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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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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소설

대하소설 진달래소야곡(10)
2018년 02월 13일 11시 25분  조회:1420  추천:0  작성자: 김장혁




               
                            18. 춘향 어디에 있나?
모두들 졸업을 앞두고 승호가 코 다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 지나도록 학교 측에서는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성호는 송파와 송호 형제 깡패무리 위협 앞에서도 승호와 홍희, 은영을 보호하려고 나선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그러나 승호의 첫사랑, 약혼녀 경옥이 돌층계에 머리를 쪼아 피못 속에 기절해 넘어가던 장면을 본 후에는 생각이 좀 달라졌다.
경옥은 결코 홍희나 은영만 인물체격이 못하지 않았다. 오히려 체격은 홍희보다  나아보였다.
(모두들 첫사랑은 평생 잊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승호는 어쩜 첫사랑을  그렇게 헌신짝 차버리 듯할 수 있단 말인가?)
순간 성호는 자기도 마음에 걸렸다. 전도와 리상을 위해 첫사랑 순희를 대학생이 아니라고 버린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승호처럼 순희의 정조를 짓밟지는 않았다. 아니, 손 한번도 쥐여본 적도 없었다.
(자식, 결혼하지 않을게면 다치지 말게지.)
성호는 승호를 한번 따끔하게 찔러주고 싶었다.
침실에 승호가 나타나자 성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말했다.
“얘, 할 말이 있다.”
승호는 갑자기 성호를 와락 포옹했다.
“감사해. 이번에 네가 우리를 살려냈어.”
성호는 승호의 가슴을 떠밀어냈다.
“친구끼리 당연하지.”
승호는 성호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자, 우리 집에 가서 술이나 한잔 마시자. 엄마 두부까지 앗아놓고 기다린다.”
성호는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려고 따라나섰다.
자그마한 호수가에 자리잡은 승호네 2층 아파트는 꽤나 으리으리했다. 높다란 담장 철문을 열고 들어서자 나팔꽃, 코스모스, 백일홍이 울긋불긋 만발한 화단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승호는 집 안에 들어서면서 소리쳤다.
“친구 왔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승호 어머니는 허리를 꾸벅 굽히는 성호를 반갑게 맞았다.
“아이구, 정말 남자답구먼.”
성호는 승호의 어머니가 아주 깔끔하게 생긴 미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짙은 눈썹아래 어글어글한 눈, 우뚝 솟은 큼직한 콧마루, 두툼한 입술… 어디를 보아도 젊어서 미인이였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어서 2층으로 올라 가오.”
벽화는 뒤따라 올라가면서 끝없이 두툼한 입술을 널어놓았다.
“승호야, 속담에 부모를 팔아서라도 좋은 친구를 하나 친하라는 말이 있다.  관건적인 시각에 생사결단하고 친구를 구하는 이런 친구는 금덩이를 주고서도 바꾸지 못해.”
성호는 승호 어머니가 침이 마를 지경으로 칭찬하는 것을 들으면서 2층에 올라갔다.
2층 객실 벽에는 경복을 입은 승호의 아버지와 한복을 입은 승호 어머니 거폭의 결혼사진이 걸려 있었다. 농촌에서는 단색텔레비죤도 보지 못하는 세월에 과장님 댁에는 색텔레비죤까지 있지 않겠는가.
승호가 랭장고를 열자 줄느런히 꽂맥주병이 긴 목을 내밀었다.
승호는 성호를 데리고 2층 베란다에 나갔다. 호수에 피여난 빨간 련꽃과 실실이 넘실거리는 수양버들이 기분을 한결 돋구며 방실방실 추파를 보냈다.
이윽고 웬 처녀애가 채를 들고 올라와 밥상에 줄느런히 올려놓았다.
“녀동생 선금이야.”
승호는 처녀애 쪽에 얼굴을 돌리더니
“선금아, 인사해라. 딱친구 성호야.”
꽤나 예쁘게 생긴 선금은 생글 웃으면서 인사했다.
“오빠한테서 많이 들었어요. 오빠를 구해줘서 감사해요.”
성호는 어색하게 머리를 끄덕이며 웃음으로 인사를 보냈다.
밥상에는 성호가 좋아하는 푹 삶은 돼지고기보에 노르스름한 두부지짐이 올랐다. 명태국과 시원한 배추김치도 보였다.
선금은 손수 성호와 오빠의 잔에 맥주를 찰찰 넘치게 부었다.
“두 분 마음껏 드세요.”
“저도 한잔 마시오.”
“아니, 전 마시지 못해요.”
그때 승호가 맥주병을 성호한테 주었다.
“선금아, 성호 오빠 술 한잔 받아라.”
선금은 “아니, 아니.” 하면서도 술잔을 잡았다.
그들 셋은 한잔 쭉 마셨다.
“그럼 전 실례하겠어요.”
