 숟가락 떠서 주기까지 했다.
순자는 돌변한 큰어머니 태도에 놀랍고도 반신반의했다.
(정말 별 일이야! 깍쟁이를 쓰던 큰어머니가 불시에 부처님처럼 마음이 선량해지었단 말인가.)
순자는 생각할수록 우스웠다.
상순이 1년 사이에 아버지와 형님마저 여의고 조카 동선마저 조선에 보내고 마음이 아파할 때었다. 설상가상으로 웃새집의 큰아버지가 또 앓아누웠다.
웃새집 큰아버지 김창준은 그해에 82세였다. 항상 가슴까지 내리드린 흰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동네를 성큼성큼 돌아다니던 큰아버지가 불시에 앓아누웠다. 아마 동생과 조카 그리고 손자들이 연이어 돌아가는 바람에 심리적 타격이 심했을 수 있었다.
연 며칠 식사를 드시지 못하던 창준은 끝내 동생과 한해 동삼에 세상을 떴다.
상순과 상훈, 상길은 한해에 세 번이나 상을 치렀다. 그들은 비통한 나머지 목이 메여 울고 또 울었다.
밤이 깊어가도록 곡소리가 끝이지 않았다.
사흘만에 자손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창준을 그가 생전에 피땀을 흘리며 개간하던 황무지밭이 쓸쓸히 누워있는 소서구 북쪽 산비탈에 모시었다.
명옥은 시집마을에 연이어 상치기 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다행히 본가집은 그간 그래도 무사히 보냈다. 오빠 근형은 효자였다. 그는 할아버지를 모시다가 둘째삼촌 경인이 할아버지를 효성을 다해 모시자 진수해를 떠나 화룡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가에 가서 혼자 살았다. 그새 근형 오빠는 맏아들 만길과 천길에 뒤이어 딸 송죽까지 보았던 것이다. 명옥의 동생 근룡은 열여섯에 항미원조 전쟁으로 나갔다가 복부에 부상을 입어 영예군인으로 됐다. 근룡은 농사일도 못했는데 체격도 좋고 인물도 좋은 처녀에게 장가를 들어 진수해에서 살면서 맏딸 정옥까지 보았다. 막내 동생 근삼은 큰형 근형의 맏아들 최만길과 명옥 누나의 둘째딸 은숙과 동갑이었다. 그들은 누가 삼촌이고 조카인지 구분하기 힘들게 허물없이 지냈다.
명옥과 상순은 병완 할아버지가 너무나도 괴로워 허연 수건을 머리에 질끈 동이고 자리에 드러누운채 일어나지 못해 근심이 태산 같았다.
병완은 자손들이 연 이어 저세상으로 떠나가자 극도로 비통에 빠져 식읍을 전폐하다 시피 했다. 자손들을 앞세운 아픔을 가슴에 묻고 더 살고 싶지도 않았다. 정말 죽지 못해 억지로 사는 괴로운 심정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창준과 기준, 상우의 원혼이 하늘에서 훨훨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그 외로운 귀향 혼이 구름과 안개가 부서지듯이 흩어져 남으로, 남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무정한 눈가루가 풀풀 흩날리고 있었다. 아니, 고향으로 날아가는 그들의 하얀 혼이 흩날리고 있었다. 아니, 고향에 대한 티없이 맑고 깨끗한 하얀 그리움이 흩날리고 있지 않겠는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하늘에는 물고기비늘, 룡비늘을 련상케 하는 구름이 둥둥 떠다녔다. 상순은 그 구름을 쳐다보면서 하늘을 원망하며 막연한 생각도 했었다. 저도 몰래 허구픈 웃음을 웃었다.
(하늘엔 물고기도 많건만 하늘도 무심하지. 어쩜 사람 사는 인간세상에는 물고기는커녕 입에 풀칠할 쌀알도 없는가. 하느님이여, 좀 우리 백성들이 먹고 살 하늘에라도 흔한 그 물고기랑 룡이랑 내리뜨려주옵소서.)
