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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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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이상(李箱) 시 58편 해설-360 쪽 全 ​
2018년 06월 25일 17시 45분  조회:2635  추천:0  작성자: 강려
 이상(李箱) 시 58편 해설-360 쪽  全 

 
저자 신영삼
1958년 부여 출생
 

 

머리말
 
이상의 시가 세상에 나오자, 사람들은 두통을 호소하기도 하고 가슴이 답답하다고도 했다. 의학 박사님들은 이상의 두개골과 가슴을 절개하고 병인을 찾았다. 두개골에서는 뚜렷한 병인이 나타나지 않았고, 가슴에서는 폐병이 진행되고 있었다. 처방을 내리고, 입원 시키고, 치료하고, 퇴원시켰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의 두통과 답답함은 계속되었다.

그러자 저마다 한 가닥 한다는 박사님들이 나름대로 진단하고 치료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자신의 의술을 과시하기 위한 동기에서부터 출발했다. 더러는 먹고 살기 위한 자들도 더러 있었다. 그들의 관심은 두개골과 가슴에만 머물렀다. 두개골과 가슴은 수없이 절개되고 봉합되었다. 만신창이가 되었다. 독자들의 두통과 가슴 답답한 증세는 악화되었다.

형이상학적으로 접근한 어떤 박사님 중에는, 이상 시가 외계인의 말로 되었기 때문에, 지구인들은 해독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고, 이상의 정신병적 병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초현실주의라는 전염병에 감염되었다고 하는 박사님들도 있었다. 그들의 진단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제는 말도 안 되는 시골 돌팔이까지 타났다. 자기도 한 번 사람들의 두통과 답답증을 풀어보겠다는 것이다. 접근 방식은 지극히 형이하학적이었고, 말은 어눌했으며, 주로 민간요법에 의존했다. 호기심을 보이는 자들도 있었으나, 대부분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는 눈치였다.
 
2012. 1. 20
보령에서 신영삼

▣ 차례 ▣
 
엮으면서 12
1. 異常한 可逆反應
異常한可逆反應 14
破片의景致 22
▽의遊戱 29
수염―― 36
BOITEUX · BOITEUSE 45
空腹 ―― 51
 
2. 烏感圖 (1)
二人…… 1 …… 60
二人…… 2 …… 63
神經質的으로肥滿한三角形 66
運動 72
興行物天使 76

3. 三次角 設計圖
線에關한覺書 1 88
線에關한覺書 2 97
線에關한覺書 3 105
線에關한覺書 4 109
線에關한覺書 5 112
線에關한覺書 6 115
線에關한覺書 7 124

4. 建築 無限 六角體
AU MAGASIN NOUVEAUTES 136
出版法 149
且8氏의出發 161
대낮 170

5. 烏感圖 (2)
烏瞰圖 詩第一號 178
烏瞰圖 詩第二號 183
烏瞰圖 詩第三號 186
烏瞰圖 詩第四號 188
烏瞰圖 詩第五號 192
烏瞰圖 詩第六號  196
烏瞰圖 詩第七號 203
烏瞰圖 詩第八號 解剖 211
烏瞰圖 詩第九號 銃口 221
烏瞰圖 詩第十號 나비 224
烏瞰圖 詩第十一號  228
烏瞰圖 詩第十二號 231
烏瞰圖 詩第十三號 234
烏瞰圖 詩第十四號 238
烏瞰圖 詩第十五號 244

6. 易斷
火爐 254
아침 260
家庭 263
易斷 271

7. 危篤
禁制 282
絶壁 285
白書 288
買春 292
生涯 295
自像 299
 
8. 無題
一九三三. 六. 一 306
꽃나무  309
이런詩 312
普通記念 315
거울 322
紙碑 328
明鏡 331

9. 遺稿
肉親의章 338
最後 344
悔恨의章 346
 

1. 異常한 可逆反應


▣ 異常한可逆反應

任意의半徑의圓 (過去分詞의 時勢)
 
圓內의一點과圓外의一點을結付한直線
二種類의存在의時間的影向性
(우리들은이것에관하여무관심하다)
 
直線은圓을殺害하였는가
 
顯微鏡
그밑에있어서는人工도自然과다름없이現象되었다.
  ☓ 
 
같은날의午後
勿論太陽이存在하여있지아니하면아니될處所에存在하여있었을뿐만아니라그렇게하지아니하면아니될步調를美化하는일까지도하지아니하고있었다.
 
發達하지도아니하고發展하지도아니하고
이것은憤怒이다.
 
 鐵柵밖의白大理石建築物이雄壯하게서있던
眞眞5"의角바아의羅列에서
肉體에對한處分法을센티멘탈리즘하였다.
目的이있지아니하였더니만큼冷靜하였다.
 
太陽이땀에젖은잔등을내려쬐었을때
그림자는잔등前方에있었다.
 
사람은말하였다.
「저便秘症患者는富者집으로食鹽을얻으려들어가고자希望하고있는것이다」
라고
............

― <朝鮮과 建築> 1931. 7 ―
 
 
<이상한 가역반응>이라는 제목에서부터 무엇인가 시의 제목으로는 낯설다. ‘이상한 가역반응’은 원래 화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다. 가역반응이란 정반응이 일어나면 다시 그것의 역반응이 일어날 수 있는 반응이다. 따라서 가역반응이란 어떤 동일한 현상을 놓고 정반응으로도 생각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역반응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 시에서는 이상하게도 동일한 현상을 놓고 서로 다르게 보는 반응이다.

이 시의 구체적 상황을 설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몇 가지 단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단서들을 세밀히 관찰하고 생각하면 대체적인 시적 상황의 윤곽이 잡힌다. 이 시는 전반적으로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화자가 과거에 경험한 것을 이야기하는 시로 보인다. 이상 시인의 몇 편의 다른 시들은 이 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 시들을 읽어본 것을 바탕으로 소설(fiction)을 쓰겠다.
 
『소년인 화자는 어느 과부의 집에 가끔 놀러 갔다. 우연히 과부를 통해 여자를 알게 되었던 소년은, 이후로도 가끔 과부의 집을 찾아가곤 했다. 과부와의 밀회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과부도 좋아했고, 소년도 좋았다. 사흘 전에도 과부의 집에 갔었다.

어제 밤, 어떤 놈이 몰래 담을 넘어서 과부를 겁탈하고, 과부의 금반지며 목걸이까지 훔쳐서 달아났다. 과부는 경찰서에 신고 했다. 곧 수사관이 왔다. 과부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지문도 채취했다.

오늘 정오, 소년은 강간범으로 체포되어 경찰서에서 취조를 당하고 있다.』
 
任意의 半徑의 圓 (過去分詞의 時勢)

화자가 경찰서에 잡혀갔다. 조사관이 임의의 반경의 원을 볼펜으로 그렸다. 임의의 반경을 가진 원은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부자의 집’ 즉 과부의 집을 그린 것이다. 아니다. 과부를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 과거 분사의 시세다. 이미 어떤 사건이 완료되었음을 알 수 있다.

圓內의 一點과 圓外의 一點 을結付한 直線

원 내의 일점과 원외의 일점을 결부시키는 직선이 그려진다. 화자가 과부의 집에 침입하여 과부를 겁탈하고 물건을 훔쳐가지 않았느냐고 심문하는 것이다.
 
二種類의 存在의 時間的 影向性 / (우리들은 이것에 관하여 무관심하다)

두 종류의 존재의 시간적 영향성 즉 화자가 과부의 집에 갔던 시간과 어떤 놈이 과부의 집을 침입한 시간이, 화자가 범인인가 아닌가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우리들’이라는 말로 봐서 화자와 조사관 모두 이 시간성에 무관심한 채 심문하고, 심문을 당하고 있다.
이를테면 심문 과정은 이랬을 것이다.
조사관 : 너, ○○집에 침입하서 강간하고 강도질 했지?
화자 : 아닙니다. 그런 적 없습니다.
조사관 : 증거가 있는데……. 바른 대로 불어.
화자 : 절대로 강간하고 강도질 한 적 없습니다.
위 대화에는 범인이 그 집에 침입한 시간과 화자가 그 집에 간 시간이 나타나지 않는 대화다. 시간적 영향성이 결여되어 있다.
 直線은 圓을 殺害하였는가. / 顯微鏡 / 그 밑에 있어서는 人工도 自然과 다름없이 現象되었다.
직선은 원을 살해하였는가? 화자가 어제 밤 과부를 겁탈했는가? 조사관은 화자가 범인이라고 주장하고, 화자는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조사관은 증거로 지문을 제시하는 것 같다. 현미경 아래에서는 인공도 자연과 다름없이 현상되었다. 현미경에는 세포 관찰을 할 때처럼, 지문도 자세히 나타났다. 꼼짝없이 강간범으로 몰린 것이다.
같은 날의 午後 / 勿論 太陽이 存在하여 있지 아니하면 아니 될 處所에 存在하여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步調를 美化하는 일까지도 하지 아니하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물론 태양이 존재하여 있지 아니하면 아니 될 처소인 중천에 존재하였고, 태양은 아주 느리게 서쪽을 향하여 걸음을 옮겼다. 화자는 아주 지루하게 오후 내내 취조를 받았다.
發達하지도 아니하고 發展하지도 아니하고 / 이것은 憤怒이다.
조사 방법이 발달하지도 아니하고 발전하지도 아니한 것에 화자는 분노를 느꼈다. (순전히 자백과 고문에 의존하는 원시적인 수사 방법이다.)
鐵柵 밖의 白大理石 建築物이 雄壯하게 서 있던 / 眞眞 5"의 角바아의 羅列에서 / 肉體에 對한 處分法을 센티멘탈리즘하였다.
대리석 건물이 웅장하게 서 있는 도회의 어느 철책 안,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았다. ‘진진5"’는 ‘진~진~하는 오 초’라고 읽자. 취조실에 있는 전기 고문기의 스위치를 올리면, 5초 동안 ‘진~~~진~~~’하고 소리가 난다. 전기 고문기와 각목이 늘어서 있는 취조실, 이런 상황에서 화자는 자신의 육체를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 고민하였다. 고문을 당하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진실을 고수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거짓 자백을 해야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目的이 있지 아니하였더니 만큼 冷靜하였다.
‘부자의 집’ 즉 과부의 집에 갔던 것은 사실이나, 과부를 겁탈할 목적이 있지 아니하였던 것인 만큼 냉정하였다. 거짓 자백을 하지 않기로 했다.
太陽이 땀에 젖은 잔등을 내려쬐었을 때 / 그림자는 잔등 前方에 있었다
‘태양이 땀에 젖은 잔등을 내려 쬐었을 때 그림자는 잔등 전방에 있었다.’는 말과, 앞에 나왔던 ‘태양이 존재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처소에 존재하였다’는 구절과 연관시켜 보자. 그러면 태양이 중천에 떠 있을 때부터 태양이 질 때까지 오후 내내, 아주 땀이 흠뻑 젖을 정도로 고통스럽게 취조를 받았다는 것을 추리할 수 있다.
사람은 말하였다. / 「저 便秘症患者는 富者 집으로 食鹽을 얻으려 들어가고자 希望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 ............
‘사람’은 말을 하였다. 사람은 과부다. 과부가 경찰서 취조실로 찾아왔다. 범인이 잡혔다는 연락을 받고 경찰서에 찾아온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범인이라는 자가 바로 자기가 잘 아는 총각이 아닌가! 과부는 “저 변비증 환자는 부잣집으로 식염을 얻으러 들어가고자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사실 그렇게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 총각은 나를 만날 일이 있을 때는 우리 집에 자주 오는 총각입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화자는 석방 됐다.
그러면 과부가 “저 총각은 나를 만날 일이 있을 때는 우리 집에 자주 오는 총각입니다.”라고 말한 것을, 과부는 왜 “저 변비증 환자는 부잣집으로 식염을 얻으러 들어가고자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했는가?
화자가 과부의 집에 가는 것은 식염을 얻으러 가는 것이다. 여기서 식염은 정액을 비유한 것이다. 암염을 절구에 넣고 절구 공이로 찧으면 소금가루를 얻을 수 있듯이, 남자가 여자의 음부에 남근을 절구질하면 소금가루와 같은 하얀 정액이 나온다. (<오감도 시제칠호>의 ‘血紅으로 染色된 巖鹽의 粉碎’라는 구절은 이와 유사한 상황의 비유다.)
‘변비증 환자’는 똥을 누고 싶어도 누지 못하는 자다. 성적 욕구가 생겨도 해결할 대상이 없는 화자도 변비증환자다. 변비증 환자가 소금을 먹으면 효험이 있듯이, 성적 욕구를 해결할 마땅한 대상이 없는 화자는 과부를 찾아가, 과부의 음부에 절구질을 하고, 그리고 하얀 소금가루와 같은 정액을 내보내서 성적 욕구를 해결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부가 “저 총각은 성적 욕구를 해결할 마땅한 곳이 없어서 나를 찾아오는 사람입니다.”라고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식염을 얻으려 들어가고자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에서 ‘있는’이라는 말의 시제에 유의하면, ‘화자는 식염을 얻으려고 부자의 집에 들어가고자 늘 희망하고 있다.’는 의미다. 성욕을 해결하고자 과부의 집에 자주 드나든다는 의미다. 
그러면 왜 과부의 집이 ‘부자의 집’일까? 그 집에는 소금이 많아서 부자의 집이다. 과부의 음부에는 과부를 겁탈했던 어떤 놈의 소금도 있을 것이고, 가끔 찾아가 암염을 절구질하는 화자의 소금도 있을 것이니, 과부는 참으로 부자가 아니겠는가? 따라서 부자의 집은 과부의 집이다. 아니 과부의 음부인지도 모른다.
 
 
 
▣  破片의景致

 △은나의AMOUREUSE이다

나는하는수없이울었다
 
電燈이담배를피웠다
▽은 I/W이다
       ×
▽이여! 나는괴롭다
 
나는遊戱한다
▽의슬리퍼어는菓子와같지아니하다
어떻게나는울어야할것인가
       ×
쓸쓸한들판을생각하고
쓸쓸한눈나리는날을생각하고
나의皮膚를생각하지아니한다
 
記憶에對하여나는剛體이다
 
정말로
「같이노래부르세요」
하면서나의무릎을때렸을터인일에對하여
▽은나의꿈이다
스티크! 자네는쓸쓸하며有名하다
 
어찌할것인가
        ×
마침내▽을埋葬한雪景이었다

― <朝鮮과 建築> 1931. 7 ― 
 
 
破片의 景致 /  △은나의AMOUREUSE이다

제목 '파편의 경치'라는 말에서부터 무슨 말인지 읽기 어렵다. 이 시를 끝까지 읽어보아도 파편의 경치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파편의 경치, 조각난 경치, 조각나서 완전하지 않은 경치, 전체가 아닌 조각난 몇 개의 경치, 그 경치를 가지고, 그 조각난 경치를 맞추어서 완전한 그림을 그려보라고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부터 조각난 몇 개의 경치를 맞추어서 하나의 그림을 그려 보겠다.

이 시에는 × 표를 중심으로 네 개의 경치가 있다. 그리고 그 네 개의 경치를 맞추어서 하나의 완전한 경치를 만들어야 한다. 조각난 네 개의 경치를 가지고 하나의 완전한 이야기로 조합을 해야 이 시를 제대로 읽은 것이 된다.

부제 '△은나의AMOUREUSE이다'는 프랑스 말로 ‘△은 나의 연인’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화자는 △을 좋아할 것 같다. 그러나 이 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아도 △은 나오지 않는다. ▽만 나온다. 그런데 내용을 읽어보면 ▽은 화자에게 괴로운 대상이다. 그렇다면, △이 화자가 좋아하는 대상, △과 대비되는 ▽은 싫어하는 대상이라는 것을 추리할 수 있다. 이렇게 어떤 대상을 부호나 기호로 표현하는 방식은 서양 학문의 방식이다. 이상은 서양 학문 특히 수학과 과학을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서양 학문에서 무엇을 무엇이라고 하자는 그 발상을 활용하고 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울었다
화자는 하는 수 없이 울었다. 왜 울었으며, 왜 하는 수 없이 울었으며, 우는 행위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며, 뒤에 나오는 '어떻게 나는 울어야 할 것인가'라는 말과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 말인지 의문이 든다. 그래서 한참을 고민한 끝에 다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화자는 아픔을 갖고 있다. 그것은 화자가 살아오면서 갖은 아픔들이다. 이를테면 양자로 가서,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든가, 대를 잇기 위해서 돈을 받고 양자로 간 것 등은 이상의 삶에서 가장 큰 아픔들이다. 그래서 집을 나와서 여급들과 동거도 하고, 금홍이도 만나게 된다. 물론 폐병도 이상에게는 커다란 아픔이었을 것이다. 화자에게는 그동안 삶에서 고통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우리는 고통스러울 때 왜 울까? 그것은 고통을 잊기 위한 행위다. 이 시에서 우는 행위가 고통을 잊기 위한 행위라는 것은 이 시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또 우는 행위는 고통을 표현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고통을 울음으로 표현함으로써 고통을 잊는 행위다. 무엇인가 아픔을 표현하는 행위는 바로 고통을 잊기 위한 행위다.
 
電燈이 담배를 피웠다 / ▽은 I/W이다
아픔이 많았던 화자는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일어나서 전등을 켰다. 그런데 전등이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피우면, 담배 연기 때문에 방 안의 공기가 뿌옇게 된다. 마찬가지로 전등이 뿌옇게 켜졌으니까 전등이 담배를 피운 것이다. 그리고 지금부터 ▽은 I/W이다. ‘I/W’에서 ‘I’는 전류를 나타내는 기호다. ‘W’는 전력을 나타내는 기호다. 보통 V=I/W라는 공식이 있다. 전압은 전류를 전력으로 나눈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은V 즉 전압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는 ‘전등을 켜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화자가 싫어하는 ▽은 ‘전등을 켜는 것’이다. 지금부터 ‘전등을 켜는 것’이라고 약속하는 것이다. 어떤 대상을 기호화하여 표현하는 서양의 수학이나 과학의 발상이다.
 
▽이여! 나는 괴롭다
▽ 곧 전등을 켜는 것이여! 나는 괴롭다. 화자는 아픔으로 인한 고통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전등을 켜는 것이 괴롭다. 밤에 편안히 잠도 못자고 일어나 전등을 켜고 있는 것이 괴롭다.
 
나는 遊戱한다 / ▽의 슬리퍼어는 菓子와 같지 아니하다 / 어떻게 나는 울어야 할 것인가
 
그래서 화자는 유희를 한다. 고통을 잊기 위해서 즐거운 놀이를 한다. ▽의 슬리퍼어, 밤에 고통 때문에 전등을 켜고, 슬리퍼를 신고, 남들이 다 잠자는 시간에 화장실도 가고, 또 혼자 왔다 갔다 하는 것은 과자와 같지 않다. 과자처럼 달콤한 것이 아니다. 고통스러운 것이다. 
어떻게 나는 울어야 할 것인가. 나는 나의 고통을 잊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고 지금 화자는 생각하고 있다. 고통스러울 때 우는 것은 고통을 잊기 위한 행위다. 따라서 어떻게 울어야 할까 고민하는 것은 어떻게 고통을 잊을까, 무엇으로 고통을 잊을 것인가, 무엇을 하면서 고통을 잊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쓸쓸한 들판을 생각하고 / 쓸쓸한 눈 나리는 날을 생각하고 / 나의 皮膚를 생각하지 아니한다
화자는 고통을 잊기 위해서 쓸쓸한 들판을 생각한다. 화자는 쓸쓸한 들판에 혼자 놓여 있었던 것과 같이 외로웠던 지난날을 생각한다. 그리고 전등을 켜고 그것을 글로 쓴다. 글로 쓰는 행위는 우는 행위와 같다. 고통을 글로 드러냄으로써 고통을 잊고자 하는 행위다.

화자는 고통을 잊기 위해서 쓸쓸한 눈이 내리는 날을 생각한다. 화자는 쓸쓸한 눈이 내리던 지난 시절, 참으로 고통스러웠던 지난날을 생각하고 그것을 글로 씀으로써 고통을 잊고자 한다. 그리고 자신의 피부를 생각하지 않는다. 폐결핵을 인해서 창백해진 현재의 자신의 피부를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의 폐결핵의 고통보다는 화자의 기억 속에 있는 고통이 더 크기에, 폐결핵으로 망가져가는 몸도 잊고 밤에 글을 쓴다.
 
記憶에 對하여 나는 剛體이다
기억에 대해서는 화자는 강한 육체를 가졌다. 화자는 과거 슬프거나 외롭거나 쓸쓸한 기억을 떠올리는 데는 매우 강하다. 과거의 고통을 잊기 위해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그것을 글로 쓰는 데는 소질이 있다.
 
정말로 / 「같이 노래부르세요」/ 하면서 나의 무릎을 때렸을 터인 일에 對하여 / ▽은 나의 꿈이다 / 스티크! 자네는 쓸쓸하며 有名하다
정말로, ‘같이 노래 부르세요’ 하면서 화자의 무릎을 때렸을 터인 일, 슬퍼하거나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에게, 무릎을 툭 치면서, 자꾸 그렇게 슬퍼하거나 고통스러워만 하지 말고 ‘같이 노래 부르세요. 즐겁게 생각하세요.’ 라고 말함직한 일이다. 결국 그 일은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슬퍼하거나 고통스러운 일에 대해서 ▽ 곧 전등을 켜는 것은 화자의 꿈이다. 전등을 켜고 그 슬픔과 고통을 글로 기록하는 것은 화자가 가지고 있는 꿈이다. 고통을 잊기 위해서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을 떠올리고, 그 떠올린 것을 글로 적는 것은 화자의 꿈이다. 그래서 그것을 전등을 켜고 글로 쓴다. 그러면 고통을 잊을 수 있다.

스티크는 필기도구다. 이를테면 만년필이다. 만년필은 쓸쓸하며 유명하다. 만년필은 슬프거나 고통스러운 일을 떠올려서 그것을 밤에 홀로 전등을 켜 놓고 외롭게 기록하는 도구다. 그래서 스티크는 쓸쓸하다. 사실은 화자가 스티크를 가지고 고통을 잊기 위해서 무엇인가 기록하면서 쓸쓸해 한다.
또 만년필은 유명하다. 화자가 과거의 슬프거나 고통스러운 일을 떠올리고 그것을 기록함으로써 고통을 잊게 해 준다는 의미에서 만년필은 마치 유명한 의사와 같은 존재다.
 
어찌할 것인가
자, 그렇다면 과거의 슬프고 괴로웠던 기억들을 어떠한 방식으로 쓸까? 시로 쓸까? 소설로 쓸까? 아마 그렇게 생각하면서 화자는 만년필로 무엇인가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을 埋葬한 雪景이었다

마침내 ▽ 곧 전등을 켠 것을 매장한 설경이었다. 전등을 켠 것을 매장했다는 것은, 전등을 켠 것이 생명을 다 해서 땅에 묻었다는 것인데, 이는 전등을 껐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등을 매장한 설경은 눈이 하얗게 내리듯이 밖이 하얗게 밝은 아침이 되었다는 의미다. 과거의 고통을 잊기 위해서, 과거의 슬프고 괴로웠던 일들을 떠올렸고, 그리고 그 기억들을 기록하는 가운에 밤이 지나갔다.

결국 화자는 과거의 고통과 슬픔을 잊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의 지나온 삶, 슬프고도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일들을 시나 소설 혹은 수필로 썼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이상의 문학 작품들이 모두 이상의 과거의 고통의 기억들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 ▽의遊戱――

   ▽은 나의 AMOUREUSE이다.
 
종이로만든배암을종이로만든배암이라고하면
▽은배암이다.
 
▽은춤을추었다.
 
▽의웃음을웃는것은破格이어서우스웠다.
 
슬립퍼어가땅에서떨어지지아니하는것은너무나소름끼치는일이다.
▽의눈은冬眠이다.
▽은電燈을三等太陽인줄안다.
         ×
 ▽은어디로갔느냐.
여기는굴뚝꼭대기다.
 
나의呼吸은平常的이다.
그러한데탕그스텐은무엇이냐.
(그무엇도아니다.)
 
屈曲한直線
그것은白金과反射係數가相互同等하다.
▽은테이블밑에숨었느냐.
        ×
1
2
3
3은公倍數의征伐로向하였다.
電報는아직오지아니하였다.

― <朝鮮과 建築> 1931. 7 ―
 
 
▽의 遊戱――
시인은 지금 ▽를 가지고 유희를 하고 있다. 재미있는 놀이를 하고 있다. 우매한 독자를 향하여 재미있는 놀이를 하듯이, 이러한 시를 써 놓고 시인은 즐기고 있다. 사실 이상의 시를 아직까지 자세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쩌면 이상이 저승에서도 즐거워할 일인지도 모른다. ‘――’으로 봐서 아마 즐거운 유희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왜냐하면 이상의 시에서 ‘――’이 있는 경우는 항상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은 나의 AMOUREUSE이다.
부제에 나오는 ‘AMOUREUSE’는 프랑스어로 사랑하는 사람, 연인이라는 의미다. 화자는 ▽을 자신이 연인처럼 사랑하는 어떤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추리해 보아야 한다. 화자가 사랑하는 어떤 것이다.
종이로 만든 배암을 종이로 만든 배암이라고 하면 / ▽은 배암이다.
종이로 만든 배암을 종이로 만든 배암이라고 하면, ▽은 배암이다. 종이로 만든 배암은 비록 가짜 배암이지만, 이것을 종이로 만든 ‘배암’이라고 가정한다면, ▽은 배암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을 화자가 사랑하는 어떤 것으로 정의했으니 이제부터 ▽은 실제로 화자가 사랑하는 어떤 대상 그 자체는 아니지만, ▽은 화자가 사랑하는 어떤 대상이 된다. 따라서 ▽은 배암과 같은 것이고, 화자가 사랑하는 어떤 것이다.

이렇게 ‘▽은 배암이다’처럼 ‘무엇을 무엇이라고 하자’ 하는 전제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발상은 서양식 학문에서 비롯한다. 서양학문에서는 어떤 것을 기호화하거나 부호화하여 표현하는 방식이 발달한 학문이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수학이나 과학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과학에서 기차가 시속 120km로 2시간 동안 달릴 때, 그 기차가 이동한 거리는 얼마인가? 또 기차가 시속 150km로 3시간 동안 달릴 경우 기차가 이동한 거리는 얼마인가? 하는 것들을 서양 학문에서는 간단히 기호화하여 표현합니다. 즉 ‘기차가 이동한 거리는 기차의 속도에 시간을 곱하면 됩니다.’ 이것을 서양 학문에서는 s를 거리라고 하고, v를 속도라고 하고, h를 시간이라고 하면, ‘s = vh’라고 간단히 부호화합니다. 여기서 다시 속도는 어떻게 구하는가 하는 것을 v = s/h 라고 간단히 공식화한다. 이러한 방식이 서양 학문의 부호화, 기호화 방식이다.

이상 시인도 이러한 서양식 부호화, 기호화 방식을 이용하여 ▽을 배암이라고 한 것이다. 물론 ‘배암’은 다시 무엇인가의 비유한 것인데, 여기서 ‘배암’은 화자를 비유한 것이다.
▽은 춤을 추었다.

▽은 춤을 추었다. ▽은 배암이니까, 배암이 똬리를 튼 상태에서 대가리를 들고 춤을 추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은 배암과 같은 어떤 것을 비유한 것이다. 똬리를 틀고 머리를 들고 춤을 추는 배암과 같은 것은 무엇일까? 여기에 이 시를 읽는 독자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필자는 다음과 같이 상상했다. 화자가 밤에 일어나 앉아서 기침을 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기침을 할 때는 상체가 앞뒤로 몹시 흔들린다. 이 시는 1931년에 지은 시인데, 이때부터 이상은 폐병을 앓았던 것 같다. 이상이 밤에 일어나서 기침을 하는 모습이다. 똬리를 틀고 앉아서 머리를 들고 춤추는 배암이 화자다.
 
▽의 웃음을 웃는 것은 破格이어서 우스웠다.

▽의 웃음을 웃는 것 즉 화자가 배암과 같은 자세로 똬리를 틀고 앉아서 기침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웃음을 웃는 것은 아주 파격(破格)이어서, 도리어 우스웠다. 화자가 배암과 같은 자세로 기침을 하고 있는 장면은 결코 우스운 장면이 아니다. 우스운 장면이 아닌데 이를 보고 웃는다는 것은 아주 파격이고, 그것이 도리어 우습다는 것이다. 화자가 폐병으로 똬리를 틀고 고개를 들고 있는 뱀이 춤을 추듯이, 앉아서 상체를 앞뒤로 심하게 움직이면서 기침을 하고 있는 심각한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슬립퍼어가 땅에서 떨어지지 아니하는 것은 너무나 소름끼치는 일이다.
슬립퍼어가 땅에서 떨어지지 아니 하는 것은 너무나 소름끼치는 일이다. 화자는 기침으로 인해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 같다. 잠을 못 자는 화자는 슬리퍼를 신고 이를테면 화장실도 가고, 물도 먹고 해야 할 것이다. 식구들이 모두 잠을 자고 있는 밤에 홀로 일어나 돌아다니려면 조용조용 다닐 수밖에 없다. 슬리퍼를 조용히 끌면서 다닐 수밖에 없다. 따라서 슬리퍼가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은 밤에 홀로 조용히 다니는 것이며, 밤에 기침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일어나서 다녀야 하는 것은 화자에게는 너무나 소름끼치는 일이다.

▽의 눈은 冬眠이다.
▽의 눈은 동면(冬眠)이다. 화자는 눈을 배암이 동면하듯이 감았다. 그러나 완전히 잠을 자는 것은 아니다. 눈만 감고 누워 있다. 
▽은 電燈을 三等太陽인 줄 안다.
▽은 전등을 삼등 태양인 줄 안다. 배암인 화자는 전등을 세 번째 등급의 태양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밤에 전등을 켜 놓고 일어나서 잠을 자지 않고 있다. 태양이 있는 낮에는 우리는 일어나서 활동을 한다. 전등을 삼등 태양으로 아는 화자는 밤에 일어나서 활동을 한다.
▽은 어디로 갔느냐. / 여기는 굴뚝 꼭대기다.

▽은 즉 배암인 화자는 어디로 갔느냐. 여기는 굴뚝 꼭대기다. 화자가 간 곳은 굴뚝꼭대기다. 굴뚝 꼭대기는 연기가 난다. 연기가 나는 곳에서는 기침을 할 수밖에 없다. 화자가 기침을 아주 심하게 한다는 뜻이다.
나의 呼吸은 平常的이다. / 그러한데 탕그스텐은 무엇이냐. / (그 무엇도 아니다.)

화자의 호흡은 평상적이다. 평상시와 같이 숨을 쉬고 있다. 죽은 것은 아니다. 호흡이 평상시처럼 남아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텅스텐은 무엇이냐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괄호를 치고 그 안에 그 무엇도 아니라고 했다. 그 무엇도 아니라는 것은 텅스텐이 형상을 가진 어떤 물체가 아니라는 뜻이다. 형상을 가진 어떤 물체가 아닌 것 중에서, 호흡과 관련시켜 상상해 보면, 호흡에서 마치 텅스텐을 두드릴 때 나는 소리가 난다 뜻이다. 따라서 아직 살아 있으나 호흡은 매우 가쁘며, 텅스텐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屈曲한 直線 / 그것은 白金과 反射係數가 相互 同等하다.

굴곡한 직선. 화자가 배암이다. 배암은 원래 긴 직선이다. 그 직선의 배암이 굴곡 상태로 있다. 길게 펼쳐져 있어야 할 화자가 굽은 상태로 있는 것이다. 기침이 멈추고 화자는 몸을 웅크린 채, 옆으로 누워 있는 것 같다. 몸을 옆으로 뉘어 웅크리고 잠을 자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그것은 원래 직선이 굴곡한 모습이다.

또 그것은 백금과 반사계수가 상호 동등하다. 백금은 하얗다. 굴곡한 직선 즉 화자가 광선을 반사하는 계수가 백금과 상호 동등하다는 것은, 화자가 백금처럼 하얗다는 뜻이다. 화자의 창백한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폐병을 앓는 사람의 창백한 모습이다.

▽은 테이블 밑에 숨었느냐.
▽은 테이블 밑에 숨었느냐. 배암이, 화자가 마치 테이블 밑에 숨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아니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조용하다. 시끄럽던 것이 조용하면 어디에 숨었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기침이 가라앉았다.
1 / 2 / 3 / 3은 公倍數의 征伐로 向하였다.
기침을 한 번 한다. 조용해졌던 기침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기침을 두 번 한다. 기침이 조금 잦아졌다. 기침을 세 번 한다. 기침이 조금 더 잦아진 것 같다. 3은 공배수의 정벌로 향하였다. 잦아진 기침이 마치 3의 공배수를 정벌하려는 듯이 삼의 공배수 쪽을 향하여 계속해서 나가고 있다. 3, 6, 9, 12~~~ 이런 식으로, 콜록 콜록 콜록, 콜록 콜록 콜록 콜록 콜록 콜록, ~~~ 이런 식으로 기침이 자주 나고 있다. 기침이 점점 잦아진다.
電報는 아직 오지 아니하였다.

전보는 아직 오지 아니하였다. 전보는 누가 죽었을 때 멀리 있는 사람에게 급히 알리기 위한 통신 수단이다. 편지는 여러 날이 걸린다. 그래서 전보를 보낸다. 전보가 오지 않았다는 것은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아직 죽지는 않았다는 것은 결국 매우 위독한 상태라는 것이다. 화자는 매우 위독한 상태다.



 
▣  수염――

 (鬚 · 髭 · 그밖에수염일수있는것들 · 모두를이름)
 
 
          1
 
눈이存在하여있지아니하면아니될處所는森林인웃음이存在하여있었다
 
          2
 
홍당무
 
          3
 
아메리카의幽靈은水族館이지만大端히流麗하다
그것은陰鬱하기도하다
 
         4
 
溪流에서――
乾燥한植物性이다
가을
 
         5
 
一小隊의軍人이東西의方向으로前進하였다고하는것은
無意味한일이아니면아니된다
運動場이破裂하고龜裂할따름이니까
 
         6
 
三心圓
 
         7
 
조(粟)를그득넣은「밀가루」布袋
簡單한須臾의夜月이었다
 
        8
 
언제나도둑질할것만을計劃하고있었다
그렇지는아니하였다고한다면적어도乞人이기는하였다
 
        9
 
疎한것은密한것의相對이며또한
平凡한것은非凡한것의相對이었다
나의神經은娼女보다도더욱貞肅한處女를願하고있었다
 
          10
 
말(馬)――
땀(汗)――
 
           X
 
  余, 事務로  써散步하라하여도無防하다
  余, 하늘의푸르름에지쳤노라이같이閉鎖主義로다

― <朝鮮과 建築> 1931. 7 ―
 

 
1931년 6월 21세의 젊은 혈기의 이상, 어느 날 아메리카의 젊은 남녀의 벌거벗은 사진을 보았나 보다. 젊은 여자의 나체 사진, 그리고 젊은 남자의 나체 사진을 보았다. 그리고 시를 썼다.
수염―― /  (鬚 · 髭 · 그밖에 수염일 수 있는 것들 · 모두를 이름)
제목 '수염――'은 차마 여자의 음모를 직접 말하지는 못하고, 그냥 수염이라고 말하면서 한참 생각하는 것 같다. 독자가 못 알아차릴까 봐서 괄호를 하고, 그 안에 상상할 수 있도록 썼다. 수―턱수염, 자―콧수염, 그밖에 수염일 수 있는 것들, 모두를 말하는 것이라고. 따라서 여기서는 수염은 여자와 남자의 성기 주변에 난 음모라고 상상하는 것이 좋다.
 
눈이 存在하여 있지 아니하면 아니될 處所는 森林인 웃음이 存在하여 있었다
눈이 존재하여 있지 아니하면 아니 될 곳은, 눈이 원래 있어야 한 곳이다. 눈에는 삼림처럼 음침한 웃음이 존재하였다. 화자는 아메리카에서 들어온, 나체의 남녀 사진을 보고 있다. 사진을 보고 있는 화자의 눈동자는 보이지 않고 속눈썹만 삼림처럼 보인다. 눈을 지그시 감고 속으로 음침한 웃음을 머금고 있다.
 
홍당무
화자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것도 좋다. 하지만 화자의 성기가 벌겋게 발기되었다고 하는 것이 더 좋다.
 
아메리카의 幽靈은 水族館이지만 大端히 流麗하다 / 그것은 陰鬱하기도 하다
아메리카의 유령 곧 여자의 나체 사진은 비록 수족관이지만 대단히 유려했다. 유령은 형상은 있으나 실체가 없다. 여자도 형상은 사진 속에 있으나, 그 여자의 실체는 지금 화자 앞에 없다. 그래서 유령이다. 수족관이라는 것은 그 속에서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은 볼 수는 있으나, 유리가 가로막아 그 물고기를 만질 수는 없다. 사진 속의 여자 또한 그 형상은 있으나 그 여자의 실체를 만질 수가 없다. 수족관이다. 그러나 그 사진 속의 여자는 대단히 유려하다. 미끈하고 아름답다.
그것은 음울하기도 하였다. 음울(陰鬱)은 그늘지고 울창하다는 뜻이다. 사진 속의 여자의 음모가 매우 많아서 숲으로 말하면 짙은 그늘이 질 만큼 울창했다.
 
溪流에서―― / 乾燥한 植物性이다 / 가을
여자의 사타구니를 보고 있다. ‘――’으로 봐서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한 마디 한다. “건조한 식물성이다”라고. 음모는 시냇물이 흐르는 계곡에서 즉 여자의 음부의 갈라진 양옆에서, 건조한 식물성이다. 건조한 식물성은 계곡의 물이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의 계곡에서 애액이 흐르지는 않는다.  그리고 가을이다. 여자의 음모가 단풍이 들었는가 보다. 아니 음모의 색갈이 단풍의 색처럼 붉다. 금발의 백인 여자인 것으로 보인다.
 
一小隊의 軍人이 東西의 方向으로 前進하였다고 하는 것은 / 無意味한 일이 아니면 아니 된다 / 運動場이 破裂하고 龜裂할 따름이니까

일개 소대의 군인은 많은 숫자의 군인이다. 군인은 남근이다. 군인은 머리에 철모를 썼다. 철모를 쓴 군인은 남근의 모습이다. 일개 소대의 군인이 계곡에서 동서 방향으로 전진하였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동쪽으로 전진했다가 다시 서쪽으로 전진하였으면 제자리다. 전진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성행위 장면을 연상해 보자. 열심히 전진하고 후퇴를 거듭한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왕복 운동을 하는 것이다.

결국 제자리에 있는 셈이다. 그것은 전진한 것이 아니라 운동장 즉 여자의 음부가 파열하고 균열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여자의 음부가 갈라져 열리고, 제자리에서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였다는 말이다. 성교하는 모습이다.
따라서 화자는 여자의 음모가 난 계곡을 보면서, 많은 남자들의 남근이 여자의 성기 속에서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행위를 하였을 것이라고 연상하고 있는 것이다.
 
三心圓
이제는 남자의 나체 사신을 들여다보고 있다. 삼심원은 세 개의 중심이 있는 세 개의 원이다. 남근과 고환 두 쪽을 정면에서 바라본다. 삼심원이다. 정면으로, 발기된 남근을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있는, 사진 속의 아메리카 남자를 보고 중얼거리는 말이다.
 
조(粟)를 그득 넣은「밀가루」布袋 / 簡單한 須臾의 夜月이었다
이제는 고환을 바라보고 있다. 고환은 조를 그득 넣은 밀가루 포대다. 고환 속에는 정액이 있고, 정액 속에는 정자가 들어 있다. 정액과 정액 속의 정자는 고환이라는 포대 속에 담겨 있다. 따라서 조는 정자, 밀가루는 흰색의 정액, 그리고 포대는 그것이 담겨 있는 고환이다.
사진 속의 남근을 보면서 자신의 경험을 상상한다. 남근은 간단(簡單)한 수유(須臾)의 야월(夜月)이었다. 성교는 잠깐 동안 쾌감에 젖는, 간단한 정액의 사정일 뿐이었다. 야월? 밤에 뜨는 달은 초승달, 보름달, 하현달처럼 커졌다가 작아진다. 그리고 커졌다가 작아지는 남근에서 방출되는 정액은 달처럼 뿌옇다.
언제나 도둑질할 것만을 計劃하고 있었다 / 그렇지는 아니하였다고 한다면 적어도 乞人이기는 하였다
남근은 도둑질할 것만 계획하고 있었다. 도둑질은 몰래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근은 아내 몰래 다른 여자와 바람피울 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는 아니하였다고 한다면 적어도 걸인이기는 하였다. 걸인은 무엇을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애걸하는 사람이다. 남근은 여자를 보면 한 번 잠자리를 함께 하기를 애걸하는 존재인 것만은 분명하다.
 
疎한 것은 密한 것의 相對이며 또한 / 平凡한 것은 非凡한 것의 相對이었다.
성기다고 하는 것은 빽빽하다는 것의 상대이며, 평범하다고 하는 것은 비범하다는 것의 상대였다. 화자는 사진 속의 남자의 음모와 남근의 크기, 그리고 자신의 음모와 남근의 크기를 마음속으로 비교하고 있다. 사진 속의 남자의 음모는 빽빽하고 무성하고 자신의 음모는 거기에 비하면 성기게 났는가 보다. 사진 속의 남자의 성기는 대단히 커서 비범하며, 자신의 성기는 작아서 평범한가 보다.
나의 神經은 娼女보다도 더욱 貞肅한 處女를 願하고 있었다.
화자의 신경은 창녀보다도 더욱 정숙(貞肅)한 처녀를 원하고 있었다. 화자의 흥분된 신경은 창녀를 원하기 보다는 즉 흥분된 성적 욕망을 창녀에게 가서 해결하기 보다는, 더욱 정숙한 처녀를 원하고 있습니다. 정숙한 처녀처럼 창녀가 있는 곳에 가지 않고 정조(貞操)를 지키면서, 조용하고 엄숙하게 해결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화자는 남녀 나체 사진을 보고 자위를 하기를 원했다는 말이다.
 
말(馬)―― / 땀(汗)――
그래서 오랫동안 말을 달리듯이 자위를 했다. 그리고 그 말이 땀을 흘렸다. 오랫동안 말을 달렸다는 것은 자위를 했다는 것이다. 자위 할 때의 동작은 말을 타고 달릴 때의 동작과 흡사하다. 기수가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말 등을 중심으로 사람이 앞으로 몸이 쏠렸다가 뒤로 쏠렸다가 하는 동작을 한다. 손으로 성기를 잡고 자위를 하는 장면이 이와 유사하다. 땀은 말의 몸에서 나오는 것이다. 자위 후 남근에서 정액이 땀처럼 조금 비쳤다.
 
余, 事務로써 散步하라 하여도 無防하다.
나는 이제 사무로써 산보하라 하여도 무방하다. 사무(事務)는 ‘볼일’이다. 소변을 보는 것을 ‘볼일’ 본다고도 한다. 자위를 마친 화자, 이제는 소변을 보기 위해서 천천히 걸어가라 하여도 괜찮다. 조금 전까지는 남근이 발기하였기 때문에 소변을 보려고 해도 남들이 볼까봐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위가 끝났고, 발기된 성기가 작아졌다. 소변을 보러 밖으로 나가라고 하여도 괜찮다.
余, 하늘의 푸르름에 지쳤노라 이 같이 閉鎖主義로다
화자는 하늘의 푸름에 지쳤다. 우리의 사회는 이같이 폐쇄주의다. 푸른 하늘은 성적인 문제에 대해서 지나치게 맑은 우리 사회다. 아메리카에 비해서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성적인 문제에 대해서 맑고 깨끗한 것만을 강요한다. 화자는 이러한 우리 사회에 대해서 지쳤다.



▣   BOITEUX · BOITEUSE

긴것
 
짧은것
 
열十字
 
    ×
 
그러나 CROSS 에는기름이묻어있었다
 
墜落
 
不得已한平行
 
物理的으로아팠었다
    (以上平面幾何學)
 
     ×
 
오렌지
 
大砲
 
葡萄
 
     ×
 
萬若자네가重傷을입었다할지라도피를흘리었다고한다면참멋적은일이다
 
오――
沈默을 打撲하여주면좋겠다
沈默을如何이打撲하여나는洪水와같이騷亂할것인가
沈默은沈默이냐
 
매쓰를갖지아니하였다하여醫師일수없는것일까
天體를잡아찢는다면소리쯤은나겠지
 
나의步調는繼續된다
언제까지도나는屍體이고자하면서屍體이지아니할것인가

― <朝鮮과 建築> 1931. 7 ―
 

BOITEUX · BOITEUSE
절름발이 남성명사, 절름발이 여성명사. 절름발이는 길이가 하나가 길고 하나는 짧은 것을 일컫는다. 이를테면 십자가의 두 막대기도 길이가 다른 절름발이다. 보통 남자와 여자도 길이가 다르다. 절름발이다.
 
긴것 / 짧은것 / 열十字
긴 것, 짧은 것, 크로스 된 열십자. 기독의 상징 십자가.
 
그러나 CROSS 에는기름이 묻어 있었다 / 墜落 / 不得已한 平行 / 物理的으로 아팠었다 / (以上 平面幾何學)
그러나 십자가에는 기름이 묻어 있었다. 그래서 미끄러져 추락했다. 십자가의 추락. 기독의 타락. 긴 것과 짧은 것이 부득이하게 평행을 이뤘다. 남녀가 십자가 아래에서 평행을 이루어 서로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었다. 물리적으로 아팠었다. 사물의 이치로 당연히 괴로워했었다. 과거완료형 시제다. 과거에 그랬다. 화자가 정신적으로 괴로워했던 듯하다. 평면기하학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복잡한 사람의 삶을 마치 평면기하학에서 간단한 도형을 그려 설명하듯 설명을 했다. 화자의 경험을 말한 것이다.

아마 화자가 과거에 과부와 십자가가 매달려 있는 어느 방에서 육체적 관계를 맺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오감도 시제오호>, <오감도 시제십호>, <오감도 시제십사호>, <이상한 가역반응>, , <백서>가 모두 같은 상황이다. 화자는 과부의 집 십자가가 걸린 방에서, 과부와 관계했다.
 
오렌지 / 大砲 / 葡萄
오렌지처럼 표면이 오톨도톨한 고환, 대포처럼 정액을 발사하는 남근, 정액 속의 포도알과 같은 정자들.
 
萬若 자네가 重傷을 입었다 할지라도 피를 흘리었다고 한다면 참 멋쩍은 일이다
만약 자네가 중상을 입었다 할지라도, 피를 흘렸다고 말한다면 참 멋쩍은 일이다.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중상을 입은 기독의 모습을 보고 피를 흘렸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멋쩍은 일이다. 마찬가지로 여자가 만족을 하기도 전에 사정을 하여 남근이 힘없이 늘어져, 마치 중상을 입은 기독처럼 되었다 할지라도, 이를 사정을 하였다고 한다면 참 멋쩍은 일이다. 화자는 여자와의 관계에서 성급하게 사정을 했고, 그래서 참 멋쩍었다.
 
오―― / 沈默을 打撲하여 주면 좋겠다 / 沈默을 如何이 打撲하여 나는 洪水와 같이 騷亂할 것인가 / 沈默은 沈默이냐

오―― 그래서~~ 화자는~~ 침묵을 타박하여 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침묵하는 것을 침묵하지 않도록 두드려 주면 좋겠다. 여기서 침묵은 바로 상대 여자가 흥분하지 않아 교성을 내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남성은 자신의 남근을 가지고 여성의 음부를 힘차게 타박한다. 힘차게 두드린다. 침묵을 어떻게든지 두드려서 홍수와 같이 소란한 것인가를 생각한다. 사정하여 홍수처럼 넘쳐나는 정액과 함께 여자를 소란하게 만들 것인가를 생각한다. 침묵은 그냥 침묵이냐? 아니다. 침묵은 그냥 침묵이 아니라 소리가 나지 않음이다. 여성의 입에서 교성(嬌聲)이 나지 않는 것이다.
 
매쓰를 갖지 아니하였다 하여 醫師일 수 없는 것일까 / 天體를 잡아 찢는다면 소리쯤은 나겠지

매스를 갖지 아니하였다 하여 의사일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의사가 아니어도, 매스가 없어도 천체(天體)를 잡아서 찢는다면 소리쯤은 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의사가 아니겠는가. 침묵을 치료하는 의사다.

남녀가 성교를 할 때,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여성을 치료하는 의사는, 여성의 천체 즉 머리 부분, 그 중에서도 입을 잡아 찢어야 교성이 난다. 여성의 음부에 남근이 들어가서 격렬하게 성행위를 하는 것은 곧 여성의 입이 열리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것이 곧 천체를 잡아 찢는 행위다. 그러면 자연히 천체 즉 머리 부분에 있는 입이 열리고, 교성을 낼 것이다. 그러면 화자는 비록 메스가 없어도 침묵을 치료하는 의사인 셈이다.
 
나의 步調는 繼續된다 / 언제까지도 나는 屍體이고자 하면서 屍體이지 아니할 것인가

나의 걸음걸이의 속도는 일정하게 계속된다. 나의 성교의 보조는 언제까지 일정하게 계속된다. 성급하게 절정에 도달하지 않는다. 언제까지도 나는 시체이고자 하면서 즉 남성이 사정을 마치고 축 늘어진 시체를 갈망하면서도, 시체이지 아니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남근이 발기된 상태를 유지하기를 바란다. 성행위가 오래 지속되어야, 상대가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입에서 교성이 나오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자는 사정의 속도를 조절하면서 여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   空腹 ――

바른손에菓子封紙가없다고해서
왼손에쥐어져있는菓子封紙를찾으려只今막온길을五里나되돌아갔다
        ×
이손은化石하였다
 
이손은이제는이미아무것도所有하고싶지도않다所有된물건의所有됨을느끼기조차하지아니한다
只今떨어지고있는것이눈(雪)이라고한다면只今떨어진내눈물은눈(雪)이어야할것이다
나의內面과外面과
 
이件의系統인모든中間들은지독히춥다
 
左右
이兩側의손들이相對方의義理를저바리고두번다시握手하는일은없이
困難한勞働만이가로놓여있는이整頓하여가지아니하면아니될길에있어서獨立을固執하는것이기는하나
 
추우리로다
추우리로다
         ×
누구는나를가리켜孤獨하다고하느냐
이群雄割居를보라
이戰爭을보라
         ×
 
나는그들의軋轢의發熱의한복판에서昏睡한다
심심한歲月이흐르고나는눈을떠본즉
屍體도蒸發한다음의고요한月夜를나는想像한다
 
天眞한村落의畜犬들아 짖지말게나
내體溫은適當스럽거니와
내希望은甘美로웁다

― <朝鮮과 建築> 1931. 7 ―
 
 
空腹 ――
‘공복(空腹)’을 보통 빈 뱃속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腹’은 ‘가운데’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따라서 ‘공복(空腹)’은 ‘텅 비어있는 가운데’이라는 의미도 있다. 또 ‘腹’은 ‘앞, 전면(前面)’을 의미하기도 한다. ‘등(背)’이 ‘뒤, 후면(後面)’을 의미한다면, ‘배(腹)’는 ‘앞, 전면(全面)’을 의미한다. 따라서 공복(空腹)은 ‘텅 빈 앞, 즉 텅 비어 있는 미래’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사실 이상의 시 중에 제목 옆에 ‘――’처럼 표시되어 있는 시들이 몇 편 있다. 이를테면 <수염――>, <공복――>, <이인…… 1 ……>, <이인…… 2 ……> 등의 시가 그것이다. 이런 경우에 시인은 ‘――’ 혹은 ‘……’을 심심해서 붙여놓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제목 ‘空腹’은 단순히 ‘비어 있는 배’라는 의미만은 아니다.
1930년대 초반, 이른바 조선 땅에는 실용적인 서양의 학문을 하여야 한다는 부류의 사람들과, 동양적 학문이 바른 학문이라는 사람들이 서로 대립하면서 논쟁을 하던 시기였던가 보다. 물론 필자가 조사해 본 것은 아니다. 다만 ‘공복(空腹)’을 읽고, 그렇게 생각해 본 것이다. 
이상 시인이 생각하기에는 서양적 학문은 실용적이기는 해도 완전한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동양적 학문만이 전부 바르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이상의 시에서 많은 부분 서양 학문의 문제점을 비판한 시들이 있지만, 이 시만 놓고 보면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바른손에 菓子封紙가 없다고 해서 / 왼손에 쥐어져 있는 菓子封紙를 찾으려 只今 막 온 길을 五里나 되돌아갔다
단순히 문장을 읽기도 어렵다. 화자는 바른손에 무엇인가를 쥐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바른손에는 과자봉지가 없었다. 그래서 그 과자봉지를 찾으려 막 온 길을 오 리나 되돌아갔다. 결국 지금 화자의 왼손에는 과자봉지가 쥐어져 있다. 따라서 화자는 지금 바른손에 무엇인가를 쥐고 있고, 왼손에는 과자봉지가 쥐어져 있다. 좌우 양손에 모두 무엇인가를 들고 있는데, 왼손에 쥐어져 있는 것은 과자봉지다.
화자가 바른손에 쥐고 있었던 것은 동양의 학문이다. 동양의 학문에는 과자봉지에 담긴 과자처럼 당장 먹기에 달콤한 것이 없다. 당장 먹기에 달콤한, 과자가 들어 있는 과자봉지는 서양의 학문이다. 지금 화자의 왼손에 쥐어져 있는 과자봉지 속에는 당장 먹기에 달콤한 과자 즉 서양의 실용적 학문들이 담겨 있다. 서양의 학문은 당장 현실에 적용하기 용이한 학문이다. 그래서 화자는 지금 바른손에는 동양적 학문, 왼손에는 서양적 학문을 모두 쥐고 있다.
사실 이상은 처음에는 동양적 학문인 한학을 했고, 다음에 서양 학문을 공부한 사람으로 보인다. 부모님 혹은 주변의 사람들의 의견을 좇아서 서양의 학문도 공부한 사람인 것 같다. 결국 이상은 동서양의 학문을 모두 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상이 서양의 학문에 대해서 비판하는 많은 시를 쓴 것을 보면, 서양 학문에 대해서 그것이 전적으로 옳은 학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도리어 동양의 학문이 정신적인 차원에서는 더욱 소중한 학문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어쩌면 동양적 학문과 서양적 학문이 적절히 상호 보완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손은 化石하였다
화자의 두 손은 굳어서 돌이 되었다. 바른손에는 동양의 학문이 쥐어져 있고, 왼손에는 서양의 학문이 쥐어져 있는데도 두 손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 차차 나온다. 미리 설명하면, 세상에는 서양적 학문이 실용적이어서 바르다(옳다, 좋다)는 사람과 동양적 학문이 바르다는 사람 이렇게 둘로 갈라져서, 서로 열을 내면서 싸우고 있다. 이상과 같이 동양적 학문도 하고, 서양적 학문도 함으로써, 두 학문의 장점과 문제점을 고루 알아서, 두 학문이 상호 보완하면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었던가 보다. 세상에는 동양적 학문이 옳다는 사람과 서양적 학문이 옳다는 사람 이렇게 두 부류의 사람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중간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화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 손은 이제는 이미 아무것도 所有하고 싶지도 않다 所有된 물건의 所有됨을 느끼기조차 하지 아니 한다
그래서 이 화자의 손은 아무것도 소유하고 싶지도 않다. 소유된 물건의 소유됨을 느끼지도 못한다. 동양적 학문이 옳다는 사람과 서양적 학문이 옳다고 주장하는, 두 부류의 사람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화자는 무엇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동양적 학문이건 서양적 학문이건 아무것도 소유하고 싶지도 않고, 동양적 학문과 서양적 학문이 모두 소유되었음에도, 그것을 소유했다는 것을 느끼기조차 아니하고 있다. 여기서 ‘아니 한다’는 것은 화자의 의지의 부정이다. 능력의 부정이 아니라, 의지의 부정이다.
 
