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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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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소쉬르와 퍼스

[공유] 소쉬르와 퍼스 다시 읽기(3)-강인규
2019년 02월 03일 21시 16분  조회:844  추천:0  작성자: 강려
출처 존재와 사유 | 동동
원문 http://blog.naver.com/mdpsjk/20021771588
 
소쉬르와 퍼스 다시 읽기 (3)   
              2003. 1. 9.
 
-      소쉬르의 기호이론과 그것이 미친 영향
                               강인규
 
리뷰
 
1.      소쉬르와 구조주의
 
구조주의에서 “구조(structure)”는 관계와 차이의 체계이며, 통시적(diachronic)이기보다는 공시적(synchronic) 특성을 지닌다. 구조주의의 이러한 특성은 언어의 개별적 사용 즉, “파롤(parole)”보다 언어의 일반적 구조인 “랑그(langue)”에 초점을 둔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으로부터 유래한다.
 
2.      구조와 주체
 
구조주의 철학에서 ‘구조’는 주체의 자율성을 제거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 관점에 따르면 주체의 구조에 종속된 하인에 지나지 않는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는 중세의 신이라는 ‘구조’에 종속되지 않은 인간존재의 자율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구조주의는 이처럼 자율적이고 능동적 주체의 개념을 거부한다. 데카르트가 존재의 조건으로 내세운 ‘생각’이란 개인 고유의 판단이 아니라 언어라는 사회적 구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언어라는 사회구조 없이는 말도, 생각도 불가능하다면, ‘나’란 언어가 내면에 심어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주체가 사회구조로 환원되는 상황에서는 개인도, 자율성도, 저항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구조주의는 다분히 결정론이나 숙명론적 성격을 갖는다.
 
3.      자의성, 부정성, 관계, 차이
 
소쉬르의 기호학은 자의성(arbitrariness), 부정성(negativity), 관계(relationship), 그리고 차이(difference)의 네 개념으로 요약될 수 있다. ‘자의성’이란 기표와 기의 사이에 닮은 점이 없다는 것이고 (바르트는 이 ‘자의성’이 기표와 기의 사이가 아니라 기표와 지시대상 사이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부정성이란 의미가 ‘~이 아님’이라는 기호의 부정적 관계 속에서 떠오른다는 의미이다.
 
4.      이항대립(binary opposites), 신화소(mytheme), 기능(function)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는 ‘구조적 환원(structural reduction)의 틀로써 “이항대립”과 “신화소(mytheme)”의 개념을 사용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이 두 가지의 상반된 개념범주에 근거하여 세상을 이해한다고 보았다. 밤과 낮, 하늘과 땅, 안과 밖,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신화소”는 이야기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서사구조를 말한다. 
 
 
5.      특이범주(anomalous category)
 
이항 대립의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특이범주(anomalous category)”는 흔히 금기의 대상이 되거나 신성화된다. 예를 들어 육상동물과 물고기의 특성을 공유하고 있는 뱀은 혐오의 대상이 되는, 반면에 신성과 인성을 모두 겸비한 천사는 신과 인간의 매개자로서 신성시된다.
 
6.      레비-스트로스의 신화(myth): “구체성의 논리(logic of the concrete)”
 
‘너는 늑대고, 나는 곰이다’라는 토템신화는 결코 비논리적인 것이 아니다. 이러한 신화적 동일시는 세계와 그 세계에서의 개인의 지위를 다른 사물이나 개인에 연관시켜 진술하는 것 뿐이다. 예컨대 내가 곰의 후손이고 네가 독수리의 후손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과 와 사이의 관계를 생물의 종들 사이의 관계에 빗대어 구체적이고 명료하게 드러내는 작업이다. 이처럼 추상적인 내용을 구체적인 은유로 치환하는 과정을 “구체성의 논리(logic of the concrete)”라고 한다.
 
7.      롤랑 바르트의 외연, 내포, 신화
                                              
 “외연(denotation)”은 기호의 1차적 의미작용, 즉 문화의 차이와 관계 없이 누구에게나 동일한 의미를 산출하는 과정을 말한다. 반면에 “내포(connotation)”는 기호가 사용자가 속한 문화적 차이와 개인적 정서에 따라 다른 의미를 산출하는 2차적 의미작용의 과정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신화’가 인간들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중립적으로 설명하는 기술적(descriptive) 개념인 반면, 바르트의 ‘신화’는 처방적(prescriptive) 개념이다. 바르트의 신화개념은 자연화되고 상식화된 지배적 담론체계를 지칭한다. 텍스트의 의미가 외연에서 내포와 신화로 바뀌어가는 과정은 텍스트에 내재된 의미가 사회적으로 삼투되는 과정이다.
 
