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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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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항일 렬사들과 어르신들을 추억하며
2014년 08월 15일 21시 39분  조회:4020  추천:5  작성자: 김성룡

“8.15” 는 일제로부터 해방 받은 조선민족의 광복의 날로서 자못 의미 깊은 날이다. 때문에 해마다 남북 모두가 이날을 성대히 기념하고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항일전쟁 승리의 공식 기념일이 9월 3일이기 때문에 특별한 기념행사들이 없다. 오직 조선족이 집거해 살고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만이 이날을 “광복”이요, “해방”이요, “항전승리”와 관계없이 민족전통의 어르신들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로인절로 지내고있다. 물론 마음 깊은 사람들은 이날을 로인절로 기념하면서도 이날의 진정한 의미도 망각하지 않을것이다.

늘 “8.15”를 지내왔지만 올해만은 각별히 감회가 남다르다. 늘 그러했듯이 집안 어르신들에게 안부 전화를 하고 곁들어 명절의 인사를 전하며 조그마한 성의로 용돈을 얼마간 보내드리면 그만이였다. 그리고 조금 여유가 있으면 방송사업일군인만큼 우리방송을 애청하고 계시는 연변이거나 장춘의 어르신들에게 문안전화도 하군했었다. 그런데 올해는 웬지 여러 가지 의미가 한데 뒤엉켜 마슴이 무겁기만 하다. 그도그럴것이 내가 알고있는 너무 많은 어르신분들이 이미 돌아가셨다. 내가 방송국 기자로 취재하면서 만났던 많은 로인들 특히 혁명에 참가하셨던 분들은 최근 몇년사이에 련속 돌아가셨다. 조선혁명군정대학을 나왔고 해방전쟁시기 동북대지를 석권하면서 피어린 항쟁을 직접 겪으셨던 심양의 원로 최강 선생님, 서영화 선생님, 길림성 반석의 김응삼 선생님, 길림성 연길의 김병욱 로인, 최명세 로인.......뿐만 아니라 우리방송을 애청해 듣던 잊지 못할 로인분들도 돌아가셨거나 또 병에 시달리고 계신다. 특히 방송을 들으시면서 늘 나를 고무격려해주셨을뿐만 아니라 방송 애청자 소조까지 조직해 주신 연변방송애청자협회의 문태경 회장님께서 중병에 걸려 이제는 사람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는 비보를 박철원 선생님으로부터 전해 들었기 때문에 심정이 더 무거운감을 느끼고있다.

20여년간의 방송기자로 사업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고 많은 일을 겪어보았지만 그래도 문태경 회장님을 비롯한 방송 애청자분들을 만났던 일이 가장 기억이 새록새록하고 또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다.
 
문태경 방송애청자협회 회장

 문태경 선생님은 아주 정열에 넘치는 분이셨다. 70세 고령이 넘었지만 점잖고 말수적으며 또 가끔씩 유머도 곧잘 하시군 했다. 또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조금 억찌도 곧잘 부리시군 하셨다. 물론 부인이 안 계시기에 곁에 돌봐주는 사람이 크게 없었던것 만큼 술이나 담배를 자제하지 못하셨다. 게다가 나 역시 깐깐한 성격이 아니였기에 만나면 늘 함께 담소를 나누면서 술과 담배를 걸지 않았다.

