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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옥타비오파스 시론

영감靈感편 /옥타비오파스
2018년 08월 25일 15시 06분  조회:1461  추천:0  작성자: 강려

영감靈感편 /옥타비오파스

 

 

  우리의 조건을 드러내는 것은, 또한, 우리 자신을 창조하는 일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드러냄(啓示)은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데, 어떤 경우엔 언어적인 형태를 띄지 못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서조차도, 현시하는 주체의 창조, 즉 인간의 창조는 수반된다. 

 

우리들의 원초적인 존재 조건은, 본질적으로, 항상 스스로를 만들어가고 있는 무엇이다. 어쨌든, 계시가 시적 경험이라는 특수한 형태를 취할 때, 행위와 표현은 불가분의 것이 된다. 시는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말하여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나중에 낱말들로 옮겨지는 경험이 아니라, 낱말들 자체가 핵을 이루는 경험이다. 

 

그 경험은 이름 불려지기 전까지는 스스로의 실존을 결여하고 있는 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따라서 경험을 분석하는 것은 그 경험의 표현을 분석하는 것을 포함한다. 둘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앞장에선 시적 계시의 의미를 규명했고 분석했다. 이젠, 그것이 어떻게 실제로 일어나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시는 어떻게 씌어지는가? 207

 

 

  우리들의 물음이 제일 먼저 부딪히는 어려움은 시 창작의 증언들이 보여주는 모호함이다. 시인들의 말을 믿는다면, 표현의 순간에는 언제나 예기치 않은 결정적인 도움이 있다고 한다. 이 도움은 우리 의지의 결과일 수도 있고, 혹은 그것과 상관없을 수도 있지만, 언제나 갑작스러운 침입의 형태를 취한다. 

 

시인의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것이 아니기도 하다. 내 사고의 흐름에 뛰어들어, 나로 하여금 원하지도 않았던 것들을 말하도록 하는 그는 대체 누구이며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이들은 그를 악마, 뮤즈, 영靈(espiritu), 정령精靈(jenio)으로 부르고, 다른 사람들은 그를 노동, 우연, 무의식, 이성으로 부른다. 어떤 이들은 시는 외부로부터 온다고 믿으며, 어떤 이들은 시인 자신에게서 온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들 모두 예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예외는 번번이 일어나서, 단순히 예외라고만 부를 수는 없다.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창작에 관한 이런 상반된 개념들을 이상적으로 반영하는 두 타입의 시인을 가정해보자. 

 

 

  책상 위에 엎드려, 골똘하지만 텅 빈 듯한 시선으로, 영감을-믿지-않는-시인은 미리 그려놓은 계획에 따라 시의 첫 연을 이미 썼다. 아무것도 우연에 맡기지 않았다. 각각의 각운과 이미지를, 자명한 원리에 따른 엄격한 필연성 그리고 기하학적 놀이 같은 즐거움과 가벼움을 준수하며 썼다. 

 

하지만, 11음절의 마지막 행을 끝내기 위한 한 단어가 필요했다. 시인은 생각나지 않는 각운을 찾아 사전을 뒤적인다. 하지만, 찾지 못한다. 담배를 피워 물고, 일어섰다 앉았다, 다시 일어선다. 무無, 공허와 불모. 그러다 갑자기 각운이 생각난다. 

 

시를,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어쩌면 초기의 계획에 정반대의 방향으로 완성시키는 것은 예상 못했던 다른 것―항상 다른 무엇―이다. 이 이상한 도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시인이 착상을 자극해서 그것이 순간적으로 나타나게 했다고는 말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무에서는 무에서만 나온다. 그 단어는 어디에 있던 것일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적 발생들은 어떻게 우리에게 일어나는가? 208

 

 

   반대의 경우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속삭임의 무진장한 흐름'에 내맡긴 채, 외부 세계로 향한 눈을 지긋이 감고 시인은 거침없이 글을 써내려 간다. 처음엔 문장들이 앞서거니뒤서거니 하지만, 점차 펜을 쥔 손의 리듬은 사고의 흐름과 일치한다. 이제 사고하기와 글쓰기 사이의 차이가 없어지고, 둘은 같은 리듬을 탄다. 

