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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구조주의 이론/ 심상운
2018년 11월 03일 16시 38분  조회:938  추천:0  작성자: 강려

한국시문학아카데미 금요포럼 주제발표 원고 (2011년 8월 26일)

 

 

포스트구조주의 이론

 

 

                                                                    정리 : 조 명 제

 

 

 구조주의의 한계

 

ⓛ구조주의는 기본적으로 작품의 구조에 집착하는 데서 오는 공허하고 분명치 못한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면을 ‘언어의 감옥’이라고 비판한 경우도 있다(프레드 리 제임슨『언어의 감옥-구조주의와 형식주의 비판』, 까치, 1972).

 

②본디 반역사주의적인 성향에서 오는 문학의 배경 등에 걸친 입체성을 상실하고 있다.

 

③언어구조 등에 치우치는 데서 오는 탈사물화(脫事物化) 현상을 피하지 못하고 있 다.

 

이런 취약성을 안고 있는 구조주의는 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 포스트구조주의 내지 해체주의로 이어지고 있다.

 

구조주의의 특성과 제문제

 

1960년대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구조주의의 기본적 특성은, 우선 그것이 ‘언어(기호)’를 모든 체계의 기본으로 상정한다는 점, 그리고 개개의 특성보다는 그것들의 근간을 이루는 어떤 체계나 문법, 곧 구조의 발견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으로 대별된다. 이 같은 관념은 언어 자체만이 아니라 문화, 문학, 인류학, 신화 및 기타 사회적 관습들을 연구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구조주의자들은 겉으로 드러난 외양보다는 그 근저에 숨어 있는 공통된 체계나 법칙, 혹은 틀을 찾으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구조주의의 이러한 특성은, 그 특성 자체가 애초부터 스스로의 숙명적인 해체 요인이 되어 왔던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구조주의는 개별 텍스트들의 특성과 가치는 무시한 채, 전체적인 ‘구조’만을 중시함으로써 개체를 전체에 종속시켜 버리는 전체주의적 독선을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첫째 구조주의자들은, 리얼리티는 작가의 언어가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구조가 창조한 것이라고 믿음으로써, 한 문학작품의 의미는 작가나 독자의 개인적 경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개인을 지배하는 언어 체계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둘째, 구조주의는 보편적인 ‘구조’, ‘문법’ 또는 ‘법칙’을 찾아내고 수립하려는 과정에서 스스로 경직된 과학적 이론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구조주의는 우리가 인지하고 경험하는 것의 서술적 분석을 통해 의미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현상학적 태도를 배격하며, 따라서 모든 경험적 리얼리티와의 연계성을 스스로 포기한다. 셋째, 구조주의는 공시적인 연구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필연적으로 통시성을 무시하는 비역사적 태도를 보이게 된다. 따라서 구조주의자들은 텍스트가 씌어진 시대나 그것의 역사적 배경과 수용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넷째, 구조주의의 이와 같은 태도는 자연히 자아나 주체, 개인의 사유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객관화시키는 비인본주의적, 비실존주의적 태도를 보인다. 구조주의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사고 역시 하나의 고정된 틀 속에서 생성되고 기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구조주의에 의하면 ‘구조’는 곧 모든 ‘개체’의 기원이나 센터가 되며, 특권을 부여받는 존재가 된다. 이러한 생각은 랑그/빠롤, 말/글, 심층구조/표면구조, 자연/문명, 서술/묘사 등으로 모든 것을 이분화한 다음, 전자(前者)에 특권을 부여하는 구조주의의 이분법적(이항대립적) 관점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여섯째, 구조주의는 모든 것의 근본이 언어 체계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이는 기호의 재현 능력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포스트구조주의

 

 

구조주의가 등장한 지 불과 몇 년이 되지 않은 1960년대 후반에 강력하게 부상하기 시작한 포스트(탈)구조주의는 위에 지적한 구조주의의 여섯 가지 특성 모두를 비판하면서 등장하였다.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외부가 아니라 오히려 그 내부에서 스스로의 잘못을 발견한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단순한 연장도 아니지만 동시에 그것의 완전한 배제만도 아니다. 왜냐하면, 구조주의가 없는 포스트구조주의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을 뿐더러, 포스트구조구의는 구조주의가 구축해 놓은 구조를 그 내부에서 ‘해체’ 또는 ‘탈구축’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면적 속성을 가진 포스트구조주의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스트구조주의는 우선 전술한 여섯 가지 구조주의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해체하면서 시작된다.

 

 

1) 전체적인 ‘구조’보다는 ‘개체’의 존엄성과 자유를 인정한다.

2) 사고의 경직화 및 문학과 학문의 과학화를 배격하며, 이성 중심적 태도를 지양 한다.

3) 역사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표명하며, 과거를 향수 가 아닌 탐색의 대상으로 취급한다.

4) 자아와 주체를 중요시한다.

5) 절대적인 진리나 센터, 근원의 독선과 횡포를 거부하며,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 부터 탈피하여 ‘타자’를 인정하고 포용한다. (이는 곧 형이상학의 부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6) 모든 기호와 그것들의 재현 능력을 불신한다.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사이의 가장 기본적인 차이를 나타내 주고 있는 것으로서 하라리는 여섯 번째 것, 즉 재현에 대한 차이를 든다. 그에 의하면 언어 체계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구조주의는, 언어를 포함한 모든 기호들의 재현 능력과 그것들이 지칭하는 대상의 현존, 그리고 기호와 대상 사이의 연계성을 믿는 이상주의적 가정 위에 세워진 것인데, 포스트구조주의는 바로 구조주의의 그러한 이상주의적 가정에 회의를 표명하고 구조주의가 제시하는 안정을 뿌리째 뒤흔들면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즉,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낙관적인 생각이 틀린 것이며, 사실 의미란 본질적으로 불안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비롯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기호’란 더 이상 확실한 것이 아니고, ‘의미’ 역시 유동적이고도 유보적인 상태일 뿐이며, 따라서 지시어와 지시 대상 사이에는 이을 수 없는 단절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었다.