문태경 선생님과의 인연은 2004년 하반기부터였을것이다. 당시 내가 맡았던 대형 력사방송다큐 “불멸의 발자취”가 본격 방송되던 때였다. 물론 한주에 한회정도 방송하니 그처럼 큰 영향력을 과시하지 못했다. 대신 오래도록 길게 청취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준 것도 사실이다. 그때 방송이 끝날때면 늘 방송된 내용에서 찾아보는 퀴즈문제를 내주고 전화나 편지로 퀴즈를 맞추는 분들에게는 관련 도서거나 반도체를 비롯한 기념품을 증정했다. 너무 간단한 이벤트였지만 그래도 청취자들의 호응이 괜찮았다. 그러던 어느 날 늘 퀴즈를 맞추던 한 애청자가 편지를 보내왔다. 방송다큐 “불멸의 발자취”를 잘 청취하고 있는데 이 좋은 자료를 책으로 정리해 출판하지 않겠는가고 건의해왔다. 그리고 자기도 자그마한 인쇄공장을 가지고있으니 도움을 주겠다는 내용이였다. 그러지 않아도 책 출판이 꿈이였 던 나는 곧 이 좋은 건의를 제기한 청취자를 기억하게 되었다. 편지마지막에 “문태경(文泰景)”이라고 한자로 밝혀져 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때부터 문선생님은 사실 방송 애청자소조를 조직할 준비를 하고 계셨다. 얼마후 문선생님으로부터, 방송에서 호명되는 애청자들의 련락주소를 제공할것을 요구하는 전화가 왔다. 그래서 명함과 통신력락처(주로 고정전화번호)를 정리해 보내주었다. 문선생님은 명함에 따라 애청자분들과 일일이 통화하면서, 방송애청자 소조를 건립해 자주 모임을 가지고 서로 방송청취 소감을 이야기하며 또 뜻 깊은 행사도 조직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의하셨다. 그리하여 방송애청자분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2005년에 민족출판사에 의해 “불멸의 발자취”가 출판되였다. 비용은 좀 할인 받았지만 그래도 모든 비용은 자부담으로 해결했다.

책이 출판되자 나는 가장 먼저 이 소중한 도서들을 방송 애청자들에게 선물하고싶었다. 그래 스스로 우편료를 부담하면서 먼저 연변의 문태경 선생에게 부쳐 보냈다. 방송프로그램 퀴즈답변에 적극 참가한 애청자분들에게 선물로 증정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장춘의 애청자분들은 그때 많지 않았기 때문에 수십권을 직접 가져다 드릴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그해 겨울 연변에 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비행기를 마다하고 기차편으로 장춘을 들러 가기로했다.

책은 생각보다 아주 무거웠다. 같은 체적의 무게가 돌덩이보다 더 무거운것 같았다. 나는 책을 가득 담은 트렁트를 끌고 장춘역에 내리니 장춘의 방송 애청자 윤영학 선생님께서 마중나오셨다. 윤영학선생님도 그때 장춘의 방송 애청자들을 조직하고 계셨는데 나의 부탁을 아주 기꺼이 들어주셨다. 그리고 나를 댁에 초대해 사모님이 직접 만든 맛나는 음식까지 대접해 주셨다. 그야말로 제집 식구를 맞아주는 격이였다.

장춘에 잠깐 머문 다음 연변에 가서 일을 보기 시작했는데 지금도 그때 연길 출장 목적이 무엇이였던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문태경 선생님과 애청자들을 만나던 정경만은 기억이 뚜렷하다.

우리는 함께 간단한 좌담을 가졌고 애청자분들은 너도나도 다투어 방송을 청취한 소감을 이야기하셨다. 그리고 소중한 책을 선물해주어서 너무나도 감사하다고했다. 그런데 이때 문태경 선생님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셨다.

“이왕 이렇게 모였던바에 우리 중앙인민방송국 방송 애청자소조를 건립하자”는것이였다. 물론 자리에 참석한 분들은 기꺼이 승낙했고 만장일치로 문태경 선생님을 책임자로 추대했다. 문선생님은 이 자리를 위해 미리 도서 “불멸의 발자취”를 이분들에게 다 나누어 드리면서 여러사람들의 의향을 다 파악했던것이다. 그리하여 방송 애청자 소조 설립회의가 소박하게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때 생각지 못한 일이 또 생겼다. 한 애청자가 책을 들고 나에게 다가오더니 싸인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아 글자를 잘 못 쓰는데요”하고 겸손을 떨면서 한국식대로 “아무아무에게 드리니 혜존”하고 써 드렸다. 그러자 다른 애청자분들도 모두 와서 줄을 서서 싸인을 기다리는것이였다. 방송애청자 소조 설립좌담회가 도서 출판 싸인회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자리에 모인 십여명에게 다 싸인해주고 방송애청자소조의 설립을 축하해드렸다. 모두가 첫 대면이였지만 문태경 선생님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분은 옛날 주덕해가 연변에서 서기로 사업할 때 연길시 정부의 한 부문에게 공무원으로 심부름을 했던 분이였다. 정확한 직함과 단위는 부끄럽게도 지금까지 모르고 있다.