   그는 어깨가 무거워나는 것을 온 몸으로 느겼다.
   (우리 중국과 조선 인민들은 그 얼마나 백성들이 배불리 먹으며 잘 살 수 있는 새 사회를 갈망했는가. 그 새 사회를 맞아오려고 그 얼마나 많은 선렬들이 일본 놈과 미제 양키들과 싸우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는가.)
   큰아버지 성칠, 큰어머니 김하옥, 최구철, 엄상호, 엄은희, 이병호, 득호, 림호, 최형철, 조철호...
(그러나  오늘 숱한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지 않는가!)
      아버지 김기준, 둘째큰아버지 김창준, 형님 김상우...
(선렬들이 보면 얼마나 마음 아파하겠는가? 백성들이 굶어 마구 쓰러지지 않는가? 당지부 서기인 내게 책임이 제일 많다. 서기가 얼마나 잘 령도했으면 숱한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겠는가. 어떻게 하나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사는 행복한 새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모든 지혜와 힘을 바쳐야 할 때가 왔다.)
상순은 마음 속으로 굳은 결의를 다지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성큼성큼 토성안 대대 사무실로 걸어갔다.  
                           
                              12. 빗발치는 정치몽둥이

마을에서 숱한 사람들이 제대로 먹지 못해 얼굴이 퉁퉁 부은 채 주린 배를 끌어안고 집체식당으로 몰려갔다. 그런 지루한 세월이 흐르자 이집 저집 식구들이 까무러치고 북망산에 가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자연재해로 마을에 자주 곡성이 처량하게 들리고 인심이 뒤숭숭해졌다. 인심이 각박하다 못해 사람이라도 마구 잡아먹을듯이 살벌해져갔다.
설상가상으로 민족우파를 타도하는 정치폭풍이 사납게 불어쳐 조선에서 이사해온 마을 사람들은 모두 목을 움츠렸다. 무슨 정치몽둥이 날아오겠는지 모를 일이 아닌가.
반민족우파 몽둥이가 이번에는 진수해공사 당위 서기 허백호와 조개덕대대 당지부 조직위원 진달래에게 날아들었다.
허백호는 이른바 도처에서 조선족의 우량한 전통과 중국 혁명에서 조선족의 공훈을 너무 떠들어댔고 조선족을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말한 죄로 민족우파 고깔모자를 쓰고 온 공사 탈곡장을 돌아다니면서 투쟁당하는 판이었다.
신임 공사 당위 서기 박우성이 허백호 서기를 고깔모자를 씌워 조개덕의 탈곡장에 떠밀고 들어서더니 목에 지렁이 같은 핏줄을 세우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오늘부터 우리는 민족우파 허백호를 투쟁하겠습니다.”
박우성은 동북군정대학 시절 상순의 동창생이었다. 그는 일찍 일본까지 유학했었다.
허나 상순은 숱한 사람들 앞이라 박우성과 그저 눈인사만 했다. 허백호가 고깔모자를 쓴 것을 보고 상순은 속으로 “싼 통 했다.”고 욕했다.
박우성은 사원들 앞에 우파분자 오옥선과 박성근, 이 화영, 그리고 이른바 민족우파들인 허백호, 허영주, 진달래에게 고깔모자를 씌워 지주 장학산과 그의 아들 장충국,  악질지주 지학사의 아들 지괴호 등과 한 줄에 세워놓고 투쟁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빗발치는 총포탄 속을 헤가르며 토비와 미제 특무들과 싸워온 허백호와 항일전쟁시기 일제 놈들과 돌멩이로 싸운 진달래를 지주들과 한줄에 세워놓고 투쟁하는데는 모두들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모두 감히 말하진 못하고 그저 눈치만 흘끔흘끔 볼뿐이었다.
       그러나 진달래는 너무나도 억울해 욕설을 퍼부었다.
“항일유격대 중대장인 내가 목숨을 걸고 일본 놈들과 싸웠는데 무슨 죄가 있다고 투쟁해?”