只今 떨어지고 있는 것이 눈(雪)이라고 한다면 只今 떨어진 내 눈물은 눈(雪)이어야 할 것이다.
만약 지금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것이 눈(雪)이라고 한다면, 지금 화자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淚)은 눈(雪)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서양식 학문의 관점에서 본다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雪)이나 화자의 눈에서 나오는 눈물(淚)나 결국 같은 것이다. 모두 H2O다. 그러나 화자는 이러한 서양식 사고방식만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화자가 떨어뜨린 눈물은 그 성분에서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같을 수 있으나, 정신과 감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눈이 내리는 것을 보고 감격하여 흘린 눈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서양적 사고는 다양한 현상을 종합하여 개념화 추상화 일반화는 데는 뛰어나지만, 인간이 가진 다양한 정신과 문화와 감정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학문이다. 따라서 동양적 학문과 서양적 학문의 적절한 조화만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나의 內面과 外面과 이 件의 系統인 모든 中間들은 지독히 춥다
화자는 내면적으로는 동양적 학문을 중시한다. 외면적으로는 서양적 학문을 했다. 서양적인 학문만이 옳다는 사람과 동양적인 학문만이 옳다는 사람만 있는 세상에서, 두 가지의 적절한 보완과 종합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외롭다.
左右 / 이 兩側의 손들이 相對方의 義理를 저바리고 두 번 다시 握手하는 일은 없이 /  困難한 勞働만이 가로놓여 있는 이 整頓하여 가지 아니하면 아니 될 길에 있어서 獨立을 固執하는 것이기는 하나
좌우, 즉 서양적 학문과 동양적 학문, 이 양측의 주장들이 상대방의 의리 즉 상대방의 학문이 서로에게 기여하는 바른 이치를 저버리고, 두 번 다시 서로 악수 즉 화해하는 일이 없이, 곤란한 근심스러운 일만이 가로놓여 있는, 이 정돈하여 가야할 길에, 화자는 또 화자대로 자신의 독립을 고집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보면, 화자는, 동양적 학문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서양적 학문이 옳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만 있는 세상에서 홀로 두 학문이 상호 보완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추우리로다 / 추우리로다
화자는 생각한다. 동양적 학문만 옳다고 주장하거나, 서양적 학문만을 주장하는 사람들만 있는 지금의 현실로 볼 때, 우리의 미래는 추울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희망이 없을 것이다. 제목 ‘空腹(공복)’과 연관하여 생각해 보면, 우리의 미래는 텅 비어 있다. 배가 고플 것이다.
 
누구는 나를 가리켜 孤獨하다고 하느냐 /  이 群雄割居를 보라 /  이 戰爭을 보라
누구는 화자를 가리켜 고독하다고 하느냐? 화자는 동양적 학문을 하는 것이 바르다는 입장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서양적 학문을 하는 것이 바르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도 아니기에, 고독할 것이라고 누군가 말하였나 보다. 그러나 화자는 동양적 학문을 하는 것이 바르다는 사람들과 서양적 학문을 하는 것이 바르다는 사람들이 제각각 군웅할거 식으로 나뉘어서, 서로 싸우고 다투는 것을 구경하고 있다. 그것을 구경하고 있는 화자는 결코 고독하지 않다.
 
 나는 그들의 軋轢의 發熱의 한복판에서 昏睡한다 / 심심한 歲月이 흐르고 나는 눈을 떠 본 즉 / 屍體도 蒸發한 다음의 고요한 月夜를 나는 想像한다
화자는 그들의 ‘알력의 발열’ 즉 서로 의견이 맞지 아니하여 열나게 싸우는 한복판에서 혼수한다. 여기서 혼수한다는 것은 정신없이 잠을 잔다는 말이다.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는 상태다. 
화자는 미래에 자신이 죽고, 시체도 썩어서 증발한 다음의 고요한 달밤을 상상한다. 세월이 흐르고 나면, 동양적 학문을 하는 것이 바르다고 주장한 사람이나, 서양적 학문을 하는 것이 바르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나 모두 고요한 달밤처럼 조용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동양적 학문만이 바른 것도 아니고, 서양적 학문만이 바른 것도 아니라는, 화자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알 것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그러한 미래를 상상한다.
 
天眞한 村落의 畜犬들아 짖지 말게나 /  내 體溫은 適當스럽거니와 /  내 希望은 甘美로웁다
천진하고 순진하리만큼 어리석은, 시골에서 가축으로 기르는 개와 같이 미련한 놈들아, 짖지 말게나. 떠들지 말게나. 엉터리 주장 하지 말게나. 
내 체온은 적당스럽다. 서양에 치우치지도 않았고, 동양에 치우치지도 않았다. 그리고 내 희망은 감미롭다. 미래에 분명히 내 말이 맞을 것이라는 달콤한 희망을 갖고 있다.



▣  2. 烏瞰圖 (一)

二人…… 1 ……

基督은襤褸한行色하고說敎를시작했다.
아아ㄹ· 카아보네는橄欖山을山채로拉撮했다
       x
一九三○年以後의일――.
네온사인으로裝飾된어느敎會의門깐에서는뚱보카아보네가볼의傷痕을伸縮시켜가면서入場券을팔고있었다.

― <朝鮮과 建築> 1931. 8 ―
 
 

二人…… 1 ……
제목 <二人 …… 1 ……>에서 은 ‘二人’은 ‘두 사람’이라는 의미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그냥 ‘二人’이라고 표현하면 될 것인데, ‘二人’이라고 써 놓고 그 옆에 ‘……’ 표시를 했기 때문이다.
이상의 시에는 이런 식의 표시가 되어 있는 시들이 있다. 이를테면 <수염――>, <공복――>이 그것이다. 이런 경우 그냥 단순히 ‘수염’이라고 해석할 수 없다. 단순히 ‘공복 즉 비어 있는 배’라고 해석할 수 없다. 이상 시인이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알리기 위해서 ‘……’표시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의 제목은 ‘두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고, ‘한 사람의 이중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시에 나오는 ‘기독(基督)’과 ‘아아ㄹ 카보네’는 동일 인물이다.
基督은 襤褸한 行色하고 說敎를 시작했다. / 아아ㄹ· 카아보네는 橄欖山을 山채로 拉撮했다.
기독(基督)과 같은 사람은 마치 기독처럼 남루한 행색을 하고 설교를 시작했다. 여기서 ‘기독’은 ‘사람들이 그를 마치 기독인 듯이 생각하는, 어느 교회의 목사’다. 남루한 행색을 하고 설교를 했다는 것은, 이를테면 사욕을 버리고, 교회에 들어오는 헌금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하여 나누어 주고, 자신을 위해서는 사용하지 않으면서 설교를 했다는 것이다. 자신을 위하여 돈을 사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사람은 남루한 행색이 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그러한 목사를 기독이라고 칭송한다.
그런데 그 목사는 사실은 ‘아아ㄹ 카보네’다. 그리고 그 아아ㄹ 카보네는 감람산을 山(산)채로 납촬해 왔다. 알(Al)은 흔히 서양에서 남자의 이름에 붙는다. 그리고 ‘카보네(carvone)’는 ‘카본’(carvon)의 프랑스어식 표기이며, 우리말로는 탄소라고 한다. 연탄이나 흑연을 구성하는 물질이다. 연탄이나 흑연은 검을 색을 띠고 있다. 따라서 ‘아아ㄹ 카보네’는 마음이 시커먼 교회의 목사를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어느 교회의 목사가 처음에는 기독과 같은 남루한 행색으로 설교했으나, 사실은 마음이 시커먼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목사가 이제는 감란산을 통째로 교로 가져왔다. 기독의 감람산 연설을 듣기 위해서 많이 모여 있던 군중들을 교회로 데려 온 것이다. 기독과 같은 훌륭한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一九三○年 以後의 일――. / 네온사인으로 裝飾된 어느 敎會의 門깐에서는 뚱보 카아보네가 볼의 傷痕을 伸縮시켜가면서 入場券을 팔고 있었다.
그런데, 1930년 이후――, 교회의 목사는 남루한 행색을 하던 기독이 아니었다. 달라졌다. 네온사인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어느 교회의 문간에서는 잘 먹어서 뚱보인, 마음이 시커먼 목사가 열변을 토한다. 기독의 볼에는 피를 흘리는 상처가 있는데, 이 마음이 시커먼 목사의 볼에는, 잘 먹어 살이 쪄서 생긴 주름살이 있다. 그 주름살을 씰룩거리면서 열변을 토하면서, 천국 입장권을 팔고 있었다. 교회에 다녀야 천국에 가고, 헌금을 많이 해야 천국에 간다고, 기독 팔아서 돈을 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에 나타난 목사는 사기꾼이다. 처음에는 마치 자신이 기독인 것처럼 행동을 하고,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자, 이제는 기독을 팔아서 사욕을 채우는 사람이다. 따라서 제목 ‘二人 ……’은 이중성을 가진 어느 목사다.



 
▣   二人…… 2 ……

아아ㄹ · 카아보네의貨幣는참으로光이나고메달로하여도좋을만하나基督의貨幣는보기숭할지경으로貧弱하고해서아무튼돈이라는資格에서는一步도벗어나지못하고 있다. 
 
카아보네가프렛상이래서보내어준프록코오트를基督은最後까지拒絶하고말았다는것은有名한이야기거니와宜當한일이아니겠는가.

― <朝鮮과 建築> 1931. 8 ― 
 
 
아아ㄹ · 카아보네의 貨幣는 참으로 光이 나고 메달로 하여도 좋을만 하나 基督의 貨幣는 보기 숭할 지경으로 貧弱하고 해서 아무튼 돈이라는 資格에서는 一步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교회에 헌금이라는 것을 한다. 십일조를 바치기도 한다. 교회에 들어온 돈은 기본적으로 교회의 살림을 하는데 사용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기독의 뜻대로, 가난하고 병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한다.
그런데, 마음이 검은 아아ㄹ 카아보네 목사에게 들어오는 돈은 빛이 난다.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은, 불우한 이웃을 위하여 자신의 것을 기부하는 훌륭한 사람으로 칭송되고, 그 이름은 영광된 것이다. 
그래서 아아ㄹ 카보네의 교회에 들어온 헌금은 메달(medal)로 하여도 좋다. 메달은 목에 건다. 메달은 자랑스러운 것이다. 영광된 것이다. 따라서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면 그 사람의 이름과 그가 낸 돈의 액수를 기입하여 메달처럼 게시한다. 그래프로 그려서 헌금의 실적을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게시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를 보고 더욱 더 많은 헌금을 한다.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은 자랑스럽다. 더 많이 하고 싶다. 헌금을 적게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보기가 민망하여 헌금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음이 시커먼 목사의 돈벌이 방법이다.
그러나 교회에 들어온 헌금 중에서, 아아ㄹ 카보네 목사가 기독의 뜻에 따라, 불우한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는 ‘기독의 화폐’는 보기 흉할 정도로 빈약해서 아무튼 돈이라는 자격에서는 일보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돈으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카아보네가 프렛상이래서 보내어 준 프록코오트를 基督은 最後까지 拒絶하고 말았다는 것은 有名한 이야기거니와 宜當한 일이 아니겠는가.
카아보네가, 기독이 프렛상(flatちん)이라고 해서 즉 십자가의 기독이 마치 가난해서 잘 먹지 못하여 갈비뼈가 드러나도록 빈약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 듯이, 그리스도에게 프록코오트를 보내 주자, 기독은 최후까지 거절하고 말았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거니와, 아아ㄹ 카보네의 자선을 거절하는 것이 의당한 일이 아니겠는가.
십자가에 매달린 기독은 옷을 벗은 채, 겨우 아랫도리만 가리고 있다. 기독은 목사가 보내준 프록코트를 거절하여 입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아ㄹ 카보네 목사를 외면하는 듯한 모습, 고개를 모로 돌린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 그러한 기독의 모습을, 화자는 마치 아아ㄹ 카보네 목사가 보내준 프록코트를 기독이 거절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 기독이 사기꾼 아아ㄹ 카보네 목사를 외면하여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은 참으로 의당한 일이다.
 


▣   神經質的으로肥滿한三角形
   ――△은나의AMOUREUSE이다

▽이여  씨름에서이겨본經驗은몇번이나되느냐.
▽이여  보아하니외투속에파묻힌등덜미밖엔없고나.
▽이여  나는그呼吸에부서진樂器로다.
    나에게如何한孤獨은찾아올지라도나는xx하지아니할것이다.
    오직그러함으로써만나의生涯는原色과같이하여豊富하도다.
그런데나는캐라반이라고.
그런데나는캐라반이라고.

― <朝鮮과 建築> 1931. 8 ― 
 
 
神經質的으로 肥滿한 三角形 / ――△은 나의 AMOUREU -SE이다
제목은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삼각형’이다. 부제는 ‘――△은 나의 AMOUREUSE이다’이다. 부제를 보면, ‘――’이 있다. 혹시 무슨 의도가 있지 않을까? 있다. ‘――’은 생각해 보라는 뜻으로 보인다. 무슨 말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라는 뜻이다. 뭔가 약간 수상하다.
△은 화자가 사랑하는 연인과 같은 그 어떤 것을 지칭한다. 그 어떤 것을 간단히 기호화하여 △이라 말하고 있다. 이렇게 기호화하여 말하는 방식은 서양 학문 즉 현대 수학이나 과학에서 일반화된 표현 방식이다. 
이를테면 반지름과 원주의 길이와의 관계를 표현할 때, 서양의 학문에서는, 반지름을 r이라고 하고, 원주의 길이를 ℓ이라고 하고, 원주율을 π라고 한다면, π=ℓ/2r= 3.14 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반지름을 r 이라고 한다, 원주의 길이를 ℓ이라고 한다, 원주율을 π라고 한다’는 것은, 바로 어떤 것을 간단히 기호화하는 서양식 사고방식이다.
따라서 제목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삼각형’에서 ‘삼각형’은 화자가 연인처럼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그 어떤 것을 기호화한 것이다. 그런데 그 삼각형이 비만하다. 따라서 삼각형(△)으로 기호화된, 그 무엇을 화자는 연인처럼 좋아하거나 사랑한다. ‘신경질적으로’라는 제목과 관련하여 생각하면 삼각형(△)은 ‘신경’과 관련이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너무 비만하여 아주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어떤 대상임을 추리할 수 있다.
▽이여  씨름에서 이겨본 經驗은 몇 번이나 되느냐.
△을 사랑하는 연인이라고 해 놓고, 이 시에는 △은 나오지 않고, ▽만 나온다. 그렇다면 ▽은 무엇일까? △과 ▽을 나란히 놓고 곰곰 생각해 보면, ▽은 화자가 싫어하는 것, 미워하는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어쩌면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삼각형’이라는 제목과 관련시켜 보면,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은 화자가 신경질적으로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그 어떤 대상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은 좀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화자는 ▽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여, 씨름에서 이겨본 경험은 몇 번이나 되는냐”하고. 아마 ▽은 씨름에서 별로 이겨본 적이 없는가 보다. 그래서 화자는 ▽을 아주 싫어할 것이다.
그러면 씨름에서 별로 이겨본 적이 없었다는 것과 관련시켜 ▽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각해 보자. 씨름은 두 사람이 서로 마주잡고, 힘을 쓰면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호흡이 가빠오면서, 이기려고 하는 경기다. 그러나 화자는 그러한 씨름과 같은 어떤 행위에서 이겨본 적이 별로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제2행과 제3행의 ‘▽이여, 보아하니 외투 속에 파묻힌 등덜미밖엔 없고나. / ▽이여, 나는 그 호흡에 부서진 악기로다.’와 관련하여 곰곰이 상상해 보면, ▽은 신경질적으로 지나치게 잘 발기되지 않는, 힘이 빠진 화자의 남근임을 추리할 수 있다. 화자는 힘이 빠져서 늘어진 남근으로 여자와의 씨름 즉 성교에서 이겨본 적이 없는가 보다. 여자를 제대로 만족시켜 준 적이 별로 없었는가 보다.
그렇다면 △은 잘 발기된 화자의 남근을 의미한다 할 것이며, 그러한 남근을 화자는 아주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연인처럼 사랑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화자는 잘 발기된 남근으로 여성과 성교를 하는 것을 아주 좋아할 것이다. 
▽이여  보아하니 외투 속에 파묻힌 등덜미밖엔 없고나.
▽은 가만히 들여다보면 외투 속에 파묻힌, 등덜미밖에 없는 그 어떤 것이다. 남근을 사람의 형상에 비유한다면, 귀두 부분을 머리, 그 아래 잘록한 부분을 목, 그리고 그 아래 부분을 등 아래쪽의 몸의 형상과 유사하다. 따라서 ‘외투 속에 파묻힌, 등덜미 밖에 없는 ▽은 힘이 빠진 남근의 모습이다. 발기된 남근은 사람의 목덜미에 해당하는 부분이 확연히 드러나지만, 힘이 빠진 남근은 귀두를 둘러싸고 있는 표피가 귀두를 감싸서 잘 보이지 않다. 외투가 감싸고 있는 등덜미만 보이는 것처럼 보인다.
▽이여  나는 그 呼吸에 부서진 樂器로다. / 나에게 如何한 孤獨은 찾아올지라도 나는 xx하지 아니할 것이다. / 오직 그러함으로써만 나의 生涯는 原色과 같이하여 豊富하도다.
화자가 힘이 빠져 늘어져 있는 자신의 남근을 보면서 “나는 그 호흡에 부서진 악기로다”하고 독백하듯이, 탄식하듯이 말하고 있다. 호흡은 여러 가지로 상상할 수 있겠으나, 여기서는 화자의 가쁜 호흡이다. 성적으로 흥분했을 경우의 가쁜 호흡 때문에 화자는 자위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 근거는 다음 행에 있다.
부서진 악기는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없다. 악기는 소리를 내는 도구다. 부서지지 않은 악기는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듯이, 잘 발기된 남근은 여자로 하여금 아름다운 교성을 낼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자위로 인해서 힘이 빠진 남근은 부서진 악기처럼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없다. 여성으로 하여금 아름다운 교성을 내도록 하지 못한다.
그래서 화자는 속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약간 행을 들여쓴 것은 화자가 속으로 생각함을 표현하려는 의도다.) 화자에게 여하한 고독은 찾아올지라도 xx하지 않을 것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여기서 고독은 성적으로 흥분된 상태를 홀로 처리해야 하는 상황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래도 xx하지 않겠다 즉 자위를 하지는 않겠다고 한다. 평소에 흥분이 되어 이를 해결할 수 없어서 오는 고독이 찾아올지라도, 자위를 하지 않고 힘을 비축해 두어야, 다음에 여자와 성교를 할 때, 여자라는 악기를 교성이 나도록 잘 연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오직 홀로 있을 때 자위를 하지 않음으로서 나의 생애는 원색과 같이 즉 남근이 본래의 붉은 색으로 잘 발기되어 화자의 삶이 풍부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은 아주 잘 발기된 남근의 기호화다. 신경질적으로 ▽은 신경질 적으로 발기가 되지 않는 남근의 기호화다.
그런데 나는 캐라반이라고. 그런데 나는 캐라반이라고
“그런데 나는 캐라반이라고. 그런데 나는 캐라반이라고” 화자가 독백하는 것 같다. 같은 문장이 두 번 반복되었다. 이것을 ‘그런데 내가 캐러반이라고 하느냐, 그런데 내가 캐러반이라고 하느냐’라는 문장으로 읽을 수 있다. 언뜻 보면 같은 내용을 두 번 말함으로써 강조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으나, 서로 다른 내용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보아야 한다.
캐러반은 대상(隊商)이다. 무거운 짐을 낙타나 말에 싣고 여기저기 장사를 다니며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다. 화자는 캐러반인가? 맞다. 화자는 △만 있다면, △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혼자 자위도 하고 여자와 성교하기도 좋아하는 캐러반이다. 또 이 여자와 저 여자와 성교하기를 좋아하는 캐러반일지도 모른다.
아니다. 화자는 캐러반이 아니다. 화자는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이 있을 뿐이다. ▽을 몸에 짊어지고 다니면서 어떻게 제대로 자위는 할 것이며, 여자와 제대로 성교는 할 수 있겠는가. 또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어떻게 이 여자 저 여자와 성교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화자는 결코 캐러반이 아니다.
 


▣   運動

一層우에있는二層우에있는三層우에있는屋上庭園에올라서南쪽을보아도아무것도없고北쪽을보아도아무것도없고해서屋上庭園밑에있는三層밑에있는二層밑에있는一層으로내려간즉東쪽에서솟아오른太陽이西쪽에떨어지고東쪽에서솟아올라서쪽에떨어지고東쪽에서솟아올라西쪽에떨어지고東쪽에솟아올라하늘한복판에와있기때문에時計를꺼내본즉서기는했으나時間은맞는것이지만時計는나보담도젊지않느냐하는것보담은나는時計보다는늙지아니하였다고아무리해도믿어지는것은필시그럴것임에틀림없는고로나는時計를내동댕이쳐버리고말았다.

― <朝鮮과 建築> 1931. 8 ― 
 
 
運動
'운동(運動)'이 제목이다. 무슨 뜻일까? 보통은 사람이 몸을 단련하기 위해서 몸을 움직이는 일을 운동이라 한다. 그런데 '물체의 운동'이라고 말할 때의 '운동'도 있다. 이때의 운동은 이동(移動)과 같은 의미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그 운동 혹은 이동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별로 없다. 그래서 더욱 난해하다.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겠다.
一層 우에 있는 二層 우에 있는 三層 우에 있는 屋上 庭園에 올라서
일층 위에 이층, 이층 위에 삼층, 삼층 위에 옥상, 그리고 그 옥상에는 정원(庭園)이 있다. 우리는 보통 아내를 ‘집’이라고 한다. 내 아내는 우리 집사람이다. 따라서 집에서 운동하는 것 혹은 이동하는 것은 부부가 서로 육체적으로 사랑을 나눌 때의 순서 혹은 단계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부부가 육체적으로 사랑을 나눌 때는, 먼저 입을 맞추면서 서로의 사람의 감정을 나누기 시작한다. 입을 맞추면서 서로 교감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일층이다. 첫 번째 단계다. 그 다음 남자는 아내의 유방을 애무한다. 그러면서 서로 서서히 흥분이 되고, 사랑을 나누기 위한 감정을 고조시켜 나간다. 따라서 입이 일층이라면, 유방은 이층이다. 두 번째 단계다. 다음으로 아내의 음부를 애무한다. 육체적 사랑을 위한 준비는 최고조에 이른다. 삼층이다. 세 번째 단계다. 이처럼 입에서 유방으로, 다시 유방에서 음부로 이동하면서,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는 성교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근이 여자의 음부를 향한다. 음부가 옥상이다. 옥상은 집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옥상에는 정원이 있다. 정원에는 잘 가꾸어진 꽃과 풀과 나무가 있다. 초목이 자라는 정원은 음모가 나 있는 음부와 유사하다. 옥상 정원에 올랐다는 것은 아내의 음부에 남근을 삽입한다는 것이다.
南쪽을 보아도 아무것도 없고 北쪽을 보아도 아무것도 없고 해서 屋上庭園 밑에 있는 三層 밑에 있는 二層 밑에 있는 一層으로 내려간 즉 東쪽에서 솟아오른 太陽이 西쪽에 떨어지고 東쪽에서 솟아올라서 쪽에 떨어지고 東쪽에서 솟아올라 西쪽에 떨어지고
그런데 한참 열심히 하다가 남쪽을 보아도 아무것도 없다. 북쪽을 보아도 아무것도 없다. 남쪽은 따뜻한 곳이다. 뜨거운 곳이다. 아내와 화자 모두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았다. 북쪽은 차가운 곳이다. 추운 곳이다. 그런데 북쪽에도 아무것도 없다. 아내와 화자 모두 차갑게 식은 것도 아니다. 아마 한참 서로 육체적 사랑을 나누기는 하였으나 화자의 남근이 제대로 발기되지 않아서 미지근한 상태다. 아내도 제대로 달아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열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음부 애무 아래 단계인, 유방 아래 단계인, 입으로 갔다. 화자는 입맞춤에서부터 유방 애무, 그리고 음부 애무, 그리고 삽입의 과정을 다시 시작한다.
그런데 입에서부터 솟아올라 유방을 거쳐 음부에 이르렀을 때 뜨겁던 태양이, 한참 하다 보면 서쪽으로 떨어진다. 열기가 식어버린다. 그래서 다시 입에서 유방으로 유방에서 음부로 이동하면서 열기를 고조시키고, 하다 보면 또 떨어지고, 그래서 다시 입에서 유방을 거쳐 음부로 그리고 옥상에 올라보면 또 식어버리고~~. 열심히 운동한다. 이동한다.
東쪽에 솟아올라 하늘 한복판에 와 있기 때문에 時計를 꺼내 본 즉 서기는 했으나 時間은 맞는 것이지만 時計는 나 보담도 젊지 않느냐 하는 것보담은 나는 時計보다는 늙지 아니하였다고 아무리 해도 믿어지는 것은 필시 그럴 것임에 틀림없는 고로 나는 時計를 내동댕이쳐 버리고 말았다.
동쪽에서 뜬 태양이 한복판에 와 있어서, 즉 사랑의 열기가 다시 가장 뜨겁게 고조된 상태가 되었기에, 시계를 꺼내서 보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동하면서 운동했는가 시간을 알아보기 위해서 시계를 꺼내 본 것이다. 그랬더니 시계는 서기는 하였으나 맞는다. 그런데 시계는 나보담 젊지 않느냐 하는 것 보다는, 나는 시계보다는 늙지 아니하였다고 아무리 해도 그것이 믿어지는 것은 필시 그럴 것임에 틀림이 없다. 
여기서 시계는 화자보다 젊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것은, 시계는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 자리에서 그 상태를 유지하고 오래도록 멈춰 있다. 그러나 화자의 남근은 커졌다가는 이내 줄어들었다. 발기된 상태를 오래도록 유지하지 못했다. 한 상태를 오래도록 유지하고 있는 멈춰선 시계는, 발기된 상태를 오래도록 유지하지 못한 화자보다 젊다고 할 수 있다. 젊은이는 발기된 남근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보다는 화자가 시계보다 늙지 아니하였다고 말해도 그것이 믿어진다. 멈춰선 시계는 운동하지 않았으나, 화자는 여러 번 운동을 하였다. 입에서 유방으로 다시 음부로 그리고 삽입하여 노력하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열심히 운동을 했다. 운동을 잘 하는 사람이 젊은 사람이고 잘 못하는 사람이 늙은이라면, 화자는 멈춰선 시계보다 운동을 많이 했으니까, 화자가 시계보다 늙지 아니 하였다고 하는 것도 또한 믿어진다.
그래서 화자는 시계를 내동댕이쳐 버리고 말았다. 시계보다 늙지 않은 화자, 다시 입에서 유방으로 유방에서 음부로 음부에서 삽입으로, 일층에서 삼층 위 옥상까지 열심히 오르내리며 운동을 했다.
 


▣   興行物天使

  ――어떤後日譚으로――

整形外科는여자의눈을찢어버리고形便없이늙어빠진曲藝象의눈으로만들고만것이다. 여자는실컷웃어도또한웃지아니하여도웃는것이다.
여자의눈은北極에서邂逅하였다. 北極은초겨울이다. 여자의눈에는白夜가나타났다. 여자의눈은바닷개(海狗)잔등과같이얼음판위에미끄러져떨어지고만것이다.
世界의寒流를낳는바람이여자의눈을불었다. 여자의눈은거칠어졌지만여자의눈은무서운氷山에쌓여있어서波濤를일으키는것은不可能하다.
여자는大膽하게NU가되었다. 汗孔은汗孔만큼荊刺되었다. 여자는노래부른다는것이찢어지는소리로울었다. 北極은鐘소리에戰慄하였던것이다.
       ◇
거리의音樂師는따스한봄을마구뿌린乞人과같은天使. 天使는참새와같이瘦瘠한天使를데리고다닌다.
天使의배암과같은회초리로天使를때린다.
天使는웃은다. 天使는고무風船과같이부풀어진다.
天使의興行은사람들의눈을끈다.
사람들은天使의貞操의모습을지닌다고하는原色寫眞版그림엽서를산다.
天使는신발을떨어뜨리고逃亡한다.
天使는한꺼번에열個以上의덫을내어던진다.
       ◇
日曆은쵸콜레이트를늘인(增)다.
여자는쵸콜레이트로化粧하는것이다.
여자는트렁크속에흙탕투성이가된즈로오스와함께엎드러져운다. 여자는트렁크를運搬한다.
여자의트렁크는蓄音機다.
蓄音機는喇叭과같이紅도깨비靑도깨비를불러들였다.
紅도깨비靑도깨비는펜긴이다. 사루마다밖에입지않은펜긴은水腫이다.
여자는코끼리의눈과頭蓋骨크기만한水晶눈을縱橫으로굴리어秋波를濫發하였다.
여자는滿月을잘게잘게썰어서饗宴을베푼다. 사람들은그것을먹고돼지같이肥滿하는쵸콜레이트냄새를放散하는것이다.

-<朝鮮과 建築> 1931. 8 -
 

興行物 天使 / ――어떤 後日譚으로――
‘흥행물 천사’는 축음기 레코드 판 속에서 노래하는 여자 가수다. 레코드판은 흥행을 목적으로 만든 물건이다. 천사는 천국에서 인간 세계에 파견되어 신과 인간의 중간에서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고, 인간의 기원을 신에게 전하는 사자(使者)다. 축음기의 레코드판도 실제 가수의 목소리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천사와 같은 존재다.
부제 ‘――어떤後日譚으로――’는 축음기로 레코드판의 노래를 듣고 난 뒤 썼다는 의미로도 보이고, 축음기로 레코드판의 노래를 듣고 난 뒤, 그 후에 벌어질 경과에 대하여 덧붙이는 이야기로 썼다는 의미로도 보인다.
整形外科는 여자의 눈을 찢어버리고 形便없이 늙어빠진 曲藝象의 눈으로 만들고 만 것이다. 여자는 실컷 웃어도 또한 웃지 아니하여도 웃는 것이다.
정형외과는 여자 가수의 눈을 찢어버리고 형편없이 늙어빠진, 곡예하는 코끼리의 눈처럼 커다란 레코드판을 만들고 만 것이다. 레코드판은 커다란 코끼리의 검은 눈동자와 같다. 검은 눈동자에는 그 안에 검은 동공이 있는데, 이는 레코드판 전체가 커다란 코끼리의 눈과 같다면, 동공은 음악이 기록되지 않은 안쪽 부분이다. 코끼리의 눈과 같은 레코드판에는 홈이 주름처럼 새겨져 있다. 그래서 형편없이 늙어빠진 곡예상의 눈이다.
그래서 코끼리의 눈은 실컷 웃어도 또한 웃지 아니하여도 웃는 것이다. 주름 모양의 홈이 있으니 웃거나 웃지 않거나 웃는 모습처럼 보인다.
여자의 눈은 北極에서 邂逅하였다. 北極은 초겨울이다.
여자 가수의 눈인 레코드판은 레코드 바늘과 위쪽에서 만났다. 위쪽이 북쪽이다. 북극은 초겨울이다. 레코드판 위에 처음 레코드를 재생하기 위해서 레코드 바늘을 올려놓으면 마치 북극에서 부는 바람과 같은 잡음이 들린다. 그 잡음 소리가 마치 초겨울에 부는 바람 소리 같다.
여자의 눈에는 白夜가 나타났다. 여자의 눈은 바닷개(海狗) 잔등과 같이 얼음판 위에 미끄러져 떨어지고 만 것이다.
여자 가수의 눈과 같은 레코드판에는 백야가 나타났다. 북극의 얼음판 위에 백야가 나타나면 햇빛이 얼음판에 반사되어 빛난다. 마찬가지로 레코드판에는 홈에 햇빛이 반사되어 마치 지평선 위에서 해가 비친 것처럼 햇빛이 반사된다. 
마치 바닷개의 잔등과 같은, 눈의 흰자위에서 얼음판 위에 미끄러져 떨어진 눈동자처럼, 레코드판의 표면이 빛에 반사되어 빛난다.
世界의 寒流를 낳는 바람이 여자의 눈을 불었다. 여자의 눈은 거칠어졌지만 여자의 눈은 무서운 氷山에 쌓여 있어서 波濤를 일으키는 것은 不可能하다.
세계에 한류를 불러오는 북극의 바람과 같은 잡음이 레코드판에서 일었다. 그래서 여자 가수의 눈과 같은 레코드판은 주름이 있어 거칠어졌지만, 여자의 눈인 레코드판은 빙산과 같이 딱딱한 것으로 되어 있어서, 바람에 의해서 파도를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자는 大膽하게 NU가 되었다. 汗孔은 汗孔만큼 荊刺되었다. 여자는 노래 부른다는 것이 찢어지는 소리로 울었다. 北極은 鐘소리에 戰慄하였던 것이다.
여자 가수는 대담하게 NU가 되었다. 여자는 이제 새로운 형태의 가수가 된 것이다. 레코드판의 홈을 따라 여자 가수의 땀구멍은 땀구멍 수만큼 레코드 바늘로 찔렸다. 레코드 바늘이 찌르는 대로 레코드판 속의 가수는, 땀을 흘리는 듯이, 있는 힘을 다해서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레코드판 속의 여자 가수는, 노래 부른다는 것이 찢어지는 소리로 울었다. 북극은 종소리에 전율하였던 것이다. 종소리의 파문처럼 나 있는 홈에, 레코드바늘이 얹히고, 홈의 요철을 따라 레코드 바늘이 지나가자, 마치 찢어지는 듯 절규하는 목소리로, 전율하는 듯 소리를 냈다.
거리의 音樂師는 따스한 봄을 마구뿌린 乞人과 같은 天使. 天使는 참새와 같이 瘦瘠한 天使를 데리고 다닌다.
거리의 음악사는 따스한 봄을 마구 뿌린 걸인과 같은 천사다. 따스한 봄은 쵸콜레이트가 잘 녹는 계절이고, 쵸콜레이트처럼 녹은 레코드판의 원료로 레코드판을 만들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레코드판을 거리에 마구 뿌리고, 그 뿌린 레코드판으로 사람들에게 돈을 요구하는, 마치 걸인과 같이 돈을 요구하면서 음악을 전해주는 천사다. 거리에서 들려오는 축음기 속의 가수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사기를 요구하면서, 돈을 요구하면서 노래를 부른다. 마치 걸인과 같다.
축음기 속에서 노래 부르는 실제 가수는, 참새와 같이 수척한 천사, 참새와 같이 자그만 레코드판 속의 노래 부르는 가수를 가지고 다닌다. 그리고 그 가수를 흥행시켜서 돈을 벌고자 한다.
天使의 배암과 같은 회초리로 天使를 때린다. / 天使는 웃은다. 天使는 고무風船과 같이 부풀어진다.
천사의 똬리를 틀고 있는 배암과 같은 회초리로 천사를 때린다. 가수는 똬리와 같은 홈이 있는 레코드판을 찍어낸다. 천사는 돈이 많이 들어오니까 좋아한다. 천사는 부풀어진 고무풍선처럼 많은 돈을 번다.
天使의 興行은 사람들의 눈을 끈다. / 사람들은 天使의 貞操의 모습을 지닌다고 하는 原色 寫眞版 그림엽서를 산다.
거리에 울려 퍼지는 천사의 노래는 사람들의 주위를 끈다. 사람들은 천사의 정조한 모습, 실제와 변함없는 모습을 지닌다고 하는, 그 원색 사진판 그림엽서 즉 원래 가수의 목소리를 그대로 찍어 놓은 레코드판을 산다.
天使는 신발을 떨어뜨리고 逃亡한다.
여자 가수는 자신의 자취만을 레코드판 속에 남겨 놓은 채 사라진다. 레코드판 속에 실제 여자 가수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의 자취만 남겨진다. 신발을 떨어뜨리고 간 것은 자취만 남기고 간 것이다.
天使는 한꺼번에 열 個 以上의 덫을 내어 던진다.
여자 가수는 레코드판 하나에 열 개 이상의, 사람들을 유혹하는 노래를 판 속에 실어 놓는다.
日曆은 쵸콜레이트를 늘인(增)다. / 여자는 쵸콜레이트로 化粧하는 것이다.
날이 갈수록 레코드판을 많이 낸다. 레코드판 속의 여자 가수는 레코드판을 새롭게 고쳐서 단장하는 것이다.
여자는 트렁크속에 흙탕투성이가 된 즈로오스와 함께 엎드러져 운다. 여자는 트렁크를 運搬한다.
여자 가수는 여자가 들어가는 큰 가방과 같은 축음기 속에서, 흙탕투성이가 된 속바지와 함께 엎드려서 운다. 축음기 속에는 많은 가수들의 레코드판이 들어가 재생된다. 따라서 그 축음기 속은 많은 가수들이 들어갔다 나왔다 하므로 흙이 많다. 그리고 축음기 속의 여자 가수는 레코드 바늘이 땀구멍을 찌를 때마다 땀을 흘리면서 마치 아파서 우는 것처럼 열심히 부른다. 그러니 흙과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 흙탕투성이가 되었다. 그리고 서양 여자들은 마치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속옷과 같은 팬티를 입고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레코드판은 축음기 위에 납작하게 놓여 재생된다. 엎드러져 우는 것이다.
여자는 트렁크 즉 축음기를 운반한다. 레코드판을 재생하기 위해서는 축음기가 있어야 한다. 축음기를 운반해야 한다. 축음기를 사게 하는 것이다.
여자의 트렁크는 蓄音機다. / 蓄音機는 喇叭과 같이 紅도깨비 靑도깨비를 불러 들였다.
여자를 담는 큰 가방은 축음기다. 축음기는 소리를 크게 들리게 하는 나팔과 함께 홍도깨비와 청도깨비를 불러 들였다. 도깨비는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한 잡된 귀신의 하나로, 비상한 힘과 재주를 가지고 있어, 사람을 홀리기도 하고 짓궂은 장난이나 심술궂은 짓을 많이 한다. 이렇게 축음기와 레코드판이 보급되자, 도깨비처럼 사람을 홀리는 노래를 부르기를 좋아하는 남자와 여자가 모여들었다.
紅도깨비 靑도깨비는 펜긴이다. 사루마다밖에 입지 않은 펜긴은 水腫이다. / 여자는 코끼리의 눈과 頭蓋骨 크기만 한 水晶 눈을 縱橫으로 굴리어 秋波를 濫發하였다.
사람을 홀리는 가수는 펭귄과 같은, 하얀 와이셔츠에 턱시도를 입고 노래 부른다. 사루마다 즉 팬티밖에 입지 않고 노래 부르는 가수는 몸이 붓는 병을 앓고 있다. 그래서 납작한 레코드판에 들어갈 수가 없고, 노래 대신 몸으로 사람을 홀리는 것이다. 노래로 사람들의 관심을 살 수 없으니까 몸으로 사람을 홀리는 가수다.
여자 가수는 코끼리의 눈과 두개골 크기만 한, 수정처럼 딱딱한 레코드판을 종횡으로 굴리면서 노래를 불렀다. 레코드판의 홈을 따라서 가로로, 그리고 밖에서 안쪽으로 세로로 눈을 굴리면서 사람들에게 추파를 남발하였다. 레코드판 속의 노래는 주로 이성을 유혹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여자는 滿月을 잘게잘게 썰어서 饗宴을 베푼다. 사람들은 그것을 먹고 돼지같이 肥滿하는 쵸콜레이트 냄새를 放散하는 것이다.
레코드판 속의 여자 가수는 보름달과 같은 레코드판을 홈을 따라서 잘게 썰어서 노래로 사람들을 융숭하게 대접하는 잔치를 베푼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여자가 주는 노래를 먹고, 돼지 같이 돈을 버는 레코드판 냄새를 방산하는 노래를 부른다. 레코드판 속의 가수가 주는 노래에 가수는 돈을 벌고, 대신 사람들은 그녀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이다.
 
 
 
 
3. 三次角 設計圖

▣   線에關한覺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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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宇宙는冪에依하는冪에依한다)
 (사람은數字를버려라)
 (고요하게나를電子의陽子로하여라)
스펙톨
 
軸 X 軸 Y  軸 Z
 
速度 etc의 統制例컨대光線은每秒當三○○○○○킬로미터달아나는것이確實하다면사람의發明은每秒當六○○○○○킬로미터달아날수없다는法은勿論없다. 그것을幾千倍幾萬倍幾億倍幾兆倍하면사람은數十年數百年數千年數萬年數億年數兆年의太古의事實이보여질것이아닌가. 그것을또끊임없이崩壞하는것이라고하는가. 原子는原子이고原子이고原子이다. 生理作用은變移하는것인가. 原子는原子가아니고原子가아니고原子가아니다. 放射는崩壞인가. 사람은永劫인永劫을살수있는것은生命은生도아니고命도아니고光線인것이라는것이다.
 
臭覺의味覺과味覺의臭覺
 
   (立體에의絶望에依한誕生)
   (運動에의絶望에依한誕生)
   (地球는빈집일境遇封建時代는눈물이나리만큼그리워진다)

― <朝鮮과 建築> 1931. 10 ―
 

 
이 시는 무한히 팽창하며 펼쳐진 우주, 우주를 향해 날아가는 광선, 광선과 관련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그리고 원자 물리학 등을 공부한 이상이, 광선을 중심으로 현대 서양의 과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 시다.
제목 <선에 관한 각서1>에서 ‘선’은 광선이다. 광선에 대해서 깨달은 것을 기록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첫 번째 시로 적었다. 여기서 광선은 서양의 과학 문명을 상징한다.
이상한 그림
맨 처음에 나오는 숫자와 점들로 이루어진, 이상한 그림은 무한히 펼쳐진 우주를 나타낸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숫자들이 씌어 있고, 계속해서 그 숫자들이 증가하면서 무한히 펼쳐지는 우주를 형상한다. 
(宇宙는 冪에 依하는 冪에 依한다)
이상 시인은 이 이상한 그림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까 봐서 친절하게도 아래에 괄호를 하고, 그 안에 몇 자 적어 놓았다. 서양의 과학에 의하면, 우주는 제곱에 의하는 제곱에 의한다고 했다. 제곱이 거듭 제곱되는 것에 의해서 무한히 펼쳐진다. 이러한 문제를 지금 이상 시인이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
(사람은 數字를 버려라) 
사람은 숫자를 버리라고 했다. 서양 과학에 따르면, 사람의 몸에서 반사된 광선은 초당 30만 킬로미터로 우주를 향해 달아나고, 그 광선을 타임머신을 타고 따라가면, 우리는 과거의 자신을 볼 수 있고, 또 과거로 돌아가 젊어질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서양 학문에 따르면, 인간은 몇 살까지 산다는 숫자를 버려도 된다. 서양 학문에서는 숫자를 버리라고 한다.
또 서양의 과학인 양자역학에 의하면 모든 물질은 중심부에 양자가 있고, 양자의 주위를 전자가 돌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얼마간, 이를테면 80세, 90세 살다가 죽는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사람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이 양자와 전자로 구성되어 있다면, 사람은 죽어서도 그 물질은 우주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람은 영원히 죽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죽으면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양자와 전자가 다른 형태로 우주의 어디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가 과연 옳은지를 지금 이상 시인이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
(고요하게 나를 電子의 陽子로 하여라) 
고요하게 나를 전자의 양자로 하라고 하였다. 서양의 현대 물리학적인 입장에 따르면, 인간은 양자 주위를 돌고 있는 전자로 구성되어 있음으로, 인간도 결국 하나의 물질에 불과하다. 화자는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그것이 과연 옳은지 생각에 잠겨 있다.
스펙톨
스펙톨. 분광(分光). 물체에서 반사된 광선이 분광되어 수없이 많은 방향으로 달아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광선이 사람의 몸에 닿으면 그 광선은 반사되어 우주로 날아간다. 그 날아가는 광선을 타임머신을 타고 쫓아가면 과거의 자신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의 몸에서 반사된 광선은 수없이 많은 광선으로 분광되어, 수없이 많은 방향으로 날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수없이 많은 사람으로 나누어져 우주 공간으로 날아가는 것이 된다. 광선보다 빠른 타임머신을 타고 그 광선을 따라간다면, 우리는 우주에서 수없이 많은 같은 사람을 만날 것이다. 과연 서양의 과학의 이론대로 그렇게 되는 것인지 지금 화자는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
軸 X 軸 Y  軸 Z
X축과 Y축과 Z축으로 이루어진, 삼차원의 입체 공간을 표현한 것이다. 우주는 삼차원의 입체 공간이다.
 
速度 etc의 統制 例컨대 光線은 每秒當 三○○○○○킬로미터 달아나는 것이 確實하다면 사람의 發明은 每秒當 六○○○○○킬로미터 달아날 수 없다는 法은 勿論 없다
속도 기타의 통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우주 공간에서 속도와 기타 이를 통제하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예컨대, 광선은 매초당 삼십만 킬로미터로 나아가는 것이 확실하다면, 사람의 발명 즉 사람이 발명한 타임머신과 같은 것은 매초당 육십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나아갈 수 없다는 법을 논하지 말라는 것은 없다. 
화자는 광선이 초당 삼십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날아간다면, 인간이 만든 물건 즉 타임머신 같은 것이 육십만 킬로미터로 날아간다는 모형을 설정할 수 있다. 인간이 만든 발명품은 초당 육십만 킬로미터로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勿論(물론)’이라는 글자 위에 강조점이 있다. 이것은 ‘논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그것을 幾千倍 幾萬倍 幾億倍 幾兆倍하면 사람은 數十年 數百年 數千年 數萬年 數億年 數兆年의 太古의 事實이 보여질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인간이 만든 발명품의 속도를 몇 천 배, 몇 만 배, 몇 억 배, 몇 조 배 높여서, 우주로 달아나는 광선을 따라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수십 년, 수백 년, 수천 년, 수만 년, 수억 년, 수조 년의 아득한 옛날의 사람을 볼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광선보다 빠른 타임머신을 타고 광선을 따라가면 아득한 옛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것을 또 끊임없이 崩壞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原子는 原子이고 原子이고 原子이다. 
태고로 가서, 또 거꾸로 사람이 태어나서 죽고, 죽고, 죽고, 죽고 하는 것을, 끊임없는 원자가 붕괴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그렇다면 원자는 다시 원자(붕괴의 근본이 되는 것)가 되고, 다시 원자가 원자가 되어야 한다. 즉 사람이 죽어서 붕괴하여 원자가 되고, 다시 그 붕괴한 원자가 붕괴의 근원이 되는 사람이 되고, 다시 그것이 붕괴하여 원자가 되고, 다시 그것이 붕괴의 근원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수없이 반복하여야 한다.
원자는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인데 그것이 어찌 다시 붕괴의 근원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따라서 어찌 죽음을 끊임없이 붕괴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生理作用은 變移하는 것인가. 原子는 原子가 아니고 原子가 아니고 原子가 아니다.
그러면 생리작용은 변하여 이동하는 것인가? 태고로부터 사람이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할 때, 그 태어나고 죽는 사람마다 생리작용이 다른데, 그러면 그 생리작용은 변이하는 것인가? 변이한다면 원자 붕괴의 근본이 되는 사람은 원자가 아니고, 원자 붕괴의 근원이 되는 사람은 원자가 아니고, 또 다시 붕괴의 근원이 되는 그 사람은 원자로 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원자는 모든 종류의 물질에서 동일한 성질을 띠는 것이기 때문이다.
 
放射는 崩壞인가
인간의 몸에서 출발하여 우주로 날아가는 광선을 쫓아가면 과거의 자신을 만날 수도 있고, 다시 젊어질 수도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광선이 사방을 반사되어 달아나는 것이 곧 물질이 붕괴하여 원자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는 말인가. 광선이 우주를 향해 달아나는 것이 곧 인간의 죽음을 의미하는가.
 
사람은 永劫을 살 수 있는 것은 生命은 生도 아니고 命도 아니고 光線인 것이라는 것이다
현대 물리학에 의하면, 인간이 영겁을 살 수 있는 것은, 생명이 사는 것도 아니고, 목숨이 사는 것도 아니고, 광선이라고 한다. 타임머신을 타고 광선보다 빨리 우주로 나아가면 태고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인간이 영겁을 살 수 있는 것이 과연 광선에 있는 것인가.
 
臭覺의 味覺과 味覺의 臭覺
인간이 단순히 원자가 모이고 흩어지는 관점에서 존재를 설명한다면, 취각이 미각이 될 수도 있고, 미각이 취각이 될 수 있다는 논리다. 후각도 물질로 이루어졌고, 후각을 구성하는 물질이 흩어졌다가 다시 미각으로 결합하면 후각이 미각이 된다. 그게 과연 그러한가. 현대 물리학적 이론에 대해서 이상 시인은 상당한 회의를 품은 채 생각하고 있다.
 
(立體에의 絶望에 依한 誕生)  (運動에의 絶望에 依한 誕生) 
동양에서는 인간은 죽어서도 영원히 산다. 훌륭한 시를 쓴 사람은 그가 죽어서도 시 속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 좋은 업적을 남긴 사람은 그가 죽은 후에도 역사 속에서 그 영원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인간을 원자의 구성체로 보는 서양 과학의 사고는, 서양 사람들이 인간을 죽어서도 살 수 있는 존재로 볼 수 없는 절망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들은 인간은 죽어서도 살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절망에서 인간을 쪼개서 원자로 바라본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살아서의 삶이 죽어서의 삶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절망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정신과 문화가 죽어서도 계속 이어진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자, 서양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서도 그 사람에게서 방사된 광선은 계속하여 우주로 날아가고, 그 광선을 따라가면 죽은 사람도 만날 수 있다는 괴상한 논리를 펴는 것이다.
(地球는 빈집일 境遇 封建時代는 눈물이 나리만큼 그리워진다)
현대 물리학에 의하면 지구는 빈집이다. 서양의 현대 물리학에 따라서 인간을 본다면, 지구에 인간이 사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원자의 집합체, 물질의 집합체가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구는 빈집이다. 그렇다면 봉건시대 즉 현대 물리학이 없던 시대인 봉건시대, 인간을 단순한 물질 이상의 존재로 생각했던 봉건시대는 눈물이 날만큼 그리워진다.


 
▣   線에關한覺書 2
 
 
1 + 3
3 + 1
3 + 1   1 + 3
1 + 3   3 + 1
1 + 3   1 + 3
3 + 1   3 + 1
3 + 1
1 + 3
 
 
線上의一點 A
線上의一點 B
線上의一點 C
 
A + B + C = A
A + B + C = B
A + B + C = C
 
이선의교점 A
삼선의교점 B
수선의교점 C
 
3 + 1
1 + 3
1 + 3   3 + 1
3 + 1   1 + 3
3 + 1   3 + 1
1 + 3   1 + 3
1 + 3
3 + 1
 
(太陽光線은, 凸렌즈때문에收斂光線이되어一點에있어서爀爀히빛나고爀爀히불탔다. 太初의僥倖은무엇보다도大氣의層과層이이루는層으로하여금凸렌즈되게하지아니하였던것에있다는것을생각하니樂이된다. 幾何學은凸렌즈와같은불장난은아닐른지. 유우크리트는死亡해버린오늘유크리트의焦點은到處에있어서人文의腦髓를마른풀과같이燒却하는收斂作用을羅列하는것에依하여最大의收斂作用을재촉하는危險을재촉한다. 사람은絶望하라. 사람은誕生하라. 사람은誕生하라. 사람은絶望하라.)

