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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옥타비오파스 시론

옥따비오 빠스의 시와 시학 2
2019년 03월 09일 21시 33분  조회:1307  추천:0  작성자: 강려
뜨거운 추상의 시어들
 
옥따비오 빠스의 시가 우리 입맛에 맞지 않은 또다른 이유는 우리의 시의 추상어 기피현상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말에서 추상어는 모두가 한자말이다. 아니면 일본어에서 온 생경한 말이다. 일제로부터 우리말을 되찾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았고, 또한 우리가 오랜 한자문화의 전통 속에서 자란 반작용이 있기 때문에 쇄국주의적 우리말 선호풍조를 키워왔다.
 
우리말, 우리스러운 정서에 대한 열정은 한편으로 한국적 정서로는 우리 문학의 형이상학적 깊이를 잃게 하는 역효과도 가져왔다. '언문'이나 '내방문학'으로, 민요로 명맥을 유지해오던 우리말은 주로 여성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이런 우리말이나 우리 문학어의 특징은 여성 특유의 한이나 정감을 표현하는 데는 뛰어날 수 있었지만 추상이나 관념을 풀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옥따비오 빠스의 시는 생각과 감각이 하나 되어 이루어지는 미학이다. 어디까지가 우주만물에 대한 관조이고 어디까지가 감각이나 느낌의 형상화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말로 빠스의 시를 옮겨놓으면 시가 갖는 깊은 사고의 무늬가 그 현묘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만다. 나는 빠스의 이런 시학을 '맛있는 추상'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하려 한다.
 
 
너의 눈동자 
 
바람 없는 폭풍, 파도 없는 바다,
갇힌 새들, 졸음에 겨운 황금빛 맹수
진실처럼 무정한 수정
숲속의 환한 빈터에 찾아온 가을, 거기
나무의 어깨 위에선 빛이 노래하고, 모든 잎사귀는 새가 되는 곳
아침이면 샛별같이 눈에 뒤덮인 해변
불을 따 담은 과일 바구니
맛있는 거짓
이승의 거울 저승의 문
한낱 바다의 조용한 맥박
깜박거리는 절대
사막.
 
여기에서 아름다운 한 여인의 눈동자에 대한 감이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 첫 구절 "너의 눈은 번개와 눈물의 조국"의 이미지는 선명하다. 너의 반짝이는 눈동자, 그러나 금방 눈물이 쏟아질 듯 물기어린 아름다움....그러나 여기에서부터 물(눈물)과 불(번개)의 역설적 만남이 시작된다. '너의 눈동자' 속에는 끝없는 역설이 산다. 말하는 고요, 침묵의 언어, 바람 없는 폭풍, 파도 없는 바다, 이들 이미지 속에서 너의 눈빛에 응축된 정열은 조용한 바다의 고요로 반짝이고 있다. 너의 눈빛은 수정처럼 맑다. 비인간적으로 아름답다.
 
"숲속의 환한 빈터에 찾아온 가을." 이 시구는 속눈썹 켜지는 깨달음 같은 사랑에의 확신을 생각하게 한다. 아니면 장자의 우주관처럼 모든 사물들이 각각의 분계를 넘어 "잎사귀는 새가 되고" "나무의 어깨 위에선 (새 대신) 빛이 노래하는" 극도의 황홀이 있다. "아침이면 샛별같이 눈에 뒤덮인 해변."  눈에 뒤덮인 해변 속 샛별, 하얀 얼굴에 반짝이는 눈빛, 하얀 눈빛의 파동과 파도 속에 자리한 반짝임. 시인은 마침내 너의 눈동자를 "불을 따 담은 과일 바구니"라고 부른다. 은유치고는 최고의 역설이다. 불이 어떻게 과일일 수 있는가. 그러나 너의 눈동자를 보면 그게 기적처럼 가능함을 본다. 먹을 수 있는 추상. 만질 수 있는 불. 맛있는 영원의 불길. 그래서 너의 눈빛은 '맛있는 거짓'이다.  
 
