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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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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혁명기시의 공적
2012년 09월 02일 23시 39분  조회:5704  추천:2  작성자: 김성룡
   중국의 조선족이 대량 중국동북 각지에 이주해오기 시작한 력사는 백 50여면이라고 볼수있다. 20세기초에 이르러 그 수가 2백만에 달했다. 우리민족 선인들은 신근한 로동으로 동토대인 동북에서 황무지를 일구고 벼농사에 성공함으로써 동북의 생산력을 크게 추진하였다. 항일전쟁시기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침략전쟁을 위한 대량의 물질적 자원을 비축하기 위해 조선반도로부터 대량의 조선농민을 중국동북이거나 화북 발해 연해지역으로 강제로 집단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하거나 광산개발, 도로수건, 철도부설을 비롯한 고된 로동을 시켰다.

1910년, 일제가 전반 조선반도를 침점하자 국권을 상실한 조선의 지사들은 중국으로 와서 반일투쟁과 혁명의 길을 찾았다. 이들은 중국내 광범한 조선주민들을 단합시켜 불효불굴의 의지로 반일투쟁을 진행하였다.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이들은 또 중국공산당을 따라 장개석 독재정부를 전복하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창립하기 위해 영용히 싸웠다.

조선지사들이 중국경내에서 광범한 조선민족 주민들을 이끌고 중국혁명에서 중국인민과 어깨겯고 싸우면서 중국공산당을 따라 승리에서 승리에로 나아간 빛나는 력사는 대체로 세개 부분으로 나누어 볼수있다. 하나는 중국 대혁명시기이고 다른 하나는 항일전쟁시기이며 또 해방전쟁시기이다.
 
대혁명시기의 공적

 
 1910년 일본제국주의는 이른바 “한일합방”을 통해 조선을 침탈함으로써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저락되였다. 이로부터 조선의 수많은 유지인사들은 국가주권과 민족의 독립을 위한 간고하고도 장기적인 반일투쟁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진정한 대중의 해방과 자유를 위한 혁명을 길을 탐구하면서 헌신적으로 싸우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중국에 와서 중국의 반제반봉건의 위대한 투쟁에 참여하였고 수억 중국인민과 함께 진리를 찾고 민족해방의 길을 모색하였다. 이들은 중국혁명의 승리는 곧 조선혁명의 승리를 가져올수있고 중국 항일전쟁의 승리는 필연코 일본제국주의의 멸망을 가져오고 조선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가져올것이라고 믿었던것이다.
 

독립운동가 신정(1879~1922)

 
1910년 신정(1879~1922)이 중국 상해로 왔다. 그는 “민생보”를 운영하면서 송교인, 진기미, 황흥을 비롯한 중국동맹회 중요인물들을 알게 되였고 이들의 영향을 받아 손중산의 삼민주의 사상을 접수하게 되였다. 1912년에 신정은 “동제사”를 만들어 광범한 조선지사들을 모으기 시작하였으며 송교인, 호한민, 교중개, 진과부를 비롯한 중국 동맹회 중요인사들의 힘을 빌어 대량의 조선청년들을 보정군관학교, 호북강무당, 운남륙군강무당 등 군사학교에 보내 현대화한 군사지식을 배우도록 하였다. 1916년에 운남륙군강무학당 제12기 기병과에 입학한 조선인으로는 배달무, 김정, 김세준(김자렬), 최진이 있었다. 이들은 가장 일찍 중국군사학교에서 공부하고 훈련받은 조선인이였다.

조선 3.1운동이 있은후 더 많은 애국지사들이 일경의 눈을 피해 중국상해에 모여들었고 상해에서 한국림시정부를 세웠다. 신정은 림시정부 법무총장, 외무총장, 국무총리 대리를 비롯한 직무를 맡았고 손중산과의 련계를 강화하였다. 손중산이 이끄는 중국 호국군정부는 한국 림시정부를 승인하였고 1921년 3일에 정식 외교관계를 설립하였다.

그후 신정은 한국림시정부의 무능함과 돌이킬수없는 분렬사태에 극도로 되는 실망을 가지고 1922년 국무총리에서 사임하였다. 이때 중국광동의 진형명도 반란을 일으켜 손중산의 혁명도 큰 위기를 겪고있었다. 중국의 신해혁명처럼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으로 일제를 조선에서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려던 신정은 이중 타격을 받고 극도로 되는 실망속에서 병으로 쓰러지고말았다. 그는 아예 치료를 거부하고 단식을 하던끝에 1922년 9월 5일 상해에서 별세하였다. 그는 사후 상해 만국공원에 안장되였다.

