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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강 오이디푸스와 성적 주체의 탄생
2019년 03월 18일 14시 28분  조회:969  추천:0  작성자: 강려
◆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ㅡ각각의 화투에는 고유한 규칙이 있다. 그것이 이른바 언어에서의 코드와 같은 것인데 화투를 한 장씩 늘어놓았을 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지만 그것들이 게임의 규칙에 맞게 조합을 이루어나갈 때는 서로 간의 관계에 의해서 그 게임의 규칙에 맞게 가치가 정해진다. 기호의 체계들도 이와 비슷하다. 개별적인 기호들 자체는 의미가 없지만 기호들이 관계를 맺어 나갈 때 상호규정성에 의해서 가치가 결정이 된다. 
ㅡ프로이트는 자기 자신의 경험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발견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그 이전까지 히스테리에 주어졌던 설명, 즉 유혹설(아이가 어른의 성적 유혹에 의해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겪게 되면서 히스테리 환자가 된다는 설)을 폐기하고 유아 자체가 이미 성적인 것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관계 속에서 표현된다고 주장한다. 
→ 그래서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신화가 아니라 성적 주체를 구성하는 핵심적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이후에는 주체의 발생과정 뿐만 아니라 모든 문명과 도덕, 종교의 기원 등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연관을 시킨다. 
→ 라캉에게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중요한 핵심범주로 이해되지만 라캉은 그것을 자기 식으로 수정을 한다. 라캉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시니피앙에 의해서 주체가 탄생해 나가는 과정, 주체가 상징계로 진입을 해서 자신의 위치를 부여받게 되는 것으로 정의를 한다. 
ㅡ잡다한 기억과 표상들의 집합이 콤플렉스이다. 정동적 성격을 갖는 것, 자기 스스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감정적으로 충격을 줄 수 있는 집합들이 콤플렉스이다. 보통 유아기의 인간관계로부터 시작이 된다. 하지만 콤플렉스는 과거 차원의 것만은 아니고 현재의 감정이나 태도, 모든 관계들에 영향을 미친다. 
ㅡ왜 노이로제가 발생하는가, 왜 히스테리가 발생하는가 하는 원인의 중심에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자리 잡고 있다. 보통 4~6세 아동이 겪게 되는 과정인데, 물론 경험적 과정은 아니다. 신화적인 과정은 아빠, 엄마, 아이의 삼각관계에서 경험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실질적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아빠와 엄마와의 상호 관계를 통해서 자기의 성적인 정체성과 대상관계들이 형성되어 나가는 원형적 과정이다. 
→ 그래서 오이디푸스 자체를 실증적 과정으로 이해하면 정신분석에 대해 잘못 이해할 수 있다. 
예) 홀아버지가 키우는 아이는 오이디푸스를 겪지 않는 것인가→ 
→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실제의 아버지, 어머니, 아이의 경험적 관계가 아니라 하나의 원형적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ㅡ오이디푸스의 전형적인 예는 남아의 성적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프로이트에게는 리비도는 단 하나만 인정된다. 즉 여성적 리비도, 남성적 리비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남성적 리비도만 인정이 되기 때문에 가장 전형적 형태가 남아에게서 나타나게 된다. → 여기에서 여자아이의 성적 정체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중요한 문제가 나오게 된다. 
(1)아이는 최초에 엄마와의 관계에서 애착을 갖게 된다. 이것은 여자 아이나 남자 아이나 마찬가지이다. 최초에 아이는 하나의 덩어리로 태어난다. 지각도 발달되어 있지 않고 외부라는 개념도 없고 오로지 감각의 덩어리로 자신을 느끼게 될 것이다. 또한 어머니 뱃속에서 탯줄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던 세계와의 단절을 경험하게 된다. 
(2)그 이후에 아이는 외부 세계와의 관계들을 배워나가게 되는데 이 과정에 개입하는 것이 어머니다. 어머니는 최초로 아이에게 타자적인 차원을 보여주고 가르쳐주면서 아이를 돌보는 존재로 등장을 한다. 여기서 아이의 상태와 어머니의 상태는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는 엄마가 자신의 세계가 되고 자신의 육체와 생리적인 모든 욕구들을 해결해줄 수 있는 존재가 된다. 