― <朝鮮과 建築> 1931. 10 ―
 
 
 
이 시는 볼록렌즈와 볼록렌즈를 통과하여 한 점에 수렴하는 光線(광선)으로 상징되는 서양의 문명, 유클리드의 기하학으로 대표되는 서양의 수학 등이, 인류의 다양한 사고를 말살시키고 결국 인류를 위험에 빠뜨린다는 생각을 표현한 시다.
이 시의 제목 <선에 관한 각서>는 선 즉 광선에 대해서 깨달은 것을 기록한 글이다. 여기서 선은 볼록렌즈를 통과하는 광선을 의미한다. 그리고 광선은 서양 과학 문명의 상징이다.
 
1 + 3
3 + 1
3 + 1   1 + 3
1 + 3   3 + 1
1 + 3   1 + 3
3 + 1   3 + 1
3 + 1
1 + 3
위 숫자들로 이루어진 이상한 것은 전체적으로 볼록렌즈 모습을 하고 있다. 예전에 세로쓰기 할 때의, 이상의 시집에 나타난 모습하고는 방향이 바뀌었다. 오늘날 우리는 가로쓰기를 한다. 그래서 위 숫자들, 그리고 숫자들로 이루어지는 그림을 가로쓰기 방식으로 적었기 때문에 원래 이상의 시집에 나오는 모습하고는 다소 다르다. 위 그림에서 오른쪽으로 90도 돌리면 윗면이 평평하고 아래고 볼록한 볼록렌즈가 되는데 원래는 그렇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되어 있건 시를 이해하는 데는 전혀 불편을 주지 않아서 이렇게 썼다. 괜찮다.
이 시를 읽어 보면 이 볼록렌즈를 통과한 광선은 한 점으로 수렴된다. 1+3 지점을 통과한 광선이나 3+1 지점을 통과한 광선이나, 1+3 3+1 지점을 통과한 광선이나, 1+3 1+3 지점을 통과한 광선이나 3+1 3+1 지점을 통과한 광선이나, 3+1 지점을 통과한 광선이나 1+3 지점을 통과한 광선이나 모두 한 점에 수렴된다. 볼록렌즈의 초점에 모두 수렴된다.
그러면 이상 시인은 광선이 통과하는 볼록렌즈의 각 지점을 왜 ‘1+3’의 형태로 표현하였을까? 다른 숫자도 많은데 왜 1과 3의 숫자로 표기했을까? 1+3은 4가 되고 4=死(사)이다. 한 점에 수렴되는 광선은 모든 것을 태워 죽인다. 모든 것을 말살한다. 그래서 1과 3의 숫자로 표기했다. 서양문명으로 상징되는 볼록렌즈를 통과해서 한 점에 수렴되는 광선은 모든 인문적 정신을 말살하는 서양 학문의 상징이다.
 
線上의一點 A / 線上의一點 B / 線上의一點 C // A + B + C = A / A + B + C = B / A + B + C = C  // 이선의교점 A / 삼선의교점 B / 수선의교점 C
임의의 광선 하나가 볼록렌즈를 통과한다. 그 임의의 한 선상의 어느 한 점을 A라고 하자. 또 다른 광선의 선상의 임의의 한 점을 B라고 하자. 또 다른 광선의 선상의 임의의 점을 C라고 하자.
A, B, C 세 점을 각각 통과하는 광선을 합해도 결국 A점을 통과한 광선과 같다. 왜냐하면 그 A, B, C 세 점을 각각 통과한 광선은 볼록렌즈를 통과하면서 결국 한 점에 수렴되기 때문이다. A, B, C 세 점을 통과하는 광선을 합해도 결국 B점을 통과하는 광선과 같다. 왜냐하면 그 A, B, C 세 점을 각각 통과하는 광선은 볼록렌즈를 통과하면서 결국 한 점에 수렴되기 때문이다. A, B, C 세 점을 통과하는 각각의 광선을 합해도 결국 C점을 통과하는 광선 하나와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그 A, B, C 세 점을 각각 통과하는 광선은 볼록렌즈를 통과하면서 결국 한 점에 수렴되기 때문이다.
볼록렌즈를 통과하는 두 광선의 교점을 A점이라고 해도 된다. 왜냐하면 두 광선의 교점을 통과한 광선은 A점을 통과하는 광선과 함께 한 점에 수렴되기 때문이다. 볼록렌즈를 통과한 세 광선의 교점을 B점이라고 해도 된다. 왜냐하면 세 광선의 교점을 통과한 광선은 B점을 통과하는 광선과 함께 한 점에 수렴되기 때문이다. 볼록렌즈를 통과하는 여러 광선의 교점을 C점이라고 해도 된다. 왜냐하면 여러 광선의 교점을 통과한 광선은 C점을 통과하는 광선과 함께 한 점에 수렴되기 때문이다.
 
3 + 1
1 + 3
1 + 3   3 + 1
3 + 1   1 + 3
3 + 1   3 + 1
1 + 3   1 + 3
1 + 3
3 + 1
여기의 볼록렌즈는 처음의 볼록렌즈와 유사하다. 그러나 숫자가 조금 다르다. 숫자가 달라도 마찬가지다. 3+1을 통과한 광선이나, 1+3을 통과한 광선이나 어떤 숫자를 통과한 광선도 결국 한 점에 수렴된다. 그것이 볼록렌즈를 만든 서양 문명인 것이고, 그것이 서양 학문의 근본적 사고다. 
 
(太陽光線은, 凸렌즈 때문에 收斂光線이 되어 一點에 있어서 爀爀히 빛나고 爀爀히 불탔다. 太初의 僥倖은 무엇보다도 大氣의 層과 層이 이루는 層으로 하여금 凸렌즈되게 하지 아니하였던 것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樂이 된다)
독자들을 위해서 친절하게도 괄호를 하고 자세히 설명을 했다. 볼록렌즈로 상징되는 서양 문명, 한 점으로 수렴되는 서양 문명이 인간의 삶에서 얼마나 삭막한 문명인지를 독자들이 잘 알아들으라고 괄호를 하고 자세히 설명했다.
태양광선은, 볼록렌즈 때문에 수렴광선이 되어, 한 점에서 혁혁히 빛난다. 아주 밝게 빛난다. 그리고 혁혁히 불탄다. 아주 거세게 불타버린다.
태초의 요행 즉 이 지구가 처음 생겨날 때의 요행은 무엇보다도 대기의 층과 층, 이를테면 대기권 성층권 등이 이루는 층으로 하여 볼록렌즈가 되게 하지 아니하였던 것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즐거움이 된다. 태양으로부터 오는 광선을 대기의 각 층들이 한 점으로 수렴하도록 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것이 볼록렌즈처럼 태양 광선을 한 점으로 모았다면 지구는 불타서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그래서 인류는 지구에서 살게 되었고, 다양하고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하게 된 것이다. 다양한 인문학을 바탕으로 다양한 문화를 이루면서 살아가게 된 것이다.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 다양한 정신적 삶을 누리게 된 것이다.
 
幾何學은 凸렌즈와 같은 불장난은 아닐른지. 유우크리트는 死亡해 버린 오늘 유크리트의 焦點은 到處에 있어서 人文의 腦髓를 마른 풀과 같이 燒却하는 收斂作用을 羅列하는 것에 依하여 最大의 收斂作用을 재촉하는 危險을 재촉한다
기하학은 볼록렌즈와 같은 불장난을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서양의 기하학은 모든 현상을 기하학적 사고로 해결한다. 인류의 모든 삶을 기하학에 수렴되고 그것으로 인간의 삶을 이해하려 한다. 볼록렌즈를 통과한 광선이 한 점에 수렴되면 그 곳에서 혁혁히 불타듯이, 인류의 다양한 삶을 기하학에 수렴시켜 해석하려는 서양문명은 다양한 문명을 태워 없애지 않을지 염려한다.
유클리드는 사망해 버렸다. 그러나 오늘날 유클리드의 초점은 도처에 있다. 원과 초점 이야기가 나오는 기하학으로 모든 현상을 설명하려는 유클리드 기하학은 도처에 남아 있다. 서양 문명을 대표하는 유클리드 기하학은 유클리드 사망 후에도 남아서 도처에서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따라서 인문의 뇌수로 이룩한 인문학의 정수들을 마른 풀과 같이 태우는 수렴 작용을 나열하는 것에 의해, 즉 모든 인문학을 유클리드 기하학 하나로 수렴하여 해결하는 것들에 의해, 더욱 더 수렴 작용을 재촉하는 위험을 점점 더 재촉하고 있다.
 
사람은 絶望하라. 사람은 誕生하라. 사람은 誕生하라. 사람은 絶望하라
따라서 화자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은 볼록렌즈와 유클리드 기하학으로 대변되는 서양 문명에 대한 희망을 버려라. 그리고 새롭게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사람으로 탄생하라. 동양의 학문을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으로 새롭게 탄생하라. 동양 학문을 간절히 그리워하라.



▣   線에關한覺書 3

3   2    1   
•    •    •    1
•    •    •    2
•    •    •    3

1   2    3   
•    •    •    3
•    •    •    2
•    •    •    1
 
∴ nPn = n (n-1) (n-2) …… (n-n+1)
(腦髓는부채와같이圓까지展開되었다. 그리고完全히回轉하였다)

― <朝鮮과 建築> 1931. 10 ―
 
 
제목 <선에 관한 각서>는 선에 대해서 깨달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 선은 광선을 의미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말하는 광선을 말하는 것으로 봐도 된다.
이 시는 서양의 현대 학문의 상징인 기하학, 기하학 중에서도 원을 통하여, 서양의 현대문명이 인간이 이룩한 다양한 가치, 문화, 종교, 인문 등을 어떻게 말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다. 따라서 이 시는 문명비판적인 시, 혹은 서구문명의 한계를 지적한 시라 할 것이다.
3   2    1   
•    •    •    1
•    •    •    2
•    •    •    3
이 숫자와 점들을 기하학적으로 바라보면 부채꼴이다. 원의 중심을 기준으로 가로와 세로로 잘랐을 경우, 이 그림은 원의 오른쪽 위 부분에 해당하는 부채꼴이다. 다만 부채꼴에는 위에서 아래로 1, 2, 3 이라는 숫자가 있고, 오른쪽에서 왼쪽 순서로 1, 2, 3 이라는 숫자가 있다. 그러한 부채꼴이다.
1   2    3   
•    •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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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
이 그림도 앞의 그림과 유사하다. 그러나 앞의 부채꼴과는 다른 부채꼴이다. 이 부채꼴은 앞의 부채꼴에 비해서 숫자가 다르다. 가로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3, 2, 1 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고, 세로로 위에서 아래로 3, 2, 1 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다. 따라서 두 부채꼴은 서로 다르다. 
만약 이것을 단순히 부채꼴로 보지 않고 인류의 다양한 사고, 문화, 역사, 삶, 인문 등으로 해석한다면 두 개의 부채꼴은 서로 다른 사고요, 문화요, 역사요, 삶이요, 인문이다.
∴ nPn = n (n-1) (n-2) …… (n-n+1)
위 그림 외에 또 다른 부채꼴들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위에 있는 두 개의 부채꼴 외에도 다양한 부채꼴이 이 세상에는 더 존재한다. 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서로 다른 부채꼴이 존재할 수 있다. 이 세상에는 nPn = n (n-1) (n-2) …… (n-n+1) 개만큼의 부채꼴이 존재한다. 만약 부채꼴을 우리의 사고와 문화와 역사로 본다면, 이 세상에는 (∴) nPn = n (n-1) (n-2) …… (n-n+1)   개만큼의 사고와 문화와 역사와 삶과 인문 등이 존재한다.
수학에 약한 분을 위해서 복잡한 수식을 설명하겠다. (사실 필자도 수학에 자신이 없어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우리 아들한테 물었다. 아들이 설명해 주어서 이해했다. 모르면 물어볼 수도 있다.) 부채꼴의 호에 있는 숫자들을 보자. 만약 숫자가 n개 있다고 하면 부채꼴의 종류는 nPn 만큼 있는 것이다.  nPn은 n 개의 숫자에서 n 개만큼 뽑아서 이를 나열하는 방법의 수를 나타낸다. n! 만큼 다양한 부채꼴이 존재할 수 있다.  n! 은  n (n-1) (n-2) …… (n-n+1) 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거의 무한에 가까운 서로 다른 부채꼴이 존재하며, 거의 무한에 가까운 서로 다른 사고와 문화와 역사와 삶과 인문 등이 존재한다.
 
(腦髓는 부채와 같이 圓까지 展開되었다. 그리고 完全히 回轉하였다)
그러나 서양의 과학 혹은 수학을 생각해 낸 그들의 뇌수 즉 사고는 부채와 같이 펼쳐져서, 원까지 전개되었다. 그리고 완전히 회전하였다.
서로 다른 숫자가 적힌 다양한 부채꼴을 회전시켜 보라. 그러면 다양한 숫자가 적힌 부채꼴은 각각의 다른 부채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원으로 존재한다. 동일한 모양의 원이 된다. 부채꼴 호에 아무리 다양한 숫자가 적혀도 이를 회전하면 부채꼴의 다양성은 사라지고, 하나의 원만 남는다. 이처럼 다양한 것을 하나의 원리나 법칙으로 설명하려 드는 서양의 학문이나 과학은 인류의 다양한 가치, 사고, 역사, 문화, 인문 등을 모두 말살하고, 이를 하나의 원으로 단순화시킨다. 이것이 서양 학문의 특성이다. 이러한 서양 문명은 결국 인류의 다양한 인문 정신을 말살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사실 서양 과학의 핵심은 귀납추리에 의한 일반화, 추상화에 있다. 다양한 사례를 하나의 원리로 설명하려 드는 것이 서양의 학문이요 문명이다. 이러한 사고는 일견 위대해 보이지만, 개별적인 것들의 다양성을 말살하는 정신을 낳을 우려가 있다. 시인은 서양적 학문과 문명의 이러한 점을 우려하여 이와 같은 시를 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시는 서구문명 혹은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적인 시라 할 것이다.


 
▣   線에關한覺書 4
           (未定稿)
 
 
彈丸이一圓壔를疾走했다 (彈丸이一直線으로疾走했다에있어서의誤謬等의修正)
 
正六雪糖 (角雪糖을稱함)
 
瀑筒의海綿質塡充 (瀑布의文學的表現)

― <朝鮮과 建築> 1931. 10 ―
 
                                                      

제목 <선에 관한 각서>는 광선에 관해서 깨달은 것을 적은 것이다. 광선은 서양의 학문과 과학의 상징이다. 이 시는 서양의 학문과 과학적 사고가 인류의 다양한 정신적 가치들을 말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다.
제목 밑에 미정고(未定稿)라고 적혀 있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원고라는 의미로 보인다. 아니면 원래는 미정고로서 확정되지 않은 원고인데, 이를 정리하여 발표하면서, 미정고라는 말을 지우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시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미정고라는 말은 중요하지 않다.
 
彈丸이 一圓壔를 疾走했다 (彈丸이 一直線으로 疾走했다에 있어서의 誤謬等의 修正)
만약 우리가 서서, 전방을 향하여 총을 한 방 쏘았다고 하자. 우리는 보통 그것을 탄환이 일직선으로 빠르게 달려갔다고 말한다. 이러한 표현을 서양의 현대 과학적 입장에서는 잘못된 표현이라고 한다. 탄환이 일직선으로 날아간 것이 아니고, 탄환이 둥근 지구의 언덕을 따라서 빠르게 달려갔다고 해야 옳다는 것이다. 지구는 둥그니까 탄환도 자연히 둥근 지구의 언덕을 따라서 날아갔다는 것이다.
 
正六雪糖 (角雪糖을 稱함)
지금 화자는 앞에 각설탕, 정육면체의 각설탕을 놓고 생각에 잠긴다. 이 각설탕을 맑은 물이 든 유리컵에 넣었다고 상상해 보자. 컵의 바닥으로 떨어지는 각설탕은 뽀글뽀글 하얀 공기를 뿜어내면서 가라앉게 되고, 마침내 녹아서 설탕물이 된다.
이러한 현상을 놓고 서양의 과학으로는, 각설탕의 입자 사이의 공극에 물이 침투하게 되고, 그 결과 공극에 있던 공기가 밖으로 빠져 나오고, 설탕이 녹은 것이라고 설명할 것이다. 이것이 설탕이 녹는 현상을 설명하는 서양 과학의 발상이다.
 
瀑筒의 海綿質 塡充 (瀑布의 文學的 表現)
그렇다면, 마치 각설탕이 물이 든 컵의 바닥으로 떨어질 때 하얀 물거품을 뿜어내면서 녹는 것처럼, 하얀 물거품을 내면서 떨어지는 저 폭포는, 해면질로 된 지구의 공극을 메우기 위해서 저렇게 하얀 물거품을 뿜으면서 떨어지는 것이란 말인가. 폭포를 보면서도 그러한 생각을 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떨어지는 폭포를 보면서, 서양의 과학적 설명의 차원을 넘어서는, 아름다움과 장엄함과 그리고 거센 기세와 자신을 투신하는 헌신 등의 다양한 문학적 상상, 인문학적 사고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서양 학문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과학이라는 이름을 빌어 각설탕이 컵에서 녹는 방식으로만 설명한다. 따라서 서양의 과학적 사고는 결국 우리의 다양한 인문적 사고를 말살시키는 한계를 가진 것이다.



▣   線에關한覺書 5
 
사람은光線보다도빠르게달아나면사람은光線을보는가. 사람은光線을 본다. 年齡의眞空에있어서두번결혼한다. 세번結婚하는가. 사람은光線보다도빠르게달아나라.
未來로달아나서過去를본다. 過去로달아나서未來를보는가. 未來로달아나는것은過去로달아나는것과同一한것도아니고未來로달아나는것이過去로달아나는것이다. 擴大하는宇宙를憂慮하는자여, 過去에살으라. 光線보다도빠르게未來로달아나라.
사람은다시한번나를맞이한다. 사람은보다젊은나에게적어도相逢한다. 사람은세번나를맞이한다. 사람은젊은나에게적어도相逢한다. 사람은適宜하게기다리라. 그리고파우스트를즐기거라. 메퓌스트는나에게있는것도아니고나이다.
速度를調節하는사람은나를모은다. 無數한나는말(譚)하지아니한다. 無數한過擧를傾聽하는現在를過擧로하는것은不遠間이다. 자꾸反復되는過去. 無數한過去를傾聽하는無數한過去. 現在는오직過去만을印刷하고過去는現在와一致하는것은그것들의複數의境遇에있어서도區別될수없는것이다.
聯想은處女로하라. 過去를現在로알라. 사람은옛것을새것으로아는도다. 健忘이여. 永遠한忘却은忘却을求한다.
到來할나는그때문에無意識中에사람에一致하고사람보다도빠르게나는달아난다. 새로운未來는새로웁게있다. 사람은빠르게달아난다. 사람은光線을드디어先行하고未來에있어서過去를待期한다. 于先사람은하나의나를맞이하라. 사람은全等形에있어서나를죽이라.
사람은全等形의體操의技術을習得하라. 不然이라면사람은過去의나의破片을如何히할것인가.
思考의破片을反芻하라. 不然이라면새로운것은不完全이다.聯想을죽이라. 하나를아는者는셋을아는것을하나를아는것의다음으로하는것을그만두어라. 하나를아는것의다음은하나의것을아는것을하는것을있게하라. 
사람은한꺼번에한번을달아나라. 最大限달아나라. 사람은두번分娩되기前에xx되기전에祖上의祖上의祖上의星雲의星雲의星雲의太初를未來에있어서보는두려움으로하여사람은빠르게달아나는것을留保한다. 사람은달아난다. 빠르게달아나서永遠에살고過去를愛撫하고過去로부터다시그過去에산다. 童心이여. 童心이여. 充足될수야없는永遠의童心이여.

― <朝鮮과 建築> 1931. 10 ―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상정하고 이 시를 읽어 보자. 나의 몸에서 반사되어 우주로 달아나는 광선을, 그 광선보다 빠른 타임머신을 타고 따라간다고 생각하자. 그러면 우리는 과거의 무수한 나를 만날 수 있다. 조금 전의 나도 만날 수 있고, 어제의 나도 만날 수 있고, 작년의 나도 만날 수 있고, 10년 전의 나도 만날 수 있다. 10년 전의 나로부터 반사된 광선은 지금도 우주의 어딘가를 초당 30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달아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상을 전제로 해서 이 시를 읽어 보자. 그러면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처음 한 연만 읽어 보겠다.
사람은 光線보다도 빠르게 달아나면 사람은 光線을 보는가. 사람은 光線을 본다. 年齡의 眞空에 있어서 두 번 결혼한다. 세 번 結婚하는가. 사람은 光線보다도 빠르게 달아나라.
사람의 몸에서 반사된, 우주로 달아나는 광선을 쫓아서 타임머신을 타고 빠르게 따라가면 사람은 그 광선을 보는가. 사람은 광선을 본다. 달아나는 광선보다 빨리 따라가면 볼 수 있다. 연령의 진공에 있어서 즉 나이를 먹지 않는, 따라가서 본 광선에서 우리는 두 번 결혼한다. 한 번은 현실에서 결혼하고, 한 번은 그 광선에서 결혼하는 것을 본다. 세 번 결혼하는가? 현실에서 한 번 결혼하고, 광선에서 한 번 결혼하던 것을 보고, 아니 그 이전의 광선을 본다면, 그 광선이 시간이 지나면서 또 결혼을 할 것이고, 그렇다면 세 번 결혼을 하는가. 그럴 수도 있다. 서양 학문에 의하면 광선을 따라가면 과거의 자신과 만날 수 있고, 또 과거로 돌아가서 젊어질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는 광선보다 빠르게 달아나야 한다. (나머지는 독자들이 읽어 보라.)



▣  線에關한覺書 6

數字의方位學
 
  
數字의力學
 
時間性(通俗思考에依한歷史性)
 
速度와座表와速度
 
+
 
+
 
+
 
+
 
etc
 
사람은靜力學의現像하지아니하는것과同一하는것의永遠한假說이다. 사람은사람의客觀을버리라.
 
主觀의體系의收斂과收斂에依한凹렌즈
 
 第四歲
 
 一千九百三十一年九月十二日生
 
 陽子核으로서의陽子와陽子와의聯想과選擇
 
原子構造로서의一切의運算의硏究
 
方位와構造式과質量으로서의數字의性態性質에依한解答과解答의分類
 
數字를代數的인것으로하는것에서數字를數字的인것으로하는것에서數字를數字인것으로하는것에서數字를數字인것으로하는것에 (1 2 3 4 5 6 7 8 9 0 의疾患의究明과詩的인情緖의棄却處)
 
(數字의 一體의性態  數字의一切의性質  이것들에依한數字의語尾의活用에依한數字의消滅)
 
數式은光線과光線보다도빠르게달아나는사람에依하여運算될것.
 
사람은별 ―― 天體 ―― 별때문에犧牲을아끼는것은無意味하다. 별과별과의引力圈과引力圈과의相殺에依한加速度函數의變化의調査를爲先作成할 것

― <朝鮮과 建築> 1931. 10 ―



제목 <선에 관한 각서>는 광선에 대해서 깨달은 것을 적은 것이다. 여기서 광선은 서양의 과학 문명을 상징이다.
 
數字의 方位學 /
여기에 사용된 ‘’는 일단 방위를 나타내는 기호다. ‘’는 위쪽의 지시하는 방위 기호이며, ‘’는 왼쪽을 지시하는 방위 기호이며, ‘’는 오른쪽을 지시하는 방위 기호이며 ‘’은 아래쪽을 지시하는 방위 기호다.
 
數字의 力學 
이제 ‘’는 숫자를 나타낸다. 따라서 ‘’는 4라는 숫자와 관련된다. ‘’도 4라는 숫자와 관련된다. ‘’도 4라는 숫자와 관련된다.  ‘’도 4라는 숫자와 관련된다.
時間性(通俗思考에 依한 歷史性)
이제 ‘’은 시간성과도 관련이 있다. 시간의 흐름, 통속적으로 우리가 역사라고 하는 시간의 흐름과도 관련이 있는 기호다.
 速度와 座表와 速度 / +/+/+/+/ etc
이제 속도와 좌표와 그리고 속도의 관계 속에서 아래 기호들을 생각해 보자. 화자는 서양의 과학 혹은 수학과 관련된 속도와 좌표와 그리고 속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방위의 역학, 숫자의 역학, 그리고 시간성 즉 우리가 통속적으로 역사성이라고 말하는 그 시간성이 포함된다.
‘+’은 평면 좌표에서 오른쪽(방위의 역학)으로 4(숫자의 역학)만큼 갔다(시간성)가, 다시 왼쪽(방위의 역학)으로 4(숫자의 역학)만큼 간(시간성) 것을 나타냅니다. 서양의 학문에서는 이러한 경우,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으므로, 그것은 결국 아무 방향으로도, 또 얼마만큼도 움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제자리에 있었던 것과 같다고 한다. 오른쪽으로 4만큼 갔다가 다시 왼쪽으로 4만큼 돌아온 것은, 원래 제자리에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래서 4+(-)=0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삶에서는 이러한 경우 분명히 오른쪽으로 4만큼 간 행위가 있었고, 다시 왼쪽으로 4만큼 간 행위가 이루어진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있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서양 학문에서는 좌표 평면에서, 4+(-4)=0이라고 하는 것처럼 오른쪽으로 4만큼 갔다가 다시 왼쪽으로 4만큼 간 행위를 처음부터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던 행위와 동일시한다. 이것이 서양 학문이 우리 인간의 삶에 적용되었을 때의 잘못된 점이다.
나머지 +,+,+도 마찬가지다. 왼쪽으로 4만큼 갔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4만큼 갔다는 ‘+’, 위로 4만큼 갔다가 다시 아래로 4만큼 간 ‘+’, 아래로 4만큼 갔다가 다시 위로 4만큼 간 ‘+’은 모두 처음의 제자리에 돌아오기 때문에 아무런 행위가 일어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삶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제자리에 돌아왔어도 각각 왼쪽으로 4만큼 갔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4만큼 간 행위가 일어났고, 나머지도 각각 마찬가지다.
심지어 서양의 학문에서는 ‘+’과 ‘+’과 ‘+’과 ‘+’을 모두 같은 것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원래의 위치에서 모두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etc 즉 기타 다른 것도 방위의 역학, 숫자의 역학, 그리고 시간성 속에서 서양의 학문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를테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타임머신을 타고 광선보다 빠른 속도로 가면 과거의 나의 모습은 볼 수 있고 젊어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타임머신을 타고 나로부터 출발한 광선을 쫓아간다고 해서 내가 다시 과거로 돌아가 젊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靜力學의 現像하지 아니하는 것과 同一하는 것의 永遠한 假說이다. 사람은 사람의 客觀을 버리라
어떤 사람이 앞으로 4보를 걸어간 다음 뒤로 돌아서서 다시 4보를 걸었다고 하자. 이것을 서양의 학문 방식으로 수식화하면 4+(-4)=0이 된다. 그렇다면 서양식 학문에서는 제자리에 서 있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처럼 서양 학문은, 제자리에 다시 돌아왔다고 해서, 그것을 움직이지 않은 것과 동일시하는 영원한 가설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사람에 대한 객관을 버려야 한다. 사람 즉 인간의 행위는 서양 학문에서 말하는 식으로 객관화할 수 없는 것이다. 앞으로 4보 갔다가 뒤로 돌아서 4보를 간 행위를 객관화하여 서양학문에서는 4+(-4)=0 이니까 결국 제자리에 서 있었던 것과 동일하다고 객관화하여 말한다. 하지만, 인간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러한 객관화가 타당하지 않다. 사람에 있어서는 서양 학문식의 객관을 버려야 한다.
主觀의 體系의 收斂과 收斂에 依한 凹렌즈 /第四歲 /  一千九百 十一年 九月 十二日生 / 陽子核으로서의 陽子와 陽子와의 聯想과 選擇 
주관의 체계의 수렴과 그리고 수렴에 의한 오목렌즈. 주관의 체계는 같은 것을 놓고도 사람마다 서로 다르게 각자의 주관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관적 사고는 하나의 현상을 각자의 주관에 따라 다르게 보고, 또 각각이 본 것을 수용한다는 의미에서 오목렌즈와 같다. 오목렌즈는 다양한 광선을 받아들여 수렴시키지 않는다. 각각의 광선을 받아들이되 이를 수렴시키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광선에 따라 발산시킨다.
예를 들어 4라는 수자를 생각해 보자. 개인의 주관적 사고로 4를 바라보면 그것은 나이가 4살 이라는 의미로도 파악된다. 또 4는 일천구백삼십일 년 구월 십이일을 의미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 날짜에 탄생한 넷째 동생을 떠올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4는 양자 핵으로서의 양자와 그 주위를 돌고 있는 양자의 관계로도 연상할 수 있다. 그리고 4라는 것은 개인의 주관에 의해서 선택되어 다양한 의미를 부여받을 수도 있다.
 
原子構造로서의 一切의 運算의 硏究 / 方位와 構造式과 質量으로서의 數字의 性態 性質에 依한 解答과 解答의 分類
서양 학문에서는, 일체를 원자 구조로서의 운산으로 연구한다. 모든 것을 원자의 집합체로 보고 연구하는 것이다. 또 방위와 그것을 구조식으로 나타내는 것을 연구한다. 질량으로서의 본성의 모습과 본성의 바탕에 대해서 숫자로 그 해답과 해답을 분류한다. 그것이 서양의 현대적 학문이다.
 
數字를 代數的인 것으로 하는 것에서 數字를 數字的인 것으로 하는 것에서 數字를 數字인 것으로 하는 것에서 數字를 數字인 것으로 하는 것에 (1 2 3 4 5 6 7 8 9 0 의 疾患의 究明과 詩的인 情緖의 棄却處)
서양의 학문은 숫자를 대수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즉 숫자를 어떤 것을 대신하여 표시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또 숫자를 숫자적인 것으로 연구한다. 즉 숫자를 숫자적인 것 자체로 연구하고 표시하고 사용한다. 또 숫자를 숫자적인 것으로만 파악한다. 또 숫자를 숫자적인 것으로만 파악한다. 따라서 모든 것을 숫자적인 것으로만 파악한다. 그것은 어떠한 서양 학문 이를테면 수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등 어디에서건 마찬가지다.
따라서 왜 서양 사람들은 1,2,3,4,5,6,7,8,9,0의 숫자로 모든 것을 파악하려 하는지 그 질환의 규명이 필요하다. 또 이러한 사고방식에 의해서 서양 학문은 시적인 정서의 소각처가 된 것이다.
 
(數字의 一體의 性態  數字의 一切의 性質  이것들에 依한 數字의 語尾의 活用에 依한 數字의 消滅)
모든 것을 태도를 숫자로 파악하는 성향, 모든 성질의 바탕을 숫자로 파악하려 하는 것들에 의해서 숫자의 어미 즉 모든 것에 숫자가 꼬리처럼 달리는 것에 의해서, 모든 것은 숫자로 수렴되어 소멸되고 만다.
 
數式은 光線과 光線보다도 빠르게 달아나는 사람에 依하여 運算될 것 
사람의 몸에서 반사된 광선은 초당 삼십만 킬로미터로 나아가고, 만약 사람이 이 광속보다 더 빠른 기계, 이른바 타임머신을 타고 가면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시간도 되돌려서 우리는 다시 젊어질 수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제부터 수식은, 초속 30만 킬로미터로 달아나는 광선과 그 광선보다 빠르게 타임머신을 타고 쫓아가는 사람, 바로 그 ‘사람’에 의해서 연산되어야 한다. 이제부는 숫자가 아닌 인간에 의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운행되고 계산되어야 한다.
 
사람은 별 ―― 天體 ―― 별 때문에 犧牲을 아끼는 것은 無意味하다. 별과 별과의 引力圈과 引力圈과의 相殺에 依한 加速度 函數의 變化의 調査를 爲先 作成할 것
사람이 별 즉 천체 때문에 희생을 아끼는 것은 무의미하다. 서양 과학자들이 별 곧 천체는 무한히 펼쳐진 진공 상태의 우주의 공간에 떠 있는 물질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우리가 하늘에 대고 돼지 소 등을 잡고 이를 제물로 해서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즉 천체를 주관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서양의 과학에 의해서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별―― 천체 ――별’을 잘 관찰해 보라.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서양 사람이 별에 대해서 어떻다는 확신을 가진다고 해서, 우리가 하늘에 소나 돼지를 잡고 제사지내는 것을 미신이라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서양 사람들의 사고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희생을 아끼는 주체’가 우리가 될 수도 있고, 서양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과 ‘――’을 이상 시인이 그냥 심심해서 썼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서양 학문의 관점에서 바라본 별과, 동양적 사고에 의해서 바라본 별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 그 가치를 상쇄시키는지 우선 조사하여야 한다. 숫자로 파악한 서양 학문에서 바라본 별과, 인문학적으로 바라본 동양의 별이 서로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어 인간의 삶을 말살하는지를 우선 조사하여야 한다. 서양의 과학적 사고와 동양의 인문학적 사고가 서로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서로의 가치를 얼마나 상쇄시키는지를 우선 조사하여야 한다.
결국 시인은 서양의 과학이 인간의 삶에 부정적 영향을 가져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   線에關한覺書 7

空氣構造의速度―音波에依한―速度처럼三百三十미터를模倣한다 (光線에比할때참너무도劣等하구나)
光線을즐기거라. 光線을슬퍼하거라. 光線을웃거라. 光線을울거라.
光線이사람이라면사람은거울이다.
光線을가지라.
――
視覺의이름을가지는것은計劃의嚆矢이다. 視覺의이름을發表하라.
□ 나의이름
△ 나의안해의이름 (이미오래된過去에있어서나의 AMOU ―REUSE는 이와같이聰明하도다.)
視覺의이름의通路는설치하라. 그리고그것에다最大의速度를附與하라.
――
하늘은視覺의이름에對하여서만存在를明白히한다 (代表인나는代表인一例를들것)
蒼空, 秋天, 蒼天, 靑天, 長天, 一天, 蒼穹 (大端히갑갑한地方色이나아닐는지) 하늘은視覺의이름을發表했다.
視覺의이름은사람과같이永遠히살아야하는數字的인어떤一點이다. 視覺의이름은運動하지아니하면서運動의코오스를가질뿐이다.
――
視覺의이름은光線을가지는光線을아니가진다. 사람은視覺의이름으로하여光線보다도빠르게달아날필요는없다.
視覺의이름을健忘하라.
視覺의이름을節約하라.
사람은光線보다빠르게달아나는速度를調節하고때때로過去를未來에있어서淘汰하라.

― <朝鮮과 建築> 1931. 10 ―



空氣構造의 速度 ― 音波에 依한 ― 速度처럼 三百三十미터를 模倣한다 (光線에 比할 때 참 너무도 劣等하구나)
인간의 주관적 인식을 중시하는 동양의 학문은 각 개인의 주관적 인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므로, 그것은 마치 대기 속에서 전파되는 음파처럼 대상을 파악하는 속도가 느리다. 반면 객관적 인식을 중시하는 서양의 학문에서는 어떤 대상을 간단히 기호화하여 파악하고 표시한다. 따라서 서양 학문은 마치 우주를 향해 날아가는 광선처럼 대상을 빠르게 인식한다.
예를 들어 보자. 홍길동이가 한 달에 10만원씩 5년 동안 저금을 하였다. 장길산이도 한 달에 10만원식 5년 동안 저금을 하였다. 그리고 성춘향이도 한 달에 10만원씩 5년 동안 저금을 하였다. 홍길동이는 결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저금을 하였고, 장길산이는 자기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 저금을 하였다. 그리고 성춘향이는 아들의 대학 등록금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서 저금을 하였다. 
이 경우 동양적 사고에서는 홍길동이의 저금과 장길산이의 저금과 성춘향이의 저금을 각각 다르게 본다. 결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저축과 집을 마련하기 위한 저축과 자식을 가르치기 위한 저축을 서로 다른 가치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금의 의미가 사람마다 각각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서양의 학문에서는 이것을 하나의 원리로 파악하고자 한다. 홍길동이를 A라고 하고, 장길산이를 B라고 하고, 성춘향이를 C라고 한다면, 이들이 저금한 것을 각각 이렇게 파악한다. A가 저축한 금액은 10 x 12 x 5 = 600만원. B가 저축한 금액은 10 x 12 x 5 = 600만원. C가 저축한 금액은 10 x 12 x 5 = 600만원. 따라서 홍길동이 저축한 것이나 장길산이 저축한 것이나 성춘향이가 저축한 것을 같은 것으로 취급한다. 아니 서양 학문의 관심은 저축한 금액이 같다는 것에만 주로 주목한다.
이처럼 동양의 학문과 서양의 학문은 그 주목의 대상이 다르다. 따라서 ‘공기 구조의 속도’는 동양적 사고방식이다. 그것은 개인의 주관적 인식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일견 서양식으로 파악하는 것보다 더디고 느린 것으로 보인다. 마치 소리가 공기 속에서 초당 340미터 전파되듯이 느리게 파악된다. 
이에 비해서 서양 학문에서는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 하고, 기호화하여 파악하려고 하고, 하나의 원리나 법칙으로 파악하는데 관심이 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의 저축은 '매달 저축액 x 일 년 중의 달의 수 x 저축한 햇수'로 파악한다. 그래서 10만 x 12달 x 5년 = 600만원에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이러한 학문은 마치 빠른 광선처럼 모든 것을 하나의 원리에 적용하여 파악하기 때문에 빠르다. 동양적 학문은 어쩌면 서양 학문에 비해서 너무 열등하고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
光線을 즐기거라. 光線을 슬퍼하거라. 光線을 웃거라. 光線을 울거라.
서양 학문이 편리하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광선을 즐겨라. 그러나 그 서양 학문만이 옳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 서양적 사고에 대해서 슬퍼해야 한다. 광선으로 상징되는 서양 학문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서양 학문을 접하면서 즐거워할 것이다. 그러나 서양 학문을 제대로 알면 그것이 얼마나 인간의 다양성을 말살하는지를 알 것이다. 그럴 경우 우리는 참으로 서양 학문을 슬퍼해야 할지 모른다.
光線이 사람이라면 사람은 거울이다. // 光線을 가지라. // ――
서양 과학에서는, 우주로 달아나는 광선을 타임머신을 타고 따라가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우리가 젊어질 수도 있다고 한다. 그 광선이 진짜 사람이라면 그러면 우리는 거울에 불과하다. 거울에 비친 허상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을 도식화, 기호화, 추상화하여 인식하고자 하는 서양 학문에서 그것이 진실이라면, 인간의 삶은 허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래 서양 학문이 좋은 학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광선과 같은 허상을 가져라. 그리고 그것이 진짜라고 믿어라. ―― 과연 그 광선이 진짜 자신의 모습인가. 서양 학문에서 말하는 것이 과연 진리인가.
視覺의 이름을 가지는 것은 計劃의 嚆矢이다. 視覺의 이름을 發表하라. // □ 나의 이름 // △ 나의 안해의 이름 (이미 오래된 過去에 있어서 나의 AMOUREUSE는 이와 같이 聰明하도다.)
‘시각의 이름’을 가지는 것 어떤 것을 계획하는 맨 처음이다. 서양 학문은 어떤 것을 계획할 때, 그 대상을 기호화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래서 서양 학문에 따르면 먼저 시각의 이름을 발표해야 한다. 자, 지금부터 시각의 이름을 갖자. □은 나의 이름이라 하자. △은 나의 아내의 이름이라 하자. 이미 오래 된 과거에 화자는 이처럼 총명하게 시각의 이름을 발표했었다. 이를테면 <파편의 경치>, <▽의 유희>라는 시에서 이미 시각의 이름을 발표한 적이 있다.
視覺의 이름의 通路는 설치하라. 그리고 그것에다 最大의 速度를 附與하라. // ――
시각의 이름으로 기호화한 것이 두루 미칠 수 있는 길은 마련해 놓아라. 그리고 그것에다 최대의 속도를 부여하라. 가장 간단히 하라는 말이다. 간단한 것은 가장 빠르게 그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 그러나 과연 이러한 서양식 학문이 대상을 제대로 보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하늘은 視覺의 이름에 對하여서만 存在를 明白히 한다 (代表인 나는 代表인 一例를 들 것) // 蒼空, 秋天, 蒼天, 靑天, 長天, 一天, 蒼穹 (大端히 갑갑한 地方色이나 아닐는지) 하늘은 視覺의 이름을 發表했다.
서양 학문에 따르면, 하늘은 시각의 이름에 대해서만 존재를 명백히 한다. 여기서 ‘시각의 이름’은 모든 구체적인 것들을 대표하는, 가장 간단한 기호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사전을 찾아보면 ‘하늘은 지평선이나 수평선 위로 보이는 무한대의 넓은 공간이다’라고 나온다. 서양식 학문에서는 이것만이 가장 객관적으로 하늘의 존재를 명백히 한다고 한다. 여기서 ‘하늘’은 모든 하늘을 대표하는 하늘이다.
그래서 화자도 모든 자신을 대표하는 화자가 하나의 예를 들고자 한다. 하늘 하면, ‘蒼空(창공)’도 있고, 秋天(추천)도 있고, 蒼天(창천)도 있고, 靑天(청천)도 있고, 長天(장천)도 있고, 一天(일천)도 있고, 蒼穹(창궁)도 있다. 이렇게 하늘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것은, 서양식 학문의 관점에서 본다면, 대단히 갑갑한 촌스러운 것이나 아닐는지 모른다. 그래서 드디어 하늘에 대한 시각의 이름을 발표했다. 하늘은 ‘지평선이나 수평선 위로 보이는 무한대의 넓은 공간’이라고. (여기서 보면 서양 학문은 바로 하나의 현상을 다양하게 인식하는 주관적 인식을 배제한다. 따라서 인간의 대상에 대한 주관적으로 인식해온 것들을 말살하는 역할을 한다.)
視覺의 이름은 사람과 같이 永遠히 살아야 하는 數字的인 어떤 一點이다. 視覺의 이름은 運動하지 아니하면서 運動의 코오스를 가질 뿐이다. // ――
시각의 이름은, 사람과 함께 영원히 살아야 하는 것이고, 그것은 수자적인 일점이다. 사람과 함께 영원히 살아야 하므로 항구적으로 변하지 않는 속성을 지니다. 또 숫자적인 어떤 하나의 점과 같이 간단히 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시각의 이름은 운동 즉 이동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그 의미가 변하지 않고, 그 의미가 고정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시각의 이름은 그 자체는 이동하지 않으면서도 이동의 속성을 가진다. 그 자체의 의미는 움직이지 않으나, 그것은 다른 구체적인 것들에 두루 이동하면서 적용되어야 하는 속성을 가진다.
예를 들어, 삼각형의 넓이를 S라 하고, 밑변의 길이를 a라고 하고, 높이를 h라고 한다면, ‘S=ah/2’이다. 이 공식이 바로 시각의 이름이다. 어떤 것을 간단히 기호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속성을 가진다. 그리고 이것은 숫자적 일점과 같이 간단하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속성을 가진다. 그러면서 이것은 다른 구체적인 삼각형들에도 두루 적용된다. 그러므로 이동의 코스를 가진다. 
‘――’ 화자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긴다.
視覺의 이름은 光線을 가지는 光線을 아니 가진다. 사람은 視覺의 이름으로 하여 光線보다도 빠르게 달아날 필요는 없다.
시각의 이름은 광선을 가지는 그 광선을 갖지 아니한다. 광선은 구체적인 사물만이 갖는다. 따라서 시각의 이름은 구체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에 불과하다. 시각의 이름은 광선이 없는 허구적인 것이기에, 사람은 시각의 이름으로 하여 광선보다 빠르게 달아날 필요는 없다. 사람은 그 허구적인 서구 이론으로 인하여 거기에 매달려 살 필요는 없는 것이다.
視覺의 이름을 健忘하라. // 視覺의 이름을 節約하라. // 사람은 光線보다 빠르게 달아나는 速度를 調節하고 때때로 過去를 未來에 있어서 淘汰하라.
시각의 이름을 과감하게 잊어라. 시각의 이름을 절약하라. 사람은 광선보다 빠르게 달아나는 속도를 조절하고, 때때로 과거를 미래에 있어서 필요한 것만 취하고 나머지는 버려라.
여기서 시각의 이름을 과감하게 잊고, 절약하고 버리는 것은 지나치게 시각의 이름에 의존하지 말라는 것이다. 서양의 학문에서는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세계를 가변적인 것으로 본다. 따라서 불변의 영원한 진리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주관적인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대기 속에서 공기를 마시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별을 보면서 꿈을 꾸기도 하고, 달을 보면서 임을 그리워하기도 하는 것이다. 서양식으로 말하면 ‘별’은 빛을 관측할 수 있는 천체 가운데 성운처럼 퍼지는 모양을 가진 천체를 제외한 모든 천체를 의미할 뿐이고, ‘달’은 지구의 위성으로서 햇빛을 반사하여 밤에 밝은 빛을 내고, 표면에 많은 분화구가 있으며 대기는 없는, 공전 주기는 27.32일, 반지름은 1,738km인 것을 가리킬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별을 보면서 미래를 꿈꾸는 대상으로 생각하고, 달을 보면서 멀리 있는 임을 그리워하기도 하는 것이다. 서양식의 별과 달의 개념을 잊거나, 절약하거나, 혹은 불필요한 것을 걸러내고, 거기에서 우리 삶을 적용시켜서 바라볼 때, 인간의 다양한 정신, 감정, 문화는 이룩되는 것이다. 서양적 학문이 만능은 아닌 것이다.
 
 
 

4. 建築 無限 六角面體
 
▣   AU MAGASIN DE NOUVEAUTES

四角形의內部의四角形의內部의四角形의內部의四角形의內部의四角形
四角이난圓運動의四角이난圓運動의四角이난圓.
비누가通過하는血管의비눗내를透視하는사람.
地球를模型으로만들어진地球儀를模型으로만들어진地球.
去勢洋襪. (그女人의이름은워어즈였다.)
貧血緬絲. 당신의얼굴빛깔도참새다리같습네다.
平行四邊形對角線方向을推進하는莫大한重量.
마르세이유의봄을解纜한코티의香水의마지한東洋의가을快晴의空中에鵬遊하는Z伯號. 蛔蟲良藥이라고씌어있다.
屋上庭園. 猿猴를흉내내이고있는마드무아젤.
彎曲된直線을直線으로疾走하는落體公式.
時計文字盤에Ⅻ에내리워진一個의浸水된黃昏.
도아―의內部의도아―의內部의鳥籠의內部의카나리야의內部의嵌殺門戶의內部의인사. 食堂의門깐에方今到達한雌雄과같은朋友가헤어진다.
파랑잉크가엎질러진角雪糖이三輪車에積荷된다.
名啣을짓밟는軍用長靴. 街衢를疾驅하는造花金蓮.
위에서내려오고밑에서올라가고위에서내려오고밑에서올라간사람은밑에서올라가지아니한위에서내려오지아니한밑에서올라가지아니한위에서내려오지아니한사람.
저여자의下半은저남자의上半에恰似하다. (나는哀憐한邂逅에哀憐하는나) 四角이난케―스가걷기始作이다. (소름끼치는일이다.)
라지에―타의近傍에서昇天하는굿빠이.
바깥은雨中. 發光魚類의群集移動.

