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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
2019년 01월 14일 21시 22분  조회:1467  추천:0  작성자: 강려
후기 롤랑 바르트
 
“글쓰기는 우리의 주체가 도주해 버린 그 중성, 그 복합체, 그 간접적인 것, 즉 글을 쓰는 육체의 정체성에서 출발하여 모든 정체성이 상실되는 음화(negative) 이다.”
1. “나는 ~을 좋아한다”
나는 롤랑 바르트를 좋아한다. 그러나 누가 나에게 롤랑 바르트가 어떤 사람인가요 하고 묻는다면, 나는 더듬거리면서, 바르트를 치장하는 형식적인 단어 몇 가지로 그를 설명하려고 애쓰리라. 즉 나는 몇 가지의 단어를 알고는 바르트를 좋아한다고 떠벌인다. 그렇다면, 나는 다시금 살펴보아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롤랑 바르트’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그리고 바르트 본인은 정작 어떤 사람인지.
이렇게 해서 나는, 조금의 생각할 시간을 가진 후, 이 글의 첫 문장을 다음과 같이 고친다; 나는 롤랑 바르트의 문체, 특히 <사랑의 담론에 의한 단상>(<사랑의 단상>이라고 번역됨. 문학과지성, 김희영 옮김)에서의 그의 글쓰기를 좋아한다. 커다란 혹은 추상적인 주제를 다루면서 그는 주제와 그다지 상관이 없을 듯한 사소한 일∙사물들에 집중하여 그것의 모습을 섬세한 펜터치로 묘사를 한다. 그러한 단상들은 색종이 조각들처럼 여기저기 모아지고 흩어지면서 하나의 형태/모자이크를 이룬다. 나는 그 조각들의 색깔을 보면서 감탄한다. 색종이 조각들의 틈새, 그 휴지부들 또한 내가 메우어서 형태를 완전히 하게 만들거나, 혹은 그 틈새의 빔[空虛]에 의해 주제를 확장, 또는 주제에서 벗어나게 만들도록 유도한다. 그것은 나에게 책을 읽는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 
이 즐거움을, 나는 좀더 이성적으로 알고자 한다. 또한 구조주의자에서부터 기호학자, 포스트 구조주의자까지, ‘현기증 나는 전이’라고 까지 불리우는 롤랑 바르트의 정체를 밝히고 싶다. 이러한 작업은 우선적으로 롤랑 바르트의 역사적∙사회적∙문화적 위치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나는 롤랑 바르트를, 그의 글쓰기의 정체를 구조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포스트구조주의에 위치하는 후기 바르트를 구조적으로 파악하려는 것은 잘못 끼우는 단추일까?
2. 계보적 나열
2-1. 이후(post)로서의 구조주의
후기 롤랑 바르트 혹은 후기 구조주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구조주의에 대한 윤곽이 어느정도 숙지되어 있어야 하나, 구조주의가 일정한 틀을 가지고 있는 거대 담론이 아닌 탓에 그 윤곽을 파악하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구조주의를 그 전 단계의 사상들의 후기(post)로서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이정우의 <시뮬라크르의 시대>에 의하면 구조주의는 19C 이래 전개되어온 실증주의, 변증법, 주체철학(임의적 용어)과 동시에 대립하면서 등장했다.
멘느 드 비랑에서 실존주의로 이어지는 반성(反省)철학(내면의 철학)과 정면 대립함과 동시에, 경험주의적(유명론적)인 실증주의에 반하는 구조주의는 기본적으로 합리주의(실재론적)를 표방한다. 현상을 바로 그렇게 만드는 본질적인 것을 찾는 입장인 합리주의의 전통 속에 위치지울 수 있는 구조주의는 대상 이면에 법칙성이 선재(先在)한다고 가정한다 . 또한 그것은 거대 이론으로서의 변증법과는 달리, 각 영역에서 구체적 연구를 행한 후, 서로 얽히면서 복잡한 장을 형성함으로써 거대 이론의 약점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칸트적 의미에서의 선험적 주체를 이어받고 있는 헤겔, 후설,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로 이어진 사조(현상학, 주체철학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가 갖고 있던 이분법—인식론[對象]과 반성철학[人間]의 양분 구도—과는 다른 시각으로, 즉 자연(대상)이 아닌 사람과 문화를 결정론적(과학적)으로 다루었다. 다시 말하면, 구조주의는 과학적 토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증주의의 한계를 벗어나 있고, 거대 이론이면서도 변증법적 무모함을 벗어나 있으며, 인간과 사회를 사유하면서도 현상학적 주체주의를 벗어났다.