 
 
1.      데리다의 구조주의 비판
 
데리다(Jacques Derrida)에 의하면 기표는 기의의 거울이 아니다. 다시 말해 기표는 직접적으로 기의를 드러내지 않는다. 이 관점은 기표와 기의가 종이의 양면처럼 붙어있는 것으로 보았던 소쉬르의 견해와 큰 차이가 있다. 기표를 통해 궁극적인 기의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의는 기표들 밑으로 끝없이 미끄러져 가기 때문이다. 기호의 의미가 ‘~이 아님’의 부정적 관계 속에서 희미하게 떠오르는 것이라면, 의미란 기호 속에 내재된 것이 아니다. 의미는 기표의 사슬 주변에 불규칙하게 흩어져있을 뿐이다. 따라서 의미는 고정시킬 수도 없고 하나의 특정 기호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의미는 마치 별의 깜박임처럼 현존(presence)과 부재(absence)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언어는 그 자체로는 부재하지만 그 구조를 가능케 하는 발화를 통해 현존한다.
                의미가 기호 속에 있지 않다면 지식의 ‘목적’과 ‘수단’ 역시 일치할 수 없게 된다. 지식의 목적은 특정한 ‘의미’에 있으며, 이를 위해 ‘기호’라는 수단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언어에는 시간적인 제약이 존재한다. 내가 어떤 문장을 읽는다면 그것의 의미는 언제나 지연된 것이고 유예된 것이다. 따라서 이전의 기표는 지연 과정에서 다른 기표들도 대체된다. 게다가 각각의 기호가 특정한 의미를 위해 선택된 것임을 생각하면, 그 기호에는 배제된 기호들의 흔적이 깃들어 있는 셈이다. 또한 의미는 맥락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언어가 레비-스트로스 등의 구조주의자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불안정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말하거나 쓰는 데 있어 내가 의도한 바를 남에게 완전히 전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환상이다.
                데리다에 의하면 독립적인 기표의 영역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즉 어떤 기표도 특정 기의를 언급하지 않으며, 우리는 결코 이러한 기표의 체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결국 제약받지 않는 현존은 없다. 우리는 불안정한 언어를 통해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절름발이 현존을 볼 뿐이다. 언어가 불완전하다면 언어에 의해 매개된 우리의 현존 역시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데리다는 현존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위계화된 대립(hierarchized opposition)을 낳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데리다가 구조주의에 가했던 비판과 맞닿아 있다. 그의 비판은 구조주의가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체계를 가정하고 있으며 (소쉬르의 ‘랑그’와 레비-스트로스의 ‘신화소’ 등), 전통적인 이항대립적 구조에 토대를 두고 있다(소쉬르의 ‘기표-기의,’ 레비-스트로스의 ‘자연-문화’)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대립에서 ‘우월한 것’은 현존과 로고스에 속하게 되고 ‘열등한 것’은 종속적인 지위를 강요 받는다. 그 결과 지성과 감성, 그리고 정신과 육체의 대립이 서양철학사를 지배해 왔다. 기표와 기의의 대립 역시 이러한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다.
                지식이 불완전한 언어에 근거하고 있다면, 우리가 아는 바의 ‘진리’ 역시 불완전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데리다는 니체의 저작들이 갖는 주된 특성을 “형이상학에 대한 전면적 불신’과 ‘진리’ 및 ‘의미’의 가치에 대한 의심”으로 요약하고 있다. 니체의 입장에서 우리의 해석을 뛰어넘는 단일하고 물리적인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관점만이 있을 뿐이다. 그는 우리가 언어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원하든 그렇지 않든 언어 속에서 살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언어와 개념의 덫에 걸려있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이 주장 역시 언어의 일부일 뿐이다. 우리가 아무리 그 ‘덫’을 표현하려 애쓴들 그 개념은 역시 동일한 덫의 일부가 되어 우리를 구속할 것이다.
                니체에 의하면 모든 관념은 동일하지 않은 것을 동일하게 만드는 과정을 통해 발생한다. 은유(metaphor)는 서로 닮지 않은 것 사이에 동일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인가? 진리는 은유, 환유, 의인법으로 구성된 기동부대이다. 결국 진리란 우리가 환상이라는 사실을 잃어버린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니체는 이처럼 은유 등을 만들어내는 힘을 ‘권력에의 의지’라고 불렀다. 진리에의 의지는 권력에의 의지이다. 우리는 소유하고 정복하기 위해 지식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2.     언어의 본질로서의 은유와 환유
 
3.1. 은유
 
언어가 기호들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낳는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은유가 단순한 수사학적 도구가 아니라 언어 자체의 속성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언어는 본질적으로 은유적이다. 우리가 말하기와 쓰기, 그리고 심지어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 한, 은유는 어디에나 존재하며 결코 뿌리뽑을 수 없는 것이다.
                은유(metaphor)는 다른 속성을 지닌 두 차원 중 하나를 어느 한 편의 차원으로 치환하는 방법이다. 예컨대 ‘그 여자는 한 송이 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그 여자’라는 의미를 ‘꽃’이라는 표현수단으로 치환한 은유다. 은유에는 이 같은 ‘문학적 은유’ 외에 ‘일상적 은유’도 있다. 일상적 은유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은밀함을 특성으로 한다. 다시 말해서 일상적 은유는 그 자체가 은유로서 인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상적 은유는 문학적 은유보다 더 교묘하게 사회의 ‘상식’이 되어 아무런 검증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해당 문화권 내에 쉽게 수용된다.
                문학적 은유와는 달리 일상적 은유는 자신의 수사학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보다 쉽게 ‘진리’의 위치를 점하게 된다. 예컨대 우리는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고위층’이라고 지칭한다. 그들은 평균적인 사람보다 키가 크거나 높은 건물에서 지내는 사람들도 아닌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우리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의 문화적 지위를 스스로 자연화 하는 것이다. 결국 은유란 일련의 기호들이 아무런 근거 없이 대체되는 것이다. 결국 철학, 법, 그리고 정치이론 역시 시나 소설과 마찬가지로 은유를 통해 작동하는 허구적인 것이다.
                언어가 단순히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적극적으로 구성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은유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이에 따라 사람들이 주목하게 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즉 ‘언어의 수사학적 장치가 어떻게 우리의 경험과 판단을 형성함으로써 특정한 행위를 유도하고 또 배제하는가.’ 은유는 단순히 언어의 표현적 기능만을 담당하는 수사학적 장치가 아니다. 이는 언어의 본질이기도 하다.
                  ‘시간은 돈이다’라는 은유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시간에 따라 전화 통화료를 지불하고 시간에 따라 급료를 받고 이자를 계산한다. 이처럼 우리는 시간을 가치를 지닌 상품으로서 다룰 뿐 아니라, 동일한 방식으로 시간을 인식한다. 그러나 시간이 ‘돈’이 아닌 문화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다시 말해 이러한 상식은 자의적인 문화적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러한 은유는 사람들의 인식을 특정한 방식으로 형성함으로써 경험을 ‘은유적으로’ 재조직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자연에 대한 동양의 전형적 은유는 ‘조화를 이루고 살 존재의 원천’인 반면, 서양의 은유는 ‘인간의 정복을 기다리고 있는 수동적 대상’이다. 이러한 은유의 차이는 세계관과 문명의 차이로 나타났다. 앞에서 말한 ‘시간은 돈’이라는 은유를 전달의미와 표현수단으로 나누어 분석해 보자.
 