 

시인은 그의 행위에 대한 의식마저도 잊어버렸다. 무엇을 쓰고 있는지 혹은 지금 자신이 쓰고 있는지 조차 모른다. 돌연히 길을 가로막는 단어 하나, 혹은 단어의 이면인 침묵이 나타나 흐름을 중단시킬 때까지 모든 것은 순탄하다. 시인은 줄기차게 장애물을 피하려고, 그것을 돌아 어떻게 해서든지 비껴 나아가려고 시도한다. 다 소용없다. 길들은 항상 동일한 벽 앞에 이른다. 샘은 흐르기를 멈춘다. 

 

시인은 방금 썼던 글을 다시 읽어보고, 뒤얽혀 있는 듯한 그 글이 비밀스런 일관성을 갖추고 있는 것을 알고는 놀라워한다. 시는 부인할 수 없는 음조와 리듬과 체온의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전체다. 혹은 여전히 살아 있는 부분들은 아직도 빛을 내며, 전체의 일부가 된다. 

 

하지만 시의 통일성은 물리적이거나 물리적인 의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음조, 체온, 리듬 그리고 이미지들이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은 시가 하나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품은, 모든 작품은, 원재료를 소기의 계획에 종속시키고 변형시키려는 의지의 산물이다. 

 

그 글을 쓰는 데에 이성적 의식이 거의 참여하지 못했던 텍스트엔 반복되는 단어들, 일정한 경향에 의해 계속 다른 것들을 생산해내는 이미지들, 잡을 수 없는 단어를 찾아 팔을 길게 뻗친 듯이 보이는 문장들이 있다. 시는 흐르고, 달린다. 이 흐름이 바로 시에게 통일성을 부여한다. 210

 

 

그런데, 흐름이란 단순한 움직임뿐 아니라 또한 무엇을 향해 간다는 것도 의미한다. 단어들을 존재하게 하고, 또한 앞으로 향하게 하는 긴장은 그것들이 무엇인가를 만나기 위해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단어들은 자신의 행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행진을 멈추게 할 단어를 찾는다. 시는 이 마지막 단어에 의해, 그리고 그 단어 앞에서야 환하게 밝아진다. 

 

시편은 숨어 있는, 어쩌면 말해질 수 없는 그 단어를 향한 겨냥이다. 결국, 시의 통일성은, 다른 모든 작품들의 통일성과 마찬가지로, 그 방향과 의미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갈 지之자 모양의 시편의 흐름에 마지막 순간 의미를 부여하는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사색적인 시인의 경우를 따라가면, 신비한 외부의 도움, 즉 예기치 못한 타인의 목소리의 출현과 만나게 된다. 낭만주의 시인의 경우를 따라가면, 속삭임을 딱 들어맞는 말로 바꾸고, 희미한 예감을 현실화하는―앞의 경우와 같이 설명할 수 없는―어떤 의지의 출현과 마주치게 된다. 

 

두 경우 모두, 좀 부정확하지만 임시 방편으로 '타자의 의지 침투'라고 부를 수 있는 그 무엇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것은 의지라고 불리는 현상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어쩌면 그것은 의지보다 훨씬 오래되고, 오히려 의지가 기대고 있는 그 무엇이다. 

 

사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의지란 계획을 짜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일정한 규범에 우리의 행위를 종속시키는 능력을 말한다. 그런데, 이 글에서 우리가 관심을 두고 말하는 의지란 사색, 계산, 혹은 예상 등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지적 작용보다 우선하며, 창조의 바로 그 순간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 의지의 진정한 이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정말 우리 것인가? 210 

 

 

 

   시를 쓰는 행위는 상반되는 힘들의 얽힘, 즉 나의 목소리와 타자의 목소리가 합쳐져 하나가 되는 것으로 주어진다. 경계는 희미해진다. 우리의 언표 행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우리가 완전히 제어할 수 없는 무엇으로 바뀐다. 그리고 '나'는, '너'나 '그'가 아닌, 무어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어떤 다른 대명사에게 자리를 양보하게 된다. 이 모호성에 영감의 신비가 자리한다. 

 

신비인가, 난제인가? 둘 다이다. 영감이 고대인들에게 하나의 신비였다면, 우리들에겐 세계라는 개념과 우리의 심리적 개념 자체에 모순되는 난제이다. 이렇게 영감의 신비를 심리적인 문제로 왜곡하는 것은, 시적 창조가 무엇에 기초하는지를 우리가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처음부터 외부 세계의 실존을 의문시했던 인도 사상과는 대조적으로, 서구 사상은 오랫동안 외부 세계의 존재를 안심하고 믿어버려 우리 눈이 본 것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았다. '타자성'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개입하는 시적 행위는 언제나 어둡고 설명되지 않는 무엇으로 치부되어, 세계라는 개념을 위협하는 문제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하고 말았다. 

