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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 "낯설게 하기" 기법의 낯설게 하기 / 함영준
2018년 06월 21일 17시 03분  조회:2312  추천:0  작성자: 강려
출처  | 청하
원문 http://blog.naver.com/cyan666/120036136959
 

"낯설게 하기" 기법의 낯설게 하기

 

단국대학교 교수 함영준

 

(1)

 

줄에 묶여 매 네 걸음마다 한번씩 다리를 절며 다니는 것은 무엇인가? 쌀뜨이꼬 프-쉐드린의 아주 유명한 이 경구에 대한 답은 다름 아닌 시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것은 시의 정형화된 구조에 대한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시에 대한 낯설게 하기를 시도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쉬끌롭스끼의 지적처럼 위 질문에 대한 대답은 고정된 관습과 습관화된 시의 리듬에 중독 된 사람을 제외하고 예술을 바라보는 모든 이에게는 자명한 것이라 하겠다. 실제로 우리의 예술에 대한 관점은 보다 자주 고정되고 자동화되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일상적인 균형 속에 파격을 줌으로서 예술의 존재가치를 보다 새롭게 할 수 있음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20 세기초 문학성에 대한 관심으로 새로운 학파를 탄생시키는 쉬끌롭스끼(후기 형식주의의 대표자:프라하 학파)의 선언적 논문"기법으로서 예술"의 가장 중심적인 개념중의 하나인 "낯설게 하기"는 형식주의 미학의 기본 도구로서 사용되어 왔다. 특히 형식주의 연구의 집대성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독일의 러시아 문학자 한씬 뢰베는 형식주의가 "낯설게 하기 원칙에서 발전"한 것으로서 이 학파의 총체적인 성격을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 용어는 패러독스한 운명을 살고 있다.

왜냐하면 이 기법의 최초 의미론인 '자동화'된 사물에 대한 '탈 자동화'로의 시각 교정이 오늘날 문학이론에서 거의 여과 없이 "낯설게 하기"라는 자동화된 모습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그에 대한 비판적 그리고 발전적 고찰보다는 존재하는 기법상의 문제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고의 목적은 형식주의적 방법론에 묻혀버린 "낯설게 하기"라는 기법을 다시 한번 낯설게 하여 탈 자동화 시켜 보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쉬끌롭스끼가 고안해 놓은 이 용어의 특징을 살펴 볼 것이다. 그 동안 형식주의를 언급할 때 거의 빠지지 않고 언급되었던 그의 주장을 다시 한번 옮겨 놓으면 다음과 같다.

 

"예술이라는 것은 삶의 느낌을 주고, 사물을 느끼기 위해 다시 말해 돌을 돌답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예술의 목적이란 '사물에 대한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으로가 아니라 '보이는 것'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예술의 기법은 사물을 (낯설게 하는)기법이며 형식을 어렵게 하는 기법인 것이다. 당연히 이 기법은 지각을 어렵고도 오랫동안 확장시키게 되는데 왜냐하면 예술에서는 지각 과정 그 자체가 목적이며 이는 오래 지속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사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경험하는 방법이고 이미 만들어 진 것은 중요하지 않다"

 

여기에서 볼 때 쉬끌롭스끼의 논점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예술의 존재 이유에 관한 것이고(대상을 대상답게 느끼기 위함)

둘째는 예술의 목적에 대한 것(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닌 보는 것으로의 전달)이며

셋째는 이러한 기반에서 예술의 기법은 무엇인가(낯설게 하기와 형식을 어렵게 하기)하는 점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습관적이고 자동적으로 보던 대상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탈 자동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낯설음"이라는 것이 쉬끌롭스끼의 고유한 이론이 아니며 새로운 것 또한 아니었다. 이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이래 지속적으로 사용되어오던 방식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쉬끌롭스끼 자신도 이것에 대해 지적하고 있는 바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시적 언어란 낯설고 놀라게 하는 특징을 지녀야 한다" 사실상 이러한 기법들은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바로크, 낭만주의자 노발리스, 그리고 철학에서는 칸트와 헤겔의 그리고 마르크스 철학에서도 그 맹아적 형태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의 역사적 고찰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 따라서 쉬끌롭스끼와 뽀쩨브냐와의 관계 또한 관심이 없다. 우리의 관심은 이 기법의 보다 본질적인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의 지평 확대에 관한 것이 될 것이다.

문제는 이 "낯설게 하기" 기법이 문학 용어로서의 창조라는 큰 역할에도 불구하고 한계를 보여 준다는 점이다. 그것은 예술에서 자동화되는 대상을 어떻게 이탈시켜 낯설게 할 것인가라는 방법상의 문제와 그리고 이러한 기법의 목적은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또한 덧 부쳐서 낯설게 하기 기법의 지평확대 가능성은 없는 가도 논의의 핵심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쉬끌롭스끼의 주장에서는 이러한 여러 질문에 대한 대답들이 정확히 나타나 있지 않다. 그의 진술에서 발견할 수 있는 "돌을 돌답게 하기 위해" 형식주의자들의 문학관에 부합한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예술은 예술로서 존재양식이며 여타의 사회적, 역사적 관심은 배제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보이는 것으로 전달" 하라는 주문 즉 "낯선 시각" 또는 "처음 본 것처럼" 볼 것을 요구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문학을 보는 것인가 ? 아니면 알아차리는 것인가 ? 그리고 방법상의 문제와 더불어 이 기법의 목적이 "지각을 어렵게 하여 오래 지속시키도록"하는 미학적인 측면의 사용이 "낯설게 하기"의 유일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지의 문제도 정작 쉬끌롭스끼 자신은 무관심한 체 하고 있다.

