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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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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실화소설 38선에서 싸우던 나날에(6)
2018년 12월 02일 12시 36분  조회:1468  추천:1  작성자: 김장혁



         래봉장에서의 겨룸
       리해식은 정전대표단의 문화선전을 책임진 간사로서 조국에서 문예계 대표단이 개성에 오기만 하면 래봉장에 안내하고 래봉장에서의 첫겨룸을 소개해주군 하였다.
       래봉장은 송악산 남쪽 기슭, 개성시 고려동 북쪽끝에 자리잡고 있다. 차를 타고 래봉장에 가 둘러보면 사면이 산에 둘러싸이고 장원에 여러가지 버드나무들이 우거진 것이 한눈에 안겨온다. 래봉장 대문 밖의 언덕에는 작은 옛탑이 서 있다. 래봉장 대문으로 울안에 들어서면 우거진 록음 속에 인공호가 조용히 누워 있고 호수 가운데 작은 수중 정자가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호수 량 옆에는 래봉장 큰 건축물로 통할 수 있는 두갈래 오솔길이 나 있다.
      래봉장 단층집 왼쪽은 곁채이고 복판에는 두개의 큰 원채가 있다. 첫 원채는 쌍방의 참모일군들이 정기회의를 연 곳이다. 두번째 정면대청은 첫 정전담판을 한 곳이다. 후에 담판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겨갔지만 래봉장의 담판대청의 탁자며 의자며 모든 것을 그대로 두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제는 쏘련을 주요적수로 하고 전략적 중점을 구라파에 두었다. 미제는 조선전쟁에 륙군 총수의 3분의 1에 달하는 9개 사단, 공군의 5분의 1에 달하는 1,450여대의 비행기와 해군의 절반에 달하는 함대와 해군 륙전대를 투입시키고 많은 군사장비와 물자를 투입하였다. 그런데 의연히 날따라 패배하는 국면을 돌려세울 수 없었다. 게다가 조선전쟁으로 하여 구라파에서의 방어력량(당시 구라파에는 6개 산단 밖에 없었다.)이 영향을 받는 불리한 형편에서 부득불 조선전쟁을 시급히 끝내고 발을 빼려고 하였다.
       1951년 5월 31일, 미제와 유엔군이 우리 중조 부대의 다섯번째 타격을 받아38선 이남으로 쫓기워간 후, 당시 미국 국무경 애치슨은 그의 고문이며 일찍 쏘련 주재 미국 대사로 있은 카이난을 시켜 개인신분으로 유엔 주재 쏘련 대표 마리끄를 통해 조선정전담판의 가능성을 알아보게 하였다.
        6월 23일, 마리끄는 유엔 보도기구를 통해 조선전쟁 쌍방에 정전담판을 할 것을 건의하고 외국 군대가 조선반도에서 철거할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어 6월 30일, 유엔군 총사령관 리치위 장군은 미국정부의 위임을 받고 중조부대에 방송연설을 하였다. 그는 방송연설에서 자기는 미국 정부의 명령에 좇아 조선정전담판을 하려 하며 담판은 조선 동해의 원산항구 밖의 단마르크료양선에서 할 수 있다고 하였다.
7월 1일, 중조 측의 김일성 수상과 팽덕회 총사령원은 라지오방송을 통해 담판을 동의하며 담판지점을 38선에 있는 개성지구에서 하며 시간은 1951년 7월 10일부터 15일까지 사이로 하자고 하였다.
        7월 8일, 제1차 정전담판을 준비하기 위한 쌍방 련락관들의 예비회의가 여기 래봉장에서 먼저 열리게 되였다.
오전 8시 22분 맑디맑은 개성시 하늘에 미국 직승비행기(헬기) 한대가 나타나더니 요란한 엔진과 프로펠라 소리를 내면서 개성시 서북쪽으로 날아가 고려동 래봉장 부근의 지정된 곳에 내렸다.
       비행기 문이 열리더니 미국측 대표 켄니아 상좌를 비롯한 3명의 군관과 2명의 번역원이 내려 겁기어린 눈길로 여기저기를 힐끔거리면서 래봉장 대문 안에 들어갔다.
       오전 8시 반, 련락관회의가 정식으로 열렸다. 우리 중조 측에서는 조선인민군 상좌 장춘산, 중국인민지원군의 시성문 등 3명 군관이 참가하였다. 맞눈총을 놓는 담판대청의 분위기는 매우 팽팽하였다.
중조 측의 수석련락관 장춘산 상좌가 먼저 회의를 시작한다고 선포하고 예비회의의 중요성과 회의내용을 강조하였다.
“이번 회의는 정식담판대효회의 장소와 휴식실, 공급 및 기타 해당 문제를 사전에 토론하고 준비하여 정식대표회의에 유리한 조건을 지어주는 것입니다.”
미군측 수석련락관 켄니아 상좌는 별다른 생각도 없이 “고맙습니다.” 하고 한마디 할뿔이였다.
장춘산 상좌가 켄니아 상좌에게 “먼저 어느 문제를 토론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하고 묻자
켄니아 상좌는 꿈에서 깨여난듯 불쑥 물었다.
“정식회의를 언제 열려고 합니까?”
그러자 중조측 대표들은 대답 대신 코웃음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쌍방의 최고사령관들이 편지로 정식담판은 7월 10일부터 15일에 열기로 결정하지 않았는가. 실로 코 막고 답답한 노릇이였다.
이때 갑자기 꽝 하고 소리 났다.
간이 콩알만해 창문 곁에 앉아 있던 괴뢰군 련락관 리수영 중좌는 깜짝 놀라 그만 걸상에서 떨어져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는 얼음강판에 넘어져 버둑거리는 소 눈깔로 희번뜩거리며  두리번거리다가 바람에 창문이 꽝 닫긴 소리라는 걸 알고서야 제풀에 얼굴이 귀밑까지 벌개졌다. 그는 그제야 엉뎅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제자리엣 돌아가 앉았다.
좀 지나 또 회장 바깥의 문이 바람에 꽝 떨어져 넘어갔다. 미군의 한 련락관은 깜짝 놀라 떼굴떼굴 주위를 살피다가 문이 넘어간 걸 보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후- 내쉬였다.
회의에서 우리 측이 제기한 의견을 미군 측에서 다 접수하였다. 이어 군사정전담판에 참가한 쌍방 정식대표명단을 교환한 후 회의를 끝냈다.
7월 10일 오전 8시 전 세계 인민들의 눈길을 모으는 조선정전담판이 래봉장 담판대청에서 정식으로 열리게 되였다.
중조 측 담판대표단 수석대표로는 조선인민군 대장 남일이였고 대표들로는 조선인민군 소장 리상조, 중국인민지원군 부사령원 등화 장군, 참모장 태방 장군, 조선인민군 소장 장평산이였다.
유엔군측의 수석대표로는 미군 원동해군 사령원 쵸이 중장이였고 대표들로는 미군 공군 소장 크레찌, 미군 륙군 소장 코디스, 해군 소장 베크, 리승만 괴뢰군 소장 백선엽이였다.
