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붉은 태양이 서서히 서산으로 넘어가면서 금빛을 뿌리었다. 황혼의 붉은 낙조로 물든 서산의 상공은 붓으로 그린듯이 검붉었다. 그래도 져가는 태양은 펑펑 구멍 뚫린 검은 구름 조각들 사이로 구름 변두리나마 노르스름하고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뿐 시간이 흐름에 따라 태양은 맥없이 지평선 아래로 꼴깍 넘어가면서 몇 가닥의 금빛을 비추다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뒤이어 어둠이 능구렁이처럼 내달려오면서 산과 들을 무섭게 뒤덮고 지지눌렀다.
1976년은 중국으로 말하면 특별한 한 해였다. 초봄에는 당산시에서 7급도 훨씬 넘는 지진이 일어나 일대 재난이 벌어졌다.
8월 말부터 9월 초에는 패용천산과 칼산 사이에 있는 과수원의 살구꽃과 사과배꽃이 하얗게 피기까지 했다.
덕돌은 소 방목을 하면서 때 아니게 핀 살구꽃과 사과배꽃을 살펴보면서 이상해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저 패용천산 꼭대기 절벽 우에서 정규상이 싸리나무광주리를 잔등에 업고 괭이로 약초를 캐고 있었다.
그는 시오를 파서 잔등의 싸리나무광주리에 담고 허리를 펴고 산 아래 무연히 펼쳐진 들판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땅이 꺼지게 길게 토해냈다.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늘여진 논두렁, 무연히 넘실거리며 펼쳐진 사래긴 옥수수밭과 콩밭…
허나 세상이 아무리 넓어도 말 한마디 했다가 억울하게 우파 모자를 20년이나 쓴 정규상과 같은 우파분자가 숨이 나올 곳은 없었다.
덕돌이 너무 이상해 정규상에게 배꽃이 핀 사과배나무가지를 끊어다가 보였다.
“정 교수, 이걸 보십시오. 가을에 배꽃이 다 피었습니다.”
정규상도 한숨을 쉬며 나뭇가지를 받아 쥐고 한참이나 여겨보더니 그리 멀지 않은 배꽃이 하얗게 핀 과수원을 내려다보았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덕돌이 신기해하자 정규상은 의연히 한숨만 내쉬며 흐리터분한 을씨년스러운 하늘만 쳐다볼 뿐이었다.
그런데 9월 9일에 뜻밖에도 중국 인민의 대구성이며 위대한 수령이며 진붉은 태양이신 모택동 주석께서 불행하게도 사망하셨다. 전국 각 민족 인민들은 모두 슬픔의 바다에 잠겼다.
추도대회를 하는 날 함흥대대 토성 안 마당에 검은 천을 두른 거폭의 모택동 주석 초상화를 모시고 사원들이 줄을 지어 추모활동을 벌렸다. 어떤 노인들은 대성통곡하다가 기절해 넘어가 정규상이 위생소에 데려다 주사를 놓으면서 구급해야 할 지경이었다.
덕돌은 5.7중학교를 졸업하고 상순의 포치대로 생산대 소 방목을 하다나니 경애하는 모주석의 추도대회에도 참가하지 못하고 패용천산에 가서 소몰이를 해야 했다.
그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그의 아버지는 집안 집 손자 성욱을 생산대 대무위원 겸 회계를 시키면서도 자기 아들은 대전 일도 시키지 않고 글쎄 소 궁둥이를 치게 했던 것이었다.
“참, 아버지는 이해 못하겠어. 내가 회계를 하면 성욱보다 못하게 할까봐 나를 소방목을 하래?”
더구나 상순은 소몰이를 시킨 첫날에 그를 보고 “정치가 백열화된 세상에서 정치를 잘 하지 못하면 소궁둥이나 쳤지 별 수 있니?”라고 비꼬는 투로 말하기까지 했다.
덕돌은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격이었다.
고중 졸업을 앞두고 그는 학교에서 조직한 글짓기서클에 참가해 경산과 성환 형님, 그리고 철봉 형님까지 모시고 조선어문법과 일부 문학창작 이론까지 학습했고 소식과 통신, 소설과 시 등 문체의 글짓기를 배워 공사와 현, 주 방송과 신문에도 소식을 여러 편 발표했다. 게다가 장영웅과 맹광철 그리고 방순희의 도움으로 점차 학급의 애들과도 관계를 개선해 입단지원서까지 썼다. 물론 그때 담임교원 황승연은 학교 빈농 대표 이흥수와 짜고 들어 극력 덕돌의 입단을 저애했지만 학급에서 주먹 왕이자 글짓기를 잘한데다가 대채전을 만드는 중노동도 아주 잘해 학생들 속에서 위신이 높았다. 하여 학교 내에서 덕돌을 내놓고 다른 애들을 입단시키기 힘들었다.
덕돌은 고중에서 입단하고 농촌에 나가 생산대대를 위해 소식이나 통신을 잘 써 입당도 하고 대학에 갈 푸르른 꿈이 당장 실현 될 것 같아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그가 진수해 공사 방송소에 가서 견습기자로 뛰어 다닐 때 면목 익힌 아나운서 오영순은 그보다 한 살 위 여성이었는데 공사 단위 조직위원이었다.
덕돌은 그녀를 양누나로 모시고 소식쓰기를 배웠고 방송소를 떠날 때는 이제 입단지원서가 공사단위에 올라가면 토론할 때 도와달라고 체면을 잃고 부탁해놓기도 했다. 그리하여 입단문제는 문제없으리라고 시름 놓고 미몽만 꾸었다.
허나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져 왔다. 학교 단총지에서 온 것이 아니라 제일 믿던 양 누나 공사 방송소 아나운서 오영순한테서 먼저 편지가 날아왔던 것이다.
동생, 미안하오. 뜻밖의 불행한 소식에 놀라거나 격분해 하지 마오. 총명한 동생은 이성을 잃은 일을 하지 않으리라고 믿고 말하오. 생각 밖으로 동생이 제일 믿던 사람이 덕돌에 대한 평가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입단 문제가 공사 단위에서 비준되지 못했소. 학교 기층단총지에서 올려 보낸 자료가 나쁘기에 나로서는 혼자 어찌는 수가 없소. 조직원칙이 있기에 구체적으로 전해주지 못하는 것을 양해하오. 항상 주변 사람들을 과분하게 믿지 마오. 허나 이번의 좌절에서 경험과 교훈을 섭취해 이후에 사상 상에서 입단하면 꼭 멀지 않은 장래에 입단하리라고 믿소…
덕돌은 그 아래 위안의 말들을 더 읽어 내려갈 수 없었다.
그는 김이 빠진 공처럼 편지를 스르르 떨어뜨리고 위 방안에서 이불을 들쓰고 들어 누었다. 진종일 들어 누운 채 천정 한 곳만 멍청히 쳐다보았다.
며칠 후 소를 먹이다가 덕돌은 영웅이 찾아와 말하는 말에서 피뜩 의심이 들었다.
“어쩌겠니? 나도 별 수 없다. 학교 혁명위원회와 단위를 쥐고 흔드는 승연선생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대가리도 꼬리도 없이 남기고 간 영웅의 말에서 덕돌은 희미하게나마 짐작이 갔다. 입단 소개인인 장영웅이 소개인 추천 란에 평가를 좋지 않게 써놓았을 수 있었다.
덕돌은 소를 먹이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오영순의 편지를 꺼내 다시 읽고 또 읽어 보았다.
…동생이 학급에서 제일 믿던 사람이 덕돌에 대한 평가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입단 문제가 공사 단위에서 비준되지 못했소. 학교 기층단총지에서 올려 보낸 자료가 나쁘기에 나로서는 혼자 어찌는 수가 없소…
“‘내가 제일 믿던 사람이’ 누구겠는가? 영웅을 내놓고 또 누가 있는가? 영웅이야, 바로 영웅이야.”
제일 믿던 입단소개인마저 평판이 좋지 않은 덕돌을 공사단위 조직위원인 오영순인들 어떻게 입단시킨단 말인가!
순간 배신감과 허위성에 허탈감이 났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영웅이 어찌 이럴 수 있느냐? 내가 널 얼마나 믿었는데...”
사실 영웅과 덕돌은 모두 공부를 잘했다. 덕돌의 큰누나는 영웅의 아버지 제자였다. 영웅의 아버지는 진수해중학교 화학교원이었는데 춘자는 화학을 아주 잘해 맏제자나 다름 없었다. 영웅은 반장이고 덕돌은 학습위원을 하면서 아주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덕돌이 수학과 물리, 화학을 몽땅 100점을 맞은 후부터 영웅은 덕돌을 질투하기 시작했다. 학급에서 학습성적 일위를 내줬기 순간부터 생긴 삐뚤렁 정치의 물결이 인것이었다. 그러나 졸업을 앞두고 영웅은 자기를 물매를 치겠다는 뒷말을 듣고 주먹이 센 한족친구들이 많은 걸 보고 덕돌을 보고 자기를 보호해달라고 했다. 대신 덕돌을 꼭 입단시키겠다고 이른바 거래식 군자협의를 달성했다. 덕돌은 졸업할 때 영웅을 누가 다치는 날엔 가만놔두지 않겠다고 을러멨다. 그리고 사전에 영웅을 빼돌려 물매를 피하게 했다.그런데 영웅이 배은망덕하고 뒤에서 자기를 헐뜯어 소개인 소개란에 무함해 써넣을줄은 몰랐다.
허나 승연이가 영웅을 강박해 그런 허위소개를 했다고 생각하자 더욱 격분했다. 희망으로 부풀었던 덕돌의 마음에 남긴 상처는 깊고 깊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그 상처는 아물 것 같지 않았다.
덕돌은 소몰이를 하다가 과수원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배꽃을 보고 소 궁둥이를 치던 회초리로 마구 후려갈겼다. 새하얀 배꽃잎사귀들이 질척질척한 땅바닥에 마구 떨어졌다.
“너의 아름다움은 내 마음의 비애다. 때 아니게 핀 꽃은 필요 없어!”
덕돌은 이른 아침에 소 무리를 몰고 옥수수 밭을 지날 때면 제일 서러웠다. 옥수수 밭에 달려 들어가 옥수수 잎을 마구 뜯어먹는 소를 쫓아내려고 달려 들어가면 아침 이슬에 옷이 흠뻑 젖곤 했다. 늙은 소 콩 밭쪽으로 한다고 소들의 왕격인 혹달개는 오른쪽 뿌리에 혹이 달리었는데 괘씸하게도 덕돌의 눈치를 흘금흘금 보다가도 다른 소를 쫓아내는 사이면 콩밭에 뛰어 들어가 콩 꼬투리를 마구 뜯어먹었다.
“이 놈 혹달개야! 나오지 못하겠니?!”
그 놈의 혹달개는 콩밭에서 뛰어나오며 똥을 빌빌 쏘면서도 콩잎을 마구 뜯어먹었다.
“이라! 이놈 혹달개야!”
혹달개를 쫓아 뛰어가다가 덕돌은 혹달개가 갓 쏴놓은 똥물을 밟고 그만 엉덩방아를 찧었다.
“에이, 씨!”
