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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옥타비오파스 시론

활과 라라 / 옥타비오파스 [스크랩]
2018년 08월 11일 16시 41분  조회:2120  추천:0  작성자: 강려



→이중적 성격
앎 구원 힘 포기
이 세계를 드러내면서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
선택받은 자들의 빵이자 저주받은 양식
격리시키면서 결합시킨다
여행에의 초대이자 귀향
들숨과 날숨 근육 운동
공을 향한 기원 무의 대화
시의 양식 : 권태 고뇌 절망
기도 탄원 현현 현존
악마를 쫓는 주문 맹세 마법
무의식의 승화 보상 응집
계급과 국가, 인종의 역사적 표현이면서 역사를 부정
경험 느낌 감정 직관 방향성이 없는 사유
우연의 소산 계산된 결과물
세련된 형식을 사용하여 말하는 기술이자 원시적 언어
규칙에 복종하며 동시에 다른 규칙들을 창조
선대를 흉내내는 것 실제의 모방 이데아의 모방에 대한 모방
광기 황홀경 로고스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 성교 낙원과 지옥, 연옥에 대한 향수
놀이 노동 금욕적 행위
고백
본래적 경험
비전 음악 상징
아날로지
교육 도덕 계시 춤 대화 독백
시의 기능 :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
시적 행위 : 혁명적인 것 정신의 수련으로서 내면적 해방의 방법
시 속에서 모든 객관적 갈등들이 해소되고 인간은 마침내 일시적으로 스쳐가는 것 이상의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을 얻게 된다.
시편
→시의 표면
세상의 음악이 울리는 소라고둥
시편의 운율과 각운 : 전체적인 조화의 상응 울림
시는 민중의 목소리이자 선민의 언어이고 고독한 자의 말이다. 시는 순수하면서 순수하지 않고, 신성하면서도 저주받았고, 다수의 목소리이면서 소수의 목소리이고, 집단적이면서 개인적이고, 벌거벗고 치장하고, 말하여지고, 색칠되고, 씌어져서, 천의 얼굴로 나타나지만 결국 시편은 빔-인간의 모든 작위의 헛된 위대함에 대한 아름다운 증거!-를 숨기고 있는 가면일 뿐이다.
시적 경험이 개념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시적경험, 시편을 살펴보아야 한다.
시가 우연의 응축으로 주어질 때나 혹은 시인의 창조적 의지와는 다른 힘과 여건의 결정체로 주어질 때 우리는 시적인 것과 만나게 된다.
시적인 것이 무정형 상태의 시라면, 시편은 창조물, 즉 ‘일어선 시’이다. 시는 단지 시편이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을 완전히 드러낸다.
시편은 단순한 문학적 형식이 아니라 시와 인간이 만나는 장소이다. 시편은 시를 품고 있고 시를 유도하며 시를 방출하는 언어적 유기체이다.
형식과 본질은 동일하다.
시를 표방하는 형식은 다양하다.
문학을 연구하는 학문은 시편을 하나의 장르로 환원시키려고 애쓰는데, 여기는 두 가지 면에서 한계가 있다.
1. 만일 시를 일단의 형식들, 즉 서사시, 서정시 극시로 환원한다면 많은 예외가 발생한다.
2. 분류가 가지는 표면적인 것에 대해서 한계가 드러난다. (이는 문체론에서부터 정신 분석학에 이르기까지 문학 비평이 이용하는 타문학적 방법론들에도 적용된다.)
시는 모든 시편들의 합계가 아니다.
모든 시적 창조물은 그 자체로 자기 충족적인 단위 (부분이 곧 총체)
각각의 시문은 유일하며 환원 및 반복 불가능
다양성
역사의 산물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어느 시기, 어느 사회에서나 동일한 다양성이 존재
시편의 공감을 일으키는 열쇠는 역사적 탐구가 아니라 전기. 그러나 같은 시인의 글일지라도 하나하나의 작품은 저마다 독특하고 개별적이며 환원 불가능하다.
모든 작품은 스스로의 생명을 가지며 때로 한 작품이 다른 작품을 부정하기도 한다.
역사와 전기는 역사적 시기와 삶에 대한 주조를 말해주고 작품의 경계를 보여주며 작품의 외재적 스타일을 설명해준다. 또한 하나의 경향성이 지니는 의미를 명확히 보여줄 수도 있고 시편이 왜 씌어졌으며 어떻게 씌어졌는지까지도 드러내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시편이 무엇인지는 말해줄 수 없다.
모든 시편의 공통점 : 인간의 생산품, 작품
하나하나의 시편은 창조의 순간에 소멸하는 ‘기술’에 의해서 창조되는 유일한 대상
스타일
일군의 예술가나 한 시대에 적용되는 공통된 방법
상속이며 변화, 집단적 방법이라는 면에서 기술과 유사
모든 창조적 의도의 출발점
모든 예술가는 역사적인 공동의 스타일을 뛰어넘으려 한다
시인이 스타일을 획득하면 시인이기를 그만두고 문학적 인공물을 세우는 자로 변한다.
시인은 그 시대의 공통된 자산, 그 시대의 스타일을 이용하고 적용하고 모방하지만 그러한 모든 자료들을 변화시켜 독창적인 작품을 만든다.
시인은 스타일에서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스타일 없이는 시편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스타일은 태어나고 자라서 죽지만 시편들은 영속한다. 왜냐하면 하나하나의 시편은 자기 충족적인 단위, 결코 반복되지 않을 독립된 본보기를 이루기 때문이다.
 
의미의 세계
시편 : 색깔이고 소리이면서 의미이기도 한 말로 이루어지는 애매한 존재
조형 예술, 조음 예술 : ‘의미하지 않음’에서 출발
양가적 유기체인 시편 : 의미를 품은 존재인 말에서 출발
의미와 작용이 결핍된 그 자체로의 색깔과 소리는 없다.
인간의 손에 닿음으로써 성질이 바뀌고 작품의 세계로 진입 - 모든 작품은 의미화 작용에 닻을 내림. 인간의 손길이 스치면 지향성에 물들게 되어 어딘가를 향하게 되는 것
(인간의 세계는 의미의 세계)
애매성, 모순, 광기 혹은 분규 따위는 허용하지만 의미의 결핍은 용납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언어
말하여지거나 씌어진 언어와 조형적이거나 음악적인 언어 사이의 차이는 대단히 크지만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언어, 즉 의미를 나타내고 의사 소통할 수 있는 표현의 체계라는 사실은 공통된다.
재료의 면에서나 의미의 면에서나 작품은 인간을 초월할 수 없다. 모든 작품들은 ‘~를 위한 것’ 그리고 ‘~를 향해 가는 것’이며 이것들은 필연적인 역사 속에서만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인간에 닻을 내린다. (한 시대의 생산물들은 역사, 즉 스타일에 용해되어 있다.)
하나의 스타일 안에서, 시편-운문으로 씌어진 논문/ 그림- 교육적 삽화/ 가구- 조각 을 분리시키는 차이점, 차별적 요소는 시.
창조와 스타일을 구별짓고, 예술 작품과 도구 사이의 차이점을 보여줄 수 있는 것 : 
<언어: 다의성> -하나 : 산문 -다수 : 시
시인은 말을 자유롭게 풀어주고 산문 작가는 말을 구속한다.
시적기능 ↔ 기술적 조작
도구로 전락하거나 모양이 일그러졌던 재료는 예술 작품 속에서 본래의 광휘를 회복한다.
시적 기능에 힘입어 재료가 본성을 회복하게 됨으로써 색깔은 더욱 색깔다워지고 소리는 충만한 소리가 된다.
이미지
그자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초월하고 뛰어넘는 어떤 것을 구현한다.
그것들은 일차적인 가치, 원래의 무게를 잃지 않는 채, 피안에 닿는 다리가 되며 일상의 단순한 언어로는 말할 수 없는 기의들의 또 다른 세계로 열리는 문이 된다.
다의적인 존재, 시적인 말은 온전히 있음이며 동시에 다른 사물, 즉 이미지 이다.
이미지는 듣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에게 이미지의 성좌를 유발시키는 이상한 힘으로서 모든 예술을 시적으로 만든다.
-광채를 발하거나 혹은 불투명한 재료를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되돌려서 유용성의 세계를 부정
-그것을 이미지로 변화시키며 동시에 의사 소통을 위한 특별한 형태로 만드는 시적 작용
시는 의미와 의미의 전달이면서 언어를 넘어서는 어떤 것
언어를 넘어서는 어떤 것은 언어를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는 것
이미지가 됨으로써, 말은 말이면서 동시에 언어, 즉 역사의 의미화 작용으로 주어진 체계를 뛰어넘는다.
시편은 말이고 역사이면서 역사를 초월한다.
시편의 다양성은 시의 단일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확인하는 것이다.
 
가능성
모든 시편은 유일하다. 그러나 시편에 대한 경험-독서나 음송을 통한 재창조- 역시 혼란스러운 다양성과 이질성을 보여준다. (독서는 거의 언제나 본래적 의미의 시와는 다른 것을 드러낸다.)
모든 독자들은 시편에서 무언가를 찾는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이미 자신의 내부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편을 통하여 찰나적으로 멈추어 있는 시의 번갯불을 본다. 그 순간은 모든 순간을 포함한다. 흐름을 멈추지 않고 시간은 정지하며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찬다.
시편은 개인의 성질이나 기질 그리고 성향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가능성이다.
모든 시편의 공통점 : 참여
독자가 실로 시편을 소생시킬 때마다 그는 시적이라고 일컫는 상태에 참여한다.
언제나 자기 자신을 뛰어 넘는 것 시간의 벽들을 부수고 다른 ‘나’가 되는 것
시편의 경험도 역사 속에서 주어지며, 역사이면서 동시에 역사를 부정한다.
이미지를 소생시키고 직선적 시간 개념을 부정하고 시간을 역전시킨다.
시편 : 중재 역할
~ 태초의 시간 - 순간 속에 육화
~ 직선적 시간 - 순수한 현재로 변화 (쉬지 않고 자신을 새롭게 하며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
시편을 읽는 것 ≒ 시적 창조
시인은 이미지, 즉 시편을 창조하며 시편은 다시 독자를 통해 이미지, 즉 시로 태어난다.
 
시편이란 것이 고유하게 존재하는가?
시편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시적 언어들은 어떻게 의사 소통하는가?
 
시편 : 순수한 시간에 도달하는 통로이며 실존의 생명수에의 잠항
시 : 끊임없이 창조하는 리듬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출처] 옥타비오 빠스 _ 활과 리라 : 서 (요약)|작성자 옥토끼
 
시편
 

호 ≠ 대상
인간의 역사는 말과 사유 사이의 관계로 환원될 수 있다.
모든 위기의 시대는 언어에 대한 비판과 일치한다.
  무릎 위에 상처난 아름다움을 길게 뉘었다. 그리고 그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말이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면 사물도 똑같이 피를 흘린다.
 
모든 철학의 모호성 → 철학이 언어에 치명적으로 예속되어 있기 때문
인간은 말로 된 존재 그리고 말도 인간처럼 태어나고 죽기 때문에 말을 이용하는 모든 철학은 역사에 예속될 수밖에 없다.
한 쪽에는 말이 표현할 수 없는 실재가 있고, 다른 한 쪽에는 단지 말로써만 표현될 수 있는 인간의 실재가 있다.
말은 우리의 유일한 실재이거나 혹은 적어도 우리의 실재를 표현하는 유일한 증거이다.
언어 없이 사유는 존재할 수 없으며 앎의 대상 역시 존재할 수 없다.
언어는 인간 실존의 조건인 것이지, 우리가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는 대상도, 체계도, 유기체도 아니다. 언어에 대한 연구는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학문을 이루는 한 부분이다.
 
언어의 기원
○동물의 의미화 작용이 발전하여 사람의 언어가 되었다는 주장
이의 제기 : 1. 인간의 일상어는 복합적
2. 동물의 언어에는 추상적 사유가 부재
→이런 유의점은 본질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
 
마샬 어번 : 말의 세가지 기능
1. 말은 무엇인가를 가리키거나 혹은 지시하는 이름
2.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자극에 본능적, 자발적으로 반응을 보이는 것(감탄사 의성어)
3. 표상으로서의 기호이며 상징
→의미화 작용 : 지시적, 감정적, 표상적
언어의 본질은 다른 것을 통해서 경험의  요소를 표상하는 ,  기호 혹은상징과 의미되거나 상징된 사물 사이의 양극 관계인 것이며 그러한 관계에 대한 의식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것. 언어는 유일하게 인간만이 가지는 것이다.
 
○단순한 것(감탄사, 외침 의성어) → 지시적, 상징적인 표현
원시 언어들도 대단한 복합성을 지님.
거의 모든 고대 언어들에는 구나 완벽한 문장을 구성하는 말이 존재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의 이행은 자연 과학에서는 확실하지만 문화 과학에서는 그렇지 않다.
언어에 대한 동물적 기원의 가설~ “언어를 표현적인 운동의 장”에 포함시킨다는 면에서 독창성을 지님
제스처와 동작은 의미화 작용(지시, 감정, 표상)을 가진다.
 
언어와 신화 : 은유
“모든 말들과 언어의 형태들이 일차적으로 신화적 성격을 갖는다.”
언어와 신화는 실재에 대한 광범위한 은유
언어의 본질 : 상징적인 것
~ 실재의 한 가지 요소를 다른 것으로 표상하기 때문
인간은 말 덕분에, 즉 인간을 다른 존재로 만들어주고 자연의 세계에서 분리시켜주는 원초적 은유 덕분에 인간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언어를 창조할 때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존재이다. 언어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은유가 된다.
 
이미지와 운율을 띤 언어적 형상의 계속적인 산출은 일상어의 상징적 특성, 시적 성격을 증거한다. 언어는 자발적으로 은유로 구체화되려는 경향이 있다.
언어 한복판의 내전 : 모든 것은 하나를 향하여 투쟁하고 하나는 모든 것을 향해 투쟁한다.
 
시와 시적 표현(일상어)의 차이
시 : 언어를 초월하려는 시도
시적 표현 : 일상어와 동일한 수준에 머물며 인구에 회자되는 언어들의 왕복 운동의 결과
 
말과 대상사이의 거리
말이 지시하는 것의 은유로 변화할 때, 어쩔 수 없이 말에 강요되는 거리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획득하자마자 자연 세계에서 분리되었고 자신의 내부에서 타자가 되었다. 말이 지시하는 실재와 말이 동일하지 않은 것은 인간과 사물 사이에, 그리고 더욱 심층적으로는 인간과 인간 존재 사이에, 자신에 대한 의식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말은 다리이며 이 다리를 통하여 인간은 자신을 외부 세계와 분리시키는 거리를 없애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러한 거리는 인간 본성의 일부를 구성한다.
 
