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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체란 시모음
2017년 05월 20일 21시 16분  조회:4288  추천:0  작성자: 강려
파울체란 시모음
 
 
눈 하나, 열린 / 파울 첼란
 
 
오월의 빛깔, 서늘한, 시간
이제는 부를 수 없는 것, 뜨겁게
입안에서 들린다.
 
다시금, 그 누구의 목소리도 없고,
 
아파 오는 안구의 밑바닥.
눈꺼풀은
가로막지 않고, 속눈썹은
들어오는 것을 헤아리지 않는다.
 
눈물 반 방울,
한층 도수 높은 렌즈, 흔들리며,
너에게 모습들을 전해 준다.
 
*눈 하나: Ein Auge. 첼란의 시에서 빈번히 나오는 고통의 심상이다. 외눈, 감기지 못한 눈, 뜬 채로 굳어진 눈, 생명의 물기를 잃어버린 눈, 본 것이 준 고통이 각막에 지워지지 않는 상흔으로 남아 지층에 총총히 박혀 있는 눈 등.  이 시는 <언어창살>에 수록되어 있다. / 전영애 번역
 
 
꽃 / 파울 첼란
 
 
돌.
내가 따라갔던 공중의 돌.
돌처럼 멀어 버린 너의 눈.
 
우리는
손이었다,
어둠을 남김없이 퍼냈다, 찾았다
여름을 타고 올라온 단어.
꽃.
 
꽃 - 맹인의 단어.
너의 눈과 나의 눈이
물을
마련한다.
 
성장(成長).
마음의 벽이 한 꺼풀 한 꺼풀
떨어져 내린다.
 
이런 단어 하나 더, 그러면 종추(鐘錘)들이
트인 곳에서 흔들린다.
 
*꽃: 경직된 이미지로 가득한 시집 <언어창살>에 수록된 시다. 서정시의 대표적인 대상, 혹은 시 자체의 은유로서의 꽃의 이미지는 시의 역사만큼이나 많은 굴곡을 겪어 왔지만 이 시에서 그려지는 꽃은 시사(詩史)에서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경직된 의식에는 역사의 고통이 서려 있고("돌처럼 멀어 버린 너의 눈"). 그 가운데 인식된 사물은 활성화된 언어(꽃=말)로 전이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눈물로 키운 꽃, 어렵게 찾은 소중한 언어, 허물어지는 마음의 벽, 울려퍼지는 종소리에의 꿈 역시 이 시에 담겨 있다.
*종추들이 트인 곳에서 흔들린다: 얽매임 없이 울리는 여러 개의 종소리를 나타낸 표현이다. / 전영애 번역
 
파울 첼란(Paul Celan)
1920년 루마니아 북부 부코비냐의 체르노비츠에서 유대인 부모의 아들로 태어난다,(체르노비츠는 옛 합스부르크 왕가의 변방으로 독일어를 쓰는 지역이었다.) 그의 나이 21세 때,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체르노비츠는 유대인 거주 지역(게토)으로 확정된다. 독일군이 도시를 점령한 후 유대인들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고, 첼란의 가족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게 끌려가 강제 노역을 하던 그는 부모의 처참한 죽음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 또한 가스실 처형 직전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지만, 이후 끔찍한 기억에 고통스러워하며, 삶을 이어 간다. 종전 후 그는 루마니아의 수도 브쿠레슈티에서 번역 및 출간 일을 하다가 이후 오스트리아 빈으로 건너가 첫 시집 <유골 항아리에서 나온 모래>(1948)를 발표한다. 그리고 1948년 프랑스 파리에 정착하여 센강에 몸을 던져 1970년 자살하기까지 꾸준히 시작(詩作) 활동을 해, 모두 7권의 독일어 시집을 남겼다. 1958년 부레덴 시 문학상을, 1960년 베오르크 뷔히너 상을 수상한다.
 
전영애
서울대학교 독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한국괴테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서울대 독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고등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어두운 시대의 고통 파울 첼란의 시> <카프카, 나의 카프카> <괴테의 도시 바이마르에서 온 편지> <괴테와 발라데>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괴테 시 전집>, <데미안>, <변신-시골의사>, <말테의 수기> 등이 있다. 2011년  괴테 연구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상 중 최고의 영예로 상으로 꼽히는 괴테 금메달을 동양인 최초로 수상했다.
 
언어창살 / 파울 첼란
 
 
창살 사이의 안구(眼球)
 
섬모충 눈꺼풀이
위로 노 저어 가
시선 하나를 틔워 준다
 
유영하는 아이리스, 꿈 없이 우울하게,
심회색(心灰色) 하늘이 가깝구나.
 
갸름한 쇠 등잔 속, 비스듬히
천천히 타는 희미한 관솔 등화(登火).
빛 감각에서
너는 영혼을 알아본다.
 
(내가 너 같았으면. 네가 나 같았으면.
우리 한 무역풍 아래
서 있지 않았던가?
지금은 낯선 이들인 우리.)
 
타일들. 그 위에
바싹 붙어 있다. 두 개의
심회색 물줄기.
두 개의
입안 가득한 침묵.
 
*언어창살
원래 중세 수도원 면회실의 창살문을 가리키며 이것을 사이에 두고 수도 중인 사람과 외부 면회자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를 '언어창살'로 직역한 것은 그 창살문의 이미지가 여기서는 소통과 단절의 기능을 동시에 가지는 언어와 접목되었기 때문이다. 가까우면서도 ("타일들, 그 위에/바싹 붙어 있다. 두 개의/심회색 물줄기.") 낯설고 단절된("두 개의/ 입안 가득한 침묵.") 인간관계가 현미경적 이미지들로 포착되어 있다. 이 시는 <언어창살>에 수록되어 있다.
*아이리스
무지개의 여신. 눈의 홍채를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안구의 홍채와 안구의 홍채 속을 헤엄치는 아이리스를 동시에 보여 준다.
 
 
무덤근처 / 파울 첼란
 
 
남녘 만(灣)의 물은 아직 알고 있을까요,
어머니, 당신에게 상처를 남긴 파도를?
 
한가운데 물방아들이 있는 벌판은 알까요, 
얼마나 나직하게 당신의 가슴이 당신의 천사들을 견뎠는지?
 
어떤 은(銀)포플러도 어떤 수양버들도, 이제는,
당신의 근심을 거둬 가지 못하지요, 위안을 드리지 못하지요?
 
그런데 신은, 꽃봉오리 피어나는 지팡이를 짚고
언덕으로, 언덕 아래로, 가지 않나요?
 
그런데 견디시겠어요, 어머니, 아 언젠가, 집에서처럼,
이 나직한, 이 독일어의, 이 고통스러운 운(韻)을?
 
*독일어
첼란은 복합적인 이유로 여러 언어를 뛰어나게 구사하였다. 그러나 극한의 체험 이후 모든 사람을 잃고 홀로 살아남은 첼란은, 독일어로 시를 쓰기로 결심한다. 독일어는 그에게 오로지 고통만을 가져다준 나라의 언어. '살인자들의 언어'였지만, 동시에 모국어이자 무엇보다 비명에 간 어머니와 어린 시절 함게 읽었던 문학의 언어였던 것이다. 어머니의 사망시기나 장소는 불명이지만, 유대인들이 송치되었던 흑해변 드네프르 강 연안("남녘 만")으로 추정된다. 이 시는 첼란이 한정판으로 냈다가 회수한 첫 시집 <유골 항아리에서 나온 모래>에 수록되어 있다.
 
/번역및 해설 전영애 
 
포도주와 상실 곁에서, 그 두 잔이 다 기울었을 때 / 파울 첼란
 
나는 눈 속을 달렸어, 당신, 듣고 있지,
내가 신(神)을 타고 달렸어, 먼 곳으로-가까운 곳으로, 그가 노래했어,
그건
인간-장애물을
넘던 우리의 마지막 승부였어.
 
그들은 무릎을 꺾었어,
우리가 그들을 넘어가는 소리를 들으면, 그들은
썼어, 그들은
우리의 말 울음소리를
거짓말로 바꿔 적었어
그림 그려진 그들의 언어 하나로.
 
 
목각별 하나, 파란, / 파울 첼란
조그만 마름모꼴들을 모아 맞춘 것, 오늘,
우리 손들 중 가장 어린 손이.
 
그 말, 어둠으로부터
네가 소금을 떨어뜨리는 동안, 시선이
다시 햇무리를 찾는 동안,
 
-별 하나, 그걸,
그 별을 어둠 안에 넣어 다오.
 
(-내 어둠 안에, 내
 어둠 안에.)
 
 
 
---좔좔 샘물이 흐른다 / 파울 첼란
 
너희, 기도로-, 너희, 독신(瀆神)으로-, 너희
기도로 날 선
나의 침묵의 칼.
 
너희 나의 나와 더불어 불(不)
구(具)된 말들, 너희
나의 똑바른 말들.
 
그리고 너,
너, 너, 너
나의 날마다 진실하게, 더욱 진실하게
껍질 벗겨지는 장미의
훗날-
 
얼마나 많은, 오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 얼마나 많은
길인가.
목발인 너, 날개들, 우리-
 
우리 동요를 부르리, 그걸
네가 듣고 있어, 그 동요
인(人)들과 간(間)들이 있는, 인간들이 함께 있는, 그래, 그
뒤엉킨 덤불과
눈 한 쌍이
거기 함께
눈물-또-
눈물로 함께 있는 그 동요를.
 
 
*포도주와 상실 곁에서
이 시는 <그 누구도 아닌 장미>에 수록되어 있다.
*목각별 하나
이 시는 <언어 창살>에 수록되어 있다.
 
*불구
한 단어를 나눠 행을 바꿈으로써 '불구' 상태를 언어 형태로도 나타내고 있다.
뒤엉킨 덤불과 눈 한쌍
눈썹과 눈의 이미지를 드러낸다. 앞 행에서 인간의 고통을 토막 낸 불구의 언어로 나태내고("인(人)들과 간(間)들") 그것을 다시 온전하게 합침으로써 ("인간들") 그렇게 했듯, 이제 제자리에 모여 울 수 있게 된 눈("눈물-또-/눈물")의 이미지를 통해 동요에 등장할 만한 작은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다. 좔좔 흘러, 생명의 언어를 꿈꾸게 하는 샘물 앞에서.
이 시는 <그 누구도 아닌 장미>에 수록되어 있다. / 전영애
 
찬미가 / 파울 첼란
 
아무도 흙으로 진흙으로 우리를 다시 빚어 주지 않는다.
아무도 우리의 티끌에 혼을 불어넣어 주지 않는다.
아무도.
 
찬양하세, 그 누구도 아닌 이.
당신을 위하여
우리가 꽃피려 하노니
당신을
바라보며.
 
우리가 하나의 무(無)
였고, 무이며, 언제까지이고
무일지니, 꽃피며
무의-
그 누구도 아닌 이의 장미여라
 
그 암술대, 혼(魂)처럼 밝고
꽃실, 하늘처럼 황폐하고
그 화관(花冠) 붉어라
가시
너머, 오 너머로
우리가 노래 불렀던 그 자식(紫色)의 말로
 
*그 누구도 아닌 이
독신(瀆神)과 경건이 교차된 신(神)의 이미지이다.
*장미
사랑, 신과의 신비적 합일. 유대 민족 등 다양한 표상을 지닌다. 이 시는  <그 누구도 아닌 이의 장미>에 수록되었다. /전영애
 
 
만돌라 / 파울 첼란
 
 
만델 안에-만델 안에 서 있는 게 무얼까?
무(無)이지
만델 안에 무가 있지
거기 서 있고 또 서 있지.
 
무 안에-서 있는 게 누굴까? 왕(王)이지.
거기, 왕이, 왕이 서 있지
거기 서 있고 또 서 있지.
 
유대인의 곱슬머리, 너는 세지 않는구나.
 
그리고 너의 눈-네 눈은 어디를 보고 있나?
네 눈이 만델을 마주 보고 있지
네 눈, 무를 마주 보고 있지
왕을 보고 있지
그렇게 멈추어 있지. 언제까지고.
 
인간의 곱슬머리, 너는 세지 않는구나.
텅 빈 만델은 로얄 블루.
 
*만돌라
중세 교회의 그림이나 조각에서 성인(聖人)의 전신을 아몬드형으로 감싸도록 장식한 후광, 한편 이 시를 연시(戀詩)로 읽는 해석도 있다.
이 시는 <그 누구도 아닌 장미>에 수록되어 있다. / 전영애
 
 
운하수문 / 파울 첼란
 
 
이 모든 너의
슬픔 너머에, 없다
두 번째 하늘은.
 
-----------
 
그것이 천 마디 말이었던
입 하나를 스치며
잃어버렸다-
잃어버렸다 내가, 내게 남아 있었던
말 하나를,
누이를.
 
많은 신들을 믿다가
말 하나를 잃어버렸다
나를 찾던 말을.
카디시.
 
운하 수문으로
나는 통과시켜야만 했다.
그 말을, 다시 소금물로 되돌려-
저 바깥으로 그리고 그 너머로 건져 내기 위하여.
이스코르.
 
*카디시와 이스코르
카디시는 '성스러운'이란 뜻의 아랍어로 유대교 미사를 마무리하는 유족을 위한 '진혼의 기도'를 가리킨다. 이스코르는 히브리어로 '(신께서) 기억하시기를'이라는 뜻으로 장례 후, 혹은 추도석에서 모든 회중이 조용히 함께 낭독하는 기도문이다. 이 시가 수록된 시집 <그 누구도 아닌 장미>를 쓰던 무렵 첼란은 유대 문화에 대한 관심이 각별했으며, 관련된 글도 많이 읽었다. (신비주의적인 유대 경전 카발라, 유대 신학자 마르틴 부버의 저서, 유대 철학자 레비나스가 쓴 글 등) 그 자취가 이 시에도 남아 있다. /전영애
 
서 있기, 공중의
상흔의 그림자 속에 / 파울 첼란
 
 
그 누구도-그 무엇도-위해서가- 아닌-서 있기.
아무도 모르게
오직
당신울
위하여
 
그 안에 자리를 가진 모든 것과 함께
언어도
없이.
 
