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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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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명시선 ( 1 )
2017년 08월 09일 14시 37분  조회:2579  추천:0  작성자: 강려
프랑스 명시선
 
1. 프랑스와 비용(1431~1463)
 
대유언서(발췌)
 
26.
아, 하나님, 어리석었던 젊은 시절
공부 열심히 하고
조신했다면
집과 포근한 잠자리가 있었을 것을
헌데, 오호라, 나는 악동(惡童)마냥
학교에서 도망질쳤지.
이런 글 적는 나의 가슴
찢어질 듯하구나
 
35.
어릴 적부터 나는 가난했다
돈 없고 미천한 집 태생으로
나의 아버지는 별 재산이 없었고
오라스라 불린 그의 아버지도 가난뱅이
가난은 우리 집 모두의 뒤를 쫓아다녔다
나의 조상들의 무덤 위에는
신이여, 그들의 영혼을 보살펴 주소서!
면류관도 왕홀(王笏)도 볼 수 없었소.
 
36.
가난을 한탄할 적마다
나의 속마음은 자주 나에게 타이른다
"이 사람, 그리 슬퍼하지 말게
그런 설움 또한 나타내지도 말게!
자네는 자크 커르 영감만큼 돈이 많지 않지만
가난하고 껄끄러운 옷을 걸치고라도 살아 있는 편이
생전에 고관이었다가
지금 호사스런 무덤 속에 썩고 있는 것보다는 낫네."
 
37
고관이었던 것보다 낫다구! 이 무슨 말인가?
이제는 오호라! 이미 대감이 아니란 말인가?
다윗의 말에 의하면
"영혼이 거하던 처소를 영영 알지 못하리라" 했으니까
이 이상 이 문제를 거론치 않으리라
그것은 죄인인 내가 관여할 바 아니므로
나는 이것을 종교가들에게 맡긴다.
바로 이런 일는 설교가들의 직책이니까.
 
38
곰곰이 자신을 생각해 보아라
나는 별이나 천체(天體)로 장식된 면류관을 쓴
천사의 아들이 아니다.
나의 아버지는 죽었고 하나님의 그의 영혼을 거두었으며
그의 육신은 무덤 돌 아래 누워 있소
나는 나의 어머니가 멀잖아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고
불쌍한 어머니도 그것을 잘 알고 있소
그리고 그의 아들도 오래 남아 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50
미남 파리스도 미녀 헬레네도 죽었다
누구나 죽는다, 죽어도 고통스럽게 죽는다
숨통이 꽉 막혀 죽는다
쓸개즙은 염통에서 터지고
그리고 땀을 흘린다. 끔찍한 땀을!
그러나 아무도 그의 고통을 덜지 못한다.
이 때 그를 대신하고자 하는
자식도 형제도 누이도 없기 때문이다.
 
51
죽음을 그를 떨게 하고 창백하게 만든다
코는 비뚤어지고 핏줄은 뻣뻣해지며
목은 부어오르고 살은 흐늘거리며
뼈마디와 신경줄은 늘어나고 벌려진다.
그토록 보드랍고 매끄럽고 향기로운
그토록 귀중한 여인의 육체여,
그대도 이러한 고통을 맞이하여야 하는가?
그렇소, 그렇지 않으면 살아서 천당으로 곧장 가야지.
 
 
왕년의 미녀의 노래
 
말해다오 어드메 어느 땅에 있는가!
아리따운 로마의 유녀(遊女) 플로라는,
아키피아드는, 그리고
그녀의 사촌동생 타이스는,
강물 위나 연못 위에서
소리나면 응답하던 그 에코는?
가히 초인간적인 미모를 지녔던 이 요정은?
그런데 지금은 어디 갔나 지난 해의 눈(雪)은?
 
어디 있는가 저 슬기롭던 엘로이즈는,
그녀로 인해 피에르 아벨라르는
거세되어 생-드니 수도사가 되었지
그의 고난도 결국 그의 사랑 때문
또한 어디 있는가? 뷔리당을
자루에 넣어 세느 강 속에
던지게 한 여왕은?
그런데 지금은 어디 갔나 지난 해의 눈은?
 
인어(人魚) 시렌느의 목소리로 노래하고
백합같이 희었던 블랑시 황후
발이 큰 배르트 태후, 그리고 비에트리스, 알리스
멘느 주를 다스렸던 아랑뷔르지스 백작 부인
그리고, 영국 군사들이 루앙에서 불태워 죽인
로넨느의 착한 처녀 쟌 다르크는
그녀들 지금 어디? 어디에? 성모 마리아시여!
그런데 지금은 어디 갔나 지난 해의 눈은?
님이시여, 그 미녀들 지금 어디 있는지
이 해에도 다음 해에도 묻지 마시오
그런데 지금 어디 갔나 지난 해의 눈은?
 
 
비용의 묘비명(墓碑銘)
     비용이 교수형 집행을 기다리는 그의 동료들과
     자신을 위하여 쓴 발라드 형식의 묘비명.
 
우리 죽은 뒤 살아갈 형제들이여
우리에게 냉혹한 마음 품지 말라
차라리 그대들 우리를 불쌍히 여길 때
신께선 곧 당신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리라
보라, 여기 우리들 다섯 여섯씩 목매달려
포식(飽食)으로 길러 온 육체는
이미 오래 전에 뜯어지고 썩어지고
우리들의 해골들은 흙이 되어 간다
아무도 우리들의 비운을 비웃지 말라
다만 신께 구하라 우리 모두의 죄를 용서해 줄 것을!
 
우리 비록 법으로 처형된 몸이나
그대들을 형제라 부름을 탓하지 말라
인간이 모두 옳은 생각만을 가질 수 없는 일
이는 그대들도 알고 있다
이미 우리는 죽은 몸이니 용서하고
성모 마리아의 아들께 기도드리라
우리에게 내리는 그의 은총이 마르지 않고
지옥의 불길에서 우리를 지켜 주도록
우리는 죽은 몸 누구도 우리를 괴롭히지 말고
다만 신께 구하라 우리 모두의 죄를 사해 줄 것을!
 
빗물은 우리를 적셔 씻겨 내고
햇빛은 우리를 말려 검게 태운다
까치와 까마귀는 우리들의 눈을 파내고
수염과 눈썹을 쪼아 낸다
우린 잠시도 쉴 때가 없다.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한없이 흔들리며
새 쪼아 먹은 몸은 골무보다 더 험상궂다
그러므로 행여 우리 같은 신세 되지 말고
다만 신께 구하라 우리 모두의 죄를 사해 줄 것을!
 
만백성을 주관하시는 왕자 예수시여,
지옥의 권세에 들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시고
그 곳에서 할 일도 갚을 것도 없게 하소서
사람들이여 이 일은 절대 비웃을 일이 아니니
다만 신께 구하라 우리 모두의 죄를 사해 줄 것을!
 
 
프랑스와 비용: 1431년 말이나 1432년 초에 파리 태생으로 되어 있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라다가 '성 베네디트' 교파의 기욤 드 비용이라는 신부집에 맡겨졌는데 비용이란 이름도 그가 기른 이 신부의 이름을 딴 것이다. 1452년 당시 소르본느 대학 문학부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얻었다. 그대로 나갔으면 그의 서사시에 있듯이 교직자로서 좋은 자리와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때부터 그의 난폭한 성질이 드러나 젊은 혈기와 더불어 위험한 장난, 패싸움, 도박, 그리고 민중 봉기에 가담하였다. 당시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 직후로서 강토는 황페해지고 도처에 도적과 살인과 방화가 잇달아 민심이 흉흉하던 때이고 당시의 학생이란 일종의 부랑자. 불한당이 많았으므로 비용도 이 때까지는 이런 부류에 속하였다. 1455년 어느 여름 저녁, 비용은 여자 문제로 인한 사소한 싸움 끝에 세르모아즈라는 신부를 돌로 쳐서 숨지게 했다. 이 사건 후 비용은 자취를 감추었다가 다음 해 그에 대한 사면장(赦免狀)이 나오자 파리로 되돌아왔다.그런데 그 해 12월 나바르 대학의 금고를 깨드리고 그 속에 든 돈자루를 훔쳐 간 도난 사건이 일어났다. 비용은 이 사건 며칠 뒤 파리에서 <소유언>이라는 작은 책자를 하나 써 내놓고 앙제르로 떠난다. 이 책에서 그가 파리를 떠나는 이유는 자기의 사랑을 배반한 한 여자에 대한 원한을 잊기 위하여, 그의 말을 빌면  "사랑이라는 감옥의 쇠사슬을 끊기 위하여"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나바르 대학의 도난 사건은 범인들이 붙잡히고 그 중 하나가 자백하여 비용이 일당 5명 중의 하나라는 것이 드러났다. 비용은 도난당한 금화 120 에퀴의 변상을 조건으로 파리로부터 추방령을 받았다. 이로 미루어보아 <소유언>이란 책자는 결국 자기의 범죄를 은페하려는 데 목적이 있어 보이나 이 시집 속에는 그의 시인으로서의 기질과 재질이 마음껏 발휘되어 웃음과 눈물과 야유와 풍자가 교차하는 주옥 같은 시가 많이 들어 있다.
 추방령을 받은 이후부터 그의 신세는 완전한 부랑자, 거지가 되어 앙제르, 부르지 블르와 등지를 전전한다. 블르와에서는 한때 시인 왕족 샤롤르 도를레앙의 식객이 되기도 하였다. 그 후 그의 행방은 묘연하여졌는데 사건 후 5 년이 지난 1461년 그가 다시
묑-쉬르-르와르 감옥에 갇혀 있었던 것이 기록에 나타나 있다. 그 지방 주교의 명으로 투옥되었는데 그 근처에서 일어난 절도 살인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마침 이때에 왕위에 오른 루이 11세가 묑 근처를 방문했을 때 모든 죄수에게 사면령을 내리게 되어 비용은 풀려나 다시 파리로 돌아오게 된다. 그의 나이 겨우 30세이나 그 동안 겪은 가난과 고생과 방랑과 감옥살이로 심신이 모두 병들어 있었다. 이제 죽음의 예감도 깊이 들었던지 그는 그의 생활을 총람하는 <대 유언>을 썼다. 이는 그의 대표작이다.
 이 시집도 <소유언>과 같이 자기를 미워하는 자는 은혜를 베푼 사람들에게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고 있다. 자기를 감옥에 보낸 디보 도시니 주교에게는 무서운 저주를 퍼붓고 자기를 사면해 준 루이 11세에게는 감사를 드리고 있다. 그러나 유언이나 유품 분배는 하나의 구실에 불과하고 그는 이 가운데 자신의 생을, 후회를, 소망을 이 세상에 대한 분노와 조소를 강렬하게 토로하고 있다. 그리고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와 더불어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여 신의 자비를 빌고 있다. 한 마디로 비용은 이 가운데 그 자신을 투사함으로서 인간의 모든 것, 그의 약점과 죄악, 그의 사랑과 즐거움, 그의 소망과 믿음, 인생의 무상, 죽음의 가혹함 등을 꾸밈없이 성실하게 또한 감동적으로 보여 준다.
 비용의 불행과 불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 해 또 다시 우연한 패싸움에 끼어 들어 샤를레 감옥에 투옥된다. 전과자로 가중되어 교수형의 선고를 받는다. 비용은 당신의 최고 재판소에 탄원서를 내어 겨우 사형은 면했으나 10년 동안 파리 입성을 금하는 추방령을 받았다.
 이후부터 그의 이름은 역사상의 기록이나 사람의 입에서 영영 사라진다. 영국에 가서 살았다고도 하고 프와투에서 신비극을 쓰고 또 상연했다는 말이 있으나 확인할 수 없다.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이 된 비용을 상상할 수도 있으나 그것을 뒷받침할 근거는 전혀 없다. 병과 가난으로 불쌍하게 죽었다는 것이 가장 가능성이 많다.
 
 
2, 피에르 롱사르(1524~1585)
 
 
님에게 꽃다발 보내오니
(마리에게 바치는 소네트)
 
활짝 핀 이 꽃들 꽃다발로 손수 엮어
님께 지금 보내오니
이 꽃들 이 저녁에 따지 않으면
내일이면 땅 위에 떨어지리.
 
이는 그대에게 분명한 교훈되오
그대 미모 지금 한창 꽃핀 듯 화려하나
멀지 않아 시들어져 떨어지오
홀연히 사라지는 낙화(落花)와 같이.
 
님이여, 세월은 가고 자꾸만 가오
아니, 가는 것은 세월 아닌 우리들 인생
멀지 않아 우리들도 북망산 아래 누우리다.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이 사랑도
우리 사후(死後) 말하는 사람 없으리다
그러니 그대 모습 아름다운 지금 이 내 몸
사랑해 주오.
 
 
늙어짐
(엘렌드에게 바치는 소네트)
 
 
그대 늙어 저녁 촛불 아래,
불가에 앉아 실 뽑고 감을 때,
나의 노래 읊으며 감탄하듯 말하리라:
"롱사르는 내 아름다운 시절 날 찬미했었지."
 
이 때 일에  지쳐 반쯤 잠든 그대 시녀들도
이 소식 듣고,
불멸의 찬사로 그대 이름 축복한
나의 이름 소리에 깨어나지 않는 자 없으리라.
 