유엔군측 대표들은 중조측의 요구와 준비회의의 사전결정에 따라 의외사고를 방지하고 안전을 위해 백기를 꽂은 찌프차에 앉아 38선을 넘어 래봉장에까지 느릿느릿 달려왔다. 그 모양을 보고 중조측 담판대표단 일군들은 미제 사촉하에 움직이는 유엔군이 투항을 상징하는 백기를 걸고 온다고 비웃었다.
회의가 시작되자 미국 측 대표들은 담판석상에서 전쟁의 모든 죄과를 중조 측에 들씌우면서 담판에 장애를 조성하였다.
쌍방이 담판회의 의정을 토론할 때 중조측 수석대표 남일 장군이 담판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에 대해 세가지 의정안을 제기하였다.
“첫째, 쌍방에서 협희한 후 모든 군사행동을 정지해야 합니다. 둘째, 38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고 전쟁포로송환 등 문제를 토의해야 합니다. 셋째, 모든 외국군대를 조선으로부터 철거시킨 문제를 토의해야 합니다.”
남일 장군의 발언에 뒤이어 등화 장군이 남일 장군의 세가지 제의안을 지지한다고 발언하였다.
미군측 수석대표 쵸이 장군은 도리여 괴상한 론조로 문제를 제기하였다.
“정전 유관 제 항목에 협의를 달성하고 군사정전위원회를 세워 사업하기 전에는 군사행동을 정지할 수 없습니다.”
뒤이어 쵸이 장군은 “우선 전쟁포로를 송환할 문제부터 토론합시다.”라고 하였다.
오전의 담판은 의정문까지 협의를 달성하지 못하고 끝났다.
오후 회의에서 미군측은 갑자기 유엔군측의 20여명의 기자들을 회의에 참가시킬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우리 중조측에서는 미군측의 무리한 요구를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고 쌍방의 협상을 거쳐 합당한 시기에 쌍방의 기자가 개성에 들어와 취재할 수 있도록 허락할데 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첫날의 담판은 의정문제마저 협의도 맺지 못하고 끝났다.
7월 12일 오전 7시 45분, 미군측에서는 쌍방의 협상을 거치지도 않고 20명 기자와 65명 대표단 성원을 숱한 차에 태워가지고 개성 동남쪽의 판문점에 들이닥쳤다. 그들을 몽땅 래봉장회의에 참가시키려는 것이였다.
판문점에 있던 중조측 련락관은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대표단 대표들만 지나가게 하였다. 무지막지하고 야만적인 쵸이 장군은 붉으락푸르락해서 숱한 차대를 끌고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면서 되돌아 달아났다.
그런 뒤 사흘이나 담판석상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7월 15링에야 미군측 대표들은 낯을 내밀었다.
중조측의 제의하에 쌍방이 협상한 후 개성시 십자로어귀를 중심으로 반경 5백야드 지대를 중립구로 정하였다. 중립구내에서는 일체 군사활동을 엄금하며 중조 단방면의 적은 수효의 군사경찰일군들이 경무기를 휴대하고 중립구의 안전사업을 책임지게 하였다.
담판의정문제에 대해서 7월 26일까지 쟁론하던 끝에 겨우 다섯가지 의정안만 협의를 달성했다.
7월 27일, 실제문제를 토론하기 시작하자 미군측 수석대표 쵸이 장군은 싸움터에서 얻지 못한 것을 담판석상에서 얻어보려고 목에 지렁이 같은 피줄을 세우고 침방을 튕기면서 떠들어댔다.
그는 세계여론과 조선전장의 실제적정황을 무시하고 38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려는데 대해 극구 반대해나섰고 중조측이 군사분계선으로 하려는데 대해 극구 반대해나섰다.
그는 중조측이 림진강 서쪽에서는 뒤로 철거하여 2천 내지 3천 평방킬로메터의 지역을 내놓아야 하며 동부와 중부 전선에서는 3천 내지 4천 평바킬로메터 지역을 내놓아야 한다고 무리하게 요구하였다.
이것은 총 한방도 쏘지 않고 중조측의 1만 2천여평방킬로메터나 되는 땅을 빼앗으려는 악동하고 망녕된 궤계 아니고 무엇인가!
당시 전쟁터의 정황을 놓고보면, 전쟁이 사작되여서부터 정전담판이 시작된 7개월 사이에 38선을 중심으로 적측에서도 38선 이북으로 두차례나 쳐들어왔고 중조부대가 38선 이남으로 두차례나 쳐들어갔다. 중조 부대는 38선 이남지구를 5개월 동안 점령하였고 적측에서는 두달동안 점령하였다. 중조측에서는 38선 이남의 145킬로메터나 되는 지역, 37도 위도선에 위치한 수원 이남 지역까지 쳐들어갔댔으며 북으로 철퇴한 후에도 개성을 비롯한 38선 이남의 3,630킬로메터에 달하는 지역을 통제하였다. 적측에서는 38선 이북의 165킬로메터 종심에 달하는 구간의 4,630평방킬로메터에 달하는 38선 이북의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런데 중조측에서 통제하는 38선 이남 지역은 개성을 포함하여 경제상, 군사상에서 모두 가치가 큰 요충지였다.
중조측에서는 미군측의 무리한 요구를 견결히 거절하고 반박하였다. 중조측에서는 군사적으로 빈번히 전쟁터에서 승리함으로써 담판석상에서 미제와 리승만괴뢰군의 기염을 여지없이 꺾어놓았다. 그리하여 미군측에서는 제나름대로 할 수 없었고 발언권도 잃고 말았다.
이때 미군측은 비밀회의를 하자고 새로운 제의를 내놓았다.
8월 17일부터 비밀회의를 열었다.
비밀회의기간에 중조측 대표는 38선을 분계선으로 하자던 제의를 그만두고 전선실제접촉선을 분계선으로 삼자고 하였다.
미군측은 들을념도 하지 않고 무력으로 1만 2천여평방킬로메터나 되는 땅을 빼앗으려고 전선에서 대진공을 하는 한편 담판회의를 악렬하게 파괴했다.
8월 15일, 미제와 리승만괴뢰군은 이른바 여름철공세를 들이댔고 뒤이어 가을철공세를 들이댔다. 적괴수 팸프리드는 자기 수하의 미군 제8군을 포함한 9개 사단의 병력으로 덮쳐들었다. 허나 20일 동안 싸운 결과 적들은 7만여명의 병력과 땅크 129대, 비행기 189대를 손실당하고 말았다.
8월 16일 밤이였다.
땅! 땅!
갑자기 야무진 총소리가 담판회중립구의 고즈넉이 잠들었던 하늘을 깨웠다.
지원군 경위패 패장 요경상이 8명 경위전사들을 데리고 중립구내 송곡동 부근에서 순라할 때였다.
그 곳에까지 매복해 있던 30여명 미군 놈들이 불의습격했다. 요경상 패장이 당장에서 숨지고 다른 한 전사가 부상당하였다.
이튿날 개성시 군민들은 요경상렬사의 시체를 개성시에서 제일 경치가 좋은 자남산 기슭에 안장하고 추도대호를 열었다. 렬사의 까만 화강석 묘비 앞면에는 “요경상렬사지묘”라는 글자가 새겨졌고 뒤면에는 미제가 정전담판을 파괴하고 렬사를 살해한 죄장이 새겨져 있다.
