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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에 의한 관념의 극복과 순수의 회복/신규호
2019년 03월 10일 16시 29분  조회:1295  추천:0  작성자: 강려
색채에 의한 관념의 극복과 순수의 회복
  서평 - 심상운 시집 『녹색 전율』
  
                                                                   신 규 호<시인>
 
 
 
1.
스스로 술회하고 있듯이 심상운 시인은 2006년에 『디지털시의 이해』(한국시문학아카데미)를 발표한 이래, 하이퍼시의 이론서인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2010년 5월)를 간행하는 등, 새로운 시론을 개척하기에 노력하고 있다. 그가 이번에 간행한 시집 『녹색 전율』은 이러한 그의 하이퍼시 창작 결과 간행되었다는 점에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모두 7부로 구분된 이 시집은 서문(시인의 말)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하이퍼 시 55편과 일반 서정시 61편 등, 총 116편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중 3부까지는 하이퍼 시이고, 4부부터 7부까지는 일반 서정시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 심상운 시인이 근자에 와서 특별히 추구하고 있는 하이퍼 시 55편에 주목하면서 평설을 쓰고자 한다.  
하이퍼 시를 중심으로 작품을 살펴보면, 심상운 시인이 대상을 인지하는 방법 가운데 특별한 점을 발견할 수 있으니, 그것은 시집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이 ‘색채 단어’(이하 색채어라 칭함)를 빈번히 사용한다는 점이다. 이로 미루어 심상운 시인의 시적 감수성이 대상의 일차적 시각 체험인 색채에 매우 민감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시집의 표제(녹색 전율)도 수긍이 가지만, 다수의 작품에 골고루 등장하고 있는 여러 색채어의 출현이 그 점을 확인해 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모든 동물은 시각적으로 물체의 색을 분간하는 기능을 본능적으로 갖고 있지만, 똑같은 색채인식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동물은 적색 색맹인 경우도 있고, 모든 색을 초록 아니면 회색 등의 단색으로 인지하는 경우도 있다. 인간과 똑같이 색채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다. ‘색채-존재’의 관계와 관련된 불교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示空空卽示色)’이란 말이 있지만, 이 말은 색, 즉 존재는 눈으로 인지된 대로의 모습이 아니요, 따라서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이 참 존재가 아니라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원근법만 보아도 색, 즉 존재의 모습은 거리나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이므로, 물체의 참모습은 전혀 알 수 없는 것이 된다. 이 지점에서 인간에게 언어에 의한 형이상적 관념이 탄생한다.
그러기에 관념을 기피하는 시인에게 언어 이전의 순수색채는 사물의 아르케(Arche)를 찾는 기본이 되는 것이므로, 알 수 없는 그 구극에서 색채에 감각적으로 ‘전율’하게 되고, 일단 유아적 공포를 느끼게 된다. 생명체의 색인 녹색에 전율하는 심 시인의 정서는 따라서 관념적 진술이 아닌, 언어 이전의 느낌이라 하겠다. 언어적 관념 이전의 색채가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존재의 첫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에서 색채도 각기 관념적 의미를 지니기도 하는 바, 국기의 색깔처럼 경우에 따라 색채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빨간 색은 정열, 사랑, 혁명이나 피를, 파란 색은 하늘, 영원, 이념, 이상, 동심(童心)이나 꿈을, 검은 색은 대지, 모성, 회의, 어둠, 죽음, 절망을, 흰 색은 순결, 순수, 무염(無染), 무구(無垢), 백치, 무저항, 항복을, 초록은 생명, 안전, 평화, 식물을 흔히 상징한다. 하지만, 문학(시)과 예술 작품에서 작가가 사용하는 색채, 또는 색채어가 이런 관념적 의미를 제거한 채 사용될 경우에는,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작가의 독창적 순수 감정의 개성적 선택이므로, 색채어가 지니고 있는 기존의 관념이 제거된 특별한 정서 자체를 표현할 뿐이다. 상징적 의미가 제거된 색채감각은 기존의 어떤 관념도 개입이 안 된 동심적 순수성 그 자체일 뿐이다. 심상운 시인의 작품에 등장하는 색채어는 전자가 아닌 후자의 경우에 해당하므로, 의미를 제거한 비(非)관념적 색채어의 세계인 그의 작품이 난해함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새로운 시를 실험하는 심 시인이 색채어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기존의 관념적 표현을 외면하고 대상의 순수성을 추구하고자 하기 때문이며, 관념이 개입되는 기존의 비유법을 버리고 순수 색채어로 그만의 독특한 하이퍼적 이미지를 찾고자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물의 이미지를 본의와 유의에 의한 전통적 비유의 방법이 아닌, 원관념을 포함한 모든 의미가 제거된 단순한 색채어로 표현하다 보니, 작품 자체가 자연히 관념과 거리가 먼 동심의 세계를 닮게 된다. 심 시인의 시가 마치 어린이가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과 같이 언어 이전의 순수성을 지니는 것이 그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화나 음악이 아닌 언어를 도구로 삼는 시 창작에 있어서, 기존의 언어적 의미나 관념을 완벽하게 지워 버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을 피할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색채어를 이용하여 언어가 지닌 관념을 적극적으로 기피하려는 심상운의 시에서도 작품 속에 내재하는 최소한의 의미는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하여, 필자는 심 시인의 난해한 시의 알파와 오메가를 다뤄 보고자 하는 본고에서 작품의 구조적 특징과 함께 작품이 지닌 최소한의 의미를 찾아 서술해 보려는 노력을 병행하지 않을 수 없음을 미리 밝힌다.
2.
‘헤드라이트’의 한 줄기 빛에 의해 어둠에 묻힌 사물들이 얼핏 그 색채-존재를 드러내는 충격적 느낌을 심상운 시인은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표현한다.