선금은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쟁반을 들고 조용히 내려갔다.
이윽해 승호 어머니가 올라와 성호를 보고 부산을 떨었다.
“이름이 뭐라던가?”
“리성호라고 부릅니다.”
“오- 성호, 어쩜 우리 승호와 형제처럼 생겼소. 이름도 똑같이 범 ‘호’라. 호랑이 형제 같은 친구들이구먼. 천천히 드오.”
벽화는 내려가다가 도리머리를 흔들더니 몸을 돌려 성호를 다시 유심히 여겨보았다.
“왠지 딱 누굴 닮은 것 같은데. 성호는 고향이 어디오?”
성호는 맥주잔을 내려놓으면서 “천수해 어느 산골에 있습니다.” 하고 무심히 대답했다.
“오, 그래? 고향이 어느 마을이오?”
“태평구촌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오- 그래?”
벽화는 어글어글한 눈이 데꾼해졌다.
“아버지 명함은?”
“농사군인데요. 리상진이라고 불러요.”
“뭐라고? 리상진?!”
“예.”
순간 벽화는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승호는 “혹시 아는 분입니까?” 하고 물었다.
“아, 아니야. 너희들 하도 쌍둥이처럼 생겨서…”
벽화는 황급히 표정을 바꾸더니 말끝을 흐리면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승호는 객실이 조용해지자 성호에게 시원한 맥주를 부어주고 물었다.
“할 말이 있다더니?”
성호는 기다렸다는듯 스스럼없이 입을 열었다.
“전번에 약혼녀가 돌층계에 머리를 쪼아 피를 줄줄 흘리며 대성통곡치는 걸  보고 안됐더라.”
승호는 돼지고기점을 성호 앞의 접시에 집어놓으면서 대수롭잖게 말했다.
“걔 무슨 약혼녀라고? 부모 동의도 없었어.”
“부모 동의도 없이 왜 다쳤니? 그 녀자애와 결혼할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승호는 성호를 피뜩 마주 쳐다보더니 맥주잔을 들어 성호의 잔과 마주치고는 목구멍이 미여지게 꿀떡꿀떡 들이켜더니 더러운 속심을 털어놓았다.
“딱 결혼을 념두에 두고 처녀애들과 친해야 한다는 법은 없잖니? 건 다 옛날 소리야. 련애는 결코 결혼하기 위한 건 아니지.”
성호는 어이없어 도리머리를 흔들기까지 했다.
“얘, 그게 무슨 소리야. 련애는 결혼대상을 고르기 위한 과정 아니냐?”
“픽!”
승호는 랭소했다.
“련애는 남녀가 이성을 즐기는 거야.”
“뭐라고?!”
승호는 문께를 내다보더니 격분해하는 성호를 제지했다.
“얘, 흥분하지 말라. 괜히 우리 둘이 싸우는가 하겠다. 자, 술이나 마시자.”
그가 술잔을 내들었지만 성호는 술맛이 없었다.
“정말 말이 아니구나. 결혼할 대상이 아니면 아예 다치지 말아야지. 그게 뭐야? 너 이제도 얼마나 많은 처녀 정조를 유린할지 모르겠구나. 사람새끼, 어쩜 그럴 수 있느냐?”
“야, 피곤하다, 피곤해. 딱 결혼하기 위해 련애한다는 건 진짜 피곤해. 건 그저 후대를 보려고 녀성을 얻는 봉건전통관념이야.”
승호는 오히려 제 쪽에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넌 진짜 봉건통이야. 어쩜 개혁개방시기 신식청년이 머리채를 땋아 늘어뜨린 리씨왕조시기 봉건통이냐?”
성호는 어이없어 입을 쩍 벌렸다가 분김에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승호는 술이 얼근히 들어가자 자기 나름대로 지껄여댔다.
“난 녀자 하나로는 모든 녀자들의 사랑을 다 맛볼 수 없다고 생각해. 녀자애들마다 사랑의 맛도 달라. 이것 저것 맛을 봐라. 얼마나 새로운 감이 나는가. 옛날부터 희신염구(喜新厌旧)라는 말이 있어. 난 희신염구병에 걸려서 새 걸 좋아하고 묵은 걸 싫어해. 한 녀자를 몇년 데리고 놀면 자연히 싫어진다. 그래서 끊임없이 새 녀자애를 친해 놀아야 해. 어째?”
성호는 듣다못해 중둥무이했다.
“딱 숱한 녀성들을 데리고 놀아야 사랑의 참맛을 본다고 생각하니?”
“그래.”
승호는 성호에게 잔을 내밀었다.
성호는 승호의 잔을 손으로 내리눌러 상 우에 내려놓게 하고 입을 열었다.
“참다운 사랑은 리몽룡처럼 벼슬이 올라가도 한 녀성을 일편단심으로 영원히 사랑하는 거야. 참사랑은 청춘남녀의 피끓는 한쌍의 심장으로 변함없는 사랑의 선률을 울리는 것이야.”
승호는 술잔을 들어 혼자 쭉 굽을 내고 잔을 내려놓았다.
“이 봉건통아, 아직도 뭐 ‘일편단심’이요, ‘백년해로’요냐? 지금 어디 리몽룡이나 춘향 같은 처녀총각이 하나라도 있니? 무슨 정조고 뭐고, 떡대가리 같은 소릴 작작 해라. 다 썩어빠진 옛말이야. 인생을 헛되게 랑비하지 말고 젊어서 실컷 즐기는 것이 락이야!”
성호는 밥상을 탕 쳤다.
“야, 그래 동물처럼 성애가 사랑의 전부란 말이냐? 어째 처녀의 착한 마음이나 사랑보다도 몸을 더 사랑하느냐? 그래 짐승처럼 아무 녀자나  닥치는대로 얼리고 닥치고 사기쳐서 성교나 하는 걸 지고무상의 락이라고  생각하니? 건 짐승들이나  할 짓이야!”
“그래 네가 말하는 사랑이란 도대체 뭐냐? 너도 들을라니 적게 련애한 건 아니더구나. 고향에 첫사랑 순희라고 있었다지 않았냐? 왜 은영이, 정희와 련애하니?”
“난 련애는 해도 정조를 짓밟진 않았다. 심지어 손도 쥐여보지 않았어.”