 
*서 있기, 공중의 상흔의 그림자 속에
역사의 폭력은 공기에까지 상흔을 남겼고, 시인의 설 자리는 그것이 드리운 그림자 속으로 줄어들어 있다. 절체절명의 고독의 역사. 언어에 대한 회의와 접목되어 하나의 결정(結晶)을 이룬다. 이 시는 <숨결돌림>에 수록되어 있다. /전영애
 
 
박해받은 일들과 뒤늦게, / 파울첼란
 
침묵으로 가릴 수 없
는 빛 발하는
동맹을 이루어.
 
금박 입힌, 아침의 깊이를 재는 측연*이
내게 와 박힌다 함께
맹세하고 함께
파고 함께
쓰는
발뒤꿈치에.
 
 
측연
끈에 매달아 수심을 재는 납추, 자주 총알에 비유되는 납덩이가 캄캄한 수심이 아니라 아침의 깊이를 재는 금박 추가 되어 발뒤꿈치에 와 박혔다고 함으로써 뒤꿈치에 날개 달린 장화를 신은 헤르메스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떨쳐지지 않는 역사의식과 시적 변용을 통한 상스이 어우러져 첼란 특유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시는 <숨결돌림>에 수록되어 있다. / 전영애
 
모래예술은 이제 그만, 모래책도, 명인도 그만 / 파울 첼란
 
 
아무것도 주사위 던져 얻어지지 않는다, 몇 명인가
벙어리는?
열일곱.
 
그대 물음 - 그대 대답
그대 노래,그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깊은눈속에서
ㅍㅡ ㄴ 눈 ㅗㄱ
ㅡ-ㅜ-ㅗ
 
 
 
*깊은 눈 속에서:
끝에 이르러서 '깊은 눈 속에서'라는 구절이 한 덩이로 뒤엉키고 이어 차츰 녹아내리듯 모음만 남는다. 언어에 대한 회의가 극단적으로 드러나며 실행된 작품이다. 이 시는 <숨결돌림>에 수록되어 있다. / 전영애
 
 
 
언젠가, / 파울 첼란
 
그의 기척을 들은 적이 있다,
그가 세계를 씻고 있었다,
보이지 않게, 밤새도록,
정말로.
 
하나와 무한(無限),
파괴되어,
'나'되어.
 
빛이 있었다, 구원.
 
 
*'나'되어:
'나(ich)'에 동사화 어미 '되다(-en)'을 붙여 만든 조어 'ichen'의 과거형이다. 이 단어는 앞 행의 '파괴되어 (vernichtet)' 다음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음향상 그 여운처럼 들리고, 또 '빛(Licht)'이라는 단어가 그 뒤로 이어지기 때문에 '파괴'와 '빛' 사이에서 일어나는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것으로 짐작된다. 비슷한 단어를 찾자면 중세 독일어 'iht'('무엇'을 뜻하는 고어)가 있다.(이 경우 번역은 "하나의 무한/파괴되었다/무엇인가가" 정도가 될 것이다.) 유희처럼 들리기도 하는 언어의 피안 침묵과 절망의 언어 너머로 절절히 간구된 '구원'이 비쳐 나온다, 이 시는 <숨결돌림>에 수록되어 있다. /전영애
 
죽음의 푸가 / 파울 첼란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점심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그걸 쓰고는 집 밖으로 나오고 별들이 번득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사냥개들을 불러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유대인들을 불러낸다 땅에 무덤 하나를
파게 한다
 그가 우리들에게 명령한다 이제 무도곡을 연주하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아침에 또 점심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공
 중에선 비좁지 않게 눕는다
 
 그가 외친다 더욱 깊이 땅나라로 파 들어가라 너희들 너희 다른
사람들은 노래하고 연주하라
 그가 허리춤의 권총을 잡는다 그가 총을 휘두른다 그의 눈은 파
랗다
 더 깊이 삽을 박아라 너희들 너희 다른 사람들은 계속 무도곡을
연주하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낮에 또 아침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가 외친다 더 달콤하게 죽음을 연주하라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가 외친다 더 어둡게 바이올린을 켜라 그러면 너희는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오른다
 그러면 너희는 구름 속에 무덤을 가진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점심에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저녁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의 눈은 파랗다
 그는 너를 맞힌다 납 총알로 그는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우리를 향해 자신의 사냥개들을 몰아 댄다 그는 우리에게
공중의 무덤 하나를 선사한다
 그는 뱀들을 가지고 논다 또 꿈꾼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죽음의 푸가: 첫 시집 <양귀비와 기억>에 수록된 시 중 가장 유명한 시이다. / 전영애
 
유골항아리에서 나온 모래 외 / 파울 첼란
 
 
망각의 집은 곰팡이 슨 초록빛,
나부끼는 문마다 너의 머리 없는 악사가 푸르러진다.
그는 너를 위해 이끼와 쓰라린 치모(恥毛)로 만든 북을 울려주고
곪은 발가락으로 모래에다 너의 눈썹을 그린다.
그것이 달려 있었던 것보다 더 길게* 그린다, 또 네 입술의 붉음도.
너는 여기서 유골 항아리를 채우고 네 심장을 먹는다.
 
*길게: '오래'라고도 번역이 가능하다.
 
 
절반의 밤 / 파울 첼란
 
 
 절반의 밤, 번득이는 눈에 꿈의 단검들로 꽂힌.
 고통으로 울부짖지 마라, 깃발처럼 구름이 펄럭인다.
 비단 양탄자, 그처럼 절반의 밤은 우리 사이에 펼쳐져, 어둠에서
어둠으로 춤추었다.
 그들은 살아 있는 나무로 검은 피리를 깎아 우리에게 주었고,
이제 춤추는 여인이 온다.
 그녀는 파도 거품으로 자아낸 손가락을 우리 눈에 담근다.
 여기서 누가 아직 울려는가?
 아무도 그리하여 절반의 밤은 희열에 차 소용돌이치고, 뜨거운
팀파니는 울린다.
 그녀는 우리에게 고리들을 던져 주고 우리는 그것을 단검으로
받는다.
 그녀는 우리를 이렇게 맺어 주는가? 사금파리인 듯 소리 울리니,
이제 다시 알겠다.
 네가 접시꽃빛 죽음을
 맞지 않았음을.
 
 
마리아네 / 파울 첼란
 
 라일락도 아닌 꽃은 너의 머리, 거울인 너의 얼굴
 눈에서 눈으로 구름이 흐른다. 소돔이 바벨로 몰려가듯
 나뭇잎인 양 구름은 탑을 쥐어뜯고 유황불 타는 덤불숲 둘레를
광란한다.
 
 그리고 번개도 번쩍인다 너의 입가에서-바이올린의 잔해를
지닌 저 계곡,
 눈(雪)빛 이빨로 누군가 바이올린 활을 그으니, 오 더욱 아름답
게 갈대는 울렸는데!
 
 사랑아, 너 또한 갈대이고 우리 모두 비(雨)여라.
 너의 육신은 비할 데 없는 포도주, 우리 열(十)이서 잔을 든다.
 곡식 속의 나룻배 너의 가슴을, 우리가 그것을 밤(夜)으로 저
어 가느니,
 작은 항아리 하나를 채운 푸르름으로, 그렇게 너는 가벼이 우리
를 훌쩍 뛰어넘어 가고, 우리는 잠자고 있다----
 
 천막 앞에 백 명의 병사가 집합하고, 우리는 마시며 마시며 너
를 무덤으로 나른다.
 이제 세상의 석판 위에서 꿈의 단단한 은화*가 쨍그렁 울린다.
 
*은화: 망자에게 동전을(입에 물려) 주는 것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의 풍습이다. 진혼의 모티브가 드러난다.
 
프랑스의 추억 / 파울 첼란
 
 
 그대 나와 생각하자. 파리의 하늘, 때 잊은 커다란 가을나리
꽃---
 
 우리는 꽃 파는 아가씨에게서 하트를 샀지.
 그건 파랬고 물속에서 꽃피었어.
 우리의 방 안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우리 이웃 사람이 왔다, 므시외 르송주, 깡마른 난쟁이.
 우리는 카드놀이를 했고, 나는 눈동자를 잃었어.
 그대는 내게 머리카락을 빌려 주었는데, 그것마저 나는 잃었고
그는 우리를 내리쳤지.
 그가 문밖으로 나가자, 비가 그를 따라갔지.
 우리는 죽었는데 숨은 쉬었지.
 
*가을나리 꽃: 상사화. 봄에 돋은 잎이 죽고 나서 가을에 불쑥 줄기만 솟아나와 피는 (연)보라빛 꽃으로 강심제로 쓰이는 약용식물이기도 하다.
*므시외 르송주: Monsieur L' Songe. 프랑스어로 '꿈'을 의인화한 이름.
 
 
먼 곳의 찬양 / 파울 첼란
 
네 눈의 샘 안에
살고 있다, 표류의 바다의 어부들의 그물이.
네 눈의 샘 안에서
바다는 약속을 지킨다.
 
여기에 나 던지네,
사람들 가운데 머물렀던 가슴 하나
옷들 그리고 맹세의 광채를 벗어던지네.
 
상복을 입어 나는 더욱 검고, 더욱 벌거벗었다.
배반하며 나는 비로소 충실하다.
나는 나이면서 너다.
 
네 눈의 샘 안에서
나 떠들며 약탈을 꿈꾼다.
 
그물이 그물을 포획하였다.
우리가 껴안은 채 헤어지고 있는 것.
 
네 눈의 샘 안에서는
교수형을 당한 자가 밧줄을 교살한다.
 
 
온 생애 / 파울 첼란
 
 선잠 든 태양들은 아침 한 시간 전 네 머리카락처럼 푸르다.
 태양들도 새의 무덤을 덮은 풀처럼 빠르게 자라고,
 태양들도 유혹한다. 기쁨의 선상에서 우리가 꿈으로 벌였던 유
희를.
 시간의 백악암에서는 태양들도 비수에 찔린다.
 
 깊은 잠의 태양들은 더욱 푸르다. 네 고수머리도 오직 한 번 그
리 푸르렀지.
 돈으로 살 수 있는 네 누이의 품 안에서 나는 밤바람으로 머물
렀다.
 네 머리카락은 우리 위에 드리운 나무에 걸려 있는데, 거기 너
는 없었다.
 우리는 세계였고, 너는 문 앞의 덤불이었다.
 
 죽음의 태양들은 우리 아이의 머리카락처럼 희다.
 네가 모래 언덕에 천막을 쳤을 때 밀물에 밀려 나왔던 아이.
 행복의 칼이 우리 위에서 움찔거린다. 꺼진 눈으로.
 
/전영애 번역
 
애급에서 / 파울 첼란
 
 
이방 여인의 눈에다 이렇게 말하라. 물이 있으라!
이방 여인의 눈 속에 네가 아는 물속의 여인들을 찾으라.
룻! 노에미! 미르얌! 그녀들을 물 밖으로 불러내라.
네가 이방 여인 곁에 누울 때 그녀들을 치장해 주라.
이방 여인의 구름머리카락으로 그녀들을 치장해 주라.
룻, 미르얌, 노에미에게 이렇게 말하라.
보라, 내가 이방 여인과 동침하노라!
네 곁의 이방 여인을 가장 아름답게 치장해 주라.
룻, 미르암, 노에미로 인한 고통으로 그녀를 치장해 주라.
이방 여인에게 말하라.
보라, 내가 그녀들과 동침했노라고!
 
* 동침: 마지막 문장에 이르기까지 아홉 문장이 모두 마치 십계명처럼 나란히 '-하라'로 시작하고 있다. 룻, 미르암, 노에미는
          유대 여인의 전형적인 이름들이다. '동침'이라는 가장 밀착된 인관관계에 동족의 기억이 스며들어 있다.
*이방 여인: 첼란은 1948년 '정월 스무날' 빈에서 잉에보르크 바하만을 만났다. 독일의 대표적인 현대 시인인 두 사람은  오랫동안
                가까우면서도 먼 관계를 유지했는데, 최근 연구와 시간집 출간을 통해 두 사람은 서로의 작품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음이
                밝혀졌다. 첼란의 시 <코로나>, <애급에서>와 바하만의 소설 <말리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 전영애
 
코로나 / 파울 첼란
 
가을이 내 손에서 이파리를 받아먹는다. 가을과 나는 친구.
우리는 시간을 호두에서 까 내어 걸음마를 가르친다.
시간은 껍질 속으로 되돌아가기에.
 
거울 속은 일요일이고,
꿈속에서는 잠을 자고,
입은 진실을 이야기한다.
 
내 눈은 연인의 음부로 내려간다.
우리는 서로 바라본다.
우리는 서로 어두운 것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서로 양귀비와 기억처럼 사랑한다.
우리는 잠을 잔다, 조개에 담긴 포도주처럼,
달의 핏빛 빛줄기에 잠긴 바다처럼.
 
우리는 서로 껴안은 채 창가에 서 있고, 사람들은 길에서 우리를 본다.
알아야 할 때가 되었다.
때가 되었다. 돌이 꽃피어 줄 때,
그침 없는 불안으로 가슴이 뛸 때가.
때가 되었다, 때가 될 때가.
 
때가 되었다.
 
*코로나: 태앙이 완전히 가려졌을 때 그 주위로 먼저 나오는 빛의 환(環). 한순간 태양 빛이 꺼지듯
          시간의 어두운 원점에 선 연인들의 모습을 그린 연가이다.
 
무적(霧笛) 속으로 / 파울 체란
 
 
감춰진 거울 속의 입,
자부심의 기둥 앞에 꿇은 무릎,
창살을 거머쥔 손이여.
 
너희에게 어둠이 다다르거든,
내 이름을 불러라,
나를 내 이름 앞으로 끌어가라.
 