 

롤랑 바르트는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구조주의에서 포스트구조주의 및 기호학 이론가로 자신을 해체시켜 가면서 탈바꿈한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이 계열의 주요 저작으로는『S/Z』(1970)가 있다. 발자크의 사실주의 소설인「사라진느(Sarrasine)」가 어떻게 포스트구조주의적 책읽기를 통해 반재현적 독서를 유발하는지를 자명하게 보여주고 있다.『S/Z』에서 바르트는 독자가 어떻게 고정된 의미의 단순한 소비자에서 다원적 의미의 적극적인 생산자가 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후기의 바르트는, 언어란 결코 명료하지 못한 것이며, 따라서 언어를 통해 독자가 분명한 진실이나 리얼리티에 도달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훌륭한 작가와 가치 있는 텍스트는, 언어의 그러한 속성을 인정하고 글쓰기를 통해 ‘유희(play)'할 줄 아는 작가와 텍스트를 의미했다.

 

롤랑 바르트의 초기 저작인『글쓰기의 영도』를 보면, 당시 사상의 중심이었던 사르트르의 문학관과는 달리 진정한 의미에서의 참여는 작가가 언어를 사용하는 방법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사르트르의 언어의 도구성을 중심으로 한 언어관과는 달리, 바르트는 글쓰기에 있어서 형식의 책임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이데올로기가 드러나는 방식을 분석할 수 있는 ‘신화(myth)'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낸다.

바르트에 의하면, 기호의 의미작용에는 두 수준의 질서가 있다. 제1차의 질서는 현실의 수준 또는 자연의 수준이며, 제2차의 질서는 문화의 수준이다. 의미작용의 제1차 질서는 기호가 그것이 표상하는 현실의 외시(外示) 의미만을 생산한다. 이 수준에서 ‘한 알의 모래’는 모래일 뿐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 제2차 질서는 기호의 두 기본 소자들, 즉 기표와 기의가 함축하고 있는 특성들로부터 비롯된다. 기호가 두 개의 기본 소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제2차 질서 또한 두 가지로 되어 있다. 그 하나는 함축적 질서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신화의 질서이다. 먼저, 함축은 기표의 제2차 의미작용을 나타내는 것으로, 기표가 기호의 형태를 결정한다. 기호 형태의 변이와 변용들이 여러 가지 주관적 함축 의미를 일으킨다. 이 수준에서 예의 ‘한 알의 모래’는 모래 이상의 것이 된다. 영국의 시인 W.블레이크는 ‘한 알의 모래에서 우주를 본다’고 했다. 토목 건축업자들이라면 ‘한 알의 모래’라는 기표에서 거대한 건축 구조물을 떠올리고, 반도체 공학자들은 거대한 인공 통신조직을 볼지도 모른다. 이처럼 기표는 보는 사람의 문화적 배경과 체험에 따라 천차만별의 함축 의미들을 일으킨다. 기호가 지니는 함축 의미는 특수하고 자의적인 뜻으로 이루어진다. 함축 의미는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기호를 읽는 사람들 사이에 오해를 일으키기 십상이다.

 

둘째로 기호를 통하여 현실을 설명하는 다른 한 가지 방법은 신화에 의한 것이다. 신화란 함축적 기의들로 엮인 고리의 체계를 말한다. 이렇듯 바르트는 신화를 ‘함축 의미의 체계’라고 정의하는데, 이 신화는 끊임없는 변형을 시도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신화라는 것은 고전적인 신화체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르트에 의하면, 신화란 ‘하나의 이야기’ 혹은 ‘하나의 특수한 언술’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기호의 ‘의미체계’를 형성하고 있는 섬유조직 자체와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분석은『패션의 체계』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있는데, 그 텍스트는 한마디로 말해서 여성의 의상에 관한 기호학적 분석을 시도한 책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실제 의상이 아니라 패션잡지에 글로 기술된 의상이라는 점이다. 그 글이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이미 소쉬르의 제안들을 뒤집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문에서 바르트는 포스트구조주의적 기호학이 언어학에 속해 있는 학문임을 주장한다. 그러한 면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언어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쉽게 말해서 우리가 어떤 대상을 하나의 의미 있는 것으로 인지할 때는 항상 그 대상을 언어화해서 이해하도록 되어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모든 현실은 피할 도리 없이 의미를 짓는 언어체의 중재에 의해 일어나며, 나아가서 언어체는 현실을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언어체이며 그 어떤 것도 언어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이 같은 주장은 바르트의 뿌리 깊은 신념인 것이다.