그러나 68혁명을 분기점으로 구조주의가 갖고 있는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첫째, 구조주의는 시간을 제거해버린 공간적 사유(빠롤보다 랑그를, 통시적 사고보다 공시적 사고를 선호)라는 것, 둘째, 결정론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구조주의는 우연과 불연속의 문제에 대해서 설명을 할 수 없다는 것, 셋째, 법칙화할 수 없는 몸/신체의 가변성, 역동성, 개체성, 주체성 등에 대해서 역시 설명할 수 없다는 점, 시간, 카오스, 욕망, 권력 같은 개념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구조주의자들은 자신의 사유 이후(post)에 천착하기 시작했다.
2-2.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구조주의는, 부언하자면, 이전에 과학적인 기호 세계를 인위적으로 만들고자 했던 자신들의 모습(구조주의)을 조롱하면서 1960년대 후반에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반석이었던 소쉬르의 언어 이론에서 역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는데, 그는 랑그는 개별적 표현행위인 빠롤을 지탱하는 체계적 언어 양상이라고 한 반면(구조주의적 맥락), 기호는 기의와 기표로 이루어지고 이 둘의 관계는 필연적이지 않다고 하였다(포스트구조주의적 맥락). 이것은 곧, 의미화 과정이 불안정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기호는 두 층위(기의/시니피에와 기표/시니피앙) 사이에 존재하는 순간적 ‘고정물’임을 의미한다. 여기에 주의를 집중시킨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미끄러지는 기의로부터 저항하는 기표의 새로운 위치 형성에 천착한다. 그들은 ‘항존하는’ 언어 구조에 의해 ‘주체’가 형성된다는 기존의 자신들의 입장(구조주의)이 개인들의 주관적 과정을 거세시킨다고 보면서, 언어는 몰개성적 체계가 아닌, ‘사용중인’ 언어, 즉 주관적인 과정들과 항상 접합해 있다고 간주하고 ‘말하는 주체’ 혹은 ‘과정 안의 주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이는 언어가 항상 역동적이며 사회적 맥락 속에서 사용되어진다고 보는 바흐친 학파와 유사한 맥락을 갖고 있으나,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단지 담론만이 존재할 뿐이다”라는 슬로건을 강조한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또한, 주체는 객체를 파악하고 그것을 투명한 언어 매체로 표현한다고 주장한 경험주의적 전통에 반기를 들고, 주체와 객체는 분리할 수 없으며 지식은 주체의 경험에 선행하는 담론들로부터 형성된다고 보는 ‘담론적 형성 discursive formation’ 이론을 내세우면서 주체는 언제나 ‘과정 중에’ 있으며, 자율적이고 통합된 정체성은 없다고 주장한다. 푸코는 이러한 담론적 형성의 권력/지배에 대한 관계에 천착하면서, 담론은 모든 제도권이 사회를 지배하고 질서를 부여할 때 사용하는 매체이므로 권력과 분리될 수 없다고 역설하는 반면, 담론 이론에 중요한 기여를 한 루이 알뛰세는, 푸코가 너무 비관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로서 담론을 대체하고 그것의 이론화를 제안한다. 그는 우리가 우리로 하여금 모두 사회 구조 속에서 일정한 입장을 취하도록 소환(호명 interpellation)하는 이데올로기의 ‘주체들’이라고 주장하면서, 라캉의 정신분석을 활용하여(좀더 정적(靜的)으로), 상상계적 단계로부터 파생된 통합된 주체성이라는 환상을 거부하고, 자아의 의식적 생활과 욕망의 무의식적 생활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는 영속적으로 불안정한 실체라고 정의 내린다.