 
화인(火印) / 파울 첼란
 
 
 더는 잠들지 못했다. 우울의 시계 장치 속에 누워 있었기에, 우리,
 시계바늘은 채찍처럼 휘었고,
 도로 다시 튕겨져 피 맺히도록 시간을 후려쳤고,
 너는 짙어 가는 어스름을 이야기했고,
 열 두번 나는 네말의 밤에 대고 너를 불렀고,
 하여 밤이 열렸고, 그대로 열린 채로 있었고,
 나는 눈 하나를 그 품 안에 넣고 또 하나는 네 머리카락에 넣어
땋아 주었고,
 두 눈을 도화선으로, 열린 정맥으로 읽었고-
 갓 번뜩인 번개가 헤엄쳐 다가왔고.
 
 
누군가 / 파울 첼란
 
누군가 심장을 가슴에서 뜯어내 밤으로 건네는 이, 장미를 향
해 손을 뻗는다.
 그 잎과 가시는 그의 것이니,
 장미는 그의 접시에 빛을 놓고,
 그의 유리잔을 숨결로 채우니,
 그에게서는 사랑의 그림자가 술렁인다.
 
 누군가 심장을 가슴에서 뜯어내 밤으로 건네며 울리는 이,
 그는 헛맞추지 않고,
 돌을 돌로 치며,
 그의 시계에서는 피가 울리고,
 그의 시계에서는 그의 시각이 시간을 친다.
 그이, 보다 아름다운 공을 가지고 놀아도 좋다.
 너에 대해, 나에 대해 이야기해도 좋다.
 
크리스탈 / 파울 첼란
 
찾지 마라, 내 입술에서 네 입을,
문 앞에서 낯선 이를,
눈에 눈물을.
 
일곱 밤 높게 붉음은 붉음에게로 가고
일곱 가습 더 깊게 손은 문을 두드리고
일곱 장미 더 늦게 우물은 좔좔 흐르고.
 
 
수의 / 파울 첼란
 
내가 가벼움으로 짠 것을
나는 돌의 영광을 위해 입는다.
내가 어둠 속에서 외침들을
깨우면, 수의는 외침들을 실어 온다.
 
자주, 내가 더듬거려야 할 때,
수의는 잊었던 주름을 잡고,
지금의 나인 이가 용서한다.
지나날 나였던 이를.
 
그러나 돌 언덕의 신은
자신의 둔탁하디둔탁한 북을 건드리고
옷에 주름이 잡히듯
그 어두운 이의 이마에 주름살이 생긴다
 
그녀가 머리를 빗는다 죽은 이의 머리를 빗겨 주듯.
그녀는 푸른 사금파리를 셔츠 밑에 지니고 있다.
 
그녀는 사금파리 세계를 끈에 꿰어 걸고 있다.
그녀는 말을 알면서도, 웃기만 한다.
 
그녀는 자신의 미소를 포도주 잔에 섞는다.
너는 그걸 마셔야 한다, 세상에 머물자면.
 
너는, 그녀가 생각에 잠겨 생(生)을 굽어볼 때,
사금파리가 그녀에게 보여 주는 상(像).
 
 
풍경 / 파울 첼란
 
너의 키 큰 포플러 - 이 땅의 사람들!
너의 행복의 검은 연못들 - 너희가 그들을 비추어 죽게 한다!
 
내가 너를 본다, 누이야, 네가 이 찬란한 빛 속에 서 있음을.
 
 
정적이여! / 파울 첼란
 
정적이여! 내가 너의 가슴에다 가시를 박고 있구나.
장미가, 장미가
거울 속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서 있기에, 피를 흘리고 있기에!
장미는 전에도 피 흘렸다, 우리가 '예'와 '아니요'를 섞었을 때
우리가 그것을 들이켰을 때,
유리잔이 식탁에서 튀어 올라 쨍그랑 울렸기에,
그 소리는 예고했다, 우리보다 더 오래 어두어졌던 밤을.
 
우리 탐욕스러운 입으로 마셨다.
소태 맛이었으나,
그래도 포도주처럼 거품 일었다 -
나는 너의 두 눈이 뿜는 빛을 따라갔고
우리 혀는 달콤함을 웅얼거렸다---
(그렇게 혀는 웅얼거리고 있다. 그렇게 혀는 여전히 웅얼거리고 있다.)
 
정적이여! 가시가 네 가슴을 더 깊이 파고든다.
가시는 장미와 한 동아리다.
 
 
해아려라 만델을,
 헤아려라, 쓴 것, 너를 눈뜨고 있게 했던 것을,
 거기에 나까지 함께 헤아려 다오.
 
 네가 눈을 떴으나 아무도 너를 눈여겨보지 않았을 때, 나는 너
의 눈을 찾았다.
 나는 저 남모르는 실오리를 자았다.
 네가 생각했던 이슬이,
 그걸 타고 굴러 내려
 항아리에 담겼다, 그 누구의 가슴에도 가 닿지 못한 한마디 말
씀이 지키는 항아리.
 
 거기서야 너는 너의 것인 이름 안으로 온전히 들어섰다.
 확실한 걸음으로 너에게로 갔다.
 네 침묵의 종루에서 종추들이 자유롭게 흔들렸을 때
 귀담아들은 말이 너에게로 울려 나왔고,
 죽은 것이 또한 네 어깨에 팔을 둘러,
 너까지 셋이서 너희들은 저녁을 지나갔다.
 
 나를 쓰게 만들어 다오
 만델에 나까지 함께 헤아려 다오.
 
*만델: 편도(아몬드)를 말한다. '만델형 눈'은 갸름한 눈을 가리키며 '구부러진 코'와 더불어 전형적인 유대인의 외모를 묘사할 때 사용한다.
*쓴: '(맛이) 쓰다'는 뜻 외에 '쓰라린' 또는 '혹독한'이라는 뜻으로 쓰였으며 마지막 연 첫 번째 햄의 "쓰게"도 마찬가지이다. 만델 열매의 '쌉살한 떫은' 맛에 '혹독한' 체험이 겹친다.
 
나는 들었다 / 파울 첼란
 
나는 들었다.
물속에는 돌 하나 또 동그라미 하나 있다는 얘기를
물 위에는 말 하나
동그라미를 돌 주위에 놓는 말 하나 떠 있다는 얘기를.
 
나는 보았다, 내 포플러가 물로 내려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 팔이 깊은 곳으로 뻗어 내려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 뿌리가 하늘을 향해 어둠을 간구하는 것을.
 
나는 서둘러 뒤쫓지 않았다,
나는 그저 바닥에서 빵 부스러기를 주워 들었다,
네 눈의 모양과 기품을 니진 빵 부스러기를
나는 네 목에서 말씀의 목걸이를 벗겨
그 빵 부스러기가 놓인 식탁 가장자리에 둘렀다.
 
그러자 내 포플러가 이제 보이지 않았다.
 
 
붉은 노을 속에 / 파울 첼란
 
붉은 노을 속에 이름들이 잠자고 있다.
하나를
너의 밤이 깨워
데리고 간다, 하얀 막대들을 따라
마음의 남쪽 벽을 더듬으며
소나무 아래로.
사람 키만한 소나무 한 그루
성큼성큼 도공(陶工)들의 도시로 걸어간다,
바다시간의
친구 되어 비가 돌아오는 곳으로
푸름 속에서
그것은 어둠을 약속하는 나무말을 한다,
그리고 네 사랑의 이름을
그 음절에 덧붙여 헤아린다.
 
 
도끼로 유희하며 / 파울 첼란
 
밤의 일곱 시간, 깨어 있음의 일곱 해
도끼들을 가지고 유희하며
너는 누워 있다. 일어선 시체들의 그늘에
-오, 나무들 네가 베지 않은 나무들!-
머리맡에는 침묵으로 은폐된 것의 호화로움
말(言)의 구걸은 발치에 두고
너는 누워 유희한다, 도끼로-
그러다 마침내 번득인다, 도끼처럼.
 
 
삼단 같은 머리 / 파울 첼란
 
내가 땋아 주지 않은, 나부끼게 내버려 둔 삼단 같은 머리
오고 가며 희어졌구나
내가 미끄러져 스쳐 간 이마에서 흘러내려
이마의 해(年)에-
 
이것은, 만년설을 위하여
일어선 말(言) 하나
내가 눈(眼)들에 여름처럼 에워싸여
네가 내 위에 펼쳐 놓은 눈썹을 잊었을 때
눈(雪) 쪽으로 눈길 주었던 말 하나
내 입술이 언어로 피 흘렸을 때
나늘 피했던 말 하나.
 
이것은 말들 곁에서 나란히 걸었던 말 하나
침묵의 모습을 한 말 하나,
늘 푸른 담쟁이와 근심으로 에워싸인.
 
여기서 먼 곳들이 내려가면
그러면 네가,
솜털 같은 머리카락별 하나여,
너 여기서 눈 되어 내리는구나
흙의 입에 닿는구나.
 
어렴풋한 모습 / 파울 첼란
 
네 눈을 그 방 안에서 한 자루 양초이게 하라
네 눈길을 심지이게 하라
나를 충분히 눈멀게 하라
그 심지에 불붙일 만큼.
 
아니다.
다르게 하라.
 
네 집 앞으로 나서라
네 얼룩얼룩한 꿈에다 마구를 매라
네 경적이 말하게 하라
눈(雪)에게, 네가 내 영혼의
용마루에서 불어 날린 눈에게.
 
 
어둠에서 어둠으로 / 파울 첼란
 
네가 눈을 뜬다 - 내 어둠이 살아 있음이 보인다
내 어둠의 바닥을 본다
거기서도 그건 내 것이고 살아 있다.
 
그런 것이 건너갈까? 그러면서 깨어날까?
누구의 빛이 내 뒤를 바짝 따라오는가.
사공이 있으라고?
 
 
아시시 / 파울 첼란
 
움브리아의 밤,
움브리아의 밤, 종과 올리브 잎의 은빛이 있는.
움브리아의 밤, 당신이 지고 오는 돌이 있는.
움즈리아의 밤, 돌이 있는.
 
말없이, 삶 속으로 솟는 것, 말없이.
항아리를 바꿔 채워라-
 
흙 항아리,
흙 항아리, 도공의 손과 한데 엉겨 붙어 버린.
흙 항아리, 그림자의 손이 영원히 봉인한.
흙 항아리, 그림자의 봉인이 찍힌.
 
돌, 그대 바라보는 곳에, 돌.
그 나귀를 들어가게 하라.
 
터덜터덜 가는 짐승.
터덜터덜 가는 짐승, 가장 헐벗은 맨손이 뿌리는 눈 속을.
터덜터덜 가는 짐승, 철커덕 잠겨 버리는 말(言) 앞에서.
터덜터덜 가는 짐승, 손에서 잠을 받아먹은.
 
광휘, 위로하지 않으려는, 광휘.
죽은 이들--- 그이들이 아직도 구걸하고 있나이다, 프란
체스코여.
 
*이시시: 이탈리아 중부 움부리아 주(州)의 옛 도읍. 성 프란체스코가 태어난 곳으로 유명한 순례지다.
*도공: Toper. '창조주(Schopfer)'를 연상시킨다.
*나귀: 성경 속에서 신이 사랑하는 짐승으로 등장한다.
 
 
프랑수아를 위한 비명(碑銘)
 
 
세상의 두 문(門)이
열린 채 있다.
네가 어스름 속에서
열어 두고 가 버린 문.
그 문이 덜컥덜컥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우린 어렴풋한 것을 나른다.
초록빛을 네 영원 속으로 나른다.
 
1953년 10월
 
*프랑수아를 위한 비명: 프랑수아는 첼란의 첫아들 이름이다. 첼란이 날짜를 기입한 시는 이 시가 유일하다.
 
 
열쇠를 번갈아 가며 / 파울 첼란
 
 
열쇠를 번갈아 가며
너는 집을 연다. 그 안에는
침묵으로 은폐된 것의 눈(雪)이 휘날리고 있다.
네게서, 눈(眼)에서 입에서 혹은 귀에서
솟는 피에 따라
네 열쇠가 바뀐다.
 
네 열쇠가 바뀌면 말이 바뀐다.
눈송이와 더불어 휘날려도 좋은 말.
너를 앞으로 몰아치는 바람에 따라
그 말 주위에는 눈이 뭉친다.
 
/전영애 번역
 
정물(靜物)/ 파울 첼란
 
촛불 곁에 촛불, 흐릿한 빛 곁에 흐릿한 빛, 환한 빛 곁에 환한 빛.
 
그리고 그 아래, 여기 이것. 눈 하나
쌍이 못된 채로, 감겨서,
저녁이지는 않은 채 찾아드는
늦음에다 속눈썹을 달아 주며.
 
그앞에, 네가 여기서는 그것의 손님인 낯선 것
빛 없는 엉겅퀴
그로써 어둠은 제것들을 의심하고
먼 곳으로부터
잊히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또 이것, 귀 먼 것 가운데 실종되어,

돌이 되어, 돌을 꽉 그러 물고,
바다로부터, 그 얼음을
여러 해 굴려 오고 있는 바다로부터 부름 받아.
 
 
그리고 아름다운 / 파울 첼란
 
그리고 아름다운 것, 네가 쥐어뜯는 그리고 머리카락,
네가 쥐어뜯는.
어느 빗이
그것을 다시 단정하게 벗어줄까, 그 아름다운 머리를?
누구의 손 안의
어느 빗이?
 
그리고 돌들, 네가 쌓은,
네가 쌓는.
그것들은 어디로 그림자 그리우나.
또 얼마나 멀리?
 
그리고 그 위를 스치며 가는 바람,
그리고 바람,
이 그림자 하나를 그러쥐어
바람은 네게 나누어 줄까?
 
 
언덕 / 파울 첼란
 
내 곁에 너는 살고 있다, 나같이
움푹 꺼진 어둠의 뺨 속
돌 하나로.
 
오, 이 돌 언덕, 사랑아,
우리가 쉼없이 구르는 곳,
돌인 우리가,
얕은 물줄기에서 물줄기로,
한 번 구를 때마다 더 둥글게.
더 비슷하게, 더 낯설게.
 
오 이 취한 눈,
여기서 우리처럼 길 잃고 두리번거리며
우리를 이따금씩
놀라며 하나로 보는.
 
 
벌판들 / 파울 첼란
 
늘 그 한그루, 그 포플러
생각의 자락에.
늘 손가락, 솟아 있는 손가락
밭둑에.
 