그후 문태경 선생님과 나는 자주 통화했고 나는 연변에 출장 나갈 기회만 있으면 되도록 시간을 쪼개서 문태경 선생님과 애청자분들을 만나 보군했다. 선생님은 애청자분들을 조직해 주덕해 기념비를 찾아가 추모행사를 했고 렬사릉원을 찾아 렬사들을 추모하는 행사도 조직했으며 또 환경미화활동을 비롯해 다양한 뜻깊은 일들을 많이 하셨다. 뜻깊은 일을 하시고는 늘 우리 애청자분들이 무엇을 했다는 것을 나에게 전해주면서 “사업회보한다”고 말씀하셨다. 롱을 잘하는 분인줄 알기 때문에 나는 전해 들은 내용을 정리하여 방송프로에서 방송하군했다. 그러자 애청자소조의 영향력도 날로 커졌다. 특히 연변의 애청자소조와 장춘의 애청자소조간의 련락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어르신들은 서로 문안을 했고 방송을 듣고 연변에서 혹은 장춘에서 뜻깊은 일을 했다는것을 서로 알았다면서 기꺼워하셨다. 그리하여 후에 연변과 장춘의 애청자 대표들이 함께 길림시의 화피창 렬사릉원을 공동 참배하는 행사도 하게 되었던것이다.

방송애청자소조가 자발적으로 설립된후 이듬해 2006년에 우리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개시 50주년 기념행사가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방송을 듣고 조선의용군이 싸웠던 중국 관내지역 태항산에 가 보고싶었 던 애청자분들이 이를 계기로 태항산 견학을 하자는 건의가 들어왔다. 물론 역시 문태경선생님의 좋은 아이디어였다. 련락을 받고 나는 고민했다. 대부분 로인분들이기 때문에 건강상황이 문제가 될것 같았다. 그리고 로인분들이 다 돈을 아껴쓰시는 분들인데 어찌 아무 후원도 없이 견학비용을 부담시키겠는가가 걱정되였다. 내가 고민을 이야기하자 문태경 선생님은 걱정하지 말라면서 지금 생활이 좋아졌고 자녀분들이 대도시나 외국나가 돈을 잘 벌고있으니 어지간한 비용은 부담할수있다고 했다. 그리고 특히 “조선 렬사들이 조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국타향에 묻힌것도 서러운데 우리 연변의 조선족도 찾아가 참배하지 않으면 이분들을 알아줄 사람이 어디있겠는가?”고 하셨다.

2006년 “8.15”가 지난후 얼마 안되여 연변의 애청자와 장춘의 애청자 윤영학 선생님을 비롯해 태항산 견학단 9명이 북경에 모이게 되었다. 이분들은 먼저 중앙방송국 50주년 기념대회에 참석했다. 문태경 선생님은 기념대회에서 연변에서부터 가지고온 금기(錦旗, 작은 기발에 글을 써서 치하하는 것으로 지금의 감사패와 같음)를 방송국 주임에게 드렸다. 금기에는 “백두의 높은 정기는, 조선민족의 숨결일세”라고 씌여졌다.

방송국 조선어부에서는 공식적으로 애청자분들을 초대하고 이분들을 잘 안내하라고 나에게 임무를 주었다. 물론 미리 준비를 다 해놓았던 나는 려행사를 통해 기차표, 관광뻐스, 숙박 등을 까근히 배치해놓았다. 그리하여 기념대회가 있은 이튿날 일행은 기차로 한단에 가서 먼저 한단 렬사릉원을 찾아보았다. 거기에는 조선의용군의 진광화와 윤세주 렬사의 묘소가 있었다. 일행은 묘소를 찾아 연변식으로 참배했다. 간단한 과일과 마른 음식을 차려놓은 다음 한분씩 술을 붓고 절을 올렸다.