너의 눈동자는 내게 영원한 사랑의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속세의 인간에게 영원한 사랑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그것은 거짓이다. 거짓이어도 믿고 싶은 '맛있는 거짓', 그것이 너의 눈동자다. 그렇다. 너의 눈동자를 보면 나는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보람을 느낀다. 살아 있다는 것이 이토록 황홀한 것임을 안다. 너의 눈동자야말로 내가 이승에 살아 있기를 잘했다는 느낌을 준다. "이승의 거울." 너의 눈동자의 아름다움.
 
그러나 동시에 너의 눈은 내가 영원할 수 없고 영원히 사랑할 수도 없음을 확인해주는, 생의 한계성을 절박히 느끼게 하는 "저승의 문"이다. 너의 눈은 죽도록 사랑하고 싶은 나의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산다는 것은 결국 죽음(바다)속에 떠 있는 가벼움(맥박)이다. 나는 너의 눈동자를 보며 살아 있다는 실감을 경험한다. '깜박거리는 절대', 너의 눈동자에 취한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소망한다. 동시에 나는 그것이 영원히 불가능함을 안다. 너의 눈동자의 아름다움과 그 반짝임은 모든 것을 약속하지만, 그것은 또다시 그 모든 것이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더욱 큰 목마름으로, 뼈로 알게 한다.
 
이 시의 해설이 이렇게 길어지게 된 것은 그만큼 응축된 추상들로 시가 엮여져 있기 때문이다. 명사 중에서 고유명사가 가장 구체적이다. 루쏘의 '언어의 시원'에 따르면 고유명사에서 보통명사가 생긴다고 한다. 태초에 '나무'란 말은 한 잎사귀 많은 기둥을 일컫는 고유명사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나무'를 닮은 많은 기둥들이 보이자 이것도 나무, 저것도 나무라고 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아는 '나무'라는 보통명사가 생겨났을 것이다. 보통명사를 아우르는 것이 '초목' '식물' 같은 총칭명사이고, 그 총칭명사를 넘어서 모두를 일컫는 말이 추상어이다. 즉, 형상 있음을 넘어선 형상 없음으로 전체를 규정하는 말이 추상어이다. 그림에서 추상화가 가장 건조하고 알아보기 어렵듯이 시에서 추상어의 남발은 시를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그 어려움은 낯섦의 다른 표현일 뿐 인간의 구체적 느낌과 생각까지 도외시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흔히 아름다운 풍경이나 집의 구체성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그 실체성에 대한 최상급의 찬사이다. 그러므로 감동으로 육박해 오는 구체적 현실감은 이렇게 추상으로 표현되곤 한다.
 
어떤 문학이건 종국에는 그 의미가 문제되는 법이다. 아무리 이미지성이 강한 시라도, 아무리 구체적 감각과 심상이 있는 시라도, 마지막에 그것이 엮어내는 의미의 무늬로 시와 시 아닌 것이 판가름된다. 무의미 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까를로스 보우소뇨도 '자동필기법'을 동원한 현대시의 가장 난해한 속성을 '상징화'라고 결론짓는다. 쉬르리얼리즘이 가진 극단의 불연속적 이미지도 결국은 '상징화'를 통한 의미 산출로 향하고 있다.
 
그러나 빠스의 추상은 그렇지 않다. 빠스의 추상어는 먼저 감탄사이다. 시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음을 감탄사로 대치하고 있다. 언어와 시가 의미를 향한다면 빠스의 시는 그 의미와 추상에서 되올아오는 시다. 
 
 
손끝으로 느끼는 삶
 
나의 손은 
네 존재의 커튼을 연다
너를 또다른 벌거숭이 옷으로 입히고
네 몸의 그 많은 육체들을 벗긴다
나의 손은
너의 몸에서 또다른 몸을 창조한다.
 
