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신이 몰고 왔던 뜨거운 입김이 지나간 대지는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가을바람에 낙엽이 우수수 지고 있었다. 누런 가랑잎들이 계절신이 누렇게 칠해가는 땅바닥에 떨어져 가을바람에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었다.
덕돌은 허구한 나날 여자애들을 쫓아다닌 것이 허무할 뿐이었다. 지는 낙엽과 함께 실련의 아픈 흔적이 나뒹구는 감이 아프게 느껴졌다. 사랑의 열풍을 몰고 왔던 처녀 영희도 영옥도 사라졌고 영자는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망아산 아래 이 시내에서 사라졌다.
(사랑은 청춘 남녀가 티 없이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연주하는 아름다운 사랑의 멜로디야. 정조는 사랑의 생명이 아닌가? 정조를 잃은 영자를 생각해 뭐 해?)
덕돌은 실련의 고배를 마시고 숙사 침대에 이불을 들쓰고 누워 고민하고 있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착잡한 생각을 몰아내고 실련의 아픔을 이겨내려고 애썼지만 허사였다. 소설을 읽으려고 해도 작중 열연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읽노라면 자연히 영자 생각이 나서 더 읽어내려 갈 수 없었다.
사라진 영자 때문에 실련의 고통으로 해 덕돌은 고민의 깊고 깊은 구렁텅이에 빠졌다.
그는 소설책을 팽개치고 일어책을 들고 보다가 불현듯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중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뭘 해봤자 하늘을 찌르겠는가? 소설을 애나게 쓴들 조선의 이기영이나 한설야를 초과하겠어? 아예 일본이나 유학 가는 게 좋겠다. 일본 같은 선진국에 가서 견식을 넓히고 돌아와 하늘을 찌르는 큰 일을 해야지. 정치 학부를 다니면서 기자로 되려는 이상도 현실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장사를 해 돈이라도 벌어 시내에서 사업을 해봐야지.”
덕돌은 망망한 대해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지푸라기라도 잡은 것처럼 일루의 희망의 끈을 잡고 다시 생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래, 일본으로 가야겠다. 큰 인물들은 청년 때 모두 유학을 가 견식을 넓히고 지식을 많이 쌓은 분들이야. 주덕이나 등소평이나 주은래, 진의 등은 모두 프랑스 유학생 출신이야. 세상의 도리를 먼저 안 사람이 수령이 되기 마련이지. 주은래는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프랑스에까지 유학을 갔다 온 인물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자꾸 머리를 쳐들었다. 덕돌의 눈앞에는 외동아들인 자기를 믿고 살고 있는 머리가 흰 부모가 떠올랐다.
(내 일본에 가면 부모는 어쩌는가?)
허나 한편 덕돌은 속으로 큰 일을 할 사람이 어찌 부모생각만 하겠는가고 생각했다.
(자고로 충신은 효자가 아니잖은가!)
하지만 좀처럼 머릿속에서 부모를 지울 수 없었다.
(내 일본에 가서 몇 해 일하면서 공부해 돈을 많이 벌어다 한평생 농촌에서 땅을 파면서 고생스레 살아온 부모님을 호광하게 살게 해야지. 귀국한 후 효성을 다해 모시면 되겠지.)
그는 자기를 위안하면서 부모의 동의를 받으려고 시골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 날, 상순은 밭으로 나가고 없고 명옥은 집에서 돼지먹이를 가마에 끓이고 있었다.
덕돌은 부엌에 앉아 한창 불을 때는 엄마의 손을 잡고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애꿎은 풍무만 돌렸다.
한참 후에야 큰 마음을 먹고 무거운 입을 뗐다.
“엄마, 내 일본으로 유학가자고 그럽꾸마. 가도 되겠습둥?”
허나 엄마 명옥은 “일본으로 유학하러 가자고?”라고 하더니 일어나 가마뚜껑을 닦으면서 잠간 생각하는 것 같았다.
덕돌은 엄마가 꼭 반대하리라고 생각했다.
뜻밖에 어머니는 큰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
한참 후에 어머니는 이렇게 나직이 말했다.
“유학까지 갔으면 얼마나 좋겠니? 대학을 보낸 것만 해도 기쁜데 유학까지 가면 우리 아들 얼마나 장하니? 가겠으면 가라. 부모 걱정은 말고.”
덕돌은 흰 머리를 쓸어 넘기며 비장한 결심을 하는듯한 머리에 흰서리 내린 어머니를 보는 순간 콧마루가 시큼해났다.
(엄마는 내가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모험으로 일본에 가련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다만 일본으로 유학 간다 하니 기뻐하고 있다. 그저 아들이 잘 되기만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닌가. 외동아들인 내가 가면 늙은 엄마는 누가 모시겠는가? 누나들이 다섯이나 있지만 다 멀리 시집가지 않았는가? 나를 믿고 사는 부모를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이야?)
한참 후 아버지 상순이 밭에서 돌아왔지만 덕돌은 일본 유학을 가련다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했다. 머리가 희슥한 부모를 보는 순간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드디여 자기 생각이 물을 건너는 흑보살처럼 와르르 무너지는 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숙사에 돌아와서도 덕돌은 깊은 생각을 거듭하지 않으면 안 되였다.
(구경 전도를 어떻게 개척한단 말인가?)
겨울 방학이 되자 덕돌은 세상구경을 하자고 엄마와 여비를 달라고 했다.
명옥은 아들이 하자는 일이라면 열에 아홉은 안 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는 돼지 한배를 판 돈 120원이나 꺼내 주었다.
“세상 구경을 널리 하고 큰 뜻을 세워라.”
덕돌은 엄마가 주는 돈을 넙적 받으면서 이런 생각이 가슴을 후려쳤다.
(이렇게 좋은 부모를 두고 내가 어디로 간단 말이냐?)
그때 상순은 덕돌이 무슨 고민에 빠진 것도 모르고 불쑥 이런 부탁을 했다.
“얘, 저 윗마을 해월을 정규상한테 데리고 가서 치료해달라고 해라. 흥수는 비록 내 정치적수였지만 애들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 불쌍한 애가 미쳐서 어쩌겠니?”
덕돌은 싫은 대로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 해월은 암이 아닌 거 같습니다.”
“그래도 정신병을 치료해야지.”
“그럼 함께 갑시다. 정신 나간 해월을 어떻게 혼자 시내로 데리고 가겠습니까? 무슨 미친 짓을 하면 어쩝니까? 괜히 다른 소문이 나겠습꾸마.”
“그것도 그렇구나.”
상순은 덕돌과 함께 윗마을에 가서 춘실과 함께 해월을 데리고 시내 정규상을 찾아 갔다.
해월은 미친 나머지 YJ병원에 들어가면서도 히히히 웃기도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상스러운 손짓을 마구 해대 경악케 했다.
“히히히, 덕돌아, 이 사람들을 봐라.”
해월은 덕돌의 팔소매를 잡아당기면서 떠들어댔다.
“함흥대대에서 한다하는 해월이 왔다고 구경하는 거 봐라. 해해해. 선녀가 내렸지. 이 집에. 흥, 집도 크다야. 헤헤.”
춘실은 창피해 해월의 허우적거리는 손을 꽉 잡고 덕돌을 따라 걸었다.
덕돌은 일단 먼저 해옥 아재를 찾아갔다.
그는 해옥의 귀에 대고 뭐라고 나직이 말했다. 그러자 해옥이 그들을 데리고 정규상의 사무실로 갔다.
정규상은 한창 병을 보다가 해월을 보더니 앉으라고 했다.
해월은 정규상을 보자 달려가 마구 끌어안으며 “충국아, 너 어째 여기 있니?”라고 미친 소리를 했다.
춘실은 황급히 해월의 팔을 마구 끌어당겨 떼 냈다.
“정 선생, 양해하십시오. 얘 병을 꼭 떼 주십시오.”
정규상은 해월을 아래 위 바라보더니 우쭐 일어나 나갔다.
그러자 춘실은 속으로 남편 흥수가 함흥 대대에 하향해 내려간 정규상을 못 살게 굴었다고 나가버린 것으로 알고 실망해 했다.
허나 이윽고 정규상이 신경병 치료전문가 량수원 업무원장을 데리고 와서 함께 해월의 병을 보는 것이었다. 그제야 춘실은 젖어드는 눈 굽을 닦으면서 정규상한테 미안하고 그의 드넓은 흉금에 탄복했다.
기실 해월은 자초부터 암에 걸리지 않았었다. 정규상은 노간부들을 투쟁하면서 못 살게 구는 흥수를 혼빵내려고 해월이 암에 걸렸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흥수가 이미 처단돼 죽은 다음에는 해월이 불쌍해 정규상은 의사로서 인도주의를 발휘해 구하려고 나섰다.
그는 량원장을 데리고 한쪽으로 가서 한참 토론하더니 처방을 내렸다. 량원장은 첩약을 떼 주었고 정규상은 서약을 떼 주었다. 그리하여 해월은 정신병과에 입원해 주사도 맞고 첩약도 달여 먹었다.
정규상은 심장병과에서 권위로 돼 심장병환자들의 병을 보고 있었다. 그는 억울하게 우파 모자를 쓰고 20여 년 동안이나 농촌에서 투쟁 받으면서 고생하다가 이젠 우파 모자를 벗었을 뿐만 아니라 병원의 원장으로 됐고 인대 상무위원회 부주임, 직함평의위원회 의료전문주임위원으로 됐다.
그는 원장으로 된 후 자기에게 그렇게 억울한 우파 모자를 씌운 박영발에게 보복을 하지 않았다. 허나 병원 혁명위원회가 없어진 뒤 정부에서는 “문화대혁명” 후반기에 반란파 두목 황종연과 이흥수에게 빌붙어 간부들에게 박해를 가하고 정치투기를 해 병원에 올라온 박영발과 박윤희를 가도 병원으로 내보냈으며 출당시켰다.
덕돌이 해월의 병이 어떤 가고 찾아 갔을 때다.
정규상은 아주 반갑게 이야기했다.
“근심하지 말라. 해월은 한 동안 치료받으면 나을 거야.”