이러한 것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기법의 사용은 단순히 화석화된 문학 연구의 용어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이미지가 잇는 곳에는 어디에나 낯설게 하기가 존재"한다는 쉬끌롭스끼의 주장은 마치 신화에 등장하는 마이다스의 손처럼 모든 대상을 원하는 대로 처리하고도 정작 사용할 수 없는 그림의 떡과 같은 상황으로 이끌 수도 있다.

이를 밝혀내기 위해 먼저 "낯설게 하기" 기법에 대한 여러 연구가들의 견해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쉬끌롭스끼에게 가장 기본적인 기법인 낯설게 하기는 또 다른 형식주의자인 또마쉡스끼에게 "개인적인 특수한 경우"로 또한 쥐르문스끼에게 이 "낯설게 하기" 기법은 예술 발전의 가장 큰 동인이 되는 요소가 아니라 부차적인 특징일 뿐이다.

그는 "낯설게 하기, 어렵게 하기라는 기법이 미적 체험이 이루어지기 전의 것이며 평범치 않은 미적 대상을 상상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음을 입증"하는 것에 다름 아니며 "체험을 하고 나면 이 감각은 사라져 단순성과 평범함을 느끼는 것으로 바뀐다"고 주장하고 있다.

메드베제프(바흐찐)도 역시 쥐르문스끼의 견해에 공감을 표하면서 이 기법이 "심리적인 주관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소이에서 비롯되었음을 비판하고 있다. 메드베제프는 쉬끌롭스끼가 "감지되는 것을 문학의 목표"로 삼은 것에 대해 비판하며 이러한 감지되는 것이란 실체가 없는" 소박한 심리주의의 모습이라고 반대하고 있다.

보이곳스끼 또한 "예술에서 지각되는 과정이 목적"이라는 쉬끌롭스끼에게 반대한다. 이것이 형식주의자들의 심리학적인 약점을 드러내고 있으며 내용과는 관계없이 사물의 지각 자체를 아름다운 것이라는 "초보적 쾌락주의"공식으로 퇴행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문학 비평가인 프레드릭 제임슨도 쉬끌롭스끼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그는 스위프트의 비인간성, 혐오성과 사르트르의 부르주아 사회의 비판의 힘을 언급하면서 이러한 모든 것이 쉬끌롭스끼에게는 모두 새롭게 하기 위한 구실로서 우선 순위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또한 제임슨은 낯설게 하기가 지각과정 자체인지 아니면 그 지각의 양식 제시 쪽인지 애매하다는 점을 들고 있다. 즉 예술의 본질이 낯설게 하기라는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쉬끌롭스끼의 글은 낯설게 되는 것이 내용인지 형식인지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이렇듯 많은 연구가들이 "낯설게 하기"기법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피력하였음에도 대부분은 쉬끌롭스끼의 기법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뭔가 보충적인 선에서 비평하고 지적하고 있는 것 같다. 이 기법에 대한 비평들의 대부분은 "낯설게 하기"라는 본질적 문제 보다는 이것의 출현 배경이나 혹은 다른 형식주의 이론들과의 연계성 속에서 혹은 다른 논의 구조 층위 속에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평에도 불구하고 쉬끌롭스끼의 이 기법의 중요성은 형식주의 이론과 실제 뿐 아니라 향후 문학이론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뿐더러 문학연구에서 아직도 이 기법은 유용하며 또한 흥미로운 것으로 남아있다. 이제 앞에서 제시한 우리 논문의 중심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결국 쉬끌롭스끼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2)

 

쉬끌롭스끼가 지적하였듯이 무엇보다 먼저 "낯설게 하기"는 어떠한 대상에 대한 관습적인 시각에서 이탈하여 새롭게 보는 것이다. 주지하다 시피 톨스토이는 자신의 작품에서 종종 어떤 사물을 마치 처음 본 것처럼 그 사물의 이름을 명명하지 않고 단지 그 특성을 나열하는 문체적 특성을 보여준다. 언젠가 '밝고 흰 줄기와 가지를 지닌 키가 크고 구부정한 나무'라고 쓴 적이 있는데 이는 물론 자작나무인 것이다. 톨스토이는 마치 이 나무의 이름을 모르고 그 특이함에 놀란 것처럼 묘사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낯설게 하기 기법의 사용에서 사용되는 것은 그 대상의 새로운 시각(혹은 마치 처음 본 듯한)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쉬끌롭스끼는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면 이 기법의 생성원리를 찾아낼 수 있다

 

낯설게 하기 위한 조건은 그 대상의 이름을 모른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름을(또는 명칭) 모른다는 전제는 흥미로운 기호적 성격을 획득한다. 철학자 로세프에 따르면 "어떤 대상의 이름이란 총체적인 유기체로서" 그 이름을 통해 다른 삶을 살아가던 것을 이름을 수렴시키고 환원시켜서 그것 자체가 되게 하는 것이다. 낯설게 하기란 결국 대상의 이름(명칭)을 모르는 체하면서 그 이름을 구성하고 있는 내부 인자들의 특징을 해체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앞에서 이야기한 "자작나무"(명칭)를 모른다는 전제는 이 나무의 구성 인자의 특징인 "밝고 흰 줄기와 가지를 지닌 키가 크고 구부정한 나무"라는 표현으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이름의 기표가 숨겨진 채 기의를 통한 표현 기법이 낯설게 하기의 기본 원리인 것이다.