일어나 내려다보니 금방 씻어 입은 바지 엉덩이에 싯누런 소똥이 발리었다.
덕돌은 너무나도 서러워 패용천산 꼭대기 너럭바위에 올라서서 산 아래에서 사래 긴 옥수수 밭을 차고 키 넘는 옥수수 사이에서 기음을 매며 나가는 사원들을 내려다보며 장탄식을 했다.
“어떻게 계속 이렇게 소궁둥이를 치면서 한뉘 산단 말인가?”
그는 앞길이 막막해 흐릿흐릿한 하늘을 한참씩이나 쳐다보며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고 마구 후려쳤다.
“야! 이놈의 세상, 어쩜 고중을 졸업한 내가 소 궁둥이를 쳐야 한단 말이냐?! 광활한 천지에는 할 일도 많다는 게 이런 거냐?”
한편 아버지가 자기에게 소몰이를 시킨 것이 원망스러웠다.
순간 소몰이를 내보내며 아버지가 하던 말씀이 귀전을 아프게 때렸다.
“별 수 있니? 싸움이나 하고 책도 온전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한뉘 소 궁둥이나 쳤지.”
순간 덕돌은 콧마루가 시큼해났다.
그는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벌려 보이면서 목청껏 웨쳤다.
“아버지, 두고 보십시오! 내가 소 궁둥이나 치면서 사는가? 어쩜 세상을 주름잡아 달릴 큰 뜻을 품은 아들에게 그런 말씀을 해 자극할 수 있습니까?!”
그는 끊임없이 하늘에 대고 주먹질을 하고 웨치고 산 아래 들판에 대고 고함쳤다.
“아버지, 어쩜 성욱에겐 회계를 맡기고 당신의 아들에겐 소몰이를 시킬 수 있습니까? 농촌에서 농사를 배우지 않고 소몰이나 해서야 무슨 전도가 있습니까?”
덕돌은 아버지 그때 말씀이 이해되지 않아 날마다 끊임없이 넉두리를 했다. 넉두리를 하다가도 밭으로 달려가는 소들을 되몰아왔다. 어떤 때에는 자기가 조립한 반도체 라디오를 메고 칼산에 올라가서 조선노래를 들으면서 산우에서 목청이 터지라고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고 나면 그래도 잠시나마 가슴이 후련하고 마음이 홀가분해났다.
기실 상순은 아들 덕돌에게 격장법을 써서 정신을 차리고 농촌을 벗어나라고 일부러 소몰이를 시켜 자극했던 것이다. 허나 덕돌은 아버지의 그 깊은 마음을 알리 만무했다.
약재를 캐다가 덕돌의 그 모습을 지켜 보아온 정규상은 슬슬 다가와 광주리를 벗어 너럭바위 위에 놓고 산 아래를 둘러보았다.
사원들이 보이지도 않자 그는 너럭바위 위에 덕돌과 나란히 앉아 타일렀다.
“운명을 한탄만 해서야 소몰이 신세를 고칠 수 있니?”
“그래 무슨 방도가 있습니까?”
정규상은 덕돌의 어깨에 손을 얹더니 나직이 말했다.
“지금 세월에 잠시 지식분자들을 써주지 않지만 장차는 써줄 거야. 지식분자를 멀리하고서야 사회가 어찌 발전하겠느냐? 그러니 소만 몰지 말고 여가를 타서 책을 보아라. 지식은 언제든지 네 운명을 개변시키는 힘이 될 거야.”
덕돌은 그 말에 정신이 들었다.
“예. 그런데 책을 보자고 해도 소들이 밭으로 가서 볼 새 있습니까?”
정규상은 덕돌의 어깨를 다독이면서 귀띔해 주었다.
“소몰이도 방법을 대라. 소는 소금을 먹기 좋아해. 소금을 사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니다가 ‘염, 염.’ 하고 조금씩 먹여라. 그럼 소들이 달아날 때마다 ‘염, 염’ 하고 부르면서 손을 내밀어봐라. 소들이 밭으로 가다가도 달려오지 않는가. 소들도 방법을 대 얼리고 길들이면 얼마든지 책을 볼 새 있느니라.”
“예~ 그게 정말 방법입니다.”
“그래, 뭐나 방법을 생각하면서 일해야 한다.”
덕돌은 “예, 알았습니다.”라고 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정규상은 뒤 말을 이었다.
“내 알건대 네 고조부는 궁중 어의였다더라. 너도 의사공부를 하지 않겠느냐?”
덕돌은 김빠진 공처럼 물앉아 한숨만 내쉬었다.
“내 언제 의사 질을 해서 농촌을 벗어나겠습니까?”
허나 정규상은 덕돌에게 힘을 불어넣어주었다.
“넌 총명하기에 농촌에서 일하면서도 의료지식을 제대로 배울 수 있다. 공부라는 건 딱 학교에서만 하는 게 아니야. 지금 잠시 농촌에 있지만 먼저 책을 보면서 자습할 수도 있다. 이제 세상이 뒤바뀌면 언젠가는 내가 너를 의사로 되게 도와주마.”
“예? 정말입니까?”
“그래. 의료지식 책을 주면 누구에게도 보이지 말고 가만히 소몰이를 하면서 봐라.”
“예. 감사합니다.”
덕돌은 새로운 희망으로 부풀어 올랐다.
이튿날부터 덕돌은 정규상 교수의 말대로 집에서 소금을 둬 줌씩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소몰이를 했다.
그는 먼저 우사에 가서 소들의 우두머리 혹달개의 구유 앞에 가서 “염, 염” 하면서 소금을 손에 쥐어 내밀었다.
혹달개는 귀를 뻘쭉하더니 혀로 덕돌의 손바닥을 핥아 보더니 앞으로 육중한 몸뚱이를 움직이더니 쯥쯥 소금을 핥아 먹어버렸다.
“염, 염, 염.”
덕돌은 소들을 하나하나 다가가 손바닥을 내밀어 소금을 먹였다. 다른 소들도 혹달개처럼 아주 맛있게 먹는 것이었다.
그런데 덕돌은 소에게 소금을 먹이다가 오줌이 마리어 괴춤을 내리고 쏴 갈겼다. 그런데 이게 뭐야? 혹달개는 그 오줌도 쩝쩝 받아 아주 맛있게 먹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줌, 오줌, 오줌, 염, 염, 염.”
그 후부터 덕돌은 혹달개랑 옥수수 밭으로 달아나려고 하면 쫓아갈 필요없었다.
“염, 염, 염.”
덕돌이 소리치면서 손바닥을 내밀기만 하면 옥수수 밭으로 달려가던 혹달개랑 소금을 먹으려고 덕돌한테로 뛰어왔다.
소금이 없을 때는 “오줌, 오줌, 오줌.” 하고 소리치면 소들은 귀 뻘죽해 멈춰 섰다가 이쪽으로 달려 왔다. 혹달개는 오줌도 쩝쩝 맛있게 먹는 것이었다. 진짜 우둔한 소들도 조건반사가 생겼다. 원시사회 기적이 아닌가!
소금을 몇 알만 얻어먹어도 혹달개랑 덕돌의 곁을 떠날줄 몰랐다.
그게 방법이었다.
덕돌은 혹달개랑 가파로운 패용천산에 소들을 올리 몰아놓고 꼭대기 쪽에 올라가 너럭바위에 핸들 들어 누워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듯이 정규상에게서 가진 의학책을 걸탑스럽게 읽어보았다. 비록 재미로 볼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농촌 구석을 벗어나려면 중초약책이라도 열심히 읽어야만 했다.
그 밖에도 그는 닥치는 대로경산 선생이 준 소설책도 보고 동화책도 보고 철봉 형님이 준 “문학창작의 길”이란 문예창작 이론책도 읽어보았다. 제일 재미나게 읽은 책은 그래도 고파의 “림해설원”이나 라관중의 “삼국연의”나 시내암의 “수호전”이었다. 무송이나 리규, 로지심과 같은 양산박의 호한들이나 류비, 관운장, 장비 같은 영웅들의 이야기에 끌려 덕돌은 소가 옥수수 밭으로 뛰어 들어간 것도 다 잊고 넋을 잃고 읽어 내려갔다.
혹시나 옥수수 밭으로 달려 들어간 소떼를 발견하면 산 중턱으로 달려 내려가면서 “염, 염, 염.” 하고 소리쳐 부르기만 하면 됐다.
소들이 옥수수 밭에서 뛰어나오는 것만 같으면 또 드러누워 책을 읽었다. 그는 지어 잘 된 구절은 목책에 적어놓고 암송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설근의 “홍루몽”이나 양말의 “청춘의 노래”, 조선 작가 리기영의 “고향”이나 “두만강” 같은 소설은 잔잔한 물 흐름과 같이 필치가 섬세한데다가 정감이 풍부해 읽는 재미가 달랐다.
점심이 되면 옥수수떡 둬개 꺼내 대충 요기하고는 소련 작가 고리끼의 자서전 그림책을 탐독했다. 고리끼의 “어린 시절”과 “인간수업”, “인간들 속에서” 등은 할머니 손에서 너무나도 고생스레 자란 고리끼 본인의 이야기를 너무나도 진실성이 강하게 펼쳐보였다. 때문에 덕돌로 하여금 어떤 때에는 고리끼의 비참한 운명에 눈물을 흘리게 했고 점차 사람이 사는 도리를 알게 했다.
어떤 때에는 소낙비가 쏟아지면 패용천산 군용 갱도 입귀에 들어가 계속 책을 읽었다. 소들은 풀을 먹다가도 소낙비를 피해 갱도에 들어간 덕돌을 따라와 갱도 어귀에 모여 서서 주인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해가 서산에 지기 시작하면 혹달개랑 벌써 배가 뿔룩하게 풀을 뜯어먹고 산꼭대기에 모여와 누워 새김질 하면서 덕돌이 책을 놓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렸다. 허나 덕돌이 집으로 돌아갈 염을 하지 않고 너럭바위에 누워 작중 이야기에 매료돼 “허허허” 하고 소리치며 호탕하게 웃기도 하고 무릎 팍을 때리기도 하며 야단쳤다. 그 모양을 보고 답답했는지 소들도 집으로 돌아가자고 덕돌의 곁으로 몰려왔다.
그래도 혹달개가 담이 있어서 스적스적 다가와 집에 가자고 누워 있는 덕돌의 얼굴에 대고 입김을 푸푸 내쉬며 냄새를 맡았다. 그래도 안 되면 대가리를 하늘 공중에 쳐들고 “음메-” “음메 헉!” 하고 산정이 떠나갈듯이 영각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덕돌은 서산에 넘어간 해를 쳐다보며 일어나 소들을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부터 덕돌은 황혼녘으로 해 소들이 벌써 몰려오면 갈 때 됐구나 하고 책을 호주머니에 질러 넣고 집으로 돌아왔다.
빌려온 책을 다 보고 없을 때에는 자기가 조립한 반도체 라디오를 틀어놓고 북조선과 남조선의 방송을 가만히 도적질해 들었다. 어쩐지 연변인민방송이나 중국 방송은 혁명적 본보기극에서 “둥, 둥, 당, 창” 하며 부르는 경극 노래 소리 밖에 나지 않아 듣기 싫었다. 조선 방송이나 한국 방송을 가만히 들으면 아주 귀맛이 당겼다.