그는 덕돌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넌 정말 개천에서 나온 용이다. 어쩜 그 함흥 촌 골 안에서 너 같은 대학생이 나왔니? 누가 소몰이를 하던 네가 대학에 가리라고 꿈에나 생각했겠느냐? 정말 총명한 내력이야.”
덕돌은 정규상 앞에서는 어린애처럼 주눅이 들어 머리를 숙였다.
“가만, 졸업배치는 어디로 받을 예산이냐?”
덕돌은 제꺽 “일본 유학을 갈 예산입니다.”라고 말하려다가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삼켜버렸다.
“네가 내 말대로 의학원에 갔더라면 우리 병원에 배치받게 도와주겠는데.”
“원래 의학원에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색맹이 돼서 지망을 고쳤댔습니다.”
정규상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덕돌이 정규상과 갈라져 학교 숙사로 돌아 올 때었다.
“덕돌이!”
불시에 등 뒤에서 자기를 부르는 처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를 돌려 보는 순간 덕돌은 깜짝 놀라며 자기 눈을 의심했다.
조영희가 아니겠는가!
(아니, 집체호 영희는 어째 왔을까? 기다리는 순희는 소식도 없고 불청객은 불쑥. 흥!)
성욱이랑 순희랑 조영희랑 연속 대학시험을 네 번이나 쳤지만 연속 낙제를 맞았다. 성욱은 번마다 몇 백점도 모자랐기에 대학을 바라볼 게제도 되지 못했다. 하지만 순희와 영희는 번마다 딱딱 십여 점씩 모자라 대학에 입학하지 못해 아쉬웠다. 순희는 그후부터 가타부타 깜깜무소식이었다.
(무정한 애라구야.)
혹시 순희는 덕돌을 볼 면목이 없은 것 같았다. 혹시 그녀는 점점 지위가 차나는 덕돌과의 사이를 느끼고 다시는 찾아올 엄두를 못냈을수도 있었다.
그런데 영희는 지위따위 차이는 개의치 않고 담대하게도 학교에까지 찾아왔다. 물론 처여애로서 아무리 자기 마음 속에 뒀던 총각이라고 해도 선뜻 대학교에까지 찾아오기는 조련찮았을 수도 있었다.
영희는 이젠 25세나 돼버렸다. 그간 집에 붓박혀 책과 씨름만 하면서 별로 활동도 하지 않아 그런지 호리호리하고 예쁜 영희와는 판판 다른 모습이었다. 더구나 엉덩이마저 농촌 아낙네처럼 펑퍼짐해 보기 민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다만 예지로 반짝이는 까만 눈매만은 의연히 매력적이었다.
덕돌은 영자를 잃은 뒤 여자애들만 봐도 신경질이 나고 사귀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었다. 괜히 실련의 아픈 상처에 고춧가루를 맞을까봐 겁났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엄동설한에 차마 대학 한끝까지 자기를 찾아온 영희를 큰 거리에 세워 놓고 말해 보낼 수는 없었다.
그는 영희를 데리고 식당으로 갈까 하다가 괜히 열정적으로 대하면 계속 찾아 올 것 같아 그만두고 대학교 숙사 옆에 있는 자그마한 상점으로 들어갔다.
복판에 난로를 피워놓은 한족집 상점 안에는 다행히 한족 주인과 손님 몇이 있을 뿐이었다. 항상 다니던 상점이어서 주인은 사탕 한 알도 사지 않아도 덕돌과 영희에게 눈을 흘기지 않았다.
덕돌은 영희가 정을 떼게 하려고 차마 못할 말로 쌀쌀하게 했다.
“어째 왔소?”
영희는 그 한마디에 새파랗게 언 얼굴에 눈물부터 왈칵 쏟더니 돌아서 어깨를 들먹이었다. 석탄이 타면서 탕탕 소리내는 화로를 마주해 서서 흑흑 흐느끼는 상 싶었다.
이윽고 영희는 가까스로 용기를 내 몸을 돌리더니 덕돌을 기대에 찬 눈길로 마주 바로보며 물었다.
"이전에 제 대학에 올 때 준 담배꽃쌈진 어쨌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웬 담배쌈지 얘기냐?)
덕돌은 이렇게 말하려다가 그만두고 딴전을 부렸다.
"학교에 가지고 오지도 않았소."
"왜? 건 내 일편단심을 한코한코 새긴 꽃쌈진데."
"너무 몇백년 전 담배쌈지처럼 촌스러워서..."
"그래 버렸소?
"모르겠소. 어쨌던지?'
"대학에 오더니 꽤나 제비 배때기처럼 희냥하며 비싸게 노는구만요."
조왕돌은 냉냉하게 물었다.
"그래 그걸 찾으러 왔소?"
"아니,"
영희는 자기 마음을 모르는 덕돌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아직도 그 꽃삼지를 잊지 않았는가 해 왔소."
덕돌은 허구픈 웃음을 웃었다.
영희는 분명 직접 묻기는 그렇고 하니깐, 담배꽃삼지에 견주어 지금 자기를 잊지 않았는가, 사랑하는가를 묻고 있었다. 그녀는 미리 어떻게 말할가 많이 생각하고 찾아온 것 같았다.
"촌스러워 가지고 오지도 않았다고 말하지 않았소. 난 그걸 잊은지 오래오. 그런 담배쌈지를 줄 처녀가 수두룩하니까. 대학생처녀들도 가득한데 하필이면..."
"알았소. 좋은 대학생처녀를 만나 콱 잘 사오."
그녀는 덕돌의 말을 중도무이하더니 머리를 숙인 채 상점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덕돌은 뒤늦게 따라 나가 보았다. 연애는 하기 싫어도 도의상 엄동설한에 그 먼 곳에서 찾아온 영희를 점심이라도 대접해야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가 아닌가.
영희는 오른 손으로 눈을 가린 채 달려가다가 비틀거리며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큰길 옆에서 칼바람에 몸부림치는 벌거숭이 가로수를 손으로 짚고 겨우 몸을 지탱하는 것이었다.
덕돌은 가로수에 몸을 기댄 채 어깨를 들먹이는 영희를 보자 속이 뭉클해나고 콧마루가 시큼해났다. 그는 뒤따라가 영희를 위안하려고 하다가 인차 냉정하게 리성을 회복했다.
(안 돼, 직업도 없는 고중생과 정을 뚝 떼버려야 한다. 또 찾아와서 졸졸 묻어 다니면 어쩌는가?)
덕돌은 마음을 모질게 먹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숙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숙사에 돌아와서도 그는 너무 지나친 것 같아 창문으로 큰 길 쪽을 내다보았다.
영희는 쌩쌩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가로수 옆에 쪼그리고 물앉아 왝왝 토하면서 우는 상 싶었다. 덕돌도 차마 정을 떼기 어려웠다. 허나 이상과 전도를 위해서는 무정하게 정을 떼버려야 했다.
한참 후 영희가 일어나 상점 부근과 숙사 쪽을 두리번거리다가 비칠거리면서 겨우 떠나가는 것이었다.
(야, 영희야, 날 콱 욕해라! 난 나쁜 놈이야! 내 잘 살기 위해선 별 수 없구나.)
덕돌은 침대에 쿵 쓰러져 이불을 들쓰고 들어 누었다.
눈보라를 들쓰면서 울며불며 진수해로 돌아가는 영희를 보는 것 같아 속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야, 사랑은 정말 자사 자리한 거야. 사랑은 무서운 것이야. 사랑하지 않으면서 허위로 국밥 한 그릇이라도 사주면서 얼려 보낼 순 없어. 책임지지 못할 처녀는 아예 건드리지 말고 맺고 끊어야지. 분명 한생을 함께 할 사람이 아닌데 건드려 뭘 해? 영희, 나를 용서하오. 무정한 철석같은 사내를.)
덕돌이 “사랑전쟁터”에서 실련의 고배를 마시고 고민에 빠쪄 이불을 들쓰고 초저녁부터 책도 보지 않고 누어있을 때었다.
어느 날 밤중에 한 침실에 있는 성호가 침대에서 일어나 덕돌의 침대에 다가와 바깥에 나가 조용히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무슨 일이 있을까? 이 책벌레가.)
료녕성에서 온 이 성호는 덕돌과 소박한 감정으로 가까이 보냈다.
숙사에서 나가자 성호는 덕돌을 조용히 불러 어깨에 오른 손을 올리고 말했다.
“친구야, 그까짓 처녀애들 작작 쫓아다녀. 대학교 때 하나라도 책을 많이 봐라. 그래야 당장 사회에 나가 유용한 일을 하지.”
덕돌은 한숨만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성호는 “날 좀 도와줄래?”라고 평안도 말로 물었다.
“뭔데?”
성호는 덕돌을 데리고 숙사 복도에 들어가더니 헌 침대를 가리켰다.
“이걸 들고 가자.”
덕돌은 성호와 함께 헌 침대를 들고 교수청사로 올라갔다.
2층에 올라가 교실 저쪽으로 해 헌 위생실이 있었다. 그리로 침대를 맞들고 들어갔다.
성호는 오래 동안 쓰지 않은 위생실을 말끔히 정리해놓고 전기마저 장치해두었던 것이다. 대변실 세 칸이 있었는데 작은 책걸상을 들어다 놓고 탁상 등마저 켜놓으니 아주 조용한 독서실이 돼버렸다.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라. 숙사에서 한 침실에 여덟이나 들어 떠들썩해서 어디 책을 제대로 보겠니? 난 시간이 아깝다. 언제 허튼소리나 할 새 있어? 책 한 폐지라도 더 봐야지.”
덕돌도 동감이 갔다. 숙사에서 반장 허운호가 통 말이 아니었다. 그는 기억력이 어찌나 좋은지 교실에서 집중해 책을 들고 보면 누가 지나가도 다치지 않는 한 헛눈을 팔지 않았다. 그런데 운호는 밤 12시에라도 공부를 마친 후 그 독한 술을 마시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밤중에 숙사에 무슨 안주가 있겠는가?
운호는 쩍 하면 나이 제일 어린 덕돌을 담임 교원네 집에 가서 김치를 가져오라고 했다. 허나 덕돌은 평소에 담임교원을 보면 어려워 머리도 들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그러니 밤중에 어떻게 담임교원의 집 문을 두드리고 김치를 달라 하겠는가?