상해 만국공원의 만국공동묘소(이곳에 묻힌 조선의 독립지사들의 유해는 후에 한국에 봉환되였다)

 
3.1운동후 조선인민의 반일투쟁형식은 주로 한국림시정부와 중국동북의 여러 조선민족 무장에게서 체현되였다. 망국의 한을 지닌 조선의 애국청년들은 가산을 팔아 중국에 건너와서 조선인 집거지에 학교를 세우고 애국주의 교육을 진행하면서 무장투쟁을 준비하고있었다. 1920년 가을, 동북의 여러갈래 반일유격대들이 한데 모여 청산리에서 일본군 근 천명을 소멸하는 청산리 대첩을 이룩해냈다.

한편 상해림시정부의 항쟁주장은 줄곧 같지 않았다. 일부 사람들은 강대국의 이른바 위임통치에 환상을 걸고 외교구국을 주장하였으며 일부 사람들은 심지어 일본과의 타협까지 주장하였다. 주장이 달랐고 림시정부 내부의 파벌도 분립해 서로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싸웠다. 대부분 지사들이 리승만을 림시정부의 초대주석으로 추대하였지만 그는 멀리 미국에 있으면서 줄곧 상해에 와서 취임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수많은 반일지사들과 애국지사들이 큰 실망과 방황속에서 허덕일때 새로운 희망이 나타났다. 로씨야 10월혁명이 폭발해 봉건제국을 뒤엎고 참신한 사회주의 국가를 건립하였던것이다. 이로써 공산주의 사상이 신속히 중국대지에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공산주의자 리동휘(1873~1935)
 
1919년 9월에 조선공산주의자 리동휘(1873~1935)가 상해에 도착하였다. 그는 상해 한국림시정부의 활동에 참가하였다. 조선의 의병운동이 실패한후 리동휘는 로씨야 원동지구로 가서 1915년에 아시아지구 첫 공산주의 단체인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었다. 리동휘가 상해에 도착함으로써 림시정부는 새로운 활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1920년 리동휘는 려운형과 함께 상해 공산주의소조를 세웠고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으로 재조직하면서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동북간도(연변)지구에 사람을 보내 공산주의소조를 세웠고 중국의 공산중의자들과 접촉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또 로어에 정통한 안병찬을 시켜 공산국제의 대표 위진스키를 데리고 중국 공산주의자 리대소, 진독수를 만나게 하였다. 이들은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도와 중국공산당을 창립하게 했다.

광주 황포도의 군관학교 기념관


 
무한 군관학교 옛터

 

무한 구관학교




광주 중산대학

  대혁명시기 손중산은 “로씨야와 손잡고 공산당과 손잡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로써 광동성은 중국혁명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따라서 대량의 조선청년들도 광동성에 찾아왔다. 조선의렬단의 단원 강세우, 김성숙(김규광), 장지락(김산), 리영준, 최원, 서의준, 리활(이륙사) 그리고 조선 지식청년 마준, 김동주, 김원식 등이 중산대학에 와서 혁명리론을 학습하였다. 이때 의렬단 단장 김원봉은 단원들을 데리고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황포군관학교 총명책”을 보면 황포군관학교 조선인 교관과 학원을 찾아볼수있다. 제3기에 리빈, 차정신(김지일), 장성철, 리일태 등 4명이 있었고 제4기에는 강평국, 류원욱, 박효삼, 박건웅, 최림(김원봉), 양검, 전의창, 리우각, 권준, 리집중, 왕자량, 윤의진, 최영택, 김종, 리종원, 로일룡, 리기환, 오세진, 전홍묵, 백홍, 로세방, 박익제, 문선재, 로건 등 무려 24명이나 있었다. 제5기는 김호원, 안유재, 장흥, 장익 등 4명이다.

황포군교 건교초기 쏘련의 군사학교를 졸업한 조선인 강섭무가 포병훈련교관을 맡았다. 그리고 상해림시정부가 보낸 김철남이 제3교도단 소좌 부퇀장을 맡았고 조선인 손두환이 교장 판공실 부관을 맡았으며 운남강무학당을 졸업한 조선인 리계동이 부관을 맡았고 리검운(리철호)은 조교를 맡았다. 운남강무학당을 졸업한 조선인 양림은 기술조교로 있었고 쏘련 고문단의 조선인 양달부(량도부)가 포병교관으로 있었다. 제3기를 졸업한 리빈이 정치대대 구대장을 맡았다. 그리고 제5기에는 양림이 중좌 교관으로 있었고 오성륜, 채원개, 최추해, 안응근, 오명, 리일태 등 조선인 교직원이 있었다.