 
여기서 존재라는 말은 그 사랑과 감탄과 흥분이 빚어낸 절정감을 표현하는 추상어이다. 나의 손은 너의 존재를 손끝으로 하나하나 확인해간다. 나의 손끝이 그려가는 너의 육체는 너의 육체가 아니다. 나의 손끝이 느끼는, 나의 손끝이 그려가는 또다른 '벌거숭이 옷'이다. 나의 손은 너의 몸뚱어리 곳곳을 탐색한다. 너무도 신기하고 새롭다. 벗길수록 새로운 네 속의 그 많은 곳들, 물체들. 그러나 너는 지금 나의 손끝을 황홀경에 빠뜨리는, 네 육체가 가진 신비를 모른다. 그리고 너의 육체는 나의 손끝을 모른다. 나의 손끝이 너의 몸에서 느끼는 황홀은 너의 황홀이 아니라 나의 황홀이다. "나의 손은 / 너의 몸에서 또다른 몸을 창조한다."
 
 
 
추상어를 통한 이미지들
 
서구 르레상스 이후 오늘의 시는 절묘한 은유와 상징을 통해 오묘한 감정과 의미를 산출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어왔다. 그러나 빠스의 추상어는 그 의미에서 감각과 느낌으로
되돌아와 이미지를 산출한다. 옥따비오 빠스는 보르헤스같이 가장 지것인 시학을 가지고 있다. 그는 지성인의 추상적인 언어로 더욱 정력적인 것을 진솔하게 선사한다.
 
 
독백
 
허무와 꿈 사이
부서진 기둥 밑에서
나의 불면의 시간들을 가로질러가는
너의 이름, 음절들
 
불그레산 너의 머리칼
한여름의 번갯불이 
밤의 등뒤에서
달콤한 횡포의 불빛으로 떨리고 있다
 
폐허에서 솟아나는
꿈의 어두운 물살,
허무로부터 너를 벼리어내는 
물에 젖은 밤의 해변이여,
거기 눈먼 바다가 밀려와 
미친듯 후려치고 있다.
 
모든 것은 잊혀진다. 모든 것은 밤을 향한다. 그러나 밤의 등뒤에서 문득문득 되살아나는 횡포스러운 불빛들, 기억들. 나를 잠 못 들게 하는, 의미 없는, 그러나 너무 확실한 입술들. 그것은 날밤의 번갯불 같은, 그러나 달콤한 '횡포의 불빛'이다. '불그레한 너의 머리칼'의 젖은 냄새와 한여름밤의 꿈도 잊었다. 그것은 이제 전설이다. 전설 속에서 솟아나는 꿈의 물살. 망각이나 허무로부터 "나는 살았노라!" 다시 일깨우는, 심지어 이 밤 눈물을 가능케 하는 이름없는 추억이여. 물에 젖은 밤의 해변이여. 나는 하나도 증명할 수 없는 한 여인의 사랑에 아파하며, 주소 없는 아픔의 "눈먼 바다가 밀려와" 나의 온몸을 미친 듯 후려치는 비극 아닌 비극을 실감하다. 
 
 
 
시를 향하여
-출발점들
 
 
말들, 몇 순간의 수확들, 아침인사와 저녁인사, 입구와 출구, 아무데에서 아무데로나 가는 복도의 입구에, 불타버린 언어의 나무 숯덩이에서 끌어낸 말들.
동물성 뱃속, 광물성 뱃속, 시간의 뱃속에서 끝없이 뒤치다, 출구를 발견하는 것 : .
나의 시선들이 부서지는 그 얼굴의 집념 폐허화된 풍경 앞에서,
미궁을 공략한 뒤, 다시 불굴의 의지로 무장한 전선, 혹은 이마. 화산의 고뇌.
시대의 우상, 지휘자, 총수의 종이호랑이 상판때기의 인자함, '나'들, '너'들, '그'들, 거미줄을 짜는 사람들, 손톱으로 무장한 대명사들, 얼굴 없는 추상스러운 성인들, 그, 그리고 우리들, 그리고 그 위대한 사람, 아무도 아닌, 누구도 아닌 그 사람. 아버지 하느님은 이 모든 우상들의 모습 속에서 복수를 당한다.
이 순간은 얼어붙는다, 응고된 백색이 눈을 흐린다, 대답이 없다 사라진다 빙빙 도는 물살들로 밀려난 북가죽 돌아오리라
환상의 탈을 벗긴다 만감한 한가운데 큰 못을 박는다 화산폭발을
자극한다
탯줄을 끊는다 성모를 잘 죽인다 : 이것이 현대 시인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저지른 범죄. 새 시인은 성모 대신 커다란 사랑의 여신을 찾아야 한다.
말하기 위해 말하기, 절망적으로 소리를 끌어내기, 파리가 날아가는 소리를,
그 말을 받아적기, 까맣게 되기. 시간은 두 갈래로 열린다 : 죽음 앞에서 뛰어내리기.
 