별 수 없이 침실에서 나이 지긋한 철산을 데리고 갔다. 철산이 담임교원네 집 문을 두드릴 때 덕돌은 문 뒤에 숨어 있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밤중에 담임교원이 철산을 데리고 함께 김치움에 가서 김치를 대야에 담아 내오고 집에 들어간 후에야 덕돌은 김치 대야를 받아들고 숙사로 달아 나군 했다.
성호는 운호가 술을 마시는 게 딱 질색이었다.
“술을 마시면 난 머리가 뗑해 암송한 것도 다 날아난다.”
성호는 덕돌과 함께 침대를 바로 잡아 놓은 후 뒤말을 이었다.
“이젠 난 밤이면 여기서 홀로 자면서 책을 보겠다. 사회에 나가면 언제 일하면서 책을 보겠니? 지금 많이 봐 둬야 해. 지식은 만 가지 사업의 원동력이야. 에너지 충전을 많이 해야 돼.”
평소에 말수가 적은 성호는 이쯤하면 덕돌과 많이 말한 셈이었다.
그는 하루에 네댓 시간만 자고 동서고금의 수많은 명작과 한문도서를 읽기에 여념이 없었다.
덕돌은 성호의 독서실에서 나오면서 “신체를 돌보면서 공부해라.”라고 조용히 부탁했다.
성호는 희미한 전등 불 아래에서 철색얼굴에 미소를 지으면서 믿음에 찬 눈길로 바래었다.
집에 돌아오면서 덕돌은 성호에게 탄복했다.
(진짜 세상에 둘도 없는 수재야. 저렇게 노력하니 모든 과문에 우수를 맞았지.”
뒤이어 그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누가 책을 보면 좋은 거 몰라 그래? 실련의 구렁텅이에 빠져 이러지.)
방학이 되기 바쁘게 덕돌은 실련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려고 계획대로 세상구경을 나섰다. 세상구경을 널리 하노라면 실련의 고통을 잊을 수 있다고 하던 친구 성호와 승광의 말에 도리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화학학부에 다니는 상해지식청년에게 부탁해 학생증으로 상해까지 기차표 반표를 떼 달라고 부탁했다.
반표를 손에 쥐자 덕돌은 남방으로 달리는 열차에 올랐다.
북경에서도착하자 천안문과 고궁에 들어가 돌아보았고 만리장성에 오르고 의화원 호수에 가서 한적하게 뱃놀이도 했다. 다만 남들은 남녀들이 쌍쌍이 노를 저으면서 뱃놀이를 하는데 혼자 외롭게 노를 젓노라니 또 실련의 아픔이 가슴을 무정하게 찌른 것 같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천단공원 계단 앞에 가서 합장하고나서 하늘에 빌고 또 빌었다.
“하늘에 빌어보기도 했다.대학생처녀와의 사랑과 아름다운 전도를 내려주옵소서.”
그는 천단공원 금은 장신구방에 들어갔다가 피뜩 기이한 영감이 떠올랐다.
(만약 장사를 해서 숱한 돈을 벌어 금은 장신구를 사가지고 향항을 거쳐 일본으로 가면 어떨까? 향항이나 일본 돈이 없는 형편에서 세계 공동 화폐인 금을 사둬야 한다. 배를 타도 그렇고 금덩이를 내밀면 무슨 일이 안되겠는가?)
허나 덕돌은 인차 고향에 두고 온 늙으신 부모를 떠올렸다.
(아니야. 내가 왜 이런 불효한 생각을 또 하지. 머리 파뿌리처럼 허연 부모를 고향에 두고 어디로 가? 넌 외동아들이야. 부모를 잘 모셔야 해.)
효도와 전도가 맞부딪치면서 모진 갈등 파도를 일어켜 속이 비길 데 없었다.
(딱 일본으로 간다고 하지 말고 모든 것을 꼼꼼히 생각해보자.)
그는 천단공원의 너른 광장을 거닐면서 복잡한 생각에 잠겼다.
(모든 게 가능한가고 따져 봐야지. 무슨 장사를 해서 숱한 돈을 벌어 금은 장신구를 산단 말인가? 아니, 절대 아니야. 정상적으로 출국할 수 없는데 향항을 도주해 외국상선에 올라 일본으로 건너가야 한다. 좋기는 일본 상선이지. 다른 나라의 상선이야 일본으로 가지 않고 아프리카라도 가면 큰일이 아닌가? 상선에 어떻게 올라? 가만히 헤염 쳐 동아줄을 타고 기어오르자. 올랐다가 들키면 어떻게 하지? 금은덩이를 쥐어주면 일본에 건네 줄까? 일본에 건너갔다고 해도 무슨 일을 해 학비를 대는가? 냉혹한 일본 자본주의 세상에서 일본 청년들도 취직하기 어려운데 취직 쉽겠는가? 민족기시가 심한 섬나라에서 거지행색을 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근공 검학은 어려운 거야. 누가 도주해 불법체류중인 너를 대학에 받아준다더니? 그저 떠돌아다니면서 일본 사회를 구경할 수 있을뿐이겠지. 그러고서야 어찌 발전된 일본 사회를 제대로 알 수 있어? 그럼 일본으로 도주해 간 가치가 있는가?)
덕돌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또 부모는 어쩌지? 내가 일본에 유학을 간다고 속이고 이런 모험은 할 수 있다. 허나 내가 만약 잘못 되면 부모는 어쩌지? 한뉘 아들도 없이 딸집으로 돌아다니면서 살겠지? 물론 누나 다섯은 모두 효성이 지극하지만, 부모를 모셔야 할 아들인 내가 불효를 저질러서야 되겠는가? 혹시 일본으로 가서 돈을 많이 벌어 가지고 돌아오면 부모를 더 잘 모실 수 있지 않을까?)
허나 덕돌은 반중건중한 생각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남방으로 달리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물론 상해지식청년대학생이 떼 준 반표를 내들고 열차에 올랐다. 침대차는 바라도 보지 못했고 좌석만 있어도 얼마나 좋으랴? 허나 그 무더운 여름에 건조실 같은 열차에 기대 설 자리조차 찾기 어려웠다.
오후에 올라 온 밤을 꼿꼿이 서서 꺼떡꺼떡 졸면서 달려 이튿날 오전에 남경에 도착했다.
덕돌은 남경에서 내려 곧추 남경대교 쪽으로 버스를 타고 달려갔다. 남경대교에 올라 도도한 장강의 물결을 보는 순간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세상에 넓기도 넓은 강이 있어. 엄청 큰 강이로구나. 그래도 내 고향의 강이 더 좋아. 비록 장강에 비할바는 못 되지만 맑은 강물에 시원히 목욕하고 헤염치고. 허나 저 싯누런 장강이 몇 십 미터나 되게 깊다니 배를 타기는 좋지만 목욕하고 자맥질하기는 틀렸어.)
그는 다리 밑으로 지나가는 발 밑의 기선을 보면서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몇십미터 깊이 장강을 헤염치기도 겁나 하면서 어떻게 몇 백 미터 깊이나 되는 퍼런 바다 물에서 자맥질해 외국 상선에 다가가 올라?)
생각만 해도 모험의 대가가 아뜩하게만 생각됐다.
덕돌은 열차를 타고 한참 달리다가 소주에서 내렸다.
지도를 보니 상해를 한역 앞둔 옛 도시었다. 상해 역에 가서 괜히 반표를 내밀었다가 상해말도 온전히 하지 못하면 들키어 벌금이라도 당할 것 같았다. 소주만큼 이름난 옛 도시를 구경하고 싶었다.
소주는 옛날 2천 몇백년 전 오나라 서울이자 후에는 송나라 남쪽 임시도읍이었다. 옛날 송나라 임금도 금나라 군사들에게 쫓기어 여기 도망 와서 산적이 있었다. 하여 임금과 관리들이 미녀들을 수 없이 끌어 들여 소주와 항주에는 미녀가 많았다고 한다. 고대 오자서가 파견한 동방의 유명한 미녀 서시도 항주 부근 미녀가 아니었던가! 확실히 소주 시내에 내려 두리번거리는데 벌써 역 부근에서 왔다 갔다 하는 미녀들이 수태 눈에 띠었다.
옛날에 숱한 부패한 관리들이 소주에 낙향해 사유 원림을 건축해 고풍스러운 건축물과 원림이 유람객들의 발목을 잡고 눈길을 끌었다. 덕돌은 소주 역에서 내려 두리번거리다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옛 탑(북사탑)에 눈길을 멈추었다.
(저 탑을 구경하자.)
덕돌은 그리로 발길을 돌렸다. 남방 날씨는 찜통같이 무더웠지만 다행히 그날만은 하늘이 흐려서 그리 덥지 않았다.
탑 밑에 가 보니 옛 탑은 눈 뿌리 아찔하게 높았다. 덕돌은 탑 꼭대기에 올라 가 시원한 공기를 한껏 마시면서 소주 시내를 내리 둘러보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시내로 흐르는 강물과 울울창창한 대나무숲 속에 옛 집과 원림 그리고 인공호수가 한눈에 안겨 왔다.
(그래, 저기도 들어가 보아야지.)
덕돌은 탑에서 내리자 그 원림을 찾아갔다.
원림에 들어서니 태호의 기괴한 돌로 만든 가산들이 둘러선 곳에 거울같이 맑은 연못이 누워 있고 담에는 옛 시인들의 시사를 새긴 까만 시석이 다닥다닥 박혀 있었다. 원림에는 쌍쌍이 거니는 연인들이 한 눈에 안겨왔다. 그래도 아름다운 소주 원림의 경치 때문에 덕돌은 외로움도 실련의 고민도 서서히 희석돼 사라져가고 있었다.
(이 다음 연인을 데리고 와서 구경해야지. 에이, 영자 아니면 예쁜 처녀가 없을까봐? 쳇, 80년대 초 대학생이 어디서 예쁜 처녀를 얻지 못할까봐 걱정해?)
