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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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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비카소 한락연①
2012년 11월 07일 13시 40분  조회:5442  추천:2  작성자: 김성룡
“전국이 해방된후 나는 여러차례 신강에 가군 하였다. 거기에서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아득히 펼쳐진 사막을 가는 락타대를 늘 보게 된다. 그리고 멀리에서 울리는 락타방울소리를 듣는다. 그때면 가파른 어느 산정이나 바위우에 락연선생님이 서있는 모습을 그려보게 된다. 그의 모습은 영원히 젊어보인다. 그는 산기슭의 맑은 샘가에서 나를 보고 웃는듯 하였다. 나의 마음속 깊이에서는 가벼운 부름소리가 난다. 락연선생님, 제가 왔어요!”

이는 중국의 저명한 화가 황주(黃冑)가 1982년, 은사인 한락연(韓樂然)선생을 기념하여 쓴 글의 한 대목이다. 무거운 짐을 지고 아득히 펼쳐진 사막을 가는 락타대, 그것은 조선독립과 중국혁명의 중임을 떠메고 반일투쟁의 험난한 길에 나섰던 혁명가 한락연의 한생을 방불케 하였다.
 

중국의 저명한 화가 황주, 한락연의 학생


황주의 작품, 그의 작품에서는 한락연의 화풍이 잘 보여진다
 

중국 길림성 룡정촌(龍井村)에서 태여난 한락연(1898-1947)은 최초의 중국조선족 무산계급혁명가이며 탁월한 화가이며 국제반파쑈전선의 투사이다. 그의 원명은 광우(光宇)이고 자는 락연(樂然)이다.

지금 북경에는 그의 딸 한건립(韓健立), 아들 한건행(韓健行)이 살고있다. 중앙당학교 최룡수교수의 련락을 받고 우리가 한락연의 유가족을 찾아간것은 2003년 9월 18일 오전이였다.촬영사 김철기자와 력사고문 최룡수교수 일행 3명이 갔다. 북경시 방장(方莊) 방고원(芳古園)에는 한락연의 딸 한건립이 살고있었다. 남편 강기민(康冀民)씨는 외교관으로서 오문(澳門)문제 중국-뽀루뚜갈 련락소조 중국측 대표로 일하다가 리직한 분이고 한락연의 아들 한건행은 국가체육총국 체육신문업본사 대형행사센터의 부주임으로 사업하고있었다. 이들은 기자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한건립녀사는 차분하고 조용조용한 성격이였고 한건행씨는 스포츠사업을 하는만큼 성격도 활달하고 시원스러웠다. 서로 인사를 나누자 자연스럽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강기민씨를 제외하고 모두 조선족이였지만 한건립녀사와 한건행씨는 조선말을 못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어로 대화가 오고갔다.

 

한락연의 자화상
 

한락연 북경 유가족과 함께(좌로 두번째 딸 한건립, 네번째 아들 한건행) 2003년
 


한건립녀사는 다음과 같이 회억하였다.

“아버지께서는 1947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1944년에 태여났으니깐 그때 네살이였지요. 한건행은 그때 두살이였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라면 마지막 신강으로 떠나실 때의 일뿐입니다. 아버지는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트럭에 앉아 신강으로 떠나셨습니다. 어린 나는 아버지를 따라가면서 함께 가겠다고 했거든요. 그러니 아버지는 다음엔 꼭 데리고 간다고 하시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자상한 이야기는 후에 어머니에게서 많이 들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회억을 더듬으면서 이들 오누이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락연의 아명은 윤화(允化)였고 또 한소공(韓素功)이라는 별명을 쓰기도 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가정이 가난했기때문에 그림공부를 하지 못하였다. 한락연은 어렸을 때 형제가 여럿이 있었지만 모두 페결핵으로 요절하였다. 때문에 한락연은 후에 자녀들의 이름자에 모두 건강하다는 건(健)자를 넣어주었다 한다. 나라가 독립 못하며 녀성들도 자립할수없다하여 딸한테는 일어설 립(立)자를 붙여주고 말한대로 행동에 옮기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들한테는 행(行)자를 붙여주었다고 한다.