초여름 감자밭 고랑에 앉아 포실포실한 흙속으로 맨손을 쑤욱 밀어 넣으면 화들짝 놀라는 흙덩이들. 내 난폭한 손가락에 부르르 떠는 축축한 흙의 속살. 나는 탯줄을 끊어내고 뭉클뭉클한 어둠이 묻어 있는 감자알을 환한 햇살 속으로 드러낸다. 그때 아 아 아 외마디 소리를 내며 내 손가락에 신생의 비릿한 피 냄새를 묻히고 미꾸라지처럼 재빠르게 흙속으로 파고드는 어둠. 흙속에 숨어 있는 어둠의 몸뚱이에는 빛이 탄생하기 이전 우주의 피가 묻어 있을 거라고? 그럼 붉은 피는 어둠 속에서 나오기를 거부하는 우주의 꽃빛 파일(file)! 몇 장의 헌혈 증서를 남기고 떠나간 20대의 그녀는 하얀 침대에 누워 누군가의 혈관 속으로 흐르는 자신의 장밋빛 시간을 상상했을까? 아니면 비 오는 밤, 검정고양이가 청색 사파이어 눈을 번뜩이며 잡동사니로 가득한 헛간을 빠져나와 번개 속을 뛰어가고 있는 TV화면을 보고 있었을까? 나는 불빛이 번쩍이는 순간 번개 속을 통과한 검정고양이를 찾아 승용차의 헤드라이트를 켜고 강변도로를 달린다. 비가 그치고 가로수를 껴안고 있던 어둠들이 깜작깜짝 놀라면서 몸을 피하는 게 희뜩희뜩 보이는 밤이다
- 시 「헤드라이트」 전문
시집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이 시는 어둠과 빛(헤드라이트)의 극명한 대조가 전제된 가운데, 흰색과 검정색, 핏빛, 꽃빛, 장밋빛, 청색, 불빛(번개) 등의 천연색들로 이어지면서 하나의 영상적 하모니를 이룬다. ‘환한’, ‘사파이어 눈’, ‘희뜩희뜩’ 등도 역시 색채를 강하게 떠올려 주기는 마찬가지다. ‘포실포실한’, ‘부르르 떠는’, ‘축축한’, ‘뭉클뭉클’과 같은 촉감적 감각과 함께, ‘비릿한’, ‘피 냄새’ 등의 후각적 표현도 등장하고 있지만, 작품 전체를 지배하며 이끌고 있는 것은 색감적 표현이다. 어떤 관념도 배제된 채, 오직 색채를 중심으로 오감(五感)에 의해 존재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한다는 특색이 있다.
먼저, 이 작품이 지닌 구조적 비밀을 알아본다. 우선 거시적으로 보면, 이 시는 의식의 흐름에 따른 연상법에 의해 수직적 구조로 이루어졌다는 인상을 준다. 다시 전체를 두 부분으로 크게 나누어 의식의 흐름을 살펴보면, 전반부의 이미지 군은 ‘감자 캐기-> 놀라는 흙덩이들-> 난폭한 손가락에 떠는 흙의 속살-> 어둠이 묻어 있는 감자알-> 신생의 비릿한 피 냄새-> 피 냄새를 묻히고 흙속으로 파고드는 어둠-> 우주의 피가 묻어 있는 어둠-> 우주의 꽃빛 파일’로 이어지고, 후반부의 또 다른 이미지군은 ‘헌혈 증서를 남기고 떠난 그녀-> 혈관 속으로 흐르는 장밋빛 시간-> 비 오는 밤-> 번개 속을 통과하는 검정고양이의 청색 사파이어 눈-> 헛간을 빠져 나와 번개 속을 통과한 검정고양이-> 검정고양이를 찾아 헤드라이트를 켜고 달리는 나-> 가로수를 껴안고 있던 어둠들이 깜짝깜짝 놀라며 피하는 밤’으로 이어진다. 첫 이미지 군과 다음 이미지 군 사이를 ‘피’가 연결해 주고 있다.
거시적으로 보면, 작품 전체의 이미지들이 의식의 흐름 수법에 의해 단순히 수직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지만, 각 그룹의 이미지들을 미시적으로 세분해 보면, ‘감자 캐기 / 놀라는 흙덩이 / 탯줄 끈킨 어둠 / 피 냄새를 묻힌 손가락 / 흙속으로 파고드는 어둠 / 우주의 피가 묻어 있는 어둠? / 우주의 꽃빛 파일,’과 같이 상호 단절된 채 서로 다른 수평적 구조의 이미지들, 곧 하이퍼적 리좀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구조는 둘째 그룹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로 인해 이 작품의 전체 구조가 수직적 연상 이미지와 수평적 리좀 이미지가 한데 어우러진 하이브리드적 다시점의 이미지 군으로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그 때문에 이 시는 마치 잘 깎인 다이아몬드처럼 빛을 발하는, 다면적이고 입체적인 느낌을 주면서 다양한 인상을 준다.
다시 그 의미를 찾아서 보편적으로 서술해 보면, 심시인은 밭에서 감자를 캐는 순간의 체험을 의식의 흐름에 의한 수직적 연상법과 수평적 다선 이미지들을 입체적으로 동시에 구사함으로써, 새롭게 재창조된 입체적인 제2의 초월적 비유를 이룬다는 것이다. 감자밭 흙속에 ‘난폭한’ 손가락을 넣는 순간, 먼저 ‘화들짝 놀라며 부르르 떠는 흙덩이’를 만난다. 캄캄한 땅속에 감자라는 생명체를 잉태하고 있는 흙의 의인화를 통하여 땅과 생명체의 관계를 감각적으로 깨닫게 한다. 어떤 종교적 이념이나 철학적인 관념적 표현보다도 생명체를 낳아 기르는 땅의 모성이라는 제2의 초월적 의미(관념)를 하이퍼적 감각으로 일깨워 준다. ‘흙-어둠’과 ‘감자-빛(햇살)’이 떠올리는 ‘무(없음, 죽음)’과 ‘유(있음, 생명)’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 주목할 것은 ‘뭉클뭉클한 어둠이 묻어 있는 감자알’이 햇살 속으로 드러나는 순간 ‘아 아 아 외마디 소리를 내며 손가락에 비릿한 피 냄새를 묻히고 어둠이 흙속으로 파고 든다’는 표현이다. 그리고 그 어둠의 몸뚱이에는 ‘빛이 탄생하기 이전 우주의 피가 묻어 있을 거’라는 관념적 회의(?)가 진술된다. 이 부분에서도 끝까지 회의함으로써 갑자기 개입하려는 관념을 기피하려는 의도를 엿보인다. ‘비릿한 붉은 피는 어둠 속에서 나오기를 거부하는 우주의 꽃빛 파일(file)!’이라는 대목 역시 뛰어난 제2의 하이퍼적 비유이다.