(3)이러한 아이-어머니의 이자적인 관계에 제3자로서 아버지가 개입하게 된다. 아버지는 아이와 어머니의 융화된 상태(물론 여기서 대상관계의 초보적인 형태들이 형성되긴 하지만 완전한 의미에서 대상과 주체와의 관계가 형성된 건 아니다)를 분리시키는 사람으로 등장을 하게 된다. 
→ 여기서 아버지를 금지와 법의 차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문화적으로 해석하는 시각에서는 아이와 엄마의 최초의 관계 자체를 깨뜨려주는 금지의 심급으로서 아버지의 역할을 설명한다. 
→ 주체로서 자기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대상에 종속되어 있는 관계가 아니라 대상 자체를 마주하고 관계를 맺을 때 가능해지는데 한 덩어리(엄마-아이)로 모아져 있는 카오스의 상태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러한 융합 상태를 깨뜨리기 위해 아버지가 등장한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엄마에게 집착하게 되고 이것을 깨뜨리는 아버지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지게 된다. 
▲ 구순기/항문기/남근기/성기기
ㅡ정신분석이론에 따르면 4세가 될 때 인격과 성적인 정체성이 단계를 거쳐서 발전하게 된다. 물론 이 단계는 순차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퇴행을 하기도 하고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1) 구순기(口脣期, oral phase)
ㅡ최초의 단계인 구순기의 단계는 외부 대상을 입을 통해 받아들이고 외부 대상을 먹거나 뱉어내거나 배척하는 대상관계가 입을 통해 형성된다. 대상을 소유하려는 마음의 원형들을 구순기가 마련해준다. 
예) 받아들이는 입의 역할을 강조하는 경우는 ‘지식에 굶주렸다/권력에 굶주렸다/사랑에 굶주렸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관계로서 입의 원형이 작용하는 것이다. 
2) 항문기[肛門期, anal phase] 
ㅡ다음 단계는 항문기인데 여기서는 규칙을 배우게 된다. 항문기는 외부를 통해 긴장을 표출하면서 해소하는 방법의 원형을 이루는 시기이다. 구순기/항문기는 성인이 되면 원형적인 형태로 심리에서 작용을 한다. 
ㅡ항문기는 밖으로 내보내고 표출하는 것인데 분노를 터뜨린다든지 화를 냄으로써 긴장을 해소하는 것이다. 
3) 남근기[男根期, Phallic Phase] 
ㅡ다음 단계가 남근기이다. 여기서는 페니스와 남근phallus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한데 남근은 실제 남자가 가지고 있는 성기가 아니다. 아이의 성적인 충동들을 상징하면서 그것을 성적 정체성으로 묶어줄 수 있는 상징적인 기표가 남근이다. 남자 아이는 자기의 성기를 남근과 동일시하고 여자 아이는 자신이 거세되어 있다고 느낀다. 
ㅡ오이디푸스의 과정에서는 아이에게는 남근이라는 단 하나의 성기만이 존재한다는 것이 성적 정체성에 있어서 중요하게 부각된다. 여기서 실제 해부학은 중요한 게 아니다. 여자 아이는 자신의 신체적 차이를 남자 아이와 대등한 관계에서 느끼지 못한다. 남자 아이나 여자 아이나 단 하나만의 남근을 아는 시기이고 이 시기 동안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과정이 일어난다. 
4) 성기기
ㅡ이것이 사춘기까지 잠복(잠재기)해 있다가 사춘기에 성기기로 완성이 된다. 성기기에 와서야 남자 여자의 신체적 차이는 성적 정체성과 일치된다. 일치된다는 것은 성적인 관계가 이성을 향한 대상적 관계에서 표현이 된다는 의미이다. 
▲ 꼬마 한스의 사례
ㅡ남자 아이는 구순기, 항문기를 거치며 몸 자체가 여러 가지 충동의 만족을 주게 된다는 것을 경험한다. 그리고 각각의 신체 부위를 따라서 성감대가 형성이 되는데 여기서 자기 성기에 대한 발견도 이루어진다. 또한 남자는 여자 아이가 성기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워하게 된다. 