이미 나는 황천(黃川)에 내려 뼈 없는 망혼(亡魂)이 되어
도금양(挑金孃) 그늘 아래 몸을 쉴 때
그대는 난롯가 쭈그린 노파되어,
 
나의 사랑과 이를 뿌리친 그대 교만을 뉘우치리라.
진정 그대에게 말하노니 오늘을 사시오  내일을 기다리지
   말고:
꺽으시오 이 날부터 인생의 장미꽃을
 
 
최후의
 
 
이제 뼈만 앙상한 내 몸은 해골과 같아
살은 빠지고 힘줄은 늘어지고 근육은 물러나고 바싹 마른
   몸에
죽음의 화살은 가차 없이 날아와 박혔네
몸이 떨려 차마 내 팔을 바라볼 수도 없구나.
 
아폴론과 그 아들, 두 위대한 명의(名醫)도
내 병은 고칠 수 없어 그들의 의술도 내겐 소용 없겠지
잘 있거라, 즐거운 태양아! 나의 눈은 벌써 가려져 간다.
내 몸은 아래로 내려간다 만물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곳으로.
 
어느 친구가 이 앙상한 모습 보고
자리에 누운 나를 위로하고 내 얼굴에 입맞추고
죽음으로 잠들어 가는 내 눈을 닦아 주며
 
슬프고 눈물 괸 눈으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잘 있게나, 나의 동무들! 잘 있게나 나의 친구들!
내가 먼저 가서 자네들 자리 미리 준비하겠네
 
 
피에르 롱사르(1524~1585)
 
 16세기에 들어서면 유럽에 르네상스라는 새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그 진원지는 이탈리아.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와 1세가 즉위한 다음(1515) 이탈리아로부터 많은 예술품들과 예술가, 학자들을 데려와 새로운 학문과 예술을 널리 퍼지게 한다. 프랑스와 1세도 퐁텐느블로나 르와르  강변에 많은 아름다운 이탈리아 식 궁성을 지어 그 안에서 연극, 무도회, 음악회 등을 열어 생의 즐거움을 구가함으로써 르네상스의 꽃을 피우게 된다.
 롱사르는 이 시절에 생을 즐긴 사람이다. 시골 귀족 가문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2살 때 프랑스와 1세의 블르와 왕국에 시동(侍童)으로 들어가 장래에는 군인이나 외교관이 되고자 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중병을 앓은 끝에 반귀머거리가 되어 그의 꿈은 깨지고 말았다. 그는  그 대신 문필로 후세에 이름을 남기기로 결심하고 시골로 돌아가 고대 문학을 열심히 공부했다. 계속하여 파리에 올라와 당대의 석학 도라(Dorat)의 지도 아래 약 5년간 고대 문학 특히 그리스 시인들의 작품을 모방한 시를 썼으나 차츰 독창적이며 순수하고 서정적인 시를 쓰게 되었다. 그가 16세 되던 해부터 30대 전반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작은 절정에 이르렀으며 그의 이름은 궁중과 시단에서 유명하여졌고 그의 시집은 계속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는 당대의 유명한 시인 6명과 더불어 <플리아드>라는 시파(詩派)를 조직하여 프랑스의 언어와 시를 더욱 세련되고 우아하게 만드는 데 공헌하기도 했다. 이로써 그는 당대의 버질(Virgil)이라는 평을 들었으며 자타가 공인하는 시의 왕자가 되었다.
 그의 행운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앙리 2세는 그를 궁중 시인으로 임명했다. 비록 그의 공식적인 임무는 미사 때 왕에게 성수(聖水)를 떠 바치고 왕이 무릎을 꿇을 때 방석을 펴는 일이었으나 그의 주된 직책은 왕실에서 거행되는 모든 축제 행사를 주관하는 일이었다. 공이 있는 궁신이나 신하들의 찬사를 시로 쓰고 중요한 서한, 사랑의 편지도 대필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에게 명예와 더불어 큰 재산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특히 이름 난 미인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다. 그 까닭은 그의 시 속에 한번 음미되면 그녀의 이름과 재덕과 미모는 영원불멸하게 되기 때문이다.
 성품이 관대하고 우아하고 때로 용감하기도 한 그는 역대 왕의 총애를 받았고 왕실 귀현과 숙녀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영광과 행복 속에 살았다. 그러나 롱사르는 사랑의 시인만은 아니었다. 16세기 후반 프랑스가 신구 종교의 싸움으로 두 쪽으로 갈라져 싸운 내란 시절, 그는 위험을 무릎쓰고 이 싸움에 가담하였다. 처음에는 양파의 잘못을 지적하며 관용과 국민적 단합을 호소했고 이에 실패하자 카톨릭 편에 서서 문필로써 싸웠다. <논설(1562~1563)>이라는 3부작이 그것으로 그 논조는 당당하고 성실하여 반대파로부터도 존경과 공감을 얻었다고 한다.
 51세로 왕실 시인의 자리를 물러나 시골에서 은퇴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지병인 통풍의 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계속 시를 쓰고 작품 퇴고를 쉬지 않았다. 유명한 <마리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들> <엘레는에게 바치는 노래들> 등은 이 시절의 것이다.
 그는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는데 그의 장례식은 죽은 지 2개월 뒤 파리에서 일찌기 볼 수 없을 만큼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그런데 이 풍부하고 다양하고 아름다운 그의 노래들이 그후 200년 동안 전혀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묻혀 있었던 일은 문학사상 기이하고도 불행한 일이었다.  이는 그리스 로마 문학을 모델로 한 그의 작품에 대한 말레르브,브왈 등 국수파의 반발이었으며, 조화, 명확, 규칙을 금과옥조로 하는 이들이 롱사르의 독창성, 서정성과 감수성을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다. 석학 아르노르 같은 사람도 '롱사르의 한심스러운 시'라고 할 정도였다. 19세기의 낭만파 문학이 일어날 때야 비로소 그의 진가가 알려졌는데 이에는 특히 당대의 비평가 생트-뵈브의 역할이 컸다. 그 후부터는 문학파마다 롱사르를 자기파의 선구자로 삼으려고 할 정도였다.
 
죽음과 나무꾼 / 퐁넨느
 
 
불쌍한 나무꾼 하나 온통 나뭇가지에 뒤덮여
나뭇짐과 쌓인 나이 아래 짓눌려
끙끙거리며 굽은 허리에 무거운 발걸음으로
연기에 그을린 오두초막집으로 돌아가는 중
드디어 힘이 빠지고 고통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나뭇짐을 내려 놓고 제 가엾은 신세를 곰곰이 생각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 지금까지 무슨 낙이 있었나?
둥근 땅덩이 위에 나보다 더 가련한 인생 있을까?
뻑하면 식량이 떨어지고 한시도 쉴 새가 없다
여편네와 자식들 병사들과 세금
  빚장이와 부역(賦役)으로
나야말로 불쌍한 인간의 완전한 본보기가 아닌가
나무꾼은 죽음을 부른다. 죽음은 지체 없이 대령한다.
  그에게 무엇을 해 드릴까 묻는다.
  "할 일이란" 그는 말한다. "나를 도와
이 짐을 다시 지워 주시오 당신이면 금방 하리다"
 
  죽음은 와서 모든 고통을 덜어 준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있는 곳에서 꼼짝 말자
  죽기보다는 괴로운 게 낫지
  이것이 인간이 만들어 낸 표어(標語).
 
 
이리와 / 퐁넨느
 
 
이리 선생 한 분 피골(皮骨)이 상접하게 되었는데
  이는 견공(犬公)들이 그만큼 집을 잘 지킨 까닭,
이리 선생이 우연히 힘 세고 잘생긴 맹견 하나를 만났지요.
살이 오르고 털에 윤기가 나는 이 맹견은 잠깐 실수로 길
  을 잃었던 것,
달려들어 갈기갈기 찢는 것은
이리 선생의 간절히 바라는 것이나
그러자면 일전(一戰)을 각오해야 하며
이 맹견 모양을 보아 하니
일대 방어전을 벌일 성 싶다.
    그러므로 이리 선생 겸손히 견공 가까이 가
말을 건네고 살이 보기 좋게 쪄서 부럽다고
     찬사을 한바탕, 견공 대답하길
     "나같이 살 오르기가 소원이시라면
그야 다만 선생 마음 먹기에 달린 일
숲을 떠나시요 그게 좋으리다
선생의 그 곳 동료들의 신세는 말이 아닙니다.
불쌍하고 가엾은 거지 신세들
굶어 죽기에 꼭 알맞은 형편이죠
그 이유야 뻔하죠,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있나, 거저 얻
어 먹는 밥이 있나,
모든 것은 목숨 걸고 싸워야 하니까요.
날 따라오시오. 훨씬 신세가 편하게 되리다"
이리 선생이 말한다 "그럼, 나는 무얼 하면 되겠소?"
"별로 하는 일 없지요,"라는 견공 대답. "몽둥이 든 자나
거지들은 쫓아 내고
집안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 주인에게는 맘에 들게
꼬리를 흔들면 당신의 보수는
갖가지 푸짐한 상물림
병아리 뼈에다 비둘기 뼈
주인의 애무는 말할 것도 없고"
이리 선생, 이미 고져친 팔자를 머리에 그리며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길을 가다가 문득 견공의 목덜미에 털 빠진 자국을 보고
이리 선생이 묻기를 "이게 뭐요?" - "아무것도 아니요"
- "아무것도 아니라니, 뭐요?" "대수롭지 않을 일"
- "그렇지만 좀 압시다" - "선생이 보신 건 아마 나를 잡아
매었던 끈 자국인가 보오"
- "잡아 매다니" 이리 선생의 말: 그럼 댁은 가고 싶은
곳에 달려갈 수 없단 말이요? - 견
공: "그럴 때도 있지만 그게 뭐 대수롭소?"
- 대수롭다마다요, 그 값을 치른다면
귀댁의 고량진미도 난 원치 않고
금은보화를 준다 해도 난 원치 않소
이 말 끝내자 이리 선생 출행랑을 칩니다. 지금도 달립니다.
 
 
토끼와 개구리들 / 퐁넨드
 
 
토끼 생원 제 굴 속에서 몽상에 골똘합니다.
(하기야 굴 속에서 몽상 외에 별 할 일이 없지만)
이 토끼 생원 깊은 수심 속에 빠져 있습니다.
이 짐승는 원래 심란한 성질인데다 겁이 많아 스스로를 괴롭힙니다.
"겁 많게 태어난 사람들은 정말 불행하지"
하고 한탄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몸에 이롭다는 음식을 먹을 수가 있나
맘 놓고 즐길 수가 있나 항상 전전긍긍합니다.
이것이 내가 사는 생활: 이 고약한 겁 때문에
나는 눈뜨고 잘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고치시오"라고 어떤 머리 좋은 사람이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겁이라는 게 고쳐지는 겁니까?"
그런데 사실은 인간들도 나처럼
겁장이라는 생각도 든다고
토끼씨는 추리합니다
이 동안에도 그는 주위를 살핍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수상하고 불안합니다.
한 줄기 바람 한낱 그림자 하챦은 모든 것들이 열을 오르게 합니다.
이 우울한 동물이
이런 생각에 골몰할 때
어디서 바스락 소리, 이는 그에게
자기 굴 쪽으로 도망치라는 신호
달려가다 연못가를 지나갑니다
갑자기 개구리들 저마다 물 속으로 뛰어듭니다
그들도 그들의 깊은 토굴 속으로 되돌아갑니다
아니! 토끼 군이 말합니다. 나도 남이 나한테 하듯
남에게 할 수 있다고! 나의 출현이
또한 사람들을 무섭게 만든다고! 온 진지(陳地)에 비상사태를 편다고!
도대체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나한테 생기는가?
아아! 내 앞에서 벌벌 떠는 동물들도 있다니!
나야말로 그들에겐 용맹 장군 아닌가!
알았다. 이 세상에는 아무리 겁장이라도
그보다 더한 겁장이가 있구나!
 