다음으로 쉬끌롭스끼에 따르면 이 기법은 '에로틱한 예술'에서 자주 보이며, 수수께끼와 민속에서 자주 보인다는 것이다. 그의 통찰력을 토대로 하여 우리는 수수께끼의 구조적 고찰을 통한 낯설게 하기의 생성원리를 추적할 수가 있다.

기호학적인 측면에서 수수께끼는 "기호(수수께끼의 텍스트)의 본뜻(해답)에 대한 관계"를 규정하는 텍스트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수수께끼는 "현실의 예술적 변환 원칙에 대한 문제를 제시하고 아주 단순한 예를 통해 그러한 변환을 조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수수께끼로 제시된 대상은 무언가 부족하고(또는) 변형이나 은유를 통해 왜곡된 묘사로 나타나게 된다.

쉬끌롭스끼 자신 또한 이것이 지니는 기호적 속성이 낯설게 하기 기법과 많은 부분 상관성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미지와 수수께끼"라는 논문에서 쉬끌롭스끼는 수수께끼와 그 해결 과정에 주목하면서 "수수께끼의 해결은 제시된 대상의 특징들의 치환을 통해 의미를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수수께끼에 관한 것을 고찰해 보면 분명히 "하나의 시작되는 상황에서 변환되는 상황으로" 전달해 간다. 만일 우리가 맞추어야할 문제를 X라고 가정하면 X를 암시하는 몇몇의 대항을 지정해 주게 된다 . 이때 지정된 대상들은 맞추어야할 X의 특징, 상황, 부분 등의 조건이어야 한다.

그러나 X를 맞추기 위해서 X에 대한 기능을 제시 해 주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가위(X)를 수수께끼의 문제라고 가정 할 때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다. 두 개의 날카로운 끝(2A)을 가지고 두 개의 고리(2B)에 못이(C)박혀 있는 것이다.(이것을 공식화 하면 X=nA+nB+nC...로 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제시된 그 과정은 어떤 경우라도 낯설어 지는 대상의 기능이 숨겨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가위의 기능인'자르다'는 표현이 나타나면 그 대상은 너무 쉽게 자동화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낯설게 하기"기법의 원리가 도출 될 수 있다. 이는 어떠한 방법으로 낯설게 되는가에 대한 기본적인 답이 된다 (쉬끌롭스끼는 그 방법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낯설게 하기 기법의 원칙은 낯설어지는 대상의 기능이 감춰진다.

 

즉 그 사물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어디에 쓰이는 것인지를 감추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순수한 의미의 낯설게 하기 기법인 것이다. 이는 단지 쉬끌롭스끼가 말하는 새로운 시각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그 과정의 애매성을 제거한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원리를 쉬끌롭스끼가 주로 인용한 톨스토이의 작품들을 통해 보도록 하자. 쉬끌롭스끼가 인용한 톨스토이의 글<부끄럽다>에 대입시켜 보면 보다 확연히 드러난다. 톨스토이는 "법을 어긴 사람들의 옷을 벗기고 쳐서 마루에 넘어뜨리고 눕히고 엉덩이를 회초리로 때리는 것"으로써 대상을 낯설게 한다. 그 낯설어진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태형이다. 태형의 본래 기능인 벌을 주는 것에 대해서는 짐짓 무심한 척 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본질을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형식을 바꿔 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전쟁과 평화>의 오페라나 <크로이체르 소나타>의 결혼에 대한 낯설게 하기는 기능이 제거됨으로 마치 처음 보는 듯한 시각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낯설게 하기 기법은 어떠한 목적을 지니고 있는가? 우리는 앞에서 많은 비평가들은 이 기법의 유용성(문학 연구 방법론적 측면에서)을 인정하면서도 쉬끌롭스끼의 독단적인 규정에 반기를 들고 있음을 보았다. 그 반기의 가장 보편적인 것은 이 기법이 도덕적, 심리적 측면을 완전히 무시한 문학적, 미학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예에서 보여지는 쉬끌롭스끼의 관심이 이념적 의미가 아니라 "상투성에 대한 톨스토이의 도전"이라고 하더라도 예술에서 미학적 기법뿐 아니라 정신적, 사회적, 종교적 의미들을 결코 무시할 수는 없다.

따라서 단지 낯설어 지는 대상의 기능이 제거된다는 것만으로 톨스토이의 이 기법을 설명하기엔 부족한 면이 있다. 쉬끌롭스끼가 인용한 톨스토이의 낯설게 하기 기법을 사용하는 목적은 다른데 있다. 그것이 낯설게 하기의 목적중 하나가 될 것이다.

