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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너머에서 일렁이는 시(詩) - 옥타비오 파스, 『활과 리라』
2019년 03월 10일 16시 56분  조회:1541  추천:0  작성자: 강려
옥타비오 파스는 언어를 넘어서는 지점에서 시 창작의 비밀을 찾는다. 시는 언어로 언어 너머를 표현한다. 지은이의 말마따나 “언어를 넘어서는 어떤 것은 언어를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28쪽) 언어는 어떻게 언어를 넘어서는 것일까? 시인은 이미지를 통해 언어를 넘어서는 길을 찾는다. 이미지는 감각과 어울린다. 감각은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사물의 감각을 가리킨다. 시인은 사물이 내보이는 감각을 언어로 표현하는 무모한 일을 벌이는 존재이다. 언어로 사물의 본질을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모순이다. 언어는 사물의 의미를 정확히 드러낼 수 없다. 사물에 언어를 붙이면 사물은 저 멀리로 도망가 버린다. 언어란 인간의 약속 체계일 뿐이지 않은가. 인간이 만든 언어로는 사물의 본질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시작(詩作)은 이렇게 불가능한 일을 이루려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셈이다.
지은이는 “이미지가 됨으로써, 말은 말이면서 동시에 언어, 즉 역사의 의미화 작용으로 주어진 체계를 뛰어넘는다. 시편은 말이고 역사이면서 역사를 초월한다.”(29)라고 주장한다. 시인은 이 땅에 발을 딛고 있다. 이 땅을 벗어난 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땅에만 머물러 있으면 시인은 결코 좋은 시를 쓸 수 없다. 이 땅에 발을 디딘 시인은 이 땅을 넘어서는 모험에 나섬으로써 언어로는 표현하기 힘든 사물의 본질을 엿보는 존재가 된다. 언어를 넘어서는 언어를 사용하려면 시인은 벼랑에서 한 발을 더 내딛는 ‘치명적 도약’을 거쳐야 한다. 일상적인 자아를 넘어서는 자리에서 시인이 탄생한다. 치명적 도약을 거친 시인은 사물을 보는 시선부터 일반인과 다르다. 일반인이 볼 수 없는 것을 시인은 보고, 일반인이 들을 수 없는 것을 시인은 듣는다. 시인은 말 그대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히는 창조자인 것이다.
리듬에 따르는 작시와 아날로지적 사유는 동전의 양면이다. 리듬 덕분에 우리는 이러한 우주적 상응을 인식한다. 다시 말해, 그러한 상응이 다름 아닌 리듬의 나타남이다. 리듬으로 돌아가는 것은 실재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포함한다. 즉, 역으로 아날로지의 원리를 택하는 것은 리듬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고정된 운율의 작위성에 대항하여 강세 위주의 시작詩作이 가지는 힘을 긍정할 때, 낭만주의 시인은 개념에 대한 이미지의 승리, 논리적 사유에 대한 아날로지의 승리를 선언하는 것이다. (94쪽)
일상 언어와 시 언어의 차이는 리듬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언어는 리듬으로 표현된다. 언어는 언제나 사람들의 일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물마다 독특한 리듬이 있다. 인간에게는 인간의 리듬이 있고, 돌에게는 돌의 리듬이 있다. 당연히 꽃의 리듬이 있고, 비의 리듬이 있다. 시인은 저마다의 사물들이 내보이는 이러한 리듬을 시 언어로 구현한다. 지은이가 “리듬에 따르는 작시와 아날로지적 사유는 동전의 양면이다.”라고 주장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사물의 리듬을 시인은 아날로지(analogy)로 표현한다. 이육사의 「광야」에는 “가난한 노래의 씨”라는 시구가 나온다. 시인은 식민지 시대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가난한 노래의 씨를 내놓는다. 가난한 노래의 씨는 스스로를 희생하는 ‘씨’의 리듬과 이어져 있다. 땅속에 심은 씨는 자신을 죽임으로써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난다. 이육사는 자신을 희생하는 마음을 ‘씨’라는 사물에 실어(아날로지) 새로운 삶의 리듬을 생성하고 있는 셈이다.