드라 퐁넨느: 프랑스의 어느 작가가 라 퐁넨느를 가리켜 비도덕적인 모랄리스트이며 아마추어 시인이지만 가장 완벽한 시를 쓴, 그의 우화 속에 나오는 동화적인 인물이라고 평하였다. 그는 본의 아니게 프랑스의 태양왕 루시 14세 치하의 기라성 같은 문인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현재까지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고 애독하는 시인이 되었다.
 그는 명예나 지위에 대한 욕망이라든가, 이해타산, 남의 평판 같은 데는 전혀 관심이 없는 비실제적인 사람이었다.
 고향에서 아버지가 물려준 유력한 산림관(山林官) 자리도, 그가 공부한 변호사 자리도, 성직자 자리도 마다하고 시골에서 유유자적, 산책과 명상과 책 보는 일만 즐겼다. 그가 26세 때 아버지가 결혼을 시켰고 부인과의 사이에 어린 자식도 있었으나 그는 35세 때 홀연히 가정을 버리고 단신 파리로 올라와 버렸다. 이 일로 인하여 당시는 물론 후세에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무책임한 사람으로 비난을 받았으나 본인은 별 잘못을 느끼지 않는 듯 했다.
 반면 그의 아이 같은 청순한 마음과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은 많은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아, 아무 밑천이나 준비 없이 파리에 와서 이후 일생 동안 당시의 유명한 고관과 귀부인들의 보호와 총애 밑에 살았다. 그렇다고 그들의 식객이나 종자로서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의 순수한 인간성과 재질로 인해 그들의 애정과 존경을 받았다. 또한 라 퐁텐느로서도 이들에 대하여서는 끝까지 애정과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고 때로는 신변의 위험이나 고난을 무릎쓰고 이들의 안위나 명예를 위하여 진력한 용기있는 사람이기도 하였다. 또 당시의 유명한 문인과도 친교를 맺어 라신느, 몰리에르, 브왈로와는 평생 변치 않는 우정을 가졌다. 이렇게 보호자와 친구들 사이에 태평스럽게 지내며 기회 있는 대로 여러 내용과 형식의 작품을 생각나는 대로 썼으며 친구들의 주선으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기도 했다.(1684).
 대기(大器)는 만성(晩成)이라고 그의 시재(詩才)는 상당히 느리게 성장하여 그의 이름을 후세에 길이 빛나게 한 그의 작품, 즉 우화 제1집이 나온 것은 그가 47세 때였다. 그 후 다시 10년 뒤인 57세 때에 제2집이, 그리고 마지막 편인 제3집이 나온 것은 그가 74세의 나이로 죽기 1년 전의 일이다. 그러므로 그의 우화집은 장장 27년 동안 씌어졌고 출판된 것이다. 그러나 이 한 권의 우화집은 그의 이름과 함께 프랑스 문학에서 영원히 남게 될 걸작이다.
 그의 만년은 그의 보호자이던 사블리에르 부인이 죽자 데르바르 부인의 초청을 받아 그녀의 저택에서 인생의 모든 영예와 행복을 즐기며 지내다 1695년 74세로 생을 마쳤다.
 그의 작품을 떠난 개인적 생활은 일생을 권세가나 귀부인 비호 아래 살아가며 인생의 목적이나 책임을 모르고 일종의 향락주의자의 무위도식의 생활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도 스스로 이것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으로 "어느 게으름뱅의의 묘비명"이란 제목으로 일종의 자기 묘비명을 썼다.
 
  쟝은 밑천과 수입을 모두 까먹고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갔노라.
  그의 소용 없는 것을 보물인 양 간직했었다.
  시간만은 잘 쓸 줄 알았는데
  두 부분으로 나누어 한 쪽은 잠자는 데
  또 한 쪽은 무위(無爲)에 썼다.
 
 그러나 이러한 묘비명은 다분히 자조적이며 유머러스한 것으로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도리어 권문대가의 비호 아래 살면서도 그의 마음 속에서는 사회적 양심이 잠자지 않고 있었으며 만사에 흥미와 열의가 없는 그의 태도 속에서도 관찰의 눈은 쉬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17세기 프랑스 귀족 사회의 가식, 불의, 모순을 모르지 않았으며, 인간성의 비굴, 허위, 간교 등을 너무나 생생히 보았고 느껴 왔고 겪어 왔다. 다만 그는 이러한 자신의 관찰이나 생각을 공공연히 직접적으로 나타내려고 하지 않았다.(시대가 그것을 용인하지 않았고 그에게 그러한 정열도 없었다.)따라서 그는 간접적이며 우회적인 표현을 통하여 그의 사상이나 인생관, 철학을 나타내려고 하였다. 이 우회적인 표현 수단이 바로 '우화'였다고 할 수 있다.
 
네에레 / 앙드레 셰니에
 
 
그러나 아름다운 백조가 죽음 앞에
마지막으로 탄식하며 그 부드러운 목소리로,
곧 끊어져 버릴 그의 목소리로
떠나기 전, 인생에 이별을 고하며 노래하듯
그녀는 슬픔과 죽음이 가득 찬 눈에
창백한 모습으로 최후의 힘을 다하여 입을 열었다:
"아아, 그대들 세베투스 강을 배회하는 나이아테스의 요
  정들이여
나의 무덤 위에 그대들의 금발의 머릿단을 잘라 주어요.
잘 있어요, 나의 클리니아스; 그대의 마음에 들었고
그대를 사랑한 나를 그대는 다시 보지 못할 거요.
오오, 하늘이여, 오오, 땅이여, 오오, 바다여, 들과 산과
  바닷가여,
꽃밭, 노래하는 숲, 골짜기와 험난한 동굴이여
그로 하여금 자주, 그로 하여금 항상 기억켸 하라
네에레, 그의 모든 행복, 네에레 그의 모든 사랑
오오라, 그가 나의 네에레라고 부른 이 네에레는
그를 위하여 죄인되어 어머니를 버렸고
그를 위하여 도망질치며 이곳 저곳으로 헤매었고
사람들의 눈앞에 차마 얼굴도 들지 못하였지요.
오오! 헬레네의 두 형제의 깨끗한 별이
그대의 뱃전 아래 이오니아의 파도를 잔잔케 하거나
페스툼 해안가의 그대의 정원이
그대의 정성스런 손길 아래 해마다 두 차례씩, 장미꽃으
  로 덮일 때
석양에 그대 마음 외로와져
조용하고 부드러운 명상에 빠지면
그러면, 나의 클니아스여, 나를, 나를 불러요,
나는 오리다, 나는 그대에게 날아오리다.
떠다니는 내 영혼은 나뭇잎새들을 지나오면서
떨 것입니다, 바람 위에 혹은 어떤 구름 위에
그대는 보리다, 내 영혼이 내려오는 것을, 혹은 바다 한
  가운데서
꿈과 같이 솟아올라 공중 속에서 빛나는 것을
그리고 언제나 부드럽고, 다정하나 한 맺힌 내 목소리는
떠나가며 그대의 기울인 귓전을 스칠 것이외다."
 
 
젊은 여수(女囚) / 앙드레 셰니에
 
 
"새로 돋은 이삭은 낫의 방해를 받지 않고 익어 가며;
포도알들은 압착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여름내
  달콤한 새벽의 선물을 마신다;
포도처럼 아름답고 이삭처럼 영롱한 나는
아무리, 지금 이 시간 불안과 슬픔이 있다 해도
  아직 죽고 싶지는 않다.
 
냉정하게 죽음을 찾아가는 냉혈한도 있으리라
그러나 나는 울며 또 바란다, 모진 폭풍이 불면
  나는 머리를 숙였다 다시 든다.
괴로운 날들이 있으면 지극히 행복된 날들도 있는 법!
아아, 쓴 뒷맛 안 남기는 꿀이 어디 있었으며
  폭풍이 불지 않는 바다 있었던가?
 
무성한 몽상이 나의 가슴 속을 채우고 있어
감옥의 벽이 무겁게 누른다 해도 소용 없다
  나에게는 희망의 날개가 있으므로
잔악한 새잡이의 그물을 빠져 나와
밤 꾀꼬리는 넓은 하늘에서 더욱 경쾌하고 더욱 행복하게
  노래 부르고 또 솟구쳐 오른다.
 
내가 죽으리라고? 나는 편안히 잠들며
또 편안히 눈 뜬다: 자나깨나
  나에게 후회는 없다.
일어나면 나를 반기는 모든 눈에 웃음이 떠오르고
감방 속의 내 모습은 절망한 얼굴들 위에
  거의 기쁨을 소생케 한다.
 
나의 아름다운 인생 행로의 종점은 아직은 너무나 멀어
나는 지금 출발할 뿐, 길 양쪽에 늘어선 느릎나무도
  나는 이제 그 몇 그루를 지나왔을 뿐
겨우 시작된 인생의 향연에서
아직 내가 든, 가득 찬 술잔에
  단 한 순간 입술을 대었을 뿐.
 
나는 인생의 봄일 뿐, 수확의 가을을 보고 싶다.
그리고 계절에서 계절로 움직이는 태양처럼
  나는 나의 한 해를 다하고 싶다.
나무 줄기 위에서 빛나며 정원의 자랑인 나는
빛나는 아침 햇살밖에 보지 못하였으니
  나는 나의 하루를 다하고 싶다.
 
오, 죽음이여 그대는 기다리라; 떠나가라. 멀리 가버리라
가서 수치와 공포와 챙백한 절망이 괴롭히는
  마음들을 위로하라.
나에게는 아직 팔레스 신의 푸른 안식처와
입맞춤의 사랑이 있고 풍류의 무즈 신이 있으니
  나는 아직 죽고 싶지 않다."
이리하여 슬프고 갇힌 내 거문고는
젊은 여수(女囚)의 이 탄식, 이 목소리, 이 소망을 듣고
  깨어났다.
그리하여 지루한 나날의 짐을 떨어 버리고
그녀의 사랑스럽고 천진한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아름다운 시구(詩句)에 담았다
 
나의 감방 격조 높은 증인인 이 노래들은
학문적 여가를 즐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아름다운 여인이 누구였나 찾게 하리라;
그녀의 얼굴과 말에는 우아한 기품이 있었으며
그녀의 옆에서 나를 지낼 사람들은 그녀와 같이
  저들의 생이 끝남을 보기 두려워하리라.
 
 
이얌므 8 / 앙드레 셰니에
 
 
사람들은 산다; 사람들은 비열하게 산다. 어찌하겠는가?
  그럴 수밖에 없는 걸;
    비열한 자들도 먹고 자야 하니까.
이 곳에서도, 이 울타리 속에서, 우리들이 죽음 앞에 풀
  을 뜯고
    단두대 작도가 우리들을 제비 뽑는 이 곳에서도
  허튼 수작, 어리석은 자들의 음모 따위
노래를 부른다; 노름을 한다; 치마를 올린다;
  유행가를 부르고 재담을 한다;
어떤 자는 바람을 넣은 공을 밀어 내어
  지붕과 창문 위에서 튀게 한다.
속이 빈 공이라면 7백명의 저속한 무뢰한들의 연설이 그
  러하고
  그 중에서 바레르라는 자가 제일 유식한 자.
다른 자는 달리고 또 어떤 자는 뛰고 정치가 이론가들은
  고함 지르고 마시고 웃는다.
갑자기 쇠돌쩌귀 위에 문 여는 소리가 삐걱거린다.
  우리들은 호랑이 판사 나리들의
징발관이 나타난다. 오늘 단두대 칼이 부르는
  밥은 누구일까?
모두 부들부들 떨며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는 아직
  자기 차례가 아닌 것을 알고 기뻐한다---
 
 
앙드레 셰니에(1762~1794): 1794년 6월 25일, 지금의 파리 콩코르드 광장에서 앙드레 셰니에는 26명의 사람들과 함께 단두대의 칼날 아래 목이 떨어졌다. 그의 나의 32세였다. 이 때에 누구도 그들이 한 시인을, 아니 한 위대한 시인을 죽였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만큼 한때 혁명가였던 이 사람을 시인으로 아는 사람은 없었고 그의 작품도 발표된 적이 없었다.
  그가 단두대에서 사라진 지 25년이 지난 1819년 라쿠슈라는 출판사에서 그의 작품이 간행됨으로써 비로소 그는 갑자기 위대한 시인으로, 특히 사막 같은 18세기 문단에 솟은 유일한 종려나무라는 절찬을 받았다. 특히 당시에 낭만파 시인들은 그들의 선구자라고 환호성을 올렸고, 앙리 드 레니에는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롱사르, 위고, 셰니에의 이름을 꼽을 정도였다.
  앙드레 셰니에는 1762년 콘스탄티노풀에서 당시 이 곳에 프랑스 영사로 부임해 있던 아버지와 그리스 태생의 아름답고 교양 있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그는 그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영향으로 그리스의 문화와 문학에 대한 애착과 동경을 가졌다. 그 후 파리로 돌아온 뒤에는 사교가이기도 한 어머니가 그녀의 살롱에 많은 문인, 학자, 다비드 같은 유명한 화가를 손님으로 맞이하였으므로, 젊은 셰니에는 이 모임에 자주 참석하였고 그의 문학에 대한 관심과 정열도 높아졌다. 이 때에 그는 그리스 시가를 본뜬 몇 편의 시를 썼다.
  그가 25세  때 프랑스 대사관의 서기관으로 런던으로 가게 되었는데 이 2년에 걸친 영국 생활은 그에게는 무척 고통스럽고 무료하고 적적하였던 모양이다. 그는 이 망향의 슬픔과 고적한 생활을 달래기 위해 방대한 작품을 계획하고 "헤르메스"와 "아메리카"라는 두 작품을 썼다.
  2년이 좀 넘어 1790년 그는 꿈에도 못 잊던 프랑스에 돌아왔다. 때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아 파도와 불이 소용돌이치는 격동기였다. 젊고 정열에 넘치는 셰니에는 이 와중에 뛰어들어 열렬한 혁명가가 되어 변혁과 자유를 찬양하는 노래와 시를 썼다. 그러나 그는 자유와 동시에 정의와 질서를 사랑하는 온건주의자로서 공포 정치로 치닫는 자코뱅의 과격한 행동을 비판 공격하고 차츰 루이16세의 옹호파와 협력하게 된다. 이리하여 그는 혁명파에 의하여 반동파, 인민의 적으로 규정되고 루이 16세가 처단된 뒤에는 베르사이유 교외에 숨어서 지내다가 1794년 3월 파리에서 체포되어 생 라자르 감옥에 수감되었다.
  감옥 속에서도 그는 굴하지 않고 몰래 12편의 이얌브라는 형식의 풍자시를 써서 자코뱅의 폭정과 독재를 맹렬히 공격한다. 이 원고를 그는 세탁함 속옷 속에 숨겨 자기 아버지에게 보냈다.감옥에 들어온 지 약 4개월 뒤 인민의 적이라는 죄목으로 그는 단두대위에서 사라진다. 그가 죽은 지 이틀 뒤에 그의 적이던 로베스피에르도 같은 형장에서 사라졌다.
 