어릴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한락연은 하학후면 묘지에 가서 나무가지로 땅에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가 1914년에 소학교를 졸업한후 선후로 전신국과 세관에서 일하며 집안살림을 보태지 않으면 안되였다.

세관에서 일할 때 한락연은 많은 외국서적을 접하게 되였으며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미술에 관한 전문서적도 찾아보면서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1919년 3월 13일, 중국 길림성 룡정에서도 조선의 3.1운동을 성원하는 성대한 군중시위가 있었다. 한락연은 이날 시위를 위해 교회당에서 밤새도록 프랑카드를 썼다.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다니면서 사람들을 련락하기도 하였다. 3월 13일, 만여명 시위자들과 함께 조선독립과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를 반대하는 구호를 소리높이 웨치던 그는 무고한 시위자들에게 총격을 가하는 일제의 만행을 직접 보게 되였다. 마침내 그는 만악의 일본제국주의자들을 소멸하고 젊음의 끓는 피를 조선독립과 민족해방사업에 기여할 결의를 다지며 고향을 떠나게 되였다.

1919년, 로씨야의 사회주의 10월혁명을 동경한 한락연은 로씨야로 갔지만 울라지보스또크의 많은 조선혁명자들이 중국 상해에 가자 그들과 함께 다시 상해로 갔다. 상해에서 한락연은 전차(電車)회사와 인쇄공장에서 일하는 한편 상해미술전과학교(上海美術專科學校)에 입학하였다. 그는 상해에서 늘 조선혁명자들과 접촉하면서 고려공산당 활동에 참가하였으나 조선혁명자들의 내부 종파투쟁과 암투에 큰 실망을 느끼고 말았다.

(한건행) “1923년 아버지께서는 상해에서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후 1924년에 동북에 파견되였습니다. 아버지는 동북에서 사업을 시작한 첫 중국공산당원이라는 기재가 있습니다. 당사에는 심양 봉천 당지부 설립의 한사람. 조선쪽의 공산당과 어떤 인물들과 련락하는지 몰랐지만 로소비의 회억에 의하면 아버지께서는 상해에서 수요일이면 꼭 밖에 나갔다고합니다. 심양에서 심양미술전문학교(지금 심양로신예술학교) 미술학원을 설립하였습니다. 상해의 로소비, 구양여천을 초청해 회화와 희곡을 강의한 학교였습니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당원들과 련락하기 위해 학교에 나가셨습니다. 그는 소자원을 당원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은행에서 대부금 맡아 운영하는 학교였습니다. 혁명활동으로 아버지가 외출하였을 때 빚 재촉이 와서 학생들이 아버지 방에서 트렁크를 열어보았는데 거기에는 전부 맑스주의저작과 혁명서적이였다고합니다. 그리고 일본 파쑈의 죄행, 조선의 곤혹 이 같은 내용의 서적들이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인 것을 알게 되었다고합니다.”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이 상해에서 창건되였다. 당시 중국공산주의자 채화삼(蔡和森)이 창간한 《향도(向導)》잡지의 애독자였던 한락연은 적극적으로 중국공산당에 접근하였으며 1923년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게 되였다. 이해 말, 우수한 성적으로 상해미술전과학교를 졸업한 그는 당의 파견을 받고 중국 동북으로 가게 되였다.