 

후기의 바르트는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의 영향과 포스트구조주의적 담론 아래에

서 새로운 지형도를 형성한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텍스트이다. 그는 텍스트의 유희성을 다룬『텍스트의 즐거움』(1973)을 비롯해서, 포스트구조주의 문학 논쟁으로 번진『저자의 죽음』(1968)을 썼는데, 다원적 텍스트론의 바르트는 텍스트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그 하나는 읽을 수 있는 텍스트이고, 다른 하나는 쓸 수 있는 텍스트이다. 읽을 수 있는 텍스트는 흔히 책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에게 있어서 책의 개념은 고정적이고 잘 변하지 않는 이미지이다. 그에 비해 쓸 수 있는 텍스트는 수용미학적 관점이 반영된 것이다. 독자는 저자의 책을 읽으면서 또한 창조적인 하나의 저자가 된다. 이러한 텍스트 개념은 문학비평에 있어서, 수용미학(독자 지향 이론)과 더불어 독자의 위치를 높이고 독자의 능동적 독서 행위를 강조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일반적인 텍스트의 개념은 커뮤니케이션의 모든 산물(글로 씌어진 것, 말로 된 것, 그림으로 그려진 것, 영화, TV프로그램, 화장한 얼굴, 몸치장 등)을 통틀어 지칭하는 말이며, 또한 이런 것들 하나하나를 일컫는 일반적 용어이기도 하다.

텍스트는 담론과 대비되는 개념으로도 이해된다. 텍스트는 기호들이 어떤 코드(code)에 입각해서 통일성을 이룬 구체적인 기호학적 체계를 가리킨다. 텍스트가 구조적임에 비해 담론은 과정적이다. 담론은 텍스트를 배태한 채 수행되는 기호학적 과정이다. 이러한 텍스트 중심주의는 나중에 데리다의 유명한 명제 “텍스트 바깥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말을 낳게 한다.

 

바르트의 이러한 변화를 데리다, 크리스테바와 같은 학자들과의 연장선상에서 보는 시각도 있다. 데리다의 초기 3부작인『목소리와 현상』『글쓰기와 차이』『그라마톨로지』에서 수행했던, 후서얼의 기호학 체계 비판과 소쉬르의 언어 중심주의 비판에는 흔히 ‘로고스 중심주의’라고 알려진 ‘이성 중심주의’의 비판에 있었다. 그래서 존재신학 혹은 서구 중심의 형이상학적 체계를 공격하는 이런 데리다의 전략과 마찬가지로 롤랑 바르트의『저자의 죽음』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그 논문의 핵심은 섣부르게 오해되고 있는 인본주의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단 하나의 유일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과거 작가들에 대한 신화를 전복하자는 데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와 마찬가지로 바르트 역시 단일한 의미란 신학적 혹은 형이상학적 전통에서 비롯된 서구의 뿌리 깊은 전통이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현실의 효과」라는 논문에서 바르트는, 플로베르의 소설이나 미슐레의 문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구체적 세부 사항에 주목한다. 그것은 지시 사항과 기표의 직접적인 공모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기의는 기호에서 추방되고 지시 대상적 환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형성된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그러한 장치는 사실상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이 현실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J.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의 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즉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기호(이미지)가 실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후기 바르트를 비롯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연구는 초기 구조주의자들에 대한 정형화된 분석을 바탕으로 그 위에 기표의 물결을 뒤덮는다. 데카르트 이래 소쉬르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기의였으며, 그것은 구조주의자들과 초기 롤랑 바르트에게까지는 중요한 입장으로 실천된다. 그러다가 후기에 와서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전복되는데, 이것을 적극적으로 표방한 사람은 자크 라캉이다. 라캉은 그의 강의 속에서 그 같은 전복의 관계를 설명한다. 어떤 구조 속에서 서로 배타적이면서 공존하는 두 가지 실체나 개념을 이항대립쌍(또는 이원항)이라고 할 때, 그 두 줄기의 상호작용을 라캉은 Sr/Sd(기표/기의)라는 형식으로 표시하면서, 기표의 우위를 주장한다. 기의란 언제나 제시된 기표의 밑바닥에서 끊임없이 ‘미끄럼'을 타는 그런 것라고 한다. 이러한 생각이 나중에 보드리야르에 이르게 되면 기의는 사라지고 오직 기표만이 남아 있게 된다. 이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 데리다는 라캉과 보드리야르 사이에서, 라캉식으로 보자면 기존의 담론 질서에 대한 전복을 꾀하고, 보드리야르식으로 보자면 기표들의 유희를 만들어 낸다.

 

데리다가 문학 이론적 측면에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프랑스 내부에서가 아니었다. 데리다의 이론은 동시대인인 미셀 푸코와 함께 빠르게 미국 학계에 전해졌는데, 미국의 예일대학 교수인 폴 드 만을 비롯해서 해롤드 블룸에 이르기까지 해체비평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강단에서 환영받게 된다. 예일대학을 중심으로 한 이 일파는 버로우즈나 토머스 핀천 같은 기존의 비평으로 감당할 수 없었던 작가들에게 이러한 방법을 적용하면서 이른바 해체비평을 전세계적으로 유행시켰다.

 

정신분석학 이론들

 

언어로 표명되는 성욕에 근본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정신분석 비평은 문학적인 ‘무의식’을 추구하면서 특히 세 가지 주요 양상, 즉 저자(‘등장인물’), 독자, 그리고 텍스트를 취급했다. 정신분석 비평의 시작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문학작품을 예술가의 징후로서 분석한 것이었다. 그 뒤 정신분석 비평은 정신분석적 독자반응 비평을 통해 포스트프로이트주의자들에 의해 변형되고, 문학작품은 집단 무의식과 개인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재현한다는 칼 융의 ‘원형’ 비평에 의해 논박의 대상이 되었다.

최근에 와서는 자크 라캉과 그 추종자들의 저작에 의해 포스트구조주의 맥락에서

재구성되었다. 이들은 ‘욕망’의 역동적인 개념과 구조주의 언어학의 모형을 결합시켜 영향력 있는 쇄신 작업을 해 왔다.