 
 
 
시간은   소중하다.  (전달의미)
                                                                     [통합체]
돈이다.
                                    금이다.      (표현수단)
진주다.     
  목숨이다.
                                    …………..
                                    [계열체]
 
위의 분석에서 볼 수 있듯이 은유는 계열체적으로 작용한다. 은유는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상상적인 것으로서, 연상의 원리에 의해 수직적인 차원에서 유사성을 찾는 것이다. 이러한 연사의 원리는 현실 혹은 의미의 한 차원에 내재되어 있는 속성의 가치를 다른 차원의 속성의 가치로 치환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이러한 치환과정은 한 계열체 내의 기호단위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은유의 이러한 치환과정이 반드시 유사성에 의해서 매개되는 것은 아니다.
 
3.2. 환유
 
은유가 서로 다른 속성을 지닌 두 차원 중 어느 한 쪽을 다른 쪽으로 치환하는 과정이라면, 환유는 동일한 차원 내에서 의미를 연상시키는 방법이다. 환유를 간단히 ‘어떤 한 부분을 통해 전체를 지칭하는 방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야콥슨은 은유를 시에 지배적인 양식으로, 그리고 환유를 소설에 보편화된 양식으로 간주하였다. 현실은 ‘재현’은 불가피하게 환유를 수반하며, 전체를 지칭하기 위해서 ‘현실’의 일부분이 선택될 수 밖에 없다.
환유는 선택된 일부분에 의해 선택되지 않은 나머지 부분까지 구성된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어떤 대상을 선택하는가’는 환유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한국의 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시위현장은 대부분 시위대에 의해 진압경찰이 맞고 있거나 수세에 몰려있는 장면이다. 이는 전체의 일부분 – 혹은 극히 예외적인 부분 – 에 지나지 않지만, 방송사에 의해 의도적으로 선택됨으로써 시청자들로 하여금 그 ‘폭력적’이고 ‘불법적인’ 시위를 비난하도록 한다. 시청자들은 환유를 통해 선택된 부분을 통해 이 시위에 대한 나머지 부분을 상상적으로 재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환유는 지표적(indexical)으로 작용한다. 환유의 지표적 작용은 매개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사진이 강력한 전달수단이 되는 것은 이것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진에 담긴 것은 피사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여기에 자의적인 선택의 과정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환유는 ‘먹구름과 비,’ ‘불과 연기’ 등의 자연적 지표와는 다른 차원을 갖지만, 자연적인 지표로 인지되어 ‘자연스럽고 당연한’ 현실로 인식된다. 즉 환유는 자신의 지표적 본질을 숨김으로써 사실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예컨대 먹구름이 비 자체가 아니며, 발자국이 발 자체가 아니라는 것은 쉽게 인식할 수 있지만, 시위현장의 사진이 시위 그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은 깨닫기 어렵다. 사진의 지표성은 이런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적 속성을 갖는다. 기호학 분석의 주목적은 이런 은폐의 매커니즘을 폭로하는 것이다. 은유가 계열체적으로 작용하는 반면 환유는 통합체적으로 작용한다. 환유는 제시된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수용자 스스로 구축해야 하기 때문이다.
 