- <朝鮮과 建築> 1932. 7 -
 
 
AU MAGASIN DE NOUVEAUTES
‘MAGASIN’은 프랑스어로 상점이다. ‘NOUVEAUTES’는 새롭다, 참신하다, 신기하다는 의미다. ‘AU MAGASIN DE NOUVEAUTES’는 신기한 상점 혹은 새로운 상점이라는 정도의 의미다.
화자는 서양 영화를 본 것 같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된다. 내용이 서사적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화자는 서양의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그것을 시로 쓴 것 같다. 구체적으로 서양의 어느 영화인지는 필자로서 확인할 길이 없다.
서양 영화 속의 한 장면이 시인에게 강한 인상을 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에서는 창녀를 사고자 한다면 창녀가 있는 사창가로 가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창녀가 자동차를 타고 손님이 부르는 곳으로 가는가 보다. 이것을 시인은 ‘AU MAGASIN DE NOUVEAUTES’ 즉 신기한 상점이라 말하고 있다.
四角形의 內部의 四角形의 內部의 四角形의 內部의 四角形의 內部의 四角形
창녀는 사각형 건물의 내부에 있는, 사각형으로 된 출입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계단을 타고 이층으로 올라 간 다음, 사각형으로 된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거실에서 다시 사각형으로 된 방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간다. 그 방 안에는 사각형의 침대가 있다.
창녀가 들어간 집은 연립주택 형태의 이층일 것으로 보인다. 커다란 사각형의 건물이 있고,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사각형의 도어가 있고, 도어 안으로 들어가서 이층으로 올라가면 다시 그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는 사각형의 도어가 있고, 그 집을 들어가서 다시 방으로 들어가는 사각형의 도어가 있고, 방으로 들어가면 사각형의 침대가 있다. 창녀는 어느 남자의 주문을 받고 그 사람이 사는 집의 방으로 들어갔고, 그 방안에는 최종적으로 침대가 있는 것이다.
四角이 난 圓運動의 四角이 난 圓運動의 四角이 난 圓
사각형의 침대 위에는 남자가 있다. ‘사각이 난 원운동의 사각이 난 원운동의 사각이 난 원’은 발기되어 끄덕거리는 남자의 남근이다. 발기된 남근은 정면에서 바라보면 둥근 원의 모양이다. 그런데 남근은 원이면서도 사각이 나서, 움직이고자 하지만 굴러가지 못한다. 끄덕끄덕 하는 것은 마치 둥근 원 모양의 남근이 굴러가고자 하지만, 사각이라서 굴러가지 못하고, 들썩거리기만 하는 모습이다.
비누가 通過하는 血管의 비눗내를 透視하는 사람.
이 사람은 창녀를 보자, 자신의 성욕을 해결하기에 적당한 매력적인 여자인지, 그녀의 몸을 투시한다. 옷 속에 감춰진 그녀의 몸을 투시하여, 성욕을 해결하기에 알맞은 여자인지 가늠해 보는 것이다.
비누가 통과하는 혈관은 자신의 몸속에 있는 성욕의 때를 씻고자 하는 욕망의 움직임이다. 옷을 오래 입으면 때가 끼듯이, 성욕도 오래 참으면 때가 낀다. 때가 낀 옷을 빨아서 입으면 기분이 상쾌하듯이, 오래 묵은 성욕도 해결하면 상쾌하다. 따라서 비누가 통과하는 혈관의 비누 냄새를 투시하는 사람은, 창녀를 보면서 자신의 몸속에서 오랫동안 묵은 성욕의 때를 잘 씻어줄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남자다. 이 사람은 성욕의 묵은 때를 씻기 위해서 창녀를 부른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오감도 시제십이호>에도 나온다.
地球를 模型으로 만들어진 地球儀를 模型으로 만들어진 地球
옷 속에 감춰진, 남자에 의해서 투시된, 여자의 엉덩이는 잘 발달되어 있다. 이 남자의 성욕의 때를 잘 씻어 줄 것으로 보인다. ‘지구를 모형으로 만들어진 지구의를 모형으로 만들어진 지구’는 여자의 엉덩이다. 발기된 남근은 마치 지구와 같은 둥근 여자의 엉덩이, 그 엉덩이에 있는 음부에, 마치 지구라도 뚫을 듯이 힘차게 남근을 넣고 절구질하고 싶은 것이다. 음부가 있는 엉덩이와 음부에 삽입된 남근은 마치 북극과 남극을 축으로 돌아가는 지구의와 유사하다. 따라서 남자는 여자의 엉덩이를 보면서 그 엉덩이에 있는 음부에 남근을 넣고, 성교하기에 적당한지 상상하고 있다. 창녀의 엉덩이는 지구처럼 둥글게 잘 발달되어 있다.
去勢洋襪. (그 女人의 이름은 워어즈였다.)
창녀는 양말을 벗어 던진다. 서양식 버선인 양말은 스타킹이라고 해도 좋다. 벗어서 던져놓은 스타킹은 원래 신었을 때의 형상이 거세된 채로 방구석에 아무렇게나 구겨져 놓인다.
그리고 그 여인의 이름은 워어즈였다. ‘워어즈’는 영어로 ‘Wars’다. ‘전쟁(戰爭)’이다. ‘전쟁’은 싸우고 다투는 것이다. 따라서 워어즈는 창녀다. 창녀는 마치 남자와 싸우고 다투듯이, 서로 끓어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며, 씩씩거리는 여자다. 이러한 발상은 <오감도 시제삼호>에도 나온다. <오감도 시제삼호>도 결국 남녀의 성교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시다.
貧血緬絲. 당신의 얼굴 빛깔도 참새다리 같습네다.
여자가 옷을 모두 벗었다. 알몸이 된 창녀의 외모를 묘사하고 있다. 핏기 없는 가는 실처럼 하늘거리는 하얀 몸매. 창녀의 얼굴 빛깔도 핏기가 없는 하얀 얼굴을 하고 있다. 백인 여자다. ‘조족지혈(鳥足之血)’이라는 말이 있다. 새 발의 피라는 말이다. 조그만 새 발에서 피가 나와야 얼마나 나오겠느냐는 말인데, 새 발의 피처럼 창녀의 얼굴에도 핏기가 거의 없다는 말이다. 곧 그 창녀는 백인 여자다.
平行四邊形 對角線 方向을 推進하는 莫大한 重量.
창녀가 침대로 올라와 나란히 눕자 남자가 거대한 중량으로 달려들어 애무한다. 평행사변형의 대각선 방향으로 추진하는 것은 아직은 성교가 이루어지지 않고 애무만 하는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직선을 직선으로 질주하는 것’이 창녀의 음부에 남근을 삽입하고 격렬하게 성교를 하는 것이라면, 평행사변형의 대각선 방향을 추진하는 것은 남자가 창녀의 몸을 애무하는 것이다. 애무를 통해서 다음에 이어질 성교를 예비한다.
마르세이유의 봄을 解纜한 코티의 香水의 마지한 東洋의 가을 快晴의 空中에 鵬遊하는 Z伯號. 蛔蟲良藥이라고 씌어 있다.
남자가 여자를 애무하자, 여자는 마치 ‘제발 그러지 마세요.’ 라고 하는 듯이 몸을 이리저리 뒤튼다. 마치 청춘의 배가 닻을 풀고 물결에 이리저리 흔들리듯이 쾌감에 젖는다. 그녀가 쾌락에 젖어들자, 남자는 마치 코티 향수를 맞이한 것 같은, 동양의 가을 하늘처럼 쾌청한 기분으로, 공중에 붕새처럼 붕 뜬 기분으로, Z기처럼 힘차게 창녀의 음부를 향해 질주할 최고의 남자가 된다. 남자가 창녀를 향해서 성교를 할 준비가 완벽하게 갖추어졌다.
그녀에게는 회충양약이라 씌어 있다. 회충양약은 회충을 구제하기에 좋은 약이다. 성욕을 해결하고자 하는 남자에게 좋은 약이다. 회충과 같이 하얗고 기다랗게, 정액이 잘 뿜어져 나오게 하는 여자다. 이 창녀는 남자의 성욕을 해결해 주는 데는 아주 좋은 재주를 가진 여자다.
屋上 庭園. 猿猴를 흉내내이고 있는 마드무아젤.
옥상 정원은 창녀의 음모가 나 있는 음부다. 남자가 창녀의 음부를 애무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표현은 <운동>에도 나온다. 여자와 입을 맞추는 애무의 첫 단계가 일층이라면, 다음으로 유방을 애무하는 단계가 이층이다. 그리고 다음 음부를 애무하는 단계가 삼층이며, 그 삼층 위에는 옥상이 있다. 옥상은 바로 여자의 음부다. 그 음부에는 마치 옥상의 정원에 자라는 풀처럼 음모가 자라고 있다. 지금 남자가 창녀의 음부를 애무하고 있다.
그러자 창녀는 원숭이 흉내를 내고 있다. 원숭이는 상대의 털을 골라주는 습성이 있다. 창녀가 쾌감에 못 이겨 남자의 머리를 잡고, 좌우로 자신의 몸을 흔들면서 쾌감에 빠져 있는 것을, 마치 원숭이가 상대의 머리털을 고르거나 이를 잡아 주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彎曲된 直線을 直線으로 疾走하는 落體 公式.
만곡된 직선은 쾌감에 젖어 몸을 활처럼 뒤로 젖히고 있는 창녀다. 원래 사람은 직선 모양이다. 그래서 직선이다. 그런데 쾌감에 젖어서 몸을 뒤로 활처럼 젖혔으니, 그 창녀는 만곡된 직선이다. 그 창녀를 직선으로 곧 곧바로 질주하는 낙체 공식이다. 여기서 ‘질주한다’는 말은 힘차게 성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질주하는 행위와 성행위는 유사하다. 숨이 가쁘고, 땀이 나고, 격렬한 행위다. 따라서 질주하는 행위는 힘차게 성행위를 하는 행위다. 낙체는 여자의 몸에 남자의 몸을 떨어뜨리는 행위 곧 성교 행위다. 공식은 틀에 박힌 형식이나 방식을 말한다. 이제 창녀의 몸에 남근을 삽입하고 성행위를 하는 것은 뻔하다.
時計 文字盤에 Ⅻ에 내리워진 一個의 浸水된 黃昏.
성교가 끝나고 축 늘어진 남근을 표현한 것이다. 시계 문자반에서 12에서 아래로 바늘이 일직선으로 내리워지면, 그것은 6시를 의미하고, 오후 6시는 황혼이다. 성교가 끝나고 남근이 아래로 늘어진 모습은, 마치 시계 문자반에서 바늘이 아래를 가리키고 있는 것과 같다. 창녀의 음부에 빠졌다가 결국 죽어서 늘어진 남근은, 한 개의 물에 빠진, 그래서 황혼을 맞이한 남근이다.
도아―의 內部의 도아―의 內部의 鳥籠의 內部의 카나리야의 內部의 嵌殺門戶의 內部의 인사.
남자의 요구에 의해서 성적 욕구를 해결해 준 창녀가 떠나려고 인사를 한다. 그 인사는 ‘도아―의 내부의 도아―의 내부의 조롱의 내부의 카나리야의 내부의 감살문호의 내부의 인사’다. 성욕을 해결하기 위해서 창녀를 부른 남자에게, 창녀는 도아를 열고 들어와서, 또 도와를 열고 남자의 집으로 들어와서, 조롱과 같은 방 안에 있는 남자에게, 카나리아와 같은 아름다운 교성으로, 계곡처럼 움푹 패인 음부로, 남근을 죽여 준, 그 음부의 내부의 인사인 것이다. 즉 성욕을 해결해 준 대가, 화대를 달라는 것이다.
食堂의 門깐에 方今 到達한 雌雄과 같은 朋友가 헤어진다.
서양의 주택 구조는 거실 한편에 식당이 있다. 지금 남자와 창녀는 거실에서 마지막 헤어지는 장면이다. 식당의 문간에는, 방금 도달한, 자웅과 같은, 붕우가 헤어진다. 남자와 여자는 자웅이지만, 그러나 성교를 마친 창녀와 남자는 이제 암컷과 수컷에서, 친구로 돌아와 헤어지고 있다. 방금까지 자웅으로 성교를 했으나, 이제는 친구처럼 헤어지는 것이다. 성욕을 해결한 남자와 성욕의 해결을 돕기 위해서 온 창녀가 이제는 일이 끝났음으로, 그저 친구들이 헤어지듯이 남녀의 감정을 모두 버리고 헤어지는 것이다. 이제는 화대를 놓고 계산만 남은 것이다.
파랑 잉크가 엎질러진 角雪糖이 三輪車에 積荷된다.
파란 잉크가 엎질러진 것처럼 색깔이 파란 달러가, 창녀가 좋아하는, 각설탕과 같이 달콤한 네모진 돈이, 삼륜차인 남자에게 부과되면서 서로 다툰다. 성욕을 해결한 남자는 덜 주려고 한다.  창녀는 많이 받으려고 한다. 서로 돈의 액수를 놓고, 자웅이 아닌 붕우처럼 옥신각신한다. 적하(積荷)는 돈이 포개지고 또 책망한다는 의미다. 남자가 달러를 얼마간 얹어 주자, 여자가 더 달라고 책망하는 것이다. 
여기서 남자는 삼륜차다. 남자의 발기된 남근과 그리고 두 쪽의 고환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세 개의 원이 된다. 이러한 표현은 <수염――>에 ‘삼심원(三心圓)’이라고 나온다. 그리고 남자는 그 남근과 고환으로 창녀에게 성교를 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삼륜차’는 성교를 한 남자다.
名啣을 짓밟는 軍用長靴. 街衢를 疾驅하는 造花金蓮.
헤어지면서 남자는 창녀의 이름을 물었을 것이다. 남자를 상대하는 기교가 좋은, 매력적인 그녀를 다음에 또 찾고 싶은 마음에서다. 군용장화와 같은 긴 부츠에 이름이 재갈 물려서 짓밟혔다. 창녀는 이름을 말하지 않고, 마치 “쳇~ 짠돌이~~” 라고 말하듯이 입을 삐죽 내밀며 굳게 다문 채, 부츠를 신은 발로는 땅을 한 번 “탁” 차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갔을 것이다. 그래서 명함이 군용장화에 짓밟힌 것이다.
그 여자는 온 거리를 빠르게 말을 타고 달리듯이 질주하는 가짜 꽃이다. 그러나 걸음걸이가 예쁜 미인이다. 여기서 조화는 진짜 누구를 사랑해서 그와 사랑을 나누는 여자가 아니다. 금련(金蓮)은 걸음걸이가 예쁜 여자다. 엉덩이를 실룩거리면서 바쁜 듯이 급히 나간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내려오고, 밑에서 올라가고, 위에서 내려오고, 밑에서 올라간 사람은, 밑에서 올라가지 아니한, 위에서 내려오지 아니한, 밑에서 올라가지 아니한, 위에서 내려오지 아니한 사람.
시인이, 이 시에 등장하는 사람이 누가 누군인지 잘 구분하지 못할까 봐서 다시 설명하고 있다.
여자의 몸 위에서, 내려오고 올라가고, 내려오고 올라가고 한 사람, 즉 위에서 열심히 성교한 사람 즉 남자는, 이층의 계단 밑에서 집으로 올라오고 그리고 일을 마치고 계단을 내려간 사람인 창녀가 아니고, 또 밑에서 올라가지 아니한 즉 처음부터 위에 있던 사람이고, 위에서 내려오지 아니한 사람 즉 일이 끝나고도 계단을 내려오지 아니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집 안에 있던 사람은 남자이고, 그 창녀가 남자의 집에 다녀간 것이다. 여자는 이른바 서양의 콜걸(call girl)인 것이다.
저 여자의 下半은 저 남자의 上半에 恰似하다. (나는 哀憐한 邂逅에 哀憐하는 나) 四角이 난 케―스가 걷기 始作이다. (소름끼치는 일이다.)
저 여자의 하반신은 저 남자의 상반신과 흡사하다. 저 여자의 하반신은 엉덩이가 잘 발달한 육감적인 여자라면, 저 남자는 상반신의 근육이 잘 발달된 매력적인 남성이다.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슬프고 가련한 잠시의 만남에, 도리어 화자 자신이 슬프고 가련하다. 화자도 그런 엉덩이가 잘 발달한 여자와 한 번 해후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으나, 그러지 못한 것을 슬퍼하고 가련하게 생각한다.
사각이 난 케이스 즉 상자가 걷기 시작한다. 여자가 자동차를 타고 떠나려고 한다. 자동차는 남자가 사는 이층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사람을 담는 케이스와 같다. 그것은 소름끼치는 일이다. 자동차가, 사람이 소름을 끼칠 때 몸을 부르르 떨듯이, 자동차는 시동을 걸자 부르릉 하고 진동한다.
라지에―타의 近傍에서 昇天하는 굿빠이. / 바깥은 雨中. 發光魚類의 群集移動.
창녀가 자동차의 창문을 열고, 손으로 입을 가져갔다가 다시 하늘을 향해서 뻗으면서, 굿바이라고 인사하면서 떠난다. 자동차의 앞좌석은 라지에타 근처에 있다. 서양식 인사법이다. 키스 대신에 손을 입으로 가져가서, 그 손에 입맞춤 한 다음, 그 손을 이층에 있는 화자에게 날려 보내는 인사를 하고 있다. 손이 승천한 것이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헤드라이트에서 빛을 내는 자동차들이 떼를 지어 달리고 있다. 아니, 물고기처럼 싱싱한 창녀들이, 비가 내리는 도시를, 떼를 지어 이동하는 모습이다. 자동차로 이동하면서 몸을 파는 창녀의 모습. 신기한 상점이다. ‘AU MAGASIN DE NOUVEAUTES’다.



 
▣   出版法

     Ⅰ
虛僞告發이라는罪名이나에게死刑을言渡하였다. 자취를隱匿한蒸氣속에몸을記入하고서나는아스팔트가마를睥睨하였다.
| 直에 關한 典古一則 |
其父攘羊 其子直之
나는아아는것을아알며있었던典故로하여아알지못하고그만둔나에게의執行의中間에서더욱새로운것을아알지아니하면아니되었다.
나는雪白으로曝露된骨片을주워모으기始作하였다.
「筋肉은이따가라도附着할것이니라」
剝落된膏血에對해서나는斷念하지아니하면아니되었다.

    Ⅱ 어느警察探偵의秘密訊問室에있어서
嫌疑者로서檢擧된사나이는地圖의印刷된糞尿를排泄하고다시그것을嚥下한것에對하여警察探偵은아아는바의하나를아니가진다. 發覺當하는일은없는級數性消化作用. 사람들은이것이야말로卽妖術이라말할것이다.
「勿論너는鑛夫이니라」
參考男子의筋肉의斷面은黑曜石과같이光彩나고있다한다.
 
   Ⅲ 號  外 
磁器收縮을開始
原因極히下明하나對內經濟破綻에因한脫獄事件에關聯되는바濃厚하다고보임. 斯界의要人鳩首를모아秘密裡에硏究調査中.
開放된試驗管의열쇠는나의손바닥에全等形의運河를掘鑿하고있다. 未久에濾過된膏血과같은河水가汪洋하게흘러들어왔다.
 
    Ⅳ
落葉이窓戶를滲透하여나의禮服의자개단추를掩護한다.
暗殺
地形明細作業의至今도完了가되지아니한이窮僻의地에不可思議한郵遞交通은벌써施行되었있다. 나는不安을絶望하였다.
日曆의反逆的으로나는方向을紛失하였다. 나의眼睛은冷却된液體를散散으로切斷하고落葉의奔忙을熱心으로幇助하고있지아니하면아니되었다.
(나의猿猴類에의進化)

-<朝鮮과 建築> 1932. 7 -
 
出版法
‘출판법(出版法)’이란 무슨 의미일까? 참으로 어렵다. 이상 시인은 하나의 용어에 다양한 의미와 이미지를 동시에 담아 사용하기에, 어느 하나의 의미만으로 제목이나 시어의 의미가 고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의 지적 사고의 습성은 끊임없이,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하나의 의미만을 찾는데 열중한다. 그래서 의미의 혼란이 온다. 이상의 시어들은 많은 경우 다양한 의미와 이미지를 동시에 담아낸다. 따라서 ‘출판법’도 그렇게 보아야 한다.
‘출판법’은 족보를 새롭게 출판하는 법이며, 그것은 출판된 족보에서 화자가 나오는 법이며, 하수구 속에서 하수구의 뚜껑이라는 판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방법이다. 대체로 이런 의미를 동시에 가지는 단어가 ‘출판법(出版法)’이다.
이상이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양자로 간 줄을 모르고 자라다가, 어린 시절 어느 시점에 자신이 양자로 간 것을 알게 되고, 그로 인해 갈등했던 이상은, 족보를 새롭게 출판하기 위해서, 아니 이미 출판된 족보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 그 족보를 하수구에 버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족보가 하수구를 치우던 어떤 사람에게 발견되고, 중요한 문서라 경찰에 신고를 한 모양이다. 이 때 족보에 적혀 있는 대로 큰아버지가 경찰서로 불려오고, 이상은 경찰서에 따라갔다가, 혹시 자신이 버린 족보를 발견한 것이 아닌가 해서 다시 하수구 속으로 들어갔다가, 하수구 뚜껑을 인부들이 닫는 바람에 갇혀서 죽을 뻔한 일을 기억하고, 그 사건을 시로 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시의 내용은 서사적이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4개의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다.
虛僞告發이라는 罪名이 나에게 死刑을 言渡하였다. 자취를 隱匿한 蒸氣 속에 몸을 記入하고서 나는 아스팔트 가마를 睥睨하였다.
이 문장은 이 시 전체적인 맥락에서 중의적으로 사용되었다. ‘허위고발’의 주체는 누구일까? 화자일까? 아니면 다른 누구일까? 일차적으로는 화자를 양자로 데려간 큰아버지인 것으로 보인다. 큰아버지는 자신을 양자로 데려왔다는 것에 대해서 허위로 화자에게 알렸다. 화자를 자신이 낳은 자식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한 죄명으로 인하여 화자가 자신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자신을 족보에서 지우기로 한 것이다. 족보에서 이름을 지우는 것은 곧 자신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것이다.
화자는 자신의 출생의 자취를 은닉한 증기 속에 몸을 기입하고 나서 아스팔트 가마를 비예한 것이다. 자취를 은닉한 증기는, 증기처럼 감쪽같이 자신의 태어난 자취를 감춘 족보다. 그 족보 속에 어렴풋한 기록되어 들어갔다는 것을 알고 나서 아스팔트 가마 즉 ‘아스팔트의 하수구 뚜껑을 흘겨보았다.’ 하수구에 그 족보를 넣어 없애버리기로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출판법이다. 출판된 족보라는 판에서 나오는 방법이다.
또 이 나중에 이 족보는 하수구를 청소하던 인부에 의해서 발견되고, 큰아버지가 경찰서에 불려간 뒤에도 화자는 모르는 체한다. 따라서 ‘허위고발’의 주체는 화자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이 버렸던 족보가 궁금하여 하수구에 들어가게 되고, 하수구에 갇혀서 죽을 뻔하게 되는데, 결국 경찰서에서의 허위고발이 자신을 죽게 할 뻔한 사건을 두고 ‘허위고발이라는 죄명이 화자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허위고발이라는 죄명이 나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라는 문장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
또 족보의 자취를 감춘 하수구 속으로 들어가 갇히게 된 화자는 하수구를 나오기 위해서 하수구 속에서 하수구 뚜껑을 흘겨보게 된다. 따라서 ‘자취를 은닉한 증기 속에 몸을 기입하고서 나는 아스팔트 가마를 비예하였다.’라는 문장도 중의적 의미를 갖는다.

| 直에 關한 典古一則 | / 其父攘羊 其子直之
우선 이 글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도 문제가 된다. ‘일직에 관한 전고 일 즉 일’로 읽어야 할지, 아니면 ‘|직에 관한 전고 일 즉|’으로 읽어야 할지 애매하다. 세로쓰기에서 양쪽의 ‘|’을 한일자로 읽어야 할지, 아니면 괄호로 읽어야 할지 분간하기 어렵다. 한일자(一)와, 괄호 개념의 한일자(―) 형태가, 고딕체 글씨에서는 구분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앞뒤의 맥락과 의미로 봐서는 괄호로 읽는 것이 좋을 듯하다.
따라서 ‘직에 관한 전고 일 즉’으로 읽겠다. ‘직’에 관한, 책보다 오래된 하나는 곧 ‘기부양양(其父攘羊) 기자직지(其子直之)’다. 그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그 아들이 이를 바로잡았다. 큰아버지가 화자를 화자 몰래 양자로 삼자, 이를 화자가 몰래 바로잡는다. 그래서 화자는 족보를 큰아버지 몰래 하수구에 넣었다.
나는 아아는 것을 아알며 있었던 典故로 하여 아알지 못하고 그만 둔 나에게의 執行의 中間에서 더욱 새로운 것을 아알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
화자는 자신이 돈을 주고 사온 양자라는 것을 알며, 논어에 그 아비가 무엇을 잘못하였더라도 그 아들이 숨겨야 한다는 공자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모르는 체해 온 화자에게, 이번에 족보를 버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이를 집행하는 중간에, 더욱 새로운 사실을 알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 (여기서 화자는 새로운 것을 알게 된 것에 대해서 흥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말을 더듬고 있다.)
나는 雪白으로 曝露된 骨片을 주워모으기 始作하였다. /「筋肉은 이따가라도 附着할 것이니라」/ 剝落된 膏血에 對해서 나는 斷念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
화자는 흰 눈처럼 환하게 드러난 조상의 계보의 줄기를 주워 모으기 시작하였다. 골격에 붙는 살은 이따가라도 붙여볼 것이다. 족보에서 벗겨져 떨어진, 대신 돈을 받고 살이 찐 핏줄에 대해서는 화자는 단념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 자신을 양자로 넘긴 친아버지의 핏줄에는 자신의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Ⅱ 어느 警察 探偵의 秘密 訊問室에 있어서
화자가 하수구에 버린 족보가 하수구를 청소하던 인부에 의해서 발견되어 경찰서에 신고했다. 그 족보가 하수구에 버려진 것과 관련하여 경찰관이 조사한다.
嫌疑者로서 檢擧된 사나이는 地圖의 印刷된 糞尿를 排泄하고 다시 그것을 嚥下한 것에 對하여 警察探偵은 아아는 바의 하나를 아니 가진다. / 發覺當하는 일은 없는 級數性 消化 作用. 사람들은 이것이야말로 卽妖術이라 말할 것이다.
족보를 유기한 것으로 의심되어 경찰서로 불려온 큰아버지는, 족보의 인쇄된 친아버지의 아들로서의 화자를 씻어내고, 다시 그것을 삼켜서 자기의 아들로 만든 것에 대해서, 경찰 조사관은 아는 바의 하나를 아니 가진다. 경찰 조사관은 버려진 족보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으나,  단 하나 화자가 혐의자의 양자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족보에는 화자가 혐의자의 아들로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자가 범인일 것이라는 것은 추호도 의심하지 못한다. ‘아아는’은 말을 더듬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화자가 경찰서에서 마음을 졸이면서 조사가 진행되는 것을 예의 주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찰 조사관이 화자가 양자로 들어온 사실을 모른다는 것은, 바로 화자가 큰아버지의 아래 층계에 기록됨으로써 족보를 유기한 범인으로 발각당하는 일이 없는, 일종의 급수성 소화 작용이다. 사람들은 이것이야말로 ‘즉요술’이라고 말할 것이다.
「勿論 너는 鑛夫이니라」/ 參考 男子의 筋肉의 斷面은 黑曜石과 같이 光彩나고 있다 한다.
화자는  ‘물론 너는 광부이니라.’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하수구에서 족보를 발견한 인부를 두고 이르는 말 같다. 참고 남자 즉 족보를 발견한 남자의 근육의 단면 즉 근육을 자른 면 한쪽이 마치 흑요석처럼 검게 광채가 나고 있었다고 한다. 참고 남자의 근육에서 하수구의 흙이 묻은 부분과 묻지 않은 부분이 마치 무엇으로 자른 듯이 보이고, 흙이 묻은 부분이 검게 빛났다는 말이다. 화자가 하수구에 아무도 모르게 유기한 족보를 인부가 발견한 것을 두고, 그 인부를 마치 지하에 있는 흑요석을 캐낸 광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수구의 흙은 흑요석처럼 검고, 물기가 있는 하수구의 흙이 발이나 손에 묻으면 그 묻은 부분이 번들번들하게 광채가 난다.

Ⅲ 號外 / 磁器 收縮을 開始
‘호외(號外)’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 임시로 발행하는 신문이나 잡지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러한 의미가 아니다. 유기된 족보 사건으로 인해서 경찰서에 ‘불려온 사람 이외의 사람’이라는 의미다. 어린 화자는 불려온 자가 아니다. 혐의자로 불려온 것은 큰아버지요, 참고인은 유기된 족보를 발견한 하수구를 청소하던 인부다. 따라서 불려온 사람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화자다. 화자가 바로 ‘호외(號外)’다.
자기 수축을 개시했다. 종이 위에 철가루가 있고 종이 아래에 자석을 가져다 댔을 경우, 철가루들이 자석을 중심으로 방사선 모양으로 모이듯이, 여러 조사관들이 둥그렇게 모여 서로의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시작했다.
原因 極히 下明하나 對內 經濟 破綻에 因한 脫獄事件에 關聯되는 바 濃厚하다고 보임. 斯界의 要人 鳩首를 모아 秘密裡에 硏究 調査中.
족보를 유기한 원인은 극히 밝힐 수 없으나, 가문의 경제를 파탄내고 이로 인해서 족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건과 관련이 깊다고 보임. 이 분야의 요인들이 모여, 비둘기가 머리를 맞대고 모이를 쪼듯, 머리를 맞대고 비밀리에 연구 조사중임.
開放된 試驗管의 열쇠는 나의 손바닥에 全等形의 運河를 掘鑿하고 있다. 未久에 濾過된 膏血과 같은 河水가 汪洋하게 흘러 들어왔다.
경찰서의 조사관들이 머리를 맞대고 연구 조사에 몰두하는 사이, 화자는 개방된 시험관 즉 시험관처럼 생긴 수직의 하수구 뚜껑 열쇠가 개방되어 있어서, 화자는 손바닥을 짚고 전등형 운하를 굴착하고 있었다. 전신으로 하수구 속을 들어가고 있었다. 자신이 유기한 족보를 확인하기 위해서 간 것이다. 머지않아 여과된 기름과 피와 같은 물이 강물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흘러 들어왔다.
 Ⅳ 落葉이 窓戶를 滲透하여 나의 禮服의 자개단추를 掩護한다.
낙엽이 하수구의 창호처럼 구멍이 뚫린 곳에 빨려 들어와 화자의 예복의 자개단추를 가린다. 그래서 인부들은 그 안에 화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하수구 뚜껑을 닫는다. 하수구 안이 깜깜해진다.

暗殺
깜깜한 하수구 안에 갇힌 화자, 어두운 곳에서 죽임을 당한다. 이 시의 맨 앞에 나오는 ‘허위고발이라는 죄명이 드디어 화자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있다.’
地形 明細 作業의 至今도 完了가 되지 아니한 이 窮僻의 地에 不可思議한 郵遞交通은 벌써 施行 되었있다. 나는 不安을 絶望하였다.
공사가 끝나고 지형을 자세하게 정리하는 작업이 끝나지 않은 지금, 화자는 궁벽한 하수구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누구와 논의할 사람조차 없는 가운데, 하수도 뚜껑을 두드려 자신의 의사를 알리고자 한다. 그러나 화자는 불안을 절망하고 말았다. 불안하게 생각하면서 어떻게든 하수구 밖으로 나가려던 희망을 포기했다.
日曆의 反逆的으로 나는 方向을 紛失하였다. 나의 眼睛은 冷却된 液體를 散散으로 切斷하고 落葉의 奔忙을 熱心으로 幇助하고 있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 / (나의 猿猴類에의 進化)
일력을 돌이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서 화자는 방향을 분실하였다. 하수구에 들어와서 며칠이 흘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화자의 눈동자는 냉각된 액체를 이리저리 흩으면서 단절하였다. 하수구 구멍에서 화자의 눈동자로 떨어지는 차가운 물에 눈을 껌벅거렸다. 낙엽이 바쁘게 달아나는 것을, 화자도 낙엽의 패거리가 되어, 열심히 돕지 아나하면 아니 되었다. 하수구 뚜껑을 가로막는 낙엽을 열심히 치우면서 누군가 나타나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화자는 하수구라는 우리에 갇혀서, 마치 우리를 탈출하고자 하는 원숭이 종류로 진화한 것이다.



▣   且8氏의出發

龜裂이生긴莊稼泥濘의地에한대의棍棒을꽂음.
한대는한대대로커짐.
樹木이盛함.
    以上꽂는것과盛하는것과의圓滿한融合을가리킴.
沙漠에盛한한대의珊瑚나무곁에서돛과같은사람이산葬을當하는일을當하는일은없고 심심하게산葬하는것에依하여自殺한다.
滿月은飛行機보다新鮮하게空氣속을推進하는것의新鮮이란珊瑚나무의陰鬱한性質을더以上으로增大하는것의以前의것이다.
 
輪不輾地  展開된地球儀를앞에두고서의設問一題.
 
棍棒은사람에게地面을떠나는아크로바티를가리키는데사람은解得하는것은不可能인가.
 
地球를掘鑿하라
 
 同時에
 
生理作用이가져오는常識을抛棄하라
 
熱心으로疾走하고 또 熱心으로疾走하고 또 熱心으로疾走하고 또 熱心으로疾走하는 사람은 熱心으로疾走하는 일들을停止한다.
沙漠보다도靜謐한絶望은사람을불러세우는無表情한表情의無智한한대의珊瑚나무의사람의脖頸의背方인前方에相對하는自發的인恐懼로부터이지만사람의絶望은靜謐한것을維持하는性格이다.
 
地球를掘鑿하라
 
 同時에
 
사람의宿命的發狂은棍棒을내어미는것이어라.
 
*事實且8氏는自發的으로發狂하였다. 그리하여어느덧且8氏의溫室에는隱花植物이꽃을피워가지고있었다. 눈물에젖은感光紙가太陽에마주쳐서는희스무레하게光을내었다.

― <朝鮮과 建築> 1932. 7 ―
 

且8氏의 出發
부부가 아이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은 고상하지만, 그 아이를 낳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과정은 결코 고상한 것이 아니다. 부부가 성교를 하는 것은, 처음에는 아이를 갖겠다는 고상한 뜻으로 시작했다 하더라도, 부부가 서로 성적 쾌감을 즐기다 보면 아이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가정을 이룬 부부가 낳는 아이는 남근과 고환의 씨앗인 ‘且8氏’가 되는 것이다.
龜裂이 生긴 莊稼泥濘의 地에 한대의 棍棒을 꽂음. / 한대는 한 대대로 커짐. / 樹木이 盛함. / 以上 꽂는 것과 盛하는 것과의 圓滿한 融合을 가리킴.
‘균열이 생긴 장가니녕의 지’는 찢어진, 씩씩하게 심는, 진창이라는 의미다. 여성의 음부를 묘사한 것이다. 여성의 음부에는 발기되어 딱딱해진 한대와 같고, 곤봉과 같은 남근을 꽂는다. 그리고 남근은 남근대로 커진다. 남근이 음부에 담긴다. 이상 꽂는 것과 담긴다는 것과의 원만한 융합을 가리킨다. 즉 남근과 여성의 음부가 원만하게 하나가 된다.
沙漠에 盛한 한대의 珊瑚나무 곁에서 돛과 같은 사람이 산葬을 當하는 일을 當하는 일은 없고 심심하게 산葬하는 것에 依하여 自殺한다.
사막은 물이 없다. 사막은 식물이 자라지 않고 따라서 꽃도 피지 않는 공간이다. 아직 성적으로 흥분하지 않은 상태의 여성의 음부에는 물이 없고, 임신하지 않은 상태의 여성은 꽃이 자라지 않는 사막과 같다. 한대는 남성의 발기된 남근이다. 산호나무는 발기되어 붉은 색을 띠고 있는 남근이다. 돛은 배의 중심에 돛대가 꽂혀 있고, 돛대에는 커다란 돛이 달려 있다. 따라서 여성이 배라면 남근은 돛대에 해당하며, 남성의 몸은 돛에 해당한다.
남근이 산채로 매장을 당하는 일을 당하는 일은 없다. 남근이 음부에 살아있어 발기된 채로 죽은 듯이 있는 일은 없다. 발기된 남근을 음부 깊숙이 넣고 그리고 아이를 잉태하겠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한가하게 즐기다 보면, 남근은 사정을 하고 죽는 것이다.
滿月은 飛行機보다 新鮮하게 空氣 속을 推進하는 것의 新鮮이란 珊瑚나무의 陰鬱한 性質을 더 以上으로 增大하는 것의 以前의 것이다.
만월(滿月)은 보름달이다. 여성이 임신을 하여 배가 둥그렇게 부른 상태를 암유한다. 아이를 갖겠다고 남근을 여성의 음부에 담으면, 그 다음부터는 만월 즉 임신을 하겠다는 생각은 비행기보다 신선하게 공기 속을 추진한다. 임신에 대한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임신을 하겠다는 생각은, 산호나무 즉 남근의 음울한 성질 즉 남근의 줄어드는 성질을 더 이상으로 증대하는 것 이전의 것이다. 여성에 삽입하고 나면, 아이를 낳아야겠다는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남근을 증대시키고자 하는 성적 욕망만 남는다.
輪不輾地  展開된 地球儀를 앞에 두고서의 設問一題.
바퀴는 땅에서 오른쪽으로 구르지 않는다. 여기서 바퀴는 둥그런 수레바퀴와 같은 여성의 엉덩이를 암유한다. ‘땅에서’ 오른쪽으로 구르지 않는다는 것은, 땅에서 떨어져서 오른쪽으로 구른다는 의미다. 즉 여성이 엉덩이를 들고 있고, 남성이 이를 향한 모습이다. 뒤에서 성교하는 자세다. 
‘윤부전지’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까 봐서 화자는 다음에 설명하고 있다. ‘윤부전지’라는 말은 화자의 눈앞에 펼쳐진 지구의를 앞에 두고서 설문하여 정한 하나의 제목이다. 지구의는 여성의 둥근 엉덩이와, 그 엉덩이의 중심에 남근이 꽂힌 모습과 같다. 여성의 뒤쪽에서 남성이 성교하는 자세다.
棍棒은 사람에게 地面을 떠나는 아크로바티를 가리키는데 사람은 解得하는 것은 不可能인가.
화자의 남근은 사람에게, 지면을 떠나는 아크로바티 즉 지면에서 떨어져 허공에 있는, 그래서 곡예처럼 삽입하여야 하는 음부를 가리키는데, 사람은 해득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사람은 해득하는 것은 불가능인가’라는 말은 스스로 깨우쳐 잘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뜻이다. 잘 삽입이 되지 않는 상태다.
地球를 掘鑿하라 // 同時에 // 生理作用이 가져오는 常識을 抛棄하라
지구에 구멍을 뚫어라. 지구는 지구의를 닮은 여성의 둥그런 엉덩이를 의미하며, 굴착하는 행위는 힘차게 남근을 여성의 음부를 향하여, 마치 지구를 뚫듯이 힘차게 내리 꽂는 행위다.
동시에 생리 작용이 가져오는 상식을 포기해야 한다. 남녀가 교접을 하면 반드시 사정을 해야 한다는 상식을 포기하라는 말이다. 사정하지 말고 참으라는 말이다. 사정을 억제하고 참을 때 여자를 만족시킬 수 있다.
熱心으로 疾走하고 또 熱心으로 疾走하고 또 熱心으로 疾走하고 또 熱心으로 疾走하는 사람은 熱心으로 疾走하는 일들을 停止한다.
열심히 질주하여 열심히 성교에 몰두한다. 질주하면 숨이 차고 땀이 나다. 성교를 열심히 하면 숨이 차고 땀이 난다. 그래서 성교는 질주하는 것과 같다. 열심히 질주하고, 열심히 질주하고 또 열심히 질주하고 또 열심히 질주하는 사람은 열심히 질주하는 것을 정지한다. 열심히 성교를 하면서 사정하는 것을 멈춘다. 사정을 억제할수록 그 사람은 열심히 성교를 하는 사람이다. 사정을 향하여 질주하는 사람은 열심히 성교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沙漠보다도 靜謐한 絶望은 사람을 불러세우는 無表情한 表情의 無智한 한대의 珊瑚나무의 사람의 脖頸의 背方인 前方에 相對하는 自發的인 恐懼로부터이지만 사람의 絶望은 靜謐한 것을 維持하는 性格이다.
사막은 물이 없다. 물이 나오지 않는다. 여자가 만족하지 않는 상황이다. 그런데 그러한 것보다도 정밀한 절망 즉 성적 교감의 소리를 내지 않는 데서 오는 절망은, 사람을 불러 세우는 무표정한 표정이다. 사람을 불러 세운다는 것은 질주하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였으나 여자가 교성으로 반응하지 않음으로써 성적 욕망이 사그라지는 것이다.
남근이 줄어드는 것은 첫째, 무지한 한대 즉 성적 기교에서 지혜롭지 못한 남근에서 기인하고  둘째, 산호처럼 붉은 남근을 가진 남자가 등 쪽에서 전방을 향하여 상대하는 자발적 두려움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러나 열심히 노력하지만 절망감을 느끼는 것은, 성적 교감의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을 그대로 지켜가는 아내의 성격에서 비롯된다.
地球를 掘鑿하라 // 同時에 // 사람의 宿命的 發狂은 棍棒을 내어미는 것이어라.
지구를 뚫어라. 지구의와 같은 엉덩이를 마치 지구를 굴착하듯이 힘차게 뚫어라. 동시에 사람의 숙명적 발광 즉 성적으로 흥분되어 숙명적으로 미쳐서 날뛰는 것은 곤봉 즉 발기된 딱딱한 남근을 여성 쪽을 향하여 힘차게 내어 미는 데에 있다. 마지막 힘차게 남근을 내어 밀었을 때, 아무리 아내가 고요함을 유지하는 성격이라 하더라도 숙명적으로 발광하게 되어 있다.
* 事實 且8氏는 自發的으로 發狂하였다. 그리하여 어느덧 且8氏의 溫室에는 隱花植物이 꽃을 피워 가지고 있었다. 눈물에 젖은 感光紙가 太陽에 마주쳐서는 희스무레하게 光을 내었다.
사실 남근과 고환은 스스로 발광하였다. 아이를 만들어 자손을 번식한다는 무슨 고상한 뜻에 의해서 발광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 욕망에 의해서 스스로 발광한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덧 남근의 온실 즉 남근의 씨앗을 키우는  따뜻한 여성의 음부에는, 마치 포자로 번식하는 은화식물처럼 정자로 번식하는 생명이, 꽃을 피워가지고 있었다. 즉 어린 생명이 잉태하여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눈물에 젖은 감광지가 태양에 마주쳐서는 희스무레하게 빛을 내었다. 감광지는 사진의 감광지다. 빛을 받으면 사진 속의 형상이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햇빛 속에서 아이의 잉태를 알게 해주는, 불러오는 여인의 배가 감광지다. 배가 점점 불러옴에 따라서 임신 여부를 알 수 있다. ‘눈물에 젖은 감광지’는 쾌락으로 땀에 젖은 여인의 배라는 의미로 쓰였다. 성적 쾌락으로 땀에 젖어 아이를 잉태한 여인의 불러오는 배가, 햇빛이 비추면 약간 뿌옇게 빛을 내며, 희미하게 아이가 잉태하였음을 알게 해 준다.



▣   대낮

   ―― 어느 ESQUISSE ――

ELEVATER FOR AMERICA
         ○
세마리의닭은蛇紋石의層階이다. 룸펜과毛布
         ○
삘딩이吐해내는新聞配達夫의무리. 都市計劃의暗示
         ○
둘쨋번의正午싸이렌
         ○
비누거품에씻기어가지고있는닭. 개아미집에모여서콩크리―트를먹고 있다.
         ○
男子를搬揶하는石頭
         ○
男子는石頭를白丁을싫어하드키싫어한다.
         ○
얼룩고양이와같은꼴을하고서 太陽群의틈사구니를쏘다니는詩人.
꼭끼오――.
瞬間 磁器와같은太陽이다시또한個솟아올랐다.

― <朝鮮과 建築> 1932. 7 ―


이 시는 1930년대 초반, 조선의 젊은이 이상이 아메리카인의 생활을 간단히 스케치한 내용이다. 이상 시인이 아메리카에 간 것 같지는 않다. 서양식 교육을 받고,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근무했던 적이 있는 이상은, 아메리카에서 들어온 영화 혹은 잡지 등을 통하여 그들의 삶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자. 1930년대 초반의 조선의 젊은이가 아메리카인의 생활을 알게 되었다면,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참으로 신기한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당시 조선은 농경 사회였다. 농경 사회에서 사람들은 정착하여 살아간다. 아침에 해가 뜨면 들에 나가 일을 하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잔다. 새벽부터 그렇게 바쁠 것도 없고, 돈을 벌기 위해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닐 필요도 없다. 봄에 곡식의 씨앗을 땅에 뿌리면 가을에 가서 수확하는 것이 농경 사회의 생활이니, 그렇게 바쁠 것이 없다. 한가하다.
그런데 아메리카인의 생활, 산업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 아메리카인의 생활은, 농경 사회에 사는 이상 시인으로서는 제법 신기했을 것이다. 그들은 에디슨이 전등을 발명한 이래, 꼭두새벽부터 전등불을 켜놓고 바쁘게 살아간다. 새벽부터 신문이 배달되고, 자명종이 울리면 일어나서, 세수하고 밥 먹고, 차를 타고 회사에 출근한다. 출근하는 동안에도 그날 할 일에 대해서 계획을 세우고 메모를 한다. 회사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해는 떠오른다. 
대낮 /  ―― 어느 ESQUISSE ――
제목 ‘대낮’은 전등불로 인하여 환하게 밝은, 그래서 사람들이 바쁘게 활동을 하는, 아직 날이 새지 않은 새벽이다. 전등불이 인공 태양이라면, 깜깜한 새벽은 인공 태양으로 인하여 어둠이 밀려가고 마치 대낮처럼 환하게 된다. 아메리카인은 깜깜한 새벽부터 돌아다닌다.
부제는 ‘어느 ESQUISSE’는 어느 스케치라는 말이다. 아메리카인의 일상 중에서 어느 한 때의 풍경을, 마치 스케치하듯이 시로 표현했다. 시의 본문에는 ‘○’을 중심으로 입곱 개로 나뉘어 있는데, 아메리카인의 생활 중에서 어느 장면, 장면들을 간단히 그린 것이다.
ELEVATER FOR AMERICA
아메리카인을 위한 엘리베이터다. 엘리베이터는 높은 건물을 올라가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다. 높은 건물에는 엘리베이터 이외에 계단이라는 것도 있다. 계단으로도 건물을 올라갈 수 있는데, 산업화된 사회 아메리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왜 엘리베이터를 고안했을까? 빨리 올라가기 위해서다. 따라서 엘리베이터는 바쁜 아메리카인을 위한 것이다.
세 마리의 닭은 蛇紋石의 層階이다. 룸펜과 毛布
세 마리의 닭은 무엇일까? 닭은 날이 밝았음을 알리는 새다. 그렇다면 날이 밝았음을 알리는, 닭과 같은 세 가지는 무엇이 있을까? 물론 이 시 전체를 읽어봐야 추리가 가능하다. 미리 말하면, 실제의 닭과, 자명종 시계와, 그리고 새벽부터 움직이는 산업화된 사회 속의 사람들이다. 
닭이 울면 날이 샌다. 아니 날이 샐 때 닭은 운다. 닭이 울면 우리는 날이 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날이 샜으니 일어나라고 알리는 것에는 자명종도 있다. 그런데 닭도 없고, 자명종도 없는 사람은 어떻게 날이 샌 것을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소리를 듣거나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 날이 샜음을 알 수 있다. 잠을 자고 있는데 밖에서 많은 자동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던가, 많은 사람들이 활동하면서 두런두런 소리를 낼 때, 우리는 잠자리에서도 날이 샜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세 마리의 닭은 ‘사문석의 층계’와 같다. 층계는 똬리를 튼 뱀처럼 되어 있다. 밑에서부터 빙글빙글 돌면서 위로 올라간다. 그 층계를 ‘올라가는 것과 같은 것’이 세 마리의 닭이다. 우리가 층계를 통하여 한 층 한 층 올라가듯이, 날이 새는 것도 세 마리의 닭이 차례로 울어야 한다. 신문배달부가 움직이고 ―> 자명종이 울리고 ―> (그리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 마지막으로 실제 닭이 울어야 날이 새고 태양이 떠오른다. 그래서 아메리카에서는 세 마리의 닭이 울어야 날이 샌다. 아니 날이 새기도 전에 아메리카인들은 벌써 바삐 활동한다.
룸펜과 毛布
룸펜은 부랑자다. 부랑자는 여기저기 떠돌면서 먹이를 찾아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랑자다. 부랑자는 거지와 유사하다. 그래서 그들은 모포를 덮고 잔다. 조선인 이상은 요를 깔고 이불을 덮고 잔다면, 부랑자와 같은 아메리카인은 거지처럼 담요를 깔고 덮고 잔다.
산업화 사회에서 살고 있는 아메리카인의 생활은 농경 사회 조선에서 살았던 이상이 보기에 이상했을 것이다. 여기저기 도시를 떠돌면서 먹이를 찾아 살아가는 것도 그렇고, 조선에서는 거지들이 애용하는 모포를 일상으로 깔고 덮고 자는 것도 신기하게 보였을 것이다. 하기야 원래 유목민의 후예인 아메리카인은 본질적으로 떠돌이, 마치 거지처럼 여기저기 떠돌면서 살아가는 부랑자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동하면서 덮고 자기에 편리한 모포 문화가 발달하였다.
그러나 농경 사회 조선 사람들은 먼 조상 때부터 농토를 중심으로 정착 생활을 해 왔다. 그래서 솜을 둔 이불과 요가 침구다. 솜을 둔 이불과 요를 들고 떠돌 수는 없다.
삘딩이 吐해 내는 新聞配達夫의 무리. 都市計劃의 暗示
날이 새기도 전부터 아메리카인은 마치 날이 샌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한다. 맨 처음에는 신문배달부의 무리들이 빌딩에서 쏟아져 나온다. 각 가정에 신문을 배달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활동을 시작하는 사람들이다. 세 마리의 닭 중에서 날이 샜음을 알리는 첫 번째 닭이다.
이들이 배달해 주는 신문은 도시 계획을 암시한다. 신문을 보면서 경제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예측한다. 기업가는 앞으로 어떠한 제품을 생산해야 할 것인가도 생각한다. 주가가 오를 것인가 떨어질 것인가도 신문을 통하여 짐작한다. 신문은 바로 도시 계획의 암시다.
둘쨋 번의 正午 싸이렌
다음으로 새벽 6시를 알리는 사이렌 아니 자명종이 울린다. 여기서 첫째 번의 정오는 열두시다. 시계의 작은 바늘과 큰 바늘이 12라는 숫자를 가리킨다. 둘째 번의 정오는 6시다. 큰 바늘이 12라는 숫자를 가리키고 작은 바늘은 큰 바늘과 일직선으로 된다. 일직선으로 있는 두 개의 바늘이 12라는 숫자를 가리킨다. 12시 이후에 두 번째로 12라는 숫자를 가리켰기에 둘째 번의 정오다.
비누 거품에 씻기어 가지고 있는 닭. 개아미 집에 모여서 콩크리―트를 먹고 있다.
아침 일찍 거리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아침을 알린다는 의미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서 돌아다니는 아메리카인은 닭이다.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서 아메리카인은 몸에 비누를 바르고 샤워를 하는가 보다. 그들은 개미집과 같은 연립주택 형태의 집단 거주지에서 산다. 그리고 우리가 밥과 국을 중심으로 아침밥을 먹는다면, 아메리카인은 빵이나 고기를 칼로 썰어서 먹는다. 마치 딱딱한 콩크리―트를 먹는 것과 같다.
男子를 搬揶하는 石頭
남자를 나가라고 희롱하는 돌머리는 괘종시계다. 돌로 된 머리로 종을 들이 받아 소리를 내면서, 남자에게 “이제 그만 출근해라. 출근해라. 어서 출근해야지~~”하면서 마치 희롱하는 듯이 놀리면서, 어서 밖으로 나가라고, 출근하라고 놀린다.
男子는 石頭를 白丁을 싫어하드키 싫어한다.
남자는 이 출근을 강요하는 시계를 마치 백정을 싫어하는 닭처럼 싫어한다. 이른 새벽 거리에 나감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새벽이 왔음을 알리는 닭인 아메리카인은, 괘종시계가 시각을 알리면서 밖으로 나가라, 출근하라 놀리면서 재촉하는 것을, 닭이 자신을 죽이려는 백정을 싫어하여 밖으로 나가기를 싫어하는 것처럼 싫어한다. 마치 자기를 죽음으로 내모는 것처럼 여겨서, 괘종시계를 싫어한다.
얼룩고양이와 같은 꼴을 하고서 太陽群의 틈사구니를 쏘다니는 詩人. / 꼭끼오――. / 瞬間 磁器와 같은 太陽이 다시 또 한 個 솟아올랐다.
날이 새기도 전에 출근하는 아메리카인은 각종 불빛에 반사되어 희끗희끗 보이는 것이 마치 얼룩고양이다. 그러한 꼴을 하고서, 태양군 즉 전등불빛 사이를 쏘다니는 시인이다. 버스나 자동차를 타고 출근하면서도, 마치 시인이 시상을 떠올리며 중얼거리듯이 중얼거리기도 하고. 시상이 떠올랐을 때 그것을 메모하듯이 무엇인가 적기도 한다. 그들은 그날 할 일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중얼거리기도 하고, 또 생각난 중요한 일은 수첩에 적기도 하는 것이다.
꼭끼오―― 하고 진짜 닭이 울자, 순간 그 소리에 자석처럼 끌려 올라오듯이, 사기그릇처럼 둥글고 환한 태양이 다시 또 한 개 솟아올랐다.




5. 烏瞰圖 (二)

▣   烏瞰圖 詩第一號

十三人의兒孩가도로를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아니하여도좋소

  ― <조선중앙일보> 1934. 7. 24 ―
 
 
‘오감도(烏瞰圖)’는 제목부터 난해하다. 흔히 ‘조감도(鳥瞰圖)’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서 까마귀가 조감한 세상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타당하다. 현대인의 온갖 추한 모습을 까마귀가 조감(鳥瞰)한다는 말로 보인다. 
'아해(兒孩)'라는 말이 우선 눈에 띈다. 아이라고 하지 않고 왜 아해라고 했는가. 한자 지식이 풍부했던 이상은 ‘아해(兒孩)’의 파자를 생각하면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해는 兒+(子+亥)의 파자다. ‘아해’는 아이를 만드는, 돼지와 같은 축생의 씨앗이라는 생각이 반영된 말이다. 따라서 ‘아해’는 축생과 같은 더럽고 추악한 인간의 성적 욕망과 관련이 있는, 정액 속의 정자를 의미한다.
‘십삼 인의 아해’에서 13이라는 숫자는 서양에서는 불길한 숫자, 죽음을 상징하는 숫자로 사용된다. 서양적 학문과 기독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 이상으로서는 당연히 이러한 서양적 사고를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十三人의 兒孩가 도로를 疾走하오. /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십삼 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한다고 해 놓고서, 사람들이 그 도로가 무엇인지 모를까 봐 괄호를 해서 다시 설명하고 있다. 그 도로는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다고~~. 막다른 골목은 더 이상 앞으로 질주 할 수 없는 골목이다. 일정한 거리만큼 가다가는 막혀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골목이다. 상상해 보면, 여성의 음문에서부터 자궁에 이르는 질(膣)을 의미한다 할 것이다.
第一의 兒孩가 무섭다고 그리오. ∼ 第十三의 兒孩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일의 아해로부터 제십삼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한다. 무수한 아해들이 도를 질주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질에 사정한 정액 속에 들어 있는 무수한 정자들이 난자를 향하여 질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들은 한결같이 무섭다고 그런다. 수많은 정자들의 여성의 질을 따라서 질주하지만 대부분 난자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죽게 되고, 한 개 혹은 두 개의 정자만이 난자에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난자를 향하여 질주하는 정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十三人의 兒孩는 무서운 兒孩와 무서워하는 兒孩와 그렇게 뿐이 모였소. / (다른 事情은 없는 것이 차라리 나았소.)
그런데 아해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 둘 뿐이라고 한다. 질주하여 난자에 먼저 도달한 정자는 참으로 무서운 아해다. 우리가 흔히 무슨 일을 목숨을 걸듯이 열심히 하는 사람을 일컬어 ‘무서운 사람’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다른 정자들을 물리치고 난자에 도달한 그 하나 혹은 두 개의 정자는 참으로 무서운 아해다. 그리고 나머지 정자는 모두 죽는다. 그래서 나머지 정자들은 난자를 향하여 질주하면서도 죽음을 무서워한다. 다른 사정은 차라리 없는 것이 나았다. 두 가지 결과밖에 다른 것은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中에 一人의 兒孩가 무서운 兒孩라도 좋소. / 그 中에 二人의 兒孩가 무서운 兒孩라도 좋소. / 그 中에 二人의 兒孩가 무서워하는 兒孩라도 좋소. / 그 中에 一人의 兒孩가 무서워하는 兒孩라도 좋소.
그런데 이제는 그 중에서 1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라도 좋고, 그 중에서 2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하고 해도 좋다. 그 중에서 2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도 좋고, 그 중에서 2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고 해도 좋다. 이제는 성을 생식을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쾌락을 목적으로 한다. 무서운 아해거나 무서워하는 아해거나 구별이 생기지 않는다. 모든 정자는 난자에 도달하지 못하고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길은 뚫린 골목이라도 適當하오.) / 十三人의 兒孩가 道路를 疾走하지 아니하여도 좋소.
길은 뚫린 길이라도 적당하다. 13인의 아해가 도로 즉 여성의 질을 질주하지 않아도 좋다. 남성이 손으로 자신의 성기를 잡고 자위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뚫린 길은 성기를 잡고 자위하는 손이다. 이제는 성을 이성과의 관계 속에서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자위를 통해서 즐기기도 한다. 십삼 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다. 어차피 자위를 통해서 배출된 정자는 모두 질주를 하지 않으며, 그대로 죽는다.
따라서 <오감도 시제1호>는 성을 쾌락의 도구로 생각하는 현대인에 대한 시인의 생각을 표현한 시다. 과연 이러한 시를 두고 음란한 내용이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 현대인의 우울한 삶의 모습을 까마귀가 조감한 시로 볼 것인가? 독자들이 판단할 문제다.



