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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것들, 은유 | 양선규
2018년 11월 03일 20시 17분  조회:895  추천:0  작성자: 강려
  빛나는 것들, 은유               


                                    양선규(대구교육대학 교수)

 

 

아래에 소개하는 시는 우리 내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상작용 중의 한 극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인의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것들이 유관한 이미지들의 도움을 받아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시인의 상상작용만으로 한 편의 시를 만들어내고 있는 경우가 됩니다. 시인은 조급증이 애초에 없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아니면 그 조급증과 안에서 피터지게 싸우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저로서는 상당히 저의 조급증과싸우면서 읽은 시입니다. 조급증을 내서는 도저히 읽어낼 수 없는 시입니다. 시에 관심 없는 분들은 아예 건너뛰시는 게 조금이라도 덜 억울한 일이 되지 싶습니다.

 

 

등대가 보이는 커브를 돌아설 때 사람이나 길을 따라왔던 욕망들은 세계가 하나의 거울인 곳에 붙들렸다 왜푸른빛인지 의문이나 수사마저 햇빛에 섞이고 마는 그곳이 금방 낯선 것은 어쩔 수 없다 밝음과 어둠이 같은느낌인 바다

 

바다 근처 해송과 배롱나무는 내 하루를 기억한다 나무들은 밤이면 괴로움과 비슷해진다 나무들은 잠언에 가까운 살갗을 가지고 있다 아마 모든 사람의 정신은 저 숲의 불탄 폐허를 거쳤을 것이다 내가 만졌던 고기의 푸른 등지느러미, 그리고 등대는 어린 날부터 내 어두운 바다의 수평선까지 비추어왔다.

 

돛이 넓은 배를 찾으려고 등대에 올라가면 그 어둔 곳의 바다가 갑자기 검은 비단처럼 고즈넉해지고 누군가가 불빛을 보내고 그의 향로와 내 부끄러움을 빗대거나…… 죽은 사람이 바다 기슭에 묻힐 때 붉은 구덩이와흰 모래를 거쳐 마침내 둥근 지붕 생기고 그 아래 파도와 이어지는 것들…… 혼자 낡은 차의 전조등 켜고 텅 빈국도를 따라가면 고요를 이끌고 가는 어둠의 집의 굴뚝이 보인다, 낯선 이가 살았던 어둠, 왜 그는 등대를 혹은푸른빛을 떠나지 못하는가

 

바다를 휩쓸고 지나가는 햇빛은 폭풍처럼 기록된다, 그리고 등대

─ 「푸른빛과 싸우다 - 등대가 있는 바다」 송재학 시집 『푸른빛과 싸우다』(문학과지성사, 1994)

 

 