리해식은 개성에 온 뒤 수많은 중조 군민들과 함께 요경상렬사의묘지를 침앙한적이 있다.
적들은 군사적으로 중조측에게 타격을 입고 더 큰 지역을 빼앗겼으며 요경상렬사를 살해하였기에 세계여론의 질책을 받았다.
미군측 수석대표 쵸이 장군은 부끄러운대로 담판석상에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미제 공중날강도들은 8월 16일과 8월 22일에 중립구 중조담판대표 숙사에 폭경하고 소사하였다. 그리하여 담판장소를 부득불 판문점에 옮겨가지 않을 수 없었다.
10월 25일, 2개월이나 미제의 파괴로 말미암아 중단되였던 담판은 개성시에서 동남쪽으로 15킬로메터 상거한 판문점에서 다시 열리게 되였다.
적들은 1만 2천킬로메터에 달하는 지역을 자기들의 손에 넣으려는 무리한 요구를 다시 들고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개성은 서울을 방어하는데 수요되는  요충지라면서 개성을 내놓으라고 떼질썼다. 그러지 않으면 고성과 금성 2개 도시로 개성을 바꾸자고 하였다.
사실 그때 고성과 금성 지구는 우리 중조부대의 통제 밑에 있었고 적들은 이 두 곳에서 매우 작은 곳만을 통제했을뿐이였다.
첫 의정안인 군사분계선과 비군사구역 문제는 4개월 동안 쟁론을 거쳐 11월 27일에야 합의를 보았다. 이는 중조측에서 합리하게 방안을 내놓고 한차례 또 한차례 적들의 음모를 분쇄하고 강대한 군사적타격을 잘 배합한 결과이다.
1953년 6월 17일 쌍방이 최종적으로 확정한 군사분계선은 1951년 11월 27일에 정한 군사분계선보다 개성지구를 포함하여 190여평방킬로메터나 남으로 더 나갔다.
그때로부터 래봉장은 미제 침략자가 아군에게 5차 타격받고 “흰기”를 들고 와서 담판을 한 곳으로, 중조 인민의 공동의 원쑤 미제와의 첫겨룸에서 중조인민이 승리한 상징으로 되여 수많은 관광객들을 끌었다.
 
                   판문점
정잔담판장소가 판문점에 옮겨지자 중조측 정전담판대표단 정치부 선전과도 판문점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였다.
리해식 등이 찌프에 앉아 개성시에서 동남쪽으로 한 15킬로메터 즘 달려가니 푸르른 들판에 둘러싸인 펑퍼짐한 산둔덕에 자리잡은 판문점이 한눈에 안겨왔다.
당지 민간전설에 의하면, 옛날 지금의 판문교에서 서북 쪽으로 200여메터 떨어진 곳에 땅 밑에서 퐁퐁 솟아나는 맑은 샘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 샘물을 마시면 백병이 떨어진다고 소문이 파다히 퍼졌다. 그리하여 조선 팔도에서 숱한 사람들이 병을 치료하려고 이 샘물을 마시러 샘물터로 찾아왔다.
그때 부근에 살던 마음씨 착한 한 농사군은 샘물 사시러 오는 사람들의 숙식을 마련해주려고 샘물터 옆에 려관방을 차려놓았고 벌레와 먼지가 들어가지 않게 우물을 판장문으로 덮어놓았다. 그때로부터 사람들은 이 곳을 판문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류수와 같은 세월이 흐르고 흘러 전설 속의 “판문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지금은 다만 직경이 반메터 남짓하고 십여메터 깊이 되는 옹둘우물이 남아 있다.
이 샘물터로부터 동쪽으로 몇발작 걸어가 작은 언덕을 굽어들면 동서로 뻗은 길이 나지고 그 길 북쪽에 널판자와 참대삿자리로 지은 장방형의 큰 집이 솟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판자집이 바로 쌍방대표단이 담판하는 회의장소였다. 이 판자집을 중심으로 반경이 천야드 되는 둥그런 원 안은 회장구역이다. 회장구역 네귀의 상공에는 빨간 줄을 네줄이나 칠한 커다란 고무풍선이 둥둥 떠 있었다. 이것은 회장구역 공중표식물이다. 밤이면 탐조등을 밝혀 그 고무풍선을 대신하였다.
회의장소로 된 그 장방형 집은 회장구역의 유일한 집이였다. 그 나머지는 몽땅 흰 방수포장막이였다. 회장 남쪽에 회장과 나란히 앉아 있는 큰 천막집이 있었는데 쌍방 참모일군들이 회의를 하는 곳이였다. 이 천막집의 동쪽과 서쪽에 좀 큰 천막집이 각기 있었다. 이 곳은 쌍방대표단이 쉬는 곳이였다.
도로 남쪽에는 우리측 사업일군과 기자들이 쉬는 두개의 천막집 외에 판문교를 가까이한 척측의 천막집이 몇개 있었다.
찬찬히 여겨보면 온 회장구역 내의 크고 작은 천막은 이미 비바람과 해볕에 희읍스름하게 퇴색하였다. 담판회의장으로 쓰는 장방형 큰 집 꼭대기의 참대삿자리도 희읍스름하게 퇴색하였다. 이 큰 집의 남쪽과 북쪽에는 유리창문 몇개가 있었다. 서쪽과 동쪽에는 문이 하나씩 있었는데 웃문턱 우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흰비둘기 조각이 박혀 있었다. 담판 할 때면 우리 중조측 대표들이 서쪽 문으로 회장에 들어가고 미군측 대표들은 동쪽 문으로 들어가게 되여 있었다.
리해식은 서쪽 출입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회의장에 들어갔다.
회의장 복판에는 남북으로 록색천을 띤 긴 책상이 가로 놓여 있었다. 이 긴 책상 남쪽 우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작은 국기가 꽂혀 있었고 긴 책상 북쪽 우에는 유엔의 작은 기대가 꽂혀 있었다. 담판할 때면 쌍방대표는 동서 량쪽에 나뉘여 마주앉고 뒤줄에는 번역일군과 참모들이 앉아 있었다.
선전과 로동지들이 해식에게 우리 측 대표단이 이 담판석상에서 적측 대표단과 날카롭게 맞서 싸우던 정경을 말해주었다.
 
1952년 5월 23일, 미군측 선임수석대표 해리슨 중장이 전임 수석대표 쵸이 중장을 대신하여 판문점에 나타나 담판석상에서 포로송환문제를 가지고 생떼질하였다.
전쟁포로송환에 아무런 성의도 없는 미군측 선임수석대표 해리슨은 탐판회장에 들어선 첫날부터 무리한 첫마디를 던졌다.
“당신들이 우리 측 방안을 언제 접수하면 언제 담판을 다시 하겠습니다.”
“당찮은 말을 하지도 마십시오.”
우리 측 대표는 엄숙하게 반박하였다.
해리슨은 어깨를 으쓱하며 두 팔을 벌려보였다.
“닷새 후에 다시 담판합시다.”
5월 27일에 다시 담판할 때 해리슨은 매우 거만스레 떠벌이였다.
“담판을 중지합시다. 당신들의 발언에 아무런 흥취도 없습니다.”