그는 영자를 잊어버리기로 하고 홀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점심때가 되자 두터운 구름층에서 뻘겋게 활활 타오르는 해가 뜨거운 얼굴을 내밀면서 점차 무더워나기 시작했다. 얼음과자를 사서 와삭와삭 먹어도 먹을 때뿐이지 인차 목안마저 마구 마를 지경이었다.
덕돌은 상해로 가자고 아쉬운 발길을 돌려 역으로 돌아갔다.
때마침 역 부근에서 자그만 참대바구니에 물만두를 삶아 파는 처녀가 보였다. 눈에 띠는 대로 먹는데 습관 된 그였다.
물만두를 배불리 먹고 역에 들어가 상해로 가는 기차표를 사가지고 장의자에 앉자마자 저도 몰래 호로로 잠들고 말았다.
“일어나!”
“일어나지 못할까!”
덕돌이 눈을 뜨고 보니 웬 바싹 마른 경찰 둘이 눈을 부라리는 것이었다.
“어째?”
“호주머니와 가방 안의 걸 몽땅 꺼내놔!”
덕돌은 경찰이 죄인처럼 대하는 것이 괘씸했지만 별 수 없이 꺼내 놓았다.
일어교과서를 들고 보더니 “일어를 아는가?” 하고 물었다.
덕돌이 안다고 하자 “읽어보게!” 하고 을러멨다.
덕돌은 처음에는 제대로 일어로 읽다가 입을 헤 벌리고 우멍눈을 슴벅이면서 멍청히 듣는 경찰들이 일어를 알기나 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경찰들의 눈치를 흘끔거리면서 조선말을 드문드문 섞어 읽었다.
“네가 무슨 일어를 안다고 와다시와(나)를 못살게 굴고 있니? 개 같은 새끼!”
허나 경찰은 알아듣지 못하고 “그만! 참 잘 읽는구나!”라고 했다.
다른 경찰이 “대학생인가?”라고 하며 가슴에 단 대학마크를 건드렸다.
“그래, 난 대학생이야.”
덕돌은 당당하게 대답하면서도 속으로는 무지한 경찰을 보고 막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경찰들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자도 앉아 자게. 누워 자니까 괴상하게 보이지. 대학생, 양해하게.”라고 하고는 가버렸다.
덕돌은 무식한 경찰들이 우습고도 귀해 희죽이 웃었다. 그의 입귀에서는 비난의 조소가 흐르고 있었다.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날씨는 찌는 듯이 무더웠다.
덕돌은 역에서 내리자마자 가방에 깊이 간직한 편지 한통을 꺼냈다. 그것은 상해지식청년 수호가 그의 아버지 상순에게 써 보낸 편지었다. 그 편지 주소 한통을 들고 그는 대도시 상해시에서 수호네 집을 찾아내 도움을 받으려고 했던 것이다.
허나 상해 사람들은 연변에 와서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은 상해지식청년들과는 달랐다. 편지봉투에 적힌 주소를 내들고 길을 물어보아도 돈을 줘야 알려준다고 했다. 어떤 때에는 돈을 받고서도 왕청 같은 데로 틀리게 알려줘 애를 먹게 하기까지 했다. 그러다나니 인심이 야박하기로 그지 없는 상해에서 덕돌은 이틀 동안 편지봉투를 들고 길을 물으면서 찾아다녔지만 수호네 집을 찾을 길이 없었다.
편지봉투에 적힌 주소와 대조해보면 딱 길이나 집 번호나 똑 같았다. 황포구 사천북로가 소주로 612호, 딱 맞았다. 그런데 모른다 하거나 여기에는 이런 사람이 없다고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확실히 2층으로 된 그 집은 밑층에 손마선질을 하는 복장점 밖에 없었다.
“딱 이 집이 맞는데.”
덕돌은 이번에는 자리를 뜰 염을 하지 않고 뻗치면서 아래 위를 두리번거렸다. 상해 사람들은 동북 사람으로서는 알아도 듣지 못할 상해 말로 저희들끼리 뭐라고 지껄이면서 땀을 뻘뻘 흐리며 서 있는 덕돌의 아래 위를 훑어보았다.
그중에 쌍까풀눈의 20대 초반의 처녀애가 편지봉투를 달라고 해 들여다보더니 뭐라고 말하면서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덕돌아!”
덕돌이 2층층계를 올려다보니 수호와 아내 황련지가 길림을 데리고 내려오면서 반갑게 인사했다.
“야, 네가 어떻게 돼 여기까지 왔니?”
“어서 우리 집에 올라 가자요.”
수호와 황련지는 덕돌을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가다가 아까 편지봉투를 쥐고 2층으로 올라가던 처녀애를 보고 인사시켰다.
“얘, 인사해라. 내 항상 외우던 우리 일가 은인 김 서기네 아들 덕돌이야.”
그러고 돌아서서 덕돌을 보고 “내 여동생 수매야.”라고 했다.
수호의 여동생 수매는 쌍까풀눈을 곱게 내리깔며 인사했다.
수호네 집은 10평방미터도 되나마나 했는데 누나까지 집이 없어 애들 둘이나 데리고 와서 얹혀살고 있었다. 그리하여 2층 침대를 놓고서도 잘 자리가 모자라 수호는 2층 지붕에 올라가 다른 층집과 자기 집 사이에 깔아놓은 3장의 널판 위에서 위험하게 자는 형편이었다.
그들은 먼 동북에서 온 은인의 아들을 열정적으로 접대했다. 먼저 땀벌창이 된 덕돌에게 찬 냉수를 마시게 하고 세수 대야에 찬물과 비누,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세수를 하고 찬 물까지 시원히 마시자 이번에는 돼지고기채에 닭알지짐까지 밥상에 올렸다. 덕돌은 오랜만에 맛있는 채에 밥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가방에서 마른 버섯이랑 노란 콩이랑 사탕과자랑 꺼내 놓았다. 수호네 길림은 이젠 열 살도 거의 돼 꽤나 컸다. 덕돌이 과자랑 사탕이란 주자 눈치를 할금거리다가 받아서 맛나게 먹는 길림을 보고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수호네 조카애들도 과자를 맛나게 먹으면서 대뜸 덕돌과 가까워졌다.
허나 집이 비좁아 덕돌은 수매가 주선해준 부근의 지하 여인숙에 가서 들었다. 그게 오히려 부담스럽지 않고 자유스러워 더 좋았다.
수호는 낮에는 일본인이 꾸리는 신발공장에서 일하기에 대신 여동생 수매를 보고 덕돌을 데리고 여기저기 상해 구경을 시켰다.
상해 제일 번화한 남경로나 황포강변 황포공원 부근은 인파가 어찌나 붐비는지 발을 옮겨 놓을 자리도 없을 정도여서 덕돌은 도저히 수매를 따라 다닐 수 없었다.
수매는 사람들 속에서 뒤따라오는 덕돌한테 다가오더니 쌍까풀눈을 곱게 내리뜨더니 덕돌의 팔을 끼었다. 덕돌은 좀 불 자연스러워 스리슬쩍 팔을 뺐다.
그러자 수매는 맑은 눈으로 덕돌을 바라보며 웃었다.
“호호호. 우리 상해에서는 동행자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이렇게 팔을 끼거나 손을 잡고 다녀야 해. 개혁개방시기 80년대 대학생이 어쩜 아직도 개방되지 못했어? 봉건통!”
말을 마치자 수매는 이번에는 덕돌의 손을 잡았다. 덕돌은 이번에는 손을 빼지 않았다.
이렇게 돼 그들은 연인처럼 다정하게 손을 잡고 상해 서교공원과 황포공원 그리고 남경 로의 승리공원을 돌아다녔다.
일요일이 되자 수매 대신 수호가 덕돌을 데리고 상해 남경 로에 있는 제1백화상점과 국제 빈관을 구경시켰다.
국제빈관에는 상지민의 어머니가 있었다. 덕돌과 수호는 국제빈관 대청에서 소파에 앉아 차물을 마시면서 기다리었다.
기별을 받고 상지민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상지민은 덕돌을 보자 와락 끌어안으면서 “야, 우리 은인 김 서기 아들이 왔구나. 환영한다. 환영해.”라고 했다.
뒤이어 함흥대대 조개덕에 내려왔던 상해지식청년들인 홍모, 리민, 마대랑, 소승애 모두 왔다. 그들은 앞다퉈 자기들을 여러 모로 관심해준 상순의 은정을 말하면서 그의 건강형편과 마을의 형편을 물어보았다.
그날 점심. 덕돌은 아버지가 덕을 쌓은 덕분에 으리으리한 국제빈관 식당에서 상지민 어머니가 차려준 상해 고급요리에 술을 마음껏 마셨다.
허나 국제 빈관을 나서자 너무 더워서 견디기 어려웠다. 그때 상지민이 국제 빈관의 승용차를 빌어 덕돌과 수호를 집과 여인숙까지 실어다 주었다.
이튿날 수호는 덕돌을 데리고 자기가 출근하는 일본 신발공장으로 데리고 갔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공장이었지만 상해바닥에서 일본 신식신발을 생산해 꽤나 인기가 있었다.
수호는 덕돌을 보고 “너 대학에서 일어를 배웠니?”하고 물었다.
덕돌이 머리를 끄덕이자 그는 “잘 됐다. 우리 일본 보스를 만나 일어로 대화해 보겠니?”하고 물었다.
“그러기요. 일어를 써먹어 봐야지.”
덕돌은 수호를 따라 2층에 있는 보스 사무실로 올라갔다. 대머리 보스가 안경을 춰올리며 사무 상에서 일어나 수호와 덕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수호가 다가가 종이에 한어로 “대학생”, “일어”라고 썼다. 그러자 보스는 덕돌을 쳐다보면서 반겼다.
덕돌은 일어로 “안녕하세요? 처음 뵙습니다.”라고 인사했다.
일본 보스는 아주 기분 좋아졌다.
“오랜만에 상해에서 우리 일어로 말하는 사람과 만나니 정말 기쁘오. 저기 걸상에 앉소.”
그는 손수 차 두 잔을 부어 수호와 덕돌의 앞 차탁에 놓았다. 여비서가 다가와 에어콘을 틀어놓아 영상 35도도 넘는 무더운 날씨와는 달리 아주 시원해 좋았다.