ㅡ한스는 동물이나 인간 같은 ‘유기체’와 ‘비유기체’로 세계를 구별한다. 한스는, 유기체는 모두 성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건물이나 돌 같은 것들에는 성기가 없다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한스는 자기 여동생이 태어났을 때 엄마에게 자기 여동생은 왜 꼬추가 없냐고 물으며 나중에 자라날 것이라고 말한다. 한스에게는 엄마, 아빠도 성기가 있고 자기도 성기가 있고 어른이 되면 이것이 커진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한스는 단 하나의 성기 (페니스)만을 알기 때문에 여자 아이는 성기가 없는 존재로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여자 아이도 남자 아이를 보면서 자신은 남근이 없는 존재, 즉 거세된 존재처럼 생각하게 된다. 
→ 여기서 남근을 가지느냐, 가지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 성적 정체성의 형성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남자 아이는 자기도 성기가 없는 여자 아이처럼 될 수 있다는 거세 공포를 갖게 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거세 콤플렉스와 짝을 이루어 발달하게 된다.
▲ 거세 콤플렉스 
ㅡ남자 아이는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을 거세 콤플렉스(castration complex 佛 complexe de castration)로 느끼기 시작한다. 이것을 성기가 실제로 잘린다는 의미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자기가 갖는 불안감이 상징적인 기표인 남근으로 집약되고 그것을 여자 아이와의 차이 속에서 충격적으로 느끼게 되면서 거세 콤플렉스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래서 여자 아이를 보면서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된다. 아버지는 자신의 방해자고 명백하게 자기를 분리시키는 자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주는 사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ㅡ여기서 남자 아이의 태도는 두 가지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갖는 적극적 측면과 소극적 측면이다. 
(1)적극적 측면에서 아이는 자신을 남자(아버지)와 동일시하게 된다. 그래서 어머니를 욕망하고 아버지와 경쟁을 해보려고 하는 상태가 된다. 
(2)소극적 측면에서는 아버지의 권위에 대해서 무서워하면서 자기를 여성적인 위치에 놓게 되면서 어머니처럼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으려고 한다. 
→ 이렇게 양가적인 차원이 동시에 나타나게 된다. 
→ 실제로 하나의 남성 리비도만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성적인 리비도가 양가성으로 작용을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완전히 100% 남성적인 것은 있을 수 없고 100% 여성적인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ㅡ거세콤플렉스를 느끼면서 아이는 아버지에게 저항하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남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아버지에 대한 동일시로서 극복하게 된다. 아버지와의 가망 없는 싸움을 하기보다는 아버지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자기도 언젠가는 아버지처럼 여자를 소유할 수 있다, 나의 남근을 가질 수가 있다는 식으로 자기 동일시를 하면서 남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나간다. 
▲ 여자 아이의 정체성 형성
ㅡ여자 아이는 최초에 어머니를 사랑한다. 그런데 아버지라는 존재가 들어올 때 어떻게 해서 여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갖게 되는지가 문제가 된다. 남자 아이의 경우엔 거세콤플렉스 때문에 오이디푸스적인 경쟁 관계를 종식시키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면 여자 아이는 반대로 남근 선망적인 것에 의해서 오이디푸스에 들어가게 된다. 
ㅡ남자는 자기에게 있는 것을 뺏기지 않으려고 하는, 거세당할지도 모른다는 지키는 입장이다. 여자 아이는 자기는 없으니까 가져야 되겠다는 입장이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여자 아이는 아버지를 욕망하게 되면서 자기처럼 거세된 동일한 존재인 어머니를 원망하게 된다. → 결국 아버지에 대한 욕망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여아는 남근을 아버지, 즉 남자를 통해서 받아들이며 자기를 여성적인 입장으로 만들어간다. 