거리 소멸
1. 인간됨을 포기하고 자연 세계로 돌아감
2. 인간됨의 한계를 초월
모든 역사 속에 잠재되어 있는 거리 소멸의 시도는 근대에 이르러 극단적으로 나타남
현대시
1. 마법적 가치에 대한 철저한 긍정
2. 혁명적 소명
양극으로의 운동 : 인간 자신의 조건에 대한 인간의 반역
 
세계와 인간 사이에 원초적인 단일성이 회복된다면, 소외가 사라지면 언어도 사라질 것이다.
말과 사물, 이름과 이름 붙여진 것 사이의 융합은 그보다 먼저 인간이 자기 자신과 그리고 세계와 화해하기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창조적 의지
창조적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시가 존재할 수 없다.
말이 갖는 창조적 힘은 그것을 발화하는 사람에게 있다.
언어를 움직이게 하는 것 : 인간
모든 것은 의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정신은 불가분의 총체
 
무심(無心)
무심한 사람은 근대 세계를 부정한다. 근대 세계를 부정할 때, 그는 전체를 얻기 위해서 자신의 전체를 건다.
무심한 사람은 이성과 소극적 안일함의 다른 편에는 무엇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무심이란 이 세상의 반대편에 대한 매혹
의지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방향을 바꿀 뿐이다.
의지는 분석적 힘에 봉사하는 대신에, 분석적 힘이 자신의 목표를 위하여 정신적 에너지를 억압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창조적 의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언어에 대한 위반
시적 창조는 언어에 대한 위반으로 시작한다.
1. 말들은 지탱하고 있는 뿌리를 뒤흔드는 일
시인은 일상적인 일들, 그리고 그것들과 맺고 있는 연관 관계에서 말들을 뿌리째 뽑아내어 일상적 언어의 획일적인 세계와 결별시킨다. 이때 단어들은 이제 막 태어난 것처럼 생생한 것이 된다.
2. 말을 원초적 상태로 복귀시키는 것
시는 소통의 대상으로 변한다.
 
시의 두 가지 적대적인 힘
-언어로부터 말을 뿌리째 뽑아내는 상승 혹은 적출의 힘
-말을 다시 언어로 복귀시키는 중력의 힘
시는 독창적이며 유일한 것이지만 독서와 음송을 통한 소통이기도 하다.
시인과 독자는 동일한 실재의 두 순간일 뿐
 
공용어
결별과 복귀의 두 작용은 시가 공용어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요구
도시, 국가, 계급, 동아리 혹은 분파가 뜻하는 집단의 언어
 
유럽 민족들의 언어가 창조될 때, 전설과 서사시들은 그 민족 자체를 창조하는 데 기여했다. 심층적인 의미에서는, 그 민족들에게 그들 자신에 대한 의식을 부여함으로써 민족 수립의 토대를 세웠다.
→시로 인하여 각 민족의 공용어는 원형의 가치를 지닌 신화적 이미지로 변화되었다.
근대시는 부르주아 세계에서 추방당하고 탈퇴한 사람들의 양식으로 변했다.
반역의 시가 가능
그러나 이 경우에는 사회적 언어로 시가 쓰인다.
 
‘시인이 속한 집단이 무엇이든지 간에, 시인의 언어는 집단의 언어이다.’
시인 - 연통관(통과의례, 공범관계) - 집단
현재, 분열의 과정
 
근대가 각 개인들 사이에 세워놓은 공허의 장벽을 제거하기를 원하는 많은 현대 시인들은 잃어버린 청중을 찾으려고 민중 속으로 들어갔지만, 이제 민중은 없고 조직된 대중이 있을 뿐이다.
시인이 관리로 변했다.
 
이데올로기들과 관념 그리고 여론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의식의 가장 바깥 표피층을 구성하는 반면에, 시는 존재의 가장 심층에 거주한다. 시는 공동체의 생생한 언어, 신화, 꿈 그리고 열정들, 다시 말해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성향들로부터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시는 민중의 토대를 세우는데, 왜냐하면 시인은 언어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시원의 샘물을 마시기 때문이다. 사회는 시에서 자신의 존재의 토대, 즉 자신의 맨 처음 말과 마주선다. 그 본래적 말을 하면서 인간은 성장해왔다.
 
시인이 자신의 추방 -진정한 반역의 유일한 가능성- 을 포기한다면, 시도 포기하는 것이 되고 그러한 추방이 합일로 변화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도 포기하는 것이 된다.
이중의 오류
전도 시인 : 민중의 언어를 말하고 있다고 믿음
민중: 시의 언어를 듣고 있다고 믿는 것
 
모호함
시적 창조는 언제나 수평적 완만함의 저항을 받기 마련
모든 작품이 갖는 어려움은 그것의 혁신성에 기인
습관적인 쓰임에서 떨어져 나와 대화와 담론의 질서와는 다른 질서 속에 편입된 말들은 자극적인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모든 창조는 모호성을 야기
시적 즐거움은 창조의 어려움과 유사한 어떤 어려움을 이겨내야만 주어지는 것
 
모든 신성한 말은 비밀스러운 것 그리고 모든 비밀스러운 말들은 신성함과 닿아 있다.
비의적 시편의 시의 위대함과 역사의 빈곤함을 선언한다.
 
특정한 사회의 가치에 반대하는 위대한 비의적 시인 혹은 반역적인 시 운동이 나타날 때마다, 치유 불가능한 병을 앓고 있는 것은 시가 아니라 사회라는 사실을 의심해보아야 한다.
원인 1. 공통적 언어의 부재 2. 고독한 노래 앞에 사회가 귀를 막고 있다
시인이 고독하다는 것은 사회가 하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창조는 언제나 일정한 높이에서 역사적 수준의 하강을 고발한다. 가끔씩 난해한 시인들이 더욱 높아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는 관점의 오류이다.
그들이 높은 것이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세계가 낮은 곳에 있는 것이다.
 
사회적 영역을 떠나 시의 말이 될 때.
시인은 자신의 말을 선택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자신과 같이 있었으며 실제로 그에게 속하는 말과 거리에서 배운 다른 말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주저한다.
시인은 그의 말을 발견할 때 그 말이 이미 자기 자신 속에 있었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릭 그도 이미 그 말 속에 있었다.
시인 = 시인의 말
창조의 순간에, 우리 자신의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이 의식에 떠오른다.
다른 말이 아니라 꼭 그 말인 것이다.
 
시의 말들은 모두 유일. 동의어가 없다.
유일하고 움직일 수 없는 것이어서, 단어 하나에 상처를 입히면 시 전체가 상처를 입게 된다.
 
시인의 말도 역시 공동체의 말
시인은 살아 있는 목소리의 거부
개인적 언어는 시인에 의해서 드러나거나 혹은 변형된 공통의 언어
 
시가 말을 순화한다
시는 감정적 외침이 발전된 것이다.
발전과 감정적 외침 사이에 모순적 긴장이 존재한다.
긴장 = 시
발전의 주체 : 감정적 외침이 시사하는 총체적이고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는 그러한 실재 앞에서 자기 자신을 창조해가는 언어
시 : 감정적 외침이 말하지 못한 것을 듣는 귀
 
시인은 말에게 봉사하는 자이다
말에 봉사함으로써, 말에게 말의 충만한 본성을 되돌려주며, 말이 자신의 존재를 회복하게 한다.
시 덕분에 언어는 원래의 상태를 회복한다. 일반적으로 사유에 의해서 손상된 조형적이고 음성적인 사치를 회복하게 되며, 이어서 정감적인 가치를, 마지막으로 의미를 나타내는 가치를 회복한다.
 
 리듬

고립된 단어는 의미 단위를 구성할 수 없다. 토막난 단어는 진정한 의미에서 언어가 아니다. 우연에 맡겨진 낱말들의 연속도 언어가 아니다.
언어가 되기 위해서는 기호들과 소리들이 의미를 암시하고 전달하도록 조합되어야 한다.
일상어의 가장 작은 단위를 구성하는 것 : 구 혹은 문
 
각각의 시는 언어와 언어의 세포인 구와 같이 복합적이고 분리 불가능한 성격을 갖는다.
모든 시는 자기 자신에게 닫혀 있는 총체성이다.
시의 세포,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핵 : 구
운문적 구를 구성하며 언어를 만드는 단위 : 리듬
 
시인과 리듬
단어가 갖는 마법적인 힘
어떤 단어들은 서로 끌어당기고, 어떤 단어들은 서로 밀치면서, 모든 단어들은 상응
일상어는 별과 식물을 다스리는 것과 비슷한 리듬에 따라 움직이는 살아 있는 존재들의 집합
 
사유, 구 역시 리듬, 부름, 울림
사유한다는 것은 적절한 음률을 타는 것
노여움, 열광, 분노 그리고 우리를 우리 밖으로 팽개치는 모든 감정을 똑같이 우리는 해방시키는 힘을 갖는다.
대화 : 함의 이상의 어떤 것. 화음
 
언어는 인간이며 그 이상의 어떤 것
처음에 말들은 부르지 않아도 다가와서 서로 결합
어떤 질서가 말들 사이의 친밀성과 거부감을 다스린다.
→모든 언어 현상의 밑바닥에는 리듬이 존재한다.
 
언어의 역동성은 시인으로 하여금 말 사이에 존재하는 끌어당김과 밀침의 힘을 사용하게 함으로써 언어의 우주를 창조하도록 이끈다
시인이 모델로 삼는 것은 모든 언어를 움직이는 리듬 (리듬 = 자석)
시적 창조는 유혹의 동인으로서 리듬의 자연적 흐름을 이용한다
 
시인은 언어가 무엇인지 혹은 그 본질이 무엇인지 묻지 않으며, 목적 그 자체를 위하여 그것들을 이용할 뿐이다.
시인의 언어는 자신 안에 있으며 오직 그에게만 드러난다.
시적 계시는 내면적 탐색을 포함한다.
이미지의 출현에 적절한 수동성을 야기할 수 있는 정신적 활동
 
예 : 말라르메
말라르메의 시적 언어의 긴장은 그 자신에게서만 수행된다.
그의 선명성은 자신을 태워버림으로써 끝나는 것이다.
말라르메의 위대함은 우주의 마법적 복제 - 조화로운 우주로 인식되는 단 하나의 작품- 인 언어를 창조하려는 시도와 특히 그러한 언어를 연극의 장으로, 인간과의 대화로 변화시키기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에 근거한다.
우리가 입을 다무는 것은 할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말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시인은 리듬을 통하여 언어를 유혹한다. 하나의 이미지는 또 다른 이미지를 유발한다. 이렇게 지배적인 리듬의 기능은 시를 다른 모든 문학적 형태들로부터 구별한다.
시는 리듬 위에 세워진 언어적 질서, 즉 구들의 집합이다.
 
리듬
타격과 휴지의 연속은 어떠한 지향성, 즉 방향과 같은 어떤 것을 드러낸다. 리듬은 기대를 유발하며 어떤 바램을 떠받치고 있다.
리듬은 우리 안에 어떤 감정의 상태를 유발시키는데, 그 감정은 ‘어떤 것’이 돌출될 때에만 비로소 잠잠해질 수 있다. 리듬은 우리에게 기다림의 자세를 취하게 한다. 그 어떤 것이 무언인지 모를지라도, 우리는 리듬이 어떤 것을 향하여 가는 것처럼 느낀다.
리듬 : 방향성, 느낌, 원초적 시간
 
리듬이 우리 앞에 전개될 때, 시간과 더불어 우리가 지나간다. ‘……를 향하여 가는 것’
그곳은 우리가 무엇인지 드러날 때 비로소 밝혀질 수 있다.
리듬에 우리를 부어넣고 ‘어떤 것’을 향하여 우리는 발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리듬은 의미이며 ‘무엇’인가를 말한다.
 
시의 단어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러한 단어들이 의지하고 있는 리듬이 이미 말하고 있다.
제의와 신화적 이야기는 리듬과 의미를 분리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리듬
-어떤 힘들을 매혹시켜 사로잡고, 다른 힘들을 쫓아내는 즉각적인 목표를 갖는 마법적 방법
-기념하기 위한 것, 신화를 재생산하기 위한 것
-우주적 운율의 닮은 꼴, 인간이 원했던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창조적 힘
-제의
 
운문에는 이미 구와 구의 가능한 의미화 작용이 잠재태로 있다.
장중한 리듬이 있는가 하면 경쾌한 리듬도 있고, 춤추는 리듬이 있는가하면 장엄한 리듬도 있고, 희열에 찬 리듬이 있는가 하면 슬픔에 찬 리듬도 있는 것.
인간과 리듬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리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리듬은 인간의 모든 창조의 뿌리이다.
역사 자체가 리듬이다.
각각의 문명의 원초적 리듬의 발전으로 환원될 수 있다.
예) 중국인- 음과 양 / 아즈텍인 - 사박자 리듬 / 히브리인 - 이원적 리듬 / 그리스인 - 대립물들의 투쟁과 결합 / 서구의 근대 문명 - 삼박자 리듬
 
리듬은 우주의 생생한 이미지이며 우주의 법칙이 현시적으로 드러난 것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우주론적 개념은 원초적 리듬에 대한 직관에서 싹튼 것
모든 문화의 밑바탕에는 종교적, 미학적 혹은 철학적 창조로 표현되기에 앞서서 리듬으로 나타나는 생명에 대한 기본적 태도가 깔려 있다.
 
리듬은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 결정적 사실에 대한 가장 오래되고 지속적이며 단순한 표명
 
리듬을 동질의 공간으로 나누어진 순수한 측량으로 환원시키기가 불가능한 것처럼, 리듬을 추상화하고 합리적인 도식으로 변화시키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각각의 리듬은 세계에 대한 구체적 비전이다.
이미지이고 의미인 리듬은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표현하는 우리 자신
리듬은 철학이 아니라 철학이 의지하고 있는 세계의 이미지
 
리듬의 기능
리듬의 반복에 의하여 신화는 되돌아온다
“시간의 신화적 표상은 본질적으로 리듬 같은 것이다. 종교와 마법에서 달력의 역할은 시간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리듬화하는 것이다”(원초적인 시간을돌아오게 하는 것)
시에서 내용이 없는 동질적 연속성의 시간이 리듬으로 변화한다
비극, 서사시, 노래 등의 시는 반복하여 순간을 재창조하는데, 그 순간은 원형적 사건 혹은 그 사건들의 집합이다.
 
이야기 속의 시간은 연속성을 단념한다.
지금 되고 있는, 지금 생성되고 있는 시간
재상되는, 재현되는 과거
 
시간의 재현 방법
1. 시적 창조의 순간
2. 독자가 그 순간을 새로이 소환하여 시인의 이미지를 소생시켜 재창조 할 때
시편은 어떤 입술이 리듬이 깃들인 구들은 반복하자마자 현실화되는 원형적 시간이다. 이러한 구들이 우리가 운문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그것의 기능은 시간을 재창조하는 데 있다.
모방적 재생산이라는 말을 시인이 원형을 재창조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진실되게 보이는 것은 바로 시가 그런 의미에서 모방적 창조일 때
자신의 경험을 재창조할 때는 서정시인조차도 미래에 다가올 과거를 소환한다
 
시적 리듬은 미래이며 현재인 그러한 과거, 즉 우리 자신을 현재화하는 것
시구는 살아 있는 구체적인 시간 : 리듬, 근원적 시간, 영원히 재창조 되는 것,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고 죽고 또 다시 새로 태어나는 것
 
 
운문과 산문 
 
 
산문과 시를 구분하는 방법
어떤 의미에서 언어는 리듬의 소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혹은 적어도 모든 리듬은 언어를 암시하거나 예시한다.
모든 언어적 표현은 리듬
 
리듬은 모든 언어적 형태에서 자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이 가장 충만되게 나타나는 것은 시
리듬이 없이는 시가 될 수 없으며, 리듬만으로는 산문이 될 수 없다.
리듬은 시가 되기 위한 조건인 반면, 산문의 필수요소는 아니다.
 
