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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환 동시론 [한국] 모셔온 향기
2016년 08월 10일 19시 20분  조회:1602  추천:1  작성자: 강려

동시 창작론 ①

직접 표현은 피해야

유경환(시인,동시인)
 

  산길에
  풀꽃이
  아름답게 피었어요.

  이 석 줄 한 연()으로 씌어진 글을 한 편의 동시로 보아야 할 것인가.
  '산길에 풀꽃이 아름답게 피었어요.'
  이렇게 이어붙여 보면, 틀림없는 산문이다. 주어, 동사가 뚜렷하고 주어와 동사의 서술 관계가 분명하다.
  그러니 한 줄의 완벽한 산문이다. 하건만 위에 인용했듯 석 줄로 바꿔 놓고서 동시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즉 운문이라고 여긴다. 쓴 사람의 생각으로만 운문일 뿐, 그러니까 형식으로 운문처럼 보일 뿐이지, 사실은 운문이 아니다. 다른 말로 동시라고 하기가 어렵다.

  산길에
  풀꽃이
  아름답게 피었어요.

  위의 글이 작품이 되려면, 적어도 '아름답게'라는 부사어는 다른 표현으로 바뀌어야 한다. '아름답게'라는 형용사적 부사어를 직접 표현으로 구사하면, '아름답게'라는 표현의 분위기가 사전적 의미에 갇히고 만다. 따라서 쓴 사람이 지녔던 느낌이 읽는 사람에게 전달되기 어렵다.
  읽는 사람에게 아무런 감동이 오지 않는다. '아름답게'라는 표현은 시어(
詩語)가 되기 적합하지 않다는 뜻이다. 이미 일상어로 때묻어 있어 쓴 사람과 읽는 사람 사이에 아무런 정서 이동을 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감정을 전달하는 정서 이동, 이것이 쓴 사람에게서 읽는 사람에게 옮겨지려면, '아름답게'라는 표현 대신 다른 표현이 동원되어야 한다. 그냥 쉬운 표현으로 '아름답게'가 아니라, 쓴 사람만의 새로운 표현 기법이 요구된다.
  쓴 사람이 생각해 낸 새로운 표현 방법, 없던 것을 있도록 하는 표현 방법 찾기가 곧 창작인 것이다. 창작을 크리에이션(Creation)이라 한다. 이미 있는 것을 가지고 되풀이 사용하면 되풀이의 Re가 붙어서 리크레이션(Recreation)이 된다. 오락이다. 이미 있는 표현을 재사용하는 경우가 유행가의 노랫말이다. 동시는 창작이어야 한다.
  '산길에'는 어디라는 것을 나타내는 부사적 조건이다. '풀꽃이'는 주격으로 상징적 존재일 수 있다. 주어인 풀꽃이 다른 의미의 해석을 가능케 구사되었다. 그러기에 이 석 줄에서 시적 분위기를 조성할 요체는 '아름답게 피었어요'에 달려 있다. 그런데 일상적 대화에서 하듯 그냥 '아름답게 피었어요'라고 하면 읽는 사람이 쓴 사람의 내면에 접근할 수가 없다. 쓴 사람이 어떻게 아름답게 보았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 감동을 했는지 조금도 짐작할 수 없다.
  쓴 사람이 이 석 줄을 쓸 때 지닌 내적 정서, 이것을 읽는 사람이 짚어낼 수 없다. 쓴 사람이 지녔던 내적 체험이 읽는 사람에게 전달되지 못하면, 어떤 감응도 생기지 않는다. 곧 감동이 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정서 이동이 안 된다.
  정서 이동의 불가능은, 한마디로 감동의 차단이다. 그런데도 적잖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은 소정의 절차를 밟아 등용의 관문을 통과한 동시인이라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기 때문에, '산길에/풀꽃이/아름답게 피었어요.'라고 써놓고, '이렇듯 아름다운 모습을 시적으로 묘사했는데…… 어째서 작품이 덜 되었다고 평가하느냐'고 불만스러워한다. 쓴 사람은, 풀꽃이 핀 산길의 정경을 잘 옮겨 놓았다고 여기기 때문에 항변하는 것이다.
  이런 불평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어떻게 설명해야 '발효되지 아니한 표현'인 것을 깨닫도록 할 수 있을까. 어떤 방법으로 일러줘야 숙성한 감정이 바탕하고 있지 않음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을까. 산길에 풀꽃이 수를 놓듯이 피어 있는 것을 보고 나서 '산길에/풀꽃이/아름답게 피었어요.'라고 쓰는 것은 초등학교 1학년생도 가능한 것이다.
  소정의 등단 절차를 거쳤다면 한 20년은 살았을 것이다.그런데 7살이면 써낼 정도의 표현 기교밖에 못 지니는가? 20년, 30년, 40년, 심지어 60년을 살아보고도 나이에 걸맞는 삶의 체험을 겪어내고도, 초등학교 1학년생이 표출하는 정서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인가.
  살아낸 세월만큼 나무의 나이테처럼 자기 내면에 축적한 것이 있을 것이다. 단순한 경험일 수 있고, 생각 깊은 체험일 수 있으며 또 아픔을 이겨낸 쓰라림일 수도 있겠다. 이것을 눈에 안 띄게 대입할 경우, 의인화의 풀이나 이중 해석이나 상징 분석이 가능해진다.
  필자는 '생각의 우물'이라는 표현을 오래 전부터 써 왔다. 얼마나 깊게 생각의 우물을 파 왔으며, 얼마나 오래 사색에 젖어 왔으며, 얼마나 깊은 고뇌에 빠져 보았느냐에 따라 동원 선택하는 시어(
詩語)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별다른 생각 없이 '산길에 풀꽃이 예쁘게 핀 것을 보나, 아… 아름답구나… 이런 분위기를 글로 옮겨서 남에게도 전해주고 싶다'라는 충동에 따라 위의 인용처럼 썼다면, 이 사람 나이가 60대일지라도 정서 연령은 10대일 수밖에 없다. 만약 유치원에 다니는 원아나 초등학생이 이렇게 썼다면 칭찬받을 일이다. 하지만 인생을 겪어본 사람의 안목으로 이렇게 썼다면 돌아서서 한숨을 뿜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산길에
  풀꽃이
  ○○○○○○…피었어요.

  위에 ○○○○○○… 남겨진 자리를 자기 체험처럼 자기 사상에 바탕한 자기만의 표현으로 채우려 애쓰고 고민할 때, 비로소 생각이 숙성되고 발효하여 자기다운 목소리가 나오게 된다. 동시 창작을 위한 표현 기교에서 기법이라는 것은 가장 적절한 한마디를 찾아내는 데 있다. 이것이 표현 기법의 개발이다. 윗줄과 아랫줄 그리고 앞과 뒤, 그 사이에 들어서서 전체 분위기를 살려내는데 걸맞는 한마디를 만들어 내는 일, 이 일은 어렵고 힘든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사물은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 달리 보인다. 슬픈 심정으로 달을 쳐다보면 달이 슬퍼 보이고 즐거운 감정으로 쳐다보면 달이 웃는 것으로 보인다. 보이는 대상은, 보는 사람의 심상(
心象)에 걸맞게 보인다. 더 쉽게 말하면 볼록렌즈로 보느냐 오목렌즈로 보느냐와 같다. 곤충의 모듬눈[複合眼]은 사람이 보는 것과 다른 영상을 곤충이 인식하도록 작용한다. 보이는 대상이 보는 사람의 눈을 통해 보는 사람의 마음에 들어와 자리하는데, 보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내면화하는 양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 말은 생각이 깊은 사람이 보는 풀꽃과 생각이 단순한 사람이 보는 풀꽃이 같지 않다는 것을 정당화한다. 깊은 고뇌에 갈등하는 시인의 눈을 통해 내면화한 풀꽃의 이미지가 어찌 '아름답게'라는 단어로 표출될 수 있겠는가.
  부모와 헤어져 살고 있는 초등학생이 보았다면 '산길에/풀꽃이/어우러져 피었어요'라고 쓸 것이고, 서로 싸우고 돌아선 사람이 보았다면 '산길에/풀꽃이/서로 외면한 채 피었어요'라고 쓸 것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산길에/풀꽃이/아무도 듣지 못하는 말로 속삭이고 있어요' '산길에/풀꽃이/길이 외로울까 봐 피었어요' '산길에/풀꽃이/어머니 발자국으로 피었어요' '산길에/풀꽃이/햇볕을 붙잡고 있어요' '산길에/풀꽃이/볕을 기다리고 있어요 '산길에/풀꽃이/달빛 마시려 목을 쳐들고 있어요'…….
  얼마든지 '아름답게'라는 형용사적 부사어를 대신하여 시적 요건을 보태줄 수 있는 일이다. 과연 어떤 표현이 '아름답게'라는 것 대신 시적 요건을 충족시켜 줄 것인가. 그것은 이 석 줄의 위와 아래에 올 다른 연(聯)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직접 표현은 되도록 피해야 은유라고 하는 비유의 역할이 커질 수 있다. 그러므로 직접 표현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분명하게 덧붙여야 할 것이 있다. 산문에서 운문으로 형식을 바꾸기 위한 조건으로 ①명사 뒤에 붙는 토씨(조사)를 가능한 떼어버리고, ②문법적 어문 구조를 해체하는 손질이 필요하다. 토씨를 생략하고 산문 구조를 해체해야만, 그만큼 빈 자리가 생긴다. 이런 빈 자리가 만드는 공백이 있어야, 읽는 사람의 상상이나 폭 넓은 해석이 들어갈 자리가 생기는 것이다.
  이런 감정의 여운에서 다양한 해석이 증폭되며 확대 해석이 가능해진다. 쓴 사람이 생각 못했던 비유나 상징까지, 읽는 사람에 의해 지적되면, 동시의 감상은 여러 사람에 의해 다양하게 이루어진다. 곧 독자에 의해 상징 의미가 발견되는 셈이다.
고속도로에 제한 속도를 60 Km라고 표시해 놓으면 60 Km로 달려야 하는 규제를 당한다. 그 이상의 속력을 내면서 느끼는 쾌감이나 그 이하의 속력을 내면서 풍치를 감상하는 즐거움이 박탈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산길에
  풀꽃이
  아름답게 피었어요.

라고 써 놓으면, '아름답게'라는 직접 표현이 지닌 사전적 의미 또는 일상의 어의(語意)에 구속되기 때문에 그 이상의 멋을 읽는 사람이 느낄 수 없게 된다. 시는 산문과 다르다. 상상을 제약하거나 해석을 제한하는 언어의 구속, 이런 구속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거나 또는 문법 구조의 해체를 시도하는 작업에서 오히려 매력을 얻는다.  

(2003년 봄 『한국동시문학』창간호)

 

동시 창작론 ②

「생략」으로 빛나는 동시

유경환(시인, 동시인)

  문화재 기능 보유자들이 제품을 만들 때 갈고 닦고 하는 모습을 보면 장인(匠人) 정신이라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동시를 쓰는 일에서도 이와 다르지 않다. 산문 형태에서 운문 구조로 바꾸는 1차 작업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으로 '지워 버리는'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 이 생략 작업은, '여러 해석이 가능하도록' 하는 나무의 가지치기와 다름없다. 좀더 구체적으로 짚어보기로 하자.

  좋은 산문은 한 가지 뜻만 드러나되 그 뜻이 분명해야 한다. 이런 뜻인지 저런 뜻인지 헷갈리는 산문은 좋은 산문이 못 된다. 운문은 이와 반대이다.
  운문은 여러 가지 뜻을 품을 수 있어야 매력 있는 운문이 된다. 좋은 운문은 여러 가지 뜻을 담을 수 있으므로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이것이 운문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산문과 운문의 차이는 이렇게 확실하다. 산문과 운문에는 겹칠 수 없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런데 <월간문학>(2002. 12∼2003. 2) 잡지에 실린 '동시'라는 글을 보니, 산문과 운문의 구별이 안 되는 것을 '동시'라고 발표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을 '동시를 쓰는 아동문학가'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회원의 글이면 다 실어주는 협회지(
協會誌)에 발표하고 싶어 보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쓰는 글을 어떻게 동시 작품이라고 믿게 되었을까? 아마도 어떤 등단 절차를 거쳤을 것이다. 소정의 절차를 밟는 동안, 자기 글도 동시 작품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혹 심사위원이나 추천위원이 있었다면 그들의 안목에 책임이 귀착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문학 작품으로서의 '동시' 수준에 오르지 못한 글을 (어떤 생각에서인지) '인정'하여 준 그 대가(
代價), 그 대가의 결과로 오늘날 아동문학 풍토엔 잡초가 무성하게 휘날리게 된 것이 아니랴.

  다시 말머리를 돌리자.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바로 이 점에 운문의 멋과 맛이 있다. 시는 동시를 포함하여 운문이다. 그러므로 시는 물론, 동시도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해야 한다.
  '여러 해석'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 시인은 첫 번째로 산문과 다른 형태로 변형시키는 작업으로 문장을 해체하고, 두 번째로 복합 의미를 지닌 상징 언어를 시어로 선택한다.
  문장을 해체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①주어 동사 따위의 문법 구조를 일부러 무너뜨리거나 ②주어 동사 따위의 문법적 배열을 의도적으로 뒤바꾼다거나 ③명사 뒤에 붙는 토씨 따위를 잘라버리는 생략 기법을 쓰거나 ④명사 앞에 오는 형용사 부사 따위를 철저하게 지워버리는 기법(
技法)이다.
  독자가 작품을 한 번 읽어서 어떤 느낌(feeling)은 알아낼 수 있으되 그러나 어떤 말(message)을 담고 있다고 대번에 짚어내기엔 애매하도록 시인은 모호한 시어를 선택 구사하기 일쑤다. 여기서 모호한 시어란, 다중(
多重) 의미를 지닌 어휘를 가리킨다. 어떤 연유에서 시를 읽을 때 두 번 세 번 읽도록 유도하는 술책으로 상징 단어를 시어(詩語)로 동원하는 것이 예사(例事)이다.
  왜 두 번 세 번 읽도록 유도하는 술책을 쓰는가? 되풀이 읽어내면서 글 속에 시인이 숨겨 놓은 뜻을 찾아내 감지(
感知)하도록, 곧 독자를 시 속에 끌어들이는 술책이다. 달리 쉽게 말하면 '간단히 직설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을 철사를 구부리듯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 복잡 구조를 통해 간접적으로 내비치는 방법이 시의 작법일 수 있다.
  왜 이렇게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는' 것일까?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는 작업은, 마치 반도체의 집적(
集積) 회로처럼 다양한 의미를 글 속에 축적하는 작업이다. 한눈에 대번에 읽어내는 글은, 글이 지닌 밑바닥 내용이 금세 드러나므로, 액면가가 곧 실제가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읽어야 비로소 글의 밑바닥 사상이 드러나는 시는, 독자의 정서 상태와 독자의 체험의 폭과 그리고 독자가 살아온 삶의 농도에 따라 다른 메시지를 독자에게 안겨주게 한다. 여기서 시작품이 '시로서 읽히는' 매력이 발견되는 것이다. 같은 동시를 읽더라도 읽는 독자의 수준에 따라 감상이 달라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시가 지닌 메시지와 독자의 수용 태도가 서로 상관 관계(相關關係)를 이루는데, 독자는 이를 잘 모르거나 간과한다.

  이쯤에서 이 창작론의 본론으로 들어가자. 무엇을 보고, 생각하고, 그리고 가슴에 스며오는 정감(情感)이 괸다면 ①우선 그 정서를 줄글(산문)로 쓰기 시작하라. 바로 적어두어야지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정감이 흩어지거나 엷어져서 정서를 포착하기 어렵다. ②그 다음 해야 할 일은, 생선을 토막 내듯이 이 줄글(산문)을 토막토막 잘라서 두 줄이나 석 줄이나 넉 줄, 다섯 줄……로 나누어 배열하고 되풀이 읽어보라.(대부분의 <월간문학> 발표 '동시'는 이 단계에서 작업이 중단된 것들이다.) ③적잖은 이들이 놓치고 있는 작업 과정이 이 세 번째 단계의 작업이다. 여기서는 문법에 구애되지 않고 명사 뒤에 붙어다니는 토씨를 떼어내고, 가급적 형용사 부사 따위 수식어를 지워버려야 한다. 이 생략 기법의 활용은 쉬운 것이 아니다. 자기 글을 자기가 자른다는 행위는, 고도의 장인 기술이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흔히 '열 손가락 안 아픈 것 없다'고 말하지 않은가? ④끝으로 글의 기본 문법인 주어 동사 따위 배열 순서를 의도적으로 뒤바꿔 도치법(倒置法)을 활용해 효과를 높이는 효과 측정을 해야 한다.
  이런 네 단계 작업을 마친 뒤에 다시 읽어보면서 '속으로 느껴지는 논리' 곧 내면으로 수긍할 수 있는 논리(정서 논리)가 통하고 있다고 여기면, 산문에서 운문으로의 변이(
變移)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시는 먼저 마음 속에 산문으로 오게 마련이며, 그 다음 다듬는 과정에서 운문 형식으로 탈바꿈하게 마련이다. 이것은 동시 쓰기에서도 마찬가지 일반 순서이다. 박목월도 그랬을 것이고 박두진도 그랬을 것이다. 이분들이 남긴 동시를 읽어보면 일반 순서에 따라 지어졌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물론 대가(
大家)가 되면 산문에서 운문으로 전이(轉移)하는 과정을 안 거치고 바로 운문 형태로 들어갈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대개의 경우, 시는 산문적 기초에서 출발하여 운문적 구조로 이월하는 것이 상식이다.

  이번에는 실례를 들어 설명하기로 하자. 아름다운 경치를 눈 앞에 보고 있다고 가정하자. '아, 참으로 멋진 풍경이다.…… 이 경관을 오늘 여기에 함께 자리하지 아니한 뉘에게도 보여주고 싶다. 혼자 보기엔 너무 고운, 아까운 경치야…….' 이렇게 감탄할 만한 풍경 앞에 서 있다고 치자.
  어떤 이는 카메라를 꺼내 찰칵 찍을 것이다. 사진에 그대로 담길 것이다. 어떤 이는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것이다. 화가가 하는 작업이다. 사진 작가의 작업과 화가의 작업은 모두 그 풍경을 재현하는데 초점을 둔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작업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차이는 생략이라는 작법 곧 생략 기법인 것이다. 사진에는 생략 없이 모든 것이 담긴다. 그러나 그림에는 화가의 선택대로 생략된 나머지만 담긴다.
  정밀 사진기로 감탄 대상을 정확히 담아낸 사진 작품과 그리고 무디지만 감성적인 선택으로 그려낸 미술 작품을 비교해 보자. 화가의 정서가 이입(
移入)된 (화가가 붓으로 표현하되 물감의 농도로 강조된) 주관적 선택이 더 황홀한 감정을 현장 부재자에게 전달할 수 있잖은가? 밴 고흐가 남긴 작품이 그 시대의 사진 작품보다 더 선호되는 이유와 같다.
  시와 동시가 애매 모호한 문장 구조를 지니도록 하는 것은, 한마디로 작품에 시인의 의도가 숨겨지도록 하는 작법이다. 시인이 그 작품을 쓸 때 (안 보이도록) 작품 행간 속에 깔아놓은 정서, 이것을 비슷한 체험을 지닌 독자가 읽어낼 수 있도록 '숨겨 놓는' 것이 시인이 즐겨 택하는 시작법이다. '나만큼 고민한 사람은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나만큼 관찰한 사람은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만큼 생각해 본 사람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이런 부담을 독자에게 요구한다. 이런 요구는, 문학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겐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지극히 당연시되는 요구이며 또 아울러 독자에겐 최소한의 의무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시를 읽고 감상하는 행위는, 누워서 TV 연속극을 보거나 TV 가요를 듣는 것과 같을 수 없는 최소한의 부담을 지불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런 '부담'을 지불하지 않고 읽고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 수준에서 '동시'를 써내거나 발표하는 글이 바로 '시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 '시적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그런 '동시'들인 것이다. 흔한 말로 수준 미달의 것을 이른바 '동시'라고 발표하면서, '어째서, 왜 내 동시에 대해선 혹평을 일삼느냐?'고 항변하기 일쑤이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는 속담이 있다. '목마른' 경험이 없다면 이 속담의 진의를 알기 어렵다는 말과 상통한다. 그러므로 먼저 목마른 경험에 마음을 쏟아야 한다. 목말랐던 경험 없이 물맛이 어떻다고 불만 불평을 쏟아놓는 데 문제가 있다.
  동시를 그냥 언어의 유희라고만 여기면 유리알 굴리듯 예쁜 낱말 고운 낱말을 추려서 이리저리 맞추는 작업에 그치고 만다. 이런 이들에겐 문학적 고민이나 시대의 아픔이나 역사의 앙금 같은 것들이 과연 필요한 것일 수 있을까? 동시는 어린이나 또 피곤한 어른에게 삶을 따뜻이 품어안도록 위안을 주며, 그런 위안을 안겨주는 일(몫)도 아울러 해내는 문학 작품으로의 값을 지닌다. 동시는 어린이나 어른에게(특히 생각이 달리는 어른에게) 주는 정서 영양일 수 있다. 그들의 가슴을 촉촉히 적셔주는 샘과 다르지 않다.

  이 글의 결론을 위해 긴 말을 짧게 줄여 보자.
  동시를 쓰겠다는 사람은, 첫 번째 단계로 쓰고 싶은 내용을 우선 산문으로 써 놓고 나서 줄일 수 있는 것을 모두 잘라내 길이를 줄여 운문 형태로 바꿔 놓은 뒤에, 두 번째 단계로 반드시 숨겨져 있어야 할 음률과 운치 곧 내재율과 율동성을 속으로 외워 맞춰야 한다. 세 번째 단계로 은유적으로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낱말, 곧 비유가 가능한 시어(
詩語)로 자기가 사용한 낱말을 바꾸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이러한 세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감한 생략 기법이다. 이준관의 동시를 읽어보면, 긴 산문체에서 퇴고 과정을 거치는 동안 몇 줄씩 지워버렸거나 아주 잘라버린 흔적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준관 시인은 시와 동시를 함께 쓰는, 시를 아는 동시인이기 때문에 좋은 동시도 잘 써내고 있는 것이다.