▣  烏瞰圖 詩第二號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니나는왜나의아버지를껑충뛰어넘어야하는지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

 ― <조선중앙일보> 1934. 7. 25 ―
 

나의 아버지가 나의 곁에서 조을 적에 나는 나의 아버지가 되고 또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고 그런데도 나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대로 나의 아버지인데 어쩌자고 나는 자꾸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니 나는 왜 나의 아버지를 껑충 뛰어넘어야 하는지 나는 왜 드디어 나와 나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노릇을 한꺼번에 하면서 살아야하는 것이냐.
이 시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는 ‘나의 아버지가 나의 곁에서 조을 적’이 어떠한 상황이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화자는 아버지가 조을 적에, 나와, 나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노릇을 한꺼번에 하면서 살아야 하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어떠한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표현하고 있는지 알아봐야 한다.
이상의 연보를 보면, 이상은 1910년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서 아버지 강릉김씨 演昌(연창)과 어머니 박세창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고, 본명은 해경(金海卿)이다. 아버지 김연창은 차남이었고, 큰아버지 김연필은 구한말 총독부 기술직에 종사한 전형적인 서울의 중인층이었다. 김연필은 소생이 없는 때여서, 이상의 탄생은 집안의 경사였다고 한다. 세 살 때 큰아버지가 이상 김해경을 양자로 데려갔다고 한다.
이상의 연보와 관련해서 생각해 보면, <오감도 시제2호>는 집안의 장자로서의 대를 이어야 하는 이상의 장자의식(長子意識)이 반영된 시라 할 수 있다.
아버지가 ‘조을고 있다’는 것은 아버지가 나이가 들어 이제는 자손을 번식할 기력이 없고 늙었다는 말이다. 조는 상태는 활발히 활동하지 않고 무기력한 상태다. 아버지가 늙어서 이제 더 이상 자손을 번식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면, 아들이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결혼을 하고 가문을 이어갈 자식을 낳아야 한다. 만약 큰아버지처럼 대를 이을 자식을 낳지 못하면 것은 조상에게 커다란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은 생각이 달랐는지 혹은 기타 무슨 사정이 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한 개인이 자신의 삶보다는 가문의 대를 이어가야 하는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의 아버지가 옆에서 조을 적에 나는 나의 아버지가 된다. 나의 아버지처럼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서 대를 이어야 하는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 또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된다.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대를 이어가야 한다.
그런데도 나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이다. 나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일 뿐이고 나는 나일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즉 아버지를 껑충 뛰어넘어서 드디어 먼 조상의 대를 잇는 존재로 살아가라고 강요한다. 화자는 답답하다.



▣   烏瞰圖 詩第三號

싸움하는사람은즉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고또싸움하는사람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었기도하니까싸움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고싶거든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싸움하는것을구경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나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움하지아니하는것을구경하든지하였으면그만이다

 ― <조선중앙일보> 1934. 7. 25 ―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싸움한다'의 이미를 이해해야 한다. ‘싸움한다’는 두 가지 의미로 쓰였다. 하나는 남녀가 마치 싸움하듯이 서로 껴안고 성교를 한다는 의미다. 또 하나는 ‘발기가 잘 되지 않는 화자가, 아내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애쓴다.’는 의미다. 싸움하는 것과 성교를 하는 것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서로 껴안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숨을 몰아쉬면서, 격렬하게 행동한다.
또 ‘싸움하는 사람’은 아내와 성교를 하는 화자, 화자의 성교 상대인 아내, 그리고 남근이 제대로 발기되지 않아 아내를 잘 만족시키지 못하여 애쓰는 화자, 이렇게 셋이다.
그러면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또 어떤 사람인가? 평소에 기력이 달려서 아내와 자주 성교를 할 수 없는 사람일 수도 있고, 싸움하지 않는 형태, 즉 자위와 같은 방식으로 성욕을 해결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금홍이와 사는 이상의 생활을 상상해 보자. 금홍이와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금홍이와 자주 잠자리를 할 수 없던 이상이, 낮에 자위로써 혼자 성욕을 해결하곤 했는데, 마침 그날은 금홍이와 잠자리를 하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낮에 자위를 한 사람이 그날 밤에 또 아내를 만족시켜주기 위해서 또 성교를 할 경우 잘 되겠는가. ‘싸움하지 않는 사람’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동음 이의어를 사용하고, 띄어쓰기도 하지 않아서 혼란스럽다. 설명하기도 곤란하다. 설명을 해도 그말이 그말이라 하나도 무엇이라고 결론 내릴 수도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싸움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남녀가 서로 껴안고 성교를 하는 것이며, 발기가 잘 되지 않는 화자가 아내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애쓰는 행위다. 기본적인 의미를 바탕으로 각자 의미를 적용하여 읽어 보라.
싸움하는 사람은 즉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고 / 또 싸움하는 사람은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었기도 하니까 / 싸움하는 사람이 싸움하는 구경을 하고 싶거든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 싸움하는 것을 구경하든지 /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싸움하는 구경을 하든지 /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나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싸움하지 아니하는 것을 구경하든지 / 하였으면 그만이다
 


▣   烏瞰圖 詩第四號

 患者의容態에關한問題.
 診斷 0.1
  26. 10. 1931
    以上   責任醫師 李   箱

 ― <조선중앙일보> 1934. 7. 28 ―
 
 
오늘날 서양의 발달한 문명의 밑바탕이 되는 수학과 과학에서는 모든 현상을 하나의 원리로 파악하고 기술한다. 그래서 서양 학문에서는 수학적 원리, 과학적 법칙 등을 숫자로 간명하게 기호로 표시한다. 
그러나 간단한 기호로 표시하는 수학과 과학이 인간의 다양한 정신적 문제까지 모두 해결할 수는 없다. 아니 도리어 인간의 다양한 인문 정신을 말살한다. 이런 내용을 다룬 대표적인 시로는 <이상한 가역반응>, <▽의 유희> 등이 있다. 이 시도 그러한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患者의 容態에 關한 問題.
이상한 숫자들 위에 ‘환자의 용태에 관한 문제’라는 말이 있다. 숫자는 서양의 문명을 낳은 수학과 과학의 상징이다. 거꾸로 쓴 이 이상한 숫자들은 서양 학문의 용태와 관련된 숫자들이다. 그리고 책임 의사 이상이 진단했다. 서양 학문의 문제점을 진단한 것이다.
이상한 그림
숫자들은 거꾸로 씌어 있다. 마치 거울에 비친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겉모습을 진단하기 위해서는 거울을 본다. 몸 안에 있는 질병의 상태는 엑스레이 촬영을 통하여 본다. 이상이 살았던 1930년대 초반에도, 엑스레이 촬영을 하여 병을 진단하였던 것 같다. <오감도 시제팔호>를 보면 엑스레이 촬영을 하는 모습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엑스레이 필름에 찍힌 영상은 환자의 몸 안에 있는 병의 상태를 보여 준다. 서양 학문에 내재한 문제점을 진단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엑스레이를 찍는다. 그래서 숫자들이 마치 거울에 비친 듯이 좌우가 바뀌어 있다.
인체의 내부에 병이 있을 때, 그것을 발견하기 위하여 엑스레이 촬영을 하고, 엑스레이 필름을 보면서 해부를 하고 치료한 다음, 다시 봉합한다. 서양 학문에 내재한 문제점을 치료하기 위해서도 엑스레이 촬영을 하고, 엑스레이 필름에 찍힌 영상을 보고 진단하고, 절개하여 병을 제거하고, 다시 봉합해야 한다. 거꾸로 된 숫자는 바로 엑스레이로 촬영한 서양 학문이다.
이 숫자들을 조망해 볼 때,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안 하얀 줄처럼 보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해부한 자국이다. 그리고 가운데 점들은 그것을 다시 봉합한 바늘 자국이다. 봉합하고 나니, 숫자들이 어긋나 있다. 꿰맨 자국을 따라서 아래 부분의 숫자들이 왼쪽으로 한 칸씩 밀렸습니다. 이는 숫자로 상징되는 서양 학문이 인간의 삶을 완전히 치료하나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시각화한 것이다.
이해가 안 되는 독자를 위해서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서양 과학에 의하면 광선은 삼십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날아간다. 만약 인간이 광선보다 빠른 타임머신을 타고 그 광선을 쫓아간다면 과거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또한 인간은 젊어질 수도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과연 실제 인간의 삶에서 그러한 현상이 발생하겠는가. 이상 시인이 보기에 서양의 과학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한 것이다.
 診斷 0.1 / 26. 10. 1931 / 以上 責任醫師 李 箱
그래서 이상 시인은 모든 것을 어떤 숫자로 도식화해서 표현하는 서양의 학문에 대해서 이 시를 통해 비판하고 있다. 그림 아래에 서양 사람들이 좋아하는 숫자로 결과를 0.1이라고 진단했다. 1이 완전한 것을 의미한다면 서양의 학문은 0.1에 불과하다. 그리고 서양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그들의 방식대로 그 아래에 날짜를 적었다. 년, 월, 일 순서가 아닌 일, 월, 년 순서로 적었다. 그리고 책임의사 이상이 진단을 했다고 서명했다.



▣  烏瞰圖 詩第五號

前後左右를除하는唯一의 痕跡에있어서
翼殷不逝 目不大覩
胖矮小形의神의眼前에我前落傷한故事를有함

 

 
 
 
 
臟腑 라는것은 侵水된畜舍와區別될수있을것인가


 ― <조선중앙일보> 1934. 7. 28 ― 
 

前後左右를 除하는 唯一의 痕跡에 있어서 
‘전후좌우를 제거하는 유일의 흔적’은 십자가에 매달린 기독의 모습이다. 기독(基督)이 인류를 위해서 무엇을 했다는 전후좌우의 복잡한 말보다, 기독이 두 팔을 벌리고 피를 흘리며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기독의 삶에 대해 더 많은 말을 해 준다.
翼殷不逝 目不大覩 胖矮小形의 神의 眼前에
그런데 그 십자가에 매달린 기독은 날개는 크지만 높이 날지 못하고, 눈은 크게 보지 못한다. 원래 ‘翼殷不逝 目不大覩’는 <장자(莊子)>의 ‘산목편(山木篇)’에 나오는 말이다. 산목편에는 ‘翼殷不逝 目不大覩’ 라고 나오지 않고 ‘翼殷不逝 目大不覩’라고 나온다. <장자>에서 말하는 '翼殷不逝 目大不覩'는 날개는 크지만 높이 날지 못하고, 눈은 크지만 보지 못한다는 말이다. 자신의 이익에 집착하다 보면 자신을 해치려는 자를 보지 못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大’자와 ‘不’자의 순서를 바꿈으로써 다른 뜻으로 사용되었다. '날개는 크지만 날지 못하고, 눈은 멀리 보지 못한다'는 의미다. 장자에 나오는 구절을 변형하여 활용하고 있다.
십자가에 매달린 기독은 두 팔을 벌리고 있다. 그것을 날개가 크다고 했다. 그러나 멀리 보지 못한다. 지금 십자가 아래에서 남녀가 성교를 하고 있는데, 그 민망한 꼴을 보고서도, 십자가에서 큰 날개를 펼친 듯 양팔을 벌리고 있는 기독은, 높이 날아서 피하지도 못한다. 눈은 멀리 바라보아 외면하지 못하고, 고래를 아래로 숙여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십자가의 기독은 그 고난을 상징하듯 갈빗대가 다 드러날 정도로 마른 모습이다. 따라서 '胖矮小形의神(반왜소형의 신)'은 갈빗살이 빈약한 기독이다. 따라서 화자는 그리스도의 상이 새겨진 십자가 앞에서~~
我前落傷한 故事를 有함
자신이 앞으로 넘어졌던 고사가 있다. 앞으로 넘어진 것은 여자와 성교를 하였다는 말이다. 여자가 뒤로 넘어져 밑에 있고, 남자가 그 위를 앞으로 넘어지면 남녀가 성교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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臟腑라는 것은 侵水된 畜舍와 區別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위의 그림이 나온다. 그 그림 아래에 ‘장부라는 것은 물이 침투한 축사와 구별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말한다. 아니 인간의 내장은 물이 침투한 축사와 구별될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일차적으로 이 그림은 물이 침투한 축사의 모습이다. 물이 침투한 축사는 가축의 배설물과 물이 뒤범벅이 되어 매우 지저분하다.
또한 위 그림은 인간의 성적 욕망의 배설물인 정액으로 가득 찬 더러운 공간을 연상할 수 있다. 위 그림은 여성의 음부의 내부를 그린 것이다. 입구처럼 보이는 곳이 남성의 성기가 들어가는 곳이며, 그 안의 넓은 공간은 성적 욕망의 배설물인 정액이 들어와, 마치 축사와 같이 지저분하게 된 곳이다. 
따라서 위 그림은 여자의 음부의 내부의 모습을 그린 것이고, 화자는 십자가가 달린 방에서 어떤 여자와 성교를 한 것이다.
이 시는 <이상한 가역반응>, <오감도 시제십사호>, <백서> 등과 상황이 매우 유사하다. 화자는 어느 과부와 성교한다. 과부와 성교하는 과부의 집에는 십자가가 걸려 있다.
 


▣   烏瞰圖 詩第六號 
 
 
鸚鵡  ※ 二匹 
         二匹 
      ※ 鸚鵡는哺乳類에屬하느니라.
내가二匹을아아는것은내가二匹을아알지못하는것이니라. 勿論나는希望할것이니라.
鸚鵡   二匹
『이小姐는紳士李箱의夫人이냐』 『그렇다』
나는거기서鸚鵡가怒한것을보았느니라. 나는붓그러워서얼굴이붉어졌었겠느니라.
鸚鵡   二匹
       二匹
勿論나는追放당하였느니라. 追放당할것까지도없이自退하얏느니라. 나의體軀는中軸을喪失하고또상당히蹌踉하여그랫든지나는微微하게涕泣하얏느니라.
『저기가저기지』『나』『나의―아―너와나』
『나』
sCANDAL이라는것은무엇이냐.『너』『너구나』
『너지』『너다』『아니다 너로구나』나는함뿍젖어서그래서獸類처럼逃亡하얏느니라. 勿論그것을아아는사람은或은보는사람은없었지만그러나果然그럴는지그것조차그럴는지.

  ― <조선중앙일보> 1934. 7. 31 ―


이상은 여러 명의 여자와 동거했다. 주로 카페나 술집에 나가는 여급들과 동거했다. 서로 사랑해서라기보다는 젊은 남녀의 짧은 동거 생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홍이도 그런 여인 중의 하나다. 금홍이와는 약 3년 정도 살았으나, 그래도 여급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것 같다. 
사실 여급들과 동거하면서 한평생의 반려자로 생각하면서 살았던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이상의 생각에 그때그때 함께 사는 것이 남편이요 부인이라는 생각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부부처럼 한평생을 같이 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이 시의 상황을 상상해 보면, 화자가 앵무새처럼 생긴 어떤 여급과 살고 있던 중에, 또 전에 살던 다른 앵무새처럼 생긴 여급이 찾아와서, 이상이 자신의 남편이라고 싸운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상은 그 두 여자에 대해서 각각 함께 살 때는 각각을 아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鸚鵡  ※ 二匹 / 二匹 / ※ 鸚鵡는 哺乳類에 屬하느니라.
앵무새 두 필이 있다. 앵무새는 포유류에 속한다. ‘匹(필)’은 말이나 소 등의 가축을 세는 단위다. 그리고 앵무새는 포유류에 속한다는 말로 봐서, 새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포유류에 속하는, 앵무새와 유사한 두 여자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앵무새는 겉모습이 아름답다. 외양이 화려하다. 카페나 술집에 나가는 여급은 보통 여염집 여자보다 외양이 화려하다. 따라서 앵무새 두 필은 이상이 잠시 함께 살았던, 여급 생활을 하던 여자들인 것으로 보인다. 한 앵무새는 지금 살고 있는 여자인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앵무새는 지금 여자와 살고 있는 곳에 찾아온, 전에 이상과 함께 살았던 여자로 보인다. ‘앵무새 두 필, 두 필’하고 반복하는 것은 ‘왜 두 여자가 여기에 함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는 것 같다.
내가 二匹을 아 아는 것은 내가 二匹을 아 알지 못하는 것이니라. 勿論 나는 希望할 것이니라.
화자가 여급 생활을 하는 한 여자와 동거하고 있었는데, 밖에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예전에 함께 살았던 여자가 찾아와서, 두 여자가 함께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화자가 앵무새 두 필을 아 아는 것은 사실은 화자가 두 필을 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화자는 두 여자 앞에서 당황하여 말을 더듬고 있다. 당연히 당황하였을 것이다.) 화자가 두 여자를 알고 있다. 한 여자는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여자다. 알고 있다. 한 여자는 전에 함께 살았던 여자다. 누군지 알고 있다.
그러나 두 여자가 왜 지금 여기에 함께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따라서 두 여자를 아는 것은 결국 두 여자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두 여자가 누구인지는 알지만, 왜 함께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두 여자가 함께 있는 이유를 알기를 희망한다.
鸚鵡 二匹 / 二匹
앵무새 두 필, 앵무새 두 필.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왜 두 여자가 지금 여기에 함께 있는지 화자는 알 수 없다. 그래서 되뇌고 있다.
『이 小姐는 紳士 李箱의 夫人이냐』 『그렇다』/ 나는 거기서 鸚鵡가 怒한 것을 보았느니라. 나는 붓그러워서 얼굴이 붉어졌었겠느니라.
“이 소저는 신사 이상의 부인이냐?”하고 지금 살고 있는 여자가 전에 살았던 여자를 가리키면서, 화자에게 말한다. 화자는 “그렇다”고 했다.
전에 함께 살았던 여자는 지금 함께 사는 여자를 찾아와서 이상이 자신의 남편이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상이 들어오자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여자가 물은 것이다. 그러자 화자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물론 지금은 부인이 아니지만 전에 함께 살고 있을 때는 그 여자도 부인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대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화자는 거기서 앵무새가 노한 것을 보았다. 지금 함께 사는 여자가 노한 것이다. 화자는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졌었을 것이라고 독자들은 생각할 것이다. 화자는 얼굴이 붉어지지 않았다. ‘붉어졌었겠느니라’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자. 보통 붉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할 것이나, 그렇지 않았다는 말로 보인다. 왜냐하면 전에 살던 여자는 그때의 화자의 부인이고, 지금 살고 있는 여자는 지금의 부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를 가지고 있는 이상은 얼굴이 붉어질 이유가 없다.
鸚鵡 二匹 / 二匹 / 勿論 나는 追放 당하였느니라. 追放 당할 것까지도 없이 自退하얏느니라. 나의 體軀는 中軸을 喪失하고 또 상당히 蹌踉하여 그랫든지 나는 微微하게 涕泣하얏느니라.
앵무새 두 필, 두 필. 화자는 그 여자 둘이 왜 서로 자신을 놓고 서로 부인인지를 따지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전에 살던 여자는 그때의 부인이고, 지금 사는 여자는 지금의 부인인데 그것을 왜 물어보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물론 화자는 거기서 추방당하였다. 지금 살고 있는 여자가 화자를 추방하였을 것이다. 아니 추방당할 것까지도 없이 스스로 물러나왔다. 자신을 남편으로 생각하는 두 여자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어서 스스로 물러나온 것이다. 화자의 몸은 중심축을 잃어버리고 또 상당히 비틀거려서 그랬던지 미미하게 흐느껴 울었다. 당황스럽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이 가지 않아서 눈물도 났다. 왜 자기가 그런 일을 당하여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기가 저기지』『나』『나의―아―너와나』/ 『나』
'저기가 저기지' 그래 두 여자가 모두 여급이지. 나는 신식교육을 받은 신사 이상. 나의 아내가 여급? 너와 나는 부부가 될 수 없다? 나는 남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구나.
화자는 지금 비로소 자신이 아내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두 여자와 자신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는 것을 깨달았다. 두 여자는 앵무새와 같은 여급이고, 두 여자의 대화에서 나왔듯이 나는 신사다. 자신을 신사라고 말하는 것으로 봐서, 사람들은 여급들과 산다는 것을 스캔들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고 있다.
sCANDAL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sCANDAL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화자는 스캔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스캔들에서 s자는 소문자로 작고 CANDAL은 대문자로 크다.) 스캔들은 섹스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다. 스캔들은 ‘섹스에 대한 캔들’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촛불 마주하여 앉은 사람은 촛불이 비추는 자신의 주위를 환하게 생각하듯이, 여급과 사는 것을 있을 수 있는 당연한 일로 생각한다. 촛불에서 멀리 있는 사람은 촛불이 비추는 자신의 주위를 어둡게 생각하듯이, 여급과 사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신사 이상이 여급과 사는 것을 SEX SCANDAL로 생각하는구나 하고 생각한다.
『너』『너구나』/『너지』『너다』『아니다 너로구나』나는 함뿍 젖어서 그래서 獸類처럼 逃亡하얏느니라. 勿論 그것을 아 아는 사람은 或은 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러나 果然 그럴는지 그것조차 그럴는지.
너. 너구나. 너지. 너다. 너는 아니다. 너로구나. 화자는 지금 자신이 함께 살았던 여급들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다. 사실 이상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상 시인은 4~5명의 여급들과 살았다고 한다. 이상 시인의 가까운 주변 사람들은 이상 시인과 여급들과 산 것을 두고, ‘가벼운 동거’ 쯤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정식 결혼으로 보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여튼, 화자는 함뿍 생각에 젖어서, 짐승의 무리처럼 도망하였다. 짐승처럼 섹스 스캔들이 될 만한 생각들을 더듬어 본 것이다. ‘獸類(수류)’는 성적 욕망만을 추구했다는 짐승과 같은 스캔들의 주인공이라는 의미와, 빠르다는 의미를 동시에 비유하는 말이다. ‘도망하였다’는 말은 현재의 화자의 위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시점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과거로 생각을 되짚어 본 것이 도망하는 것이다.
물론 화자가 과거의 함께 살았던 여급들의 생각을 되짚어 본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없고, 혹은 그러한 생각을 하는 자신을 보는 사람도 없었지만, 과연 그 여급들과 살았던 것도 그렇게 생각할는지~~~, 그것조차 사람들은 그렇게 즉 스캔들로 생각할는지~~~ 생각하고 있다.


 
▣    烏瞰圖 詩第七號

久遠謫居의地의一枝·一枝에피는顯花·特異한四月의花草·三十輪·三十輪에前後되는兩側의明鏡·萌芽와같이戱戱하는地平을向하여금시금시落魄하는滿月·淸澗의氣가운데滿身瘡痍의滿月이劓刑當하여渾淪하는·謫居의地를貫流하는一封家信·나는僅僅히遮戴하였더라·濛濛한月芽·靜謐을蓋掩하는大氣圈의遙遠·巨大한困憊가운데의一年四月의空洞·槃散顚倒하는星座와星座의千裂된死胡洞을跑逃하는巨大한風雪·降薶·血紅으로染色된岩鹽의粉碎나의腦를避雷針삼아沈下搬過되는光彩·淋漓한亡骸·나는塔配하는毒蛇와같이地平에植樹되어다시는起動할수없었더라·天亮이올때까지.

 ― <조선중앙일보> 1934. 8. 1 ―
 
 

이상은 1929년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근무한다. 그러나 1933년 23세 때 폐병으로 인한 각혈로 기수직을 그만두고 황해도 백천온천에 요양간다. 거기서 기생 금홍이를 만나게 된다. 그 뒤 서울로 올라와 <제비>라는 다방을 차리고 금홍이와 동거에 들어간다.
화자가 지금 떠올리는 ‘구원한 적지’는 ‘일봉가신’을 받은 시점에서 회상하고 있는, 과거에 요양차 갔던 백천온천이다. 일봉가신을 받은 것은 시를 쓰는 시점인 현재보다 과거다. 따라서 시를 쓰는 시점보다 앞서서 일봉가신을 받았고, 일봉가신으로 인하여 화자가 회상했던, 금홍이와의 만남은 더 앞선 과거다.
대체로 문장이 명사형으로 끝난다. 무엇인가 회상하거나 상상하는 대목 같다. 서술어가 제대로 표현된 것은 '나는 僅僅히 遮戴하였더라'와 '다시는 起動할 수 없었더라' 두 군데 뿐이다. 그것도 회상 시제 선어말어미 ‘―더―’가 사용되었다. 이는 현재의 시점에서 일봉가신을 받았던 시점의 상태를 회상하면서 썼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 준다.
이 시에는 ‘적거의 지를 관류하는 일봉가신’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과연 ‘적거의 지를 관류하는 일봉가신’이 어느 상황에서 화자에게 왔는가. 그 내용은 대체로 무엇인가. 이것을 잘 설정해야 시의 전체적 의미가 일목요연하게 드러난다. 다음과 같이 추리해 보겠다.
화자가 서울에서 금홍이와 함께 살던 시절에, 집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온다. 지금 화자가 함께 살고 있는 여자는 과거에 백천온천에서 기생이었고, 그래서 그녀와 함께 사는 것을 반대하거나 질책하는 내용의 편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화자는 그 편지를 받고 처음 금홍이를 만났을 당시를 회상하였고, 지금 시를 쓰는 시점에 그 편지를 받을 당시를 회상하면서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시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고, 또 그것을 표현함에 있어서 복잡한 비유를 사용하고 있기에, 이 시는 그 의미를 쉽게 알기 어렵다.
久遠謫居의 地의 一枝. 一枝에 피는 顯花
시간적으로도 오래 되었고 공간적으로 먼 유배지 백천온천지. 그리고 그 유배지에 심겨진 한 그루의 나무처럼 외롭게 심겨진 화자. 그 나뭇가지와 같은 화자의 머리에 피어나는 한 떨기의 꽃과 같은 달. 그 달과 같은, 화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명의 여자. 금홍이.
여기서 화자는 집에서 온 한 통의 편지를 받은 시점에서 과거의 유배지에서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꼼짝 않고 앉아서 생각하고 있는 화자는 나뭇가지다. 나뭇가지에는 한 떨기의 꽃과 같은 달이 떠오르고 있다. 둥근 보름달이 떠오르는 초저녁, 머릿속에 떠오르는 달과 같은 모습의 여자를 떠올리고 있다. 그 달과 같은 그 여자는 금홍이다. 금홍이를 떠올리게 된 것은, 화자가 금홍이를 만났던 백천온천지를 관류하는, 일봉가신 때문이다.
特異한 四月의 花草 / 三十輪 / 三十輪에 前後되는 兩側의 明鏡
화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떨기 꽃, 즉 금홍이는 사월에 피어나는 화초와 같이 특이한 화초다. 삼십일에 한 번씩 찼다가는 기우는 보름달. 보름달에 전후되는 양측의 명경과 같은, 보름달보다는 다소 갸름한, 화초였다.
여기서 금홍이를 화초로 비유한 것은 금홍이의 아름다운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그 금홍이는 보름달보다는 약간 갸름한, 손거울과 같은, 아름답고도 특이한, 화초와 같은 여자였다.
萌芽와 같이 戱戱하는 地平을 向하여 금시금시 落魄하는 滿月
돋아나는 어린 싹과 같이 희희하는 지평은 곧 금홍이와 처음 만나서 즐거움이 싹트던 백천온천지다. 그 백천온천을 향하여 지금 바로 빛을 보내고 있는 보름달과 같은 금홍이를 떠올리고 있다.
淸澗의 氣 가운데 滿身瘡痍의 滿月이 劓刑當하여 渾淪하는 / 謫居의 地를 貫流하는 一封家信 / 나는 僅僅히 遮戴하였더라.
맑은 산골물의 기운 가운데에 있는 백천온천지. 만신창이의 만월처럼 기생으로서 혹은 창녀로서 온몸에 상처를 입은 동그란 얼굴의 금홍이. 비형을 당한 사람이 고통으로 소리치듯이 콧소리로 교성을 지르고 있는 혼돈의 땅, 화자가 유배와 사는 백천온천지를 꿰뚤어 보는 듯한 일봉가신. 이로하여 화자는 간신히 금홍이를 만났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청간의 기운 가운데’은 맑은 산골물의 기운이 흐르는 곳이다. 이는 백천온천지다. 만신창이의 만월이 비형을 당하여 혼륜하는 적거의 지는, 기생으로서 창녀로서 온몸에 상처를 입고, 밤마다 코를 베인 형벌을 받는 듯이, 콧소리를 내면서 교성을 지르는 혼돈의 땅이면서, 화자가 유배를 갔던 땅 백천온천지다. 화자는 일봉가신을 받고 그때의 기억을 간신히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근근히 저대하였다’는 말은 ‘근근이 이것을 머리에 이었다.’는 말인데, 간신히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는 의미다.
濛濛한 月芽 / 靜謐을 蓋掩하는 大氣圈의 遙遠 / 巨大한 困憊 가운데의 一年四月의 空洞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 금홍이와의 생활의 시작, 금홍이와의 생활의 고요함의 뚜껑을 덮었던 대기권의 멀고 아득함(백천온천에서의 금홍이와의 생활이 화자가 살던 서울과 멀어서, 그 소문이 서울에 있는 가족에까지 나지 않았음을 의미함). 거대한 어려움 속에서 보낸 1년 4개월의 텅 빈 골짜기의 생활.
 
槃散顚倒하는 星座와 星座의 千裂된 死胡洞을 / 跑逃하는 巨大한 風雪 / 降薶 / 血紅으로 染色된 岩鹽의 粉碎
남녀가 만나서는 서로 즐기다가 헤어지며 또 다른 계집의 몸 위에 넘어지는, 뭇사람들이 서로 만났다가는 헤어지는, 죽음이 드리운 골짜기. 그 골짜기를 따라 죄를 짓고 도망치듯 달아나는 거대한 눈바람 즉 교성. 남근으로 내리쳐서 구멍 즉 음부를 메우는 소리. 피처럼 붉게 염색된 발기된 남근으로 암염(巖鹽)을 분쇄하기 위해 절구질 하듯이, 음부를 내리치며 정액을 쏟아내는 곳. 환락가로서의 백천온천지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나의 腦를 避雷針삼아 沈下搬過되는 光彩/ 淋漓한 亡骸
화자의 뇌를 피뢰침 삼아서, 밑으로 투과되어 지하로 스며들어가고 있는, 저 하늘에 떠 있는 달과 같은 금홍이의 기억들. 여기서 화자는 기억(뇌)을 통해서 달로 비유된 금홍이에 대한 기억(광채)이 뇌리를 스쳐가는 모습을, 마치 달빛이 화자의 뇌를 피뢰침 삼아서 내려온 다음 화자의 뇌를 통과하여 지하로 스며드는 달빛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흠뻑 젖어보는, 잊었던 금홍이 모습. ‘임리’는 흠뻑 젖는다는 말이다. ‘망해’는 까마득히 잊었던 금홍이 모습을 의미한. 따라서 오랜만에 금홍이와 처음 만났을 때의 금홍이의 모습을 회상하면서 추억에 흠뻑 젖고 있음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는 塔配하는 毒蛇와 같이 地平에 植樹되어 / 다시는 起動할 수 없었더라 / 天亮이 올 때까지
화자는 탑과 짝을 이루는 독사와 같이 평지에 나무로 심겨져, 다시는 일어나 움직일 수 없었다. 아침이 올 때까지. 여기서 화자는 움직일 줄 모르는 탑의 짝인, 똬리를 틀고 있는 독사처럼 앉아서, 금홍이와 만났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마치 평지에 심겨진 나무처럼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침이 올 때까지.


 
▣    烏瞰圖 詩第八號  解剖

第一部試驗   手術臺             一
             水銀塗抹平面鏡     一
             氣壓               二倍의平均氣壓
             溫度               皆無
  
爲先痲醉된正面으로부터立體와立體를爲한立體가具備된全部를平面鏡에映像시킴. 平面鏡에水銀을現在와反對側面에塗沫移轉함. (光線侵入防止에注意하여)徐徐히痲醉를解毒함. 一軸鐵筆과 一張白紙를支給함.(試驗擔任人은被試驗人과抱擁함을絶對忌避할것) 順次手術室로부터被試驗人을解放함.翌日.平面鏡의縱軸을通過하여平面鏡을二片에切斷함.
水銀塗抹二回.
ETC 아직그滿足한結果를收得치못하였음.
 
第二部試驗  直立한平面鏡       一
            助手               數名
野外의眞空을選擇함. 爲先痲醉된上肢의尖端을鏡面에附着시킴. 平面鏡의水銀을剝落함. 平面鏡을後退시킴. (이때映像된上肢는반드시硝子를無事通過하겠다는것으로假說함) 上肢의終端까지. 다음水銀塗抹. (在來面에) 이瞬間公轉과自轉으로부터그眞空을降車시킴. 完全히二個의上肢를接受하기까지. 翌日. 硝子를前進시킴. 連하여水銀柱를在來面에塗抹함. (上肢의處分)(惑은滅形)其他. 水銀塗抹面의變更과前進後退의重複等.
ETC 以下未詳

 ― <조선중앙일보> 1934. 8. 2 ―
 

시인이 아팠는가 보다. 병원에 갔는가 보다. 엑스레이 사진을 찍고, 수술을 하였는가 보다. ‘제일부시험’은 엑스레이 촬영하는 내용이다. ‘제이부시험’에서는 엑스레이 사진을 바탕으로 수술을 받는 장면이다. 시인이 직접 경험한 것으로 보인다.
 
詩第八號  解剖
소제목 '해부'는 이른바 이상이 몸을 절개하는 수술을 받는 장면을 바탕으로 이 시를 썼다는 것을 의미한다.
 
第一部 試驗
‘제일부시험, 제이부시험’에서 '시험'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화자가 서양식 치료 방식에 대한 신뢰를 보내지 않는 상태에서, 과연 그들이 자신의 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인가를 시험해 본다는 의식 즉 의사의 치료행위에 대해서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반영된 표현이다. 또 전체적으로 시험을 보는 장면을 연상하도록 한다.
 
手術臺 : 一, 水銀塗抹 平面鏡 : 一, 氣壓 : 二倍의 平均氣壓, 溫度 : 皆無 
제일부 시험을 위한 준비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수술대 한 개가 필요하다. 물론 여기서 수술대는 엑스레이를 찍는 기계를 의미한다.
수은도말평면경이 한 개 필요하다. 여기서 수은도말경은 수은을 바른 거울이라는 뜻인데, 엑스레이 필름이다. 보통 엑스레이 찍는 기계에 넣는 필름으로서, 필름통 속에 들어 있다. 수은을 입힌 거울은 보통 거울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엑스레이 필름을 거울이라고 표현한 것은 거울에 사람의 형상이 그대로 비추듯이 엑스레이 필름에도 사람의 내부에 있는 병의 형상이 그대로 비춘다는 의미에서 거울로 표현했다.
기압은 두 배의 평균 기압을 준비한다. 두 배의 평균 기압이 있으면 숨이 막혀서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엑스레이를 찍을 때 숨을 멈추는 것을 상상한다면 왜 두 배의 평균 기압이 준비되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찍을 때 답답한 채로 숨을 멈춰야 하기 때문이다.
온도는 개무하다. 전혀 없다. 웃옷을 벗고, 차가운 기계에 몸을 부착하여 찍는 것을 생각하며 쓴 것이다. 차가운 것은 온도가 없는 것이다. ‘溫’은 따뜻할 온 자다. 따뜻한 정도를 나타내는 것이 온도인데, 차가운 것 밖에 없다는 발상이다.
 
爲先 痲醉된 正面으로부터 立體와 立體를 爲한 立體가 具備된 全部를 平面鏡에 映像시킴
마취된 정면이란 엑스레이 기계 앞에서 마치 마취 된 듯이 정면을 향하여 꼼짝 않고 서 있는 것을 말한다. 
‘입체와 입체를 위한 입체’에서 앞의 두 입체는 엑스레이 기계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몸체, 마지막 ‘입체’는 엑스레이 기계다. 
사람의 몸체와 엑스레이 기계 전부를 평면경에 영상 시킨다. 방사선은 어디에선가 나와서 사람의 몸을 통과하여, 사람이 서 있는 기계 속의 필름으로 들어가서 사람의 형상을 필름에 나타나게 한다. 따라서 사람과 기계를 모두 영상 시키는 것이다.
 
平面鏡에 水銀을 現在와 反對 側面에 塗沫移轉함
거울에서는 바라보고 있는 유리의 뒷면에 수은을 도말함으로써 사람의 형상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엑스레이 촬영에서도 사람의 형상이 필름에 나타나도록 하자면, 현재 사람이 바라보고 있는 필름의 반대 측면에 수은을 도말해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발상에서 나온 표현이다.
 
(光線 侵入 防止에 注意하여)徐徐히 痲醉를 解毒함
엑스레이 필름은 광선이 침투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광선침투에 유의하면서 서서히 마취를 해독한다. 마취가 엑스레이 기계 앞에서 꼼짝 않는 것을 의미한다면, 마취를 해독하는 행위는 꼼짝 않던 몸을 서서히 움직이는 것이다. 촬영을 마치고 기계 앞에서 물러난다.
 
一軸鐵筆과 一張白紙를 支給함.(試驗 擔任人은 被試驗人과 抱擁함을 絶對 忌避할 것)
‘일축철필’은 쇠로 된 지팡이이다. ‘일축’은 그것을 짚고 의지하는 것이다. ‘철필(鐵筆)’은 쇠로 된 붓과 같은 것, 즉 쇠로 지팡이다. 환자들이 짚는 것이다. ‘일부시험’과 연결하여 지팡이를 철필로 표현했다.
일장백지는 한 장의 백지다. 원래는 진료기록 서류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병이 심각한 환자의 입장에서 진료기록 서류의 글이 전혀 보이지 않고, 또 시험 볼 때 백지를 지급하는 것과 연결하여 표현한 것이다. 환자가 지팡이를 짚고, 진료 기록을 받아서 촬영실을 나오는 장면이다.
시험을 담당한 의사는 환자와 포옹함을 절대 꺼리고 피한다. 환자로부터 병이 옮을까봐서 부축하기를 기피한다.
 
順次手術室로부터 被試驗人을 解放함
순차수술실은 엑스레이 촬영실과 수술실이다. 여기서는 엑스레이 촬영실이다. 수술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엑스레이 촬영실에서 촬영을 하고, 다음으로 수술실에서 수술을 순차적으로 해야 한다.
피시험인은 환자다. 환자가 촬영실에서 나온다. 힘겹게 촬영을 마치고 촬영실을 나오는 것은 해방이다.
 
翌日. 平面鏡의 縱軸을 通過하여 平面鏡을 二片에 切斷함
다음 날, 평면경 즉 엑스레이 사진의 세로축을 통과해서 평면경 즉 엑스레이 필름 통을 두 조각으로 절단한다. 필름 통에서 필름을 꺼내는 장면이다.
 
水銀塗抹 二回
엑스레이 필름을 현상한 것을 두고 말하는 것 같다. 수은을 도말한 거울에는 사람의 형상이 나타난다. 엑스레이 필름에는 환자의 모습이 나타난다. 수은도말을 2회 했다는 것은 엑스레이 필름에서 다시 형상이 드러나도록, 약품을 처리하여 현상한 것으로 보인다.
 
ETC 아직 그 滿足한 結果를 收得치 못 하였음
기타, 아직 그 만족한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화자는 엑스레이를 찍었으나, 병세가 나아지지 않았다. 엑스레이만 찍는다고 병이 낫지 않는다. 이부 시험을 볼 수밖에 없다. 이부시험은 수술이다.
 
第二部 試驗,  直立한 平面鏡 一, 助手 數名 
제이부 시험 즉 수술을 하기 위한 준비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직립한 평면경 한 개가 준비된다. 직립한 평면경은 세로로 세운 에스레이 필름을 말한다. 병원에 가면 벽면에 있는, 불빛이 있는 판 위에 엑스레이 필름을 걸어 놓고, 그것을 보면서 수술을 한다. 직립한 평면거울은 걸어 놓은 엑스레이 필름을 말한다.
조수 수명이 준비된다. 조수는 간호원이다. 간호원은 의사가 환자를 시험하기 위해서 준비한 조수다. 여러 명이 필요하다.
 
野外의 眞空을 選擇함
시험 즉 수술을 야외의 진공을 선택해 그곳에서 한다. 야외는 자신의 온 몸이 드러난 공간이다. 수술을 할 때 온 몸을 벗은 채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쓴 표현이다.
진공의 공간에서 시험 즉 수술을 한다. 진공에서는 숨을 쉴 수 없다. 숨을 쉴 수 없다는 것은 마취 상태와 유사하다. 옷을 벗고, 마취를 했다는 뜻이다.
 
爲先 痲醉된 上肢의 尖端을 鏡面에 附着시킴
우선 마취된 상지 즉 팔의 첨단 즉 뾰죽한 것을 거울면에 부착시킨다. 마취된 상지의 첨단은 수술 도구를 잡고 있는 의사의 손끝에 달린 수술 도구다. 의사의 팔을 마취된 상지로 표현한 것은 의사가 수술할 때 경직된 자세로 수술을 함을 표현한 것이다. 경직된 모습이 마치 마취된 모습과 흡사하다.
첨단을 경면에 부착시킨다는 것은 수술 도구를 엑스레이 필름에 부착시킨다는 의미다. 수술 도구의 뽀족한 끝을 환자의 몸에 부착시키지 않고, 필름에 부착시키는 것인지는 다음에 나온다.
 
平面鏡의 水銀을 剝落함
(수술 도구로) 평면경 즉 필름의 수은을 벗겨 낸다. 환자의 환부가 필름에 나타났고, 그 필름이 거울과 같다면, 거울 뒷면의 도말된 수은을 벗겨낸다면 환부가 거울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발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수술을 통하여 환부를 제거하는 것을 거울의 뒷면에 있는 수은을 벗겨내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平面鏡을 後退시킴. (이때 映像된 上肢는 반드시 硝子를 無事通過하겠다는 것으로 假說함) 上肢의 終端까지
평면경 즉 필름을 환자의 몸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이 때 필름이라는 평면경에 영상된 상지 즉 의사의 팔은 반드시 초자 즉 유리를 무사히 통과하겠다는 것을 가설한다. 필름 즉 거울에 영상된 의사의 팔이 거울을 통과하지 않는다면, 의사의 팔은 필름에 찍힐 것이고 결국 환자의 몸속에 남아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의사의 팔이 필름 즉 거울에 비쳐서 형상으로 남아 있지 않고 무사히 통과하여야 환자의 실제 몸에 의사의 팔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소 난해한 부분이다. 팔의 종단 곧 잡고 있는 수술 도구까지 거울을 무사히 통과하여야 한다.
 
다음 水銀塗抹. (在來面에) 이 瞬間 公轉과 自轉으로부터 그 眞空을 降車시킴. 完全히 二個의 上肢를 接受하기까지
다음으로 박락한 필름 즉 벗겨낸 거울에 수은을 다시 입힌다. 앞에서 거울의 수은을 벗겨 냄으로써 환부를 도려낸다고 하였는데, 수은이 벗겨진 부분을 그냥 두면, 그 부분은 환자의 영상이 투과해 버린다. 그러면 환자는 구멍이 뻥 뚫린 상태의 사람이 되고 만다. 따라서 수술 후에 다시 거울 면에 수은을 도말하여야 환부를 치료한 부분이 다시 필름에 촬영되고, 결국 환자의 몸이 정상이 되기 때문이다. 재래면은 본래부터 있었던 화자의 몸이다. 
이 순간 공전과 자전으로부터 그 진공을 해방시킨다. 공전과 자전은 화자가 마취된 상태다. 마취가 되면 어질어질하고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데, 이를 공전과 자전이라고 표현했다. ‘진공을 강차시킨다’는 것은 마취된 상태에서 깨어나게 한다는 의미다. 차를 타면 어지럽고 멀미를 한다. 마취도 이와 유사하다. 차에서 내리면 멀미가 사라진다.
두 팔을 환자가 완전히 접수할 때까지 마취를 해독한다. 상지를 접수하는 것은, 환자가 마취가 되었을 때는 두 팔을 양쪽으로 늘어뜨리는데, 마취에서 깨어나면 늘어뜨렸던 팔을 거두는 모습을 연상하여 표현한 것이다.
 
翌日. 硝子를 前進시킴. 連하여 水銀柱를 在來面에 塗抹함. (上肢의 處分)(惑은 滅形)
다음날, 유리를 전진시킨다. 환자의 몸 쪽으로 유리를 전진시키면 그 거울 혹은 필름과 달리 환자의 환부가 유리에 남지 않고 투과된다. 따라서 환자는 환부의 흔적이 거울 혹은 필름에 남지 않는다. 따라서 환부가 보이지 않는 환자의 몸은 정상적인 상태가 된다. 환자는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간 것이다.
계속해서 체온계를 재래면 즉 환재의 본래부터 있었던 몸에 도말한다. 여기서 도말한다는 것은 환자의 몸에 부착시킨다는 의미다. 체온을 재는 장면이다.
체온을 재는 것은 팔의 처분과 혹은 팔의 사라지는 형상과 관련이 있다. 체온을 잴 때의 팔의 모습을 상상하면 된다. 길게 뻗은 팔을 오므려 짧게 몸에 부착하는 모습이다.
 
其他. 水銀塗抹面의 變更과 前進後退의 重複 等
기타. 수술 후의 여러 가지 조처가 있었음을 나타낸다. 수술 후 다시 촬영을 했고, 필름에 다른 모습이 촬영되었다. 전진과 후퇴를 중복했다. 수술 후 여러 번 엑스레이 촬영을 했다. 기타 여러 가지 조처가 있었다.
 
ETC 以下 未詳
기타 이하는 자세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  烏瞰圖 詩第九號   銃口

每日같이烈風이불더니드디어내허리에큼직한손이와닿는다. 恍惚한指紋골짜기로내땀내가스며드자마자쏘아라. 쏘으리로다. 나는내消化器管에묵직한銃身을느끼고내다물은입에매끈매끈한銃口를느낀다. 그리더니나는銃쏘으드키눈을감으며한방銃彈대신에나는참나의입으로무엇을내배앝었더냐.


 ― <조선중앙일보> 1934. 8. 3 ―

 
 
銃口
이 시는 남자끼리의 동성애 경험을 표현한 시다. 두 남자가 서로를 상대의 성기를 입으로 애무하면서 성적으로 만족하여 사정하는 장면을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제목 ‘총구’는 정액을 쏘아 방출하는 남근을 비유한 것이다. 총알을 발사하는 총구, 정액을 총알처럼 쏘는 남근, 제목의 의미를 유추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每日같이 烈風이 불더니 드디어 내 허리에 큼직한 손이 와 닿는다.
매일같이 거센 바람이 불더니 드디어 화자의 허리에 큼직한 손이 와 닿았다. 여기서 ‘열풍(烈風)’은 ‘열풍(熱風)’과 다르다. 열풍(烈風)은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이다. 상대 쪽에서 화자 쪽으로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이다. 누군가가 화자에게 매일같이 동성애의 유혹을 보낸 것 같다.
그러더니 드디어 화자의 허리에 큼직한 손이 닿는다. 누군가가 화자를 성적 대상으로 느꼈는가 보다. 화자보다 큰 사람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화자보다 큼직한 손, 그리고 화자의 허리를 감싸는 손, 그 손의 주인공은 화자를 마치 남자가 여자의 허리를 감싸듯이 다정히 감싸고 있는 것으로 봐서 남성에게 성적 욕망을 느끼는 동성애자다.
恍惚한 指紋 골짜기로 내 땀내가 스며드자마자 쏘아라. 쏘으리로다.
황홀한 지문 골짜기로 땀내가 스며들었다. 화자가 상대의 남근을 잡고 열심히 애무했다. 땀이 손에 날 만큼 애무했다. 그러자 화자도 황홀함을 느끼는 순간, “사정하라. 나도 사정할 것이다.”라고 상대가 말했다.
나는 내 消化器管에 묵직한 銃身을 느끼고 내 다물은 입에 매끈매끈한 銃口를 느낀다.
화자는 자신의 소화기관 즉 입에, 묵직한 총신(銃身) 즉 곧 사정하려는 남근을 느끼고, 자신의 다문 입에 매끈매끈한 총구 즉 상대의 사정하여 정액으로 매끈매끈해진 남근을 느낀다.
그리더니 나는 銃 쏘으드키 눈을 감으며 한 방 銃彈 대신에 나는 참 나의 입으로 무엇을 내배앝었더냐.
그러더니 화자는 총을 쏘듯이 눈을 감고, 한 방 총탄 대신에 입으로 무엇을 뱉었다. 화자는 사정을 하지 못한 것 같다. 화자가 눈을 감은 것은 상대의 정액이 입에 들어오자 불결한 생각에 눈을 감은 것 같다. “쏘아라, 쏘으리로다”라고 말한 상대방은 화자에게 총탄 대신에 무엇을 쏘았고, 화자는 그 쏘은 것을 뱉은 것이다. 그것은 상대가 쏜 정액이다.




▣   烏瞰圖 詩第十號  나비

찢어진壁紙에죽어가는나비를본다. 그것은幽界에絡繹되는秘密한通話口다. 어느날거울가운데의鬚髥에죽어가는나비를본다. 날개축처어진나비는입김에어리는가난한이슬을먹는다. 通話口를손바닥으로꼭막으면서내가죽으면앉았다일어서드키나비도날아가리라. 이런말이決코밖으로새어나가지는않게한다
 

― <조선중앙일보> 1934. 8. 3 ―
 


찢어진 壁紙에 죽어가는 나비를 본다
찢어진 벽지에 걸려 있는,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기독을 상상해 본다. 죽어가는 나비는 기독이다. 기독은 팔을 벌리고 있다. 나비의 모습이다. 기독은 갈빗대가 드러났다. 연약한 모습이다. 기독은 피를 흘리고 있다. 죽어가는 모습이다. 따라서 화자는, 어느 집의 찢어진 벽지에 걸려 있는, 십자가에 매달린, 기독의 상을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왜 하필이면 십자가가 찢어진 벽지에 걸려 있을까. 1930년대, 찢어진 벽지를 바르고 사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은 교회에 많이 다녔을 것이다. 교회는 교회에 들어오는 헌금을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사용한다. 가난한 사람은 교회에 다녀야 그래도 무엇인가 얻을 수 있다. 아닐지도 모른다. 기독은 가난한 사람을 사랑한다. 가난한 이웃을 더욱 생각하는 종교가 기독교다. 가난한 사람은 기독 앞에서 심리적으로 평등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아닐지도 모른다. 가난한 사람은 이승에서는 가난하지만 저승에서라도 천당에 태어나서 고통이 덜하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기독은 가난한 사람들이 어려움을 참고 견디게 하는 힘을 나누어 주는 존재다. 
하여튼 찢어진 벽지에 걸려 있는 십자가는 가난한 어느 사람의 집에 걸려 있는 십자가다. <오감도 시제오호>, <오감도 시제십사호>, <백서>에 나오는, 어느 젊은 과부의 집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것은 幽界에 絡繹되는 秘密한 通話口다
십자가에 매달린 기독은 저승 세계에 왕래할 수 있는 비밀한 통화구다. 십자가에 매달린 기독은, 그에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면서 하늘에 있는 하나님과 대화를 할 수 있는 미밀스런 통화구다. 따라서 ‘그것은’ 십자가의 기독이다.
 
어느날 거울 가운데의 鬚髥에 죽어가는 나비를 본다
어느 날 화자는, 거울 가운데의 수염에 죽어가는, 나비를 보고 있다. 거울은 실제는 아니되, 실제와 닮은 상을 보여주는 도구다. 따라서 거울에 비친 수염은 기독의 수염과 유사한 어떤 것이다. 그런데 가운데의 수염이다. 기독의 수염은 얼굴에 났고, 거울에 비친 기독의 수염을 닮은 수염은 가운데에 났다. 그렇다면 수염은 여자의 음모다. 
그 음모에 붙어서 죽어가는 나비는 십자가에 매달린 기독과 닮은 것이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는 기독이 두 팔을 벌리고 힘없이 늘어져 있는 모습은 나비의 모습과 유사하다. 나비는 화자의 힘없이 늘어진 남근이다. 고환이 양쪽에 있고, 그 고환 사이에 축 늘어진 남근은 십자가에 매달려 힘없이 늘어진 기독이다. 죽어가는 나비다.
 
날개 축 처어진 나비는 입김에 어리는 가난한 이슬을 먹는다
날개가 축 처진 나비 곧 남근은, 입김에 어리는 가난한 이슬을 먹는다. 나비가 이슬만 먹고 살듯이, 화자의 남근은 가운데 수염 즉 음모가 수염처럼 난 여성의 성기의 입구에 어리는 체액을 먹는다. 그런데 그 체액이 가난한 이슬이다. 힘이 없어 축 처진 화자의 남근은 여성에게 제대로 만족시키지 못한다. 여성의 음부에서는 체액이 많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가난한 이슬만 먹는다.
 
通話口를 손바닥으로 꼭 막으면서 내가 죽으면 앉았다 일어서드키 나비도 날아가리라
벽지가 찢어진 집에 사는 사람이, 십자가를 손바닥으로 꼭 쥐면서 무릎을 꿇고 앉아서, ‘내가 죽으면~~천당에 가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를 마친 다음 일어서듯이, 화자도 자신의 힘없는 남근을 정액이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꼭 잡고 자위를 하면, 마치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사람이 기도가 끝나면 일어서듯이, 화자의 늘어진 남근도 일어설 것이다. 제대로 발기될 것이다. 
<오감도 시제십사호>에 보면 여성에 대한 이상의 의식의 근원을 엿볼 수 있다. 여성도 끊임없이 성적으로 만족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므로 이상은 여자와의 관계는 성적으로 얼마나 잘 만족시켜 줄 수 있는가가 여성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라는 믿는다. 이런 이상으로서 잘 발기되지 않는 자신의 남근은 고민이었을 것이다.
이상은 자신의 남근이 잘 발기가 되지 않고 힘이 없는 것은 자주 정액을 분출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나름대로 힘찬 남근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자위를 할 때나 혹은 여자와 관계할 때, 정액을 분출하지 않고 한다면, 그 정액이 밖으로 나가지 않음으로써 늘 힘찬 남근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나름대로 비법을 터득한 것이다.
이런 말이 決코 밖으로 새어나가지는 않게 한다
나름대로 터득한 비법을 남들에게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   烏瞰圖 詩第十一號 

그사기컵은내骸骨과흡사하다. 내가그컵을손으로꼭쥐었을때내팔에서는난데없는팔하나가接木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닥에메여부딪는다. 내팔은그사기컵을死守하고있으니散散이깨어진것은그럼그사기컵과흡사한내骸骨이다. 가지낫든팔은배암과같이내팔로기어들기前에내팔이或움직였든들洪水를막은白紙는찢어졌으리라. 그러나내팔은如前히그사기컵을死守한다.