산문 작가는 일관성과 개념적 명료성을 추구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이미지로 명시되고자 하는 운율의 숙명적인 흐름에 저항
 
시 : 인간 표현의 자연스러운 형태
산문 : 비판과 분석의 도구. 점진적인 성숙을 요구, 일상어를 길들이고자 하는 일련의 기나긴 노력 뒤에 생겨나는 것
 
산문의 진척도는 사유가 말을 정복한 정도로 가늠된다.
언어의 자연스러운 경향에 대항한 영원한 싸움을 통해 성장
산문의 가장 완벽한 형태 : 담론, 예증
 
시는 닫혀진 질서, 산문은 열리고 직선적인 건축물
산문 : 사열, 개념들과 사건들에 대한 사실적 이론, 선,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언제나 앞으로 나아간다. 산문의 원형- 담론과 이야기, 사색과 역사
시 : 원형 혹은 구형으로 존재, 자기 자신에게 닫혀있는 어떤 것, 자족적인 우주, 그 안에서 종말은 되돌아오고 반복되고 재창조된다. 끊임없는 반복과 재창조=리듬
 
운율vs리듬
운율과 리듬은 동일하지 않다
리듬 : 구와 떼어놓을 수 없다. 이미지이며 의미, 리듬 이미지 그리고 의미는 분리 불가분의 조밀한 단위들인 시구와 시행에 동시에 주어져 있다, 독자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질이고 구체적인 내용
운율 : 이미지와는 별개로 추상적인 음격, 각각의 시행에 필요한 음절과 강세, 의미가 빠진 음격
 
운율과 리듬의 구별은 바르게 운을 맞춘 많은 수의 작품들을 시라고 부를 수 없게 한다.
문학 안내서는 타성에 젖어 운율이 맞는 작품만을 시로 취급한다.
구는 개념적 질서 혹은 이야기에 복종하여 전개되지 않고, 이미지와 리듬의 법칙에 이끌린다. 거기에는 시의 확실한 표징인 이미지와 강세, 그리고 리듬의 간만이 있다.
자유시는 리듬의 통일성이다.
 
리듬이 언어 자체와 혼동되는 반면, 운율은 역사적이다.
근대 언어에서 운율은 음수율, 즉 강세와 휴지에 의해서 끊어졌다 이어지는 지속으로 이루어진다.
음수율적 음격은 추상성의 원리, 수사학, 그리고 언어에 대한 반성을 암시한다.
 
서구 근대 언어들에서 언어의 자연스러운 경향성과 추상적 사유의 강제성 사이의 투쟁은 운율의 이중성을 통하여 표현된다.
리듬에 따르는 작시와 아날로지적 사유는 동전의 양면이다.
고정된 운율의 작위성에 대항하여 강세 위주의 시작이 가지는 힘을 긍정할 때, 낭만주의 시인은 개념에 대한 이미지의 승리, 논리적 사유에 대한 아날로지의 승리를 선언하는 것이다.
예) 프랑스와 영국의 근대시의 발전
예) 스페인
스페인어권 근대시는 산문과 운문, 리듬과 운율 사이의 관계에 대한 하나의 예증이다.
 
리듬과 이미지는 분리 불가능하다.
시행, 즉 리듬을 갖는 구가 또한 의미를 갖는 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단지 이미지만이 말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
 
 
정의
이미지들은 상상적 결과물
모든 언어적 형태, 시인이 말하는 구와 이것들이 모여서 시를 구성하는 구들의 총체
구나 구들의 총체의 구문론적 통일성을 깨지 않고 말이 갖는 의미의 다원성을 보존하고 있다
각각의 이미지는 자신 안에 품고 있는 대립되거나 조화되지 않는 많은 의미들을 하나도 제거하지 않은 채 껴안아 화해시킨다
비극적 영웅도 하나의 이미지
이미지는 인간 조건의 표식
 
모든 이미지는 대립되거나 무관심하거나 혹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요소들을 가깝게 접근시키거나 결합시킨다
→다원적 현실에 통일성을 부여한다
 
개념·과학적 법칙과 시의 차이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자신의 구체적이고 독특한 성질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이미지는 모순의 원리에 도전함으로써 물의를 일으킨다
대립되는 것들의 동일성을 말하는 것은 우리의 사유 토대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미지가 보여주는 시적 현실을 옳고 그름을 지향하지 않는다
시는 ‘~이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될 수 있다’를 말한다
시의 왕국 :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불가능한 그럴듯함”의 왕국
 
시인들이 고집스럽게 단언하는 것은 이미지가 드러내는 바는 ‘~이다’지 ‘~이 될 수 있다’가 아니다
 
이미지를 이해하는 틀
시를 읽는 해석의 틀1 변증법
시를 읽는 해석의 틀2 뤼파스코 : 상보적 모순의 원리
But. 이는 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시는 대립되는 것들의 역동적이고 필연적인 공존뿐만 아니라, 그들 사이의 최종적인 동일성도 선언한다
각각의 용어가 갖는 특성을 환원시키는 것도 아니고 변형시키는 것도 아닌 이러한 화해는 아직껏 서양의 사유가 뛰어넘지도, 뚫고 나가지도 못하는 벽이다
 
찬도가야 우파니샤드 : “네가 바로 저것이다”
이것과 저것 사이의 대립은 상대적이며 동시에 필연적이만, 베타적으로 보이는 용어들 사이에 적의가 사라지는 순간이 있다
 
생각한다는 것은 숨쉬는 것이다. 숨을 멈추는 것은 관념의 순환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도록 비우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이 숨쉬는 것인 이유는 사유와 삶이 개별적 우주가 아니라 연통관이기 때문에, 즉 이것은 저것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세계, 의식과 존재, 존재와 실존의 최종적인 동일성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믿음
과학과 종교, 주술과 시의 뿌리
우리의 모든 활동 : 양쪽 세계를 소통시키는 잃어버린 통로를 발견하는 것
우리가 추구하는 것: 원초적 동일성을 반영하는 것, 대립물의 보편적 상응을 재발견하거나 검증하는 것
 
모든 앎은, 앎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도는 말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고로, 현자는 말없는 가르침을 전한다.”
 
“사람들이 진리를 배운다고 말할 때, 그들은 책을 생각한다. 그러나 책은 말로 되어 있다. 말도 가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말의 가치는 말이 숨기고 있는 의미에있다. 이 의미는 바로 말로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도달하려는 노력 그 자체이다.”
의미는 사물들을 지향하고, 사물들을 가리키지만, 결코 그것들에 도달할 수는 없다. 대상은 말 너머에 있다.
 
언어로 되어 있으면서도 언어를 넘어서는 언어, 즉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말
 
도교, 힌두교, 불교의 사유가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시적 이미지 때문이다.
장자 : 도의 경험이란 언어가 갖는 상대적인 기의들이 무효화되는 자연적이고 원초적인 의식으로 돌아가는 것
 
언어와 이미지
모든 의사 소통의 체계는 지시체들과 그 의미들의 세계 안에서 가능하다
언어 체계는 가변성을 갖는 기호들의 총체를 구성한다
 
각각의 낱말은 서로 관련을 맺고 있는 여러 의미를 갖는다. 그러한 의미들은 문장에서의 낱말의 위치에 따라 정돈되며 뜻이 정해진다. 낱말들이 구를 형성하게 되면 문맥의 의미라는 다른 의미가 만들어진다.
 
말은 그 자체로 무한한 의미의 가능성이지만, 하나의 구 속에 들어가 활성화될 때, 즉 언어로 변화될 때, 그러한 가능성은 단지 하나의 방향으로 고정된다.
 
이미지는 의미의 다원성이 사라지지 않는 구이다. 이미지는 일차적인 의미와 이차적인 의미 그 어느것도 배제하지 않고 단어의 모든 가치들은 거두어 고양시킨다.
 
이미지는 모순적, 무의미적 혹은 비일관적인 명제들을 훨씬 뛰어넘는 통일성을 갖는다
 
이미지의 의미
이미지는 진정성을 갖는다
-심리학적 차원의 진리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유효한 객관적 실재를 구성한다
-스스로의 실존의 진실이라는 또 다른 진리의 세계 창조
-이미지의 미학적 진리는 단지 자신의 세계 안에서만 가치가 있다
시인은 이미지들이 세계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무언인가를 말하며, 그 무엇은, 비록 이상하게 보일지라도 우리에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진정으로 드러내준다
 
이미지는 지각의 순간을 되살려내며 독자로 하여금 언젠가 지각한 일이 있는 대상을 자신 안에서 되살려내도록 충동한다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의 부활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가장 어둡고 멀리 떨어져 있는 부분의 부활이기도 하다. 시는 우리가 잊고 있는 것, 즉 진실한 우리 자신을 기억하게 해준다.
 
이미지에 의해서 이름과 대상, 표상과 실재 사이에 순간적인 화해가 이루어진다
 
이미지는 이미지 자체이지 다른 말로 설명될 수 없다
 
의미와 이미지는 동일하다
하나의 시편은 이미지 이외에 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시의 이미지들은 산문과 달리 우리를 또 다른 사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체적인 실재와 마주서게 한다
 
문장과 구는 수단이다. 그러나 이미지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며, 이미지 자체가 의미이다. 그 의미는 이미지에서 시작하고 이미지에서 끝난다. 시의 의미는 시 자체이다. 이미지들은 어떠한 설명과 해석으로도 환원 불가능하다.
 
시와 이미지
이미지는 단어의 가변성과 상호 교환 가능성을 잃어버리게 한다. 낱말들은 교체 불가능하며, 수정 불가능한 것이 된다. 낱말들은 더 이상 도구가 아니다. 언어는 더 이상 유용성을 위한 것이 아니다.
 
시심이 언어를 건드리면 언어는 별안간 언어이기를 그친다.
시는 언어를 초월한다
 
이미지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과 우리 자신에 대한 무시무시한 경험을 표현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에게 밀어닥치는 침묵에 맞서기 위한 절망스러운 수단이다.
 
시는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 언어
존재의 극단에 있는 언어이며 극단까지 존재하는 언어
스스로의 내면으로 복귀하여 일상어의 이면을 보여주는 언어의 극단이며 극단적인 언어
침묵이며 의미하지 않음
 
이미지의 이편에는 낱말, 설명, 역사의 세계가 있으며, 이미지의 저편에는 실재의 문이 열린다.
의미화와 무의미화는 등가치의 용어가 된다
이미지의 최종적 의미는 이미지 그 자체이다.
 
어떤 이미지들은 현실을 구성하는 용어들이나 요소들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한다
어떤 이미지들은 “상반되는 현실”에 접근하여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낸다
어떤 이미지들은 세계, 언어 혹은 인간의 부조리한 성격을 폭로하는 극복할 수 없는 모순이나 절대적인 무의미를 유발한다
어떤 이미지들은 우리에게 실재적인 것의 복합성과 상호 의존성을 드러낸다
어떤 이미지들은 상반되는 것들의 결합을 실현하는 이미지
→동일한 과정이 목격
~실재의 다양성을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가 본질적인 개성을 잃어버리지 않은 채, 그 다양성이 최종적인 통일성으로 드러나거나 표현되는 것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 언어는 그 특성상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것을 말하게 된다
시어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이미지에서 말과 사물 사이의 거리는 좁혀지거나 혹은 완전히 사라진다.
이름과 이름붙여진 것은 같은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것은 그 자신에 의하지 않고서는 말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어떤 것
 
시는 설명하지도 않고 표상하지도 않으며 단지 ‘보여줄’ 뿐이다
현실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재창조하려고 시도한다
시는 현실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 현실에 거주하는 것, 혹은 현실 그 자체이다
 
이미지는 설명하지 않고 현실을, 문자 그대로, 재생시킨다. 시인의 말은 시적 교감으로 육화된다. 이미지는 인간을 변화시켜, 그를 상반되는 것들이 서로 융합되는 공간, 즉 이미지로 만든다. 이미지로 될 때, 타자가 될 때, 태어나면서부터 찢겨진 인간은 자기 자신과 화해한다.
 
시는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동시에 원초적 존재로 돌아가게 만든다. (인간을 자기 자신이 되게 하는 것)
인간은 자신의 이미지이다
그 자신이며 타자
리듬이고 이미지인 구를 통하여 인간, 끊임없이 자신이 되고자 하는 자는 존재
시는 ‘존재로 들어가기’이다
[출처] 옥타비오 빠스 _ 활과 리라 : 1부 시편 (요약)|작성자 옥토끼
 
시적계시
 
피안
 
 
 
시적 체험이란 무엇인가
시는 참여를 통하여 존재 - 원초적인 순간의 재창조
시의 리듬은 끊임없이 신화적 시간과 유사해지고, 이미지는 신비주의의 용어와 섞이며, 그리고 시적 참여는 마법적 연금술의 종교적 영성체 의식에 가까워진다.
시적 작용이란 신성한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
 
이 글이 의도하는 바는 신성의 개념으로 시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만 이해될 수 있으며 다른 것으로는 환원불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신성의 세계는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한다
현대인의 마음속에는 지적인 호기심을 넘어서는 저 너머에 대한 짙은 향수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
부재에 대한 증거
부재에 대해 느끼는 지적 향수의 편린
 
피할 수 없는 두가지 문제
1. 인간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시 본래의 의도로부터 시를 떼어놓는다면, 시는 하나의 무기력한 문학 형태로 전락하는 위험에 처하게 될 것
2. 현대시의 프로메테우스적인 과업은 종교와 맞서 싸우는 것.
종교와의 교전 : 이 시대의 교회들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신성함에 대항하여 ‘새로운’ 신성함을 창조하기 위한 현대시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한 것
 
‘신성한 것’에 대한 연구사
의식, 제의의 주체 → 원시인, 정신병자(우리와 다른 사람)
-> ‘원시 사회’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가
인류학자들이 연구하는 그 어떤 사회도 진정으로 원시 사회라고 불릴 만한 것은 없다
성스러움을 자아내는 본질 → 사회제도
여러 사회 제도가 모여서 구성하는 성스러움은 이미 하나의 대상
제의, 신화, 축제, 전설 - ‘물질화’ 대상화 사물화
-> 인간은 자신이 창조한 제도 및 대상과 분리될 수 없다
 
사회 제도 자체가 신성한 것은 아니며, 또한 ‘원시적 사고 방식’이나 신경증이 신성한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성스러운 것은 하나의 대상으로 전락시킬 뿐
신성함 : 우리들 자신이 그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전체적인 현상
 
신적인 것의 경험 : 우리를 전체의 일부로 포함하며, 그 세계에 대한 묘사는 곧 우리 자신에 대한 묘사가 될 것이다.
 