성호는 자기 련애관을 토로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처녀와 백년을 두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깊이 사랑하는 거야. 진짜 사랑하는 처녀를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사랑, 그런  사랑이야 말로 진정한 사랑이야! 사랑은 상대방을 점유하는게 아니야. 베푸는 거야.”
승호는 허구픈 웃음을 입귀로 흘렸다.
“누가 사랑에 사심이 없다고 했니? 로실히 말해 사랑은 자사자리해. 너도 은영을 좋아하면서도 정희와 가만히 련애하지 않니? 사랑은 성생활을 떠나 운운할 수  없는 거야. 아, 고조에 올라 머리가 붕 뜨고 온 몸이 둥둥 하늘로 날아올라가는 것처럼 황홀한 경지에 이를 때, 아, 그 때야만이 사랑의 절정인 거야. 또 한 녀성에게서 모든 녀성을 맛볼 수 있니? 련애를 할수록 녀성들마다 사랑의 향기가 각각이야. 마치 꽃마다 생김새가 다르고 향기가 다른 것처럼. 야~ 녀성들 진짜 날 죽여준다, 죽여 줘. 그 육체미에 진짜 미칠 거 같아!”
승호는 진짜 황홀한 경지에 올랐을 때처럼 흥분돼 지껄여댔다.
“생각해봐라! 가슴이 밋밋한 경옥이 몸 하나로 어찌 녀성의 육체미를 다 대체할 수 있어? 녀성들 육체마다 그 미와 향기가 각각인거야. 이 멍청아, 너도 빨리 재미를 봐라.”
성호는 점점 더 어이없어 도리머리를 홰홰 저었다.
그때 승호 어머니가 문을 삐쭉 열고 들어섰다.
성호는 억지로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오이쪼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
벽화는 맛있게 구운 고등어를 담은 접시를 성호  앞에 놓으면서 나직이 말했다.
“이제 주고받는 말을 다 들었소. 성호라던가. 제 말에 도리는 있소. 허나 저 승호도 그럴만한 사연이 있어 그 애와 헤여졌소.”
“엄마!”
“아니야. 너희들 이후에 의좋게 보내려면 말하는게 옳아.”
승호가 말려도 벽화는 기어이 두툼한 입술을 열었다.
“경옥이 엄마가 저 애를 뭐라고 욕했는지 아오? 항상 '바람둥이네 새끼'라고 욕했소. 내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그렇게 욕지거리를 한단 말이요? 바꿔놓고 성호라면 그렇게 악다구니질하는 집 딸과 약혼하겠소? 그런 앙칼진 년을 가시엄마로 모시고 살 만하오?”
그녀는 너무 격분해 손까지 부르르 떨렸다.
“경옥의 에미는 나와 중학교때 동창생이요. 그런데 어찌 우리 불쌍한 승호를 그렇게 입에 담지 못할 쌍을 한단 말이요? 자기는 그렇게 정파다운가? 검정개 돼지 흉을 한다고 하오.”
승호는 듣다못해 말렸다.
“엄마, 그만 하십시오.”
성호는 승호 어머니와 경옥의 어머니가 중학교 동창생들이라는데 갈등이 심한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꾹 참고 승호 어머니 말을 듣다가 한마디 물었다.
“부모들이 반대해도 둘이 좋아서 그런 관계까지 벌였으면 끝까지 책임져야지 않습니까?”
승호는 쓴 오이를 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애를 사랑해?”
성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초에 사랑하지 않으면서 왜 다쳤니?”
“그런 건 아니야. 사실 경옥은 내 첫사랑이야. 그런데 걔네 엄마 날 ‘과부네 새끼’라고 욕하니까 복수하려고 다쳤다.”
성호는 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승호를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벽화는 보다못해 “자, 이젠 경옥이 말을 그만하고 맥주나 마시오. 채 다 식었구나. 내 데워올가?” 하고 어색한 기분을 돌려세우려고 했다.
성호는 손사래를 쳤다.
“됐습니다. 술맛이 없어 더 마시지 못하겠습니다.”
벽화는 일어나 나가면서 “괜히 다투진 마오. 술이나 포근히 마시오.” 하고 억지로 웃어 보였다.
성호는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하면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했다.
이윽고 성호는 승호에게 통장훈을 쳤다.
“네 카멜레온처럼 이랬다저랬다 천변만화하는 그 더러운 련애관을 버리지 않는 날엔 함께 술도 마시지 않겠다. 날 찾지도 말라.”
승호는 성호를 손가락질을 하면서 피씩 웃었다.
“참 답답하구나. 정말 철학을 배운 거 같잖구나. 천지만물이 다 변하는데 누가 사랑이라고 변하지 않는다 했냐?”
“에이, 듣기도 싫어.”
승호는 우쭐 일어나려는 성호를 붙잡아 앉혔다.
“내 말을 들어봐라. 홍희나 은영과 같이 예쁘고 따르는 대학생들이 줄을 쭉 섰는데. 왜 욕을 처먹으면서 천하디 천한 중학생출신 녀자애를 계속 사랑해야 한단 말이냐? 황차 경옥은…”
그는 눈알을 떼굴떼굴 굴리더니 고등어쪼각을 집어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으면서 말꼬리를 꿀꺽 삼켜버렸다.
승호는 경옥을이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한 2년 데리고 놀았다. 그러나 몸만 뜨거워졌지 정은 오히려 점점 식어갔다. 설상가상으로 경옥보다 훨씬 풍만한 홍희와의 치정에 푹 빠진 후부터 경옥의 비행장 같은 밋밋한 가슴에 정이 뚝 떨어졌던 것이다…