3. 롤랑 바르트
구조주의에서 후기구조주의로의 움직임은 부분적으로는 작품에서 텍스트로의 움직임이다 
(테리 이글턴, <문학 이론 입문>, 창작과비평, 1986, 171쪽)
바르트의 후기를 결정 짓는 것을 한 단어로 압축하자면 텍스트(론)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에서 텍스트로의 움직임.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텍스트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이 작품과 다른 점은? 상식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텍스트’라는 용어는 ‘글’이라는 광범위한 의미를 나타내는데 쓰인다. 이 쓰임새는 최근의 포스트구조주의적 담론의 유입/유행으로 인해 더욱 그 범위를 넓혔는데, 단순히 문자를 매개체로 하는 ‘글’을 가리키는 것 뿐만 아니라, 어떤 내용/사건/의미를 갖고 있는 갖가지 표현수단들을 지칭하고자 한다; 한 영화가 갖고 있는 ‘텍스트’, 공간의 ‘텍스트’, 등등.. 반면 형식주의나 구조주의 비평가들이 말하는 텍스트는 “문학 작품의 현상적인 표면, 즉 작품 안에 나타나는 말들의 짜임으로 단일하고도 안정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을 가리킨다.(바르트, ‘Texte’, 세계 대백과 사전)
텍스트는 직물을 뜻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사람들은 이 직물을 그 뒤에 다소간의 의미(진리)가 감추어져 있는 하나의 산물, 완결된 베일로 간주해 왔다. 이제 우리는 이 직물에서 지속적인 짜임을 통해 텍스트가 만들어지며 작업하는 생성적인 개념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 직물, 이 짜임새 안으로 사라진 주체는 마치 거미줄을 만드는 분비액을 토해 내며 약해지는 한 마리의 거미와도 같이 자신을 해체한다. 우리가 신어 사용을 좋아한다면, 우리는 텍스트론을 거미학(hyphologie, 그리스어 어원인 히포스[hyphos]는 직물/거미줄을 뜻한다)이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텍스트의 즐거움>, ‘이론’, 111쪽)
3-1. 거미학(Hyphologie)
바르트가 말하는 ‘텍스트’를 ‘작품’과 비교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테리 이글턴이 말한 것처럼 이 둘을 가른다면, ‘작품’은 구조주의를, ‘텍스트’는 포스트구조주의를 상징할 수 있는 용어라 할 수 있다. 구조주의적 관점에서의 ‘작품’이 단일하고도 안정된 의미를 드러내는 기호체계라면, 이런 고정된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무한한 기표들의 짜임이 곧 텍스트이다. '작품'은 항상 이분법적인 구조로서(상징/비상징, 정신/물질) 지금까지 비평이 추구해 온 것이 총체적이고도 단일한 의미(기의)의 발견과 재구성에 있다면 그것은 의사소통이 지니는 결정적이고도 고정적이며 목적론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문학은 언어이며, 이 언어는 내용이 아닌 구조, 그 순수한 형태 체계안에서 연구되어야 한다”며 문학을 과학적으로 실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구조주의자 바르트는 점차 이런 로고스 중심주의에 입각한 작품이라는 개념으로는 의미의 흔들림과 다양한 층을 포착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바르트는 크리스테바의 작업, 즉 기의가 생산되기 이전 기표들의 역동적인 유희 및 작업에 시선을 돌려 기표에 자율성을 부여한 작업에 영향을 받아, 텍스트를 다각적이고도 물질적, 감각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기표의 무한한 의미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열린 공간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정의내리게 된다. 그렇게 하여 텍스트는 더 이상 ‘작품’이 아닌 ‘언어 생산의 장’으로 변모한다. 
텍스트가 더 이상 산물이나 기의의 창 창출 도구로 간주되지 않고, 의미 실천의 장, 언술 행위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된다면, 이젠 글읽기가 창조적 행위로 변모된다. 바꿔 말하면 저자의 위치는 배제된다. 저자란 중세 이후에 종교개혁의 개인적 신앙, 합리주의, 실증주의와 더불어 생겨난 자본주의의 소산물이다. 이런 저자의 제국은 말라르메 이후 흔들리기 시작하며, 글쓰기를 위해 저자를 제거하는 작업이 시작된다. 이후 저자의 탈신성화, 언술행위가 하나의 텅 빈 과정이라고 보는 언어학, 바흐친의 상호 텍스트 개념은 우리에게 저자가 더 이상 글쓰기의 근원이 아니라는 것을, 글쓰기에는 기원이 부재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따라서 저자라는 개념은 이제 설 자리가 없으며, 다만 여러 다양한 문화에서 온 글쓰기들을 배합하며 조립하는 조작자, 또는 남의 글을 인용하고 베끼는 필사자(scripteur)가 존재할 뿐이다.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에서 , "저자를 계승한 필사자는 이제 더 이상 그의 마음속에 정념이나 기분, 감정,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고, 다만 하나의 거대한 사전을 가지고 있어, 거기서부터 결코 멈출 줄 모르는 글쓰기를 길어올린다. 삶은 책을 모방할 뿐이며, 그리고 이 책 자체도 기호들의 짜임, 상실되고 무한히 지연된 모방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제 이런 저자의 배제는 독자의 탄생을 불러들인다. 그런데 이 독자는 심리나 역사가 부재하는, 다만 <글쓰기를 이루는 모든 흔적들을 모으는 누군가>일 뿐이다. 독자는 그의 일시적인 충동이나 기벽, 욕망에 따라 텍스트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해체하는 자이다.(<저자의 죽음>) 이렇게 바르트는 저자와 독자, 글쓰기와 글읽기, 창작과 비평, 실천과 이론 등 그 이분법적인 경계를 파기하고, 즐거움의 대상으로서의 텍스트를 실천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3-2. 육체의 즐거움
“그 독자, 나는 그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를 찾아나서야 한다(나는 그를 <꼬셔야/유혹해야>[draguer] 한다). 그때 즐김의 공간이 생겨난다. 내게 필요한 것은 타자의 <인간>이 아니라 공간이다. 욕망의 변증법, 예측불허의 즐김이 가능한 그런 공간”(<텍스트의 즐거움>, 51쪽)
 
글읽기의 주체는 더 이상 소비자가 아니라 의미 생산의 주체로서 의사 소통적/표현적/재현적 언어를 해체하고 무한한 기표들의 유희를 조작, 분산, 재분배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글읽기는 곧 글쓰기를 의미하며,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텍스트론은 새로운 인식론적 대상을 부각시킨다. 바르트의 텍스트는 작가와 독자가 서로 찾아 만나야 할, 구체적이고도 관능적인 만남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글을 읽거나 쓴다는 것은 사랑에서와 마찬가지로 결합에의 꿈을 실현시켜 준다. 이에 대해 주브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독서란 그 자체로서 구조화의 행위이고, 이 구조화의 근거는 바로 육체이다. 즉 독자를 개인적이고도 개별체적인 주체로 정의하게 하는 것은 하나의 사상이 아닌 바로 육체이다. 그러므로 텍스트의 즐거움은, 비록 그것이 문화에 연유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우선은 각 주체의 육체에서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 주체의 개인적이고도 주관적인 일련의 접촉이나 성찰을 통해서만 비로소 작품의 문화적 양상이 독자에게, 독자의 특이한 욕망 속에 스며들기 때문이다. 의미과정의 수용은 이렇듯 우리를 주조한 문화보다는 개별적인 육체의 움직임과 더 깊은 관계를 맺게 한다.(V. Jouve, <롤랑 바르트>, 민음사, 1986, 100-101쪽.)