치명적 도약
성 -터부- 속
성의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 속의 성스러움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알기 위해서
→그 세계로 직접들어가보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어떻게 그곳에 들어가 볼 수 있을까?
‘치명적 도약’
바다의 파도처럼 부침하는 생과 사의 윤회로부터 탈피하는 것
피안에 이름
 
모든 의례들은 우리를 변화시켜서 ‘타자’로 만드는 공통된 목적으로 가지고 있다
‘피안’의 경험인 ‘치명적 도약’은 한 번 죽고 한 번 사는 일로서, 본성의 변화를 수반한다
그 피안은 바로 우리 속에 있다
 
우리는 실제로는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우리 밖으로 끌어내는 커다란 바람에 자신이 떠밀리는 것을 느낀다. 그 힘은 우리를 우리 밖으로 밀어내면서, 동시에 우리 속으로 끌어당긴다.
~자신의 의지는 거의 개입되지 않거나 아니면 매우 역설적으로 개입된다
자아의 의지는 어떤 다른 힘과 절묘하게 결합되는것
예) 스페인 희곡 티르소 데 몰리나, <믿음이 없는 죄인>
본성의 급격한 변화, 순간적인 전의
천재지변의 첫 번째 결과로 자연적, 도덕적 중력의 법칙 폐기
선과 악은 다른 의미로 바뀌어버린다 악한이 구원받고, 의인은 몰락한다. 인간 행위의 결과는 이중적이다. 우리가 올바르게 행동했다고 믿을 때, 악마의 소리를 듣고 악을 저지른다. 혹은 그 반대가 일어난다. 도덕은 ‘신성한 것’과는 다르다. 신성과 마주치면, 우리는 진정으로 다른 세계에 있게 된다.
신적인 것 앞에 섰을 때, 이중적 감정
우리가 신이나 신의 형상과 마주쳤을 때, 동시에 끌림과 두려움, 사랑과 공포, 매혹과 혐오를 느낀다
순교자들이 말하듯이 고통 속에서 희열을 느낀다
 
신적인 것은 우리 사고의 기반이며 한계인 시간과 공간 개념을 결정적으로 뒤흔들어놓는다
성의 체험은 여기가 저기라고 믿게 한다
몸은 편재, 공간은 더 이상 연장이 아니라 질
어제는 오늘, 과거는 돌아오고, 미래는 이미 일어났다
신성한 시간은, 육체를 결합시키거나 분리시키고, 감정을 교란시키며, 쾌락을 고통으로 바꾸고,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바꾸며, 선을 악으로 바꾸는 그 리듬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리듬에 따라 다시 돌아온다
 
초자연적인 것
치명적 도약은 우리를 초자연적인 것과 맞닥뜨리게 한다. 초자연적인 것 앞에 서 있다는 느낌은 모든 종교적 경험의 출발점이다.
 
초자연적인 것은 먼저 근원적인 낯설음의 느낌으로 나타다
가장 일상적이며 명백한 표현으로 현실과 존재를 인정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 대상들은 다른 것으로 변화시킨다
모든 것은 현실적이면서 비현실적
종교적 제의들은 이 이중성을 강조
 
모든 제의는 하나의 공연이다.
제의에 참여한 사람 - 연극 공연 중의 배우, 극중 인물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제의 장소역시 재연 - 산은 용왕의 궁전이며, 무심히 흐르는 강은 신성의 흐름이다
하지만 그 산과 강은 본래의 성격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각각은 모두 자기이며 동시에 자기가 아니다
이중적 성격
 
믿음의 순간, 그는 이 세계 안에 있기도 하고, 밖에 있기도 하다. 이 세계는 실재이면서 실재가 아니다.
 
낯설음 : 일상적 현실이 갑자기 처음 보는 듯한 것으로 뒤바뀌는 현상 앞에서 놀라는 것
이상한 나라에서 앨리스가 느끼는 어리둥절함
 
무엇 앞에서 놀라워하는가?
자기 자신 앞에서, 스스로의 적나라한 실상을 보고 놀라는 것
일상 속의 자신, 자기 존재의 정체성에 대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그 무엇 앞에서 놀라는 것
우리 앞에 있는 이 자연 - 나무, 산, 석상과 목상, 나를 지켜보는 나 자신 - 은 평범한 현존이 아니다. 그것은 타자의 거주지이다.
초자연적인 것의 체험은 곧 타자의 체험이다.
 
타자성의 느낌
루돌프 오토, 타자의 출현은 -타자성의 느낌까지도- 일종의 ‘가공스러운 신비, 우리를 전율케하는 신비’의 형태로 다가온다
가공스러움
1. 성스러운 공포 :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경험이기에, 언어를 넘어서는 섬뜩함
2. 현존 혹은 출현의 위험 : ‘무시무시한 위엄’
3. 빛나는 에너지 : 이렇게 살아 있고, 활동적이며, 전지전능한 신
2,3은 종교적 신성의 속성, 가공스러움의 본질이라기보다는 그 경험의 부차적 산물
 
‘타자성’을 경험할 때의 가장 순수하고 원초적인 형태는 낯설음, 망연자실, 숨이 멈출 듯한 놀라움
‘신비’는 바로 다자성, 우리와는 무관하거나 낯선 무엇으로 나타나는 타자의 경험
타자란 우리와는 달리, 존재이면서 동시에 비존재이기도 한 무엇
망연자실 - 무서움
현현한 것이 그 자체로 위협적인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모습이 견딜 수 없을 것 같으면서도 매혹적이기 때문
현현 속에 있는 모든 것이 밖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에 무섭다
깊숙한 곳에 있는 모든 내면이 드러나는 얼굴, 존재의 안과 밖을 보여주는 것
 
무서움을 근접할 수 없는 충만한 전체 앞에 섰다는 놀라움에서 발생
모든 것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이 현현 앞에서, 선과 악은 더 이상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 그때 우리들의 몸은 무게를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워진다. 아니, 다른 측정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그의 존재는 모든 존재를 포함한다
속에 있던 것이 밖으로 드러나고, 마침내 생의 내장이 눈앞에 드러난다. 하지만 생의 내장은 바로 죽음이다. 삶은 죽음이다. 그리고 죽음은 삶이다.
“모든 것은 현존한다”는 말은 “모든 것은 공이다”는 말과 동격이다
 
놀라움, 망연자실, 기쁨 등 ‘타자’ 앞에서 느끼는 감정의 파노라마는 매우 다양하다
그 모든 감정의 공통점은 마음의 첫 번째 움직임의 방향이 뒤로 물러서는 것이라는 사실
이 물러섬에 이어 반대의 동작이 이어진다
 
거부와 매혹, 그리고 현기증, 몸을 던져 ‘자아’를 벗고 ‘타자’와 하나가 된다.
비우는 것, 무가 되는 것. 전체가 되는 것, 존재하는 것, 죽음의 중력, 자아의 망각, 포기 그리고 동시에 그 이상한 현현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갑자기 깨닫는다.
‘타자’는 나다
 
‘타자’의 경험은 ‘일치’의 경험엣 정점에 달한다
‘타자’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우리가 떨어져 나온 무엇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중성이 그치고 우리는 피안에 도달한 것이다.
우리는 치명적 도약을 하였다. 마침내 우리는 우리 자신과 화해한 것이다.
 
‘타자’에 대해 낯설어하면서도 친숙하고, 거부하면서도 매혹되고, 도망가면서도 안기고 싶은 마음은 우리 자신에 대해 느끼는 고독과 교감의 상태이다.
고독이란 자신의 존재로부터 분리되어 둘이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둘이기 때문에, 모두 외로운 것이다. 낯선 자, 타자는 우리의 분신이다.
 
타자는 언제나 부재한다. 부재하면서도 편재한다. 우리 발밑에는 빈틈과 구멍이 있다.
 
 
치명적 도약은 사랑, 이미지, 현현이다
현현 : 우리는 나아갈지 물러설지 망설인다. 그때 느끼는 감정의 모순된 성격은 우리를 얼어붙게 한다
사랑 : 우리는 정지시키고, 자아로부터 빠져 나오게 하며, 우리를 타인의 육체, 타인의 눈동자, 타인의 존재로 나아가게 한다
자신의 육체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의 육체에서만, 너무나 타인인 그 사람의 인생에서만 우리는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다.
 
사랑과 신성의 경험
같은 연원에서 흘러 나온 현상
단지 각 존재의 상이한 층위에서 도약을 시도하여 피안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일 뿐
신성은 우리에게서 도망친다. 그것을 잡으려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의 근원이 원초적인 것이며 우리 자신의 존재와 뒤섞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랑과 시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난다.
~ 인간 존재의 뿌리가 외부로 드러나는 현상들
그 경험들에는 이전의 상태에 대한 향수가 깃들여 있다. 우리가 떨어져 나왔으며, 매순간 떨어져 나오고 있는 그 근원적인 통일성은, 우리가 끊임없이 돌아가고자 하는 원초적인 존재 조건을 이룬다
 
태초의 삶에 대한 향수는 미래의 삶에 대한 예감
과거와 미래의 삶은 지금 여기이며, 번개 같은 순간 속에 녹아든다
향수와 예감은 시, 신화, 사회학적 유토피아 혹은 영웅의 과업 등 모든 위대한 인간 업적의 본질은 이룬다.
 
인간의 진정한 이름, 인간 존재의 표식은 ‘욕망’인지 모른다
사랑의 만남, 시의 이미지, 그리고 신의 현현에는 갈증과 충족감이 뒤섞인다
 
시적 계시
 
 
 
종교와 시
종교와 시 : ‘타자성’을 포용하려는 시도. 종교 경험처럼 시 경험도 ‘치명적 도약’/ 본성을 바꾸는 것/ 근원적인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것
시와 종교는 계시이다
시 언어는 종교적 권위를 넘어선다
이미지는 이성적 증명이나 초자연적인 힘의 권위에 기대지 않고, 오직 스스로에게만 의지한다
인간이 스스로를 발견할 때 드러나는 본연의 모습
종교적 언어- 우리와는 다른 어떤 신비를 보여주고자 시도한다
 
같은 샘에서 탄생하고 또 같은 변증법에 지배되는 것같이 보이는 그 둘이, 어쩌면 그렇게 상호 화해 불가능한 상태로 구체화되어 갈라서게 되는 것일까?
 
신성
신성을 초자연적 경험에도 있지 않고, 수많은 종교적 개념에도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합리적 선험성으로 여겨지는 완전함이라는 관념은 자동적으로 신성의 개념에서만 성립될 것이다.
 
신성의 경험은 거부하고 싶은 경험 (두려운 무엇으로 이끌리는 경험)
내재적이고 비밀스러운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이며, 존재의 내장을 보이는 것
 
정화 혹은 순화를 통하여, 경험의 잔혹한 요소들은 신의 모습에서 유리되고 종교 윤리가 생성될 토양을 만들게 된다. 하지만 종교적 계율의 도덕적 가치가 무엇이 되든 간에, 그 계율이 신성의 최종적 근거가 되지 못하고, 또한 순수한 윤리적 직관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것은 존재의 가장 깊은 층을 들추는 원초적 경험의 합리화 내지 정화의 산물일 뿐이다.
 
신령한 대상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파악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에겐 너무나 이질적이다. 우리가 그것을 표현하고 싶을 때 우리는 이미지나 역설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신성의 경험은 우리의 외재적 대상인 신, 악마 혹은 우리와 다른 현존의 드러남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숨어 있던 그 ‘타자’가 드러나기 위해 우리의 마음과 내면을 여는 것이다.
 
종교적이거나 신격화 성향
오토숭고한 감정의 출현은 신성한 감정의 출현보다 나중에 일어난다. 신성의 특이점은 그 우선성에 있다
성스러움은 근원적인 감정이며, 이로부터 숭고함과 시적 감정이 유래된다는 것
그러나 이것을 증명하기는 매우 어렵다
 
신성함이 다른 모든 영역보다 우선하면서 근원적이고 대체 불가능한 선험적인 영역이라고 확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그 선험적 영역을 고집하려고 할 때마다, 신성의 경험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다른 경험 속에도 들어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모든 경험에는 서로간의 우선성을 따질 수 없는 동일한 요소들이 나타난다
이 경험들을 서로 구분지을 수 있는 것은 그 경험을 이루는 요소들의 조합이 아니라 의미이다
신성의 영역을 다른 영역들과 경정적으로 구분짓는 것은,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이나 지시체이외에는 없다. 하지만 대상이란 것도 경험 안에 있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신성이 인간에게서 탄생하는 그 순간
신성한 공포 - 낯설음 속에서 싹튼다.
놀라움- 자아의 왜소화
스스로에 대한 감정과 무엇에 의지하고픈 마음에서 신성의 관념이 태어난다
 
피조물의 상태는 창조주와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결과
우리는 전체 앞에 서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작은 부분이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느낀다.
우리가 창조주를 희미하게나마 보았기 때문에 스스로를 피조물로 느끼고 스스로에 대해 의식한다
 
인간은 세상에 던져진 존재. 막 탄생한 그 상태는 우리의 생애 내내 지속된다. 매 순간 우리는 보호받지 못하고 발가벗겨진 채로 태어나 세상에 던져진다 낯선 미지의 것이 사방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오토가 말한 피조물의 상태란, 신학적인 의미를 탈색하면, 바로 하이데거가 부른 “그곳에 처해졌다는 섬뜩한 느낌”이다.
 
신성함의 영역은 피조물이라는, 태어났다는, 그리고 매 순간 태어난다는 그런 근본적인 상태의 정서적 계시가 아니라 그 상태의 해석이다. ‘그곳에 처해졌다’는, 즉 우리는 언제나 유한하고 비보호의 상태로 낯선 곳에 던져졌다는 극단적인 사건은, 전지전능한 의지에 의해 우리가 창조되었고 언젠가는 그 자궁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로 변한다
 
신성의 경험은 우리의 원초적 조건의 계시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 계시의 의미를 감추기 위한 하나의 해석을 뿐
 
우리의 근원적인 비참함과 대조적으로, 신성은 자신의 성스러운 형태에 존재의 충만함을 담는다. 성스러운 것은 ‘장엄한 것’인데, 이것은 선과 도덕의 개념을 초월한다.
 
우리들은 부족한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무언가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전체인 존재에 비해 작은, 혹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 우리들의 부족함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근원적인 불충분함이다. 원죄란 부족한 존재에서 비롯된다.
 
존재하기 위하여 인간은 신을 달래고, 신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헌신을 통하여 인간은 신성한 것, 충만한 존재에 이른다.
 