 ― <조선중앙일보> 1934. 8. 4 ―
 
 
이상의 언어 구사는 상식적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상의 시는 난해하다는 것은 늘 타당한 명제였다. 난해하다는 것은 풀이가 어렵다는 말이다. 난해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과는 다르다. 난해하다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상을 천재 시인이라고 말한다. 타당한 명제다. 그러나 왜 천재 시인인지는 잘 설명하지 않는다. 자신이 모른다고 해서 상태를 천재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른다는 것이 천재의 진정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이유를 밝혀야 한다. 이제는 이상의 천재성은 언어 구사의 천재성, 수사적 천재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상은 시에서 수사의 천재다. 그러면 이상의 수사적 문제를 이해하면 이상 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사기컵은 내 骸骨과 흡사하다
사기컵은 무엇인가를 비유한 것이다. 내 해골도 무엇인가를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각각 비유된 사기컵과 내 해골은 또 그 어떤 유사한 속성을 공유한다. 이 정도만 문장을 분석할 능력이 있어도 이 구절의 의미를 상상하는데 도움이 된다.
사기컵의 속성은 깨지기 쉬운 것이다. 사기컵처럼 깨지기 쉬운 어떤 속성을 가진 어떤 대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 사기컵은 내 해골과 흡사하다고 했다. 먼저 내 해골이 무엇을 비유한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 해골, 사기컵처럼 깨지기 쉬운 내 해골은 무엇을 비유한 것인가. 이상의 시를 두루 읽어본 사람, 그리고 그 두루 읽어본 시의 의미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만이 ‘내 해골’이 무엇을 비유했는지를 알아차릴 것이다.
내 해골은 화자의 남근이다. 화자의 해골 즉 화자의 모습과 화자의 남근은 형태상 유사하다. 머리통 모양의 귀두, 목처럼 잘록한 귀두 아래, 그리고 몸통과 같은 이하 부분은 마치 사람의 상체 형상이다.
이 시에서 화자는 청소년기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청소년기의 화자의 남근은 성적 민감성으로 깨지기 쉬운 속성을 가졌다. 깨진다는 것은 여자를 보면 쉽게 흥분하고, 또 여자와 접하여 쉽게 사정을 하는 것을 말한다. 흔히 동정이 깨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사기컵으로 비유된 대상은 어떤 처녀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 처녀는 사기컵처럼 깨지기 쉬운 속성을 가지고 있다. 처녀성은 깨지기 쉬운 것이다. 결국 사기컵은 화자의 해골과 비슷하다. 처녀는 화자와 생김새도 비슷하며, 처녀는 화자의 남근처럼 깨지기 쉬운 속성도 지녔다. 이제부터 사기컵은 어느 처녀다.
 
내가 그 컵을 손으로 꼭 쥐었을 때 내 팔에서는 난데없는 팔 하나가 接木처럼 돋히더니 그 팔에 달린 손은 그 사기컵을 번쩍들어 마룻바닥에 메여 부딪는다
화자가 그 처녀를 손으로 꼭 쥐었을 때, 팔에서는 난데없이 팔 하나가 마치 접목하듯이 돋아났고, 그 팔에 달린 손이 처녀를 번쩍 들어서 마룻바닥에 메어 부딪게 했다. 
화자가 처녀를 손으로 꼭 쥐었다. 조그만 사기컵을 손으로 꼭 쥐는 모습은, 커다란 처녀를 포옹하는 모습이다. 그러자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어떤 팔이 돋아나서 그 처녀를 번쩍 들어서 마룻바닥에 쿵 하고 눕혔다. 성적 감수성이 예민한 화자가 처녀를 포옹하는 순간,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처녀를 범하려는 순간이다.
 
내 팔은 그 사기컵을 死守하고 있으니 散散이 깨어진 것은 그럼 그 사기컵과 흡사한 내 骸骨이다
화자의 팔은 그 처녀를 사수하고 있으니, 화자는 처녀를 눕혀 놓은 채 꼭 껴안기만 하고 있으니, 산산이 깨어진 것은 처녀가 아니다. 그것은 처녀와 속성이 흡사한 화자의 남근이다. 화자는 처녀를 범하지 않은 채 사정했다. 화자만 깨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동정이 깨진 것이다.



▣   烏瞰圖 詩第十二號

때묻은빨래조각이한뭉텅이空中으로날라떨어진다.그것은흰비둘기의떼다.이손바닥만한한조각하늘저편에戰爭이끝나고平和가왔다는宣傳이다.한무더기비둘기의떼가깃에묻은때를씻는다.이손바닥만한하늘이편에방망이로흰비둘기의떼를때려죽이는不潔한戰爭이始作된다.空氣에숯검정이가지저분하게묻으면흰비둘기의떼는또한번이손바닥만한하늘저편으로날아간다
 
― <조선중앙일보> 1934. 8. 4 ―


 
과거에, 군인들만 살아가는 병영은 남성들만의 공간이다. 젊은 군인들이 병영에서 풀려났을 때, 제일 먼저 찾는 곳이 창녀촌인 것 같다. 병영에서 성적 욕망을 해결할 수 없었던 젊은 군인들은 휴가를 나온다던가 하면 제일 먼저 찾는 곳이 창녀촌이다.
때 묻은 빨래조각이 한 뭉텅이 空中으로 날라 떨어진다. 그것은 흰 비둘기의 떼다.
때 묻은 빨래조각이 한 뭉텅이 공중으로 날아 떨어진다. 창녀촌을 찾아 성적 욕망을 해결하고자 하는 젊은 군인이 옷을 벗어서 공중에 급히 내던지며 서두르는 모습이다. 그것은 흰 비둘기 떼다. 속옷의 흰 색깔과 비둘기의 흰 색깔은 유사하다. 전시에는 군인이 병영 밖으로 나올 수 없으나 평화 시에는 병영 밖으로 휴가를 나올 수 있다.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한다. 그래서 공중으로 날았다가 떨어지는, 급히 벗어 던지는 때 묻은 빨래조각을 흰 비둘기 떼라고 말하고 있다. 
오랫동안 성욕을 해결하지 못한 군인들은 ‘때 묻은 빨래조각’을 벗어던지는 것일까. 이 시에는 성욕을 해결하는 것을 방망이질하여 때를 씻는 행위로 나타내고 있는데, 왜 그런 발상을 한 것일까. 참으로 궁금했고, 고민했던 대목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겠다. 오랫동안 풀지 못한 성욕은 늘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갖는다. 때가 묻은 옷은 그것을 벗어버리고 싶은 욕망을 갖는다. 묵었던 성욕을 해결하고 나면 마음이 상쾌해진다. 때가 묻은 옷을 벗어 세탁을 해서 입으면 상쾌해진다. 따라서 오랫동안 묵은 성욕을 해결하는 것은 마치 빨래를 하는 것과 같다. 여자와 성교를 하는 것도 빨래 방망이질을 하는 것과 유사한 행위다. 
그래서 창녀촌에 찾아온 군인들은 급히 때가 묻은 옷을 벗어버리고, 묵은 성욕을 해결한다. 그러나 성욕은 한 번 해결한다고 해서 영원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또 시간이 지나면 쌓인다. 빨래도 한 번 빨아 입는다고 해서 영원히 깨끗한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때가 낀다.
이 손바닥만한 한 조각하늘 저편에 戰爭이 끝나고 平和가 왔다는 宣傳이다.
이 손바닥만한 한 조각하늘 저편은, 손바닥만한 창녀촌 저편을 가리킨다. 병영이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오면 군인들은 병영에 나와 창녀촌을 찾는다. 창녀촌에 군인들이 몰려올 때는 병영에 평화가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무더기 비둘기의 떼가 깃에 묻은 때를 씻는다. 이 손바닥만한 하늘 이편에 방망이로 흰 비둘기의 떼를 때려죽이는 不潔한 戰爭이 始作된다.
일군의 군인들이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성욕의 때를 씻어내고 있다. 이 손바닥만한 하늘 이편은 창녀촌이다. 창녀촌의 방들은 좁다. 창녀촌에서는 방망이로 흰 비둘기 떼를 때려죽이는 불결한 전쟁, 오래 묵은 성욕의 때를 씻어서 깨끗하게 하는 싸움이 시작됩니다. 방망이는 남근의 암유다. 방망이와 같은 남근으로 묵은 성적 욕망의 때를 씻는 불결한 전쟁, 마치 때가 묻은 빨래를 하는 듯한, 요란한 전쟁이 시작된다. 마침내 창녀촌은 방망이질하는 군인들과 창녀들의 교성으로 전쟁터처럼 시끄러워 진다. 아니 서로 전쟁하듯이, 싸움하듯이 끌어안고 씩씩거린다.
空氣에 숯검정이가 지저분하게 묻으면 흰 비둘기의 떼는 또 한 번 이 손바닥만한 하늘 저편으로 날아간다.
공기에 숯검정이가 지저분하게 묻는 것은 공기가 깜깜해지는 것이다. 그러면 군인들이 또 한 번 이 손바닥만한 창녀촌을 떠나서 병영으로 들어간다. ‘또 한 번’이라는 말로 봐서, 병영이 평화로울 때마다 일군의 군인들이 창녀촌을 찾는 것으로 보인다.



▣   烏瞰圖 詩第十三號

내팔이면도칼을든채로끊어져떨어졌다. 자세히보면무엇에몹시威脅당하는것처럼새파랗다. 이렇게하여잃어버린내두개팔을나는燭臺세움으로내방안에裝飾하여놓았다. 팔은죽어서도오히려나에게怯을내이는것만같다. 나는이러한얇다란禮儀를花草盆보다도사랑스레여긴다.

 ― <조선중앙일보> 1934. 8. 7 ―

 
내 팔이 면도칼을 든 채로 끊어져 떨어졌다.
이 시에는 두 개의 팔이 나온다. 과연 이 시에 등장하는 두 개의 ‘팔’은 무엇인가? 고민스럽다. 들여다봐도 들여다보아도 이해가 가지 않는 골칫거리다. 이렇게 생각해 보겠다. 팔은 몸에서 돋아난 것이다. 화자의 두 개의 팔은 화자의 몸에서 돋아난, 팔과 같은 것 두 개를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는 팔이고, 하나는 남근이다.
화자의 팔이, 면도칼을 든 재로 끊어져 떨어졌다. 여기서 면도칼은 두 개의 팔 중의 하나인 남근이다. 남근이 왜 면도칼이 될까. 면도칼은 무엇을 예리하게 베어서 벤 자국에 틈이 벌어지게 하며, 살을 베고 그 끝에는 피가 묻어 있다. 화자의 발기된 남근은 여체의 어느 한 부분을 예리하게 베어서 찢고 싶은 욕망, 즉 여자의 몸속에 사정하고 싶은 욕망을 가진 것이다. 그리고 끝에 정액이 묻어 있다.
화자의 팔이 면도칼인 남근을 손에 든 채로 떨어졌다. 한참 자위를 하던 화자가 사정 후, 갑자기 팔의 동작이 멈추고, 정액이 끝에 조금 묻어 있는 남근을 손으로 잡은 채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이다. 사정 후에 갑자기 멈추는 팔의 동작, 그리고 갑자기 줄어드는 남근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또 자위를 한 후에 낙담하여 물끄러미 남근을 바라보는 장면이라고 해도 좋다. 왜 낙담을 하여 물끄러미 바라볼까. 남근에서 정액이 마치 칼끝에 묻은 핏방울처럼 조금밖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면 무엇에 몹시 威脅당하는 것처럼 새파랗다. 
자세히 보면, 사정을 한 남근은 무엇에 몹시 위협당하는 것처럼 새파랗다. 위협을 당하는 사람은 새파랗게 질려서 몸을 움츠린다. 붉은 남근이 색이 힘을 잃으면서 작아졌다. 아니 정액이 끝에 조금 나와 있는 남근을 보면서,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 그런가 하고 몹시 걱정을 하는 것이다. 그것을 남근이 위협당한다고 표현했다.
이렇게 하여 잃어버린 내 두 개 팔을 나는 燭臺세움으로 내 방안에 裝飾하여 놓았다. 
이렇게 하여 잃어버린 화자의 두 개 팔, 떨어진 두 개의 팔을 화자는 촉대세움으로 화자의 방 안에 장식하여 놓았다. 마치 나란히 장식해 놓은 두 개의 촉대를 감상하듯이, 자위를 한 후, 조금밖에 정액을 쏟아내지 못한 남근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이다. 장식물은 오래도록 바라보며 감상하기 위한 것이다.
팔은 죽어서도 오히려 나에게 怯을 내이는 것만 같다. 나는 이러한 얇다란 禮儀를 花草盆보다도 사랑스레 여긴다.
팔은 죽어서도 오히려 화자에게 겁을 내이는 것만 같다.  ‘내이다’는 ‘내게 하다’의 의미, 사동의 의미다. 팔이 화자에게 겁을 내게 한다는 뜻이다. 자위한 주체는 팔이다. 팔이 자위를 함으로서 면도칼로 비유된 화자의 남근은 사정을 했고, 남근의 끝에는 핏방울과 같은 정액이 조금 묻어 있다. 자위를 한 팔은, 자위 후에 남근을 바라보고 있는 화자에게 겁을 내게 하려는 듯이, 피와 같은 정액을 조금 묻도록 한 것이다. 마치 이제는 자위를 하지 말라는 듯이 정액을 남근 끝에 조금 남겨놓은 것이다.
나는 팔의 이러한 얇다란 예의를 화초분보다 사랑스럽게 여깁니다. ‘팔의 이러한 얇다란 예의’는 자위를 하여 사정을 한 후 남근의 끝에 정액을 조금 묻게 해 놓음으로써 화자에게 겁을 먹게 하는 예의다. 자위를 자주 하지 말라고 젊잖게 일러주는 예의다. 화자는 그것을 ‘화초를 키우는 화분과 같이, 안에 생명을 키우는 여자보다 더 사랑스럽게 여긴다.
왜 화자는 이런 생각을 했을까. 자위 후 남근에서 정액이 조금 나온 것은, 자위를 자주 하면 건강에 해롭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다. 따라서 자위를 한 주체인 팔은 예의가 있는 놈이다. 그런데, 화초분 즉 여자는 그렇지 않다. 상대가 끊임없이 자신을 만족시켜주기를 바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자가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상의 의식 속에서 여자는 성적으로 만족을 시켜줘야 한다는 강한 강박관념이 들어있는 것 같다. 이러한 이상의 내면 의식을 엿볼 수 있는 시로는, <백서>가 대표적이며, 그 이외에도 <화로>, <오감도 시제십사호> 등에도 나타난다.
 


▣   烏瞰圖 詩第十四號

古城앞에풀밭이있고풀밭위에나는帽子를벗어놓았다. 城위에서나는내記憶에꽤무거운돌을매어달아서는내힘과距離껏팔매질쳤다. 抛物線을逆行하는歷史의슬픈울음소리. 문득城밑내帽子곁에한사람의乞人이장승과같이서있는것을나려다보았다. 乞人은성밑에서오히려내위에있다. 或은綜合된歷史의亡靈인가. 空中을向하야놓인내帽子의깊이는切迫한하늘을부른다. 별안간乞人은慓慓한風彩를허리굽혀한개의돌을내帽子속에치뜨려넣는다. 나는벌써氣絶하였다. 심장이頭蓋骨속으로옮겨가는地圖가보인다. 싸늘한손이내이마에닿는다. 내이마에는싸늘한손자국이烙印되어언제까지지어지지않았다.

 ― <조선중앙일보> 1934. 8. 7 ―
 
 
古城 앞에 풀밭이 있고 풀밭 위에 나는 帽子를 벗어 놓았다.
이 시는 화자가 어느 과부와 성교를 한 것을 회상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성은 오래되고 낡은 옛 성이다. 그 성에는 원래 누군가가 살았었다. 그러나 그 후로 주인이 없는 성, 오랫동안 비워서 낡은 성, 이는 곧 주인이 없는 과부의 음부를 표현한 것이다. 고성 앞에는 풀밭이 있었다. 풀밭은 과부 음부에 난 음모다. 그 풀밭 위에 모자를 벗어 놓았다. 발기가 되어 귀두가 드러난 남근은 마치 모자를 벗은 사람의 머리 형상이다.
城 위에서 나는 내 記憶에 꽤 무거운 돌을 매어달아서는 내 힘과 距離껏 팔매질 쳤다.
화자는 자신이 기억하기에 꽤 무거운 돌을 매달아서, 성 위에서, 힘과 거리껏 팔매질을 쳤다. 과부의 성기에 자신의 남근을 힘차게 내리 쳤다는 말이다. 꽤 무거운 돌은 아래로 무겁게 떨어진다. 팔매질 치는 행위는 힘차게 내던지는 행위이며, 무거운 돌은 아무리 팔매질 쳐도 곧바로 아래로 무겁게 떨어지게 마련이다. 힘차게 과부의 음부를 향해서 남근을 내리 던지듯이 꽂았다는 뜻이다.
抛物線을 逆行하는 歷史의 슬픈 울음소리.
포물선을 역행하는 역사의 슬픈 울음소리가 들렸다. 과부의 음부를 향해서 힘차게 남근을 내리 꽂자, 과부는 마치 포물선처럼 몸을 뒤로 젖히면서 성적 쾌감을 느끼며 교성을 질렀을 것으로 보인다. 포물선처럼 몸을 뒤로 젖히는 행위는 화자로부터 과부가 멀어지는 동작이다. 마치 화자가 싫어서 몸을 피하는 동작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포물선을 역행하여 들려오는 역사의 슬픈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그 젖힌 과부의 몸을 역행하여 도리어 포물선을 타고 여자의 교성이 화자 쪽으로 들려온 것이다. 여기서 ‘역사의 슬픈 울음소리’는 오랫동안 남자를 접하지 못한 여자의 슬픈 울음과도 같은 환희의 교성이라 할 것이다.
문득 城 밑 내 帽子 곁에 한 사람의 乞人이 장승과 같이 서 있는 것을 나려다보았다. 乞人은 성밑에서 오히려 내 위에 있다.
문득, 여자의 음부 밑, 화자의 발기되어 귀두가 벗겨진 남근 곁에, 한 사람의 걸인이, 장승과 같이 서 있는 것을, 화자가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걸인은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기독과 과부를 모두 지칭하는 말이다. 기독은 마치 제대로 먹을 것을 먹지 못한 걸인처럼 갈빗대를 드러내고 있다. 그동안 성에 굶주린 과부 또한 걸인이다. 
그런데 그 걸인이 장승과 같이 서 있다. 장승처럼 우뚝 서 있다. ‘장승처럼 서 있다’라는 말은 높은 곳에 우뚝 서 있는 모습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장승처럼 서 있는 걸인은 과부와 관계하는 방에 있는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기독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화자의 몸 위에 있는 과부를 의미한다.
기독과 과부의 음부 밑에서 바라보는 화자의 눈에는 오히려 그들이 화자의 위에 있다. 과부가 여성 상위 체위로 위에서 있고, 화자가 아래에 있으며, 아래에 있는 화자가 바라보기에 십자가의 기독은 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보면 화자는 당시 여자의 경험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여자의 경험이 없는 화자를 상대하는 과부는 자신이 직접 화자의 몸에 올라서 능동적으로 성행위를 했을 것이다.
或은 綜合된 歷史의 亡靈인가. 空中을 向하야 놓인 내 帽子의 깊이는 切迫한 하늘을 부른다. 별안간 乞人은 慓慓한 風彩를 허리굽혀 한 개의 돌을 내 帽子 속에 치뜨려 넣는다. 나는 벌써 氣絶하였다. 
공중을 향하여 내놓인 화자의 모자의 깊이 즉 화자의 남근도 과부의 음부의 깊은 곳에서 절박한 하늘을 부르고 있었다. 화자의 남근도 몹시 급하게 절정에 도달하여 사정을 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절박한 하늘’을 부르는 것’은 몹시 급하게 절정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늘은 높은 것이고, 높은 것은 절정이다. ‘절정(絶頂)’은 가장 높은 꼭대기를 의미한다. 또 하늘은 하나님이다. 
화자는 어느 순간 과부에게 ‘사정하고 싶어요’라고 말했을 것이다. 성교 상항을 상상해 보자. 화자가 볼 수 있는 대상은 십자가에 매달린 기독이다. 그러나 화자가 ‘사정하고 싶다’라고 말한 실제의 대상은 과부다.
그러자 별안간 화자의 기도를 기독의 하나님이 들어주듯이, 걸인인 기독은 표표한 풍채를 굽혀서 내려다보고, 과부는 또 표표한 풍채를 굽혀서 즉 공중에서 가볍게 나부끼듯이 몸체를 굽혀서, 한 개의 돌을 화자의 모자 속에 치뜨려 넣는다. 여자가 위에서 힘차게 남근을 향하여 엉덩이를 내리쳤다. 화자는 벌써 기절하였다. 화자는 이미 사정을 하고 화자의 남근이 힘을 잃고 늘어졌다.
화자는 이것을 ‘혹은 종합된 역사의 망령인가?’하고 생각한다. 남편이 없는 과부의 욕망, 성욕을 해결할 상대가 없는 화자의 욕망, 그리고 이들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는 기독의 하나님, 타락한 종교가 종합된 역사의 망령이다.
심장이 頭蓋骨 속으로 옮겨가는 地圖가 보인다. 싸늘한 손이 내 이마에 닿는다. 내 이마에는 싸늘한 손자국이 烙印되어 언제까지 지어지지 않았다.
심장이 두개골 속으로 옮겨가는 지도가 보인다. 감정은 심장에 있다. 이성은 두개골 속에 있다. 성적 충동의 감정으로 과부와 관계를 맺었던 화자는 이제 점점 이성적으로 이를 생각하게 된다. 화자의 생각이 옮겨가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 지도다.
싸늘한 손이 화자의 이마에 닿는다. 성교가 끝나고 화자는 냉정한 현실로 돌아와 자신의 손으로 머리를 짚으면서 생각한다. 화자의 이마에는 싸늘한 손자국이 낙인되어 언제까지 지워지지 않았다. 화자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았고, 그 생각이 오랫동안 화자의 뇌리에서 마치 낙인된 것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기독이 있는 곳에서, 과부와의 관계 후에,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그리고 어떤 생각이 오랫동안 화자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는지 나와 있지 않다. 추리해 보자.
사람에게 있어서 성적 욕망과 이것의 충족은 종교적 믿음보다 앞선다는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오랫동안 성에 굶주린 과부, 성적인 욕망은 있으되 이를 충족할 방법이 없었던 화자, 성적인 욕망은 종교적 믿음보다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여자들에게 성적 욕망을 충족시켜 주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시에 자주 나타나는데, 이것은 과부와의 첫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오감도 제오호>에도 이와 유사한 상황이 등장한다.



▣   烏瞰圖 詩第十五號

     1
나는거울없는室內에있다.
거울속의나는역시外出中이다.
나는至今거울속의나를무서워하며떨고있다.
거울속의나는어디가서나를어떻게하려는陰謨를하는中일까.
 
     2
罪를품고식은寢床에서잤다.
確實한내꿈에나는缺席하였고
義足을담은軍用長靴가내꿈의白紙를더럽혀놓았다.
 
     3
나는거울속에있는室內로몰래들어간다.
나를거울에서解放하려고.
그러나거울속의나는沈鬱한얼굴로同時에꼭들어온다.
거울속의나는내게未安한뜻을傳한다.
내가그때문에囹圄되어있드키그도나때문에囹圄되어떨고있다.
 
     4
내가缺席한나의꿈.
내僞造가登場하지않는내거울.
無能이라도좋은나의孤獨의渴望者다.
나는드디어거울속의나에게自殺을勸誘하기로決心하였다.
나는그에게視野도없는窓을가리키었다.
그窓은自殺만을爲한들窓이다.
그러나내가自殺하지아니하면그가自殺할수없음을그는내게가르친다.
거울속의나는不死鳥에가깝다.
 
     5
내왼편가슴心臟의位置를防彈金屬으로掩蔽하고
나는거울속의내왼편가슴을겨누어券銃을發射하였다.
彈丸은그의왼편가슴을貫通하였으나그의心臟은바른편에있다.
 
     6
模型心臟에서붉은잉크가엎질러졌다.
내가遲刻한내꿈에서나는極形을받았다.
내꿈을支配하는者는내가아니다.
握手할수조차없는두사람을封鎖한巨大한罪가있다.

 ― <조선중앙일보> 1934. 8. 8 ―
 
 
‘거울’은 거울인가? 이상의 시에는 거울과 관련된 몇 편의 시가 나온다. <거울>이 있고, <명경>이 있다. 거기에서 거울은 거울이 아니고 사진이다.
이상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을까? 그 대강을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이상은 우리 나이 셈법으로 네 살 때, 큰아버지에게 양자를 간다. 자식이 없었던 큰아버지는 이상을 양자로 맞은 것이다. <역단>에 보면 가난했던 생부는, 총독부에 기술직으로 있어서 비교적 잘 살던 큰아버지로부터 얼마간의 돈을 받고, 또 아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맏아들인 이상을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보낸다. 큰아버지는 그 후 어느 젊은 여자를 첩으로 맞아서 아들을 낳는다. 
그러나 이상은 어려서부터 똑똑하여 큰아버지는 이상을 미워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어린 시절 이상은 점점 자라면서 자신이 큰아버지의 진짜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갈등한다. <역단(易斷)>은 점점 자라면서 큰아버지가 자신을 낳은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갈등하는 것을 표현한 가장 대표적인 시다.
이상은 1910년생이다. 이 시는 1936년에 썼다. 이상의 나이 27세 때다. 그 동안 이상은 자란다. 자라면서 자신을 양자로 보낸 생부에 대한 반감, 큰아버지 집에서 대를 이어가는 존재로 살아야 하는, 타의적 운명에 대한 거부감 등이 항상 이상의 가슴에 크게 자리잡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시에 이런 의식이 엿보인다. 
그리고 총독부 기수직을 그만둔다. 폐병으로 백천온천에 요양을 간 것도 이 시절이다. 고독했던 이상은 백천온천에서 금홍이를 만나고, 금홍이에게 사랑을 느낀다. 금홍이는 이상이 매우 좋아했던 여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상의 삶과 관련하여 이 시를 읽어 보자. 과연 이 시에서 ‘거울’은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한 단어로 바꾸기 어렵다. 거울 속의 나는 거울을 보고 있는 나와 닮았다. 그러나 좌우가 바뀌어 반대로 되었다. 기억 속의 어린 시절의 화자는 현재의 화자와 닮았다. 그러나 그 삶에 있어서는 반대되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거울은 무엇을 비추면, 무엇과 무엇이 비춘 것은 닮았으면서도 반대다. 따라서 거울은 일단 무엇을 보는 도구다. 하여튼 그런 것이다.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이 시에서도 때에 따라서 거울의 속성을 빌어 다양하게 사용했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의미를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 시는 각 연 앞에 번호가 붙어 있다. 그것은 각 연이 독립된 어떤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번호가 없이 연이 이어질 경우에는 전체 연이 하나의 장면에서 서로 연결되어 의미를 구성한다. 그러나 번호를 붙였을 경우는 각 번호에 따라 장면은 각각 다르다. 시를 이해하기 전에 알아두면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1 / 나는 거울 없는 室內에 있다. / 거울 속의 나는 역시 外出中이다. / 나는 至今 거울 속의 나를 무서워하며 떨고 있다. / 거울 속의 나는 어디 가서 나를 어떻게 하려는 陰謨를 하는 中일까.
(화자는 어린 시절의 자신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자신이 자란 큰아버지 집이 아닌, 어딘가의 실내에 있다. 화자가 집을 나온 것이다. 과거의 삶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나는 지금 거울이 없는 실내에 있다. 과거의 기억을 떨쳐버리려고 집을 나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어느 공간에 있다. 어린 시절의 나 역시 지금 외출중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그 어느 공간에 있는 나에게,  과거의 기억이 따라 온 것이다. 과거의 기억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과거의 기억이 무서워서 화자는 지금 떨고 있다. 아마 이렇게 끈질기게 과거의 기억이 나를 따라다니는 것으로 봐서, 그 과거의 기억은 어디선가 나를 어떻게 하려는 음모를 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2 / 罪를 품고 식은 寢床에서 잤다. / 確實한 내 꿈에 나는 缺席하였고 / 義足을 담은 軍用長靴가 내꿈의 白紙를 더럽혀 놓았다.
죄를 품고 차디찬 침상에서 잤다. 잠 속에서 내가 과거로 돌아가서 큰아버지 집에서 살고 있는 꿈을 꾸었다.
과거 어린 시절, 나는 확실한 미래에 대한 꿈을 꾸며 살았다. 그런데 그 꿈에 나는 없었다. 나의 꿈은 큰아버지의 꿈, 이를테면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한 큰아버지의 꿈만 거기에 있었다. 의족을 담은 군용장화 곧 진짜 아버지가 아닌, 군용장화를 신고 다니던 큰아버지가 화자를 양자로 들임으로써 화자의 꿈의 백지를 더럽혀 놓았다. 큰아버지가 나의 진짜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의 꿈은 추하고 더럽게 생각되었다.
3 / 나는 거울 속에 있는 室內로 몰래 들어간다. / 나를 거울에서 解放하려고. / 그러나 거울 속의 나는 沈鬱한 얼굴로 同時에 꼭 들어온다. / 거울 속의 나는 내게 未安한 뜻을 傳한다. / 내가 그 때문에 囹圄되어 있드키 그도 나 때문에 囹圄되어 떨고 있다.
나는 거울 속에 있는 실내로 몰래 들어간다. 과거에 나는 큰아버지 집을 나와서 어느 ‘실내’로 몰래 들어간 적이 있다. 그것은 나를 거울에서 해방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거울 속의 나는 침울한 얼굴로 동시에 꼭 그 실내에 들어온다. 과거에 큰아버지 집에서의 삶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보려고, 큰아버지 집을 나와서 아무도 모르는 어느 실내로 들어간 적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큰아버지 집에서의 기억들이 침울한 얼굴을 하고 동시에 꼭 그 실내에 들어왔다. 큰아버지 집에서의 삶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었고, 새로운 삶도 시작할 수 없었다.
과거에 큰아버지 집에서의 삶을 떨치고 새로운 삶을 시도했던 그 과거의 내가, 지금 또 큰아버지 집에서의 삶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도하려는 지금의 나에게 편안하지 않은 뜻을 전한다. 지금의 나도 결국 큰아버지의 집에서의 삶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도했던 과거의 나처럼 실패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미안한 뜻을 전한다. 과거의 내가 미안한 뜻을 전하는 것은, 내가 큰아버지 집에서의 삶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도했던 과거의 나에게 갇혀 있듯이, 그도 지금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나에게 갇혀서 떨고 있다.
결국 화자는 과거의 경험으로 봐서 새로운 삶을 위한 시도는 실패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고,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할 것이다.
4 / 내가 缺席한 나의 꿈. / 내 僞造가 登場하지 않는 내 거울. / 無能이라도 좋은 나의 孤獨의 渴望者다. / 나는 드디어 거울 속의 나에게 自殺을 勸誘하기로 決心하였다. / 나는 그에게 視野도 없는 窓을 가리키었다. / 그 窓은 自殺만을 爲한 들窓이다. / 그러나 내가 自殺하지 아니하면 그가 自殺할 수 없음을 그는 내게 가르친다. / 거울 속의 나는 不死鳥에 가깝다.
나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내가 결석한 나의 과거의 삶. 나는 그러한 삶에서 벗어나, 내 위조가 등장하지 않는 내 삶을 살아야 한다. 미래에 가서 거울로 비춰보듯이 삶을 되돌아 봤을 때, 위조된 삶이 사라지고 나만의 의지로 이룩한 나의 미래를 떠올려 본다. 내가 꿈꾸는 미래의 나는 무능이라도 좋은 나의 고독의 갈망자다.
나는 드디어 기억 속의 과거의 나에게 자살을 권유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그에게 시야도 없는 창을 가리키었다. 그 창은 오직 과거의 기억을 잊기 위한 들창이었다. 과거를 잊기 위해 무엇인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어떤 것에 희망을 걸었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문학에 몰두하는 것 등이 거기에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자살하지 아니하면 그가 자살할 수 없음을 나에게 가르친다. 그 과거를 잊기 위한 들창에도 과거 기억 속의 자신이 등장하는 의미다. 이를테면 과거를 잊기 위한 문학 속에도 결국 자신의 과거 이야기가 등장한다는 말이다. 그는 불사조에 가깝다.
5 / 내 왼편 가슴 心臟의 位置를 防彈 金屬으로 掩蔽하고 / 나는 거울 속의 내 왼편 가슴을 겨누어 券銃을 發射하였다. / 彈丸은 그의 왼편 가슴을 貫通하였으나 그의 心臟은 바른 편에 있다.
그래서 나는 과거 기억 속의 나를 살해하기로 하였다. 내 왼편 가슴 심장의 위치를 방탄 금속으로 덮어서 가리고, 나는 과거 기억 속의 나의 왼편 가슴을 향하여 권총을 발사하였다. 탄환은 그의 왼편 가슴을 관통하였으나, 그의 심장은 바른 편에 있다. 기억이라는 거울 속에 있는 나는 현재의 나와 반대이기 때문에 그의 심장은 바른편에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를 살해할 수도 없었다.
 
6 / 模型心臟에서 붉은 잉크가 엎질러졌다. / 내가 遲刻한 내 꿈에서 나는 極形을 받았다. / 내 꿈을 支配하는 者는 내가 아니다. / 握手할 수조차 없는 두 사람을 封鎖한 巨大한 罪가 있다.
실제 심장이 아닌 모형 심장에서 붉은 잉크가 엎질러졌다. 미래의 나의 죽음을 생각해 본 것이다.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화자는 죽음을 꿈꿔 본 것이다. 모형 심장은 실제의 심장이 아니다. 붉은 잉크는 실제의 피가 아니다. 붉은 잉크는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이름을 호적에서 지울 때 사용한다. 따라서 화자는 미래에 자신이 자살할 것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실제의 내가 도착하지 않은 미래의 나의 꿈 즉 죽음에서 나는 극형을 받았다. 내 미래의 죽음조차 이를 지배하는 자는 내가 아니다. 
내가 극형을 받는 것은, 죽어서도 나와 화해할 수 없는 두 사람을 봉쇄한 죄다. 나를 낳아준 생부의 꿈,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나에게 좀 더 부유한 가정에서 편안하게 살기를 바랐던 생부의 꿈을 봉쇄한 죄가 있다. 또 나를 통하여 대를 잇기를 바랐던 큰아버지의 소망을 봉쇄한 죄가 있다.
 


 

6. 易斷

▣   火爐

房거죽에極寒이와닿았다. 極寒이房속을넘본다. 房안은견딘다. 나는讀書의뜻과함께힘이든다. 火爐를꽉쥐고집의集中을잡아땡기면유리窓이움푹해지면서極寒이혹처럼房을누른다. 참다못하여火爐는식고차겁기때문에나는適當스러운房안에서쩔쩔맨다. 어느바다에潮水가미나보다. 잘다져진房바닥에서어머니가生기고어머니는내아픈데에서火爐를떼어가지고부엌으로나가신다. 나는겨우暴動을記憶하는데내게서는억지로가지가돋는다. 두팔을벌리고유리窓을가로막으면빨래방망이가내등의더러운衣裳을뚜들긴다. 極寒을걸커미는어머니――奇跡이다. 기침藥처럼따끈따끈한火爐를한아름담아가지고내體溫위에올라서면讀書는겁이나서곤두박질을친다.

― <카톨닉 청년> 1936. 2 ― 
 

이상은 1936년 <카톨릭 청년> 2월호에 ‘易斷(역단)’이라는 큰 제목 하에 5편의 시를 발표한다. <화로>, <아침>, <가정>, <역단>, <행로>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왜 큰 제목을 ‘역단’이라고 했을까? ‘역단’이란 ‘바꾸어서 끊는다’, ‘바꾸어도 단절된다’ 등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인은, 시를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을, 다른 이야기로 바꾸어서 이야기함으로써, 사람들이 시의 의미에 접근하는 것을 단절시킨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화자의 원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고 읽어야 올바로 읽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이 시 <화로>는 단순히 ‘화로’로 읽어서는 안 된다. 화로! 화로는 뜨거운 것이다. 안에 뜨거운 불씨를 담고 있다. ‘화로’는 그 안에 뜨거운 불씨 즉 성적 뜨거움을 담고 있는 아내를 암유한다.
 
房 거죽에 極寒이 와 닿았다
방 거죽 즉 아내의 성기의 표면에 극한이 와 닿았다. 방은 아내의 몸의 내부를 의미한다.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문을 통하여 들어가야 하고, 그 문이 바로 아내의 음문이다. 그 음문 안에는 뜨거운 화로와 같은 성적 욕망의 불씨가 있다. 극한은 지극히 추운 것을 의미하는데, 마치 추위에 오그라든 것과 같은 화자의 왜소한 남근이다. 극한인 왜소한 남근은 뜨거움의 씨앗을 속에 간직하고 있는 화로를 그리워하는 법이다. 추워서 따뜻한 곳을 그리워하기도 하며, 뜨거운 곳에 들어가면 줄어들었던 남근이 커지기도 한다. 따라서 아내의 음문의 표면에 뜨거운 곳에 들어가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화자의 왜소하게 오그라든 남근이 닿았다는 뜻이다.
 
極寒이 房속을 넘본다. 房 안은 견딘다.
극한이 방 속을 넘본다. 몹시 차가워져서 왜소해진 화자의 남근이, 따뜻한 곳을 그리워하는 화자의 왜소한 남근이, 아내의 몸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 방 안은 견딘다. 뜨거운 욕망을 가진 아내의 방 안은 열리지 않는다. 뜨거운 방 안에 화자의 발기되지 않은 왜소한 남근이 들어갈 수 없다.
 
나는 讀書의 뜻과 함께 힘이 든다
화자는 독서의 뜻과 함께 힘이 든다. 독서는 상체를 앞뒤로 움직이면서 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자의 남근은 위아래로 끄덕이는 뜻 즉 왕성하게 발기의 뜻을 가지고 있으나, 그렇지 못하여 힘이 든다. 제대로 발기가 되지 않아서 제대로 아내의 몸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火爐를 꽉 쥐고 집의 集中을 잡아 땡기면 유리窓이 움푹해지면서 極寒이 혹처럼 房을 누른다.
뜨거운 불씨를 간직하고 있는 화로 즉 아내의 몸뚱이를  꽉 잡고, 집의 집중 즉 아내의 뜨거움이 모여 있는 가운데를 잡아당기면 즉 아내의 음문과 밀착시키면, 유리창 즉 투명하게 열려 있어 쉽게 들어갈 것 같던 음문이, 실제로 들어가려니까 유리가 가로막듯이 들어가지 못하고, 다만 움푹해지면서 극한인 화자의 왜소한 남근이 혹처럼 조금 방을 누를 뿐이다. 아마 제대로 발기가 되지 않아서 삽입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아내는 투명한 유리창처럼 열려 있으나, 화자는 그 가로막는 유리를 발기되지 않은 남근 때문에 들어갈 수 없다. 
 
참다못하여 火爐는 식고 차겁기 때문에 나는 適當스러운 房 안에서 쩔쩔맨다. 어느 바다에 潮水가 미나 보다.
아내는 화자의 남근의 차가움에 참다못하여 성적 열기가 식는다. 그러면 방 안 즉 아내의 몸속에 들어간 화자의 남근은 또 화로인 아내가 달아오르지 않고 화자와 똑같이 식어버린 아내의 몸속에서, 아내가 뜨거워지기를 바라며 쩔쩔맨다. 열심히 노력을 한다. 곧 아내는 조수가 밀듯이 화자의 남근을 음부에서 밀어내고, 화자는 어느 바닷가에 놓인 것처럼 홀로 남는다.
 
잘 다져진 房바닥에서 어머니가 生기고 어머니는 내 아픈 데에서 火爐를 떼어 가지고 부엌으로 나가신다.
잘 다져진 방바닥에서 어미가 생긴다. 굳건한 남근으로 아내의 음부의 내부를 잘 다질 때, 거기에서 아이도 태어나고 아내가 어머니가 될 수 있다. 아이를 낳기를 바라는 아내는,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한 것 때문에 마음이 아픈 화자에게서, 화로를 떼어가지고 즉 자신의 몸을 화자로부터 떼어가지고 부엌으로 나간다. 부엌에서 다시 뜨거운 불씨를 화로에 담기 위해서다. 조금 쉬었다가 다시 시도하기 위해서 새로운 불씨를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다.
 
나는 겨우 暴動을 記憶하는데 내게서는 억지로 가지가 돋는다
화자는 이제야 겨우 폭동을 기억한다. 화자는 이제야 겨우 폭동과 같은 격렬한 부부관계를 해야 한다고 머릿속에 떠올린다. 화자에게서는 억지로 가지가 돋는다. 화자에게는 억지로 가지 즉 왜소한 남근이 조금 살아난다.
 
두 팔을 벌리고 유리窓을 가로막으면 빨래방망이가 내 등의 더러운 衣裳을 뚜들긴다.
그래서 두 개의 고환이 양쪽에 있는 남근을 가지고, 아내의 몸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나 유리창이 막는 듯이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에서 서성거리고 있으면, 빨래방망이가 화자의 등의 더러운 의상을 두들긴다. 아내가 손으로 화자의 등을 두드리면서 새롭게 시작해 보라고 위로한다. 
여기서 아내가 화자의 등을 두드리면서 위로하는 것을 빨래방망이가 더러운 의상을 두들긴다고 말한 것은 더러운 의상을 방망이로 두드려 빨면 깨끗한 옷이 되어 다시 새 옷처럼 입을 수 있듯이, 자꾸 안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새롭게 시작해 보라는 의미에서 사용한 것 같다.
 
極寒을 걸커미는 어머니―― 奇跡이다
아내의 몸속에 들어간 화자의 오그라들어 왜소한 남근을 빗장을 걸어서 미는 어머니 즉 아내. 여기서 ‘걸커민다’는 말은 빗장을 걸고 화자를 향하여 민다는 의미다. 아내가 자신의 몸속에 들어온 왜소한 남근을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빗장을 걸듯이 꼭 잡고 음부를 화자 쪽을 향하여 민다는 의미다. 아마 아내가 몸속에 들어온 왜소해진 남근을 꼭 죄어 잡고 남편 쪽으로 음부를 밀면서 노력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 같다. 기적이다. 비로소 왜소하던 화자의 남근이 제대로 커졌는가 보다.
 
기침藥처럼 따끈따끈한 火爐를 한아름 담아가지고 내 體溫 위에 올라서면 讀書는 겁이 나서 곤두박질을 친다
화자는 따끈따끈해진 화로 즉 달아오른 아내를 한 아름 담아가지고 자신의 체온 위에 올라섰다. 따끈따끈해진 아내를 한 아름 담았다. 아내의 노력에 의해서 화자도 달아올랐다. 그리고 달아오른 화자의 체온 위에 올라섰다. 화자의 달아오른 남근으로 아내의 뜨거운 몸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면 독서 즉 앞뒤로 끄덕이는 화자의 남근은 겁이 나서 곤두박질을 친다. 뜨거운 것이 겁이 나서 마치 그것을 식히려는 듯이 아내의 몸속으로 곤두박질친다. 힘차게 방을 다진다. 그러고 나면 감기 걸려 열이 날 때 먹는 기침약처럼, 뜨거운 아내는 화자의 남근의 열기를 이내 식혀 준다. 사정을 한 후 남근은 열이 내린다. 줄어든다.



▣   아침

캄캄한空氣를마시면肺에害롭다. 肺壁에끌음이앉는다. 밤새도록나는몸살을앓는다. 밤은참많기도하더라. 실어내가기도하고실어들여오기도하고하다가잊어버리고새벽이된다. 肺에도아침이켜진다. 밤사이에무엇이없어졌나살펴본다. 習慣이도로와있다. 다만내侈奢한책이여러장찢겼다. 憔悴한結論위에아침햇살이仔細히적힌다. 永遠히그코없는밤은오지않을듯이.

― <카톨닉 청년> 1936. 2 ―
 
 
이 시는 ‘역단’이라는 큰 제목 아래 발표된 5편의 시 가운데 하나다. 예사로 읽으면 이상의 의도에 말려 제대로 읽을 수 없을 것이다. 참으로 조심해서 읽어야 할 작품이다.
보통은 이렇게 읽을 것이다. 이상 시인이 폐결핵 환자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폐결핵 환자는 밤이 되면 더욱 기침이 심해지고, 그래서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가 보다. 이 시도 그러한 상황과 관련이 있다. 그러니 그런 맥락에서 읽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독자가 이렇게 생각할 것이라고는 벌써 이상이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 시를 제대로 읽지 못하게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큰 제목이 역단이다. 바꾸어 끊는다. 다른 이야기처럼 바꾸어 이야기함으로써 사람들이 접근을 끊는다는 의미다. 따라서 이 시는 다음과 같이 읽어야 한다.
캄캄한 空氣를 마시면 肺에 害롭다. 肺壁에 끌음이 앉는다.
깜깜한 공기를 마시면 폐에 해롭다. 화자의 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비평가들의 텅빈 기운을 읽으면, 화자의 참된 마음에 해롭다. 엉터리 비평가들의 글이 화자가 참된 마음으로 글을 쓰는데 해가 된다는 말이다. 엉터리 비평가를 의식하면, 자신의 참된 마음을 기록하는 글을 제대로 쓸 수가 없다는 말이다. 진실된 마음을 단절하는 그을음이 앉아서 제대로 글을 쓸 수 없는 것이다.
밤은 참 많기도 하더라. 실어 내가기도 하고 실어 들여오기도 하고 하다가 잊어버리고 새벽이 된다. 肺에도 아침이 켜진다. 
깜깜한 밤과 같은 비평가들은 참으로 많았다. 밤에 쓴 글을 공기(空氣) 즉 온 힘을 다해 쓴 글이 텅빈 기운으로 가득찬 비평가들에게 실어 내가기도 하고, 비평가들이 화자의 시에 대해서 쓴, 내실이 없는 근거로 화자를 비평하는 글을 들여와서 읽기도 하다가, 밤인지도 잊어버리고 새벽이 된다. 참된 마음에도 비로소 아침이 켜진다. 비평가들이 왜 자신의 글을 그렇게 비평하고 있는지의 참된 마음이 드러난다. 비평가들은 자신의 능력으로 화자의 시를 이해할 수 없어서 화자를 혹평하는 것이다.
밤사이에 무엇이 없어졌나 살펴본다. 習慣이 도로 와 있다. 다만 내 侈奢한 책이 여러 장 찢겼다. 憔悴한 結論 위에 아침 햇살이 仔細히 적힌다. 永遠히 그 코 없는 밤은 오지 않을 듯이.
화자는 밤사이에 무엇이 없어졌나 살펴본다. 습관이 도로 와 있다. 화자는 습관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시를 또 썼고, 비평가들은 화자의 시를 이해하지 못해서 습관적으로 혹평하기만 하는 되풀이하는 버릇이 와 있다.
다만 화자의,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는 비평가들에게는 분수에 넘칠 만큼 좋은 책이 여러 장 찢겼다. 비평가들의 혹평에 의해서 화자의 책 몇 장이 쓸모없이 되어 버렸다. 비평가들이 화자의 글에 대해서 애태우고 근심하면서 맺은 결론만이, 아침 햇살처럼 환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상세하게 적혀 있다. 영원히 그 역겨운 냄새가 없는 밤은 오지 않을 듯이.
 


▣   家庭

門을암만잡아다녀도안열리는것은안에生活이모자라는까닭이다. 밤이사나운꾸지람으로나를졸른다. 나는우리집내門牌앞에서여간성가신게아니다. 나는밤속에들어서서제웅처럼자꾸만減해간다. 食口야封한窓戶에어데라도한구석터놓아다고내가收入되어들어가야하지않나. 지붕에서리가내리고뽀족한데는鍼처럼月光이묻었다. 우리집이앓나보다그러고누가힘에겨운도장을찍나보다. 壽命을헐어서典當잡히나보다. 나는그門고리에쇠사슬늘어지듯매어달렸다門을열려고안열리는門을열려고.

― <카톨릭 청년> 1936. 2 ―
 
 
이 시의 제목은 '家庭(가정)'이다. 가정이란 무엇인가부터 잘 생각하여야 할 것 같다. 가정에 대해서 사람마다 다양한 생각을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원만한 가정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가장이 어느 정도의 수입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상 시인은 당대 지식인이었으나 경제적으로 무능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가정에 대해서 늘 고뇌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러한 생각을 이 시에 대응시켜 해석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 학교에서도 그렇게 가르친다.
이상 시인은 사람들이 시를 읽고도 잘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다양한 비유적 표현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상 시인의 시에 나타나는 시어들을 견강부회식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하나의 시어를 시 전체의 맥락에서 순리적으로 잘 연결하면서 생각해 보면, 시어의 의미는 드러나게 마련이다. 다만 시인이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발상에서 시어들을 사용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잘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이상의 다른 시들과도 연계시켜서 해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 시인의 생각은 여러 시에서 유사한 표현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어떠한 발상에서 사용된 시어들이 다른 시에서도 유사한 발상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이상 시인의 시도, 이상 시인의 시 전체를 개괄하여 읽어 본 다음, 다시 한 작품 한 작품 읽어 볼 때 그 의미가 드러난다.
필자는 ‘가정’의 의미를 이렇게 생각해 보겠다. 가정이란 부부가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대를 이어가는 곳이다. 부부가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룬다고 했을 때, 그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은 아니다. 
몇 명의 여자들과 동거하기도 했던 이상 시인은 아이가 없었고, 그리고 그 여자들과는 헤어지고 만다. 물론 이상이 상대한 여성들은 창녀나 다름이 없는, 카페나 다방의 여급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상이 그러한 여자들과 가정을 이루고자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여자들 중에서 이상 시인과 그래도 비교적 오래 살았던 여자는 금홍이다. 백천온천에서 만나서, 서울에 와서 다방 <제비>의 마담으로 있던 금홍이와는 약 3년 정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금홍이와의 사이에서도 자식이 없었고, 결국 나중에 헤어지게 된다. 이상의 <날개>에는 금홍이가 직접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상 시인으로서는 금홍이를 어느 정도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감도 시제칠호>, <명경> 등에는 금홍이로 추정해도 좋을 만한 여자에 대한 시인의 애틋한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다. 만약 금홍이와의 사이에 자식이 있었다면 금홍이가 떠나갔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1930년대 사람들의 관념으로서는 자식이 부부를 매개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가정’에서 자식을 잉태하고 낳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물론 아이를 잉태하는 것은, 아이를 잉태하겠다는 고상한 생각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이상 시인은 가졌던 것 같다. 부부가 성을 즐기다 보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생긴다는 생각을 가졌다. <차8씨의 출발>에 그러한 이상의 생각이 표현되어 있다.
 
문(門)을 암만 잡아다녀도 안 열리는 것은 안에 생활(生活)이 모자라는 까닭이다
문은 나의 가정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가정을 이룬 가장은 문을 통하여 가정으로 들어간다. 원만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문을 통과하여야 하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원만한 가정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은 입을 의미하기도 한다. '말문이 열린다'라는 문장에서 문은 입을 의미한다. 입이 열리고 그 열린 문을 통하여 말이 나왔을 때 우리는 말문이 열렸다고 한다. 
문을 잡아당기면서 열려고 하는 것은 지금 화자가 아내와 성교를 하면서 아내를 만족시키려는 행위다. 아내가 성적으로 만족한다면 아내는 입이 열리고 성교의 쾌감을 토해 낼 것이다.  그러나 화자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아내는 입이 열리지 않는다.
문은 또 하나 있다. 아래에도 있다. 그것을 우리는 하문(下門)이라 한다. 음문(陰門)이라고도 한다. 문을 잡아당기는 행위는 음문을 자신 쪽으로 당기는 행위다. 그것은 곧 자신을 그 음문 쪽으로 밀착시키는 행위와 동일한 행위다. 화자가 가정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기 위해서 즉 아이를 낳아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아내의 하문에 몸을 강하게 밀착시킨다. 그러나 아내의 문 즉 입은 열리지 않는다. 아내가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안에 생활이 모자란 까닭이다. 안은 아내의 음문의 안쪽이다. ‘생활(生活)’은 살아 있음을 의미한다. 아내의 음문 안쪽으로 들어간 화자의 남근이 제대로 발기되어 살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제대로 발기되지 못하면 아내가 만족할 수 없다. 따라서 제대로 발기되지 않은 남근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아내의 입이 열리지 않고, 만족하는 교성이 나오지 않는다. 원만한 부부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정을 이루기가 어렵다.
 
밤이 사나운 꾸지람으로 나를 졸른다
밤이 사나운 꾸지람으로 화자를 조른다. 밤이 되면, 자식이 없어서 제대로 된 가정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 아내가, 화자와 닮은 자식을 만들어 내는 틀인 아내가, 사나운 꾸지람으로 화자를 조른다. 아내가 자식을 잉태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아내가 잉태를 위해서 사정하기를 사납게 조를수록 화자의 남근은 마치 사나운 꾸지람을 들은 아이가 몸을 움츠리고 위축되듯이 줄어든다.
 