그보다 이미 훨씬 전에
이랑이 저녁 속에서 망설이고.
그러나 구름.
그건 흐른다.
 
늘 그 눈.
늘 그 눈, 그 눈꺼풀
그 감긴 눈꺼풀들이 뿜는 빛 속에서
네가 활짝 뜨는.
늘 이 눈.
 
늘 이 눈, 그 자아내는 시선이
그 한 그루, 포플러에 감긴다.
 
쪽으로 젖혀진 / 파울 첼란
-한나 렌츠, 헤르만 렌츠를 위하여
 
밤 쪽으로 젖혀진
꽃들의 입술,
엇갈리고 뒤엉킨
전나무 줄기들,
잿빛 띤 이끼들, 뒤흔들린 돌,
깨어나 무한히 날아간다
만년설 너머 검은 새들.
 
여기는 우리가 쉬는
곳. 서둘러 와 닿은 지역.
 
그것들은 시간을 일컫지 않을 것이다
눈송이를 헤아리지 않을 것이다
물을 막힌 곳까지 따라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 갈라져 서 있다
하나하나가 자기 어둠 곁에
하나하나가 자기 죽음 곁에
무뚝뚝하게, 맨머리로, 서리에 덮혀
가깝고도 먼 것에 의해.
 
그들은, 그들의 부채(負債)를 져 낸다, 근원에 혼을 불어넣은 부채를
그들은 그걸 져 낸다. 말 하나에까지로
여름처럼, 부당하게 존속하는 말.
 
말 하나 - 알지
시체 하나.
 
우리 그걸 씻어 주자
우리 그걸 빗질해 주자.
우리 그 눈이
하늘 쪽으로 향하게 하자.
 
 
시간의 / 파울 첼란
 
이건 시간의 눈
일곱 빛깔 눈썹 아래서
곁눈질을 한다
그 눈꺼풀은 불로 씻기고
그 눈물은 김이다.
 
눈먼 별이 날아와 닿아
뜨거운 속눈썹에서 녹으니
세상이 따뜻해지리
죽은 이들이
봉오리 틔우고 꽃 피우리.
 
 
쉬볼렛 / 파울 첼란
 
창살 뒤에서
커다랗게 울었던
내 돌들과 함께,
 
그들은 나를 날카롭게 갈아서
시장 한복판으로 보냈네,
거기로
내가 어떤 서약도 하지 않은
그 깃발 오르는 곳으로.
 
피리들,
밤의 이중 피리.
생각하라,
빈과 마드리드의
어두운, 꼭 같은 두 개의 붉음을.
 
네 깃발을 조기(弔旗)로 올리라,
기억을,
조기로
오늘과 영원을 위하여.
 
가슴,
여기서도 너는 네 신분을 밝히라,
여기 시장 한복판에서
외치라 그것, 쉬볼렛을, 저 밖으로
낯선 고향에 대고
2월. 노 파사란.
 
아인호른.
너는 돌을 훤히 알지,
너는 물을 훤히 알지,
오라
내 너를 인도하마
에스트레마두라의
목소리들에게로.
 
*쉬볼렛: 구약 성경에서 에브라임인과 적대 관계에 있던 길르앗인들이 에브라임 지역 요르단 강 나루터를 점령했을 때 , 에브라임인임을 숨기고  강을 건너려는 자를 색출해 내기 위해서 썼다는 암호. 에브라임인은 이 단어를 '시볼렛'이라고 발음했는데, 이를 제대로 발음하는 사람만 살려 통과시켰다고 한다.
*두 개의 붉음: 빈의 노동자 봉기(1938)와 스페인 내전의 시발이 된 마드리드 봉기(1936)를 가리킨다.
*노 파사란:  No pasaran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으 파시즘에 맞선 공화파의 구호로, "너희가 건너지 못하리라"라는 뜻
*아인호른: Einhorn 글자 그대로 옮기면 일각수(一角獸)를 뜻하나 여기서는 사회주의자였던 첼란의 고향 친구 이름이다.
*에스트레마두라: 스페인 내전 당시 피해가 혹심했던 남서부 지역
 
가묘(假墓) / 파울 첼란
 
꽃을 뿌리라, 낯선 여인이여, 마음 놓고 뿌리라.
그대 저 아래 깊은 곳에
정원들에 꽃을 건넨다.
 
여기 누웠어야 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누워 있지 않다. 그렇지만 세계가 그의 곁에 누워 있다.
세계, 그것이 갖가지 꽃들 앞에서
눈을 떴다.
 
그러나 그는 붙들었다, 많은 것들 보았기에,
눈먼 사람들과 함께.
그는 갔다, 그리고 너무 많이 꺾었다.
향기를 꺾었다-
그리고 그걸 본 사람들이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이제 그는 갔다, 낯선 물 한 방울 마셨다,
바다를.
물고기들-
물고기들이 그 몸에 와 부딪힐까?
 
 
어느 돌을 네가 들든 / 파울 첼란
 
어느 돌을 네가 들든-
너는 드러내 버린다,
돌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이들을,
벌거벗긴
그들은 이제 짜임을 새롭게 한다.
 
어느 나무를 네가 베든-
너는 짜 맞춘다,
그 위에 혼(魂)들이
또다시 고일 잠자리를,
마치 흔들리지 않을 듯이
이 영겁(永劫)
또한.
 
어느 말을 네가 하든-
너는 감사한다
사멸(死滅)에.
 
 
그대도 말하라 / 파울 첼란
 
그대도 말하라,
마지막 사람으로,
그대의 판정을 말하라.
 
말하라-
그러나 '아니요'를 '예'와 가르지 마라.
그대의 판정에 뜻도 주라.
그것에 그림자를 주라.
 
그것에 그림자를 충분히 주라.
그것에 그만큼을,
네 주위 한밤중과 한낮과 한밤중에
두루 나누어 줄 수 있는 만큼 주라.
 
둘러보라,
보라, 사방이 살아나고 있다-
죽음 곁에서! 살아나고 있다!
그림자를 말하는 이, 이 진실을 말하는 것.
 
지금 그러나 그대 선 곳이 줄어든다,
어디로 이제, 그림자 벗겨진 이여, 어디로?
오르라, 더듬어 오르라.
그대 점점 가늘어지고, 점점 희미해지고, 점점 섬세해진다!
더욱 섬세해져 이제 한 올 실낱이다.
그가, 별이,
타고 내려오고 싶어 하는 실낱.
낮은 곳에서 유형하고자, 낮은 곳,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곳,
떠도는 말들의 물살에서.
 
*판정: Spruch '말씀', '격언' 등의 뜻도 있다
*뜻: Sinn '감각', '방향' 등의 뜻도 있다.
 
 
침묵의 증거 / 파울 첼란
-르네 샤르를 위하여
 
황금과 망각 사이
사슬에 꿰인

둘은 밤을 잡으려 하였다.
둘에게 밤은 허락하였다.
 
놓으라
너도 지금 거기다 놓으라.
낮들 곁에서 어스름히 차오르려는 것을
별 넘어 날아간 말
바다 넘쳐 씻은 말을.
 
그 말을 누구에게나
폭도들이 등덜미를 쳤을 때
노래 불러 주었던 그 말을 누구에게나-
노래 불러 주고는 굳어버린 그 말을 누구에게나.
 
그녀, 밤에게,
별 넘어 날아간, 바다 넘쳐 씻은 말을.
밤에게 침묵으로 얻은,
독니가 음절을 짓씹었을 때도
피 흘리지 않은 그 말을.
 
밤에게, 침묵으로 얻은 그 말을.
 
껍질 벗기는 자 귀들이 화냥질하고
시간과 시대도 기어오르는
그 많은 다른 말들에 맞서
그것은 증언한다 마침내,
 
마침내, 사슬이 절거덕거리기만 하면
증언한다, 거기 황금과 망각 사이에
놓인 밤에 대하여,
예로부터 그 둘과 형제인 것에 대하여-
 
그럴 것이, 대체
어디에서 밝아 오겠는가, 말하라, 그 밤 곁이 아니라면
그 밤의 눈물의 유역(流域)에서
잠수하는 태양들에게 씨앗을 가리키고
또 가리키는 밤 곁이 아니라면?
 
*침묵의 증거: '침묵으로 된 증거' 혹은 '침묵으로 이루어진 시'로 번역할 수 있다. 첼란이 이 시를 헌정한 프랑스 현대 시인 르네 샤르는 <증거(Argumenturm)>라는 시를 쓴 바 있으며, 첼란은 그의 시를 많이 번역하였다.
 
목소리들 / 파울 첼란
 
목소리들, 초록에다,
수면(水面)의
초록에다 새겨 넣은.
물총새가 자맥질해 들어가면
초(初)가 쨍 - 울린다.
 
어는 물가에서나
당신을 향해 섰던 무리가
다가온다
베어져, 다른 형상 되어.
 
*
목소리들, 쐐기풀 길에서 들려오는
 
손을 짚고 거꾸로 서서 우리에게 오라.
등불과 함께 홀로 있는 이에게는
읽어 낼 손밖에 가진 것이 없다.
 
*
 
목소리들, 어둠을 견뎌 내고 들려오는, 동아줄들,
네가 종을 매다는.
휘어라, 세계여
망자(亡者)의 조개가 쓸려 오면
여기서 종소리 울리려 하노니.
 
*
목소리들, 그 앞에서 너의 가슴이
어머니의 가슴으로 뒷걸음질 치는.
나이테의 햇목질과 묵은 목질이 그 테를
바꾸고 또 바꾸는 곳.
교수목(絞首木)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
 
*
목소리들, 돌 부스러기 속에서 울리는, 꺽꺽거리는,
그속에서 또한 무한(無限)이 삽으로 파내고 있다.
 
(마음의-)
점액질 물줄기.
 
여기에다 배를 내려라, 아이야,
내가 승선시켰던 배들을.
선체 중앙에서 돌풍이 우현으로 불면
꺾쇠가 닫힌다.
 
*
야곱의 목소리.
 
눈물.
형제의 눈에 고인 눈물.
그 한 방울이 계속 매달린 채 커졌다.
우리는 그 눈물 방울 속에서 살고 있는 것.
숨 쉬어라,
그 눈물이 떨어지도록.
 
*
목소리들, 방주 안에서 들려오는.
 
구조된 것은
입들뿐이다.
가라앉고 있는 이들아,
들어 다오
우리의 소리도,
 
*
목소리는
없고 - 한 가닥
때늦은 소음, 시각에 맞지 않게, 너의
생각에 주어져, 여기, 마침내
깨어 데려온 소음.
눈(眼) 크기만 한, 깊게 상처 난
과엽(果葉) 하나
진물이 흐른다, 아물려
들지를 않는다.
 
 
*물총새: Eisvogel.글자 그대로 옮기면 '얼음새'라는 뜻이다. 천 연의 경직된 목소리를 묘사하는 데 효과를 더한다.
*꺽쇠: 앞의 "마음의-"의 앞뒤에 친 괄호를 뜻하기도 한다. 괄호가 닫히면 "마음의-"는 사라지고 '점액질 물줄기'만 남는다.
*그 눈물이 떨어지도록: 유대교 신비주의의 전통에 의하면 카인에게 죽임을 당한 '아벨'의 눈물이 말라야 메시아가 온다고 한다.
 
 
확신 / 파울 첼란
 
눈 하나 또 있으리라
우리들 눈
옆에, 낯선 눈 하나, 말을 잃고
돌이 된 눈꺼풀 아래 있으리라.
 
오라, 너희들의 갱(坑)을 뚫으라!
 
속눈썹 하나 있으리라,
암석 속에서 안으로 향한 채
울지 못한 울음의 강철 입힌
가장 섬세한 굴착기가 있으리라.
 
그대들 앞에서 그것이 작업하고 있다,
마치, 돌이 있으니, 형제도 있으리라는 듯.
 
 
편지와 시계로 / 파울 첼란
 
밀랍,
적히지 않는 것을 봉인하는
네 이름을
알아맞혀 낸,
네 이름을
암호로 감추는 밀랍.
 
이제 오고 있는가, 표류하는 빛이여?
손가락들, 손가락들도 밀랍이다,
낯선
고통을 주는 반지 끼워져,
녹아들었다 손가락 끝 끝.
 
오고 있는가, 표류하는 빛이여?
 
시계의 벌집, 비었다 시간이 없다
신부처럼, 벌 떼는
떠날 채비가 되었다.
 
오라, 표류하는 빛이여.
 
귀향 / 파울 첼란
 
점점 짙어지는 강설(降雪),
비둘기빛, 어제처럼,
그대 아직도 잠들어 있기라도 하듯, 강설
 
멀리까지 펼쳐진 백색(白色),
그 너머, 끝없이,
사라져 버린 이의 썰매 자국.
 
그 아래, 감추어져 있다가,
젖혀 올려진다.
두 눈을 이토록 아프게 하는 것.
보이지 않던
언덕 또 언덕.
 
그 언덕마다에
'오늘'로 되불려 온,
침묵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나'
나무로 된, 말뚝.
 
저기, 얼음바람에 실려 온
하나의 감정,
그 비둘깃빛, 눈(雪)빛
깃발을 달고.
 
 
/ 파울 첼란
 
각막에 그어진 흠.
절반 간 길에서 시선이
보아 버린 '잃어버림'.
실제로 자아낸 '결코 아니다'의
되돌아옴.
 
반 동강 길들 - 그러나 가장 긴 길들.
 
혼(魂)이 밟고 간 실 가닥,
유리 흔적,
뒤로 말려들어 가고
그리고 이제
그대 머리 위, 항(恒)
성(星), 그 위에서 눈(眼)인 당신이
하얗게 너울 씌워 놓은
 
각막에 그어진 흠.
어둠에 실려 온 기호 하나
간직하라는 것.
 
낯선 시간의 모래로 (아니면 얼음으로?)
보다 낯선 '언제나'를 위하여
되살아나고 소리 없이
떨리는 자음으로 조율해 놓은 그 기호.
 
