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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나의 두 여자, 은유와 환유 / 이빈섬
2018년 06월 23일 20시 54분  조회:1449  추천:0  작성자: 강려
나의 두 여자, 은유와 환유 / 이빈섬 

우린 늘 언어와 문자에 골몰하면서도 그걸 쉽게 경멸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말 잘하는 놈을 보면 밸이 틀린다. 뭔가 번지르르한 말결 속에 교묘히 허수를 숨기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시나 수필을 쓰면서도 은유와 환유가 풍겨내는 지분냄새같은 것을 지독하게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기름끼 다 빼고 정말 언어의 견결한 골조만 남은 시, 수필을 쓰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런 것이 가능할까? 문학에서 은유와 환유가 들어올린 공간을 모두 제거해버리는 일이? 물론 그건 번답과 화려가 본질을 가리고 진의를 에두른 적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다이어트의 희원임을 모르진 않는다. 그러나 그건 은유와 환유가 좀더 평상어에 가까운 방식으로 슬림해지는 것이지, 그것들에 대한 무차별의 삼제가 될 수는 없다. 

문학의 심연은 어쨌든 문자가 들어올린 그 여지의 활기와 비의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교환을 위한 통상의 문자들만을 줄세워 문학을 할 수는 없다. 그건 문학의 순정성의 증표가 아니라, 문학을 압살하고 경멸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평상어의 눈으로 시와 산문을 재단하려는 모든 기도를 나는 반대한다.

복잡한 문장, 섬세한 뉘앙스에 대한 가차없는 경멸. 여기엔 정말 심각한 무지와 오해가 있지 않나 싶다. 우선 우리나라 국어교육과 언어사회학의 죄악이다. 논리를 즐길 줄 아는 교육을 받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논리가 돼야 수사학이 된다. 무슨 뜻인지 파악하는 눈과 귀가 없는데 어떻게 그게 즐거울 수가 있으랴? 또 많은 달변가들과 문자쟁이들이 사람을 현혹시키고 본질을 어지럽히는데 그 재능을 써오기도 하였다. 그러니 지레짐작 말 잘하는 놈은 의심부터 하고 볼 일인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마음이 중요하지, 그것을 표현하는 재능은 별 거 아니다. 기본적인 말만 할 줄 알면 되는 게 아닌가. 이런 통념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먹혀들어가면서 그것과 대립되는 능력인 화술과 언어재능과 시적감각들이 세상살이에 별로 소용없는 물건으로 치부되게 되었으리라. 그러나 과연 그게 옳은 생각인가.

누군가에게서 몇 마디 날카로운 지적을 받으면 그것을 논리적으로 풀기 전에 얼굴부터 벌개져서 입이 꽉 닫히는 일. 아주 치열한 논리적 공방을 바라보면 그 풍경에서 시정잡배의 멱살잡이 만을 떠올리며 그걸 뜯어말려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일. 몇번씩 뒤틀어 표현한 복잡하고 섬세한 문장들에 대해서 아예 손사래부터 치며 왜 해골을 복잡하게 하느냐고 화내는 일. 이런 언어습관이 유통되는 사회에서 시가 존재하기란, 혹은 문학이 당위를 인정받는 일이란 얼마나 간고한 일인가.

문학이란, 혹은 시란, 평상어로부터의 고의적인 일탈이다. 좋게 말해서 일탈이지 솔직히 말하면 멀쩡한 언어판을 뒤흔들어 개판으로 만들어놓는 일이라 할 수 있다. 화폐와 같이 정직한 교환가치를 인정받는 평상어는, 인간의 언어욕망 모두를 채워주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그러니 허전한 뭔가를 채우기 위해 인간은 시, 혹은 문학을 기웃거린다. 평상어들이 득세하여 문학적 언어들을 핍박하고 경멸하는 사회. 이것이 우리 사회의 인문적 지형도다. 인문학의 위기, 인문주의의 위기라는 표현 또한 실용이라는 담론에 경도되어 오래된 인류의 낙원을 스스로 폐기처분하고 있는 이 시대의 경박에 대한 경고다.