<가톨릭>
‘결점’은 바로 신이 아니라는 사실, 즉 우연한 존재라는 사실에 기인. 우연은 천사와 인간에게 자유로서 주어진다.
인간은 추락되거나 구원받을 수 있는 영원한 가능성 자체
원죄는 ‘부족한 존재’와 동의어가 아니라 구체적인 결핍을 의미
“은총과 함께 우리가 은총의 힘을 능가하는 자유 의지를 가지는 게 아니라 우리의  의지가 은총에 의하여 그 힘과 자유를 회복하는 것”
 
인간이라는 ‘부족한 존재’를 신이라는 충만한 존재와 마주 세우면서, 종교는 영원한 삶을 상정. 죽음으로부터 우리는 구원했지만, 지상의 삶을 긴 고통 속에서 근원적 결핍을 속죄하는 것으로 만듦.
죽음을 죽임으로써, 종교는 삶도 죽이게 된다.
 

종교처럼 인간의 원초적 상황, 인간이란 잔혹하고 냉담한 세계에 던져진 존재라는 것과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은 유한한 시간밖에 살지 못하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에서 출발
 
영감은 불모의 상태 다음에 온다
시적인 말은 가뭄의 시기를 거쳐 움튼다
시의 구체적 내용이 어떤 식으로 표현되든지 간에 시 언어는 이 땅 위의 삶을 긍정한다.
시편 개개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시적 행위, 시를 쓰는 일, 시인의 언표는 어떤 해석이 아니라 본래부터 인간 조건을 드러내는 것이다.
 
시적 언어는 리듬이며 끊임없이 솟아나고 소생하는 시간성
리듬이면서 또한 대립되는 것들을, 삶과 죽음을 한마디로 껴안는 이미지
실존 그 자체처럼, 한껏 고양된 순간에조차도 그 안에 죽음의 이미지를 품고 있는 삶처럼, 시간의 흐름인 시 언어는 죽음과 삶을 동시에 긍정한다.
 
솟구쳐오르는 리듬과 이미지가 표현하는 것은 단지 우리 자신
시의 단어가 갖는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드러내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조건 (시적 행위의 의미)
시가 원초적인 인간의 조건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시를 쓴다는 것이 인간의 결핍 혹은 근원적인 결함에 대한 판단 이외에 무엇이겠는가?
 
결핍은 인간의 근원적 조건. 인간은 본래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
시를 쓴다는 것이 진실로 인간의 원초적이고 영원한 조건을 발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핍을 인정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 생명을 가진 것은 죽는 것처럼, 죽음이 우리 밖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고 삶 자체에 포함되어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죽음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죽음은 인간 삶의 결핍이 아니라, 반대로 삶을 완성시키니다. 산다는 것은 앞으로 향해 나아가는 것, 낯선 것을 향해 전진하는 것이며 이러한 전진은 우리 자신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죽음을 직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 끊임없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낯선 것을 만나는 것은 긍정적이다.
 
삶과 죽음, 존재 혹은 무는 별개의 실체나 사물이 아니라. 부정과 긍정, 결핍과 충만은 우리 안에 공존한다. 아니 바로 우리다. 존재는 비존재를 암시한다. 그리고 비존재는 존재를 암시한다.
 
인간은 스스로를 관조하자마자, 자신이 의미 없는 사물들과 대상들의 총체 속에 들어 잇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의미가 부재한다는 것을, 인간은 사물들과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지만 그 의미란 바로 죽음밖에 없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닫게 됨으로써 비롯된다.
우리 자신이 무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세게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무에 이름을 붙인다면 무는 존재의 빛으로 반짝일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을 마주하고 사는 것은 삶 속의 죽음을 끼워넣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존재는 무의 전제 조건이기 때문에, 그리고 죽음은 삶으로부터 태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무에 이름을 붙일 수 있음 죽음과 삶을 재통합할 수 있다.
우리는 존재를 통해서 무로 다가갈 수 있으며, 무를 통하여 존재로 다가갈 수 있다.
우리는 ‘부정의 근거’이면서, 또한 그러한 부정의 초월이기도 하다.
 
인간의 하찮음의 드러남은 존재의 드러남으로 변한다. 죽음과 삶, 우리는 살면서 죽고, 죽으면서 산다.
 
사랑~ 사랑 혹은 사랑의 기쁨은 존재의 드러냄이다.
사랑은 존재와 무의 동시적 드러냄이다.
우리가 참여하는 어떤 것이며 우리가 우리를 만들어가는 어떤 것이다.
사랑은 존재의 창조다. 그때 창조되어지는 존재는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창조할 때 우리를 소멸시키며, 소멸시킬 때 창조한다
 
우리를 존재의 창조로 이끌어가는 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의 깨달음이다.
무에 던져진 인간은 무에 맞서서 자신을 창조한다
 
시적 경험 : 우리의 근원적인 조건의 드러냄 : 우리 자신의 창조로 귀결
시인은 존재를 창조한다 (존재 : 만들어지는 것)
인간의 원초적인 조건은 가능성
인간의 자유 : 가능성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것
-시인이 드러내는 것은 자신을 창조해가는 인간
 
시 쓰기가 보여주는 것 :죽을 운명이라는 것이 인간 조건의 양면성 중의 한 면일 뿐이라는 사실. 또 다른 한 면은 살아가는 존재.
태어남은 죽음을 포함한다. 그러나 죽음과 삶이 서로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태어남은 부족과 형벌의 동의어가 아님을 알게 된다.
→시를 쓴다는 것의 최종적 의미
 
결론
시의 말과 종교의 말은 역사를 통해 혼동되어왔다
종교적 계시(그것이 말인 한에 있어서) : 원초적 행동이 아니라 그에 대한 해석
시 : 인간 조건의 계시. 이미지에 의한 인간의 창조.
시적 언어는 인간의 역설적인 조건 (타자성)을 드러내며, 그럼으로써 현재의 자신을 실현시킨다.
인간에게 존립 근거를 주는 것은 종교의 경전이 아니라 시적 언어다.
 
영감
 
 
 
우리들의 원초적인 존재 조건 : 본질적으로, 항상 스스로를 만들어가고 있는 무엇
계시가 시적 경험이라는 특수한 형태를 취할 때, 행위와 표현은 불가분의 것이 됨
 
시는 어떻게 씌여지는가?
시 창작의 증언들이 보여주는 모호함
표현의 순간에는 언제나 예기치 않은 결정적인 도움
갑작스러운 침입의 형태
시인의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면서 동시에 자기 것이 아니기도 하다. 내 사고의 흐름에 뛰어들어, 나로 하여금 원하지도 않았던 것들을 말하도록 하는 그
: 악마, 뮤즈, 영, 정령
: 노동, 우연, 무의식, 이성
 
시인은 그저 영매로서 성, 일기, 역사 혹은 고대 신들과 악마들의 대용품을 은밀히 표현하는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개념
→그 모든 것에는 그들을 통틀어 거부하게 만드는 한계, 부분으로서 전체를 설명하고자 하는 배타주의가 횡행하고 있다
 
=그것들은 그 경정적인 힘이나 사실을 어떻게 언어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
=리비도, 인종, 계급 혹은 역사적 순간 등은 어떻게 언어와 리듬, 이미지로 변하는가?
=정신 분석가들은 시적 창조를 승화라고 본다. 그렇다면, 그 승화가 왜 어느 때는 시가 되고 어느 때는 시가 되지 못하는가?
 
만일 영감이라는 것이 인간이 자신의 의식 안에서 듣는 ‘목소리’라면, 그 목소리를 듣고 스스로의 영역을 건설하는 유일한 존재인 의식을 심문해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현대시의 역사 : 시인이, 용인되지 않는 영감의 현존과 현대적 세계관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갈기갈기 찢겨져온 역사
“모순의 법칙을 파괴하는 것은 아마도 최상의 논리가 지닌 가장 숭고한 책무이다”
 
시인은 시적 창조의 수단이며 동시에 주체
그는 듣는 귀, 스스로의 목소리가 부르는 것을 받아 적는 손
시인의 꿈은 좀 더 깊은 층에선 깨어 있음을 요구하고, 깨어 있음은 꿈에다 스스로를 내맡기는 것
 
말 : 시 행위를 다른 것들과 구분짓게 함
시 쓰기 : 말로써 창조하는 것, 시를 창작하는 것
시적인 것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고 또한 인간을 만드는 상호적인 것.
시는 하나의 가능성. 우리 스스로를 창조해내는 가능성
이름을 부르고, 말을 사용하여 창조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부르는 그것 자체 - 우리가 부르기 전에는 위협과 공허와 혼돈으로밖에는 존재치 않았던 것-를 창조하는 것
 
시가 씌여지고 나면, 시 이전에 존재했고, 시인을 창조로 몰고 갔던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그것-사랑, 기쁨, 고뇌, 권태, 다른 것에 대한 향수, 고독, 분노 등-은 하나의 이미지로 변한다. 그것은 이름 불려져 시, 즉 투명한 언어가 된다. 창조 뒤에 시인은 홀로 남게 된다. 이제 그 시를 재창조하면서 자신을 창조해갈 이들은 바로 독자들이다.
 
창조 이전엔 시인이란 존재치 않는다.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그가 시인인 이유는, 시 때문이다. 시는 시인의 창조물이지만, 시인 역시 시의 창조물이기도 하다.
 
초현실주의
초자연적인 것이 세계의 일부분이었다는 바로 그 이유로, 과거의 시인들에게 영감은 자연스러운 것
 
시적 창조의 비밀을 풀기 위하여 사색하고 몰두해야 할 필요성 - 근대의 산물
~그 행위 속에 근대성이 기초
시인들의 불쾌함 - 근대인의 의식과 세계관 속에서 근대인으로서의 자신을 부정하고 근대의 기초 관념들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이상한 현상을 설명해낼 수 없는 무능에 기인
 
영감의 문제를 정확히 제기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근대 사회가 위기에 처하게 됨으로써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 뒤흔들리는 것을 경험해야만 했다
→시사에서 그 순간을 초현실주의로 불린다
 
초현실주의 : 주체와 현상(객체)사이의 투쟁을 제거하려는 극단적인 시도
객체에 대해 공격했지만 객체를 녹였던 그 산은 주체마저 녹여버렸다. 자아도 없고 창조자도 없으며, 단지 시적 힘만이 근거 없고 설명할 길 없는 이미지만을 선호하고 양상하는 종이 위를 휩쓸고 다닐 뿐이었다
 
모든 사람이 시를 쓸 수 있게 됨. 왜냐하면 시적 행위는 문자 그대로 비자발적이 되어, 항상 주체의 부정으로서 행해졌기 때문
시인의 사명 - 시의 힘을 불러 고압 전류로 바꿔서 이미지들을 방전하도록 하는 것.
주체와 객체는 영감을 위해 용해됨
 
양가적 가치 사이의 모순과 유아론을 부수고자 하였다
단호한 의자로 모든 출구를 봉쇄하고 말았다
이제 세상도 없고, 의식도 없다. 세계의 의식도 없고 의식에 바친 세계도 없다
상상력이라는 천장으로의 비행 외에는 환풍구도 없어졌다.
영감은 이미지로 나타나거나 실현.
영감 → 상상 → 주체와 객체 해체. 우리 자신 해체, 모순 제거
 
영감에 대한 초현실주의적 사고 → 세계관의 파괴
세계관을 구성하는 두 가지 기본 개념이 단순한 환영임을 고발하기 때문
영감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관을 상정
 
초현실주의의 진정한 독창성은 영감을 하나의 개념으로 설정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것을 하나의 ‘세계관’으로까지 확대했다는 데 있다.
~처음으로 영감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다른 관념들과 충돌하지 않았다
 
인간과 영감
우리가 영감의 원천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인간의 ‘부분’이거나 ‘구성 요소’로서의 의식이나 무의식에서도 아니고, 충동이나 수동성 혹은 깨어 있음에서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 모두가 모여야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순간순간 그는 ‘타인’이며 자기 자신.
‘타자성’은 인간 안에 있다
그치지 않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하나의 통일성이 ‘타자성’ 속에서 용해되어 다시 새로운 통일성으로 재탄생한다
이런 관점에서 ‘다른 목소리’라는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림
 
시인도 말도 ‘항상 저 너머이다’
매일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세계를 창조하듯이, 말들을 창조하고 발명해내야 한다
시인이 발명하는 말은 - 그 말은 모든 순간을 포함하는 한 순간에 허공으로 사라지거나 아니면 침투할 수 없는 물건으로 변한다 - 매일매일의 일상의 말이다.
시인은 자신에게서 그 말을 꺼내지 않는다. 외부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안이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 즉 우리 자신이다.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타인이 되어야 한다. 그의 언어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타인의 것이기 때문에 자기 것이 된다. 그것을 진짜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이미지와 형용사와 리듬에, 즉 그것을 타자화하는 모든 것에 의지하게 된다. 이렇게 그의 말은 그의 것이면서 또한 아니다.
시인이 어떤 이상한 목소리를 듣는 게 아니다. 자신의 목소리와 자신의 말이 이상한 것이다. 그것은 세계의 목소리와 말인데 단지 그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다.
 
시어는 우리의 원초적 존재 조건의 계시이다.
~시어를 통하여 시인은 타인으로 불리며, 이렇게 그는 동시에 이것이며 저것이고 그 자신이면서 타인이 된다.
 
영감 : 인간의 구성 요소인 ‘타자성’의 발현
사실 영감은 어디에도 있지 않다. 그냥 ‘있지 않으며’, 그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지향이며, 나아감이며, 바로 우리 자신인 그것으로 향한 앞으로의 움직임이다.
시적 창조는 우리의 자유와 존재하고자 하는 결심의 연습이다.
 
영감의 첫 단계에서, 우리는 먼저 자신이 되기를 멈춘다.
두 번째 단계에서 자신으로부터의 탈피는 더욱더 전체적인 자신이 된다.
 
인간은 세상을 자화한다.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삼라만상은 그에 의하여, 또 그를 위하여 의미를 머금게 되고, 결국 하나의 이름을 갖게 된다. 모든 것이 인간을 겨냥한다
 
인간은 ‘시간성’이며 변화이고, ‘타자성’이 그의 고유한 존재 방식을 구성한다. 인간은 타자가 될 때, 스스로를 채우고 완성한다. 타자가 되면서 스스로를 회복하고 낙원에서의 추방과 이 땅으로의 전락 이전의, 나와 ‘타인’ 사이의 분열 이전의 원초적 존재를 재정복한다.
 
말이란, 인간이 타자가 되기 위해 가지는 수단 중의 하나이다. 이 시적 가능성은 단지 우리가 치명적 도약을 할 때만, 즉 우리가 실재로 자신에게서 나와 ‘타자’에서 자신을 양도하고 사라질 때만 이루어진다.
 