당시 한국 방송이나 조선 방송을 들으면 정치문제에 걸리기가 십상이었다. 허나 덕돌은 그런 방송에 끌려들어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부드럽고 경쾌한 노래 소리는 동질 민족의 미적감수가 같아 그런지 귀맛을 당겨 라디오 속의 가수들과 함께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고중을 졸업하고 광활한 천지에서 소 궁둥이를 치게 된 덕돌에게는 책과 라디오방송이 큰 위안으로 됐다. 책을 읽고 방송을 듣노라면 모든 고독과 적막함, 실망, 고민이 흐리터분한 하늘로 날아가고 마음이 후련하고 온 몸에 힘이 솟구쳤다.
그러나 그런 좋은 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날 흥수는 덕돌의 집에 찾아와 반도체 라디오를 빼앗아냈다. 그는 보름을 높이 틀어놓았다.
반도체 라디오에서는 북조선의 노래 소리가 왕왕 울렸다.
샘물터에 물을 길러 동이 이고 나갔더니
빨래하던 군인동무 슬금슬금 돌아앉네
그 솜씨 너무나도 서툴러서
부끄러워도 말 했지요
내가 빨아줄게요 내가 빨아줄게요
“이게 뭐야? 북조선 노래 아니게?”
흥수는 박죽코를 벌름거리며 눈을 뚝 부릅뜨더니 금방 밥숟가락을 놓은 상순과 덕돌을 번갈아 보면서 왜가리 목을 빼들고 호통쳤다.
“잘한다, 잘해! 패용천산에 날마다 올라가 외국 방송을 듣는다더구먼.”
흥수는 반도체 라디오를 쳐들어 보이면서 을러멨다.
“이건 네가 조립했다면서? 어떻게 외국 방송을 듣기 싶으면 반도체까지 다 조립해? 몰수야, 몰수!”
상순도 할 말이 없어 덕돌을 욕했다.
“뭐야? 소나 온전히 먹일 게지. 말썽을 일으켜?!”
덕돌은 그저 머리를 숙이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어서 치보 주임에게 잘 못했다고 하지 못하겠니?”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흥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반도체를 훌 들고 나가버렸다.
덕돌은 흥수를 쫓아나갔다.
"반도체 라디오는 가져가지 맙소. 내 어떻게 점심을 굶으면서 부속품을 사다 조립한 게라고 그러오?”
허나 흥수는 귀등으로도 들은 척 만 척 하면서 휑 하니 가버렸다.
“안 돼! 왈라카누(뭐 할려고 하나)? 가만 놔두든가 봐라!”
상순은 덕돌이 일을 칠까봐 뒤따라 나와 황급히 뛰어가 흥수의 손을 잡고 사정했다.
“이 치보, 한번만 사정하기요. 덕돌이 잘못했는데 내 교육하겠으니까. 투쟁대회나 비판대회는 그만 두오.”
“관둬! 당신 노서기라는 양반이 아들을 어떻게 교육했으면 적국의 방송까지 듣소? 남조선 방송을 누가 마음대로 들으라고 했어?”
흥수가 그렇게 비난사정해도 반도체 라디오를 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자고 할 때었다.
“서라!”
옆에 있던 덕돌이 로지심처럼 고함치며 웃통을 활 벗어버리며 뒤쫓아 갔다.
흥수가 우뢰 같은 고함소리에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덕돌이 세귀눈을 뚝 부릅뜨고 잡아먹을 상하고 덮쳐오는 것이었다.
“이놈 새끼, 치보한테 대들 테냐?!”
“반도체를 놔두고 가라!”
“이놈 새끼, 버릇없이 누구보고 야, 자냐?”
“반도체를 내려놓지 못하겠는가?!”
덕돌은 씽 덮쳐나가 반도체를 쥐여 당겼다. 흥수는 덕돌과 반도체를 잡고 밀고 닥치고 했다. 그 바람에 반도체 얇은 곽이 각이 툭 나갔다.
마사진 반도체를 보자 덕돌은 열이 후끈 올랐다.
“내 반도체를 배상하오!”
덕돌은 흥수의 멱살을 쥐고 마구 흔들었다. 그날 일을 포치 받으려고 상순이네 집 앞으로 숱한 사원들이 몰려오면서 구경했다.
흥수도 자존심을 세우면서 고함쳤다.
“네놈새끼, 감히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을 뜰 테냐? 대학에 영영 추천받을 거 같아?! 흥!”
“못가도 좋소. 반도체를 내놓소!”
덕돌은 흥수를 톡톡히 망신주려고 바자굽에 마구 떠밀었다.
“아이고, 뜨개 소 같은 놈, 두고 보자!”
흥수에게 버릇없이 구는 덕돌을 상순이 발길을 날려 궁둥이를 차 넘겼다.
“이 새끼야, 네 어찌 아버지 벌 되는 분에게 몹쓸 버릇이야? 사람 질을 못할 놈 새끼, 뜨개소가 왕이 될 거 같아? 어찌 힘으로 세상을 쥐락펴락하려고 드니? 내일부터 소를 몰지 말고 대전 일을 해라! 곡식 실이나 해라!”
말을 마치자 상순은 흥수를 부축하면서 “어떠오? 모질 상하지 않았소. 함께 위생소로 가기요.”라고 했다.
흥수는 오만상을 찌푸리다가 외까풀 눈을 가슴츠레 뜨고 덕돌을 노려보며 지분거렸다.
“이놈 새끼, 두고 보자. 네 놈 새끼 이 골 안에서 구더기처럼 썩어빠지지 않는가 봐라! 내일 투쟁대회를 하고 공사파출소에 잡아가겠어!”
허나 덕돌은 대수롭지 않게 두덜거리었다.
“마음대로 하오. 누가 두려워 할 거 같소?”
그날로 흥수는 민병들인 성욱이랑 응철이랑 상선이랑 끌고 덕돌을 투쟁하겠다고 데리러 왔다. 그런데 희극적인 장면이 벌어졌다.
당장 죽는다 만다 하던 해월이가 소문 듣고 덕돌이네 집으로 달려와 앞을 막아 나섰던 것이다.
“아버지! 그만 두십시오. 무슨 투쟁을 한다고 이래요?”
흥수는 해월을 밀어냈다.
“뭘 삐쳐?”
그때 해월은 흥수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아버지, 제발 덕돌을 살려 주십시오. 덕돌은 내 첫사랑입니다. 내 뱃 속에는 덕돌의 애가 있습니다.”
“뭐라고?”
흥수나 상순은 두 말할 것도 없고 덕돌은 그 뜻밖의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
“야, 이건 무슨 생 똥 같은 말이냐? 난 너를 좋아한 적도 없어!”
그 말에 해월은 일어나면서 절절한 눈길로 덕돌을 쳐다보았다.
“네 지난해 동삼에 우리 집에 오지 않았니? 그날부터 난 임신했어.”
“뭐라고?”
덕돌은 어이없어 혀를 홰홰 내돌렸다.
“생사람을 작작 잡아라! 병문안을 갔지? 언제 그랬니?”
허나 해월은 덕돌의 팔소매를 잡고 놓지 않았다.
“생떼를 쓰지 말라! 넌 내 낭군임이야.”
해월은 흥수의 팔소매를 잡고 몸까지 흔들면서 떼를 썼다.
“내 신랑감을 작작 투쟁하오. 그러잖으면 토성 아래 우물에 풀렁 뛰어들어 죽어버릴 거요. 덕성영감처럼! 알았지?”
흥수는 해월과 덕돌을 번갈아보더니 성욱이랑 돌아보면서 “너네 먼저 가. 내 먼저 알아봐야 할 게 있어.”라고 했다.
해월이 떠드는 바람에 흥수는 투쟁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동네 창피해 슬금슬금 자리를 떴다.
상순은 덕돌의 귀 쌈을 찰싹 갈겼다.
“이놈 새끼, 어서 우사에 가서 수레를 메워가지고 옥수수실이나 해라!”
덕돌은 아무 말도 못하고 수레를 메우러 갔다.
그때 해월은 상순의 팔소매를 잡고 집안에 들어가 통사정을 들이댔다.
“덕돌이 아버지, 내 이 집 며느리 하면 안 됩둥?”
상순은 해월의 불룩한 배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래 배 속의 애는 정말 덕돌이 거냐?”
해월은 캐득캐득 웃어댔다.
“아니. 난 장충국이한테 시집갔습니다. 그 늙은 영감이 그래도 노총각이어서 힘도 생각 밖으로 잘 쓰던데요.”
상순은 어이없어 정신이 나간 해월을 집에서 내쫓았다.
“가라, 가. 왜 우리 덕돌을 물어먹니? 하긴 잘한다. 너 아비는 우리 덕돌을 투쟁하겠다고 떠들어대고. 딸은 배 속에 애를 만들었다고 생사람을 잡아먹고. 흥! 퉤!”
해월은 어처구니없는 말을 늘여놓으면서 바깥으로 밀려나갔다.
“내 덕돌의 애를 가졌다고 말하지 않으면 우리 아빠 덕돌을 투쟁하지 않고 가만 놔둘 거 같았습둥?”
그제야 상순은 모든 것을 알았다. 해월은 충국에게 짓밟혀 확실히 정신이 나갔다. 허나 어떤 때에는 뜻밖의 어물 넙적한 소리를 했다. 좌우간 해월이 덕돌을 구하기도 해서 그리 밉지는 않았다.
한편 덕돌은 혹달개를 말뚝에서 풀어내 수레를 메워가지고 몰고 장개골 안으로 옥수수단을 실으러 갔다. 그런데 앞에서 송선이 수레를 몰고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주머니, 왜 돼지죽을 먹이지 않고 여기 왔습니까?”
송선은 주위를 뒤돌아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보자
“어쩌겠소? 이 치보가 나보고 돼지죽을 먹이는 일이 편안하다고 먹이지 말라는 거.” 하고 볼멘소리를 했다. 그녀는 머리를 또 돌려 물었다.
“저는 어째 소를 몰지 않고 여기 왔소?”
덕돌은 어처구니없어 혀를 글끌 찼다.
“아주머니나 내나 매한가집니다. 세상에 소몰이나 돼지치기를 좋아 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들은 이말 저말 하면서 옥수수단을 수레에 싣고 바 줄로 꽁꽁 동여맸다. 그런데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금방 실었을 때는 괜찮았는데 어설프게 실은 옥수수단이 조금 덜렁 거리니 수레 위에서 옥수수단이 수레채 옆으로 여기저기 괴나오기 시작했다.
“탈곡장까지만 견디면 되겠는데.”
덕돌이 꾀지는 수레 위 옥수수단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었다.
뒤에서 수레를 몰며 따라오던 송선은 “그래도 제 덕분에 처음 수레에 옥수수를 다 실어보았소.”라고 웃고 떠들었다.
가파른 내리막으로 오자 혹달개는 겁을 집어 먹고 눈을 부릅뜨고 주춤거렸다. 그보다도 송선은 내리막을 보고 감히 수레를 몰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주머니, 여기 소고삐를 딱 쥐고 서 있으십시오. 내 다시 와서 함께 몰고 내려갑시다.”