 

한국 동아일보에 실린 한락연의 기사


성경시보에 실린 한락연의 미술활동 관련 기사


조기 공산주의 간행물인 향도


최초의 개인 유화전을 했던 곳


할빈 보육중학교, 한락연은 할빈에서 보육중학교 미술교원의 신분으로 활동했다


한락연이 꾸린 락천사진관이 있었던 곳


흑룡강 치치할시 룡사공원에 있는 격언정, 한락연이 격언정을 설계했다


한락연(한행지)를 시정국 공정과 과원으로 임명한다는 임명장
 
1924년 봄, 봉천(奉天 심양)에 도착한 한락연은 기독교청년회(基督敎靑年會)의 간사 염보항(閻寶航)을 알게 되였다. 그는 염보항의 도움으로 개인 유화전시회를 열었고 또 소남관(小南關) 풍우대(風雨臺)부근에 사립미술전과학교를 세웠다. 기독교청년회와 미술전과학교는 한락연이 혁명활동을 전개하는 좋은 장소였다. 그는 수많은 청년들을 조직해 맑스주의 리론을 학습하게 하였으며 사회 각계인사들과 접촉하면서 혁명을 선전하였다. 1925년에 그는 당에서 파견한 임국정(任國禎), 오려석(吳麗石)과 함께 심양의 최초로 되는 당지부를 설립하였다. 한락연이 이끌어준 소자원(蘇子元) 등 청년들도 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심양의 중국공산당 조직사업을 훌륭히 완수해 내였다.

1925년 여름, 한락연은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로씨야 울라지보스또크로 갔다가 다시 할빈에 남아 사업하게 되였다. 그는 할빈 보육중학교(普育中學) 미술교원의 신분으로 활동하면서 초도남(楚圖南), 조상지(趙尙志) 등과 함께 청년독서회, 평민야학을 조직하고 지식인과 청년들에게 공산주의사상을 전수하였다. 이 시기 한락연은 수분하(綏芬河)에 중국공산당 련락소를 만들었으며 또 치치할시 룡사공원(龍沙公園)의 격언정(格言亭)을 설계하였다.

1929년 가을, 한락연은 동북으로부터 상해를 거쳐 멀리 프랑스로 떠났다. 그는 예술의 전당으로 불리우는 프랑스에서 예술의 새로운 경지를 찾아보려고 했던것이다.

한락연이 프랑스에 도착했을때는 서방의 전반 자본주의사회가 극심한 경제공황을 겪던 시기였다. 프랑스 리옹에 도착한 한락연은 거리에서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프랑스에서 류학하는 중국의 화가들인 상서홍(常書鴻), 려사백(呂斯百)을 알게 되였고 또 리옹의 중국호텔에서 개인 회화전시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비록 성숙되지 못한 그림들이였지만 그의 과감한 행동과 짙은 동방적인 회화기법은 사람들의 긍정을 받았고 또 려비도 얼마간 마련하게 되였다한다.

그후 한락연은 프랑스 남부도시 니스에서 한동안 생활하다가 1931년, 빠리에서 예술대학에 입학하였다. 거기에서 그는 예술의 조예를 깊이 하는 동시에 프랑스 공산당 중국언어지부에 가입하고 국제로동운동의 경험을 학습하였다. 이해 그는 유럽 각국을 다니면서 시야를 넓혔고 여러차례 회화 개인전을 가졌다.

 

프랑스 류학시절 작품활동을 하고있는 한락연


빠리 거리에서 사생하고있는 한락연


빠리 개선문의 부조 유화(한락연)


항일전쟁이 폭발하자 양호성장군 등과 함께 귀국하는 배에서(뒷줄 좌로 다섯번째가 한락연), 이 사진은 온가보 총리의 백부 온붕구가 수장한 사진이다
 
1937년 7월, 일본제국주의는 로구교사변을 일으켜 중국대륙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을 시작하였다. 이딸리아에서 이 소식을 접한 한락연은 급급히 빠리에 가서 빠리 석간신문사의 촬영기자 신분으로 반파쑈국제선전사업에 종사하였다. 얼마후 그는 항일전쟁의 일선에서 사업하려는 열망을 안고 귀국의 길에 올랐다. 그는 서안사변 주인공의 한사람인 양호성 장군과 함께 귀국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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