개념으로는 미처 표현할 수 없는 의미를 시인은 이미지로 표현한다. 이미지는 사물을 그대로 묘사하는 게 아니다. 아날로지에 근거한 이미지는 사물과 사물의 유사성에 주목한다. “시는 ‘~이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될 수 있다’를 말한다. 시의 왕국은 존재의 왕국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불가능한 그럴듯함”의 왕국이다.”(131쪽)라는 지은이의 주장은 정확히 이 지점에 걸려 있다. ‘불가능한 그럴듯함’은 시에 나오는 아날로지를 제대로 설명한다. 언어로 언어를 넘어서는 비결은 무엇보다 불가능한 것을 그럴 듯하게 표현하는 시인의 능력에 있다. 시인은 사물을 단정하지 않는다. 사물은 다양한 길로 뻗어나갈 개연성을 그 속에 함유하고 있다. 하나에만 집중하면 수없이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된다. 시인은 안에서도 사물을 보고, 밖에서도 사물을 본다. 위에서도 사물을 보고, 밑에서도 사물을 보며, 옆에서도 사물을 본다. 사방팔방에서 보는 사물들은 사방팔방에서 보는 것만큼이나 다양한 의미들을 내보인다.
시는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 언어이다. 즉, 존재의 극단에 있는 언어이며 극단까지 존재하는 언어이다. 스스로의 내면으로 복귀하여 일상어의 이면을 보여주는 언어의 극단이며 극단적인 언어이다. 시는 침묵이며 의미하지 않음이다. (146쪽)
‘차안此岸의 세계’는 상대적인 대립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설명과 까닭과 이유의 왕국이다. 큰 바람이 일어나 인과因果의 사슬을 끊어버린다. 이 천재지변의 첫 번째 결과로 자연적, 도덕적 중력의 법칙이 폐기된다. 인간은 무게를 잃고 하나의 깃털이 된다. 티르소와 미라 데 메스쿠아의 주인공들은 어떤 저항에도 부딪히지 않는다. 아무도 그들을 붙잡을 수 없게, 수직으로 솟거나 혹은 가라앉는다. 동시에 세계의 모습도 변한다.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된다. 도약은, 텅 빔이나 충만한 존재로 향한다. 우리가 성역에 접어들자마자, 선과 악은 다른 의미로 바뀌어버린다. 악한이 구원받고, 의인은 몰락한다. 인간 행위의 결과는 이중적이다. 우리가 올바르게 행동했다고 믿을 때, 악마의 소리를 듣고 악을 저지른다. 혹은 그 반대가 일어난다. 도덕은 ‘신성한 것’과는 다르다. 신성과 마주치면, 우리는 진정으로 다른 세계에 있게 된다. (164쪽)
긴장을 하지 않는 시인은 사물이 순간에 내보이는 본질과 맞닥뜨릴 수 없다. 사물이 언제나 제 본질을 내보이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순간이다. 직관이 뛰어난 시인만이 이 순간을 포착할 수 있다. 직관은 순간을 직접 보는 것이다. 순간은 찰나이다. 본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니고, 듣는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직관은 이성 너머에 있다. 지은이는 “시는 침묵이며 의미하지 않음이다.”라고 주장한다. 사물을 직관하는 시인은 침묵 속에서 소리를 듣고, 의미하지 않음에서 의미를 본다. 언어를 들고 벼랑 끝에 선 시인을 상상해 보라. 한 발이라도 내디디면 시인은 벼랑 아래로 떨어진다. 벼랑 아래는 말 그대로 저승이다. 극도로 긴장된 이 순간에 시인은 눈을 감고 침묵하면서 벼랑에서 한 발을 더 뗀다. 앞서 말한 ‘치명적 도약’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이육사가 말한 “가난한 노래의 씨”가 이 세상에 새 생명을 퍼뜨리는 순간이라고 말해도 좋다.