“양, 주의하오.”
“예.”
덕돌은 소고삐를 바짝 틀어쥐어 당기며 수레 멍예를 팔꿈치로 꽉 눌렀다.
“이라. 혹달개야, 천천히 내려가자. 염, 염, 염.”
혹달개는 자꾸 옆의 덕돌을 보며 소금을 주겠는가고 주둥이를 하 벌리고 침을 흘리며 천천히 내리막을 내려갔다.
덕돌이 “와, 와, 와.”하며 천천히 내리막을 용케도 내려갔다.
평소에 그래도 아버지를 따라 땔나무를 실으러 다녔던 건데 덕을 보았다.
그때까지 송선은 고삐를 쥐고 암소 대가리 털을 쓰다듬어 주면서 서있었다.
덕돌은 송선의 수레마저 몰고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암소여서 내리막을 받지 못해 마구 달려 내려갔다.
“와, 와,”
“염, 염, 와, 와, 와!”
덕돌이 아무리 소리쳐도 암소는 네 굽을 안고 아래로 달렸다. 송선이 뒤에서 아무리 가냘픈 손으로 수레를 뒤로 잡아당기며 끌려 내려갔지만 허사였다.
“활 놓소. 위험하오.”
덕돌은 수레멍지를 부여안고 로지심 같은 힘으로 뒤로 뻗쳤지만 내리 달리기 시작한 수레를 막을 수 없었다. 굽인돌이에서 한쪽 수레바퀴가 빗물 곬에 빠지더니 수레가 허망 번져졌다. 다행히 덕돌과 송선은 상하지 않고 암소도 상하지 않았다.
소수레는 해뜩 번져 수레바퀴가 빙그르 돌아갔다.
덕돌과 송선은 둘 다 길 옆에 풀렁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걸 어쩌오?”
송선은 울상이 돼 땅바닥을 쳤다.
그래도 스무 살 밖에 안 되는 덕돌이 사내느라고 위안했다.
“괜찮습니다. 다시 실으면 됩니다.”
덕돌은 번진 수레에 다가가더니 웃통을 벗어버리는 것이었다. “어쩌자고 그러오?”
송선은 털이 부숭부숭 난 덕돌의 쩍 벌어진 가슴을 보고 놀래며 물었다.
“근심 마십시오.”
덕돌은 가슴을 쭉 뻗고 산 공기를 한껏 심호흡을 하더니 수레바퀴를 쥐고 어깨를 들이댔다.
“나도 밀라오? 어찌 혼자 세우겠소? 옥수수단을 부리고 세울까?”
옥수수단을 쥐는 송선을 보고 “저쪽으로 가 구경하십시오.”라고 했다.
그는 용처럼 꿈틀거리는 두 팔로 수레를 잡고 어깨로 들이대더니 “얏!” 하고 고함치며 떠밀었다.
옥수수단을 실은 수레가 움찔움찔 하더니 드디어 서서히 한쪽으로 번져지기 시작했다. 옆에서 두 손을 잡고 긴장하게 구경하던 송선은 경악하고 말았다.
“아니, 힘이 어쩜 이리도 세오?”
산더미 같은 수레가 옥수수단이 마구 괴나오면서 되 번지어져 세워졌다.
덕돌은 얼굴이 지지벌개 씩씩거리며 욕지거리를 했다.
“제길, 젖은 옥수수를 베서 실어들이라고 할 게 뭐야? 마른 담 실어들이면 사람이나 소나 다 쉽겠는데. 흥!”
덕돌은 수레를 되세워놓고 숨을 돌리지도 않고 옥수수를 수레에 실었다. 괴물 같은 덕돌의 힘에 밭으로 나가던 사원들의 눈이 떼꾼해졌다.
“진짜 로지심이구먼.”
“허참. 우둔한 게 범을 잡는다더니.”
“우리 대대에 괴물이 생겼소. 쯧쯧.”
사원들은 혀를 내둘렀다.
송선과 덕돌은 암소가 끌지 못할 까봐 옥수수단을 채 싣지 않고 혹달개가 끄는 수레에 더 싣고 탈곡장으로 몰고 떠나갔다.
덕돌과 송선은 그 다음번에는 수레에 옥수수단을 서너 단 적게 싣고 내리막을 내려왔다. 그것도 덕돌이 먼저 자기 수레를 몰고 내려온 후 혹달개를 풀어 몰고 올라가 송선의 수레에 다시 메워 몰고 내려왔다. 그러다나니 일축이 별로 나지 않았다.
말을 들을까봐 송선도 덕돌이 모는 요령을 보고 차차 앞에서 수레를 몰기 시작하고 뒤에서 덕돌이 수레꽁지를 쥐어 당기면서 가파른 내리막을 내려왔다.
기실 흥수는 송선을 징벌하기 위해, 상순은 덕돌을 혼내려고 고의적으로 옥수수 싣기를 시켰던 것이다.
그날 저녁에 흥수는 이쯤하면 송선이 혼났으리라고 속구구를 하면서 송선 네 집으로 기신기신 기어들었다.
“왜 왔어요? 어서 나가세요.”
송선은 치뜬 눈으로 박죽코마저 지지벌개진 흥수를 쏘아보았다.
“애들은 어데 갔소?”
“시내에 책을 사러 갔다가 오지 않았어요. 이제 인차 올 거예요.”
흥수는 애들이 없는 눈치이자 신을 벗고 구들에 올라섰다.
“헤헤. 어떻소. 옥수수 싣기를 하자니 힘들지? 헤헤헤.”
“…”
“뭐랬어? 내 말을 고분고분 듣고 위생소에 들어앉아 있었더라면 얼마나 편안했겠어? 에참, 권주는 안 마시고 벌주를 마시다니. 호박 쓰고 돼지 굴에 들어갈거노(거나)?”
흥수는 머리 숙이고 뒤로 비실비실 물러서는 송선을 밀어 붙이면서 벽 밑에까지 다가섰다.
“그래도 목욕받기만 낫습니다.”
흥수는 흘겨보는 송선의 예쁜 모습을 보고 끓어오르는 정욕으로 온 몸이 전율할 지경이었다. 가시 돋힌 장미꽃 같은 미녀의 모습은 희미한 전등불 아래 이름 못할 정욕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주먹으로 지지벌개진 박죽코를 쓱 닦으며 다가섰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어. 내 말 고분고분 들어.”
흥수가 와락 끌어안으려는 순간 송선이 찰싹 귀 쌈을 갈겼다.
“짐승 같은 놈아, 네가 다 당원이고 치보 주임이냐? 짐승 보다 못한 놈 새끼! 사람을 어떻게 보고 이 지랄이야? 미친 놈아!”
흥수는 창피를 당하고 주춤 물러섰다.
이윽고 방바닥에 내려가 신을 신으면서 중얼거렸다.
“어디 두고 보자. 언제까지 뻗대는가? 네년이 죽어 물귀신이 돼도 이 골 안을 벗어나는가 두고 보랑께(보라는데)? 흥!”
허나 그의 등 뒤에서는 “퉤!” 하고 침을 뱉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흥수가 송선의 집에서 맥없이 씩씩거리며 나와 울안을 나설 때었다.
집 안에서 매서운 소리가 귀전을 귀찮게 때렸다.
“개 같은 놈, 나를 어떻게 보고, 미친 놈, 윤희를 짓밟고서도 모자라 나를 지껄여? 어림도 없어!”
저쪽에서 송선의 두 딸애가 공책이랑 사들고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흥수는 닭을 뒤쫓다가 지붕을 쳐다보는 개 격이 돼 툴툴거리며 어떻게 송선에게 보복할 것인가를 궁리하며 함흥촌으로 돌아갔다.
어둠이 무시무시하게 깔린 한족묘지꺼리에서는 마른 쑥대들이 을씨년스럽게 가을바람에 술렁거리고 있었다.
언제면 암흑한 이 세월이 끝날까?
저자 주: 지금까지 김장혁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총7권)의 제6권까지 감상한 여러분께 경의를 드립니다.
이제부터 계속해 제7권을 련재해드리겠습니다. 저의 홍색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의 향연을 계속 만끽할 것을 기대합니다.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7권)
제29장 천지개벽
1. 파란만장한 인생길
깜깜한 밤하늘에 은하수가 비끼고 삼태성이 반짝이었다. 아기별들이 초봄의 밤바람에 스치어 숯불처럼 점점 밝아지며 반짝이었다. 지지리 먹장구름으로 뒤덮인 채 흐리터분하던 밤하늘에 어쩌다가 구름이 하나하나 가시어지고 별들이 하나 둘 드러났다. 허나 별빛으로 몇 천 킬로미터 두께로 두꺼운 어둠이 깔린 밤하늘을 밝히기는 어림도 없었다. 허나 끝내 먼동이 푸름 해지기 시작했다. 어둠층이 기적적으로 점차 연해지었다. 푸름 해지는 동녘의 하늘과 구불구불한 코끼리 잔등 같은 산정의 윤곽이 그림처럼 명암이 분명해지면서 진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지의 삼라만상이 암흑 속에서 기지개를 켜더니 푸름 해지는 하늘아래 삼라만상을 하나하나 드러내려고 모질음을 썼다.
“꼬끼오~오~”
어디선가 새벽을 알리는 수탉의 울음소리가 거세찬 계급투쟁의 정치파도가 휩쓸고 지나가 피곤한 나머지 잠시 고요히 잠들어버린 함흥대대 마을의 적막을 깨뜨렸다.
동녘하늘이 각일각 환해지더니 노르스름한 구름들이 점점 붉어지었다. 소나무가 우거진 계수동의 구불구불한 능선 위로 붉은 태양이 불끈 솟아오르면서 금빛 몇 가닥을 뿌렸다. 새날이 밝아오기 시작하는 시각이었다.
지지리 숨 막힐듯이 대지의 만물을 내리누르던 암흑의 장막이 기적적으로 훌렁 걷히었다. 아직도 잔설이 듬성듬성 뒤덮인 소소리 높고 가파른 절벽으로 장식된 패용천산과 칼산이 름름한 원 모습을 되 찾아가고 패용천산과 칼산 사이의 돌 언제를 쌓은 다락밭과 과수원, 양봉장과 인삼 장, 그리고 조개덕의 벽돌공장과 함흥촌의 토성 안의 고래 등 같은 대대 새 청사가 한눈에 안겨왔다. 조개덕과 함흥촌, 계수동의 게딱지처럼 거무칙칙하고 올망졸망한 초가집 무리 속에 들어앉은 붉은 벽돌집이 쌀의 티처럼 드문드문 드러났다. 그 벽돌집은 상순이가 사원들을 조직해 벽돌공장을 지은 후 새 농촌을 건설하면서 한 해 동안에 가난한 사원들에게 지어준 벽돌집들이었다.
겨우내 꽁꽁 석자두께로 얼었던 태평강의 얼음도 뜨드득 갈라지고 녹으면서 얼음덩이 사이에서 봄날의 이른 아침을 알리는 봄 강물이 조잘조잘 노래하며 꽃구름송이들을 싣고 동으로 유유히 흘러갔다.