 

낯설게 하기 기법은 폭로적(비평적)기능을 할 수 있다.

 

쉬끌롭스끼는 톨스토이의 "낯설게 하기" 기법에 대해 논하는 중에 태형에 대한 낯선 시각을 제공하는 것이 본질을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형식을 바꿔 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쉬끌롭스끼는 이 이외에도 <전쟁과 평화>에서 전투장면과 살롱과 극장. <부활>에서 도시나 재판 광경. <크로이제르 소나타>에서 결혼 장면. 그리고 <홀스또메르>에서 조차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미학적인 측면에서만 보고 있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쉬끌롭스끼에겐 이러한 기법의 사용이 "돌을 돌답게" 만들어 주기 위한 예술적 기법이며 "낯설게 하기가 단지 부정적으로 취급하는 사물을 보여주려는 목적으로 적용되어지는 기법은 아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형식주의적 문학 이론이 "문학성"을 찾기 위한 내재적 분석 방법이 경도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잇다. 특히 톨스토이의 작품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쉬끌롭스끼는 이 기법이 드러내 주는 "지각 과정 차체가 목적"이 며 이것이 톨스토이 특유의 시회 비평 수단의 폭로적 기능에 대해서는 관심을 돌리지 않고 있다. 낯설게 하기 기법을 단순히 예술적 선언이라고 볼 수 있는가? 단지 낯설게 되는 대상을 더욱 예술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인가? 우리가 보기엔 아닌 것 같다. <부끄럽다>에서 언급한 태형의 낯설게 하기는 이러한 신체적 징벌을 더욱 징벌답게 묘사하기 위해서 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태형의 불합리한 점을 폭로하기 위함인 것이다. 실제로 톨스토이는 "태형은 인간에게 단지 육체적인 고통 뿐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세의 고통을"주는 것으로 비평하고 있는 것이다.

쉬끌롭스끼가 <전쟁과 평화>에서 살롱 및 극장의 낯설게 하기에 인용하고 있는 것도 실상은 단순히 오페라에 대한 예술적 미학적 목적이 아니라 이는 오히려 "시골적이고 자연적인 나타샤가 오페라를 이해하지 못하다가 사교계의 필수적인 이것을 받아들이게 하는 도덕적인 목적"에 있다. 실제로 곧 나타샤는 완전히 자연스럽게 오페라를 받아들인다. 그녀는 "점점 오랫동안 체험해 보지 못했던 도취 상태로 빠져 들고""이제 이 상황이 전혀 낯설지 않게 되어 만족스럽게" 동참하게 된다. 그리하여 나타샤는 "자신이 지금 있는 세계에 완전히 빠져들어""시골 생활이 전혀 머리에 떠오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급기야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무엇이 이성적이고 무엇이 비이성적인지 모를 이 불가사의한 광기의 세계에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빠져버린 것을 느낄 뿐이었다. 마찬가지로<크로이체르 소나타>에서 결혼의 낯설게 하기 기법이나 <부활>에서 재판관경 묘사와 같은, 이러한 모든 기법의 내용상 기능은(쉬끌롭스끼가 무시한 기능은) 비평적이며 폭로적인 파토스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톨스토이가 사용하고 있는 이 기법의 사용이 "돌을 돌답게"만들어 주기 위한 예술적 기법이며 "낯설게 하기가 단지 부정적으로 취급하는 사물을 보여주려는 목적으로 적용되어지는 기법은 아니다" 라는 쉬끌롭스끼의 견해는 다시 한번 재고되어야 한다.

낯설게 하기 기법의 대가로서 톨스토이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표층의 삭제는 윤리적인 관점에서 부정적인 사회 현상의 폭로를 목적으로 하고 있음은 비록 그의 모든 기법상의 특징은 아닐지라도 절대적인 의미론을 획득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흥미롭게도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서 유럽의 사회적 정치적 제도에 대한 풍자적인 해명을 위해 낯설게 하기 기법을 사용했다고 한 사람은 같은 형식주의자중 한 사람인 또마쉡스끼였다. 쉬끌롭스끼 자신도 1970년대에 들어와 "톨스토이의 낯설게 하기 기능이 양심"이라는 입장으로 후퇴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물론 낯설게 하기 기능이 폭로적(비평적)인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 실제로 쉬끌롭스끼의 지적처럼 많은 이 기능의 많은 부분이 미학적, 예술적 원칙을 위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예로서 체홉의 <까쉬딴까>를 들 수 있다 . 이 작품에서 눈물은 '비오는 날 창문에 어리는 반짝이는 방울들"로 보여 지고 코끼리는 "코 대신 꼬리가 달리고 입 언저리에 살점이 다 뜯긴 두개의 긴뼈를 지닌 뚱뚱하고 거대한 상판때기"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안타 카레니라>에 등장하는 레빈 아이의 탄생 장면에서 사용되는 낯설게 하기는 비판적인 기능은 없다. "리자베따 빼뜨로브나(산파-필자)는 이 꿈틀거리는 새빨간 것을 침대에 놓고는 한 손으로 아이를 들어 올리며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풀었다 간 무언가로 덮으면서 다시 감았다" 당연히 여기서는 폭로적인 목적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선 철저히 쉬끌롭스끼 적인 것으로 보여 진다. 이 기법의 사용에서 우리가 구분해야할 것은 어떠한 때에 비평적 기능을 수행하며 언제 미학적 기능을 지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또 하나의 원리를 도출할 수 있다. 우리가 예를 든 것을 조건적으로 보았을 때 낯설어지는 대상이 문화와 연관되었을 때와 자연적 현상과 관련되었을 때를 구분해야 한다.