앞에서 식물적 생명의 상징인 ‘피’가 후반부로 이어지면서 동물적 ‘피’로 전환된다. 곧 ‘헌혈증서를 남기고 떠나간 20대의 여인’ 이야기와, ‘번개 속을 통과하는 검정고양이’, 그리고 승용차 헤드라이트에 비치는 ‘가로수를 껴안고 있던 어둠들이 놀라며 몸을 피한다’는 다이나믹한 시각적 이미지는 빛과 어둠의 강렬한 색감에 의해 동적 세계의 공포를 드러낸다. 앞부분이 정적인 식물적 지하의 세계라면, 이 후반부는 지상의 다이나믹한 동물적 세계다. 밭(지하)에서 감자를 캐는 단순한 체험에서 우주와 생명체의 근원(피)을, 뒤이어 20대의 여인과 검정고양이, 그리고 승용차에 의한 지상세계의 동적 이미지에서 동물적 피의 세계를 다룸으로써, 입체적 구조를 이룬다고 하겠다. 색채어에 의한, 색채를 중심으로 구성된 이 시는 생명의 근원인 식물적 이미지와 함께 비릿한 피 냄새를 풍기는 지상의 동물적 살육의 현장까지 강하게 떠올려 주면서, 매우 다양한 초월적 의미를 상기시켜 준다.
결국, 이 작품은 ‘하이퍼시는 전통적 비유를 뛰어넘어 입체적으로 초월 세계와 연속하려고 하는 다이나믹한 정신적, 언어적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문덕수, 하이퍼시 개관, 한국하이퍼시클럽, P209. 참조)는 하이퍼시의 한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그림 속 뱀들은 금 간 아스팔트 위에 무리지어 똬릴 틀고 있다. 풀밭을 떠나온 뱀들이 화물차가 100km 이상 달리는 검고 뜨거운 바닥에서 서로 엉켜 바들바들 고무락거린다. 햇빛이 그들의 허리에서 번쩍인다
화랑(畵廊)에서 돌아온 날 밤 침대 위에서 허리를 잔뜩 웅크린 나는 키가 30cm로 줄어들고 팔과 다리가 없어졌다. 새벽에 눈을 뜨니 내 옷걸이가 커다란 몸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미명의 어둠 속에서 옷걸이는 “넌 누구니?”하고 묻는다. 내가 누구냐고? 하룻밤 사이에 내가 뱀이 되었다고?
아침 햇빛이 소리치듯 창문으로 환하게 쏟아져 들어온다. 햇빛의 뼈가 나를 일으킨다. 내 몸이 점점 커진다. 팔과 다리도 다시 생긴다. 거울에 반사된 빛이 사방으로 뻗어가고 있다. 빛A 빛B 빛C........빛A에는 구름의 살 향기가 묻어 있고 빛B에는 자동차의 경적이 묻어 있고 빛C에는 전화벨 소리가 묻어 있다
그녀는 뱀들과 함께 빛의 향기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창 밖 허공엔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뱀들이 혀를 날름거리며 반짝이고 있다
- 시 「뱀과 그녀」 전문
시인은 화랑에서 뱀들의 그림을 감상하며 의식과 무의식의 입체적 체험을 한다. 아마도 얼마 전에 작고한 천경자 화백의 그림(뱀을 머리에 얹고 있는 여인)을 보고 촉발된 강렬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제목도 제목이지만, “그녀의 그림 속 뱀들”이라는 구절로 이 시가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천경자 화백의 그림 중에도 뱀과 여인을 결합한 작품이 특별히 강렬한 인상을 준다.
일단, 배경이 화랑이라는 점에서 시각적으로 현란한 색채를 떠올려 준다. ‘미명의 어둠’과 ‘아침 햇빛’, ‘거울에 반사된 빛’, ‘빛A 빛B 빛C’ 등의 색채가 작품의 주조를 이룬다. 마치 헤드라이트처럼 어둠을 걷어 내면서 비치기 시작하는 아침 햇빛에 서서히 물체들의 모습(빛, 색채)이 드러나는 경이로운 느낌을 빛(색채)으로 상기시켜 준다. 온통 갖가지 빛들로 채워진 화랑이 햇빛으로 환하게 드러나면서 눈부시게 하는 작품이다.
이 시 역시 그 구조가 전통적 비유법과 거리가 먼 하이퍼적인 작품이다. 시상의 전개가 의식의 흐름인 수직적 연상법과 함께 각 이미지들이 리좀으로 이루어진 수평적 이미지의 집합 구조로 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형식을 보면, 제1연은 ‘그림 속의 뱀-> 풀밭을 떠나온 뱀-> 아스팔트 위에 똬리를 틀고 있는 뱀-> 그 위를 달리는 화물차들-> 햇빛에 번쩍거리는 뱀’과 같이 의식의 흐름에 따라 수직적 구조를 이루면서 욕망과 문명에 얽힌 온갖 상념을 떠올려 준다. 제2연에서는 ‘침대 위 30cm 로 줄어든 ‘나’-> 새벽에 ‘넌 누구니?’ 질문하는 옷걸이-> 밤사이에 뱀이 된 나’로 전개되면서, 뱀처럼 팔과 다리가 없어진 채 몸통만 남은 지난 밤 ‘나’의 모습이 욕망 덩어리(뱀)였음을 암시한다.제3연에서는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온 아침의 햇빛-> 다시 팔과 다리가 생기면서 커지는 몸-> 거울에 반사되는 빛들(빛 A, 빛 B, 빛 C......) -> 구름의 살 향기’-> 자동차의 경적-> 전화 벨소리가 되는 빛’으로 전개된다. 지난 밤 침대 위의 육욕에서 벗어나 아침을 맞았지만 또 다른 욕망(빛A의 관념, 빛B의 현실, 빛C의 생활)이 햇빛에 드러나는 삶의 아이러니를 다양한 빛들로 표출함으로써 환상적인 수직적 구조를 이룬다.제4연은 결구로, ‘뱀들과 함께 빛의 향기 속으로 들어가는 그녀-> 투명한 뱀들이 혀를 날름대는 허공’으로 이어지면서 역시 의식의 흐름 수법으로 수직적 구조가 된다.이 시의 수평적 구조도 앞의 작품(헤드라이트)과 같이 의식의 흐름에 의한 이미지들과 함께 ‘그림 속 뱀/아스팔트/달리는 화물차/번쩍이는 햇빛//침대 위/팔다리가 없어진 나/넌 누구니? 묻는 옷걸이/밤 사이 뱀이 된 나?//나를 일으키는 아침 햇빛/팔다리가 생기고 몸이 커지는 나/사방으로 뻗어가는 빛/A, B, C의 여러 빛들// 뱀들과 함께 빛의 향기 속으로 들어가는 그녀/투명한 뱀들이 혀를 날름대는 허공’ 등으로 이미지들이 각기 단절된 채 수평적 리좀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동일하다.   