모든 언어는, 나이며 타자들이고, 나의 목소리이며 다른 사람의 목소리이고, 모든 사람이면서 각 개인인 그 원초적 대명사의 은유들이다. 영감은 존재로의 투신이지만, 또한 무엇보다도 존재를 기억해내서 다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존재로 돌아가는 것’
[출처] 옥타비오 빠스 _ 활과 리라 : 2부 시적 계시 (요약)|작성자 옥토끼
 
시의 력사
 
순간의 성화
 
 
 
시편이란
다른 경험으로 환원 불가능한 시적 행위가 어떻게 세계 속으로 편입되는지
 
시 작품으로 구체화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자신과 다른 어떤 것, 즉 그것 없이는 시편으로 구체화될 수 없는 어떤 것에 의지한다
시편 = 시 + α
α = 시편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
 
순수 시편 : 시를 쓴다는 행위 그 자체만을 의미하기 위해서, 말이 특정한 의미를 갖거나 이것 혹은 저것에 대한 지시체이기를 포기하는 것. 말의 소멸을 요구.
→말로 씌여질 수도 없고, 사실상 말해질 수도 없는 것
 
시편 : 말을 초월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것만큼이나 필연적으로 말에 의존한다
말로 씌어진 시편은 말 너머를 향하며 역사는 시편의 의미를 고갈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시편에 근거를 제공하고 또한 역으로 시편이 근거를 제공하는 공동체와 역사가 없다면 시편은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시인의 말 : 말이라는 그 사실로 인해 자신의 것이며 타인의 것
: 역사적, 민중에 속하는 것이며 그 민중이 말을 사용하는 특정 시기에 속하는 것
: 역사적 시점의 말이자 모든 역사적 시점 이전의 말, 태초의 말
 
시편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언어 : 역사
역사는 시적인 말이 육화하는 장소
 
시편은 원초적 경험과 그 뒤에 오는 행동과 경험의 총체 사이의 중재
시편은 특별한 순간을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선을 긋는다
순간은 시에 의해서 성화되어 있다
- 시간은 살아 있고, 환원 불가능한 특수성으로 가득 찬 순간. 동시에 다른 순간에반복되고 재생산되면서 자신의 빛으로 새로운 순간들, 새로운 경험들을 비추는 것
 
역사가 없이는 시편은 태어나거나 육화될 수 없다. 그리고 시편이 없다면 역사 또한 없을 것인데, 왜냐하면 기원도 시작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은 두 가지 방법으로 역사적
1. 사회적 생산물로서
2. 역사적인 것을 뛰어넘는 창조물로서
~ 시편이 다시 역사 속에서 육화되고 사람들 사이에서 반복될 필요가 있다
~ 잠재적이며 영원히 현재인 시간, 한정된 바로 지금 여기서 구체적으로 현재화됨으로써만 실현되는 시간
~ 원형적 시간
 
시편의 이중성
시편이 갖는 다의성은 시편의 이원적 본성의 결화
갈등은 역사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편의 내부에 존재
시적 작용의 이중 운동에 기인
시편은 역사적 시간을 원형적 시간으로 변화시키며, 그러한 원형을 다시 특정한 역사적 현재로 육화
이중적 운동 : 본래적이고 역설적인 시의 존재 방법
시가 취하는 역사적 방식이 논란거리가 되는 것은, 자신이 부정하는 시간과 연속성을 다시 긍정하기 때문
 
이미지는 결코 ‘이것 혹은 저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미지는 ‘이것과 동시에 저것’을 말한다. 심지어 ‘이것이 저것’이라고 말한다.
 
시와 인간
시적 언어의 이원적 조건은, 시간적이며 상대적이지만 언제나 영원을 향하여 던져진 존재라는 인간의 이원적 본성과 다르지 않다
 
순간을 순간으로 만들며, 시간을 시간으로 만드는 것은, 그것들을 유일하며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그 순간, 그 시간과 하나가 되는 인간
 
자신의 시간적 조건을 벗어나기 위해서 시간 속에 더 완벽하게 함몰
유일하며 한 번 뿐인 순간을 창조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역사에 기원을 제공
인간의 조건은 인간을 타자가 되도록 이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이면서 자신의 이미지로 변화한다
 
시적 경험은 인간의 조건을 드러내는 것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 것 - 인간의 본질
시적 기능을 특징짓는 것 : 언표 - 모든 언표는 무언가에 대해서 말하는 것
무언가 - 역사적이며 시간적인 것
 
시인이 성화시키는 것 : 언제나 역사적 경험으로서, 그것은 개인적인 경험도, 사회적인 경험도 될 수 있으며 혹은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경험도 될 수 있다
모든 사건들, 느낌들, 경험들 그리고 인물들에 대해서 말할 때, 시인은 우리에게 다른 것, 즉 만들어가고 있는 것, 우리 앞과 우리 안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에게 창조하고 이름 부르는 행위인 시 자체에 대해 말한다. 독자로 하여금 시를 반복하고 재창조하도록 한다. 그가 이름 부른 것을 다시 이름 부르게 하여 그 행위를 통하여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드러내게 한다
시인은 시로부터 시를 만들어낸다
 
시인이 쓴 시와 독자가 읽는 시가 동일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창조의 행위 자체는 동일하다. 독자는 순간을 재창조하며 자기 자신을 창조한다.
 
시는 새로운 독자와의 만남으로 늘 완전해지려고 하는, 언제나 미완성의 작품이다.
 
시적 계시 - 시인이 드러내는 것 - 본래의 우리로 복귀하는 것
-결코 추상적 형태를 취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에 의하지 않고는 설명되지 않는 행위
-인간 조건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이 드러나거나 혹은 밝혀지는 경험
 
시적 경험 - 자유 그 자체, 무언가에 다다르기 위해 펼쳐지며, 그렇게 순간적으로 인간을 실현시킨다

영웅적 세계
 
 
 
그리스 서사시
그리스 영웅들을 다른 영웅들과 구별짓는 것 - 신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도구가 아니라는 점
호메로스의 주제 : 영웅들의 운명
~신들의 운명과 연결되어 있고, 우주의 구원과도 연결되어 있어서, 종교적 주제가된다
그리스 서사시의 또 다른 특징 : 종교성 (도그마화된 종교는 아니다)
 
고대 그리스의 두 가지 종교
1. 신들에 대한 종교 - 자연신 숭배, 태양신 제우스
2. 조상들에 대한 종교 - 공동체 전체를 상징하는 뛰어난 인물 숭배, 아가멤논
 
에게 해 문명 분열
영웅들은 이제 무덤 속에 있는 사자들이 아니라, 신화적 인물로 변함
신화는 종교적 찬양과 기원으로부터 벗어나, 영웅들을 신화적 대상으로 다루게 됨으로써, 서사시의 자양분 역할을 하게 되었다.
무덤 속의 영혼과 인간을 이어주던 신성한 끈이 끊어지면서, 영웅-신은 인간의 속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인간화는 올림푸스의 신들도 감염시켜 그들 역시 인간화했다.
 
호메로스 : 끝이며 시작
끝-올림푸스 신들을 섬기는 종교의 승리와 조상 숭배의 패배로 완결된 기나긴 종교적 진화의 끝
시작-호메로스의 시들이 종교와 삶의 이상과 윤리의 바탕을 제공한 귀족적이고 기사도적인 새로운 사회의 시작
 
영웅 : 두 개의 세계-자연적인 세계와 초자연적인 세계-가 합류하며 투쟁하는 장소
: 탄생에서부터 영웅은 독립적인 두 개의 힘이 결합하는 연결 고리의 이미지
영웅의 본질은 두 세계의 투쟁이다.
모든 비극은 영웅의 서사적 개념 속에 고동치고 있다.
 
영웅이 행동하는 세계에 대한 관념 형성
제거 그리스 이전에는 몰랐고, 그리스에 와서 그들의 정신적 특징이 알아낸 것은사물의 내재적 합법성에 대한 의식이다.
우주적 법칙, 충동, 리듬에 의해 생명을 부여받는 역동적 총체의 개념
인간을 그러한 총체성을 구성하는 능동적인 부분으로 보는 관념
~인간이 갖는 책임 관념 모순적
이러한 모순 내에서 영웅적인 것의 뿌리와 나아가 비극적인 것에 대한 의식이 발견
 
그리스 인들은 인간을 자연의 일반적인 운행 속에 삽입시키며, 여기에서 영웅됨의 갈등과 모범적인 가치가 비롯됨
 
영웅들과 신들의 세계는 인간들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우주. 살아있는 총체, 그것의 운동은 정의, 질서, 운명이라 불림
탄생과 죽음은 이러한 생생한 조호의 협주곡을 구성하는 두 개의 극단적 음표이며, 위태로운 인간의 모습은 이 두 극단 사이에 나타남
삶과 죽음이라는 두 세계가 합류하는 장소가 인간이기 때문
 
이러한 개념으로 총체적 자연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의 건강도 우주의 건강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으며, 영웅의 광기나 병약함은 우주 전체로 전염되며, 하늘과 땅을 위태롭게 한다.
 
활의 시위나 리라의 현처럼, 우주는 팽팽한 긴장 상태에 있다.
헤라클레이토스 : 존재를 생성으로 인식할 뿐만 아니라, 인간을 우주적 투쟁이 전개되는 장소로 여긴다.
 
그리스 비극
비극과 희극은 그리스가 자기 자신과 나누는 대화이며, 자신을 세운 토대와 나누는 대화
 
아이스킬로스
: 인간의 운명을 인간의 의지가 참여하는 초인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으로 인식
: 고통, 불행, 재난의 본래적 의미는 절제를 초과하려는, 다시 말해서 각자가 위치하는 영역의 극한을 뛰어넘어 자기 자신 너머로 감으로써 신이 되거나 악마가 되려고 하는 인간에게 가해지는 형벌
모두에게 똑같이 태양을 비추어주는 하늘이여! 그대는 내가 이토록 부당하게고통받고 있는 것을 보고만 있구나.
: 아무도 그를 고통에서 끌어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고통은 인간의 비극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소포클레스
: 비극적 행위가 운명이 갖는 우월한 힘뿐만 아니라 우주적 정의를 완수함에 있어서 인간의 능동적 참여 또한 내포하고 있다.
: 비극이 가르치는 것은 무의식적인 체념이 아니라, 운명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일이다.
: 인간이란 신의 손아귀에 든 ‘도구’이상의 어떤 것이라고 거듭 확신했다.
 
운명과 자유라는 모순되면서 상보적인 두 개의 단어 덕분에, 인간은 인간일 수 있고 세계는 세계일 수 있다. 비극성은 이가적 대립물을 동등하게 보며 절대적으로 긍정하는데서 연유한다.
가혹한 운명의 무게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주고, 우리에게 만유적 질서의 빛을 던져주는 유일한 것은 운명에 대한 의식이다. 사유와 운명은 서로 대립되며 상보적인 단어이다. 그것의 신비는 사물의 본성 그 자체에 속한다.
 
에우리피데스
: 우주적 합법성의 신성함과 정의로움에 관해 감히 터놓고 질문한 첫 번째 사람
: 존재의 영역을 버리고 도덕적 비판의 영역으로 옮겨간다
: 과오 - 주관적, 심리적인 개념
 
운명의 정의로움을 부정하자마자, 고통은 정당성을 상실하고 혼란이 찾아온다. 운명의 침입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자기 자신 안으로 숨거나 혹은 이상적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다.
스토아 철학, 개인적 신비주의, 정치적 유토피아 - 객관적 적법성을 상실한 세계가 나갈 수 있는 출구
 
우리는 벌을 받고 속죄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백하면서 죄인이기 때문이다.
 
비극을 인간의 가장 뛰어난 시적 창조물로 만드는 것은 그러한 갈등에서 충만되고 심오하게 나타나는 ‘다른 목소리’-기본적인 인간 조건의 드러남-이다.
비극의 위대성 : 그러한 개념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이가적 대립물 사이의 해결 불가능한 모순을 육화시켰다
비극적 영웅들은 의식을 버리지 않으며 그의 존재를 조건짓는 궁긍적인 이유에 대해 끊없이 질문한다
그리스 비극은 존재의 근거 자체에 대한 질문이다
운명은 신성한가? 인간은 죄인인가? 정의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스 사회를 지탱하는 가설 자체에 대한 것.
폴리스를 세운 모든 가치 체계를 의문시하는 것
 
모든 행위의 앞면과 뒷면을 우리에게 남김없이 보여주기 위해서, 비극 시인들은 가장 성스러운 행동과 가장 지독한 신성모독까지도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비극은 신선모독에 대한 광범위한 사색이며 애매한 가치 - 구원하고 벌하며, 벌하고 구원하는-에 대한 검토이다.
 
운명이 스스로를 완수하기 위하여는 인간의 자유 행위를 요구한다
자유는 운명이 갖는 여러 얼굴 중의 하나이기 때문
비극은 우주와 인간의 이미지이다.
모든 비극적 행동, 모든 갈등은 한 가지로 환원 : 자유 ~필연성의 조건
그리스인에게 삶은 자유와 운명이 얽혀 풀리지 않는 매듭으로 엮어내는 무훈
매듭 : 인간 -인간 안에는 인간의 규칙, 신의 규칙 그리고 양자를 다스리는 불문율이 서로 얽혀 있다
 
유한하며, 늙고, 병들고, 터무니없는 열정과 심정의 변화에 따라 움직이는 피조물인 인간은 유일하게 자유로운 존재이며 운명에 의해 선택된 주체이다. 그러한 선택은 인간의 수락을 강요한다. 그래서 그의 범죄는 우주를 진동시키며, 그의 행위는 삶의 과정을 회복시킨다.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것은 인간이다.
 
스페인 연극
서사적 전통으로부터 자양분을 공급
1. 로망스 시와 중세 전설의 보물
2.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삶인 기독교적 서사시
중세 스페인의 정치적 개념 : 만인지상
모든 사람은 군주에게 복종해야 하며 자신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 : 이중의 충성
양자에 대한 충성이 병립될 수 없을 때, 드라마가 생겨난다.
→그리스 영웅들처럼 인간 조건의 신비와 운명에 대해 질문하는 용기가 빠져 있다
스페인 극작가들은 인간의 모든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이미 만들어진 대답을 가지고 있다.
 
스페인 희극
사건의 얽힘이거나 혹은 관습에 대한 비판일 뿐
진정한 희극은 일종의 발레 시
-인위적 유희로서 연극을 빛나게 하는 것 : 속도감 있는 행동, 상황의 얽힘, 우아한 대화
인간의 자유와 신의 은총이라는 중심 주제를 독창적이고 보편적으로 다루는 작품
국민 연극의 개념과 자유 의지에 대한 기독교적 교리의 옹호와 계몽을 융합
철학적이라는 수식어가 진실로 어울리는 유일한 서양 연극
중요한 주제 : 영혼의 운명
문제에 대한 해답 - 스페인 극작가들은 정정을 허용하지 않는 기독교 교리를 이용
스페인의 위대한 작가들에게 자유는 신의 은총이다.
양립 불가능한 이가적 대비극 사이에서 움직인다
신의 섭리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가?
만일 신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인간의 자유가 무슨 의미를 갖는가?
진정한 자유는 우리를 신에게 복속시키면서 실현된다
스페인 영웅들의 자유는 인간의 본성에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반대로, 운명을 긍정하는 것은 인간이 비극적 존재임을 긍정하는 것이다.
인간 : 신과 악마라는 두 사람의 배우가 등장하는 무대
숙명과 자유 의지에 대한 교리 - 신학적 미로, 미로의 입구에서 우리는 기다리는 것은 무이거나 존재
신이 인간을 황폐하게 만들어버렸다. 인생은 꿈이고 인간은 그 꿈에 나타나는 환영일 뿐이다.
 