 

낯설어 지는 것이 자연적 대상일 경우에는 쉬끌롭스끼적(미학적)타당성을 유지한다. 그러나 문화적 대상은 그렇지 않다.

 

태형과 재판, 극장(오페라), 전투 등과 같이 문학적인 현상이 낯설어질 때 비평적이고 폭로적 의미론을 획득하고 눈물, 코끼리, 자작나무, 어린아이와 같이 자연적인 대상의 낯설게 하기는 미학적인 모습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예에서는 대부분 이러한 원칙이 들어맞지만 문화적인 현상의 낯설게 하기가 모두 비평적(폭로적)이란 우리의 제안이 그리 단순하지는 않은 것 같다. 예를 들어 푸쉬킨의 <대위의 딸>에 등장하는 "결투"에 대한 생각 속의 낯설게 하기 기법은 뭔가 다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결투에서 부상당한 그리뇨프에게 하인 싸벨리치는 말한다 ; "모두가 그 빌어먹을 무슈놈의 잘못입니다. 그놈이 쇠꼬챙이로 찌르는 법과 발 구르는 법을 가르쳤으니까요" 물론 여기서 칼쓰는 법에 대한 늙은 하인 사벨리치의 말은 결투라는 사회적 불합리에 대한 비판적 모습을 띠는 것으로 불수는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것은 독자로 하여금 유머의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다. 유머의 느낌은 마치 수수께끼나 에로틱한 예술에서와 같이 미학적인 의미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낯설게 하기 대상의 자연적 현상과 문화적 현상을 분리해서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쉬끌롭스끼가 바라본 단 한가지의 목적과는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앞에서 본 여러 원리들을 중심으로 실제적인 낯설게 하기의 사용의 예를 기호적 측면에서 분석하기 위해 쉬끌롭스끼가 자신의 논문에서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홀로또메르>를 모델로 볼 것이다.

제일 먼저 독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관점의 문제이다. 이 작품은 말의 관점에서 인간의 모습을 보고 있다. 이는 당연히 인간이 정해놓은 "이름"(명칭)을 새롭게 불 수 밖에 없는 조건을 부여해 준다. 이 경우 시점은 말에게 주어지고 말에 의해 낯설어진 효과는 더욱 강한 가극을 준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동물의 관점으로 본다는 것은 당연히 낯설어 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경우 낯설게 하기는 처음엔 주로 폭로라기보다 종종 묘사적 타입으로 그려지는 것처럼 보이다가 대개의 경우 작품의 전개 속에서 작가적 시점과 관점이 작용하면서 내용상의 폭로적 의미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주인공이 아닌 대부분의 작품에서 보여 지는 이러한 시점의 불일치는 일반적으로 아이러니한 작품의 예에서 자주 등장한다.

쉬끌롭스끼는 <홀스또메르>에서 주도적인 낯설게 하기 기법으로 사용하는 것을 두 가지로 보았다.

하나는 사적 소유에 대한 문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죽음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본 언어로 하자면 문화적 대상으로서 '사적 소유'의 문제와 자연적 대상으로서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먼저 이 작품의 소유에 대한 고전적인 인용을 살펴보자. 무엇보다 먼저 <홀스또메르>에서 가장 명확한 낯설게 하기는 말의 눈을 통한 '소유'의 문제일 것이다. 여기서도 내용상 기능은 사적 소유에 대한 비평과 폭로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소유의 "낯설게 하기"를 기표와 기의라는 기호학적 측면에서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자기 것, 자기 말이라는 단어가 무얼 뜻하는지는 그 당시엔 정말 몰랐지,...이것이 어떤 관계를 뜻하는지 당시 난 전혀 알 수가 없었어...그 당시로서는 인간의 소유물로서 나를 자기 것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거야. 살아 숨쉬는 말인 나를 향해 붙여진 나의 말이라는 단어가 내겐 마치 나의 땅, 나의 공기, 나의 물이라는 단어들처럼 이상하고 어색했던 거지..."

 

홀스또메르의 눈에 비추어진 '소유'는 (1)먼저 단어적 수준에서 드러난다. '내 것, 나의 것""자기 것"이라는 단어는 실제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말은 이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말에게 이는 단지 소리로서만 존재 할 뿐 어떤 기능도 수행하지 못한다. 또한 "나의 땅","나의 공기" 그리고 "나의 물"은 부조리한 단어 결합이며 역시 무의미하고 그 단어의 기능은 없다. 따라서 말의 입장에서 이러한 모든 단어들은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닌 조건적 언어이다. 다시 말해 "무엇 때문에 그럴는지 모르는" 단어들은 그 기능이 제거된(감춰진)기표상의 낯설게 하기인 셈이다.