 

1.자크 라캉의 언어와 무의식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과 소쉬르의 언어 이론을 혼합한 것 같은 자크 라캉의 이론은 우선 주체(주관Subject)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를 통해 구조주의와 정면 충돌한다. 라캉은 무의식을 불안정한 지시어에 비교하며 무의식과 의식의 사이처럼 지시

어와 지시 대상 사이도 역시 불안하고 단절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 언술행위는 만족이 아닌 욕망만을 가져다 주는데, 이 욕망은 물론 무의식과 상통하고 있다. 모든 지시어는 이미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언어의 힘에 대한 믿음을 버리라고 권하며 의미의 자유로운 유희를 제안한다. (기호에 대한 라캉의 설명에 따르면 기의는 ‘떠 있는’ 기표 밑에서 ‘미끄러진다’).

 

2.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언어와 혁명

 

 

문학적 의미에 관한 크레스테바의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시적 언어의 혁명』(1974)을 들 수 있다. 바르트의 이론과는 달리 크리스테바의 이론은 정신분석학이라는 특별한 사상 체계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 책은 정렬되고 합리적으로 수용돤 것이 ‘이질적인’ 것과 ‘비이성적인’ 것에 의해 계속 위협당하는 과정을 천착하려 한다. 크리스테바의 제목에 나오는 ‘혁명’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은유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녀의 견해로는 급진적인 사회 변화의 가능성은 권위 있는 담론들의 분열과 연루되어 있다. 시적 언어는 사회의 ‘닫힌’ 상징적 질서를 ‘가로질러서’ ‘기호학적’인 것의 전복적인 개방성을 도입한다.

 

3.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신분열 분석

 

질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들의 저서『앙띠오이디푸스: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1975)과『카프카:소수문학을 위하여(1972)에서 정신분석을 과격하게 비판하고-라캉을 끌어들이나 그를 초월하면서-동시에 그들이 ‘정신분열 분석’이라는 이름을 붙인 텍스트 자세히 읽기 접근 방식을 제시한다. 그들은 욕망이란 무의식을 흉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기재라고 생각한다. ‘정신분열 분석’은 욕망의 해방을 의미하며, 편집증적 무의식적 욕망과는 달리, 분열증적 욕망은 자본주의적인 총체성의 전복을 제공하면서 ‘탈영토화’를 한다. 문학과 정신분열의 관계는 문학도 역시 체계를 전복시킬 수 있고 체계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저자/텍스트도 잠재적으로 혁명적인 담론들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욕망을 해방시키는 독자’, 즉 ‘분열 분석가’를 필요로 한다. 그들의 개념 속에서 카프카의 작품은 ‘리좀’(rhizome)이다[엘리자베스 라이트].

 

해체 이론

 

 

해체비평(Deconstruructive Criticism)은 더러 포스트구조주의 또는 탈구조주의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해체주의는 어디까지나 포스트구조주의의 하부 개념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게 좋겠다. 다분히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비평방법을 지니고 있는 해체비평은 재래적인 작품 읽기나 해석방법을 부정하고 새로운 텍스트 읽기를 주장한다. 소쉬르와 그에 바탕을 두고 있는 구조주의 기호학에 의해 발달된 개념들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그 모태를 무너뜨리는 성격을 띤 이론이다.

 

 

1. 자크 데리다의 해체 이론

 

 

롤랑 바르트가 구조주의의 한계를 깨닫고 포스트구조주의로 전환한 대표적 인물이었다면, 자크 데리다는 구조주의의 기본 명제들을 그 근본부터 뒤흔들며 등장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36세 무렵의 무명학자이던 그는 1966년 미국의 존즈 홉킨즈 대학에서 열린 <비평의 언어와 인문학>이라는 국제 심포지엄에서 발표하여 세계적인 구조주의 석학들을 놀라게 한 논문「인문과학 담론에서의 구조, 기호, 그리고 유희」를 통해, 레비-스트로스로 대표되는 구조주의 이론은 물론, 플라톤 이래의 서구 형이상학의 근본에 대해서도 강력한 의문을 제시했다.

 

그의 해체적 이론은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 구조를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적이지만, 소쉬르나 레비-스트로스 같은 전형적인 구조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의미의 궁극적인 근원으로서의 구조 개념까지도 해체함으로써 첨예한 포스트구조주의의 시대를 연 것이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기표와 기의의 임의적인 관계에 새삼 주목한다. 소쉬르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자의적이라고 하더라도 동전의 앞뒷면처럼 안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기표와 기의 사이는 불안정하며, 기표와 기의는 그 둘 사이를 가로막는 경계선을 두고 서로 끊임없이 흐르다가 아주 순간적으로 의미가 형성된다고 여겼다. 하나의 기표는 시대의 흐름과 변천에 따라 새로운 기의가 덧씌워지곤 한다는 뜻이다.

 

무릇 사람들은 ‘중심’을 원한다. 중심은 ‘현존으로서의 존재’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예(例)의 논문에서 데리다는 구조나 기호의 내면에서 그것들에게 통일성을 부여해 주는 어떤 의미의 ‘중심(center)’이 ‘완전한 현존’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은 다만 환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의미의 중심에 대한 서구 형이상학의 욕망과 확신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로서 데리다는 서구의 ‘말(말씀) 중심주의(logocentrism)’ 또는 ‘음성 중심주의’(『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에서)를 들고 있다. ‘로고스’(희랍어로 ‘말’을 뜻함) 는 신약성서에서 최대로 가능한 현존의 중심화의 의미를 가진 용어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모든 사물의 기원이 되는 ‘말씀’은 세계의 완전한 현존을 승인한다. 따라서 모든 것은 이 하나의 원인의 결과이다. 글은 말의 대체물이라고 주장하면서 데리다는 음성을 글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말 중심주의의 고전적인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기호 체계 즉 글은 현존해 있다는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회의를 던지며, 근원과 현존의 부재를 주장한다. 만일 현존에 도달, 완전한 재현이 가능한 것이라면 모방이 필요 없어지고 따라서 예술이나 언어도 그 존재 가치가 없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완전한 현존이나 완전한 재현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말이나 글 모두가 일종의 글쓰기라고 말함으로써 말/글의 서열제도를 없애 버렸다.