6월 7일, 담판석상에서 해리슨은 유엔군의 수석대표이자 미군 3성박이장군이라는 체면도 잊었다. 그는 실하고 긴 목을 기린의 목처럼 빼들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는가 하면 휘파람을 휘-휘- 불기까지 하면서 도무지 담판에는 정신을 팔지 않았다.
해리슨은 앉아 있기도 싫던지 제쪽에서 “사흘동안 담판을 중지합시다.” 하고 선포하고는 번역일군이 번역하기도 전에 벌컥 일어나 회장을 나가버렸다.
더욱 한심한 일도 있었다. 해리슨은 후에 련속 몇번이나 회장에 들어시기 바쁘게 회의를 중지한다고 선포하고는 되돌아나갔다.
확실히 그는 고의적으로 담판을 방애하여 유엔군 총사령 클라크 상장의 명령대로 포로송환을 하루하루 지연시켜 중조측 포로를 억류하며 두드사건의 진상을 감추려고 하였다.
미제 침략자들은 1949년 8월 제네바에서 63개 제약국이 제정한 “전쟁포로에 관한 제네바공약”을 공공연히 어기고 포로를 돌려보내지 않고 잔혹하게 학살하였다. 그자들은 포로의 입 안에 휘발유를 부어넣고 불을 달아 태워죽이고 강한 전기불빛을 비춰 눈을 멀궈놓았으며 시뻘겋게 단 쇠꼬챙이로 포로의 몸을 지지고 손톱을 집게로 집어 뺐으며 바깥에 끌고 나가 산 과녁으로 삼아 총살하였으며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 세균실험을 한 후 바다물에 처넣어 참혹히 죽였다. 녀자포로들을 강간한 후 젖가슴을 칼로 도려내고 손발을 베버리고 휘발유를 치고 불태워 학살하였다. 그리고 포로들을 강박하여 이른바 “반공구국군”, “대한청년단” 등 반동조직에 들게 하였으며 포로의 몸에 한자와 영어로 반동구호를 새겼다.
1951년 10월까지만 해도 미제 침략자들은 중조측 포로 17,000여명이나 잔혹하게 학살하였다.
그러면서도 담판석상에 나와서는 포로들이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세계여론을 기만하려고 들었다.
뒤이어 미국 전쟁포로집중영당국에서는 미군 참모장련석회에서 채택한 이른바 “자원적인 귀환”의 “원칙”에 좇아 두달 전에 남조선 거제도 조선인민군 포로들이 집중된 62호 전쟁포로집중영을 시점으로 잡고 마수를 뻗쳤다.
그날 전쟁포로집중영당국에서는 6대의 장갑차에 1개 영의 전신무장한 병력을 실어다 적수공권인 5천명 전쟁포로병들이 갇힌 62호 감방을 물샐틈없이 겹겹이 포위하였다. 적병들은 총칼을 빼여들고 집중영에 뛰여들어 닥치는대로 찔러죽였다. 눈깜짝할 사이에 120여명 포로들이 피못에 스러져 숨졌다. 290여명 포로들이 팔이거나 다리를 찔려 쓰러졌다.
“가만 있다가 죽을게면 싸우다가 죽자!”
누군가 웨치자 조선인민군 포로들은 빈 주먹으로 적병들과 맞다들었다. 어떤 포로들은 적병들의 날창을 비껴치우고 멱살을 거머쥐고 골받이(헤딩)를 들이대 쓰러눕혔다. 어떤 포로들은 찔러들어오는 날창을 비껴쥐고 소발쪽 같은 무쇠주먹으로 적의 대갈통을 쳐 눕혔다.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한 미군 적병은 조선인민군 포로들의 물매를 맞고 늘어졌다. 이밖에 30여명 양키놈들이 맞아 코가 삐뚤어졌거나 팔다리가 부러졌고 빼앗긴 날창에 찔리워 옆구리에서 피가 즐벅이 흐르거나 가슴에 구멍이 뚫렸다.
바빠맞은 양키놈들은 포로영 대문 밖으로 뿔뿔이 꽁무니를 뺐다.
4월 6일, 거제도집중영에는 서슬푸른 살기가 어리였다.
이날 거제도 83호 집중영 철조망 안팎에는 기관단총을 비껴든 미군 양키놈들이 물샘틈없이 둘러싸고 있었다.
미군은 누가 “자원적으로 되돌아가겠는가?” 고 포로들을 하나하나 심사하고 부류끼리 나눠놓기 시작하였다.
포로들은 적들의 총칼이 숲을 이룬 삼엄한 심문실에 끌려들어가 하나하나 심사를 받게 되였다.
한 포로가 떨리는 다리를 글며 끌려나가자 사무상에 마주 앉은 한 미군 군관놈이 철갑모 밑으로 파란 눈깔을 떼룩거리면서 뭐라고 씨벌여댔다.
옆에 선 괴뢰군 번역원이 번역하였다.
“북으로 되돌아가는게 소원인가?”
“예, 꼭 돌아가겠습니다.”
“죽자고 그따위 소릴 쳐?!”
“자나 깨나 마음이 그런 걸 어쩌랍니까?”
“망할 자식!”
그 군관놈이 꽥 고아댔다.
뒤에 섰던 두 놈이 그 포로의 정수리를 총박죽으로 탁 쳤다. 그 포로는 그 자리에 풀썩 꺼꾸러져 까무러쳤다. 반주검이 된 그 포로는 줄줄 끌리워나갔다.
그 다음 포로가 끌리워 들어갔다.
“보았지? 돌아가자면 저런 끝장이야!”
미군 군관놈이 길다란 손가락으로 삿대질하였다.
“그래도 되돌아갈텐가?”
“죽어도 되돌아가겠다!”
“이 놈, 죽어봐라!”
그 군관놈이 손짓하기 바쁘게 옆에 섰던 적병들이 날창으로 그 포로의 옆구리를 콱 찔렀다.
“앗!”
비명소리와 함께 그 포로는 왼손으로 옆구리를 찌른 날창을 틀어쥐고 적의 멱살을 거머쥐려는듯 오른 손을 허공중에 내뼏쳤다가 허우적거리더니 맥없이 옆으로 스르르 쓰러졌다.
그 포로의 시체가 끌려나가자 또 다른 포로가 끌려들어왔다.
그 포로는 끌려나가는 포로의 시체와 자기를 쏘아보는 파란 눈깔을 번갈아 보면서 천천히 사무상 앞에 다가가 섰다.
군관놈은 오른손을 머리 우로 올려 엄지와 식지를 마주쳐 딱 소리를 냈다.
“OK! 저 끝장 봤지? 넌 돌아가지 않지?”
“난 죽어서 시체 돼서라도 이북 땅에 가고 싶다!”
“엉?!”
또 물매를 면할 수 없었다.
적들이 아무리 무력으로 강박하여도 조선인민군의 대부분 포로들은 한결같이 이북 땅에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러자 적들은 하나하나 심사하던 것을 그만두고 한패한패씩 분류하였다. 이북으로 돌아가려는 포로들을 십자나무기둥에 비끄러매놓고 알몽뚱이에 시뻘건 쇠꼬챙이로 “반공”, “멸공”이란 글자와 태극기, 유엔기 도안을 새겼다. 뿌지직뿌지직 살이 타들어가는 소리, 비명소리가 처량하게 들렸다. 뒤이어 적들은 “되돌아가지 않겠다.”는 청원서에 억지로 혈인을 찍게 강박하였다.