(2003년 여름 『한국동시문학』 제2호)

 

동시 창작론 ③


형상화란 무엇인가?
―간결하게 소재를 선택하면 형상화의 어려움 덜 수 있다

유 경 환

  동시 쓰기에서 세 번째로 다뤄야 할 것은, 형상화(形象化)의 문제라고 여겨 왔다. 형상화라는 말은 창작 기법 이론서에 자주 나오는 어휘이다. 그러나 쉽게 풀이하여 놓은 것을 보지 못했다. 이 기회에 형상화에 대하여 진지하게 다가서 보고자 한다.
  형상화라는 말이 한자로 되어 있어서 우리말로 바꿔볼 수 없을까 하고 여러 번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쉽사리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모양 만들기'라면 어떨까 싶기도 하지만, 마음에 드는 한마디가 못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모양 만들기에 가깝거나, 비슷하다고 할 만하다.
  어쨌거나 창작이라는 작업에서는, 형상화가 창작인의 가슴에 먼저 밑그림으로 들어서야 하느니만큼, 문학에서는 물론 미술 조각 따위에서도 한결같이 형상화가 중요한 일몫을 한다.
  창작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만드는 작업이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기에, 창작이 예술의 첫 번째 조건이 된다.
목수는 통나무를 가지고 온갖 도구를 사용하여 자기가 만들고자 하는 것의 모양을 나무 속에서 찾아 뽑아낸다. 이 때 '만들고자 하는' 것의 밑그림이 곧 형상화의 대상이 된다.
  조각가의 경우, 조각을 빚는 과정에서 자기 예술 속의 것을 모양이 있는 것으로 빚어내는 일에 따라다니는 생각이 곧 형상화의 대상이 된다.
  시인이 시를 쓰는 경우, 시인의 가슴 속에 괸 정서를 가슴 밖으로 꺼내어 모양이 있는 것으로 바꿔 놓을 때, 글자들이 갖추는 모양이 형상화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형상화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마음이 아닌 것(모양이 있는 것)으로 바꿔 놓을 때, 만들고 싶어하는 모양으로 옮겨진 심상의 변화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형상화가 어째서 중요하다고 하는 것일까. 형상화 작업이 아니면 어떤 느낌이나 감동이나 떠오른 상(
)이 예술가의 가슴 속에 한동안 담겨 있다가 그냥 스러지고 만다. 때문에 예술가의 가슴에만 담겨 있게 하지 말고, 가슴 밖에 존재하도록 모양을 갖춰 입혀야 하는 작업이 중요한 것이다.
  수많은 예술가들 가슴에 괴어 있던 생각이, 그들 가슴 밖에 존재하도록 창작되지 않고, 예술가와 함께 사라진 에는 부지기수다. 예술가의 가슴 밖에 있을 때에는 구상이나 예감이나 상상일 수도 있고, 예술가의 가슴 밖에 있을 때엔 창작물이 되는 것이다.
  가슴 안과 밖의 차이는, 가슴살 한 겹의 차이가 아니라, 무(
)와 존재의 차이다. 아무리 좋은 착상을 가지고 있다 한들, 누구나 읽을 수 있게, 노래할 수 있게, 눈으로 감상할 수 있게, 창작품으로 바꿔 놓지 못하면 그것은 여전히 무인 것이다. 인간의 육신 속의 영혼은 육신과 헤어져 따로 서야만 존속될 수 있다. 그래서, 죽기 전에 분리가 중요하다.
  예술가의 심상 속에 깃든 영혼은 만인의 영혼으로 바뀌어야, 그 값을 빛처럼 발휘할 수 있다. 예술가의 심상 속의 영혼은 고독한 영혼이되, 예술가의 심상 밖으로 나온 영혼은 만인의 영혼을 달래줄 수 있는 기능으로 값지게 된다. 죽은 육신에서 영혼이 나올 수는 없다.
  동시 작가의 동시 쓰기에서도 위에 말한 일반론이 그대로 적용된다. 동시 작가의 가슴에 스며든 시정(
詩情)이, 가슴 밖으로 나와 글자라는 수단에 힘입어 어떤 모양을 갖추게 되면, 이 때 비로소 동시 작가의 정서가 형상화하고 이 형상화에 담긴 작가 의도가 독자에게 전달된다.
  동시 작가가 동시를 쓰기 전 또는 쓰는 동안, 어떤 작가 의도를 형상화시키려 했던지, 그것은 동시 작가의 기량에 달린 문제다.
  여기서는 만질 수 없고 느낄 수만 있는 마음, 곧 작가 의도를 내가 아닌 남이 만지거나, 읽거나, 듣거나, 보거나 할 수 있도록 모양을 갖춰 '독립적 존재'로 바꿔 놓는 작업이 중요하며, 이 작업 과정에서 형상화는 다양한 모양 가운데 한 가지 형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조각가가 창작한 조각, 미술가가 그려낸 미술 작품, 음악가가 창작한 작곡, 시인이 쓴 시 작품…… 모두 마음을 영원히 존재하도록 변형시킨 결과물이다. 이 창작물이 예술인의 마음을 어느 정도 대변하므로 창작인의 창작 의도를 짚어볼 수 있는 것이다.
  도예가가 빚은 자기를 바라보면서, 도에가가 흙을 빚을 때 담아 넣으려던 마음을, 우리는 자기에서 짐작해 볼 수 있다. 선이 아름다운 곡선 허리의 자기를 감상하면서, 도예가의 작가 의도를 유추 해석한다면, 애초에 도예가가 형상화하려던 그 마음까지 짚어볼 수 있다.
  이 말은 그대로 동시를 놓고 되풀이할 수 있다. 뜻을 지닌 낱말들을 골라 적당한 위치로(속으로 정서 논리가 통하도록) 배열해 놓으면, 글자들의 논리에 따라 머리에 그릴 수 있는 추상적인 그림이 그려진다. 바로 이것이 동시 쓰기에 잇어서 형상화 작업이다.
  여기서 말하는 글자의 논리라는 것은, 문법이라든가, 어법이라든가, 어감(
語感)이라든가, 또는 복합 의미(複合 意味), 이중 해석(二重 解釋) 따위가 어우러져 만드는 질서이다. 우리 말과 글을 모국어로 쓰는 사람과 그리고 우리 말과 글을 외국어로 쓰는 사람의 차이는, 이 「글자의 논리」를 어느 정도 이해하느냐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하물며 정서 논리에 있어서는, (아무리 우리 말과 글을 잘 한다 하더라도) 외국인인 경우 이해하고 납득하는 데 우리 나라 사람을 따르지 못한다.
  동시 쓰기에서, 이 글자 논리와 질서 논리는 아주 중요한 기능을 하기 때문에 형상화를 쉽지 않은 작업으로 보는 것이다.
  한 줌의 찰흙을 쥐어 주면서 잔을 형상화하라고 이르면, 한국인은 소주를 마시는 술잔 모양으로 빚어내는데, 아랍인은 아랍식 다기 모양으로 빚어낸다. 이 차이를 흔히 문화의 차이라고 이야기하려 든다. 좀더 구체적으로 짚어 본다면, 정서 논리에 따른 결과라고 설명할 수 있다. 정서 논리는 이렇듯, '마음을 굳혀서' 존재로 변형시키는데 변수(
變數) 같은 기능을 한다.
  이쯤에서, 우리는 형상화라는 것을, '마음 빚기'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형태가 없는 마음 곧 예술가의 심상을, 형태가 있는 것으로 바꿔 놓기라고, 위에서 길게 늘어놓았다.
  형상화의 대상은 마음이다. 가슴 속의 마음을, '가슴 밖에 존재하는 마음'으로 남기기 위해, 모양을 갖추게 하는 작업이 형상화 작업이다. 이를 바꿔 말하면 마음 빚기가 된다. 작곡가는 오선지 위에 음표로 마음을 빚어 나타내며, 시인은 원고지 위에 글자로 마음을 빚어 나타낸다.
  변형된 마음, 곧 빚어진 마음은 예술가가 지구에서 사라져도 계속 존속한다. 그래서 창작품은 예술가의 분신(
分身)이라고 일컫는다. 예술가의 분신은, 영혼을 얼마만큼 형상 속에 지닌다.
  이렇게 거꾸로 소급하여 생각해 보면, 동시를 쓸 때 동시 작가의 의도를 형상화하는 작업이 얼마나 고귀한 일인가 알 수 있다. 가장 순수하고 가장 경건하고 가장 진지한 마음, 이것을 바꿔 담을 만한 글자의 그릇을 찾는 일이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글자로 빚어진 그릇, 마음 빚기로 만든 마음 덩어리를 그대로 폭 빠뜨려 담아낼 수 있는 그릇, 이런 글자로 된 그릇이 쉽게 찾아지는가.
  길을 가다가도 문득 걸음을 멈추고 펜을 꺼내 끄적이고, 뭘 먹다가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돌아앉아 펜을 꺼내 끄적이고, 잠을 자려하다가도 벌떡 일어나 떠오른 것을 적어 놓는 작업이 모두 마음 빚기를 실천하는 행위이다.
  도공은 빚은 마음을 1600도의 고열 가마에 넣고 구워서 형상이 유지되도록 하나, 시인은 빚은 마음을 흙가마가 아닌 고뇌의 가마에 넣고 구워내야 한다. 이런 고뇌가 몇 도인지 사람들이 알겠는가?
  정작 형상화 작업에서 꼭 하고 싶은 말을 이제 하겠다.
  시인이 성인을 위한 시를 쓰는 작업에서는 1600도를 넘는 고뇌의 과정을 앓아야 하겠지만, '동시를 쓰는 과정에서도 그런 과정이 필요하겠는가'라며 지껄이는 말을 들을 땐 참으로 기가 막힌다.
  동시 쓰기에서 가장 적절한 표현을 위해, 낱말 고르기에 하루가 아닌 한 달을 고심하거나, 썼다 지웠다를 열 번 스무 번이나 되풀이하거나, 윗줄과 아랫줄을 붙였다 떼었다 줄였다 늘였다를 수없이 실험하는, 이런 '목마르는 체험'을 못해본 사람이라면 감히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있겠지만…….
  끝으로 형상화 작업에서 형상화하고자 하는 대상의 선택, 이 선택이 참으로 어렵고 힘든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사진기로 찍어내는 대상은 렌즈의 기능에 따라 담길 수 있는 영역 전부가 축소되어 재현된다. 그러나 화가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 시선이 닿는 범위 안에서 자기가 선택하는 것만 골라 옮겨 그린다. 이 때 선택은, 화가의 의도에 따라 선별된 선택이다.
  화가는 눈에 보이는 대로 다 옮겨 그리지 않고, 그리고 싶은 몇 가지만 소재로 삼아 캔버스에 옮겨 그리면서 자기 감정도 그림 속에 집어 넣는다. 결국 사진 예술 작품과 화가의 미술 작품과의 차이는, 인간의 정서가 선별적으로 선택한 조재의 강조에서 나타나게 마련이다.
  동양화와 서양화의 차이도 소재의 선택에서, '얼마나 생략하느냐'에 따라 분명하게 차이가 나타난다. 선택의 차이가 아주 극명한 경우를 우리는 화가와 그리고 판화가의 눈으로 선택한 최소한의 선택만으로 작품을 구성하고 있지 않은가.
  동시 쓰기에서도, '선택'은 판화가의 선별 선택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는 몫이다. 꼭 선택해야 하는 것만 선택한 경우, 형상화 작업에서 어려움을 덜 겪게 된다. 그러나 이것 저것 선택하는 욕심을 부릴 경우, 형상화 작업에서 매우 어려운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다. 동시 쓰기에서 최소한의 것만 선택한 간결한 소재는, 형상화 작업에서 겪는 어려움을 덜어주는 몫을 해준다.
  흙에 씨앗을 심어 키운 나무는, 자라는 데 십년 이십년이 걸린다. 그러나 마음에 씨앗을 심어 키우는 형상화는, 하루에도 가능하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아니하다. 마음에 씨앗을 심어 키운 나무는 예술이다. 형상화는, 십년 자란 나무를 하루에 키우는 신비를 지닌다. 형상화는 창작을 위한 밑그림이요, 아울러 예술 전단계의 필수 작업이다.  
  

(2003-여름 한국동시문학 3호)

 

동시 창작론 ④

이미지의 연결

유 경 환(동시인/시인)  

  이번에는 '이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이미지를 우리말로 어떻게 써야 하며, 어떤 표현법이 서양의 이미지에 가장 가까운 것이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냥 이미지라는 외국어를 그대로 차용한다.
  이미지란, 이야기로 쓰기가 아주 예민한 낱말이므로, 여지껏 미뤄온 것이다. 그래도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었다. 하고자 하는 말은 이런 것이다. '이미지'가 떠오르면, 떠오르는 대로 적기부터 하는 것이 현명하다.
  떠오르는 그대로, 조각 조각이어도 좋다. 순간적으로 스치는 이미지를 놓치면 다시 불러오기 어렵다. 이것이 이미지의 속성이다. 사람의 가슴이나 머리는, 이런 이미지를 차근히 붙잡아둘 능력에서, 아직 덜 개방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미지란 과연 어떤 것인가?
  간단히 말해, '구름이 한 마리 양으로 보였다면' 이 때에 양은 이미지다. 상상 속에 떠올라 겹쳐지는 생각의 그림이라고나 할까?
  대상을 보는 순간, 또는 어떤 생각이 가슴에 차오르는 순간에, 매우 빠르게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가는 직관(
直觀)이므로, 이를 재빠르게 잡아야 한다. 이런 이미지는 떠오르는 대로, 스며오는 대로 그대로 기록하여, 나의 것으로 만드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만일 그것들을 연결시키려고 애를 쓴다면, 그 동안에 뒤미쳐오는 다른 이미지를 놓쳐버리기 쉽다.
  이미지는 책을 읽거나 그림을 보거나 음악을 들으면서 느닷없이 오기도 하고, 산책을 하거나 산엘 오르거나 잠에서 깨어나면서 시나브로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갑작스레'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 머리 속에 또는 가슴 속에 늘 담아 왔기에 그것이 넘쳐 나오듯 다가오는 것이다.
  이쯤에서, 이미지를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은유(메타포어 metaphor)란 언어로 이루어지는, 언어로 비유되는 어떤 상(
)이지만 이미지란 언어 이전의 상()이므로 그냥 서양말 이미지를 빌어쓰기가 오히려 편하다. 그래도 설명이 구태어 있어야 하겠다면 '어떤 것을 보고 다른 무엇을 생각나도록 하는, 이런 연상 작용의 밑바탕'이라 할 수 있겠다.

  이미지는 시를 신선하게 표현하는데 아주 좋은 일몫을 한다.시가 참신하다는 평을 듣는 데는, 동원된 이미지가 아주 새롭거나 또는 독자들이 생각하는 범위를 훨씬 넘어 구해왔다는 이유가 잠재한다.
  남들이 여러 번 동원한 이미지를 다시 쓰면, 되풀이된 만큼 신선한 감각을 잃게 되어, 구태의연한 표현 기법이라는 평을 듣게 된다. 따라서 이미지를 옮겨 놓는 기법에서, 낡은 단어나 식상한 낱말은 피하는 것이 좋다.
  따라서, 남들이 이미 사용한 이미지 구사법은 피해야 한다는 결론과 만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선배의 작품을 되도록 많이 읽는 것이 상책이다. 앞서 발표된 작품이나 작품집을 읽는 길밖에는 달리 길이 없다.
  언젠가 '병아리들이 흙담 밑의 봄볕을 쫑쫑 물고 간다'는 이미지 표현이 활자화되었는데, '병아리', '노란 주둥이' 그리고 '햇볕' 이렇게 세 가지를 연결시킨 표현이 잇달아 작품으로 발표되어,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 적이 있다.
  비슷한 시기(봄을 눈앞에 둔 절기)에 비슷한 생각(유사한 동질 상황 속에서)을, 따로 지닐 수 있다. 그러므로 쓴 사람은 '모방이 아니고 표절은 더구나 아니'라고펄쩍 뛸 노릇이다. 하지만 같은 이미지가 포개진다면, 결과적으로 부분 모방 또는 부분 표절로 몰릴 수밖에 없다. 말은 안 해도 독자는 속마음으로 그렇게 간주할 것이다. 속마음(내심)으로 굳히는 판단이니, 따라다니며 변명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이미지라는 것은, 시 작품 속에 전개된 내용에서 앞과 뒤, 그리고 위와 아래가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서로 잘 어울려야, 이미지의 기능을 제대로 하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서술된 표현 속에 이미지는 마치 천조각들로 이어 맞춰진 조각보처럼, 아우러진 조화와 균형 이것들을 생명으로 기능한다.
  한 편의 시 작품 속에서 이미지가 조화스럽고 균형되게 아우러졋다면, 이를 놓고 문학 이론서에선 '정서 논리'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유의할 것은 일반 논리(
一般論理)가 아닌 정서 논리다. 큰 기게를 돌아가게 하는 톱니바퀴들이 맞물리듯, 또는 손목시계 속에서 작은 톱니바퀴들이 맞물리듯, 정서적으로 척척 맞아떨어지는 경우라야 독자에게 상상 연상 또는 환상을 만들어 줄 수 있다.
  이런 황홀한 세계를 독자가 만나야, 시인의 내면 세계에 깊이 들어갈 수 잇으며 실제 이상의 세게로 들어갈 수 있다. 이미지는 생각의 조각에다, 천사의 날개 같은 날개를 달아주는, 멋진 기능을 시 속에서 하는 것이다.
  또 이미지는, 다른 한편, 낡은 시형식이나 오래 전부터 자주 동원된 시어를 물갈이하는 방법으로 채택된다.
  시에 동원되는 단어들이 새로운 단어로 바뀌는 것은, 시인이 시를 창작할 때 전에 한번도 쓰이지 아니한 새 이미지로 형상화하기 때문이다.
  요즘 새로 등단하는 신인들의 작품을 읽으면, 그들이 사물을 보고그 사물에게서 뽑아낸 이미지가 얼마나 새로운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곧 이미지의 표출 방식이 그 전 세대와 달라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시의 진화(
進化)는 새로운 이미지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시적 대상에서 시적 메시지를 끌어내기 위하여 새로운 감각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참신한 이미지의 표출을 위해 전연 새로운 발상으로, 생각지도 못했던 꿈을 꾸고 이를 표현할 언어를 찾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의 차이로 말미암아, 전세대의 수용 감각과 신세대의 수용 감각에 차이가 나고, 틈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시의 진화는 이루어지고, 수용 감각의 차이로 시를 대하는 감각이 달라지며, 마침내 이미지를 표출하는 능력까지 '같지 않게' 되고 만다. 같은 재료를 쓰면서 다른 차원의 형상을 빚는 감각의 차이를 인정한다면, 이미지의 처리에서도 또한 그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옛 사람들의 정서 작품인 시조(時調)를 보면, 꽃의 이미지로 여인을 글 속에 숨겼다. 그리고 이런 이미지 활용 기법은, 생존하는 시인 김춘수의 '……내가 네 이름을 불러주기까지……'라는 작품 '꽃'에까지 지속되어 왔다.
  '호박꽃도 꽃이냐?'라고 한다면 이 경우 호박꽃의 이미지는 부정적으로 활용된 것이지만, '수더분한 누나가 생겨날 때면 호박꽃을 보러 울타리로 간다'고 했다면 호박꽃의 이미지는 긍정적으로 활용된 것이다. 
  이렇듯 이미지의 활용은 시인의 잠재의식에 따라 달라진다. 시의 품위를 유지하는데, 이미지의 활용은 결정적 일몫을 한다. 이미지의 활용을 천박하게 하면, 시가 아닌 '유행가'로 전락하고 만다.
  따라서 시 작품의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인의 내적 잠재의식이 고상해야 할 것은 당연지사이다. 오늘날 어린이도 읽을 만한 시, 곧 동시 속에 시인들이 어떤 이미지를 활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 나라 동시의 미래와 직결되는 과제가 된다. 어린이가 읽을 만한 시라고 해서, 유치한 이미지 활용을 생각없이 일삼는다면, 동시가 천한 것이 될 것은 확실하다.
  요즘 동화의 소재로 '똥'이 자주 채택되는데, 이는 일부 사실주의 작가들의 이야기와는 달리, 철학이 빈곤한 작가들의 짓거리일 수도 있다.
  어린이에게 권할 만한 시, 곧 동시에도 이런 경향이 옮겨오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시는 언어의 유희가 아니라, 언어의 조각이고 정서의 보석이다. 시에는 조각 같고 보석 같은 영혼이 담겨야 시로서 존재할 수 있다.
  아이들이 글짓기 시간에 써내듯, 아동문학가로 등단한 시인이 한두 시간 안에 동시라고 써내는 글을 보면, 말문이 열리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들은 이미지의 연결에 고민할 이유가 없다고 여기는 것일까?
  '꽃밭에 가장 큰 해바라기꽃은 우리 아버지……' 이것은 초등학생의 글인가, 아동문학가의 글인가? 초등학생이 능히 써 낼 수 있는 글을 아동문학가의 작품이라고 발표한다면, 그는 스스로 자기의 위치를 초등학생 수준으로 퇴장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동시를 쓴다고 하는 아동문학가들이여, 발표하기 전에 한 주일에 한 번씩 한 달쯤, 두고두고 퇴고하길 바란다. 서로 상충되는 이미지는, 원고지만 구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동문학의 얼굴까지 구겨 놓기 때문이다. 

(2003-겨울 『한국동시문학』 제4호에서)

 

동시 창작론 ⑤

상징(象徵)의 활용(活用)

유경환(시인, 동시인)  

  동시를 쓰는데 상징(symbol)을 왜 알아야 할까? 대답은 잠시 뒤로 미루자. 이론은 들어본 적이 없어도 훌륭한 동시 작품을 써낼 수 있다. 이론 공부 없이 신춘문예에 당선되기도 하고 문예지의 추천으로 등단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론 공부를 구태어 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닐까? 창작 행위에 있어서 이론이란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론을 알아 두어야 할 이유가 있다. 이론 공부는 지속적으로 창작 활동을 하기 위해 필요한 '거름주기'와 같다.
  한두 번 동시를 써본다거나, 아니면 몇 편 써낸 동시 가운데 잘 된 것으로 한 편이 뽑히거나 가려진 경우엔 '이론 없이도 된다'는 말이 나올 만하다.
  하지만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한 수준의 동시 작품을 계속해서 생산하려면, 이론의 뒷받침이 있어야 함을 동시 작가들이 더 잘 알 것이다.
  문학은 원래 혼자 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이 말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혼자 창작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써도 되는 것일까?' 하는 의아심이 자기 속에서 떠오를 때, 이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면 이론서를 꺼내 뒤적여야만 한다.
  마치 '저쪽이 내가 가려는 남쪽'이라 믿고 배를 몰고 나가다 한참 뒤에 동서남북을 가릴 만한 것이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게 되면, 그 때에야 나침반을 찾는 것과 다르지 않다.
  훌륭한 동시를 써내겠다면 상징의 활용이 어떤 효과를 작품에 얹는지 알아야 한다. 동시 창작에 있어서 상징의 활용은 필요 조건이 아닌 충분 조건이다. 쉬운 말로 한다면 꼭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지만 있으면 더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상징을 알면 더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조건을 더 얻는 셈이다.

