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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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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비카소 한락연②
2012년 11월 09일 16시 09분  조회:6162  추천:0  작성자: 김성룡
 중국 전민이 동원되여 일본침략자와 싸우던 그 가렬처절한 전투에 뛰여들기 위해 조선혁명가 한락연은 프랑스로부터 중국에 왔다. 그는 중국의 항일전쟁은 기필코 일본제국주의자들을 전승할것이라고 믿었고 따라서 조선인민도 독립과 해방을 맞이할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기자의 신분으로 중국에서 저지른 일본침략자들의 비인간적인 야망을 전세계에 전해주고 유지인사들을 단합시켜 일본침략자와 싸울 것을 다지며 무한에 거처를 잡았다.
 
(권립) “로구교사변이 일어나자 그는 불타는 애국심으로 귀국하여 무한 동북항일구국 총회에서 사업했습니다. 그는 화가의 신분으로 민주인사들과 접촉하고 국민당 장군들과 외국인사들과 접촉했습니다. 그때 한구에서 학교를 꾸리고있던 미국 기자 스노, 한구에서 전선지원 의료대 훈련반을 꾸리고있던 스미스트라이 녀사에게도 한락연은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때로부터 한락연은 당의 지시에 따라 줄곧 상층 통일전선 사업에 자신의 한생을 바쳤습니다.”


진보적인 항일잡지 반공(대부분 반공 잡지의 표지그림은 한락연이 그렸다)


한락연은 반공잡지에 동북 장고봉에 관련한 글을 실었다



한락연은 이 건물에 거폭의 항일선전화를 그려 걸어놓아 전민의 항일의지를 고양시켰다
 

귀국하여 무한에 도착한 한락연은 동북에서 활동할 때 친숙하였던 염보항의 소개로 다시 공산당조직활동에 참가하였다. 당시 무한에는 중공중앙 장강국(長江局)의 령도를 받는 동북항일구국총회(東北抗日救國總會)가 있었는데 동북에서 활동하던 류란파(劉瀾波), 염보항, 우의부(于毅夫) 등이 책임자로 있었다.

무창(武昌) 명월교(明月橋) 순직회관(順直會館)에 본부를 둔 동북항일구국총회는《반공(反攻)》이라는 반월간 잡지를 출간하였는데 한락연은 늘 잡지에 글을 발표하였으며 잡지의 표지설계와 미술편집을 담당하였다. 선전사업을 더욱 폭넓게 진행하기 위해 그는 선전대와 함께 거리에 만화를 붙였고 또 한구(漢口)의 가장 번화한 강한관(江漢關) 종루(鐘樓)에 거폭의 선전유화를 걸어놓기도 하였다. 동북항일구국총회의 련락사업을 맡은 그는 또 쏘련 대사관과 련락을 가지고 쏘련의 중국항전 지원사업을 추진시켰다. 쏘련대사관의 한 무관은 그에게 독일제 사진기를 선물하기도 하였다.

한락연은 외국어에 능했기때문에 국제인사들과 쉽게 접촉할수 있었다. 한락연의 부인 류옥하(劉玉霞)녀사가 회억한데 의하면 길림성 룡정에서 태여난 한락연은 어려서부터 중국어, 조선어, 일본어에 능했고 또 로어도 조금 배웠다한다. 그후 유럽을 다녀오면서 또 영어, 독일어, 이딸리아어도 잘했다한다. 당시 국제우호인사 스메들리(Annes Smodler)는 한구에서 의료일군 지원자 강습반을 만들려 하였다. 저명한 미국 녀기자였던 스메들리는 전장의 구호일군을 양성시키는 한편 팔로군에 보낼 약품을 모으려 하였던것이다. 무창에 있던 한락연은 늘 강을 건너 한구에 가서 스메들리의 사업을 도와주었으며 외국기자들에게 전쟁터의 사진을 전했다. 그는 일제의 침략죄행과 중국인민의 항일투쟁을 내용으로 하는 많은 소중한 사진들을 외국기자들에게 제공함으로써 중국의 항일투쟁을 국제에 널리 알리게 하였다.

한락연은 또 중국인민의 벗인 국제우호인사 루이.앨리(Rewi Alley), 에드가 스노(Edgar Snow) 등과 친숙한 사이였다. 이들이 1938년, 한구에서 중국공업합작협회(中國工業合作協會)를 세울 때 이미전부터 이들을 알고있었던 한락연은 이 사업에 적극 참가하였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편 그는 무한에서 범장강(范長江), 진룡비(陳龍飛)와 함께 청년구국협회(靑年救國協會)를 조직하였는데 협회는 민주인사 심균유(沈鈞儒), 전준서(錢俊瑞)가 령도하는 상해구국회와도 밀접한 련계를 가지고있었다. 무한에 있던 중공중앙의 지도자들인 주은래, 동필무(董必武) 등은 동북항일구국총회의 여러 사람들과 함께 무한에 모인 수많은 민주인사들과 적극적인 련계를 취하면서 항일통일전선을 이끌어나갔다.