이 시를 한 번 읽고서는 시인이 무슨 뜻을 전하려는지 금방 알 수가 없습니다. 아름다운 것들이 얼핏얼핏 보이는데 그게 일상의 언어로, 자동적으로, 치환되지 않습니다(언어의 비자동화가 강조되는 시스템 언어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를 다른데서 찾으면 안 되겠습니다. 스스로를 무지하다고 탓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우선 시인은 아무나 그저 한번 후딱 자기 시를 읽고 지나치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고 생각해야 할 것같습니다. 조급증을 되게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조급증 내지 말고, 찬찬히 생각해야 합니다. 비단 이런 이미지 중심의 시를 읽을 때가 아니더라도, 주로 섣부른 전문적(?) 독자들이 자주 범하는 실수이기도 합니다만, 자기 문맥으로 시가 들어오지 않으면 막말로 ‘난해하다’는 등의 말을 내뱉으면서 쉽게 시를 버리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래서 ‘무조건 쉽게 쓰는 게 도덕이다’라는 말도 안 되는 불문율이 돌아다니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인이 시를 쓰면서 보낸, 그 아름답거나 절망적인 시간들을 반드시 충분히고려해야 합니다. 스스로에게 내 아름다움이 무엇이고 내 절망이 무엇이냐를 지속적으로 물어주어야 합니다.시인은 그저 시인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어렵지 않으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들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는 입에 넣기만 하면 자기가 알아서 녹는 달콤한 초콜릿이 아닙니다(그 안에 깨물어 먹어야 할 아몬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시를 읽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시를 읽을 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시는 뜻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뜻으로 매겨지지 않는 그 어떤 것들로 가득합니다. 시인은 뜻보다는 오히려 그 다른 쪽들에 관심이 더 많은 사람입니다. 언어라는 것이 겉으로 뜻에 목을 매고 있는 것처럼보이기는 합니다만 시인들은 가차 없이 그 허구를 들추어냅니다. 시인은 항상 뜻을 넘어서는 그 무엇을 추구합니다. 우리가 시어의 총체성이라는 말로 부르기도 하는 것들, 이를테면 말뜻(Sense), 느낌(Feeling), 어조(Tone), 의도(Intention) 등을 두루 살펴야만 우리는 ‘시인의 시간’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푸른빛과 싸우다’라는 이 시, 이 기록을 남기는 발화자(시인)의 ‘시를 쓰는 목적’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물론 이 시에 나타난 것을 중심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적 발화의 ‘의도(Intention)’에큰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정도의 큰 방향이 가능하겠습니다. 하나는, 마치 화가가 좋은 풍경을 풍경화로 남기고 싶어 하듯이, 시인도 ‘등대가 있는 바다’를 서정적으로 멋지게 한번 그려보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방향에서라면 이 시에 나타난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이미지들을 음미하면서 우리도 느긋하게그와 함께 등대가 있는 바다를 한번 그려보면 됩니다. 그것으로 끝나면 그냥 끝내면 됩니다. 만약, 그러고 말기에는 무언가 미진하다는 생각이 들면 그 ‘그림’ 위에다 다시 한 번 내 물감으로 덧칠을 해 보면 됩니다. ‘내안의 풍경’을 꺼내서 그것에다 겹쳐 보면 됩니다. 아마 우리는 후자 쪽을 택해야 될 것 같습니다. 이 시가 ‘풍경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인 자신의 ‘내면의 성찰’을 목적으로 작성된 것이라는 짐작은 이미 ‘푸른빛과싸우다’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들었던 사실입니다. 시인의 ‘싸움의 기술’을 잘 읽어내어야 한다는 각오가 처음부터 들게 합니다. 이미 그 언사에서부터 시인이 삶과 죽음을 하나의 ‘수평선’ 위에서 바라보는 ‘삶의 등대지기’를 자처하는 것 같은, 어떤 구도자와 같은, 느낌을 받았고, 싸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 ‘푸른 빛’이 발산해내는 그 신비한 아우라에도 약간 주눅이 들기도 했습니다. 다음 장에서 살펴볼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와 같은 시와는 벌써 제목부터 다릅니다. 그런 느낌을 출발점으로 해서 이 시가 어떤 식으로 ‘자기 성찰’의 과정을형상화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성찰의 내용은 과연 무엇인지를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시인의 의도를 ‘내면 성찰’ 쪽에서 살피려면 우선 그가 내세우는 ‘푸른빛’의 의미부터 알아야 하겠습니다. 물론 사전적 의미의 ‘푸른빛’은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합니다. 시가 전달하고자 하는 함축적 의미는 늘 사전에없는 것입니다. ‘싸움’의 대상이니까 ‘즐거움’보다는 ‘고통’의 색깔일 텐데 우리는 그 ‘고통’이 어떤 내용인지알 수가 없습니다. 