*각막에 그어진 흠: 긁힌 유리를 통해 사물을 보면 그 사물에도 긁힌 자국이 나 보이듯, 무언가에 긁혀 흠이남은 각막으로 세상을 보면 무엇을 보든 그 대상에도 흠이 그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흑암 / 파울 첼란
 
저희가 가까이 있나이다, 주여.
잡힐 듯 가까이.
 
이미 잡혀서, 주여.
저희 하나하나의 몸이
당신의 육신인 듯, 서로를 움켜쥐고,
주여.
 
기도하소서, 주여
저희에게 기도하소서
저희가 가까이 있나이다.
 
바람에 뒤틀린 채 저희가 갔습니다
향하여 갔습니다. 물 괸 웅덩이와
분화구를 찾아 몸을 굽히려고.
 
물 마실 곳으로 갔습니다, 주여.
 
피였습니다, 그건
당신께서 흘리신 피였습니다, 주여.
 
그것이 반짝였습니다.
 
그것이 우리 눈에 당신의 형상을 비추었습니다, 주여.
눈과 입이 저렇듯 열려 있고 비어 있습니다, 주여.
저희가 마셨습니다, 주여.
피와 그 피 속에 잠겨 있는 형상을, 주여.
 
기도하소서, 주여.
저희가 가까이 있나이다.
 
*흑암: Tenebrae. '어둠' 외에도 '죽음의 밤'이라는 뜻이 있는데, 특히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직후
         골고다 언덕을 뒤덮은 어둠을 가리킨다. 첼란이 독일어를 두고 굳이 라틴어로 제목을 쓴 것은, 그로 인
         해 덧붙여지는 기독교적 의미를 신이 인간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이 뒤집힌 기도 형태의 시에 수  
        용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여름 소식 / 파울 첼란
 
이제는 아무도 밟지 않는,
에둘러 가는 백리향(百里香) 양탄자.
종소리벌판을, 가로
질러 놓인 행(行)
바람이 짓부수어 놓은 곳으로는 아무것도 실려 오지 않는다.
 
다시금 흩어진
말들과의 만남, 가령
낙석(落石), 딱딱한 풀들, 시간.
 
 
쾰른, 호프 / 파울 첼란
 
마음의 시간, 꿈꾸어진 이들이
멈추어 있다
자정의 자판을 가리키며.
 
어떤 이들은 정적 속에다 말을 하고, 어떤 이들은 입 다물고 있고
어떤 이들은 자기 길을 갔다
추방당하고 상실되어
집에 있다.
 
너희 사원들.
 
보는 이 없고.
 
너희 사원들.
 
너희 강물에 귀 기울리는 이 없고
너희 시계는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있고.
 
*암 호프: Am Hof. 호텔 이름으로, 첼란은 파리에서의 재회 후 몇 년이 지난 뒤에 이곳에서 바하만을 다시 만났다.
 
 
그림 하나 아래로 / 파울 첼란
 
갈까마귀 떼 뒤덮힌 물결치는 밀밭.
어느 하늘의 푸름인가? 낮은 하늘의? 높은 하늘의?
늦은 화살, 영혼이 당겼다.
더 세찬, 화살 나는 소리. 더 가까운 이글거림. 두 세계.
 
*그림 하나 아래로: 빈센트 반 고호의 그림 <까마귀가 있는 밀밭>을 소재로 한 시이다
 
스트렛토 /파울 첼란
 
실려 왔다 그
확연한 흔적이 있는
땅으로.
 
풀, 갈라져 적혀 있고, 돌들, 하얗게
풀 줄기 그림자 드리워져.
이제 읽지 말고 - 보라!
이제 보지 말고 - 가라!
 
가라, 너의 시간은
다시 올 시간이 없고, 너는 -
집에 와 있다. 바퀴 하나, 천천히,
저 혼자 굴러 나온다, 바퀴살들이
기어간다
거무스름한 들판을 기어간다, 밤은
별이 필요 없다, 그 어디서도
네 소식을 묻지 않는다.
 
*
 
그 어디서도
네 소식을 묻지 않는다 -
 
그들이 누었던 곳, 그곳은
이름이 있다 - 그곳은
이름이 없다.그들은 거기 눕지 않았다.무엇인가가
그들 사이에 가로놓여 있었다.그들은
꿰뚫어 보지 못했다.
 
보지 못했다, 아니
제각기 논하였다,
말에 대해서. 아무도
눈뜨지 않았다
잠이 그들을 덮었다.
 
*
왔다, 왔다.그 어디서도
묻지 않는다 -
 
나야, 나,
내가 너희 사이에 누워 있었어, 나는
열려 있었고
들리기도 했지, 내가 너희를 향하여 째깍거렸지, 너희 숨소리가
귀 기울렸지, 그건
여전히 나야, 너희는
잠만 자는데.
 
*
 
그건 여전히도 나야 -
세월.
세월, 세월, 손가락 하나가
더듬고 있다. 아래로 위로 더듬고 있다
이리저리
만져지는, 꿰맨 자리, 여기
다시 아물어 붙었구나 - 누가
그것을 덮어 주었을까?
 
*
 
덮어
 주었다 - 누가?
 
왔다, 왔다.
왔다 말(言) 하나, 왔다.
밤을 뚫고 와
밝히고자 하였다, 밝히고자 하였다.
재.
재, 재,
밤-또-밤. - 눈(眼)
을 찾아가라, 젖은 눈을 찾아.
 
*
 

  을 찾아가라,
               젖은 눈을 찾아 -
 
돌풍.
돌풍, 언젠가의,
입자(粒子)들의 흩날림, 타자,
당신
그걸 알지, 우린
책을 읽었어, 의견
이었어.
의견
이었지, 있었어. 어떻게
우리가 우리를 붙잡았을까 -

두 손으로?
 
적혀 있기도 했어, 이렇게.
어디에? 우리는
그 위에 침묵 하나를 띄워 놓았어,
독(毒)으로 안정시켜, 커다랗게.
초록빛
침묵
하나, 꽃받침 이파리 하나, 거기
식물적인 것에 대한 생각 하나 매달려 있었어 -
초록빛으로, 그래,
매달려 있었어, 그래,
음흉한
하늘 아래서.
그래,
식물적인 것에 대한.
 
그래,
돌풍, 입
자들의 흩날림, 남아 있었어.
사간이, 남아 있었어,
식물적인 것을 돌에서 틔워 보려고 - 돌은
손님을 환대했지, 그건
말을 가로막지 않았어, 우린
제법 형편이 좋았지.
 
알갱이로,
알갱이로, 섬유질로, 줄기로,
빽빽하게.
송이로 다발로, 신장으로,
판으로 그리고
덩이로,느슨하게, 가지
쳐서 - ,그는,그것은
말을 가로막지 않았다, 식물적인 것이
말했어,
말하기 좋아했어 메마른 눈에게도, 그것이 감기기 전에. -
 
말했어, 말했어.
있었어, 있었어.
 
우리는 늦추지 않았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하나의
숨구멍 짓기, 그리하여
그것이 왔다.
 
우리에게로 왔다, 뚫고
왔다, 꿰매었다
보이지 않게, 꿰매었다
마지막 음향전달막을,
하여
세계, 한 덩어리 수천의 수정(水晶)
결정(結晶)이 이루어졌다, 결정이 이루어졌다.
 
*
 
결정이 이루어졌다, 결정이 이루어졌다.
                                      그러고는 -
 
환원된, 밤들, 동그라미들
초록 혹은 파랑, 빨강
네모들.
이 세계가 그 가장 내면적인 것을
새로운 시간들과의
도박에 건다. - 동그라미들,
빨강 혹은 검정, 환한
네모들,
비상(飛翔)의 그림자
없고
측량 탁자도 없고
연기혼(魂)도 피어올라 섞이지 않는다.
 
*
 
피어올라
         섞인다 -
 
땅거미 질 녘
돌이 된 문둥병 곁에
도망쳐 온 우리들의 손들

최근의 박해 때
무너진 담벼락
총알받이
너머로,
 
보인다, 새
롭게
이랑들이.
 
그때의 그 합창들이
찬미가가, 흐,호-
산나.
그러니까
아직 사원(寺院)은 서 있는 것.
아무것도
아무것도 상실되지 않았다.
 
호-
산나.
 
땅거미 질 녘, 이곳에
땅 밑을 흐르는 물흔적이 나누는
날 어두운 대화들.
 
*
 
땅 밑을 흐르는 물흔적
                    의
                        날 어두운 -
실려왔다
그 확연한
흔적
이 있는 땅으로.
 
풀,
풀,
갈라져 적혀 있는.
 
 
* 스트렛토: <목소리들>로 시작되는 시집 <언어창살>의 맨 끝에 수록된 시. 이 시에서는 <목소리들>에서 나열되었던, 또한 <죽음의 푸가>에서 울렸던 여러 목소리들이 하나의 궤적을 좇아 집약되고 있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알랭 르네의 영화 <밤의 안개>와 연결시킬 수도 있다. '스트렛토'로 번역한 'Engfuhrung'은 '비좁히기'라는 뜻의 음악 용어로 푸가 형식에서 여러 성부가 나오는 부분을 가리킨다.
 
*의견: 단테는 <신곡>에서 '사랑'을 그저 하나의 '의견(Doxa)'으로 정의했다. 함께 책을 읽다가 사랑에 빠져 불륜을 범하게 되는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이야기와 연결된다.
 
*그는, 그것은: er,es. '돌'을 가리키는 대명사 'er'와 '식물적인 것'을 가리키는 대명사 'es'를 나란히 적어 돌에서 생명이 생성되기를 바라는 꿈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바로 앞에 나열한 명사와 형용사를 보면 생물(식물)에 관련된 표현과 무생물(광물)에 관련된 표현이 뒤섞여 있다.
 
*음향전달막: 북 따위의 악기들에서 소리를 전달시키는 데 쓰이는 얇은 금속, 종이, 고무 등으로 된 이파리 모양의 관
 
*땅거미 질 녘: Eulenflucht '올빼미로 날아오를 녘'의 고어이다. 그대로 옮기면 미네르바의 올빼미를 연상시키는 장점이 있지만, 시 전테의 어두운 분위기에 부합하지 않아 '땅거미 질 녘'으로 옮겼다.
 /전영애 역
 
취리히, 슈토르헨 / 파울 첼란
-넬리 작스를 위하여
 
이야기가 있었다, 너무 많거나
너무 적음에 대하여. '그 이'에 대하여
'그래도 그이'에 대하여,
밝음에 의한 흐림에 대하여
유대적인 것에 대하여
너의 신에 대하여.
 
'그것'에
대하여.
어느 성모 승천일
성당은 건너편에 서 있었다, 성당은
금빛을 띠고 물을 건너왔다.
 
너의 신에 대해 말해져 왔다, 나는
그에 맞서 이야기하였다, 나는
내가 한때 가졌던 마음이
희망하게 하였다.
그의 높고 가장 높은, 구멍 뚫린,
다투는 말을-
네 눈이 나를 보았다, 그 너머 멀리를 보았다.
네 입이
눈에게 격려를 보냈다, 말이 들려왔다.
 
우리는
정말이지 모릅니다, 아시겠어요,
우리는
정말 모릅니다,
무엇이 유효한지.
 
*춤 슈토르헨: 호텔 이름으로 "황새네' 정도의 뜻이다. 1960년 첼란은 이곳에서 넬리 작스를 만났다.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스웨덴으로 망명한 작스의 시즌 많은 부분 첼란의 시와 주제를 공유한다. 다만 첼란의 시
                와 달리 구원에 대한 희망이 비교적 겉으로 드러난다.
*'그래도 그이': Aber-Du. 대화 상대자인 '너(du)'와 구별되도록 앞 철자를 대문자로 써서 만들어 낸 새로운 주체
                '그이(Du)'에 부정어를 붙였다.가리키기 어려운, 부정하면서도 다시 긍정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신(神)
                 을 암시한다.
 
많은 성좌들, 우리 앞에
내밀어져 있는 나는,
언제였던가? 너를 보았을 때
저 바깥
또 다른 세계들 곁에 있었다.
 
은하계의, 오, 이 길들.
우리들에게로
우리들 이름의 짐 안으로
밤들을 흔들어 보내오는
이 시각,
나 이제 알겠네, 우리가 살았다는 건
틀린 말,
숨결 하나가 '저기'와 '거기 없음'과 '이따금씩' 사이를
눈 먼 채 지나갔을 뿐.
혜성처럼 눈 하나가
불 꺼져 버린 것을 향하여 휘익 날았을 뿐, 골짜기들 속에서,
거기, 그 작열이 스러진 곳
유두(乳頭)처럼 화사하게 시간이 멈추어 있다.
거기서 이미 위로, 아래로
그 너머로 자랐다.
있는 것, 있었던 것, 있을 것이-
나 알겠네.
내가 알고 당신이 알고, 우리가 알았네,
알지 못했네, 우리는
있었지만, 거기에는 없었지. 그리고 이따금씩
오직 무(無)가 우리 사이에 서 있을 때라야
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마주하였지.
 
 
당신의
건너에 있음, 오늘 밤.
말(言)로써 내 당신을 다시 데려왔다, 여기 당신이 있다
모든 것이 진실하고 진실에의
한 가닥 기다림도 진실하다.
 
우리 창(窓) 앞을
콩 넝쿨이 기어오른다. 생각하라
누가 우리 곁에서 자라며
그것을 바라보는가를.
 
신(神)은, 우리는 그리 읽었다,
하나의 조각이며 또 하나의, 흩어진 조각이라고
모든 베어진 이들의
죽음 가운데서
그이는 자신에게로 자라 간다.
 
그곳으로
시선이 우리를 이끌어 간다.

반쪽과
우리는 오가며 지내는 것.
 
 
양손에, 여기
별들이 내게로 자라 오는 곳, 멀리
모든 하늘에, 가까이
모든 하늘에.
저기
저 깸! 저기
우리들 한가운데를 뚫고
열려 오는 저 세계!
 
네가 있다
네 눈이 있는 곳에, 너는 있다
저 위에, 있다
저 아래, 나는
밖으로 찾아 가노니.
 
이 떠도는, 텅 빈
환대하는 중심. 갈라진 채
나는 네게로 떨어져 가고, 너는
네게로 떨어져 온다, 서로
떨어져 나가며, 우리는
꿰뚫어 본다.
 