ㅡ오이디푸스기를 겪으면서 아이는 엄마와의 의존적인 관계, 정서적으로만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하나처럼 되어있는 관계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아버지는 아이를 어머니에게서 분리시키면서 원초적인 좌절을 안겨주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분리를 통해서 아이를 주체로 만들어주는 구원자의 역할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분석은 아버지와 그리고 그로부터 변이처럼 나타나는 여성성에 대해서 질문하게 된다. 
→ 오이디푸스기를 통과하면서 대상을 선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주체가 자기 자신으로 서게 되면 그 이전에 투영되었던 리비도의 자기성애적인 측면을 원초적 차원에서 대상관계로 전환시키는 것이 가능해진다. 
▲ 자기성애
ㅡ자기성애narcissism는 1차적 나르시시즘 2차적 나르시시즘으로 나뉘며 중요하게 부각이 된다.
(1)1차적 나르시시즘
→ 처음에는 원초적 상태에서 엄마와 분리되면서 아버지를 통해서 매개되는 대상적 관계를 나르시시즘의 전형으로 보았다. 그것이 1차적 나르시시즘이라고 프로이트는 보았다. 
(2)2차적 나르시시즘
→ 2차적 나르시시즘은 어떤 사건을 거치면서 변이를 통해 대상관계에서 다시 퇴행하여 자기 자신에게 리비도가 집중되는 퇴행적 현상으로 보았다. 
→ 그래서 나르시시즘 자체에 대한 검토가 초기에는 정신병이나 동성애를 해명하면서 설명이 되었는데 나중에 프로이트의 2차 모델이 나오면서 바뀌게 된다. 즉 1차 나르시시즘과 자기성애의 구분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 여기서 자기성애란 충동이 아직 대상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자기의 몸에 부분적으로 집중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아직 완전한 대상관계가 아니다. 그러다가 분리를 경험하게 되면서 자기의 몸 자체를 원초적 차원이 아니라 하나의 신체적 자아, 즉 이상적 자아ideal ego라는 형태로 투영을 하면서 거기에 대상들을 설정하게 된다. 
→ 이렇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오이디푸스의 극복과정이기도 하다. 자아성애적인 원초적 차원에서 대상관계로 바뀌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ㅡ자기성애의 상태는 어머니의 몸과 아이의 몸이 아직 구별되지 않는 하나의 덩어리처럼 묶여 있는 원초적 상태인데 이것을 아버지가 깨뜨려줌으로써 그 상태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상적 자아(아버지)를 모델로 해서 외부 대상으로 관계를 설정하게 된다. 
ㅡ성적 정체성은 동일시를 모델로 형성된다. 여자 아이는 어머니를 모델로 삼으면서 여성으로서 남자 아이는 아버지를 모델로 삼아서 남성으로서 성적 정체성을 형성한다. 
ㅡ원초적 욕망은 아직 욕망이 될 수 없다. 이것은 부분충동들의 발산일 뿐이지 자기의 몸에 대한 자기성애에 기반을 두고 있는 원초적 충동은 아직 주체의 욕망 차원으로 승화되지는 못한 단계이다. 여기서 대상관계로 넘어갈 때 비로소 욕망이 성립하게 되는데 그것은 금지를 받아들임으로 가능해지는 것이다. 
→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모든 신경증의 핵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금지를 원천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이후에 자기를 결여된 주체로 설정하는 최초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라캉 역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중요한 개념으로 받아들이는데 부모와의 양가적인 관계가 아니라 이것을 철저히 상징계의 개념으로 재해석한다.
 
◆ 오이디푸스 과정, 은유와 환유
오이디푸스 과정에 대한 라캉의 설명
1) 상상적 삼각관계(아이-남근-어머니)
ㅡ아이와 엄마를 매개해주는 것은 남근인데 이것은 상상적 남근으로 작용한다. 이 관계는 아이와 엄마의 이자관계가 아니라 상상적 남근이 작용하는 삼각관계이고 아이는 엄마에게 있어 자신이 남근이라고 생각한다. 