승호는 어머니와 선금이 들을가봐 성호에게 속심의 말을 더 할 수  없었다.
성호는 승호와 련애관이 판이하게 다르다지만 누구도 누구를 설복시킬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호는 더는 술맛이 없어 우쭐 일어났다.
“됐다. 술도 잘 마셨고 속심도 잘 나눴다. 이젠 숙사에 돌아가야겠어.”
승호는 말리는 척했다.
“얘, 랭장고에 맥주 몇병 더 있어. 더 마시다 가라.”
허나 성호는 기어이 그 귀족 아파트 울안 같은 높다란 담장 속에서 나왔다.
저쪽에서 경복을 입은 작달막한 매부리코가 마주오고 있었다. 피뜩 보니 승호 아버지 같았다. 성호는 보기도 싫어 황급히 골목길에 굽어들어섰다.
어느날, 성호가 학용품을 사들고 선녀음식점 문 앞을 지나갈 때였다.
“야, 성호!”
등뒤에서 승호가 소리치면서 헐레벌떡 쫓아와 손을 잡았다.
“한잔 마시자.”
“싫다, 술맛이 없다.”
“오늘 녀자 말 하지 말고 술이나 맛있게 마시자.”
승호는 성호를 끌고 선녀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숱한 손님들이 이쪽에 머리를 돌렸다.
승호를 알아보는 몇몇 손님들은 질겁해 부랴부랴 일어났다. 승호는 항상 깡패들과 싸웠기에 시내에 소문난 싸움군이였다.
“아이유, 오빠들 참말 오랜만이구만요.”
선화가 아양을 떨면서 다가왔다. 그녀는 승호와 성호가 은영 때문에 갈등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라 함께 온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얼굴에 여러 군데 멍이 든 그들 둘의 얼굴을 보고 혹시 싸우지나 않았는가고 의심했다.
“뭘 시킬가요?”
승호는 손사래를 쳤다.
“개고기 계렬로 가져오오.”
“알았어요.”
이윽고 복무원아가씨가 개고기로, 개뼈다귀로, 개가죽고기로, 개간으로, 개밸로 상다리 부러지게 올렸다.
“소주 할가?”
“시간도 없는데 그러자.”
“무슨 일이 그리 바쁘니?”
“목동이여서 졸업배치생각만 해도 골치 아프다.”
승호는 성호 앞의 큰 잔에 소주를 찰찰 넘치게 부었다. 성호도 술병을 받아 승호 잔에 부었다.
그들은 술잔을 댕 부딪쳤다.
“나하고 홍희, 은영을 보호해주어 각골난망이야.”
승호는 개고기를 집어 입에 넣고 질근질근 씹으면서 개기름이 번지르르한 입을 열었다.
“최성균교수하구 잘 부탁해보지. 널 시내에 남겨 달라고.”
“에이고, 뭘 보고 농부네 아들을 시내에 남기겠니?”
승호는 주위를 살피더니 나직이 말했다.
“그럼 시내처녀와 약혼하면 어떨가?”
성호는 한숨을 후~ 내쉬였다.
“배치받기 위해 가짜약혼이라도 하라는 거냐?”
“그래, 살자면 마지막수라도 써야잖겠니? 사랑이라는 거 별거더냐? 만나서 살을 비비면서 사느라면 사랑이 생기는 거야.”
성호는 승호의 글러먹은 건달놈의 련애관과 혼인관을 딱 듣기도 싫어 화제를 돌렸다.
“넌 어디에 배치받을 작정이냐?”
“공안기관에 들어갈 예산이야.”
성호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야, 아버지와 함께 일할 작정이냐?”
“그래, 정부기관이나 돈깨나 생기는 단위에 배치받을 수도 있어. 적어도 난 학생총회 부주석이고 학생당원이고 체육위원이 아니냐?”
승호는 술을 거나하게 마셨는지라 한바탕 큰소리를 탕탕 치면서 불어댔다.
“기실 정부기관에 들어가 일하고 싶은데 이번에 일을 쳐서 정부기관에 들어갔다가 배길 것 같지 못해.”
성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다. 정부 기관에야 날뛰는 정객들이 많은데 네 같은 놈이 며칠 삐치겠니?”
승호는 한 숨을 후~ 내쉬였다.
“에이, 경옥이 엄마 날 즉살나게 욕하지만 않았어도 경옥에게 복수하느라고 일을 치지 않았을 거야.”
성호는 눈이 떼꾼해졌다.
“진짜 경옥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복수하느라고 해쳤니?”
승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경옥이 엄마가 나를 더러운 바람둥이네 새끼라고 욕한게 진짜 이발이 갈리도록 괘씸했어.”
성호는 술맛이 없어 술잔을 내려놓았다.
“야, 이 놈 새끼야, 경옥의 어머니와 복수할 걸 왜 경옥을 짓밟았니?”
승호는 “글세 지금 생각하면 그래. 그 일만 없어도 난 정부기관에 가서 장차 시장이나 서기 쯤 하겠는데 말이야.” 하고 한숨을 후~ 내쉬였다.
승호는 마음이 아팠는지 술잔을 들어 성호의 잔과 마주치고 굽을 쭉 냈다.
“넌 시내에 남겠으면 시내 처녀와 약혼해라. 혹시 말이 있는 처녀 있니?”
“불시에 마대치기를 해오겠니? 어떻게 시내 처녀와 약혼하는 방법으로 리상과 전도를 실현해?”
“종수는 시내 국장집 딸과 약혼했다더라. 이제 시내 어느 신문사에 배치받기로 했단다.”
“그래? 가정배경이 든든해야 일이 슬슬 풀리는 판이구나.”
승호는 어두워지는 성호의 얼굴표정을 보고 뒤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농민의 아들인 성호에게는 혹시 상처를 입힐 수도 있기 때문이였다.
그는 인차 화제를 돌렸다.
“시내 처녀 소개해 줄가?”