“어느 대학교를 다니오?”
보스의 물음에 덕돌은 “YJ대학에 다닙니다.”라고 솔직히 대답했다.
일본 보스는 “그 대학은 유명한 대학이죠?” 하고 묻더니 무척 덕돌에게 관심을 보이면서 이것저것 물었다.
덕돌이 유창한 일어로 술술 대답하자 보스는 나중에 이런 말을 꺼냈다.
“우리 공장에 와서 일어통역을 하지 않겠소? 높은 로임으로 초빙하지.”
그 말에 수호나 덕돌이나 너무 뜻밖이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덕돌은 한참이나 궁리했다.
(이런 일본 공장에 있을 거면 일본에 건너가지. 아직 대학졸업장도 타지 못했는데 중도에 공장에 다닌단 말인가? 지금은 견식을 넓히고 많이 배울 때인데.)
그때 피뜩 이런 영감이 번개처럼 뇌리를 쳤다.
(번화한 대도시 상해에서 일본기업소에 다니다가 저 보스를 등에 업고 일본에 건나 갈 기회를 마련하면 좋지 않을까?)
덕돌은 인차 “이제 대학을 졸업한 뒤 오면 어떨까요?”라고 헛일 삼아 말해보았다.
“환영하오.”
보스는 대번에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헌데 난 지금 이 기업소를 경영하기 힘들어 죽겠소.”
알아듣지 못한 수호는 어리벙벙해 있는데 덕돌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고 물었다.
일본 보스는 솔직히 말했다.
“우리 기업에 일어통역이 없어 힘드네. 무슨 일을 시키려고 해도 기술자나 노동자들이나 내 말을 통 알아듣지 못하네. 그래서 나는 종이와 만년필을 들고 다니면서 한자어를 써서 그래도 의사를 얼마간 전하는 형편이네. 난 지금 당장 일어통역이 필요하네. 우리 기업에 와서 일하게나.”
일본 보스가 비난사정을 하는 것을 보고 덕돌은 응모조건을 엉뚱하게 슬쩍 높였다.
“내가 여기 와서 일하면 장차 보스님께서 일본에 데리고 가서 유람도 시키고 연수도 시키겠습니까?”
“그래, 될 수 있지. 여기 와서 3년만 일을 잘 하라고. 그럼 내가 일본에 돌아갈 때면 데리고 가서 일본 구경을 시키겠네.”
일본 보스는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는 뚱뚱한 몸을 일으키며 손수건으로 번들 이마의 땀을 훔치면서 안경알 너머로 덕돌을 슬쩍 곁눈질하더니 너스레를 떨었었다.
“나 원, 참, 대도시 상해에서 일어를 아는 사람을 찾기 이렇게 힘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국제빈관에 가서 부탁했더니 진짜 일어를 아는 대학교 학생들이나 선생들은 우리 공장이 작다고 오지 않아. 외국어대학교 대학생들은 외교부나 영사관이 목표라고 해. 개혁개방한지 몇 해라고 일어인재가 이렇게도 없을 줄이야.”
일본 보스는 한참 신세타령을 하더니 이런 말을 꺼냈다.
“덕돌이라 했던가? 여름방학에 유람을 나다니는 것 같은데 개학 전까지 우리 기업에서 임시 통역을 해 줄 수 없나?”
덕돌이 수호와 한어로 말하니 수호는 “대답해라. 차비라도 마련하면 좀 좋아서.”라고 했다.
덕돌은 흔쾌히 대답했다.
덕돌은 그날부터 지하여인숙에 뒀던 짐을 싸가지고 일본 기업인 교또신발공장에서 와서 실습 삼아 통역으로 일했다.
일반노동자인 수호와는 달리 덕돌은 보스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면서 통역을 해주었다. 또 여비서와 함께 보스를 따라 상점에 가서 필요한 생활용품도 사오고 보모에게 음식부탁도 해야 했고 고급식당에도 따라다니면서 고급생활도 했다.
보스와 갈라져 공장 숙사에 돌아가면 곤한대로 가지고 간 일어교과서를 펼쳐들고 일어공부에 전념했다.
그런데 보스 이시가와씨는 아예 덕돌을 자기 집에 와서 함께 주숙하게 했다. 교또에서 건너온 그는 사모님도 데리고 오지 않아 전적으로 상해 당지에서 구한 보모가 끓여 주는 밥을 먹고 살아야 했다. 허나 말이 통하지 않아 음식습관이 다른데 음식주문을 하기 힘들어 골치 아팠던 것이다. 이젠 덕돌은 그의 입이 된 셈이어서 덕돌이 한시도 없이는 살기 어려웠던 것이다.
허나 개학이 오래지 않아 덕돌은 동북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시가와 보스는 덕돌과 갈라 질 때 두툼한 봉투를 내밀면서 신신당부했다.
“자네와 함께 있은 한달 동안은 아주 편리했네. 수고했어. 로임으로 인민페 200원을 넣었네. 대학을 졸업하면 우리 기업에 오게나. 꼭 더 높은 로임을 주겠네. 한 500원을 줄 예산이네.”
500원이면 대학을 갓 졸업한 대졸생의 1년 12개월 로임에 해당됐다. 수호가 받은 로임의 거의 10배는 됐던 것이다.
덕돌은 봉투를 받으면서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하면 그때 다시 봅시다.”
이시가와 보스는 덕돌의 손을 굳게 잡았다.
“ 믿고 기다리겠네. 덕돌이 꼭 오겠지?”
덕돌은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믿어줘서.”
덕돌이 떠나는 날 수호와 황련지는 어린 아들애 길림까지 데리고 상해 공평부두에까지 짐을 들어주며 바래였다. 그들은 길림성에 가서 재교육을 받으면서 낳은 애라고 아들애의 이름을 길림이라고 달았던 것이다.
수호는 줄 것이 없어 자기네 일본 교또신발공장에서 생산한 여름에 신는 산다를 스무 컬레나 가방에 넣어 보냈다. 공장에서 파는 가격은 1원도 되나 마나 했지만 연변에 가져다 팔면 3원 80전이나 4원씩 팔 수 있었던 것이다. 수호는 상해와 연변의 신 값을 손금을 보듯 했던 것이다. 그 신 스무 컬레를 팔면 로비를 하고도 남을 것이었다.
덕돌과 수호, 황련지는 눈물을 흘리면서 석별의 정을 나눴다. 덕돌은 신짝을 넣은 묵직한 가방을 메고 만 톤급 윤선에 올랐다.
흐린 날이어서 덥지 않아 좋았다. 윤선에 올라 시원한 바닷바람을 쏘이며 돌아 볼라니 저쪽 부두 입구에서 그때까지도 수호네 일가는 손을 젓고 있었다. 덕돌은 돌아가라고 연신 손을 저었다. 수호와 황련지는 눈물을 훔치며 손을 계속 흔들었다.
뿡-
만 톤급 장강호 윤선은 기나긴 경적을 울리더니 서서히 황포강 공평부두에서 미끄러져 강심으로 바다로 대련으로 미끌어져나갔다
“아름다운 상해여, 안녕히! 유정한 친구들아, 이제 가면 언제 다시 만나느냐? 꼭 다시 만나자!”
윤선은 깊고 깊은 석별의 정과 끝없는 고민을 싣고 푸르른 바다로 나아가고 있었다 …
제30장 망향(望乡)
1. 모험과 효성
서늘한 가을바람이 선들선들 불어와 무더위가 핥고 간 대지를 시원한 세상으로 바꿔 놓았다.
상순의 집에는 경사나 난듯이 웃음꽃이 피었다.
“나돌아 다닌 머저리 앉은 영웅보다 낫다는 말이 그른데 없다.”
명옥이 하는 말에 말수가 적은 상순도 희죽이 웃었다.
“돼지 새끼 네개를 팔아 가지고 세상구경 떠나가더니 돼지 새끼 열 마리를 벌어가지고 왔구나.”
그때 본가집에 돌아온 막내누나 성숙이가 덕돌이 대련에서 가져온 생신한 물고기를 동네 아줌마들한테 파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성숙은 경박호 옆의 상수촌 김광선한테 시집갔다. 첫애를 잃고 그 아래로 아들 영남과 영춘을 낳았는데 이번 걸음에 애들을 데리고 놀러 왔다. 그녀는 하나 밖에 없는 남동생 덕돌이 가져온 산다와 물고기를 파는 재미에 웃음꽃을 피웠다.
덕돌은 윗방에 누워서 정지 부엌바닥에서 고기가 불이 펄 나게 팔리는 것을 보면서 흐뭇해 푸른 꿈을 익히고 있었다.
글쎄 대련에서 한 근에 20전에 산 청어를 이 시골에서 1원 30전에도 사서 먹으려고 해도 없었으니 말이다. 경제가 낙후하고 변경 시골에 자리 잡은 진수해는 시내라고 해도 하나 밖에 없는 식품상점에서 청어 한 근에 1원 50전 했지만 너무 오래서 다 썩은 것 같았고 부스러기뿐이었던 것이다. 그것에 비하면 대련에서 펄떡펄떡 뛰던 생신한 청어를 사서 가져왔기에 진수해 식품상점의 청어보다 값도 20전이나 덜 받았기에 마을 사람들은 앞 다퉈 사갔다. 하여 100근 되는 물고기를 하루 새에 불이 펄 나게 몽땅 팔았다.
이번 걸음에 덕돌은 실련의 고통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널리 보았고 돈줄을 발견했다.
“그래, 대련의 물고기에 상해 교또신발공장의 신을 가져다 팔아 목돈을 벌어야지.”
물고기와 신을 팔아 일약 200원도 넘는 돈을 벌었다. 얼굴의 밭고랑 같은 주름살마저 쪽 펴진 부모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덕돌은 크게 장사를 벌려 부자로 돼 부모께 효도할 마음을 먹었다.