1938년 8월 13일, 8.13항일전쟁 전면개시 일주년을 기념하는 횃불시위가 무한에서 성대히 진행되였다. 한락연은 수많은 중국, 조선 청년들과 함께 시위에 참가하였다. 십여만 시위 인파속에는 《중화민족선봉대 총대부(總隊部)》, 《동북항일구국총회》, 《조선민족전선련맹(朝鮮民族戰線聯盟)》 등 글자를 새긴 기치를 볼수있었다. 주은래, 동필무, 엽검영(葉劍英) 등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이 시위의 앞장에 섰다.

이해 한락연은 주은래가 조직한 작가와 예술가 연안(延安)방문단에 참가해 연안을 방문하였다. 그는 연안의 녀대학생들에게 《항일전쟁속의 민족문화예술》이란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무한에서 통일전선사업을 맡고있던 한락연은 또한 조선혁명자들도 적극 도왔다. 이시기 혁명의 성지(聖地) 연안으로 가려하는 조선청년들이 있었다. 그는 중국인 혁명활동가 강극부(姜克夫)를 통해 리명(李明), 왕수성(王守成), 장영(張英 녀) 그리고 서양화를 배우는 장진광(張振光) 등 4명 조선청년을 연안에 보냈다. 이들은 서안의 팔로군판사처를 거쳐 연안으로 갔다. 이들 중 리명(李明), 장진광(张振光)은 연안 항일군정대학(抗日军政大学)에서 학습한후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파견되여 조선의용대와 조선독립동맹의 요원으로 되였다.

1938년 전민의 항일투쟁정서는 크게 앙양되였지만 전세는 호전되지 않고있었다. 일본침략군은 상해, 남경을 함락한후 세면으로 무한을 포위해왔다. 적들은 비행기, 땅크를 동원하였고 최 정예부대를 투입해 무한공격전을 개시하였다. 중국 군민들도 이에 대항해 무한주변 산과 물에 의지해 완강히 적들과 싸웠다. 적아 쌍방이 백여만명 병력을 투입한 무한회전은 일제의 무한함락으로 막을 내렸다.

이해 겨울, 무한의 동북항일구국총회는 당의 지시에 따라 중경(重慶)에 옮겼다. 한락연은 주은래의 결정에 따라 중경에 옮겨온 동북항일구국총회에서 사업하였다. 그는 구국총회 본부를 설치한 오랜 전우 염보항의 집에 거처를 잡았다.

이듬해 봄, 한락연은 녀청년회 향촌부 주임간사를 맡고있던 류옥하와 결혼하였다.

(한건립) “어머니는 기독교 녀청년회에서 전국협회 농촌부 총간사였습니다. 청년회 본부는 상해에 있었습니다. 상해에서 후에 부유난민소가 있었습니다. 이조직은 후에 무한에 옮겨왔는데 어머니는 무한에서 아버지와 결혼. 어머니는 당시 미국 꼴롬비아 대학 석사졸업생이였습니다. 1935년 졸업하고 38년 모든 항일조직이 모두 무한에 모였는데 무한에서 항일선전대를 조직하였습니다. 무한 기독교 녀 청년회에서 사업했는데 기독교라는 종교이름이였지만 당사의 조직사를 보면 무릇 여기에 참가한 사람은 항일, 혁명의 참가 기한을 모두 그때로부터 기록했습니다. 기독교 이름이지만 사실은 진보적인 조직이였습니다. ”


40년대 가족사진(한락연과 부인 류옥하, 딸 한건립, 아들 한건행)


한락연의 부인 류옥하 유화


뒷줄 좌로 두번째가 류옥하 녀사이고 다섯번째가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 녀사이다
 
 
류옥하는 일찍 미국 꼴롬비아 대학에서 공부한 지적인 녀성이였다. 항일전쟁시기 그는 선후로 한구와 중경에서 녀성항일선전대를 조직하였고 주은래의 부인 등영초의 많은 지도를 받았다.