 

반대로, 그것은 자연스럽게 세계 속에 포함되고, 세계를 부정하기보다는 긍정하는 현상으로 여겨졌다. 나아가 그것은 세계의 객관성, 사실성 그리고 역동성의 증거로까지 인정되었다. 

 

플라톤은 시인을 신들린 자로 보았다. 시인의 몽환夢幻과 열정은 악마적 강신降神의 표지였다. 소크라테스는 『이온Ion』에서 말하길, "시인은 열정의 포로가 되어 자신 밖으로 나오지 않고는 창조를 말할 수 없는 가볍고, 신성하며, 날개 달린 존재이다…… 시인의 말은 그의 것이 아니라, 신의 입이 그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준 것이다"고 했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적 창조를 자연의 모방으로 보았다. 211

 

 

아리스토텔레스에겐 자연이란 혼으로 가득한 것, 하나의 유기체 그리고 살아 있는 모델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면, 모방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해설에서 가르시아 바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개념은 다소간 신비적 물활론物活論에 의해 영靈이 깃들인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적절히 지적하였다. 

 

따라서 시적 '발생'은 무에서 나온 것도 아니요, 시인이 자신의 내부에서 끄집어낸 것도 아니다. 시 자체가 자신의 주인이며 혼이 깃들인 자연과 시인의 영혼이 만나서 얻어지는 열매이다. 

 

 

  그리스의 물활론은 후에 기독교적인 초월로 변한다. 이러한 연계성으로 인해 외부 세계는 존속한다. 혼령의 터전이건 신에 의해 창조된 자연이건 간에,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간에 외부 세계는 우리 앞에 필요한 지평으로서 존재한다. 

 

천사, 돌, 동물, 악마, 식물 그리고 '타자'까지도 자기 스스로의 삶을 가지며, 때때로 우리를 포로로 잡아 우리 입을 통해 말한다. 외부 세계가 의심받지 않고 개념과 원형을 산출해내는 사회에서, 그것이 영감과 동일시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른 목소리'와 '낯선 의지'는 '타자' 즉 신이거나 귀신과 정령이 깃들인 자연이다. 영감은 신성한 힘의 현현이기 때문에 계시이다. 영감이 인간의 자리에서 대신 말을 한다. 신성하거나 세속적이거나 간에, 서사시이거나 서정시이거나 간에, 시는 외부에서 시인에게 내려지는 은총이다. 

 

시적 창조는 신들이 인간의 입을 통해 말하는 것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신비이다. 하지만 그 신비는 문제를 야기하지도 않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믿음을 거스르지도 않는다. 초자연적인 존재가 인간 속에서 육화되어 그를 통해 말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212

 

 

  데카르트로부터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근대적 주관주의는 외부 세계의 존재를 단지 의식에 근거해서만 인정하였다. 초월적이 되기를 바라는 의식이 매번 부딪히는 것은 유아론이었다. 의식은 자신에게서 벗어나 세계를 세울 수 없었다. 그 사이 자연은 우리에게 대상과 관계의 얽힘으로 변하고 말았다. 

 

신은 우리의 생생한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고, 대상, 본체, 인과의 개념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과학의 영역에서와 같이, 관념론이 외부 현실을 파괴하지 않은 곳에서, 외부 현실은 하나의 대상, 하나의 '경험의 장'으로 변화되고 그로 인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오래된 속성들을 빼앗기고 말았다. 

 

 

  자연은 살아 있고 혼이 깃들인 생명체, 즉 은밀하고 의도를 갖는 하나의 힘이기를 멈추었다. 하지만 세계에 대한 오래된 개념이 사라졌다고 해서, 영감의 개념조차 사라진 것은 아니다. '타자의 목소리'와 '낯선 의지'는 아직도 우리에게 도전해온다. 이렇게 영감에 대한 우리의 개념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개념 사이에는 하나의 벽이 세워진다. 