  그는 비록 32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으나 그가 남긴 작품은 그 자체로 보나 그 작품들이 후세에 미친 영향으로 보나 매우 중요하다.
  그는 당시의 사회 환경이나 가정 교육으로 보아 자연히 그리스의 고대 문화가 문학에 젖고 심취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의 시(특히 초기의 것) 가운데는 헬레니즘의 취미 사상이 가장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다. 그러나 셰니에의 독창적인 점은, 고대 세계에 안주하지 않고 차츰 그가 살고 있는 시대와 사회를 자신의 풍부한 감수성과 열정으로 가지고 살았으며 그것을 고대의 형식미와 조화시켜 표현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이 세기를 넘어 아직도 기억되고 있는 까닭은 그가 시대의 감각, 감정, 사상,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성실하고 힘차게 표현한 데 있다. 또한 17세기, 18세기의 프랑스의 시가는 감정이 마르고 개성이 없어 귀족이나 풍류객들이 즐기는 말의 기교나, 언어의 유희에 불과하였다. 이 메마른 땅에 셰니에는 마음을 불러들였다. 그의 유명한 말에 "기교는 시구(詩句)를 만들 뿐 마음만이 시인이다"가 있다. 이는 바로 말의 기교가 아니라 마음의 표현이 시를 이룬다는 새로운 태도로, 앞으로 올 낭만파의 구호가 된다. 한편 그는 문학에 있어서 개성과 마음을 중요시하였지만 그가 이어받은 고대 그리스-로마 시가의 미의 이상인 우아와 절도, 형식과 내용의 조화, 조형미와 음악성의 융화를 잊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고전성이 또 후에 파르나스 파의 선구가 된 것이다.
 
나비 / 알퐁스 라마르틴느
 
 
봄과 더불어 태어나 장미와 함께 죽으며
하늬바람 날개에 실려 맑은 하늘 속을 헤엄치며
겨우 피기 시작한 꽃가슴에 앉아 하늘거린다
향기와 빛과 창공에 취하고
아직 젊은 몸에 날개의 분가루를 뿌리면서
한 줄기 바람처럼 무한한 창공으로 날아가는 것
이것이 나비의 매혹된 운명.
이는 결코 쉴 줄 모르고
만사를 스쳐 가나 만족됨이 없어
결국 쾌락을 쫓아 하늘로 되돌아가는 인간의 욕망 같이.
 
 
호수 / 알퐁스 라마르틴느
 
 
아아, 이렇듯 항상 새로운 기슭으로  밀려가고
돌아오지 않는 영원한 밤 속으로 실려 가는 우리들은
일월(日月)의 바다 위에 단 하루도
   닻을 내릴 수 없단 말인가?
 
오, 호수여! 세월은 이제 겨우 한 해의 운행을 끝냈을
  뿐인데
그녀가 와서 다시 보았을 정다운 물가에
보라, 내가 홀로 이 바위 위에 앉았노라.
  너도 보았지. 그녀가 와서 거기 앉던 것을 !
 
너는 그 때도 이렇듯 깊은 바위 밑에서 울부짖고 있었노라
너는 그 날도 이렇듯 바위 모서리에 부딪쳐 깨지고 있었
  노라.
그 날도 이렇게 바람은 너의 파도 거품을 그녀의 너무나
  사랑스러운 발 위에 끼얹고 있었노라.
 
어느 날 저녁, 너는 기억하는가? 우리는 말없이 배를 저
  어 가고 있었다.
물결 위와 하늘 아래 저 멀리서 들리는 것이라곤
장단 맞춰 너의 아름다운 수면을 치는
  노 젓는 이의 소리뿐이었다.
 
갑자기 이 세상 소리 같지 않은 음향이
홀린 듯한 기슭에서 메아리친다.
불결도 귀기울인 채 나에겐 정다운 목소리가
  이런 말을 떨어뜨렸다.
 
"오오, 시간이여, 너의 날개를 멈추어라! 그리고 행복의
  순간들이여
    그대들의 흐름을 멈추어라!
우리들로 하여금 가장 아름다운 날들의
     일순간의 환희를 맛보도록 하라!
 
그러나 이 세상의 많은 불행한 사람들이 그대에게 탄원하
   나니 시간이여,
     흘러라, 흘러라 저들을 위하여
가져 가라, 저들의 날들과 함께 저들을 괴롭히는 근심 걱정도
     행복한 자들은 잊어버려라.
 
"내가 몇 순간의 유예(猶豫)를 청했으나 부질없는 일,
    시간은 나를 피하여 달아났다.
나는 이 밤에게 말한다. "좀더 더디 가라" 그러나 새벽은
  이미 밤을 거두려 한다.
 
"사랑하자, 그러므로 사랑하자! 달아나는 시간을
    서둘러 즐기자!
인간에게 항구가 없고 시간에게 기슭이 없으니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지나간다!"
 
시기 많은 시간이여, 사랑이 우리들에게
철철 넘치게 행복을 부어 주는 이 도취의 순간들도
불행한 나날들과 같이 빨리 우리들로부터 멀리
    날아가 버릴 수 있단 말인가?
 
뭐라구! 우리는 도취된 순간의 자취마저 간직할 수 없을
    것인가?
뭐라구! 영원히 지나가 버렸다고? 무엇이! 완전히 없
   어져 버렸다고?
그 순간들을 주었고 또 그것을 지워 버리는 이 시간을
    우리들에게 그것을 돌려 주지는 않을 것인가?
 
영원이여, 허무여, 과거여, 어두운 수렁이여,
너희들이 삼켜 버린 이 날을 어찌하려는가?
말하라, 너희들이 우리에게서 앗아간 이 숭고한 황홀의
    순간들을 우리에게 돌려 줄 것인가?
 
오, 호수여! 말없는 바위여! 동굴이여! 검푸른 숲이여!
시간이 아직 손대지 않고 때에 따라서 다시 새롭게 하는 그
   대들은
간직해 다오, 아름다운 자연이여
    이 밤의 추억이나마 간직해 다오!
 
아름다운 호수여 그대의 휴식 속에 또는 폭풍우 속에
그대의 웃는 듯한 언덕의 모습 가운데
그리고 이 검은 전나무와 물 위를 내려다보는
    거친 바위 가운데!
 
살랑거리며 지나가는 미풍 속에
너의 기슭에 부딪치고 또 기슭에 반복되는 물결 소리 가
    운데
보드라운 광채로 너의 물 위를 하얗게 물들이는
    은색 얼굴의 달 가운데 깃들게 하라!
 
울부짖는 바람, 탄식하는 갈대,
너의 향긋한 대기 속의 가벼운 향기
듣고 보고 숨쉬는 만물이여, 모두 말하라;
    "그들은 사랑하였노라"고.
 
 
고독 / 알퐁스 라마르틴느
 
 
해질 무렵 나는 자주 산 위에 올라
해묵은 떡갈나무 그늘 아래 힘없이 앉는다.
무심코 눈초리를 들판으로 돌리면
변모하는 전야(田野)의 풍경화가 발 밑에 펼쳐진다.
 
이 쪽에선 거품 이는 강물이 웅얼대며 흘러
이리저리 굽어서 먼 어둠 속으로 숨어 버리고
저 쪽에선 움직이지 않는 호수물이 잠든 듯 펼쳐 있다.
그 위에 저녁별이 푸른 하늘 위에 솟는다.
 
검푸른 나무로 덮인 이 산마루에는
석양이 아직도 그 마지막 햇살을 던지고 있으며
어둠의 여왕 달님의 수레가 어렴풋이 떠올라
벌써 지평선 가장자리를 희게 물들인다.
 
이윽고 고딕 종탑에서 날아오는
경건한 종소리가 공중에 울려 퍼지면
길손은 발걸음을 멈추고 마을 종소리는
이 날의 마지막 소음에 성스러운 주악을 섞는다.
 
그러나 이 온화한 풍경들 앞에서
나의 무심한 영혼은 아무 매력도 열광도 느끼지 않는다.
나는 떠다니는 환영처럼 대지를 바라다볼 뿐
살아 있는 사람들의 태양은 이미 죽은 자들을 덥게 해 줄
   수가 없다.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부질없이 눈길을 돌리며
남에서 북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 광대한 공간의 구석구석을 찾아보고
나는 말한다; "행복이 나를 기다리는 곳은 아무데도 없
  다"고.
 
이 골짜기들, 이 화려한 건물들, 이 초가집들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이미 나에게는 흥미를 잃은 부질없는 물건들
강물도 바위도 숲도 정다운 외로움도
한 존재가 없을 때엔 모든 것이 비어 있다.
 
태양의 순회가 시작되건 끝나건
나는 무관심한 눈으로 그 운행을 쫓는다;
혹은 흐린, 혹은 맑은 하늘에 해가 지건 돋건
태양이 나에게 무슨 상관인가? 나는 나날에 아무 기대도
  갖지 않는다.
 
비록 내가 그의 광대한 행로를 쫓을 수 있다 해도
나의 눈으 도처에 허공과 사막을 보리라.
나는 태양이 비추는 모든 것에서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으며
무한한 이 우주에서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
 
그러나 아마도 태양계의 한계를 넘은 저 쪽에
참다운 태양이 다른 하늘을 비추는 곳에
내가 만일 나의 육체의 허물을 지상에 버릴 수 있다면
내가 그토록 꿈꾸던 것이 눈앞에 나타나리라!
 
거기서 나는 그리던 샘물에 취할 것이며
거기서 나는 희망과 사랑을
그리고 모든 영혼이 갈망하나
지상에는 그 이름조차 없는 최상의 복락을 되찾으리라!
 
어찌하여 나는 오로라의 수레에 실려
나의 소원의 막연한 대상인 그대에게 달려갈 수 없는가?
어찌하여 나는 아직까지 유배의 땅에 머물러 있는가?
이 땅과 나와는 아무런 공통되는 바가 없다.
 
나뭇잎이 초원에 떨어지면
저녁 바람이 일어 낙엽들을 골짜기로부터 몰아간다.
나는 또한 시든 낙엽과도 같으니;
거센 북풍이여, 나를 저 나뭇잎처럼 실어 가 다오!
 
 
알퐁스 라마르틴느(1790~1869): 샘 솟듯 흘러나오는 감정의 토로, 호수-숲-골짜기를 거닐며 과거에 대한 회상-현실에 대한 실의로 시작하여 체념 혹은 희망으로 끝나는 알퐁스 드 라마르틴느의 시는 1820년 프랑스 독자를 매혹하고 열광시켰다.
 5세기에 걸친 오랜 왕정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혁명이라는 거센 바람에 휘말리다 나폴레옹의 출현과 더불어 전설과 꿈 같은 제정 시대에 젖었던 프랑스 국민은 또 다시 하루 아침에 황제와 그 제국의 붕괴를 눈앞에 보게 되자 깊은 허무감과 무상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 급격하고 잇단 변천은 사람들을 깊은 실의와 애수에 빠지게 하였고, 그들은 마음을 공감하고 위로받고 달래 주는 무엇을 찾고 있었다. 라마르틴느의 시는 바로 이러한 공감과 욕구를 채워 주는 것이었다.
  라마르틴느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다음 해 즉 1790년에 포도주의 명산지 마콩에서 태어났다. 원래 귀족 가문이었던 그의 집안은 혁명의 거센 바람에 휩쓸려 그의 아버지가 감옥에 들어갔다가 1794년 풀려 나오자 더 이상의 화를 피하기 위하여 온 가족이 시골 밀리(Milly)로 이사하였다. 이제 세월을 바뀌어 나폴레옹이 출현하고 공화국은 제정으로 바뀌었다. 20세가 된 라마르틴느는 외교관이 되거나 또는 그의 아버지와 같이 군인이 될 생각이었으나 그의 가문은 원래 왕정파로서 왕위의 찬탈자 아래 봉사하기를 원치 않았다. 1815년 루이 18세가 복위된 뒤 1820년 비로소 그는 외교관이 되어 이후 10년간 이탈리아 각지에서 서기관 또는 대리 대사로 지내게 된다. 그런데 이 동안 그는 외교관으로서 일하기보다는 시인으로서 더 많이 일하였으며 더 널리 알려졌다.
 1820년  <명상시집>, 1825년의 <하롤드 최초의 순례가>, 1830년에는 두 권의 <시적 종교적 조화> 등이 출판되었다. 특히 첫 시집 <명상 시집>을 발표한 뒤 그는 일약 새로운 시대를 고하는 국민 시인이 되었고 1829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라마르틴느는 문학을 일생의 직업으로 삼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국민 대중과 인류를 위하여 일하는 것을 자기 사명으로 삼았다. 1830년 7월 혁명이 일러나 복구된 왕정이 전복되고 루이 필립 아래 소위 입헌 군주제가 수립되자 1833년에 라마르틴느는 정치에 참여하기 위해 외교관을 퇴임하고 국회 의원으로 출마하여 당선된다. 이리하여 그는 1851년 루이 나폴레옹이 구테타로 공화 체제를 전복할 때까지 18년 동안 국정에 참가하였고 특히 1848년 5월 혁명 직후에 수립된 과도 정부에서 외무 장관으로서 또 실제로는 정부 수반으로 온건파의 공화국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한 쪽에서는 폭력적인 파리 시민과 다른 쪽에서는 군의 지지를 업은 유산층(有産層)의 틈바구니에서 악전 고투를 하다 결국 4개월 만에 정치 판도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정직하고 용감하고 성실하고 미래를 볼 줄 아는 사람이었으나 너무나 선량하고 이상적이었으며 관대한 그는 필경 정치에는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놀라운 일은 이러한 정치적 생활 가운데서도 그는 간헐적으로 시를 썼고 여러 편의 시집을 출간한 일이다.
 유명한 도덕적, 종교적 서사시 <조슬랭 (1836)>, <천사의 추락(1838)>, <명상록(1839)>, 그리고 정치가로서의 저서인 <지롱당의 역사(1837)> 등이 있다.
  그의 만년의 20년(1849~1968)은 비참한 것이었다. 정치인들에게는 무시되고 대중에게는 잊혀진 그는 고독 가운데에서 가난과 싸워야 했다. 천성이 대범하고 관대한 그는 그 동안 생각없이 걸머진 빚을 갚아야 했고 그 돈을 벌기 위해 책을 썼다. 역사 소설, 자서전, 심지어 월간지-문학의 대중 강좌도 맡아 했다. 스스로 문학의 강제 노동을 한다고 했다. 그러나 경제적 곤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겨우 그가 죽기 2년 전 그를 동정한 정부로부터 약간의 연금을 받아 겨우 숨을 돌리게 되었다. 그는 기진맥진하여 79세의 긴 일생을 파리에서 마쳤다.
 