“내게 즐거움을 준 텍스트를 <분석>하려 할 때마다, 내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내 <주관성>이 아닌 내 <개별체>이다. 그것은 내 육체를 다른 육체들과 분리시키며 내 육체에 그것의 고통, 또는 즐거움을 적응시키는 소여(所與)이다. 그러므로 내가 발견하는 것은 내 즐김의 육체이다.”(<텍스트의 즐거움>, 110쪽)
육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글읽기의 체험을 바르트는 즐거움(plaisir)과 즐김(jouissance)으로 구분한다. 그는 즐거움과 즐김의 구별을 위해 정신분석학적 개념에 의존하는데, 즐거움의 텍스트는 문자를 인정하지만(즐거움은 말해질 수 있는 것이기에), 즐김의 텍스트는 작가와 더불어 <감당할 수 없는 텍스트, 불가능한 텍스트>가 시작된다(왜냐하면 즐김의 텍스트는 말해질 수 없는 것이기에, 혹은 말해진 것 사이에 놓여 있기에). 따라서 즐김의 텍스트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다만 그것을 쓰는 것만이 가능하다. 즐거움의 텍스트는 문화에서 와 문화와 단절되지 않으며, 글읽기의 마음 편한 실천을 허용하여 우리를 행복감으로 채워주는 텍스트이다. 이때 주체는 모든 종류의 문화에 대해 깊은 쾌락과 자아의 놀라운 강화, 또는 그 진정한 개별성을 체험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그것은 <고전, 문화, 섬세함, 행복감>의 동의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즐김의 텍스트는 독자의 역사적, 문화적 심리적 토대나, 그 가치관, 언어관마저도 흔들리게 하여 자아가 회복되는 것을 원치 않는, 절대적으로 자동사적인 것이다. 그것은 어떤 목적성도 가지지 아니하며, 모든 규범적인 것을 전복시키는 변태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즐거움과 즐김의 구별은 그리 엄격하지 않으며, 대립적이라기 보다는 상호보완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장애물을 치우고 더 멀리 나아가도록, 혹은 단순히 말하고 글을 쓰도록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텍스트의 즐거움>, 194-195쪽)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바르트가 말하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왜 나는(나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은) 소설, 전기, 역사적 작품에 한 시대, 한 인물의 <일상적인 삶>이 재현되는 것을 보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일까? 시간표, 습관, 식사, 숙소, 의복 등 이런 하찮은 세부적인 것에 대한 호기심은 왜일까?” (<텍스트의 즐거움>, 101쪽) 이것은 텍스트의 전복적 양상과 관계된다. 물질적이고 감각적/세부적인 것이 지적이고 추상적인 언어의 나열 속에 불쑥 끼어들 때, 그것은 하나의 틈새를 자아내며, 그리하여 텍스트를 불연속성의 공간으로, 관능적인 공간으로 변형시킨다. 바르트에 의하면 문학의 전복적인 양상은 기존의 문화나 언어의 파괴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언어를 변형하고 재분배하는 데 있다고 말해진다. 왜냐하면 언어의 재분배에는 반드시 틈새가 있게 마련이며, 이 틈새가 즐거움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위반이란 파괴가 아닌 인정하고 전도하는 것이다.”(뱅상 주브, 앞의 책 89쪽)
3-3. 결어 : 필사자(scripteur) & 푼크툼(punctum)
또 하나의 필사자가 되어 여기에 롤랑 바르트를 재생산해 내었다. 롤랑 바르트를 이해하기 위한 본 텍스트는 여기에 여러 필사자의 글들을 발췌, 조합, 재조합해 내어 변형된 일그러진 ‘나의’ 롤랑 바르트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바르트를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한 시도는 얽키설키 짜집기 되어 내가 좋아하는 바르트의 주관적인 이미지에서 그다지 손상되지 않은채 재생산되었다. 물론 바르트는 내가 상상하는 대로의 바르트는 결코 아니리라. 문학사회학자로서 그리고 텍스트를 자신만의 즐거움 속에만 가두려고 하지 않고, 복수태적인 권력 담론으로서의 언어체(langue)를 해체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글쓰기로 이동하는 그의 자세를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바르트는 ‘바르트’가 아니다. 