여기저기 굴뚝에서 밥을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면서 시골 마을은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덕돌은 아침밥술을 놓기 바쁘게 멜대를 메고 가슴을 쭉 뻗치고 태평강 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디 허 대장이 얼마나 힘이 세기에 나를 헐뜯는가 보자. 뭐 나를 뼈대를 아껴서 일을 건성건성 한다고? 제기랄 당신 뼈대는 어느 만한가 두고 보자.”
그는 윽윽 벼르면서 태평강 언제를 쌓는 공지로 나갔다.
사실 덕돌은 지난해 초가을까지 소몰이를 하면서 책을 보거나 라디오를 듣다나니 소가 옥수수를 먹였다는 이유로 상순에게 한바탕 욕을 먹고 대전 일을 하기 시작했다.
덕돌은 아버지와 허 동원이 시키는대로 수걱수걱 농사일을 했다. 가을에 소수레로 벼를 탈곡장에 실어들이었다. 벼실이 끝나자 탈곡장에 가서 벼단을 메 탈곡기 옆에 가져가고 탈곡기에서 튕겨 나온 짚단을 메고 짚무지를 쌓는데 날라 갔다. 그는 힘이 셌기에 단번에 32 단씩 날랐다. 벼 짚단은 괜찮은데 벼 알이 늘어지게 달린 벼 짚단을 손아귀에 더 쥘 자리 없을 정도로 틀어쥐어 둘러메고 씨엉씨엉 날랐다. 아무도 한두 번은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허나 온 종일, 아니, 날마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여 벼단을 나르는 일을 성욱과 덕돌이 둘이 하던 것을 덕돌이 혼자 날랐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르던 벼 짚마저 혼자 달아 다니면서 날랐다.
그런데도 “대채평공”을 할 때에는 갓 고중을 졸업하고 나온 풋내기농민이라고 공은 적게 매겨주었다.
이른바 “대채평공”을 할 때면 매개 사원들이 일 한 것을 하나하나 사원대회에서 토론해서 공을 기입하는 형식이었다. 사원들은 그 공에 따라 년 말 총화 때 돈을 타게 됐기에 공수이자 돈이었다.
덕돌은 입술이 따발을 걸 지경이 됐다.
“허 대장, 둘이 하던 일을 했는데 왜서 다른 사람들보다 공을 더 적게 줍니까?”
허 대장은 덕돌의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거들떠도 보지 않고 “그 다음 사람을 평합시다.”라고 했다.
덕돌은 벌떡 일어나 허동원 대장을 쏘아보며 “어째 사람의 말이 들리지 않습니까? 내걸 다시 평해줍소. 내 뼈 빠지게 둘의 몫을 일했는데 어째 남보다도 공을 적게 줍니까?”라고 직격탄을 날리었다.
그러자 허동원은 쌍까풀눈을 부릅뜨고 “넌 풋내기다. 뼈대를 아껴서 건성건성 일해 가지고 공을 더 타겠다고?”라고 맞불질 했다.
자존심이 작두날처럼 시퍼런 덕돌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뭐랍니까? 아무리 풋내기라도 그렇지. 내가 언제 뼈대를 아꼈습니까? 여기 숱한 사원들이 보지 않았습니까?”
사원들은 모두 “덕돌이 힘이야 세지.”라고 하는가 하면 “일이야 많이 했지.”라고 했다.
그 바람에 허동원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야, 빈농들의 재교육을 잘 받으려면 공수를 따지지 말고 힘든 일, 궂은일을 다 해야 한다. 일은 많이 하고 말은 적게 해라. 넌 힘은 셌지만 일을 한 게 질이 차하다, 차해. 지난해 가을에 옥수수를 실어들일 때 송선의 수레를 몰다가 희뜩 번져 하마터면 암소를 죽일 번 하지 않았니? 너를 팔아도 그 암소 한 마리를 사지 못한다.”
그 말에 덕돌은 억이 막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상순은 덕돌을 쏘아보며 욕했다.
“이놈 새끼, 힘만 세면 왕이 되겠니? 허 대장 말이 옳다. 넌 힘은 세지만 아직 농사일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잔말 말고 농사일이나 잘 배워라.”
그제야 덕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둘째누나 은숙마저 덕돌을 나무랐다.
“그게 무슨 태도냐? 넌 확실히 건성건성 일하는 게 보인다. 허 대장이 공수를 얼마 주면 얼마 가질 것이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니?”
(남이 말해도 모르겠는데 자기 누나까지 그렇게 말하다니?)
덕돌은 어이없어 더 말이 나가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코 등으로 저도 몰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었다.
그는 뜨거운 눈물을 손등을 씻으면서 회의실문을 박차고 바깥으로 나와 버렸다.
“허 대장, 어디 두고 봅시다. 당신 아들 허춘이 이제 농촌에 돌아와도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뭐? 뼈대를 아껴 건성건성 일했다고? 원, 사람이 억울해서 어떻게 살아?”
덕돌은 허대장의 아들 허춘과 앞뒤 집에서 사는 딱 친구였다. 그는 두 살 지하인 허춘을 친동생처럼 아끼고 역성을 들어주었다.
한번은 덕돌이 낮잠을 자는데 계수동의 애에게 얻어맞고 허춘이 찾아왔다.
“형님, 계수동의 호일과 붙었는데 맞았소. 형님, 한번 혼내주오.”
“뭐라고? 누가 감히 동생을 건드려?”
덕돌은 벌떡 일어났다.
“가서 그 놈 새끼를 꼬여 저기 태평강 가에 데리고 오너라. ”
덕돌은 그림자차럼 붙어 다니던 동생 허춘을 때렸다는 말에 승치 해주려고 나섰던 것이다.
덕돌은 함께 나가다가 주춤 멈춰서 머리를 숙이고 뭔가 궁리하더니 “너 먼저 가라. 내 목욕하는 척 하면서 기다렸다가 갈게. 그 새끼를 데리고 태평강 가에 가서 붙어 싸우는 척해라. 내 뒤 따라 가서 그 놈 새끼를 없애치우겠다.”
형에게서 힘을 얻은 허춘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고 씩씨거리며 마을 서남쪽에 있는 태평강 언제를 가로 막아서 호일이 5.7(함흥)중학교로 오기를 기다렸다.
덕돌은 뒤에서 스적스적 태평강에 가서 목욕하는 척 하면서 언제 쪽을 노려보았다.
이윽고 오후 한시가 가까올 때 저쪽에서 허춘이 호일을 꾀여 이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강둑 위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지나갈 때에도 덕돌은 속으로 어디 혼 나봐라 하면서도 능청스레 손으로 강물을 퍼서 털이 부숭부숭 난 가슴에 끼얹으면서 못 본척했다.
그들이 떠나간 지 반분도 안 돼 덕돌은 대돌 물에서 부랴부랴 나가 옷을 주섬주섬 주어 입으면서 호일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덕돌이 뒤따라 가보니 허춘은 호일과 맞붙어 싸우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뚱뚱한 허춘은 호일을 몰아세우며 드센 공격을 퍼부었다. 허나 호일의 몸놀림이 어찌나 날랜지 허춘은 점점 이리저리 몸을 피하다가도 반격을 가했다. 호일은 공격을 들이대다가도 날래게 피하고 피하다가도 주먹질에 발길질까지 해댔다. 허춘은 힘이 세고 주먹질도 잘 했지만 몸놀림이 호일을 따르지 못해 얻어맞기 시작했다. 자칫하면 허춘이 얻어맞아 쓰러질 수도 있었다.
덕돌은 황급히 나가면서 고함부터 쳤다.
“야, 누구 앞에서 감히 주먹질이냐?”
호일은 사자와도 같이 노호하는 덕돌을 보더니 주춤 멈춰서며 주먹을 내리웠다.
“형님…”
어느 결에 덕돌은 주먹을 날려 호일의 턱주가리를 턱 쳤다.
“엇!”
덕돌은 호일의 멱살을 틀어쥐더니 헤딩을 연속 들이댔다. 한번 헤딩에 호일은 얼이 빠지고 두 번째 헤딩에 호일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헌데 이게 뭐야?
호일은 쓰러져 눈알이 뒤로 마구 뒤집히더니 숨도 바로 쉬지 못했다.
깜짝 놀란 덕돌은 “허춘아, 모자에 물을 담아도 쳐라!” 하고 소리쳤다.
저쪽에서 구경하던 양훈과 득만도 달려와 모자에 호일의 얼굴에 물을 쳤지만 정신을 차리지 모하는 것이었다.
덕돌은 살인이라도 내지 않았는가 겁을 집어먹었다.
그는 황급히 허춘을 보고 “야, 네가 호일을 업어 너네 집에 가져다 머리에 장이랑 붙여주고 간장물이라도 타서 먹여라!” 라고 했다.
두 살 지하인 허춘도 겁을 집어먹고 덕돌이 시킨 대로 했다.
허춘이 호일을 업고 떠나가자 덕돌은 과수원으로 가는 척 하다가 아무도 따라오지 않자 부랴부랴 패용천산 쪽으로 도망쳤다.
(만약 호일이 죽으면 어쩌지? 파출소에 가서 자수할까? 아니야, 자수해도 총살을 면치 못할 거야. 그럼 어떡하지?)
순간 피뜩 장씨 모녀간을 업신여긴 부랑배를 혼줄 내주려다가 때려죽인 로지심이 핍박에 의해 양산박에 오른 일이 피뜩 떠올랐다.
(개새끼들, 만약 살인죄를 쓰게 되면 도망쳐버리자. 교하로 달아날까? 그래 믿을 게 교하 큰누나와 셋째누나 밖에 있니?)
허나 덕돌은 인차 생각을 바꿨다.
(안 돼, 누나한테 연루되게 해선 안 된다. 그럼 어디로 달아나? 그는 겹겹이 늘어선 산 등성이들을 둘러보았다. 장백산 원시림에 숨어 원숭이처럼 살더라도 살아야 한다. 우리 집에는 내가 외동아들인데 내가 죽으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쩌겠니?)
덕돌은 이쯤 마음을 먹자 손에 쇠붙이 하나 없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래 강도질을 하면서 살자 해도 비수가 있어야지.)
덕돌은 패용천산 벼랑 위에 납작 엎드려 한 1리 떨어진 자기 뒤 집 허춘이네 집의 동정을 살폈다.
“제발 호일이가 잘못되지 말아야겠는데.”
덕돌은 손에 땀을 그러쥐고 엎디어 중얼거리며 속을 바질바질 태웠다. 허나 두식경이나 눈 뿌리 빠지게 동정을 살폈지만 허춘이네 집에서는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웬 일일까? 혹시 호일이 죽었을까? 아니면 기적적으로 살아났을까?)
덕돌은 그제야 너무 세게 헤딩한 것을 후회했다. 허나 친형제나 다름없는 허춘의 역성을 들어 싸운 건 하나도 후회하지 않았다. “수호전”을 읽으면서 무송이나 로지심, 이규를 비롯한 양산박 호한들이 의리를 위해 재물을 아끼지 않고 목숨까지 바쳐 싸운 이야기를 많이 본 후 인생의 좌우명을 새롭게 정한 그였다.