병완은 항일투사 진달래를 지주들과 함께 투쟁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아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리하여 박우성을 조용히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저 진달래는 무슨 죄가 있다고 지주들과 함께 투쟁하오?”
그러자 박우성 서기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촌당지부 서기가 이렇게 정치두뇌가 명석하지 못하니 어떻게 합니까? 진달래 전 남편은 남조선 특무가 아닙니까? 그러니 특무의 새끼를 낳은 진달래는 남조선 특무입니다. 지주보다도 더 나쁜 우파입니다. 우리 공산당이 영도하는 사회주의 조국을 허물고 뒤엎으려고 미쳐 날뛴 국제 원수입니다. 잔말을 마십시오. 자칫하면 영감도 민족우파로 몰리어 투쟁 받을 수도 있습니다.”
병완은 상순과 박우성을 번갈아 보며 중얼거렸다.
“항일전쟁에서 목숨을 내걸고 일본 놈들과 싸운 항일유격대 중대장을 어떻게 지주들과 함께 투쟁하오?”
그는 괴어오르는 불만을 가까스로 눅잦히면서 진달래를 돌아보다가 제자리에 가서 맥없이 주저앉았다.
흥수가 이번에도 앞장서 “우파분자들을 타도하자!” 하고 높이 외쳤다.
군중들은 주먹을 쳐들고 구호를 부르는 척 했다. 그들은 고깔모자를 쓴 허백호 서기와 진달래를 보는 순간 구호를 부르고 싶은 마음도 힘도 없었다. 그렇게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하던 허백호도 우파로 몰리어 투쟁 받는 판이었다.
“이제 또 누가 투쟁을 받겠는지 아오?”
뒤에서 군중들은 쉬쉬 했다.
상순은 앞장서 구호를 부르는 흥수를 쏘아보다가 눈을 스르르 내리감고 머리를 숙인 채 덤덤히 앉아 있었다.
(허영주 사장이나 진달래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허백호 서기는 반우파투쟁 때 흥수를 추동질해 밉게 놀았지만 억울한 일면도 있었다. 그래 허백호 서기가 조선족들이 이 땅의 주인이라는 것이 틀렸단 말인가? 이 땅을 개척하고 보호하기 위해 우리 조선족들이 쪽박을 차고 두만강을 건너와 흘린 피땀이 적은가? 그래 우리 조선족들이 이 땅의 주인이 아니란 말인가? 그래 우리 조선족에게 우량한 민족전통이 없단 말인가? 죄를 들씌우다 못해 별 거 다 들씌우는구먼.)
상순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입에 빗장을 지른채 눈을 내리 감고 덤덤히 앉아 있었다.
구호소리가 멎자 박우성 서기가 연설했다.
“우리는 반우파투쟁을 끝까지 벌려야 합니다. 잡귀신 같은 우파분자들은 우리 중국 공산당을 악독하게 공격하고 모독했습니다. 이런 잡귀신들은 생기는 족족 제때에 잡아 없애 버려야 합니다.”
박우성 서기는 개를 잡은 포수처럼 우쭐해 뒷말을 이었다.
“진달래는 항일투쟁 때 공훈을 세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의 본 남편 김용천은 항미원조 전쟁 때 남조선 특무가 아닙니까? 그 놈은 장백산 지구에 기어들어 우리 후방을 파괴하고 나아가서 갓 태어난 우리 사회주의 조국을 뒤엎으려고 미쳐 날뛰었습니다. 그래 남조선 악질특무의 새끼 김경주까지 낳은 진달래를 투쟁하지 않고 누굴 투쟁하겠습니까?”
그때 병완이 벌떡 일어나 고함쳤다.
“박 서기, 한 가지만 물어 보기요.”
박우성은 낯이 백지장처럼 바래지더니 쌍까풀눈을 뚝 부릅뜨고 병완을 쏘아보았다.