이날 오후, 전신무장한 미군 놈들이 중국인민지원군 전쟁포로들이 든 거제도 제71호 포로집중영을 겹겹이 둘러쌌다. 이어 포로집중영 장관 두드장군의 대표인 벨 상좌가 집중영대문 안에 들어섰다.
“오늘, 되돌아가려는 자들을 분류해야겠다.”
지원군 포로대표가 한발 나서서 목에 지렁이 같은 피줄을 세우면서 항의하였다.
“전쟁포로를 몽땅 디돌려보내는 것은 제네바공약의 규정이다. 미국은 제네바공약 제정 참가국이다. 때문에 반드시 제네바공약대로 무조건 우리 포로들을 송환해야 한다. 당신들의 이른바 ‘자원귀환’은 제네바공약에 대한 란폭한 위반행위이다.”
벨은 말문이 막혀 대문 밖으로 나갔다. 이윽하여 전신무장한 미국 병정들과 국민당 특무들이 뛰여들어와 조국으로 돌아가려는 포로들을 비수와 날창으로 찌르고 몽둥이로 사정없이 때렸다.
삽시에 비명소리와 신음소리, 포로들이 반항하는 웨침소리가 울리였다.
이날 오후 72호, 86호 집중영에서만 해도 중국인민지원군의 99명의 포로들이 살해되였다. 적들의 칼에 큼직하게 살점을 뜯기운 포로가 300여명이나 되였고 중상 입은 포로는 340명, 경상 입은 포로는 천여명이나 되였다.
적들의 이런 만행에 극도로 분개한 중조 포로들은 주밀한 계획을 세우고 반항하였다. 포로들은 단식하는 한편 포로집중영철조망 안에서 시위행진하면서 포로집중영당국의 최고장관 두드가 직접 나와 포로대표와 담판하자고 웨쳤다.
1952년 5월 7일 오후 1시, 미군 두드 준장이 전신무장한 한개 소대 병사들의 호위 밑에 거제도 제76호 전쟁포로집중영 대문 앞에 나타났다. 그 자는 거만스레 대문짝 하나 열만한 거리를 두고 조선인민군 포로대표와 담판하자고 책상에 마주 앉았다.
조선인민군 포로대표는 두드 량 옆에 총을 든 적병이 딱 붙어선 것을 둘러보고 말했다.
“총을 든 병사 앞에서 어떻게 담판할 수 있는가?”
두드는 모든 것을 대수롭잖게 생각하고 뒤로 손을 저었다. 두 병사는 뒤로 썩 물러섰다. 두드 옆에는 시종부관 밖에 남지 않았다.
그제야 조선인민군 포로대표는 두드가 마주 앉은 사무상에 다가가 마주 앉았다.
“미군이 중국인민지원군과 조선인민군 포로를 학대하고 되돌아가려는 포로를 억류하고 있다. 식량과 마실 물도 제때에 공급하지 않고 있다. 이는 전쟁포로의 합법적인 권익을 침범하는 비법적 행위이다. 이후에 다시는 이런 폭행이 발생하지 않도록 담보해야 한다.”
두드는 듣는둥마는둥하면서 손칼을 꺼내 연필을 깎다가고 손톱깎개로 손톱을 딱딱 깎았다.
담판은 두시간이나 하였지만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하였다.
이때 갑자기 4명의 조선인민군 포로가 대문 밖으로 뛰쳐나왔다. 한 억센 포로가 독수리 병아리 덮치듯 덮쳐나가 집제 같은 손으로 아무런 준비도 없는 두드의 손을 꽉 틀어쥐였다. 다른 한 포로는 두드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다른 두 포로는 두드의 두 팔을 건뜻 들어 포로집중영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뚱뚱한 두드는 묶이운 돼지처럼 두 다리를 버둥거리면서 돼지 멱 따는 소리를 질렀다.
적병들은 총을 쏠 수도 없어 발만 구르며 왔다갔다 맴돌아쳤다. 포로들은 포로집중영의 대문을 꽉 닫고 쇠빗장을 찔러놓았다. 실로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돌연습격이였다.
이 찰나에 두드 장군은 평소의 그 거만하던 위풍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질겁한 나머지 낯이 창백해지고 바지에 오줌까지 질질 쌌다.
이때 포로들은 진작 준비해두었던 길이 7메터, 너비 2메터 되는, 영어로 된 프랑카드를 포로집중영 대문 우에 내걸었다.
그 프랑카드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우리는 전쟁포로집중영 장관 두드 준장을 생포하였다. 그의 생명안전을 꼭 담보한다. 우리는 그와 정당한 담판을 끝낸 다음 꼭 안전하게 돌려보내겠다. 엄중한 무장행동으로 하여 생기는 일체 후과는 몽땅 너희들이 책임져야 한다!”
포로대표들은 두드에게 엄정히 경고하였다.
“네가 놓여나갈 수 있는가 하는 건 네 태도에 달렸다. 전쟁포로들의 정당한 요구를 재빨리 들으며 거제도의 각 집중영에서 대표를 보내 담판에 참가할 수 있게 해라.”
두드는 연신 “yes”, “yes(예, 예.)” 하면서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털이 부시시한 손으로 송수화기를 들더니 집중영당국 사무실에 76호 집중영의 포로대표 두 사람을 데리고 각 집중영에 가서 포로대표들이 담판에 참가하게 통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날 밤, 남조선 경상남도 남해바다의 외로운 섬인 거제도 17개 집중영의 중조 포로대표 43명 (그중 녀포로대표 3명)이 76호 전쟁포로집중영에 모여왔다. 그들은 즉시 중조 포로위원회 창립 대회를 열었다.
대회장 정면에는 중조 두 나라 국기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그 아래에는 포로들이 자체로 그린 중화인민공확국 모택동 주석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 원수의 채색초상화가 모셔져 있었다. 둘레 벽에는 오색령롱한 종이꽃이 달려 있었다.
두드는 끌리워와 이 대회에 억지로 참가하였다. 그는 먼저 주석대에 가서 흰 별이 박힌 장군모자를 벗고 차렷자세를 취하더니 중조 국기와 수령의 초상화에 경례하고 또 전체 포로들에게 경례한 후 공손히 지정된 자리에 가서 앉았다.
대회에서는 대표들의 협상을 거쳐 전쟁포로위원회의 정부위원장을 선출하였다.
조선인민군 포로대표이며 원 조선인민군 사단 참모장 리XX가 위원장으로, 중국인민지원군 포로대표이며 원 중국인민지원군 모 영 교도원 손진관이 부위원장으로 당선되였다.
두두가 생포된 소식이 각 집중영에 인차 퍼지자 중조 포로들은 기뻐 어쩔줄 몰라했다. 그들은 각기 부동한 방법으로 자기 담판대표들을 성원하였다.