성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만둬. 사랑은 사랑이고 졸업배치는 졸업배치지. 어찌 사랑에 졸업배치를 섞울 수 있냐?”
승호는 골치 아팠다.
“야, 이 봉건통아, 항상 순결성이고 뭐고? 사랑이라고 어찌 순결하기만 해? 리몽룡과 춘향이 어디에 있느냐? 아직도 그따위 개도 먹지 않는 사랑의 순결성을 고집하니? 농민출신은 시내 가시아버지 방조라도 받아야 졸업배치를 잘 받아.”
“됐다, 됐어.”
성호는 승호의 말을 반박했다.
“개혁개방을 한다는 건 결코 성해방을 하라거나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혼인관을 부정하라는게 아니야. 난 시내에서 좋은 일자리를 찾지 못하더라도 자기 성적만큼 가라는데로 가서 인생 가치를 실현할 테야. 난 차마 시내 처녀를 사닥다리로 졸업배치를 사기치지 못하겠어.”
“이런 바보.”
승호는 꽉 막힌 성호가 답답해 도리머리를 홰홰 돌리면서 삿대질해댔다.
“야, 인생길에 그런 좋은 챤스 몇번 있다고 이래? 챤스를 놓치지 말아야지.”
그는 성호의 옆에 다가와 사진 한장을 꺼내 들었다.
“이 처녀애 어때?”
성호는 보지도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눈 앞에 대는 사진 속의 처녀는 피뜩 봐도 예뻤다.
“네 동생 아니야?”
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야, 말도 안돼.”
“왜?”
“녀동생까지 내놓겠니?”
“넌 매부로선 손색없는 사람이야. 의리심도 강하지. 진짜 현대판 리몽룡이야. 내 매부 되면 졸업배치 근심하지 말라. 우리 둘이 공안기관에 가서 손잡고 일하면 두려울 것도 없어.”
성호는 자기에게 기대려는 승호의 허무하고 나약한 속심지가 가련하고 우스웠다.
“선금은 사범학교를 다녔는데 이제 곧 시내 소학교에 배치받을 거야."
성호는 입에 빗장을 지른 채 묵묵부답이였다.
"네보다 두살 지하니까. 나이도 어울리지. 얘가 춤을 얼마나 선녀같이 잘 춘다고. 어때? 전번에 녀동생 봤지 않았니?”
“그래서 집에 청했던 거야?”
“겸사 겸사.”
성호는 그제야 베일 속에 가리였던 승호의 속내를 알아챘다. 도와주려는 마음과 믿음만은 고마웠다. 그러나 어쩐지 건달 같은 승호가 싫었다.
성호는 저가락으로 고기점들에 고추를 마구 버무려놓으면서 내키지 않는 어투로 말했다.
“이전에 그 세집 지하독서실에서 뭐라 했느냐? ‘어찌 녀성들의 치마자락에  매달려 리상을 실현하려고 하는가?’, ‘땅을 밟고 하늘을 떠인 사내대장부로서 자기 피타는 노력으로 공부를 잘해 리상과 전도를 개척해야 해.’ 그 때 넌 그렇게도 커보였다. 그런데 날 보고 그 썩어빠진 길을 걸으라는 거냐?”
“사람이 살자면 허허실실, 기동령활한 전략전술이 필요해. 만약 나처럼 학습성적이 높으면 모르겠는데. 넌 중축에 가나마나 해.”
성호는 저도 몰래 머리가 숙어졌다.
“사람의 일은 몰라. 네가 우리 선금과 약혼하면 시내에 남기만 하겠냐?  공안국이나 법원에서 일할 수 도 있어.”
성호는 한잔 기울이며 묵묵부답했다. 그러나 승호의 호의를 무시할 수도 없어 진퇴량난에 빠졌다.
취기 오른 승호는 또 제 좋은 소리를 줴쳤다.
“처녀라는게 별게 아니야. 모두 하루 처녀야. 그런 하루 처녀가 그리 중해?”
순간 성호는 피뜩 의심이 쑥 들었다.
(자식, 네 녀동생도 하루 처녀란 말이냐?)
성호는 너무 매끄러운 승호를 생각할수록 부아통이 터져 술잔으로 밥상을 꽝 치고 격분해 고함쳤다.
“그 더러운 련애관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처녀들이 정조를 짓밟혔니? 아직도 내 앞에서 그 더러운 말을 하겠니?”
승호는 손님들의 눈길이 뜨거워 손사래를 쳤다.
“됐다, 됐어. 우린 아무리 말해도 한곬으로 갈 수 없어.”
승호는 잔을 쭉 굽내고 안주를 몇 저 집더니 훌 일어났다. 카운터로 가서 결산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음식점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선화가 이쪽으로 걸어와 문 밖을 눈짓했다.
“더러운 놈새끼.”
성호는 분김에 남은 술을 병채로 들어 꿀꺽꿀꺽 마시고 비틀거리며 나가려고 했다.
선화는 뒤따라가 부축했다.
“안방에 들어가서 한잠 자고 가오.”
“왜 이래? 저리 가!”
성호는 선화를 활 밀어놓고 나가버렸다.
선화가 따라 나오면서 소리쳤다.
 “야, 혼자 갈만 하니?”
 성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틀거리며 팔을 휘둘러댔다.
“내 시내 년들 신세에 시내에 남을 거 같애. 농, 농촌에  가더라도 내 힘으로 살 테야.”
선화는 승호에게 골나가지고 자기와 성을 내는 성호가 얄미웠다.
“차도 복잡한데 교통안전 주의해라!”
성호는 들었는지 말았는지 비틀거리면서 황혼빛이 너울치는 학교 숙사로 터벅터벅 힘겹게 걸어갔다.
그의 눈 앞에는 불찌가 반짝반짝 빛났다. 홀연 그 황혼의 락조가 불타는 불티 속에서 한 미녀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너울너울 춤을 추면서 자기한테로 달아오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런데 그 미녀가 누구인지 아물거려 분간하기 힘들지 않겠는가.
 