3.      권력관계로서의 언어
 
언어는 사회적이다. 각 사회계층마다 쓰는 말이 다르며, 같은 말이라도 맥락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나타낼 수도 있다. 특정한 진술을 위해 사용하는 말이 서로 다를 뿐 아니라 이를 해석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 최근의 담론연구는 계층이 낳는 담론 이외에 ‘중립적인’ 영역으로 간주되던 지식의 담론으로도 그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예컨대 작업현장에서 쓰는 언어와 이사회에서 쓰는 언어만이 갈등을 겪는 것이 아니다. 환자가 자신의 몸을 설명하는 말과 의사가 환자의 상태를 설명하는 말 역시 위계화 되어 있다. 예를 들어 한 환자가 의사에게 서툰 일상용어로 자신의 증상을 설명하고, 의사는 여유롭게 그 용어를 ‘전문용어’로 교정해 준다. 그리고 환자가 전혀 알 수 없는 언어로 환자의 증상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하고는 외국어로 된 의학용어를 처방전에 휘갈겨 쓴 후, 간호사에게 건네주라고 말한다. 환자는 자신의 ‘무지’에 부끄러워하며 그 수수께끼 같은 처방전에 의한 치료를 흔쾌히 받아들인다. 결국 의사와 환자가 사용하는 언어의 차이는 사회적 권력관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언어는 결코 합리적 의사소통의 도구가 될 수 없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번째는 ‘언어자본의 불평등’이고, 두번째는 ‘사회적 관계의 불평등’이다. ‘언어자본’이란 각 개인의 언어사용 능력을 의미한다. 언어사용 능력의 핵심이 되는 어휘 수와 문장 구성 능력 등은 교육수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들 사이에 평등한 대화가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노동자와 경영대학원을 마친 사용자가 ‘노사협상’에 앉아 대화하는 상황을 예로 들어보자. 사용자는 현 시점이 ‘구제금융 시국’임을 시종 강조하면서 도표와 그래프로 매끈하게 다듬어진 적자보고서를 노동자에게 건넨다. 사용자가 정확한 수치를 인용하며 진행하는 ‘경제원론’과 ‘노동윤리’의 강의 속에서 노동자의 감정에 호소하는 언어는 힘을 잃기 마련이다. 설사 그가 어설픈 형식논리를 들이댄다고 해서 결과가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두 번째로 ‘사회적 관계의 불평등’은 대화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화자들의 관계를 위계화하는 사회적 요인을 말한다. 이러한 사회적 조건화로 인해 ‘말할 수 있는 사람’과 ‘들어야 하는 사람’은 애초부터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위에서 언급한 노사협상의 예를 다시 한 번 들어보자. 대화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이 ‘협상’이 갖는 성격은 미리 결정되어 있다. 여차하면 사용자는 그를 승진대상에서 제외하거나 아예 해고할 수도 있으며, 극단적인 경우 ‘회사 때려치우고 은행 이자나 받아먹고 살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실력 행사를 한다고 해도 크게 두려울 것이 없는 것이, 그들의 뒤에는 든든한 공권력이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자의 요구란 기껏해야 사용자의 인내심의 한계에서 허용되는 경우가 많다.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모든 언어교환에 권력이 작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대화에 임하는 모든 화자들은 화자의 불평등한 분배구조 속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동등한 위치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은 이처럼 불평등한 관계를 토대로 작용하지만, 이에 대한 저항과 갈등이 표출되지는 않는다. 이는 화자에 대한 상대방의 승인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것은 화자가 대화의 장 내에서 점유하고 있는 위치와 자본에 대한 인정을 뜻한다. 앞서 ‘노사협상’은 애초부터 등등한 조건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노동자가 아무리 자신의 입장이 불리하다고 해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대단히 불평등한 매체이니 만큼 다른 의사소통 수단을 사용합시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사용자가 그토록 강조하는 ‘합리적인 언어’는 이미 노동자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경영자의 언어를 빌어 자신의 요구를 전달해야 하는 것이 노동자의 운명일 수 밖에 없다. 결국 사용자와 언어를 공유하는 것 자체가 그가 가진 자본과 지위를 묵인하는 것이 된다.
 