항일전쟁이 폭발한후 장개석은 국민당 좌파인사들의 지지를 받기 위하여 자기가 직접 주임위원을 맡은 전지당정위원회를 설립하고 리제심(李濟深)을 부주임으로 임명하였다. 공산당에서는 국민당 상층인사들과의 련락을 강화하고 통일전선을 공고히 하기 위해 주은래를 전지당정위원회 위원으로 배치하였다. 한락연은 전지당정위원회에 파견되여 소장지도원(少將指導員)의 신분으로 활동하였다. 1934년 4월, 그는 염보항의 소개로 제7전구 사령부에 가서 사업하였다. 그는 주로 산서와 섬서지역에서 국민당과 공산당 부대의 련락사업을 맡아 두 군 사이의 마찰을 감소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시기 그는 중경으로부터 서안을 거쳐 진동남지구를 자주 시찰하였다. 그는 기자이면서 또 전지당정위원회의 소장지도원의 신분으로 국민당과 공산당 부대를 자유롭게 다닐수 있었다. 그는 전구인민들의 항쟁사실을 사진에 담았으며 현지 풍경과 민속을 화폭에 담았다.

이해 겨울, 한락연 다시 산서성 남부를 시찰하였다. 당시 일본군이 진동남지구를 토벌하고있었다. 그는 포화를 무릅쓰고 황하를 건너 항일전쟁에 나선 국민당 장병들을 위문하였고 팔로군 주둔지에 가 보았다. 그는 팔로군 전선총부(前線總部)의 부참모장인 좌권(左權)장군을 만나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당시 산서에 주둔하고있던 국민당 93군은 장개석의 직계부대였다. 그는 93군 참모장인 위외(魏巍)와 긴밀한 련락을 가졌는데 위외는 황포군관학교 제4기 졸업생으로서 줄곧 국공합작을 주장하던 인물이였다. 그의 주변에는 혁명을 지향하는 수많은 진보적인 장병들이 있었다.

1940년 2월, 장개석은 93군에 밀령을 내려 산서의 팔로군 유격대를 공격하게 하였다. 명령을 받은 위외는 작전계획에 허점이 있다는 구실로 명령을 하루동안 하달하지 않았다. 이 기회를 빌어 당천제(唐天際)사령원이 거느린 공산당의 유격부대는 순조롭게 국민당군의 포위권을 빠져나올수 있었다. 이 일로 하여 93군 내부는 혼란에 빠졌으며 국민당에서는 위외를 중경의 중앙훈련단에 와서 강습하라고 하였다. 사실 강습은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 위외가 중경에 돌아가면 체포되여 심판받거나 구금될것은 뻔한 일이였다. 그는 한락연을 만나 서한을 팔로군의 팽덕회(彭德懷)부사령원에게 전할것을 요구하였다. 팽덕회를 만난 한락연은 위외더러 계속 93군에 남아 사업을 견지할것을 요구하는 팔로군측의 의사를 전했다.

5월에 한락연은 위외의 서한을 가지고 서안의 팔로군 판사처를 찾아 떠났다. 그는 서안을 거쳐 중경으로 가던 길이였다. 그러나 서안을 떠나 중경으로 가던 도중 한락연은 보계(寶鷄)에서 국민당 밀정들에게 체포되였다. 밀정들은 그를 공산당으로 의심하였지만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였다. 옥중에서 한락연은 적들의 혹형을 이겨내고 당의 비밀을 고수하였으며 옥중의 기타 전우들과 함께 적들과 투쟁하였다.


한락연은 전지 기자의 신분으로 팔로군의 진동남근거지를 다니며 공산당과 팔로군, 신사군의 항일을 적극 선전했다(태항산근거지의 민가)


한락연의 옥중 자화상
 

한락연이 체포된 소식을 접한 당조직에서는 백방으로 구조하였다. 그러나 위외의 사건과 련계되였기에 처음에는 쉽게 풀려날수가 없었다. 당시 위외는 사태가 엄중한것을 짐작하고 93군의 부분적인 진보인사들을 거느리고 팔로군을 찾아 떠났던것이다. 위외는 후에 백천(白天)으로 이름을 고치고 팔로군 전선총부 참모처장을 지냈으며 함께 93군에서 나온 하눌(夏訥)은 전선총부 참모로, 양공소(楊公素)는 전선총부 비서로 사업하였다.

3년간 옥고를 치른 한락연은 중국공산당과 국민당 상층인사들, 동북 민주인사들의 노력으로 가석방되였다. 그러나 밀정들은 계속 그를 감시하였으며 그에게 서북을 떠나지 못한다는 등 여러가지 제한을 주었다.

출옥후 한락연은 서안시에서 생활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한편 계속 당의 통일전선사업을 진행하였다. 이해 여름에 그는 예술기질이 있는 학생 황주와 함께 다시 섬서로 떠났다.

수개월간 한락연은 중국의 참담한 모습을 진실한 화폭에 담아냈으며 동행한 황주에게 회화기교를 전수하는 동시에 혁명사상을 전수하였다. 드넓은 중화대지의 아름다운 경물들과 빈궁에 허덕이는 농민들, 낡은 마차, 농촌녀인들의 진실한 모습이 그들의 화폭에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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