  자,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 상징에 대해 생각해 보자. 기존의 이론서처럼 하자면 제1장 제1과 이렇게 나눠 놓고 상징의 의미, 상징의 구사, 상징의 효과…… 이런 식으로 설명해야 하겠다.
  그러나 우리도 좀 바꿔 보자. 다른 나라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식으로 우리도 부드럽게 이야기식으로 풀어가 보자.
  교과서에 나온 동학혁명 운동이라는 것이 일어났을 때 그 시절 사람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노래를 불렀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이 노래 속의 녹두는 곡식 이름이기도 하지만 동학혁명을 일으킨 전봉준을 상징하였다. 녹두장군이란 말도 있었다.
  아침에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고 해서 까치는 반가운 새로 여겼으며, 그와 반대로 까마귀를 불길한 새로 여겼다.(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까마귀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유치환 시인의 알려진 시 작품에서 '깃발'은 소리 없는 아우성, 곧 생명의 몸부림을 상징하는 시어로 씌였다.
  이육사 시인의 알려진 시 작품에서 '광야'는, 광막한 현실, 곧 일제 시대의 우리 나라 형편을 상징하는 시어로 구사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알려진 시작품 가운데 '꽃'은 어떤 상징으로 동원되었는지는 이미 지난번에 이야기하였다.
  태극기는 우리 나라의 상징이고 푸른색 한반도는 통일된 나라의 상징이다. 태극무늬, 장고도 상징으로 씌이는 경우가 있다. 시야를 넓히면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며 하늘에서 지구를 내려다본 지구본은 유엔의 상징이다. 학교마다 교기가 있고 모표나 배지가 있다. 이만하면 상징이 어떤 역할과 기능을 하는 것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이쯤에서 어려운 말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상징은, 복합적 의미들 가운데서 어느 한 가지를 대신하도록 특별한 의미를 확대한 표상(
表象)이다. 그래서 문예 이론서에서는 상징주의를 표상주의라고도 부른다.
  동시 작품을 쓰는데 상징법을 활용한다는 것은 직접 표현은 미뤄 놓고 간접 표현을 써서 독자로 하여금 더 깊고 더 넓은 뜻을 생각하도록 새로운 해석에 이끌어 들이고자 하는 것이다. 일종의 유도 기법이다.

  동시 작가들이 동시를 창작하는데 무덤가에 핀 할미꽃은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도록, 하늘에 일찍 뜬 이른 별은 하늘에 올라간 언니나 동생을 생각하도록 , 또 안 보이는 곳에서 울어대는 산새는 그리운 사람을 생각하도록, 상징법을 활용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할미꽃, 별, 산새…… 따위들은 이미 상징 시어로서 생명을 잃은 낱말이 되었다. 더 이상 상징 시어로서 역할과 기능을 할 수 없을 만큼 닳고 때묻은 낱말이 되었기에, 이런 상징 시어는 독자에게 참신하지 못한 인상을 주고 있다. 지속적으로 동시를 써내야 하는 동시 작가라면 상징 시어로서 새로운 낱말을 찾아내고 골라내야만 하는 부담을 그래서 안게 된다.
  말을 뒤집어 하면, 참신한 동시 작품을 쓰고자 한다면 먼저 참신한 상징시어를 찾아내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 요즘 박두순, 이준관, 윤삼현, 이상문, 이정석, 한명순, 신형건(무순) 시인들이 주목을 받고 있는 까닭은 상징의 활용에서 남다른 기량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분들은 그 앞 세대가 구사하던 상징 기법과 아주 다른 상징 기법을 스스로 개척하여 활용하는 본보기들이다.
  그러나, 이런 분들의 상징 활용과 상징 기법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동시가 너무 어려워…… 난해한 것을 써놓고 저희들끼리만 좋다고 하는, 저들끼리만의 잔치'라고.
  직접 표현의 낱말만 가지고 동시를 써온 세대가 있었다. 유치원 어린이들이 읽고 들으면 금세 알아듣는 직접 표현의 낱말만 시어로 선택하였던 세대가 오늘날 70대 후반과 80대에 이른 원로 세대이다.
  그러나 직접 표현의 낱말을 시어로 써온 80년 동안, 그런 낱말들은 '반달' 같은 눈썹, '앵두' 같은 입술에서 반달이나 앵두처럼, 상징의 역할과 기능을 할 수 없는 수준으로 퇴색하고 말았다.
  그래서 6.25전쟁 직후부터 새로운 세대의 동시 작가들이 직접 표현 대신에 간접 표현의 시어를 도입 구사하는 방법으로 '동시도 시이어야 한다'는 기치를 올렸던 것이다. 이 기치는 필자가 맨 먼저 들었다. 동시도 시이어야 한다는 말의 뜻은, 동시는 '어린이에게 읽힐 만한 시'라는 것이다.
  유치원 어린이들이 발맞춰 가며 부르는 노래의 노랫말 같은, 틀에 맞춘 동요― 틀에 맞도록 한 가지 이야기를 줄 바꿔가며 짧게 줄인 노랫말……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것이다. 벗어나기 위해 간접 표현을 중시했고 상징 활용을 은유적으로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간접 표현 중시와 상징 활용을 눈치 채지 못하는 일부 동시인들이(일부 비평가와 함께) 입을 맞춰 '난해하다'는 불평을 터뜨렸던 것이다. 아마 그들은 계속 할미꽃, 별, 산새, 반달, 앵두…… 이런 정도의 낱말만 상징 용어로 쓰이길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는 이야기 한 토막을 몇 줄로 줄 바꿔가며 나열하는 것이 쉬운 동시라고 여기는지도 모르겠다.

  한가지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유아 동요나 유년 동시에는 상징을 활용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는 사실이다. '짝자꿍' 같은 유아 동요나 유치원 원아들 수준에 맞는 유년 동시에서 상징을 구사하면 오히려 혼란이 온다. '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의 '새 나라', '어린이'는 그냥 직접 표현으로 충분하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서의 '나팔꽃'이나 또는 '과꽃'도 직접 표현으로 충분하다. 이런 동시는 한 줄의 이야기를 내재율이나 외재율에 맞도록 줄을 바꿔 쓴 '이야기'이므로(이야기 속에 모든 것이 이미 들어가 있으며) 한 번 읽어서 대번에 들어있는 뜻을 알 수 있으므로 구태어 상징을 동원할 필요도 구사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나라 동시가 언제까지나 이런 노랫말에 맞는 동시 수준에 머물러야만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정서면에서 지체 또는 장애를 강요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에 설득력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다른 나라 어린이들 그리고 청소년(teen-ager)들이 어떤 시를 읽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기를 권한다. 모르면 배워서라도 바로 알아야 할 일이다. 우물 속에 들어가 앉아 하늘 둘레가 지금 몇 미터라고 말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아니한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100년 전도 아닌 오늘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현실이다.
  영국의 어린이들이 윌리엄 브레이크의 시를 '어린이가 읽을 만한 시'로 여기면서 읽고 외우는 까닭을 모르면, 프랑스의 어린이들이 보들레르의 시를 초등학교 과정에서 외우는 까닭을 모르면, '동시에 왜 상징이 필요하냐?'고 반문할 것이 뻔한 일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간다. 동시에서 상징을 활용하면 동시가 지니고 있는 함의(함축된 의미)를 확대시킨다. 물 위에 뜬 얼음만 읽어도 물 속에 잠긴 빙산의 규모까지 해석할 수 있도록 상징 기법을 쓰는 것이다. 물 위에 뜬 글자만 읽어도 물 속에 잠긴 것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물 위의 글자를 직접 표현으로 하지 않고 간접 표현으로 쓰는 것이 최종적 대답이다.
  좋은 동시로서 난해한 시는 있을 수 없다.
  산을 다룬 좋은 동시는 산을 주제로한 동시로도 읽히면서 아울러 덕스러운 할아버지의 상징성을 풍기기도 한다. 강을 다룬 좋은 동시는 강을 주제로 한 동시로 읽히면서 오랜 역사나 전통의 상징성을 독자에게 넌즈시 던져주기도 한다. 나무를 다룬 좋은 동시는 그냥 나무의 시로 읽히기도 하지만 아울러 인격이 높은 사람으로 읽히기도 한다.
  문제는, 좋은 동시가 품고 있는 그 내면의 이중성을 독자가 감지하지 못하거나 찾아내지 못할 경우, 좋은 동시를 '난해하다'고 단정해버리는 태도에 있다. 백두산을 다룬 동시에서 '백두산'이 나라를 상징한다는 것은 쉽게 알아차리면서 다른 동시가 속깊이 품고 있는 상징성을 알아내지 못한다면, 그 독자의 능력과 수준의 문제라고밖에 달리 말할 수가 없다. 좋은 동시를 읽고 '난해하다'고 하는 사람은 좋은 동시인지 그렇지 못한 것인지를 식별할 능력이 없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하필이면 좋은 동시가 못 되는 작품(?)을 놓고 '난해하다'고 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좋은 동시와 난해한 동시의 상관성은 다음과 같이 정리핳 수 있다.
  ① 좋은 동시는 난해한 시가 아니다.
  ② 난해한 시는 좋은 동시가 될 수 없다.
  ③ 난해한 것은 좋은 동시가 못 된다.
  ④ 좋은 동시는 난해하지 않다.

  되풀이하자면, 좋은 동시인데도 난해하다고 우긴다면 그 상징성을 파악할 능력이 없거나 그럴 만한 독해력을 갖추지 못한 독자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일반 독자도 아닌 비평가라는 사람이 좋은 동시를 놓고 난해하다고 앞장선다면 우리는 이 비평가라는 사람을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  

(2004년 봄 『한국동시문학』 제5호)

 

동시창작론 ⑥

비유의 정체와 기능
―비유를 모르면 시를 못 쓰는가?

유 경 환

  '비유컨대, 한용운의 시에서 님은 무엇입니까?'라고 말한다. 비유라는 낱말이 문장에 등장한 경우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김동명의 시에서는 호수가 마음의 비유임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의 성서는 비유로 가득 차 있다. '하느님의 어린 양'의 양, '나의 목자시니'의 목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의 포도나무는 모두 비유이다. 불교의 법구경도 비유로 말한 경구들의 모음이다.
  윌리암 워드워즈는 무지개를 이상에 비유했다. '용비어천가'의 '월인천강지곡(
月印千江之曲)'도 비유의 시다. 월인천강은 '1천 개의 강줄기에 달이 빠져 있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다. 1천 개의 강줄기는 수많은 강의 과장 표현이다. '임금이 어질면 그 은총이 어디에나 고루 퍼진다.' 이런 해석이 위의 한자 넉 자에서 나올 수 있다. 달은 군주의 비유로 쓰였다.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라는 강소천의 '닭'은, 현실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 이상을 쳐다보는 인생을 비유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동요 '병아리떼 종종종'의 병아리도 귀여운 어린이의 비유일 수 있다.
  자, 이 정도의 예문을 읽어보면 비유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으리라. '어떤 관념이나 사물을 그와 비슷한 것을 끌어대어 설명하는 일'이 사전적 비유의 뜻이다. 그러나 이런 사전적 정의를 읽으면 알 듯한 뜻이 더 알쏭달쏭하게 안개 속에 숨겨진다.
  비유란 쉬운 말로 빗대어 하는 말이다. 빗댄다는 말이 흔히 나쁜 뜻으로 쓰이기 때문에 개념의 혼란을 일으키기 쉽다. (하지만 빗댄다는 말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없다. 여기서는 이미지를 끌어오기 위해 빗댄다고 여기면 된다.)
  사물이 지니고 있는 이미지를 끌어다 설명하는, 간접적 묘사의 방법이라고 받아들이면 비유의 개념은 단순해진다.
  그러면 왜 다른 사물이 지니고 있는 이미지를 끌어다 간접적으로 설명하려는 방법을 쓰는가? 비유의 방법을 쓰면 독자에게 해석의 폭을 넓혀 줄 수 있다. 독자에게 해석의 폭을 넓혀주는 일몫이 바로 비유의 기능인 까닭이다.
  독자는 독자 나름으로 제각기 체험(내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 독자 체험과 쉽게 연결시켜주는 일몫이 비유의 효과에 들어 있다. 그래서 비유의 기법은 독자의 체험과 서로 관계가 있는 상관 관계라고 말한다.
  강소천의 작품 '닭'에서 닭을 그냥 마당가에 이리저리 다니는 닭으로 읽는 독자는 어린 독자이고, 닭 이상의 것으로 읽는 독자는 그만큼 성숙한 독자이다. 한 군주가 어질면 만 백성이 편하게 산다는 해석을 하는 이는, 월인천강의 달을 임금으로 해석하는 사람이다.
  비유의 기법을 써서 다른 사물의 이미지를 끌어다 간접적으로 설명하면 그만큼 해석의 폭이 넓어지기 때문에, 다양한 체험을 지닌 폭 넓은 독자층에겐 전달 의지가 쉽게 수용될 수 있다. 독자는, 성숙한 독자일수록 다양한 체험을 축적하고 있으므로, 그만큼 해석의 폭을 넓힐 수 있다. 이 점이 바로 비유와 체험 사이를 말하는 상관 관계의 참뜻인 것이다.

  비유는 영어로 메타포어(metaphor)이다. 비유는 직유(直喩)와 은유(隱喩)로 갈라볼 수 있다. 직유는 한자 그대로 직접적인 비유를, 은유는 한자 글자대로 은근한 비유를 가리킨다. 시에서는 직유보다 은유가 더 쓰인다. 영어에서 a heart of stone 이라고 쓰면 비유가 되는데, a heart like stone 으로 쓰면 직유가 된다. 직유의 예문으로 꿀벌처럼 부지런하다를 as busy as a bee 라고 쓰면 꿀벌은 직유인 것이다. 비유의 개념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영문으로 예문을 들었지만 이것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에서 영어를 공부할 때 한번씩 짚고 넘어갔던 것이기에, 비유가 문장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확실하게 밝혀보기 위해 재인용한 것이다.
  그러면 이런 비유를 시 쓰는 작업에서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에 초점을 두어 이야기를 더 나누어 보기로 하자. '이런 비유를 왜 알아야 하는가'로 줄여서 말할 수도 있다. 몰라도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독서를 하다보면, 한두 권의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다량의 책을 읽다보면, 문장의 파악에서 저절로 비유의 일몫을 일깨우게 된다. 문법상 비유의 기능은 해석의 폭을 넓혀주는 것이다. a heart of stone 이라고 할 때에, '돌 속에 들어 있는 마음'으로 읽는 이는 아주 적을 것이다. 돌 같은 마음(a heart like stone)으로 읽고 감상할 것이다. 그러나 문장으로서는 a heart of stone 이 더 멋지다. 왜 더 멋질까? 비유가 시에 있어서 빼어놓을 수 없는 '시적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를 쓰는 데 비유를 모르면, 낱말의 사전적 의미에 한정된 것밖에 전달하지 못한다. 뒤집어 말하면, 비유가 없는 문장에선 사전적 의미 이상의 것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기에 비유가 시에서는 중요한 시적 요소가 된다.
  한 문장에서 또는 글에서 사전적 의미에 한정된 감상밖에 할 수 없다면 얼마나 삭막한 문장이 되겠는가. 뼈가시만 남은 물고기를 뱃전에 잡아매고 돌아온 헤밍웨이의 소설 '바다와 노인'의 그 '앙상한' 해석만 가능할 것이 아닌가. 이쯤에서 비유의 개념과 기능을 더 분명하게 짚어보자. 비유는, '시에 함축된 의미를 독자의 체험만큼 확대시켜주는 효소'라고 할 만하다. 시어로 동원된 언어의 뜻을 기량껏 더 깊고 더 높게 확대시키는 마술적 기능을 비유가 한다. '기량껏'이라는 것은 독자가 지닌 '체험의 질(
)과 수준에 따라서'라는 말이다. 언어의 요술사가 바로 이 비유인 것이다.
  복사꽃이 이울게 되어 바람에 날릴 때, 시인이 '꽃비'가 온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꽃잎이 눈 내리는 것보다 더 자욱하게 날리는 것을 보지 못한 독자는 (이런 체험의 결여 때문에) '꽃비'라는 비유에 선뜻 다가서지 못한다. 하지만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는 독자는, '꽃비'라는 비유를 바로 받아들이게 된다. 비처럼 꽃잎이 내리는 것을 본 적이 있는 체험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내면적으로 생각해 본 독자는, 1차 비유인 꽃잎을 넘어서 2차 비유로 '목숨이 진 낙화'로 '꽃비'를 확대 해석한다.
  이렇듯, 시어의 함의(함축된 의미)를 한 겹만이 아닌 두 겹 세 겹까지 벗겨내는 해석, 이것을 가능하도록 해주는 기능이 비유의 숨겨진 기능인 셈이다.

  사람이 그 주변 분위기나 환경에 따라 옷을 갈아입듯이, 비유는 시를 이루는 글의 옷을 맞춰 입히는 일몫을 한다. '가을이 오자 나무도 나뭇잎을 떨군다"는 글은 산문이고, '노란 빨간 옷 / 벗는 나무'의 두 마디는 운문이다. 같은 독자가 위의 산문과 운문을 읽었을 때, 더 오래 더 깊이 생각하게 하는 글은 어떤 것인가. 뒤의 것이다.

사막에선 / 바람이/ 줄무늬 만들고 //
가슴에선 / 그리움이 / 줄무늬 만든다.//
그리운 이름 하나 / 가슴에 묻고 / 살지 않으면 /
어이 가슴에 / 줄무늬 일겠는가.// (졸작 '사막' 전문)

  이 시에서는 사막도 줄무늬도 모두 비유다. 내셔날 지오그래픽 쏘사이어티가 보여주는 사막의 필름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그 장면의 모래줄무늬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어 모래사막을 자신의 가슴으로 바꿔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위의 필름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야기는 아예 달라진다.)
  사막을 자신의 가슴에다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람은, 그리움 때문에 가슴앓이를 해 본 사람이다. 그리움, 이 때문에 잠을 제 때에 제대로 잘 수 없을 만큼 속앓이를 해 본 사람만이 사막의 줄무늬와 자신의 내면에 그어진 줄무늬를 연결시킬 수 있다. 가슴앓이라는 체험이 이 시에 구사된 비유를 직감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러므로 비유는 '체험을 매개로 하여 기능한다'고 말할 수 있다.
  윤석중이 자신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자선한 동시 '꽃밭'은 아기가 넘어져 한참 울다가 보니 정강이에 피가 아니고 꽃잎이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윤석중은 새빨간 피와 새빨간 꽃잎을 비유로 쓰지 않았다. '새빨간 피가 아닌 것을 자세히 보니 알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니 피와 꽃잎은 몇 번을 읽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피와 꽃잎일 뿐이다. 절대로 그 이상의 어떤 것이 될 수 없다. 시 '꽃밭'이라는 동시의 감상은 이렇게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만약 '피가 아닌 꽃잎'이라는 설명을 시 속에 넣지 않고 생략했더라면, 감상의 폭은 더 넓게 확대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비유가 시의 함의와 그 해석을 확대시킴으로써 시의 멋과 격(
)을 더 돋보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
  지난 날, '동시에도 비유를 쓸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을 때엔, 동시 창작에 비유가 거론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동시를 '어린이가 읽을 만한 시'로 수용하는 오늘날에는, 비유에 대한 공부가 당연히 있어야 하겠다. 다만 유치원 원아들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이 읽을 만한 동시 창작에는, 비유의 활용과 기법을 굳이 고집할 이유가 없다. 실정법상 미성년자는 모두 어린이이면서 아울러 청소년이다. 이 애매한 지칭 때문에 '어린이'라는 말의 개념 범주가 넓어졌다 좁아졌다 하고 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면 '우린…… 동시는 유치해서 안 읽어요'라고 거침없이 내뱉는 현실에서, 동시를 계속 유치원 원아나 초등학교 저학년 계층에 걸맞도록 창작할 것인지, 더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 나라 현재의 동시는,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들의 접근을 막거나 배척하는 그런 수준의 동시인 것이 분명하다.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읽힐 것을 바라며 동시를 쓰는 시인들은, 심각하게 들어야 하고 냉철하게 검토해야 할 과제이다.
  유아 동시 유년 동시에서 어린이에게 읽힐 만한 시로 위상을 바꾸려면, 동시 창작에서 비유의 기법을 충분히 활용하는데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 비유는 시의 발효를 돕는 효소, 꼭 있어야 할 효소이다.  