나는 우리 집 내 문패(門牌) 앞에서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그래서 화자는 우리 집 문패 즉 자식을 낳고 가정을 이룬다는 것 앞에서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위축되어 줄어든 남근으로 자식을 잉태하고자 하나 사정이 잘 되지 않고, 그런 속에서 사정을 하려고 하니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아내 앞에서 매우 성가시다. 
나의 문패가 달린 집은 내 집이다. 내 가정이기도 하고 내 아내이기도 하다. 화자는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아내의 음문 앞에서 힘겨운 노력을 하고 있지만 잘 되지 않아서 괴롭다는 뜻이다.
 
나는 밤 속에 들어서서 제웅처럼 자꾸만  감(減)해 간다 식구(食口)야 봉(封)한 창호(窓戶)에 어데라도 한 구석 터 놓아 다고 내가 수입(收入)되어 들어가야 하지 않나
화자는 밤, 자식을 잉태하기를 바르는 아내의 몸속에 들어서서 열심히 노력하지만 그럴수록 발기되었던 남근은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처럼 생명력을 잃고 자꾸만 줄어든다. 사정을 하여 자식을 잉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화자의 남근을 더욱 위축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화자는 “식구야, 봉한 창호에 어디라도 한 구석 터놓아 다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화자가 수입되어 들어가기 위한 것이다. 봉한 창호는 아내의 굳게 닫힌 입(口)이다. 또한 화자의 사정을 북돋우는 교성이 나오는 입이다. 입을 문(門)이라 하지 않고 창호(窓戶)라고 하면서, 봉한 창호에 어데 한 구석일도 터놓아 달라고 말하는 것은, 입을 열어서 조그만 소리의 교성이라도 제발 내 달라는 간청이다. 그것은 화자의 사정을 북돋우는 것이 된다. 아내가 교성을 내면, 아내의 음부에 있던 화자의 남근은 아내의 교성에 의해 더욱 흥분하게 되며, 남근에서 사정을 할 수가 있다. 
‘수입되어 들어간다.’는 말은 피동적인 표현이다. 화자의 남근이 아내의 교성에 의해서 발기가 되고, 그러면 자연 쉽게 더욱 흥분되어 원만하게 사정할 수가 있다.
 
지붕에 서리가 내리고 뽀족한 데는 침(鍼)처럼 월광(月光)이 묻었다 우리 집이 앓나 보다 그러고 누가 힘에 겨운 도장을 찍나 보다 수명(壽命)을 헐어서 전당(典當) 잡히나 보다.
지붕에는 서리가 내린다. 사정하기 위해서 화자는 오랫동안 노력을 하였는가 보다. 아내가 집이라면 아내의 몸을 덮고 있는 화자는 지붕이다. 지붕에 서리가 내린다는 것은 화자의 몸에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다. 서리는 하얀 색이다. 열심히 노력한 화자의 등에는 땀이 흥건하도록 났고, 그 등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로는 것 같다. 피어오르는 김은 흰 색이다. 마치 지붕에 서리가 내리는 것과 유사하다.
그리고 지붕의 뾰죽한 데는 침처럼 월광이 묻었다. 지붕이 화자라면 화자의 뾰죽한 곳은 화자의 남근의 끝부분이다. 그리고 화자의 남근의 끝부분에 ‘침처럼 월광이 묻었다’는 것은 화자가 겨우 조금 사정을 했다는 것이다. 침은 사람의 몸 속으로 들어가는, 끝이 뾰죽한 것이다. 화자가 겨우 아내의 몸 깊이 침처럼 조금, 월광과 같은 희미한 정액을 사정했다. 그러함으로써 밤, 아내의 몸속이 조금 밝아진 것이다. 달빛은 희미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밝다.
우리집 즉 아내가 앓는가 보다. 아내가 낮게 교성을 내는 것 같다. 앓을 때는 낮은 소리로 ‘앓는 소리’를 낸다. 아내가 마치 앓는 사람처럼 교성을 조금 냈다. 
누가 힘겨운 도장을 찍는가 보다고 화자는 생각하고 있다. 누구는 화자다. 화자는 지금까지 힘겨운 도장을 찍는 행위를 한 것이다. 도장을 찍는 행위는 남근이 아내의 음부를 향해서 내리찧는 행위와 유사하다. 또 도장을 찍는 행위는 무슨 일을 마무리하는 행위와도 연결된다. 가정을 이루는 행위를 끝낸 것이다.
그리고 화자는 그러한 행위를 ‘수명을 헐어서 전당잡히는 행위’라고 말하고 있다. 사정하여 자식을 잉태하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했는가 보다. 이러다가는 힘이 들어 얼마 못 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같다. 수명의 일부를 헐어서 전당잡히고 가정을 이룬다는 말이다. 수명을 담보로 자식을 잉태하기 위한 사정을 하였다는 뜻이다.
 
나는 그 문고리에 쇠사슬 늘어지듯 매어달렸다 문을 열려고 안 열리는 문을 열려고
‘매달렸다’는 말에는 과거 시제다. 이 시에는 과거 시제는 여기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이 부분은 지금까지 했던 행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지금까지 가정으로 들어가기 위한 문고리, 가정을 이루기 위한 도구인 남근에 쇠사슬 늘어지듯 매달린 것이다. 쇠사슬처럼 무겁게 늘어진, 잘 발기되지 않는 남근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한 것이다. 그것은 문을 열기 위한 것이었다. 안 열리는 문을 열기 위해서였던 것이었다. 아이를 잉태하지 못함으로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가정을, 잘 이룩하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 한 것이다.


 
▣   易斷

그이는白紙위에다鉛筆로한사람의運命을흐릿하게草를잡아놓았다. 이렇게홀홀한가. 돈과過去를거기다가놓아두고雜沓속으로몸을記入하여본다. 그러나거기는他人과約束된握手가있을뿐, 多幸히空欄을입어보면長廣도맞지않고안드린다. 어떤빈터전을찾아가서실컷잠자코있어본다. 배가아파들어온다. 苦로운發音을다삼켜버린까닭이다. 奸邪한文書를때려주고또멱살을잡고끌고와보면그이도돈도없어지고疲困한過去가멀거니앉아있다. 여기다座席을두어서는안된다고그사람은이로位置를파헤쳐놓는다. 비켜서는惡息에虛妄과復讐를느낀다. 그이는앉은자리에서그사람이 平生을살아보는것을보고살짝달아나버린다.

― <카톨닉 청년> 1936. 2 ― 
 

이상이 4세 때 큰아버지 집에 양자로 간 것은 잘 알 것이다. 큰아버지 입장에서는 대를 잇기 위해서였다. 친아버지 입장에서는 자신이 가난했기 때문에 이상이 잘 사는 큰아버지의 양자가 된다면, 이상이 자라는데 부족함이 없이 잘 자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큰아버지가 양자를 조건으로 얼마간의 돈을 주었던 것 같다. 돈을 주면서 만약 양자를 물리면 그 돈을 도로 내놓아야 한다는 계약서까지 쓰지 않았는가, 이 시를 통하여 추정해 본다.
이상이 양자로 간 후, 큰아버지는 어린 여자를 첩으로 들인 것 같다. 그러자 큰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첩에게서 아들을 낳는다. 물론 어려서부터 이상이 아주 총명하여, 큰아버지는 이상을 아주 좋아했다고는 하지만, 새로 태어난 어린 동생과 젊은 어머니 속에서, 큰아버지는 이상에게 따뜻하게 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중에 자신이 양자로 간 것을 알게 되고, 큰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이상은 친아버지의 집을 찾아간 것 같다. 그러나 친아버지 역시 큰아버지와의 계약 때문에 이상을 반갑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 
하여튼 어린 이상은 큰아버지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자 아버지를 바꾸어보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를 바꾸어 보려고 친아버지에게로 같으나, 친아버지 역시 반기지 않는다. 양자로 감으로써 아버지가 바뀌어, 큰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이상은, 다시 아버지를 바꾸어 보고자 하지만, 역시 친아버지도 반기지 않아, 누구와도 단절되어 있다. 이것이 이 시의 제목 ‘역단’이다. 친아버지와 큰아버지를 바꾸어도 단절되어 있는 이상의 외로움이 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시에는 ‘그이’와 ‘그 사람’이 나온다. 한 사람은 자신을 양자로 데려단 큰아버지를 지칭하는 것 같고, 한 사람은 자신을 양자로 넘긴 친아버지다. 그런데 ‘그이’는 누구이고, ‘그 사람’은 누구인가? 이 시는 참으로 표현과 구성이 절묘하여 ‘그이’를 큰아버지, ‘그 사람’을 친아버지로 읽어도 되고, 다시 ‘그이’를 친아버지, ‘그 사람’을 큰아버지라고 읽어도 된다. 바꾸어 읽어도 마찬가지다. 바꾸어 읽어도 어느 아버지도 화자를 반갑게 맞지 않는다. 화자는 두 아버지에게 단절되어 있다. 바꾸어 읽어도 단절되어 있다. 역단(易斷)이다. 이런 효과를 노리고 쓴 <역단>이야말로, 이상이 왜 천재 시인인지를 증명하고 있다. 이상은 표현에서 특별한 천재 시인이다.
먼저 ‘그이’를 큰아버지, ‘그 사람’을 친아버지로 읽어보자.
그이는 白紙 위에다 鉛筆로 한 사람의 運命을 흐릿하게 草를 잡아 놓았다. 이렇게 홀홀한가.
‘그이’는 화자를 양자로 데려온 큰아버지다. 큰아버지는 대를 잇기 위해서 친아버지와 백지 위에다 계약서를 작성하고 화자를 양자로 데려간다. 이를테면, 부자였으나 자식이 없던 큰아버지는, 가난했던 화자의 친아버지에게 얼마간의 돈을 주고, 화자를 양자로 삼는다, 다시 화자를 데려갈 경우, 주었던 돈을 도로 반환하다는 정도의 내용을 계약서로 작성한 다음, 화자를 양자로 데려간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백지’는 계약의 내용을 기록하는 종이다.
그 계약서는 화자의 운명을 돌려놓았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대수롭지 아니한가. 큰아버지는 화자의 운명을 돌려서 양자로 들였으면서도 화자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지 화자에게 사랑을 주지 않는다.
돈과 過去를 거기다가 놓아두고 雜沓 속으로 몸을 記入하여 본다. 그러나 거기는 他人과 約束된 握手가 있을 뿐, 多幸히 空欄을 입어 보면 長廣도 맞지 않고 안 드린다.
그래서 화자는 큰아버지의 돈과 과거 즉 양자로 가서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거기 즉 큰아버지 집에 놓아두고,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어 이들과 잡다하게 섞이고 합하는 속 즉 친아버지 집으로 몸을 기억하여 들어가 본다. 그러나 거기 친아버지는 타인과 약속된 악수만 있을 뿐이다. 친아버지는 큰아버지의 돈을 받고 계약을 했기에 쉽게 화자를 반기지 않는다.
친아버지와 포개지기를 바라서, 친아버지의 비어 있는 울타리, 즉 자신이 양자로 가서 자신의 자리가 비어 있는 울타리, 즉 친아버지를 입어보면, 친아버지의 품을, 마치 옷을 입듯이 입어 보면, 친아버지와 화자는 길이과 넓이도 맞지 않고, 또 친아버지가 안 들인다. 화자는 친아버지가 뒤에서 화자를 꼭 안아주기를 바랐으나, 친아버지는 화자를 꼭 껴안지 않았다. 화자는 그것을 친아버지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친아버지는 화자를 집으로 들이지 않는다.
어떤 빈 터전을 찾아가서 실컷 잠자코 있어 본다. 배가 아파 들어온다. 苦로운 發音을 다 삼켜버린 까닭이다.
그래서 친아버지가 자기를 반기지 않는 것은 느낀 화자는, 어떤 빈 터전 즉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실컷 잠자코 있어 본다. 배가 아파 들어온다. 배가 고픈 것이다. 그것은 화자가 괴로운 심정을 말하지 않고 삼켜버린 까닭이다.
奸邪한 文書를 때려주고 또 멱살을 잡고 끌고 와 보면 그이도 돈도 없어지고 疲困한 過去가 멀거니 앉아 있다.
양자를 요구한 문서, 어긋난 것을 요구한 문서를 때려주고, 또 그 문서를 멱살을 잡고 친아버지 집에 끌고 와 보면, 즉 양자를 요구한, 어긋난 문서를 멱살을 잡고 끌고 오듯이, 화자가 양자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친아버지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니 없어지고, 돈도 다시 물어 주어야 하니 없어지고, 힘들게 살아가던 가난한 과거가 남아서 멀거니 앉아 있다.
여기다 座席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그 사람은 이로 位置를 파헤쳐 놓는다. 비켜서는 惡息에 虛妄과 復讐를 느낀다.
드디어 큰아버지가 찾아왔다. 큰아버지가 화자에게 말을 한다. “여기를 네 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고, 이 말로써 큰아버지는 화자의 위치를 파헤쳐 놓는다. 즉 큰아버지가 “여기가 네 집이 아니다.”라는 말 대신에, “여기를 네 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즉 ‘여기가 네 집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 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돈을 받고 양자로 삼았기 때문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의 말을 한다. 이로써 큰아버지는 자신이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드러낸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불길한 자식에게 허망함을 느낀다. 지금까지 돈을 들여서 키운 것에 대한 허망함을 느낀다. 그리고 복수의 마음을 느꼈는지 화자를 때리면서 가자고 한다.
그이는 앉은 자리에서 그 사람이 平生을 살아보는 것을 보고 살짝 달아나 버린다.
이를 앉아서 지켜보던 친아버지는 앉은 자리에서 큰아버지가 평생을 살아보는 것을 보고 살짝 달아나 버린다. 큰아버지가 평생 화자가 말을 듣지 않을 경우, 때릴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그렇다고 돈을 도로 갚고 데려올 처지도 못 되기 때문에, 씁쓸한 마음이 들었던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한다.
이제는 ‘그이’를 친아버지, ‘그 사람’을 큰아버지로 읽어보자.
그이는 白紙 위에다 鉛筆로 한 사람의 運命을 흐릿하게 草를 잡아 놓았다. 이렇게 홀홀한가.
친아버지는 큰아버지가 말할 것을 적은 종이 위에다, 큰아버지가 부르는 대로 따라 씀으로써 한 사람의 운명의 초안을 흐릿하게 작성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결정할 수 있는가. 
친아버지는 부자인 큰아버지에게 아들을 양자로 보낸다. 아이의 장래의 운명을 위해서다. 물론 큰아버지 집에서 자라는 것이 아이의 장래를 위하여 좋은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는 없으나, 그래도 가난한 자신의 집에서 자라는 것 보다는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화자를 양자로 보냈다. 물론 그 대가로 주는 적지 않은 돈이, 가난하게 살아가는 친아버지에게는 앞으로 생계를 이어갈 소중한 돈이다. 그러나 그 결정이 갑작스럽고 경솔했다는 생각을 화자는 하고 있는 것이다.
돈과 過去를 거기다가 놓아두고 雜沓 속으로 몸을 記入하여 본다. 그러나 거기는 他人과 約束된 握手가 있을 뿐, 多幸히 空欄을 입어 보면 長廣도 맞지 않고 안 드린다.
그래서 화자는 친아버지가 받은 돈과 태어나서부터 양자 가기 전까지의 과거의 삶을 거기 즉 친아버지의 집에 놓아두고, 잡다하게 섞이고 합하는 속 즉 큰아버지 집으로 몸을 문서의 기록대로 들어가 본다. 그러나 거기 큰아버지는 타인과 약속된 악수만 있을 뿐이다. 큰아버지는 조상의 대를 이어야겠다는 조상들과의 약속만이 있을 뿐, 화자를 사랑으로 대하지 않는다.
큰아버지와 합쳐서 하나가 되기를 바라며, 비어 있는 울타리, 즉 자식이 없어서 허전한 큰아버지의 품을, 마치 옷을 입듯이 입어 보면, 큰아버지와 화자는 길이도 넓이도 맞지 않고, 또 큰아버지가 안 들인다. 화자는 큰아버지가 뒤에서 화자를 꼭 안아주기를 바랐으나, 큰아버지는 화자를 꼭 껴안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품으로 들이지도 않는다. 큰아버지는 자신을 사랑으로 대하지 않는다.
어떤 빈 터전을 찾아가서 실컷 잠자코 있어 본다. 배가 아파 들어온다. 苦로운 發音을 다 삼켜버린 까닭이다.
그래서 화자는 어떤 빈 터전 즉 자신을 양자로 보내서 자리가 비어 있는 친아버지 집으로 가서 실컷 잠자코 있어 본다. 배가 아파 들어온다. 배가 고픈 것이다. 그것은 화자가 괴로운 자신의 발음 즉 말을 친아버지에게 하지 않고 삼켜버린 까닭이다. 친아버지도 화자를 쉽게 들일 수 없다. 화자를 다시 데려오면 계약서에 의해서 돈을 다시 물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奸邪한 文書를 때려주고 또 멱살을 잡고 끌고 와 보면 그이도 돈도 없어지고 疲困한 過去가 멀거니 앉아 있다.
양자를 요구한 문서, 어긋난 것을 요구한 문서를 때려주고, 또 그 문서를 멱살을 잡고 친아버지 집에 끌고 와 보면, 즉 양자를 요구한, 어긋난 문서를 멱살을 잡고 끌고 오듯이, 화자가 양자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큰아버지도 없어지고, 친아버지가 받은 돈도 없어져서, 화자에게는 피곤하게 지나가는 미래의 삶만 물끄러미 보인다.
여기다 座席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그 사람은 이로 位置를 파헤쳐 놓는다. 비켜서는 惡息에 虛妄과 復讐를 느낀다.
친아버지가 화자에게 말을 한다. “여기를 네 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고, 이 말로써 친아버지는 화자의 위치를 파헤쳐 놓는다. 즉 큰아버지가 “여기가 네 집이 아니다.”라는 말 대신에, “여기를 네 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즉 ‘여기가 네 집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 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돈을 받고 양자로 삼았기 때문에 양자를 간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의 말을 한다. 이로써 친아버지는 자신이 친아버지라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드러낸다.
그리고 화자를 일으킨다. 이를 거부하는 불길한 자식에게, 즉 돌아가지 않음으로써 돈을 물어줘야 하는, 불길한 자식에게 자신이 모자랐고 망령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받은 돈을 돌려보내서 갚아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이는 앉은 자리에서 그 사람이 平生을 살아보는 것을 보고 살짝 달아나 버린다.
이를 앉아서 지켜보던 큰아버지는 앉은 자리에서 친아버지가 평생을 살아보는 것을 보고 살짝 달아나 버린다. 친아버지가 아이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친아버지는 계약서대로 돈을 돌려줘야 하고, 그러면 평생 가난하게 살 것이다. 그렇다면 친아버지는 어떻게든 아이를 잘 달래서 반드시 보내올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큰아버지는 슬그머니 그 자리를 뜬다. 어차피 친아버지가 잘 알아서 보낼 것이니까.
 
 
 
7. 危篤

▣   禁制

내가치던개(狗)는튼튼하대서모조리실험동물로공양되고그中에서비타민E를지닌개(狗)는學究의未及과生物다운嫉妬로해서博士에게흠씬얻어맏는다. 하고싶은말을개짖듯배앝아놓던世月은숨었다. 醫科大學허전한마당에우뚝서서나는必死로禁制를앓는(患)다. 論文에出席한억울한髑髏에는千古에氏名도없는法이다.

― <조선일보> 1936. 10. 4 ~ 10. 9 ―
 
 
 
禁制
‘禁制(금제)’는 어떤 행위를 하지 말라고 말린다는 의미다.
내가 치던 개(狗)는 튼튼하대서 모조리 실험동물로 공양되고
화자가 기르던 개는 튼튼하다고 해서 모조리 실험동물로 공양되었다. 여기서 '개'가 무엇일까? 시어를 두 번 이상 비틀어서 사용하는 이상 시인의 시어를 제대로 알기는 어렵다. 그것은 마치 서정주 시인의 시를 읽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필자는 개를 이상 시인의 문학 작품 혹은 시로 보겠다. 왜 갑자기 개가 시가 되느냐 하면, 이상 시인의 시를 당시 사람들 특히 평론가들이 개 짖는 소리처럼 알아먹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화자가 기르던 개 즉 이상 시인이 쓴 시는 튼튼하다. 튼튼하여 쉽게 쪼개지지 않는다. 즉 분석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모조리 실험동물로 공양되었다. 이상 시인의 시를 실험적인 시라고 일언지하에 말해버린 것이다. 소위 문학을 전공한 평론가들이 알아먹을 수 없으니 실험적인 시라고 모조리 공양해 버린 것이다. 싸잡아 잡아먹어 버린 것이다.
그 中에서 비타민E를 지닌 개(狗)는 學究의 未及과 生物다운 嫉妬로 해서 博士에게 흠씬 얻어맏는다.
화자가 기르던 개, 이상 시인이 쓴 시 중에서 비타민E를 몸속에 가지고 있는 개, 즉 영양가 있는 시들은  박사들로서는 학문적 연구가 이에 미치지 못하고, 생물다운 질투 즉 박사들도 사람인지라 열등감을 느껴서, 박사님들에게 흠씬 얻어맞다. 이상의 시가 평론가들에 의해서 실컷 두들겨 맞았다.
하고 싶은 말을 개 짖듯 배앝아 놓던 世月은 숨었다. 醫科大學 허전한 마당에 우뚝 서서 나는 必死로 禁制를 앓는(患)다.
화자도 하고 싶은 말을 시로 개 짖듯이 뱉어 놓았던 세월은 이제 숨어버렸다. 개 짓듯이 시를 쓰던 시절은 지나갔다. 이상 폐병을 앓게 되면서부터 글을 잘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화자는 의과대학 허전한 마당에 우뚝 서서 필사로 금제를 앓는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근심하고 있다. 제발 내 시를 두들겨 패지 말라고 근심하고 있다. 
論文에 出席한 억울한 髑髏에는 千古에 氏名도 없는 法이다.
왜냐하면, 박사들의 논문에 출석한 억울한 촉루 즉 박사들의 논문에 등장하여 억울하게 두들겨 맞아 죽은 시들의 뼈다귀는 천고에 씨명도 없는 법이다. 예로부터 성과 이름도 남기지 않은 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간다는 말이다. 박사들의 논문에 의해서 자신의 시가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에 대해서 화자는 근심하고 있다.
이상 시인의 시를 읽으려면 두 번 꼬아 놓은 의미를 두 번 풀어야 한다. 그것은 서정주 시인의 시와 유사하다. 왜 이상 시인과 서정주 시인이 말을 두 번 꼬았는가 하는 것은, 그들의 시가 당시의 보편적 관념으로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교묘하게 시어를 꼬아서 표현하는 것을 연구한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서정주 시인의 <문둥이>를 박사님들도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고, 이상 시인의 시들을 대부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쉽게 읽히기를 거부하는, 교묘하게 꼬아 놓은 시어들의 나열, 그래서 우리는 서정주, 이상 시인을 가리켜 천재라고 한다. 표현의 천재다!



▣   絶壁

꽃이보이지않는다. 꽃이香氣롭다. 香氣가滿開한다. 나는거기墓穴을판다. 墓穴도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墓穴속에나는들어가앉는다. 나는눕는다. 또꽃이香氣롭다. 꽃은보이지않는다. 香氣가滿開한다. 나는잊어버리고再처거기墓穴을판다. 墓穴은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墓穴로나는꽃을깜빡잊어버리고들어간다. 나는정말눕는다. 아아, 꽃이또香氣롭다. 보이지도않는꽃이――보이지도않는꽃이.

― <조선일보> 1936. 10. 4 ~ 10. 9 ― 
 
 
絶壁
절벽! 뛰어내리면 죽을 것이다. 따라서 절벽(絶壁)은 죽음과 관련이 있다. 또 절벽은 벽처럼 무엇과 무엇을 단절하는 역할을 한다. 절벽은 단절의 의미가 있다.
꽃이 보이지 않는다. 꽃이 香氣롭다. 香氣가 滿開한다. 나는 거기 墓穴을 판다. 보이지 않는 墓穴 속에 나는 들어가 앉는다. 나는 눕는다.
이상 시인의 <꽃나무>라는 시를 보면, 꽃이 사진 속에 있는 나체 여자를 의미하고, 화자는 그 사진을 보면서 자위하는 장면이 나온다. <절벽>을 읽으면서 <꽃나무>가 연상되었다. 지금 화자는 여자의 나체 사진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상황은 <꽃나무>와 유사하다.
꽃이 보이지 않는다. 사진의 실제 여자가 화자의 눈앞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진 속에는 사진만 있고 실제 여자는 없다. 그러나 그 꽃이 향기롭다. 여자의 나체 사진을 보면서, 사진 속의 실제 그 여자에 대한 생각이 향기롭게 피어난다. 화자에게 성적 충동이 일어서 실제의 그 여자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난다. 꽃이 만개한다. 실제 그 여자에 대한 생각이 간절해져서 참을 수가 없다.
화자는 거기에 있는 묘혈을 한다. 사진의 실제 여자의 음부에 삽입하여 성교하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자위를 한다. 
여기서 묘혈을 판다는 말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묘혈을 파듯이 여자의 음부를 판다, 묘혈을 파는 것처럼 음부를 파고 그 안에 발기된 남근이 들어간 다음 죽는다, 자위를 통하여 거기 사진 속의 실제 여자에 대한 성적 욕망을 죽이고 단절시킨다는 등의 의미를 갖는다.
지금 화자가 보고 있는 사진의 실제 여자의 음부 속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화자는 그 보이지 않는 실제 여자의 음부 속에 상상으로 들어가서 앉는다. 실제 여자와 성교를 하는 것을 상상하면서 자위를 한 후 사정을 한 것이다. 앉는다는 말은 선다는 말의 상대 개념이다. 발기된 남근이 선 남근이라면, 사정 후에 줄어든 남근은 앉아 있는 남근이다.
그리고 화자는 눕는다. 남근에 힘이 빠지고 늘어진다.
또 꽃이 香氣롭다. 꽃은 보이지 않는다. 香氣가 滿開한다. 나는 잊어버리고 再처 거기 墓穴을 판다. 墓穴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墓穴로 나는 꽃을 깜빡 잊어버리고 들어간다. 나는 정말 눕는다.
또 꽃이 향기롭다. 사진의 실제 여자에 대한 성적 욕망이 또 일어난다. 꽃은 보이지 않는다. 실제 여자는 화자의 옆에 있는 것이 아니기에, 보이지 않는다. 향기가 만개한다. 실제 여자와 성교하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게 일어난다.
화자는 방금 전에 그 여자의 사진을 보면서 자위를 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또 사진 속의 실제 여자와의 성교를 상상하면서 자위를 한다. 실제 여자의 음부, 화자의 발기된 남근이 들어갈 구덩이는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상상 속에서, 내부가 보이지 않는, 실제 여자의 음부 속으로, 그 여자는 아까 그 여자라는 것을 깜빡 잊어버리고, 다른 여자인 것으로 착각하여 들어간다. 사정 후, 이제는 정말로 남근의 기운이 완전히 빠졌다.
아아, 꽃이 또 香氣롭다. 보이지도 않는 꽃이――보이지도 않는 꽃이.
아아, 꽃이 또 향기롭다. 또 사진의 실제 여자와 성교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일어난다. 보이지도 않는 꽃, 보이지도 않는 사진 속의 실제 여자가, 보이지도 않는 사진 속의 실제 여자가~~여자가~~여자가, 자꾸 자위를 하게 한다. 그 여자 생각을 잊기 위해서, 그 여자에 대한 성적 욕망을 단절하기 하기 위해서 자위를 했는데도 자꾸 하고 싶다. 이러다가 화자가 죽을 것 같다.



▣   白書

내두루마기깃에달린貞操뺏지를내어보였더니들어가도좋다고그런다. 들어가도좋다던女人이바로제게좀鮮明한貞操가있으니어떠냔다. 나더러世上에서얼마짜리貨幣노릇을하는세음이냐는뜻이다. 나는일부러다홍헝겊을흔들었더니窈窕하다던貞操가성을낸다. 그리고는七面鳥처럼쩔쩔맨다.

 ― <조선일보> 1936. 10. 4 ~ 9 ―
 
 
白書
백서(白書)의 사전적 의미는 정부가 국민에게 알리는 보고서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자신의 비밀을 고백하는 글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화자가 고백하고자 하는 비밀은 어린 시절, 어느 과부와 처음 성교를 한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내 두루마기 깃에 달린 貞操뺏지를 내어보였더니 들어가도 좋다고 그런다.
짧은 소설 한 편 쓰겠다. 어린 나이의 화자가 어느 날, 인근에 사는, 화자를 어린아이라고 생각하는, 어느 젊은 과부와 함께, 과부의 집 방에 있었다. 그런데 여자와 접촉해 본 적이 없는, 아직은 성적 감수성이 예민한 화자는 그 과부와 있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성적 욕망이 생겨서 남근이 슬그머니 발기되었고, 그것이 바지 위로 도드라져 보였다. 이를 본 과부는 ‘어, 얘좀 보게. 벌써 다 컸나? 에이, 아직은 어린데 남자 구실 제대로 하겠어?’ 라고 생각한 듯이 깔깔깔 웃었다. 
정조뺏지는 아직 여자를 접한 경험이 없어서, 여자와 함께 그들만의 공간에 있을 때, 성적 욕망으로 인해 쉽게 발기된 남근이다. 쉽게 발기되는 남근은 여자의 경험이 없다는 정조를 상징하는 정조뺏지다.
화자는 두루마기 깃에 달린 정조뺏지를 내어 보였다. 발기된 남근을 바지 위로 조금 도드라지게 하여 보였다. 평소에 남근은 표피가 귀두를 감싸고 있어 마치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의 형상이다. 귀두가 사람의 머리, 귀두 아래의 잘록한 부분이 사람의 목, 그리고 그 이하가 사람의 몸통과 유사하다. 따라서 귀두를 감싸고 있는 표피는 두루마기가 된다. 아직 발기되지 않은 남근은 두루마기를 입고 있는 사람의 형상이다. 두루마기 깃 사이로 정조뺏지를 내어보였다는 것은 표피에 둘러싸여 있던 귀두가 드러났다는 의미다. 크게 발기되어 남근의 귀두가 드러났다는 의미다. 따라서 화자의 남근이 발기된 것이다. 이상 시인의 시에서 남근의 표피가 귀두를 감싸고 있는 것을, 마치 옷을 입은 사람으로 비유하여 표현한 시로는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삼각형>이 있다.
‘에이, 아직은 남자 구실 제대로 하겠어?’라고 생각한 듯이 깔깔깔 웃는 과부의 웃음은, 화자에게는 표피를 비집고 나와 발기된 남근이 다시 표피 속으로 들어가도 좋다고 말하는 것으로 들렸다.
들어가도 좋다던 女人이 바로 제게 좀 鮮明한 貞操가 있으니 어떠냔다. 나더러 世上에서 얼마짜리 貨幣 노릇을 하는 세음이냐는 뜻이다.
들어가도 좋다던 여인 즉 깔깔깔 웃던 여인이, 바로 정색을 하면서, 마치 자신에게 좀 선명한 정조가 있으니 어떠냐? 하고 말하듯이, “너 여자 해 본 경험이 있니”라고 말했을 것이다. 여인은 과부였고, 과부가 재가를 하지 않고 살고 있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선명한 정조를 가진 것이다. 그러한 여자가 “너 여자와 해 본 경험이 있니”라고 말했다는 것은 화자에게는 ‘너 나와 할 수 있겠니?’ 라고 하는 말로 들렸을 것이다. ‘어떠냐’는 말을 화자는 ‘할 수 있겠니?’로 들었을 것이다.
결국 “너 여자와 해 본 경험이 있니”라는 말을 화자는 ‘세상에서 얼마짜리 화폐 노릇을 하는 세음이냐’라는 말로 들린 것이다. 화폐는 물건 등을 살 수 있는 ‘가치’를 가진 것이다. ‘다른 여자와 해 본 경험이 있니?’ 라는 말은, 세상에서 남자로서의 ‘가치’를 제대로 발휘한 경험을 묻는 것이다.
나는 일부러 다홍 헝겊을 흔들었더니 窈窕하다던 貞操가 성을 낸다. 그리고는 七面鳥처럼 쩔쩔맨다.
화자는 일부러 다홍 헝겊을 흔들었다. 화자는 발기되어 붉게 물든 남근을 조금 보여주었다. ‘충분히 남자 구실을 할 수 있다, 남자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귀두를 둘러싸고 있는 표피가 두루마기라면, 다홍 헝겊은 발기된 남근의 일부에 해당한다. 피륙의 조각을 ‘헝겊’이라고 한다. 따라서 화자는 발기된 남근을 조금 꺼내어 보여준 것이다.
그랬더니 지금까지 요조하던 정조 즉 조용하던, 남편을 사별하고도 재가를 하지 않은 과부가 성을 내다. 마치 성이 나서 그런 거처럼, 갑자기 화자를 잡아 넘어뜨려 놓고, 그 위에 걸터앉아서, 씩씩거리면서, 마치 화자를 두들겨 주는 것처럼, 여성 상위의 성교를 격렬하게 한다. 그리고는 칠면조처럼 얼굴색이 다양하게 변하면서 어찌할 줄을 모른다. 여자가 화자를 통해서 오랫동안 풀지 못한 성욕을 풀고 있다.
이 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개 여자의 경험이 없는 남자와 남자의 경험이 있는 여자가 성교를 할 때는 남자가 능동적이지 못한가 보다. 그래서 경험이 있는 여성이 남자의 위에서 주도적으로 하는가 보다. 
이 시는 <오감도 제십사호>와도 상황이 유사하다.



▣   買春

記憶을맡아보는器官이炎天아래생선처럼傷해들어가기始作이다. 朝三暮四의싸이폰作用. 感情의忙殺.
나를넘어뜨릴疲勞는오는족족避해야겠지만이런때는大膽하게나서서혼자서도넉넉히雌雄보다別한것이어야겠다.
脫身. 신발을벗어버린발이虛天에서失足한다.

― <조선일보> 1936. 10. 4 ~ 9 ―
 
 
買春
‘매춘(賣春)’은 돈을 받고 몸을 파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매춘(買春)’은 돈을 주고 몸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맞나? 이상 시인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골치 아픈 존재다. 뻔한 것을 뻔하게 쓰는 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시의 제목 ‘매춘(買春)’이 돈을 주고 몸을 사는 것이라고 한다면 독자는 너무나 쉽게 시의 의미를 알아차리게 된다. 시가 재미없을 것이다. 이 시의 제목 ‘매춘(買春)’은 젊음을 산다는 의미다. ‘춘(春)’은 젊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화자가 몹시 아픈가 보다. 이상 시인이 병으로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은 적이 있는가 보다. <오감도 제팔호 해부>를 보면 이상 시인이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 사진을 찍고 수술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따라서 이 시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아픈 화자가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는 상황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몹시 아파서 곧 죽을 수도 있는 젊은 환자가, 병원에 가서 돈을 주고 수술을 한 다음, 다시 건강을 회복하려고 할 때, 병원에 돈을 내고 치료를 받는 행위는 젊음을 사는 행위다. 매춘(買春)이다.
記憶을 맡아보는 器官이 炎天 아래 생선처럼 傷해 들어가기 始作이다. 朝三暮四의 싸이폰作用. 感情의 忙殺.
수술을 하기 전에 마취를 하는 장면 같다. 기억을 맡아 보는 기관 즉 뇌가 뜨거운 햇볕 아래 생선처럼 상해 들어가기 시작한다. 뇌가 상해 들어간다는 말은 기억이 점점 가물가물해 진다는 말이다. 마취를 할 때 의식을 점점 잃어가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마취는 조삼모사의 사이펀 작용이다. 하나의 사물이 세 개로 보였다가 네 개로 보였다가 하면서, 의식이 점점 아래로 내려간다. 마취는 감정 즉 느낌을 빠삐 죽이는 것이다.
나를 넘어뜨릴 疲勞는 오는 족족 避해야겠지만 이런 때는 大膽하게 나서서 혼자서도 넉넉히 雌雄보다 別한 것이어야겠다.
나를 넘어뜨릴 피로는 오는 족족 피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마취는 피로가 나를 넘어뜨리는 것이지만, 대담하게 나서서 넘어져야 한다. 승부를 가르는 경기에서는 둘이 겨루다가 내가 피곤하면 그 피곤이 나를 넘어뜨리는 것이지만, 마취는 혼자서도 넉넉히 넘어지는 것이다. 마취할 때는 피곤이 나를 넘어뜨리는 것이지만, 암수가 성교 후에 몰려오는 피곤이 나를 넘어뜨리는 것과는 이상스럽게 다른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매춘(買春)>은 남녀가 성교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脫身. 신발을 벗어버린 발이 虛天에서 失足한다.
탈신(脫身). 관계하던 일에서 몸이 빠져 나온다. 여기서 관계하는 것은 의식이고, 그 의식에서 몸이 빠져 나온다. 즉 의식을 잃고 자유로운 몸이 된다. 이것은 마취다.
신발을 벗어버린 발이 텅 빈 하늘에서 실족하여 떨어진다. 사람이 높은 다리 위나 절벽에서 자살을 할 때는 신발을 벗어놓고 뛰어내린다고 한다. 그러나 마취는 스스로 죽음과 같은 상태로 뛰어드는 것이다.
 

 
▣   生涯

내頭痛위에新婦의장갑이定礎되면서내려앉는다. 싸늘한무게때문에내頭痛이비켜설氣力도없다. 나는견디면서女王蜂처럼受動的인맵시를꾸며보인다. 나는已往이주춧돌밑에서平生이怨恨이거니와新婦의生涯를浸蝕하는내陰森한손찌거미를불개미와함께잊어버리지않는다. 그래서新婦는그날그날까무러치거나雄蜂처럼죽고죽고한다. 頭痛은永遠히비켜서는수가없다.

― <조선일보> 1936. 10. 4 ~ 10. 9 ―
 
 

生涯
생애(生涯)의 기본적인 의미는 사람이 살아가는 한평생, 혹은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생애(生涯)라는 말이 무엇을 암유한다고 본다면, 살아있는 물가, 솟아나는 물가 즉 체액이 솟아나는 신부의 음부를 암유한다. 여자는 성적으로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졌던 이상은 신부에게도 늘 성적으로 만족을 못 시켜주는 것에 대해서 고민을 하였던 것 같다.
내 頭痛 위에 新婦의 장갑이 定礎되면서 내려앉는다.
두통(頭痛)은 머리가 아픈 증상이다. 그렇다면 이상 시인에게 있어서, 신부인 아내와의 사이에서 살아가면서 두통거리는 무엇이었을까? 이상의 시 <가정>, <화로>, <백서> 등을 참고할 때, 남녀가 함께 사는 가정에서는 아내도 늘 성적으로 만족을 할 수 있어야 원만한 가정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것이 화자의 두통이다.
화자의 두통 위에 신부의 장갑이 정초되면서 내려앉는다. 아내를 성적으로 만족시켜야 한다고 고민하는, 화자의 남근 위로, 신부의 손이 주춧돌처럼 내려앉았다. 잘 발기가 되지 않는 화자의 남근을 신부가 손으로 애무를 하는 것 같다. 힘이 빠진 남근은 신부가 손으로 애무해도 신부의 손을 제대로 느껴 발기되지 않는다. 마치 장갑을 끼고 애무하는 것처럼 느낀다.
왜 신부가 화자의 남근을 애무하는 것을 두고 정초(定礎)되었다고 했을까? 주춧돌을 놓는 것은 그 위에 기둥을 세우기 위함이다. 신부가 화자의 남근을 애무하는 것은 화자의 남근을 자신의 손으로 세우기 위함이다. 그래서 신부의 손이 주춧돌이 된다.
싸늘한 무게 때문에 내 頭痛이 비켜설 氣力도 없다.
싸늘한 주춧돌의 무게 때문에 화자의 두통이 비켜설 기력도 없다. 싸늘한 주춧돌의 무게 즉 기둥처럼 남근 세우는 원동력이 되는 성적 에너지(정력, 기력)가 싸늘하게 식어 가라앉았기 때문에 화자의 두통이 비켜설 기력도 없다. 화자의 두통인 남근이 제대로 발기되지 않는 것을 피할 기력도 없는 것이다.
나는 견디면서 女王蜂처럼 受動的인 맵시를 꾸며 보인다.
화자는 두통거리인 발기가 되지 않는 남근을 신부가 열심히 애무하는 것을 견디면서, 여왕벌처럼 수동적인 맵시를 꾸며 보인다. 마치 여왕벌처럼 아내의 애무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수동적인 맵시를 꾸미는 것은 신부가 애무를 잘 할 수 있도록 자세를 취한다는 의미다. 꾸미는 것은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이다.
나는 已往 이 주춧돌 밑에서 平生이 怨恨이거니와 新婦의 生涯를 浸蝕하는 내 陰森한 손찌거미를 불개미와 함께 잊어버리지 않는다.
화자는 이왕 이 주춧돌 밑에서 평생이 원한이다. 주춧돌 밑은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우게 하는 성적 에너지다. 따라서 화자는 늘 남근을 세울 수 있는 기력이 달리는 것이 원한이다. 
그래서 신부의 생애 즉 신부의 체액이 솟아나는 음부를 침식하는 내 쓸쓸한 손찌검을 불개미와 함께 잊어버리지 않는다. 신부의 생애를 침식한다는 것은 신부의 음부를 손으로 파고 들어간다는 의미다. 불개미는 단것을 좋아하여 단물이 있는 곳에 모여들어 그것을 먹는다. 화자도 불개미처럼 신부의 체액이 나오는 달콤한 음부를 손으로 파고들면서 애무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 장면은 화자가 아내의 음부를 손가락으로 애무하여 아내를 만족시키는 장면이다.
그래서 新婦는 그날그날 까무러치거나 雄蜂처럼 죽고죽고 한다. 頭痛은 永遠히 비켜서는 수가 없다.
그래서 신부는 그날그날 성적으로 만족하여 까무러치거나, 수펄처럼 죽고 또 죽고 한다. 수펄은 여왕벌과 교미를 마치면 죽는다고 한다. 신부는 화자의 애무에 의해서 성적으로 만족하여 까무러치거나 만족 후에 마치 죽는 것처럼 늘어져 누워 있는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화자의 두통은 영원히 비켜서는 수가 없다. 화자의 두통거리인 발기가 되지 않는 것은 영원히 피할 수가 없다. 또 그렇기 때문에 아내를 손으로 만족시켜야 한다는 골칫거리도 영원히 사라지지도 않는다.
 


▣   ​自像

여기는어느나라의데드마스크다. 데드마스크는盜賊을맞았다는소문도있다. 풀이北極에서破瓜하지않던이수염은絶望을알아차리고生殖하지않는다. 千古로蒼天이허방에빠져있는陷穽에遺言이石碑처럼은근히沈沒되어있다. 그러면이곁을生疎한손짓발짓의信號가지나가면서無事히스스로와한다. 점잖던內容이이래저래구구기시작한다.

― <조선일보> 1936. 10. 4 ~ 10. 9 ― 
 

自像
이 시의 제목 ‘自像(자상)’은 ‘自畵像(자화상)’이라는 말과 같은 말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상이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쓴 시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이상 시인의 시를 읽어 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함정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다가, 결국 황당한 결론에 도달하고 마는 것은 천하에 비일비재한 일이다.
여기서 자상은 자신을 본뜬 형상이라는 의미다. 이상 시인이 자화상이라는 말을 몰라서 자상이라고 했겠는가. 물론 이상 시인은 자상을 자화상으로 읽을 어리석은 사람들을 예상하면서 썼을 것이다. 그것은 시를 쓰는 또 하나의 재미다. 서정주 시인도 그랬을 것이다. 서정주 시인의 시를 거꾸로 읽는 것은, 우리 한국문학의 상식이요 비극이다. 언제 기회가 다면 서정주 시인의 시들도 읽어보고 싶다. 각설하고, 자화상은 자신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고, 자상 자신의 형상이다. 자신의 형상을 닮은 그 어떤 것을 비유한 것이다.
필자는 그것을 자식이라 하겠다. 또 이것을 자식을 낳을 수 있는 남근이라 하겠다. 자식은 아비의 형상을 닮게 되는 것이고, 자식을 낳을 화자의 남근 또한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상 시인이 남근을 사람의 형상으로 묘사한 시는 여러 편이 있다. 언뜻 생각나는 것만 해도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삼각형>, <백서> 등이 있다.
그냥 이상 시를 읽은 독자로서 추정해 본다. 이 시는 1936년에 쓴 시다. 1936년 유월을 전후하여 시인은 슬그머니 변동림과 결혼하게 된다. 둘이만 어디엔가 가서 결혼식을 했던 것 같고, 간단한 살림살이만으로 결혼 생활을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금홍이와는 다른 면에서 변동림은 이상 시인이 매우 좋아했던 여자였던 것 같다. 결혼을 하면 가정을 이루는 것이 되고, 가정이 이루어졌으면 자손을 생산하는 것이 자연스런 이치다. 그러나 이상 시인과 변동림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결혼 생활도 오래 가지 못하였던 것 같다. 자식이 있었더라면 하는 가정도 해 본다.
필자는 더 이상 그 자세한 내막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도 못하며, 그것을 알기 위하여 이런저런 책을 읽어 본 적도 없고, 앞으로 읽어볼 마음도 별로 없다. 이것저것 안다는 것이 반드시 시를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보장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는 어느 나라의 데드마스크다. 데드마스크는 盜賊을 맞았다는 소문도 있다.
여기 즉 화자의 남근은 어느 나라의 데드마스크다. 발기된 남근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귀두가 얼굴의 형상이요, 귀두 밑 잘록한 부분이 사람으로 치면 목에 해당하고, 그리고 그 아래가 바로 몸통의 형상이다. 그런데 발기되지 않는 화자의 남근은, 사람의 얼굴 형상이라고 하기에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분간이 안 되고, 죽은 사람의 얼굴 형상을 하고 있는 것도 같고, 제대로 사람의 형상도 갖추지 못한 것도 같다. 어느 나라의 데드마스크와 같다.
그 데드마사크는 도적을 맞았다는 소문도 있다. 화자의 남근이 기력을 회복했다는 말이다. 이상 시인과 변동림의 결혼은 친구들도 몰랐던가 보다. 어느 날 이상의 집에 갔더니, 거기에 변동림이 있었고, 나중에 사람들은 이상 시인이 변동림과 결혼한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상 시인이 결혼하였다는 소문이 있었으며, 결혼을 하였으면 제대로 남편 구실을 할 것이고, 그러면 남근이 제 구실을 할 것이라는 발상에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풀이 北極에서 破瓜하지 않던 이 수염은 絶望을 알아차리고 生殖하지 않는다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기 위해서 남편과 아내가 잠자리를 같이 하고자 한다. 그러나 성적 열기가 올라오지 않고 차갑게 식어서 발기하지 못한 남편이 아내와 성교를 한다면, 남근이 아내의 음부로 들어가지 못하고, 쓸데없이 남편의 음모와 아내의 음모만 서로 부딪힌다. 따라서 아내의 처녀막을 뚫을 수 없다. 처녀막이 터지지 않던 수염 즉 아내의 음부는 절망을 알아차리고 생식하지 않는다. 자손을 낳고자 하는 노력, 즉 성교를 포기한다.
千古로 蒼天이 허방에 빠져 있는 陷穽에 遺言이 石碑처럼 은근히 沈沒되어 있다
아득한 옛날부터 푸른 하늘이 움푹 파인 곳에 빠져 있는 구덩이에, 유언이 돌비석처럼 은근하게 침몰되어 있다. 참으로 말이 어렵다. 아득한 옛날부터 아내는 아래에 눕고, 남편은 아내의 몸 위에 올라서 자손을 잉태하여 생식하는 상식이다. 따라서 푸른 하늘이 움푹 들어간 곳에 빠져 있는 함정은, 푸른 하늘을 향하여 누워 있는 아내의 음부다. 여기에다가~~
자식을 낳으면, 아비는 그 자식에게 유언을 하고 죽는 것이다. 자식은 유언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그 자손은 자신을 낳아 길러 준 아비가 죽으면 석비를 세우는 것이다. 유언을 남기고 석비를 세워 줄 자식을 낳고자 하는 화자, 남근이 석비처럼 은근하게 아내의 음부에 가라앉았다. 남근이 드디어 발기되어 석비처럼 굳게 딱딱하게 되고, 아내의 음부를 향하여 은근하게 쑥욱 들어가 잠긴다. 석비는 딱딱하게 발기된 남근을 암유한다.
그러면 이 곁을 生疎한 손짓발짓의 信號가 지나가면서 無事히 스스로와 한다
그러면 이 곁을 즉 아내의 함정에 침몰한 화자의 석비 곁을 생소한, 전에는 없었던 손짓발짓의 신호가 지나간다. 모처럼 성적 쾌감에 젖은 아내가 손과 발을 이리저리 흔들어 대면서 어쩔 줄을 모르고 만족한다. 그러면서 아내는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수줍고 부끄러워한다. 성교가 끝나면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조용해지면서, 너무 손짓발짓을 한 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흥분하여 발광을 한 것에 대해서, 수줍어하고 부끄러워한다.
점잖던 內容이 이래저래 구구기 시작한다
‘內容(내용)’은 안 내, 얼굴 용, 해서 아내의 함정 안에 있던 얼굴이다. 즉 발기되어 제대로 사람 형상을 갖추었던 화자의 자랑스런 남근이다. 그러나 아내와의 성교가 끝나고 아내가 수줍어하고 부끄러워하면, 화자의 점잖던 내용 즉 발기되어 제대로 사람의 형상을 갖추고 있었던 남근은, 이래저래 구기기 시작한다. 남근은 힘이 빠지고 줄어들면서 이래저래 좌우로 힘없이 흔들리고, 사람의 형상을 갖추고 있던 귀두가 구겨저 줄어들기 시작한다. 도로 데드마스크가 되고 만다.
 

▣   8. 無題

一九三三. 六. 一

天秤위에서 三十年동안이나 살아온사람(어떤科學者) 三十萬個나넘는 별을 다헤어놓고만 사람(亦是) 人間七十 아니二十四年동안이나 뻔뻔히살아온 사람 (나) 나는 그날 나의自敍傳에 自筆의訃告를 揷入하였다. 以後나의肉身은 그런故鄕에있지않았다 나는 自身나의詩가 差押當하는꼴을 目睹하기는차마 어려웠기 때문에.

― <카톨릭 靑年> 1933. 7 ―
 

1933년 6월 1일, 이상 시인이 무슨 중대한 선언을 하는 것 같다. 무엇을 선언하는 것일까. 그것은 시를 잘 읽어 보아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시만 읽어서는 알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시는 애매하다. 애매한 시만으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시인의 연보라도 참고해야 할지 모른다.
天秤 위에서 三十年 동안이나 살아온 사람(어떤 科學者) 三十萬 個나 넘는 별을 다 헤어 놓고 만 사람(亦是)
천칭(天秤)은 저울의 한 종류다. 지레의 원리를 이용해 물체의 질량을 측정하는 장치다. 또 처녀자리와 전갈자리 사이에 있는 별자리를 천칭자리라고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 것 같다.
천칭 위에서 살아온 사람과 마찬가지로, 30만 개나 넘는 별을 다 헤어 놓은 어떤 과학자. 그도 역시 대다한 과학자다. 일생동안 천칭자리 하나만을 관찰하고 연구한 과학자다. 평생 동안 한 우물을 판 사람이다.
人間七十 아니 二十四 年 동안이나 뻔뻔히 살아온 사람 (나) 나는 그날 나의 自敍傳에 自筆의 訃告를 揷入하였다.
인생 칠십 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말이 있다. 인간 칠십(人間七十)은 한 사람의 한평생이다. 한평생 동안, 아니 이 시를 쓸 당시의 시인의 나이는 24세였으니, 24년 동안, 나름대로 한평생 동안, 화자는 뻔뻔히 살아온 사람이다.
여기서 생각해 보자. 화자의 삶은 앞의 과학자의 삶과 대조된다. 과학자가 한평생 하나의 일에 몰두하여 살아온 사람이라면, 시인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뻔뻔히 살아왔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시인은 이것저것 여러 일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화자는 그날, 자신의 자서전에 부고를 삽입한다. 자서전? 아마 일기일 것이다. 일기는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서 서술한 책이다. 자서전이다. 자서전에 부고를 삽입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은 죽은 삶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以後나의肉身은 그런故鄕에있지않았다 나는 自身나의詩가 差押當하는꼴을 目睹하기는차마 어려웠기 때문에.
이후 화자의 육신은 그런 고향에 있지 않았다. 육신이 이것저것 하면서 살아온 고향에 있지 않겠다. 지금까지 이것저것 하면서 살아온 삶에서 벗어나 오로지 시에만 전념하고 싶다는 말로 보인다. 실제로 이상은 1933년 총독부 기수직을 그만두고, 취직을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자신의 시가 차압당하는 꼴을 차마 보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차압당하는 것은 강제로 빼앗기는 것이다. 남들이 자신의 시를 너무 쉽게 읽어버리는 꼴을 보기 싫다는 말이다. 시라는 것은 그 의미를 쉽게 알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오래도록 그 시를 본다. 그러나 의미가 쉽게 드러나는 시는, 한 번 본 다음에는 다시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화자는 앞으로는 시를 쓰는 것에만 전념하여,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도록 시를 더욱 어렵게 쓰겠다는 말로 보인다.
오늘날 사람들이 이상의 시에 관심을 갖는 것이 이해가 된다. 아직도 이상의 시들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끊임없이 사람들이 관심을 보인다. 아직도 이상의 시는 차압당하지 않았다. 적어도 필자의 <이상시 해설>이 나오기 이전까지는 차압당하지 않았다.
 