데리다는 소쉬르의 언어이론, 즉 언어의 의미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결합을 통해 언어체계 속에서 구축된다고 하는 소쉬르의 주장에 모순이 있다고 주장했다. 어떤 기호는 횡적으로 다른 기호들과의 변별된 차이에 따라 그 의미가 정해질 뿐만 아니라, 종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미 나타난 기호들은 물론 앞으로 나타날 기호들과의 관계에 따라 그 의미가 결정된다. 결국 기호의 의미는 공간적 차이와 시간적 지연이라는 두 가지 차원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결코 최종적 의미는 지금 여기에서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연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미작용의 이 같은 끝없는 운동, 즉 공간적 차이와 시간적 지연을 동시에 나타내기 위해, 다시 말해 왜 기호는 완전한 현존이 되지 못하는 것인가, 그리고 왜 말 중심주의는 틀린 것인가 하는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데리다는 ‘차연(差延/differance)’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낸다. 의미가 기호들의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는 소쉬르의 차이의 개념을 차연의 개념으로 대치한 것이다. 프랑스어 동사인 ‘differer’는 ‘차이나다(다르게 하다), to differ’와 ‘연기하다(지연시키다), to defer’의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공간적 개념인 ‘차이’는 언어와 그것이 재현하려는 것과의 숙명적인 차이를, 그리고 시간적 개념인 ‘지연’은 언어가 재현하려는 현존의 끝없는 유보를 의미한다. 즉 하나의 텍스트 속에서 어느 한 요소의 의미는, 그것이 연관과 맥락에 의해 그 텍스트 내의 다른 요소들과 상호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결코 완전히 현존할 수는 없게 된다. 따라서 그것의 의미는 영원히 ‘차이’를 갖게 되며 끝없이 ‘유보’되는 것이다. 데리다의 중요한 이론 중의 하나인 상호텍스트성 또는 범텍스트성 이론은 바로 이와 같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절대적인 진리와 중심과 근원이 유보되어 있는 현 상태는 작가들에게 활발한 유희

를 유발시키며, 현실은 곧 꿈의 속성을 띠게 된다. 또한 절대적 진리의 유보는 곧 해석의 불가능을 의미한다. 요컨대 데리다를 비롯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언어 외적인 의미의 원천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고정된 결합까지도 부정하고 시니피에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시니피앙의 끝없는 유희를 강조함으로써 재현 가능성을 부정하고 시니피앙의 의미화 기능을 열린 지평으로 개방한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의 이러한 태도나 ‘텍스트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상호텍스트성 이론은 필연적으로 그에게 비이데올로기적이고 비투쟁적이며 텍스트의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현실과 괴리된 비평가라는 비판을 가져다 주고 있다.

 

2. 미국의 해체 이론

 

미국의 비평가들은 그들이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해 온 신비평의 형식주의를 떨쳐 버리고자 수많은 외국의 이론들을 자유롭게 섭렵하고 있었다. 노드롭 프라이의 과학적 ‘신화비평’, 루카치의 헤겔적 마르크스주의, 뿔레의 현상학, 그리고 엄격한 프랑스 구조주의가 각각 유행하였다. 데리다가,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의 비평가들을 매료시켰다는 사실은 다소 놀라운 일이다.

미국의 해체론과 프랑스 해체론 간의 두드러진 차이의 하나는 비평적 글쓰기의 양

식에 있다. 예컨대 데리다와 바르트가 때로(특히 1970년대 이래로) 파편화되고 장난스러운 담론을 선보이는 데 반해, 드 만과 밀러 그들은 잘 짜여진 관습적 텍스트를 내놓는다. 그러니까 미국의 해체론자들은 온갖 텍스트성의 자유 유희를 주창하면서도 전통적인 담론 양식을 실천한다.

 

✿폴 드 만(Paul de mann)/ 드 만은 모든 언어는 동시에 상반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같은 문장이 동시에 반대의 뜻을 갖는 것은 언어의 지칭력에 대한 회의를 의미한다. 그는 이것을 ‘언어의 수사성’이라고 불렀다. 같은 문장이 동시에 상반된 뜻을 갖는 경우에 해석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신비평의 모호성과는 다르다. 모호성은 두 가지 의미가 공존한다는 전제 아래 이렇게도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되는 것이지만, 드 만의 수사성은 이미 언어 자체가 서로 반대 의미를 품고 있어 해체되어 버리므로 엄밀히 어느 쪽 의미도 가능하지 않게 된다.

 

✿헤이든 화이트/ 포스트구조주의의 수사적 유형은 여러 형태를 취하는 바, 역사 편찬학(역사 이론)에서 화이트는 잘 알려진 역사가들의 저작들에 대해 과감한 해체를 시도했다.『담론의 수사학』(1978)에서 그는 역사가들이 자신들의 서술을 객관적이

라고 믿지만, 구조와 관계되는 그들의 기술 행위는 텍스트성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해롤드 블룸/ 블룸은 전통에 대항하는 시인의 강한 자기 주장이 괴기한 오독을 낳는다고 했다. 시인은 늘 앞선 시인의 영향에 대한 불안을 느낀다. 그리하여 그 강한 에고는 선배의 시를 잘못 읽는다. 그러나 억압된 선배의 시는 흔적으로서 후배의 시에 수정되어 나타난다. 블룸은 ‘시적 오독’에 관한 4부작을 통해 계몽주의 이후 영미의 주요 시인을 탐구했다.