은유란 뜻밖에도 발이 넓다. 어쩌면 문학 전부가 은유란 그릇 안으로 들어와 앉아도 자리가 남을 정도다. 은유에 대한 성찰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찾아올라가야 할 만큼 묵은 내력을 지닌다. 인류는 일찌감치 언어의 별세계를 찾아냈다. 저 그리스 아저씨의 <시학>을 잠시 훔쳐보자. "은유란 유에서 종으로, 또는 종에서 유로, 또는 종에서 종으로, 또는 유추의 관계에 의해서,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이시켜 적용하는 것이다." 유니 종이니 하는 말 때문에 지레 따분해질 필요는 없다. 일본사람과 게다신발을 생각하면 된다. 이때 게다는 종이며 일본사람은 유이다. 일본사람을 그냥 게다짝이라고 멸칭하기도 하고, 그것을 신은 모양새를 데려와 쪽발이라고 욕질하기도 한다. 이것도 고전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은유이다.(실은 환유이지만.) 앵두같은 입술이라 할 때 앵두와 입술은 붉음이란 특징을 매개로 한 유추의 관계다.(이건 은유 중에서도 직유라고 불린다.)그러니 은유가 가능한 경우를 아저씨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다. 여기서 귀담아 두면 좋을 것은,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이시켜 적용한다는 표현이다. 무엇과 무엇을 연결시켜 어떤 효과를 자아내는 행위. 이같은 은유론은 많은 학자들의 성찰을 거쳐서 체계적으로 다듬어져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지금까지도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적시하고 있다. 은유는 너무 평범하고 진부해서도 안되며 지나치게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가 되어서도 안된다. 은유가 평범하고 진부한 표현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까닭은 언어의 은유적 사용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즉 개똥이는 개똥이가 아니라 말똥이라고 말하는데서 생겨나는 즐거움, 즉 우회해서 말하는데서 생겨나는 수사적 즐거움-을 보장받기 위해서이다. 또 수수께끼가 되는 걸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자칫 은유를 통한 언어의 우회적 움직임이 그 출발점을 잊어버리고 길을 잃게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이 아저씨가 은유를 너무 멀리서 이끌어내서는 안된다고 여러번 강조하고 있는 까닭은 은유의 유추적 즐거움이 언어의 수사적 기능, 말하자면 담론을 통해 타인을 설득시키는 것에 종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서 살피자면 은유는 낱말과 낱말 사이의 거리이다. 유사성의 거리라고 할까. 너무 가까우면 재미없고 너무 멀면 딴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그 알맞은 거리의 긴장과 탄력이, 좋은 은유를 만들어낸다.

쓰다보니 문자 사이의 건조함이 목구멍을 칼칼하게 한다. 은유에 관한 날렵한 성찰들을 살핌으로써 물기를 뿌려보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말은 나를 사로잡았다. "은유는 아마도 인간의 가장 다산적인 잠재력일 것이다. 그것의 효력은 마술에 접해있고, 그것은 신이 인간을 만들었을 때 그의 피조물의 몸 속에다 깜박 잊어버리고 놓아둔 창조의 도구처럼 보인다." 요컨대 은유는 인간이 지닌 조물주의 능력, 즉 창조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수술가위를 몸 속에 놔둔 채 꿰매는 멍청한 외과의사로 신을 조롱한 죄가 가볍지 않아 보이지만 은유에 대한 예찬을 이 정도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리쾨르의 얘기도 들을 만하다. "은유는 낱말 차원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에서 발생한다. 즉 술부에서 발생한다. 의미혁신은 주부와 술부가 이어지면서 낱말이 사전적 의미를 어느 정도 이탈하면서 발생한다. 은유는 어떤 말을 통해서 다른 말을 하려고 하는 말이다. 한번 꼬여서 간접으로 무엇을 겨냥한다. 여기서 언어혁신이 일어난다. 언어에 들어있는 뜻이 아니라 언어가 새로 만들어내는 뜻이다. 말이 새로운 뜻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은유는 <의미론적 사건>이라 할 만하다." 