 

영감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문젯거리가 되었다. 그것의 존재는 우리의 가장 뿌리 깊은 지적 믿음을 부정한다. 따라서 19세기 내내, 신성한 그 옛 힘을 외부 현실에게 되돌려주고자 하는 골칫거리 운동들을 없애버리거나 아니면 완화시키려는 시도가 증가되어왔다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한 방법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만일 영감이 우리의 세계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해결책이다. 16세기부터는 영감을 하나의 수사학이나 문학적 비유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그 후 시인의 입을 통해 말하는 주체는 시인의 의식뿐이었다. 당시의 대표적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듣지도 않았고, 부르는 대로 받아 적지도 않았다. 그는 단지 자의식에 충만한 깨어 있는 사람일 뿐이었다. 213

 

 

시적 창조를 진정으로 설명할 수 있는 대답을 구하기가 불가능해진 사실은, 슬그머니 도덕적이고 미학적인 차원으로 변화되었다. 한동안 영감에 대한 믿음이 가져온 탈선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그것의 진정한 이름은 게으른, 부주의, 즉흥주의, 편의주의였다. 

 

몽환과 영감은 광기와 질병의 동의어로 변했다. 시적 행위는 노동과 훈련이 되고, 글쓰기는 '흐름에 거슬러 싸우기'가 되었다. 이런 사고 방식 속에서, 여러 가지 부르조아지 도덕 개념들이 미학의 영역에 과도하게 흘러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초현실주의의 가장 큰 공헌 중의 하나는 이 장사꾼 미학의 도덕적 뿌리를 고발한 것이다. 사실 영감은 상과 벌이라는 개념을 숨기고 있는 편의성과 난해함, 게으름과 노동, 부주의와 테크닉 등의 천한 개념들과는 관계가 없다. 그것들은 맑스가 지적한 대로, 부르조아지 사회가 오래된 인간 관계를 대체한 '엄격한 계약 관계'의 산물인 것이다. 한 작품의 가치는 그것에 투자한 작가의 노동의 양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다른 한편, 시적 창조는 우리의 일상적 관념을 완전히 변화시킬 것을 요구한다. 적절하고 자연스러운 영감은 심연에서 싹튼다. 시인의 언표는 침묵과 불모, 가뭄으로 시작된다. 그것은 충만함과 일치에 도달하기 전의 결핍이고 목마름이다. 그 뒤, 결핍은 더욱더 커지는데, 왜냐하면 시는 시인의 손에서 벗어나 더 이상 시인의 소유가 아닌 것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시의 앞뒤 좌우에는 아무것도, 아무도 없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아무도 없이 홀로 있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하자마자 그 '우리', 그 '나' 역시 사라지고 침몰한다. 시인은 몸을 숙이고 스스로 백지 위로 굴러 떨어진다. 이렇게 시적 창조에는 이득과 손실, 노력과 대가와 같은 개념들이 적용되지 않는다. 시 안에서는 모든 것이 이득이다. 모든 것이 손실이다. 

 

하지만 부르조아지 도덕의 압력은 시인들에게 그 오래된 정령들의 '목소리' 앞에 귀를 막게끔 강요한다. 보들레르조차도 은근히 노동을 찬양했다. 불모의 황무지와 게으름의 천국에 대하여 그토록 많은 것을 썼던 그 조차도! 하지만 비평가들과 작가들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영감의 샘은 마르지 않았다. 그리고 시의 목소리는 여전히 도전이며 문젯거리가 되고 있다. 214

 

 

  현대의 여러 특징 중의 하나는 추상적인 신들을 양산했다는 점이다. 선지자들은 우상 숭배에 빠진 유대인들을 꾸짖었다. 현대인들에게는 정반대의 질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탈육체화에 정신이 없다. 현대의 우상들은 육체도 없고, 형태도 없다. 그것들은 관념, 개념, 권력 등이다. 

 

신들과 악마들이 살았던 고대 자연과 그 뒤 기독교적 유일신이 차지했던 자리를 인종, 계급, (집단적 혹은 개인적) 무의식, 민족성, 유산 등 얼굴 없는 존재들이 차지했다. 이런 개념들에 의지하면 영감조차도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시인은 그저 영매靈媒로서 성性, 日記, 역사 혹은 고대 신들과 악마들의 대용품을 은밀히 표현하는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이런 개념들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들로는 충분치 못하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에는 그들을 통틀어 거부하게 만드는 한계, 즉 부분으로서 전체를 설명하고자 하는 배타주의가 횡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모두에는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사실을 붙잡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음이 자명하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그 결정적인 힘이나 사실을 어떻게 언어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 그리고 리비도, 인종, 계급 혹은 역사적 순간 등은 어떻게 언어와 리듬, 이미지로 변하는가? 정신분석가들은 시적 창조를 승화라고 본다. 그렇다면, 그 승화가 왜 어느 때는 시가 되고 어느 때는 시가 되지 못하는가? 