 

"...그 단어의 의미는 이런 거야. 인간들의 삶은 일이 아니라 지껄여 대는 말에 의해 좌우된다는 거지... 나의 것, 나의 물건, 나의 소유라는 것이지... 무었 때문에 그렇게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던 그렇게 되어 있어. 난 한동안 이런 것이 인간들에게 어떤 직접적인 이익이 되는 것인지 이해해 보려고 무진 애를 썼어. 하지만 이건 잘못된 거야 예를 들어 나를 자기 말이라고 부르던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은 나를 타고 다니지도 않았어. 오히려 날 탄 사람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어. 내게 먹이를 준 것도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지"

 

기의적 측면에서 '소유'는 (2)인간에게 어떠한 '이익을 의미한다." 나를 자기 말이라고 부르던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은 나를 타고 다니지도 않았어" 여기서 소유라는 기능의 목적은 아마도 그 말을 타고 다님으로서 다시 말해 말을 이용함으로서 의미를 찾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날 탄 사람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고 보면 소유의 기능은 제거되고 부정된다. 또한 "내게 먹이를 준 것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소유자(주인)의 기능은 당연히 말에게 먹이를 주어야 한다. 그런데 주인은 이 기능을 거부한다. 비록 말 지기를 고용하여 봉급을 줌으로서 이 기능을 간접적으로 수행은 하지만 이 기능은 여기서 부정적으로 폭로된다.

 

"네게 선을 베푼 사람들도 나를 자기 말이라고 부르던 그 사람들이 아니라 마부나 수의사난 아니면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었어. 내 주변의 사람들을 관찰해 본 결과 나의 것이라는 개념은 우리 말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낮고 저급한 본능인 소위 감정이나 사적 권리라고 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지. 인간들은 <나의 집>이라고 말하면서도 결코 거기에 살지 않고 단지 집의 건물 자체와 그 유지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상인들은 <나의 상점>, <나의 양복점> 하고 말하지만 자신의 가게에 있는 고급 양복지로 만든 옷을 입어본 적이 없다는 걸 알고 있어. 인간들은 땅을 다신의 것이라고 부르면서도 그 땅에 가본적도, 그 땅위를 걸어 다녀본 적도 없단 말이야. 심지어 다른 사람들을 '나의 사람'이라고 부르는 인간들도 전혀 그들을 만나 본적도 없으니 말이야.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맺고 있는 관계는 단지 손해를 입히는 일 뿐이지. 혹은 여자들을 보고 나의 여자니 마누라니 하고 부르는 데도 그 여자는 다른 남자와 살기도 해. 결국 인간들이 인생에서 바라는 것은 그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될수록 많은 것을 나의 것이라고 말하기 위한 거야 바로 이점이 인간과 우리말을 구별하는 본질적인 차이라고 나는 확신할 수 있어..."

 

낯설게 하기는 그 기능의 바꿔치기에 의해 강조된다.

 

홀스또메르의 관점에서 '소유'는 (3)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주인의 필수적인 기능은 아니다. 주인은 선을 행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잇다. 여기서 낯설게 하기의 기능은 슬쩍 다른 것으로 변화된다. 홀스또메르는 "선을 베푼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자기와 직접 관계없는 사람"임을 말한다. 이것은 말에 대한 본질적인 기능이 아니라 부차적인 것이다. 따라서 기능은 바꿔치기 된다. 소유라는 대상의 낯설게 하기는 여기서 '이익'이라는 소유의 기능이 제거되는 게 아니라 '선'이라는 다른 기능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제 자연스럽게 소유는 선이라는 가치 기능으로 넘어간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비평적인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잇을 것이다.

우리는 <홀스또메르>에서 '소유'가 "인간의 저급한 본능인 감정이나 사적 권리"라는 기능 대신에 경제적인 기능으로 바꿔치기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자기 집에 살지 않고"."자가 땅에 가보지도 않음으로", 집이라는 살아가는 공간과 자신이 경작해야하는 땅은 돈과 소유라는 경제적 이익으로서 바꿔치기 된다. 그리고 상인이 "자기 집의 천으로 옷을 해 입지 않는'것도 마찬가지로 옷감의 본래 기능인 옷을 해 입는 것에서 판매라는 소유의 이익으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사람들을 자기 사람이라고 부르면서도 그들을 본적이 없는 것은 기능의 제거이며 뒤이어 "다른 사람들에게 맺고 있는 관계는 단지 악을 행하는 것"은 바꿔치기 기능인 것이다. 그리고 이 바꿔치기 기능을 통해 낯설게 하기의 폭로적 기능이 강화되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는 <홀스또메르>에서 소유에 대한 "낯설게 하기"를 보았다. 다음으로 자연적 대상인 죽음이 어떻게 낯설게 되는지 보자. 소유의 문제를 제외하고는 낯설게 하기 기법의 중요한 부분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세상을 방황하며 먹고 마셔댄 세르뿌홉스꼬이의 죽은 육신이 한참 후 땅에 묻혔다...새 관을 다른 납으로 된 곳에 집어넣고 모스끄바로 운구하여 거기서 옛사람들의 뼈를 파헤치고 새 제복과 깨끗한 구두로 감춰진 구더기가 우글거리는 썩어 가는 육신을 흙으로 완전히 덮어 버렸다."