영국 연극
스페인 연극에서 신과 자유 의지가 차지하는 자리를, 그리스 연극에서는 자유와 운명이 차지하며, 영국 연극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차지한다.
그 본성의 신성한 성질은 오래된 권위에 대항하여 반역을 저지르는 힘으로부터 나온다.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시인 : 이제 막 인간을 발견
열정의 조수는 무대에서 신을 쫓아낸다.
인간의 본성은 이중적인 신성이다.
 
셰익스피어와 웹스터의 영웅들은 근본적으로 홀로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절규는 허공에 흩어지기 때문이다. 그들의 하늘에는 더 이상 신과 운명이 살지 않는다. 신들이 사라져버리자 우주는 일관성을 상실하고 우연이 급습한다.
 
셰익스피어의 세계에서는 우연이 필연을 대신한다. 동시에 결백과 죄는 무가치한 말로 변한다.
엘리자베스 1세 시대 연극의 인물들은 영웅이 아니다. 그들 모두에게는 유치함이 존재한다. 유치하고 야만적인. 잔인하건 부드럽건, 순결하건 부정하건, 용감하건 비겁하건 간에, 그들은 한 사발의 피와 한 줌의 해골이며, 신들린 본성의 갈망을 순간적으로 달래야하는 처지에 처한 신경질적인 존재들이다. 기운이 잦아진 호랑이(영웅)은 연극에서 퇴장하고, 무대 위에는 피투성이의 인간들만 남았다.
 
셰익스피어의 세계에서 우리는 혼돈의 복귀를 목격한다. 사물과 존재 사이의 경계는 사라지고, 범죄가 덕이 될 수 있으며, 결백은 죄가 될 수 있다. 적법성의 상실은 세계를 동요하게 만든다. 현실은 꿈이며 악몽이다. 우리는 또다시 환영 사이를 걷는다.
 
유럽이 영국의 시인들에게 전해준 철학은 총괄적인 교리로서의 철학이 아니라,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는 방법으로서의 철학이었다
유동적인 것, 이본, 정정,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해결책을 받아들인 것
 
프랑스 연극
프랑스 연극은 그리스 비극을 미학적 모델로 선택
라신의 인간
- 일종의 정형외과 수술을 받은 모습
- 인간을 더 순수하고 추상적인 모습으로 바꾸어서 그를 통해 우리 자신을 인식하게 해주었다.
- 자신의 인성으로부터 벗어나서 상위와 하위의 세계들과 관계를 맺는 인간의 신비로운 차원도 제거해버렸다.
라신의 연극 :성격과 상황의 연극
라신의 등장 인물들은, 우주와 신성의 개념이 사라져버리고 구체적인 개별성조차 사라져버린 텅 비고 순수한 정확 속에서 움직인다.
라신은 우리에게 인간에 대한 투명한 이미지를 제공하지만, 그 투명함은 애매하고 어두운 영역, 진정한 어둠의 입-그곳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과 합일하는 저 너머로 들어가는 문-을 녹여버린다.
 
독일 연극
괴테의 위대한 파우스트적 신화는 자신의 창조물에 끊임없이 자신을 비쳐보는 서양 정신-모든 것은 거울이다-의 끝없는 독백
괴테는 평생 동안 그러한 주관주의에 대항해 싸웠으며, 그가 보여준 ‘어머니들’에 대한 숭배-고대 신비의 반향-는 총체적 자연의 신성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
괴테 이후의 극작가들은 주관주의를 극단으로 밀고 나간다.
 
셰익스피어도, 라신도, 칼데론도 세계를 의문시하지는 못했다. 낭만주의자들은 세계를 처단하고 그들의 연극은 세계에 대한 고소장이다. 시인과 역사의 관계는 급격하게 변화한다.
 
근대 연극
모든 근대 연극은 세계를 부정하며 거울의 장난으로 세계를 지워버린다.
 
세르반테스는 소설에 대한 소설을 쓰고, 셰익스피어는 연극 속에서 연극에 대한 비판을 행하며, 벨라스케스는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다.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는데, 거기서 그가 보는 것은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자신의 얼굴이다.
 
근대의 영웅들은 그들을 떠받치고 있는 현실만큼이나 모호하다.
 
근대에 출현한 유머는 겉모습을 해체시키고 현실을 비현실로, 비현실을 현실로 만든다.
과거의 시는 프로메테우스 혹은 세히스문도, 안드로마케 혹은 로미오라고 칭하는 영웅들을 신성화했다. 근대 소설은 그 영웅들을 시험대에 올리고 측은한 마음이 생길 만큼 그들을 부정한다.
소설의 모호성
 
 
 
근대
근대 : 인간이라는 가치 위에 세계를 세우고자 했던 것
-근대적 우주를 떠받치는 초석은 인간의 의식
예 1. 맑스
역사란 소외된 인간이 역사의 최종적 단계에서 자기 자신, 즉 자기 의식의 주인이 되는 기나긴 과정
의식이 사회적 실존을 결정
예 2. 근대희 과학 개념
자연은 자극과 반응의 고리이자,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의 그물망
사실의 조각들을 선택해서 토막내고, 단지 관찰에 적합한 조건이 조성되었을 때만 실험
객관적 현실은 의식의 영상(이미지)이며 또한 의식의 가장 완벽한 생산물
 
우주와 자기 자신 앞에서 취하는 근대인의 태도는 과거의 인간들이 취했던 태도와는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코페르니쿠스의 혁명
-인간은 자시의 지상의 거주지를 재구성한다는 조건으로 권좌에서 축출되어 고아로남게 되었다.
-생을 정당화하고 역사에 근거를 제공해왔던 개념들의 소멸
-신성함, 신성 혹은 초월 등으로 알려진 복합적인 믿음의 체계가 붕괴
역사적인 변화, 혁명적인 변화
세계에 대한 하나의 가치 체계가 다른 가치 체계로 대체되는 것
 
모든 혁명은 세속화 작업인 동시에 신성화 작업
혁명은 과거의 이미지들을 파괴하기 때문에 세속화 운동이다. 하지만 이 몰락은 항상 그때까지 세속적인 것으로 치부되어왔던 것의 신성화를 동반한다.
 
근대의 혁명을 특징짓는 차별성은 자신이 서 있는 토대로서의 원리를 신성시 할 수 없다는 점이다.
불경에 뒤이어 새로운 원리의 신성화가 뒤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에, 의식의 진공 상태가 발생했다.
진공 상태 : 재가 정신, 중립성
저기 신들이 죽은 곳에서, 유령들이 탄생한다.
근대의 유령은 추상적이고 무자비하다.
-국가
-기계에 대한 숭배
기술테크닉은 근대인들에게 아무런 문도 열어주지 않는다. 그것은 근대인이 자연과 혹은 다른 인간들과 접촉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오히려 닫아버린다.
 
부르주아지 혁명
인간의 권리 - 사유 재산과 자유 무역
자유 - 재화의 종속물
민중의 통치권과 인간의 평등 - 제국주의적 침략
 
근대의 혁명을 과거의 혁명과 구분짓는 것은 딱히 근대 혁명에서 원천적인 이상이 부패하고 자유의 원칙들이 새로운 억압의 기구로 변질되는 것뿐 아니라, 바로 인간을사회의 기초로 성화할  없다는 불가능성에 기인한다. 이성적 회의.
 
부르주아지가 사회를 통치하는 슬로건은 분명치 않다. 그 동안의 것들은 마치 요술사처럼 손을 재빨리 바꿔온 결과에 불과하다. 군주 체제와 귀족 사회를 몰락시킬 때 사용한 비판을 이제는 자신의 몫을 차지하는 데 사용한다. 그들은 왕위 찬탈자일 뿐이다. 그 어느것에 의해서도 아물지 않는 비밀스런 상처처럼, 근대 사회는 스스로를 부정하면서 건설하고 그리하여 그 건설을 지속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다시 부정하고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원칙을 자신 속에 지니고 있다. 비판은 근대 사회의 양식이며 동시에 독이다.
 
근대 사회의 서사시
시의 역사적 기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가장 시급한 사명은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순간을 원형으로 승화하거나 변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의미에서 시적 언어는 한 민족의 기초가 된다.
부르크하르트 소설이야말로 근대 사회의 서사시
 
소설의 독특한 성격
언어 : 소설은 산문인가?
소설가는 논증하거나 서술하는 게 아니라 한 세계를 재창조한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순간 혹은 일련의 순간들을 되살려서 한 세계를 재창조하는 것
그는 언어의 리듬이 갖는 힘과 이미지의 형상력에 의지
그의 작품 전체 = 하나의 이미지
시와 역사에, 이미지와 지라학에, 신화에 심리학에 동시에 이웃하고 있다
리듬이면서 의식의 실험이며, 비판이면서 이미지
→이중적
산문과 시, 개념과 신화 사이의 끊임없는 왕복운동에서 기인
→근원적인 비순수성
 
돈 키호테의 이성과 광기, 라스티냐크의 허영과 사랑, 베니그나의 탐욕과 관대는 모두 하나의 천을 짜고 있다.
 
근대 소설의 많은 인물들은 염세주의자이고, 다른 인물들은 차라리 반항아이고 반사회적 인간이지만, 그들 모두는 자신의 세계와 공개적이거나 비밀리에 투쟁하고 있다. 그 소설들은, 자기 자신과 투쟁하고 잇는 사회의 서사시이다.
 
소설 속의 영웅이 자신에 대한 품는 의심은 그대로 그를 떠받치고 있는 사회에 대한 의심으로 연결된다.
소설의 사회주의는 현실의 비판이며, 현실은 돈 키호테의 꿈과 환상처럼 비현실적인 것으로 의심해보기도 한다.
영웅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그 인물들처럼 그렇게 모호하기만 하다.
 
유머 덕분에, 세르반테스는 근대 사회의 호메로스가 되었다. 헤겔은 아이러니가 (비판적)주관성을 객관성의 체계에 삽입시킬 때 발생한다고 보았다.
세르반테스의 가장 엉뚱한 인물조차도 자신의 상황에 대한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다.
의식 →비판
비판 의식 앞에서 현실은, 비록 모든 것을 양도하지는 않지만, 주저한다.
유머는 그것이 가서 닿는 것을 모호하게 만든다. 그것은 현실과 그 가치에 대한 암묵적인 판단이며, 그것들이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방황하게 만드는 일종의 임시적인 휴지이다.
 
아이러니와 유머는 근대 정신의 위대한 발명품이다. 그것은 비극적 갈등에 견줄 만한 것이다.
아이러니적 결합은 실질적인 결말을 내리는 것을 방해하는 잠정적인 통합니다. 소설의 갈등은 비극의 예술을 탄생시킬 수 없다.
 
비판 위에 건설된 사회의 서사시인 소설은 그 사회 자체에 대한 암묵적인 심판이다.
현실이 현실에 대해 던진 질문이다.
문제 제기 자체에서 모든 해답을 미리 배제했기 때문에 가능한 답변을 기대할 수 없는 그 질문은 모든 사회 질서를 부식시키는 염산이다.
 
소설은 자기 자신에게 거슬러 돌아와 자신을 삼중으로 부정하는 서사시이다.
1. 산문에 의해 부식된 시적 언어
2. 유머와 심리 분석으로 영웅과 세계를 모호하게 창조
3. 소설의 언어가 성화하고 고양하려는 것이 분석과 비난의 대상으로 변하는 노래
 
프랑스 - 소설의 요람
불어는 현존하는 언어 중 가장 분석적인 언어, 근대 정신은 그 어떤 나라보다도 프랑스에서 최고의 적확성과 명료성의 꽃을 피웠다.
그 어떤 나라와 언어도 라클로에서 프루스트에 이르는 위대한 소설가들이 끊임없이 계승해온 프랑스 소설의 역사에 견줄 수는 없다. 프랑스 사회는 그 일련의 창작물들을 통해 일면 스스로를 성화하고 다른 한편으론 스스로를 검증했다. 스스로를 노래하면서, 스스로를 심판하고 형벌을 내렸다.
 
근대 사회의 위기 : 우리 세계를 떠받치는 원칙의 위기
소설 속에서 시로 돌아가려는 시도로 나타남
세르반테스에 의해 시작된 운동은 지금은 역방향으로 조이스, 프루스트, 카프카에게서 반복된다.
20세기 초반부터 소설은 다시 시로 돌아가고자 한다.
프루스트 : 느린 리듬, 마치 시적 영감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기억에 의해 유발된 이미지
조이스 : 논설적 사상의 맥락을 끊기 위하여 단어로 하여금 본래의 독자성을 회복
리듬의 밀물이 넘침
영웅적 성향의 재정복이 시도
 
근대 사회의 탄생과 더불어 내재되어왔던 산문과 시 사이의, 성화와 분석 사이의, 노래와 비판 사이의 투쟁은 시의 승리로 귀결지어져가고 있다.
 
이 시대의 연극과 소설은 한 경향의 탄생이 아니라 그 장례식을 노래한다. 즉, 이 시대의 종말과, 이 시대를 낳은 형식들의 종말을 노래한다.
시- 인간 조건의 계시. 구체적인 역사적 경험의 성화
소설과 근대 연극 - 그 시대를 부정할 때조차도, 그 시대에 의지한다.
과거의 신성들은 죽고 객관적 현실은 의식에 의해 부정되었을 때, 시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제외하고는 노래를 불러줄 아무런 대상도 가질 수 없었다.
시는 이제 말을 통해 육화되는 게 아니라, 삶 자체 속에서 육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적 언어는 역사를 성화하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이 역사가 되고 삶이 될 것이다.
육화되지 못하는 언어
 
 
 
혁명과 종교 사이의 시
소설, 연극 : 비판적 정신과 시적 정신 사이에 상호 개입을 가능하게 하는 형태
서정시 : 분석으로 환원되지 않는 소비적이고 낭비적인 열정과 경험들.
사랑에 대한 찬양 - 선동을 유발, 근대적 세계에 대한 도전
사랑이란 분석할 수도, 분류할 수도 없는 예외적인 것
 
‘저주받은 시인들’
동화되지 않는 것들을 추방하는 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물
부르주아지는 의사, 변호사, 성직자, 시인 그리고 과학자를 보수를 받는 봉사자로 변화시켰다.
부르주아지는 시인들에게 금고 문을 닫아버렸다. 시인은 하인이나 어릿광대가 아니라, 천민 계급이고 허깨비이며 부랑자이다.
 