(2004년 여름 『한국동시문학』 제6호)

 

동시 창작론 ⑦

고쳐쓰기

유경환(동시인/시인)

  옛날에 쓰던 교과서엔 '고쳐쓰기'를 퇴고라고 하였다. '퇴고'라고 한자로는 '堆敲'라고 쓴다. '시문의 자구(字句)를 여러 번 생각하여 고치는 일'이, 사전에 나와 있는 풀이다. 한자 때문에 한때엔 '추고'라고도 했다. 어떻게 일컫든, 고쳐쓴다는 뜻은 같다. 그러기에 '고쳐쓰기'로 한다.
  글을 쓰는 일에서 고쳐쓰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는 것은 글을 쓰는 경력과 관계가 있다. 글쓰기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나이에선 고쳐쓰기가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처음부터 잘 쓰면 되지, 왜 쓰고 나서 또 고치고 고치고 해야 돼?' 이런 의문이 들게 마련이다. 이런 의문을 지닌 사람에겐 '그래, 네 말도 맞다.'라고 하는 것이 상책이다.
  왜냐하면, 그 정도의 사람에겐 아무리 이야기를 들려주어도 설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에 쓸 만한 속담이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나도 그랬었다. 그러나 차차 글쓰기가 쉽지 아니한 일임을 알아차리게 되고 글쓰기가 어려운 일임을 깨닫게 되자, 비로소 고쳐쓰기가 왜 필요한지를 납득하게 되었다.
  고쳐쓰기는 단순히 고쳐 쓴다는 것으로 여길 일이 아니다. 고쳐쓰기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을 생각해 내는 기회와 만남이기도 하다. 고쳐쓰기는 '생각의 우물'을 더 깊이 파고드는 기회가 된다는 말이다. 고쳐쓰기는 그냥 이미 써놓은 것을 되짚어 보면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고쳐쓰기는 반드시 거쳐야 할 창작의 과정이다. 건너뛸 수 없는 글쓰기의 과정이라는 말이다.
  흔히 고쳐쓰기를 '써놓은 것을 다듬는 일'로 여기기 쉽다. 이런 것으로 여기면 건너뛸 수 있다. 하지만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왜? 사람은 처음부터 완벽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좁은 병목에 걸려 잘 나오지 않듯이, 글을 쓸 때 생각도 손을 기다려주지 않고 앞질러 나오려 하는 것을 누구나 경험할 것이다.
  이런 경우, 생각이 국수 기계에서 국수발이 가지런히 나오지 못하고 뭉개지듯 또는 실타래에서 할머니들이 실을 풀어낼 때 실이 엉키는 일과 비슷하게 된다. 글을 쓸 때 손을 통해 펼쳐지는 생각도 이와 같다. 가슴속의 생각과 그리고 손끝의 생각이 뒤엉키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이렇게 되면 '생각'이 차분하게 순서에 맞게 서술되지 못하거나 서술이 뒤바뀌는 결과가 된다.
  이렇기 때문에 글은 (운문이거나 산문이거나) 반드시 고쳐쓰기 과정에서 고쳐져야 옳다. 만일 고쳐지지 아니하면, 그것을 읽는 독자에게 혼란을 주거나 또는 메시지를 정확히 전달치 못하게 되므로 받아들여지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고쳐쓰기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① 틀린 곳을 바로잡는다.
  ② 문법과 어법에 맞는가를 살펴보게 된다.
  ③ 빠뜨린 것을 알게 되어 보태어 넣는다.
  ④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을 뒤늦게 집어넣는다.
  ⑤ 더 깊은 뜻을 스스로 깨닫고, 새로운 의미를 글에 덧붙인다.

  여러 번 (다른 글에서도 이미 이야기했듯이)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셈이지만, 나의 경우 작품 한 편을 완성시키는데 평균 다섯 번 원고지에 옮겨 쓴다.
  지겹고 귀찮은 작업이다. 하지만 활자로 찍혀나간 뒤에는 고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내 의사가 충분히 전달되기에 미흡한 글인 경우, 굴곡 왜곡 또는 와전될 가능성이 크기에 안타깝다.
  그래서 지겹고 귀찮아도 옮겨 쓰고 또 옮겨 쓴다. 다시 옮겨 쓰면서 위에 열거한 다섯 가지 가운데 어느 한 가지를 '발견'하며 위안을 얻으면서 보람을 느낀다.

  고쳐쓰기가 지니는 또다른 의미는 '객관적 시각'에서 찾을 수 있다. 객관적 시각이란, 글을 읽는 냉정한 눈길을 말한다. 흥분된 나의 눈이 아니라 냉정한 남의 눈인 셈이다.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글을 쓸 때에는 누구나 그 나름의 흥분을 지니게 된다. 이런 내적인 긴장 상태는 글을 계속 써 나가도록 밀어주는 힘, 곧 추진력을 팔과 손에 실어주지만 그 대신 '신나는' 흥분을 느끼게 한다.
  이 흥분은 글을 쓰는 이로 하여금 객관적 시각을 잃게 하거나 또는 주관적 판단을 우선시키도록 유도하기 일쑤다. 그러므로 '잘 씌어진다' 또는 '잘 나간다'는 엉뚱한 생각에 빠지게 한다. 이런 함정에서 헤어나오는 기회가 바로 고쳐쓰기의 기회다. 고쳐쓰기는 나의 눈이면서 동시에 남의 눈인 '객관적 시각'으로 다시 훑어보게 하는 기회를 안겨준다. 남에게 읽어보도록 하고 나서 틀린 곳 고칠 곳을 지적받는 작업에 버금가는 기회인 셈이다.
  나의 눈과 남의 눈은 같지 않다. 틀리기 때문에 차이가 난다. 이런 차이로 말미암아 글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 글에 대한 나의 주장보다 독자의 주장을 고맙게 여겨야 글이 늘 수 있다. 일단 발표되고 나면 독자의 평가에 변명하기 어렵다. 그러기에 발표되기 전에 (고칠 수 있을 때에) 고쳐쓰기를 통해서 고쳐 쓰는 것이 바른 작법이다. 
  또 고백하자면 초기에는 마침표를 찍자마자 청탁된 주소로 보내었다. 마음에 드는 글을 마쳤다는 기쁨이 나를 서둘러 우체통으로 내보냈다. 그러나 이젠 그렇게 하지 않는다. 밥을 지을 때 불을 끄고도 한참 동안 뜸을 들이듯 글에서도 뜸을 들인다. 뜸 들이는 시간에 고쳐쓰기를 되풀이한다. '아, 내가 왜 이런 생각을 그전에 못햇었지?' 아니면 '아, 내가 왜 이런 생각을 빠뜨리고 그냥 넘어갔지? 하면서 원고지를 더럽힌다. 
  원래 원고지라는 인쇄된 용지는 고쳐쓰기를 하기 쉽도록 고안된 용지다.  줄을 그어 글의 순서를 바꾸거나 옮기고 또 덧붙인 글을 줄로 끌어들이며 중복된 부분을 지우게 한다. 예전에 고쳐쓰기를 할 때 빨간 색 잉크나 볼펜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고쳐쓰기를 끝낸 원고지를 인쇄소 사람들이 '빨간 종이'라고 불렀었다.
  사람의 생각은 끊이지 않고 나오는 법이 없다. 논리적인 서술인 경우 더 그렇다. 토막토막 끊긴 사유의 결과를 한 줄의 글로 이어맞춰 나가려면, 생각을 가다듬어야 하고 가다듬은 생각을 순서대로 줄 세워 체계적으로 전개해야 한다. 그러므로 줄 세운 생각을 이어가면서 써나간다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유도 어렵지만 사유의 결과를 쓰는 작업도 힘드는 일이다.
  이런 순서, 곧 배열과 전개의 서술은 운문에서 더욱 어렵고 힘드는 일이다. 이렇게도 놓아보고 저렇게도 놓아보면서 몇 번이나 다른 시도를 실험한다. 이 또한 고쳐쓰기에서 가능한 작업이다.
  작품을 쓰고 나서 고쳐쓰기를 서둘지 않는다. 일부러 간격을 둔다. 왜냐하면 객관적인 안목으로 평가하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읽되 남이 보듯 다시 읽는 데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대강 한 주일쯤 뒤에 다시 본다. 작품을 쓸 때에 만나게 되는 내적 긴장, 이 긴장이 완전히 풀어진 다음에라야 자기 흥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기 흥분에서 '자유로워야' 비로소 남의 눈으로 읽게 된다. 이렇게 해야 '고쳐야 할 곳'이 제대로 눈에 띈다. '다섯 손가락 안 아픈 데 없다'는 속담은 자기가 써놓은 글, 곧 작품에도 그대로 적중한다. 애써 힘들여 써놓은 글일수록 어느 부분을 쉽게 잘라버리기가 아주 어렵다.
  이렇게 한 주일만에 한 번 고쳐쓰기를 하고 또 미뤄 두었다가 다시 며칠 뒤에 다시 고쳐쓰기를 하고…… 몇 번 되풀이하면 그 과정을 다 거치는 동안에 '더 손 댈 데 없는 듯한' 결과로 낙찰된다. 손목이 저리고 눈이 아픈 경우가 왜 없으랴. 헌데, 이런 일련의 과정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써왔다면 이런 태도는 올바른 창작 태도라 할 수 없다.
  글쓰기는 길 없는 곳에서 길을 묻는 일과 다름없다. 길 없는 곳에서 누구에게 길을 물을 수 있는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 길 없는 곳에서 길을 찾기 위해 자신에게 묻는 것과 똑같은 일을 고독하게 해내야 한다. 이런 일의 한 가지로 고쳐쓰기도 자신에게 길을 묻는 방법인 것이다. 그래서 고쳐쓰기 또한 고독한 작업이다. 혼자서 기쁨과 보람을 찾아내는 작업.

  한번 지나간 길을 되짚어 다시 오고 가듯 하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고치고 하는 되풀이는 지루한 일이다. 이런 일을 하다보면 처음에 썼던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 되기 십상이다. 나의 경우 끝부분이 크게 달라지곤 한다. 이런 결과를 놓고 '괜찮은 일인가? 하고 자문하거나 반신반의하는 경우가 흔하다. 처음에 생각하였던 것과 아주 달라진 끝부분이 되어도 전연 개의치 않는다. 작품을 완성시킨다는 뜻에서 첫 생각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 처음 생각에 미련을 가지고 집착하다 보면 완성도를 높이는데 지장이 온다. 자꾸 되풀이하며 읽다가 문득 멋진 생각이 떠올라 비로소 마음에 드는 맨 끝줄 한 줄과 만나기도 한다. 혼자서 무릎을 치게도 된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크게 보아 '고쳐쓰기'의 범주에 드는 방법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덧붙이는데 그것은 외국에서 하는 글짓기 방법이다.
  밖에 나가 공부하는 동안 방학을 맞아 일리노이 스프링필드라는 곳에 가서 '시를 어떻게 가르치고 배우고 하는가'를 살펴본 적이 있다. 본 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칠판에 휫트먼의 작품 '풀잎'을 써 놓으면서 선생은 일부러 단어를 빈칸으로 남긴다. 그리고는 학생으로 하여금 빈 칸에 가장 적당하다고 여기는 단어를 시어(試語)로 선택하여서 메꾸도록 한다. (벽돌 담에서 갈라진 벽돌을 깨뜨려 버리고 새 것으로 채우게 하는 것과 같다.) 대강 한 반에 12명 정도인데 앞의 학생이 선택한 단어와 같은 것을 뒤의 학생이 택하여도 괜찮다. 12명 가운데 3분의 2 이상이 선택한 시어가 같은 것이라면 가장 알맞는 시어라고 우선 1차로 판정한다.
  선생은 원작자인 휫트먼보다 더 나은 예비 시인을 기다리는 것이다. 시적 감각이 예민한 학생은 휫트먼이 생각지 못했던 시어의 구사 능력을 보인다. 휫트먼을 능가하는 새 시인을 이런 식으로 키우는 <시 공부 방법>이다. (후배에 의해 교실에서 시가 고쳐지는 셈이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라는 시조를 교과서에서 배운 적이 있다. 선생은 이 시(시조)를 가르치는데, 작자인 남구만(南九萬)이 어떤 사람이고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 따위…… 작품 외적인 것만 들려 주었다. 원문에서 한두 자를 바꿔 읽었다가는 큰일이 나는 것처럼 우리는 공부하였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이런 차이가 있다. 물론 원문을 훼손하여서는 안 된다. 하지만 원작보다 더 나은 작품을 기대하는 방법론에서는 '실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교실에서의 수업 방법이다.
  이름난 양복점에서 양복을 맞추면 가봉이라는 절차를 거친다. 아주 꿰매기 전에 한번 입혀보고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마무리 작업이다. 그러나 큰 백화점 같은 곳에서 파는 기성복을 사 입는 경우, 이 가봉이라는 절차는 있을 수 없다. 맞춤양복이 몸에 맞는 것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글쓰기에서 고쳐쓰기란 바로 이 마지막 과정이라 여기는 것이 좋겠다. 

(2004년 가을『한국동시문학』제7호)

 

*동시 창작론 ⑧

감동, 체험의 일치에서 오는 감동

유 경 환

  1
  창작론에서 아직까지(7회에 걸쳐) 다루어 온 것은 외적인 틀(하드웨어)에 관한 것이었고, 이제부터는 알맹이에 해당하는(소프트웨어) 내적인 질(質)에 관하여 다루겠다.

  2
  시의 알맹이는 감동(感動)이다. 시에는 감동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 줄여서 말하면, 시는 곧 감동이다. 감동을 줄 수 없는 시는, 쓴 사람이 혼자 즐기는 시다. 그러므로 시라고 일반화하기 어렵다. 흔히 시의 생명은 감동이라고 말한다. 읽는이에게 감동을 전해주므로, 시는 널리 읽힌다. 이렇게 감동이 시의 생명을 연장시킨다.
  그러나 대부분 감동적 요소는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다. 숨겨져 있기 때문에, 제대로 감상하지 못하는 경우엔, 이를 감지하지 못하고 만다. 그래서 시에 감동적 요소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거나 모르게 된다. 시에 대한 오해는 이렇게 비롯된다.
  동시도 시다. (동시도 시이어야 한다고 1950년대 말에 외친 사람은 필자다.) 동시도 시이므로 또한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를 여기서 왜 다시 해야 하는가. 시를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듯이, 동시를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너무(부정적으로 쓰는 부사다) 많다. 더구나 아동문학인 가운데, 동시를 잘못 알고 있는 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동시」작품이라고 발표되는 글의 질적 수준이 매우 유치하다. 동시라는 명사의 첫 글자 아이동(童) 한 자로 말미암아, 어린이의 입재롱감으로 동시를 인식하는 현실이 확대된다.
  「동시」라는 일컬음이, 문학으로서의 동시의 본질을 왜곡시켰고, 그 원인은 1920∼1960년까지 우리 나라 문학에 대해 제대로 눈을 뜰 겨를이 없었다는 공백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이렇게 잘못된 인식이 그 동안 화석(化石)처럼 굳어 대물림되었다.
  잘못된 인식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첫째, '동시이므로 시의 경지에 이르지 아니하여도 된다.' 둘째, '동시이므로 시의 차원에 오르지 않아도 된다.'
  이런 잘못된 인식은 왜 자꾸 대물림되는 것인가. 서울의 신춘문예나 또는 권위 있는 문학 전문지에 여러 번 응모하였어도 등단에 실패하는 경우, '시는 어려우니까 이제부터 동시나 해봐야지…'라는 말을 서슴없이 지껄이는 인사들(?)에 의해서 퍼진다.
  왜 신춘문예나 문예지 추천에서 번번이 실패하는가? 그것은 시를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에 대한 이해가 오류에 기반하는 것이기에 시를 오해하게 되는 것이다. 시는 서두에 말했듯이 감동을 내포하고 있는 운문이다. 감동, 그렇다. 이것이 들어 있어야 시의 기능과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3
  동시도 시이므로 당연히 시적(詩的) 요건(要件)을 갖추어야 한다. (이 한마디는 좀 번거로우므로, 이하 시적 요건을 그냥 시라고 말하겠다.) 동시와 그리고 일반시를 그림으로 그려서 이해를 돕게 하자면, 지름의 길이가 다른 동심원(同心圓)을 그려서 설명할 수 있다.
  일반 성인시는 지름이 길다. 그러나 동시는 성인시에 비해 지름의 길이가 짧은 편이다. 이해와 감상의 폭이 같지 않다는 뜻이다. 동시는 어린이를 포함하는, 또는 어린이를 주된 독자라고 여기는, 이러한 대상을 의식하면서 쓴 시다.
  지난 날에는 어린이를 대상으로하여 쓴 시라고 하였으나 이는 편협된 견해이다. 이런 견해가 한동안 지배적이었던 것이 바로 1920∼1960년까지의 공백 상황인 것이다. 오늘날 동시의 독자는 어린이에 한하지 않는다. 어린이에 한정한다는 생각은 폐쇄적 사고의 소산이다. '아동문학은 3대(代)에 걸쳐 효용을 발휘하는 문학'이라는 말이 왜 나왔겠는가. 영국의 이름난 시인들의 '어린이를 위한 시' 작품에서부터 시작하여 '아낌없이 주는 나무' 등을 읽고 그 효과를 수용하는 계층은 어린이부터 노인에 이른다. 우리 나라의 문단이 1920∼1960년까지 지극히 폐쇄적이었기 때문에 우물 속에 들어가 앉아 하늘의 넓이를 재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는 어린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계층에게 읽히는 문학 작품이다. 동시는 어린이를 포함하는 (또는 어린이를 더 많은 독자로 여기는) 대상을 위하여 문인이 써내는 시 작품이다. 그러므로 아동이 써내는「아동시」와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아동시」와「동시」의 질적인 차이를 식별하지 못하는 인사(?)들로 말미암아 혼동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더 기가 찰 일은, 적잖은 아동문학인들까지 어린이가 써내는 아동시 수준의 것을 자신의 문학 작품으로 읽어달라며 발표하고 있는 현상이다.
  아동시와 동시의 질적 차이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짧게 이야기하자면, 아동시에는 (위에 여러 번 강조한 그대로) 시가 들어 있지 아니하다. 시가 들어가 있지 아니하다는 말의 뜻은, 체험의 일치를 유발할 내용(또는 철학)이 들어 있지 아니하다는 것이다. 경륜이 짧으면 체험의 깊이도 얕을 수밖에 없다. 체험의 깊이가 얕으면, 감동시킬 핵(核)이 엷거나 약하거나 또는 없을 수밖에 없다. (이 핵은 바로 시적 요건이다.)

  4
  시가 들어 있지 아니한 글을 동시라고 하면서 발표하는 것을 보면, 대강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귀여움을 나타내고자, 예쁜 생각을 꾸려서, 어린이들이 늘 쓰는 낱말을 동원하여, 줄을 끊어서 몇 줄로 써내는 형식.'

  이런 형식에 그친 것이 대부분이다.
  시는 글자로 형상화된다. 글자로 형상화되므로, 글자가 수단이자 재료이다. 이런 기능을 지닌 글자를 배열하는 데엔, 눈에 잘 안 띄는 기술이 요구된다. 글자를 배열하는 주체(사람 = 어른 = 문인)는 글자들이 이루는 줄 사이 어딘가에 자기 체험을 깔아서 직접 나타나지 않는 어떤 생각(체험의 연장)을 불러 일으키는 기술을 숨겨 넣어야 한다. (이런 기술 숨겨넣기가 쉬운 것이 아니므로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마찬가지로 동시에도 이런 기술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런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는 푸념은 대강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벽돌 쌓기처럼 고운 말을 쌓아 연결시키면, 재미있다고 어린이가 손뼉을 친다. 그러면 되지 않는가?'

  이런 질문 아닌 항의에 맞서서 대답을 하면, 곧이어 나오는 한마디가 '그건 어린이에게 난해하다'이다. 이런 사람에겐 당분간 대답을 안 하는 것이 상책이다. 받아들일 수준이 못 되기에 그렇다. 좀더 문학을 알게 되고 좋은 동시 작품을 읽게 되고, 그래서 혼자서라도 좋은 동시에서 오는 잔잔한 감동을 느껴보게 된다면, 그 때 비로소 동시도 시이어야 한다는 말을 수긍하게 되리라.
  교직자로 일생을 보내다 퇴직한 교감, 교장 출신 아동문학인이 발표하는 작품을 보면 대부분 대칭 기법을 쓰고 있다. 대칭 기법이란 대강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 연에서 '맑은 하늘'을 쓰면 두 번째 연에선 '푸른 바다'를 쓴다. 첫 연에서 '푸른 산'을 쓰면 다음 연에선 '깊은 강'을 쓴다. 이런 식이다. 이런 식은 동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동시를 뜯어맞추는 것이다.
  1920년대 창가(唱歌)라는 것이 있었다. 창이니 타령이니 하는 악보 없는 노랫가락만 전수하다가 악보가 있는 노래가 처음 보급되던 그 시기에 불리던 노래다. 오늘날 70대 할아버지 세대가 부르는 학도가(學徒歌)도 그런 것 가운데 하나다. 학교의 교가도 그 즈음에 제정되기 시작했다. 이런 노래의 가사(歌辭)에는 시가 들어 있지 아니하다. 전형적인 틀에 맞추어 찍어내는 붕어빵식이니 시가 들어갈 수 있었겠는가. 그 영향을 아직 못 벗어난 교직자 출신 아동문학인들, 그들은 어린이의 글짓기 경험만 가지고 동시를 쓴다고 나선다. 시를 정식으로 공부한 적이 없으므로「자신」을 모를 수밖에 없다. 시가 들어 있지 아니한 짜맞추기씩「동시」의 본보기를, 그래서 써내게 되는 것이다.

  5
  조선 시대의 시조 틀에서 최남선에 의해 자유로워진 것이 1920년대 1차 시의 해체이다. 그리고 신체시라는 이름으로 자유시가 씌어지고 퍼지고 한 것이 지난 30년간이다. 이 30년 동안에 윤석중이 정형율(3,4조, 4,4조, 7,5조 등)에 맞게 동요와 동시를 개발하고 보급시켰다. 정형율에 맞도록 써냈기 때문에, 작곡가들이 곡을 붙이기에 아주 수월하였다. 그래서 동요는 부르는 노래와 동의어처럼 사용되었다. 그 혼용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다행히 윤석중은 우리 나라 최초의 동시집을 내면서 동시의 문학사적 지위를 확고하게 했다.
  요즘 신현득이 새로 쓰는 '한국 동시사' 연재에서 밝혔듯이, 우리 나라 자유 동시는 1950년대 말에 2차 시의 해체가 시도된다. 신현득은 '유경환. 조유로, 박경용, 신현득'에 의해서 주창되었다고 썼다. 가장 정확한 기술이다. 어떤 아동문학사(史)의 기술에는 이와 다르게 서술되어 있는데, 그것은 저자가 ○○지방 아동문학사의 기본 자료를 가지고 ○○대신 한국을 붙여 개작하였기 때문에 생긴 오류인 듯하다.
  유경환이 1950년대 말에 동시도 시이어야 한다는 기치를 들었을 적에, 지면을 내준 곳은 배영사와 그리고 교육자료사였다. 이 기치에 때맞춰 이론으로 걸맞게 옹호하고 나선이가 박경용이고, 조유로는 그 때까지 중앙에는 낯선 이름이었으며 2년 뒤에 신현득이 작품으로 동참하였다.
  필자가 1950년대 말 동시도 시이어야 한다고 외쳤을 적에, 당시 아동문학계는 건방지다는 투의 시선을 보냈다. 다만 이원수만이 '맞는 말이긴 한데, 그런데 그런 말을 하려면 우선 작품으로 보여줘야지… 나는 유군이 동화를 쓸 줄 알았는데….' 라고 하였다. 이원수는 1952년 피난지 대구에서 내게 제1회「소년세계문학상」을 준 분이다. (당선작은 동화 '오누이 가게', 상으로 받은 금 5돈·메달 형식을 팔아서 1953년 고등학교 입학 등록금으로 요긴하게 쓴 것을 이미 다른 곳에서 말한 바 있다.)
  1957년도 조선일보 신춘문예(당선작 없는 가작, '아이와 우체통')를 선고(選考)한 윤석중, 어효선(그 뒤 50년간 줄곧 가까이 찾아뵙곤 하였지만)은 필자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 번 더 응모하여 당선작을 내놓으라'는 충고를 따르지 아니 하였기 때문이다. (1957년 11월호 <현대문학>지에 박두진에 의해 초회시 추천이 이루어졌고, 1958년 4월호로 추천 완료 등단하였기에) 그러나 신현득은 2년 뒤에 가작 그리고 당선의 절차를 밟아 마친다.
  이런 상황과 분위기에서 '동시도 먼저 시이어야 한다'는 외침은, 저항이나 거역으로 비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다행이도 박경용이, 필자와 사전 의논이라도 한 듯, 같은 주장을 펴준 덕택에 기진할 일이었으나 문단에서의 외로움을 참고 견뎌낼 수 있었다. 필자는 이원수의 '작품으로 해야지…'하는 말에 걸려서 서둘러 첫 동시집 <꽃사슴>을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있던 책방 겸 출판사인 숭문사에서 낸다.(1966) 이 때 숭문사에서 함께 나온 황영애의 동화집, 최효섭의 동화집을 기억한다.