라캉도 거든다. 그는 프로이드를 데려오면서 인간의 무의식의 지형은 은유와 환유의 기법이 차용되어 있다고 말한다. 꿈 속에 등장하는 많은 것들은 비슷하거나 근접한 무엇들의 변용이 아니던가. 크리스테바는 말한다. 텍스트에서 첫 출발하는 주체는, 에고의 가장자리에서 기호계의 검은 물결이 흘러넘치는 절벽 위에 대롱대롱 매달린채 그것에 교란받는 주체이다,라고. 데리다는 은유를 이렇게 말한다. "이성중심주의를 희석시키는, 아버지의 집으로부터 떠나가는 한없는 이방의 여행이다."

제 생각이 없으면 이렇게 글에 귀신들이 들끓는다. 남의 생각에 의지하여 앵무새같은 개념들을 늘어놓는 일이 자신의 새로운 생각을 매만지는 일보다 훨씬 쉽기 때문이리라. 그런 비난들이 더 커지기 전에 내 얘기들을 좀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은유의 서양말인 메타포 (metaphor)는 그 말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메타페레인이란 그리스어를 만나게 된다. 메타는 "위로" 혹은 "너머로"라는 뜻이고 페레인은 "옮기다" 혹은 "나르다"의 뜻이다. 은유란 말이 처음 쓰일 때의 생각은 "한 말에서 다른 말로 그 뜻을 실어 옮기는 것"이었을 것이다. 

어느 영화에서 어떤 소년이 말한다. 인생은 구두와 같다고.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묻는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처음엔 맞지 않지만 조금씩 발을 맞춰가듯 맞춰가는 게 인생이 아니냐고, 소년은 짐짓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아버지는 되묻는다. 그래? 그럼 인생은 장갑과도 같은 것이군. 그것도 맞춰야 하잖아? 아냐 인생은 모자와도 같은 것이야. 아니 내복과 같은 게 아닐까? 아버지의 조크는 소년의 은유가 지닌 약점을 정확하게 포착한 것인지도 모른다. 은유가 생동감을 얻기 위해서는 두 사물의 유사성이 참신하고도 설득력있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소년은 그의 은유를 충분하게 잘 설명하지 못했는지 모른다. 인생은 구두와 같다. 참신한 비유가 아닌가? 이런 비유를 만났을 때, 우린 인생과 구두가 지닌 유사점에 대해서 고민하고 성찰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은유의 힘은, 구두라는 매개개념을 데려와, 인생이란 의미를 좀더 풍요롭게 파악해가는데 있다. 

개미같은 허리라고 하면 우린 아예 개미를 떠올리지 않고도 가는 허리를 생각하게 된다. 그 은유가 오랜, 잦은 사용으로 진부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우초밥같이 생긴 여자라고 말한다면 우린 한참 고민하게 된다. 도대체 어떻게 생겼단 말인가? 쉽게 답이 안나온다. 이 수수께끼가 의미의 미로에서 너무 오래 헤매면 그건 일단 성공적인 비유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새우초밥 여자가 들어있는 문장의 맥락에서 그가 가슴에 겨자빛 반점을 지닌, 불그죽죽한 새우무늬의 숄을 걸치기 좋아하는 여자라면 그건 설득력있는 은유일 수 있다. 이렇게 문맥 속에서 살아움직이는 두 개념 간의 피돌기가 자아내는 효과, 이것이 은유의 힘이 아닐까 싶다. 새우초밥같은 여자라고 말했을 때, 그 여자는 새우초밥에서 건너오긴 했지만 새우초밥을 넘어서있는 뉘앙스이다. 

내가 아까 불러온 귀신들의 말로부터 받았던 인상들을 종합하자면, 은유란 것이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본질적인 무엇이라는 놀라움이다. 수사학은 출발과 끝이 은유에 싸인 하나의 거대한 봉지사탕인지 모른다. 문학이란 은유 욕망들의 다채로운 결과물이기도 하다. 통상적인 언어에서 빠져나온, 바람난 언어들의 춤이다. 시는 평상적 언어에서 새나가는 뉘앙스들을 수배하러 나선 또다른 언어들의 그물망이다. 언어를 올라탄 언어, 문자와 문자의 교미, 낯익어서 이미 긴장이 풀려버린 언어들의 나사를 풀어 낯선 다른 언어를 끼워넣음으로써 새롭게 하는 작업들. 은유란 일렬로 선 낱말들을 교란시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본능적인 유희가 아닐까 싶다. 신은 인간에게 의사소통을 위해 언어를 선물했을 테지만, 인간은 그것을 즐기는데에 쓰기 시작했다. 이 유희의 한 지류가 문학이며 레토릭이며 또, 은유행위다.