 
 
 
 
 
 
 
 
 
 
 
 
 
 
 
 
 
 
 
 
 
 
 
 
 
                           19. 충고
찜통에 찌는듯한 날씨에 성호는 침대에 들누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면서 속궁리를 굴렸다. 아무리 궁리해 봐도 어쩐지 승호의 매부로 되기는 싫었다.
(개자식, 날 자기 집안에 끌어들여 호위무사로 삼으려고? 저런 놈이 공안국에 들어가면 무슨 짓 할지 누가 알아?)
성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부랴부랴 신을 주어 신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승호가 들어왔다.
"야, 녀동생을 데리고 왔어."
"아니, 말도 하지 않고?"
그때 문이 배시시 열리더니 선금이 사뿐 들어서서 혀를 홀랑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성호는 황급히 인사를 받으면서 승호를 돌아봤다. 선금은 귀밑까지 홍조가 번지고 있었다.
성호는 승호를 보고 나직이 “우리 둘이 조용히 말하자. 녀동생을 먼저 내보내라.” 하고 선금을 흘끔 곁눈질했다.
승호는 선금을 잠간 현관에 나가 기다리라고 했다.
선금이 나가자 성호는 "아니, 이게. 뭐야?" 하고 어처구니없어 입을 짝 벌리기까지 했다.
"네가 선금을 좋아하는 것 같아 데리고 왔다."
"야, 내 언제 좋다고 했니? 난 이미 사랑하는 처녀가 있어."
뜻밖의 말에 승호는 따지고 들었다.
"뭐라구? 누구야?!"
성호는 명확히 말했다.
"네 녀동생을 더 괴롭히고 싶지 않아. 이 일은 없던 일로 하자."
말을 마치자 성호는 문 밖으로 나갔다.
승호는 성호 뒤잔등을 삿대질하면서 대성질호했다.
"야, 너 꼭 후회할 거야."
선금은 벽에 돌아서서 어깨를 가늘게 들먹였다.
성호는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어제 술에 만취돼 꿈 속에 떠올랐던 처녀를  찾아보아야 했다.
그는 정신을 똑바로 가다듬고 곧추 녀성숙사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고 주춤 멈춰섰다.
(그래, 숙사에 없을 거야. 꼭 그녀가 잘 가는 열람실에 있을 거야.)
그는 정신을 잃고 허둥지둥 열람실로 반달음쳐 갔다. 교정의 언덕을 올라가면서도 그녀와 뭐라고 말할가고 속궁리를 베아링처럼 굴렸다.
"열번 찍어 넘어지지 않는 나무가 없다고. 아무리 질겨도 이번에야 견디지 못하고 꼭 넘어갈 거야."
성호가 열람실에 올라가 보니 아닌게 아니라 은영이 습관처럼 제일 뒤에 앉아 책을 열심히 뒤지고 있지 않겠는가.
(아니, 기말시험도 끊났는데 저렇게 열심히 독서해?)
그는 스적스적 그녀한테로 다가갔다.
그가 벼르고 별러 마음먹고 찾은 그녀는 바로 은영이였다. 그녀는 성호를 피뜩 보고서도 새침한 표정을 지으면서 눈을 살며시 내리깔고 책을 보는 척했다.
(조 표정 죽여주는구나.)
성호는 쿵쿵 울리는 심장을 가까스로 진정하면서 은영의 곁에 슬쩍 앉았다.
"안녕?"
"오랜만인데요."
은영은 대충 인사하고는 버릇처럼 굽실굽실한 체육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무슨 일이 있어요?"
"은영이, 할 말이 있소."
은영은 주위의 눈총을 둘러보더니 "공부 바쁜데 이러지 마세요." 하고는 책을 하나 슬쩍 밀어주었다.
성호는 눈치채고 책을 보는 척하면서 얼굴을 가리고 은영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바깥에 나가기요."
은영은 주위의 눈길이 쏠리자 마지못해 책을 가방에 주섬주섬 주어넣고 일어섰다.
성호는 피가 온몸을 세차게 박차고 흐르고 심장이 쿵쾅, 쿵쾅 높뛰는 것을  느끼면서 바깥으로 나갔다. 그뒤로 좀 거리를 두고 은영이 체육머리를 훔치면서 따라 나갔다.
성호는 은영을 데리고 나무숲에 둘러싸인 운동장으로 걸어갔다.
운동장에서는 성대학생운동대회에 참가할 준비를 하는 대학생선수들이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진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운동장이였다. 이 운동장에서 은영과 함께 성대학생륙상경기대회에 참가하려고 뛰지 않았던가. 겨울에는 빙장에서 은제비들처럼 쌍쌍이 나래치지 않았던가!
그는 뒤따라 온 은영을 돌아보면서 무거운 입을 간신히 열었다.
"은영이, 이 운동장은 우리 둘이 달리던 활무대였지."
은영은 외까풀눈을 곱게 흘겼다.
"어머, 추억에 푹 빠질 여유도 있는가요?"
성호는 은영을 정겹게 마주 바라보았다.