 

✿제프리 하트만/ 하트만은 모든 것이 자리바꿈이고, 다만 과정에 의미가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비평의 사회적 책임 역시 텍스트를 서로 공유하는 상호 관련성에 있을 뿐이다. 그는 ‘연기(delay)’라는 단어의 정의를 내리면서 의미의 결정이 늦춰지는 게 아니라 의미 자체가 끊임없이 지연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해체 이론은 텍스트의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이미 스스로 해체해 버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도 했다.

 

✿J. 힐리스 밀러/ 밀러는 “모든 독서는 오독이다.”라고 설파한다. 그의 수사비평은 데리다의 ‘차이’와 폴 드 만의 수사성이 묘하게 혼합되어 단어, 이미지, 작품들의 관계가 모두 반복이고 자리바꿈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셸 푸코의 언술과 권력

 

 

미셸 푸코는 데리다의 상호텍스트성 이론이 언어를 모든 역사적, 사회적 틀에서 분리시켜 언어가 마치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취급하고 있다고 비판했던 또 하나의 중요한 포스트구조주의 계열의 사상가이다. ‘텍스트의 밖이란 없다.’ 즉, 우리는 결코 텍스트를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하며 모든 것을 텍스트와 언어의 문제로 귀결시켰던 데리다와는 달리, 푸코는 ‘글쓰기’란 복합적인 힘을 창조하는 행위이고 ‘텍스트’란 곧 이 복합적인 힘들이 권력 투쟁을 벌이는 장소라고 생각했다. 예컨대「저자란 무엇인가」에서 푸코는 언술의 힘을 통해, 그리고 특정 의미의 부여를 통해 저자가 텍스트 속에서 어떻게 독자들을 억압하고 있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지식과 권력과 억압 사이의 함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푸코가 말하는 언술행위라는 것은 곧 지식과 권력이 담합하여 만들어 놓은, 그래서 우리의 사고 체계를 지배하는 말하기와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푸코는 ‘정의’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자신의 이론을 시작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배 권력이 내세우는 정의의 개념이란 사실 그 지배 권력의 이데올로기가 합법화시킨 것일 뿐, 혁명 후에는 그것이 곧 불의로 전락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이성적이고 절대적이며 고정된 기준은 곧 임의적인 것이 되고 불안하게 되며, 드디어 해체되어 버리고 만다. 당대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영합한 공식적인 언술행위와 그것의 억압에 대한 관심은 푸코로 하여금 그러한 공식적인 언술행위가 오랫동안 제외해 온 또 다른 소외된 언술행위로 눈을 돌리게 해 주었다.

지식과 권력의 결탁은 곧 규율이라는 미명하에 행해지는 타자에 대한 온갖 억압을 합법화, 정당화시켜 주게 된다. 그런데 이 정당화는, 압제자에게는 스스로 당연한 지배자로 군림하도록, 그리고 피압제자에게는 압제가 당연한 것으로 순응토록 만든다는 점에서 압제자와 피압제자 모두를 피해자로 만든다. 감시와 규율과 교화의 목적은 비정상인의 정상화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그 정상화의 기준이 무엇인지도 문제려니와,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다소간 정상화되었다고 판정을 받는 비정상인들은 대부분 모범수가 되어 이번에는 제도적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여 동료들을 억압하는 데 앞장서게 된다는 사실이다. 권력과 지식의 이러한 결탁과, 제도적 폭력과 억압에 대한 문제는 정신병원뿐만 아니라 형무소, 복지원, 고아원, 학교, 정부, 성(性) 등의 모든 사회제도에 해당되는 것임을 푸코는 시사한다. 그것들은 너무도 교묘히 모든 것 속에 들어가 있고 너무도 널리 편재해 있어서 밖으로 태어나고 교육받으며 성장해 가기 때문이다. 푸코는 바로 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을 탐색하여 보이도록 해 주는 것이 비평가의 작업이라고 했다.『광기의 역사』『말과 사물』『지식의 고고학』『감시와 처벌』『감옥의탄생』『性의 역사』등 그의 저서들은 구조주의적 분석 방법에 큰 획을 그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시작 이론/ 푸코의 미국쪽 제자인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의 중요한 저서『오리엔탈리즘』(1978)에서 푸코의 담론 이론을 차용하고는 있지만, 푸코와 데리다를 세속성(worldiness)이 부족한 인물로 규정하고 비판을 가한 더욱 급진적인 비평가이다. 사이드는 텍스트가 산출되고 위치해 있는 역사적 순간이나 그

것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맥락은 무시한 채, 텍스트 내면의 미궁 속으로만 빠져들어가고 있는 현대 문학비평의 현황을 개탄하며, 텍스트는 고고한 고립에서 벗어나 보다 더 세속화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사이드가 말하는 세속화란 물론 텍스트의 현실인식과 역사의식, 그리고 텍스트와 현실 세계와의 긴밀한 연관을 의미한다.

사이드의『시작 이론』이 가지는 중요성은, 우선 그것이 그 동안 인류 역사를 주도해 온 지배적 언술행위의 군림과 횡포에 저항하여, 그것과 다른 언술행위를 찾아 내고 인정하며, 또 창조해 내는 데 있다.