다음으로, 이 작품의 각 연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찾아본다. 제1연에서 심 시인은 그림에서 촉발된 또 다른 환상을 떠올린다. 즉, ‘뱀들은 풀밭을 떠나 화물차들이 달리는 금간 아스팔트 위에 서로 엉켜 고무락거리면서 햇빛에 번쩍거린다.’ 즉, 원초적 세계인 ‘풀밭’을 떠나 ‘금간 아스팔트(도시문명)’의 한가운데에 ‘바들거리며 고물고물하는 뱀들’의 형상을 통해 현대인이 구차하게 살아가는 문명 속의 욕망 덩어리를 상기시킨다. 본디 뱀은 그 형상이 남근과 닮음으로써, 성적 리비도를 상징하기도 한다. 프로이트의 주장대로 인간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리비도 덩어리가 아스팔트 위에서 꿈틀대는 징그러운 형상이 상기되는 이 구절은 뱀이 떠올려 주는 흉측한 현대문명적 악의 모습이다.
제2연에서는 화랑에서 돌아온 날 밤 침대 위에서의 일을 회상한다. 서정적 자아(‘나’)가 뱀이 되었던 지난밤의 일을 떠올리고 있다. 밤사이에 ‘나’는 뱀이 되어(?) ‘넌 누구니? 하고 자신에게 질문한다. 1연에서의 집단적 욕망이 2연에 와서 개인적 욕망으로 치환됨으로써, 악에 관해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주목할 것은 이 때 몸이 30cm로 줄어들고 팔다리가 없어졌다는 의식적 진술이다. 즉, ‘팔다리가 없는 뱀’의 형상(욕망덩어리)만 남은 스스로의 모습을 옷걸이가 내려다보며 ‘너는 누구니?’ 질문하는 대목인 바, 이는 인간 본능의 원초적 본질에 관한 궁극적 질문이다.
제3연에서는 육체적 욕망(밤, 어둠)으로부터 벗어나 햇살 가득한 현실로 돌아온 서정적 자아인 ‘나’는 인간의 몸(이성?)을 회복하고 재생된 현실의 세계인 빛들(빛A, 빛B, 빛C....) 속에 던져진다. 그 빛(색채)들은 인간이 현실 속에서 살아가며 상상하는 구름의 향기(꿈과 이상)나 자동차 경적(도시 문명적 현실), 또는 전화 벨(생활)로 구체화 되어 거기 매몰된다는 의미이다.
제4연에서는 그녀가 뱀들과 함께 ‘빛의 향기’ 속으로 ‘들어간다’가 아니라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로 (주관적 서술을 피하고) 객관적 진술로 표현한다. 인간인 그녀가 뱀과 함께 들어간다고 하는 ‘빛의 향기’란 무엇인가. 동원되고 있는 온갖 빛은 개별적 사물들의 존재를 의미하지만, 그것이 ‘향기’와 결합되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사물들마다 지니고 있는 의미망을 거느리는 현실적 관념(매혹하는 향기)을 떠올려 주기 때문이다. 그 관념 속으로 그녀는 뱀들과 함께 다시 들어가 함몰되고 만다는, 속악한 삶의 되풀이를 상기하게 한다. 결국, 창밖 허공에는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뱀들(온갖 관념들)이 혀를 날름거리며(욕망을 유혹하며) 반짝이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다양한 내용을 관념적 진술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 다만 빛(색채)을 중심으로 한 객관적 이미지의 집합체로 상기시켜 주는 하이브리드적 작품이다.
하지만, 이 시가 품고 있는 비밀은 간단하지 않다. 우선 뱀의 등장이 그렇다. 뱀이란 무엇인가? 뱀이 떠올려 주는 전통적 상징을 전제 할 때, 이 시는 의미심장함을 지닌다. 성서적으로 뱀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이브)를 타락시킨 원흉이다. ‘선악과(善惡果)’를 따 먹게 유혹함으로써 인간에게 원죄를 심어 준 장본인이다. 뱀(남근)은 먼저 하와를 유혹하여 타락(임신)시키고, 하와로 하여금 아담을 꾀어 다시 타락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천경자 화백의 작품에도 남성이 아닌 ‘여인’이 머리에 뱀을 이고 있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수컷)을 유혹하는 것은 여성(암컷)이다. 범박하게 말해서 수컷(아담)은 영원히 암컷(하와)에게 유혹을 당하는 괴로운 존재일 뿐이다.
성서 이야기를 인용하는 것이 이 작품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뱀과 그녀」라는 제목이 그 이유가 된다고 하겠다. 인류의 원죄인 ‘선악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선악과’라는 달콤한 열매는 문명사적으로 볼 때 다름 아닌 ‘언어’를 상징한다. 직립한 인간만이 발음해서 사용할 줄 아는 ‘언어’야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선’과 ‘악’, ‘이것과 저것’, ‘좋은 것<是>과 나쁜 것<非>’을 분별하는 ‘분별지’(사물을 분별하게 하는 능력)를 갖게 함으로써, 상호간에 의사를 소통시켜 정보(지식)를 교환하거나 충돌하게 하고, 그것을 축적하고 전파해서 편리한 문명과 고급의 문화를 창조할 수 있게도 하지만<善>, 또한 언어 때문에 인간은 다른 동물들이 지닌 것과 같은 원초적 삶의 단순한 지혜(단순한 욕망)가 타락되어, 다른 동물과 달리 엄청난 욕망으로 인한 갈등으로 전쟁과 살육과 시기와 모함, 싸움 등, 온갖 죄악 속에서 고통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惡>. 그러므로 본디 인간(아담과 하와)이 살았던 천국(에덴동산)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하기 이전, 즉 ‘언어’ 사용 이전인 인류의 원초적 자연상태를 의미한다.
언어를 사용하는 능력이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성서적 상징을 떠나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직립한 동물인 인간의 두개골 형태(90도의 안면각)를 해부학적으로 살펴보면, 인간의 구강 속에 분절음(자음과 모음)인 언어를 발음할 수 있게 잘 발달된 조음기관(입술, 치아, 잇몸, 혀, 입천장, 목구멍)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여타의 동물들(안면각이 45도)은 찌그러진 구강 안에 인간과 같이 발달한 조음기관을 갖고 있지 못해서 목청을 울려 나오는 모음을 조음하여 자음을 발음할 수 없어서 자음과 모음으로 구성된 분절음(언어)을 발음하지 못한다.