 

프로이트는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고, 신비로운 '예술 능력'에 대해 언급했다. 그가 감쪽같이 문제를 감춘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근본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현실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16

 

 

시인의 언어와 노이로제 환자의 언어 사이의 차이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의식을 구분해보아야 할 것이다. 즉, 하나는 예술가들의 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인들의 무의식이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다. 꿈이나 몽상같이 방향성을 결여한 생각 속에도 이미지와 언어의 흐름은 의미가 있다. 

 

"목적이 없는 표상들의 흐름에 우리를 맡긴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목적이라는 개념이 멈출 때, 그 즉시 다른 알 수 없는 개념―부적절하지만 흔히 우리가 무의식이라고 부르는―들이 나타나서, 우리들의 의지와는 무관한 표상들의 행진들을 결정짓게 된다. 

 

목적의 개념 없이는 하나의 사상을 형성할 수 없다…… "1) 여기서 프로이트는 핵심을 찌르고 있는데, 목적이라는 개념은 무의식의 흐름에서조차도 필요 불가결하다는 점이다. 단지 그는 인간을 의식, 무의식 등 여러 층으로 나누고, 두 개의 상이한 목적을 인식할 뿐이다. 

 

하나는 우리들의 의지가 참여하는 이성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와 무관한 '무의식' 혹은 순수하게 본능적인 것으로 인간에게 무시된 것이다. 사실 프로이트는 목적이라는 개념을 리비도나 본능으로 옮겨놓았다. 

 

그러나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설명을 빠뜨렸다. 그 본능적인 목적의 의미는 무엇인가? '무의식적'인 목적이란 사실 목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수한 욕구, 자연적인 작용이므로 대상과 의미를 결여하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모든 설명이 끝난 게 아니다. 목적이라는 개념은, 비록 한없이 어둡지만, 도달하려는 것에 대한 인식과 앎을 내포한다. 목적의 개념은 의식의 개념을 요구한다. 정신분석학과 그 모든 분과 학문은 지금까지 이런 질문들에 대해 만족스럽게 대답하지 못했다. 심지어 문제를 바르게 제기하는 데도 실패했다. 

 

 

1) 프로이트S. Freud, 『꿈의 해석La interpretacion de lod suends』 (원주) 216

 

 

  시인의 개념을 역사의 '대변자'나 '표현자'라고 보는 데에도 같은 방식을 적용할 수 있다. '역사의 힘'은 어떤 방식으로 이미지로 전환되며, 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말을 '받아 적게' 하는가? 모든 역사적 삶이 가지는 상호 연관성에 대해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인간은 인人이며, 간間이다. 가장 신비주의적인 경우에서조차도 시인의 목소리는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것이다. 하지만 정신 분석학에서와 같이, '역사'나 '경제의 흐름', 즉 '역사적 목표'가, 리비도의 '목적'처럼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정말로 의식을 거치지 않고 진정한 목표가 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역사 안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역사는 하나의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역사이며, 모두 함께 역사를 만들어간다. 시는 사회의 메아리가 아니라, 다른 인간 행위들처럼 사회를 만들고 또한 사회의 산물이다. 

 

결국 우리에게 작용하는 힘이나 주체 혹은 단순한 외부 현실은 성性도 아니고, 무의식도 아니며, 또한 역사도 아니다. 세계는 우리 밖에 있지 않다. 엄격히 말해서, 우리 안에 있지도 않다. 만일 영감이라는 것이 자신의 의식 안에서 듣는 '목소리'라면, 그 목소리를 듣고 스스로의 영역을 건설하는 유일한 존재인 의식을 심문해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217

 

 

 

 

 

  지식인에게, 그리고 보통 사람들에게도, 영감은 하나의 문젯거리 혹은 미신 또는 현대 과학의 설명에 저항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는 마치 옷에 묻은 먼지를 털듯 어깨를 움칠하고는 머리 속에서 그 문제를 지워버릴 수 있다. 반대로 시인들은 그것에 정면으로 몸을 부딪혀서 투쟁해야 한다. 

 

현대시의 역사는 시인이, 용인되지 않는 영감의 현존과 현대적 세계관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갈기갈기 찢겨져온 역사이다. 이 갈등을 제일 처음 겪었던 이들은 독일 낭만주의자들이다. 동시에 그들은 명철하고 충실하게 그것에 대처하였으며, 그 모순에 고통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초극하려 애쓴 유일한 사람들―초현실주의 이전까지―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계몽주의의 자식이면서 다른 한편 질풍노도Strum und Drang 운동의 자식이기도 한 그들은 나폴레옹 제국의 칼날과 신성 동맹의 반동 사이에서, 구태여 표현하자면, 막다른 골목에서 길을 잃은 채 살았다. 그들의 내부는 대립물의 싸움터였다. 