 

여기서 육신이 먹고 마시고 돌아다닌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육신이 먹고 마시고 돌아다닐 수 있는가? 물론 불가능하다. 육신의 기능은 인간을 정신과 영혼과 더불어 지탱해 주는 것이다. 육신의 기능은 낯설어지면서 그 기능이 제거된다. 죽음에 대한 미학적 진행효과는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낯설게 하기는 그로테스크로 발전해 간다. 물론 죽음의 모습이 주는 대비는 말의 관점이 아닌 작가의 관점이다. 여기서 단지 죽음의 대비 속에 드러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는(비판적 기능)낯설게 하기 기법의 또 다른 측면으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낯설어지는 대상의 기능이 감춰지고 제거되는 것은 순수한 의미의 낯설게 하기 기법 즉, 쉬끌롭스끼의 표현을 빌자면 '새로운 시각'을 위한 기법인 것이며 톨스토이에게서 주도적으로 보여 지는 기능의 바꿔치기는 어쩌면 비평적 성격을 위한 이 기법의 확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쉬끌롭스끼는 대단히 중요한(그러나 유일한 문학 기법은 아닌)것을 착안해 냈고 낯설게 하기의 필수적 조건이 '새롭게 보기"를 끌어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이 생각을 완성시키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이러한 새로운 시각은 우리가 위에서 본 것처럼 다양한 기능들을 자주 수반하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지적해야 할 것은 쉬끌롭스끼는 낯설게 하기 기법을 예술의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반드시 있어야 할 기능으로서 새로운 대상을 창조하여 더욱 강렬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낯설게 하기가 그것으로 그치지는 않는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기법의 사용이 과연 어디에 어떻게 적용되느냐에 대한 것이다. 쉬끌롭스끼는 "이미지가 있는 곳에는 어디나 낯설게 하기가 있다"고 언급하면서 그 예로서 에로틱 예술에서 이 기법의 사용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의 사용 용례를 밝힐 뿐 왜 그 기능을 사용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비록 그가 완곡어법에 대해 말하긴 했어도 아마도 에로틱 예술에서 낯설게 하기의 사용은 "타부(금기)"에 대한 것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쉬끌롭스끼는 동일한 행위에 대한 낯설게 하기라는 .심리적 병치법'(유사성 속의 불일치)에서의 낯설게 하기와 방언사용에 의한(난해하고 애매한)낯설게 하기를 지적하고 있다.

이 밖에도 낯설게 하기의 기능과 목적은 다양하게 적용될 수 있고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브이곳스끼가 제기한 것처럼 감정의 전활을 일으키는 카타르시스, 사회 비평적이고 폭로적인 기능의 풍자, 무섭게 만드는 기능(스릴러), 흥미를 유발시키는 기능(추리소설), 마술적 상황(혹은 질병을 낫게 하는 주술), 성례적, 신비적 기능(주로 이어성에 의해)(성스러움은 불가사의한 비밀일 수 있다)등 보다 다양한 기능성들을 언급할 수 있다.

현대에 와서는 광고의 기능도 낯설게 하기에 사용된다. 특히 짧은 시간에 주어진 관심을 최대한 증폭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지각을 오랫동안 확장시키기"위해서도 광고는 기존의 자동화된 시선을 바꾸어 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광고에 많이 사용되는 유행이란 무엇인가를 보자. 헤겔이 지적한 것처럼 "유행의 의미란 의복이 지속적으로 새로워지고 그것이 또 감춰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여성들이란 의상에 의해 새로워지기 위해 옷을 새롭게 입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동화되어 여자는 사라지고 여성의(실체)는 구현되지 못 한다"는 것이다. 헤겔의 이러한 생각은 쉬끌롭스끼에세서 발견된다,

" 자동화가 사물과 의상, 가구, 아내, 전쟁의 공포를 먹어치워 버릴 것"이라고 하였다. 광고에서 보여지는 유행의 새로움은 낯설게 하기의 가장 잘 어울리는 영역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기법의 모든 기능과 적용을 살펴 볼 수는 없다. 단지 우리의 관심은 쉬끌롭스끼의 이론이 지니는 논쟁적 측면보다는 오히려 근본적인 "낯설게 하기" 기법의 적용으로 다른 지평확대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낯설게 하기 기법은 감지되는 이미지를 창조하는 데에만(쉬끌롭스끼에게선 주로 문학)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인 구조의 통일 속에서 확대되고 구체화 된다. 쉬끌롭스끼의 주장인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보이는 것으로 전달"하라는 주문을 과연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방법상의 문제와 더불어 이 기법의 목적이 "지각을 어렵게 하여 오래 지속시키도록"하는 것이 문학이외의 예술 장르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우선 그의 말대로라면 문학은 알아차리는 것으로가 아니라 보는 것으로 전달된다. 물론 쉬끌롭스끼 자신이 시각을 통한 지각의 확장을 모를 리 없었겠지만 문자 그대로 본다면 "시각"을 통한 전달이라는 것이 문학보다는 오히려 공연 예술 분야에서 더욱 설득력이 있다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쉬끌롭스끼가 문학에서 보고자 했던 "시각"이 사실 연극(공연예슬)에서 1차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연극예술이 이루어지는 극장은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그리스어인 "볼거리"와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공간이다. 주지하다시피 그리스 연극은 관객들이 모두 그 내용을 알고 있던 것이었다. 따라서 관객의 관심은 공연되는 연극의 인물에 게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내용)에 관심이 있다기 보다는 이미 알려진 그 이야기를 어떻게 새롭게 꾸미느냐(형식)에 집중되어있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실제로 우리는 세익스피어의 "햄릿"이나 "춘향전"의 내용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공연을 가는 것은 어떠한 "새로운 시각"으로 이 작품이 꾸며졌는가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연극의 본질적인 의미론인 볼거리를 새롭게 시도한 사람이 20세기 독일의 극작가이며 연출가인 브레히트이다.