같은
것이
우리를
잃었다, 그
같은 것이
우리를
잊었다, 그
같은 것이
우리를-
 
열두 / 파울 첼란
 
진정
남은 것, 진정
이루어진 행(行)은 ---파리의
네 집 - 네 두 손의 봉헌소.
 
세 번 속속들이 심호흡,
세 번 속속들이 밝히기.
 
----------------
 
말을 잃는다, 귀가 먼다
눈 뒤에서,
독(毒)이 꽃피는 모습이 보인다
온갖 말과 모습으로.
 
오라, 가라
사랑이 그 이름을 지운다. 사랑이
스스로를 그대에게 양도한다.
 
모든 생각을 지니고 나는
세계 밖으로 나섰다. 거기 당신이 있었다
당신 나의 나직한 여인, 당신 나의 열린 여인, 하여 -
당신은 우리를 받아들인다.
 
누가
말하는가, 눈빛이 꺼졌으니
우리의 모든 것이 죽었다고?
모든 것이 깨어났다, 모든 것이 일어났다.
 
커다랗게 태양 하나 헤엄쳐 왔다, 환하게
그 태양을 영혼과 영혼이 마주 섰다, 분명하게
명령조의 침묵으로 그들은 태양에게
자신들의 궤도를 가리키고.
 
가볍게
당신의 품이 열렸다, 고요히
숨결 하나가 에테르 속으로 솟아올랐다
하여 구름이 된 것,
그건 우리에게서 떠난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거의 이름 같은 것
아니었을까?
 
잃은 가을 냄새들, 이
별꽃은 꺽이지 않은 채, 걸어갔다
고향과 심연 사이로
네 기억을 지나.
 
낯선 상실 하나
모습 갖춰 거기 있었다. 네가
어쩌면
살았던 것이리.
 
 
정월, 튀빙엔 / 파울 첼란
 
멀도록
설득당한 눈들.
그 눈의 - "순수
발원(發源)은 수수께끼" -
그 눈의 갈매기 떼
에워싼 물 위에 뜬
휠덜린 탑의
회상.
 
익사한 목수들을 찾아오곤 하는 손님들.

물에 잠기는 말들에게로
 
왔으면,
한 사람이 왔으면
한 사람이 왔으면, 오늘,
족장의
빛수염을 달고, 그는 정녕,
그가 시대를
이야기한다면,
 
정녕
다만 웅얼거리고 또 웅얼거리리
언제, 언제,
언제까지고.
 
("랄락쉬, 팔락쉬")
 
*정월, 튀빙엔: 생의 후반기를 광증 속에서 보낸 천재 시인 프리드리히 휠덜린이 한 목수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았던 튀빙엔 네가 강가의 집 '휠덜린의 탑'을 배경으로 한 시. "랄락쉬"는
                     실성한 휠덜린이 자주 했다는 뜻 없는 말로 때로는 '예'를 때로는 '아니오'를 가리켰다고
                     한다. 첫 연의 "순수/발원은 수수께끼'도 휠덜린의 시 <라인 강> 중 한 구절이다.
 
연금술의 소화액같이 / 파울 첼란
 
침묵, 숯이 된
두 손 안에서
금(金)처럼 끓인,
 
커다란, 잿빛,
모든 잃어버린 것처럼 가까운
누이의 모습.
 
그 모든 이름, 그 모든 함께
불살라진
이름들. 그만큼
축복받아야 할 재(灰).그만큼
얻어진 땅
가벼운, 저렇듯 가벼운
영혼들 -
동아리들
너머.
 
큰 모습, 잿빛 모습, 앙금
남기지 않은 모습.
 
그때의 너.
창백한
깨물어 쪼갠 꽃봉오리를 지닌 너.
넘치는 포도주 속의 너.
 
(이 시계는
우리도 내보냈어, 안 그래?
그래,
그래, 네 말(語)은 여기를 스쳐 죽어 갔어.)
 
침묵, 금처럼 끓인
석탄이 된, 석탄이 된
손 안의.
손가락, 연기처럼 가느다란, 왕관처럼, 공기왕관처럼
씌워져 -
큰 모습, 잿빛 모습, 발자국 흔적
없는 모습

같은 모습,
 
몇몇의
같은 , 어둡게,
풀과 함께 왔다.
 
얼른 - 절망들이여, 너희
도공들이여! - 얼른
시간은 진흙을 내주었고, 얼른
눈물을 얻었다 -
 
다시 한 번, 푸르스름한 둥근 화서(花序)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이
'오늘'이.
 
 
검은땅, 검은
땅 너, 시간의
어머니
절망.
 
내 손에서 그
상처에서 또
태어난 것 하나가
네 목구멍을 닫는다.
 
사기꾼과 건달의 노래,
사다고라 변두리 체르노비츠 출신의
파울 첼란이
퐁투아즈 변두리 파리에서 부름
                                               "어두운 시대에, 이따금씩만"
                                           -하인리히 하이네, <어둠에게> 중에서
그때 아직 교수목이 있던 시절,
그때는 정말이지
'위(上)'라는 게 있었지.
 
어디에 나의 수염은 있는가, 바람아, 어디에
나의 유대인 얼룩이 있는가, 어디에
네가 쥐어뜯는 나의 수염이 있는가?
 
꼬불꼬불했지, 내가 온 길은
꼬불꼬불했지, 그래,
그래, 그건
그 길이 똑발랐기 때문.
 
자장자장
꼬불꼬불, 구부러지는 것은 내코,
코,
 
우리는 프리아울로 갔지
거기서 말이야, 거기서 말이야.
만델바움이 꽃피고 있었거든.
만델바움, 반델마움,
만델트라움, 탄델마움
그리고 또 만한텔바움까지.
샨델바움.
 
아장아장.
아움.
 
앙부아
 
그런데
그런데 그가 뻗대고 일어섰다네, 그 나무가. 나무가
나무까지도
맞섰다네
흑사병
 
 
*퐁투아즈 변두리 파리: 프랑스의 시인 프랑수아 비용의 사행시에서 인용한 구절로, "사다고라 변두리 체르노비츠"는 원래 구절을 뒤집어 쓴 표현이다.
                첼란의 고향 체르노비츠는 부코비나의 수도이며, 사다고라는 그 근교의 작은 도시로 하시딤 사상의 중심지였다.
*유대인 얼룩: 독일은 1530년 제국경찰령을 내려 유대인들에게 노란 반지를 끼게 했다. 나치 시대가 되어 유대인 표지는 황색 별로 바뀌었다.
*구부러지는 것은 내 코: '구부러진 코'는 '만델형 눈'. '수염'과 더불어 유대인 특유의 외모를 묘사하는 단어이다.
*산델바움: '만델바움(Mandelbaum)'에서 자음 'm'과 'b'의 자리를 바꿔 '반델마움(Bandelmaum)'이라는 단어를 만든 언어유희는 무의미를 거쳐 의
                미를 만들어 내는데, 그 중간에 '만델트라움(Mandeltraum)', 즉 만델나무의 꿈' 같은 의미 있는 어휘가 섞인다. 언어유희 끝에 나오는 '마
                한텔바움(Machandelbaum)'은 계모가 의붓아들을 죽여 아버지 식탁에 올리고 뼈를 그 나무 밑에 묻었는데 새가 되어 날아갔다는 동명의
                그림 동화에 나오는 나무이다. '샨델바움'에서는 샹들리에라는 단어에서처럼 '빛'을 읽을 수 있어 '빛나무'로 번역할 수도 있다. 불구화로 치닫는
                언어유희를 통하여 오히려 놀라운 전환에 이르고 있다.
*아움: '나무(Baum)'에서 첫 자음 'B'를 생략했다.
*앙부아: Envoi. 프랑스어로 '-에게 부침'의 뜻. 발라드의 마지막 절에 헌정의 의미로 쓰며 시 제목과 더불어 프랑수아 비용이 즐겨 썼던 음율 형식이다
*그가 뻗대고 일어섰다네: Er baumt sich der Baum. 앞서 이루어진 '나무'를 통한 언어유희의 귀착점을 잘 보여 준다. 마치 말이 뒷발로만 서 있는 듯한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강한 이미지를 담은 동사 '뻗대고일어서다(sich baumen)'의 어근이 '나무(Baum)'에서 나왔기 때문이
 
*흑사병: 카뮈의 소설 <페스트>가 상징하는 '나치즘'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누구의 뺨 / 파울체란
 
누구의 을 부비랴,
너의 뺨이 아니면, 삶이여,
몽당손으로 찾은 너의 뺨이
아니면.
 
너희 손가락들,
멀리, 도중에
교차로들에, 이따금은
풀려난 팔다리의
휴식,
'언젠가'의 먼지방석
위에.
 
나무로 변한 마음의 저장물들 - 그
속에서 타는
사랑의, 빛의 노예.
 
절반 거짓의
작은 불꽃 하나 아직
너희가 건드리는
이, 저
밤 지샌 땀구멍 속에.
 
저 위 열쇠 소리,
너의 위의 숨결
나무.
너희를 바라본
마지막 말
지금 제자리에 있어야, 머물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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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뺨을 부비며
몽당손으로 찾은
삶이여.
 
 
환한
돌들이 공중을 지나간다, 환히-
아는 것들, 빛
가져오는 것들.
 
그것들은 내려오려고도, 떨어지려고도
맞히려고도 하질 않는다, 올라
간다
조그만
해당화처럼, 그렇게 열린다
둥둥 떠 간다
그대에게로, 그대 나직한 여인
내 진정한 여인-
 
나 그대를 본다,그대 그것들을 꺾는다 내
새로운, 내
누구나의 손으로, 그대 그것들을
넣는다 '다시 한 번 밝음' 안에다, 아무도
올 필요도 일컬을 필요도 없는 밝음 안에다.
 
 
바깥으로 왕관 씌워져 / 파울체란
 
어둠 속으로 뱉어 내져서.
 
무슨 별들 곁에서인가! 온통
잿빛 낀 마음망치은(銀). 그리고
베레니케의 머릿단, 여기에도- 내가 땋았다,
내가 풀었다.
내가 땋았다, 풀었다.
내가 땋았다.
 
푸른 계곡, 네 안으로
나는 금을 박아 넣는다, 또한 그와 함께,
창녀들 작부들 곁에서 허비한 사람과 함께
나는 온다 나는 온다, 너에게로,
사랑이여.
 
또한 저주와 기도와 더불어.또한 누구와도 함께
내 너머로
휙휙 휘둘린 곤봉들,그것들도 하나로
녹아서, 그들도
남근으로 묶여 너에게로
다발-이며-말.
이름과 더불어,
모든 망명지에 적셨던 이름,
이름과 싸앗과 더불어,
이름과 더불어,모든
잔에 잠겼던 이름,너의
왕의 피로 가득 찼던 잔, 인간이여,-모든
커다란
게토-장미의 잔들에,거기서
당신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
죽은 죽음들의 그 많은
아침길들로 불멸인 당신이.
 
(그리고 우리는 바르쇼비앙카를 불렀다.
갈대가 되어 버린 입술로, 페트라르카여.
툰드라의 귀들에 대고, 페트라르카여.)
 
그리하여 이제 땅 하나 솟는다, 우리의 땅,
이 땅,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들 중 그 누구도 내려보내지 않겠다
네게로는,
바벨아.
 
*베레니케의 머릿단: 이집트의 왕비 베리니케 2세의 이름을 딴 별자리. 메레니케는 남편 프롤레마이오스 왕이 3차 시리아전에서 승전하고
                            돌아오기를 빌며 신들에게 자신의 머리채를 바쳤다고 한다.
*게토: 유대인 거주 지역.
*바르쇼비앙카: 폴란드 혁명의 노래
*페트리르카: 토스카나 출신의 시인 페트리르카는 아비뇽에 망명해서 살았다.
 
 
어디로 내게서 말은, 불멸이었던 말은 떨어져 갔는가 / 파울체란
 
아마 뒤 하늘골짜기 속으로,
그곳으로, 침과 쓰레기에 이끌려,간다
나와 함게 사는 일곱 별은.
 
어둠의 집 안에 운율, 오물 속의 호흡,
눈, 이미지들의 노예-
그리고 그럼에도, 꼿꼿한 침묵 하나, 돌 하나
악마의 사닥다리를 비껴간다.
 
오두막 창문 / 파울 첼란
 
어두운, 눈,
오두막 창문인. 모여든다
세계였고 세계로 남은 것, 떠도는
동쪽, 떠도는
사람들,
인간이며, 유대인인 이들,
구름 백성, 자력(磁力)으로
그들을 끌어당긴다, 마음의 손가락으로
내게로, 대지여,
너는 온다, 너는 온다
우리가 거처하리, 거처하리, 무엇인가가
 
-한 가닥 숨결인가? 하나의 이름인가?-
 
고아가 된 것 가운데서 헤맨다.
춤추듯, 곤봉 모양*으로,
천사의
날개들, 보이지 않는 것으로 무거워져,
상처로 껍질 벗겨진 발, 머리
 
무겁게
그곳, 비텝스크*에도 떨어졌던
검은 우박으로 균형 잡혀
 
-그리고 그를 씨 뿌린 이들, 그들
그들이 그를 써서 버린다
미믹의 장갑주먹손아귀로!-
 
간다, 헤맨다.
찾는다
아래서 찾는다
위에서 찾는다, 멀리서, 찾는다
눈으로, 가져온다
켄타우르스 알파*를 아래로, 아르크투어를, 가려 온다
빛을 덧붙여서, 무덤으로부터
 
게토와 에덴으로 간다,
성좌를
꺾어 모은다, 그가,
인간이 터 잡아 살자면 필요로 하는 것, 여기에서
인간들 가운데서
 
성큼성큼
자모를 걸음으로 재어 본다 자모들의 필멸의-
불멸의 영혼을
알레프와 유트에게로 간다, 내쳐 간다
 
그것을, 다윗의 방패를 세운다, 그것을
불타오르게 한다, 한 번
 
그것을 꺼지게 한다-거기 그가 서 있다.
보이지 않게, 서 있다
알파*와 알레프, 유트* 곁에
다른 사람들 곁에, 모두
곁에, 그대
안에
 
베트 - 그건
집, 거기 식탁이 있다
 
빛과 또 빛과 함께
 
*곤봉 모양: klobig '이삭 모양'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비텝스크: 러시아의 도시 이름 유대인 마을이 있다.
*펜타우르스 알파, 아르크투어: 북동쪽 하늘의 별들.
*알파: 그리스 문자의 첫째 글자이다.
*알레프, 베트, 유트: 각각 히브리 문자의 첫째, 둘째, 열째 글자이다. 발음할 수 없는 신의 이름이 유트로 시작된다.
 