병완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진달래는 항일투사 김성칠의 아들 경수를 낳았는데 그것도 죄오? 성칠은 항일유격대 대장이자 조선인민군 연대장이었소. 항일유격대 대장, 조선인민군 연대장의 후처로 된 진달래를 그래 우파라고 할 수 있소?”
박우성은 돌처럼 굳어졌던 백지장 같은 얼굴 표정을 느슨히 풀더니 희죽이 웃으며 병완을 마주 바라보았다.
“예~ 김 서기 잘 말했습니다. 우리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를 잘 제기했습니다. 모자를 씌워도 알맞은 모자를 씌우는 게 옳습니다.”
그러자 군중들의 눈길은 일제히 박우성 서기의 나풀거리는 입술로 집중됐다.
박우성은 군중들의 따끔한 시선을 둘러보더니 목청을 돋우어 고함쳤다.
“여러분, 진달래의 본 남편 김용천은 남조선 특무고 후남편 김성칠은 조선인민군 연대장이고 렬사입니다. 진달래는 남조선 특무와도 살았고 북조선 장교와도 살았습니다. 지금 한창 북조선 특무도 잡아내라고 합니다. 내가 조사한데 의하면 진달래는 사회주의 중국에 마음을 두지 않고 수차 조선에 드나들었습니다. 표현을 보면 남조선 특무보다도 북조선 특무일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때문에 오늘부터 진달래의 조선 특무 혐의를 조사해야 하겠습니다.”
“뭐라고?”
진달래는 박우성을 쏘아보며 언성을 높였다.
“내가 장백산에서 일본 놈들과 싸울 때 당신은 일본에 가서 공부를 한 선비에 불과해요. 당신이야 말로 일본 특무 혐의가 있어!”
그러자 박우성은 억이 막혀 물려고 드는 개 주둥이처럼 짝 벌리고 불길이 이글거리는 쌍까풀눈으로 진달래를 쏘아보았다.
“개도 미치면 생사람을 문다더니. 이거야 말로 참!”
박우성은 진달래를 더 조겨 보았자 자기에게 불리할 것 같아 이번에는 허백호 서기를 돌아보며 투쟁하려고 들었다.
그때 진달래는 계속 박우성을 공격했다.
“내 모르는 것 같아? 넌 일본 나고야대학까지 나오지 않았나? 진짜 일본 놈들이 파견한 일본 특무 맞지?”
       박우성은 울상이 돼 쌍까풀눈을 흘기며 발설했다.
“내 일본 나고야대학을 나왔지만 반당 언론을 퍼뜨린 일은 없소.”
“지금 어디 우파 언론을 퍼뜨려 우파로 되는가? 정규상을 봐라. 일본유학도 하지 않고 장춘에서 일본 국비생으로 공부했다고 우파로 됐는데?”
박우성은 극력 자기에게 날아오는 올가미를 벗어 버리려고 발버둥질을 쳤다.
“아, 정규상과 내가 어떻게 같은가? 정규상은 듣는 말에 의하면 일본의 총애를 받아 국비생이 됐는가 하면 공산당 조직에 12가지 의견이나 종합해 제기했다는구먼. 그러니 반당 우파분자로 몰리지. 허나 난 일본 나고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후 군정대학에서 맑스-레닌주의와 모택동 사상을 계통적으로 학습하고 왕청 같은 산골에 가서 사회주의 농촌을 건설했고 줄곧 중국 공산당에 충성했소. 우파 놈들이 깨끗한 공산주의자를 모욕하고 중상하지 말라.”
박우성은 따발총처럼 끝없이 을러멨다.
“네 놈 우파들이 오히려 나를 투쟁하려고? 어림도 없어. 도적을 잡아도 우두머리를 족치라고 허백호 서기부터 타도해야 한다.”
그는 허백호의 멱살을 틀어쥐고 호통 쳤다.
“여실히 탄백해라! 네 놈은 누가 소개해서 우파로 됐니?”
이때 허백호 서기가 목에 지렁이 같은 핏줄을 세우고 고함쳤다.