 

신역사주의와 문화유물론

 

신역사주의 비평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폭넓게 전개되었던 해체론이 80년대 후반에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자, 역사 또는 역사주의를 다시 되돌아보기 시작하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논의되는 비평 이론의 하나로 등장했다. 지나치게 다양하고 복잡한 양상을 띠고 전개되어 독립적이고 체계적인 비평 이론으로 분류하기 어려운 신역사주의는 그러나 신비평과 해체비평에 이르는 여러 비평 경향들을 원용하여 낡고 고착된 ‘역사’의 개념을 다시 꺼내어 재조정하고 재조합해 보려는 일종의 역사 새로보기 작업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 모든 표현적 행위는 유물론적 실천의 그물망에 내재되어 있고, 문학과 비문학적인 텍스트들이 분리될 수 없다고 보는 신역사주의는 그러나 그 전략을 살펴보면 신역사주의 이론이 해체비평의 견해와 상당 부분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신역사주의와 해체주의와의 근친성을 짐작할 수 있지만, 신역사주의가 푸코의 역사주의, 후기 마르크스주의, 바흐찐의 다성성(多聲性) 이론과 카니발 개념까지 넘나들면서 해체주의와 변별성을 유지하고 이는 것은 분명하다.

 

문화유물론이란 용어는 제2차 대전 이후 영국의 좌파 전통의 진보적 정치비평가 윌리엄스(Raymond Williams)가『마르크스주의와 문학』(1977)에서 처음 사용하였는데, 그것의 실천적 활동은 제2차 대전 이후 영국에서 진행되어 온 문화 분석의 여러 형태를 토대로 하여 시작되었다. 이 작업을 통해서 역사학, 사회학, 문학연구 분야의 영문학, 여성론, 대륙의 마르크스주의적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이 혼합, 수렴되어 왔다. 알뛰세와 미하일 바흐찐의 영향하에 있는 영국 문화유물론의 기본 가설과 개념의 기저에는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가 깔려 있는데, 문화유물론은 지금까지의 문학비평의 경향과는 달리 문학을 특권화하는 것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예술이 설사 실천으로서 그 나름의 특수성을 지닌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인 사회적 과정으로부터 분리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술을 이렇듯 사회적 과정으로 보게 되면 이른바 보편적 진리라든가 인간의 본질적 본성 등에 집착해 왔던 관념적 문학비평을 넘어서는 것이 가능해진다.

 

포스트구조주의는 결코 한두 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는 복합적이고 다원적인 사조의 이론이다. 포스트구조주의가 어떤 것이 무엇을 의미하도록 강요되거나 부과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해서도 의미를 찾거나 정의를 내리려는 시도를 거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포스트구조주의의 이와 같은 속성은 그 스스로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문을 던지고 심문을 하면서 비평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서구 형이상학 전체의 전제와 가정을 극한으로까지 몰고 가 그것이 스스로의 모순으로 인하여 스스로에 대항해 해체되도록 하는 비평태도를 보인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포스트구조주의는 현대 서구 문학비평의 지평을 확대시켜 준 방대한 지적 움직임이었다. 그것은 그 동안 경직되고 고정된 서구의 이성 중심주의에 종말을 고함으로써 문학비평의 새로운 인식의 장을 열었으며, 다음과 같은 면에서 문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우선 포스트구조주의는 모든 절대적 의미의 안정된 근원을 교란시키고 해석의 불가능함을 시사하며 모든 결론을 유보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배 체제나 지배 구조에 의해 억압받는 ‘개체’의 해방을 외치며 경직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열린 사회를 지향한다. 그러나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가끔 인정하듯이 주장들에 대해 저항하려는 그들의 욕망은 숙명적으로 실패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음으로써만이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우리가 그들이 어떤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의 견해를 요약하려는 것조차도 그들의 실패를 암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코와 신역사주의자들은 그 이론이 과거를 다시 만드는 것을 도와 주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개입주의적인 이론일 수밖에 없는 새로운 종류의 상호 텍스트적인 역사 이론을 창시한다. 문화유물론의 경우 그 자체는 포스트구조주의에 의존하는 반면에 의미의 순진한 자유 유희를 해방시키기 위해 포스트구조주의가 제시한 몇 가지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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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사항>

 

ⓛ.담론(談論): ‘discourse’의 역어인 ‘담론’은 담화(談話), 언술(言述), 언설(言說)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현재 다양한 학문분야와 사상조류들에서 각기 다른 목적과 개념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담론은 말로 하는 언어에서는 한 마디의 말보다 큰 일련의 말들을 가리키고, 글로 쓰는 언어에서는 한 문장보다 큰 일련의 문장들을 가리키는 언어학적 용어이다. 한 마디 말 또는 한 문장만을 분석하는 언어학적 방법은 한 마디 말이나 한 문장이 다른 말 또는 다른 문장과 어떤 방법으로 결합되어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하는가를 보여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담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담론이란 한 문장보다 긴 언어의 복합적 단위를 가리킨다.

 

담론 이론의 범위를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미셸 푸코는 담론을 특정 대상이나 개념에 대한 지식을 생성시킴으로써 현실에 관한 설명을 산출하는 언표들의 응집력 있고 자기 지시적인 집합체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법률적 담론’, ‘미학적 담론’과 같은 말이 생겨나게 된다. 푸코는 지식의 생산과 형성, 권력의 체계 및 행사에서 담론과 권력은 구분하기 어려운 대상이라고 보았다.