 
 
위의 시 또한 파괴적이다. 시쓰기는 말 만들어내기이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오가다 찌들리고 불타버린, 생명이 없는 단어들을 그러모은다. 이미 이들이 가진 의미는 시인이 찾는 소리가 아니다. 빠스는 이들 불모의 말들을 반짝임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것을 시라고 말한다.
 
시쓰기는 '사랑 행위이며 전쟁'이다. 빠스가 좋아하는 이런 표현은 멀리는 이딸리아의 뻬뜨라르까로부터 오지만 빠스에게는 시락이 된다. 그리 <평론의 열정>의 한 구정을 보자.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것과 대치하는 행위입니다, 소음이라든지 도시, 문명, 나무 들....문학은 일종의 반칙행위요. 무엇보다도 일상언어 전달의 위반행위에 속합니다. 그리고 언어의 붕기는 작가의 현실에 대한 자세에서도 보여집니다. 작가는 항상 어떤 것에 맞서서, 많은 경우 어떤 것에 대항하여 글을 씁니다. 내가 이 '대항하여'라는 말을 쓴 것은, 꼭 어떤 것을 증오하여 글을 쓴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대항하는' 것도 사랑 행위일 수 있지요. 어떻든 시쓰기는 언어의 파괴행위입니다. 아니면 언어의 표피를 깨고, 언어의 내부로 파고드는 행위지요. 그래서 글쓰기는 싸움이나 사랑 행위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시인의 이마는 전쟁터가 된다. '황폐화된 풍경' 앞에서 다시 말을 짜내는 불타는 이마. 시 속의 호랑이는 결국 종이호랑이이다. 니체 손에서 신은 죽었다. 신과 함께 인간도 죽었다. 인간과 함께 말도 죽었다. 따라서 시인이 만들어내는 말과 상징은 이제 절대성을 잃은 공허한 우상일 뿐이다.
 
빠스는 전통적 어머니, 즉 가족과 사회의 모태가 되었고 사회적 의미와 의사소통을 구축해온 성모는 이제 죽었다고 말한다. "성모를 잘 죽인다 : 이것이 현대 시인이 모두를 위해 저지른 범죄, 새로운 시인은 성모 대신 커다란 사랑의 여신을 찾아야 한다"고 시인은 말한다. 시는 이제 진리를 발견하고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즐기고 살아가기 위한, 육체를 가진 여신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 시대의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지요. 현대가 육체의 반란을 겪고 있다고 하는 것은 결국 오늘날 가장 선호하는 가치로 현재성이 나타났다는 것이지요. 육체의 시간은 현재의 시간입니다. 지금까지 발전주의 전진주의가 지향해온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입니다. 그런데 그 미래란 죽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거지요. 육체의 반란이란 전진주의가 숨겨온 죽음의 이미지에 대한 저항입니다. 지금까지의 문명은 최상의 가치로 저축이니, 노동, 부의 축적을 들었지요. 천국을 영원성에 두는 게 아니라 미래에 두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전진주의는 (미래가 내포하고 있는) 죽음이나 종말의 가능성을 부정할 수밖에요. 크리스천에게 죽음은 의미가 있습니다. (신에게로 가는) 하나의 과정이지요. 영원으로 가는 도약이지요. 힌두교인에게도 죽음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해탈이지요. 그러나 미래를 믿고 선진조국의 건설을 믿는 사람에게 죽음은 의미가 없지요. 미래에 죽음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미래에 대한 꿈이나 전진주의를 무력화하니까요. 우리가 추상적으로 말하는 인류의 문명이라는 것은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발전하는 것만은 아니지요. 나는 죽거든요. 더군다나 나는 결코 그 미래에 도착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육체의 반란이란 미래에 대한 반란이며, 가장 중요한 가치를 현재에 두는 것입니다. 육체의 시간이 현재라고 하는 것은 죽음의 가능성까지를 내포한 시간입니다. 육체의 시간이 현재라고 하는 것은 삶과 죽음이 함께 하는 시간이란 말입니다.
 