  6
  동시도 시이므로, 시적 수준에 이른 것만 동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주장에 맞대고 나온 것이 동시의 난해성이라고 앞서 말했다. 난해성을 들고 나오면서 방어 태세를 취하는 사람들은 대강 다음과 같은 보충 설명을 붙인다.

  '동시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글이기 때문에 쉬워야 하며 또 재미있어야 한다. 동시에서는 이 두 가지가 우선적 조건이다.'

  이 말은 반만 맞고 반은 맞지 않는다. 우선적 조건이라는 말은 틀린 말이다. 우선적 조건은 '우선 시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시가 안 되어 있는데 쉽고 재미있으면 시인가? 그런데 적잖은 아동문학인들이 '쉽고 재미있는 운문이면 되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운문에서 시는 왜 찾아?' 라고 아전인수격의 주장을 편다. '쉽고 재미있으면 된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갖추어야 할 시적 요건은 슬며시 흘려버리는 태도다.
  색깔 있는 나무토막이나 장난감 레고같이, 낱말을 짜맞추어 읽기 쉽고 보기 좋게 틀을 짜놓고서, 이를 동시라고 우기는 사람들에겐 동시의 감동이 중요할 수가 없다. 동시를 어린이의 입재롱 놀이감쯤으로 여기는 태도이기에 그렇다.
  시의 감동, 이는 시를 살리는 요체다. 동시에서도 똑같다. 동시를 읽고난 뒤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을 더 이상 읽겠는가.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될 경우 한 번 더 읽을 수 있겠다. 그래도 감상이 안 되면 체험의 일치를 위한 바탕이 들어 있지 않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겉만 동시 형식이지 속이 없는 박제된 새, 곧 표본실의 새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2004년 겨울『한국동시문학』8호)

 

동시 창작론 ⑨

생각의 우물 파기

유 경 환

  1.
  필자는 오래 전부터 '생각의 우물파기'라는 말을 써왔다. 한데 이 말에 낯설어 하는 독자가 있다면, 아마 동시에 대해 그 동안 피력해 온 필자의 글을 읽어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퍼낼수록 맑은 샘이면 좋은 샘이듯이, 파내려 갈수록 생각의 우물도 깊어지게 마련이다. 사유(思惟)를 우물에 비유하면 납득이 쉬워진다.
  달리는 차를 타고 보게 되는,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서 동시의 소재를 얻기보다는, 깊은 연못처럼 폭 넓은 사색과 깊이 있는 사유에서 동시의 소재를 찾아내기가 바람직스럽다.
  이해를 돕기 위한 방법으로, 생각의 우물파기로 얻어낸 시상(詩想)을, 먼저 문삼석의 작품에서 엿보기로 하자.

숲 속의 풀들은 모두 풀빛인데요.
어쩌다 풀빛이 아닌 풀들이 섞여 있더라도
모두들 조금씩 제 빛들을 풀어내어
다 같은 풀빛이 되게 합니다.

숲 속의 나무들은 모두 나무빛인데요.
어쩌다 나무빛이 아닌 나무들이 섞여 있더라도
모두들 조금씩 제 빛들을 풀어내어
다 같은 나무빛이 되게 합니다.

그렇게 된 풀빛과 나무빛들
쌓이고 쌓여 숲빛이 됩니다.
깊은 빛이 됩니다.
             ―문삼석 '숲빛' 전문

  작품 '숲빛'은 눈으로 씌어진 것이 아니라 생각으로 씌어진 시다. 필자만 이렇게 보는 것이 아닐 것이다. 누구든 한 번만 읽어보면, 생각 깊은 사색으로 발견해 낸 시의 세계임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사유가 없다면 이런 작품을 써낼 수가 없다. 생각의 우물을 파는 작업 끝에 얻어낸, 하나의 시상인 것에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생각이 없다면 시도 없다'는 한마디 말을 할 수 있는, 증언 같은 것이 바로 '숲빛'이다. 문삼석의 깊은 사유가 이 작품에다 시를 흥건히 담아준 것이다.

  다른 보기를 들겠다.
  생각의 우물파기로 얻어낸 시상이 아주 잘 드러나는 작품을, 이준관이 '길을 가다'로 제시한다.

길을 가다 문득
혼자 놀고 있는 아기새를 만나면
다가가 그 곁에 가만히 서보고 싶다.
잎들이 다 지고 하늘이 하나
빈 가지 끝에 걸려 떨고 있는
그런 가을날
혼자 놀고 있는 아기새를 만나면
내 어깨와
아기새의 그 작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어디든 걸어보고 싶다.
걸어보고 싶다.
          ―이준관 '길을 가다' 전문

  이준관은 길을 가다가 작은 새 한 마리를 보고, 아니 작은 새가 눈에 띄자, 그 때부터 계속 새에 대해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생각의 우물파기를 하면서 상당 기간 머리 속에 작은 새를 품었을 것이다. 이준관의 가슴이 곧 새장이 되었을 것이다. 마침내 '아기새'로 가슴속의 새가 '형상화'되어, 이준관의 친구가 되었을 것이다. 마음의 동무로.
  자기 어깨 높이로 새의 어깨를 크게 치켜올려, 나란히 함께 걷는(노는) 동무로 여겼을 것이다. 생각이 작은 새를 이준관의 동무로 만든다. 이런 새의 변신(變身)이 가능한 것이 사유 세계이다.

  세 번째 보기를 들겠다.
  이창건의 작품이다. 시인의 생각이 바로 작품이 된다는 보기다. 시인의 가슴이 곧 작품의 터요. 아울러 작품이 담기는 그릇이 된다.

나는 구석이 좋다.
햇살이 때때로 들지 않아
자주 그늘 지는 곳
그래서 겨울에 내린 눈이
쉽게 녹지 않는 곳
가을에는 떨어지는 낙엽들이
구르다가 찾아드는 곳
구겨진 휴지들이 모여드는 곳
어쩌면 그 자리는
하느님이 만든 것인지도 모르지.
그 곳이 없으면
나뭇잎들 굴러다님이
언제 멈출 수 있을까.
         ―이창건 '구석' 전문

  목숨 있는 것 가운데 생각이 깊은 사람들만이 시를 쓸 수 있는 것은, 시가 생각의 우물에서 길어올려지는 사색의 앙금이기 때문이다. 생각이 시를 만든다는 말은, 생각이 시의 재료라는 말로 다시 설명될 수 있다. 어떤 사물을 보든 그 사물을 놓고 생각의 깊은 우물을 파내려 가지 않는 한, 눈앞의 사물은 그냥 사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사물을 놓고 생각의 우물을 깊이 파내려가 보면, 사물은 슬거머니 변신하게 마련이며 '형상화'되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이 진행되게 마련이다.

  2.
  동시를 쓴다면서(시를 짓는다면서)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가슴에 시가 담길 그릇을 만들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결코 동시는 눈에 보이는 사물을 보이는 그대로 옮겨 적는 일로는 씌어지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사물을 시인의 생각으로 해석하고, 시인의 생각으로 다시 빚고 시인의 바람대로 태어나도록 새로운 모양을 지니게 형상화(形象化)시켜야 비로소 '창작'이 된다. '형상화'라는 말은 표의문자의 원래 지닌 뜻대로 '상징적 모양을 갖추도록 한다'는 것인데, 한번 더 굴려서 말하자면 사물이 본래 지니고 있는 모양과는 달리 지니게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형상화 작업은 겉모양만 바꿔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속에 들어 있는 본질적 내용까지 바꿔 지니도록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형상화 작업은 시를 창작하는 알파요 아울러 오메가인 것이다. 예를 들자면, 시인 김춘수는 작품 '꽃'에서 꽃을 꽃이 아닌 다른 것으로까지 바꿔 놓지 아니했던가.
  이쯤에서 뒤집어서(연역적으로) 설명하여 보자. 만약 생각의 우물파기를 하지 아니하고 '동시'라는 것을 써본다고 한다면 어떤 결과가 될 것인가 살펴보자.
  첫 번째, 눈에 보이는 사물을 보이는 상태 그대로 묘사한다면, 산문이 될 것이다. 이 산문을 운문 형식으로 바꾸기 위해, 적당한 길이로 잘라서 몇 줄씩의 행(行)으로 나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줄 바꿔 쓴 산문, 곧 '산문의 줄 바꿔 쓰기'에 지나지 않는 글이다. 이런 까닭에 ①동시의 요건인 '시가 들어 있음'에서 벗어난 글이 되며, ②동시의 요체인 감동이 없는 글이 되고 만다.
  두 번째 눈에 보이는 현상을 보이는 현상 그대로 묘사한다면 의미가 삽입될 틈이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런 글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색깔 있는 단어를 동원한다든가 또는 대칭 단어를 짜집기 식으로 구사하게 될 것이다. 결국 억지로 꾸며 쓴 글에 그치고 만다. 흔히 보아온 종이접기식이나 장난감인 나무벽돌 맞추기 같은 '짜맞춘 글'은 이런 과정을 통해 생산된다.
  시가 어떤 것인지, 시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일부 아동문학인(?)들이 지면에 발표하는 것들 가운데 '산문의 줄 바꿔 쓰기'나 '짜맞춘 글'이 많은 까닭은 이렇게 해명된다. 이들에겐 '동시는 이렇게 써야 한다'는 말을 하기에 앞서 '동시는 이런 것이다'라는 말을 먼저 들려주어야 옳은 순서이다.
  그러나 이 일은 대단히 어려운 과제로 남는다. 아니, 여지껏 미뤄온 셈이다.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서는 일깨워 줄 묘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렇게 말하여 왔다. 누구든 동시를 제대로 공부하려거든, 먼저 동시집을 3백 권쯤 읽으라고. 3백 권이면 이 가운데 동시집다운 작품집이 3분의 1쯤 될까 말까 할 것이다.
  그렇다 하여도 3백 권쯤 읽어내면, 그 과정을 통해서 어떤 것은 동시이고 또 어떤 것은 시가 들어 있지 아니한 동시 형식인지를 스스로 식별할 능력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만일 '시가 들어 있지 아니한 동시 형식'에 질리게 된다면, 모름지기 자신의 내부에서 오는 거부 반응을 감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깨닫게 되는 이 방법론은 뉘의 자존심도 건드리지 않는 자기 수련이 될 것이다. 문학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라고 선인들이 일찍부터 말해 오지 않았던가.

  3.
  생각의 우물파기라는 사유 세계의 확장과 심화(深化)는, 돌을 던져서 물주름을 퍼뜨리는 연못의 크기와 깊이에 비유할 수 있고 또 나무의 내면에 감기는 나이테에 비유할 수도 있다.
  작은 연못에 돌을 던져 물주름을 만들 때, 퍼져나가는 파문의 크기는 연못의 크기를 넘지 못한다. 그러나 깊고 큰 연못에서는 연못 둘레만큼 큰 파문을 기대할 수 있다. 생각의 우물파기에서도 깊이 생각하고 크게 생각하여야만 큰 감동을 작품 안에 담아 낼 수 있다.
  동시 작품에 담기는 시적 요건과 시적 요체에서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동시 작품의 질(質)과 격(格)에 있어서도, 깊이 생각한 결과와 넓게 생각한 결과로만 비로소 좋은 작품을 얻게 된다. 깊이 생각하고 넓게 생각하고 얻은 작품의 소재와 내용은, 깊은 의미와 감동을 지니게 마련이다.
  그 대신 톡톡 튀는 듯한 가벼운 의미와 재미를 느끼게 하는 재치는, 문학 작품으로서의 작품성이나 완성도를 높이는데 이바지 못한다. 작품성이나 완성도를 충족시키는 질과 격에서 이미 처져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아이들의 말을 통한 놀이감으로서 유희성에 이바지할 뿐이다.
  나무가 자라면서 내면에 감게 되는 나이테. 이 나이테와 생각의 우물파기를 연결시켜 보자. 가늘고 작은 어린 나무에 들어 있는 나이테는 가는 몇 줄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오래된 고목에 감겨 있는 나이테는 그 연륜만큼 겹겹이 감겨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동들이 써내는 '아동시'에는 과연 몇 줄의 체험적 사유가 감겨 있을 것인가. 인생을 체험적으로 말할 수 있는 아동문학인, 이들이 창작하는 동시에는 작가로서 살아온 연륜만큼 축적된 체험적 사유 세계가 감겨 있을 법하다. 분명한 것은 체험적 사유 세계의 넓이다.
  때로 아이들이 써내는 '아동시'에서 재미를 느끼는 재치가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아동문학인이 창작한 작품성이나 완성도에 견줄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사유 세계의 넓이나 깊이에서 견줄 만한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재미를 느끼는 재치는 그것으로 끝날 뿐이지 결코 문학적 감동에 앞서지 못하는 것이다.
  재미로 읽는 동시가 있고, 감동 때문에 읽는 동시가 있다. 재미로 읽는 동시는 한두 번 읽는 것으로 끝나나 감동을 느껴 읽는 동시는 오래 계속 읽힌다. 감동을 주는 동시가 문학 작품으로서 생명이 긴 것은 자명한 이치다. 진정한 동시 작가라면 어떤 동시를 쓰고자 할 것인가.

  4.
  생각은 열쇠다.
  생각의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으면, 어떤 사유 세계로도 들어갈 수가 없다. 깊은 사유 세계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의미 깊은 작품을 써낼 수가 없다. 아니 구상(構想)조차 불가능하다.
  발목이나 차는 냇물에 들어가 놀면서, 깊은 의미가 담긴 시를 생각할 수 있겠는가. 어린 묘목 한 그루를 심어 놓고, 겹겹이 감긴 연륜의 나이테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생각의 우물파기는 자기 가슴에 깊고 깊은 사유의 우물을 파라는 말이다. 깊이 가라앉은 사유의 결과를 퍼올릴 수 있으려면, 체험의 깊이만큼 해석의 깊이도 깊어야만 한다.
  사물에 대한 시인의 해석은 남들이 생각지 못하는 형상을 찾아내거나 남들이 꿈도 못 꾸는 상징을 발견해 낸다. 이 체험이라는 것, 그리고 이 체험의 해석이라는 것, 그 다음에 오는 형상화를 위한 상징의 발견이라는 것이, 사물을 응시하는 시인의 눈길에서 차례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 과정이 바로 시가 창작되는 과정이다. 동시 또한 마찬가지 과정을 거쳐 창작된다.
  리차드 바크는 '높이 나르는 갈매기가 많은 것을 볼 수 있다'고 하면서, 광산은 깊이 파야 광물을 얻는다는 개념을 뒤집었으나 그 본질에서는 반대가 아니다.
  진정한 아동문학인이면 교실 복도나 운동장에 뛰노는 어린이에게 집착하는 대신, 벌판을 달리는 어린이에게도 눈길을 돌릴 만하다. 어린이에게도 어린이가 알아들을 만한 언어로 인생을 일깨워 줄 수가 있고, 삶과 그 가치에 대해 생각하도록 암시해 줄 필요가 있다. 어린이는 '자라지 않는 어린이'가 아니라 매일매일 성장하는 어린이기 때문이다.
  문학 작품의 작품성은 인간 삶의 고달픔을 위로하고 위안한다. 삶의 고달픔은 어린이의 어려운 삶에도 있다. 동시의 작품성은 어린이에게도 필요하다. 아니, 할아버지나 할머니에게도 필요하다. 동시의 기능과 효용은 이렇게 확대된다. 깊은 생각을 자아내게 하는 문학 작품으로서의 동시는 어린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필요로 하는 모두에게 읽힐 작품인 것이다. 그래서 생각의 우물을 더 깊이 팔 필요가 있다.
  생각의 우물파기에는 아무런 연장이 없다. 있다면 짧은 관념의 호미가 우리들 마음 속에 있을 뿐이다.

(2005년 봄『한국동시문학』제9호)

 

동시 창작론 ⑩

묘사―외다리 걷기식 묘사법

유 경 환

  1.
  동시 쓰기에서 묘사 기법을 나는 '외다리 걷기'에 비유해 왔다. 외다리 걷기에는 (줄타기 놀이에서 보듯) 균형이 아주 중요하다. 균형을 못 잡거나 잃으면 떨어지고 말 듯이, 동시 쓰기에도 균형을 못 잡거나 잃으면 바로 함정에 빠지고 만다.
  그렇다면 외다리 걷기식이란 어떤 것인가? 한마디로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중심을 잡으라는 것이다. 이 중심 잡기를 구체적으로 다음 3가지 기법으로 설명한다.
  그 첫째는 짧게 쓰기다.
  그 둘째는 간결하게 쓰기다.
  그 셋째는 순수하게 쓰기다.
  위의 3가지는 동시 쓰기의 묘사 기법에 기본이다. 이것들을 기본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기본에서 이탈할 때 산문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동시는 운문이다. 그래서 운문의 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산문이 될 소지를 배제해야만 한다.
  짧게 쓰고, 간결하게 쓰고 그리고 순수하게 쓰라는 것은, (같은 말의 되풀이이긴 하지만) 운문의 형식을 지키라는 것이다. 아주 쉬운 말로 다시 말하면, 형용사나 부사를 되도록 쓰지 아니하는 것이 위의 3가지를 이행하는 지름길인 것이다.
  산문에서는 (더구나 소설 문장에서는) 형용사나 부사를 작가의 의도대로 중복하거나 또는 강조하는 뜻에서 겹쳐 쓰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 쓰기에서는 이와 다르다. 기둥과 가지만 남긴 채 겨울을 난 과수원 과수에 봄이 오면 잎이 돋아 나듯이, 기둥과 가지만 갖춰 주는 것이 시인의 몫이고 잎을 다는 것은 읽는 독자의 몫이다. 그러므로 동시 쓰기의 묘사 기법에서 형용사나 부사를 덜 쓰는 것은 읽는 독자의 몫을 남기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 법의학자들이 아주 오래된 두개골을 발견하여 그 구조적 특징을 살펴서 인체 공학적으로 생전의 모습을 재현해 내고 있다. 이처럼 시인은 정서의 기본 뼈대만 갖춰 제시하면, 독자가 읽으면서 상상의 살을 붙여가며 감상하는 것이 제대로 동시를 읽는 법이다.
  동시 읽기의 재미는 어디까지나 읽는 독자의 몫이다. 그러므로 정서의 뼈대에 기본이 되는 짧고 간결하고 순수함의 3가지만 요구된다. 쓰지 않아야 할 형용사나 부사를 묘사를 위해 썼다면, 이런 행위는 결과적으로 독자의 상상인 독자의 재미를 앗아버리는 것이 된다. 물론 꼭 필요하거나 있어야 할 형용사 부사까지 쓰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급적 덜 쓰는 것이 가장 쉬운 기법이다.

  2.
  동시를 쓰는 묘사 기법에서 두 번째로 마음에 두어야 할 점은, 시인의 의도를 (버선목 뒤집어 보여주듯이) 다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흔히 동시를 쓰는 습작기에 있는 사람들은 독자가 이런 뜻을 짚어낼 수 있을까 하고, 걱정스럽고 염려스러워서 쓰는 의도를 밝히려고 한다.
  이렇게 '이 글은 이런 의도로 썼다'고 밝혀 놓는다면, 그 글의 성격은 거기서 끝나고 만다. 동시의 매력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가 듣는 목적시들, 예를 들면 '어린이날 노래'라든가 '한글날 노래'라든가 '개천절 노래'들은 아무리 숭고한 뜻을 지녔다 하더라도 그 날 하루만 불리는 노래일 뿐이다.
  그러므로 동시를 쓰는 묘사 기법에서 중요하게 다뤄야 할 점은, 독자의 눈에 쉽사리 드러나지 아니하도록 이중 해석이 가능한 낱말을 골라 시어로 쓰는 그 '어떻게'에 있다.
  필자가 여기서 이런 식으로 설명하면,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묻고 싶어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중 해석이 가능하지 않는 낱말로는 동시가 되지 않느냐?'고. 이런 질문엔 여기서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중 해석이 어려운 낱말의 모음만으로는 유치원 원아들이 부르는 노래 수준의 작품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유치원 원아들이 즐겨 부르는 수준의 작품이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는 문학 작품으로 남기는 어렵다.
  이름난 시인 정지용이 남긴 어린이를 위한 시 가운데 '해바라기씨'라는 것이 있다. 여기 옮기면 다음과 같다.

해바라기씨를 심자.
담모퉁이 참새 눈 숨기고
해바라기씨를 심자.

누나가 손으로 다지고 나면
바둑이가 앞발로 다지고
고양이가 꼬리로 다진다.

우리가 눈 감고 한 밤 자고나면
이슬이 내려와 같이 가고 가고
우리가 이웃에 간 동안에
햇빛이 입맞추고 가고

해바라기는 첫새악시인데
사흘이 지나도 부끄러워
고개를 아니든다.