"은영이, 첫사랑 널 영원히 사랑해. 이 목숨과 심장을 바쳐서라도 영원히 사랑해."
은영은 너무 당황해 주위를 둘러보다가 성호에게 눈을 흘겼다.
"아직도 미련 버리지 않았어요?"
"그런 말 하지 말라. 내 가슴이 찢어져."
"…"
성호는 은영의 눈치를 흘끔 보면서 또 입을 열었다.
"은영은 아주 마음이 착하고 지조가 굳센 처녀요. 절대 승호와 그런 관계를 버무렸다고 보지 않소. 머저리 아니고서야 어찌 경옥이랑 홍희이랑 관계를 버무린 짐승과 그럴 수 있겠소?"
"그만 하세요."
허나 성호는 멈추지 않았다.
“승호 헛소리를 누가 믿겠소? 그 놈 새끼, 아무리 사내답고 처녀들을 꼬시는 재간이 있다고 해도 누가 그 미친 수캐 같은 놈한테 몸을 맡겨?”
“…”
은영은 나무숲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호는 뒤따라가면서 계속 공세를 가했다.
“승호는 처녀들을 자기 더러운 욕구를 만족시키는 도구로 볼뿐이야. 그런 놈을 믿고 어떻게 살아?”
“이렇게 헐뜯으면서도 친군가요? 진짜 소인배군요.”
“친구를 헐뜯는게 아니요. 전번에 승호와 술을 마시면서 속뽑이를  다 해보았소. 승호는 무한한 자극을 받으려고 끊임없이 처녀를 갈아댈 놈이요.”
“그만 하세요.”
성호는 진정어린 눈길로 은영을 마주보면서 뒤말을 이었다.
“어째 내 마음을 몰라주오. 은영은 녀동생처럼 정든 처녀요. 은영이 전도를 생각해서 모든 체면을 잃고 충고하는 거요. 승호, 그 자식 미련의 거미줄에 묶여 작작 따라다니란 말이요. 내 순결한 첫사랑을 처참하게 만들지 마오!”
그는 은영의 손을 잡고 정중히 말했다.
“내 사랑을 받아주지 않아도 되오. 허나 승호는 포기하오. 한뉘 눈물을 흘리면서 고생할 거요.”
은영은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어깨를 들먹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저쪽 수림 속에서 엿보는 정희의 걀쭉한 얼굴 반쪽이 보였다.
성호는 은영을 뒤따라 걷다나니 교정을 벗어나 어느덧 학교 뒤산으로 올라갔다. 서늘한 소나무숲이 그들을 시원히 감쌌다. 그는 은영을 와락 끌어안았다.
"시퍼런 대낮에 뭔가요?"
성호의 가슴을 밀어내는 은영의 눈시울에는 뜨거운 눈물이 흥건했다. 그녀는 줄 끊어진 구슬처럼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과거를 묻지 말고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기요."
"…"
"너와 승호와의 과거를 묻지 않을 거야. 우리 이제부터 시작하자."
"…"
은영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녀의 눈시울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가 줄 끊어진 구슬처럼 걀죽한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드디여 그녀는 비술나무를 짚고 어깨를 들먹였다.
"야, 은영아, 울지 마라. 네 울면 내 심장이 다 터진다."
은영은 한참 후에야 간신히 울음을 멈추었다.
“은영아, 속 시원히 말해. 날 사랑하지? 맞지? 널 속이지 말라.”
“…”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돌이킬수 없는 일이였다. 승호와 넘지 말았어야 할 너무 깊은 곬을 넘었던 것이다. 땅을 치면서 통탄해도 쓸데 없었다. 회상하기도 싫은 비극이였다. 색마의 감언리설에 유혹돼 청춘을 매장해버린 허무맹랑한 악몽이였고 죄악의 구렁텅이였다. 한 순진한 처녀의 청춘과 순정을 매몰한 함정이였다.
성호가 새삼스레 사랑을 고백하자 은영은 마음의 상처가 더욱 아파났다. 그러나 그 내막을 고스란히 성호에게 드러낼 수는 없었다. 목숨 같은 정조를 잃은 그녀는 자기에 대한 순정을 고이 간직한 성호 앞에 설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 그럴수록 후회와 고통, 상처가 독침으로 돼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그녀는 이를 옥물더니 뽁뽁  갈았다. 색마 승호가 한없이 가증스러웠다.
“오빠, 자꾸 캐고 드는게 정말 지겹다고. 무슨 자격으로 남의 사생활을 자꾸 간섭하는 거요?”
그제야 성호는 은영의 비밀을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충고하죠. 절 깡그리 잊으세요. 하루라도 빨리 잊을 수록 오빠에겐 좋을 거요.”
“널 잊으라고? 나한텐 어떤 존잰데…”