ㅡ이 시기에는 아직 욕망의 차원이 들어올 수 없다. 아이는 남근이 아닌데 아이는 스스로를 남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 상징적 거세 
ㅡ거세는 상상적 남근에 가해진다. 아이와 엄마의 상상적 남근을 매개로 한 관계를 아버지가 깨뜨리는 자로 들어오기 때문에 상징적 의미의 거세가 된다. 아이는 상상적인 남근이 될 수 없고 그 위치조차 갖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엄마의 욕망은 아이가 아닌 아버지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으로 아버지가 들어오기 때문에 상징적 거세 차원에서 상상적 남근이 제거되는 식으로 두 번째 단계가 설정이 된다. 
3)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극복 
ㅡ라캉은 주체의 형성에 있어 동일시를 강조하는데 프로이트는 이상적 자아라는 것을 아버지가 아이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이마고imago의 차원에서 설명을 했다. 아이가 가지고 있는 아버지의 원형적 이미지들, 어머니의 이미지들 같은 것이 이마고의 차원인데 프로이트에게는 정교하게 이상적 자아가 개념화되어 있지는 않다. 
ㅡ라캉의 경우는 주체가 대상에 대해서 동일시하는 것들을 상상적 방식과 상징적 방식으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 아버지의 법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오이디푸스 과정이 끝난다. 아버지가 명한 법, 상징적 거세를 아이가 수용하면서 남근을 상징계에서 찾게 된다. 
→ 남근이 되고자 하는 차원에서 남근을 가지려는 차원으로 바뀌게 된다. 
ㅡ‘to be or not to be’ → 내가 엄마의 남근이냐 아니냐가 1차시기의 관심이라면 이것은 욕망의 성격을 완전하게 규정해줄 수는 없다. 대신에 ‘to have’, 즉 가져야 하는 차원으로 발전할 때, 다시 말해 남근 자체를 상징계에서 찾으면서 가지려고 할 때 주체가 형성이 된다. 
ㅡ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압축과 전치를 핵심적 메카니즘으로 설명을 하면서 그것이 무의식 과정의 가장 중요한 양상들이라고 설명한다. 라캉도 마찬가지이다. 은유와 환유가 가장 중요한 시니피앙의 작동 논리이고 그것을 통해 주체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압축과 전치는 이드적인 것들이 자기의 숨겨진 욕망들을 만족시켜 나가는 방식과 관계가 된다. 
<압축>
ㅡ꿈은 대체로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들이 많이 있고 굉장히 짧다. 의식차원에서 보면 꿈이라는 것은 간단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뒤집어보면 복합되어 있는 여러 가지 이미지들이 우연처럼 보이는 표상들 속에 달라붙어 있고 그것을 통해서 숨겨진 이야기들을 전후좌우로 엮어서 보여준다. 간단해 보이는 이미지 속에 숨겨진 여러 가지 무의식적 사유의 이미지들이 중복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의 표상들이 그 속에 여러 가지 것들을 중층적으로 겹쳐서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꿈은 굉장히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이미지들이 겹쳐져 있는 것이다. 
<이드의 본성>
ㅡ이드는 원초적으로 대상들을 아무렇게나 설정해가면서 자기의 에너지를 투여하는 본성이 있다. 여기서는 대상간의 구별이 사라진다. 우리가 의식적 사고로 꿈을 해석하니까 꿈의 내용들이 상징들 간의 관계로 이해가 되지만 사실은 이드가 그것을 뚫고 대상들을 설정해 나가는 것이다. 
ㅡ이드는 속성적 사고를 특징으로 한다. 이드에겐 대상 자체는 의미가 없다. 평소 내가 아는 대상들이 아니라 우연적인 대상들에 자기 에너지를 투여하는 것이 이드의 본성이다. 
<전치>
ㅡ전치는 특히 검열과 관계된다. 무의식은 검열을 피해가면서 스스로를 표현하고자 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평소에 하찮게 보이는 이미지들에 대상적 에너지, 리비도가 가서 붙는다. 
→ 꿈에서는 사소하게 보이는 것들, 엉뚱하게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연관관계 속에서 나의 숨겨져 있는 무의식적 표상들을 보여줄 수도 있다. 
▲ 은유와 환유
→ 라캉은 압축과 전치를 은유와 환유의 공식으로 설명한다. 세미나3권에서 ‘슈레버(Schreber)’의 사례를 언급하면서 은유와 환유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
ㅡ은유는 하나의 대체이다. 