황포군관학교 제5기에 입학한 조선청년은 백여명이 되지만 4.12반혁명정변이 일어났기에 대부분 정상적으로 졸업하지 못하였기에 학생명책에는 김호원을 비롯한 4명밖에 없다.

황포군교의 조선인 교관과 학원은 대부분 “류, 양”반란을 평정하는 투쟁과 국민혁명군의 동정에 참가해 공훈을 세웠다. 특히 중좌 교관 양림과 소좌 구대장 최용건은 중국공산당이 장악한 첫 무장대오인 엽정독립퇀의 군관을 맡았다. 양림은 독립퇀 제3영 영장을 맡았고 최용건은 전부 조선청년으로 편성된 특무련 련장으로 있었다.

1927년 4월 12일 장개석은 공동연히 반혁명정변을 발동해 총부리를 공산당에게 돌렸다. 이로써 국공분렬이 초래되고 “로씨야와 손잡고 공산당과 손잡는다”는 손중산의 주장과 일치하게 제국주의와 본건주의를 반대한다던 대혁명은 최종 실패하고말았다. 대혁명이 위기에 처해있을때 중국공산당은 단연히 남창봉기, 추수봉기, 광주봉기를 발동함으로써 간고한 무장항쟁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국민혁명군에는 2백여명 조선인 장병들이 있었다. 이들은 남창봉기에 참가하였는데 엽정부대의 길림성 룡정사람인 박인과 흑룡강성 녕안의 김철강이 남창공원의 수관음청을 공격하는 전투에서 맹활약을 보였다. 그리고 흑룡강성 녕안의 방월성은 결사대에 참가해 천주교회당의 완고한 적을 소멸하였다. 하룡부대의 강석필, 김래준, 홍범기를 비롯한 조선인 장병들은 고루와 적 지휘부를 공격하는 치렬한 전투에 참가하였다. 김원봉과 조선의렬단 단원들은 하룡부대에 편입되여 남창봉기에서 싸웠다.
남창봉기가 실패한후 엽정을 비롯한 많은 공산주의자들은 다시 광주에 모여 공주봉기를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대혁명시기 광동에 모여온 대량의 조선청년들이 모두 이번 봉기에 참가하였다. 황포군관학교의 조선인 교관과 학원들 그리고 중산대학의 조선인 학생들은 광주봉기에서 중층 령도직을 맡았다.

1927년 12월 11일 아침, 봉기 총지휘인 엽정이 직접 황포군관학교 교도단을 거느리고 사하진과 연당의 주둔군을 공격하였다. 교도단 제2영 5련의 150명 장병은 모두 조선청년이였다. 련장은 조선인 박영(박근성)이였다. 이들은 30여명 적을 소멸하고 5백여명 적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사하진 전투를 신속히 끝냈다. 중산대학의 김산(장지락)은 황포군관학교 포병교관인 량도부와 함께 봉기군을 거느리고 연당의 적 포병진지로 달려갔다. 쏘련 고문단의 일원이며 황포군관학교 포병교관인 양도부는 장발규 부대에서 위망이 아주 높았다. 그는 연당에 도착하자 김산의 통역을 통해 적 포병진지의 병사들을 설득하였는데 2천여명이 무기를 놓고 투항하였다.

봉기가 시작된후 황포군관학교의 최용건도 특무영 제2련의 조선인 장병들을 거느리고 행동하였다. 그는 동북교구에서 지주무장을 격퇴한후 사하진에서 와서 교도단 2영 5련의 조선인 장병들과 함께 사하진을 수비하였다. 12월 13일, 적이 도처에서 반격해왔다. 조선인 장병들은 제때에 철수명령을 받지 못하고 봉기군 주력의 철수를 엄호하면서 간고하게 적과 싸웠다. 교도단 2영 5련 150명 조선인 장병들은 련장 박영의 지휘하에서 적과 최후까지 싸우다가 모두 장렬히 희생되였다. 광주의 “중조인민 혈의정”의 기념비에는 이들의 영웅적 사적이 영원히 새겨져있다.

쏘련에서 군사학교를 다닌 다른 한 조선인 교관 리용은 로동자 무력을 거느리고 적 공안국을 점령하는 싸움을 지휘하였다. 그들은 기관총사격의 엄호를 받으며 적 장갑차 한대를 폭파하고 공안국을 점련하였고 적 천여명을 포로하였다.