한편 담론이 비평의 독립적인 영역으로 전개, 편입되면서 담론비평이 형성되기도 하였는데, 담론비평의 이론적 원류는,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에 반기를 든 바흐찐에게서 찾을 수 있다. 바흐찐은 마르크스주의가 해결하지 못하고 넘어간 언어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고, 언어를 이데올로기, 물질성, 계급 투쟁과 분리시키려는 일체의 언어론에 맞서고 있다.

②.의미작용(의미화): 하나의 기호를 만들기 위해서, 기표와 기의를 결합시키는 것을 말한다.

③.코드와 코드화: 코드화란 기의와 기표간의 관계를 약속에 의해서 기호 사용자들에게 수용시키는 기호학적 조작을 말한다. 의미 작용과 코드화는 동시에 일어나는데, 코드화가 자의적 조작이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되려면 기호 사용자들에게 코드화된 것을 관습화시켜야 한다. 커뮤니케이션은

코드화를 필요로 하지만, 의미 작용은 코드화와 동시에 탈코드화를 허용한다. 탈코드화는 예술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나타나는데, 예술의 가치를 상실케 하는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예술에 생명을 주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코드란 메시지를 한 가지 표현에서 다른 표현으로 변환시켜 주는 명료한 규칙들의 묶음이다. 즉, 코드란 ‘기호를 위한 명료한 사회적 관습들의 체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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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라만 셀던 외(정정호 외 譯)-현대문학 이론 개관(한신문화사), 레이먼 셀던(현대문학이론연구회 譯)-현대문학 이론(문학과지성사), 문덕수-현대의 문학이론과 비평(시문학사), 이명재-문학비평의 이론과 실제(집문당), 권택영-후기 구조주의 문학이론(민음사), 김용권-현대문학 비평론(한신문화사), 윤호병-후기구조주의(고려원), 인문과학연구소(편)-현대 문학비평 이론의 전망(성균관대학교 출판부), 움베르토 에코-기호학 이론(문지), 자크 라캉(권택영 엮음)-욕망 이론(문예출판사), 김경용-기호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 한국기호학회 엮음-문화와 기호(문지), 한국기호학회 엮음-현대사회와 기호(문지), 이상우 외-문학비평의 이론과 실제(집문당), 이승훈(편집)-현대시사상ㆍ2(고려원, 1988)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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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피앙의 유희-해체시 읽기>

 

‘살려다오./북 치는 어린 곰을 살려다오./북을 살려다오./오늘 하루만이라도 살려다오./눈이 멎을 때까지라도 살려다오./눈이 멎은 뒤에 죽여다오./북 치는 어린 곰을 살려다오./북을 살려다오.’(김춘수「처용단장-제2부, 3」, ‘불러다오./멕시코는 어디 있는가,/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말더듬이 一字無識 사바다는 사바다,/멕시코는 어디 있는가,/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불러다오./멕시코 옥수수는 어디 있는가,’(同,4). ☞ 대상과 주제가 없이도 시가 될 수 있을까라는 해체적 인식 끝에 얻은「처용단장」제2부는 일체의 관념이나 설명이 제거되고 증발된 탈관념의 세계요, 통일된 어떤 아이콘[像]으로서의 이미지도 없는 탈이미지의 세계이다. 언어와 언어, 또는 문맥과 문맥 사이의 단절과 차단으로 중심이 사라지고, 어느 것 하나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언어 기호는 그 고유한 의미를 잃고 오직 무한한 상호지시의 관계로 존재할 뿐 재현적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 아내의 간통 장면을 목격하고도 춤추며 노래한 처용의 그 기이한 행위처럼, 일상적 혹은 논리적 의미체계를 일거에 소거시킨 이 비논리적 리듬의 연속성은 의미가 스며들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오직 애절한 분위기의 주술적 충격으로만 전해 온다. 기호학적으로 말하면 시니피에의 끝없는 미끄러짐을 뒤덮고 물결치는 시니피앙의 화려한 유희, 즉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이 전복된 탈중심의 소용돌이(궤적)가 현저한 상태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것은 마치 돌아가는 긴장으로 하여 팽이가 일어서듯, 그리고 현기증 나는 회전으로 하여 울음 울 듯 시니피앙의 유희와 울림의 효과만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 탈중심 탈이미지의 세계는 현기나는 리듬의 실존적 환열 바로 그것이다. (조명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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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번역 문제의 몇 사례>

 

(1) p.184-7~9행:만일 구조주의가 영웅적으로 인위적인 기호 세계를 지배하려는 욕망을 품었다면, 포스트구조주의는 희극적이고도 반영웅적으로 그러한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한신문화사)/만일 구조주의가 인간이 만든 기호의 세계를 정복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영웅적인 것이라면, 후기 구조주의는 그러한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희극적이고 반(反)영웅적인 것이 된다.(문학과지성사), p.185-4~6행:이것은 마치 다양한 언어들이 한편으로는 사물들과 이념들의 세계를 다른 개념(기의)들로 조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단어들(기표)로 구성하는 것과 같다.(한신)/그것은 마치 여러 언어들이 사물과 관념의 세계를,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개념(‘지시어’)과 또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언어(‘지시 대상’)로 분리하는 것과도 같다.(문지), pp.185-맨 아래~186-1~2행:소쉬르는 언어가 물리적 현실과 독립된 하나의 총체적 체계라고 설정한 후, 비록 기호를 두 부분으로 분리시킨 것이 기호의 일관성을 없애고자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호의 일관성에 관한 감각을 보유하고자 노력했다.(한신)/언어를 외적 현실과 독립된 완전한 체계로 확립시킴으로써, 그는(*소쉬르) 비록 기호를 둘로 나누는 것이 그것의 응집력을 위협하는 것이긴 했지만, 기호의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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