흥미롭게도 연극에서의 낯설게 하기가 1930년대 브레히트에게서 "소외"라는 개념으로 사용되면서 스파니슬랍스끼 연극론과 더불어 20세기 가장 중요한 연극적 용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 실제로 문학적인 측면에서 쉬끌롭스끼의 기법인 낯설게 하기는 연극적인 측면에서 브레히트의 "소외" 효과에 대칭된다. 그러나 브레히트의 소외 개념과 형식주의의 낯설게 하기 사이의 상관관계는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1959 년 존 윌릿은 <브레히트의 연극>에서 이 용어가 러시아 형식주의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라는 추론을 하였는데 그는 "브레히트가 1935년 처음으로 모스크바에 체류한 이래 그의 작품에 소외라는 표어와 이론이 등장함은 시사적이라는 것이다. 로널드 그레이 ㅣ역시 브레히트의 이 용어가 러시아의 "낯설게 하기"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있다. 브레히트의 러시아여행은 이미 1932년에도 한 번 있었고 그가 형식주의자들과 교유했다는 증거도 없었으며 실제로 브레히트가 1930년대 러시아를 방문하여 이 형식주의자들의 저작을 알았다 하더라도 낯설게 하기라는 용어는 순수하게 문학적인 개념이지 사회적인 요인은 전무하다는 것이다.

브레히트의 연극관에 대해서는 다음의 주제로 남겨 놓더라도 그의 연극적 낯설게 하기가 오늘날 대단히 중요한 연극 미학의 한 틀을 만들고 있음은 우리의 주제에 대단히 시사적이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영향과 수용관계가 논란이 있다 할지라도 쉬끌롭스끼 기법의 연극적 지평확장을 확인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열린 가능성으로

 

우리가 보고자 한 "낯설게 하기"에 대한 것은 아직 미완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쉬끌롭스끼의 기법이 지니고 있는 한계와 그 발전 방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그것은 낯설게 하기의 문학적 기법에 대한 관심이 문화사적인 의미를 획들할 수도 있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이 기법은 단순히 논란의 대상으로 존재하거나 아니면 박제된 이론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확장되고 변환되고 적용될 수 있는 기능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낯설게 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그 대상의 이름을 모른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낯설게 하기 기법의 원칙은 낯설어지는 대상의 기능이 감춰진다.

낯설게 하기 기법은 폭로적(비평적)인 기능을 할 수 있다.

낯설어지는 것이 자연적 대상일 경우에는 쉬끌롭스끼적(미학적) 타당성을 유지한다. 그러나 문화적 대상은 그렇지 않다.

낯설게 하기는 그 기능의 바꿔치기에 의해 강조된다.

 

우리가 제시한 이 기법의 보충 설명들은 단지 조건적일 뿐이다. 이것은 아마 낯설게 하기의 새로운 면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본래 낯설게 하기가 본질은 변하지 않은 채 대상을 새롭게 보는 것처럼 우리의 이러한 시도 역시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물론 개별 작가들의 더 많은 예문들을 통해 보게 되면 아마도 우리가 본 논문에서 본 것보다도 다양한 다른 방법들과 목적들이 더 많이 드러날 수도 있을 것이다.

도한 우리가 잠시 보았던 문학 이외의 다른 공간에서 이 기법의 적용은 어쩌면 오늘날 필수적인 연구주제가 될지도 모른다. 모든것이 자동화 되어지는 세상 속에 끊이없이 요구하는 아이디어는 결국 대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라는 쉬끌롭스끼의 주장에서 찾아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형식주의 미학 원칙의 주도적 의미를 주었던 쉬끌롭스끼의 "낯설게 하기" 기법에 대한 고찰에서 우리는 조건적인 여러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결론에서 우리가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있다. 본 논문은 애초 쉬끌롭스끼의 "낯설게 하기'기법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구상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결국 우리가 도달한 것은 그의 진술 속에서 한두 걸음 앞으로 나간 것인지도 모른다. 그나마 쉬끌롭스끼가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닌 단지 그의 입장에서 중요치 않았거나 무관심한 부분에 대한 보충으로 끝이 나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동화된 인상을 인생이라고 말하듯 살아가는 우리에게 문학의 한 기법으로서 낯설게 하기를 탈자동화 시켜보려는 시도는 그것으로 의미를 부여했다는 자족을 하게 한다. 그리고 대부분 이론의 존재가 갑작스런 도약에 의해서가 아니라 더딘 진화에 의해서 발전함을 생각할 때 앞으로 더 많은 비판과 보충, 그리고 진정한 안티테제(만일 필요하다면)를 향한 정지작업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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