 

 

  이런 시인들과 사상가들에 의해 고집스럽게 유지되어온 영감은, 낭만주의가 전투적으로 포교하는 주관주의 관념론과 화해할 수 없었다. 결별이 야기한 폭력은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대담하고 무모한 시도를 유발했다. 

 

"모순의 법칙을 파괴하는 것은 아마도 최상의 논리가 지닌 가장 숭고한 책무이다"라고 노발리스가 선언한 것은, 아마도 현대인을 분열시키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이분법을 해소하고 이를 통해 영감의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하려는 필요성을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제기한 것이 아닐까? 

 

다만 모순의 법칙을 제거하는 것―예를 들어, '통일성에로의 회귀'를 통하여―은, 글을 쓰게 하는 힘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시인이라는 이중적 요소로 구성된 영감을 파괴하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따라서 노발리스는 단일성은 이루어지자마자 곧 깨져버린다고 확신했다. 

 

상호간의 끝없는 생성 과정 속에서 모순은 동일성으로부터 탄생한다. 인간은 끝없이 자기 자신과 합의하고 헤어졌다 다시 합치는 대화이며, 다의성이다. 우리들의 목소리는 여러 목소리이며, 그 여러 목소리는 하나의 목소리이다. 시인은 시적 창조의 수단이며 동시에 주체이다. 그는 듣는 귀이며, 스스로의 목소리가 부르는 것을 받아 적는 손이기도 하다. 218

 

 

"꿈꾸는 동시에 꿈꾸지 않는 것은 천재의 작업이다." 마찬가지로, 시인의 수동적 받아들임은 그 수동성이 가능할 수 있는 능동성을 요구한다. 노발리스는 이 모순을 다음과 같은 명구로 표현한다. "능동성은 수동성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시인의 꿈은 좀더 깊은 층에선 깨어 있음을 요구하고, 깨어 있음은 꿈에다 스스로를 내맡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적 창조는 어디에 의지하는가? 노발리스는 말하기를, 시인은 "작作하지 않고 술述한다"고 했다. 섬광과도 같은 이 말은 시 쓰기의 현상을 잘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술'하게 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누가 시인으로 하여금 '작'하도록 도와주는가? 

 

노발리스는 이 점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때로 그 '작'하는 주체는 성령, 민중, 이념, 혹은 소위 대문자로 씌어지는 그 무엇들이기도 하고, 또 다른 경우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 주체로서의 시인이라는 관점에 대해선 좀더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낭만주의자들은 인간을 시적인 존재로 보았다. 보들레르가 "시인은 태어날 때부터 시인이다"고 말한 것처럼, 인간의 본성 속에는 시적 창조를 가능케 하는 일종의 선천적 능력이 있다. 그 능력은 성스러움을 지각하게 하는 신격화 성향과 유사한 것이다. 

 

시적 창조 능력은 선험적 영역에 속한다. 이러한 설명은 종교의 신자에게 신성을 심기 위해서는 그의 내부에 있는 '의존의 감정'에 호소하기만 하면 된다는 논리와 다르지 않다. 그들의 시 사상이 프로테스탄트 신학 사상과 유사하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어떤 낭만주의 시인도 종교로부터 시를 완전히 분리하지 않았다. 

 

많은 독일 낭만주의 시인들이 개종한 것은 종교를 시적으로 해석하고, 시를 종교적으로 해석한 결과였다. 시는 야생 상태의 종교 같은 것이고, 종교는 실천시이거나 행위시라고 노발리스는 거듭 확언했다. 따라서 시적인 것의 범주는 신성神聖의 여러 이름 중 하나이다. 앞의 글에서 이미 언급한 것을 여기서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219

 

 

시적 경험과 종교적 경험은 둘 다 우리의 원초적 존재 조건의 계시이지만, 그 계시의 해석이 판이하게 다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시적 작용은 언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시 쓰기는 무엇보다도 이름부르기로 이루어진다. 말(言)이야말로 시 행위를 다른 것들과 구분짓게 한다. 시 쓰기는 말로써 창조하는 것, 즉 시를 창작한다는 것이다. 