“몇번 더 말해야 해요? 난 오빠를 사랑하지도 않아요. 난 시집가지 않아. 한평생 혼자 살래. 이 더러운 세상에서 어떤 남자를 믿고 살 수 있어? 세상의 남자는 몽땅 승냥이고 색마고 변태야. 흑흑, 흑흑…"
순간 그녀는 가방을 툴렁 떨어뜨린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디론가 정처 없이 허둥지둥 뛰여갔다.
성호가 은영의 가방을 주어들고 뒤쫓아갔다. 성호의 그 모습 너무나도 가엽고 작아 보였다…
오래지 않아 졸업식이 닥쳐왔다.
성호는 은영에게 마음 속으로 감사했다. 그도 은영의 상처를 자꾸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은영한테 자기를 사랑하는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혹시 은영이 자기를 사랑하는데 전도를 고려해 농민의 아들인 자기를 포기하고 공안국 과장 시아버지를 등에 업으려고 승호한테 몸을 맡겼는가를 알고 싶었다.
그러나 은영이 그런 말을 할리 없었다. 성호가 파고 들면 파고 들수록 은영에게는 옷을 한벌, 한벌 벗기우는 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모든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했다.
"별, 정조를 잃은 주제에. 흥! 농부 아들이라고 나무려?"
이젠 성호도 은영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 살 것 같았다. 마음의 한쪽 구석에서는 반발심도 생겼다.
(내 꼭 은영보다 더 예쁘고 어린 처녀를 만나 보란듯이 살 거야.)
후~
그는 한숨을 후 내쉬고 나서교정 나무숲 속의 시원한 아침공기를 한가슴 가득  들이켰다.
아무리 시원한 아침 공기도 가슴 한가운데 남은 실련의 아픔은 가셔주지 못했다.
은영과 함께 뛰여다니던 교정의 운동장, 스케트를 타던 잡초가 자란 빙장을 둘러보는 성호의 마음은 비길데 없이 쓰라렸다. 은영과의 쓰라린 사랑을 기억 속에서 지우려고 해도 자꾸 은영과 지내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라 비길데 없이 고통스러웠다.
체육머리를 흩날리면서 저 운동장에서 화살처럼 달리던 은영이, 매화꽃이 핀듯이 눈꽃을 떠인 나무들이 빙 둘러선 빙장에서 빨간 운동복을 입고 타력있는 몸매를 날렵하게 놀리며 빨간 불새처럼 훨훨 날아예던 은영이, 빙장에서 스케트를 타던 성호를 걸어넘겨 외발로 얼음가루를 날리면서 반원을 그리며 돌아와 미안해하던 은영이…
(아, 그게 우리 첫 만남이였지. 하늘이 내린 우연한 만남이였는데. 얼마나 사랑스런 처녀인데. 이젠 얼마나 고통스런 추억으로 남았는가.)
성호는 쓰라린 추억에 잠겨 허무한 웃음을 지었다.
(우린 숱한 학우들의 흡모의 눈길을 한 몸에 받으며 함께 빙장에서 쌍무를 추었지. 후-. 건 모두 꿈만 같은 행복한 추억일뿐이야. 이젠 다 허사로 됐어.)
성호는 고통의 심연에서 허우적거리면서 헤여나오려고 발버둥질쳤다.  허우적거릴 수록 자꾸 은영이 생각이 났다.
(은영은 승호한테 당한게 분명해.)
실련의 고배를 재차 마신 성호는 가버린 첫사랑 은영이 자기 마음 속에, 아니, 골수 속에, 대뇌 속에 얼마나 깊이 배겼는가를 깊이 느꼈다. 성호는 사랑하는 은영을 사랑할 수 없어 막 죽고 싶었다. 그는 은영한테 거듭 실련당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였다. 미련의 꼬리에 뺨을 한대 얻어맞은듯 얼얼했다. 뒤산 절벽에 가서 훌쩍 뛰여내리고 싶었다. 양재물을 한사발 꿀떡꿀떡 마시고 이 세상과 결별해버리고 싶었다.
성호는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는 은영이 도대체 승호한테 시집가는가 두고 보고 싶었다.
성호도 자기가 서글프고 가련하고 곤혹스러웠다. 격분해 주먹으로 교정의 백양나무를 꽝꽝 쳤다.
나무무가지에 앉아 재잘거리던 참새들이 놀라 포르릉 포르릉 날아가버렸다.
은영을 사랑하면서도 사랑할 수 없는 성호의 고통 오죽하랴.
(은영의 아버지는 정부기관의 거물급지도자라고 하지 않는가? 그럼 무엇 때문에 승호를 사랑해?)
성호는 몽롱한 안개 속에 잠긴 사랑의 미로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아직도 막연한 심연 속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지하에 묻혀버린 그 비밀은 언제 가야 밝혀질 수 있을가? 진짜 가슴에 묻고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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