언어 사용이 인간의 뛰어난 능력(언어의 순기능)이지만, 반면 언어의 역기능(죄악의 양산) 때문에 인간만 에덴(언어 이전의 세계)에서 쫓겨났고, 결국 엄청난 고통과 질곡 속에 비극적 존재로 타락하게 된 것이다. 이 작품은 뱀을 소재로 한 천경자 화백의 그림이 시인으로 하여금 선과 악이 갈등하는 인간의 근원적 모순을 상상하게 하고, 그것을 의식의 흐름과 리좀의 복합적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라고 하겠다.
파란 지붕의 자전거 보관대에 쓰러져 있는 검은 자전거의 바퀴살이 햇빛에 번쩍이고 있다. 오전 10시 46분, 우체부의 빨간 오토바이가 서 있는 가로수 밑으로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빨며 지나가고 점점 뜨거워지는 8월의 태양.(검은 자전거의 주인은 나타나지 않고) 자전거 보관대의 파란 플라스틱 지붕은 자신의 가슴을 다 드러낸 채 번쩍이고 있다
그 파란 플라스틱 지붕은 왜 하루 종일 번쩍이고만 있을까요? 지금 을지로 상공을 날아가는 반투명의 파란 비닐봉지는 몸무게가 0으로 줄어든 나의 모습이에요. 나는 시청 앞 광장을 지나 바람에 출렁이며 청계천 다리 위를 가고 있어요. 나처럼 가끔 허공을 떠다니고 싶으면 눈을 감고 공중으로 떠오르는 0의 감각에 집중해 보세요. 그리고 몸의 무게를 계속 줄여보세요. 그러면서 저기저기 빌딩 창문 위 하늘로 둥둥 떠가는 자신을 느껴보세요. 검은 자전거의 주인이 노랑 풍선이 되어 햇빛에 반짝이며 여의도 쪽 상공을 날아가고 있는 게 보일 거예요
아, 아, 여보세요. 8월의 풀밭에서는 빨간 모자를 쓴 발가숭이 아이들이 모여서 노란 나팔을 불기도 하고 파란 페인트 통을 굴리며 뱀과 놀고 있다고요? 그 맨살의 아이들이 사람들의 잠속 연못에 들어와서 물장구칠 때가 있다고요? 그 시간에 꿈의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으면 빨간 꽃잎 요리가 아이스크림처럼 달디달다고요? 그것이 한여름 낮잠의 신비한 맛이라고요?
- 시 「한여름의 검은 자전거와 파란 비닐봉지와 빨간 모자」 전문
제목에서부터 ‘검은 자전거, 파란 비닐봉지, 노랑 풍선, 빨간 모자’의 검은 색, 파란 색, 노란색, 빨간색 등이 시선을 끄는 이 작품은, 첫째 연에서 아이스크림을 빨며 지나가는 아이들의 동영상을 제외하면 우체통이 있는 도시의 골목, 한여름의 적막한 풍경화다. 정적 분위기가 한 폭의 정물화처럼 펼쳐지면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거기 빨간 오토바이가 서 있을 뿐, 검은 자전거의 주인은 나타나지 않고 아이들이 지나가 버린 다음의 고요가 제시되고 있다. 무섭도록 고요한 정적을 느끼게 하는 이 구절은 사물들의 색채가 적막 속의 공포를 느끼게 할 뿐, 다른 어떤 의미도 상기하기 어렵다. 8월의 태양에 가슴을 드러낸 채 번쩍이고 있는 파란 플라스틱 지붕은 이 무의미한 정물화의 마지막 풍경으로 제시되어 있다. 1차적으로 보면 역시 의식의 흐름 수법에 의해 수직적 이미지 군으로 이루어진 환상적 풍경화라고 하겠다.
먼저 그 수직적 구조를 살펴본다. ‘파란 지붕의 자전거 보관대-> 햇빛에 반짝이는 검은 자전거의 바퀴살-> 우체부의 빨간 오토바이-> 아이스크림을 빨며 지나가는 아이들-> 뜨거워지는 8월의 태양-> 번쩍이는 파란 플라스틱 지붕 // 종일 번쩍이는 플라스틱 지붕-> 날아가는 반투명의 파란 비닐봉지-> 몸무게가 0으로 줄어든 나의 모습-> 청계천 다리 위를 걸어가고 있는 나-> 허공을 떠다니고 싶으면 0의 감각에 집중해 보라-> 하늘로 떠가는 자신을 느껴라-> 노랑 풍선이 되어 여의도 쪽 상공을 날아가고 있는 검은 자전거의 주인이 보일 거다 // 8월의 풀밭-> 빨간 모자의 벌거숭이 아이들이 모여 노란 나팔을 불고-> 아이들이 파란 페인트통을 굴리며 놀고 있다고?-> 맨살의 아이들이 사람들의 잠속 연못에 들어와 물장구칠 때가 있다고?-> 꿈의 식탁에 빨간 꽃잎요리가 아이스크림처럼 달다고?-> 한여름 낮잠의 신비한 맛이라고?’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이 시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왜 시인은 한여름 도시 골목에 펼쳐져 있는 사물들의 눈부신 색채에 주목하고 있는가. 을지로와 여의도 쪽을 0이 된 몸으로 날아다니는 환상에 빠진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아이들이 등장하는 동영상 한 폭과 같은 이 작품의 의미를 추적해 본다.
한 폭의 정적 풍경화가 제시된 1연을 이어받아, 2연에서는 하루 종일 번쩍이고만 있는 파란 플라스틱 지붕에 의문을 품으면서 시작된다. ‘하루 종일 번쩍거리는 파란 지붕’이 떠올리는 온갖 관념적 권위와 위엄은 또 다른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곧, 그 환상은 배경인 을지로 상공에 날아가는 반투명의 비닐봉지(상품 꾸러미?)처럼 몸무게가 0으로 줄어든 나의 모습(억압된 욕망의 해소?)이다. 번쩍이는 지붕(권위, 권력?)의 모습에 눈을 감고 환상 속에 공중으로 떠오르며 몸무게를 줄이면 0이 된다는 진술에서 시인이 무엇을 지워버리는 꿈을 꾸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번쩍거리는 파란 지붕 그 자체이다. 뿐만 아니라, 1연에서 등장하지 않았던 검은 자전거(노동?)의 주인이 나타나 노랑 풍선이 되어 여의도 쪽 상공을 날아가고 있는 게 보일 거라니, 이것은 또 무엇인가. ‘여의도 쪽 상공(권위)’이 0이 될 거라는 부분에서 지독한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파란 지붕이 떠올리는 허공의 이미지, 즉 초월적 권위와 여의도 쪽의 가식적 행위의 대조가 동시에 느껴지기 때문이다. 파란 지붕 등, 번쩍이는 사물들의 풍경에 눈을 감고 몸무게가 0이 되는 환상을 체험하라고 권고하는 마지막 부분은 경구를 이루면서 다음에 발가벗은 아이들(순수, 동심)로 나타난다.