 

시적인 것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고 또한 인간을 만드는 상호적인 것이다. 시는 하나의 가능성이지, 선험적 영역이나 선천적 능력이 아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우리 스스로를 창조해내는 가능성이다. 이름을 부르고, 말을 사용하여 창조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부르는 그것 자체―우리가 부르기 전에는 위협과 공허와 혼돈으로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던―를 창조하는 것이다. 

 

시인이 "무엇을 쓰려고 했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할 때, 그는 자신의 시가 부르고자 했던 것, 즉 이름 불려지기 전에는 단지 이해할 수 없는 침묵의 형태로만 보여졌던 바로 그것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직 몰랐다는 것이다. 독자와 시인을 위해서만 존재하고, 그들을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던 그 시를 창조할 때, 독자와 시인은 스스로를 창조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시 언어가 따로 있지 않은 것처럼, 시적 상태라는 것도 따로 있지 않다. 시의 특성은 끊임없는 창조이며, 창조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내동댕이치고 자신에게 벗어나게 하여 우리를 가장 높은 가능성으로 데리고 간다는 점이다. 220

 

 

  초조도, 사랑의 열정도, 기쁨도, 열광도 그 자체로는 시적 상태가 아니다. 왜냐하면 고유한 시적 요소란 존재치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자체의 극단적인 성격으로 인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세계를 쓰러뜨린다. 이때 우리에겐 죽어 있는 언어를 포함한 침묵이나 이미지만이 남는다. 

 

그 무엇, 이름 없는 것을 이름짓고, 부를 수 없는 것을 부르기 위해 우리가 창조한 그 어떤 것이다. 따라서 모든 시는 창조자의 희생을 통해 생겨난다. 일단 시가 씌어지고 나면, 시 이전에 존재했고, 시인을 창조로 몰고 갔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것 ―사랑, 기쁨, 고뇌, 권태, 다른 것에 대한 향수, 고독, 분노 등―은 하나의 이미지로 변한다. 

 

그것은 이름 불려져 시, 즉 투명한 언어가 된다. 창조 뒤에 시인은 홀로 남게 된다. 이제 그 시를 재창조하면서 자신을 창조해갈 이들은 바로 독자들이다. 창조의 경험은 단지 그 방향만 바뀌어 반복된다. 이미지는 독자에게 스스로를 열어, 자신의 불투명한 심연을 열어 보인다. 

 

독자는 그 심연을 들여다보고, 일상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그 심연으로 떨어질 때, 혹은 상승하거나, 이미지의 복도를 걸어 들어가 시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기나 할 때 그때까지 모르거나 무시하던 '진짜 나'가 되기 위해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시인처럼 독자도, 스스로를 투사하고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이름붙일 수 없는 것과의 만남으로 나아가는 이미지로 변한다. 시인과 독자 양자의 경우, 시는 자기 밖에 있는 시 작품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기 안의 우리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들고, 또한 우리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노발리스의 금언을 이렇게 수정할 수 있을 것이다. 시는 작하지 않고 술한다. 그리고 작자는 창조자로서의 인간이다. 시적인 것은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며, 시작詩作은 우리 내부에서, 마치 '누군가'가 우리 내부에 저장해놓았거나 혹은 우리가 그것과 함께 태어나는 '물건'처럼 시를 끄집어내는 것도 아니다. 

 

시인의 의식은 숨겨진 보물처럼 시가 묻혀 있는 동굴이 아니다. 미래의 시 앞에서 시인은 어눌해져서 발가벗고 서 있다. 창조 이전엔 시인이란 존재치 않는다.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그가 시인인 이유는, 시 때문이다. 시는 시인의 창조물이지만, 시인 역시 시의 창조물이기도 하다. 221

 

 

  갈등은 19세기 내내 지속되어왔다. 갈등은 반복되면서 깊어지고, 동시에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어 혼란스럽기도 했다. 모순은 더 첨예해졌고, 찢겨짐의 의식이 커갈수록, 그것에 정면으로 대항할 명증성과 그리고 해결해낼 용기는 작아졌다. 