이 시에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적 삶이 서로 대립적인 그 무엇으로 설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기억 그 자체가 고통인지, 아니면 현재의 삶을 아프게 반추(반성)하도록 강요하는 과거의 기억 때문에 현재가 고통인지 그 자세한 내막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시인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을 아낍니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이리저리 독자를 미로 속으로 안내하는 것을 보면, 시인은 어쩌면, 그런 사실적인 것(원인)에 관심하지 말고 ‘고통’ 그 자체에만 집중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통 없는 자는 내 시를 읽지 말기를 바란다’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시인이 이 시를 쓴 진짜 목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통의 공유, 시 내용은 그 다음 문제고, 시인은 고통(기억)을 잊지 않는 삶 그 자체를 문제 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시에는 이른바 ‘비유와 상징’이 개인적인 경험, 혹은 오래된 트라우마를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짜여 있습니다. 특히 ‘나무’와 ‘등대’는 전적으로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이미지들이어서, 그 상처의 근원을 모르는 독자들은 쉽게 의미의 그물을 짜기가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첫 줄부터 그렇습니다. ‘등대가 보이는 커브를 돌아설 때 사람이나 길을 따라왔던 욕망들은 세계가 하나의 거울인 곳에 붙들렸다’라는 말을 ‘등대가 있는 바다(세계의 거울)에 도착하자 나는 망연자실했다(세속적 욕망들의 행진이 일순 정지했다). 그곳에서 나는 내 삶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읽고 싶은데, 그 뒤를 보면 ‘왜 푸른빛인지 의문이나……금방 낯선 것은어쩔 수 없다’라고 그런 식으로 독자가 쉽게 읽어내지 못하도록 하는 어깃장 문맥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남의일로 치부하고 쉽게 읽어내는 시 읽기를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는 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만, ‘왜 푸른빛인지 의문이나’라는 말을 위안 삼아 다음 줄로 넘어갈 수밖에 없겠습니다. 시인 스스로 ‘모르겠다(의문이다)’라는 표현을 쓴다면 십중팔구는 그 부분이 트라우마의 원적지라는 말입니다(알면서도 모르는 것이 그들의 실체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는 분명합니다. 아마 시인은 그 장소에서 ‘상처 입은 주체’가 되는 자극(충격)을 경험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푸른빛’으로(색채 이미지로) 감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둘째 연에서는 이 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한두 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하루를 기억하는’ 것은 우선 ‘바다 근처 해송과 배롱나무’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그 나무들은, 특히 밤이면, ‘잠언’처럼‘나’에게 다가와서 ‘기억’을 환기시킵니다. 그것이 괴롭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고기의 푸른 등지느러미’, ‘등대’, ‘내 어두운 바다의 수평선’과 같은 또 다른 ‘내 하루를 기억’하는 것들에 대해 말합니다. 그것들은 ‘해송과 배롱나무’와는 달리 한 번 더 가공된 기억들입니다. 유년기의 ‘상처’가 긴 세월 숙성기를 거쳐그렇게 몇 개의 단어들로 삼투압된 것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인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어떻게든 의식화(의미화)하겠다는 의지를 읽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런 식의 사후작용事後作用이 어떤 의미화를 이루어내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어쩌면 말로 표현해 낼 수 있는 경계선 밖의 것을 생각하고있는 지도 모를 일입니다(시인 자신에게도 불가능한 것인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다만, 자신이 그 과정에 들어와 있다는 것만을 말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인은 앞에서도 ‘푸른빛’이라고만 말하고는 더 이상 그내용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내용을 독자가 알아서 채워 넣으라는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은 결국 자신의 고통으로 환치될 때 비로소 ‘의미’가 될 수 있을것입니다. 시인은 그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시인이 계속해서 모호한 발화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둘째 연까지 읽어도 여전히 ‘푸른빛’을 이해하는 데에는 미진함이 남습니다. ‘고통’과 관련된 말이라는 것 이외에는 별로 더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기억하기 싫은 과거의 어떤 기억과 싸운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도전입니다. 시인도 어쩌면. 그런 까닭에서 그저 ‘푸른빛’이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그런 의심마저 듭니다.