덕돌은 슬금슬금 산에서 내려 옥수수 밭과 수수 밭을 꿰질러 가 허춘 네 집 구새 목에까지 접근해가 집안의 동정을 살폈다.
(그런데 이게 뭐야?)
윗방에서 호일의 목소리가 들리었다.
“허춘아, 너 어찌 이럴 수 있니? 나하고 싸워 안 되니 어쩜 도깨비 같은 덕돌을 불러다 나를 치니?”
(살았구나. 호일이 죽지 않았구나.)
덕돌은 기뻤다.
순간 먹었던 모진 마음의 탕개가 풀리면서 구새 목에 스르르 물앉았다.
이윽고 덕돌은 구새 목에서 뒤로 슬금슬금 물러섰다.
그는 허춘 네 집 서쪽에서 술렁대는 수수 밭으로 슬금슬금 숨어들었다.
“뻐꾹, 뻐꾹, 뻑뻑꾹.”
허춘과 늘 써온 호출암호를 보냈다.
이윽고 허춘이 부랴부랴 수수 밭으로 들어와 두리번거렸다.
덕돌은 “여기 있다. 여기!” 하고 소리치며 손을 저었다.
허춘은 달아 왔다.
“형님, 아무 일도 없소.”
덕돌은 허춘의 두 손을 맞잡고 사위를 둘러 보고나서 나직이 물었다.
“그래 언제 정신을 차렸니?”
허춘은 “우리 집에 업어온 후 우리 엄마하고 내 형님 말처럼 된장도 머리에 붙여주고 간장 물도 타서 먹였소. 그랬더니 한참 있다가 정신을 차리지 않겠소. 이젠 일없소. 근심하지 마오.”라고 했다.
덕돌은 그래도 혹시나 해 수수밭에 숨어 있으면서 동정을 살피다가 호일이 흰 천을 머리에 감은 채 허춘 네 집에서 나가는 것을 보고서야 안도의 숨을 쉬었다.
허나 사달이 났다.
저녁에 호일이네 엄마가 덕돌의 집에 찾아와 구들바닥을 치면서 자기 아들을 때려 눕혔는데 치료비를 내라고 야단쳤다.
“치료비를 내지 않으면 놔두는가 보자! 집을 팔아서라도 내라.”
덕돌은 “내 잘못했소. 치료비를 내겠소.”라고 했다.
그러자 호일의 엄마는 “집을 팔아서 내라.”라고 했다.
“한 백원 내면 안 됩니까?”라고 했다.
“어림도 없다. 이 집을 팔면 한 5백원 받겠지. 5백원을 내라.”
“무슨 치료가 그렇게 비싸답니까?”
호일이 엄마가 한바탕 야단치고 가자 상순은 덕돌의 귀 쌈을 찰싹 갈겼다.
“이 뜨개쇠처럼 우둔한 놈 새끼야. 사람을 어떻게 떴으면 정신을 잃게 만들었니? 네놈 새끼 혼자 벌어서 치료비를 내라.”
덕돌은 얼얼한 뺨을 매만지면서 할 말이 없어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호일의 엄마가 그러는 건 이해됐다. 자기 아들이 맞아 정신까지 잃었으니까.
허나 덕돌은 허춘의 엄마의 배신행실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는 호일이네가 치료비를 내라고 하자 온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이런 여론을 조성했던 것이다.
“우리 허춘은 싸울줄 모르오. 호일에게 맞으면 맞았지 그렇게 정신 잃게 때릴 애가 아니오. 다 덕돌이 뜨개쇠처럼 떠서 정신 잃었다니까. 우리 집에서 무슨 치료비를 물겠소.”
빚을 진 놈은 살려줘도 정을 버린 놈은 살려 줄 수 없었다.
덕돌은 배신감을 느끼며 다시는 의리심도 양심도 없는 허춘의 어머니와 같은 집 아들의 역성을 들지 않으리라고 마음먹었다.
덕돌은 허춘을 도와주고 혼자 치료비를 껴안게 됐다. 그리하여 첫해에 농촌에 돌아와 농사일을 해 번 돈 125원을 손목시계를 사자던 돈을 주기로 했다. 하여 시내 공안국에서 일하는 5촌 이모부 강운룡이네 집에 가져다 맡긴 걸 찾아와 배상하지 않으면 안됐다.
덕돌은 손목시계를 사자던 돈을 찾으러 이모네 집으로 갔다. 작은 호수 옆으로 해 고급관원들의 집이 즐비하게 늘어섰고 그 옆으로 해 공안국 형사과에서 일하는 강운룡의 집이 있었다.
강운룡은 원래 형사과의 수사 일군으로 있다가 반란 파 두목 김용만이 공안국 국장으로 온 후 피해를 입어 교통과에 전근해 교통민경으로 일했다. 허나 시내에서 형사사건이 너무 많이 발생해 황종연과 같은 형사수사에 까막눈인 파출소 소장이나 믿고서는 사건을 해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김용만은 별 수 없어 실무파 수사능수 강운룡을 형사과 과장으로 임명하지 않으면 안됐다.
덕돌이 집 문을 떼고 들어서자 열대여섯 살 되는 향화와 열서너 살 되는 강철이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빠-”
“형님이 왔구나.”
덕돌은 동생네를 한 아름에 꽉 껴안고 기뻐 싱글벙글 웃었다. 번마다 반도체라디오 부속품을 사러 시내에 올 때마다 그는 애들과 한바탕 뛰놀아 꽤나 정이 붙었던 것이다.
이모 최순옥은 덕돌이 손목시계를 사자던 돈을 불시에 찾아가려고 하자 이상해 했다.
“집에 무슨 일이 생겼니?”
이모 최순옥은 점심상을 차려 덕돌을 극진히 대하면서 “불시에 이 돈을 찾아 뭘 하겠니?” 하고 물으며 쌍까풀눈에 이상한 눈빛이 반짝였다.
“내가 일을 쳤습니다.”
덕돌은 머리를 숙이며 점심 숟가락을 들었다.
그에게서 사건의 자초지종을 다 들은 강운룡은 술잔을 들어 덕돌에게 권했다.
“쳇, 근심하지 말라. 사내들이란 싸울 때도 있지 뭐. 그래도 나는 공안국 국장을 한 적이 있는 너네 아버지와 말이 통한다. 이전에 내가 약혼해서 너 이모를 데리고 너 네 집에 놀러 갔다. 초가집에 죽물도 겨우 마시면서도 네 엄마와 아버지는 나를 하나라도 더 대접하려고 맴돌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너도 아마 아버지를 닮은 모양이구나. 꽤나 힘도 쓰는 모양이지?”라고 했다.
그러나 순옥 이모는 “남을 때려 치료비를 물어야 되는데 싸우라고 부추기오? 쯧쯧쯧.”라고 남편한테 눈을 흘기었다.
그러자 강운룡은 “치료비는 무슨 치료비 그렇게 많이 든다니? 달라는 대로 다 줄 필요 없다. 세상에 법도 없다니?”하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순옥 이모는 “그래도 남을 정신 잃게 때렸으니 얼마간이라도 줘야 입을 막지. 괜히 부스럼을 긁어서 혹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강운룡은 “물론 치안 죄를 물으면 15일 구류될 수도 있다. 심중히 고려하는 건 옳은 거 같다. 영양이나 보충하라고 한 20원 주면 될 거 같다. 만약 무슨 일이 있으면 내게 알려라. 파출소에서도 마음대로 치료비를 안기지 못한다.”
덕돌은 이모부의 말에 힘을 입어 치료비로 20원만 찾고 100원을 주고 상해표 손목시계를 사 차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번에 호일의 어머니가 와서 야단치자 치료비로 20원을 주었다.
“호일을 때려놔서 잘 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호일의 엄마가 5원짜리 돈 넉 장을 쥐어뿌리며 야단쳤다.
“우리 귀한 아들을 때려 정신을 잃게 하고서도 요거 밖에 안 주고 어디 보자. 내 너를 망치로 쳐서 정신 잃게 하고 돈 20원을 줄게.”
“아무 소리나 하지 말고 줄 때 가지고 순순히 가시오. 뭐나 법이 있지 달라는 대로 다 줄 거 같습니까?”
덕돌은 돈 넉 장을 주어 호일의 어머니 호주머니에 넣어 주면서 희죽이 웃었다.
“누가 웃자니? 누굴 얼리려고?”
그러면서도 호일의 엄마는 매 값을 빼서 던지지는 않았다.
덕돌은 아무 일도 없은 듯이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잔등에서 호일의 엄마 욕설이 들렸다. 허나 단돈 20원 받아서인지 욕하는 소리가 이전보다 낮아진 감이 들었다.
(저래서 배속의 애도 돈을 보면 손을 내민다고 하는 모양이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호일은 황승연의 6촌 동생이었던 것이다. 황승연은 뒤에서 학교 혁명위원회 명의와 대대 혁명위원회 명의로 덕돌을 치안 죄로 파출소에 고소했고 생산대에서 민병들을 동원해 투쟁하라고 지시했다. 공사 혁명위원회 주임 겸 파출소 소장으로 있는 황종연은 민경들을 파견해 덕돌을 잡아다 구류소에 치안구류하려고 들었다.
눈치 챈 덕돌은 아무에게도 온다간다는 말도 없이 마을에서 사라져버렸다.
황급해난 상순은 공안국의 사촌동서 강운룡과 부국장 김창남한테 가서 자초지종을 말하고 한번만 용서해달라고 통사정을 들이댔다. 그 덕에 파출소에서 감히 덕돌을 잡자고 날뛰지 못했다. 생산 대에서도 처음에는 집체호 애들이 비판하려다가 정치대장에 노지부 서기인 상순의 얼굴을 봐서 그만두게 됐던 것이다. 이전에도 상순은 상지민과 수호 그리고 억울하게 위안부, “기생”, “반역자”로 억울하게 몰린 마반산집 뽕녀 할머니 등을 감옥에서 꺼낸 적이 있었다…
(제 아들이 맞는다고 역성을 들어 줬는데 배은망덕한 허 대장은 대채평공 할 때 날 공수를 적게 줘? 뭐 뼈대를 아껴 건성건성 일한다고? 어디 네놈의 뼈다귀는 얼마나 든든한가 보자.)
덕돌은 멜대를 메고 태평강 가에 가자마자 어느 돌을 함께 메면 허동원 대장을 혼내겠는가 둘러보았다.
그때 떡돌 같은 너럭바위돌이 눈에 피뜩 띠었다.
(그렇지, 저걸 메자.)
덕돌이 이를 갈며 별렀지만 허동원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대장이노라고 우쭐거려?”
(지난겨울에 둼을 끌 때도 그렇지. 내가 얻어놓은 남포로 둼 무지를 폭파해 껐는데. 뭘 뼈대를 아껴서 남포질을 했다고? 내 말이 틀린 게 뭔가? 둼이 꽝꽝 언 겨울에 둼을 끄지 말고 봄에 녹으면 수레에 실어내가면 얼마나 쉬운가? 온 동삼 할 일이 없어 언 둼을 끈단 말인가? 공수나 올렸지. 그 말을 했다고 나를 보고 뭐, 개뿔도 모르면서 뭐나 아는 척 한다고?)