가만히 엿보러 왔다가
소리를 꽥! 지르고 간 놈이―
오오 사철나무 잎에 숨은
청개구리 고놈이다.
                ―정지용 '해바라기씨' 전문

  여기서 '해바라기씨'는 그냥 해바라기씨일 수도 있으며 아울러 다른 뜻을 상징하거나 비유할 수도 있는 그런 씨다. 이 시가 씌어진 일제 시대에 일본 경찰을 우리 나라 사람들이 '참새'라는 은어로 불렀다는 사실을 기억하거나 알아 낸다면 이중 해석은 그만큼 쉬워질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중 해석'이란 꼭 두 가지 해석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 가지 해석이라는 뜻을 다중(多重) 해석으로 풀이하여도 좋다.
  이 이중 해석은 읽는 독자의 체험 수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체험 수준은 거의 나이에 따라 그 폭과 수준이 비례하므로, 이중 해석은 흔히 나이에 따라 나타난다고도 말한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할 때에 유치원 원아에겐 그냥 소의 새끼인 작고 귀여운 송아지의 이미지가 전달되겠지만, 그러나 세상을 살 만큼 살아본 어른에게는 그냥 송아지가 아닌 것이다.
  '날 저무는 하늘에 별이 3형제……'에서도 별은 그냥 별로 듣는 어린이가 있는가 하면, 별에서 다른 뜻을 찾아 내 마음 아파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쓴 사람의 의도가 다 드러나는 글이 산문에선 환영받으나 운문에서는 그렇지 않다.

  3.
  동시 쓰기에서 묘사 기법은 그 말이 원천적으로 지니고 있는 어감(語感)이나 율동감(律動感)에 의해 제약된다.
  영국 동요집 <마더 구스>(1760)를 읽어보면 음악적인 율동감을 금방 느낄 수 있다. 원래 영국에서 전래되어온 (입으로 전해진) 노래 같은 동요를 모은 모음집이기 때문에 율동감이 쉽게 감지된다.
  영국에서 이름을 떨친 A.A.밀느(Alan Alexander Milne 1882∼1956)의 동시집 속 작품들도 귀에 들려오는 사운드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면서 쓴 작품들이다. 흔히 아기곰 푸우푸우를 쓴 동시인으로 그를 알고 있다.
  동시. 이를 읽을 때에 힘을 들이거나 힘을 빼는 발음의 강약(强弱)이라든가, 낱말 자체가 지니고 있는 음량(사운드)을 참고하여서 동시를 쓸 때 낱말의 순서를 바꾸거나 또는 도치법(倒置法)으로 앞뒤와 위아래를 뒤섞거나 할 필요가 있으면, 문법대로 쓰지 않으며 또 줄을 바꿔서 새로운 줄을 만들게 된다.
  예를 들어, 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장가라도 들어보면 일정한 율동감이 있다는 것을 감지할 것이다. 이렇게 일정한 율동의 감각이 되풀이 되도록 운(韻)을 맞춰 쓰는 것이 초기 영국 동시의 틀이었다.
  우리 나라 아동문학의 개척자인 윤석중도, 일본을 통해 받아들인 영국의 운문 형식의 영향을 아니 받은 것이 아니어서, 우리 말의 율동과 장단 그리고 숨결 이 3가지를 고르고 다듬어 가며 윤석중 동시의 틀을 짰다. 이런 까닭에 작곡가에 의해 쉽게 멜로디가 붙을 수 있는 그런 작품들이 된 것이다.
  어쨌거나 동시 속에는, 안으로 접어 넣은 율동이 일정한 박자처럼 감각으로 살아나도록 스며 있으며, 또 멀리 퍼져 나가는 종소리처럼 은은한 여운이 스며 있게 마련이다.
  때문에 동시 쓰기 묘사 기법은 이런 감각적인 제약을 수용하며서 전개되어야 한다. 이런 제약 속에서도 멋진 동시를 써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오래 목수일을 해온 목수가 자 없이도 척척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있지 아니한가.
  동시 쓰기를 할 때, 낱말의 순서를 왜 바꾸며 그리고 언제 어느 때 줄을 바꿔 써야 하는지를 자신있게 알려면 노련한 목수처럼 충분한 체험을 쌓아야 한다. 동시 쓰기는 결코 수학 문제를 풀 듯이 공식에 대입하거나 법칙을 응용하듯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율동의 감각적 제약을 수용하는 능력 또한 목수의 수련과 마찬가지이다.

  4.
  동시 쓰기 묘사 기법에서 '묘사를 위한 감정 절제'가 필수적임을 말할 차례다.
  시어(詩語)로서 '상큼한'이라는 형용사와 그리고 '봄'이라는 명사가 만나면, '상큼한 봄'이라는 한 구절이 성립된다. 그런데 상큼한 봄이라는 4글자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실로 다양한 것이다. 이런 이미지의 분위기는 들판을 가득 덮을 수도 있고 골짜기를 메울 수도 있는 그런 색깔을 연상시키기도 하며, 동시에 재래시장 한 구석 장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나이든 아줌마의 봄나물 한 줌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를 다 늘어놓는다면, 이것은 시가 아닌 산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시에는 절제가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필수 사항이라는 말을 하게 된다.
  오래 전 애니메이션 '마리 이야기'라는 영상이 소개된 적이 있다. 마리 이야기는 하얀 털옷을 입은 마리가 2시간 동안에 보여주는 영상 스토리다. 그런데 관객은 이 영상을 보면서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읽어낸다.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다.
  만일 관객이 눈으로 보면서, 보이는 것 이상의 것을 가슴으로 상상하지 못한다면, 이 애니메이션은 그냥 아이들의 장난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런 수준 이상으로 평가되었다.
  시에서도, 시를 이루는 몇 줄은 독자의 가슴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는 (아픔 비슷한) 정서를 찌르는, 그런 힘을 지녀야 한다. 그 힘이 곧 시의 매력이다. 이 매력은 단 한 줄 속에 들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러기에 시가 몇 줄로 씌어졌는가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리거나 나이들었거나 상관없이 사람의 가슴 속 어느 한 구석에 담겨 있는 마음을 건드려 줄 수 있는 한마디! 이런 숨겨진 메시지가 시를 시답게 만드는 요체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한 2년 전부터 김용택이나 안도현 같은 시인들의 작품이 우리들 마음을 보자기로 싸담듯이 다잡는 것을 경험했다. 그들은 어디에서도 아동문학가로 불리지 않으며 동시인이나 동시작가라는 바이라인을 달고 다니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그들이 써내는 작품들이 기성 아동문학인들이 차지하던 자리에 밀물처럼 침식하여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에, 우리 나라 아동문학과 관계 있는 잡지에 발표되는 동시의 성격과 형식이 현저하게 달라지는 현상을 보아 왔다. 왜일까? 한마디로 그들의 작품에는 절제된 시가 들어 있으되 아주 쉬운 그리고 자연스러운 묘사 기법이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절제. 감정의 절제는 물론이거니와 묘사에서도 절제는 당연한 것이다. 그냥 늘어놓으면 시가 안 되는 것을 왜 모르는가. '그냥 늘어놓는다'는 말에는 절제없이 형용사나 부사를 자꾸 붙인다는 뜻도 들어 있다. 다 자라 옥수수대에 붙어 있는 옥수수잎보다 적은 단어 몇 개로 김시인이나 안시인은 그들의 속내를 그럴 듯하게 형상화하고 있지 않은가?

  5.
  동심이라고 일컬어 온 '어린이 마음'은 간결하고 짧고 순수한 것으로 묘사된다. 이 3가지를 합쳐서 말하면 시에는 군더더기가 필요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어린이 마음으로 동시를 쓴다면, 간결하고 짧고 순수한 낱말을 시어로 선택하여야 어린 독자에게 쉽게 다가설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구태어 논리라는 어려운 말을 빌려올 것 없이, 동시에 구사하는 시어는 겉으로 투명하되 해석에선 두 겹일 수 있는 그런 단어이어야 하겠다. 여리고 고운 마음을 담아내는 글(자)그릇은 거기 담아내는 마음 그대로 덧칠 안 된 단어일 때에 독자 가슴에 밀착될 수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빼앗긴'은 얼마나 큰 뜻으로 씌인 단순한 시어인가?

(2005년 여름『한국동시문학』10호)

 

동시 창작론 ⑪

쉽게 쓰기

유경환(동시인/시인)

  읽기는 쉬워도 실제로 쓰기에는 쉽지 아니한 것이 바로 '쉽게 쓰기'이다. '동시는 쉽게 써야 한다'라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알면서도 어렵게 쓰는 버릇을 못 고치는 편이다.
  왜냐하면 어떻게 쓰는 것이 쉽게 쓰는 것이고 그리고 어떻게 쓰는 것이 어렵게 쓰는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된 적이 없기에, 막연히 모호하고 포괄적인 기준만 내세워 '쉽게 쓰자' 또는 '어렵게 쓰지 말자'고 말해온 탓이다.

  1. 관념어(觀念語)는 피해야

  먼저 필자는 쉽게 쓰기를 위한 실제 방안으로 관념어는 피하자고 말한다. 관념어라는 것은 한자가 표의(表意)하는 그대로 관념을 나타내는 낱말이다. 예를 들면 '역사'라든가 '사상'이라든가 또는 태고(太古)라든가 하는 낱말들이다.
  우리들의 사유 세계에만 존재할 뿐이고, 실제로 접근하여 만나거나 만져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닌 낱말이다. 어린이나 청소년이 가까이 다가가서 만져보거나 접촉할 수 없는 추상적 개념인 까닭에, 어린이나 청소년의 마음을 흔들어 움직이는 이런 정서 작업에 동원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이런 까닭에 어린이나 청소년도 독자 대상에 포함하는 동시에, 관념어를 동원 구사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읽히길 바라는 시를 쓰면서 그들에게 낯선 낱말을 선택하는 이런 실제의 경우를 필자는 요즘에도 적지 않게 보고 있다. 더 실증적으로 밝히자면, 교육 기관에서 퇴직한 교직자들 가운데 특히 교감 교장 같은 고위직 경력자들이 발표한 이른바 '동시'라는 글에서 다반사로 관념어를 만난다.
  왜 그럴까? 동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오랜 교직 경력을 쌓았음에도 제대로 이해할 기회를 못 가졌을까? 기회를 못 가진 것이 아니라, 동시를 문학 작품으로 수용할 기회를 못 가졌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줄여서 지적한다면 동시를 얕보아온 탓이다. 어린이가 써내는 '아동시'와 그리고 문학 수업을 거친 문학인이 창작한 '동시'와의 차이를 모르는 그 개념 혼돈에서, 자신을 구출해 내지 못한 채 고위 교직에 오른 탓이다. 그러므로 동시도 아동시처럼 쉽게 씌어진다고 여기는 것이다.
  문학 작품으로서의 가치, 이것이 인정되는 동시는 결코 쉽게 씌어지지 않는다. 어렵게, 참으로 어렵게 창작된다. '쉬운 표현을 위해 쉬운 낱말을 선택하는' 일이 정말 어려운 일인 것이다.
  여기서 동시 '쉽게 쓰기'는 '쉬운 낱말로 쓰도록 하는 노력'이라는 것으로 결론된다. 쉬운 낱말로 동시 쓰기는(모순 같지만) 사실상 어렵게 쓰기와 상통하는 말이기도 하다. 동시를 쓰고자 하면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자가당착일 뿐이다.

  2. 쉽게 쓰기와 유치하게 쓰기

  쉽게 쓰기. 이는 읽기에 쉽도록 또는 감상하기에 쉽도록 쓰자는 것이지, 결코 유치하게 쓰자는 것이 아니다.(이런 말을 이 창작 강좌에서 해야만 하는 것인가 의구심이 든다) 하지만, 요즘 어떤 종합 문예지에 활자화되는 것을 읽어보면 그래도 '해야 하겠다'고 작심하게 된다.
  어른이 쓴 글인데 어째서 유치한 글이 되는 것일까? '동시는 어른이 어린이 마음으로 돌아가서(동심으로) 써야 한다'는, 이런 일부 평자들의 말을 마치 초등학교 1학년 학생처럼 듣기 때문이다. 어린이의 마음으로 쓰라는 이런 주장은 ①때묻지 아니한 마음으로 ②순수한 감정으로 ③또는 투명한 심사로 소재를 해석하라는 주장일 뿐이고, 쓰는 사람이 갑자기 어린이의 정서 수준으로 내려가서 쓰라는 말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적잖은 발달 장애 현상을 보고 있다. 키가 한창 클 시기에 어떤 원인 작용으로 말미암아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면 결국 평균 신장에 못 미치는 키를 갖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서가 한창 발달할 시기에 어떤 원인 변수가 개입하여 충분히 발달하지 못하면, 몸과 나이에 걸맞도록 제대로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는 정서 지체에 걸리게 된다.
  그런데, 어린이의 마음으로 돌아가 동시를 쓰란다고 마치 정서 지체자처럼 어린이의 사유 능력과 어린이의 사유 세계 안에서 뒹구는 모습을 글로 보이고 있다. 이런 글인 경우 정상적 기준으로 보면 유치한 글로 읽혀질 수밖에 없지 아니한가.
  쉽게 쓰기는 유치하게 쓰기와 같을 수 없다. 이의 차이나 간격을 식별하지 못하고 동일시(同一視)한다면, 정서 발달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다시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사실의 인지(認知)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쉽게 쓰기와 그리고 유치하게 쓰기. 이것들이 분명히 다르다는 차이점은, 첫째 낱말의 선택에서 찾아야 할 일이고, 둘째 낱말의 배열인 전개 방법에서도 찾아야 할 일이며, 셋째 낱말들의 서술에서 기술적으로(또는 의도적으로) 생략하는 그 기교에서까지 찾아야 할 일이다. 위에 열거한 3가지는 말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만큼 표현 기교는 예민하고 까다롭고 또 델리케이트한 처리 방법을 필요로 하고 있다.

  3. 정서의 집적회로(集積回路)

  '동시도 시(詩)이어야 한다'는 말을 필자는 1950년대 말에 시작하였다. 이것은 '우선 시가 되어 있어야 동시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필자의 이런 주장에 여러 가지 반응이 나왔다. 일부 평자들은 참뜻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 했는지 또는 이해 수용에 오해가 끼었는지 아니면 정서 지체가 있었는지, 하여간 동시의 난해성(難解性)을 제기하면서 '유 아무개가 한 말 때문에 동시가 갑자기 어려워지고 독자를 잃어버린 결과를 가져왔다'고 난해성에 결부시켰다.
  1970년대 동시가 일부 독자층으로부터 외면당했다고 하는 말은, 1970년대 아동문학 독자의 주계층이 분화(分化) 분류되는 현상을 오해한데 기인한 말이다.
  1920년대부터 50년간 지속된 동요의 흐름에서 시(詩)다운 동시의 새 흐름이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 1970년대 그 즈음이다.
  유치원 시설이 늘어나기 시작하여 유아 교육이 본격적으로 확장되던 시절, 유아들의 정서 생활에 걸맞는 운문이 정서 교육의 교재용으로 요청되는, 이런 시대적 수요에 따라 동시의 분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50년간 지속된 동요의 형식에서 동시의 형식으로 외적 변형을 이루자, 음악동요에 필요한 노랫말 즉 음률적으로 내재율이 뚜렷한 노랫말이 귀해져서, 새로운 노랫말 틀에 맞는 운문의 수요가 교육 현장에 급증하였기에, 동시의 분화가 곁들여 나타나게 되었다.
  사회가 열리면서 다원화(多元化)로 개방되는 기회를 통하여, 해외의 아동문학이 소개되고 그 가운데 선진국의 동시와 청소년시에 노출되는 기회가 늘면서, 우리 나라의 동시도 그 격과 위상을 높이자는 의식과 함께 '동시는 어른도 독자일 수 있다'는 해석이 짙어졌다.(이런 자극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글에서 앞섰다)
  위에 분석한 3가지 상황과 현상을 간과한 일부 평자들은 '시가 되어가는 동시'를 놓고, 계속 종래의 동요 가사의 기준에서 바라보면서, 자기네 기대를 넘었다며 '난해하다'고 한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일이다. 모두가 현명한 사람들은 아니다.
  그러나 동시의 격(格)과 난해성과의 상관 관계에는 상관성이 지극히 약한 사실을 살펴야 오해를 벗어날 수 있다.
  ①1920년대의 신체시와 그리고 창가(唱歌)의 가사, ②1930∼50년대의 동와 동요 가사, ③1960∼70년대 동시와 동요 노랫말. 이렇게 3단계로 발전한 발전 과정을 살피면, 동시가 시로서의 위상을 차지할 충분한 이유가 나타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나누어 살펴야 마땅할 상황과 현상을 한데 뭉뚱그려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아니한 발언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일부 평자들이 자기 평가의 기준을 계속 그 전 시대에 맞추어 놓은 채, 1970년대에 나타나기 시작한 '시다운 동시'를 난해한 동시로 규정하는 일은, 앞으로 동시를 공부하여 창작 생활에 들어갈 아동문학 지망생에게 적당치 못한 견해를 줄 염려가 있기 때문에,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다.

  4. 동시의 원리(原理) 알아야

  두루 알고 있다시피 컴퓨터 작동 원리인 디지털 능력은 0과 1, 이 두 가지를 가지고 만드는 순열조합의 집합체에서 나온다. 이와 크게 다르지 않게 동시의 원리를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여온 낱말이지만, 이 가운데 시어로 쓸 만한 낱말들만 동원하여, 그것들을 이어 놓거나 나눠 놓거나 또는 줄바꿔 놓거나 하는 배열 형식을 통해 일상적으로 통하던 감정 이상의 정서 곧 시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정서를 담아내는 것이 시의 창작이다.
  그런데 동원된 낱말들이 엮는 정서회로, 이것이 전해 주는 의미를 제대로 소화할 능력이 문제인 것이다.
  이런 능력에 못 미치는 사람이 평자로 등장하는 경우, 난해시와 그리고 난해시가 아닌 것을 식별하지 못하고 평하기 일쑤다. 정말 어려운 낱말을 구사하여 독자가 수용하기 어렵도록 쓴 난해시와 '시다운 동시'까지 한데 뭉뚱그려 '난해하다'고 치부하는 결과를 내놓는다.
  시에는 누가 봐도 난해한 난해시가 있다. 열 사람이 읽고 나서 모두 난해하다고 한다면, 결국 쓴 사람 혼자만 아는 난해시일 수밖에 없다. 문예 사조사(史)에 보면, 실험적으로 시도된 첨단적 성격의 작품들이 거의 난해시의 대접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동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경우와 달리 '시다운 동시'가 품고 있는 고도의 기교적 완성도, 이것이 만드는 정서회로의 효과를 추적해 낼 능력이 부족하면 작품 속에 숨겨진 작품성의 가치를 발견 못하게 된다.
  결국, 시어로 선택된 낱말들이 시인의 의도에 따라 이어졌을 때 구축되는 정서회로의 효과, 즉 시적 분위기의 느낌을 감지해내는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서회로가 내뿜는 효과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모자라서 난해하다고 불평하는 경우가 참 많다. 이를 놓고 필자는 '적절하지 못한 치부'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쉽게 쓰기.
  이는 시다운 동시를 쓰려고 노력을 하되,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친숙한 낱말을 시어로 구사해야, 어린이나 청소년이 자기들 나름의 시적 상상을 충분히 펼 수 있다는 주장이다.
  관념어는 쇠에 녹이 슬 듯 때가 낀 낱말과 같아서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시적 상상을 불러일으키거나 시적 자극을 주기에 적합하지 아니한 낱말이다. 감동을 전달하고자 하거나 느낌을 전달하고자 하는 동시 쓰기에서, 기능적으로 이미 녹슨 관념어를 계속 고집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2005년 가을『한국동시문학』제11호)

 

동시 창작론 ⑫

내면화(內面化) 들여다보기

유경환(동시인/시인)

  1
  사람과 원숭이와의 차이를 설명한, 재미있는 한마디 이야기가 있다. 의사이면서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이 한 말이다. '사람도 거울을 보고 원숭이도 거울을 본다. 그런데 사람과 원숭이와의 차이는 이렇게 나타난다. 원숭이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만 보나, 사람은 거울에 안 비치는 내면(內面)까지 본다.'
  필자는 내면(內面)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이 한마디를 주석을 달지 않은 채 인용하였다. 이 한마디가 나온 지는 퍽 오래다. 그러나 우리 나라 아동문학가들에게는 아직 낯선 편이겠다.
  내면(內面)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아니한 채로 뜻을 지니기 때문이다. 드러나지 아니한 채로 뜻을 품고 있기 때문에, 시의 의미를 깊게 하는 마술 같은 일몫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하겠다. 시어들이 나란히 조합되어 시인의 생각을 형상화시킬 때,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담아내는 일몫이 있다는 것을, 시인이 아니면 미처 생각지 못하는 편이다. 바로 내면의 문제다.
  이런 까닭에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동시라고 작품을 써낼 때, 물 밑으로 담기는 뜻을 아예 처음부터 놓쳐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동시를 통해 글자들이 빚어내는 이미지를 그려보려 하지만, 그와 아울러 물 밑으로 담겨지는 뜻은 생각지도 못한다. 잘 씌어진 동시와 그렇지 못한 동시와의 차이는 여기서 벌어진다. 이 차이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퍽 많이도 동시인으로 등단하였으니까 말이다.