4.      언어: 분절의 체계
 
모든 담론은 특정한 대상을 가지고 있고, 다른 개념을 희생시키면서 어떤 개념을 앞으로 내세운다. 상이한 담론은 상이한 개념과 범주를 만들어낸다. 거머리로 피를 뽑으며 의료와 이발을 동시에 하던 옛 유럽 이발소의 언어는 현대의 병원에서 사용되는 언어와 명백히 다를 것이다. 푸코(Michel Foucault)에 따르면 ‘젖은 양피지 조각’이라는 말은 18세기에 널리 사용되던 엄연한 의학용어였다. 그러나 의학이 근대의 합리성과 결합되면서 그 용어는 사라져 버렸다. 이처럼 시대에 따라 담론에 포함되는 영역과 배제되는 영역은 명백히 다르다. 의학이 합리성의 담론과 결합되면서 현대의 의사들은 더 이상 뇌 주위에서 ‘젖은 양피지 조각’을 발견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은 ‘황간막’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이처럼 담론은 어떤 시대에는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만들기도 하고, 또 전에는 보이던 것을 보이지 않게 만들기도 한다. 푸코는 언어의 분절화 현상이 인식된 대상을 일정한 방법으로 구조화한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은 물론,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이 대상을 특정 방식으로 나누는 ‘분절의 방식’에 의해 결정된다. 다시 말해 특정한 분절의 법칙에 따라 구성되는 담론 속에서 대상이 정의되고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담론이란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을 분할하는 분절의 체계이며, 그 위에서 대상을 정의하고 설명하게 하는 규칙의 체계다. 결국 언어의 기능은 사물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재단’하는 것이다.
‘분절(articulation)’이란 언어가 대상을 일정한 단위로 나누어 분류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같은 시계소리가 한국사람에게는 “똑딱 똑딱”으로 들리지만, 영미인들에게는 ‘틱 택(ticktack)”으로 들린다. 소리 그 자체는 비분절음이지만 이 소리가 특정한 방향으로 분절되고 나면 우리는 그 소리를 언어가 지시하는 대로 듣게 된다. 에스키모인들은 눈을 십여 가지 이상으로 분류하는데, 이것 역시 언어의 분절화가 가져온 결과로 볼 수 있다. 언어에서 ‘의미 있는 것’이 되도록 하는 것은 개개의 항목이 지니고 있는 특유한 성질이 아니라 서로간의 관계와 각 항목의 차이(difference)이다. 그러나 가능한 모든 차이가 유의미한 것으로 등록되지는 않는다. 실제로 많은 차이가 무시되고 있으며,  명백히 서로 다른 것일지라도 한 문화권에서 ‘다른 것’으로 인지되지 않는 차이는 ‘같은 것’으로 묶여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컨대 한국사람들은 영어의 ‘doll’의 첫 자음 /d/와 한국어 ‘달’의 초성 /ㄷ/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영어권 문화에서 이것은 ‘유성음(voiced)’과 ‘무성음(voiceless)’이라는 큰 차이로 인지된다. 또한 영어를 배우지 않은, 즉 ‘영어권의 구조’ 속으로 편입되지 않은 한국인들은 /r/과 /l/, /f/와 /p/, 그리고 /v/와 /b/를 같은 소리로 인지할 것이다.
워프(Benjamin Whorf)와 사피어(Edward Sapir) 등의 구조주의 언어학자는 언어라는 구조가 경험을 서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경험 그 자체를 규정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사피어는 더 나아가 객관적이고 불변인 ‘현실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사피어와 워프는 언어의 구조와 문제를 사회행동의 다른 분야로 넓혀감으로써 문화의 형상이 그 문화에서 사용되는 언어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 한 사회의 언어와 문화는 동일한 방식으로 규정되어있다는 것이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있다”는 라캉의 주장은 언어가 사회나 문화구조 뿐 아니라 인간의 내면구조까지 결정한다는 언어결정론적 입장을 드러낸다.   
푸코의 말을 빌면 담론은 ‘말과 사물을 이어주는 사슬’인 동시에 ‘사물과 언어를 재단하는 방법’이다. 19세기 이후 ‘젖은 양피지’라는 표현이 ‘비과학적’이고 ‘주관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자취를 감춘 것은 이러한 ‘말과 사물을 잇는 사슬’의 변화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합리성에 대한 절대적 기준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현대의 의학적 담론이 요구하는 시대감각에 맞지 않기 때문에 배제된 것이다. 담론은 이렇게 시대감각에 맞는 것은 포함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배제하는 분절의 규칙이다. 어떠한 대상도 담론이 허용하는 한에서만 눈에 드러나고, 말해지고, 또 설명될 수 있다. 푸코는 자신의 저서인 <임상의학의 탄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언어적 표상과 대상 사이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가 사물을 포착하는 순간부터 그 대상을 마음대로 주무르려고 하는 언어의 음흉한 계략, 즉 끊임없이 새로운 담론 속으로 끌어들여 대상의 모습을 변질시키려 하는 언어적 횡포다.”
 
5.      구조주의 언어학의 한계와 담론이론
 
“담론(discourse)”의 개념은 연구 목적 및 분야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일반적으로 ‘문장보다 상위의 범주에 속하는 언어적 발화’로 정의된다. 간단히 말해 담론은 문장보다 큰 단위의 말 집합이다. 담론은 보통 언어적인 것을 지칭하지만 넓게는 비언어적인 것까지도 포함한다. 담론분석은 한 개인의 구체적인 발화보다는 두 사람 이상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상호작용, 그리고 주어진 맥락 속에서 이 담론들을 지배하는 언어적 규칙 및 관습이다.
                전통적으로 – 심지어 현재까지도 여전히 지배적인 관점으로서 – 의미가 ‘저 밖의 세계’에 내재해 있다거나 개인의 내면에 존재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구조주의적 관점에서는 의미가 객관적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기호의 의미작용(signification)의 효과일 뿐이다. 여기서 기호와 지시대상 사이의 관계는 아무런 필연성이 없는 자의적 관계이며, 의미작용은 외부세계와 개인의 특성이 아닌 언어의 자의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 관점에 따르면, 외부세계와 개인의 의식은 언어 및 의미작용의 원인이 아니라 도리어 결과일 뿐이며, 언어와 의미작용을 떠나서는 ‘나’도 ‘세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들이 우리들에 대해서 말하는 바가 곧 우리 자신이며, 우리들이 세계에서 말하는 내용이 곧 세계 그 자체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가 갖는 문제는 이 관점이 지나치게 막연하고 추상적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 견해는 세계와 언어가 우리가 가 원하는 어떠한 의미도 가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결국 ‘언어’라는 추상적 개념은 의미가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특정한 형태로 고정되는 것을 적절히 설명해 내지 못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담론’의 개념이 허술하고 애매한 ‘언어’의 개념을 대체하기 시작한다. ‘언어(language)’와는 달리 ‘담론(discourse)’은 명사인 동시에 동사이다. 따라서 ‘언어’가 ‘사물’로만 이해되는 반면, 담론은 하나의 ‘행위’로도 이해될 수 있다. 담론은 상호작용의 과정인 동시에 사고와 커뮤니케이션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결국 담론은 의미를 만들고 이를 다시 재생산하는 사회적 과정이다.
                의미는 추상적인 언어체계인 ‘랑그’에 의해서만 생산되고 우리는 세계를 언어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하자.  하지만 이런 견해에 동의한다 할지라도 언어일반이 역사발전 및 사회적 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만은 인정해야 한다. 요컨대 ‘랑그’는 추상적일 수 있으나 의미는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담론은 사회적, 역사적, 제도적 구성체의 산물이며, 의미는 제도화된 담론들에 의해서 생산된다. 이에 따르면 언어는 잠재적으로 무한한 의미를 생산할 수 있으나,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우세한 사회관계의 구조가 그 의미를 한정하고 고정시키며, 이 구조는 다양한 담론들을 통해 재현된다. 따라서 언어를 배우는 것은 추상적인 기술의 습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우리는 앵무새처럼 ‘언어만’ 배울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은 다양한 주체성 – 계급, 성, 국가, 민족, 나이, 가족 등 – ‘재현’하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지배 담론 속에서 태어난다. 우리들은 이러한 담론적 주체들 속에 ‘서식’하며 각자의 주관성을 확립하고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주체들은 서로 협력하거나 충돌하며 공존한다. 담론 이론에 따르면 주관성 그 자체가 담론의 서식처다.
                사회적으로 생산된 의미들이 만나 충돌하는 담론 속에는 텔레비전 뉴스와 같은 ‘매체담론’부터 의학, 문학 그리고 과학과 같은 ‘제도화된 담론’까지 모두 포함된다. 그들 중에 몇몇은 높은 지위와 합법 및 당위의 권위를 누리며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공식적 담론’의 지위에 오른다. 반면에 어떤 담론은 옹색한 인정이라도 받기 위해 치열한 투쟁을 벌인다. 결국 담론은 권력관계다. 이것의 좋은 예로 (합법적이고 자연스러운) 가부장제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그리고 주변화된) 페미니즘을 들 수 있다.  기호학적 텍스트 분석을 통해 이러한 투쟁의 방향을 추적하는 것은 가능하다. 즉 어떻게 특정한 텍스트가 다양한 담론의 요소들을 취하고 그것들을 접합(articulation)하는가를 파악하는 것이다. 텍스트는 담론의 순환, 확립, 억제의 기능을 수행한다. 따라서 우리는 텍스트의 분석을 통해 담론의 자취를 좇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론은 결코 텍스트의 동의어가 아니다. 의미는 결코 텍스트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수용자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담론은 특정한 의미의 집합들을 생산하고 순환시키기 위해서 사회적으로 개발된 재현의 언어, 혹은 체계라고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들은 자연화 과정을 거쳐 한 사회의 ‘상식’이 됨으로써 그 담론이 기원한 사회의 특정 계층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게 된다. 담론이 권력관계로 이해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담론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돕거나 이와 대항하여 싸우는 사회적 행위이기에 ‘담론적 실천(discursive practice)’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6.        종합: 기호학 분석의 예[1]
 