두루뭉수리하게 통상 언어의 일탈 모두를 은유라고 부르던 아리스토텔레스식 분류법이 은유와 환유라는 보다 섬세한 일별법으로 진화하게 된 것은 언어학자 야콥슨의 공로다. 야콥슨에 이르면서 은유와 환유는 치열한 대립쌍으로 거듭나게 된다.물론 그 전에도 은유와 환유는 구별지어지는 개념이었다. 라틴수사학의 한 경전인 1세기경의 <레토릭>이란 책에서는 환유를 " 그 자신의 이름에 의해 지칭되지 않은 어떤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표현을 근접한 요소로부터 빌어오는 문채(文彩)"로 설명하고 있다. 환유를 뜻하는 미토니미(metonymy)는 그리스어 미토니미아를 어원으로 가지는 말이다. 그 뜻은 이름을 바꾼다는 뜻이다. 그래서 혹자는 환유를 아예 전의(轉義)라고 부르기도 한다. 야콥슨은 은유가 유사성에 기댄다면 환유는 인접성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은유가 초현실주의나 낭만주의 상징주의와 손을 잡는다면 환유는 고전주의나 리얼리즘과 관계를 맺는다고도 말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나는 요즘 황지우를 읽고 있다, 고 말할 때, 나는 황지우의 시를 읽고 있다는 뜻이다. <황지우>라는 인물의 한 부분인 그의 시작품을 가리키는데에 황지우 모두를 데려와버린다. 반대도 가능하다. 한쪽 팔이 없는 사람을 외팔이라고 부른다. 돌아온 외팔이란 영화도 있지 않았던가. 외팔이란 팔이 없다는 특징 만으로 어떤 사람을 특칭한다. 환유와 제유라는 분류로 더 섬세하게 구분도 하지만 이 모두를 환유라 하자. 환유는 언어를 사용하는 효용성과 크게 관련지어져 있다. 군대시절 고참이 어디에 사느냐고 물었을 때, 신병인 나는 서울에 산다고 말했다가 혼쭐이 났다. 서울이 모두 네 집이냐며 기합을 주는 것이었다. 이런 썰렁한 유머는 군대에서 하나의 관습을 이루는 것들인데, 여기에도 환유에 대한 나름의 성찰이 숨어있다. 우린 서울에 산다고 말하지, 서울시 중구 순화동 7번지 우리집에 산다고 말하지 않는다. 서울이라는 대표지명으로 구체적인 지명을 환유하는 것이다. 

한 글벗은 한때 환유법을 능란하게 활용하는 문장들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어떤 모임의 후기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거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독특한 호칭으로 불러 문장의 윤기를 낸 것이었다. 예를 들면 그의 낭군이 된 글빛하늘이라면 그중의 한 낱말인 <빛>으로 표현하고, 산돌이 아이디를 가진 사람은 <산>으로 표현하고는, 산이 빛의 손을 흔들어대고 있었다,는 식의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악수 장면이 새로운 기의를 발하면서 놀라운 참신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은유는 비슷한 성질을 이용한 낱말의 연결인 반면, 환유는 어떤 사물과 인접한 무엇을 데려와 그 사물을 대치하는 기법이다. 김동인의 붉은 산은 황량하지만 버릴 수 없는 이 나라에 대한 감동적인 대치물이다. 블루칼라는 노동자들이 입는 옷으로 그 노동자 집단 전체를 의미한다. 어떤 말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그것과 근접한 무엇으로 표현하여 어떤 쾌감을 얻는 언어행위이다. 