제3연에서는 1연에서 아이스크림을 빨며 지나간 아이들이 발가숭이가 되어 다시 등장해서 노란 나팔을 불기도 하고, 파란 페인트 통을 굴리며 놀고 있다. 역시 ‘물장구치고, 아이스크림처럼 달디단 빨간 꽃잎 요리를 먹으며, 한여름 낮잠의 신비함을 맛보는 아이들의 모습’이 제시되고 있다. 그것은 순수한 환상일 따름이다. 아이들이 부는 ‘노란 나팔’은 검은 자전거 주인의 노랑 풍선과 연결되고, 아이들이 굴리는 ‘파란 페인트 통’은 ‘파란 지붕’과 연관되지만, 아이들의 동심도 곧 회의로 나타난다. 그래서 ‘뱀(욕망)과 놀고 있다고요?’, ‘신비한 맛이라고요?’처럼 결국 허망한 환상으로 치환되고 만다는 몇 개의 장면으로 채색된다. 검은색,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등의 색채와 함께 ‘을지로’와 ‘여의도’라는 특정 공간이 제시된 상황에서 다선적 환상으로 희미하지만 현실적 의미를 떠올려 준다. (여러 색채들이 하늘 또는 을지로나 여의도와 관계가 있음을 간파할 때, 검은 자전거-노동자, 어둠, 절망; 파란 지붕-국회, 권위, 권력; 빨간 오토바이, 빨간 모자-열정, 순수; 노랑 풍선-시민, 데모대; 을지로-일상 공간, 현실; 여의도-국회, 정치권력; 아이들-순수한 시민; 꿈의 식탁-미래 생활 등으로 그 의미를 유추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복잡한 사회 현상에 관한 컨시트적 다양한 심리가 환상적으로 표현된 작품으로, 현실과 매우 밀접한 의미를 지닌 일종의 풍자시라고 볼 수 있다. 요약하면, 억압된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풍자적 환상이 지배하는 작품으로, 역시 다선적 이미지 군으로 복잡하게 짜여진 하이퍼시이다.
푸른 오토바이가 달린다
푸른 소리를 사방에 뿌리며
무너진 건물 속에서 나온 피 흘리는 시신들이
흰 천에 덮여 있는
바그다드 한복판을 달린다
빨간 오토바이가 달린다
엉덩이에서 하얀 물보라를 뿜어내며
여름 바다 위를 달린다
해변의 아이들이 손을 흔들며 뛰어 온다
하얀 오토바이가 달린다 산맥을 넘어
붉은 토마토 즙을 온 몸뚱이에 바른
벌거숭이 사내들이
떼를 지어 뛰어가는 도시 위를 달린다
노란 오토바이가 달린다 혼자서 신나게
비가 갠 들판을 달린다
“어이, 저거 봐, 오토바이가 무지개 허리 위로 올라가고 있어.”
시골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소리치고 있다
<그때 그는 손에서 리모컨을 아주 놓아버린 것이다>
- 시 「오토바이가 달린다」 전문
이 시는 ‘달린다’는 동사가 여러 시상을 각각 이끌고 있는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제1연은 ‘달리는 푸른 오토바이-> 푸른 (오토바이) 소리-> 무너진 건물-> 피 흘리는 시신들-> (시신이 덮여 있는) 바그다드의 거리를 달리는 오토바이’로 이어지는 의식의 흐름이란 단순한 수직적 구조를 이룬다. 뒤이어 2연과 3연, 4연, 5연 모두 같은 수직적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각 연과 연은 상호 단절된 다시점의 이미지로서, 작품 전체를 볼 때 수평적 구조를 이루어 결과적으로 거시적 리좀을 형성한다. 심 시인의 하이퍼시가 지니고 있는 또 다른 구조적 특징인 연과 연이 리좀을 이루는 한 사례라 하겠다.
다음으로, 작품의 의미를 찾아 서술해 본다. 연이어 등장하는 푸른 오토바이, 빨간 오토바이, 하얀 오토바이, 노란 오토바이들이 각 연을 마치 오토바이 무리가 떼 지어 달리는 영화의 장면처럼 동적으로 움직이게 함으로써, 생동하는 현장감과 함께 극적 반전 및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작품이다. 첫 연의 푸른 오토바이는 ‘푸른 소리를 뿌리며’ 피 흘리는 시신들이 흰 천에 덮여 있는 바그다드의 파괴된 거리를 달린다. 오토바이의 (요란한) ‘푸른 소리’와 시신이 흘린 ‘붉은 피’의 청각과 시각의 극적 대조로 충격을 느끼게 하면서, 전쟁으로 파괴된 바그다드의 끔찍한 실상을 부각시킨다. 참상이니 비극이니 하는 어떤 관념적 서술도 개입시키지 않은 채, 오직 푸른색과 붉은색의 강렬한 색채감과 함께 달리는 ‘푸른 오토바이’의 요란한 푸른 소리(폭발음)가 위기적 상황을 고조시킬 뿐이다.
제2연에서 빨간 오토바이는 1연의 푸른 오토바이와 달리, 지극히 평화로운 장면을 이끌며 달린다. 1연과 2연은 서로 단절된 이미지로, ‘엉덩이에서 하얀 물보라를 뿜어내며 여름 바다 위를 달리고’, ‘해변의 아이들이 손을 흔들며 뛰어 오는’ 평화로운 정경이다. 1연의 피비린내 나는 장면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풍경으로, 전쟁과 평화의 공존이란 현대사의 끔찍한 아이러니를 제시해 준다.