예) 영화 제목인‘왕의 남자’도 하나의 은유가 될 수 있다. ‘왕의 남자’는 어떠어떠한 사람이라고 설명하지 않고 ‘왕의 남자’라는 하나의 말을 통해서 권력 관계에 놓여 있는 사람들의 관계를 표현할 수도 있고 왕이 가지고 있는 동성애적인 탐닉과 변태적인 성향들을 표현할 수도 있다. 
예) ‘그는 사자이다’라고 이야기했을 때 그것은 그가 용감하다는 뜻이 될 수도 있고 사자처럼 저돌적이라는 말이 될 수도 있고 사자처럼 지배자가 되려고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할 수도 있다. 
ㅡ라캉은 ‘사랑은 햇빛 아래 웃는 조약돌’이라는 예를 든다. 여기에서도 사랑에 대해 직접적인 설명을 하지 않고 ‘사랑은 조약돌’이라는 식으로 사랑의 이미지를 조약돌의 이미지로 바꿔치기함으로 해서 그 속에서 자유롭게 일어날 수 있는 창조적인 여백들을 주게 된다. 
ㅡ은유는 본래 의미와 의미의 유사성, 연관 관계 안에서의 대체를 통해서 표현들을 풍부하게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라캉은 하나의 시니피앙이 또 다른 시니피앙으로 치환되는 것이 은유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ㅡ프로이트가 융과 함께 미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이 사람들은 우리가 페스트를 가져온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여기서 페스트는 정신분석을 지칭한다. 이것은 미국 사람들은 정신분석에 페스트적인 성격이 있다는 것을 아직 모른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정신분석/상담,치료,전복          
 
페스트/병,죽음,전복                페스트 S2/정신분석(S1/s1)
→ 라캉이 은유를 중요시하는 이유는 의미들의 생산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의미화는 은유적인 것을 통해서만 나타나게 된다. 은유는 하나의 시니피앙이 또 다른 시니피앙을 바꿔치기하는 것이라고 라캉은 말한다. 
<은유의 공식>
 
ㅡ환유는 제유법의 일종이기도 한데 부분으로 전체를 지칭하거나 원인을 가지고 결과를 지칭하거나 하는 것이다. 환유는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쓴다. 
예) ‘한 잔 먹다.’→ 사실은 한 ‘잔’을 먹는 게 아니라 한 잔에 담긴 술이나 음료를 마시는 것을 한 잔을 마신다고 표현하는 경우인데 이것은 용기를 가지고 그 내용물을 대체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예) ‘저기 푸른 모자가 걸어간다.’→ 푸른 모자(일부)를 가지고 군인(전체)을 지칭하는 것
ㅡ은유가 일종의 바꿔치기라면 환유는 인접성에 의해서 부분으로 전체를, 원인으로 결과를 지칭한다. 라캉은 하나의 단어가 또 다른 단어와 연관되는 측면에서 환유를 정의한다. 대체성은 연관성이 없을 수도 있으나 인접성은 같은 문맥이나 차원을 전제로 하는 경우에만 성립한다. 
ㅡ환유에서는 지시적인 관계의 연결만 있고 의미의 재생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환유의 공식>
 
은유→ 하나의 단어를 다른 단어로 (un mot pour un autre mot) : 동일화의 메카니즘 (보아스와 볏단). 
환유→  하나의 단어가 또 다른 단어에 연결되는 것
 
◆ 부성은유
ㅡ라캉은 부성은유paternal metaphor로 오이디푸스 과정을 설명한다.
<라캉 세미나 5, 무의식의 형성물>
“아버지라는 것은 현실의 대상이 아니다‥‥ 아버지는 하나의 은유이다. 은유란 무엇인가→ ‥‥은유란 하나의 시니피앙이 또 다른 시니피앙의 자리에 오는 것이다. ‥‥아버지란 이 다른 시니피앙을 대체하는 하나의 시니피앙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개입하는 아버지의 본질적이고 유일한 힘이 여기에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속에서 아버지의 기능은 상징화 과정에서 도입된 최초의 시니피앙, 즉 어머니의 시니피앙을 대체하는 시니피앙이다.”