바르트는, 내가 ‘좋아하는’ 바르트는 내향적인 성격으로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소한 일/사건들이 자신에게 가져다주는/찌르는 푼크툼(라틴어로 點을 가리키는 말이다)에 천착하는 가상의 혹은 역사적 인물이다. 이것이 나만의 진실이며, 나의 푼크툼이다. 나는 어쩌면 그의 앞에서 그가 말하고 있는 필사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뜻하는, 글 읽는 독자로서 나는 글을 쓰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를 읽으면서 혹은 쓰면서 즐거움(plaisir)을 느끼는지 즐김(bliss)을 느끼는지 명확하지 않다. 그를 고전으로서, 즉 스투디움(studium, 스투디움은 문화에 속한다)으로서 받아들이는/읽는 와중에, 보이지 않는 구덩이(點)에 빠지는 나는 그가 설치해 놓은(의도하건/하지 않건 간에) 틈새/푼크툼에 걸려 혼란스러워 한다. 이 즐김(bliss)! 나는 롤랑 바르트를 좋아한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1차 대전 중인 1915년 프랑스 남서부의 작은 해안도시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후 1년만에 해군으로 복무하던 아버지가 사망하여, 어머니와 조부모의 슬하에서 자랐다. 바르트는 아홉 살 때 서적 제본소에 조촐한 일자리를 얻은 어머니를 따라 파리로 이주하여, 젊은 시절을 가난하게 살았을 뿐만 아니라, 건강상의 문제로 두 번이나 요양소 생활을 하였다. 그래서 제 2차 대전 중에는 병역면제를 받고 1942년부터 약 5년 동안 알프스의 폐결핵 요양소에서 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련의 기간에도 바르트는 엄청난 분량의 서적을 독파하여 요양소를 떠날 때는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 상당한 지식을 축적했다고 한다.
   건강을 회복하여 파리로 돌아 온 후, 외국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자리를 얻게 되어, 처음에는 루마니아, 그 다음에는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어를 지도하면서, 거기서 기호학자로 유명한 그레마스(Greimas)와 친하게 되었다. 1952년에 귀국하여 친구들의 도움으로 정부로부터 어의학(lexicology)에 관한 연구비지원을 받았으나, 이 연구보다는 오히려 문학평론과 문화비판에 몰두하여, 1953년에는 『글쓰기 영도』를 출판하고, 대중문화의 이면에 은폐된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수많은 기사를 투고함으로써, 1957년에는 이 원고들을 모아, 대중문화 비판서로 유명한 『신화·Mythologies』를 출판하였다.
   전후의 지적 위기에 대응하여 사르트르와 메를로 퐁티가 헤겔과 훗설 및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도입하였으나, 바르트는 매스미디어가 매개하는 문화에 함축된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기 위해 소쉬르와 옐름슬레브 등의 구조주의를 원용한다. 1964년에 낸 『기호학의 원리』에서 바르트는 구조주의를 기호의 사회학으로 발전시켰다. 바르트는 이처럼 활발한 창작활동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그렇게 유명하지는 않았으나, 1965년 이후에 격렬하게 진행된 문학비평을 둘러싼 소위 신구논쟁을 통해서 그는 프랑스 사상계의 중앙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하게 된다.
   바르트는 1963년에 출판한 『라신에 대하여』를 통해서, 소르본느대학 교수로 역시 라신을 연구하고 있던 피카르(Raymond Picard)가 발표한 『라신의 생애』를 공격하였고, 이에 분개한 피카르가 『새로운 비평이냐, 새로운 사기냐』(1965)를 통해서 마르크스주의와 현상학적 실존주의 및 구조주의적 비평 경향을 대변하는 바르트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 비판에 대한 대응으로 출판한 『비평과 진실』에서, 바르트는 다시 소르본느의 피카르를 비롯한 모든 전통적 비평을 대학비평 혹은 랑송주의로 취급하고, 이를 실증주의적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정치적 및 지적 보수주의라고 싸잡아 비난하였다.