이때 누군가가 “제사상에 조선의 마른 명태가 있고 한국산 소주가 있으니 남북이 통일 된거나 다름없지 않는가? 렬사들도 안식할수있게네......”하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모두가 빙그레 웃었지만 마음만은 그처럼 경쾌하지는 않았다. 남북 분렬은 지금까지 가셔지지 않는 우리민족의 아픔이니 말이다. 희생된 렬사인들 지하에게 어찌 마음 펴할수있겠는가?!

한단에서 우리 일행은 관광뻐스를 타고 하북성 섭현으로 가서 조선의용군 사령원 무정이 머물렀던 집, 조선의용군 대원들이 머물렀던 절당, 조선의용군과 현지 백성들이 군민문예야회를 했던 마을의 무대 그리고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를 둘러보았다.

이어 일행은 태항산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마전의 팔로군 전적사령부 옛터를 비롯한 많은 사적지와 전적지들을 참관했다. 특히 태항산기슭에 새로 축조된 “조선의용군 렬사 기념관”과 좌권장군과 함께 희생되였던 진광화, 윤세주 렬사의 묘소자리를 찾아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좌권 장군은 항일전쟁시기 희생된 공산당의 가장 높은 간부였다. 그런데 조선의용군의 렬사인 진광화와 윤세주렬사는 좌권장군과 함께 태항산기슭에 나란히 묻혔던 것이다. 그후 중한 수교가 이루어지고 많은 한국 유가족들이 다녀감에 따라 한국에서 투자해 섭현 정부와 공동으로 이곳에 조선의용군 렬사 기념관을 세웠던 것이다.

애청자분들이 모두 년세가 많은 분들이기 때문에 사적지들을 다 다닐 수 없어 일정을 조금 줄였다. 그리하여 저녁녘에 섭현의 명소 왜황궁을 참관하고나서 빈관으로 돌아왔다.

저녁상에 둘러앉은 애청자분들은 마음속 깊이 솟구치는 감흥을 달랠수 없었다. 방송을 들으면서 받았던 감수, 그리고 아주 먼 옛날 어린시절 조선의용군으로부터 “최후의 결전”, “조선의용군 행진곡” 등 가곡을 배우며 성장했던 일들을 생각하고 또 이번에 조선의용군들이 학습하고 싸웠던 사적지들을 직접 목격한 감격이야 무엇으로 헤아리겠는가?

어느 한분이 먼저 축배의 노래를 부르자 자리의 모인 사람들이 너도나도 장끼를 보이기 시작했다. 춤을 추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 시를 읊는 사람 모두가 흥에 겨워 밤가는 줄 몰랐다.

한단 렬사릉원에서 방송애청자견학단



렬사들에게 술을 올리는 방송애창자


진광화,윤세주 렬사묘소를 찾아

  “8.15”, 우리민족이 해방된 날이고 광복을 맞이한 날이지만 지금까지도 남북분단의 아픔은 계속되고 있다. 특히 요즘에 와서 일본 우익세력이 더욱 기세를 부리고 군국주의를 회생하려는 기미를 보이고 있어 중국,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과 아시아 린국에 큰 불안을 조성하고 있다. 래년이면 항일전쟁 승리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근 70년 세월이 흘렀지만 강권과 폭압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인류는 아직까지도 진정한 평화를 찾지 못하고 있다. 특히 요즘에는 바티카노의 교황님이 한국을 찾아 성대한 평화기도식을 가진다고한다. 교황님의 평화기도가 진정 우리 마음속의 아픔을 달래주고 진정한 평화를 위해 노력하도록 사람들을 편달할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가 진정 평화를 실현해야만이 “8.15”가 “광복”이요 “항전승리”요, “일본패망”이요 등등의 기념일이 아닌 진정 로인들의 건강과 장수만을 빌고 축복하는 로인의 명절, 건강의 명절로만 될수 있는 것이다!
  삼가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빌고 문태경 선생님과 모든 어르신님들의 건강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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