이리의 죽음 / 알프레드 비니
 
1
구름은 불길 위를 날아가는 연기처럼
붉은 달 위를 달리고
숲은 땅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우리들은, 묵묵히 젖은 풀숲을 밟으며
총총한 잡목, 키 큰 가시나무 속을 걸어가고 있을 때
문득 랑드 지방의 솔 비슷한 전나무 숲 아래
우리들이 쫓던 그 떠돌이 이리들이 남긴
큰 발톱 자국들을 보았다.
우리는 귀를 기울였다. 숨을 삼키고
발걸음도 멈춘 채-숲도 들도
숨소리 하나 공중에 내지 않았다; 단지
바람개비만이 황량하게 하늘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바람이 땅 위로부터 높은 곳으로 불어
발꿈치로 외롭게 선 첨탑을 스치고 갈 뿐
땅 위에 떡갈나무들은 바위에 몸을 기대고
팔굽을 베고 누워서 잠이 든 듯했다.
천지가 고요한 이 때 이리 떼를 찾고 있던
포수 중 제일 연장자가
몸을 줍혀 모래 바닥을 살폈다; 이윽고
아직 한 번도 틀린 적 없는 이 노인은
낮은 목소리로 방금 생긴 이 발자국들은
두 마리의 큰 삵쾡이와 그들의 두 새끼들의
걸음걸이와 억센 발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들은 모두 사냥칼을 갖추고
너무 희게 빛나는 총부리를 감춘 채
나뭇가지를 헤치며 한발 한발 걸어나갔다.
세 명의 포수가 걸음을 멈춘다. 그러자 나는 그들이 보고
  있는 쪽을 찾다가
갑자기 이글이글 타는 두 눈을 보았고
그 뒤쪽으로 네 개의 희미한 형상이
달빛 아래 잡목 덩굴 속에서 춤추는 것을 보았다.
마치 주인이 돌아오면 좋아 날뛰는 사냥개들이
큰 소란을 피우며 뛰노는 늘 보던 그런 모습이었다.
그들은 형태도 뛰는 모습도 비슷했다.
그러나 새끼들은 소리 없이 놀고 있었다.
이는 바로 지척지간에 인간이란 그들의 적이
그의 집 안에서 깊이 잠들지 않고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비 이리는 서 있고 그 뒤로 좀 떨어져 어미 이리는
나무 옆에서 쉬고 있었다. 그 모습은
옛날 로마 인들이 숭앙하고 그 털 난 가슴에
반신(半神) 레무스와 로물루스를 품었던 대리석 이리
  상(像)과 같았다.
아비 이리는 앞으로 나와 앉았다. 두 앞발을 세우고
갈퀴 같은 발톱을 모래 속에 박았다.
뜻밖에 당한 일이므로 살 길이 없다고 판단했다.
퇴로는 차단되었고 모든 길은 막혔다;
그러자 이리는 불타는 듯한 입으로
가장 용맹스러운 개의 헐덕이는 목덜미를 물었다,
그의 살을 꿰뚫은 총탄에도
무쇠 집게와 같이 그의 넓은 배창자 속을
십자로 꽂는 날카로운 비수에도
그의 강철 같은 턱은 벌리지 않았다.
목 졸린 사냥개가 그보다 훨씬 앞서 죽어
그의 발 아래 내동그라진 최후의 순간까지도,
그제야 이리는 개를 놓고 나서 우리들을 쳐다본다.
우리의 칼들은 그의 허리에 손잡이까지 꽂혀
피로 홍건한 풀밭 위에 그를 못박아 놓았으며;
우리의 총부리는 험상한 초승달처럼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는 계속 우리를 쳐다본다. 그리고는
입가에 질펀한 피를 핥으면서 다시 눕는다.
그리고 어떻게 자기가 죽게 되었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고
큰 눈을 다시 감으면서 아무 소리도 지르지 않고 죽어 간다.
 
2
나는 화약에 빠진 총대에 이마를 대고
생각에 잠겨, 남은 암 이리와 그의 두 새끼들을
뒤쫓을 일조차 결심할 수 없었다.
이 세 식구는 모두 아비 이리를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내가 생각컨대 이 아름답고 슬픈 빛의 암 이리는
그의 두 새끼만 없었던들 그가 홀로 이 큰 시련을 받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미의 의무는 자식들이 굶주림을 잘 참으며
인간이 비열한 가축들과 맺는 도시의 협약에
절대 말려들지 않도록 가르치기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는 일이다.
이 노예 근성의 가축들은 그들의 잠자리를 얻기 위해 인
  간의 앞에 서서
숲과 바위의 원 소유자들을 몰아 내고 있는 것이다.
 
3
나는 생각했다. 아아, 인간이란, 이 위대한 이름에도
  불구하고
나약한 우리들 인간을 나는 얼마나 부끄럽게 생각하는
  가!
사람이 이 세상과 인생의 모든 고난을 어떻게 떠냐야 하
  는지
그것을 아는 자는 너희들, 고귀한 짐승들아!
우리가 지상에서 무엇이었으며 무엇을 남기고 가는지 생
  각할 때
무언(無言)만이 위대할 뿐 그 외의 모든 것은 연약한 일
--아아 야성(野性)의 방랑자여, 이제 너희 뜻을 깨달
  았으니
너의 마지막 눈초리는 나의 가슴까지 와 닿았다.
그 눈초리는 말하였다; "그대 할 수 있다면
꾸준히 노력하고 생각함으로써
너의 영혼이 가장 높은 인종(忍從)의 자존지경(自存之境)
  에 이르도록 하라
숲 속에서 태어난 우리들이 처음부터 올라선 이 높은 곳으로,
탄식, 눈물, 기원, 이는 모두 비겁한 일
운명이 그대를 부르고자 한 길에서
그대 오래고 무거운 과업을 힘차게 다하라.
그리고 나서 나와 같이 소리 없이 괴로와하고 죽어라."
 
 
알프레드 비니(1797~1863): 시인이며 소설가며 극작가였던 알프레도 드 비니는 프랑스 시골의 군인 귀족 가문 출신이다. 이 귀족 가문도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회오리 바람 속에 몰락해 버렸으나 젊은 비니는 귀족의 명예를 지키고 영광을 되찾기 위해 군인이 되기를 원하였다. 왕정의 열열한 지지자인 그는 18세의 소년으로 루이 18세의 복귀와 망명 때에는 총사(銃士)의 붉은 제복을 입고 호위하였다. 그러나 여러 번 실패를 거듭한 후 들어간 군문(軍門)은 그의 기대와는 달리 지루하고 단조로운 굴종의 생활에 불과하였다. 이미 나폴레옹의 몰락과 더불어 전쟁과 영광의 시대는 지나갔던 것이다. 따라서 비니는 군인으로서가 아니라 문인으로서 영광을 되찾기로 하였다. 그는 타고난 시인이며 명상가이며 철학자였다. 군복을 입은 채 시를 쓰고 또 소설을 썼다. 그리하여 그가 군인 생활에 환멸을 느껴 자진 퇴역하기 1 년 전 즉 1826년 그는 <고금 시집(古今詩集)>을 발표하고 이어서 역사 소설 <생-마르스>를 출판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1829년에는 세익스피어의 <오델로>를 번안하여 국립 극장 에서 상연함으로써 일약 극작가로서의 명성을 높였다. 이에 자극되어 1827년 그는 군인 생활을 청산하고 파리로 올라와 창작과 아울러 위고를 중심으로 한 낭만파 운동의 핵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이 때까지 그는 유명한 작가이며 행복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1839년을 고비로 타고난 염세적인 고독감과 정치에 대한 깊은 실망, 기독교와 생에 대한 완전한 회의를 느낀 그는 차츰 문단과 사회를 멀리하고 자신의 세계에 들어앉아 자신의 체험과 사상을 담은 시, 연극, 소설을 발표하였다. 천재의 정신적 고독을 다룬 소설 <스텔로(1832)>, 이 소설을 극화한 <샤텔톤(1835)>, 자신의 군인 생활의 체험과 사상을 담은 <군인의 굴종과 위대함(1837)>, 종교적 비관주의를 쓴 <다프네(1837)> 등이 있다. 또한 이 때부터 그는 순수한 문학 작품이라기보다 사회적-철학적 문제를 다룬 많은 책을 출판하였다. 또한 이 시절 그는 인생의 다른 현실적인 시련을 겪게 되었다, 사랑하던 어머니의 죽음, 문인 친구들과의 심한 불화, 더우기 그가 열애하던 무대 여배우 마리 도르발의 변심과 배반은 그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드디어 그는 파리를 떠나 고향 멘느-지로로 내려갔다. 외부와의 일체 접촉을 끊고 소위 생트-뵈브가 말한 상아탑에 들어가 사색과 명상과 시작(詩作)으로 지냈다. 그는 만년의 대부분을 여기에서 지냈다. 그러나 이러한 유페 생활은 그에게 가장 아름답고 심오한 사상이 담긴 시를 낳게 하였다. <이리의 죽음>, <삼손의 분노>, <감람산>, <목자의 집>, <바다 위의 빈 병> 등 정신적-철학적 시와 아주 만년에 그의 유일한 내면적 수기 <어느 시인의 일기>를 썼다. 앞서 말한 시들은 그가 죽은 다음해 1864년 <운명>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고 <시인의 일기>도 1867년 사후 출판되었다. 이 몇 편의 시와 일기는 그의 시인으로서의 위치, 아니 위대한 시인으로서의 그의 위치를 확보하기에 충분하였다.
  만년에 그는 작가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여섯 번이나 아카데미 프랑세스 회원에 입후보하였으나 낙선되어 1845년에 겨우 회원이 되기도 하였다. 1848년에는 자기 고향에서 대의원으로 입후보하여 낙선의 고배를 마시기도 하였다. 그의 사회 생활은 불운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863년 고향에서 위암으로 사망했다.
 
내일은 새벽부터 / 빅토르 위고
 
 
내일은 새벽부터 들이 훤해지면
난 떠날 테다. 난 안다, 네가 기다리고 있음을.
나는 가련다, 숲을 지나 산을 넘어.
이 이상 더 너와 멀리 떠나 있을 수가 없구나.
 
나는 걸을 테다, 나의 눈은 오로지 한 생각에 골똘하여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아무것도 없을 게다
홀로, 낯선 나그네, 굽은 등에 두 손을 맞잡고
슬픈 나에겐 대낮도 밤과 같으리라.
나는 저무는 석양녘의 항금빛도
멀리 아르폴뢰르 항구 향해 내려가는 돛단배들도 보지
  않으련다
다만 너 있는 곳에 다다르면 네 무덤 위에
푸른 호랑 가시나무와 꽃핀 히드 다발을 놓으리라.
 
 
파종의 계절, 저녁 / 빅토르 위고
 
 
황혼의 순간
나는 문간에 앉아
노동의 마지막 시간을 비추는
이 하루의 종막을 황홀하게 바라본다.
 
어둠에 젖은 들판에서
미래의 추수를 한 줌씩 밭고랑에 뿌리는
한 노인의 해진 옷을
나는 감격된 맘으로 본다.
 
그의 크고 검은 영상(影像)은
깊은 밭고랑들을 제압하고
나는 지나가는 나날들의 유익함을
그가 얼마나 믿고 있는지 느낀다.
 
그는 막막한 들판을 걸으며
가고, 오고, 멀리 씨를 던지고
손을 다시 펴 또 뿌리기 시작한다.
나는 명상에 잠긴다. 무명(無名)의 증인.
 
그 동안, 웅성거리는 소리가 섞인 어둠의 장막은
베일을 한장 한장 펼쳐 내린다.
씨뿌리는 사람의 장엄한 움직임을
별들에게까지 퍼지게 하는 듯.
 