   이 논쟁에 거의 모든 지식인들이 끼어 들고 저널리즘까지 가담하여 구비평과 신비평간의 열띤 논쟁이 전개되었고, 이 논쟁을 통해서 바르트는 저명인사가 되었고, 바르트가 소속된 고급연구실습학교(Ecole Practique des Hautes Etudes)는 진보적인 좌파 사상과 정치의 중심지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구비평을 대표하는 사례는 20세기 초부터 존경을 받아온 랑송(Lanson)의 『문학사의 방법』이며, 랑송의 방법론이 제자들에 의하여 경직된 실증주의 비평으로 교조화되면서 랑송주의로 불리게 되었고 이를 대학비평이라고도 한다. 한편 신비평은 실존주의, 정신분석학,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 등 주로 반실증주의적인 비평경향을 총칭하는 것이다. 
   진보적 경향의 신비평을 대변하는 바르트가 보기에, 보수적인 실증주의 비평은 문학의 궁극적 본질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외면하고, 세밀한 문헌조사에 치중함으로써 마치 문학이 그 자체로서 자연스럽고 자명한 진리인 것처럼 당연시하는 결정론적 관점을 조장하는 것이다. 어떻든 실증적 비평과 해석적 비평간의 대립을 둘러싼 신구논쟁을 통해서, 바르트는 레비스트로스, 푸코, 알뛰세, 라깡 등 걸출한 사상가들과 함께 구조주의 사상의 대가로 인정받게 되었고, 이러한 업적을 인정받은 바르트는 1977년에 드디어 명성 높은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1980년 2월 어느 날 그 대학의 앞길을 건너다가 트럭에 치어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가난과 질병으로 불안정한 삶을 살아 온 것처럼, 바르트의 문학적 관심도 끊임없이 변화해왔기 때문에 그의 입장을 단정적으로 범주화하기는 어렵다. 그는 한 때 실존주의자였고, 마르크스주의자였고, 전위적인 텍스트 비평가로 유명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바르트는 문화현상에 대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구조주의 사상가이자 기호학자이면서도, 후기 저작인 『S/Z』와 『텍스트의 쾌락』 이후에는 과학성과 구조의 엄격성을 강조하던 종래의 관심을 스스로 비판하면서, 텍스트의 해석에 있어서 복수성을 인정하고 다양한 해석을 즐기는 쾌락주의를 선언하게 된다. 그러나 학문적 관점의 끊임없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든 저작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다음과 같은 일관성이 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첫째로, 바르트는 영원불변의 본질이 있다고 확신하는 본질주의를 거부한다. 본질주의에 대한 바르트의 일관된 거부감은, 인간에게 불변의 본질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르트르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사르트르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인간뿐만 아니라 사물에도 불변의 본질 같은 것은 없다고 보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항상 열어놓는다.
   둘째로, 현대사회의 지배 세력은 기존의 사회 제도와 규범이 가장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이라는 신화를 유포하는 경향이 있고, 이는 중세 사회가 모든 것을 신의 섭리로 정당화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일상적인 문화현상에 있어서 정당하고 자연스러움을 표방(the voice of the natural)하는 모든 것을 일관성 있게 비판한다.
   셋째로, 바르트는 불변의 본질도 없고, 인간세계에 자연스러운 사실도 없다고 본다. 모든 사회적 및 문화적 현상은 그 나름의 역사적 기원이 있고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하고 자연적인 것처럼 보일 뿐이며, 그 이면에는 은폐된 이데올로기가 있다고 본다. 따라서 소쉬르의 기호학적 관점을 수용하면서도 바르트는 이를 한 단계 더 극단화하여 이면에 숨겨진 이데올로기를 폭로한다.  
(출전: 전경갑 외, 『문화적 인간·인간적 문화』, p.73-76)
 
 
 
  내용요약 top
롤랑 바르트가 사진에 대해 전문적인 기술이나 식견이 없었다는 게 흥미롭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아마튜어조차도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카메라 루시다」p.17].
다소 뻔한 얘기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진의 본질에 대해 명료한 인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바라보여지는 사람과 바라보는 사람이라는 두 가지 경험만을 이용할 수 있을 뿐이었다[위의 책, 같은 쪽].`
`이미지는 무겁고 움직이지 않으며 완고하지만(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회는 이미지에 의지한다), `자아`는 가볍고 분열되며 흩어지고[…]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사진이란 내 자신이 마치 타인처럼 다가오는 일`이다[p.19].
`사진은 주체를 객체로, 심지어는 박물관의 진열품으로도 변형시킨다` 
사진에 찍힌 존재는 `죽는다`. ` `죽음`은 사진의 본질이다[p.22].` 죽음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맥락도 모르는 채 사르트르가 했다는 `죽은 자는 산 자들의 먹이` 라는 말을 되씹곤 한다. 