은유는 유추과정을 통해 유사성을 찾아내지만, 환유는 특정한 맥락에서 생겨나는 연상을 기초로 잇는다. 비약적 마술적인 것으로 지적되는 은유와는 달리, 환유는 오랜 시간을 두고 생겨난 연관관계나 관습에 따른 연상에 기댄다. 지극한 효녀를 심청이라 부르는 것, 말을 듣지 않고 반대로만 하는 사람을 맹꽁이라 부르는 것, 제격에 맞지 않는 행동을 강요받는 경우를 억지춘향이라 부르는 것 등은 바로 이런 예라 할 만하다. 은유는 시적인 표현에서 많이 등장하고 환유는 산문적인 문장에서 많이 등장하는 것은 은유의 초현실주의적 생리와 환유의 리얼리스틱한 생리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은유가 가부장 담론의 특성이라면 환유는 페미니스트 담론의 특성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여성은 아이를 자기 몸 안에 아홉달 동안 담고 있고 낳은 후에도 곁에 두고 기르기에 모자관계는 환유적이며 부자관계는 은유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라캉의 말이다. 

은유는 남자의 문자현상을 특징짓는 기법이라면 환유는 여성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성적인 글쓰기는 만져지는 무엇을 비롯한 근접한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이 강한 특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환유적 욕망이 승한 특징을 보이기 쉽다는 지적을 하기도 한다. 너무 도식적인 분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일면 공감되는 부분도 없지 않다. 은유란 무엇인가를 보다 생생하고 풍성하게 이해시키기 위한 방식이라면 환유는 한 개체를 그 개체와 관련된 다른 개체로써 말하는 방법이다. 은유는 다른 말을 데려와 함께 서있지만 환유는 다른 말을 데려온 뒤 자신은 숨어버린다. 그 숨어있음의 쾌감이 환유의 특징이며, 은유는 두개의 말이 나란히 서서 비교됨으로써 합성되고 증폭되는 쾌감이 특징이다. 

환유는 또한 보다 현대적인 서술방식으로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은유는 지난 시대의 낭만주의와 결부된 낡았지만 아직도 튼튼하게 살아남은 기법이다. 최근의 비평가들은 당대 시인들과 작가들의 환유성을 찾아내고 그것의 얼개를 파악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는 형편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황지우의 많은 참신함은 그의 환유에 힘입고 있다.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있을 거다)는 진술에서 뚱뚱한 가죽부대는 내 몸의 구조와 형질을 경멸적인 사물적 특징으로 치환하고 있는 표현이다. "사춘기 때 수음 직후의 그/죽어버리고 싶은 죄의식처럼,/그 똥덩어리에 뚝뚝 떨어지던 죄처럼,"(수은등 아래 벚꽃)이라 했을 때 똥덩어리에 뚝뚝 떨어지는 건 "죄"가 아니라 다른 무엇이었지만 거기 느닷없이 "죄"라는 추상어를 데려옴으로써 삶의 심각한 본질을 환기시킨다. 그것은 다시 벚꽃의 만개와 겹치면서 아름다움과 죄악을 현란하게 교직한다. 그의 환유는 이 시의 중심시축이다.

은유와 환유는 시나 문학의 주민등록증같은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들이 시나 문학을 몹쓸 존재로 인식하게 하는 딱지이기도 하다. 마구 뒤섞어놓은 은유들의 실끄트머리를 찾아내어 상상력으로 끊어진 다른 지점과 조심스럽게 이어야 하는, 비유 해독의 고단함은 난해라는 두건을 뒤집어쓴 작품들에서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돌리게 한 원흉이기도 했다. 뿐만인가. 꼭 집어 그냥 말하면 좋을 얘기를 굳이 에둘러 말해버리는 저 환유의 내숭과 음흉함은 문자속 전부를 내숭과 음흉으로 인식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은 문학의 즐거움은 바로 그 묻힌 의미들을 발굴하는 쾌감이며, 낯선 의미들이 충돌하여 피흘리는데서 돋아나는 생기이며, 매복한 개념들이 낮은 포복으로 언어의 습지를 기어가는 장면을 영화처럼 감상하는 재미이기도 하다. 은유와 환유는 글쓰기라는 욕망의 가장 핵심이기도 하지만, 글을 읽는 독자들이 행간 속에서 즐길 수 있고 교감할 수 있는 쾌감의 지평이다. 

문학은 이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두 여자, 내 딸들에게 붙여주어도 좋았을 이름, 은유와 환유라는 두 여자와 사귀러가는 은밀한 아지트가 아닐까 싶다./빈섬.

(Binsom Lee/ 시인, 작가, 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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