602호 집중영의 지원군 포로들은 밤도와 돛천으로 길이 8메터, 너비1메터 되는 프랑카드를 만들어 이튿날 이른새벽에 철조망 어귀에 걸어놓았다. 기타 집중영에서도 중조 국기를 내걸고 수천수만의 포로들이 철조망 옆에 줄을 서서 자작악기로 국가와 군가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불러 자기 담판대표들을 성원하였다.
이때 미군은 20여대의 땅크(탱크)와 1천여명 보병을 동원하여 76호 집중영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두드와 직무를 대신할 콜쓴 준장은 고성기를 통해 집중영에 대고 으르대였다.
“10분 내에 두드 장군을 내놧! 그러잖으면 무력으로 구해낼테야!”
중조 포로대표는 두드에게 엄숙하게 알려줬다.
“만약 콜쓴이 무력으로 평화적 담판을 파괴한다면 우리는 네 생명안전을 담보하기 어렵다.”
두드는 질겁하여 인차 떨리는 손에 송수화기를 들었다.
“콜쓴 장군, 만약 무력으로 진압하면 내 생명이 위험해. 절대 경거망동하지 말게나.”
담판을 거쳐 두드와 콜쓴은 부득불 포로대표들이 제기한 네가지 요구에 서명하였다.
 
첫째, 전쟁포로에 대한 일체 폭행을 즉시 중단해야 한다.
둘째, 비법적으로 전쟁포로를 억류하는 이른바 “자원적인 귀환”이라는 것을 중지해야 한다.
셋째, 강박적인 선별을 그만둬야 한다.
넷째, 중조포로위원회를 승인해야 한다.
두드와 콜쓴이 서명한 이 네가지 요구는 정식문건으로 작성되였다.
10일 밤 9시 남짓하여 78시간이나 갇혔던 두드 장군은 석방되였다. 포로대표의 요구에 따라 집중영을 포위하였던 땅크가 뒤로 물러가고 콜슨의 대표이며 미군 제49헌병대대 대대장 래윈 중좌가 두드를 태울 찌프를 몰고 와서 조문과 영문으로 된 “접수증”을 내놓고 두드 장군을 데려가려고 하였다.
두드는 떠나가기 전에 중조포로대표들이 미리 갖춰놓은 필을 들어 허연 종이장에 “난 꼭 있는 힘껏 협의를 준수하고 이 협의를 실현하기 위해 힘쓰겠습니다.”라고 써서 서면으로 태도표시를 하였다.
그는 떠나면서도 뚱뚱한 몸뚱이를 연신 굽신거렸다.
그러나 두드가 석방되자 미군은 협의서에 서명한 글씨 먹이 채 마르기도 전에 협의서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새로 부임된 유엔군 총사령 클라크 장군의 명령에 따라 콜쓴의 자리를 차지한 보트나 장군은 우리 중조측 포로들에 대한 야수적인 보복을 감행하였다.
1952년 5월 23일 거제도의 6, 223명 조선인민군 포로들은 “미국 지옥에서 죽어가는 우리 포로들을 구해달라.”는 련명호소서를 남로당(남조선로동당)의 령도하에 있는 인민유격대를 통해 북반부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보냈다. 하여 미제의 진면모는 온 천하에 발가졌다.
바로 이런 정세에 비춰 정전담판 미군측 신임수석대표 해리슨은 유엔군 총사령 클라크 장군의 명령에 좇아 집중영당국의 보복적인 “류혈만행”에 배합하고저 전쟁포로송환문제를 천방백계로 질질 끌었다. 또 중조측의 방안은 고려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급기야 회의를 중지시켰다.
10월 8일 미국측은 무기한으로 정전담판을 그만둔다고 선포하고 “비행기, 대포더러 발언하게 하여” 담판에서 얻지 못한 것을 전쟁터에서 얻으려고 달려들었다.
적들은 팸프리트 장군의 직접적인 지휘하에 상감령지구에 대한 미친듯한 추기공세를 들이댔다. 그러나 그들은 43일 동안에 우리 지원군의 금성철벽의 진지를 점령하지 못하였을뿐만아니라 25,000여개 주검을 남기고 말았다.
전쟁터에서 코밥을 먹은 적들은 또 담판석상에서 돌아왔다.
1953년 4월 6일, 여섯달이나 중지되였던 담판을 판문점에서 다시 열게 되였다.
5월 25일, 미군측 수석대표 해리슨은 중조측에세 제기한 주요원칙을 다 접수하였다.
그날 괴뢰군대표 최덕신 장군은 말로는 문산에서 서울에 전화를 치는 사이에 대표단의 직승비행기(헬기)가 떠났기에 담판에 참가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기실 정전담판에 불복하고 계속 북진해 무력으로 조선반도를 통일하려는 리승만괴뢰군정권의 명령에 따라 정전담판에 참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 리승만괴뢰군은 쌍방에서 곧 협희를 달성하게 도리 전쟁포로문제에 대한 토론에도 참가할 생각도 아예 없었다.
1953년 6월 8일, 전 세계 인민들이 관심하고 주시하여온, 미국측의 저애로 하여 1년 6개월이나 끌어온 전쟁포로송환에 관한 협의를 달성하였다. 담판기간에 1년 동안이나 휴식전문가로 된 해리슨 장군은 끝내 포로송환에 관한 중조측의 공정합리한 제의안에 자기 이름을 써넣지 않으면 안되였다.
 
                 비밀부호
       리해식이 정전대표단 정치부 선전교육과에서 사업한지 얼마 안되는 7월 초의 어느날이였다.
해식은 지원군 병상자포로들이 가져온 자료를 정리하고저 병상자포로들이 든 집을 찾아갔다. 그는 자리에 앉기 바쁘게 병상자포로들에게 인사하고 찾아온 사연을 말하였다.
한창 둥그런 조선식밥상 우에 널려 있는 종이쪼각을 이어놓던 한 다리 잃은 포로는 해식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건 우리가 생명을 무릅쓰고 가져온 비밀부호입니다. 여기엔 우리 포로들이 적들과 싸운 사적이 적혀 있습니다.”
그러자 옆에 앉은 한쪽 팔을 잃은 포로가 구체적으로 말하였다.
“이 종이쪼각에는 세계를 들썽한 ‘두드포로사건’과 ‘제주도 상공에 오성붉은기가 휘날리게 한 사건’도 적혀 있습니다.”
뒤이어 그들은 자기들이 북반부로 돌아올 때의 경과부터 이야기하였다.
제주도 제8집중영에서 미군 신문을 통해 포로송환문제가 거의 합의를 달성하게 되여간다는 것을 알게 된 그들은 조국으로 돌아갈 희망으로 차넘쳤다. 하여 그들은 집중영에서의 투쟁사적을 비밀부호로 가만히 담배갑종이에 써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비밀부호를 암기해두었다.
이 비밀부호로 된 숱한 종이쪼각을 집중영을 떠나게 되는 여러 사람이 나눠가지고 가게 되였다. 어떤 포로는 그 종이쪼각을 꾸겨 옷섶에 넣고 기워맸고 어떤 포로는 모자 안이나 신 안에 넣고 기워맸다. 어떤 포로들은 종이쪼각을 꼬깃꼬깃 꾸기여 다른 종이에 싸서 홍문에 밀어넣고 떠날 차비를 하였다.