ㅡ라캉에게 있어 아버지는 시니피앙의 기능으로 이해된다. 
ㅡ최초에 아이에겐 아이의 욕망이 있다. 그렇지만 아이의 욕망은 아직 의미가 없다(x). 원초적 상태에서 어머니에게 매달려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아이의 욕망은 어머니의 욕망을 향해 있다. 아이의 욕망이 어머니 자체가 아니라 어머니의 욕망을 향하는 이유는 아이에겐 아직 대상관계 (어머니가 하나의 대상으로 이해되는)가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ㅡ아이는 상상적 남근을 매개로 한 이자관계에 몰입해 있는 상태에 놓여 있다. 여기서는 대상의 구별도 없으며 나와 너의 구별도 없고 오로지 어머니의 욕망에 의해서 모든 게 규정되고 아이는 그로부터 만족을 찾아나가는 단계이다. 그런데 나중에 여기에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것이 개입하게 된다. 즉 어머니의 욕망 대신 아버지의 시니피앙이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ㅡ아버지의 이름은 아이에겐 아직 낯선 존재이다. 그런데 그것은 어머니의 욕망이 향하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욕망은 실제로 아버지의 이름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가족 관계에선 아이가 어머니와의 원초적인 이자관계에 있다가 그것을 깨뜨리는 사람이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이는 엄마와 자기가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ㅡ아이의 욕망(x)은 어머니의 욕망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 어머니의 욕망은 아버지를 향하고 있다. 결국 오이디푸스 과정을 거치면서 아이는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이 되길 그친다. 대신 아버지의 이름을 받아들이게 된다. 여기서 아버지의 이름은 어머니의 욕망을 대체하는 새로운 이름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래서 아버지의 욕망은 아이에게 있어 원초적인 욕망의 빈 자리를 상징하는 식으로 남게 된다. 아버지는 남근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아이는 아버지의 이름을 받아들이게 된다. 바꿔 말하면 힘을 가진 자, 어머니를 소유하고 있는 자, 어머니를 자신과 분리시킬 수 있는 자로 아버지가 들어오기 때문에 의미들은 남근으로 각인이 된다.
ㅡ남근은 결여를 상징한다. 어머니의 욕망과 하나였던 것을 버려야하기 때문이다. 원초적 상태를 버리고 아버지의 이름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결여의 자리인데 그 자리는 아버지의 남근으로 지시가 된다. 아버지가 아버지일 수 있는 이유는 남근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ㅡ엄마와의 관계는 상상적인 것을 매개로 한 관계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금지의 심급이다. 
→ 아버지는 여기서 타자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 상징계의 질서를 명하는 추상화된 심급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대타자가 된다. 
(1)최초의 결여→ 최초의 어머니의 욕망,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면서 아버지의 이름을 받아들이는 것
(2)아버지→ 실제 아버지가 아니라 단지 아버지적인 기표, 추상화된 기호이지만 남근을 대신하는 기표를 아이가 수용하면서 어머니와의 원초적인 합일을 버리는 것
→ 결국 라캉은 오이디푸스 과정을 부성은유로 다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욕망(S1)은 자신의 욕망이기도 한데 이것은 영원히 남아 있는 무의식적인 원형을 이룬다. 그래서 무의식은 처음부터 언어적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다. 아버지가 들어온다는 것은 타자로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제3자로서 들어온다는 의미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빈 공간을 대체할 뿐이다. 어머니의 욕망(S1)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대체되었을 뿐이지 완전히 주체에게서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ㅡ주체의 탄생은 욕망의 탄생과 맥을 같이한다. 라캉은 ‘말하는 주체’를 강조하는데 말이 없이는 주체도 없는 것이다. 말은 아버지의 이름이 어머니의 이름을 밀어내면서(억압하면서) 자기에게로 대신 들어오는 것이다. 이것이 아이에게는 이름을 부여받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즉 아이는 더 이상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아들이며 셋째이고 장남이고 오빠이기도 하나는 식으로 상징계에서 자신의 위치가 규정이 된다. 