▣   꽃나무 

벌판한복판에 꽃나무하나가있소. 近處에는 꽃나무가 하나도없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를 熱心으로생각하는것처럼 熱心으로꽃을피워가지고섰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소. 나는막달아났소. 한꽃나무를爲하여 그러는것처럼 나는참그런이상스러운흉내를내었소.

― <카톨닉靑年> 1933. 7 ―
 
 
‘벌판 한 복판에 꽃나무 하나가 있소’라는 문장을 여러 번 되뇌어 보자. 그러면 어느새 벌판 한 복판에 있는 꽃나무 하나를 상상하게 된다.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딘가 벌판 한 복판에 꽃나무 하나가 있는 것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화자는 지금 그 꽃나무 하나를 상상하고 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이상의 시 <수염>이 떠올랐다. <수염>은 아메리카 여자와 남자의 나체 사진을 보면서 자위(自慰)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 시의 마지막에서 ‘우리의 하늘은 너무 푸르다. 폐쇄주의적이다’라고 말한다. 성(性)에 대해서 지나치게 폐쇄주의적인 우리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화자는 지금 요염한 여자 나체 사진을 보고 있다. 남자를 유혹하는 듯한 요염한 자세의 여자 사진이다. 흔히 꽃은 여자에 비유된다. 여자에 몰려드는 남자는 벌과 나비다.
벌판 한복판에 꽃나무 하나가 있소.
벌판 한 복판에 여자가 하나가 있다. 여자의 나체 사진을 보면서, 사진 속의 실제 여자를 상상하는 것이다. 어디에 사는 여자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그 여자는 벌판 한복판에 있다. 
벌판 한복판에 있는 꽃이 누구의 소유도 아니듯이, 벌판 한복판에 있는 여자는 누구의 소유도 아닌 여자를 말하는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누구나 상대할 수 있는 창녀나 그와 유사한 부류의 여자는 벌판 한복판에 있는 꽃이다.
近處에는 꽃나무가 하나도 없소.
근처에는 여자가 하나도 없다. 사진 속에는 한 명의 여자만 있다. 화자는 어디에 사는지 모르는 사진 속의 실제 여자를 상상한다. 그래서 근처에는 여자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오직 사진 속의 실제 여자 하나만을 상상하면서 그 여자에만 몰두하고 있다.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를 熱心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熱心으로 꽃을 피워가지고 섰소.
사진 속의 여자는 자기가 생각하는 여자를 열심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열심으로 요염한 자세를 하고 있다. 사진의 실제 여자가, 자신이 생각하기에, 남자를 유혹하기에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요염한 자세를, 열심히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요염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 화자는 생각한다.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에게 갈 수 없소.
사진 속의 실제 여자는, 마치 자신이 가장 요염하다고 생각하는 자세를 취할 수 없어서 안타까워하는 듯이 보인다.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서는 요염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여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자는 참으로 요염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나는 막 달아났소.
그래서 화자는 막 달아났다. 막 달아나는 행위는 대상으로부터 급히 멀어지는 행위다. 그리고 막  달아날 때는 손을 앞뒤로 마구 흔들어 댄다. 숨이 찬다. 화자는 사진 속의 실제 여자를 상상하면서, 그 여자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 남자를 간절히 원하면서 유혹하고 있는 여자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 손을 마구 흔들면서, 숨을 몰아쉰다. 자위를 한 것이다.
자위를 하고 사정을 하면 여자 생각에서 멀어진다. 자위를 하면 여자로 인해 일어난 욕망이 달아난다. 그래서 막 자위하는 것이 그 여자로부터 막 달아나는 것이다.
한 꽃나무를 爲하여 그러는 것처럼 나는 참 그런 이상스러운 흉내를 내었소.
한 여자, 사진 속의 실제 여자를 위하여 그러는 것처럼, 애절하게 사랑을 갈구하는 여자를 위해서 하는 것처럼, 화자는 참 이상스러운 흉내를 낸 것이다. 그 여자의 욕망을 해결해 주지도 못하면서, 참 이상스러운 흉내만 낸 것이다. 화자는 여자 나체 사진을 보면서, 그 사진 속의  실제 여자를 상상하면서 자위를 한 것이다.




▣   이런 詩

역사를하느라고 땅을파다가 커다란돌을하나 끄집어내어놓고보니 도무지어디서인가 본듯한생각이들게 모양이생겼는데 목도들이 그것을메고나가더니 어디다갖다버리고온모양이길래 쫓아가보니 危險하기짝이없는큰길가더라.
그날밤에 한소나기하였으니 必是그돌이깨끗이씻겼을터인데 그이튿날가보니까 變怪로다 간데온데없더라. 어떤돌이와서 그돌을업어갔을까. 나는참이런凄凉한생각에서아래와같은作文을하였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한平生에 차마 그대를 잊을수없소이다. 내차례에 못올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혼자는 꾸준히생각하리다. 자그러면 내내어여쁘소서』
어떤돌이 내얼굴을 물끄럼히치어다보는것만같아서 이런詩는 그만찢어버리고싶더라.

 ― <카톨닉靑年> 1933. 7 ―
 

이 시는 소설 <날개>에도 등장하는 금홍이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1933년 시인이 스물 세 살이었을 때, 폐병으로 인한 각혈로 황해도 백천온천으로 요양을 간다. 거기에서 기생 금홍이를 만나게 되고, 이후 상경하여 <제비>라는 다방을 개업한다. 금홍이를 마담으로 앉히고, 약 3년간 동거한다.
<날개>를 보면 금홍이는 이상의 정식 부인이라기보다는 동거하면서 몸을 팔기도 하는 여자가 아닌가 싶다. 이 시도 그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역사를 하느라고 땅을 파다가 커다란 돌을 하나 끄집어내어 놓고 보니 도무지 어디서인가 본 듯한 생각이 들게  모양이 생겼는데 목도들이 그것을 메고 나가더니 어디다 갖다 버리고 온 모양이길래 쫓아가 보니 危險하기 짝이 없는 큰 길가더라. 
역사는 토목건축이나 공사 따위의 커다란 일이다. 여기서는 이상이 백천온천에 폐병을 고치기 위해서 갔던 일, 혹은 요양 갔다가 기생 금홍이와 관계를 맺은 일을 암유한 것으로 보인다. 땅을 파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면 기생인 금홍이와 성적 관계를 맺는 행위를 암유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역사를 하다가 큰 돌 하나를 끄집어냈다. 그런데 그 돌은 어디선가 본 듯한 낯이 익은 돌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끌리는 여자였다. 보통 어딘지 마음에 드는 사람은 꼭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 돌을 목도들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큰길가에 버렸다. 그 큰길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다. 사람들이 그 돌을 몰래 가져가기 좋은 곳이다. 이상이 금홍이를 데리고 서울에 와서 다방 <제비>의 마담으로 앉힌 것을 두고 하는 말로 보인다. 다방이라는 곳은 사람의 왕래가 많은 곳이다. 사람들이 금홍이에게 눈독을 들이기 쉬운 곳이다. 금홍이도 사람들을 만나면 마음이 쉽게 바뀌기 좋은 곳이다. 따라서 다방은 사람이 많이 왕래하는 큰길가와 다름이 없다.
 
그날 밤에 한 소나기 하였으니 必是 그 돌이 깨끗이 씻겼을 터인데 그 이튿날 가보니까 變怪로다 간데 온데 없더라. 어떤 돌이 와서 그 돌을 업어갔을까. 나는 참 이런 凄凉한 생각에서 아래와 같은 作文을 하였다.
그날 밤에 한 소나기 하였다. 소나기는 퍼붓는 것이다. 화자는 금홍이에게 퍼붓었다. 금홍이가 다른 남자와 계속 관계하는 것을 두고 금홍이와 다툰 것이다. 그렇게 퍼부었으면 반드시 그 돌이 깨끗이 씻겼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이튿날 가보니, 이상했다. 금홍이가 간데 온데 없었다. 금홍이가 집을 나가버린 것이다. 화자는 처량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작문을 하였다. 아래와 같은 마음을 담아서 시를 썼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平生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어떤 돌이 내 얼굴을 물끄럼히 치어다보는 것만 같아서 이런 詩는 그만 찢어버리고 싶더라.
“내가 그렇게 사랑하던 그대 금홍이여, 내 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나의 차례가 되지 못할 사랑인 줄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겠습니다.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금홍이를 데려간 어떤 사람이 읽고,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볼 것 같아서, 그만 찢어버리고 싶었다. 괜히 자신을 비웃을 것 같았다. 아니면 미친 놈 취급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   普通記念

市街에 戰火가일어나기前
亦是나는 뉴―톤이 가리키는 物理學에는 퍽無智하였다.
나는 거리를 걸었고 店頭에 苹果山을보며는 每日같이 物理學에 落第하는 腦髓에피가묻은것처럼자그마하다.
계집을 信用치않는나를 계집은 絶對로 信用하려들지 않는다 나의말이계집에게 落體運動으로影響되는일이없었다.
계집은 늘내말을 눈으로들었다 내말한마디가계집의 눈자위에 떨어져 본적이없다.
期於코 市街에는 戰火가일어났다 나는 오래 계집을 잊었었다 내가나를버렸던까닭이었다.
주제도 더러웠다 때끼인 손톱은길었다
無爲한日月을 避難所에서 이런일 저런일
우라끼에시(裏返) 裁縫에 골몰하였느니라
종이로 만든 푸른솔잎가지에 또한 종이로만든흰鶴同體한개가 서있다 쓸쓸하다
火爐가햇볕같이 밝은데는 熱帶의 봄처럼부드럽다. 그한구석에서 나는地球의 公轉一週를 紀念할줄을 다알았더라.

― <月刊每申> 1934. 6 ―
 

普通 記念
보통 기념!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다. 무엇을 기념할 때, 보통은 특별한 것을 기념한다. 특별한 누구의 생일을 기념하고, 특별한 결혼 몇 주기를 기념하고, 특별한 죽음을 기념하여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그런데 ‘보통 기념’이란다. 보통의 것을 기념한다는 말인지, 보통이 된 것을 기념한다는 것인지, 기념 자체가 보통이었다는 말인지, 하여튼 보통 기념은 보통 기념이 아닌 것 같다. 특별한 기념인 것도 같다. 
언어유희를 하고 있는 이상의 시 앞에서 옥편을 펴 놓고 읽지 않는 한, 어떠한 지성도 이 시를 이해할 수 없다.
이상이 드디어 여자를 알게 되었다. 여자는 어떻게 해야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는지 알게 되었다. 여자를 공전 일주함으로써 여자에 대해서 지혜를 갖게 되었다.
市街에 戰火가 일어나기 前 / 亦是 나는 뉴―톤이 가리키는 物理學에는 퍽 無智하였다.
사창가에 가서 창녀와 뜨겁게 하나가 되기 전, 역시 옳다. 화자는 뉴턴이 말하는 물리학 즉 만유인력 즉 생면부지의 남녀가 그렇게 뜨겁게 하나가 될 수 있는 원리, 남녀 사이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몰랐다. 화자는 사창가에 가서 몸소 체험함으로써 남녀 간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성이 중요함을 깨달은 것이다. 체험 후에 그 깨달음을 ‘역시 옳다’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나는 거리를 걸었고 店頭에 苹果山을 보며는 每日같이 物理學에 落第하는 腦髓에 피가 묻은 것처럼 자그마하다.
화자는 거리를 걸었고, 여관 앞에 창녀들이 많은 것을 보면, 매일같이 아내와의 성교에 소질이 없는 남근이, 마치 사정을 하되 피를 흘리듯이 조금 하고 난 뒤 줄어들었다.
계집을 信用치 않는 나를 계집은 絶對로 信用하려 들지 않는다 나의 말이 계집에게 落體運動으로 影響되는 일이 없었다.
성적으로 아내를 분명하게 다스릴 줄 모르는 화자에게, 아내는 절대로 믿고 베풀려고 들지 않는다. 화자의 남근이 아내에게 성교로 이어져서 아내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계집은 늘 내 말을 눈으로 들었다. 내 말 한 마디가 계집의  눈자위에 떨어져 본 적이 없다.
아내는 늘 화자의 남근을 눈으로 들었다. 화자의 남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화자의 남근 한 마디, 한 마디만한 작은 남근을 계집의 눈자위에 떨어져 본 적이 없다. 아내가 화자의 남근에 똑바로 보고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期於코 市街에는 戰火가 일어났다 나는 오래 계집을 잊었었다 내가 나를 버렸던 까닭이었다.
기어코 화자가 창녀와 샀다. 화자는 오래 아내를 잊었다. 아내의 성감대에 대해서는 연구하지 않았다. 그것은 화자가 화자를 버렸던 까닭이다. 화자는 아내가 어떻게 해야 자신을 좋아하는지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제도 더러웠다 때 끼인 손톱은 길었다 / 無爲한 日月을 避難所에서 이런 일 저런 일 / 우라끼에시(裏返) 裁縫에 골몰하였느니라.
사창가에서 창녀를 만나기 전, 화자는 주제꼴도 더러웠다. 때가 낀 손톱도 더러웠다. 하는 일 없는 낮과 밤을, 아내와의 어려움을 피하면서, 이런 일 저런 일, 아내의 속마음을 돌이킬 방법과, 어떻게 하면 합하여 하나가 될 수 있는가에만 골몰하였다. 성적으로 잘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종이로 만든 푸른 솔잎가지에 또한 종이로 만든 흰 鶴同體 한 개가 서있다. 쓸쓸하다.
종이로 만든 푸른 솔잎가지에 또한 종이로 만든 흰 학과 같은 고상한 몸뚱이 한 개가 서 있다. 쓸쓸하다. 화자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아내에 대해서 마치 고상한 한 마리 학처럼, 고상한 것에서 그 이유와 방법을 찾았다. 그러다 보니 결국 아내의 관심을 받지 못했고, 화자는 쓸쓸했다.
火爐가 햇볕같이 밝은 데는 熱帶의 봄처럼 부드럽다. 그 한 구석에서 나는 地球의 公轉一週를 紀念할 줄을 다 알았더라.
화로처럼 뜨거움을 간직한 창녀가, 햇볕같이 밝은 데 즉 뜨거움이 모여 있는 곳인 음부는, 열대의 봄처럼 뜨거우면서도 부드럽다. 그 음부의 한 구석에서, 화자는 지구의 공전일주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실마리를 생각할 줄을 알았다.
화자는 창녀를 대상으로 여자에 대해서 탐구한 것이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한 바퀴 돌면, 지구에는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듯이, 화자는 여자를 성적 단계에 따라서 다루어야 함을 터득한 것이다. 처음에는 봄처럼 부드럽게 애무를 하고, 그리하여 여자의 몸이 점점 여름처럼 뜨거워지면 그 때 여자에게 적극적으로 행위로 절정에 도달하게 한다. 그리고 절정이 지나면 가을이 오듯이 여자는 서서히 식어간다. 이때에도 역시 애무를 통하여 여자의 쾌감의 나머지를 지속적으로 유지시켜 준다. 그리고 마침내 여자는 겨울처럼 식어서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바로 지구의 공전일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화자는 창녀와의 관계 속에서 여자의 뜨거워짐과 식어감의 실마리를 생각할 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아내와의 관계가 보통 사람들의 부부 관계처럼 돌아왔던 것이다. ‘普通紀念(보통기념)’은 한 여자로부터의 경험이 널리 통하는 실마리가 된다는 의미다. 창녀로부터 여자 다루는 법을 터득한 화자, 이를 아내에게 적용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   거울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 ―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게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 <카톨닉靑年> 1933. 10 ―



거울은 거울인가? 이상의 시에는 거울과 관련된 제목을 가진 몇 편의 시가 나온다. <명경>과 <오감도 시제십오호>가 대표적이다.
이상의 시는 기본적으로 제목들에서부터 상식적 접근을 거부한다. <수염(鬚髥)>은 수염이 아니고 음모다. <매춘(買春)>은 여자를 사는 것이 아니고, 젊음을 사는 것이다. <총구(銃口)>는 총구가 아니고 정액을 발사하는 남근이다. <명경>은 거울이 아니고 사진이다. <백서(白書)>는 정부에서 발표하는 글이 아니고, 자신의 경험을 고백하는 글이다. <자상(自相)>은 자화상이 아니고, 자신의 형상을 닮은 남근이다. <대낮>은 대낮이 아니라, 대낮과 같이 밝은, 전등불이 켜 있는 깜깜한 새벽이다. <공복(空腹)>은 빈 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운데’, ‘미래’의 의미로도 쓰였다. 이상의 시는 제목에서부터 상식적 읽기를 거부하고 의심할 때, 그 시는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거울은 거울이라는 상식에서 벗어나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거울은 거울이 아니다. 거울은 사진이다. 화자는 지금 어린 시절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이상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을까? 필자는 자세히는 모른다. 그러나 대충 아는 대로 이야기하면, 우리 나이 셈법으로 네 살 때, 큰아버지에게 양자를 간다. 자식이 없었던 큰아버지는 이상을 양자로 맞은 것이다. <역단>에 보면 가난했던 생부는 총독부에 기술직으로 있어서 비교적 잘 살던 큰아버지로부터 얼마간의 돈을 받고, 또 아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맏아들인 이상을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보낸다. 큰아버지는 그 후 어느 젊은 여자를 첩으로 맞아서 아들을 낳는다. 그러나 이상은 어려서부터 똑똑하여 큰아버지는 이상을 미워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어린 시절 이상은 점점 자라면서 자신이 큰아버지의 진짜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갈등한다. <역단(易斷)>은 점점 자라면서 큰아버지가 자신을 낳은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갈등하는 것을 표현한 가장 대표적인 시다.
이상은 1910년생이다. 이 시는 1933년에 썼다. 이상의 나이 24세 때다. 
이상은 자랐다. 자신을 양자로 보낸 생부에 대한 반감, 큰아버지 집에서 대를 이어가는 존재로 살아야 하는, 비극적 운명에 대한 거부감 등이 항상 이상의 가슴에 크게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시에 이런 의식이 엿보인다. 그리고 총독부 기수직이라는 좋은 직장을 그만둔다. 폐병으로 백천온천에 요양을 간 것도 이 시절이다. 고독했던 이상은 백천온천에서 금홍이를 만나고, 금홍이에게 사랑을 느낀다. 금홍이는 이상이 매우 좋아했던 여자인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이런 상황에서 화자가 자신의 어린 시절, 큰아버지가 양부라는 사실도 모른 채 지내던, 어린 시절의 사진을 보고 있다고 상황을 설정해 보자.
이 시의 제목 거울은 사진이다. 거울은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게 하는 도구다. 어린 시절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게 해 주는 도구도 역시 사진이다.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 / 저렇게까지 조용한 세상은 참 없을 것이오.
사진 속에는 소리가 없다. 사진 속의 어린 시절의 나는, 지금의 나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내가 지금의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렇게까지 조용한 세상은 참 없을 것이다. 사진 속의 어린 시절의 나는 현재의 나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는다.
거울 속에도 내게 귀가 있소. / 내 말을 못 알아듣는 딱한 귀가 두 개나 있소.
사진 속에도 나에게도 귀다 있다. 그러나 그 사진 속의 나의 귀는 현재의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 내 말을 못 알아듣는 딱한 귀가 두 개나 있다.
여기서 보면 현재의 화자와 어린 시절의 화자는 단절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속의 어린 화자는 그 때의 생각에서 말을 하고 살았다. 그리고 현재의 화자는 그 때 생각하고 말하던 화자가 아니다. 따라서 현재의 화자는 사진 속의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무엇인가 충고를 하고 싶다. 그러나 그 사진 속의 어린 시절의 화자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사진 속의 어린 시절의 나는 귀가 두 개나 있으면서도, 지금 나의 충고를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당연하다. 현재의 내가 어찌 과거의 자신에게 충고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화자는 현재 자신의 입장에서 과거의 자신에게 무엇인가 충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자신의 삶에 대한 부정이다.
거울 속의 나는 왼손잡이오. / 내 악수를 받을 줄 모르는 ―악수를 모르는 왼손잡이오.
사진 속의 나는 왼손잡이다. 지금의 나와 반대로 된 존재다. 따라서 상반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나의 악수를 받을 줄 모르는 ―― 악수를 모르는 왼손잡이다. 
여기서 악수는 평소에 잘 아는 대상을 만났을 때, 반가워서 나누는 인사다. 지금의 나와 어린 시절의 나의 삶은 서로 다른 삶을 살기에, 화자는 어린 시절의 자신의 삶을 생각하면서도 반갑지 않은 것이다.
‘――’은 ‘악수를 받을 줄 모른다.’는 의미에 대해서 화자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독자에게 ‘악수를 받을 줄 모른다.’는 말이 통상적인 악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현재의 나와 어린 시절의 나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의미다.
거울 때문에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만져보지를 못하는구료마는 / 거울이 아니었던들 내가 어찌 거울 속의 나를 만나보기만이라도 했겠소.
지금 화자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사진이기 때문에 화자는 어린 시절의 실제의 자신을 만져볼 수 없다. 그러나 이 사진이 아니었다면 화자가 어찌 사진 속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만나보기라도 했겠는가.
사진의 과거의 자신의 모습이다. 사진을 통하여 실제 과거의 자신을 만져볼 수 없다. 지금의 자신과 다르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자신에게, 만지면서, 연민이라도 보내고 싶으나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의미다.
나는 지금 거울을 안 가졌소마는 거울 속에는 늘 거울 속의 내가 있소. / 잘은 모르지만 외로 된 사업에 골몰할 게요.
화자는 지금 사진을 보고 있다. 그러나 그 보고 있는 사진 속의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과 같은, 생각을 보여주는 사진은 없다. 그러나 거울 속에는 늘 거울 속의 내가 있다. 사진 속에서 나는 늘 무엇인가 생각하고 있다.
오래 되어서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사진 속의 나는 아마 바르지 않고, 뒤바뀌게 된 삶에 대해서 골몰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보면 화자는 어린 시절에는 자신의 삶이 뒤바뀐 것에 대해서 잘 몰랐기 때문에 그 때의 입장에서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면서 열심히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어떻게 학교를 가고, 커서 무엇이 되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았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운명이 바뀐 것을 안 화자는 자신의 운명에 갈등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운명을 뒤바꾼 자들이 바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고, 뒤바뀐 삶을 자신이 살아가는 것도 옳지 않다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외로 된 사업’은 현재의 입장에서 과거 사진 속의 어린 시절의 삶, 자신의 운명이 바뀐 것도 모른 채 무엇인가 골몰하며 살아가는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거울 속의 나는 참 나와는 반대요마는 / 또 꽤 닮았소. / 나는 거울 속의 나를 근심하고 진찰할 수 없으니 퍽 섭섭하오.
사진 속의 나는 지금의 참된 나와는 반대다. 사진 속의 과거의 나의 삶은 지금 참되고 올바른 지금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그러나 또 외양은 꽤 닮았다. 그런데 나는 사진 속의 과거의 나를 근심하여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거나 네 삶이 잘못되었다고 진찰할 수 없다. 과거의 잘못된 삶을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퍽 섭섭하다. 과거 자신의 삶을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   紙碑

내키는커서다리는길고왼다리아프고안해키는작아서다리는짧고바른다리가아프니내바른다리와안해왼다리와성한다리끼리한사람처럼걸어가면아아이夫婦는부축할수없는절름발이가되어버린다舞事한世上이病院이고꼭治療를기다리는無病이끝끝내있다.

― <조선중앙일보> 1935. 9. 15 ―
 
 

1933년 이상 시인이 23세일 때, 3월 달에 이상 시인은 각혈을 한다. 폐병이 깊어진다. 그래서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직을 그만두고 황해도 백천온천에 요양을 간다. 거기서 기생 금홍이와 사귀게 되고, 상경하여 서울 통인동 집을 처분하여 금홍이와 함께 <제비>라는 다방을 개업하고 동거한다. 
이 시의 제목 <지비>는 다방 <제비>를 의미한다. 다방 <제비>를 경영하던 아내 금홍이을 가리킨다. 또 지비(紙碑)는 종이로 만든 비석이다. 비석은 죽은 자에 대한 기록이다. 가문 대대로 그 죽은 자를 기억하게 해 준다. 그러나 종이비석은 오래 가지 못한다. 금홍이도 죽어서, 이상의 가문에 대대로 남아 기억될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또 ‘집’은 아내다. 아내를 ‘집의 사람’이라 한다. 보통 발음할 때, ‘지비사람’이 아내다. 따라서 금홍이는 이상의 아내이기도 하고 아내가 아니기도 하다. 하여튼 금홍이가 지비(紙碑)다.
내 키는 커서 다리는 길고 왼다리 아프고 안해 키는 작아서 다리는 짧고 바른다리가 아프니
화자의 키는 커서 다리는 길고 왼다리가 아프고 아내의 키는 작아서 다리는 짧고 바른 다리가 아프다. 단순히 키가 크고 키가 작은 것을 표현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화자는 많이 배워서 지식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러러 본다. 그래서 키가 크다. 그러다보니 다리는 길고 왼다리가 아프다. 무엇인가 부족한 화자는 남들이 우러러보지만 절룩거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상은 경제적으로는 무능한 지식이다. 지식은 많으나 현실적으로 살아갈 능력이 부족하다.
아내는 키가 작아서 다리는 짧고 바른 다리가 아프다. 아내는 배운 것이 없다. 기생 혹은 창녀 신분이다. 사람들이 낮추어 본다. 윤리적으로 내려다본다. 그래서 아내는 키가 작다. 그러다 보니 생활력은 있으나 윤리인 면이 부족하다. 오른 다리가 아프다.
화자는 바르게 세상을 살기 위해서 공부했다. 그러나 반대쪽이 부족하다. 왼다리가 아프다. 금홍이는 그릇된 길로 들어섰다. 바르게 살고자 하나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부족하다. 바른다리가 아프다.
내 바른다리와 안해 왼다리와 성한 다리끼리 한 사람처럼 걸어가면 아아 이 夫婦는 부축할 수 없는 절름발이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화자의 바른다리 즉 지식이 성한 다리와 아내의 왼다리 즉 생활력 성한 다리가 끼리끼리 한 사람처럼 걸어간다면, 아아, 이 부부는 부축할 수 없는 절름발이가 되어버립니다. 비록 화자와 아내는 외형적으로는 정상적인 것처럼 살아가지만 각각 절름발이 인생이다. 외형적으로 정상처럼 보이기 때문에 남들이 부축할 필요가 없다. 
舞事한 世上이 病院이고 꼭 治療를 기다리는 無病이 끝끝내 있다.
춤에 전념하는 세상이 병원이다. 걷지 못하는 사람이 마치 춤추듯이 잘 걸어갈 수 있게 해 주는 곳이 병원이다. 화자 부부에게는 치료해야 할 것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 병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끝끝내 있다.
화자의 부부는 아무 일 없는 듯이 살아가지만 그 삶 속에는 무엇인가 아픔이 존재한다. 일상으로서는 병이 없는 것으로 보이나 무엇인가 치료를 기다리는 병이 있다. 그 치료를 기다리는 부분은 화자의 입장에서는 생활력이라든가 하는 것들일 것이고, 아내의 입장에서는 윤리적인 면이 아니겠는가.



▣   明鏡

여기 한 페이지 거울이 있으니
잊은 季節에서는
얹은머리가 瀑布처럼 내리우고
 
울어도 젖지 않고
맞대고 웃어도 휘지 않고
薔薇처럼 착착 접힌

들여다 보아도 들여다 보아도
조용한 世上이 맑기만 하고
코로는 疲勞한 향기가 오지 않는다
 
만적 만적하는 대로 愁心이 平行하는
부러 그러는 것 같은 拒絶
右편으로 옮겨앉은 心臟일망정
없으란 법 없으니
 
설마 그러랴? 어디 觸診……하고 손이 갈 때 指紋이 指紋을 가로 막으며
섬뜩하는 遮斷 뿐이다
 
五月이면 하루 한 번이고
열 번이고 外出하고 싶어 하더니
나갔던 길에 안 돌아오는 수도 있는 법
 
거울이 책장 같으면 한 장 넘겨서
맞섰던 季節을 만나련만
여기 있는 한 페이지
거울은 페이지의 그냥 表紙――

― <여성> 1936. 5 ― 
 

제목 <명경>은 맑은 거울이다. 아니 <명경>은 사진이다. 유리 액자 속에 든 사진은 사랑하던 그녀의 사진이다. 사진 속의 그녀의 얼굴은 마치 거울 속에 그녀가 비쳐 있는 것처럼, 밝고 분명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거울 속의 그녀는 우리가 직접 만지고, 감정을 나누고, 대화를 할 수 없듯이, 사진 속의 떠나간 그녀도 또한 만질 수도 없고, 대화할 수도 없고, 감정을 나눌 수도 없기에, <명경>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여기 한 페이지 거울이 있으니 / 잊은 季節에서는 / 얹은머리가 瀑布처럼 내리우고
여기 한 페이지의 거울과 같은 시진이 있다. 한 페이지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사진, 거울과 같이 마주보고 바라볼 수 있는 사진, 유리 액자 속에 있는 사진, 사랑했던 그녀의 사진을 화자는 보고 있다.
잊은 계절은 화자가 잊었던, 사진속의 그녀와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시절이다.  그 뒤로는 얹은머리였지만 사진 속에서는 머리가 폭포처럼 내리우고 있다. 이상이 백천온천에서 기생이었던 금홍이를 만났을 때 혹은 서울에 같이 올라와서 바로 찍은 사진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물론 그 뒤 금홍이는 이상과 같이 살면서 얹은머리를 하였을 것이다.
울어도 젖지 않고 / 맞대고 웃어도 휘지 않고 / 薔薇처럼 착착 접힌 / 귀 / 들여다 보아도 들여다 보아도 / 조용한 世上이 맑기만 하고 / 코로는 疲勞한 향기가 오지 않는다
울어도 젖지 않는다. 화자가 울어도 사진 속의 그녀는 슬픔에 젖지 않는다. 화자가 맞대고 웃어도 사진 속의 그녀는 휘지 않는다. 화자가 웃어도 사진 속의 그녀는 그대로 있다.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깔깔깔 웃지 않는다. 사진 속의 그녀는 장미처럼 착착 접힌 귀를 하고 있다. 장미처럼 아름답다. 그러나 착착 접혀 있기에 화자가 무슨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한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조용하며 맑은 세상이다.
코로는 피로한 향기가 오지 않는다. 사진 속의 그녀는 그녀의 체취가 나지 않는다. 실제의 그녀는 향기로운 체취로 인하여 껴안고 성교를 하고 싶은 향기를 지님으로써, 성교 후에 화자를 피로하게 하는데, 사진 속의 그녀는 피로한 향기가 나지 않는다.
만적만적하는 대로 愁心이 平行하는 / 부러 그러는 것 같은 拒絶 / 右편으로 옮겨 앉은 心臟일망정 / 없으란 법 없으니
만지작만지작하는 대로 수심이 나란히 따른다. 일부러 거절하는 것처럼, 아무리 사진 속의 그녀를 만져도 그녀가 만져지지 않는다. 비록 사진이지만, 심장이 없으란 법은 없으니, 아마 사진 속의 여자는 마치 화자가 자신을 만지는 것을 거절하는 것 같다.
설마 그러랴? 어디 觸診……하고 손이 갈 때 指紋이 指紋을 가로 막으며 / 섬뜩하는 遮斷 뿐이다
설마 사진 속의 여자가 실제로 만지는 것을 거절하겠느냐? 해서 화자는 ‘어디 촉각으로 진찰해 보자.’ 하면서 손이 여자의 얼굴로 갈 때, 지문이 지문을 가로막으며, 섬뜩한 차단뿐이다. 
지문이 지문을 가로막는 것은 손가락 유리가 가로막으며 화자의 손이 여자를 만지는 것을 차단한다는 의미다. 유리의 차갑고 섬뜩한 감촉은, 화자에게 마치 사진 속의 여자를 만지는 것을 매몰차게 거절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五月이면 하루 한 번이고 / 열 번이고 外出하고 싶어 하더니 / 나갔던 길에 안 돌아오는 수도 있는 법
떠나간 그녀는,  오월이면 하루 한 번이고 열 번이고 외출하고 싶어 했다. 기생으로 생활하던 금홍이는 자주 가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더니 나갔던 길에 안 돌아오는 법도 있는 법. 이제는 떠나가서 돌아오지 않는구나.
거울이 책장 같으면 한 장 넘겨서 / 맞섰던 季節을 만나련만 / 여기 있는 한 페이지 / 거울은 페이지의 그냥 表紙――
사진이 만약 두꺼운 책장 같으면 한 장 한 장 넘겨서 그녀와 함께 했던 추억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련만, 여기 있는 한 장의 사진은 그냥 추억의 한 표지일 뿐, 그래서 떠나간 그녀와의 추억들조차 모두 떠올릴 수는 없다.



 

▣   9. 遺稿

▣   肉親의章
 
나는 24歲. 어머니는바로이낫새에나를낳은것이다. 聖쎄바스티앙과같이아름다운동생 ․ 로오자룩셈불크의木像을닮은막내누이 ․ 어머니는우리들三人에게孕胎分娩의苦樂을말해주었다. 나는三人을代表하여――드디어――
어머니 우린 좀더형제가있었음싶었답니다.
――드디어어머니는동생버금으로 孕胎하자六個月로서流産한顚末을告했다.
그녀석은 사내댔는데 올해는19 (어머니의한숨)
三人은서로들알지못하는兄弟의幻影을그려보았다. 이만큼이나컸지――하고形容하는어머니의팔목과주먹은瘦瘠하였다. 두번씩이나咯血을한내가冷淸을極하고있는家族을爲하여빨리안해를맞아야겠다고焦燥하는마음이었다. 나는24歲. 나도어머니가나를낳으시드키무엇인가를낳아야겠다고생각하는것이었다.

― <이상전집2> 1956 ―

 
 
이 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상이 19세 때 친어머니를 찾아갔는가 보다. 물론 이상은 4살 때 큰아버지에게 양자를 갔지만, 그 후 어찌어찌하여 양자를 간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 보다. 친어머니는 이상이 양자 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보다. 두 동생들은 이상이 자신들의 형이요, 오빠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러한 상황에서 대화를 했을 것이다.
지금 이상은 24세다. 폐병으로 몹시 괴로워하고 있는가 보다. 자신이 괴로울 때 떠올리는 것은 바로 자신을 낳아 주신 어머니다. 누구나 그렇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상도 자신을 낳아 주신 어머니를 떠올리고 있다. 19세 때 찾아갔던 어머니를 떠올리고 있다. 그리고 24세 현재의 입장에서 19세 때 갔던 일을 떠올리며 그것을 시로 적고 있다.
제목 ‘육친(肉親)의 장(章)’은 바로 자신을 낳아주신 친어머니에게 보내는 글이다. 여기에는 현재 폐병으로 인한 괴로움, 그 괴로움 속에서 자신을 낳아주신 육친(肉親)에 대한 그리움이 잘 나타나 있다. <명경>과 함께, 이상 시에서 가장 서정적인 시 중의 하나다. 
나는 24歲. 어머니는 바로 이 낫새에 나를 낳은 것이다.
나는 지금 24세다. 친어머니는 바로 이 나이에 나를 낳으신 것이다. 여기서 화자는 친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있다. 물론 그 그리움의 강한 동기는 화자의 각혈부터 비롯된다. 각혈하는 화자는 자연히 친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낳게 된다. 고통스러운 화자는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 친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고 또 안 해야 되는 현실 속에서, 그리움은 애절한 아픔으로 화자에게 밀려온다. 또 화자가 19세 때 친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 친어머니는 자신이 육친인 것을 억지로 감추고 있으나, 화자가 두 번이나 각혈하자, 빨리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야 할 것이라고 초조해 하는 친어머니를 떠올린다.
聖쎄바스티앙과같이 아름다운 동생 ․ 로오자룩셈불크의 木像을 닮은 막내누이 ․ 어머니는 우리들 三人에게 孕胎分娩의 苦樂을 말해 주었다.
지금은 19세 때 친어머니를 찾아가서 동생들과 이야기를 할 때의 상황이다. 화자는 친어머니를 앞에 두고도 어머니라고 부를 수 없고, 친어머니도 아들을 앞에 두고 내 아들이라고 내색할 수 없는 상황이다. 화자는, 자신이 친형이요 친오빠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동생들을 애절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
성세바스티앙과 같이 아름다운 남동생을 본다. 자신의 동생, 그러나 동생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동생들이 어찌 예쁘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로오자룩셈불크의 목상을 닮은 막내누이. 참으로 예쁜 여동생이다.
어머니는 우리들 삼인에게, 자신이 낳은 혈육들에게 잉태하고 분만하는 어려움과 즐거움을 말해 주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낳은 아들을 앞에 두고 자신의 아들이라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그 잉태 분만의 고락을 말할 때, 어찌 앞에 있는 아들을 염두에 두지 않았겠는가. 어머니의 말을 듣고 있는 화자 역시 그 말 속에는 자신을 낳을 때의 어려움 그리고 자신을 낳았을 때의 즐거움이 담겨 있다는 것을 어찌 몰랐겠는가.
나는 三人을 代表하여 ――드디어―― / 어머니 우린 좀더 형제가 있었음 싶었답니다.
그래서 화자는 자식으로서 세 사람을 대표하여, ―― 드디어 ――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독자들이 못 알아들을까봐 ‘――’을 표시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라는 말이다. 화자가 어떤 상황에서 말을 하고 있는지를 잘 생각하면서 읽으라는 뜻이다.
“어머니 우린 좀더 형제가 있었음 싶었답니다.” 라고 말했다. 시에서 이 부분이 굵은 글씨체로 되어 있는 것은 그저 심심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으며, 이 시를 읽는 독자들은 제발 이 굵은 부분의 의미를 제대로 읽으라는 표시다.
일부러 자신이 양자로 간 것을 모르는 듯이 이야기하는 화자는, 드디어 그런 말을 한 것이다. 겉으로야 사촌으로서 남동생과 여동생 둘밖에 없으니, 형제가 더 있었으면 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내면에 들어가서 생각해 보면, 이제 화자를 양자로 보내고 아들 하나와 딸 하나밖에 없으니, 아들을 낳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어머니를 걱정하여 하는 말이다.
――드디어 어머니는 동생 버금으로 孕胎하자 六個月로서 流産한 顚末을 告했다.// 그 녀석은 사내댔는데 올해는 19 (어머니의 한숨)
어머니는 두 여동생 다음으로 자식을 잉태하자, 육개월만에 유산하였던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큰아들을 즉 화자를 양자로 보내서 아들이 없는 어머니는, 그후 두 동생을 낳았다. 이제는 두 동생 다음으로 아들을 하나 더 낳았어야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두 동생 이후로 생산을 못했다. 낳아야 할 아들에 대해서 말하는 듯이, 그러나 실제로는 두 동생 앞서 났던 아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두 여동생 앞서서 아이를 잉태했는데, 잉태한 지 육개월만에 유산을 했다는 것이다. 자신이 낳은 아들을 앞에 두고 차마 네가 내가 난 아들이라고 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유산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도 있다. 드디어 어머니는 두 동생 다음으로 잉태를 했었다. 그러나 육개월만에 그 아이를 유산했다. 그리고 ‘그 녀석은 사내였었는데, 올해는 19’ 하다가 얼른 말을 마치고 한숨을 쉬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어머니는 유산한 아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양자로 보낸 큰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19라고 말하는 순간 ‘아차’ 하고 말을 맺는다. 그리고 큰아들을 양자로 보낸 회한에 젖는 듯이 한숨이 이어지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 녀석은 사내였었는데 올해는 19’하고 말끝을 흐리며, 어머니의 한숨이 이어진다. 화자의 나이 열아홉이다. 자식을 앞에 놓고도 그 자식을 자신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어머니의 마음. 자신을 낳아 준 친어머니를 앞에 두고도 어머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화자의 그 애절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슴이 찡한 영화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三人은 서로들 알지 못하는 兄弟의 幻影을 그려 보았다. 이만큼이나 컸지――하고 形容하는 어머니의 팔목과 주먹은 瘦瘠하였다. 두 번씩이나 咯血을 한 내가 冷淸을 極하고 있는 家族을 爲하여 빨리 안해를 맞아야겠다고 焦燥하는 마음이었다.
두 동생과 화자는 서로들 알지 못하는 형제의 환영을 그려 보았다. 두 동생은 태어나지도 못한 오빠의 모습을 상상했을 것이고, 화자는 자신이 바로 그 유산되었다고 말하는 아들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두 동생은 화자가 바로 그 유산했다는 아들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래서 두 동생은 바로 화자가 그들의 형이요 오빠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이만큼 컸지’하고 자란 키를 손으로 가리켜 보이는 어머니의 팔목과 주먹은 수척하였다. ‘이만큼 컸지’하고 모습을 가리켜 보이는 손은, 두 번씩이나 각혈을 한 화자가, 자식이 없는 것을, 냉정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이 이겨나가고 있는 가족을 위하여, 빨리 아내를 맞아 대를 이으라고, 초조해 하는 것으로 보였다. 어머니가 겉으로는 냉정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말하지만, 화자에게는 그 손동작 속에는 빨리 아내를 맞아 대를 이으라는 소리로 들린다.
나는 24歲. 나도 어머니가 나를 낳으시드키 무엇인가를 낳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19세 때의 일을 떠올리는 나는 지금 24세다. 내가 19세 때, 어머니의 수척한 손을 보면서, 나도 어머니가 나를 낳았듯이, 무엇인가를 낳아야겠다고, 그래서 어머니의 대를 이음으로써 어머니에게 무엇인가 보답해 드려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最後

능금한알이墜落하였다
地球는부서질程度만큼傷했다
最後
이미如何한精神도發芽하지아니한다

― <이상전집―2> 1956. 7 ―
 
 
능금 한 알이 추락하였다. 사실 능금 한 알이 추락한 것을 두고 사람마다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을 문학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고, 신의 섭리로 해석할 수도 있고, 자연의 이치로 해석할 수도 있고, 인생의 비극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자신의 처지에 따라서 다양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서양적 사고, 현대 과학적 입장에서는,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으로만 설명한다. 물체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고, 이 힘에 의하여 지구와 능금 사이에 인력이 작용하여 두 사물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인문학의 다양한 사고는 뉴턴의 역학에 의해서 부서졌다.
그래서 지구는 부서질 정도만큼 상했다. 지구 위에서 능금이 추락하는 순간, 그것을 오직 만유인력으로만 파악함으로 지구의 다양한 사고와 가치들은 그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해서 모두 상처를 입은 것이다. 서양의 과학적 사고가 인류의 삶을 온통 파괴하고 있다. 인류의 삶은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이러한 서양적 사고, 현대 과학적 사고 하에서는 이미 여하한 ‘정신(精神)’도 발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는 서양의 과학적 사고의 한계를 지적한, 서양의 과학적 사고가 인문 정신을 말살하는 것을 비판한, 일종의 문명 비판적 시라 할 것이다.
필자가 ‘왜 이 시를 이렇게 설명하는가.’ 하고 의문이 드는 자들은 <선에 관한 각서>를 읽어 보라. 그 시들을 읽으면 이상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는 <선에 관한 각서>의 연장선상에 있는 시다.
 



▣   悔恨의 章

가장無力한男子가되기위해서나는痘㾗이었다.
世上의한사람의女性조차가나를돌아보는일은없다.
나의怠惰는安心이다.
두팔을끊어버리고나의職務를避했다.
이젠나에게事務를命令하는사람은없다.
나의恐怖하는支配는어디에도發見되지아니한다.
歷史는重荷이다.
世上에對한나의辭表의書式은더욱重荷이다.
圖書館에서의召喚狀이벌써나에게는解讀되지않는다.
나는이미世上에맞지아니하는衣服이다.
封墳보다도나의義務는僅少하다.
나에게는그무엇을理解하는苦痛은完全히없어졌다.
나는아아무것도보지는아니한다.
그럼으로써만나는아아무것으로부터도보이지는아니할것이다.
비로소나는完全한卑怯者가되는일에成功한세음이었다.

― <현대문학> 통권139호. 1966 ―



이상의 시 <금제(禁制)>에 보면, 이상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박사님들이, 이상의 시를 개 짖는 소리라고 하면서, 잡아먹고, 비타민E를 지닌 영양가 있는 시들은 박사님들의 생물학적 질투로 인하여, 박사님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다는 내용이 나온다. 화자는 그들에게 ‘제발 그러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이 시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상의 시를 이해하지 못한다. 비평가들조차도 이상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이상시가 어떻다고 해괴하게 말함으로써 이상은 이제 천연두에 걸리거나 눈병을 앓는 사람이 되었다.
아니 이상은 비평가들을 비판하고만 있지는 않다. 이상을 해괴하게 말하는 비평가들이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고, 이상 자신은 너무나 어려운 시를 썼다. 천연두를 앓는 사람처럼 혼자만의 세계에서 시를 썼고, 눈병을 앓는 사람처럼 세상 사람들이 무지하다는 것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 시는 언어유희의 극치다. 언어유희를 잘 분류하고 정리하여 전체를 일관되게 읽을 수 없다면, 이 시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신기루일 뿐이다.
悔恨의 章
제목 ‘회한의 장’은 회한을 적은 글이라는 의미다. 보통 ‘회한’하면 뉘우치고 한탄한다는 말이다. 그 회한의 대상은 일반적으로 자기 자신이다. 지난날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후회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보통 회한의 원인은 자신에게 있다. 보통은 그렇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여기서의 회한(悔恨)은 우선 ‘유감스럽게도 원망한다.’는 의미도 있다. 화자는 자신의 시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이 어떻고, 자신의 시가 어떻다고 떠드는 자들에 대해서 참으로 유감스러워하고 그들을 원망한다. 따라서 회한의 대상 곧 유감스럽게 원망하는 대상은 바로 이상의 시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이상을 미친 자 취급한 사람들, 정신병자 취급한 사람들, 이상 시를 매도한 사람들이다. 사실 이상이 살았을 때, 이 땅에는 이상의 시를 제대로 읽을 줄 아는 평론가가 없었던 모양이다. 아니 그 후에도 오랫동안 없었다.
물론 비평가들이 그렇게 이상을 매도하게 된 원인은 어쩌면 이상 자신에게 있는지도 모른다. 비평가들이 알아먹을 수 없는 시를 쓴 것이 근본 원인이라면, 이상 자신이 원인 제공자다. 그렇다면 또 ‘회한’의 대상은 다시 자기 자신일 수도 있다.
<회한의 장>은 1966년에 현대문학 통권139호에 발표된 시다. 유고시다. 그런데 아직도 이 시를 제대로 읽는 사람들이 없고, 이 시를 읽고 깨달아서, 이 시 말고도 많은 이상 시인의 시를 제대로 읽어야 할 텐데,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 없다. 알아먹을 수 없는 소리로 이상을 신비화하거나 괴상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이상 시인은 저승에서도 그러한 사람에 대한 참으로 유감스럽고 원망하는 마음, 회한의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을 것이다.
가장 無力한 男子가 되기 위해서 나는 痘㾗이었다. / 世上의 한 사람의 女性조차가 나를 돌아보는 일은 없다. / 나의 怠惰는 安心이다.
이상의 시를 읽은 사람들이, 이상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자, 이상을 미친 놈 취급한다. 정신병자 취급한다. 비평가들은 글을 통하여 이상을 신나게 두들겨 팬다.
그래서 화자는 가장 무력한 남자가 되기 위해서 두양(痘㾗)이었다. 전염성이 강한 천연두를 앓는 사람처럼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눈병을 앓는 사람처럼 글을 쓰지도 않고 책을 읽지도 않았다. 쓴 글을 세상을 향하여 발표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무력한 자, 무기력한 남자, 힘이 없는 남자가 되었다.
아니, 화자는 가장 무력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두양(痘瘍)이었다. 천연두를 앓는 사람처럼,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혼자만의 생각으로 글을 썼으며, 눈병을 앓는 사람처럼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시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세상의 한 사람의 여성, 화자와 같이 사는 아내조차 화자를 돌아보는 일은 없다. 화자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기만 하자, 같이 사는 아내조차 화자를 돌아보지 않았다.
평론가들이 화자를 업신여기고, 아내가 화자를 소홀히 하는 것은 마음을 편안히 하기 위함이다. 평론가들이 화자의 작품을 업신여기는 것은, 자신들의 지적 수준이 딸린다는 것을 은폐하고, 자신들의 마음을 편안히 하기 위함이다. 아니다. 화자가 게을러서 평론가들이 지적 수준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화자가 게을러서 그들이 읽을 수 있는 시가 어떠한 시인지를 미리 알려고 하지 않았다. 화자의 게으름은 이제 결국 화자가 글을 쓰는 데에 마음을 수고롭게 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 되었다.
아내가 화자를 소홀히 하지 않고 간섭을 한다면, 화자가 도리어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그래서 아내는 화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모르는 체한다.
두 팔을 끊어버리고 나의 職務를 避했다. / 이젠 나에게 事務를 命令하는 사람은 없다. / 나의 恐怖하는 支配는 어디에도 發見되지 아니한다.
그래서 화자는 자신의 두 팔을 끊어버렸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글을 쓰는 것도 하지 않고, 책을 읽는 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일에 힘쓰는 것을 피했다. 맡은 일을 힘써 하는 것을 피했다.
이제 화자에게 자신의 일에 힘쓰라고 명령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아내는 이제 글을 쓰라고 말하지 않다. 명(命)하지 않는다. 화자가 잡지사에 투고를 하면 이제는 좋아하지도 않는다. 령(令)하지 않는다.
화자에게는 누가 화자를 협박하고 그 협박에 화자가 두려워하는, 그래서 가르고 짝지어주는 것은 어디에도 발견되지 아니한다. 이를테면, 출판사에서 화자에게 원고 청탁을 하고 언제까지 원고를 제출하라고 조르고(恐), 그 청탁에 맞추어 화자는 빨리 써야지 하면서 두려워하는 (怖), 그래서 조르는 출판사와 이에 맞추는 화자를 가르고(支), 출판사의 청탁에 맞추어 화자가 응하는(配) 것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아니한다. 또 아내가 화자에게 글을 쓰라고 하고(恐), 그 쓰라고 하는 것에 떨면서 마지못해 글을 쓰는(怖), 시키는 자와 따르는 자를 가르고(支), 시키는 것에 맞추어 응하는(配) 것은 어디에도 발견되지 아니한다.
歷史는 重荷이다. / 世上에 對한 나의 辭表의 書式은 더욱 重荷이다. / 圖書館에서의 召喚狀이 벌써 나에게는 解讀되지 않는다.
역사는 무거운 책망이다. 많은 비평가들이 이상의 시를 미친 소리라고 오랫동안 글로 적어온 것이, 오래 계속되면 그것이 이상에게는 무거운 책망이 된다. 화자가 평론가들이 알아먹을 수 없는 글을 오랫동안 써 온 것도 또한 화자에게 무거운 책망이 된다.
또 세상에 대한 화자의 사표의 형식 즉 말을 드러내는 글의 형식은 화자에게 더욱 무거운 책망이다. 화자는 보통 시인들과 다른, 자신의 말을 표현하는 방식을 갖고 있다. 그것이 이제는 책망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아니 평론가들이 엉뚱한 소리를 할 때, 글로 그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말을 했어야 하는데,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던, 세상에 대한 나의 말을 표하는 방식에도 결국은 화자에게 책망이 되어 돌아온다.
도서관에서의 소환장(召喚狀)이 해독되지 않는다. 도서관에서 화자가 글을 쓰면, 그 글을 비평가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화자가 도서관에서 어떤 글을 쓰면, 그 글이 비평가들을 통하여 화자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데, 화자는 그 글이 그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미리 읽어내지 못한다. 아니 출판사에서 화자에게 원고 청탁이 오면 그 청탁서를 읽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나는 이미 世上에 맞지 아니하는 衣服이다. / 封墳보다도 나의 義務는 僅少하다. / 나에게는 그 무엇을 理解하는 苦痛은 完全히 없어졌다.
나는 이미 세상에 맞지 아니하는 의복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에게 맞지 않는 옷을 그들은 입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화자의 글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화자에게 글 쓰는 일은 봉분보다도 간신히 적다. 글쓰기는 거의 죽었다. 글쓰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따라서 글을 쓰기 위해서 화자가 그 무엇인가를 이해하고자 하는 고통도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아, 아무것도 보지는 아니한다. / 그럼으로써만 나는 아, 아무것으로부터도 보이지는 아니할 것이다. / 비로소 나는 完全한 卑怯者가 되는 일에 成功한 세음이었다.
화자는 아, 마치 천연두에 걸린 사람처럼 방안에 틀어박혀, 눈병에 걸린 것처럼 아무것도 보지는 아니한다. 비평가들의 자신을 뭐라고 말하건 그러한 글을 보지 아니한다. 그래서 화자는 그러한 글에 대한 반박의 글도 쓰지 아니한다. 화자는 그럼으로써만 아무것으로부터도 즉 비평가들로부터도 글에 있는 화자의 생각이 보이지 아니할 것이다. 
이제 비로소 화자는, 자신에 대한 세상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서 맞서지 못하고 피하는 비겁자가 된 셈이다. 아니다. 화자는 비로소 세상이 자신에게 무엇이라고 말하여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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