1953년 4월 11일, 판문점정전담판대표단 쌍방련락관회의에서 중조측 수석련락관 리상조 소장과 미군측 수석련락관 딴니르 소장은 각각 병상자포로를 송환할데 관한 협정에 서명하였다.
그리하여 4월 중순에 되돌가게 된 제주도 제8포로수용소의 700여명 지원군 병상자포로들은 비밀부호종이쪼각을 지닌 채 다른 수천명 포로들과 함께 부산전쟁포로수용소에 압송되여갔다.
그들은 거기에 있던 포로들과 함께 귀국선서대회를 가졌으며 부산전쟁범죄자감옥에 갇힌 지원군 포로, 원 모 사단 부정위 오성덕을 석방하여 귀국시키며 귀국하는 부상자포로들 귀국길에서의 안전을 담보해줄 것을 미군집중영당국에 제기하였다. 그러나 미군중영당국에서 답복하지 않자 사흘이나 단식투쟁을 벌렸다.
적들은 선전수요로부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포로들에게 치솔과 비누 같은 일용품을 나눠주고 미군식군복을 나눠주었다. 그리고 50명을 한조씩 무어 여섯면이 꽉 막힌 철제기차바곤에 앉혔다. 도중에 말할 권리도 주지 않았으며 음식도 음료수도 주지 않았다. 적들은 문산에서 포로들을 자동차에 갈아앉히자 판문점을 향해 쏜살같이 달렸다. 그들이 지나가는 길마다 경계가 아주 삼엄하였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봄바람이 비단결처럼 얼굴을 부드럽게 만지면서 산들산들 불어왔다. 판문점 전쟁포로송환구역에는 쌍방의 숱한 위생차와 트럭이 드나들었다.
차문을 열자 어깨를 덮는 머리카락, 맥없이 드인 눈, 창백하고 피기없는 얼굴을 한 포로들이 람루한 옷을 걸친 채 헝겊막대기처럼 휘청거리면서 우리 측 사업일군들의 부축을 받아 차에서 내렸다. 그 포로들은 차에서 내리자 동지들의 품 속에 얼굴을 파묻고 어린애처럼 처량하게 엉엉 대성통곡쳤다. 그것은 포로영에서 학대를 당할대로 당한 포로들의 설음이였다.
뒤이어 내리는 포로들은 거개가 다리 없거나 팔이 하나 없는 불구자들이였다. 어떤 포로는 두 다리가 다 없어 우리 사업일군들이 업어서 내리웠다.
마지막으로 내린 여섯명의 녀성포로는 사지가 다 끊어져 없고 맨 몸뚱이만 남아 있어 담가에 실어 내리우지 않으면 안되였다. 내리우면서 볼라니 몸의 길이가 70 내지 80센치메터 밖에 안되였다. 사업일군들은 그 비참한 정경을 보고 눈물을 금치 못하였다.
야수 같은 미군 병정들은 이런 녀성포로들을 압송해오면서도 야욕을 채우려고 달려들었던 것이다. 사지가 없는 녀성포로들은 격분해 소리칠뿐 반항할 수 없어 그저 당하기만 하였다. 하여 한 녀성포로는 정신병에 걸려 20여명 동료들의 간호 밑에 겨우 판문점에까지 올 수 있었다. 그녀는 북반부에 돌아왔지만 정신상 육체상 다시는 이전의 처녀로 돌아갈 수 없게 되였다.
남성포로들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적들이 내준 람루한 옷을 벗어던지고 빤쯔(팬티)만 입고 포로송환선을 넘어왔고 어떤 남성포로들은 아예 미군이 준 실 한오리 걸치지 않고 사업일군들의 부축을 받아 절뚝거리면서 건너왔다. 어떤 포로들은 적들이 길에서 준 치솔과 과자봉지 같은 것을 따라온 적들에게 쥐여뿌렸다.
“개놈들, 이래구서 잘했느라고 나발불려구?  언제 한번 이런 걸 줬느냐? 옜다, 가지고 가라!”
쟁그랑! 댕그랑!
포로들이 줴뿌리는 고뿌 속에서 튕겨나온 것은 마른 무우짠지와 곰팽이 허옇게 낀 닦은 콩이였다.
어떤 포로들은 변질한 음식과 함께 미제를 풍자하는 쪽지를 차 안에 남겨두었다.
“이런 걸 사람 보고 먹으라구? 미국 경제가 불경기라는 거 알 수 있지. 우린 이 음식을 가련한 코큰이들한테 돌려준다!”
8일 동안 교환을 거쳐 우리 측 전쟁포로 6,670명이 돌아왔다. 그중 지원군 포로가 1,030명이였다.
그때 부상당한 포로병들이 벗어던진 수천벌의 헌 옷과 수천컬레 신은 맑디맑은 강물 밑바닥의 조약돌이 들여다보이던 강물에, 포로송환구역 가까이에 있던 사천하에 버렸다. 그강물은 오래동안 흐려 있었다.
부상당한 포로는 격분해 말했다.
“그때 우리 포로들은 누구도 치욕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옷이고 뭐고 하나도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비밀부호종이쪼각을 가진 동무들이 옷을 벗어던지지 않자 동료들은 마구 욕을 퍼부었습니다. 실로 참고 견디기 어려운 일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야전병원에 온 뒤 람루한 옷섶이거나 모자 혼솔에서 비밀부호종이쪼각이나 종이쪽지를 꺼내서야 동료들은 오해를 풀었습니다.”
“예- 그랬군요.”
해식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밥상 우에 놓인 종이쪼각을 무심히 볼 수 없었다. 거기에는 우리 지원군 포로들이 적 포로집중영에서 피와 목숨으로 싸운 사적이 적혀 있었으니 말이다.
그때 리해식 등 사업일군들은 포로들과 함께 오랜 시간을 들여서야 비밀부호로 된 종이쪼각을 맞추고 자료를 정리해냈다.
몇십년이 지난 오늘 그때 비밀부호 종이쪼각을 가지고 돌아온, 부상포로들의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들이 가져온 자료중에서 “10월의 붉은 노래”의 매력만은 아직도 력사에 길이 남아 있다.
1952년 5월, 판문점 담판석상에서 미군측에서는 포로송환문제를 질질 끌어댔다. 미군 포로집중영당국에서는 중조 포로들을 더욱 잔혹하게 박해하고 학대하였다. 뒤이어 그해 7월 초에 적들은 귀국하려는 7천여명 지원군 포로들을 제주도 포로집중영에 옮겨다가 가두었다.
이에 9월 25일, 지원군 포로지하령도조직인 “공산주의단결회”에서는 귀국하려는 지원군 포로들이 갇힌 제8포로수용소의 각 집중영에 국기게양식을 하라고 지시하였다. 만약 미군당국에서 국기게양식을 간섭하게 되면 일체 대가를 아끼지 말고 국기를 보호하라고 거듭 강조해 지시하였다.