제3연에서는 장면이 다시 바뀌어 ‘하얀 오토바이’가 등장한다. 오토바이의 하얀 색과 토마토 즙의 붉은 색이 대조되고, 붉은 토마토 즙을 몸에 바른 벌거숭이 사내들이 도시를 떼 지어 달린다. 토마토를 트럭에 싣고 나와 서로 던지면서 축제를 즐기는 스페인 사람들의 광적인 풍경을 연상하게 하는 바, 인간들이 벌이는 싸움과 평화라는 무의미한 놀이의 부조화를 깨닫게 한다.
제4연에서는 노란 오토바이가 비가 갠 들판을 달린다. 이어 5연에서는 시골 사람들이 무지개 허리 위로 올라가는 오토바이를 바라보며 손을 흔든다. 마지막 행에서는 ‘그’가 등장하여 손에서 리모콘을 놓아 버리는 것으로 끝맺는다.
이상과 같이, ‘달린다’는 동사가 이끄는 여러 장면들로 제시된 이 작품은, 마지막 행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서정적 자아인 ‘그’가 리모콘을 손에 들고 TV 화면을 아무 생각 없이 이리저리 바꿔가며 보고 있다는 일견 단순한 내용이다. 바그다드의 피비린내 나는 끔찍한 장면과 평화로운 해변 풍경, (스페인의) 광적인 토마토 축제 등이, 각각 단절된 채 아무 의미 없이 전개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시인이 어떤 관념적 서술도 없이, TV 화면에 나타나는 현대의 복잡한 시대상을 냉철하게 제시하고 있는 의도는 무엇인가. 아무 선입견도 없이 제시된 장면들에서 독자는 비극적 세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내면심리를 읽을 수 있으며, 어떤 관념어의 개입도 없이 냉철한 시선으로 비극적 시대상의 아이러니를 제시해 주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밤 12시 05분, 흰 가운의 젊은 의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을지병원 응급실에 실려 온 40대의 사내. 눈을 감고 꼬부리고 누워 있는 그의 검붉은 얼굴을 때리며 “재희 아빠 재희 아빠 눈 떠 봐요! 눈 좀 떠 봐요!” 중년 여자가 울고 있다. 그때 건너 편 방에서 자지러지는 아이의 울음소리
그는 허연 비닐봉지에 싸여진 채 냉동고 구석에서 딱딱하고 차갑게 얼어붙은 밥을 꺼내 후끈후끈한 수증기가 솟구치는 찜통에 넣고 녹이고 있다. 얼굴을 가슴에 묻고 웅크리고 있던 밥덩이는 수증기 속에서 다시 끈적끈적한 입김을 토해 내고, 차갑게 어두운 기억들이 응고된 검붉은 뼈가 단단히 박혀 있던 밥의 가슴도 끝내 축축하게 풀어지기 시작한다. 푸른 옷을 입고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는 그는 나무젓가락으로 밥의 살을 찔러보며 웃고 있다
이집트의 미라들은 햇빛 찬란한 잠 속에서 물질의 꿈을 즐기고 있는 것일까? 나는 미라의 얼굴이 검붉은 색으로 그려진 둥근 무화과나무 목관(木棺)의 사진을 본다. 고대의 숲속에서 날아온 새들이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5월의 청계산 숲을 휘젓고 다니는 오전 11시
- 시 「검붉은 색이 들어간 세 개의 그림」 전문
역(驛 )승강장엔 선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다는
표지판이 쓰러져 있다
그가 쏟은 핏덩이가 시멘트와 자갈에 묻어 있다
역무원들은 서둘러 소방 호스로 물을 뿌리고 있다
(사람들은 그가 검은 기차를 타고 떠났다고 했다)
나는 그가 타고 간 기차의 빛깔을 파란 색으로 바꾸었다

그때 어두운 바닥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
먼지가 햇빛에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그가 안고 간 눈물의 무게는 몇 킬로그램이었을까?)
(그는 드디어 눈물이 없는 세계를 발견한 것일까?)
2006년 7월 21일 오후 2시 23분
서울 중계동 은행 사거리 키 6m의 벚나무 가지 위로
하얀 비닐봉지 하나가 날아간다
- 시 「검은 기차 또는 하얀 비닐봉지」 전문
위의 두 작품은 죽음을 소재로 하고 있다. ‘메멘토모리’란 말이 있듯이, 비록 살아가고 있지만 항상 ‘죽음을 생각하라’는 경구이다. 죽음을 다루는 시가 많지만, 대부분 죽음에 관한 일반적 관념 때문에 죽음에 관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평범한 진술로 끝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위의 두 작품은 전혀 다른 시선으로 죽음을 다루고 있다. 앞의 시는 40대 한 남성의 죽음(병사)을, 뒤의 시는 철길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한 단독자인 ‘그’의 죽음을 그리고 있다. 40대의 남성은 검붉은 색인 미라의 목관으로, ‘그’는 검은 기차를 타고 떠났다. 두 사람 다 ‘검은 색’의 세계로 가 버린 것이다. 일반적으로 검은 색은 죽음이나 저승을 상징한다. 두 사람의 죽음이 모두 ‘검은 색’의 세계로 갔다는 것은 죽음 그 자체를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40대 남자의 죽음은 생전에 비록 찬 밥덩이를 꺼내 데워 먹으며 산 가난한 가장이지만, 뒤의 ‘그’는 단독자다. 40대는 병원 응급실에서 가족이 울며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철길에서 홀로 기차에 치어 급사했다. 가장인 40대의 죽음은 검붉은 미라로 연결되고, 단독자로 비명횡사한 ‘그’는 ‘눈물 없는’ 세계로 갔다. 시인은 두 사내의 삶과 죽음을 대조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니, 가정을 가지고 병을 앓다가 병원에서 정상적 환경에서 죽어간 전자를 ‘검은 색이 들어간 세 개의 그림’이란 제목으로, 가족도 없고 홀홀단신 홀로 살다 간 후자를 ‘검은 기차 또는 하얀 비둘기’란 제목으로 구별해 놓고 있다.
두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이 서로 다른 것은 곧, 두 가지 삶에 대한 시인의 생사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죽음이지만, 망자가 생전에 어떤 삶을 살았느냐, 하는 삶의 차이가 죽음의 차이로 치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생전 절차에 따라 가정을 갖추고 정해진 순리대로 평범하게 살다가 죽어서 검붉은 얼굴의 미라로 지상에 묻혀 흔적을 남기는 삶과, 생의 희노애락과 생노병사를 두루 거쳐보지 못한 채 갑자기 떠나간 죽음 중에 어떤 것이 의미가 있는가, 하는 생사관의 대조인 것이다.