 7. 1. 광고, 기호, 의미
 
시각기호는 언어기호와는 달리 의미가 대단히 모호하다.  시각기호의 이러한 모호성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으로부터 유래한다.  위의 광고에서 시각기호를 설명해주는 언어기호가 없다고 가정해 보자.  이 때 벨트와 약병의 관계는 고정되지 않고 무수히 많은 의미의 연속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것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들은 이 약이 벨트의 버클을 닦는 광택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약이 가죽을 튼튼하게 만드는 가죽 강화제나 접착제라고 생각할 지도 모를 일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벨트와 약”이 흔히 연관되는 상황을 떠올리면서 이 광고가 다이어트를 위한 약이라고 단정할 수도 있다.  이처럼 무한한 기호의 의미작용(semiosis)은 광고주가 가장 염려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광고에 그 많은 돈을 쏟아 부었는데도 정작 소비자는 철물점이나 옷가게에서 “호르반”을 찾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어쩌겠는가?  그 때문에 광고주는 광고의 의미를 특정한 범위 내로 한정시키고자 하는데, 여기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언어기호다.  “호르반”이 “연마제”나 “다이어트약”이 아닌 “강장제”임을 말해주는 유일한 단서가 바로 언어기호이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는 이처럼 광범위하고 모호한 시각기호의 의미가 언어기호의 매개를 통해 고정되는 과정을 ‘정박(anchorage)’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배가 닻을 내려 바다 위에 선체를 고정시키듯 언어기호는 무한한 의미의 가능성 위에서 시각기호를 특정한 영역 내에 고정시킨다는 것이다.
 