 

셋째 연으로 가 보겠습니다. 셋째 연은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부분은, 등대에 오르는 것이 과거의 기억인지 현재의 경험인지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게 해서 바다를 바라보는 경험이 ‘검은 비단’과도같은 심리상태를 선사하는 것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무겁고 부드러우며 균질적인 매끄러움이 있는 세계, 안정감이 있는 어떤 심리적 에너지가 현재 자기 안에서 운행되고 있다는 말로 들립니다. 시인은, 그런 바다 앞에섰을 때 돌연히 ‘부끄러움’이라는 정서가 환기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그 다음 부분에서는 죽음을관조하고(시인은 바닷가 무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지금도 ‘기억’ 혹은 ‘푸른빛’을 떠나지 못하는 심정을 반추합니다. 마지막 부분, ‘왜 그는 등대를 혹은 푸른빛을 떠나지 못 하는가’라는 말이 이 시를 주제의 차원에서 대표하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등대’는, 넷째 연에서 그것이 다시 반복되는 것을봐도 알 수 있듯이, 모든 ‘어린 날’의 ‘기억’을 대표하는, 혹은 통어하는, 하나의 중심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굳이 그 관습적 상징의 의미를 들추자면, 지상에 수직으로 서서 먼 바다의 행로에 한 줄기 빛을 선사하는, 화자 자신의 자기실현에 대한 강한 의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연은 그 날, ‘푸른빛’을 만나던 그 날의 심정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읽을 수가 있습니다. ‘햇빛’이 ‘폭풍처럼 기록된다’는 것은 그만큼 주체가 입은 상처의 흔적이 컸다는 뜻입니다. ‘햇빛’의 원관념이 ‘강렬’이 되든 ‘각성’이 되든 ‘경탄’이 되든 ‘경악’이 되든 그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이강렬하게 자신의 내면에 금이 간 한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만 알면 될 것 같습니다.

이 시를 읽고 우리가 정리할 수 있는 의미의 영역은 아주 협소합니다. 시인이 스스로 ‘상처 입은 주체’임을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의 상처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시인이 그것을 감추는 것을 통해 그것을 말하는 방식으로 시의 형식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말하고 있는 내용과 관계없이우리는 그러한 ‘시의 형식’을 통해 ‘주체의 분열’이라는 상황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굳이 심리학적 용어를 동원한다면, 이 시의 내적 형식은 자기 분열이 주는 이화異化의 고통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차원이라면, 시인은 자기 분열이 주는 이화의 고통을 색채 이미지 ‘푸른빛’이라는말로 상징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푸른빛’과 싸운다는 것은 결국 시인 자신이 새로운 자기통합의 과정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일 수도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시의 주제를 찾아보겠습니다. 시에서 주제는 항상 마지막 주자입니다. 단체전의 주장이지요. 주장이라고 늘 어깨가 무거운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 승부를 결정지으면 주장의 경기는 그저 ‘폼생폼사’일 수도있습니다. 시에서 주제의 위상이 딱 그렇습니다. 만약 그것이 나서서 승부를 결정짓는 수준이라면 그 시는 일류 시가 아닙니다. 하이데거의 ‘일상성日常性과 본래성本來性’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면 좀 쉬운 해설을 할 수도있을 것 같습니다. 보다 실존적인 층위에서 포괄적인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포괄적이긴 하지만, 그것이 포괄하는 범위가 넓은 만큼, 뜻 전달의 모호성이 강한 이 시의 ‘설명과 이해’에는 오히려 적절한 ‘서술어’의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은 그것을 비본래적으로 사용하여 대지 위에 문화라는 울타리를 건설하고 뿌리 없는 불안정한 생존 조건을 극복하여 일상성이라는 안락한 거소居所를 이룩하였다. 그러한 일상성 속에서 사는 일상인으로서 그는 오랫동안 어머니인 대지를 망각하고 자신을 오히려 문화의 테두리 안에 길들임으로 해서 울타리의 존재마저도 잊고 있었다. 그의 생활방식은 그러므로 근본적인 의미에서 볼 때 본래성으로서의 자연인 대지와의 단절을 심화시키는 비본래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문화의 테두리 안에서 자연과의 단절은 비록 삶의 표면에 있어서는 안락하고 평화스러운 것이었으나, 때때로 그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동안에 자신의 깊은 가슴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형언할 수 없는 불안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 불안은 일상적인 생활에서의 근심이나 걱정과는 달리 일정한 대상을 갖고 있지 않은, 알 수 없는 무無로서, 근원적인 물음에 부딪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이 불안은 그러므로 비본래적인 삶을 사는 인간이 오히려 배반했던 대지에 대해 가지는 그리움이요, 또는 망각하고 있던 본래성으로부터 흘러오는 거부할 수 없는 종소리와 같은 것으로서 일상언어(비본래적인 언어)를 갖고 사유하는 그에게 일상성에 대한 배반을 요구하는 불안이다.” (하이데거, 이진흥, 『한국현대시의 존재론적 해명』(홍익출판사, 1995)에서 재인용)