얼음, 에덴 / 파울 첼란
 
'잃어버림'이라는 땅 하나 있다.
거기선 갈대 속에서 달(月)이 자란다
그 땅 우리와 함께 얼어붙어
사방에서 작열하며 바라본다.
 
그것이 본다. 문(眼)이 있기에,
환한 땅들인 눈.
밤, 밤, 잿물.
그것은 본다, 눈의 자식.
 
그것이 본다, 그것이 본다, 우리가 본다,
내가 너를 본다, 네가 본다.
얼음이 불활한다
시각이 닫히기 전에.
 
그대 나를 / 파울체란
 
그대 를 안심하고
눈(雪)으로 대접해도 좋다.
내가 어깨에 어깨를 걸고
뽕나무*와 여름을 지날 때마다
그 갓 돋은
잎이 소리 질렀거든.
 
*뽕나무: 뜯어도 자꾸 돋아나는 잎 때문에 강한 생명력을 상징한다.
 
 꿈꾸지 못한 것에 /파울 체란
 
꿈꾸지 못한 것에 부식되어
잠 못 이루고 헤맨 빵 나라가
삶의 산을 쌓아 올린다.
 
그 부스러기로
당신은 우리의 이름을 새로 반죽하고
그 이름들을 내가, 당신 눈과
닮은
외눈을 손가락 끝마다 달고
닳도록 더듬는다,
깨어나며 당신에게로 다가갈 수 있는
한 자리를 찾아
환한
입속의 굶주림촛불*.
 
*굶주림 촛불: Hungerkerze 체란의 조어로, 의미의 연결 방식을 짐작할 수
             있는 유사 단어로는 굶주림샘(Hungerquelle 어쩌다 비가 오면
             물이 나오는 샘), 굶주림천(Hungertuch 금식 기간 동안 성가대
             석에 걸거나 계단을 덮는, 대개 그리스도의 수난 장면이 그려진 천)
             굶주림존재(Hungerdasein 몹시 고생스러운 삶) 등이 있다.
 
 
고랑에다 파울체란
 
문틈에 낀 하늘 동전의 팬 고랑에다
당신이 말을 눌러 넣고 있다
그 말에서 나, 굴러 나왔지.
떨리는 두 주먹으로
우리 머리 위 지붕을
기왓장 한 장 한 장,
음절 한 개 한 개 헐어 내다가
저 높은 곳 동냥
접시의 희미한
구리 빛을 위하여.
 
강물들에서  / 파울체란 
 
강물들에서 미래 북녘
내가 그물을 던진다. 그 그물을 당신이
머뭇거리며 눌러 준다
돌들이 써 놓은
그림자로.
 
 
그림자 - 부스러기 속의 길들 / 파울체란,
네 손의
 
네(四) 손가락 이랑에서
나는 헤집어 낸다
돌이 된 축복을.
 
 
쪽으로 노래 불린 돛대를 세우고
하늘 난파선이 간다.
 
이 목질(木質)의 노래
이로 깨물다 네가 굳어졌구나
 
너는 노래가 스미지 못하는
속눈썹.
 
실낱태양들 /파울체란
 
실낱태양들
흑회색 황량함 위에 내린.
나무
높이의 사념 하나
빛소리를 잡으로 손을 뻗으니, 아직
부를 노래들이 있어라, 인간의
피안에.
 
실낱태양들: 이 시는 잿빛 하늘에서 빛줄기들이 내리 비치는 가운데 한 그루 나무가
               우뚝 선, 간결하고 장엄한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때
               "나무/높이의 사념 하나"를 '고매한 사상'의 시적 형상화로 읽으면, 현실
               에만 매몰된 시에 대한 풍자로 볼 수 있다. 이 시가 쓰였던 때는 거대 정
               당이 서로 연합한 소위 대연정의 시기로, 그 복고적 기류가 사회 비판적
               지식인들과 학생들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오던 때였다. (이에 비롯한 저
               항적 기류는 '68혁명'으로 이어졌다.) 특히 첼란이 매우 비판적 세계관을
               가지게 된 시점에서 쓴 시임을 감안한다면, 이 시를 이렇게 번역할 수 있
               다. "실낱태양들 / 흑회색 황량함 위에 내린 / 나무만큼 /고매한 사상 하
               나 / 빛소리를 잡으려 손을 뻗으니, 아직 / 부를 노래들이 있어라 / 피안에"
               (전영애)
 
 
당신을 알아, / 파울체란
 
그대 깊숙이 몸 굽힌 여인.
나, 온통 꿰뚫린 자, 나는 그대 휘하에.
우리 둘을 위하여 증언해 줄
한마디 말씀은 어디서 불타고 있는가?
그대 - 온전히, 온전히 현실이고, 나 - 온전한 광기(狂氣)
 
당신: 첼란이 파리로 이주한 뒤에 만나 결혼한 판화가 지젤 레스트랑주를 가리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부부는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레스트랑주의 작품들은 첼란의 후기 시들과 이미지가 매
         우 유사하다.
 
 
조약돌이 말씀, / 파울체란
 
주먹 안에서
당신은 잊는다, 당신이 잊는다는 것을
 
손목 관절에서 번쩍이며
문장 부호가 사격을 시작한다
 
빗살이 되어 버린
갈라진 땅을 지나
휴지(休止)가 말달려 온다
 
거기, 희생의 다년생 초목 곁,
기억이 타오르는 곳에서
한 분이 너희를 위해 주워 거두고 있다
입김을.
 
 
드러나도록 닦아 냈다 / 파울체란
 
당신 언어의 빛바람으로.
자신의 체험인 양 여기는 것의
현란한 다변(多辨) - 백 개의
혀를 가진 내
시(詩), 아무것도 아닌 것.
 
회오리쳐 -
나가고
드러나는
길, 사람의
모습을 한 눈(雪),
고해자의 눈을 지나
손님을 환대하는
만년설 방과 만년설 식탁들에 닿는 길.
 
시간의 균열 깊이
벌집 얼음
곁에서
기다리고 있다, 숨결의 수정(水晶) 하나,
폐기할 수 없는 당신의
증언(證言).
 
 
밝음에의 허기 – 허기져 / 파울체란
 
나는 빵
계단을 나섰다
맹인들의
종(鐘) 아래로.
 
그 종, 물처럼
맑은
종, 젖혀지다
함께 오른 것, 함께
너무 많이 올라 버린 자유, 그 자유를
하늘 하나가 포식했다
그 하늘을 내가
궁륭의 형상대로 두었다
단어가 헤엄쳐 간
심상(心象)의 궤도, 피의 궤도 위로.
 
 
쓰인 , 파이고 있고
말해진 것, 바다초록빛,
만(灣)안에서 불타고 있고
 
액화(液化)된 이름 속에서
쥐돌고래가 튀어 오르고
 
영원화(永遠化)한 '그 어디에도 없는 곳'에, 여기에,
너무나 요란했던 종소리의
기억 속에 - 대체 어디에?
 
누가

그림자 사방터 안에서
헐떡이는가, 누가
그 아래서, 희미하게
밝아오는가, 밝아 오는가, 밝아 오는가?
 
 
'그 어디에도 없는 곳': 시어의 작위적 품사 전환이 눈길을 끈다. '영원히'라는 부사를 무리하게 동사화하여
                          과거분사형으로 썼으며, 부사인 '그 어디에도 ~없이'는 명사화했다.
사방터: '죽은자' 라는 의미가 있는 '그림자'와 철학자 하이데거의 개념으로 삶의 터를 나타내는 '사방터'를
           합성한 시어.
 
 
가닥 우렁찬 뇌성 / 파울 체란
 
진실 그것이
인간들 가운데로
들어서고 있다.
은유의 회오리
한가운데로.
 
 깨물린 자국 외 / 파울 첼란
 
깨물린 자국, 어디에도 없는 곳에.
 
그 자국도
너는 없애야 한다
여기서부터
 
 
온스 진실, 광증 깊은 곳에,
그 곁을 스쳐서
저울 접시들이
굴러 온다
두 접시가 동시에, 대화 속에서
 
투쟁하며, 마음-
높이로 버텨 놓은 법(法),
아들아, 그것이 승리한다.
 
 
짐부스러기, 쐐기,
어디에도 없는 곳에 박혀
우리는 계속 우리와 비슷하다
빙 돌아
방향 잡힌 둥근 별이
우리에게 동의한다.
 
 
진실, 드러나 버린 꿈의 잔해에
밧줄로 몸 동이고,
어린아이 되어
능선을 넘는다.
 
지팡이,
흙덩이
자갈
눈(眼)씨앗에 어지럽게 에워싸여 골짜기 속
저 높은
곳에서 꽃피우는 '아니요'를-
화관(花冠)을 뒤적여 본다.
 
 
너는 나의 죽음이었다
너는 내가 붙들고 있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떨어져 나가는 동안에도.
 
 듣고 남은 것들, 보고 남은 것들 외 / 파울 첼란
 
듣고 남은 것들, 보고 남은 것들
침실 1001호에,
 
밤낮으로
곰들의 폴카.
 
그들이 너를 재교육한다
 
너는 다시 된다
그가.
 
 
언젠가, 죽음이 대성황을 이루었다
당신이 내 안에 몸을 숨겼다.
 
 
토트나우베르크
 
아르니카 꽃,  눈길의 위안,
그 위에 별 모양 목각이
달린 우물 물을 마심,
 
오두막
안에서
 
책에
- 누구의 이름이 그 책에 적혔는가
내 이름에 앞서? -
책에
적어 넣은,
그 한 줄, 희망을, 오늘,
생각하는 한 사람의
마음속으로
오고 있는

에의 희망을 담고.
고르게 만들지 않은 숲 속 습지,
오르히스 꽃 또 오르히스 꽃, 흩어져 하나씩,
 
잔인한 것, 나중에, 달리며,
선명해지고
 
우리를 타고 가는 것,
그것에 함께 귀 기울리는 인간,
 
절반
밟은 고습지 속 곤봉
오솔길,
 
젖은 것,
많이.
 
토크나우베르크: 철학자 하이데거의 산장이 있는 곳이다. 1967년 여름 하이데거는 첼란을 자신이 재직하고 있는
                   프라이부르크 대학으로 초청하여 낭독회를 열었다. 성황을 이룬 낭독회에서 첼란의 시를 경청한 하
                   이데거는 그를 개인적으로 산장에 초청하였다. 첼란의 착잡한 심경이 읽어 내기 어려울 정도로
                   압축되어  있는 시이다.
아르니카 꽃: 노란 꽃이 피는 국화과 여러해살이풀로, 이 꽃에서 낸 즙으로 상처를 치료한다.
눈길의 위안: Augentrost. '좁쌀풀'과 '눈요기'라는 뜻이 모두 있다. 아르니카  꽃에 대한 부연 설명이면서 동시에 그
                 주변의 다른 풀들을 가리킨다.
우물: 하이데거의 오두막에서 내다보이는 우물을 가리킨다. 이 우물에 달린 단순한 별 모양 목각 장식은 유대인의 표지
       인 황색 별을 연상시킨다.
책에 적어 넣은, 그 한 줄 희망을: 이 날 첼란은 방명록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물 별이 내다보이는 오두막의 책 에 마음속으로 오고 있는 한마디 말을 희망하며,
                                         1967. 7. 25. 파울 첼란"
오르히스 꽃: 음경 모양의 꽃이 피는 난초과 풀로, '총각풀'이라고도 불리며 '음경'이라는 뜻도 있다. 7연의 '곤봉'과도 연상의
              고리를 이룬다. 첼란은 청소년기부터 식물에 대하여 남달리 해박했다.
잔인한 것: 하이데거와 나눈 대화를 가리키는 듯하다. 위대한 철학자이지만 나치 경력이 문제 된 하이데거와 나
              치의 대표적 피해자인 시인 첼란의 만남이었던 만큼, 추측이 무성하다.
고습지: 늪지 혹은 고습지는 곤봉이라는 단어와 연결되어, 흔히 늪에서 몰아넣은 방식으로 자행되던 유대인 처형을 연상
          시킨다.
 
거기 내가 당신 안에서 나를 잊어버린 곳에서
당신은 생각이 되었지.
 
무언가가
우리 둘을 뚫고 솰솰 흐르고 있다.
마지막  날개들의
첫 번째 세상
 
풍상에 젖은
내 입
너머
가죽이 덧자란다
 
당신은
오지 않는다
당신
에게로.
 
두드려 그
빛쐐기를 떨어라.
 
물 위를 떠다니는 말은
어스름의 것.
 
] 눈(雪)의 파트 / 파울 첼란
 
보랏빛 공기, 노란 불빛 점 점 창문들이 있는
 
무너진 안할트 역사(驛舍) 위에 떠 있는
성좌, 야곱의 띠
 
요술 수업 시간이네, 아직은 아무것도
끼어드는 것 없네
 
선술집
에서
눈(雪)술집까지.
 
무너진 안할트 역사: 앞 시와 같이 1967년 12월 첼란이 베를린에 갔을 때 쓰였다. 베를린 장벽
                         가까이 있던 번화가 베를린의 안할트 역 부근은 전쟁 중 폭격으로 당시 거의
                         폐허가 되어 있었다. 첼란은 유대인에게 대규모 폭력이 가해졌던 소위 '수정의
                         밤' 다음 날인 1938년 11월 10일 아침, 이 역에 도착하여 범죄의 현장을 보았
                         다.
야곱의 띠: 오리온자리의 세 별을 이은 직선을 가리킨다.
 