         7. 2. 광고 기획자의 의도, 독자의 해석
 
광고의 목적은 상품의 이상적 속성이나 이미지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면 거짓이든 간에)를 소비자들에게 인식시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설득의 과정은 소비자들이 이미 익숙한 지배적 의미체계에 기반하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상식'은 광고 기획자들과 소비자들의 소통을 가능케 하는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평범한 소비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수준 높은 광고'란 결코 광고주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위의 광고가 ‘정보부족으로 인한 혼란’을 통해 소비자의 시선을 유도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부족은 단지 일차적 해석의 과정, 즉 “외연 (denotation)”의 수준에서만 작동한다.  소비자들은 한 눈에 알 수 없는 광고에 호기심을 갖지만, 눈길을 끈 이후에도 광고가 계속해서 의미를 알려주지 않는다면 소비자들은 곧 싫증을 느끼고는 외면해 버릴 것이다.  신문이나 잡지를 뒤척이는 소비자들은 화랑에 걸린 추상화를 바라보듯 인내심을 가지고 광고메시지를 해석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광고메시지는 다분히 대중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대중성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미 반복해서 경험한 익숙한 의미체계에 기반을 두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앞에서 벨트와 약의 모호한 관계가 “똑바로 서는 남자”라는 언어기호를 통해 고정됨으로써 그 의미가 드러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약병과 벨트의 의미가 어떻게 “선다”라는 행위 및 “남자”라는 성별과 연관되는가?  그것은 사진 속의 벨트가 남성용이라는 상식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고 “선다”는 기호는 일차적으로는 벨트와 약병의 상태를 서술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그 약이 접착제가 아닌 이상) 그 기호는 벨트가 아닌 남성성과 결합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벨트라는 시각기호는 벨트 자체가 아니라 그 벨트를 착용하는 남자를 대표하는 기호이며, 이러한 연관관계는 한 문화권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익숙한 의미체계에 근거한 것이다.  (이 사회에서는 성인 남성이라면 그 누구도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원색 벨트를 착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선다”는 언어기호 역시 상식적인 기호작용을 통해서 그 의미를 전달한다.  “서다”라는 기호는 특정 대상이 수직으로 놓여있는 상태와 쓰러진 상태에서 다시 일어나는 행위 모두를 의미한다.  여기서 “서다”는 사진 속의 벨트와 약병이 서 있는 상태를 서술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동시에 한국 사회에서 남성성이 갖는 상식을 재현하고 재생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후자의 의미에서 “선다”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발기한 남성의 성기'라는 성적 의미이고, 두 번째는 가장의 '재기(再起)' 혹은 '성공'이라는 사회적 의미이다.  이처럼 상이한 두 가지 의미는 “선다”라는 동일한 언어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결합된다.  남성의 벨트가 남성성으로, 그리고 벨트가 서 있는 상태가 사회적 성공과 성적 능력으로 자연스럽게 확대되는 과정은 이처럼 상식적인 의미체계에 근거하고 있다.  여기서 “상식”은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하는데, 하나는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광고메시지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러한 의미체계의 허구성을 은폐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호학의 목표는 이런 의미의 허구성과 이데올로기를 폭로하는 데 있다.
 
             7. 3. 은유: “서는” 남성
 
상식은 언제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진리의 위치를 자임한다.  그리고 이런 상식은 “은유”와 “환유”라는 언어의 수사학적 도구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다.  앞의 광고에서 “똑바로 서는 남자”라는 기호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다른 차원을 갖는다.  첫 번째는 문자 그대로 물리적으로 (두 다리로) 서 있는 남성이다.  그러나 이 의미는 “호르반”이 관절염 치료제가 아닌 이상 “강장제”라는 상품에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못한다.  두 번째는 다른 차원에서 물리적으로 “선,” 다시 말해 성적 능력이 왕성한 남성이라는 함의다.  이 두 번째 의미는 공적인 담론 차원에서 쉽게 다루어지지 못하는 비공식적 언어에 의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의미 뒤로 모습을 숨김으로써 사회적 반감을 피해간다.  세 번째는 “서다”의 의미가 은유적으로 확장된 것으로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성'이라는 함의다. 
                그 밖에도 앞의 광고에는 많은 은유의 기법이 사용되고 있다.  먼저 길게 누워서 앞부분을 수직으로 세우고 있는 남성용 혁대는 뱀의 은유이다.  많은 문화권에서 뱀은 남자 성기의 상징이자 은유이다.  이는 물리적 유사성에서 나온 것이지만, 특히 한국 문화권에서는 이러한 외적 유사성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뱀은 오랜 시간 동안 성교를 할 수 있는 정력의 화신인 것이다.  실제로 한국에서 뱀은 가장 선호되는 정력제이기도 하다.  이 혁대는 뱀의 은유를 통해 자연스럽게 남성의 성기로 이어진다.  따라서 앞부분을 수직으로 세우고 있는 이 혁대는 극도로 발기된 남성 성기의 은유가 된다. 위의 은유는 비교 대상을 명시하고 있지 않다.  물론 은유는 두 개 이상의 비교 대상을 필요로 하지만, 긴 물체 뱀 성기로 이어지는 은유는 우리의 문화권에 이미 코드화 (codification)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굳이 보여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약품과 이 문화적 약호 사이에는 아무런 유사성이 없다.  이 광고의 목적은 이처럼 무의미한 두 대상 사이에 인과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광고는 발기된 성기 밑에 약병을 나란히 놓아둠으로써 두 관계를 연관시키는 은유의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보통의 드링크제와는 판이하게 긴 모양으로 설계된 용기는 그런 면에서 대단히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남성의 혁대 밑에 배치시킨 긴 약품 병이 의도하는 바는 분명하다.  “이 약을 복용하면 이렇게 된다.”  광고 기획자는 수용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혁대의 위쪽에 “똑바로 서는 남자!”라는 메시지를 추가하는 배려를 보이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똑바로 서는 남자”란 이중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이것은 발기한 남자의 성기인 동시에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남자라는 함의이다.  여기서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서다”라는 기호는 은유의 주축이 되고 있다.  즉  ”남자가 바로 서”야 “가정이 바로 서”고, “가정이 바로 서”야 “사회가 바로 서”며, “사회가 바로 서”야 “국가가 건강해진다”는 것이다.  삼단 논법의 형태로 진행되고 있는 이 메시지는 “건강한 국가를 위해선 남자가 바로서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남자가 바로 선다”는 메시지는 위에서 말한 바처럼 성적 성공과 사회적 성공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그 뒤에 반복되는 “가정이 바로 선다”와 “사회가 바로 선다”는 말에는 성적 함의가 내포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단순한 동어반복처럼 사용되는 “서다”라는 말은 결코 동일 개념의 반복이 아니다.  이는 남성의 물리적인 성적 능력을 가정, 사회, 그리고 국가로 자연스럽게 확장시키는 은유의 은폐전략이다.  남성의 성적 능력이나 출세가 가정의 성공이나 사회의 발전으로 귀결될 아무런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이한 개념들을 연결해주는 것은 자연적 인과관계나 논리적 연관성이 아니라 바로 문법적 착각일 뿐이다.
 