죽음으로써 그에게선 무수한 역동의 가능성이 제거되었고, 산 자들은 움직일 수 없게 된 그를 마음껏 요리한다. 필자는 가끔 `험담`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면서 이 말을 변형시켜 본다 : `여기 없는 자는 여기 있는 자의 먹이`라고. `부재(不在)`는 완벽한 피동성을 의미한다. 여기 없는 자는 여기 있는 자들이 형성하는 자신에 대한 이미지에 완전히 무력하다. 그의 존재의 풍부한 울림과 떨림 같은 것은 말의 칼날에 가차없이 재단된다. 말은 말 자체의 힘과 흐름에 따라, 그를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변형시킨다. 부재는 곧 죽음이다. 죽음은 곧 부재다. 
`나[바르트]에게 있어서 사진가의 대표적인 기관은 눈이 아니라[…]손가락이다[p.22].` 총의 방아쇠를 당기듯 셔터를 눌러 일거에 그 사물을 지배하는 사진, 세계를 화석화시키는 무기, 이처럼 무서운 무기는 달리 없다. 
그러나 사진에는 매력적인 반대면이 있다.
 
 
 
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사진가는 죽음의 대행자다. 죽음은 사진의 본질이며, 사진의 시작은 기본적으로 대상의 파국을 의미한다. 사진 밖의 대상은 사진 속에 담기는 순간부터 죽음을 맞이한다. 대상이 하나의 이미지로 남는 순간, 그 대상은 죽음을 시작하고, 이미지는 새로운 의미로 태어난다. 이렇듯 욕망의 대상은 욕망되어지는 순간, 다시 말해 욕망의 주체에 의해 잡히는 순간, 또다른 욕망을 낳으며 저만치 도망친다. 그리고 더 큰 허무와 아픔을 남긴다. 사진은 부재하는 것, 한때 존재했던 그 무언가가 던지는 아픔인 것이다. 따라서 ‘빛으로 쓴다’는 포토그래피는 ‘죽음을 기록하는’ 타나토그래피(thanatography)이다.
 
 
Roland Barthes
 
 ロラン・バルトについて、なにかを書こうと試みたことのある人なら、経験したであろうが、彼の著作に思いを巡らせて書いた文章は、自然と彼の文体に似てきてしまう。彼の記述はそれだけ伝染性の高いものであり、一種独自のものである。1970年から80年代に多くの読者を魅了した理由のひとつは、彼のその独特の文章スタイルにある。
 彼の言語学的な主張はいささか曖昧なもので、ドイツ観念論的な精緻な構造をとらない。理解しようと努力すれど、しばらくすると微妙に変化した形で提示され、あたかも理解されることを拒んでいるかのようだ。ひとつの事象を時代の文脈で追っていくときに、社会的な変化に応じてその認識が変容するのに似ている。まるで、あらゆる事象が相互作用のなかで規定され、認識される「現在」を比喩しているかのようだ。
 彼の、文学的な主張を読めば読むほど、それは彼の「美学」に他ならないという事に次第に気付く。悲しいかな、論理であるようで論理ではないのである。彼に対する多くの批評・批判がどこか的外れで陳腐なものに感じてしまうのは、そういった理由によるのかも知れない。
 騙されるのなら甘美な夢を伴ったものの方が良いに決まっている。しかしてバルトの書物は読み継がれていくのである。
年表
1915年 フランスのシェルブールに生まれる 
1916年 父の死 
      幼年期をバイヨンヌで過ごす 
1934年 結核発症 
1935年 ソルボンヌ 
1941年 結核再発(5年間のサナトリウム生活) 
1948年 ブカレストにてフランス語講師 
1949-50年 アレキサンドリアにてフランス語講師 
1952年 国立科学研究センター研究員 
1962年 高等学術研修院研究指導教授 
1976年 コレージュ・ド・フランス教授 
1977年 母の死 
1980年 交通事故死
著作
Le Degre zero de l'ecriture, Editions du Seuil, 1953 
Writing Degree Zero 
『零度のエリクチュール』、みすず書房、1971年
Michelet par lui-meme, Editions du Seuil, 1954 
Michelet 
『ミシュレ』、みすず書房、1974年
Mythologies, Editions du Seuil, 1957 
Mythologies 
『神話作用』、現代思潮社、1967年
Sur Racine, Editions du Seuil, 1963 
On Racine 
「ラシーヌ論」
Essais critiques, Editions du Seuil, 1964 
Critical Essays 
『エッセ・クリティック』、晶文社、1972年
Critique et Verite, Editions du Seuil, 1966 
Criticism and Truth 
「批評と真実」
Systeme de la mode, Editions du Seuil, 1967 
Fashion system 
『モードの体系』、みすず書房、1972年
L'Empire des signes, Skira, 1970 
Empire of Signs 
『表徴の帝国』、新潮社、1974年
S/Z, Editions du Seuil, 1976 
S/Z 
沢崎浩平訳、『S/Z』、みすず書房、1973年
Sade, Fourier, Loyola, Editions du Seuil, 1971 
Sade, Fourier, Loyola 
『サド、フーリエ、ロヨラ』、みすず書房、1975年