 
당신은 누워 있구나 커다란 은신처에서
덤불에 에워싸여, 눈송이에 에워싸여.
 
슈프레 강으로 가라, 하펠 강으로 가라,
가라, 푸주한의 갈고리로
스웨덴 산
빨간 크리스마스 장식 사과에로-
 
선물들이 놓인 식탁이 온다
그것이 어느 에덴을 돌아간다-
 
남자는 구멍 숭숭한 시체가 되었고, 여자는
둥둥 떠다녀야 했다, 그 계집,
혼자서,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게, 누구나를 위해서-
 
국방 운하에 여울 물소리 없겠구나
아무런
막힘이 없구나.
 
 
당신은 누워 있구나: 첼란은 1967년 베를린을 방문했는데, 이 시는 크리스마스 무렵 임시 장터가 늘어선 베를린의 슈프레 강가
                        를 배경으로 했다. 이 시에 대해서는 해석학자 스촌디가 상세하게 해설한 바 있는데, 그에 따르면 시의
                        남성 화자는 칼 립크네히트, 여성 화자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상징한다. 총살당한 둘의 시체가 국경 수비 운
                        하에 던져졌던 역사적 사실(1919)을 회상시킨다. "푸주한의 갈고리"는 베를린 플뢰첸제 처형장의 갈
                        고리를 가리키며, "어느 에덴"은 '에덴동산'이 아니라 이들 두 사람이 사살되기 전 억류되었던 호텔 이름이다.
                        또한 "계집(Sau)"는  '암퇘지'라는 뜻으로 당시 가해자들이 로자 룩셈부르크를 가리켜 썼던 욕설이다.
크리스마스 장식 사과: 성탄절 무렵 보통 현관문에다 거는 조그만 초록 화환으로, 여기서는 이 평화로운 장식물이 '푸주한 의 갈고리'
                           와 운을 맞추어 낯선 이미지를 환기시킨다.
국방 운하에 (중략) 아무런 막힘이 없구나: 국방 운하는 베를린 시내에 있었다. 이 얕고 작은 운하에 시체를 던졌을 때 물소리가
                                                     나지 않고 아무것도 막히지 않는다는 것은, 그 안에 던져진 시체가 무수한 관통상을
                                                     입어 체처럼 구멍이 나 있는 탓이다. 무심히 흘러가는 역사의 시간도 함께 읽을 수
                                                     있다. 그런데도 언어적으로는, "아무런 막힘이 없"을 것이라는 구절이 막힘 없이 이
                                                     어지지 못하고 끊겨 있다.
 
읽을 없음, 이
세계의 모든 게 두 겹.
 
강한 시계들이
쪼개진 시간에 따라 준다,
목쉬어서.
 
당신은, 당신의 가장 깊은 곳 안으로 옥죄어 들어,
스스로를 벗어난다
영원히.
 
 
()파트, 마지막까지 거역하며 솟구쳐,
상승 기류 속에,
영영 창문을 막아 버린
오두막들 앞에.
 
얕은 꿈들이 씽 물수제비를 뜬다
골 진 얼음
너머로.
 
말(言)그림자들이
치고 나온다, 팔 펴서 재 본다
은 사방 꺾쇠들을
강둑 밑 팬 어느 곳에서.
 
파트: 합찬대의 한 '성부', 연극에서의 '역할'과 가장 가까운 뜻이다.
 
 
이파리 하나, 나무도 없이,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위하여.
 
이 무슨 시대란 말인가
대화가
거의 범죄이니
그 많은, 이미 말해진 것을
포함하기에.
 
이 무슨 시대란 말인가 (중략) 포함하기에: 브레히트의 시 <후손들에게>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 '이 무슨 시대란 말인가/나무에 대한 대화가
                                                    거의 범죄이니/대화가 그 많은 범죄에 대한 침묵을 포함하는 까닭에"를 변형했다. 나치 시대
                                                    의 정치 비판적 시구가 회의으로 전환되며 극단적인 언어로 축약되었다.
 
 
영원(永遠) 
 
머물러 있다, 한계 안에
가벼이, 그 강력한 축량흡입관 안에
신중히,
돌고 있다, 손
톱으로 속속들이 빛날 수 있는
혈당(血糖) 완두콩.
 
측량흡입관: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운 조어이다. 흡입관(Tenakel)은 하등동물이 먹이를 먹을 때 쓰는 관 모양의 기관을 뜻한다.
 
 
더듬더듬 따라 말할 세상
 
나, 그의 손님
이었으리, 이름 하나였으리,
상처가 높이 핥아 올라간
장벽에서 식은땀으로 흘러내린 이름.
 
더듬더듬 따라 말할 세상: 1968년 11월 23일. 죽기 두 해 전 생일에 쓴 시로 생의 결산처럼 읽힌다.
 
시간의 뜨락 / 파울 첼란 
 
나팔자리
이글거리는
빈 텍스트 깊숙이
햇불 높이로
시간 구멍 속에.
 
너의 말을 들르라
입으로.
 
 
양극()
우리 안에 있다
깨어서는
넘어갈 수 없이.
잠자며 우리는 건너간다, 문 앞으로
긍휼의 문 앞으로.
 
당신에 부딪쳐 당신을 잃는다, 그게
내가 준 눈(雪) 위로.
 
말하라, 예루살렘이 있다고
 
말하라, 마치 내가 이것
당신의 백색(白色)이라는 듯
마치 당신이
내 것이기라도 한 듯.
 
마치 우리가 우리 없이 우리이기라도 한 듯
 
내가 당신을 넘긴다, 영원히
 
당신이 기도한다, 당신이 놓는다
우리를 풀어놓는다.
 
 
있으라, 무언가가, 나중에
당신으로 채워져
솟구쳐
어느 입가에 이르는 것.
 
사금파리로 부서진
광기(狂氣)로부터
나는 일어나
내 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 손, 단
하나의
동그라미를 자꾸 그리고 있는 모습.
 
 
크로커스, 손님
식탁에서 바라보노라니
기호를 감지하는
작은 망명지로구나
공유한 진실 하나의 망명지, 넌 뭐든
꽃줄기가 필요하구나.
 
 
너를 써넣지 마라
 
세계들 사이로는,
 
일어나라
의미들의 다양(多樣)에 맞서,
 
눈물 자국을 믿으라
삶을 배우라.
 
 
() 닫고, () 열고
 
여기서 빛깔들은
보호받아 본 적 없는
맨이마
유대인에게로 간다.
여기 떠오르고 있다
가장 무거운 사람이.
여기 내가 있다.
 
 
(파울 첼란 시선 <죽음의 푸가> 전영애 번역 끝)
 
첼란의 시는 침묵을 통해 극도의 경악을 말하고자 한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어떠한 서정시도 쓰일 수 없다는 말은 잘못이었다.
— 테오도어 아도르노
 
음지를 얘기하는 사람은 진실을 말하는 자이다. — 파울 첼란
 
그가 유대인이고, 그의 언어가 독일어라 할지라도,
시인이 시 쓰기를 포기하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 존 펠스티너
 
2차 세계대전과 아우슈비츠라는 참혹한 비극을 감당해야 했던 유대인으로서, 그 고통을 아름답고 밀도 높은 시어로 표현해 낸 20세기 독일의 대표 시인 파울 첼란의 시선집 『죽음의 푸가』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시선집은 1986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첼란의 시에 관한 이론서를 펴낸 전영애 교수가 30여 년 전 독일에서 번역해 놓은 시들을 2001년부터 10년 동안 틈틈이 다듬어 내놓는 것이다.
전후 독일 문단에서는 아우슈비츠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서정시 자체를 쓸 수 없다는 의식이 만연해 있었다. 유대인 학살을 자행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과 함께 인간에게 친숙했던 세계가 무너져 버렸는데 어떻게 인간이 다시 이 세상에 대해 시적으로 노래할 마음을 가질 수 있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문제와 문학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보았던 첼란은 자신이 겪은 참혹한 시대를 극도로 상징적이고도 초현실적인 시어로 그려 내며 아우슈비츠를 바탕으로 한 서정시를 쓰는 데 성공한다. 첼란은 전후 독일 문단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시인으로 평가받으며 1958년 브레멘 문학상, 1960년 뷔히너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번 시선집에는 첼란의 시집 아홉 권 『양귀비와 기억』(1952), 『문턱에서 문턱으로』(1955), 『언어창살』(1959), 『그 누구도 아닌 이의 장미』(1963), 『숨결돌림』(1967), 『실낱태양들』(1968), 『빛의 강박』(1970)과 유고 시집 『눈[]파트』(1971), 『시간의 뜨락』(1976)에서 추린 시 118편과 그의 시론을 엿볼 수 있는, 브레멘 문학상 수상 연설문과 뷔히너 문학상 수상 연설문, 유일하게 남긴 산문인 「산속의 대화」가 실려 있다. 특히 산문 「산속의 대화」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소개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발간된 첼란 시집 중 가장 많은 작품을 수록하였으며, 첼란의 시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시선 내에서도 작품을 추려 「죽음의 푸가」를 비롯한 대표 시를 맨 앞에 실었다. 다소 난해한 첼란의 시를 우리말에 최대한 밀착시켜 옮겼으며, 유난히 함축적인 그의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주석을 충실히 달았다.
 
 
■ 적의 언어로 시를 써야 했던 고통의 시인  
 
그런데 견디시겠어요, 어머니, 아 언젠가, 집에서처럼,
이 나직한, 이 독일어의, 이 고통스러운 운()?
—「무덤 근처」에서
 
첼란의 암울하고 고통스러운 시는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의 기억을 한평생 안고 살아야 했던 비극적 운명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가 처했던 가장 근원적 비극은 자신의 인생에 가혹한 상흔을 남긴 가해자의 언어로 시를 써야 한다는 데 있었다. 시인이 태어난 부코비나 지방은 이전에 합스부르크 왕령이었던 곳으로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이었다. 유대인으로 태어난 시인에게 독일어는 모국어인 동시에 자신과 부모, 친구를 죽인 ‘살인자들의 언어’였던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시는 모국어로만 쓸 수 있다고 믿었던 첼란은 결국 혈족을 죽인 자들의 언어이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언어, 끔찍한 어둠을 지닌 이 잿빛 언어를 자신의 시어로 택한다. 시인은 자신에게 가해를 입힌 이들의 언어로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봐야 하는 것은 물론 구원을 염원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아이러니에 봉착했음에도, 끝까지 시 쓰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점심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그걸 쓰고는 집 밖으로 나오고 별들이 번득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사냥개들을 불러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유대인들을 불러낸다 땅에 무덤 하나를 파게 한다
그가 우리들에게 명령한다 이제 무도곡을 연주하라
—「죽음의 푸가」에서
   
첼란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겼던 ‘아우슈비츠’를 가장 구체적으로 그려 낸 시가 바로 그의 대표작 「죽음의 푸가」이다. 그는 이 시에서 죽음을 ‘푸가’라는 음악 형식을 빌려 유희적으로 노래하며, 실재했던 끔찍한 ‘죽음’을 서정적인 ‘은유’에 담아낸다. 시인은 자신들이 판 무덤 앞에 꿇어앉아 총살당하고, 죽어 가는 동료들 앞에서 연주를 해야 했던 참혹한 유대인 포로수용소의 기억을 “검은 우유”를 마시고 “공중”과 “땅”에 무덤을 파며 “무도곡”을 연주하는 시적 상황으로 형상화한다. 시인은 이처럼 자신에게 상처 입힌 이들의 언어로 고통을 감당하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이 처한 한계를 수동적으로 견디는 것에서 나아가 적극적으로 한 차원 높은 경지를 이룩해 내는 인간의 ‘위대함’을 몸소 증명해 보인다.          
 
  
■ 비극의 시대를 향해 외친 ‘소리 없는 아우성’    
 
첼란은 어두운 현실 속에서 자신이 경험한 극한의 고통을 직시하여 군더더기 없이 분명한 언어로 형상화시킨다. 고통의 맨살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투명한 시어들 때문에 아픔은 더욱 선명하고 생생하게 다가온다.  
 
너희 나의 나와 더불어 불()
()된 말들, 너희
나의 똑바른 말들.
(중략)
우리 동요를 부르리, 그걸
네가 듣고 있어, 그 동요
( )들과 간()들이 있는, 인간들이 함께 있는, 그래,
뒤엉킨 덤불과
눈 한 쌍이
거기 함께
눈물- -
눈물로 함께 있는 그 동요를.
 
—「…… 좔좔 샘물이 흐른다」에서
 
암호문처럼 은유가 집약되어 있는 그의 파격적인 시어는 후기로 넘어갈수록 ‘파괴’되고 ‘해체’되어 간다. 하지만 침묵, 생략, 비약 등으로 조각 나 “불구”가 된 말들은 실제의 부정적인 시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의미에서 오히려 “똑바른” 말이다. 이를테면 위의 시에서 ‘인’과 ‘간’으로 조각 나 있는 낱말 ‘인간’은 파시즘 시대 독일에서 인간에게 가한 일을 연상시킨다. 첼란에게 언어와 현실은 늘 불가분 관계에 놓였다. 후기에 이르러 점점 조각 나고 불안정해졌던 시어처럼 그의 의식도 점점 흐려지고 분열되어 갔으며, 그는 결국 1970년 센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만다. 인간성이 말살된 참혹한 시대를 지나며 겪은 쓰라린 고통을 침묵의 시로 표현했지만 마지막까지 구원을 얻지 못한 이 비운의 시인은, 결국 생을 마감하며 스스로 침묵이 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오로지 진실한 손만이 진실한 시를 쓴다. 나는 손도장과 시 사이에 어떠한 근본적인 차이도 없다고 본다.(파울 첼란) 죽음의 문턱에 선 이가 남긴 이 손도장은 그 어떤 시들보다 묵직하고 진중하며 아름답다. 거기엔 극도의 고통을 견디고 살아남은 자만이 내뿜을 수 있는 강렬한 ‘생명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 고통의 시들은 지금 각자의 ‘아우슈비츠’에서 상처 받고 고통 받고 있을 고된 인생들에게 그가 헌정하는 슬픈 진혼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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