           7. 4. 환유: 허리띠와 가장
 
이제까지 동일하지 않은 두 개념을 동일시하는 은유의 작용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처럼 개인적인 성적 능력이 사회적 함의로 확대되는 현상은 환유의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  환유를 간단히 '어떤 한 부분을 통해 전체를 지칭하는 방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광고의 사진 속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남성용 혁대와 긴 약품 용기뿐이다.  그러나 이 두 시각기호는 수용자로 하여금 그 이상의 의미를 생성해 내도록 한다.  먼저 검은 색 띠와 금과 은으로 도금된 버클장식은 이것이 고급 남성용 정장과 함께 착용하는 장신구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금과 은은 부에 대한 환유이며, 검은 색은 권위의 환유이다.  이를 전체적으로 포괄하는 사진 속의 혁대는 고급 신사복의 환유가 된다.  이러한 정장을 입는 사람은 이른바 화이트칼라, 즉 사무직 직장인이다.  부분으로 전체를 말하는 환유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혁대 하나가 직장인의 의미로 확대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똑바로 서 있는 혁대가 의미하는 바는 성공한 직장인 남성이다.  여기서 남성은 가장으로서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고 대표하는 사회적 역할의 주체이다. 
                 직장인 남성과 또 다른 환유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남자의 성기이다.  혁대는 사무직 직장인의 환유이자 남성 성기의 은유이다.  그런데 남성의 성기는 또 다시 환유를 통해 성인 남성의 의미를 드러낸다.  남성의 성기는 남성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기는 환유적으로 성인 남성 전체를 의미하게 된다.  서 있는 혁대, 즉 발기된 성기는 왕성한 성적 능력을 지닌 남성의 환유이다.  여기서 남성은 성적 관계의 주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결코 성적 능력이 만족스런 부부관계의 동의어일 수는 없다.  부부관계가 물리적인 성교만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만족스러운 부부관계가 가정을 세우는 하나의 기초를 제공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결코 그것의 동의어는 아니다.  이 광고에서는 성적 남성과 사회경제적 남성을 연결하는 환유의 커다란 두 갈래를 발견할 수 있다.  이를 도식화 하면 다음과 같다
                  기호학은 특정 맥락 속에서 특정한 계열체(paradigm)가 선택되는 이유에 관심을 갖는다.  다시 말해 선택 가능한 일련의 기호 속에서 왜 하필 그것을 택했느냐는 것이다.  기호의 의미는 그것이 아닌 다른 것들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앞의 광고에 사용된 혁대는 여성용 혁대가 아니고, 어린이나 근로자가 사용하는 혁대가 아니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요컨대 이 혁대의 주인은 가정과 사회에서 가장 큰 권력을 지닌 남성, 그리고 성인으로서 사무직에 종사하는 사람이다.  결국 이 혁대의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기호로 연결된다.
                 한국의 문화권에서 혁대는 경제적 의미와 연결된다.  예컨대 허리띠를 졸라맨다는 말은 경제적 긴축을 의미한다.  또한 사모관대(紗帽冠帶)란 말에서 허리띠는 벼슬, 즉 사회적 성공을 의미한다.  이처럼 혁대는 한국에서는 단순한 장신구 이상의 함의를 갖는다. 
광고에 나타난 혁대는 검은 색 띠에 금과 은으로 도금된 버클이 달려 있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금과 은은 부를, 검은 색은 권위를 의미하는 기호이기 때문에, 이 모든 의미요소들이 상호작용을 통해 혁대를 가정과 사회의 경제적 주체로 드러낸다.  여기서 혁대가 곧게 서 있는 모습은 가장의 사회적 성공을 의미하는 기호이다.           
광고에 나타난 혁대 그 자체는 가장을 의미하지만, 길게 뻗어 있는 전체적 형상은 남자의 성기를 의미하는 기표로서, 결국 남자의 성적 능력을 뜻하는 기호가 된다.  혁대가 서 있는 모습은 발기된 성기를 나타내며, 이는 결국 왕성한 성적 능력 가진 남성을 의미한다.                           
                  광고에 나타난 언어기호에서 고개 숙인 남자라는 말은 바로 선 남자와 흔들리지 않는 남자에 대립되는 사람으로서 발기되지 않는 성기와 낙심한 가장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내포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똑바로 서는 남자는 왕성한 성적 능력을 가진 남성인 동시에 당당한 가장이다.  이 광고 메시지에 따르면, 남자가 바로 서야 가정이 바로 서고, 가정이 바로 서면 사회가 바로 서며, 사회가 바로 서면 국가가 건강해 진다.  결국 가정의 침실로부터 국가 번영의 과업에 이르기까지 여성이 참여할 여지는 없다.  남자와 여자 간의 성관계는 남성이 바로 서는 성능력 만 갖추면 해결되는 것이며, 가정과 사회의 발전은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획득된다.  이는 발기와 번영이라는 상이한 개념을 서다라는 개념으로 동일화함으로써 발생하는 은유의 작용이다.  여기서 여자가 성관계나 사회경제적 활동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여자는 “서”지 않기 때문이다.
 
[1] 기호학연대, 기호학으로 세상읽기, 서울: 소명사, 2002.
[출처] [공유] 소쉬르와 퍼스 다시 읽기(3)-강인규|작성자 옥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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