영감의 희생양이나 증거자 혹은 공조자인 19세기의 위대한 시인들 중 그 누구도 노발리스처럼 투철한 의지를 지니지는 못했다. 그들 모두는 해결책 없는 모순 속에서 논쟁했을 뿐이다. 영감을 버리는 것은 시 자체를 버리는 것이다. 즉, 지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유일하게 정당화해주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은, 자신이 지닌 인간관 및 세계관과는 양립할 수 없는 행위였다. 이 점 때문에, 종종 이 시인들은 세계를 거부하고 비난했다. 물론 도덕적 관점에서 보들레르의 공격과 말라르메의 멸시 그리고 포우의 비판은 매우 정당한 것이었다. 즉, 그들이 살게 된 그 세계는 구역질나는 세계였던 것이다. (그들의 시대는, 현대의 비할 바 없는 끔찍함의 원인을 제공한 바로 그 시대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을 부정하거나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아무도 그가 속한 세계로부터 도망칠 수 없고, 그 부정과 비난은 이 세계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사는 방법, 즉 소극적으로 견뎌내는 방법일 뿐이다. 보들레르나 콜리지 혹은 말라르메의 글 이상으로 시적 작용의 신비와 그것이 낳는 황무지와 천국에 대해 통찰적이고 명징하게 묘사한 것은 없다. 동시에, 영감의 개념과 현대적 세계관을 조화시켜보려는 그들의 설명과 가설처럼 선명한 것도 없다. 

 

그들의 혼란스럽고 모순에 가득 찬 명증성과 맹목성을 살펴보기 위해선, 현대 시학의 중요한 텍스트(예를 들어, 포우의 『글쓰기 철학』 등) 중 그 어디라도 한번 들춰보기만 하면 된다. 그 이전 글들과의 대조는 너무나 선명하다. 초자연적인 것이 세계의 일부분이었다는 바로 그 이유로, 과거의 시인들에게 영감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222

 

 

  스스로의 확신으로 가득 찼던 단테는, 꿈에서 사랑의 신이 자신에게 영감을 주어 시를 받아 적게 했고, 초월적인 힘의 개입을 철저하게 확신시키는 상황 속에서 계시가 언제라도 내릴 수 있었다는 것을 쉽고도 단순하게 얘기했다. 

 

"말들을 마치자 그는 사라져버렸고, 잠이 몰려왔다. 그 뒤, 그 환상을 돌이켜보았을 때, 아침 9시에 그것을 체험했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내 집을 나서기도 전에 그 서정시를 끝냄으로써, 주(사랑의 신)께서 내린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2) 

 

단테에게 9라는 숫자는 네르발에게 7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의미와 유사하다.3) 단테에게 숫자 9의 반복은 베아트리체가 가지는 구원의 의미와 그들 사랑의 특별한 성격을 순수한 빛으로 조명하기 위한, 비록 신비롭고도 성스럽지만, 다분히 명확한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네르발에게 7이란 숫자는 모호하며, 때로는 불길하고 또 때로는 좋아서, 그 진정한 의미는 명확히 밝힐 수 없다. 단테는 계시를 받아들여, 그것을 통해 천국과 지옥의 비경秘境을 엿볼 수 있게 해주었다.

 

 

2) 『신생Vita nuova』, XII.(원주)

3) 단테는 아홉 살 때, 처음으로 사랑하는 베아트리체를 만났다고 했다. 다시 구년 뒤, 정확히 아홉시에. 그녀를 다시 보게 된다. 환상은 오전이나 오후 아홉시에 일어났다. 베아트리체는 13세기의 90년에 죽었다. 즉 성스러운 숫자인 10이 아홉 번 겹친 해였던 것이다. 또한 네르발은 그의 작품 『아우렐리아』의 곳곳에서 자기 생에서 7이란 숫자가 가졌던 중요성을 강조했다. (원주) 223

 

 

네르발은 흠칫 놀라며 매혹되었다. 그는 자신의 환상을 우리에게 알리려 하지도 않았고, 그 계시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의 꿈을 직시하여 그 비밀을 밝혀내고자 했다. 스스로에게 말하길, 어쨌든 나의 감정들을 찾아내는 대신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내 모든 의지로 무장한 채 이 비밀의 문을 열어제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 매혹적이고 두려운 환상을 이겨내는 것, 우리들의 이성을 조롱하는 정령들에게 법칙을 부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가?" 

 

단테에게 영감은, 시인이 겸양과 겸손과 경배를 가지고 받아들여야 할 초자연적인 신비였다. 네르발에게 그것은 우리에게 싸움을 걸고 도전해오는 재난이며 신비였고, 밝혀내야할 그것이었다. '해독해야 할 신비'와 '풀어야 할 숙제' 사이의 왕래는 쉽게 지각되지 않는 것이고, 이 점은 네르발의 계승자들이 풀어야 할 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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