“우파도 누가 소개해 되는가? 당신이 내 자리를 차지하고 편안할 거 같은가?”
“아, 이 놈, 언감 공사 서기와 대들어?”
박우성은 질서를 유지하려고 따라 온 파출소 경찰들에게 머리를 돌렸다.
“허영호 소장, 뭘 하오? 이 우파분자들의 입을 틀어막소! 이 놈들이 주둥이를 자꾸 벌려서 어디 투쟁대회를 정상적으로 하겠소?”
허나 허영호 소장은 멍해 자기 사촌형 허백호 그리고 허영주 사장 등을 둘러볼 뿐이었다.
박우성은 기다리다 못해 꽥 소리쳤다.
“허 소장! 뭘 하오?!”
민경들은 모두 허 소장의 눈치를 살폈다.
허영호 소장은 두 팔을 펴보이었다.
“박 서기, 입을 틀어막을 수건이 있어야 틀어막지?”
박우성은 쌍까풀눈을 허백호에게 돌렸다.
“넌 서기로 있을 때 전 공사 숱한 생산대대의 빈농들이 굶어 죽게 한 죄가 있다. 총살해도 시원찮을 놈이야! 지주보다도 죄가 더 한 악질 우파분자야!”
그 말에 허영주 사장이나 허백호 서기나 모두 놀라했다.
장충국은 옆에 서 있는 진달래를 슬쩍 다치며 시원해 눈을 질끈 감아보이었다.
진달래는 장충국을 가로 보았다.
장학산은 장충국을 그러지 말라고 눈짓하더니 박우성과 민경들의 눈치를 보았다.
지주들은 허백호 서기와 허영주 사장 그리고 항일투사이며 토지개혁 때 촌 간부 진달래까지 고깔모자를 쓰고 자기들과 함께 투쟁을 받게 되자 속으로 시원해 하는 눈치였다. 간부들을 투쟁하는 사이에 지주들은 편안하게 서서 구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박우성은 허백호 서기를 물고 늘어졌다.
“허백호는 대약진이란 붉은 기치를 내걸고 왕청 같은 짓을 했습니다. 심갱밀식농사법이란 구호를 내걸고 둼을 한자 깊이로 파묻고 그 위에 옥수수를 심었으니 아까운 소서구 밭에서 쭉정이도 거두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 놈은 심갱밀식농사법을 반대한 허영주 사장을 우파로 몰아 타도했습니다.”
그 말에 병완이나 허영주 사장이나 상순이나 모두 머리를 들었다.
“결과 어떻게 됐습니까? 숱한 빈농들이 3년 재해 기간에 굶어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재연했습니다. 그들은 일제의 철 발굽 아래에서도 길가의 민들레처럼 짓밟히면서도 살아서 두만강을 건너 이 곳에까지 온 우리 인민들입니다. 어떤 인민들을 굶어 죽게 했습니까? 그래 우파 조건이 안 된단 말입니까?”
그제야 군중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때 흥수가 나서 구호를 불렀다.
“계급투쟁을 잊지 말자!”
군중들은 흥수를 따라 구호를 높이 불렀다.
“우파분자 허백호를 타도하자!”
허백호는 점점 머리를 숙였다.
그 옆에 선 허영주 사장은 머리를 점점 들었다.
박우성은 허영주 사장의 손을 잡으면서 정중히 말했다.
“허 사장, 고생했습니다. 얼마나 억울했습니까? 내 상급당위에 회보해 허 사장에게 억울하게 씌워진 우파 모자를 벗겨달라고 청시할 예산입니다. 허영주 사장이야 말로 조선의용군 지하간부이고 빨찌산 항일투사입니다. 당신이야 말로 토지개혁공작대의 우수한 간부이며 우리 인민공사의 훌륭한 사장입니다. 내 꼭 우파 모자를 벗겨 주겠습니다.”