Nouveaux Essais critiques, Editions du Seuil, 1972 
(New Critical Essays) 
花輪光訳、『新=批評的エッセー』、みすず書房、1977年
Le Plaisir du texte, Editions du Seuil, 1973 
Pleasures of the Text 
『テクストの快楽』、みすず書房、1977年
Roland Barthes par Roland Barthes, Editions du Seuil, 1975 
Roland Barthes 
佐藤信夫訳『彼自身によるロラン・バルト』、みすず書房、1979年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 Editions du Seuil, 1977 
A Lover's Discourse: Frangments 
三好郁朗訳『恋愛のディスクール』、みすず書房、1980年
lecon, 1978 
"Inaugural Lecture" 
花輪光訳、『文学の記号学』、みすず書房、1981年
Sollers ecrivain, Editions du Seuil, 1979 
Writers Sollers 
『作家ソレルス』、みすず書房、1986年
La Chambre claire: note sur la photographie, Gallimard et Seuil, 1980 
Camera Lucida. Reflections on Photography 
花輪光訳、『明るい部屋』、みすず書房、1985年
Le Grain de la voix: entretiens 1962-1980, Editions du Seuil, 1981 
The Grain of the Voice: Interviews, 1962-1980 
「声の肌理: 1962-1980年の対談集」
Litterature et Realite (en collaboration), 1982
Essais critiques III, L'Obvie et l'Obtus, Editions du Seuil, 1982 
The Responsibility of Forms. New Critical Essays on Music, Art and Representation 
沢崎浩平訳、『第三の意味』、みすず書房、1984年 
沢崎浩平訳、『美術論集』、みすず書房、1986年
Essais critiques IV, Le Bruissement de la langue, Editions du Seuil, 1984 
The Rustle of Language 
花輪光訳、『言語のざわめき』、みすず書房、1987年 
沢崎浩平訳、『テクストの出口』、みすず書房、1987年
L'Adventure semiologique, Editions du Seuil, 1985 
The Semiotic Challenge 
花輪光訳、『記号学の冒険』、みすず書房、1988年
Incidents, 1987 
沢崎浩平・萩原芳子訳、『偶景』、みすず書房、1989年
La Tour Eiffel (en collaboration avec Andre Martin), 1989 
花輪光訳、『エッフェル塔』、みすず書房、1991年
Oeuvres completes tome 1, 1942-1965, Editions du Seuil, 1993 
「ロラン・バルト全集 第一巻」
Oeuvres completes tome 2, 1966-1973, Editions du Seuil, 1994 
「ロラン・バルト全集 第二巻」
Oeuvres completes tome 3, 1974-1980, Editions du Seuil, 1994 
「ロラン・バルト全集 第三巻」
花輪光訳、『物語の構造分析』、みすず書房、1979年
沢崎浩平訳、『旧修辞学』、みすず書房、1979年
『バルト、<味覚の生理学>を読む』、みすず書房、1985年
下澤和義訳、『小さな神話』、青土社、1996年
下澤和義訳、『小さな歴史』、青土社、1996年 
 
参考文献
邦文
鈴村和成著、『バルト テキストの快楽』、講談社、1996年
渡辺諒著、『バルト以前/バルト以後 : 言語の臨界点への誘い』 水声社、1997年
遠藤文彦著、『ロラン・バルト : 記号と倫理』、近代文芸社、1998年
篠田浩一郎著 『ロラン・バルト : 世界の解読』、岩波書店、1989年
花輪光著 『ロラン・バルト : その言語圏とイメージ圏』、みすず書房、1985年
荒木亨著 『ロラン・バルト/日本』、木魂社、1989年
原宏之著 『〈新生〉の風景 / ロラン・バルト、 コレージュ・ド・フランス講義』、冬弓舎、2002年 出版社サイト
翻訳
G.ド・マラク, M.エバーバック著 ; 篠沢秀夫訳 『ロラン・バルト』 青土社、1974年
L.J.カルヴェ、花輪光訳 『ロラン・バルト伝』 みすず書房、1993年
R.カワード, J.エリス共著 ; 磯谷孝訳 『記号論と主体の思想 : バルト・ラカン・デリダ・クリステヴァなど』、誠信書房、1983年
スティーヴン・アンガー著 ; 千葉文夫訳 『ロラン・バルト : エクリチュールの欲望』 勁草書房、1989年
ジョナサン・カラー著 ; 富山太佳夫訳 『ロラン・バルト』 青弓社、1991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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