그는 머리가 희슥희슥한 부모를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상해에 다니면서 신 장사를 할지언정 일본으로 갈 궁리는 포기하자. 괜히 파악도 없는 일본유학을 모험했다가 늙으신 부모에게 불효를 저질러서야 안 되지. 외동아들인 나를 기둥처럼 믿고 있는데 내가 어찌 전도와 이상을 위해 부모를 버리고 일본으로 간단 말인가? 아무리 높은 로임을 준다고 해도 어찌 나를 믿고 바라보며 사는 늙으신 부모를 버리고 어찌 상해에 간단 말인가? 난 부모자식 간에 모모한 애끓는 이별이나 별거를 바라지 않는다. 아니, 이별이란 영영 없었으면 한다. 물론 이별이 있어야 상봉도 있다고 하지만 조석으로 부모자식들이 한자리에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이 세상 부모님들은 이별의 아픔을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참아나간다. 부모님들은 자식이 이 세상 어디로 가든지 잘 되기만을 바라고 자식들이 잘 되면 기뻐한다. 부모님들은 자식의 뒷다리를 절대 잡아당기지 않는다. 그러나 자식으로서 부모님들의 마음을 십분의 일이라도 알아야 할 것이고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지 말고 늙어서 의지 가지 없을 부모님의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기 혼자 잘 살겠다고 늙으신 부모를 버리고 몇 만 리 밖의 일본으로 달아난다는 것은 차마 못할 짓이다! 세상에 부모자식이 한곳에서 사는 것만큼 행복하고 즐거운 천륜지락이 또 어디 있으랴? 그런 천륜지락은 황금산과도 바꿀 수 없으리라!)
이쯤 생각하자 덕돌은 바깥에 나가서 저 멀리 서쪽의 패용천산과 칼산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충신은 효자가 아니라고 하지만 난 부모님을 잘 모시고 효성을 다하는 효자이면서도 사업도 잘하는 사업가로 되련다. 그러면 얼마나 자랑스럽겠는가? 아버지도 부모에게 효성을 하고 처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영월구 공안국 국장도 그만두고 함흥촌 시골로 돌아오지 않았던가! 그래, 그래. 나도 아버지처럼 효성이 지극했던 부모에게 지극정성을 다해 효성을 해야 한다. 아무리 가난해도 나에게 목숨과 모든 것을 주고 나를 키워준 부모 그리고 조국과 고향을 버릴 수 없다. 물론 내가 일본 유학을 하고 조국에 돌아와 조국과 고향을 위해 더 크게 일하려는 것이지만 한시도 고향과 부모를 떠날 수 없다. 모험의 길을 포기하자. 고향 연병 땅에 뿌리를 박고 부모님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돼지고기 한 점이라도 대접해드리면서 효도하며 살자. 하늘을 찌르는 거창한 사업은 하지 못해도 부모와 고향 인민들에게 효도할 뿐만 아니라 향토애와 민족애에 묻혀 우리 고향 사람들을 위해 두부모만한 글이라도 쓰면서 참답게 살아보자.)
마음을 정하자 덕돌은 앞길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효성과 부모사랑, 민족사랑, 고향사랑이 인생길에서 상상하기도 어려운 모험을 막았던 것이다.
순간 영자와의 실련의 아픔도 가뭇없이 사라졌고 패용천산과 칼산, 태평강과 부르하통하, 고향의 모든 산천이 아름답기만 했다.
둥둥 떠다닌 구름송이 같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으면서 고향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순간이었다. 그러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때 부엌칸 쪽이 부산스러워져 내려가 보니 뒤늦게 소문을 듣고 물고기를 사러 온 병진이 아쉬워하며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허참, 먹을 복이 없는 놈은 대련 물고기도 얻어먹지 못하는구먼.”
생산대 탈곡장 벼 낟가리에 불을 질렀다가 감옥에 갇혀있던 병진은 만기 석방돼 집에 돌아왔던 것이다.
그는 자기가 감옥에 간 것은 전적으로 자기 방화죄에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할 대신 상순이가 자기를 붙잡아냈기 때문이라고 여기며 나쁜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는 덕돌을 보자 물고기를 사지 못했다면서 빈정거리었다.
“허이고, 대학생이 물고기장사를 다 하오? 이 집이야 원래 약담배장사로부터 소문 난 장사군 내력인 게 뭐. 이보, 대학생, 물고기 장사를 해 장가가면 살 집을 살 예산이오?”
덕돌은 누워 있다가 스르르 일어나더니 “철주 아버지야 사회대학을 졸업한 게 대학생 위 대학생이지.”라고 맞받아 쳤다.
“저 새끼 요사한 게 말하는 거 봐라. 날 보고 사회대학을 다녔다고 비웃어?”
덕돌은 기싸움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 그 이상 더 좋은 대학이 어디 있소? 철조망을 두른 토성 안에 보초병들까지 보초를 서 주는 철창 속에서 법률공부를 하지 않았소? 철창 속에서 법을 잘 배웠으면 마을에 돌아와 말썽 작작 일으키고 노실하게 사오. 자칫 하면 돌을 들어 재차 자기 발을 깔게요!”
병진은 덕돌의 성격을 아는지라 무섭게 번뜩이는 눈길과 경고하는 것을 보고 두덜거리면서 고개를 숙이더니 비실비실 뒤로 물러서다가 돌아가 버렸다.
덕돌이 대학교 숙사에 돌아가니 졸업배치가 시작돼서 동창생들은 모두 각자 이상에 따라 지망을 쓰고 이른바 “공작”을 하느라고 달아 다녔다. 술과 과자를 사들고 담임교원을 찾아가고 학부 주임을 찾아가 통사정을 들이댔다. 담임교원들도 제자들의 졸업배치 때문에 머리 아팠다. 어느 제자의 이익에도 도움이 되게 해주고 싶은 것이 스승의 마음이었다. 마치 자식이 많은 아비가 자식 전도를 걱정하듯이. 허나 가지 많은 나무가 바람에 성할 때가 없는 법이었다. 제자들 속에는 별의별 해괴한 일이 다 벌어졌다. 어떤 제자는 상대방이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는 정보를 장악해 가지고 자기 이해득실에 영향이 있으면 담임교원이나 학부장을 찾아가 물어뜯고 훼방을 놓았고 자기가 적임자임을 내세웠다.
덕돌은 글을 쓰는 신문사나 방송국이 아니면 출판사나 문화관 창작 실 같은데 가는 것이 소원이었다. 허나 농민의 아들이 그런 보도기관이거나 문화단위에 배치 받는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진짜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힘든 일이었다. 남들은 가문의 문벌이 높아서 기자나 편집 혹은 명작가의 아들딸이거나 사위가 아니면 며느리어서 그런 동창생들의 부모들이 이런 저런 관계를 통해 청탁을 하고 예물작전을 하는 판에 무슨 수로 경쟁이 치열한 그런 단위로 들어간단 말인가?
덕돌은 생각만 해도 골이 아팠다. 허나 세상에 얽매여 살지 않고 일본이나 상해에 가서 모험적으로 살아보려던 그여서 초현실적인 환상에 잠기면서 자기 위안하는 방법으로 암흑한 현실에서 해탈되려고 애썼다.
(세상이 더러워서. 원, 그까짓 신문사나 방송국을 대단하게 생각하는 거 같아? 난 일본에 유학을 가려던 이상도 꺾고 이런 골 안에 물앉았는데. 상해 일본 기업소에서 오라는 것도 가지 않아. 여기 로임의 10배를 주겠다는 것도 그만 뒀는데. 너희들을 대단하게 보는 거 같아? 아무 일이나 하면서 부모를 잘 모시면 되지. 인생은 마라토너야. 꼭 내 능력과 노력으로 경쟁할 테야.)
덕돌이 머리 아파할 때다. 이모부 강운룡네 아들 강호가 찾아왔다.
덕돌은 울적해 있던 차라 오랜만에 찾아온 강호를 식당에 데리고 가서 채 두 접시를 마주하고 술잔을 기울였다.
“무슨 일로 찾아왔니?”
강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형님, 교통경찰을 하니 별의별 위법하는 운전수를 다 만나오. 언제 무슨 보복을 당할지 모르겠소. 그래서 형님한테서 호신술로 쓸 권투나 무술을 배워 달라고 찾아왔소.”
덕돌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강호야, 좋은 경찰을 하면서 딱 주먹을 휘둘러야 되니? 법으로 일을 처리해야지.”
강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형님, ‘문화대혁명’은 끝났지만 이 세상은 아직도 얼마나 어지럽다고 그러오? 모든 게 법으로 될 거 같소?”
강호는 술병을 들어 덕돌의 술잔에 부어주면서 뒷말을 이었다.
“속담에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그른데 없소. 경찰도 자기 몸을 보호하려면 호신술 닦아야 하오.”
그러자 덕돌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그 말에 도리는 있다. 그럼 어째 아버지한테서 배우지 않니? 네 아버지는 항미원조 전쟁 때부터 특종병 출신이 아니고 뭐냐?”
강호는 “주먹을 믿고 아무 짓이나 할까봐 배워주지 않소.”라고 하며 답답해했다.
“지금 내 대학졸업배치로 해 골이 아프다. 배워 줄 새도 없다.”
강호는 머리를 들고 덕돌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님, 아버지와 말해서 형님을 시내에 남겨달라고 하라오? 국장인 아버지가 나서면 형님 졸업배치쯤은 문제없을 거요.”
허나 덕돌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신문사나 문화관 같은데 갈수 있겠니?”
“말해 볼게.”
“고맙다.”
덕돌은 강호를 드문드문 학교 청사 뒤 소나무 숲이거나 부르하통하 버들방천에 데리고 가서 권투를 배워주었다. 실전에서 호신술로 쓸 실용적인 간단한 동작을 배워주었다.
한편 이모부는 여기저기 수소문해 덕돌의 졸업배치를 도와 나섰다. 그러나 이모부 강운룡은 공안국과 검찰원, 법원 같은 기관에는 면목이 넓었지만 문화단위나 보도기관에는 인맥이 뻗치지 못했다. 그리하여 시내 문화관에 남으려던 덕돌의 소박한 이상마저 물거품으로 돼버렸다.