시의 글을 자기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인간 자신의 계시
근대시 = 시에 대한 이론
콜리지 : 시편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혹은 시편이 진실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자문하기 위하여 시적 창조에 몰입한 맨 처음 시인
상상력을 인간의 가장 높은 재능으로 여김
상상력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 “인간 의식의 가장 본래적 기능
상상력은 존재의 형상이거나, 진실로 지금-여기의 유일한 지식이며, 다른 모든 과학은 상상력의 상징적 표현일 때만 실제적이다.
원래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었던 상상력과 이성은 상징적 표상, 즉 신화를 통하지 않고는 표현될 수 없는 자명함 속에서 하나가 된다.
상상력
- 원초적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기능
- 모든 지각의 필수 조건
- 신화와 상징을 통하여 최상의 지식을 표현하는 기능
 
시와 철학은 신화로 완결된다.
종교는 인류의 시이다.
시가 인간 속에서 육화되어 나타나는 제의와 역사로 변화된 형태가 종교
시 - 스스로를 비판 정신의 경쟁적 원리라고, 또한 과거의 신성한 원리를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원리라고 선언
-종교의 진리가, 억압적인 강요와 가면적 은폐가 아니라, 부차적이고 역사적인 표현으로 드러나서 숨쉴 수 있는 태초의 원리
 
노발리스 “종교는 실천적 시 바로 그것이다.”
원초적 언어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시인의 임무는 교회와 국가라는 도그마가 성립되기 이전의 원초적 종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과 같다.
윌리엄 블레이크 “시 정신이 인간의 진정한 본질이다. 모든 민족의 종교는 시 정신을 받아들이는 방법의 차이에서 유래한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성서는 본래 시 정신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성은 종교보다도 더 어두운 감옥을 만들었다.
진리는 이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적 인식, 즉 상상력으로부터 나온다.
본래적인 인식 기관은 감각도 아니고 추론도 아니다. 양자는 한계가 있으며, 인간의 최종적 본질인 끝없는 욕망에 대립된다. “그 무엇도 인간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인간은 상상력이며 욕망이다.
상상력의 작용으로, 인간은 무한한 욕망을 채우며, 그 자신이 무한한 존재로 변한다.
자신의 욕망의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는 것
인간의 진정한 역사는 이미지의 역사, 신화
 
독일의 낭만주의
낭만주의 시는 진보적 보편 철학인데 그것의 목표는 모든 종류의 시를 집합시켜서 시와 철학 그리고 수사학 사이에 의사 소통을 확립하는 데 있다. 또한 그것은 시와 산문, 영감과 비판, 자연적인 시와 인위적인 시를 혼융시켜야 하고, 시를 생기 있게 하고 사회화해야 하며, 삶과 사회를 시적으로 만들고, 정신을 시화하며, 예술적 형태들을 본래의 다양한 본질로 충만하게 가득 채우고 아이러니를 통하여 전체에 생명을 불어넣어야 한다.
 
근대시는 탄생에서부터 흐름에 거스르는 독자적인 과업이었다. 비판과 조약을 체결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교회에 의지할 수도 없었다.
 
시는 가장 혁명적인 혁명이면서 동시에 가장 보수적인 계시인데, 그 이유는 원초적인 말을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시와 종교가 갈라지게 된 근원은 시적 정신이 합리적 정신과 출동한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지만, 그 결과는 유사하다. 부르주아지와 마찬가지로 교회도 시인들을 추방했다.
 
혁명과 종교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렸던 지난 세기의 시적 운동이 보여주는 들쭉날쭉하고 은밀한 흐름의 일화
-매번 찬동은 단절로 끝났으며, 매번의 개종은 추문으로 끝났다.
 
근대시는 역사의 정면에서가 아니라 지하나 후면에서 은밀한 신비와 비밀스러운 제의로서 육화되었다.
 
근대 시인
역사의 하층부에 살도록 운명지어진 근대 시인은 고독하다. 어떤 법도 근대 시인에게 자신의 고향으로 떠나도록 강요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는 추방된 자이다.
근대 개인이 사회 속에서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은 그가 사실상 ‘가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시는 상업적 재화의 교환 체계게 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적인 가치가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가 아니라면, 현대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진정한 실존을 갖지 못한다.
시의 기화 현상
시인이 말하는 것은 실제가 아니다(상품으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에 실제적이 아니다)
시적 창조는 직업이나 노동 혹은 일정한 생산 활동이 아니다 (보상을 받을 수 없다)
근대시가 ‘실제 사물들’에 관해서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것은, 태초부터 시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현실의 한 부분을 말소시켜버리기로 근대 사회에서 사전에 결정되어졌기 때문이다.
브르통 “환상적인 것의 가장 놀라운 점은 그것이 환상적이 아니라 실제적이라는 사실이다.
 
근대 예술의 모든 과업은 그 잃어버린 절반과의 대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대중적 시의 유행, 꿈과 섬망 상태에 의지하는 일, 우주의 열쇠로 아날로지를 채택하는 일, 원초적 언어를 회복하려는 시도, 신화로의 복귀, 밤으로의 하강, 원시 예술에 대한 애정 ~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편력
 
자기 자신과 인간으로부터 추방당한 시인은 고독의 극단까지 가서야 형벌이 멈추리라는 것을 예언한다.
아무것도 없고,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최후의 변방에서만 ‘타자’가 출현하며 ‘전인간’이 출현하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에 던져져, 모든 의지할 것을 잃어버린 채 빈손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고독한 인간이 바로 원초적 인간이며, 실제적 인간이고, 잃어버린 반쪽이다. 원초적 인간은 온전한 인간이다.
 
시를 공동의 자산으로 만들어내려는 가장 절망적이고 총체적인 시도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에서 발생 →초현실주의
시화를 위한 첫걸음인 객관적 현실의 파괴는 객체에 주체를 삽입하는 것으로 달성
낭만주의의 ‘아이러니’와 초현실주의의 ‘유머’의 결합
중심 : 사랑과 여성
 
낭만주의 vs 초현실주의
낭만주의
:독일철학
:역사를 부정했고, 꿈으로 도피
:과거의 봉건주의와 과격 혁명 세력의 자코뱅주의 정신의 공통된 무능을 고발
 
 
초현실주의
:아폴리네르의 시, 현대 예술, 프로이트, 맑스의 분위기
:역사 의식 명확
:당이 언어를 행동의 필연성으로 종속시킬 경우에조차도 당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극단적 허무주의와 관료주
.
의적 볼셰비키즘을 고발
 
~ 양자는 기하학적 정신이 보여주는 정신적 불모에 대항한 항의이며, 당대에서 혁명을 겪었지만 그 혁명이 결국 무단적이거나 관료주의적인 독재로 변화되는 것을목격하고 말았으며, 마지막으로 둘 다 이성과 종교를 초월하여 새로운 신성을 성립시키려는 시도였다.
 
영감 : 무의식의 표명
시편을 집단적으로 창조하려는 시도 - 시적 창조의 사회화를 암시
영감은 공동의 자산이다. 이미지가 흘러나오기 위해서는 눈을 감는 것으로 충분하다
시적 천재성에서 모든 사람은 엇비슷하다
우리 모두는 시를 쓸 수 있다. 더 나아가, 우리 모두는 시가 될 수 있다. 시 속에 산다는 것은 시 작품이 되는 것이며,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영감의 사회화는 시 작품을 삶 속에 용해되어 사라지게 한다. 초현실주의가 의도하는 것은 시 작품의 창조가 아니라, 인간을 살아 있는 시작품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시인과 시, 시 작품과 독자, 너와 나라는 이율 배반을 해소시키기 위한 수단
: 자동 기술법
나는 너이고, 이것은 저것이다. 대립물의 통일은 인식이 멈추는 상태인데, 왜냐하면 인식하는 사람과 인식되는 대상이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러한 사실을 드러내 보여주는 분수이다.
어려움 1. 현대 세계에서 유효한 모든 개념들과 반대 방향으로 실현되는 행위-노력의 가치를 공격
2. 시적 자동 기술법이 요구하는 수동성은 과격한 결단을 암시- 개입하지 않으려는의지
→언제나 사회성을 띨 수 밖에 없는 언어와 개체적 인간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
사물, 인간 그리고 언어 사이에 완전한 일치의 상태를 이루는 방법
그러한 상태에 도달한다면, 사물과 언어, 언어와 인간 사이의 거리가 지워질 것. 언어를 발생시키는 것은 바로 그 거리이다. 자동 기술법이 희망하는 상태는 언어가 아니라 침묵
 
역사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느낌과 이미지들-특히 자유, 사랑, 시가 결합한 백열하는 삼각형-은 대부분 초현실주의의 창조이며 또한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은 현대 시인들의 창조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초현실주의는 유래 없는 정신적 위기와 전쟁을 겪은 뒤, 20세기 중반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사조
그것이 하나의 개념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지향점이기 때문이다.
 
초현실주의와 그것의 이념들이 미래에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에 상관없이, 자명한 것은 현대시의 지배적인 특징이 여전히 고독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시는 역사 속에 육화되지 않았고, 시적 경험은 예외적 상태이며, 시인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길은 시들, 그림들 그리고 소설들을 창조해내는 오래된 길뿐이다.
미래의 시가 진정으로 시가 되고자 한다면, 위대한 낭만주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할 것이다.
[출처] 옥타비오 빠스 _ 활과 리라 : 3부 시의 역사 (요약)|작성자 옥토끼
 
에필로그
 
회전하는 기호들
 
 
 
이 책의 주제는 시에 대한 사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질문이 시에 대한 성찰의 시작과 끝에서 불가피하고도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하는 것을 가리키는 지표가 아닐까?
 
시는 사회적 삶을 시화하려 하고, 사회는 시어를 사회화하려 한다.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후엔, 우리의 위대한 시인들은 시의 부정을 통해 최상급의 시를 창조해왔다. 그들의 시는 시적 경험에 대한 비판이며, 언어와 의미에 대한 비판이며, 시 자체에 대한 비판이다. 시적 언어는 언어의 부정을 먹고 자란다. 이렇게 원은 닫히고 만다.
 
시적 전통이 맑시즘 못지않게 비판적이고 창조적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것은 구체적인 현실과 일반적인 움직임에 근거하여 사회를 아우르며 변화시키는 지식이다. 그것은 능동적 이성이다.
 
새로운 시인들이 직면할 상황들의 몇몇 모습
- 세계의 이미지를 상실하는 것
- 기술이라는 능동적 기호로 이루어진 보편적 어휘의 등장
- 의미의 위기
 
오늘날 우리는 세계 속에 외롭게 있지 않다. 왜냐하면, 세계가 없기 때문이다.
시적 상상력은 현존을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파편과 분산 속에서 세계의 이미지를 발견하는 것, 하나 속에서 타자를 인지하는 것은 언어에게 은유의 능력을 되돌려주는 일이 될 것이다. 즉, 언어로 하여금 타인들에게 현존을 부여하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시란 타인들을 찾는 것이며, 타자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기술은 자기 자신을 상상력과 부딪치고, 세계의 이미지의 부재에 직면해서 상상력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형상을 갖도록 한다. 그 형상이 시이다. 기술의 기호들처럼 미정형의 것 위에 세워져서, 그들처럼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의미를 찾아 헤매는 시는 급박함으로 가득 찬 빈 공간이다. 그것은 아직 현존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의미를 찾아 편력하고, 그러한 편력 이외에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기호의 다발이다.
 
우리들의 시대는, 상상할 수 있거나 예상할 수 있는 미래로 나아가는 역사라는 것이 종말을 맞이한 시대이다. 더욱더 좁아지는 현재 속에 갇혀 우리는 자문한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실제로는,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가?’ 하고 물어보아야 옳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이 물음에 확실히 대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일차 세계대전 이후의 역사의 가속화와 지구를 동질적인 공간으로 만들어놓은 기술의 보편화는, 마침내 어느 곳이든 똑같은 장소에서 광란하는 부동성으로 드러나고 있다. 시는 여기- 지금의 탐색이다.
“우리는 신을 위해서는 너무 늦게 도착했고, 존재를 위해서는 너무 일찍 도착했다.”
“우리의 최초의 시는 존재이다.”
시는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위로해주지 않고, 오히려 삶과 죽음이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전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구체적인 삶을 회복한다는 것은 삶과 죽음이라는 짝을 재결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타자 속에서 나를, 나 속에서 너를 재정복하며, 그렇게 해서 분산되어 있는 파편들 속에서 세계의 모습을 다시 발견하는 것을 뜻한다.
 
『주사위 놀이는 결코 우연을 배제하지 못하리』 ‘관념론적’ 시에 대한 처단
『지옥에서 보낸 한 철』‘유물론적’ 시에 대한 처단
 
창조의 중심을 이동시켜서 언어의 본래적 기능을 언어에게 되돌려주는 것
인간은 말에 봉사하게 되고, 시인은 언어의 봉사자가 되었다.
우리들의 세기는, 의심해보지 않았던 길을 통해, 르네상스 이후 부정되었거나 혹은 최소한 무시당해왔던 힘인 옛 영감으로 돌아가는 회귀의 시대이다.
 
조이스.
아담(모든 인간), 영어(모든 언어) 그리고 책 자체와 작가는 ‘모든 역사의 시작과 끝인 말’이라는 순환적인 담론을 통해 흐르는 단지 하나의 목소리이다.
우리 시대의 모든 창조적 행위가 채택하는 비판적 경향을 표현
관심사 1. 학문적인 차원에서 창작과정은 무엇에 근거하는지, 시의 구절, 리듬, 이미지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는지 조사해보는 것
2. 시적 차원. 개인의 영역으로만 여겨졌던 곳까지 창작의 마당이 넓어졌다
 
시는 음악도 회화도 아니다. 시의 음악은 언어의 음악이다. 시의 이미지들은 선이나 색채가 아니라, 말이 우리에게 일깨우는 영상들이다.
공간도 글씨로 변한다. 여백은 기호들이 말하지 않는 무엇인가를 말한다. 글씨는 하나의 전체를 투사하지만, 어떤 결핍에 의지한다. 그것은 음악도 침묵도 아니지만, 양자 모두에게서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모든 예술에 참여하지만 그러한 모든 예술적 동반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때만 생명을 갖는 것이 시의 이중성이다.
 
변화하는 공간 위의 글, 공중이나 백지 위의 단어 그리고 축제인 시는 하나의 의미를 찾는 기호들의 총체, 자기 자신을 맴돌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양의 주위를 도는 상형 문자이다. 의미한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세상을 비추지 않는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현실은 있지만 이미지는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어느 부재 주위를 돌고 있고 그 부재 앞에서 우리의 모든 의미는 무효화된다. 순환의 궤도에서 시는 깜박거리는 빛을 발한다. 그 깜박임이 뜻하는 바는 최종적인 의미가 아니라 너와 나의 순간적인 결합니다. 시는 너를 탐색하는 것이다.
 
오늘 시인은 귀를 쫑긋 세우고, 침묵의 목소리, 즉 자신을 육화할 단어를 찾는 죽얼거림을 감지한다. 시인은 시간이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인다. 비록 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종이 위에 몇 개의 단어들이 모이거나 흩어진다. 그 형상은 하나의 예시, 금방이라도 드러나고자 하는 현현의 급박함이다.
 
리라는 인간을 성화해서 우주 속에 그의 자리를 마련해준다. 홀은 인간을 그 자신 너머로 쏘아 보낸다. 모든 시적 창조는 역사성을 띠지만, 반면 모든 시는 (역사의) 직선성을 부정하고 영속하는 왕국을 세우고자 하는 욕구이다.
 
시는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여기와 저기의, 너와 나와 그와 우리들의 순간적인 화해이다. 모든 것이 현존한다. 시는 현존이 될 것이다

[출처] 옥타비오 빠스 _ 활과 리라 : 에필로그 (요약)|작성자 옥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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