 
최종(最種) / 빅토르 위고
 
 
나는 굴하지 않으리라! 입에 불평의 소리를 울리지 않고
조용히, 슬픔은 가슴 속에, 짐승 같은 인간의 떼 무시
  하며
나는 이 거친 유형(流刑)의 땅에서도
아아, 조국을 나의 제단(祭壇)으로, 자유를 나의 깃발로
  삼으리라!
나의 고결한 동지들이여, 나는 그대들의 신앙을 지키리라
우리 비록 추방되었으나 공화국은 여기 있고 우리를 결합
  한다.
나는 저들이 멸시하는 모든 것을 영광으로 삼으며
나는 저들이 찬양하는 모든 것을 저주하리라
 
나는 재(灰) 부대를 몸에 쓰고
목소리 되어 "화(禍) 있을진저!" 할 것이며 입 되어 "아니
  다!" 외칠 것이다.
너의 하인들이 너에게 루브르 왕궁을 가리킬 때
나는 너, 케사르여, 너에게 미친 자의 감방을 가리키리라.
 
배신의 행위와 숙여진 머리들 앞에서
나는 팔짱을 끼고 보리라, 분노하나 평온한 마음으로,
무너진 것에 대한 슬픈 충성이여
나의 힘, 나의 기쁨, 나의 청동(靑銅) 기둥이 되어라!
 
그렇다, 그가 거기 있는 한, 사람들이 그 앞에 굴하든 참
  고 견디든!
아, 프랑스! 우리들이 사랑하며 슬퍼하는 프랑스
나는 너를 다시 보지 못하리라 너의 아름답고 슬픈 땅을,
나의 조상이 묻힌 곳, 나의 사랑의 보금자리!
 
나는 다시 보지 못하리라 우리를 부르는 그 강가를
프랑스! 아아, 그러나 나는 의무(義務) 외엔 모든 것을
  잊으리라.
나는 고난받는 자 가운데 나의 장막을 칠 것이며
나는 서 있기 원하므로 추방자로 남으리라.
 
나는 이 험난한 유형을 달게 받으리라 비록 끝도 기한도
  없을지라도
좀더 굳세리라 믿었던 누군가 굴복했고
머물러야 했던 몇 사람이 가 버렸는지
나는 알려고도, 생각하려고도 않는다.
 
이제 천 명밖에 안 남을지라도, 그야 물론 나는 그 속에
  있을 것이며 만약
이제 백 명밖에 안 남았다 해도 나는 계속 독재자에게 항
  거할 것이다
만일 열 명밖에 안 남았다 해도 나는 그 열번 째가 될 것
  이며
이제 단 한 명밖에 안 남았다면 나는 그 한 명이 되리라!
 
 
빅토르 위고(1802~1885): '위대한'이란 형용사를 사람에게 쓸 수 있다면 빅토르 위고는 이 형용사를 받기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찌기 앙드레 지드는 "프랑스에 가장 위대한 작가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답하여, "할 수 없다. 위고다"라고 했다는데, 그의 이 평은 위고가 많은 인간적 내지 예술적 결함을 가졌으나 그의 위대성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고충을 피력한 말이다.
  19세기를 거의 다 살면서, 이 긴 세월 동안 그는 위대한 시인, 위대한 극작가, 위대한 소설가, 위대한 사상가이었고 또 위대한 투쟁가이었다. 한때 그의 목소리는 프랑스 민중의 양심과 감정과 희망의 울림판이었으며 그의 박애주의적 인도주의 사상은 19세기 후반에 전 유럽 사회에 빛을 던져 주었다.
   이미 14세의 소년 시절에 '사토브리앙이 되든가 그렇지 않으면 무(無)'라고 쓰고 문학에 뛰어든 그는 26세 시집 <오드(1822)>를 출판하여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한 이래 1843년 장녀 레오폴딘느의 익사로 인해 잠시 동안 문학 활동을 중단할 때까지 약 20년 동안 6권의 시집, 3편의 소설, 9편의 연극을 발표하였다. 이 가운데 시집으로서 <동방 시집(1831)>, <가을 나뭇잎1831)>, <황혼의 노래(1835)>, <빛과 그늘(1840)> 등이 소설로는 <파리의 성모 사원(1831)>, 연극으로는 <크롬웰(1827)>, <위 불라스(1838)>등의 작품이 유명하다.
  정력적인 그는, 쉴 줄 모르는 창작 활동과 동시에 열정적인 문학 운동도 폈다. 연극 <에르나니> 공연을 둘러싸고 일어난 고전파-낭만파 싸움에서 사령관 위고는 학생-문학 청년- 무명 화가들, 그리고 네르발이나 고티에 등의 20대 젊고 전투적인 시인들을 동원하여 육탄적인 공격으로 승리를 거두었고, 당시의 쟁쟁한 시인, 작가들, 비니, 뒤마, 메리메, 발자크, 생트-뵈브, 네르발, 고티에 등을 자기 집에 모아 일종의 낭만파 문학클럽 세나클(Cenacle)을 조직함으로써 낭만파 운동의 총수가 되었으며 젊은 세대의 우상이 되었다. 그는 1941년 39세의 젊은 나이로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43년은 그의 생애에 전기(轉機)를 이루는 해였다. 위고의 사랑하는 장녀 레오폴딘느는  이 해 결혼한 지 얼마 후인 9월 4일, 남편과 함께 세느 강 하류에서 보트를 타다 얼마 후인 9월 4일, 남편과 함께 익사했다.
  졸지에 사랑하는 딸을 잃은 충격으로 위고는 언어 상실증에 걸렸다.  겨우 일년 만에야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으나 이 시기를 계기로 그는 문학 운동과 창작 활동을 중단하고 혁명적인 이상을 사회에 펴기 위하여 정치에 깊이 관여한다. 그의 생각으론 시인의 사명은 민중의 목소리가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경향의 결과 위고는 1845년 왕당파로 프랑스 국회 상원 위원이 되었고, 1848년 2월 혁명 후에는 파리 출신 제헌 의회의원으로 또 입법 의회 의원으로 활약하며 가난한 자와 피압박자의 편에 서서 자유, 평등, 공화 체제를 위한 싸움에 가담했다. 드디어 군(軍)과 우익 정당을 배경으로 등장한 나폴레옹 1세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반미주적인 헌법 개정을 하자 위고는 그의 가장 격렬한 반대자가 되었다. 1851년 루이 나폴레옹이 쿠테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정지하고 반대파와 공화파 의원을 체포할 때 첫번째 대상이 된 것이 그였다. 위고는 파리 시민을 봉기시키려 했으나 실패하고 동료 의원 72 명과 함게 프랑스를 떠나 망명의 길에 올랐다. 그의 망명은 이후 19년 동안 계속되었다. 위고는 벨기에의 브뤼셀을 거쳐 영불 해협의 제르제섬으로, 다시 고도(孤島) 게르네제 로 옮겨 이 섬에서 1870년 고국에 돌아고오기까지 15년이란 긴 세월을 지냈다. 이 동안 그는 루이 나폴레옹으로 부터 두 번에 걸친 사면령과 귀국 권고를 받았으나 응하지 않고 나폴레옹 3세의 몰락과 자유의 회복 후에야 비로소 프랑스로 돌아왔다. 
  이 괴롭고 외로운 망명 생활은 그를 슬프거나 좌절케 하지 않고 도리어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을 이 때에 창작 또는 완성시켰다.   루이 나폴레옹을 매도한 <범죄의 역사(1852)>, <소-나폴레옹( 1852)>, 그리고 역사에 유래가 없는 풍자 시집 <응징(1853)>, 죽은 딸 레오폴딘느에 대한 추억의 시를 담은 그의 걸작 시집 <정관(靜觀)1853>,  인간의 서사시 <세기의 전설(1859)>, 그리고 위대한 소설 <가엾은 사람들(1862)>, 평론 <윌리엄 세익스피어(1864)>, 소설 <바다의 일꾼들(1866)>, <웃는 남자(1869)>, 환상적 서정 시집 <길과 숲의 노래(1865)>, <자유로운 연극(1869)> 등이 있으며 그 중의 한 작품만으로도 가히 한 작가의 영광을 가져올 수 있는 명작들이다.
 위고는 나폴레옹 3세가 보불 전쟁에서 패하여 퇴위, 망명하고 파리 시가 프러시아 군에 의하여 완전 포위되기 직전 파리로 돌아왔다. 이 극적인 입성은 용감하고 희생적이었으며 파리 시민은 그를 애국적 영웅으로 맞이하였다. 이로부터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만년의 생활(1870~1885)은 주로 창작 활동에 바쳐졌다.
 비록 그는 다시 국회 의원으로 선출되고 파리 지역의 상원의원이 되었으나 정치에 있어서는 실패와 실망을 맛보았다. 그러나 그의 작품 활동은 쉬지 않아 파리의 농성과 점령을 다룬 시 <끔찍한 해(1872)>, <할아버지가 되는 법(1877)> , < 세기의 전설>의 보충편(1877) 등의 시와, 과학 문제를 다룬 <나귀(1880)>, <정신의 네 바람(1881)>, 소설로는 프랑스 대혁명의 이야기를 다른 <93년(1874)> 등 노년에 이르러서도 무한한 재질의 다양성을 보여 주고 있다.
 그는 1885년 5월 22일 83세를 일기로 죽고 프랑스 정부는 이례적으로 그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정했다. 6월 1일 그의 유해는 긴 국장 행렬 가운데 온 파리 시민들의 애도와 추모를 받으며 개선문에서 팡테옹으로 향하였다. 가난한 사람의 영구차와 간소한 장례식을 요구한 그의 유언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위고의 작품에서 독자가 받는 강렬한 인상과 감동은 그의 다이내믹한 생명력에서 오는 변화무쌍한 창조력, 무진한 상상력, 강렬한 감정 등에서 온다. 이 거대한 창조력은 그로 하여금 시-연극-소설 등 여러 분야에서 창작하게 했으며 각 분야에서도 다양한  작품을 써, 그가 손대지 않은 문학 부분으 거의 없다.
 시인으로서의 그의 주된 힘은 상상력이다. 이 상상력은 무궁무진할 뿐 아니라 머리 속에 상상하는 바를 실제로 있는 존재같이 정확 명료하게 보는 힘을 가졌다. 그러므로 그는 서사시-역사소설-환상극 등에 있어서 뛰어나며 자연이나 환경-인물 묘사에 탁월하였다. 구약 성서 시대의 인물들의 성격과 생활, 중세 기사들의 영웅적 모험, 나폴레옹 휘하 군대의 전투 장면 등 세밀한 사항에 이르기까지 실제와 방불하게 묘사함은 풍부한 고증이나 사실(史實)보다는 강력한 상상력에 의한 것이다.
 시인 위고에게는 치밀한 지성이나 분석적인 정신이 없는 대신 크고 풍부한 감정과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차라리 그는 감정의 큰 불덩어리였다. 이러한 감정은 그의 작품과 생활에서 일차적으로 사랑으로 나타난다. 특히 가족에 대한, 그리고 어린이들에 대한 끝없는 애정으로 나타난다. 또 이 사랑은 확산되어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 압박받는 사람에 대한 연민과 사상으로 번져 그의 중심 사상이 되었다.
 이렇게 강력하고 웅건한 상상력과 우주 만상에까지 펼쳐지는 감정을 위고는 또한 천재적인 언어의 구사로 자유자재로 표현하였다. 그의 문장은 숨쉬듯 자연스러웠으며 강물같이 도도했으며 장엄 화려했고 많은 이미지를 동반했다. 이로서 그는 가장 작고 평범한 일과 사물에 생명을 주고 일상적인 행위와 감정을 승화시켜 우주적인 비젼을 일으키는 마력을 지녔다고 하겠다.
 물론 그에게 결점이나 결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상상력이 지나쳐 때로 터무니없는 공상으로 흐르는 점, 위대함과 장중을 좋아하는 허장성세, 웅변조, 지나친 언어의 기교, 대중에 영합하는 통속성 등 열거하면 한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결점을 내포하면서도 그는 19세기의 프랑스 문단의 최고봉이었으며 프랑스 문학사의  빛나는 거성이었다.
 
환상 / 제라르 네르발
 
 
롯시니, 모짜르트, 베버의 음악을 다 준다 해도
내가 바꿀 수 없는 곡조가 있다
그것은 아주 낡고 느리고 구슬픈 것이지만
오로지 나에게만 숨은 매력을 지녔다.
 
그런데 우연히 그 곡조를 들을 적마다
내 마음은 2백 년이나 젊어진다;
때는 루이 13세 치하; 나의 눈에 보이는 듯
석양이 노랗게 비치는 굽이치는 푸른 언덕이,
 
그리고 모서리가 돌로 된 벽돌의 성관(城館)
거기에 불그스레 물든 유리창들
성곽을 둘러싼 광활한 정원, 성 밑을 적시며
꽃 사이를 흐르는 한 줄기 강물;
 
그리고 드높은 창가에 나타난 한 부인
검은 눈에 금발을 하고, 옛 의상을 걸친 이 부인은
어쩌면 전생에서 내가 이미 만났고
그리고 내가 지금 기억하는 그 여인!
 
 
황금시(黃金詩) / 제라르 네르발
 
인간이여! 자유 사상가 - 그대는 믿고 있는가?
생명이 모든 것에서 작렬하는 이 세상에서 그대만
  이 생각하는 존재라고?
그대는 가진 능력을 자유로이 쓸 수 있다.
그러나 그대의 모든 생각에서 만물은 빠져 있다.
 
짐승 속에서 움직이는 정신을 존중하라---
모든 꽃은 하나하나 대자연에 핀 독립된 영혼이며
금속(金屬)에는 사랑의 신비가 담겨져 있다;
만물은 느낀다; - 그리고 만물은 그대의 존재에 강력하
  게 작용한다.
 
