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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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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동(冀东) 항일유격투쟁의 코기러기 주문빈②[2017 청명특집]
2017년 04월 03일 19시 54분  조회:2085  추천:0  작성자: 김성룡
주문빈은 반일애국지사인 김기창의 셋째아들로 태여났다. 신민회에서 애국계몽의 독립투쟁을 진행하였던 김기창의 영향을 받아 그의 자녀들도 일찍부터 혁명활동에 참가하였다.
어릴때부터 민족심이 강했던 주문빈은 일제침략자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불탔으며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바꿔볼 생각으로 점차 진보적인 사상을 접수하면서 혁명활동에 참가하였다.
1914년 6살때 아버지를 따라 북경 통현에 이주해온 주문빈은 1916년부터 통현에서 형들과 함께 로하(潞河)소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맏형인 김승호는 일찍 조선에서 혁명에 참가하였고 둘째형 김영호는 중국에 와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중국에 건너온후 주문빈은 자기 민족의 말과 글을 잊어서는 안된다고하여 스스로 조선어를 자습하면서 문화지식을 터득하였고 일제침략자들로부터 조선민족을 해방시킬 방법을 강구하였다. 1926년에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27년에는 강경신(康景新), 장학연(张学渊 일명 张珍), 홍경륭(洪庆隆), 장수태(张树棣)를 비롯한 중국청년들을 중국공산당원으로 받아들여 로하중학교 당지부를 설립하였다. 주문빈과 함께 활동했던 중국인 강경신은 후에 진찰기변구(晋察冀边区)에서 혁명하였고 홍경륭은 석가장에서 희생되였다. 주문빈의 동생 김상호도 이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유서 깊은 로하중학교는 중국 근대력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유명한 학교였다. 1867년 미국인 선교사 셰필드 (谢卫楼 Sheffield, 1841-1913)가 창립한 이 학교에는 주문빈 형제가 공부했을뿐만 아니라 1920년대에 무려 41명 조선청년들이 공부하였다. 그러므로 로하중학교는 우리민족과 깊은 인연이 있는 학교라 할수있다.

로하중학교 일각
 
2003년 처음 로하중학교를 답사할때 김신정로인은 학교 교정의 협화호(协和湖)라는 호수에서 오빠들이 스케트를 타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신정) “ 오빠는 안경 사러 간다고 했지만 안경을 사지 않고 그 돈으로 스케트를 사왔습니다. 그들은 호수에서 스케트를 탔는데 통현에서 이들이 가장 먼저 스케트를 탔습니다. 셋째 오빠가 가장 잘했지요. 그들은 북해공원에 가서 스케트를 타군 하였는데 사람들은 키가 장대한 오빠들을 보면 모두 피했습니다. 오빠는 모두 키가 2메터에 달했습니다. 키가 가장 작은 큰 오빠도 1메터 90이였으니깐요. 연경대학을 다닐때도 오빠들은 키가 소문이 났습니다. 오빠들 가운데서 셋째 오빠 주문빈이 가장 총명하고 날렵했습니다.”
 
통현 사람들은 이들 일가를 “고려김가(高丽金家)”라고 불렀다. 김신정로인은 당시 조선의 유명한 혁명자 량명, 천진시 당위원회 주요 간부로 활동하던 리철부 부부 등이 주문빈 형제를 찾아왔다고 하였다.
 
(김신정) “량명은 조선공산당 창시자의 한사람으로서 조선에서 아주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는 북경에서 상해로 우리집에 들렸고 다시 상해에서 쏘련으로 갈때도 우리집에 들렸습니다. 그는 상해에서 결혼했는데 1928년쯤 되였을때 일입니다. 비교적 현대식 복장을 녀인이 애기를 안고왔습니다. 량명의 부인이였는데 이름이 조원숙(赵媛淑)으로 기억됩니다. 애기는 량소명(梁小明)이라고 불렀습니다. 한달후 량명은 국제회의에 참석하러 쏘련에 갔고 임신한 안해와 아들을 우리집에 두고갔습니다. 그들의 안전을 위해 어머니는 련락을 달아 그들을 평양에 보냈습니다. 한위건은 생기고 서생(书生)티가 다분한 사람이였습니다. 내가 소학교를 다닐 우리집에 와서 오빠들과 조선말을 하군 하였지요. 한위건, 분은 녀성과 같았습니다. 얼굴을 붉히고 말소리도 조용조용하였지요. 하지만 부인은 달랐습니다. 매우 활발하고 씩씩해서 도리여 남성 같았습니다.”
 
 로하중학교 협화호 기슭에는 주문빈렬사를 기념하는 작은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로하중학교 시절 주문빈과 함께 당사업을 했던 장진이 1984년에 학교창설 경축대회에서 주문빈의 사적을 이야기하면서 문화대혁명기간 받지 못했던 로임을 전부 헌납하여 주문빈 렬사기금을 만들었다고한다. 그리하여 그해 주문빈 렬사기념비가 세워졌다. 해마다 청명이면 전교학생들이 기념비 앞에 모여 추모모임을 가지거나 공청단 입단식을 가진다고한다.
   2003년경 처음 로하중학교를 찾아왔을때 주문빈렬사기념비를 세우게 된 경위와 로하중학교의 첫 중국공산당 지부의 활동을 소개해 주었던 로하중학교 력사교원 경보진(耿宝珍)도 이미 세상을 떴다고한다.
 1952년에 로하중학교에 와서 교원 사업을 한 경보진 교원은 오랜 사학자였다. 장시기 학교력사를 연구하였던 그는 1919년이후 1920년대까지 41명 조선청년이 로하중학교를 다닌 기록이 있다고 소개하면서 학교명록에서 그 이름들을 찾아볼수있다고했다. 경보진 교원의 소개에 의하면 로하중학교를 졸업한 이들 조선청년들은 공산당이나 국민당을 따라 혁명한 사람도 있다고했다. 특히 주문빈은 통현에서 첫 공산당지부를 만들었고 당조직을 발전시켰으며 후에는 기동(하북성 동부)에서 혁명투쟁을 이끌었다고 소개했다.


왼쪽으로 세번째 김신정, 네번째 경보진(2003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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