→ 라캉이 오이디푸스 과정을 부성은유와 거의 동일화시켜 이야기하는 이유는 하나의 시니피앙이 또 다른 시니피앙을 바꿔치기 하는 것과의 유사함 때문이다. 그러면서 주체를 그 효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니피앙의 역할이다. 
<포르트-다 놀이>
ㅡ라캉은 주체의 구성을 프로이트가 이야기했던 ‘포르트다(fort-da) ’ 놀이로 설명을 한다. 
ㅡ프로이트는 1살 손자가 포르트-다(fort-da) 놀이를 하는 것을 본다. 아이는 ‘포!’라고 하면서 실패를 멀리 던지고 다시 끌어당기면서 ‘다!(여기 있다는 뜻)’라고 외친다. 프로이트는 왜 아이가 이 놀이를 하는가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아이는 엄마와의 결별이라는 고통스런 체험을 이 놀이를 통해 상징적으로 극복한다고 말한다. 
ㅡ실패를 던진다는 것은 내가 엄마를 보내는 것이고 실패를 당기는 것은 엄마를 다시 데려오는 것을 상징한다. 아이는 상황에 수동적으로 의존하는 존재가 아니라 상황을 상징화시키면서 받아들일 줄 아는 아이가 되는 것이다. 아이는 이 놀이를 통해 부재와 현존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ㅡ실패는 어머니를 상징한다. 어머니의 부재라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실패라는 매개를 통해 상징화하면서 아이는 부재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현존은 아이가 끌어당길 때 아이 앞에 오는 실패이다. 이 부재와 현존의 반복되는 놀이를 통해 주체는 상황들 자체의 주인이 된다. 
ㅡ최초의 원초적인 상태를 분리하는 경험, 부성은유의 경험들은 아이가 그 상황에 대해서 상징적 방식을 통해 능동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하다. 주체가 상징계에 진입을 한다는 것은 반드시 상징계에 의해 호명을 당한다는 의미는 아니라 주체가 상징적 방식으로 체화하는 것을 통해 가능해진다. 그래서 아버지의 이름이 아이에게 잘못 받아들여지면 정신병의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ㅡ정신병의 특성 중 하나가 퇴행regression인데 퇴행은 유아기적인 원초적 상태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현실과 환상의 구분이 없어지면 정신병의 단계로 들어간다. 마찬가지로 원초적 상태는 우리에게 실제로는 없는 것인데 이것을 가능한 것으로 믿기 시작하면 정신병의 단계로 들어가게 된다. 분리를 수행하는 아버지의 이름이 주체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ㅡ주체가 갖는 원초적 상태의 욕망은 상징계와 연관될 때 그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원초적 상태는 아이와 엄마가 합일되어 있는 상태인데 이것은 나의 묙망이 아니라 어머니의 욕망이다. 이 상태에서는 주체의 욕망이 있을 수 없다. 
ㅡ부성은유는 원초적 억압을 전제로  가 자리를 잡게 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아버지의 이름’이란 라캉의 이론이기 보다는 프로이트에게서 원형이 나오는데 물론 프로이트가 아버지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ㅡ프로이트에게는 『토템과 터부』에서도 그렇고 『모세와 일신교』 『종교의 기원』 『문명사회의 불안』 등에서 아버지를 항상 죽은 아버지로 생각한다. 즉 실재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는 죽어있을 때만 이름으로서 남아 있다. 라캉이 말하는 아버지의 이름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 줄리어스 시저는 한 개인이었는데 그가 공화정의 위협이 되는 걸 느끼니까 브루투스나 여타의 사람들이 그를 죽였다. 바로 죽이는 순간 줄리어스 시저는 황제의 고유명사가 된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이다. 아버지는 죽음으로써 이름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에게는 이것이 초자와와 연결되어 설명이 되지만 라캉에게는 부성은유 자체로 이해가 된다. 
ㅡ원초적 아버지의 모델들이 프로이트에게서 이미 제시가 되었기 때문에 사실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개념은 라캉적이기도 하지만 프로이트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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