그러자면 새로운 죽음의 이미지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가장 큰 정복이 될 것입니다. 결국 죽음의 진정한 얼굴을 발견하는 일이지요. 옛날 종교들처럼 영생이라는 이름으로 가장된 얼굴이 아닌, 그렇다고 현대처럼 위장된 얼굴도 아닌 모습 말이에요. 죽음을 삶의 중요한 핵심요소로 보아야지요. 그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에로티시즘은 육체의 시간으로 에로티시즘 속에서는 죽음이 침해나 자해행위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사랑에서는 죽음의 모습이 다르지요.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죽을 사람을 사랑하는 행위입니다. 나 또한 죽을 사람이라는 것을 압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마음은 항상 죽음의 직감과 연결된 고리 위에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마음은 항상 죽음의 직감과 연결된 고리 위에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죽음의 가능성 위에 말입니다."
 
빠스의 말을 듣고 나는 문득 서정주의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란 시구가 생각난다. 그렇다. 지극한 사랑은 죽음을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사랑을 맹세할 때도 "죽음이 둘을 떼어놓을 때까지"란 표현을 쓴다. 서정주의 절구처럼 사랑하는 "네가 죽고 내가 산다면"을 생각할 때 나는 눈이 부신 사랑의 절실함과 깨달음에 이른다. 삶은 죽음의 그림자로 인해 더욱 햇살로 넘친다.
 
우리는 이제 빠스의 <시를 향하여>의 마지막 연의 뜻을 알 것 같다. 결국 시쓰기는 사랑의 행위이며, 죽음 앞에서 말의 도약을 위한 시도이다. 절망 속에서 소리를 끌어내고 삶에서 죽음을, 죽음에서 삶을 이끌어내는 사랑의 행위가 시쓰기이다. 
 
 

 
말, 정확한 소리
그러나 틀린 말
어둡고 빛나는
상처난 샘물 거울
거울이면서 광휘
광휘이면서 갈날
사랑으로 살아 있는 칼
이제 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부드러운 손 열매
 
나를 자극하는 불길
고요한 잔인한 눈동자
현기증의 절정에 머문
눈에 보이지 않는 차가운 빛이
나의 심연을 파헤친다
 
나를 허무로 채운다 공허한 말로
달아나는 투명한 육체들
그 바쁜 움직임에 나의 발길을 맡긴다
 
이제 나를 벗어난 말 하나 나의 말
내 죽은 뒤 남은 뼈다귀처럼
이름도 없는 가냘픈 내 육신의 흔적
나의 어두은 눈물의 
소금맛 얼어붙은 금강석
 
말, 하나의 말 버림받아
웃고 있는 순수 자유
구름처럼 물처럼
대기처럼 빛처럼
온 땅을 헤매는 눈처럼
나처럼 나를 잊은 나처럼
 
말, 하나의 말
마지막이면서 처음인
항상 말없는
항상 말하는
성체용 빵이면서 잿더미.
 
시인의 말은 정확하면서 항상 틀린 말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신의 말이 아니라 상처난 말이다. 말을 찾는 작업은 늘 말의 잔인성과 공허에 맞부딪는다. 말은 항상 "달아나는 투명한 육체들"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붓에 말을 맡긴다. 시인은 자신의 시가 "나의  어두운 눈물의 /소금맛, 얼어붙은 금강석"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시인이 찾는 말은 하나의 말, 처음이면서 마지막인 말이다. 그것은 성체용 빵 같은 구원의 빵이면서 죽음의 잿더미인 패러독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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