덕돌은 생각할수록 밸이 났다.
(내가 둼을 끄다가 쉼 시간에 책을 본 게 또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뭐 일하기 싫어한다지? 또 농촌에 뿌리박고 빈농들의 재교육을 착실히 받으려 하지 않고 농촌을 벗어날 궁리만 한다고? 그럼 어떻단 말인가? 남보다 두 배씩이나 둼을 껐는데 무슨 할 말이 있단 말인가? 쳇, 쓸데없는 일을 온 동삼 하기보다 어떤가? 대채전이고 뭐고 하면서 평평한 논밭을 온 동삼 꺼서 쓸데없는 홈채기를 만들어 다락 밭으로 만드는 멍청이들 같으니. 정말 웃긴다. 대대 혁명위원회 흥수 영감의 말이면 다 꾸벅꾸벅 듣는 멍청이 같은 게. 꺼 놓은 언 논두렁 토막도 남들이 하날 멜 때 난 네 개씩이나 멨어. 그래도 내가 뼈대를 아낀다고? ‘4인무리’를 짓 부신 지도 반년이 다 돼가건만 아직도 문화대혁명의 여독이 있단 말인가? 이 치보와 짜고 들어 송선 아줌마를 아직도 투쟁하면서 여자 몸으로 떡함지 같은 돌을 메라고? 힘이 세면 오늘 나와 함께 메 보잔 말이오.)
덕돌은 사실 보름 전에 송선 아줌마 멜대를 빼앗아 쥐고 대신 메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이때 저쪽에서 허동원 생산대장이랑 정치대장 상순이랑 송선 아줌마랑 하나 둘 태평강으로 나오고 있었다.
허동원 대장은 오자마자 덕돌을 보고 “오라, 돌을 계속 메자.”라고 했다.
허동원도 덕돌의 기를 꺾어놓지 않으면 생산대에서 기를 펴지 못할 것을 알았던 것이다. 헌데 연 며칠 돌을 메 날랐는데 덕돌은 밤만 자고 나면 맥이 나는지 끄떡하지도 않았다. 허나 허 대장의 얼굴은 점점 부어오르고 눈에는 피가 가득 지기 시작했다.
허동원이 쇠줄그물을 쥐고 다가오자 덕돌은 멜대와 쇠줄그물을 들고 제일 큰 떡함지 같은 바위 돌 앞으로 갔다.
허동원은 200 키로는 실히 될 바위 돌을 보자 뒤로 주춤 물러섰다.
상순은 덕돌의 속심을 빤히 꿰뚫어보고 말리었다.
“야, 그 큰 돌을 어떻게 가파른 발판으로 저 높은 언제 위로 나른다고 그러니? 그 돌로 언제 기초를 쌓으면 된다. 이쪽에 숱한 돌을 두고 하필이면 그 돌이냐?”
송선도 저쪽에서 땀을 그러쥐고 긴장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 큰 돌을 어떻게 멘다고?)
그러나 허동원도 자존심을 꺾을 수 없었다.
“괜찮소. 언제를 든든하게 쌓자면 이런 큰 돌을 날라다 쌓아야 하오.”
허동원이 쇠줄그물을 그 바위 돌에 들이댔다.
그러자 덕돌은 그 큰 바위 돌 한쪽을 혼자 움쭉 들어 굴려 쇠줄그물 위에 담았다.
“야, 로지심이요.”
덕돌이 멜대를 메면서 볼라니 허동원의 얼굴이 퉁퉁 붓기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바위 돌을 담은 끈을 슬쩍 덕돌이 쪽으로 밀어놓는 것이었다. 허나 그까지 것 영상해 못 본 척하고 덕돌은 어깨를 안쪽으로 들이대고 떠멨다. 허동원도 젊어서는 꽤나 힘을 쓰는 뚱보여서 힘겨운 대로 멜대를 떠멨다.
그 큰 바위돌이 움쭉 들리었다. 숱한 사원들이 모두 그들 둘이 푹푹 빠지는 모래를 밟으면서 언제로 걸어 나가는 것을 구경했다. 덕돌은 넓은 가슴을 내밀고 허리를 쭉 펴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허나 허동원은 점점 허리를 굽히면서 비틀거리더니 숨소리마저 힘겨워져갔다. 가파른 언제에 놓은 발판을 밟고 올라서자 허동원은 허리를 펴지도 못하고 한발자국을 겨우 내딛였다. 허나 덕돌은 평지 걷듯이 한발, 두발 가볍게 떼였다.
꽈당!
요란한 소리와 함께 미처 따라 걷지 못한 허동원은 비틀거리다가 발판 아래로 뚝 떨어졌다.
덕돌도 발판 아래로 떨어졌다. 허동원이 떨어지는 바람에 무거운 바위돌이 평형을 잡지 못해서 묻어 떨어졌다. 그런데 먼저 밑에 떨어진 허동원은 커다란 바위 돌에 슬쩍 깔리고 말았다. 덕돌과 상순이 황급히 바위 돌을 치우고 보니 허동원은 인사불성이 됐는데 입귀와 콧구멍에서 뻘건 피가 줄줄 흘렀다.
“도깨비야, 사람을 죽이겠다. 메지 말라는데 기어이 메더니. 이 걸 어쩌니?”
그러나 덕돌은 “허 대장도 메자고 해 멨지? 내 억지로 멨습니까? 힘이 없으면 달려들지 말거지. 누가 메자고 해서 멨습니까?”라고 두덜거렸다.
(당신 뼈대도 그저 그렇구먼. 어쩌지 못하면 덤벼나 들지 말 거지. 내 뼈대를 아껴 어찌 고? 흥!)
상순은 덕돌의 귀쌈을 찰싹 갈기면서 호통 쳤다.
“빨리 공사 병원에 싣고 가라! 사람을 죽이겠다.”
덕돌은 멜대를 뽑아 쥐고 자리를 떴다.
“손잡이트랙터를 몰 줄 아는 성욱이나 보내시오. 난 몰줄 모릅니다.”
상순은 노기충천해 소리를 버럭 쳤다.
“너도 사람새끼냐? 어서 성욱과 함께 공사병원에 모셔가라!”
누구 명이라고 어길 수 있겠는가?
그날 덕돌은 성욱과 함께 인사불성이 된 허동원을 싣고 진수해 공사 병원으로 달려갔다. 허동원은 검사를 거쳐 요추간반탈출에 발목뼈 골절이란 진단을 받았다. 그런데 몇 시간 후 허리가 아파 덕돌도 검사해보니 요추간반탈출이 왔던 것이다. 분명 허동원이 먼저 떨어지는 바람에 묻어 떨어지면서 허리를 좀 상했던 것이다. 허나 20세 청년이어서 용용 솟구치는 힘에 의해 덕돌은 허리통증을 용케도 참아냈다.
덕돌이 허리를 쓰지 못하는 허동원을 공사 병원에 실어가고 집으로 돌아오자 상순이 노발대발 하면서 욕지거리를 했다.
“이 놈 새끼, 작작 원수를 갚아라. 정 그러다간 이제 병진처럼 돼버리지 않는가 봐라. 병진도 너처럼 돌아가면서 쩍하면 원수를 맺고 보복하려고 탈곡장 벼 낟가리에 불을 지르고 감옥에 들어갔다.”
덕돌은 아버지 무서운 눈길을 피해 머리를 숙이었다.
상순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잘 들어둬라. 힘이 세면 황소가 왕이 될 거 같니? 항우나 장비 같은 힘장사도 왕이 되지 못했다. 네 따위가 누굴 힘으로 꺾으려고 드니? 힘이 나 쓸 데 없으면 일성저수지에 가서 흙짐이나 메라.”
덕돌은 차라리 좋아했다.
“가라면 못 갈 거 같습니까? 원래 이 시시한 생산 대에 쓸데없는 말을 들으면서 일하지 못하겠습니다.”
덕돌은 생산 대에 있기조차 싫었던 차 잘됐다고 생각했다.
덕돌은 넷째매형 학순이 다니는 공사 목재기업에 들어 갈 까고 그간 몇 번이고 찾아 갔다.
이태 전에 결혼한 은자의 신랑 허학순은 아랫마을 계수동에 있었는데 키가 자그마했지만 원체 약삭빠르고 일처리에 능했다. 그리하여 두루 알아보고 전기기구직장에서 직공을 모집할 가능성이 많다고 했다.
하여 덕돌은 전기기구직장에서 변압기를 조립하고 수리한다는 말을 듣고 서점에 가서 전기기구 조립과 수리에 관한 서적을 사다가 골똘히 자습했다. 원래 그는 반도체라디오도 조립한 적이 있어 전기와 무선전자에 일정한 기초가 있어 인차 변압기와 발전기, 발동기 원리와 수리, 조립을 일정하게 장악했다.
허나 공사 기업으로 들어가려고 해도 재간만 있어도 안 되고 생산 대에서 추천해야 됐다. 허나 허동원 생산 대장이 한사코 반대하는데다가 청렴하고 대공 무사한 정치대장인 상순이 자기 아들을 뒷문거래를 해 공사 기업에 보내 쓸데없는 말을 들을까봐 동의하지 않은 바람에 갈수 없게 됐던 것이다.
(아버지는 대공무사한 틀만 차리면서 자기 아들을 생각할 줄 몰라. 어쩜 생산대 회계도 성욱에게 맡기고 손잡이트랙터 운전수도 성욱이야?)
덕돌은 슬그머니 좋은 일은 모두 성욱한테 맡기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소몰이를 시키지 않으면 둼을 꺼 밭에 내는 일을 시켰고 언제를 쌓고 기음을 매고 돼지죽을 먹이라고 하지 않으면 이번에는 일성저수지에 가서 흙짐을 메라고 했다.
그때 종복도 입대한지 8개 월 만에 입당했다. 하여 지난 해 겨울에 덕돌은 군부대에 입대해 입당이나 하고 돌아오고 싶었다. 그런데 신체검사에서 다른 것은 몽땅 합격이었지만 색맹 때문에 물거품으로 되고 말았다. 행여나 해 덕돌은 공사당위 선전위원으로 있는 성환을 찾아갔다.
허나 성환 형님은 안경알을 춰올리면서 말리었다.
“부대에 가서 뭘 하니? 넌 외동아들인데 부대에 갔다가 일이 생기면 네 부모는 어쩌니?”
덕돌은 지청구를 들이댔다.
“형님, 지금 부대에 가지 않고 농촌에서 어떻게 전도를 개척할 수 있소? 난 생산대 손잡이 트랙터마저 몰 자격을 주지 않는데.”
허나 성환 형님은 극구 반대했다.
“넌 아직 세상이 돌아가는 걸 모르는구나. ‘4인무리’가 분쇄된 후 세상이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화국봉을 위수로 하는 당 중앙에서는 지식인들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이제 대학입학 제도도 바뀌어 가능하게 시험을 쳐 대학에 갈 가능성이 있다. 그까짓 손잡이트랙터 운전수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부러워하니? 생산대 도서관리원이나 신문사 통신원이나 하면서 글이나 쓰고 책이나 많이 봐둬라. 넌 장차 문화공작을 할 사람이다.”