지은이는 이러한 세계를 인과의 사슬이 끊어진 장소로 표현한다. 인과의 사슬이 끊어진 곳에서는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다. 중력은 존재들을 얽매는 힘이 아닌가. 중력을 잃는 존재는 무게를 잃고 하나의 깃털이 된다. 깃털은 바람을 따른다. 바람이 이리 불면 이리로 가고, 저리 불면 저리로 간다. 비어 있는 듯 꽉 차 있고, 꽉 차 있는 듯 비어 있는 존재가 깃털이 된 시인이다. “우리가 성역에 접어들자마자, 선과 악은 다른 의미로 바뀌어버린다.”라고 지은이는 쓰고 있다. 중력이 사라진 세계에 선과 악이 있을 리 없다. 중력에 얽매인 세계는 중심과 주변을 구분하지만, 중력으로부터 벗어난 깃털은 중심도 주변도 없는 세계를 한없이 날아다닌다. 지은이는 중력이 사라진 이 세상에서 인간은 비로소 신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신성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이다. 치명적 도약을 이룬 시인은 언어 너머를 보는 언어를 들고 이러한 세계와 마주한다. 인간이면서 신인 존재, 둘이면서 하나인 시인의 모습은 이렇게 탄생하는 것이다.
종교 경험처럼 시 경험도 ‘치명적 도약’이다. 그것은 본성을 바꾸는 것인데, 본성을 바꾼다는 것은 근원적인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세속적이고 진부한 삶으로 덮여 있는 우리의 존재는 갑자기 자신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기억해낸다. (181쪽)
종교적 순간과 사랑의 순간뿐 아니라 시적 순간에도 현존과 부재, 침묵과 말, 빔과 충만이 함께 뒤섞인다. 그러한 모든 순간에는 이성적인 요소와 비이성적인 요소는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 … 시 역시 놀라움에서 싹트고, 시인은 신비주의자처럼 신성화하고, 누구에게 반한 사람처럼 사랑한다. (187쪽)
치명적 도약은 존재의 본성을 바꾼다.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길을 거쳐 죽음에서 삶으로 다시 돌아오는 이 존재는 지은이의 주장처럼 “근원적인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근원적인 본성으로 돌아간 사람은 문명으로 해서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된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자연 사물과 소통하는 방법을 잃었다. 풍요로운 문명을 만끽한 결과 사물과 하나가 되는 신성을 상실한 것이다. 치명적 도약을 통해 신성을 획득한 시인은 이리 보면 두 세계에 발을 디딘 경계 속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시인은 현존과 부재, 침묵과 말, 빔과 충만 사이를 자유로이 거닌다. 이성으로 비이성을 재단하지 않는다. 지은이는 이 상황을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시는 가능성을 연다. 그 가능성은 종교가 말하는 영원한 삶이나 철학이 말하는 영원한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껴안고 포함하는 삶이고 이것이면서 동시에 저것인 존재이다. 시적 이율배반은 우리의 근원적 조건을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며 충만하게 실현시키도록 하는 것이다.”(204쪽)라는 말로 표현한다.
시인은 하나의 목소리로 사물을 재단하지 않는다. 시인은 온갖 사물들이 내보이는 소리들을 온몸으로 받아 그 이미지들을 여러 목소리로 내보낸다. 하나의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와 이어지고, 그 이미지는 다시 또 다른 이미지와 이어진다. 말이 말을 낳는 세상에서 시인은 풍부한 이미지로 그 말들을 꾸민다. 일상 언어를 넘어서는 시 언어는 이렇게 일상 언어보다 더욱 풍부한 언어로 거듭난다. 지은이는 “말이란, 인간이 타자가 되기 위해 가지는 수단 중의 하나이다. 이 시적 가능성은 단지 우리가 치명적 도약을 할 때만, 즉 우리가 실제로 자신에게서 나와 ‘타자’에게 자신을 양도하고 사라질 때만 이루어진다.”(236쪽)고 분명히 밝힌다. 시적 가능성은 치명적 도약을 통해서만 펼쳐질 수 있다. 치명적 도약은 ‘나’로부터 벗어나 타자로 가는 길을 연다. 타자에게 자신을 양도하는 시학은 무엇보다 ‘나’라는 중심성을 내려놓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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