 

 

위의 인용문을 보면 「푸른빛과 싸우다」에서 왜 ‘푸른빛’의 실체가 모호하게 처리될 수밖에 없었는지가 설명이 됩니다. 그것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동안에 자신의 깊은 가슴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형언할 수 없는 불안’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무들은 잠언에 가까운 살갗을 가지고 있다’는 표현도 저절로 이해가 됩니다. ‘나무들은 내 본래성을 비추어주는 거울이다’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정신은 저숲의 불탄 폐허를 거쳤을 것이다’라는 생각도 자연스럽게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성에서 멀리 떨어져나온 우리는 모두 ‘불탄 폐허’ 위에서 ‘안락한 일상성의 거소’를 지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시는 시인의 일상성이 ‘본래적 자아’ 혹은 ‘불안’을 만나 ‘배반’을 강요받았던 경험에 대한 진술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시인에게는 특히 ‘일상성에의 몰입’이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일 수가 있습니다. 그는 타고난 ‘대지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푸른빛과 싸우다」의 시인은 ‘대양大洋의 아들’을 자처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대양’과 ‘대지’가 그저 이음동의어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모를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족 한 마디. 지금까지 저는 「푸른빛과 싸우다」라는 시와 한 판 ‘소리 없는 전쟁’을 치렀습니다. 시인의실존이 처음부터 끝까지 규칙을 어기며 도발해 왔지만 저는 그의 반칙에 일일이 대꾸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일상을 같이 나눈 친구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저의 이 싸움은 오늘 처음 있는것이 아닙니다. 이미 오래 전에 이루어진 ‘싸움의 기록’입니다. 앞서 나온 저의 다른 책에도 이미 실려 있는 내용입니다. 약간의 수정이 있기는 했지만 거의 똑같은 내용입니다. 다시 그것을 옮겨 적으면서 느끼는 소감은처음 때와 거의 대동소이합니다. 시의 이미지 중에는 하늘에서 내리는 것도 있고 바다에서 건져올린 것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이 시의 이미지들은 바다 깊은 곳에서 건져올린 것들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바다는 늘내 안에 있습니다. 바다에 큰 해일이 몰려올 때 안에 든 것들이 솟구쳐 오릅니다. 그러나 늘 잔잔한 바다일 때는 이 시에서처럼 우정 스스로 ‘등대’가 되어 그것들을, 저 깊은 곳에서, 비추는 길밖에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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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현대시에 나타난 비유효과/박종인(시인) 2019-05-19 0 2285
55 [스크랩] 문학용어 바로 알기 2019-03-10 0 1572
54 언어학자는 은유를 어떻게 보는가 2019-03-09 0 1656
53 이미지즘(Imagism) 2019-03-07 0 2257
52 소통, 그 은유의 불빛들 / 김수우 2019-03-07 0 1507
51 詩의 용어들 2019-03-07 0 1387
50 초현실주의 시 / 홍문표 2019-02-28 0 1460
49 365일 탄생화와 꽃말 사전 2019-02-28 0 2309
48 상징주의 리해 2019-02-27 0 1201
47 한국 사투리 모음 [퍼옴] 2019-02-25 0 2484
46 ◈ 필수(必須) 사자성어(四字成語) 72가지 2019-02-25 0 1018
45 ◈ 우리 속담(俗談) 모음-ㄱ-ㄴ-ㄷ 순 2019-02-25 0 1026
44 [공유] [dc도갤 펌] 낯설게하기(Defamiliarization) 관련 정리 2019-02-09 0 1388
43 영미 모더니즘과 현대시에 나타난 모더니티 2019-02-04 0 1706
42 영시의 이미지 2019-02-04 0 1163
41 [공유] 시에서의 36가지 수사법 2019-02-02 0 2939
40 폭력적인 그러나 아름다운 은유를 기다리며 / 양병호 2019-02-01 0 1026
39 낯설게 하기(시치미떼기) 2019-02-01 0 1112
38 원관념과 보조관념 / 박병규 2019-02-01 0 1380
37 의식의 흐름 (이상섭. 문학비평용어사전) 2019-02-01 0 1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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