그러자 허영주는 박우성의 손을 잡고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박우성은 이번에는 병완과 상순을 일일이 찾아 손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그간 저 우파분자 허백호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병완은 박우성의 갑작스레 태도변화에 덤덤히 서 있었다.
허나 상순은 자기 손을 잡은 박우성의 손을 꽉 잡아 흔들었다.
“여보, 반장, 당신이 우리 공사 당내 문제와 우리 마을 농사문제에 대해 정확하게 보니까 시름 놓이오.”
병완은 태도 표시를 소홀히 하는 것 같아 손자 상순에게 턱을 가로 저으며 눈짓했다.
그날 투쟁대회는 허백호를 투쟁하는 바람에 군중들이 잘 동원됐다.
특히 흥수가 투쟁의 앞장에 서는 바람에 모두들 그를 두고 정치투쟁의 급선봉이라고 했다.
그 덕분에 흥수는 함흥 촌 당 지부의 동의와 공사당위의 비준을 거쳐 정식으로 입당했다. 이전에는 병완과 상순이 동의하지 않아 입당을 하지 못했다. 허나 이번에는 상순이가 조개덕에 내려간데다가 병완마저 박우성 서기의 지시를 듣고 흥수의 입당을 동의했던 것이다.
새로 입당한 흥수는 어깨가 으쓱해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정치투쟁에 더욱더 열성을 부리었다. 그는 함흥대대를 틀어쥐려고 자기 주위에 얼치기 "정치인"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두만강변에서 갓 이사해온 황종연과 황승연 형제를 제일 먼저 자기 밑에 끌어왔다. 황종연과 황승연 형제는 갓 제대한데다가 주먹은 셌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부모 없이 자라서 버릇이 없었다. 그는 흥수 지시가 떨어지기만 하면 쩍하면 주먹을 휘둘러 사람을 다치게 했다.
진달래네 두 아들 경주와 경수는 애들에게 “우파”, “남조선 특무, 북조선 특무 아들”이라고 놀리음을 당해 머리를 들고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상순은 동창생인 박우성의 사무실을 찾아가 시비를 가르자고 했다.
박우성은 십중팔구는 통사정을 들이대리라고 진작 짐작하고 손사래를 쳤다.
“어째 왔소? 그 조선 여자특무를 놔달라고 사정하자고? 안 되오. 이게 어느 때오? 양? 어디 동창생의 사정을 봐줄 때오?”
상순은 물러서지 않았다.
“박 서기, 난 동창생 개인감정으로 사정하는 게 아니오.”
상순은 박우성의 맞은 켠 걸상에 척 앉아 자세를 바로 잡아 앉았다. 보아하니 단단히 해 낼 잡도리인 것 같았다.
“사실 진달래는 진짜 항일빨찌산 여중대장이었어…”
“됐소, 돼. 또 묵은 그루에 이밥 먹던 소리군. 누가 옛날 진달래가 목숨 걸고 일본 놈들과 싸운 걸 모르오? 지금 표현을 봐야지. 그는 남조선 특무 아내요. 또 조선인민군 연대장의 아내요. 사회관계가 얼마나 복잡하오? 그는 확실히 남조선 특무와 북조선 특무 혐의가 있소. 잘 조사해봐야 한단 말이오.”
상순은 책상을 탕 치면서 세 귀 눈을 무섭게 치떴다.
“마구 모자를 들씌우지 마오! 제발 생사람을 잡지 마오.”
“뭐라고?!”
박우성도 책상을 꽝 치면서 벌떡 일어났다.
“이 동무 이게, 아무 말이나 마구 하겠소? 내 언제 생사람을 잡았단 말이오?”
상순은 좀 언성을 낮춰 도리를 따졌다.
“남조선 특무의 아내라고 해 한국특무라고 할 수 있소? 조선인민군 연대장의 아내라고 해서 마구 북조선 특무라고 하면 되오? 그게 생사람을 잡는 게 아니고 뭐요? 항일투사들과 당 간부들을 지주들과 한 줄에 세워놓고 투쟁해서야 되오? 그렇게 정치두뇌가 명석하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공사 당위 서기를 하오?”