  2
  동시를 발표하면서 만약 어린이들이 감상하는 작품이기에, 선택한 시어들 밑에 다른 뜻을 깔아 둘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면, 이렇게 발표된 작품들은 어린이들에게 일회용 읽거리의 작품성 때문에, 두고두고 펼쳐볼 읽거리가 못되고 만다. 적잖은 동시인들이 기성 문단에 불만스러워하는 것은 그들의 작품이 일회용 대접밖에 못 받는 데 있다. 하지만 왜 그런 대접을 받는지에 대한 원인 분석은 간과하고 있다.
  동시집 출판은 참으로 벅차고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쳐 출판된 동시집을 읽어보면, 아깝게도 수록된 작품들의 상당수가 일회용품이라는데 혀를 차게 된다. 이런 일회용 수준의 작품을 써내면서, 어떻게 시인이라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겠는가.(때로는 좀 모자라는 사람이 아닌가 싶게 안타깝기도 하다)
  '주된 독자층이 어린이'라고 잘못된 생각을 편견인 줄 모르고 계속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독자층을 얕보는 태도에서 한번 읽으면 다시 읽고 싶지 않은 것을 써내는 사람들이, '나도 동시인!'이라고 자부하는 셈이다.
  시 앞에다 아이 동(童)자를 붙인 동시라고 하여도, 첫 번째 독자인 어린이가 성장 과정을 통해 계속 자라면서 다시 읽고 또 읽고픈, 이런 작품을 내놔야 비로소 기억되는 시인이 되는 것 아닌가. 동시도 시이어야 계속 읽힐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별다른 생각 없이 '어린이'가 되어 갑자기 어린이가 된 그런 눈으로, 깊은 고민의 흔적도 없이 옛날을 되돌이켜 보고 자시의 어린 시절 회상기를 동시라고 써서 발표하고 있다. 이런 창작 태도이고 보면, 시로서 갖춰야 할 시적 요건이 들어갈 자리조차 마련되지 않은 어린이 글, 곧 아동시가 되고 마는 것이다.
  길고 길게 설명을 하였지만, 요체는 내면화(內面化)이다. 내면화가 안 된 것은, 속이 빈 허물과 다르지 않다. '속 빈 강정'이라는 속담이 꼭 맞는 말이다.
  내면화는 동시를 시의 지위에 올리는 격(格)이다. 내면화는 시인의 의도이든 아니든, 겉으로 읽히는 것과 다른 뜻을 시가 그 물 밑에 지니게 하는 묘한 일을 한다. 내면화는 그래서 시의 매력이고 신비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내면화는 오직 느낌(feeling))으로만 감지되고 느낌으로만 전달된다. 작품 속에 내면화되어 있는 정서를 진단할 수 있는 능력은 이론이 아닌 느낌에서 터득된다.

  3
  시인은 생각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고민하는 사람이고 늘 고뇌에 차 있는 그런 존재다. 그런데 이런 고뇌 없이 '어린이가 되어' 맑은눈으로 순수한 것만 골라 '생각의 난쟁이'처럼 '곱고 예쁘고 귀여운' 것들을 글자로 짚어내, 틀에 맞게 써 내면 이 글이 곧 동시가 된다는 말인가?
  아니다. 
  아무리 동시라고 할지라도, 한 편의 동시 작품 안에 시가 들어가 제자리를 잡고 있지 아니하면, 글자 맞춤의 형식에 지나지 아니함을 알아야 한다. 곱고 예쁘고 귀여운 것. 이런 것을 줄맞춰 나타낸다 하여도, 이런 것을 어린이눈으로 그려낸다 하여도 결코 동시가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동시도 시이어야 한다는 필자의 주장은, 동시에도 사람의 사람다운 마음이 들어가 내재(內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사람다운 마음'은 기쁨과 슬픔, 아픔과 괴로움 따위 온갖 정서가 다 녹아들 수 있는 마음이다. 동시의 일차적 독자가 어린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슬픔이나 괴로움의 정서를 외면할 수 있는가. 이는 변명일 수밖에 없다. 여러 번 기회 있을 때마다 이야기하였지만, 동시는 더 이상 어린이만을 주독자층으로 삼지 아니한다. 어린이를 주독자층으로 설정한 범주 규정은, 우리 나라 1930년대 사회 문화 구조와 상관관계가 있다. 당시 민족의 희망을 어린이에게 걸 수밖에 없다는 암울한 민족적 현실에서, 동시의 범주를 좁혀 감상과 보급의 농도를 어린이에게 집중시키고자 한 의도가 그런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동시는 인간의 온 생애에 걸쳐 위안과 위로를 안겨 주는 문학 형식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것이 세계 보편적 현상이다.
  유아에서 노년까지 좋아하는 시가 동시다. 유아에서 노년까지 즐겨 듣는 시가 동시다. 유아에서 노년까지 인생을 담아낼 그릇의 효용이 인정되는 시가 동시인 것이다.
  그러니, 동시라고 하여 더 이상 그 격을 낮추지 말 일이다. 동시인 스스로 동시의 격을 낮추면 그것을 생산하는 동시인도 사회적인 대접을 받지 못한다.

  4
  햇살을 프리즘에 통과시켜 분해하면 일곱 가지 빨, 주, 노, 초, 파, 남, 보의 빛으로 나눠 볼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의 눈에는 안 보이는 적외선이 있고 자외선이 있다.
  만약 이를 볼 수 없기에 적외선이나 자외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물리학 공부를 더 해야 할 일이다. 마찬가지로 좋은 동시, 동시다운 동시 한 편에서는 읽을 땐 겉으로 드러나는 느낌과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나 속마음에 전달되어 오는 깊은 뜻을 감지하게 된다.
  그런데 이 속마음에 전달되는 깊은 뜻을 감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도 작품을 쓰는데 왜 어째서 좋은 동시로 쳐주지 않는가' 하고, 기회 있을 대마다 불만을 터뜨리고 불평을 일삼는다. 문제는 나열된 글자들이 형상화해 낸 이미지 밑에서(물 밑으로) 전달되고 있는 뜻의 기능을 감지할 만큼, 충분히 삶이나 인생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거나 고뇌에 빠지지 않았다는 생활 자세 또는 생활 태도에 있다고 할 것이다.
  생각 없이 씌어지는 시가 없고, 생각 없이 씌어지는 동시 또한 없다. 이 말은 고민 없이 씌어지는 동시가 있을 수 없고, 고뇌 없이 씌어지는 동시가 있을 수 없다는 말과 같다.(고민 없이, 고뇌 없이 어린이가 써 내는 것은 동시가 아닌 아동시다)
  그런데 어쩌다 갑자기 그냥 '어린이가 되어'서는 결코 진솔한 어린이의 흉내도 낼 수 없다. 어린 사람에게도 생각이 있고 고민이 있으며 그 나름의 고뇌가 있다고 말하니까, 작품에다 고민이니 고뇌니 하는 한자(漢字)를 그대로 써넣는 동시인(?)도 있었으니, 이 어찌 한심한 실정이라 아니 하겠는가.
  좀더 추적해 보면, 여러 잡지나 기관이 신인을 등단시키는데, 그 심사위원이나 추천위원 가운데 동시를 제대로 써내지 못하는 '위원'이 끼어 있어서, '그 밥에 그 나물' 같은 신인을 등단시키고 있다. 이것이 동시의 내면화를 모르는 일부 위원들의 심사나 추천의 결과이다.

  5
  한 채의 집을 아담하게 잘 지으면 투시도만 보았을 때와 다른 느낌을 받고 좋아하게 된다. 한 편의 동시다운 동시를 읽게 되면, 글자의 조합이 풍기는 것 이상의 느낌과, 그리고 잘 드러나지 않는 속 깊은 뜻을 감지하게 된다.
  내면화는 동시를 쓴 사람의 마음을 읽는 사람의 마음에다 고스란히 옮겨 줄 수 있는 글자 밑의 얽힘이다.
  반도체 칩이 서로 연결되어 정보를 전달하듯이, 사전에 나와 있는 글자들이 얽혀서 사전에 나와 있지 아니한 뜻을 전달하는 일몫을 내면화가 해 낸다.
  사람의 마음은 반도체 칩이 아니므로 일정한 형식으로 내몀화의 뜻을 전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사람마다 다른 체험 곧 내적인 체험에 따라 다른 뜻을 전달한다. 여기 감상의 묘미가 있고, 그래서 해석의 폭이 넓어진다.
  윤석중은 기찻길 옆에서도 잠을 잘 자는 아기에서, 편히 잠들 수 없는 사회를 기찻길로 해석될 수 있게 썼다. 박목월은 엄마소도 얼룩소에서 창씨개명을 부추기는 당시 사회 분위기에 저항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송아지를 썼다. 시인의 의도이든 아니든, 작품이 지니고 있는 내면화된 세계는, 작품의 작품성을 높이고 완성도를 결속시킨다.
  동시의 창작에서 내면을 중시하고 내면화의 세계를 천착하는 것은, 돌 한 덩이를 가지고 어떤 모양을 파내 다면체(多面體)적인 해석을 끌어내는 것과 다르지 않게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표본실에 진열되어 있는 박제된 동물에는 내면이 없다. 시가 들어 있지 아니한 동시는 동시라고 할 수가 없다. 내면은 분해된 기능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나, 내면은 전체로서 생리 기능을 한다. 마찬가지로 시에서 내면화는 전체로서 드러나지 아니하는 다른 뜻을 전달하는 일몫을 감당한다.

(2005년 겨울『한국동시문학』12호)

 

동시 창작론 ⑫

내면화(內面化) 들여다보기

유경환(동시인/시인)

  1
  사람과 원숭이와의 차이를 설명한, 재미있는 한마디 이야기가 있다. 의사이면서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이 한 말이다. '사람도 거울을 보고 원숭이도 거울을 본다. 그런데 사람과 원숭이와의 차이는 이렇게 나타난다. 원숭이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만 보나, 사람은 거울에 안 비치는 내면(內面)까지 본다.'
  필자는 내면(內面)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이 한마디를 주석을 달지 않은 채 인용하였다. 이 한마디가 나온 지는 퍽 오래다. 그러나 우리 나라 아동문학가들에게는 아직 낯선 편이겠다.
  내면(內面)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아니한 채로 뜻을 지니기 때문이다. 드러나지 아니한 채로 뜻을 품고 있기 때문에, 시의 의미를 깊게 하는 마술 같은 일몫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하겠다. 시어들이 나란히 조합되어 시인의 생각을 형상화시킬 때,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담아내는 일몫이 있다는 것을, 시인이 아니면 미처 생각지 못하는 편이다. 바로 내면의 문제다.
  이런 까닭에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동시라고 작품을 써낼 때, 물 밑으로 담기는 뜻을 아예 처음부터 놓쳐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동시를 통해 글자들이 빚어내는 이미지를 그려보려 하지만, 그와 아울러 물 밑으로 담겨지는 뜻은 생각지도 못한다. 잘 씌어진 동시와 그렇지 못한 동시와의 차이는 여기서 벌어진다. 이 차이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퍽 많이도 동시인으로 등단하였으니까 말이다.

  2
  동시를 발표하면서 만약 어린이들이 감상하는 작품이기에, 선택한 시어들 밑에 다른 뜻을 깔아 둘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면, 이렇게 발표된 작품들은 어린이들에게 일회용 읽거리의 작품성 때문에, 두고두고 펼쳐볼 읽거리가 못되고 만다. 적잖은 동시인들이 기성 문단에 불만스러워하는 것은 그들의 작품이 일회용 대접밖에 못 받는 데 있다. 하지만 왜 그런 대접을 받는지에 대한 원인 분석은 간과하고 있다.
  동시집 출판은 참으로 벅차고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쳐 출판된 동시집을 읽어보면, 아깝게도 수록된 작품들의 상당수가 일회용품이라는데 혀를 차게 된다. 이런 일회용 수준의 작품을 써내면서, 어떻게 시인이라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겠는가.(때로는 좀 모자라는 사람이 아닌가 싶게 안타깝기도 하다)
  '주된 독자층이 어린이'라고 잘못된 생각을 편견인 줄 모르고 계속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독자층을 얕보는 태도에서 한번 읽으면 다시 읽고 싶지 않은 것을 써내는 사람들이, '나도 동시인!'이라고 자부하는 셈이다.
  시 앞에다 아이 동(童)자를 붙인 동시라고 하여도, 첫 번째 독자인 어린이가 성장 과정을 통해 계속 자라면서 다시 읽고 또 읽고픈, 이런 작품을 내놔야 비로소 기억되는 시인이 되는 것 아닌가. 동시도 시이어야 계속 읽힐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별다른 생각 없이 '어린이'가 되어 갑자기 어린이가 된 그런 눈으로, 깊은 고민의 흔적도 없이 옛날을 되돌이켜 보고 자시의 어린 시절 회상기를 동시라고 써서 발표하고 있다. 이런 창작 태도이고 보면, 시로서 갖춰야 할 시적 요건이 들어갈 자리조차 마련되지 않은 어린이 글, 곧 아동시가 되고 마는 것이다.
  길고 길게 설명을 하였지만, 요체는 내면화(內面化)이다. 내면화가 안 된 것은, 속이 빈 허물과 다르지 않다. '속 빈 강정'이라는 속담이 꼭 맞는 말이다.
  내면화는 동시를 시의 지위에 올리는 격(格)이다. 내면화는 시인의 의도이든 아니든, 겉으로 읽히는 것과 다른 뜻을 시가 그 물 밑에 지니게 하는 묘한 일을 한다. 내면화는 그래서 시의 매력이고 신비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내면화는 오직 느낌(feeling))으로만 감지되고 느낌으로만 전달된다. 작품 속에 내면화되어 있는 정서를 진단할 수 있는 능력은 이론이 아닌 느낌에서 터득된다.

  3
  시인은 생각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고민하는 사람이고 늘 고뇌에 차 있는 그런 존재다. 그런데 이런 고뇌 없이 '어린이가 되어' 맑은눈으로 순수한 것만 골라 '생각의 난쟁이'처럼 '곱고 예쁘고 귀여운' 것들을 글자로 짚어내, 틀에 맞게 써 내면 이 글이 곧 동시가 된다는 말인가?
  아니다. 
  아무리 동시라고 할지라도, 한 편의 동시 작품 안에 시가 들어가 제자리를 잡고 있지 아니하면, 글자 맞춤의 형식에 지나지 아니함을 알아야 한다. 곱고 예쁘고 귀여운 것. 이런 것을 줄맞춰 나타낸다 하여도, 이런 것을 어린이눈으로 그려낸다 하여도 결코 동시가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동시도 시이어야 한다는 필자의 주장은, 동시에도 사람의 사람다운 마음이 들어가 내재(內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사람다운 마음'은 기쁨과 슬픔, 아픔과 괴로움 따위 온갖 정서가 다 녹아들 수 있는 마음이다. 동시의 일차적 독자가 어린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슬픔이나 괴로움의 정서를 외면할 수 있는가. 이는 변명일 수밖에 없다. 여러 번 기회 있을 때마다 이야기하였지만, 동시는 더 이상 어린이만을 주독자층으로 삼지 아니한다. 어린이를 주독자층으로 설정한 범주 규정은, 우리 나라 1930년대 사회 문화 구조와 상관관계가 있다. 당시 민족의 희망을 어린이에게 걸 수밖에 없다는 암울한 민족적 현실에서, 동시의 범주를 좁혀 감상과 보급의 농도를 어린이에게 집중시키고자 한 의도가 그런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동시는 인간의 온 생애에 걸쳐 위안과 위로를 안겨 주는 문학 형식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것이 세계 보편적 현상이다.
  유아에서 노년까지 좋아하는 시가 동시다. 유아에서 노년까지 즐겨 듣는 시가 동시다. 유아에서 노년까지 인생을 담아낼 그릇의 효용이 인정되는 시가 동시인 것이다.
  그러니, 동시라고 하여 더 이상 그 격을 낮추지 말 일이다. 동시인 스스로 동시의 격을 낮추면 그것을 생산하는 동시인도 사회적인 대접을 받지 못한다.

  4
  햇살을 프리즘에 통과시켜 분해하면 일곱 가지 빨, 주, 노, 초, 파, 남, 보의 빛으로 나눠 볼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의 눈에는 안 보이는 적외선이 있고 자외선이 있다.
  만약 이를 볼 수 없기에 적외선이나 자외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물리학 공부를 더 해야 할 일이다. 마찬가지로 좋은 동시, 동시다운 동시 한 편에서는 읽을 땐 겉으로 드러나는 느낌과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나 속마음에 전달되어 오는 깊은 뜻을 감지하게 된다.
  그런데 이 속마음에 전달되는 깊은 뜻을 감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도 작품을 쓰는데 왜 어째서 좋은 동시로 쳐주지 않는가' 하고, 기회 있을 대마다 불만을 터뜨리고 불평을 일삼는다. 문제는 나열된 글자들이 형상화해 낸 이미지 밑에서(물 밑으로) 전달되고 있는 뜻의 기능을 감지할 만큼, 충분히 삶이나 인생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거나 고뇌에 빠지지 않았다는 생활 자세 또는 생활 태도에 있다고 할 것이다.
  생각 없이 씌어지는 시가 없고, 생각 없이 씌어지는 동시 또한 없다. 이 말은 고민 없이 씌어지는 동시가 있을 수 없고, 고뇌 없이 씌어지는 동시가 있을 수 없다는 말과 같다.(고민 없이, 고뇌 없이 어린이가 써 내는 것은 동시가 아닌 아동시다)
  그런데 어쩌다 갑자기 그냥 '어린이가 되어'서는 결코 진솔한 어린이의 흉내도 낼 수 없다. 어린 사람에게도 생각이 있고 고민이 있으며 그 나름의 고뇌가 있다고 말하니까, 작품에다 고민이니 고뇌니 하는 한자(漢字)를 그대로 써넣는 동시인(?)도 있었으니, 이 어찌 한심한 실정이라 아니 하겠는가.
  좀더 추적해 보면, 여러 잡지나 기관이 신인을 등단시키는데, 그 심사위원이나 추천위원 가운데 동시를 제대로 써내지 못하는 '위원'이 끼어 있어서, '그 밥에 그 나물' 같은 신인을 등단시키고 있다. 이것이 동시의 내면화를 모르는 일부 위원들의 심사나 추천의 결과이다.

  5
  한 채의 집을 아담하게 잘 지으면 투시도만 보았을 때와 다른 느낌을 받고 좋아하게 된다. 한 편의 동시다운 동시를 읽게 되면, 글자의 조합이 풍기는 것 이상의 느낌과, 그리고 잘 드러나지 않는 속 깊은 뜻을 감지하게 된다.
  내면화는 동시를 쓴 사람의 마음을 읽는 사람의 마음에다 고스란히 옮겨 줄 수 있는 글자 밑의 얽힘이다.
  반도체 칩이 서로 연결되어 정보를 전달하듯이, 사전에 나와 있는 글자들이 얽혀서 사전에 나와 있지 아니한 뜻을 전달하는 일몫을 내면화가 해 낸다.
  사람의 마음은 반도체 칩이 아니므로 일정한 형식으로 내몀화의 뜻을 전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사람마다 다른 체험 곧 내적인 체험에 따라 다른 뜻을 전달한다. 여기 감상의 묘미가 있고, 그래서 해석의 폭이 넓어진다.
  윤석중은 기찻길 옆에서도 잠을 잘 자는 아기에서, 편히 잠들 수 없는 사회를 기찻길로 해석될 수 있게 썼다. 박목월은 엄마소도 얼룩소에서 창씨개명을 부추기는 당시 사회 분위기에 저항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송아지를 썼다. 시인의 의도이든 아니든, 작품이 지니고 있는 내면화된 세계는, 작품의 작품성을 높이고 완성도를 결속시킨다.
  동시의 창작에서 내면을 중시하고 내면화의 세계를 천착하는 것은, 돌 한 덩이를 가지고 어떤 모양을 파내 다면체(多面體)적인 해석을 끌어내는 것과 다르지 않게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표본실에 진열되어 있는 박제된 동물에는 내면이 없다. 시가 들어 있지 아니한 동시는 동시라고 할 수가 없다. 내면은 분해된 기능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나, 내면은 전체로서 생리 기능을 한다. 마찬가지로 시에서 내면화는 전체로서 드러나지 아니하는 다른 뜻을 전달하는 일몫을 감당한다.

(2005년 겨울『한국동시문학』12호)

 

동시 창작론 ⑭

감동을 담아내기

유 경 환

  1
  산의 높이는 해발 3백 미터니 3천 미터니 한다. 바다가 기준이다. 지도에는 등온선이 그려진다. 시에서도 이처럼 수치로 급수를 매길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그 기준이 애매하기 때문이다.
  시를 읽을 때 '좋은 시'라는 느낌이 오게 된다. 이런 좋은 시에도 여러 층이 있게 마련이다. 한마디로 좋은 시는 읽는이에게 감동을 주는 시다. 분명한 것은, 읽는 뉘에게나 감동을 전달하는 작품은 좋은 시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요즘 몇몇 지면에 발표되는 동시라는 것을 보면, 좋은 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시와는 거리가 먼 '맹물' 같은 것들이 놀랍게도 참 많다. 어째서 이런 형편에 이르렀을까.
  시인의 내면에 내재하는 감동적 요소를 작품에 옮기는 표현 기법, 이것이 서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겠다. '이 정도면 내가 옮겨 놓고자 한 대로 독자가 감동을 받겠지…'라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좋은 작품 대신 맹물이 되는 것이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 시인은 자기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그것을 가능케 하는 표현 기법 찾기에 참으로 많은 시간을 두고 고민하게 된다. 그런데 '주된 독자가 어린이일 뿐'이라는 잘못된 지식(1930·40년대 우리나라에선 그랬다) 탓에 '아이들이 읽어서 알 수 있는 표현 기법'만 내세워, 아무런 고민 없이 쉽게 표현하려고만 하였다. 그래서 의도와 전달 사이에 괴리가 생겼다.

  2
  무엇보다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쉬운 시(동시)와 그리고 쉽게 씌어진 시(동시)는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쉬운 시와 그리고 쉽게 씌어진 시는 다르다. 달라도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다르다. 이 차이를 모르거나 지나치므로 두 가지를 혼동하게 된다.
  좋은 시는 쉬운 시일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시가 쉽게 씌어지기는 어렵다. 이런 개념 혼동으로 말미암아 쉽게 씌어진 것을 발표하는 사례가 흔하게 되었다.
  윤석중, 강소천, 박목월이 표현 기법이 쉬운 시를 보여 주지만, 결코 쉽게 씌어진 작품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오랜 동안에 걸쳐 깊은 사유 끝에 어렵게 씌어진 작품들이다. '기찻길 옆에서 잘도 자는 아이'나, '물 한 모금 먹고 하늘 한번 쳐다보는 닭'이나, '얼룩송아지'가 쉽게 창작된 것이라 본다면 이는 잘못된 감상이다.
  아이들 가슴은 유리병처럼 투명한가? 아니다. 그것은 인형이나 유리 모형에서나 그렇다. 아이들 가슴에도 가늘고 여린 심상이 차 있고, 때로는 그것이 얽히기도 한다. 이것이 그들의 고민이다.
  우리가 숨 쉬는데 필요한 공기는, 아이에게나 어른에게나 똑같은 신선한 공기이다. 이와 다르지 않게, 아이에게나 어른에게나 나이에 따른 고민이 다 있게 마련이다. 그렇건만, 아이에겐 고민이 없고 있다면 장난스러운 생각만 있으리라는 일방 통행적인 사고 방식, 이런 사고 방식의 소유자들 안목 탓에 동시가 혼란에 빠진다.
  '아이에겐 고민이 있을 수 없으므로, 그런 것을 담을 필요가 없다. 그런 것을 작품에 담을 필요가 없으니, 아이들 생각 그대로를 옮겨 쓰면 된다.' 이런 안목에서 아이들 입에 붙은 표현으로 어렵지 않게 옮겨지는데, 다시 말하면 쉽게 씌어지게 된다.
  '어린이가 읽는 시에 왜 그리고 어째서 표현 기교를 도입하라는 것이냐'가 쉽게 써내는 사람들의 항변이다. 고민 없이 자란 사람만이 (자신의 유년기나 청소년기를 준거하여) 이런 항변을 할 수 있다. 정서적으로 메마른 (유년기·청소년기를 거친) 정서 결핍의 성장 과정을 지닌 사람, 이들이 문단 등단 절차를 쉽게 마치면 아이동(童) 글자 '동'자에 집착하여 쉽게 써내는 버릇을 지니게 된다.
  이렇게 소급하여 따지면, 동시라는 어휘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아이동(童)자를 시 앞에다 접두어(接頭語)로 붙인 것이 원죄가 되는 것이다.