같은 죽음이지만, 40대의 남자는 ‘밥의 살을 나무젓가락으로 찔러보면서 웃으며, 미라의 목관 사진을 보는 반면, 검은 기차를 타고 떠난 단독자인 ‘그’에게 나는 “그가 타고 간 기차의 빛깔을 파란 색으로 바꾸었다”는 진술에서 시인이 두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전자는 땅에 묻히고, 후자는 파란 하늘로 갔다는 차이에서 시인은 차라리 후자의 홀가분한 죽음을 기리고 있는 것이다.
3.
심상운 시인의 작품에서 색채어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부분적으로 언급한 바와 같이, 심 시인의 작품에서 또 하나 다른 특징을 지적할 수 있는 바, 그것은 작품 대부분이 어린이의 동심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동심으로 바라보는 사물들은 의미(관념) 이전의 색채 인식이 우선될 것이며, 작품이 의미와 거리가 먼 색채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그 이미지가 결국 동심의 세계와 같이 된 것이다. 대상에서 관념을 무화시키려다 보니, 무의미한 색채어를 주로 사용하게 된 것이고, 한편 사물에서 관념을 배제한 채 색채로 덧입히다보니, 기성관념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담게 된 것이라고 하겠다.
 
파란색 기차, 파란색 기차는 긴 꼬리를 달고 하늘을 날아가는 기차. 여름밤엔 노란 불을 켜고 여우, 뱀, 방패, 전갈, 화살, 직녀, 도마뱀, 헤라클레스, 돌고래, 백조, 견우의 나라를 지나 반인반마半人半馬의 키론이 사는 은하수의 남쪽 궁수자리로 가는 기차. 젊은 화가들은 일곱 살 아이들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서 파란색 기차를 타고 별나라 여행을 한다. 기차 옆에서는 우주의 고래들이 허연 거품을 뿜어내며 신나게 솟구치고, 기차의 창을 열고 고래 떼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와와 소리치는 아이들. 펄떡펄떡 솟구치는 고래 옆으로 우주 로켓이 유유히 지나가는 한낮, 초록별 연못가에서는 느릿느릿 기어가는 무지갯빛 달팽이와 폴짝폴짝 뛰는 왕눈이 개구리가 식탁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파란색 기차, 파란색 기차. 나는 먼 은하수로 날아가는 긴 꼬리 기차 대신 아이들과 놀이동산에서 파란색 기차를 탄다. 파란색 기차는 딸랑딸랑 방울소리를 내며 파란 나라로 들어간다. 한여름 어느 바닷가 물개들의 도시. 건물의 지붕 위로 날렵하게 날아오르는 검은 물개들의 쇼. 물개들의 등에서 찬란하게 반짝이는 5월의 햇빛이 내 뇌 속을 파랗게 휘감는 일요일이다
- 시 「파란색 기차」 전문
한 편의 동화를 읽는 것 같은 이 작품도 심상운 시인의 시적 특징 중 하나인 ‘관념 이전의 순수(동심)의 세계’를 입증해 준다. 독자를 동심의 세계로 몰입시키는 이 시는 사물을 대하는 어린이의 일차적 느낌이나 마음 상태는 어떠할까. 즐겁게 노는 아이들의 심리는 어떻게 움직일까, 하고 상상하게 해 준다. 역시, 파란색 기차, 노란 불, 허연 거품, 초록별, 무지갯빛, 검은 물개, 5월의 햇빛 등의 색채어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어린이 놀이공원의 풍경을 단순히 묘사한 것처럼 보이나, 시행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일단, 파란색 기차를 타고 허공(하늘)을 날아가는 아이들의 즐거운 놀이를 보며 시인은 갖가지 환상을 떠올린다. 여름밤에 노란 불을 켜고 여러 나라를 거쳐 은하수로 가는 그림 같은 꿈이 그려진 그림 속 아이들과, 환상의 세계 밖인 놀이공원에서 즐겁게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현실과 환상이란 두 가지 시선으로 바라본다.
후반부에서, “나는 먼 은하수로 가는 긴 꼬리 기차 대신 아이들과 놀이동산에서 파란색 기차를 탄다”고 하면서, ‘나’는 그림 속 하늘로 가지 않고 차라리 놀이동산에서 파란 기차를 탄다고 말한다. ‘일곱 살 아이들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서 파란색 기차를 타고 허황된 별나라 여행을 하는 젊은 화가들’이 되기보다 놀이터에서 즐겁게 놀고 싶다는 심리를 대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이들의 그림으로 들어가는(지도하는) 화가를 바라보면서, 딸랑딸랑 방울소리를 내는 지상 놀이의 풍경을 즐기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대비시킴으로써, 아이들 나라인 놀이공원의 두 가지 꿈을 동시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과 같이, 심상운 시인 대부분의 작품이 감상자에게 동심의 세계로 다가오는 까닭은 상술한 바와 같이, 창작에서 심 시인이 힘써 의도하는 관념의 극복이 초래한 결과라고 본다. 관념으로 때 묻은 언어에서 그 관념을 지우기 위해 순수 색채어를 동원하다 보면 실제로 관념(의미)이 사라지게 되고, 자연히 관념에 물들지 않은 아이들과 같은 환상에 몰입되게 마련이다. 순수한 동심의 표현은, 역으로 일상적 관념에 길들여진 독자들을 동화적 환상의 세계로 이끌어 줌으로써, 때 묻은 관념을 벗어나게 할 수 있다는 심 시인의 무의식적인 욕구를 읽을 수 있다.
이상으로, 일상을 지배하는 거대한 관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의지와, 그 억압된 욕구의 무의식적 해소라는 심리적 기제를 다양한 색채어에 의해 표현한 심상운 시인의 하이퍼시를 살펴보았다. 관념이 제거된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심리가 결과적으로 동심과 같은 순수한 시세계를 이루게 된 것이며, 그 세계가 심상운 시인의 하이퍼시라는 것이 이 글의 대체적인 요지이다. 그 밖에, 본고에서 살펴보지 못한 일반 서정시 61편도 변함없이 ‘관념 지우기’를 위주로 창작되었고, 역시 색채어가 빈번히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하이퍼시와 공통점이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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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하이퍼시의 구조란 무엇인가 -하이퍼시란 무엇이냐? / 문덕수 2019-01-27 0 1238
27 사물로써 시를 쓰자 / 문 덕 수 2019-01-27 0 1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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