덕돌은 성환 형님의 말이라면 열에서 아홉은 다 들어왔던 것이다. 허나 강청과 장춘교, 요문원, 왕홍문을 위수로 하는 “4인무리”를 짓 부셨다고 해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것에는 믿어지지 않았다.
눈이 풀풀 흩날리는 날에 성환 형님은 덕돌을 데리고 공사 문화소에 가서 철색얼굴에 눈 섭이 짙은 마흔 고개 오른 점잖은 분을 소개해주었다.
“이분은 우리 공사 문화 소 소장 김재군 선생이다.”
덕돌은 허리를 굽혀 인사하면서 김재군 선생이 내민 손을 잡았다.
“이분에게서 문학창작을 배워라. 이분은 특히 옛말을 잘 정리해 소문났다. 구수한 옛말을 많이 듣고 정리하노라면 너도 문학창작을 형상적으로 할 수 있을 거야.”
성환에게서 덕돌의 글짓기형편을 들은 김재군 선생은 우렁우렁한 말소리로 소탈하게 말했다.
“싹수가 있구먼. 소식도 써야지만 한 차원 높은 민담정리도 하고 소설이랑 시랑 써야지. 대담하게 쓰오. 자꾸 써야 늘지. 안 그럼 두부모만한 소식 몇 편 방송이나 신문에 낸데 자만하면 제자리에서 답보하게 되오. 작가로 되려면 청년 때부터 목표가 있고 계획이 있게 살아야 하오. 놀 거 다 놀고 잘 잠을 다 자고서야 언제 글을 쓰겠소?”
덕돌은 김재군 선생과 갈라져 문화 소 문을 나서면서 얼굴이 뜨거워났다. 정말 소식 몇 편을 내고 이 골 안에서 내노라고 자만하고 뽐낸 자기가 너무나도 부끄러웠던 것이다.
성환 형님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그때 출판사 편집들과 일보사 기자들도 농촌에 점을 잡고 일하면서 농촌사업을 하고 있었다. 출판사 편집들은 농촌 번역소조와 도시 번역소조를 내오고 농민과 노동자 번역일군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성환은 농촌 번역소조 조장을 맡고 여러가지 정치문교도서를 번역해 출판했다. 그는 그 후부터 공사 당위 선전위원 사업에 그렇게 바쁘면서도 시간만 나면 덕돌에게 번역이론을 전수하고 한문원고를 주어 번역공부를 시켰다.
성환은 또 일보사 농촌소조 조장 박하림 선생과 기자 허길룡 선생, 현 주재기자 소 기자 최찬 선생 등에게 덕돌을 소개해 주었고 일보사와 방송국에서 연 통신원양성반에도 참가시켜 기자수업을 시켰다. 덕돌은 박하림 등 기자들의 지도를 직접 받으면서 소식과 통신 쓰기를 높은 차원에서 익혀나갔고 여러 편의 소식과 통신을 써서 신문과 연변인민방송국 방송프로에 냈다.
허나 공사 혁명위원회 주임 황종연은 백방으로 성환에게 압력을 가해 덕돌이 소식을 써서 내는 것을 저애했다. 공사 혁명위원회의 비준 없이는 소식이랑 통신이랑 마음대로 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덕돌은 기자들 가르침을 받은 뉴스 안으로 뉴스소재를 발견해도 뉴스를 쓰지 못하고 말았다. 진짜 뉴스 집필재간이 있어도 쓰지 못하게 덕돌의 두 손을 쇠사슬로 꽁꽁 동여 매놓았던 것이다.
덕돌은 소식을 쓰지 못하고 점차 옛말을 정리하거나 시를 써서 김재군 소장이 꾸리는 “진수해 문예”란 프린트소책자에 냈다. 정치에 관계되지 않는 문예창작에 집념하니 황종연이랑 간섭하지 못해 오히려 편안하고 자유로워 좋았던 것이다.
헌데 후에 알고 보니 성환의 동생이자 덕돌의 동창생인 철군이가 입대해 부대로 가게 된다고 하지 않겠는가?
허나 “4인무리”가 분쇄된 후 점차 정치열이 식어가는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덕돌은 그래도 부대를 가서 1년 만에 갑작스레 입당해 정치토대를 닦은 후 글을 써도 늦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 글이야 한뉘 써야 될 게 아닌가? 정치토대를 닦는 거야 말로 급선무야. 아직도 글쎄 입단도 못했으니까. 언제 입당하고 대학에 추천받아 가는가?)
덕돌은 이렇게 생각하자 공사 무장부 간사로 일하는 성환의 둘째 동생 철주를 찾아갔다. 무장부 사무실에서는 철주 형님 외에도 리인학 부장이 있었다.
덕돌은 난로 안에서 석탄덩이가 탕탕 튀는 소리를 들으면서 리인학 부장의 눈치를 흘금흘금 보면서 입이 무거워 열지 못했다.
눈치 빠른 리인학 부장은 훌쩍 자리를 비웠다.
그제야 덕돌은 철주 형님의 날카로운 콧날을 보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형님, 날 군부대에 보내주오.”
철주 형님은 두툼한 신체검사서 무지를 들춰 덕돌의 신체검사서를 여겨보더니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네가 어떻게 가니? 색맹이구나.”
“철군인 고혈압이라도 부대에 보내면서 나를 어째 도와주지 못하오? 색맹이란 걸 슬쩍 고치면 안 되오?”
덕돌이 지청구를 들이대자 철주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딱 잡아뗐다.
“안 된다. 내 어떻게 그걸 고치니?”
“한번 좀 살려주오. 한평생 그 은공을 잊지 않을게.”
“야, 안 돼. 도와주고 싶지만 입대 신체검사서는 정치심사보다 더 엄하다. 자칫하면 내 무장부 간사 직을 떼울 수도 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청을 들 수 없는 노릇이었다. 형의 전도를 망치고 자기 앞길을 열 수는 없었다.
이 일 저일 생각하니 덕돌은 구름이 꽉 낀 하늘이 언제 열리겠는가고 갈망했다. 앞길이 막막하기만 했다.
덕돌은 이불 짐을 둘러메고 일성저수지 공정으로 떠났다. 물론 이불 속에는 동곽 선생처럼 항상 놓을 수 없는 책을 두툼히 감춰 넣었다.
(차라리 아무런 인적관계 없는 수리공정에 가서 입단하고 입당하면 좀 좋아?)
사실 생산대 안에서는 서로 먼저 입당하고 간부로 되려고 쟁탈과 질투가 심해 입단하기도 힘든 세월이었다. 아무런 정치관계가 없는 저수지공지에 가서 입단하기는 별로 쉬워보였다.
그는 생산대 도서관리원을 버리고 아버지 말씀대로 저수지 공지에 떠나가는 조금 위안됐다.
생산 대 단 지부 서기를 하는 순희가 어떻게 소문을 듣고 조개덕 마을 서쪽 태평강 가에까지 덕돌을 뒤쫓아 와 말리었다.
“얘, 무슨 궁리 하니? 이번에 널 입단적극분자로 정했는데 저수지로 가면 어떻게 하니?” “네나 입당하고 대학에 추천받아 가라.”
덕돌은 심드렁해 이불 짐을 메고 발길을 떼려고 했다.
순희는 이불 짐을 잡아 홱 나꿔챘다.
“야, 그게 무슨 말이냐? 난 널 진심으로 생각해 하는 말이다.”
“네 진심은 나도 안다. 남들의 눈이 무섭지 않니? 괜히 나하고 좋아한다는 말을 듣겠다.” “들으면 뭐라니? 우린 이젠 애들도 아닌데.”
덕돌은 순희의 복숭아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것을 곁눈질 해보았다.
“진정은 고맙다. 나도 살길을 찾아 가니 근심하지 말고 생산대 일이나 잘 해라.”
이때 허춘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형님, 우리 엄마 일이 노여워 그러오? 난 형님의 은정을 잊지 않소. 형님은 나한테 무예와 글짓기를 가르쳐주었소. 가지 마오. 저수지 공지에 가서 어떻게 고생하겠소?”
덕돌은 날따라 몰라보게 된 허춘을 묵묵히 바라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사실 덕돌은 마을에서 자기를 따르는 양훈과 허춘, 득만한테 무예도 가르치고 글도 배워주어 학교에서 머리를 들고 공부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내대장부로 되는 의리 같은 도리를 가르쳐주었다. 하여 애들은 맏형처럼 믿고 따랐던 것이다.
허나 허춘의 엄마 세치 혀끝으로 해 덕돌의 가슴에 상처를 입힌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때 저쪽에서 생산대 민병패 패장을 하는 동림과 생산대 부녀 대장을 하는 정규상 교수의 딸 순임도 소문을 듣고 밭으로 나가다가 뛰어왔다. 순임은 덕돌보다 두 살이나 이상인 누나 격으로서 오누이처럼 지내던 덕돌이공지로 간다고 하자 섭섭해 뛰어왔던 것이다.
“얘, 왜 호박을 쓰고 돼지 굴로 들어가니?”
동림도 말렸다.
“가지 말라. 네가 가면 내 무슨 멋에 조개덕에 있겠니?”
허나 덕돌의 굳은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뒤이어 집체호의 조영희도 뛰어왔다.
조영희는 지난해 덕돌이 처음 통신을 배우면서 취재해 방송에 낸 뉴스인물이었다. 그녀를 모델로 농촌 생산대 맨발의사(위생원)을 소설로 각색해 “진수해 문예”에 낸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조영희는 살그머니 덕돌이네 집으로 찾아와 성숙과 놀기도 하고 상순을 찾아와 정치에 대한 가르침을 받으면서 덕돌을 건너다 보군했던 것이다. 사실 조영희는 시내 진수해중학교 교원의 딸, 자그만치 교도처 주임의 귀한 공주이었다.
덕돌은 은근히 맑은 눈길을 자기에게 보내는 조영희의 눈치를 채고서도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군 했다.
(시골 개구리 같은 내가 어찌 푸른 하늘을 날아예는 학의 고기를 먹으려고 꿈꾸겠는가?)
조영희는 옆에 순희와 순임까지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직방배기로 말했다.
“왜 이러니? 우리 셋이 힘써 널 입단시킬 게. 저수지 공지로 가지 마오.”
허나 덕돌은 셋과 일일이 작별인사를 했다.
“고맙다. 가장 어려운 때 잊지 않아 평생 잊지 않을게.”
말을 마치자 덕돌은 홱 돌아서서 일성 골 안을 바라고 이불 짐을 둘러메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파란만장한 그의 인생길에는 또 무슨 일이 생기겠는지 아직도 막막하기만 했다.
친구들은 덕돌의 발걸음이 비틀거리고 어깨가 약간 파도치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코마루가 시큼해나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점점 멀어져가는 덕돌의 뒤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덕돌의 그림자가 자그마한 흑점으로 변해가다가 함흥촌 저 멀리 넘어 소서구 어구 굽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바랬다.
저쪽 하늘에서 봄을 찾아온 제비들이 둥지를 틀려고 지지배배 울면서 쌍쌍이 날아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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