눈 없는 벽 속에 그대를 살피는 눈을 두려워하라
물질에도 언어가 부여되어 있으니---
이를 불경한 일에 쓰지 말라.
 
자주, 희미한 존재 가운데 신이 숨어 있으며
갓난아기의 눈이 눈꺼풀로 덮여 있듯
순수한 정신이 돌 껍질 속에서 자라고 있다.
 
 
제라르 네르발(1808~1855): 제라르 드 네르발은 유명한 가문 출신으로 파리에서 태어났으나 세 살때 어머니를 잃어 르발르와 지방에 사는 큰아버지 집에서 자라났다. 이 지방의 쓸쓸한 풍경과 전설로 가득찬 자연과 환경, 그 위에 심령교(心靈敎)-점성술에 흥미를 가지고 있던 큰아버지의 영향이 어머니 없이 자란 어린 네르발에게 강하게 작용한 듯 하다.
 소년기가 되어 파리에 올라와 샤를마뉴 중고등 학교에 다녔는데 마침 테오필 고티에가 동창이어서 함께 어울려 문학적 방랑 생활을 즐겼다. 이때부터 그는 여행을 즐겨 유럽 각지와 중동 지방을 찾아다녔다. 독일 문학에 심취되어 19살 때에 이미 괴테의 <파우스트>를 번역했으며 이어서 독일 작가이며 작곡가인 호프만 류의 환상적인 이야기(contes)를 쓰기도 했다. 이때부터 이미 그에게는 환상과 현실이 뒤섞이는 징후가 나타나 이 때 쓴 그의 시 가운데는 그의 영원한 여성이며 수세기 전 수녀원에서 죽은 금발의 아드리엔느가 현실로 나타난다.
 1836년 가을 그가 28세 때 무대 여배우 제니 콜롱을 알게 되었는데 네르발은 그녀에게 대한 열렬한 사랑에 빠진다. 이 여배우는 그의 작품 가운데 <오델리> 또는 <오델리아>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데 그는 제니 콜롱이 그가 소년 시절 보았다고 생각하는 영원의 여성 아드리엔느의 환생이라고 확신한다. 제니 콜롱은 그의 사랑을 모르지 않았으나 얼마 안 되어 다른 남자롸 결혼한다. 이 일은 그에게 극심한 심적 충격을 주어 현실 생활 속에서 꿈의 유출이 심해진다. 1842년 정신 착란을 일으켜 약 8개월 동안 정신 병원에 입원되었다가 회복하였으나 그 다음 해의 제니의 죽음은 그의 신비적인 꿈을 더욱 짙게 하였다. 영원한 여성이라는 낭만적 관념은 그가 줄곧 가지고 있던 고정 관념이나 죽은 제니의 모습은 앞서 말한 아드리엔느뿐만 아니라 시바의 여왕, 고대 이집트의 여신 이시스, 성모 마리아, 심지어 그의 어머니의 화신(化身)으로까지 이어진다.
 이후부터 그의 생활은 때때로 일어나는 발광증과 가중되는 생활고으로 몸 담을 집도 없이 거리를 헤매는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된다. "내가 시를 쓰게 된 것은 처음에는 청춘의 정열이었으며, 다음은 사랑, 최후는 절망이다"라고 술회할이만큼 40대의 그의 생은 절망의 시대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그는 마치 인생을 정리나 하듯 정신이 들 때마다 자신의 관찰, 연구, 정신적 체험을 담은 작품을 하나 둘 출판했다. 그리고는 1855년 1월 이른 아침, 파리의 한 모퉁이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그는 미친 상태와 냉철한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가운데에서도 비교적 많은 작품과 번역-연구를 남기었으나, 결국 시집(오델리아>와 콩트 <실비>라는 두 권의 작품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두 작품은 프랑스 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이 두 작품은 모두 상상적 기억의 이야기로서, <오델리아>는 오델리 즉 제니 콜롱의 이야기이며, <실비>는 그의 고향인 발르와 지방의 시골 처녀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라고 하지만 그의 꿈과 기억 속에 있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환상적이며 꿈의 세계를 가장 성실하고 명쾌하게 그리고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쓴 점에 그의 문학적 가치가 있다.
 시의 특성도 그가 살고 느낀 환상적이며 초자연적인 체험을 성실하고 진실되게 기술한 점에 있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서 꿈은 꿈이라 아니라 다른 하나의 생(生)이었고 이 생 가운데 신비로운 세계를 보았다. 이 꿈 속에서 개인의 과거는 인류 전체의 과거와 혼합되고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초현실적 세계 사이에는 일종의 신비로운 조응(照應)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계에서는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초자연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의 상징이며 징조가 된다. 이러한 면에서 그의 시는 앞으로 올 상징주의나 초현실주의의 선구적인 시가 되었다. 또한 그가 마음 속에서 체험하는 꿈과 환상을 냉철히 관찰하고 분석하여 새로운 세계와 진리에 도달하려던 노력은 그 후 현대 문학에도 이어져 많은 시인과 작가들이 그의 생애와 작품을 연구하고 있다.
 
창백한 저녁별--- / 알프레드 뮈세
 
석양의 베일을 제치고 빛나는 얼굴을 드러내는
먼 곳에서 온 사자(使者), 창백한 저녁별이여,
창공 속 그대의 푸르른 궁전에서
  그대는 이 들판의 무엇을 바라봅니까?
 
폭풍우는 물러가고 바람도 잡니다.
떨고 있는 숲은 히드 황야에서 울고 있소;
금빛 나방이 가벼운 날개를 치며
  향긋한 초원을 지나갑니다.
 그대는 잠 든 이 땅 위에서 무엇을 찾습니까?
그러나 이미 그대는 산봉오리 쪽으로 내려오고 있소;
그대는 웃음 지으며 도망갑니다. 우수의 친구여,
그대의 떨리는 눈초리는 꺼질 듯 합니다.
 
푸른 언덕 위에 내리는 별이여
칠흑의 밤 망토 위에 달린 슬픈 은(銀)의 눈물 방울.
목자가 타박타박 걷는 긴 양 떼를 거느리고
길을 가며 멀리서 쳐다보는 그대,-
별이여, 이 무한한 밤 속에 어디로 가는 겁니까?
강가의 갈대 숲 속에 잠자리를 찾으려는 겁니까?
그렇잖으면 아름다움 별이여, 이 고요한 시각에,
그대는 한 잎의 진주알같이 물 속 깊이 떨어지려는 겁
  니까?
아아, 그대가 죽어야 한다면 아름다운 별이여
만일 그대가 금발의 머리를 망막한 바다 물 속에 던지려
  한다면
우리를 떠나기 전 잠깐 멈추기를; -
부디 하늘에서 내려오지 말기를, 사랑의 별이여!
 
 
있거라 쉬종 / 알프레드 뮈세
 
 
잘 있거라 쉬종, 금발의 장미화야,
네가 날 사랑한 건 단 여드레지만;
이 세상이 가장 짧은 쾌락이
때로는 가장 진실된 사랑도 된다.
널 두고 떠나는 이 순간도 나는 몰라,
떠돌이 내 별 따라가는 이 내 몸은 어디로 가는지
그러나 나는 간다 내 사랑아
  멀리멀리 바삐바삐
  항상 다름질치며,
 
떠나는 내 더운 입술 위에
네 마지막 키스가 아직 타고 있다.
내 두 팔 속에, 분별 없는 아가씨야
네 예쁜 얼굴이 와 묻혔으니
네 가슴 얼마나 고동치는지 들리는가?
지난 날 네 가슴 얼마나 즐겁게 뛰었던가!
그러나 나는 간다 내 사랑아
  멀리멀리 바삐바삐
  항상 널 사랑하며,
 
철썩! 내 말 위에 안장 얹는 소리
어찌하여 나 가는 길에, 내 사랑아
네 퉁명스런 얼굴 데러갈 수 없나,
내 손은 네 머리 향기로 온통 물들었는데!
너는 요정처럼 도망치며
웃음 짓는다. 귀여운 새침데기
그러나 나는 간다 내 사랑아
  멀리멀리 바삐바삐
  활짝 웃음지으며,
 
네 정다운 이별 속에는 귀여운 아가씨야
슬픔도 많고 매혹도 많아
네 눈 속에 진정이 담겨 있을 땐
네 모든 것이, 네 눈물까지 날 취하게 해.
네 눈을 보면 나는 살고 싶어
그 눈은 나 죽을 때 위로되리라.
그러나 나는 간다, 내 사랑아
  멀리멀리 바삐바삐
  온통 눈물 뿌리며,
 
혹시 네가 나를 잊는다 해도, 쉬종
우리들의 사랑만은 잠시 남기도록;
창백해진 꽃다발인 양
네 귀여운 가슴 속에 숨겨 두어라!
잘 있거라 행복일랑 이 집에 두고
추억만이 나와 함께 떠나가니
그 기억은 나와 함께 가리라, 나의 사랑아.
  멀리멀리 바삐바삐
  언제나 네 생각 품고.
 
 
시월이 / 알프레드 뮈세
 
 
시인이여, 그만해 두오, 그대를 배반한 여인에 대한
그대의 환상이 단 하루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해도
그녀를 말할 때 이 날을 저주하지 말아요.
그대가 사랑받기 원한다면 그대의 사랑을 존중하시오.
타인으로부터 받은 고통을 애써 용서한다는 일이
약한 인간으로서 너무나 힘든 일이라면
적어도 사람을 미워하는 괴로움만은 피하시오.
용서를 할 수 없다면 잊어버리도록 하시오.
죽은 자들의 땅 속에서 평화로이 잠자듯
우리들의 꺼진 감정도 잠자야 합니다.
심정의 유뮬(遺物)들도 유해(遺骸)을 가지고 있으니
이 성스러운 꺼진 감정도 잠자야 합니다.
그대는 왜 이 쓰라린 고뇌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의 꿈, 배신당한 사랑만을 보려 합니까?
신의 섭리가 동기 없이 일어난다고 생각합니까?
그럼, 그대를 매질한 신이 그렇게 소홀한 분이라고 생각
  합니까?
도리어 그대가 불평하는 이 타격은 그대를 지켜 주었는지
  모릅니다.
젊은이여; 바로 그로 인해 그대 마음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배우는 자, 고통은 그를 가르치는 스승
고통을 당하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고난의 세례를 받아야 하며
이 슬픔의 값을 치르고야 모든 것이 얻어진다는 것은
  가혹한 법칙이나 절대적 법칙이며
이 세상이나 운명과 같이 오랜 것입니다.
곡식이 익기 위해선 이슬이 필요하며
인간이 살고 인생을 느끼기 위해선 눈물이 필요합니다.
기쁨이란 아직 비에 젖고 꽃으로 덮인
한 대의 꺾어진 풀잎이 그 상징입니다.
그대는 어리석은 잘못에서 깨어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요?
그대는 젊고 행복되고 어디서나 환영받지 않나요?
인생을 사랑하게 하는 이 작은 쾌락들도
만일 그대가 눈물 흘린 적이 없었다면
이런 것들의 가치를 얼마나 인정했을까요?
해 저무는 석양의 잡목 우거진 광야에 앉아
정다운 친구와 함께 한가로이 술 마실 때
그대가 만일 기쁨의 댓가를 치루어 보지 못했다면
말해 봐요, 그대가 기쁜 마음으로 잔을 들 수 있을까요?
그대는 꽃과 풀밭과 초목의 푸르름을,
패트라르카의 소네트와 새들의 노래 소리,
미켈란젤로와 예술을, 세익스피어와 자연을 그대는 좋아
  할 수 있엇을까요?
만일 그대가 그 속에서 옛날 그대가 체험한 오열을
  다시 보지 않았다면?
만일 그대가 그 어느 먼 곳에서 몸의 열기와 못 이루는
  잠으로 인해
영원한 안식을 희구한 적이 없었다면
천상의 오묘한 조화를, 밤의 침묵을
중얼거리는 파도 소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
그대는 무엇이 불만입니까? 불멸의 희망이
불행의 손길 아래 그대 맘 속에서 다시 단련된 것입니다.
어째서 그대는 젊은 날의 체험을 싫어하며
그대를 보다 훌륭하게 만든 이 고통을 미워하려 합니까?
오, 나의 젊은이여! 불쌍히 여겨요, 한때 그대를
눈물 흘리게 한 이 아름다운 변심의 여인을
불쌍히 여겨요, 이는 여자이며 신께서는 그녀를 그대 곁
  에 둠으로써
고통을 통하여 행복된 자의 비결을 그대에게 깨닫게 한
  것입니다.
그녀의 역할은 괴로운 것이었으며 그대를 아마도 사랑했
  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운명은 그녀로 하여금 그대의 가슴을 찢도록 원한
  것입니다.
그녀는 인생을 알았고 그것을 그대에게 알게 한 것입니다.
다른 여인이 그대의 고통의 열매를 거두었지요.
그 여인을 불쌍히 여겨요, 그녀의 슬픈 사랑은 꿈같이 지
  나가 버렸습니다;
그녀는 그대의 상처를 보았으나 그것을 아물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녀의 눈물이 다 거짓은 아니었습니다.
설사 다 거짓이었다 해도 그녀를 불쌍히 여겨요; 이제
  그대는 사랑할 수 있어요---
 