12월 12일 광주 공안국 부근광장에서 쏘베트정부 수립대회가 진행되였다. 조선인 량도부, 김산, 김규광이 대회에 참가하였고 김규광은 정부 16명 위원의 한명으로 선출되여 숙반위원회 위원을 맡났다. 그리고 김산은 로동자부력부에서 일을 보았다.
12일 적의 반격은 더 막강하였다. 전투는 령남, 장제, 사면 등지에서 치렬하게 진행하였다. 황포군관학교 제3기를 졸업한 조선인 교관 리빈과 량도부는 함께 사면에 대포를 걸고 적을 지원하러온 제국주의 군함을 포격하였다.
성세호대했던 대혁명은 끝내 실패하고말았다.

조선혁명가 장지락(김산)



광주봉기에서 희생된 박영(박근식)


광주 광주봉기 렬사릉원의 중조혈의정


중조혈의정의 비문

 
중국공산당의 무력항쟁은 도시로부터 광범한 농촌으로 이전하였으며 농촌에서 홍군을 조직하고 토지혁명을 진행하면서 쏘베트정부를 세우고 확고한 혁명근거지를 개척하였다. 많은 조선곤산주의자들도 쏘베트구역에 도착해 토지혁명에 참가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은 양림과 무정이다.

양림


무정

양림(1898~1936), 원명은 김훈이고 자는 지원이다. 혁명하면서 그는 또 양주평, 양녕, 삐스티 등 멸명을 사용하였다. 3.1운동이 있은후 그는 일경의 눈을 피해 둥국동북에 와서 통화의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후 그는 동북의 여러 조선인 반일유격부대와 함께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여 일본군 근 천명을 소멸하였다. 그후 양림은 상해림시정부의 소개로 운남륙군강무학당 제16기에 입학하였고 졸업후 황포군관학교에 가서 교관으로 있었다. 이때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국민혁명군의 몇아의 동정전투에 참가하여 중국공산당이 장악한 엽정독립퇀 제3영 영장으로 승진하였다. 대혁명이 실패한후 그는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쏘련 군사학교에 가서 공부하였으며 졸업후 귀국해 동북의 동만특별위원회에서 사업하였다. 1932년 가을 그는 주은래의 부름을 받고 쏘베트구역 서금에 가서 중앙정부 로동및 전쟁위원회 참모장을 맡았다. 서금에서 그는 또 강서군구 회창, 순오, 안원 군분구 사령원, 홍군 제23군 군장, 월감군구 사령원, 홍군 제1군단 참모장,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총동원 무장부 참모장 등직을 맡았으며 쏘베트정부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을 선거되였다. 1934년 그는 중앙홍군대학 군사총교관을 맡기도 하였다.
무정(1905~1952)의 원명은 김무정이다. 큰 뜻을 품고 일제를 극도로 미워한 그는 애국청년운동에 참가해 일경의 추적을 받았다. 1924년 그는 중국으로 망명했으며 하북성 보정에서 보정륙군군관학교 포병과에 입학하였다. 이듬해 무정은 장가구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군교 졸업후 북벌전쟁과 상해 로동자 폭동에 참가하였다. 1930년 6월에 상해 당조직은 무정을 쏘베트근거지에 파견하였다. 그는 등대원의 소개로 팽덕회의 홍군 제5군에 참가하였다. 무정의 뛰여난 포병기술은 팽덕회의 승인을 받았으며 그는 신속히 패방으로부터 련장, 영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는 홍군에서 홍군 포병전문가로 소문이 높았다. 그후 무정은 쏘베트구역 홍군특과학교 제2임 교장을 맡기도 하였다.

중앙홍군이 장정을 할때 양림은 중앙직속 홍색간부퇀 참모장을 맡았고 무정은 중앙직속 제1종대 제3제대 사령원 겸 정위를 맡았다. 양림과 무정은 모두 승리적으로 연안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양림은 1936년 홍군이 동정할때 황하도하작전을 지휘하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광주봉기가 실패한후 김규광은 상해에서 조선 각당파의 단결을 도모하였고 김산은 북령에서 중공북평시 당위 선전부 부장을 맡고 학생운동을 령도하면서 지하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천진에서는 조선공산주의자 리철부가 하북성 당위 선전부 부장을 맡고 지하투쟁을 하였다.

김규광(운암 김성숙)

류자명

리철무(한위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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