핍박에 못 이겨 덕돌은 아버지에게 “이계삼 서기나 허영주 부 현장과 말해서 시내 학교에 남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상순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사회에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하면서 뒷문거래에 의거해서야 장차 어떻게 제대로 일하겠느냐? 사람은 자기 능력을 믿고 살아야 한다.”
어지럽게 된 세상에서 광목천을 쓰고 진흙탕 속에 뛰어들지 않으려는 아버지가 고상하면서도 아들의 전도에 관계되는 일에도 나서지 않는 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중에 덕돌은 진수해 당위 선전위원으로 사업하는 성환의 소개로 문화교육을 책임진 허영주 부 현장을 찾아가 도움을 받아 진수해중학교에 배치받았다.
중학교로 배치 받아 가기 전에 상해 일본 교또신발공장의 보스 이시가와 보스한테서 편지가 날아왔다.
보고 싶은 덕돌이, 안녕하오? 오랜만이오.
이젠 졸업할 때도 됐겠지? 약속대로 우리 기업에 오게나. 우린 한 달에 500원의 높은 로임으로 자네를 통역원으로 초빙하네. 만약 일반 통역이 지위가 낮다고 생각하면 장차 비서실장으로 제발시킬 수도 있네. 어때? 100명도 넘는 직원을 가진 우리 기업에 와서 일해보지 않겠나?
속히 회답하게나. 난 하루가 삼추 되게 자네가 오기를 기다리네. 잘 부탁 하네…
편지를 읽고 나서 덕돌은 희비가 겹치어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편지를 꾸겨 호주머니에 넣고 고민에 빠졌다.
(혹시 상해에 가서 높은 로임을 받아 부모한테 부쳐드리면 효성을 더 잘 하는 건 아닐까? 허나 옆에 외동아들이 없어도 되는 건가?)
그는 효성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돈을 많이 드리는 것이 효성의 전부인가? 옆에 자식이 없이도 돈만 많이 가지고 근심 없이 잘 살게 하면 천륜지락을 누린 것인가? 아니다. 허나 옆에서 조석으로 모시고 있지만 부모께서 이 근심 저 걱정 다 하면서 온전히 입지도 못하고 늘그막까지 일을 해야 근근득식 한다면 자식 된 도리를 제대로 한 건가?)
칼바람이 덕돌의 얼굴을 쇠깍쟁이로 긁어내듯이 불어쳤다. 덕돌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광야를 터벅터벅 걸어 진수해로부터 조개덕으로 돌아가면서 생각을 거듭했다.
(아니야. 부자로 돼 부모를 부유하게 모시지는 못해도 하나 밖에 없는 외동아들인 내가 가까이에 있으면서 부모를 조석으로 모시는 것이 옳다. 이거야 말로 천륜지락이야. 아무리 황금산을 쌓아 놓고 산다한들 만리 떨어져 있어서야 무슨 효성인가? 무슨 천륜지락이란 말인가?)
이쯤 생각이 재차 잡히자 덕돌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돈이야 벌면 있겠지만 부모자식간의 천륜지락이야 돈을 주고서도 살 수 없다. 진수해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면서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 대련과 상해를 드나들면서 물고기와 신 장사를 하면 돈이야 얼마간 벌수 있지 않는가. 돈 줄이야 국내에 있으면서도 하나하나 발견할 수 있겠지. 딱 일본에 가야만 잘 살 수 있겠는가?”
집에 돌아가자 그는 진수해중학교에 배치 받은 일을 말하면서 아버지 앞에 인사국의 졸업배치 소개신을 꺼내 보였다.
상순은 소개신을 들고 보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됐다. 이게 너의 학습 성적과 능력으로 얻은 졸업배치이다. 옛날부터 훈장의 똥은 개도 먹지 않는다고 했다. 그만큼 훈장질을 하는 일이 힘들다는 얘기다. 혹시 네가 글을 쓰려는 이상과 모순될 수도 있다. 허나 그런 모순을 재빨리 해결하고 현실에 발을 붙이고 훈장을 잘해라. 우리 가문에 처음으로 훈장이 나온 거 아니냐? 아주 장하다.”
아버지는 항상 그러했다. 그 어떤 곤난도 완강한 의력으로 박차고 나가라고 신심을 주는 것이었다.
아직도 한 달이나 지나야 개학이었다.
덕돌은 아버지를 보고 소를 팔아달라고 했다.
“뭘 하자고 그래? 졸업배치도 다 받았는데.”
덕돌은 우쭐 일어나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바깥을 내다보다가 머리를 돌렸다.
“아버지, 대련에 가서 물고기를 사다 팔가 합니다.”
“또 물고기장사를?”
“예.”
상순은 놀라했다.
“야, 이놈아, 저 혹달개소는 우리 집 목숨과 같다. 소를 팔아 본전도 못하면 황소 없이 새해 농사를 어떻게 짓니?”
명옥도 말렸다.
“야, 이놈아, 대학을 졸업했으면 됐지. 뭐가 모자라서 황소를 팔아 물고기장사를 한단 말이냐?”
명옥은 저녁밥을 지으려고 쌀을 쌀 함박에 일다가 우는 상을 지었다.
“야, 저 놈의 씨는 말리지 못한다. 딱 제 아비 닮았구나. 너 아비 젊어서 소금 장사를 하다가 나중에 약 담배 장사를 해 혼났다. 돈을 벌기는 고사하고 나중에 빚더미에 깔려 내 그 빚을 무는 게 혼났다. 농사를 지어서 물다 못해 술도 빚느라고 집에 불이 다 달렸지. 아비가 공산당 덕분에 장사를 하지 못하게 해 농사를 지으면서 장사를 그만두더니. 네가 왜 나서니? 이제 살만하니 또 황소를 팔아 물고기 장사를 해? 이 놈아, 대학을 졸업하고 한 달에 45원씩 타게 되면 살만하다. 몇해 전에 온 집 식구들이 한해 농사를 지어도 10원 돈도 타지 못했는데 네가 혼자 두 달이면 한해 농사 돈을 타는데 뭐가 모자라 그러니? 원, 장사란 말만 들어도 진절머리 난다. 그만둬라. 훈장질이나 잘 해라.”
덕돌이 뭘 하려고 해도 말리지 않고 다 받들어주던 어머니가 막아 나섰다.
덕돌이 아버지 눈치를 보았다. 아버지의 결단에 달렸던 것이다.
말수가 적은 상순은 한참 궁리하더니 뜻밖에 지지해 나섰다.
“물고기장사를 해라. 내일 소를 팔아 줄게.”
그 말에 명옥은 기 막혀 불을 때다가 구들에 달려 올라와 죽는 상을 했다.
“아니, 이 영감이 정신 있소? 하나 아들을 계속 장사를 시킬 예산이오? 이제 집을 팔아 장사를 하자고 하지 않는가 보오.”
허나 상순은 마음을 굳게 먹은 상 싶었다.
“허참, 여자들이란 소견이 좁소. 전번에도 물고기를 팔아 200원을 벌지 않았소?”
그는 누가 들을까봐 목소리를 낮춰 뒷말을 이었다.
“전번에 30전짜리 물고기를 가져다 1원 30전씩 팔지 않았소. 운 비를 제하고도 한 근에 70전 벌었소. 어디서 그런 목돈을 벌겠소? 할 만한 장사요.”
그리하여 덕돌은 며칠 후에 혹달개 소를 판 돈 500원을 가지고 대련 행 열차에 올랐다.
하루 밤낮을 꼿꼿이 앉아 대련에 도착해 내리니 해변가 날씨어서 장백산 아래 날씨와는 판판 달랐다.
덕돌이 추울까봐 가죽털모자를 쓰고 긴 군복외투를 입고 시내 전차에 탔더니 숱한 아가씨들이 핼금거리며 킥킥 거렸다.
음력설이 돼가는데 대련의 날씨는 춥지 않아 모두 털실내복에 홑옷바람이었다. 여름에 왔을 때는 해풍이 불어와 덥지 않더니 겨울에는 춥지 않아 살기 좋은 대도시였다.
호텔을 잡고 들자 덕돌은 대련 사람들처럼 털실내복에 홑옷바람으로 시내돌이를 나갔다.
그는 먼저 대련 역 화물처로 찾아 갔다.
거기서 한참 숱한 물건을 부치는 것을 여겨보았다. 혹시 젖은 물고기를 부치는 사람이있는가고 살펴 보았다.
허나 마른 고기를 부치는 사람은 있어도 젖은 물고기를 부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반나절이나 살피다가 더 기다릴 수 없어 덕돌은 여직원에게 넌지시 “젖은 물고기를 부칠 수 있습니까?”고 물어보았다.
“부칠 수 있어요.”
덕돌은 자기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젖은 물고기도 부칠 수 있습니까?”
재차 묻자 여직원은 덕돌을 흘금 쳐다보며 “금방 대답했잖아요? 부칠 수 있어요. 젖은 물고기든 언 고기든 다 부칠 수 있어요.”라고 했다.
“감사합니다.”
덕돌은 너무 기뻐 허리를 굽히며 인사까지 했다.
그러자 그 여직원은 우스워 왼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어서 젖은 물고기를 실어와요. 어디로 부치려고 그래요?”
“연변에 부치려고 그럽니다.”
“부칠 물고기 얼마나 돼요?”
“대여섯 마대 될 거 같습니다.”
“음, 그럼 삼륜차군들을 보고 실어달라고 해요. 운비는 한 5~6원이면 돼요.”
“감사합니다.‘
말을 마치자 덕돌은 상해에서 돌아올 때 들리었던 대련 어물시장으로 시내전차를 타고 달려갔다.
먼저 돌아다니면서 생신한 청어와 갈치, 오징어, 낙지 등을 두루 돌면서 가격이랑 알아본 다음 시장 어귀에서 삼륜차꾼들 앞으로 찾아갔다.
삼륜차군들은 서로 일감을 빼앗을 내기 했다. 그리하여 덕돌은 운 비를 6원을 주기로 하고 손쉽게 삼륜차꾼을 구했다.
삼륜차꾼을 데리고 삼륜차를 끌고 물고기 장사꾼들 앞으로 갔다.