*알프레드 뮈세(1810~1857): 알프레드 드 뮈세는 파리의 한 부유하고 교양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우아하고 매력있는 이 청년은 인생의 여러 가지 복을 타고 났는데 천재라는 귀한 복도 가지고 있었다. 총명하고 재기 넘치는 이 세기아(世紀兒)는 인생의 여러 길 가운데 생을 살고 맛보고 즐기기 위하여 결국 시를 선택했다.
 18세 되던 때부터 이미 유명한 위고의 문학 서클 등에 출입하여 재기와 환상으로 모든 사람의 주목과 사랑과 촉망을 받았으며 20세 되던 해에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풍물을 주제로 한 경쾌하고 재치 있는 시 <첫 시집>의 제1부,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신비로운 사랑의 모험담, 극적인 멜로드라마 연극 <안락 의자에 앉아 보는 구경> 등을 출판하여 문단과 사교계의 놀라움과 찬탄을 한 몸에 받았다.
 그가 아직 24세가 채 되기 전에 조르지 상드를 만났다. 상드는 30세의 풍만한 육체의 정열적인 부인으로, 가정에서 뛰쳐나와 소설가가 되었다. 두 사람은 곧 열렬한 사랑에 빠진다. 파리 근교 퐁텐느블로우 등에서의 아름다운 밀월(密月) 후 상드는 뮈세를 데리고 이탈리아의 제노바, 플로렌스 등으로 사랑의 도피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실망은 빨랐다. 베니스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뮈세는 중병(뇌막염)에 빠져 생사를 헤매게 된다. 상드는 헌신적으로 그를 간호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 동안 뮈세의 주치의인 이탈리아인 파젤로란 젊은 의사와 또 다른 사랑을 하게 된다.
 절망과 질투에 빠진 뮈세는 한때 목숨을 끊으려고도 하였으나 병을 안고 혼자 귀국, 그 후 4개월 동안 온종일 그의 방에 들어 앉아 울고만 있었다고 한다. 그 후 두 사람은 다시 화해하려는 노력도 있었으나 결국 영원히 헤어지고 말았다.
 이 사랑과 갈등에 대하여 뮈세는 <세기아(世紀兒)의 고백>이란 책 가운데 그 내막을 폭로하였고 상드는 <그녀와 그 남자>라는 책을 써서 자기 자신을 옹호하였다.
 이 3년에 걸친 사랑과 파탄은 뮈세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으나 다행이 이 위기를 통하여 시인은 더욱 성숙해지고 인생과 예술을 보는 눈이 깊어졌다. 그리고 그의 시작(詩作) 활동은 왕성해지고 열기를 띠었으며, 문체는 더욱 유려(流麗)해져 가히 절창이라고 부를 만한 일련이 시를 남겼다. 즉 그는 1835년에서부터 약 6년 동안(25세부터 30세까지) "밤"이란 제목의 네 편의 장시(長詩)를 썼는데 "5월의 밤"(1835), "12월의 밤"(1835), "8월의 밤"(1836)과 "10월의 밤"(1837)이다. 이 영혼의 절규는 그의 시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답고 유창하여 프랑스 낭만파 서정시의 걸작이라고 하는 작품 들이다.
 이 시들 가운데 시인은 그 자신의 고통과 슬픔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절망과 저주에서 벗어나 어떻게 마음의 평화를 회복할 수 있는가를 다루고 있는데 특히 그는 인간의 고통과 슬픔이 인생과 예술 창작에 있어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를 찾고 있다. 인간은 고통과 슬픔을 통해서 더욱 깊어지고 힘차지고 이를 통해서 비로소 자연과 예술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고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결론이다.
 
  그의 만년은 비참한 것이었다. 그는 30세에 이미 노성(老成)한 폐인(廢人)으로 그 후에도 몇 편의 시, 몇 개의 단편소설, 그리고 큰 성공을 거둔 연극 작품도 있었으나 지나친 음주와 무절제한 생활로 그의 정신과 육체를 조기에 마멸시켜 버렸다.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기도 한 그가 47세의 나이로 소식 없이 죽었을 때에는 겨우 30명 내외의 친지가 모여 그의 관을 따랐다고 한다.
  뮈세의 무덤은 파리의 몽마르트 근처에 있는 페르 라세즈 공동 묘지 안에 있는데 그 무덤 옆에는 그의 희망에 따라 한 그루의 버드나무가 심어져 있고 그의 묘석에는 다음과 같은 그의 6행시가 새겨져 있다.
 
내가 죽거든, 내 친구들이여,
무덤 위에 버드나무 한 그루 심어 주오.
나는 그 늘어진 잎새를 좋아하며
그 푸른 빛깔은 부드럽고 다정해,
내가 잠자는 땅 위에
산뜻한 그림자를 드리울 거요.
 
 뮈세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듯이 '낭만파의 응석동이' 혹은 '무서운 아이'였다. 모든 재능과 자질을 겸비하면서도 사회적 안목과 도덕적 척추가 결여된 그는 자연히 인생의 향락과 청춘의 구가에 온 정력을 소진했다. 특히 음주와 연애 행각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쳤다. 그는 사랑을 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 방탕아는 이러한 사랑의 편력 가운데서 사랑의 본질을 추구했고, 그 고뇌를 체험했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 했고, 그 가치를 찾으려 했다. 이러한 노력과 싸움은 성실하고 진지하고 강렬하여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데가 있었다. 그는 <비애>라는 시의 끝에서
 
"이제  이 세상에 남은 나의 유일한 재산은
때로 눈물 흘렸다는 일"
 
이라고 했는데 그 대신 "때로 사랑을 했다는 일"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뮈세는 사랑의 시인이었다. 그는 사랑의 절대성을 믿었고 사랑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변치않는 유일의 현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대의 뼈는 관 속에서 먼지로 남으리라.
그대의 기억도 이름도 명예도 사라지리라.
그러나 그대의 사랑만은, 만일 그 사랑이 그대에게 귀한 것이
  라면
그대의 영원한 영혼은 이 사랑을 기억하리라.
 
 사랑의 절대성을 믿었던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하였다는 그 사실, 그 추억은 이 세상의 다른 어떤 행복보다도 감미롭다고 믿었다. 그가 옛날 사랑을 주고받던 곳에 돌아가 보고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나는 단지 이렇게 말하리라; 이 때 이 곳에서
한때 나는 사랑받았고 사랑했고
그녀는 아름다웠다.
나는 이 보물을 내 영원한 영혼 속에 묻고
하늘 나라로 가져가리라.
 
 이러한 생각과 믿음은 그의 지식이나 사고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의 심정에서, 그의 감정에서 그대로 우러나온 것이다. "예술가나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감정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또 "네 가슴을 두드리라" 거기에 천재가 있다" 라고도 했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시는 영원히 낭만파에 속하며 이 영원한 감정에 대하여 그는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표현을 주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낭만파의 4대 시인의 하나로 꼽히게 하였으며, 그의 시가 지니고 있는 흥미롭고 근대적인 가치라고 하겠다.
 
바닷가에서 / 테오필 고티에
 
 
드높은 창공에서 달님이
손에 든 오색 찬란한 큰 부채를
잠시 방심한 사이
바다의 푸른 융단 위에 떨어뜨렸소.
 
건지려고 달님은 몸을 숙여
은빛 고운 팔을 내밀었으나
부채는 흰 손을 빠져 나가
지나는 파도에 실려 나갔소.
 
그대에게 부채를 돌려주기 위해,
달님이시여, 천 길 물 속에라도 뛰어들리다
그대가 하늘에서 내려오신다면
이 몸이 하늘로 올라갈 수만 있다면.
 
 
비둘기들 / 테오필 고티에
 
 
저기 무덤들 널려 있는 언덕 위에
아름다운 종려나무 한 그루, 군모(軍帽) 앞의 녹색 깃털
  처럼 우뚤 서 있고
거기에 저녁마다 비둘기들 몰려와
그 속에, 깃들이며 몸을 숨긴다.
아침되면 이 새들, 나뭇가지를 떠나간다.
목걸이 구슬알이 풀려 나가듯
흰 비둘기들 푸른 하늘 속에 산산이 흩어졌다가
좀더 먼 지붕 위에 내려앉는다.
 
나의 영혼은 이 종려나무, 거기에
밤마다, 비둘기처럼 산란한 환상의 흰 떼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에서 내려왔다가
새벽 빛이 들자마자 날아가 버린다.
 
 
랑드의 소나무 / 테오필 고티에
 
 
흰 모래로 뒤덮인 진정 프랑스의 사하라라고 할
랑드의 광야를 지날 때 보이는 나무라곤
메마른 풀숲과 초록색 웅덩이에 솟아나는
옆구리에 상처입은 소나무들 뿐,
 
이는 소나무의 눈물, 송진을 훔치기 위해
자기가 살해한 자의 희생으로만 사는
인간이라는 욕심 많은 창조물의 사형 집행인이
나무의 아파하는 몸통에 넓은 홈을 파놓기 때문.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을 아쉬워함도 없이
소나무는 향유(香油)와 수액(樹液)을 흘린다.
그러면서도 길가에 시종 꿋꿋이 서 있다.
서서 죽기를 원하는 부상병같이.
 
시인도 인간의 광야에서는 이 나무와 같아
상처가 없을 때엔 자기의 보화를 심중에 간직하나
일단 그의 노래, 성스러운 황금 눈물을 뿌리기 위해서는
그의 가슴 속에 깊은 상처를 가져야 한다.
 
 
테오필 고티에(1811~1872): 테오필 고티에는 소위 '예술을 위한 예술'의 주창자로 유명하다. 시인으로서 처음에는 낭만파의 색채가 농후했으나 차츰 감정의 시가(詩歌)에서 벗어나 지적이며 냉철한 파르나스파(Parnassien 고답파)의 시가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이루고 있다.
 그는 프랑스 서쪽 국경 지대, 피레네 지방의 타르브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 부모와 함께 파리로 이주했다. 처음에는 루이 르 그랑 중고등학교를 다니다가 후에 샤를마뉴 중고등학교로 옮겼는데 여기서 제라르 드 네르발을 만나 친교를 맺는다. 젊은(19세) 시절, 빨간 조끼의 시인 고티에는 동창생 네르발과 젊은 화가-시인들을 규합하여 전투적인 낭만파를 조직, 빅토르 위고의 깃발 아래 고전파 공격에 앞장섰다. 1830년 위고의 연극 <에르나니> 상연 첫날 밤에는 빨간 공단 조끼에 녹색 바지를 받쳐 입고 머리에 챙 넒은 모자를 쓰고 위고 편에 서서 소위 <에르나니>의 싸움을 승리로 이끈 일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 일은 당시의 고전파 인사들과 상류층 신사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데 충분했다.
 이 때부터 그는 그림을 버리고 문학, 특히 시에 생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생계를 꾸려가기 위하여 신문사에 들어가 예술과 연극 비평가로 기사, 잡문, 논설, 신문 단편소설 등을 썼는데 여가를 내어 시도 썼다. 1830년에 발표한 첫 시집 <포에지>를 비롯하여 <알베르뒤스(1832)>, <죽음의 희극(1838)>, <스페인(1845)>, 그리고 그의 대표 시집으로 <칠보(七寶)와 옥석(玉石)(1885)> 등이 있다. 형태와 색채를 즐기는 그는 또한 여행을 좋아하여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터기, 러시아 등을 두루 다니며 이를 주제로 한 많은 풍물기와 시들을 썼다. 특히 이베리아 반도의 거칠고 햇빛으로 가득 찬 풍경과 스페인 화가 들의 그림을 주제로 한 시들은 아름다운 소품들이다.
 그는 원래 화가가 되려다 문학으로 옮긴만큼 시에서 시각(視覺)을 중요시한 이미지스트(Imagiste)이며 자연미 보다 인공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 시인의 본질이라고 생각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시를 이루는 말과 형태를 깎고 다듬어 완성된 조형미를 만들어 내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 자기의 역작이며 중심 작품의 이름을 <칠보와 옥석>이라고 붙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마치 금은 보석의 세공사와도 같이 작은 형상을 아름답게 갈고 다듬어 완전한 형대를 만드는 데 그의 노력을 바쳤다. 따라서 문학사에 있어 그의 공적은 낭만파의 조잡한 자연 묘사나 무절제한 감정 토로에서 벗어나 시가의 미(美)에 인공적 미를 가하고 아름다운 형태미를 창조하는 역할을 한 데 있다.
  또한 그는 시나 문학에서 예술 이외의 모든 것 즉 사상이나 정치, 도덕, 철학, 그 밖의 모든 유용성을 배격한 예술을 위한 예술의 주창자로 나섰다. "아무 것에도 쓰일 수 없는 것만이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유익한 모든 것은 추하다"라고 선언했다. 이 주창의 정당성은 차치하고라도 그의 이론과 실천(창작활동)은 의외로 많은 예술가와 문인의 호응을 받았고 또 보들레르, 방빌, 플로베르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보다 10살 아래인 보들레르는 이 이론의 열렬한 신봉자이었다. 보들레르가 그의 유일한 시집 <악의 꽃>을 고티에 선생에게 바치고 그 헌사(獻詞)에서 그를 '완전 무결한 시인', '프랑스 문학의 마술사'라고 부른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나폴레옹 3세 제정(帝政)시 고티에는 관보(官報)의 편집 책임자로 임명되고 생활도 나아졌으나 1870년 보불 전쟁과 뒤이은 파리 코뮌(Commune)의 충격으로 1872년 파리 근교에서 급서(急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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