그 말에 박우성은 피씩 웃었다.
“그렇게 정치두뇌가 명석한 자네가 왜 우리 공사 당위 서기를 하지 못하오? 난 그래도 허영주 사장을 상급에 말해 우파 모자를 벗겨주겠소. 내처럼 공정하게 처사하는 간부가 어디 있소?”
“그 일은 참 잘 처리했소. 그래서 빈농들은 당신을 믿기 시작했소. 진달래 동지의 억울한 모자도 벗겨주란 말이오. 진달래 동지는 우리 당이 오랫동안 고험한 훌륭한 동지요. 절대 특무가 아니오. 난 당성으로 담보할 수 있소. 이전에 그의 전 남편 용천이가 우리 함흥 촌에 기어들었을 때 남조선 특무라른 것을 알고 돌멩이를 날려 전 남편의 머리를 까서 우리 민경들이 붙잡게 도왔댔소.”
“그건 발뺌일 수도 있소. 내 생사람을 잡지 않는다는 것만은 믿어주오. 진달래 문제는 꼭 사실대로 밝혀질 게요. 기다려 주오. 또 내 혼자 마음대로 규정할 수도 없는 거고.”
상순은 박우성의 딱한 처지도 알았다. 프로수를 정해 놓고 우파 분자를 잡는 세월에 박우성인들 명액에 든 우파 분자를 놓자고 하겠는가!
상순은 박우성이 점심을 먹고 가라는 것도 밥맛이 없어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며칠 후 진달래가 경수만 데리고 감쪽같이 어디로인가 사라졌다.
병완은 곰방대에 담배를 꾹꾹 눌러 넣고 불을 달아 물었다. 속이 탄 연기가 꾸역꾸역 타래치며 방안에 꽉 들어찼다.
(두만강이 얼었지. 그래, 우리가 두만강을 건너 여기로 올 때에도 두만강이 얼어붙어 쉽게 건넜지.)
그는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눈보라 기승치는 바깥을 내다보며 중얼거리었다.
(지독한 년, 어쩜 시부모와 말 한마디 없이 달아난단 말인가? 못된 년, 용천의 새끼는 자기 새끼 아닌가? 자기 살 도리만 하고 경주는 어쩌고? 우린 어떻게 살라는 거야? 네년이 달아나면 조선특무라는 때를 영영 벗지 못할 게 아니야?)
병완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창 밖에 저 멀리 상순이 허둥지둥 찾아들어서는 것이 눈에 뜨이었다.
(나는 앞날이 멀지 않지만 저 상순은 어떻게 더러운 때를 쓰고 한뉘 살겠는가? 경주는 어떻게 살겠느냐?)
병완은 집에 들어서는 상순을 보고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경주를 어쩌느냐?”
그는 상순에게 한마디 하고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불쌍한 막내손자 경주를 보러 바깥으로 나갔다. 상순도 도리머리를 흔들면서 할아버지를 따라 진달래네 집으로 내려갔다.
     병완이 진달래네 집 안에 들어서니 덕성 영감이  경주를 붙안고 서럽게 울고 있었다.
     "경주야, 엄마 없이 혼자 어떻게 살려나? 가자 작은햘배네 집으로 가자."
   병완도 어시 없는 경주를 보고 콧마루 시큼해나 머리를 쓰다듬었다.
   경주는  열댓살 밖에 안됐지만 키는 덕성 영감 어깨를 넘어섰다. 그래도 덕성은 어미, 애비 없이 홀로 난 그 손자가 불쌍해 자기 집에 데려다 키울 예산하는 것이었다.
병완은 서로 붙안고 우는 덕성과 경주를 바라보며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창 밖에서는 윙윙 눈보라만 사납게 휘몰아쳤다. 엄동설한 폭풍이 온 대지를 하얗게 실망으로 물들이며 사납게 파도치며 덮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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