덕돌은 많이 산다는 조건을 앞세우고 물고기 값을 싹싹 깎아 생신한 청어는 한 근에 20전에, 갈치는 한 근에 50전에, 낙지는 몇 근씩 하는 한 근에 1원씩 흥정해 저울눈을 일일이 까근히 살펴가면서 도합 열 마대나 사놓았다. 그는 물고기장사군과 삼륜차군을 시켜 삼륜차에 싣게 하고 자기는 십장처럼 두 손을 허리에 지르고 물고기를 빼내가지 않는가 큼직한 눈을 뚝 부릅뜨고 살폈다. 물고기를 삼륜차에 다 실은 후에야 덕돌은 품속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물고기 값을 넘겨주었다.
뒤이어 삼륜차군이 밀다가 타는 삼륜차 옆 좌석에 걸터앉아 대련 역 화물 처로 달려갔다.
화물 처 여직원은 산더미 같은 물고기를 보고 입을 딱 벌렸다.
“꽤나 한다하는 물고기장사군이군요. 이걸 연길에 가지고 가서 팔면 얼마나 벌까요?”
덕돌은 장사를 할 때엔 누구도 믿지 말라던 아버지 말을 떠올리자 거짓말을 꾸며댔다.
“운비에 차비에 숙비까지 제하고 나면 한 근에 10전이나 떨어지겠는지 모르겠습니다.”
여직원은 물고기를 부쳐주면서 “그래도 이 숱한 물고기를 팔면 적어도 200원은 떨어지겠어요. 200원이면 내 여섯 달 로임이예요.”라고 하며 혀를 내둘렀다.
“이걸 다 팔려면 그리 쉽겠습니까?”
이러루하게 대화를 하는 새 물고기도 다 부쳤다.
화물 처와 삼륜차군에게 운 비를 물고 나니 한숨이 후 나왔다.
화물 처를 떠나면서 여직원에게 인사를 하고 그 길로 귀로에 오를 가고 생각하다가 머나먼 대련에 왔다가 구경하지 않고 돌아가기는 너무 아쉬웠다. 그러나 겨울이어서 로호탄(老虎滩)공원이거나 성해(星海)공원으로 가서 바다구경을 해보았자 그저 그럴 것 같았다.
역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그는 발길을 돌렸다.
(에라, 모르겠다. 식당에 들어가 한 때 잘 먹고 보자.)
그리하여 그는 역 광장 앞에 있는 해물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는 말쑥하게 생긴 여복무원을 불러 갈치볶음 한 사발에 술 반근, 밥 두 그릇을 주문했다. 도합 1원 10전을 내고 배터지게 먹었다.
진수해에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갈치 한 근에 거의 60전을 하는데 한 사발을, 그것도 볶은 갈치인데 한 사발에 50전 밖에 하지 않았다.
“그래, 뭐나 원산지면 눅은 법이구나.”
덕돌은 술잔을 굽내고 갈치를 집어 먹으면서 피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물고기는 대련에서 사면 눅어. 허나 이런 상업기밀은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아야 해. 혹시 소문이 나가면 속심이 별난 사람들이 나를 장사를 하라고 물고기를 사겠니?”
덕돌은 대련의 물고기로 큰 장사를 할 푸르른 꿈을 꾸면서 열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덕돌은 이튿날 오후에 아버지와 함께 진수해 화물 처에 가보았는데 벌써 10마대나 되는 물고기가 한마대도 차나지 않고 도착했던 것이다.
한 수레에 산더미처럼 물고기를 꽉 박아 싣고 집으로 돌아오는 부자간은 단통 부자로 된 듯이 가슴이 부풀어 올라 둥둥 뜬 기분이었다.
시골 사람들은 덕돌이 또 물고기를 가져왔다고 하자 와 모여들어 설 준비로 물고기를 사갔다. 공것을 싫어하는 덕돌의 둘째누나 은숙은 계순을 업고 와서 청어에 갈치를 사갔다. 덕돌은 너무 한 것 같아 동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슬그머니 청어 서너 마리를 가져다 주었다.
그때 성욱의 삼촌이 성욱과 함께 물고기를 사러 와서 구경했다.
“형님이 왔소? 어서 올라오오.”
성욱의 삼촌 광학은 덕돌의 팔촌형벌이 됐다.
“야, 우리 백성자에는 이런 물고기가 없다. 정말 희구하다야. 이 물고기를 어디서 샀니?”
덕돌은 상업기밀이 누설될까봐 “심양에서 샀소.”라고 했다.
그러자 광학은 성욱을 곁눈질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쳇, 너희들이 물고기장사라도 할 예산이냐?)
장사군은 제 아비도 속인다고 덕돌은 콧방귀를 뀌면서 8촌형도 감쪽같이 속였다. 그러는 덕돌을 보고 상순은 못 마땅한 눈길을 보냈다.
“형님, 정말 한가지 묻기오? 백성자는 초원지구가 아니오?”
광학은 구들에 퍼더버리고 앉아 턱을 고인 채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가 본적이 있니?”
“아니, 없소.”
덕돌은 피뜩 떠오르는 뭔가 있어 물었다.
“그 곳에 말이나 젖소 값이 어떻소?”
그러자 광학은 “젖소 갑이 눅다. 젓소 한 마리에 한 600원 할까?”라고 했다.
“젖을 짤 수 있는 젖소 한 마리에 600원?”
“응, 그래.”
덕돌은 진수해 부근에서 젖소가 귀해 젖을 내는 한 마리에 2,000원씩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귀가 번쩍 뜨인 덕돌은 젖소 장사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 만에 대련에서 가져온 물고기를 다 팔았다. 물론 덕돌의 어머니가 나머지 물고기를 함지박에 담아 이고 눈보라가 이는 추운 날에 진수해 장마당에 가서 파느라고 고생을 했다. 하지만 한 열흘 온 집식구들이 고생해 소한마리를 팔아 1200원을 수입해 소 두 마리를 살 돈을 벌고도 물고기 얼마간 남아 집식구들이 음력설에 실컷 먹을 수 있었다. 새우는 온 여름까지 두고 먹어도 될 것 같았다.
그러자 덕돌은 용기를 얻고 대담히 큰 장사를 할 궁리를 내놓았다.
“아버지, 내 광학형님네 백성에 가서 젖소를 사다가 팔아 일약 갑부로 되겠소. 물고기를 판 돈을 주시오.”
그러자 명옥이 먼저 반발했다.
“야, 정신 있니? 돈을 벌었을 때 그만둬라. 난 풍설이 이는데 물고기를 이고 다니면서 파느라고 애 똑 떨어졌다. 이젠 난 물고기를 이고 다니면서 팔지 못하겠다. 장사를 싹 걷어치워라. 대학을 졸업했으면 교원이나 잘해 로임을 쪽쪽 타 살 궁리나 해라. 허욕을 작작 부려라. 내 네 아비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니?”
명옥은 남편의 눈치를 곁눈질 하면서 불평을 토로했다.
“이전에 너 아비 약 담배 장사를 해서 3,000원이나 벌었다. 그 돈이면 소 50마리, 소서구를 통째로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다. 그만하면 지주라도 됐겠다. 내 이젠 약 담배 장사를 그만두라고 하니 계속 하더니 그 번 돈을 다 떼우고도 빚 가리에 깔리어 죽을 고생을 다 했다. 너도 소 한 마리를 벌었을 때 그만 둬라.”
허나 덕돌은 계속 고집을 부렸다.
“이번엔 소 두 마리만 사다가 팔면 4,000원을 벌면 소 한 마리를 팔아 여덟 마리를 얻는 게 되지 않소? 내 엄마를 보고 물고기를 이고 다니면서 팔라오?”
그때 옆에서 모자간을 보고만 있던 상순이 무겁게 입을 뗐다.
“그만 둬라. 장사란 자기 눈으로 똑똑히 보고 해야 한다. 광학의 말을 귀 넓어서 믿었다가 젖소 값이 더 비싸면 어쩌니? 공 차비를 팔고 그 먼 백성자로 갈게 있니?”
덕돌은 멀거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상순은 덕돌이 듣는 눈치인지라 뒷말을 이었다.
“뭐나 냉정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저 젖소 두 마리를 사다가 팔면 4천원이나 번다고 산수만 하지 마라. 백성자의 젖소 값과 우유 값도 알아봐야 한다. 소젖이 잘 팔려야 젖소 값도 그렇게 비싼 거야. 또 여기 와서 정말 2천원을 받을 수 있는지? 만약 젖소가 팔리지 않으면 어쩌니? ”
상순은 덕돌의 어깨를 다독였다.
“얘야, 돈에 눈이 어두워 자꾸 장사할 예산만 하지 마라. 돈 때 묻은 눈은 다른 게 잘 보이지 않는다. 탐욕은 부패와 재난을 나을 수도 있다. 난 해방 전에 집이 가난해 소학교 문에도 들어가 보지 못했다. 너 한 공부 10분의 1만 공부해도 난 현장도 했을 거야. 넌 내 몫까지 해 대학공부까지 했는데 사회 어엿한 간부로 돼야 한다. 교원으로 됐으니 우선 우리 고향 학생들을 위해 교원 사업을 착실히 해라.”
허나 덕돌은 자기 계획한 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방학에 장사를 한다고 교원 사업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순은 자기 말을 다음과 같이 매듭지었다.
“그만 해서 그만 둬라. 당장 밭갈이를 해야 하겠는데 황소 한 마리는 사놔야 되지 않겠니? 오래지 않으면 개학도 되는데 교원이나 잘 할 준비나 해라.”
모든 것이 결론이 난 셈이었다.
덕돌은 벽이라도 차고 나가는 아버지 성격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상순은 조만에 소홀히 먼저 입을 열지 않고 한참씩 여러 모로 궁리를 한 후 입을 열면 복판을 치는 얘기를 했다. 반박할 여지없이 정확한 결론을 내리곤 했다. 그 말을 들어서 언제나 후회할 일은 없었던 것이다.
덕돌은 유리창문으로 눈보라 윙윙 휘몰아치는 바깥을 내다보면서 뜨거워 오른 머리를 식히고 있었다.
눈보라가 백용처럼 파도치며 대지를 무섭게 휩쓸며 지나가고 있었다.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