  3
  사람에겐 대체로 12∼15살이 빠른 성장기다. 이는 눈에 보이므로 이런 의학 상식을 수긍한다. 그런데 심성 발달 과정에서 정서적으로 가장 빠른 성숙 시기가 있다는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으므로) 수긍하려 하지 않는 편이다.
  정서 발달 기간에 충분한 효과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문인으로 양산(量産)되면, 그 원천적 정서 결핍 때문에 작품에 담아내야 할 내면 정서에 약하거나, 그것을 드러내도록 하는 표현 기법에 서툴 수밖에 없다.
  육체의 성장기에 필요 영양이 충분치 못하여 체격이 작게 굳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심성의 성숙기에 감성 훈련이 충분치 못했다면 자신의 정서 결핍을 자각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의 경우, 표현 기법에 서툴기 짝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제부터라도 시에 대한 공부를 다시 해야 마땅하다. 대장간의 대장장이도 불덩어리 무쇠 두드리는 연마를 어깨 팔뚝이 부풀도록 거쳐야 쟁이가 된다. 그런데 '아이들 생각'을 단순하게 글자로 바꿔 놓으면 동시가 되는 줄 알고, 붕어빵 찍어내듯 아이들 생각을 찍어내는 형편이니, 이런 것들이 어떻게 읽는이에게 감동을 주겠는가.
  시 공부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고 등단 절차를 마친 사람들 가운데, 교직자 출신이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한다. 매우 아이러니한 현상이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가.
  그들에겐 오랜 동안 아이들의 글짓기 지도를 해온 경험이 있는데, 이 지도 경험을 시 공부라고 착각한다. 아이들이 써내는 '아동시'와 그리고 시인이 창작하는 '동시'에는, 인생을 살아본 만큼의 차이가 있다. 아동시와 그리고 동시와의 차이를 식별 못하고, 글쓰기 지도의 '실제 경험'만으로 등단 절차를 마쳤기에, 표현 기법의 기교를 모르는 것이다. 기교는 기술의 문제이다. 모자라면 연마해야 한다.

  4
  시는 고민이 익히는 열매다. 동시도 시이므로 다르지 않다. 햇살 없이 익는 열매 없고 고민 않고 완성되는 작품 없다. '아이들이 읽는 것인데 왜 고민해?' 이런 사고 방식이 바로 맹물 같은 작품들 생산의 주범이다. 동시가 쉽게 씌어진다는 말은 자기 옹호이거나 변명이다.
  아동문학은 인간학(人間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기초 인간학이라고 이미 오래 전에 주장한 바 있다. 필자의 주장이다. '아이들이 읽는 글을 쓰는데 왜 고민을 해야만 하느냐? 이런 편견이 우리나라 아동문학의 위상을 높이지 못하고 지금의 수준에 붙잡아 매놓고 있는 첫째 원인이다.
  아동문학가라는 명함을 내밀고 인사를 나눠 보라. 상대가 어떤 표정을 지으며 돌아서는가. 이것이 우리가 받고 있는 사회 대접이 아닌가. 아동문학가의 의식에서 하루빨리 아이동(童)자를 지워야 옳다. 그래야 작품에 인간의 문제가 담길 수 있고, 아이동(童)자의 구속에서 벗어나야 작품성 높고 완성도 치밀한 작품을 창작할 수 있다. 초롱에 든 새는 날지 못하며, 의식에 구애된 사고는 장애를 못 벗는다.
  어린이가 읽어서 감동할 작품 수준이면 할아버지·할머니가 읽어도 감동한다. 역(逆)도 진(眞)이라는 말은 수학에서만 통하는 한마디가 아니다. 할아버지·할머니가 읽어서 감동할 작품이면 어린이가 읽어도 당연히 감동한다.
  어른이 읽어서 맹물로 치면, 어린이에게도 맹물이고, 어른이 읽어서 유치하면 어린이에게도 유치할 수밖에 없다. 누구나 다 아는 프랑스의 단편 '별'이나 '곡예사', 쌩키비치의 '등대지기', 황순원의 '소나기'는 어른이나 어린이에게나 똑같은 감동을 안겨 주는 작품의 예이다. 감동을 전달하는 정서 매체는 같아서 시, 동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5
  문학은 혼자 하는 작업이다. 시에 대한 공부도 혼자 하는 일이다. 좋은 동시 곧 감동을 주는 동시도 혼자 쓰는 것이다. 혼자 하되, 앞서 살다간 국내외의 문인들 작품을 읽으면서 '뒤따르지 말아야 할 점을 밝혀가며 읽는' 이런 독서가 핑요하다.
  시에 대한 공부를 하여도 인접 학문 분야에까지 폭넓게 읽어야 사고의 바탕이 넓어지고 보편적 가치에 눈을 뜨게 된다. 밑줄 쳐 놓았다가 자신을 위해서 해 둔 한마디처럼 인용하는, 주(註)도 달지 않고 슬쩍 옮겨 쓰는, 그런 독서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인격을 해치는 결과만 얻는다.
  만일 독해력(讀解力)의 문제에 걸려서 그것이 안 된다면, 차라리 수도승이나 수도사처럼 벽을 보고 앉아 묵상하는 것이 훨씬 나은 시 공부가 되리라. 왜냐하면 문학은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서 결국엔 인간학에 귀결되듯, 동시 공부 역시 기초 인간학의 탐구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장난감인 색색의 레고를 맞추듯이 써내는 동시는 말장난이므로 어린이에게 재미는 줄 수 있으되 그러나 감동은 주지 못한다. 어린이가 자라면서 오래 기억할 수 있는 감동, 이는 자라는 가슴에 심겨진 보석과 같다. 그래서 오래 간직될 수 있다.
  말장난이 어떤 가치를 지닌다는 것은 허황된 것일 뿐, 결코 가치 있는 꿈일 수 없다. 감동을 읽는이 가슴에 옮겨 주는 표현 기법은, 말장난처럼 뜯어맞추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심겨지는 씨앗처럼 자리하는 것이다.
  씨앗처럼 자리하는 것은, 생각이 담긴 사람의 마음이 옮겨지는 것이다. 이는 넓은 사고 깊은 사유의 어망(漁網)으로만 건져 올려지는, 비늘이 번쩍이는 싱싱한 물고기와 다름없는 메시지다. 그런데 떨어진 비늘 조각을 모아 붙여 펄펄 뛰는 물고기를 만들 수 있는가.
  감동을 주는 작품은, 인간의 문제나 어린 인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어린이에게서 노인에게까지 감동을 전한다. 그러하건만 '어린이가 읽는 글에 왜 고민이 필요해?' 라고 말하는 이가 아직도 많다.

(2006년 가을『오늘의 동시문학』제15호)

 


동시 창작론 ⑮

童詩의 形式

유 경 환

 

  1. 압축의 묘미

  아동문학 이론서의 '동시'편에 보면 동시의 형식이 맨 앞자리에 놓여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나는 의도적으로 이 글의 마지막 편으로 미루어 왔다. 왜냐하면, 동시 형식이라는 개념은 이론으로 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체험으로 수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작을 하지 않는 이론가들은, 동시의 형식을 맨 먼저 다루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창작을 하는 나는, 동시의 형식은 맨 뒤에 마무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긴다. 동시가 어떤 운문인가를 알고 나면, 그 형식은 부차적인 것이 되고 말 수밖에 없다.

  2. 의미의 압축

  줄글(산문)을 엿가락 자르듯 뚝 뚝 끊어서 서너 줄로 나눠 놓으면, 과연 동시가 될 수 있을까? '아니다'라고 누구나 대답할 것이다. 줄글을 뚝 뚝 잘라놓아도 동시는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줄글과 동시는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게 된다. 줄글과 동시, 이것은 산문과 운문이라는 형식에서만 다른 것이 결코 아니다.
  동시의 바른 이해를 돕기 위해 여기서 생각을 거꾸로 돌려보자.
  우리는 한 편의 동시를 가지고 원고지 20장이나 30장 정도의 긴 줄글을 만들 수 있다. 이 말은 무엇을 암시하는 말일까. 동시는 줄글을 줄여서 만들 수 있다는, 그런 말이다.
  기나긴 강물처럼 구비구비 긴 줄글을 단 몇 줄의 짧은 글로 줄여 놓은 것이 동시일 수 있다. 그러므로 동시는 압축의 묘미를 지닌다. 줄이고 또 줄여서 더 이상 줄일 수 없도록 의미를 구겨넣는, 그 결과 깊은 뜻을 숨겨 지니게 되는, 그런 압축의 기술을 요구한다.
  의미의 묘미를 얻으려 하는 압축에는, 단순한 길이의 압축만이 아니라 내용의 압축까지 들어간다. (이것을 흔히 양(量)의 압축과 질(質)의 압축이라고 말한다.) 줄이고 또 줄여서 더 이상 줄일 수 없도록 구겨넣은 의미를 놓고 우리는 함축된 의미라고 말한다.
  함축된 의미를 풍기려면, 한 가지 뜻만 지닌 낱말이 아니라, 여러 가지 뜻을 복합적으로 지닌 낱말을 골라 써야 한다. 여러 가지 뜻을 이중 삼중적으로 지닌 낱말은, 흔히 비유나 상징에서 선택되는 낱말들이다. 비유나 상징을 써서 뜻을 압축할 수 있으므로, 이것이 곧 질의 압축이 되는 것이다.
  '동시는 말하는 그림'이라고 이름난 시인이 일찍이 말한 적이 있다. (시인의 이름을 오래 전에 읽어서 잊엇기에 못 밝히는 것임) 동시에서는 일반시에 비해 비유나 상징을 덜 쓰는 편이거나, 쓴다 하여도 그 농도가 엷은 비유나 상징을 쓰는 편이므로 '말하는 그림'이라는 한마디는 어렵지 않게 받아들여진다.
  동시를 쓰고자 할 때, 사물의 모양이 비슷한 것들이나 또는 성질이 비슷한 것들을 비교해 가면서 간접적 비유를 통해 두 가지를 한 가지로 묘사하는 것이 곧 시 쓰기의 기술이다. 이 기술을 드러내지 않고자 토막 토막 끊어서 배열하거나 또는 장작을 포개 쌓듯이 짧게 포개는 것이다.

  3. 「말의 그릇」 빚기

  원래 낱말은 한 개의 사물을 대신하는 기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에 시어로 쓰일 경우엔 달라진다. 시어로 선택되어 시 속에 쓰여지면, 낱말은 기호 이상의 뜻을 스스로 품게 되고, 뿐만 아니라 다른 뜻까지 얹어 지니게 된다. 이런 신비스러운 일이 시를 쓰는 일에선 일어난다.
  시에 쓰이는 하나의 낱말은, 그 다음에 오는 낱말과의 만남을 통해 낱말이 본래 지니고 있던 뜻과는 다른 뜻을 새롭게 풍기게 된다. 이것이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나는 그 원리(原理)이다.
  누구나 다 쓰는 말을 가지고 시인은 좀 유별난 뜻이 담기는 말의 그릇을 빚어낸다. 이 한마디 말에서 시의 본질(本質)이 어느 정도 밝혀진다고 할 수 있다. 누구나 다 쓰는 말로 엮어지되, 누구나 쉽게 짐작하는 것과는 다른, 별난 의도를 담아내는 「말의 그릇」이 곧 시요 동시인 것이다.
  시인은 「말의 그릇」을 빚기 위해서 낱말을 가지고 말의 순서인 어순(語順)을 바꿔놓거나 뒤집어 놓거나, 또는 비유되는 낱말을 대입(代入)하는 그런 기교를 부려서 말의 그릇을 빚어내는 것이다. 여기서도 그냥 줄글이 아닌 토막난 글의 형식이 나타나게 된다.
  시인은 또 말의 그릇을 빚기 위해서 줄글에서와는 달리, 일반 문장의 서술법을 무시하기 일쑤이다. 일반 문장에서의 서술법대로 쓰지 아니하고, 주어와 동사의 자리를 바꾸는 도치법(倒置法) 따위의 여러 기교를 부려 형식의 묘미를 얻어내는가 하면, 아예 있어야 할 주어나 동사 따위를 아주 생략해버리는 기교를 다반사(茶飯事)로 즐겨 쓴다.
  그런데 동시도 시인 만큼, 시에서처럼 동시에서도 율(律)과 운(韻)이 매우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 이런 까닭에 길이를 압축하여 의미를 함축시키되, 율과 운이 어긋나지 않고 서로 아물려지도록 '말의 정서적 기능'을 살려내는 작업을 가볍게 해서는 안 된다.
  말로 빚는 그릇이라고 앞서 말하였다. 사발엔 무엇인가를 담을 수 있고 접시엔 무엇인가를 얹어 놓을 수만 있다. 접시엔 담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깊이가 없어 주르르 흘러내리기 때문이다. 국물은 흘러내려 건더기만 얹을 수 있는 접시와, 그리고 옴폭한 깊이가 있어 국물까지 담을 수 있는 사발, 이것은 동시의 형식에서도 좋은 비유일 수 있다.
  접시 모양의 동시에선 이야기만 얹을 수 있으나 시상(詩想)까지 고이게 하지 못한다. 요즘 엿가락처럼 재미있게 늘여가다 뚝 뚝 끊어내는 동시의 형식은, 접시 모양일까 사발 모양일까? 참신한 소재를 발견하여 그것을 이야기식으로 길게 전개한다지만, 시상이 결여되면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말은 본래부터 그것이 가리키는 사물의 뜻과, 그리고 함께 스스로 지니고 있는 음향적 리듬도 아울러 가지고 있다. 이 뒷것을 일컬어 말의 정서적 기능이라고 일컫는다.
  이런 말의 정서적 기능을 아주 잘 활용하여 시를 쓴 시인으로 김소월을 들 수 있다. 또 윤동주도 들 수 있으되, 정서적 기능에 가장 먼저 눈길을 둔 이는 역시 김소월이다.
  이런 까닭으로 위의 두 시인은 오래도록 독자들 입술에 오르내리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율과 운을 잘 살려가며 작품을 쓴 시인들이라 하겠다. 이렇듯, 동시의 형식에는 율과 운을 잘 살려내는 특별한 관심까지 요구된다.
  동시 쓰기는 또 말의 의미적 기능과 그리고 정서적 기능, 이 두 가지를 읽기 좋게 배열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런데 읽기 좋게, 보기 좋게 배열하는 작업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힘들고 괴로운 작업이다.

  4. 마음눈이 읽어내는 시심

  시인은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속뜻은 작품을 이루는 몇 줄의 글 속에다 감추어 놓고, 시어로 선택한 낱말들이 은근히 그 속뜻을 겉으로 드러내도록, 그렇게 시치미 떼고 유도하는 일을 저지르기 일쑤이다.
  이것은 따지고 보면 아주 고약한(?) 짓이지만, 시를 읽히도록 어떤 형식의 틀 안에 집어넣기 위한 전략에서는, 매우 묘한 술책으로 볼 수도 있다.
  나뭇잎들이 서로 좁건 넓건 거리를 두고 어울려야 비로소 한 그루의 나무로 보인다. 나무라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며 나무로 인식하는데, 나뭇잎들의 어울림은 대단히 중요한 일몫을 하는 셈이다. 이와 마찬가지다. 낱말들이 서로 상관(相關)된 거리를 나눠 갖고 만나야 비로소 한 편의 시가 틀지어진다. 여기에 거리를 두고 어울리는 상관된 거리가 충분히 갖춰진, 그런 결과로 시의 형식이 마무리되는 것이다.
  사물의 본질은 얼굴눈만으로는 볼 수 없다. 그러나 마음눈으로 살피면 어느 정도 본질 테두리를 알아 볼 수 있다. 동시도 마음눈으로 사물을 살필 때에 시심을 찾아낼 수 있으며, 마음눈으로 읽어야 그 시심을 나눌 수 있게 된다.
  '아주 좋은 시는 최대한의 의미를 지닌 언어라고 하겠다.' 이는 에즈라 파운드(1885~1972)라는 시인이 남긴 말이다. 좋은 동시 또한 최대한의 의미를 함축한 작품일 때에 무한한 암시력을 풍길 수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이 말을 놓고 재해석하자면, 좋은 동시는 극한적으로 압축되고 생략되어 더 줄일 수 없을 만큼 줄여졌으나, 그 대신 지니는 속뜻은 최대한으로 늘일 수 있는 그런 시 작품이다.
  모르는 사람 없을 만큼 알려진 영국 시인 엘리옷은 이런 말을 남겼다.
  '시에 대한 정의(定義)의 역사는 곧 오류의 역사이다.' 시를 놓고 여러 사람들이 내린 온갖 정의를 다 모으면 모을수록 잘못의 길이만 길게 늘어날 뿐이라는 말이다. '시란 …… 무엇이다.'라고 정의한 것을 모두 다 모아놓는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시의 본질을 완벽하게 드러내 주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시란 무엇이냐?' 라는 질문은 필요 없는 것이다. 시는 그냥 시일 뿐이다. 우리 나라 어느 스님의 말(법어)대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와 다를 것이 없다.
  아주 넓게 보면, 어떤 형식이든  시라고 써내는 것들은 모두 시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다 외우고 싶을 만큼 좋은 시나 좋은 동시일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요즘 한 방송사의 지구 탐험대가 찍어오는 필름을 보면, 아랫입술을 뚫어 작은 접시 모양의 물건을 끼워넣어야 미녀라 여기는, 그런 검은 색 피부의 여인들이 오늘날에도 살고 있다. 아름다움에 대한 그들의 인식을 구태여 우리가 바꿔 주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동시의 형식, 이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보고자 한다. 다만, 요즘 동시의 형식을 길게 늘이는 그들의 그 인식에 대해, 그들 스스로 신중하게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일깨월 줄 수 있을지 문제라 여긴다.
  아름다움 또는 미(美)에 대한 기준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것이므로 누가 상관할 일이 아님을 모르지 않는다. 그렇다 하여도 보편적인 기준에 맞춰보는 것은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5. 유치원 원아에 들려줄 동화처럼?

  하루살이가 내일을 어떻게 알겠느냐고 흔히 말해 왔다. 매미들이 다음해 여름을 어떻게 알겠느냐고도 말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의 생각은 하나의 가설(假說)일 뿐이다. 유충으로 있을 동안 '선택적 입력'이 되었을지도 알 수 없다. 사람의 판단과는 달리, 땅 속에 7년 있는 동안, 7년 전의 정보가 계속 보전되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의 머리는 이 정도가 아니도록 경이롭다. 그 놀라움의 두 가지만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다. 1백살 정도밖에 못 사는 사람이, 빛이 1년 동안 달리는 거리를 생각하여 '1광년'이라는 개념을 설정하였다. 그리고 사람은, 그 후손에게 3천억 광년 밖에 있는 은하계를 그려볼 수 있게 머리를 물려 주고 있다.
  그뿐이랴. 몸 안에 퍼져 있는 핏줄 속으로 달리는 마이크로 로봇을 만들고 렌즈를 달아 몸 속 어디에 고장이 났는지를 찾아내는 진단을 하고 있다. 우주의 넓이와 크기를 알아내는 머리와 그리고 핏줄 속의 로봇을 만드는 나노기술의 머리가 오늘날 사람의 두뇌이다. 그런데 우리에겐 이런 두뇌만이 꼭 있어야 할 것들인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또 있어야 할 두뇌도 있다. 그것은 어떤 두뇌인가?
  봄 여름 가을, 세 철을 알아낸 나뭇잎 그 맨 밑에 달리는 아침이슬에 찬란히 첫 햇살이 닿을 때의 순간적인 눈부심을, 동시로 표현하는 동시 쓰기의 능력 또한 위에 두 가지 어느 것 못지 않게 가치 있는 두뇌가 아닌가? 카메라 렌즈가 잡아내는 모습, 그 이상의 감동을 전해 주는 한 편의 동시를 창작하는데, 여기 무슨 형식이라는 것이 필요하겠는가.
  이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창작(創作, Creation)이다. 이미 어떤 형식으로든 존재하는 것을 되풀이하면 그것은 창작이 아니고 다만 오락(Re+creation)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예술의 장르에서도 다른 장르와 마찬가지이며, 문학 장르 안에서 동시 쓰기에서도 또한 같다. 동시 쓰기에서의 창작은, 소재의 발견이나 소재의 선택에서 뿐만 아니라 형식의 개발에서도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동시의 형식도 그 전과 같지 않고 달라질 필요가 있다.
  하지만, 줄글을 엿가락 뚝 뚝 잘라 적당한 길이로 장작 포개 쌓듯 배열하는, 요즘의 그 길어진 형식에 대해 좀더 진지하게 생각하여 보자. 산문시(散文詩)도 아니고, 산문시의 형식을 따라 (요즘 일반적으로 성인시가 길어졌듯이) 길게 늘여가며 율도 운도 무시한 채, (마치 유치원 원아들에게 들려주는 동화처럼) 적당히 끊어서 줄 바꿔 쓰는 요즘 동시의 형식은 ① 그래야만 할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으로서의 까닭을 그 스스로 지니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② (독자들에게) 설명할 정서 논리를 그렇게 쓰는 까닭이 지니고 있는 것일까 ③ 과연 독자들은 그런 작품에서 어느 정도 「감동」할 수 있을까? 이런 물음에 도움이 되는 글을 누군가에게서 받고 싶다. 
<끝>


출처  ㅡ 허동인 동시감상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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