이 지시에 따라 각 집중영에서는 적들의 눈을 피해 가만히 여러가지 준비사업을 다그쳤다. 그들은 국기를 만들 때 빨간 물감이 없으니 주먹으로 자기 코를 탁 쳐서 코피를 터지우거나 칼로 자기 팔을 베여 흐르는 피를 받아 적삼과 흰천에 빨갛게 물들였다. 그리고 국기를 올릴 때 쓸 바줄을 꼬고 천막을 칠 때 쓰는 나무막대기 몇개를 이어 넉장 길이나 되는 기대를 만들고 또 적들 몰래 집중영 부근에 기대를 세울 구뎅이를 석자 깊이로파놓았다.
국경절 전야에 각 집중영의 전쟁포로들은 선서대회를 열고 돌격대, 결사대, 예비대와 구급대를 무었다. 어떤 포로들은 담배갑이나 파지에 조국에 대한 사랑과 충성심, 그리고 바야흐로 벌어질 생사박투를 맞이할 결의가 담긴 결심서, 혈서, 청원서를 “공산주의단결회”에 보냈다.
어떤 포로들은 종이쪼각에 이렇게 썼다.
“나는 죽음으로 당과 모주석의 은정에 보답하며 적들에게 우리 애국의 권리를 박탈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주겠다!”
“우리의 끓는 피로 국기를 보호하겠다.”
그들은 가정주소를 서로 남기고 조국의 오성붉은기를 보호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칠 것을 맹세하였다.
국경절이 돌아왔다. 맑게 개인 제주도의 푸른 하늘에 흰구름 몇쪼각이 둥둥 더서 해발 1,900여메터나 되는 한나산 허리에 걸렸다.
이른 아침에 서늘하고 습기찬 바다바람이 제주도집중영 철조망을 쓸며 포로집중영에 불어들었다.
해 뜨기 전에 벌써 일어난 포로들은 처량한 섬에서 조국이 있는 쪽 바다 저 멀리를 내다보았다.
“아, 지금 쯤 조국의 수도 북경과 고향 그 어데서나 국경절맞이로 들끓을 것이다!”
이국의 외로운 섬에서 초롱 속에 갇힌 새로 된 그들의 마음은 쓸쓸하기 그지 없었다.
그들은 누구도 아침 숟가락을 들지 못하였다.
아침 7시, “공산주의단결회”에서 통일적으로 국기를 올리라고 명령하였다.
감격적인 시각이 닥쳐왔다.
각 집중영의 전쟁포로들은 정연하게 줄을 서서 국기게양식을 거행하였다. 포로들이 자체로 만든 악기로 연주하는 장엄한 국가 속에 피로물ㄹ든 10폭의 오성붉은기가 바다바람에 나붓기면서 이국 땅 제주도 푸른 상공에 서서히 게양되여 나붓기였다.
“차렷!”, “경례!”
구령소리가 나자 질서 정연히 줄지어 선 포로들은 푸른 하늘에 나붓기는 국기에 거수경례를 드렸다.
이국 땅에서 휘날리는 오성붉은기를 보자 전쟁포로들의 마음은 설레였고 눈물이 두 볼을 적시면서 하염없이 흘렀다. 조국에 돌아간듯한 느낌으로 가슴을 들먹였다.
휘날리는 붉은기 아래에서 포로들은 조국의 “국가”, “동방홍”, “조국을 노래하네”와 같은 노래를 목청껏 불렀다.
“조국 만세!”
“모주석 만세!”
여기저기서 구호소리가 울렸다.
노래소리와 구호소리가 오래도록 메아리쳤다.
제8포로수용소의 10개 포로영에서 10폭의 오성붉은기가 높이 오르자 미군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놈들은 당황한 나머지 11대의 땅크(탱크)와 전신무장한 1개 영의 병력으로 포로수용소를 물샘틈없이 포위하였다.
분위기는 대뜸 팽팽해졌다.
미군 적지휘관은 고성기를 통해 위협하였다.
“5분 내 기발을 내리우라! 만약 내리지 않으면 행동할테다!”
포로들은 1분이라도 기발을 더 오래 걸면 그만큼 승리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누구도 적들의 위협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자리에 못 박힌듯이 까딱 움직이지 않고 질서 정연하게 줄 지어 선 채 휘날리는 붉은기를 눈물을 머금고 바라보았다.
5분이 지났다!
또 5분이 지났다.
그러나 붉은기는 의연히 푸르는 하늘에서 휘날리였다.
1개 련의 적들이 철조망 대문을 열고 총칼을 번쩍이면서 7호 포로집중영에 덮쳐들었다.
미군 제8군 정보초의 개다리상위 부르크스가 권총을 뽑아들고 꽥꽥 고함치며 앞장서 뛰여왔다.
“기발을 내리웟!”
“계속 기발을 안 내릴텐가?! 한 놈도 남기잖고 다 죽여치울테다!”
포로들은 치미는 분노를 누를길없어 일제히 목청껏 웨쳤다.
“우리는 죽음을 겁나지 않는다!”
“네놈들의 반사발밥을 먹기도 싫다!”
“개다리상위놈아, 오기만 해라. 네놈의 대가리를 박산낼테다!”
포로들의 분노에 이글거리는 눈길에 질겁한 적들은 포로들을 향하여 최루탄을 쏘아댔다. 포로들은 코를 싸쥐고 쿨럭거리면서도 누구도 하나 물러서지 않았다.
뒤이어 상관의 명령을 받은 적들이 철조망 안으로 우르르 쓸어들어왔다. 그 놈들은 오성붉은기를 향해 미친듯이 덮쳐들었다.
돌격대와 결사대의 몇십명 포로들은 명령소리와 함께 돌멩이를 뿌려 적들에게 반격을 가하면서 놈들을 막아나섰다.
적들은 망루와 장갑차, 땅크(탱크)에서 중기관총을 쏘았다.
뚜르륵, 뚜르륵…
수많은 포로들이 피못 속에 쓰러졌다. 몇몇 포로들은 비발치는 총탄을 무릅쓰고 재빨리 오성붉은기를 내리워 휘발유를 치고 불태워버렸다. 죽더라도 조국의 국기가 적들의 손에 들어가게 할 수 없었다.
제8포로수용소의 7호포로집중영의 “공산주의단결회”의 기대에서 기발이 내린 것을 보자 다른 아홉개 집중영에서도 기발을 내리웠다.
포로들은 자기 생명으로 적들과 싸우면서 조국의 영광스러운 국경 3돐을 경축하였다.
이날 국기를 보호하는 반시간 동안의 투쟁에서 고용, 마여룡, 진건화 등 50여명 포로들이 영광스럽게 희생되였고 130여명이 부상당하였다.
포로들은 모두 흰옷을 입고 흰꽃을 달고 렬사들의 령위에 200여개 하얀 꽃다발을 올리고 성대한 추도대회를 가졌다.
추도대회가 끝난 뒤 포로들은 줄을 서서 렬사들의 령위를 들고 경비가 삼엄한 집중영 철조망 안을 세바퀴 돌면서 미군 포로영당국에 항의하였다.
그때 오성붉은기를 보호하기 위해 영광스럽게 희생된 제8포로수용소의 전우들을 기념하려고 포로들은 가요 “10월의 붉은기 노래”를 지어 불렀다.
제주도에서 판문점에로 돌아올 때도 그들은 줄곧 이 노래를 목청껏 부르고 또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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